Tag: 트라우마

남자가 무서워 피해요

고등학생 때 선생님께 성추행을 당했어요. 그 이후로 그 나이대의 남성을 만나면 무서워서 피하고 배척해요. 그 분들이 아무 잘못이 없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사랑의 마음으로 감싸지 못해요. 결국, 잘못을 저에게 돌리게 돼요. 어떻게 하면 좋지요. 저도 편하게 살고 싶어요. 
 
자매님은 아무 잘못 없습니다. 자신을 탓하지 말아주세요. 선생님께 성추행을 당하신 일도, 지금 그 나이 때의 남성을 피하는 것도, 모두 자매님 잘못이 아닙니다. 
 
상처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가해자가 되시면 안됩니다. 먼저, 피해자가 되어주셔야 해요. 과거에 머물면서 고통스럽게 살라는 말이 아니에요. 다른 누군가를 탓하며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과거를 덮어두지 말고, 제대로 살펴보고 수용해달라는 부탁입니다.  
 
과거에 겪은 끔찍한 일은 가능하다면, 지금이라도 처벌해야 합니다.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사람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죄값을 치러야 합니다. 한 여자의 인생을 파괴한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됩니다. 
 
다만, 선택권은 자매님에게 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자매님이 옳습니다. 나는 그 선택을 존중합니다. 자매님이 겪은 일은 오직 자매님만이 결정할 권리가 있어요. 다른 사람은 조언만 해줄 뿐, 이래라저래라 할 권한이 없습니다.   
 
나는 상담하는 사람이니, 자매님의 상처에 집중하겠습니다. 질문하신 내용에 계속 답하겠습니다. 가해자를 처벌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면, 자매님도 처벌하지 말아주세요. 가해자는 자유롭게 풀어주고, 피해자인 자신을 결박하고 짓누르면 안됩니다. 
 
과거를 수용한다는 말은, 그때 그일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사건에 대한 기억은 시간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기억 자체를 지우려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할 거예요. 지우려할수록 고통 받습니다. 
 
기억을 바꿀 수 없다면, 기억하는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기억이 데려오는 감정에 집중해야 합니다. 기억은 혼자찾아오지 않습니다. 감정을 데리고 옵니다. 자매님의 기억은 왼편에는 공포, 오른편에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데려옵니다. 무서운 감정들의 손을 잡고 싱글벙글 자매님을 찾아옵니다. 자매님을 파괴할 수 있으니까요. 
 
기억이 데려오는 감정을 쳐다보지 마세요. 공포나 죄책감은 쳐다보지 말고, 기억을 마주보고 당당하게 말하세요. “공포나 죄책감 없이 혼자는 못오지? 혼자 오면, 너는 아무 것도 아닌 거 너도 알지? 너 혼자 와봐. 그럼, 넌 아무 것도 못할 걸.”  
 
기억이 자존심이 상해서 날뛰기 시작할 거예요. 그렇지만, 절대로 혼자 오지 않아요. 기억은 알거든요. 혼자 오면 자매님을 파괴할 수 없어요. 공포나 죄책감을 잡은 손을 놔버리면, 기억은 고개도 못들고 자매님 옆을 지나쳐 버릴 거예요. 영화 속 악당이 아니라, 지나가는 행인으로 전락해버린 거죠. 
 
설명하려니 간단하게 말했지만, 실제로는 말처럼 쉽지는 않을 거예요. 내 기억 역시 혼자 오지 않으니까요. 어찌되었건, 나는 여전히 기억이 데려오는 감정에게 말을 걸지 않아요. 기억만 쳐다보고 말합니다. “혼자 오라니까. 자존심도 없어?” 
 
비유적으로 말하다보니, 자매님의 고통스런 문제를 가볍게 말한 것처럼 보일까 걱정됩니다. 내 진심은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나는 자매님이 기억이 데려오는 감정으로 더 이상 고통받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과거는 지난 일이니까 잊고 과거에서 벗어나 남자분들을 편하게 대하라는 말은 하지 않겠어요. 다만, 소심한 부탁을 하겠습니다. 상처의 책임을 자매님에게 떠넘기면서 자책하지 말아주세요.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엄마가 전화할게

민수는 자정이 넘어 집에 들어왔다. 수능이 10개월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다. 학원에서, 독서실로 갔다가 집으로 오는 것이 하루 일정이었다. 
 
민수가 집에 도착했을 때, 집은 난장판이었다. 아빠와 엄마가 부부 싸움을 한 것이다. 민수는 깊은 한숨을 내뱉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민수는 바로 잠에 들 수가 없었다. 학원에서 내준 과제가 적지 않았다. 졸린 눈을 비벼가며, 책상 앞에 앉았다. 
 
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지만, 익숙한 소리였다. 책에 집중하려고, 이어폰으로 귀를 막았다. 
 
그때였다. 이어폰 너머로 와장창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민수는 깜짝 놀라 밖으로 뛰어나갔다. 거실에서 부모님을 마주한 민수는 짜증이 극에 달했다. 
 
장식장이 쓰려지면서, 거실 바닥에 유리 파편을 쏟아냈다. 엄마와 아빠는 거칠게 몸싸움을 했다. 엄마는 아빠의 손목을 잡고, 사력을 다해 버텼다. 아빠는 엄마의 손목을 뿌리치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빠가 엄마의 손을 떨쳐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엄마의 뺨을 내리쳤다. 
 
찰싹.
 
아빠의 솥뚜껑 같은 손에 엄마는 힘없이 쓰려졌다. 민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아빠에게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질렀다. 
 
“제발 그만 좀 하라고!” 
 
민수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아빠가 깜짝 놀랐다. 아빠는 민수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말했다. 
 
“뭐라고? 다시 한 번 말해 봐.” 
 
“그만 좀 하라고!” 
 
민수가 아빠에게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아빠가 민수의 멱살을 잡았다. 
 
“이 자식이, 어디서 아빠한테 그딴 식으로 말해?” 
 
민수는 바닥에 쓰려져 울고 있는 엄마와 눈이 마추쳤다. 
 
민수는 이성을 잃었다. 
 
아빠의 손을 뿌리치고, 아빠의 멱살을 잡았다. 
 
“이제 그만하라고 했지! 당신이 아빠야? 왜 술만 처먹으면,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민수의 아빠도 이성을 잃었다. 민수를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민수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아빠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죽자 살자 덤벼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유리 파편 위로 넘어졌다. 민수가 아빠 위로 올라앉아서, 아빠를 사정없이 팼다. 
 
아빠는 민수를 떨쳐내고 일어서려고 온몸을 비틀었다. 유리 파편이 등에 비벼졌다. 
 
민수의 엄마는 오열하면서, 민수를 뜯어말렸다. 엄마의 울음소리를 들은 민수는 그제서야 이성을 되찾았다. 
 
미끄럼을 타듯이 아빠 몸에서 떨어져 나간, 민수는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민수의 아빠는 터진 입술에서 새어 나온 피를 빨아당겼다가, 침으로 뱉어냈다.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고는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빠의 등 뒤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엄마가 흐느껴 울면서, 아빠의 등에 박힌 유리 파편을 빼내고, 수건으로 흐르는 피를 막았다. 
 
민수는 견딜 수 없었다. 아빠를 때린 자기 손을 잘라버리고 싶었다. 주먹을 쥐고 거실 벽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시멘트로 차갑게 굳어진 벽은 민수의 손을 부러뜨렸다.  
 
퍽.
 
민수의 손가락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엄마의 귓가를 울렸다. 엄마는 민수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민수도 엄마의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엄마를 끌어안은 민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빠는 비틀비틀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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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지나고, 아빠가 이야기 좀 하자고 했어요. 아빠가 맨 정신에 이야기하기 힘들다고, 술 한 잔 하자고 하시더라고요. 술은 원래 아빠한테 배우는 거라고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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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의 아빠는 말없이 소주 한 잔을 따라 민수에게 건넸다. 민수는 잔을 받아들고 머뭇거렸다. 
 
아빠가 말했다. 
 
“마셔. 아빠가 주는 술은 일단 받는 거야.” 
 
민수는 소주를 입속에 털어 넣었다. 학교 사물함에 있는 가그린 맛이었다. 가그린을 삼켜버린 듯 찝찝한 기분이었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아빠가 한 잔을 더 따르며 말했다. 
 
“민수야. 아빠가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아빠는 반쯤은 울먹거리는 목소리였다. 
 
소주 병을 입에 물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꺼억하고 트림을 내뱉으면서, 민수에게 말했다. 
 
“있잖아. 아빠하고 엄마 사이에는 네가 모르는 일이 있어.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야. 어른들의 문제니까, 네가 끼어들면 안 돼.” 
 
민수는 하고 싶은 말을 참았다. 민수가 들이킨 알코올이 민수의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뜨거운 숨만 콧구멍 밖으로 새어 나올 뿐이었다. 
 
아빠의 연설은 세 시간이나 지속되었다. 아빠의 말이 장황하게 무한 반복되었지만, 민수는 아빠의 말을 경청했다. 
 
아빠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다혈질의 아빠는 풀이 죽어지냈다. 민수가 아빠에게 달려든 후로, 아빠는 집에서 존재감 없이 지냈다. 무기력한 아빠의 모습을 볼 때마다, 민수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아빠의 처량한 모습이 날개가 부러진 독수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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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한 달이 넘도록 민수는 아빠와 말을 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서로 말다툼을 하다가도, 민수가 들어오면 서로 말을 멈췄다. 아빠는 방으로 들어가고, 엄마는 밤늦게 들어온 민수를 챙겼다. 
 
“늦게 피곤하지?” 
 
엄마가 물었다. 
 
“엄마, 나 어떻게 하지?” 
 
민수가 엄마에게 되물었다. 
 
“뭘 어떻게 해?” 
 
“답답해서 미쳐버릴 것 같아.” 
 
엄마는 할 말을 잃었다. 말없이 민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떻게 평생을 그렇게 살아? 나 때문에 참고 사는 거면, 그럴 필요 없어. 나는 괜찮으니까, 엄마도 그냥 엄마 인생 살아.” 
 
엄마는 민수의 침대에 힘없이 걸 터 앉았다.  
 
“일단, 수능부터 끝내. 그다음에 이야기하자.”   
 
민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눈물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알겠어, 엄마. 이제 나가.” 
 
엄마가 방문을 닫고 나가자, 민수는 책상에 엎드려 울었다. 지우개를 삼킨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PC방으로 와.” 민수의 친구 K가 말했다. 
 
“알겠어, 기다려.” 민수는 터벅터벅 걸어, 학원 근처 PC방으로 들어갔다. 
 
PC방을 한 바퀴 돌아봐도 K와 친구들이 없었다. 민수는 K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민수가 물었다. 
 
“아, 우리 밖으로 나왔어. 분식점으로 와.” 
 
K가 말했다. 
 
민수는 슬슬 짜증이 밀려왔다. 때마침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타고, 분식점 앞에 내렸다. 분식점에서도 친구들은 보이지 않았다. 
 
민수는 다시 K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우리 다시 PC방으로 왔어. 빨리 이쪽으로 와. 우리 지금 세 명이라, 한 명 더 필요해. 최대한 빨리 와라.” 
 
민수는 화가 치밀었다. 
 
PC방에서 마주한 친구들은 게임에 빠져있느라 민수가 온 것도 몰랐다. 민수가 K의 옆자리에 앉았다. 
 
K가 말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조금만 기다려. 이 판 끝나면, 2 대 2로 붙자.” 
 
민수는 K의 옆에 앉아, 인터넷 브라우저를 켜면서 짧게 말했다. 
 
“알겠어.” 
 

 
“화나지 않았을까? 보통 고등학생이면, 욕하고 소리 지르고 난리 한 번 났을 텐데….” 
 
내가 민수에게 물었다. 
 
“화는 났지만, 표현할 수 없었어요.” 
 
민수가 말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어?” 
 
“두려웠던 것 같아요.” 
 
“무엇이?” 
 
“친구들이 나를 따돌릴까 봐요. 예전에도 그런 적이 있어요.” 
 
“그 친구들이?”
 
“아니요. 중학생 때 친구들이요. 제가 화를 한 번 냈는데, 친구들이 나를 멀리했어요. 중학교 2학년 때 있었던 일인데, 졸업할 때까지 혼자 다니고, 혼자 밥 먹었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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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려 간 만화책 언제 갖다 줄 거야?” 
 
민수가 L에게 물었다. 
 
“아, 깜빡했다. 내일 갖다 줄게.” L이 대답했다.  
 
“자꾸 왜 그래?” 
 
“뭘? 내일 준다고 했잖아.”
 
“그 소리 벌써 세 번째야.”
 
“뭐래? 갖다 준다고 이 새끼야.” 
 
L은 민수의 멱살을 잡았다. 
 
민수와 L은 서로가 휘두른 주먹에 얼굴이 상했다. 민수가 L을 힘으로 눌러 넘어뜨렸다. L의 위에 올라타, 주먹으로 L의 얼굴을 때리기 직전이었다. 
 
그 순간, 눈앞이 번쩍했다.
 
L의 절친, C가 주먹으로 민수의 관자놀이를 가격한 것이다. 민수는 의식을 잃고 쓰려졌다. L과 그의 친구들이 민수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만화책을 돌려달라는 말 한마디, 그 대가는 혹독했다. 친구들은 민수를 괴롭혔다. 같이 어울려주는 친구 하나 없이 중학교를 쓸쓸히 졸업했다. 
 

 
“그래서, 말을 못 했어요.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긴장돼요. 내가 뭔가 작은 실수라도 하면, 친구들이 나를 어떻게 하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고….” 
 
나는 민수에게 중학교 시절 그 친구들의 이름을 묻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달려가, 그 녀석들을 박살 내주고 싶었다. 
 
나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민수에게 물었다. 
 
“솔직하게 한 번 말해주지 않을래? 다시 PC방에 찾아갔을 때,  미안한 내색 하나 없던, K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뭐였을까?” 
 
민수는 생각에 잠겼다. 
 
“글쎄,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요? 막상, 말을 하려니까 생각이 잘 안 나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민수가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다, 두 손을 겹쳐서 깍지를 끼더니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어차피 다시 PC방으로 올 거면, 분식집으로 왜 부른 거야? 무슨 똥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지금 감정이 어때?” 
 
“말하고 나니까 그냥 시원한데….”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줄래?” 
 
“솔직히 저는 제가 친구들에게 말을 잘 못하고, 제 표현을 못 하는 게, 집 안에서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해요. 저는 외동이고, 부모님과도 대화를 별로 안 하니까요. 제 감정, 제 생각을 표현할 줄 모르는 것 같아요. 혼자만 계속 답답하고….” 
 

 
민수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어느 날, 도둑이 든 것처럼 집 안이 어수선했다. 
 
당황한 민수는 큰 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집에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다급하게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당황해서 닫지 못한 현관문 앞에 아빠가 나타났다.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였다. 비닐봉지에 소주와 맥주, 오징어와 땅콩 같은 것들이 담겨있었다. 
 
“엄마는요?” 
 
아빠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주 병을 손에 쥔 채, 벌컥벌컥 들이켜고,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여전히, 현관 앞에 기댄 채였다. 
 
“엄마는 어디 갔냐고요?” 
 
아빠가 소주 병을 현관 대리석 바닥에 내리꽂으며 소리를 질렀다. 소주 병이 깨지면서 유리 파편이 사방에 흩어졌다.  
 
“몰라, 이 새끼야. 내가 어떻게 알아?” 
 
민수의 예상이 맞았다. 엄마는 급하게 짐을 챙겨 집을 나간 것이다. 
 
민수가 수능을 마칠 때까지 곁에 있어주고 싶었던 엄마의 바람은 물거품이 되었다. 
 
민수는 아빠를 밀치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계단을 뛰어내려가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의 전화기는 꺼져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민수는 계단을 헛디뎌 우당탕 넘어지고 말았다. 민수에게는 일어날 기운이 남아있지 않았다. 엎드린 채로 엉엉 울었다. 
 
엄마와 함께 살고 싶었던 것이 민수의 바람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엄마와 따로 나와 살고 싶었다. 민수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민수는 그날 밤, 엄마를 잃고 자신을 잃었다. 
 

 
“민수야, 엄마야.” 
 
일주일이 지나고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 어디야?” 
 
“지금 독서실 앞이니까, 얼른 내려와.” 
 
민수는 번개처럼 계단을 뛰어내려와 엄마 앞에 섰다. 
 
“엄마!”
 
민수는 어린아이처럼 엄마를 끌어안았다. 엄마도 민수를 끌어앉고 소리 없이 울었다. 엄마를 끌어안은 채로 민수가 물었다. 
 
“엄마, 어떻게 된 거야? 왜 갑자기 집을 나갔어?” 
 
엄마는 민수에게서 몸을 떼어내고 조용한 곳에 앉아 대화를 나누자고 말했다. 두 사람은 독서실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았다.
 
엄마가 민수에게 그날 밤의 일을 말했다.  
 

 
민수의 아빠는 여느 때처럼,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왔다. 민수의 엄마는 빨래를 개고 있었다. 민수의 아빠는 다짜고짜 엄마에게 시비를 걸었다. 
 
짜증이 난 엄마는 아빠의 말을 무시했다. 엄마가 아빠를 무시하자, 아빠는 이성을 잃었다. 엄마가 개놓은 빨래를 발로 차서 헝클어뜨렸다. 
 
엄마는 아빠를 쳐다보지도 않고, 빨래를 주섬주섬 집어 들었다. 다시 자리에 앉아, 침착하게 빨래를 갰다. 
 
아빠는 엄마를 사정없이 때렸고, 엄마는 아빠에게 달려들었다. 감정이 격해진 아빠는, 주방에서 칼을 꺼냈다. 
 
엄마에게 칼을 휘두르며, 같이 죽자고 말했다. 엄마는 어디 한 번 죽여보라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아빠를 자극했다. 
 
아빠가 칼로 엄마를 내리쳤다. 엄마가 팔로 얼굴을 가렸다. 칼은 엄마의 팔 등에 부딪히고 멈췄다.
 
그 순간 아빠는 하얗게 질렸다.
 
아빠는 엄마를 위협할 생각이었다. 실제로 칼이 엄마의 몸에 닿을 줄을 몰랐던 것이다. 
 
칼날 부위가 아닌 칼등이 엄마의 팔에 내려앉았지만, 이미 늦었다. 엄마 눈에 아빠는 짐승이었다. 
 
엄마는 아빠를 밀쳐내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아빠가 뭐 하는 짓이냐고 힘으로 뜯어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이번에 칼을 집어 든 사람은 엄마였다. 칼을 휘두르며, 아빠에게 소리쳤다. 
 
“나 한 번만 더 건드리면, 그때는 죽여버릴 거야.” 
 
아빠는 물러섰다. 
 
엄마가 작별 인사도 없이 민수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엄마의 말이 끝나고, 민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집으로 뛰어가 아빠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중요한 사람은 엄마였다. 
 
민수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그럼 이제 집에 안 오는 거야?” 
 
“응, 그럴 것 같아.” 
 
“그럼, 지금은 어디서 지내?”
 
“나중에 알려줄게. 지금은 말 못 해.” 
 
“그럼, 어떻게 먹고살아? 돈은?” 
 
“그것도 천천히 생각해보려고….” 
 
민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할 뿐이었다. 
 
잠시의 침묵을 깨고, 엄마가 말했다. 
 
“민수야. 넌 엄마 이해하지? 엄마가 왜 이럴 수밖에 없는지….” 
 
엄마가 울먹거렸다. 
 
민수는 엄마의 손을 잡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전에도 말했잖아. 나는 괜찮다고. 엄마는 엄마 인생 살아. 나도 조금만 시간 지나면 독립할 거야. 그때는 내가 다시 엄마 찾으러 갈게. 우리 같이 살자. 조금만 참아, 엄마.”
 
민수의 말이 끝나자 엄마는 흐느껴 울었다. 그리고, 조금은 단호한 말투로 민수에게 말했다. 
 
“민수야. 엄마는 걱정하지 마. 너도 네 인생 살아야 해. 엄마는 씩씩하게 잘 살 거야. 너 가고 싶은 대학에 가고, 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야 해. 엄마 때문에 희생하지 말고, 알겠지?” 
 
민수는 불안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민수에게 말했다. 
 
“민수야, 너무 늦었다. 우리 이제 일어나자. 아빠한테는 엄마 만났다는 말 하지 마, 알겠지?” 
 
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언제 다시 만나?” 
 
“엄마가 다시 전화할게.” 
 

 
민수는 독서실에 올라가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아빠에게 달려가 따질 작정이었다. 모든 것이 아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민수 역시 맨 정신으로 대화할 수 없었다. 냉장고를 열어, 아빠가 사다 놓은 술을 사정없이 마셨다.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똑바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퇴근한 아빠가 집에 들어와서, 술에 취한 민수와 마주했다. 
 
아빠는 기가 막혔다. 
 
“너 지금 뭐 하는 짓이냐?”
 
“아빠 때문이야.” 
 
“뭐? 이게 미쳤나?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아빠 때문에 엄마가 나갔어.”
 
그 순간 뭔가 번쩍했다. 아빠가 민수의 뺨을 때린 것이다. 
 
“정신 차려, 이 새끼야. 어디서 아빠한테 술 주정이야!”
 
“아빠한테 배웠지. 내가 어디서 배워?” 
 
민수는 바닥에 넘어진 채로, 소금에 담근 미꾸라지처럼 온몸을 비틀었다. 머리를 쥐어뜯고, 발버둥을 치면서, 오열했다. 
 
아빠는 바닥에 누워 미쳐 날뛰는 민수에게 차가운 물 한 바가지를 쏟아부었다. 
 
“정신 차리고, 여기 앉아 봐.” 
 
민수는 어안이 벙벙했다. 몸을 일으켜 앉았는데,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래서, 엄마 지금 어디서 지낸다고 말해주디?” 
 
민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빠가 예전에 말했지. 어른들 문제니까 끼어들지 말라고.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 거 기억나지?” 
 
민수가 고개를 끄떡였다. 
 
“3년 전부터, 엄마가 이상했어. 처음에는 내가 오해하나 싶었어. 엄마가 아니라고 잡아떼니까, 뭐 방법이 있어야지.” 
 
민수의 정신이 또렷해졌다. 아빠의 말을 토씨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 상체를 바로 세웠다. 
 
“그러다, 큰맘 먹고 흥신소에 부탁을 했더니, 아니나 달라? 딱 걸렸지. 진명이 삼촌, 너도 알지? 그 새끼랑 네 엄마랑….”
 
민수는 고개를 가로 저였다. 그럴 리 없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엄마가 왜 어디있는지 말 못하는 지 알아? 그 자식이랑 같이 살림 차린 거야. 네 눈에는 엄마가 천사로 보이지? 엄마가 뭐 집에 붙어있은 줄 알아? 나 회사 가고, 너 학교 가면 엄마도 집에 없었어. 아빠가 맨 정신으로 살 수 있었겠냐? 아빠 인생은 3년 전에 끝났어.” 
 
아빠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인생의 쓴맛을 담배 연기로 누그러뜨렸다. 
 
“내가 너한테 별말을 다한다. 너는 신경 쓰지 말고 너 할 일이나 잘해. 정신 똑바로 차리고, 대학이나 가라고. 
 
아빠가 뼈빠지게 번 돈 너한테 다 쓰는 거야. 꼭 성공해서, 보란 듯이 잘 살아. 아빠처럼 살지 말고, 알겠어?” 
 
민수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물방울인지 눈물방울인지, 민수조차 알 수 없었다. 
 

 
정식 상담에서 민수를 만난 것이 아니었다. 
 
청소년 수련회 강사로 초대를 받아 저녁 집회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 담당 전도사님이 조심스럽게 민수의 이야기를 꺼냈다. 
 
수련회 일정 중에, 잠시 시간을 내어 민수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느냐는 부탁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물놀이를 할 시간에, 민수와 조용히 앉아 두 시간 정도의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두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민수의 이야기가 끝나고 남은 시간은 고작 10분이었다. 
 
산더미 같은 질문을 뒤로하고, 나는 억지로 대화를 마무리해야 했다. 
 
나는 아빠의 관계, 엄마와의 관계, 그리고 친구들과의 관계를 언급했다. 
 
교과서에서 나올 법한 진부한 말들이었다. 듣는 사람이 마음만 답답해지는 그런 말들이었다. 
 
고맙게도, 민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떡이며 경청했다. 
 
다음 집회 일정 때문에, 우리는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했지만, 못내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나는 민수의 등을 두드려주면서, 힘내라고 말했다. 
 
민수는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출입구를 향했다. 나는 그 자리에 선 채로, 민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민수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돌아서서 내게 말했다. 
 
“그런데, 목사님…. 저도 치유될 수 있을까요?” 
 
나는 블랙홀에 몸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민수는 어쩌면 나 자신이었다.
 
내가 민수를 향해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갈라진 자아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느꼈다. 
 
그대로 민수를 내보낼 수 없었다. 나는 민수에게 다가가 민수를 끌어안았다. 
 
민수는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그리고,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도 목사님처럼, 치유돼서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 좋은 아빠가 되고 싶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어요. 부모님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제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나는 민수의 손을 꼭 붙잡고, 고개를 끄떡였다. 
 
내가 위로랍시고 한마디를 내뱉는다면, 민수의 어깨에 내려앉은 희망이 깃털처럼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민수가 나가고, 나는 의자에 힘없이 걸 터 앉았다. 
 
나는 인정해야 했다. 민수는 내게 모든 것을 말했지만, 나는 민수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정작 나 자신은 치유되지도 않았고, 좋은 아빠도 아니었으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도 못했다. 
 
아버지와 단둘이 마주 앉으면 어색함이 흐르고, 어머니를 향한 연민으로 잠을 뒤척인다. 
 
아내에게는 여전히 서투른 남편이고, 자녀들에게는 욱하고 사과하는 일을 반복하는 일관성 없는 아빠다. 
 
오히려, 나는 민수에게 묻고 싶었다. 
 
‘민수야. 목사님도 치유될 수 있을까? 내가 자격 있는 사람일까? 언젠가 네가 아빠가 되어 나타난다면, 나도 그때 진실을 말할게.’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예수님을 찾았다. 집회 장소 어딘가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앉아 있는 민수를 찾아가셔서, 따뜻하게 안아주시기를 바랐다.  
 
또다시 아이러니였다. 
 
정작 나는 방문을 열고 나갈 용기가 없었다. 작은 방 안에 조용히 머무르고 싶었다. 잠시라도, 감정을 추스르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문밖에서, 누군가 노크를 했다. 담당 전도사님의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목사님, 이제 나가실 시간입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채로, 사람들 앞에 섰다. 
 
내 시선이 군중을 향했다. 아이들은 와글와글 시끄러웠다. 밝은 조명에 눈이 부셨다. 
 
나에게는 오직 한 사람, 상처 입은 한 사람만이 중요했다. 내 관심은 민수를 향했다. 
 
저 멀리 맨 뒷자리에, 민수가 보였다. 민수의 옆자리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민수는 말없이 조용했다.  
 
그날 밤, 설교는 기도였다.

아이를 지운 건 미안해

“제가 오죽하면 그랬을까요? 남편은 육아와 집안일에 전혀 관심이 없어요. 저 혼자 감당 못하겠다고 여러 번 말했어요. 저도 일해요. 남편보다 돈을 못 버는 것도 아니에요. 첫째를 키우는 일도 벅찬데 남편은 둘째를 낳으라고만 하니 도무지 신뢰를  할 수 없었거든요. 낳지 말자고 남편을 설득하려고 해도, 대화 자체를 거부했어요. 제 마음은 어떻겠어요? 수술실에 누워 남편을 원망했다고요.” 
 
두 달 전, 아내는 남편 동의 없이 아이를 지웠다. 남편은 둘째를 원했지만 아내는 반대했다.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첫 아이가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아내는 홀로 육아를 했다고 생각했다. 똑같이 야근을 해도 아이를 챙기는 일은 그녀 몫이었다. 일과 육아를 동시에 감당하기가 벅찼다. 
 
친청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3년 전부터 함께 살면서 아이를 돌봐주고 있다. 아내는 혹시 임신이라도 될까 싶어 침실에서 신중했다.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에서 남편에게 조심하라고 말했다. 
 
남편이 아이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대화는 산으로 갔다. 남편은 아이에 대해, 아내는 역할 분담에 대해 말했다. 보이지 않는 벽이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감기에 걸린 것처럼 몸이 아팠다. 음식을 먹으면 속이 편하지 않았다. 아내는 몰래 임신테스트를 했다. 빨간색 두 줄이 유난히 선명해 보였다. 산부인과에 찾아가 최종확인을 받았다. 일주일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남편에게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아이를 지우자고. 
 
그러나 남편을 믿을 수 없었다.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그는  육아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지만 거짓말이었다. 친정 엄마와 함께 들어와 살면서 그는 더 편해졌다. 뒤로 물러나서 그나마 도와줬던 소소한 일마저 친정 엄마에게 떠넘겼다. 
 
한 번 쓰라린 고통을 맛본 아내는 남편의 달콤한 말을 믿지 않았다. 남편이 꼭 약속을 지킬 테니, 아이를 낳자고 말해도 아내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에게 전화로 최종 통보를 하고 아이를 지웠다. 
 
그날부터 남편은 밖으로 돌기 시작했다. 퇴근 시간이 평소보다 늦어졌고,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 늘었다. 아내는 미안한 마음, 원망스런 마음이 뒤섞여 그에게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시간을 주고 싶었다. 그도 마음이 아플 테니까. 
 
그러나 상황을 알지 못하는 친정 엄마는 남편에게 쉬지 않고 잔소리를 퍼부었다. 딸이 일과 육아로 힘들다고 해서 발 벗고 나섰건만 사위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것도 모자라 하루가 멀다 하고 술에 취해 들어오니 속 터지는 일이었다. 
 
그녀가 엄마네게 적당히 하라고 부탁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솔직히 말할 수도 없었다. 비난의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올 테니까. 노인들은 아이를 지우면 천벌이라도 받는 줄 아니까. 
 
남편에게 수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어느 날부터 집에서 샤워를 하지 않았다. 쉬는 날에도 저녁 식사를 하기 전에는 샤워를 하는 깔끔한 남자였다. 왜 씻지 않느냐고 물으면 “피곤해서…”라고 짧게 대답했다. 
 
불안한 아내는 남편의 뒤를 밟았다. 그는 붉은 조명 아래 여성들이 반나체로 서 있는 골목을 서성거렸다. 아내의 두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아이를 죽인 대가로 벌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남편에게 아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말없이 서로 같은 공간을 거닐 뿐이었다. 소리 없이 걸었지만 아팠다. 깨진 유리 조각 위를 맨발로 걷는 것처럼. 
 
“어떻게 아내가 제 동의 없이 아이를 지울 수 있나요? 이건 말이 안 돼요. 너무 상처가 커서 말로 표현을 못하겠어요.”
 
그는 엄마 역할이 힘들다고 아이를 죽일 생각을 하는 아내에게 정이 떨어졌다. 육아를 충분히 돕지 못했고, 살림을 아내에게만 떠넘겼다. 그러나 그의 부족함이 아내가 저지르고자 하는 일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내를 말렸다. 울면서 제발 그러지 말라고 부탁까지 했다.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짧고 냉담했다. 
 
“나 병원이야.” 
 
더 이상 회사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조퇴하고 회사 옆 산책로를 따라 한강까지 갔다. 걷고 또 걸었다. 걷다 치쳐 인도에 걸터앉았다.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대로 집에 들어갈 자신이 없어 술을 마셨다. 곤드레만드레 비틀거리며 술집을 나왔다. 
 
붉은 불빛 가득한 거리가 나타났다. 붉은 불빛은 낯설었지만, 자극적이지 않았다. 그는 환상을 보았다. 상점 안에 있어야 할 마네킹들이 유리창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기도 했다. 그는 다시 한 번 도망쳐야 했다. 그에게 달려드는 마네킹으로부터. 
 
정신을 차려보니 경찰서였다. 술에 취해서 길에서 잠이 들은 것 같았다. 아침에 집에 들어서자 현관문을 닫기도 전에 장모님이 달려들어 그의 등짝을 후려쳤다. 
 
“자네 지금 제 정신이야? 어디 가서 뭐하다 지금 들어왔어? 당장 말해!” 
 
신발을 벗는 동안 생각했다. 
 
‘뭐라고 말할까?’ 
 
아내가 그의 얼굴은 보지도 않은 채, 아들의 옷을 입혀주면서 말했다.  
 
“엄마, 지금 뭐하는 거야, 내버려둬요!” 
 
남편은 생각했다.
 
‘아내에게 고마워해야할까? 아니면, 내 집 같지 않은 이곳에서 뒤돌아 나가야 할까?’ 
 
남편은 집이 더 이상 편하지 않다. 계속 장모님과 아내를 볼 생각을 하니 끔직했다. 그들의 눈빛이 싫었다. 방문이 열렸다. 아들이 아빠 품으로 달려왔다. 아들이 억지로 손을 잡아끄는 바람에 거실로 나왔다. 그는 소파에 앉아 TV를 켜놓고 눈물 없이, 소리 없이 울었다.    
 
***
 
 
깨어진 부부는 힘겨루기를 한다. 힘의 균형이 동등하지 않다. 둘 중 한 사람이 주도권을 쥔다. 다른 한 쪽은 더 많이 양보하고, 희생한다. 주도권을 쥔 사람은 모른다. 주도권을 잃은 사람이 겪는 고통에 대해. 승자가 결정되지 않는 경우, 힘겨루기는 치열하다. 승자가 결정되기까지 힘겨루기는 계속된다. 서로 주도권을 쥐려 한다. 
 
두 사람은 전쟁 중이다. 양보 없이 서로가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상대를 제압하려한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집안일을 도우라고 말한다. 해결은 간단하다. 아내는 아이를 낳고, 남편은 집안일을 도와주면 된다. 그러나 둘은 힘겨루기에 정신이 팔려 간단한 해결책을 버렸다. 그 대가는 혹독하다.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한 소중한 생명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내의 단정적인 사고와 빠른 결론과 결정은 남편 자격, 아버지 자격을 박탈시켰다. 가정 안에 남편을 위한 자리는 없어 보인다. 아내는 주관적인 결론을 먼저 내리고, 그에 맞춰 선별적으로 정보를 선택한다. 이것이 파괴적인 패턴으로 이어진다. 결론이 내려지면 새로운 정보는 힘을 잃는다. 결론과 맞지 않는 정보는 쓰레기통으로 직행이다. 
 
아내는 남편에 대해 결론을 내렸다. “육아와 살림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고. 잘못된 정의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남편은 “내가 원하는 만큼 도와주지 않는 사람”이다. 원하는 것에 대해 서로 대화해야 하는데, 아내는 친정 엄마를 데려왔다. 남편에게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뜻이다. 결론이 빠르니 결정도 빠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의 뒤를 발고 내린 결론도 성급했다. 그는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간 사람,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남편은 그 거리를 걸은 것은 맞지만 그 장소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는 술에 취해 전날 있었던 일에 대해 기억하지 못한다. 비난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비난받을 수는 없다. 그는 성매매를 하지 않았다.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부부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배우자가 원하는 대로 해줬으면 하는 바람은 의무와 강요로 변질된다. 의무를 앞세워 강요하면 배우자는 멀리 도망간다. 
 
“내 남편/아내는 ~한 사람이어야 한다. 내 남편/아내는 ~해야만 한다.”
 
배우자를 숨 막히게 한다. 직접 문장으로 말하지 않아도 상대는 안다. 원하는 바를 완전히 만족시킬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그래도 이 정도는 해야지…’라고 생각한다.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남편은 문제에 직면하지 않고 회피했다. 출산은 두 사람 사이에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도 남편은 소극적이었다. 대화를 끝까지 하지 않고, 중간에 물러났다.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대로 아이를 낳는다면 그에 대한 책임이 따른다. 그에 대한 논의를 충분히 했어야 했다. 아이를 낳느냐 마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출산 이후다. 아이 존재에 대한 말싸움을 하다가 남편은 아내에게 신뢰를 잃었다.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그러나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 자신 안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배우자에게 솔직하게 말하면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다. 그러나 숨기거나 왜곡시켜 표출하면 관계가 어려워진다. 
 
남편은 숨기는 방식에 익숙하다. 술에 취해 잊으려고 했다. 그의 회피가 더 많은 오해와 갈등을 일으켰다. 회피하면 문제는 커진다.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계속된다. 멈추고 직면해야 한다. 솔직한 내면을 표현해야 한다. 배우자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그 다음 문제이다. 
 
배우자가 공감한다면 이해받는 것이다. 거절하면 서로의 차이를 발견하고 인정하면 된다. 불편해도 멈추지 않고 자신을 표현해야 건강한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 그것은 아무도 대신 해줄 수 없다. 
 
장모님의 존재는 남편에게 혜택이자 손실이다. 육아와 살림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는 혜택이비만 그의 존재감에 대해서는 손실이다.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녀, 모두 각자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장모님의 존재로 인해 빼앗긴 자리를 찾기 위해서는 육아와 살림에 대한 막중한 책임을 져야 한다. 남편은 편안함과 불편함의 미묘한 경계에서 혼란스럽다. 주어진 환경에 몸을 맡기고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기에 벌어지는 일이다. 
 
가정을 온전히 책임질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고통이 따르지만 마땅히 짊어져야 하는 짐이다. 기꺼이 자신이 짊어져야 할 짐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긴 시간들에 대해 후회하는 것이 맞다. 책임지는 사람만이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

남자가 그리워요

이혼해서 아이들을 혼자 키우며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권유로 연애를 했고, 재혼 이야기까지 오고 갔습니다. 결국, 상대방 부모님의 반대로 관계를 정리했어요.
 
하지만, 저는 힘든 일을 겪고 나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두 달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서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어요. 남자가 그리워졌어요. 누군가 곁에서 날 안아줬으면 하는 바람이 점점 심해졌어요.
 
다른 싱글맘들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 친구들은 참지 말고 다른 사람을 만나라고 해요. 하지만, 저는 단지 성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가벼운 만남을 이어가는 게 성경적이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런 나 자신이 낯설어 운동도 열심히 하고 바쁘게 지내고 있지만, 혼자 있을 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럴 때마다 죄책감이 들어요.
 
사실, 저는 어린 시절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어요. 가족에게 말하지 못했어요. 아빠는 술주정, 외도로 엄마에게 고통을 주었어요. 오빠는 같이 어렸고 힘이 없다고 느껴지니까 도와줄 거란 기대 조차 없었죠. 전 남편은 결혼하고 얼마 후부터 외도를 하더니 결국 날 떠나서 그 여자랑 살아요.
 
민감한 주제라 답변을 피하고 싶었어요. 용기 내어 답변하는 이유는 자매님이 살아온 삶을 자세히 적어주셨기 때문이에요. 자매님은 지금 남자가 그리운 게 아니에요. 자매님을 보호해줄 사람이 필요한 거예요. 주장을 했으니 근거를 말해야겠죠. 제가 드리는 말은 추론에 불과해요. 제 이야기에 얽매이지 마시고, 하나의 견해로 받아들여주세요. 받아들일 만큼만 받아들이면 좋을 것 같아요.
 
자매님은 초등학교 때, 집에 놀러 온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했어요. 아빠는 술에 취해 잠든 상황이었고, 오빠는 자고 있었어요. 결국 아무도 도와줄 수 없었어요. 그 사실을 지금도 숨기고 있고요. 자매님은 엄청난 일을 당했지만, 가족에게 말하지 않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자매님을 보호해 줄 수 없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에요.
 
아빠는 가정 폭력, 외도로 엄마에게 상처를 줬어요. 어린 자매님은 아빠가 칼을 들고 엄마를 죽이려고 했던 장면을 목격했어요. 아빠가 어린 자매님을 보호해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초등학교 때, 오빠와의 일도 마찬가지예요. 자매님을 괴롭혔던 덩치 큰 아이가 나타났어요. 자매님은 오빠에게 일렀어요. 오빠는 어린 자매님을 보호해준다며 대신 싸워줬어요. 하지만, 졌어요. 두 사람은 민망한 채 말없이 집으로 돌아왔어요. 오빠 역시 자매님을 보호해줄 사람이 아니었어요.
 
전 남편은 잦은 외도 자매님에게 고통을 주었고, 결국 집을 나가 바람난 여자와 살림을 차렸어요. 자매님을 보호해주기는 커녕 상처를 주고 말았죠. 가슴 아픈 한 여자의 인생을 나는 보았어요. 그래서 외면할 수 없었고, 민감한 주제이지만 답변을 하게 되었어요.
 
자매님의 이야기가 진실이라면, 자매님은 지금 사랑받고 싶은 거예요. 보호받고 싶은 거죠. 성적인 만족을 원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 따뜻하게 안아줬으면 하는 거예요.
 
그 지점에 자매님의 결핍이 있어요. 남자를 원한다는 생각은 죄책감으로 이어지지만,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감정은 자연스러운 감정이에요. 그러니까 자신을 정죄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자매님을 온전히 사랑하세요. 지금까지 상처받으며 살아온 자매님을 보시며 하나님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요.
 
자매님은 보호해줄 사람 없이 최선을 다해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요. 누군가 찾아와 따뜻하게 안아주기를 바라는 건 자연스럽고 당연한 감정이에요. 다른 대안을 찾지 않는다는 점에서 올바른 방향을 잡았다고 생각해요. 과정은 힘들 거예요. 오래 걸려요.
 
자매님에게 부탁드리고 싶어요. 외로운 자신을 정죄하지 마시고, 돌봐주셨으면 해요. 외로운 건 자연스러운 거예요. 자매님은 누구보다 외로울 수 있어요. 외로울 때마다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고 안아달라고 말씀하세요. 자매님 안의 결핍을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채워달라 기도하세요. 예수님이 자매님을 끝까지 돌보시고 책임져 주실 거라고 믿어요. 자매님의 하나님은 정죄하는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매님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되어주셔야 해요.
 
다시 누군가를 만나기 원한다면, 솔직히 하나님께 기도해 보세요. 자매님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소중한 존재니까요.

별처럼 슬픈 밤

“참 바보 같지요. 앞날이 뻔히 보이는데, 두려워서 말도 못 하고 남자친구 뒷바라지를 했으니까요.
 
그 사람은 다른 여자를 만나 결혼했어요.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보고 알았어요. 가끔 생각날 때 확인해 봤어요. 터무니없지만, 아직 기회가 있다는, 뭐 그런 생각하면서요.
 
다른 여자와 찍은 사진을 처음 봤을 때, 잠을 잘 수 없었어요. 프로필 사진이 웨딩 사진으로 바뀐 날은 죽고 싶었고요. 지금도 밤마다 생각해요. 이대로 영원히 잠들면 좋겠다. 살아서 뭐 하겠어요. 살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말했다. 남자친구가 떠나간 그날 밤, 모든 것을 잃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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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남자라니까, 한 번 만나 봐.”   
 
“난 어린 사람 싫어, 언니.”
 
“일단 한 번 만나 봐. 생각도 깊고 듬직한 애야.”
 
교회 언니 소개로 그를 처음 만났다. 남자에게 흥미가 없던 터라, 일부러 남자를 만나지 않았다. 친한 사람들이 남자를 소개할 때마다 난처했다. 예의상 한 번 만나준다는 생각으로 마지못해 나갔다.
 
듬직한 체격, 다부진 어깨, 각진 얼굴. 그의 첫인상은 듬직하다 못해 부담스러웠다. 적당히 시간만 때우고 일어나자, 생각했다.
 
대화를 하는데 묘한 매력을 느꼈다. 외모와는 달리 부드러운 말투였다. 얼굴을 손을 가리고 웃는 소심함이랄까.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받았다. 한 번쯤은 더 만나도 될 것 같은 그런 남자였다.
 
두 달이 지난 후, 고백을 받았다. 어쩌면 처음이었다. 누군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설레였던 감정 말이다. 두 사람은 기념으로 반지를 맞췄다.
 
그녀의 나이 서른하나, 남자친구는 스물일곱, 네 살 연하의 남자였다. 남자친구는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해서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그녀는 회사생활 5년 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취업을 앞두고 심란해 보였던 그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 대학원에 가야 할까 봐. 하고 싶은 공부가 있어.”
 
공부를 하고 싶다는 그의 말에 그녀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녀의 나이 서른하나였다. 공부를 마치고 나면, 서른셋이 된다.
 
사귄 지 187일이다. 선뜻 ‘결혼은?’이라고 물을 수 없었다. 우리 둘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그잔을 손으로 감싸 쥐며 창밖을 바라봤다.
 
“걱정하지 마. 공부 마치면 우리 바로 결혼하자. 나 진심이야. 조금만 더 기다려줘.”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애써 태연한 척했다.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공부하는 동안 남자친구는 그녀에게 최선을 다했다. 학생의 장점이랄까. 퇴근 시간에 맞춰 그녀를 기다렸다. 카페 유리창 너머로 그를 바라볼 때마다 그녀는 행복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두 사람은 결혼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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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견례를 앞두고 그는 초초하게 말했다.
 
“사실은 우리 부모님이 조금 까다로우셔. 특히,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어머니가 결혼을 반대하셔. 하지만, 걱정 마. 계속 설득하고 있어. 반대하셔도 할 수 없잖아. 내 결심은 달라지지 않아. 너도 오래 기다렸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조각 케이크가 심장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기분이었다. 숨이 막혀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 엄마는….”
 
평소에 그는 어머니에 대해 말을 아꼈다. 어머니 이야기만 나오면, 시선을 피하고 말을 돌렸던 그였다. 그가 처음으로 어머니에 대해 말을 꺼냈다.
 
그의 아버지는 술만 먹으면 어머니에게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다.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었다. 경제적인 이유였다.
 
“내가 아버지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뭔지 아니? 너 때문이야. 너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지긋지긋한 삶도 이제 끝이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어머니가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너 결혼할 때까지는 참아야 되지 않겠니? 빨리 장가가라. 그래야, 지긋지긋한 삶에서 벗어나야 할 거 아니야.”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의 어머니는 말했다.
 
“어디서 그걸 여자라고 데리고 왔어. 내가 고작 그런 년하고 결혼시키려고 이날 이때까지 참은 줄 알아!”
 
그는 답답했는지, 커피를 물처럼 들이켰다.
 
“말하고 나니 속은 시원하네.”
 
그녀의 반응이 없자, 그가 조급한 듯 말했다.
 
“나한테 시간을 조금만 줘. 급할 거 없잖아. 올해까지 설득해보고, 그때 안되면 그냥 우리끼리 결혼해버리자.”
 
한 달이 지난 후, 그의 어머니가 전화를 했다. 교양 있는 말로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본론을 말했다.
 
“우리 애가 우유부단해서 결정을 못 내리는 애야. 그러니까, 네가 결정을 내리는 게 맞지 않니? 이제, 우리 아들 그만 만나라. 너 나이도 있는데, 하루라도 빨리 좋은 남자 만나야지.”
 
참을 수 없었다. 남자친구를 원망했다. 독설을 퍼부었다. 남자친구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는 말없이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다음 날도 그의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벨은 주말도 없이 부지런히 울렸다.
 
그녀가 전화를 받으면 릴레이 경주를 하듯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어머니에게 걸려오는 전화는 쉬지 않고 울렸지만, 남자친구의 전화기는 고요했다. 그의 전화기는 꺼져있었다. 바통터치 되지 않는 릴레이가 계속됐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한 그는 회의 핑계를 댔다. 회의 중에는 모든 직원이 전화기를 꺼둔다고 변명했다. 퇴근 후에 야근, 회식 때문에 전화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수 십 번을 전화했을 때가 그가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이성을 잃었다. 길 한복판에서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야! 너 미쳤어. 어디서 지금 이따위로 사람을 대하고 난리야. 나도 아쉬울 거 없어, 알아? 너 같은 놈 나도 싫어!”
 
그는 침묵했다. 할 말 다 했냐고 물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주말 내내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남자친구에게 문자라도 오지 않을까, 머리맡에 전화기를 뒀다. 진동이 울리면 손을 뻗어 전화기를 확인했다. 스팸문자뿐이었다.
 
‘설마, 그럴 리 없어. 나한테 이럴 수는 없어.’
 
출근은 했지만, 일을 할 수 없었다. 몸이 아프다고 핑계를 대로 집에 돌아와 누웠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전화기가 부르르 떨렸다. 그가 보낸 문자였다.
 
“오늘 퇴근 후에 잠깐 보자.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그를 만났을 때, 그는 혼자 선언하듯 말했다.
 
“우리 여기까지야. 이제 그만하자. 너도 나도 할 만큼 했어.”
 
#
 
그녀가 어릴 때 아버지는 집을 나갔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건 초등학교 오학년 여름 날이었다.
 
물건이 깨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화장대 거울에 금이 갔다. 깨진 거울에 엄마가 비쳤다. 거울에 비친 엄마 얼굴이 여러 개였다. 하나, 둘, 셋.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이대로 나가면 어떻게!”
 
“내가 말했잖아. 잠깐 피하는 거라고.”
 
아빠가 짐을 싸느라 정신이 없다.
 
“당신만 살면 되는 거야? 우린 어떻게 해?”
 
엄마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그게 아니라고 몇 번 말해. 일단 도망가야 해. 같이 살 집 구하면 내가 바로 연락할게. 일주일도 안 걸려. 나 감옥 가면, 우리 가족은 누가 먹여 살려. 나 절대로 감옥 안 갈 거야. 억울해서 미치겠다고.”
 
“여보, 다시 생각해 봐. 그래도 이건 아니야. 우리도 데려가. 제발, 여보.”
 
“애까지 데리고 어떻게 도망을 치라고. 비켜!”
 
아버지가 문을 박차고 나갔다. 엄마가 뛰어나가 아버지에게 매달렸다. 아버지는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엄마는 몇 미터 끌려다가 멈췄다. 무릎이 까진 채 엎드려 세상이 떠나가듯 울었다.
 
그녀는 창가에 서서 바닥에 쓰러져 우는 엄마를 바라봤다.   ‘내가 없었다면, 아빠는 엄마를 데려갔을까.’
 
엄마의 대본에서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엄마의 대본을 고치고 싶지 않았다. 대본대로 행동하는 게 편했다.
 
그녀는 적절한 시기마다 대본에 쓰인 대로 말했다. ‘엄마, 아빠는 언제 와?” 엄마 역시 대본에 충실했다. “곧 오실 거야.”
 
‘엄마는 정말 몰랐을까.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었을까.’
 
어린 그녀도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발걸음은 일주일짜리 발걸음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구두가 시멘트 바닥에 부딪혀 따닥따닥 내는 소리는, 모스 부호처럼 선명했다.
 
“다. 시. 는. 돌. 아. 오. 지. 않. 을. 거. 야.”   
 
#
 
아빠가 나간 후, 엄마는 시체처럼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뱃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요동해도 엄마를 깨울 수 없었다. 배가 고프다고 엄마를 깨우면, 밥 대신 욕을 얻어먹었다.
 
방은 어두웠다. 엄마는 울다 자다를 반복했다. 이틀에 한 번 엄마가 일어나 돈 만 원을 던져줬다. 돈을 집어 들고, 집 앞 가게에 가서 담배 한 갑과 라면을 사 왔다.
 
이모에게 전화를 받은 엄마가 갑자기 달라졌다. 밤마다 화장을 짙게 하고 밖으로 나갔다. 알록달록 이상한 옷들이 늘어갔다. 엄마가 먹고살려고 술집에 나가 일을 시작한 것이다.
 
밤마다 혼자 자는 게 무서웠지만, 엄마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동이 틀 때쯤 집에 들어오는 엄마는 딸보다 변기를 먼저 찾았다. 남편 대신 변기를 끌어안고 구토와 울음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
아침에 잠깐 마주하는 엄마는 칼처럼 예민했다. 작은 것 하나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말투, 눈빛에서 세상을 향한 분노가 새어 나왔다.
 
“비누 어디 갔어?”
 
엄마가 물었다.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그녀가 말했다.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우리 집에 둘 밖에 없는데.”
 
“나 정말 몰라.”
 
“이게 어디서 거짓말이야.”
 
엄마가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그날은 비누가 없어졌다. 전날은 벽 시계가 멈췄다. 택배가 늦은 날도, 가스비가 청구된 날도 그녀는 뺨을 맞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는 엄마의 쓰레기통이었다. 엄마는 구깃구깃한 감정을 딸에게 던져버렸다.
 
“어디서 거짓말을 하고 난리야. 어린 게 제 아빠를 빼다 박아가지고. 생긴 것도 모자라서 거짓말하는 것도 닮았어. 한 번 만 더 거짓말하면 그때는 가만히 안 둬, 알겠어!”
 
엄마는 저녁 10시가 되면 어김없이 집을 나갔다. 짙은 향수 냄새를 단칸방에 채워 넣고 밖에서 문을 잠갔다.
 
그녀는 저녁 대신 향수를 먹었다. 엄마가 없는 저녁마다 창문을 열었다. 바닥에 누우면 한 뺨 창밖으로 밤 하늘이 보였다. 외로웠다. 울다 잠든 날이 별처럼 많았다.
 
#
 
엄마가 없는 날, 아빠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뇌의 저편에서 아빠라는 단어가 번쩍했다. 의식에서 지워졌던 기억이 7년 만에 되살아났다. 차분하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여보세요?”
 
그녀가 말했다.
 
“잘 지내지? 아빠야.”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엄마, 지금 옆에 있니? 있으면 바꿔줄래.”
 
“….”
 
엄마는 집에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볼래. 아빠가 몇 년 만에 전화했잖아. 그동안 힘들었지. 아빠가 미안하다. 지금 최선을 다해 방법을 찾고 있으니까 아빠가 곧 데리러 갈게.”
 
“….”
 
이제 그럴 필요 없다.
 
“너 지금 우니?”
 
“….”
 
울지 않는다.
 
“그래, 그럼 알았다. 아빠가 또 연락할게.”
 
뚜 –
 
변한 건 없었다. 그녀에게는 아빠의 자리는 없었다.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다. 엄마는 엄마의 인생을 되찾았다.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고 말하면 엄마의 인생은 다시 멈춘다. 엄마를 위한 배려였다.
 
“엄마, 전화번호 바꿔줘.”
 
“왜?”
 
“옛날에 빚 갚으라 했던 사람들이 낮에 전화했어. 이러다 우리 집까지 알아내면 어떻게 해. 나 무서워.”
 
엄마는 화장을 하다 멈칫했다. 파우더를 든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를 바라보며,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알겠어. 엄마가 내일 전화번호 바꿀게.”
 
#
 
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녀는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밤늦게 집에 들어온 그녀가, 현관에서 남자 신발을 목격했다. 빨간색 뾰족구두와 밤색 구두가 뒤엉켜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엄마는 태연한 듯 행동했다. 이른 새벽, 밤색 구두의 사내는 사라지고 없었다. 엄마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엄마의 대본대로 행동했다.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엄마의 인생을 살고, 그녀는 그녀의 인생을 살았다.
 
그 남자가 집에 오는 날이 늘어갔다. 엄마가 집에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그녀의 집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집에 라면 있냐?”
 
“없어요.”
 
“그럼 가서 사 올래? 여기 돈.”
 
“아저씨가 직접 사다 드세요.”
 
“버릇없다, 진짜.”
 
“엄마도 없는데 왜 우리 집에 계세요. 불편해요, 저.”
 
“라면 한 그릇만 끓여먹고 나갈 거야. 제발 그런 눈빛 좀 하지 마라.”
 
그 말이 전해진 것 같았다. 엄마는 그날 이후 그녀를 보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주말 저녁, 엄마는 그녀를 불러 앉혔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깊이 빨았다. 그녀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엄마는 그 아저씨 좋아해. 너만 괜찮으면 같이 살자.”
 
그녀는 대답 대신 기침을 했다.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얼굴이 빨개지도록 기침을 했다. 연기에 질식한 것인지, 엄마가 내뿜은 말에 질식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반응은 중요하지 않았다. 엄마는 미리 외워둔 자기 대사를 계속했다.
 
“사실 이 집 그 사람 거야. 우리 판자촌 벗어나게 해주고, 너 학교 다니게 해준 사람이야. 그 교복도 그 사람이 해 준 거고. 같이 살기는 힘들겠지만, 적응 잘 해봐. 어차피 학교에서 밤늦게 오니까 잠깐만 참으면 되잖아.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하면 독립해. 엄마는 능력 없어.”
 
“….”
 
처음으로 엄마에게 욕을 했다. 입에 담을 수 없는 쌍욕을 무한 반복했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폭탄은 속에서 터졌다. 충격에 입술이 씰룩였지만, 엄마는 몰랐다. 이를 악물고 간신히 버텼다.
 
#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독립했다. 대학에 가서 고시원에서 살았다. 바로 취업해서 독하게 살았다. 월급을 아끼고 아껴 썼다. 오피스텔 보증금을 마련하고 고시원을 탈출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빠듯한 삶을 벗어날 수 없었다. 월급의 절반을 엄마에게 보내도 엄마는 모자라고 난리였다. 소소한 일이라도 하면서 용돈이라도 벌어보라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무리하게 몸을 쓰면 병원비로 나가는 돈이 더 많다고 말했다. 쉬면서 조용히 사는 게 돈을 아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엄마였다.
 
#
 
“딸, 엄마가….”
 
엄마가 돈을 보내달라고 하기 전에 항상 하는 말이다.
 
“지난번에 ‘미니’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왔는데, 치료가 길어질 것 같다고 해서….”
 
“엄마, 지금 개새끼한테 들어갈 돈 없어. 나도 간신히 살고 있는데 무슨 개한테 돈을 써. 안락사 시켜.”
 
“너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 그러면 못 써.”
 
“내가 여유가 없어서 그래. 아무리 힘들어도 매달 보내주는 용돈 안에서 살아야 해. 매번 이런 식으로 하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그래서, 말하잖아. 이번 한 번 만이라고.”
 
“그 말이 벌써 몇 번째야, 엄마.”
 
“무슨 몇 번째니? 오늘 처음 말한 건데.”
 
“처음 아니야. 개 갖다 버려. 끊을게, 엄마.”
 
엄마에게 전화가 온 날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옥상에 올라가 잠시 머리를 식혔다. 미니라는 개는 늙어간다. 앞이 보이지 않아 똥오줌을 못 가리고, 기운이 없어 산책도 못한다.
 
엄마는 미니와 자신을 구분하지 못했다. 엄마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듯, 하루 종일 거실에 앉아 안쓰럽게 개를 쳐다보고 쓰다듬었다.
 
결국, 엄마에게 돈을 보냈다. 그녀는 엄마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다. 감정과 상관없었다. 반사 신경처럼 그녀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아빠가 떠난 날, 엄마의 영혼도 떠났다. 술집에 나가 웃음을 팔아 번 돈으로 그녀를 키운 엄마였다. 그런 엄마라도 살아있어 감사했다.
 
#
 
잠이 오지 않았다. 남자친구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우리 여기까지야. 이제 그만하자. 너도 나도 할 만큼 했어.”
 
그녀는 혼잣말을 반복했다.
 
‘아니,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밤마다 고통이 찾아왔다. 울다 지쳐 잠드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새벽에 잠에서 깨면 식은 땀으로 온몸이 젖어 있었다. 백 일이 지나도, 일 년이 지나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
       
매일 저녁 퇴근길, 그녀는 편의점에 들렀다. 노란색 바나나 우유를 샀다. 다 마신 병을 버리지 않았다. 집에 가져와 책상에 내려놓았다. 똑같이 생긴 플라스틱병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가지런히 놓였다. 촘촘하게 일자로 놓인 플라스틱병이 책상을 가득 매웠다.
 
플라스틱병이 갈수록 늘어갔다. 책상을 가득 메운 플라스틱병은 방바닥으로 이어졌고,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집을 채웠다.
 
#
“아이고, 미친년아. 너 실성한 거 아니냐.”
 
엄마가 찾아왔다. 주말 내내 전화를 받지 않으니까, 걱정돼서 찾아온 것이다. 엄마의 잔소리에 그녀가 돌아누웠다. 엄마는 쉬지 않고 말했다.
 
“아니, 무슨 바나나랑 원수 맺었냐. 먹으면 치워야지. 왜 쓰레기를 방에 쌓아두고 있어? 이게 도대체 뭔 일이야.”
 
“엄마, 그만 나가.”
 
엄마는 듣지 못했다. 쓰레기봉투에 병을 담느라 정신이 없다.
 
“엄마, 나가라고.” 그녀가 다시 말했다.
 
엄마는 여전히 듣지 못했다. 그녀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엄마, 내 말 안 들려? 나가라고!”
 
깜짝 놀란 엄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플라스틱 통이 여기저기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녀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엄마, 나가라는 말 안 들려. 나가서 두 번 다시는 오지 마. 내 앞에 나타나지도 말고, 나한테 연락하지도 마. 꼴도 보기 싫으니까.”
 
찰싹.
 
그녀의 얼굴이 후끈거렸다. 엄마가 노려보며 말했다.
 
“별 미친년을 다 보겠네. 알겠어, 이년아. 다시는 안 오면 되잖아.”
 
#   
 
“웃기죠? 엄마는 그날 이후로 정말 연락을 안 해요. 내가 딸 노릇 한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결국 이렇게 됐네요. 남자친구에게 버림받고, 엄마에게 버림받고….
 
나같이 비참한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모든 걸 잃은 것 같아요. 밤마다 생각해요. 이대로 잠들어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녀가 비참해졌다는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녀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 했다. 어쩌면 그녀는 오래전에 버려졌다. 아빠의 말로 버려졌고, 엄마의 말로 버려졌고, 남자친구의 말로 버려졌다.
 
“애까지 데리고 어떻게 도망을 치라고. 비켜!”
“고등학교 졸업하면 독립해. 엄마는 능력 없어.”
“우리 여기까지야. 이제 그만하자.”
 
그들의 말은 차갑고 무서웠다.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한 채, 한 사람의 내면을 짓밟아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길 수는 없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다. 저마다 자신만의 이유가 있을 것이고,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면서, 이미 스스로를 용서했을 것이다.
 
그녀의 이해와 용서는 그들에게 전혀 필요하지 않다. 그들은 각자 혼자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문득문득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아쉬움이 남겠지만, 저마다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면서 각자의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인생은 그들의 것이 아니다. 그녀의 인생은 그녀의 것이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비참하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은 그녀가 그녀 스스로를 버리는 것이다. 그녀는 아직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타버린 잿더미 속에 작은 희망의 불씨가 남았다.
 
그녀는 어렴풋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돌봤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버릴 때마다, 그녀는 스스로를 다시 주웠다. 버려진 자신을 줍고 닦아서 간직했다.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죽고 싶지만, 살고 싶다. 살고 싶은 본능이 그녀를 내 앞으로 데려온 것이다. 그녀는 알고 있다. 언젠가 그녀는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일어설 것이다.
 
그녀가 고통받는 이유는 버림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고통받는 이유는 그녀가 미지의 세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해결하지 못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언제 어떻게 고통이 해결될 것인지 알지 못해 두려운 것이다.
 
고통은 영원히 미지의 세계다.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고통을 피할 수 없다면, 고통을 다루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고통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이 고통을 견딜 수 있다. 현재의 고통은 현재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다. 현재의 고통은 한 사람이 일생 동안 추구할 궁극의 의미와 맞닿아 있다.
 
버림받은 기억으로 고통받는 사람은 버림받지 않기 위해 값비싼 비용을 치른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사랑하고 희생한다. 자기 인생은 어찌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버림받을지언정,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고통이 찾아오면 깨닫는다. 자신 안의 결핍을 발견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 자신을 희생시켜 관계를 유지하는 자신을 직면한다.
 
같은 패턴으로 고통이 반복되면, 결국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절망과 좌절의 터널을 지나면서, 자신을 지키고 보호할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고통은 반복된다. 고통의 터널은 하나가 아니다. 쉬지 않고 계속 나타난다. 터널을 지날 때, 라이트는 자동으로 켜지지 않는다. 수동이다. 때에 맞춰 라이트를 켜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도로 위에 터널이 없기를 바라면 안 된다. 어두운 터널을 만나면, 침착하게 라이트를 켜라. 그러면, 당신은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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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남자친구를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아요. 자기가 힘들다고 여자를 버린 사람이잖아요. 결혼했어도 행복하지 않았을 거예요. 시어머니를 제가 어떻게 감당했겠어요. 게다가 그 사람은 마마보이처럼 행동했는데요.
 
정확히 말하면, 그 남자가 그리운 게 아니에요. 사랑받았던 감정이 그리운 거죠. 남자친구의 뒷바라지를 해서라도 사랑받고 싶었던 제 자신이 후회스러운 거죠. 사랑받으려고 너무나 비싼 값을 치렀어요.
 
언젠가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도 있겠죠. 나이도 있으니, 평생 혼자 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서두르지 않으려고 해요. 누군가를 만나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지금 당장은 괜찮아진 것 같아도,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지도 모르고요. 지금은 그냥 제 자신을 조금 더 알고 싶어요.”
 
그녀가 라이트를 켰다. 터널 세 개를 지나는 동안 라이트를 켜는 방법을 깨달은 것이다. 다음 터널에서는 그녀가 때에 맞춰 라이트를 켤 수 있을 것이다.
 
라이트를 켜고 끄는 일은 번거롭다. 라이트를 제때 못 켰다고 우는 날 있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언젠가 하늘의 찬란한 빛이 그녀의 앞길을 비춰줄 것이다. 눈부신 그날이 속히 오기를 바랄 뿐이다.

당신은 그 소년을 알고 있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는데,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네요. 돈, 가정, 친구, 다 잃었어요….”  
 
E는 서른아홉 살 여자다. 6년의 결혼 생활을 끝내고 혼자된 지 3년 지났다. 남편은 교회 목사님 소개로 만났다. 목사님은 남편이 진지하고 성실한 남자라고 하셨다. 첫눈에 호감이 느껴지는 남자는 아니었지만, 목사님이 인정한 사람이니 한두 번 만나보자고 생각했다. 따뜻한 성품이 좋았다. 8개월 만나고, 결혼했다. 
 
신혼집은 다세대 주택에서 시작했다. 4층 건물 맨 꼭대기 주인세대에 시어머니가 살고, 그녀와 남편은 2층에서 살았다. 결혼 일주일 만에 남편과 다퉜다. 그가 급여를 아내에게 갖다 주지 않았다. 생활비는 여자가 관리해야 한다며 남편을 설득했다. 그러자 그는 “그런 게 어디 있냐? 돈 버는 사람이 관리하자”라고 말했다. 아내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물러섰다. 
 
두 달 뒤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편은 결혼 전에 대출을 받아 주식에 돈을 투자했다가 2억 정도 빚을 지고 있었다. 그래서 급여가 모두 대출금 상환으로 쓰였다. 기약 없는 기간 동안 수입 없이 살아야 했다. 
 
시어머니는 “알고 있었고, 부부가 함께 짊어져야 할 짐이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분노했다. 남편과 시어머니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했다. 
 
이혼을 생각했지만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임신 4개월이었다. 남편은 집안일을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저녁마다 침대에 누워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속이 터졌다. 남편에게 화를 내고 잔소리를 했다. 그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아내 얼굴에 베개를 던지며 싸늘하게 말했다. 
 
“입 닥쳐.” 
 
이후로 던지는 물건이 달라졌다. 베개에서 시계로, 시계에서 컵으로. 컵이 깨지던 날,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남편은 울고 있는 그녀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아내는 휴대폰 게임을 그만하라고 말했다. 남편은 무시했다. 남편이 게임으로 100만 원 넘는 돈을 썼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녀는 그동안 쌓였던 불만을 터트렸다. 
 
남편이 소리 지르며 욕을 했다. 아내는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밤새도록 말다툼을 했다. 신경이 예민해졌다. 배가 아팠다. 두려움에 싸인 아내는 의식을 잃었다. 아기는 유산되었다. 시어머니는 주변 사람들에게 며느리가 몸을 돌보지 않고 무리해서  유산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를 불러 말했다. 
 
“내가 그 놈을 혼내줄 테니까, 이번 한 번만 눈 감고 넘어가자.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야.” 
 
그러고 5만원 권 한 뭉치를 그녀의 손에 쥐어줬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돈을 한 장씩 찢기 시작했다. 눈물이 흘렀다. 돈을 갈기갈기 다 찢을 때까지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돈도 눈물도 말없이 땅에 떨어졌다. 
 
그녀는 이혼했다. 
 
어린 시절, 그녀는 아버지에게 맞고 자랐다. 술 취한 아버지는 매일 엄마를 때렸다. 참다못한 엄마는 집을 나갔다. 혼자 남겨진 그녀는 아버지의 주정과 매질을 당해야 했다. 
 
몇 달 뒤, 엄마가 집에 돌아왔다. 아빠가 없는 틈에 짐을 가지러 온 것이었다.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다. 엄마에게 매달리다시피 하여 같이 문을 나서는데 처음 보는 아저씨가 서 있었다. 엄마는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그 아저씨와 가버렸다. 
 
4년이 지났다. 견디다 못해 엄마를 찾아갔다. 그리고 예전에 만났던 아저씨를 “아빠”라고 부르며 살았다. 너무나 그리웠던 엄마였다. 하지만 헤어져 산 시간이 길어서 인지 아니면 상처가 많아서 인지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엄마는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뭘 물어봐도 짧게 대답했다. 그녀에게 소리 없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 때문에 난처해졌어. 불편해졌다고.” 
 
아저씨 표정도 달라졌다. 그 집에 오래 살 수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나왔다. 
 
“제 안에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있어요. 외로움에 미쳐버릴 것 같았어요. 매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세요? 남편에게 전화해서 ‘욕하지 않고, 돈 관리 내가 하고, 게임 안 하고, 빚 갚기로 약속하면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어’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언젠가 전화를 걸지도 몰라요. 남편은 바뀌지 않을 거예요. 제가 너무 외로워서 그래요.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까.” 
 
외로움이 찾아오면, 그녀는 잠을 잔다. 그러면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밤과 낮이 바뀐 채 3년이 지났다. 깨어있는 시간은 TV를 본다. 외로움을 느끼고 싶지 않아 선택한 방법이다. 자신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과 전쟁을 치르고 있다. 조용하지만 치열하다. 그녀는 승리한 적이 없다. 
 
외로움은 갑자기 찾아와서 그녀를 휘젓는다. TV보다가 눈물이 흐르고, 잠에서 깨면 슬픔이 밀려온다. 휴대폰에 전남편의 번호를 누르고, 통화 버튼을 바라본다. 번호를 다시 지우고 입력하는 일을 반복한다. 휴대폰을 소파에 던지고, 수면제를 먹고 잠든다.    
 
***
 
외로움은 견디기 힘든 감정이다. 외로움이 속삭이는 말은 무섭다. 
 
‘넌 혼자야. 아무도 없어.’ 
 
거짓말이지만 진실처럼 들린다. 거짓을 거부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지만 외로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노력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거짓이 진실이 된다. 전기고문 의자에 꽁꽁 묶인 채 저항하지 않고 고통을 받아들인다. 외로움은 사람을 서서히 파괴한다.    
 
사람은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외로움과 싸워 이긴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누구나 외롭다. 외로움은 그림자처럼 항상 따라다닌다. 그것과 싸우면 질 것이 뻔하다. 의미 없는 싸움이다. 외로움이 삶을 파괴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택해야 한다. 
 
외로움과 싸우지 않고 
외로움을 돌보는 것이다. 
 
외로움을 돌보려면 그것에 대해 알아야 한다. 외로움을 “꼬마”라고 부르겠다. 언제 꼬마가 활동하는지 알아야 한다. 특정한 상황이나 분위기나 시기에 꼬마가 활동한다면 어디서 나타는지 따라가 본다. 쥐구멍에 갇힌 쥐를 찾는 것처럼 자세히 살핀다. 
 
그다음에 꼬마가 활동하기 시작하면 자신에게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확인한다. 꼬마가 나타나면 자신이 하는 행동을 관찰한다. 반응은 다양하다. 자는 사람, 먹는 사람, 우는 사람, 화내는 사람. 패턴을 발견할 때까지 유심히 관찰한다. 
 
외로움에 이름을 붙인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으로부터 감정을 분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감정을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착각하는 것이다. 감정은 감정일 뿐이지 자신이 아니다. 감정과 자신을 분리하지 않으면 감정을 변화시킬 수 없다. 
 
외로움이 느껴지면 절망하지 말고, 차분하게 말한다. 
 
“또 시작이군.” 
 
만약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난다. 감정이 분리된 사람은 감정을 돌볼 수 있다. 
 
상상해 보자. 당신은 상담자다. 꼬마는 상담실에 찾아온 내담자다. 꼬마는 통제불능이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 사랑받지 못했다. 관심 받고 싶어 과도한 행동을 한다. 작은 말 한 마디에 상처받고, 우울해진다. 다들 기분 좋아서 웃고 있는데, 뭐 하나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물건을 집어던지고 난리다. 설득하고 달래도 소용없다. 
 
꼬마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미안하지만 변화되지 않는다. 꼬마는 피터팬처럼 영원히 나이 먹지 않는다. 철들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그 꼬마를 돌보는 게 의미가 있을까? 물론이다. 꼬마를 대하는 자기 자신이 변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는 꼬마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대하는 자신에게 일어난다. 
 
감정을 바꿀 수 없지만
감정에 대한 반응을 바꿀 수 있다. 
 
나는 내 안에 있는 꼬마를 “소년”이라고 부른다. 소년은 다섯 살 정도 된다. 발가벗겨졌다. 온몸이 멍 자국이다. 파랗고 빨갛다. 파란 자국은 생긴 지 오랜 된 것이고, 빨간 자국은 방금 생긴 것이다. 머리는 지저분하고, 얼굴은 눈물자국, 땟자국으로 얼룩졌다. 
 
소년은 불안해 보인다. 시선을 어디다 둘지 몰라 눈알을 이리저리 굴린다. 어깨는 움츠러들어 있고, 두 손은 덜덜 떨린다. 아무리 설득하고 달래고 돌봐주고 씻겨줘도 항상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있다. 소년은 내가 원치 않을 때 갑자기 나타나 말을 건다. 
 
‘못 하겠어…. 두려워…. 안 하면 안 돼? 그만하자. 뭘 위해서 그래.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사람들이 알아줄 거라고 생각해? 의미 없는 일이야. 소용없는 일이라고. 현실은 달라. 너는 실패할 거야. 망할 거라고. 멈춰. 이대로 있어. 하지 마. 그만해!’
 
나는 소년과 오랫동안 함께 지냈다. 익숙할 법도 한데, 쉽지가 않다. 그가 입을 열면 움찔한다. 때로는 깊은 절망에 빠진다. 마음을 가다듬고 말한다. 
 
‘알아. 네가 얼마나 두려운지…. 나 만나서 고생이 많구나. 그래도 우리 가야 해. 무서워도 같이 가자. 내가 도와줄게. 힘들어도 조금만 참자.’
 
나는 그 소년을 따뜻하게 안아준다. 
 
나는 당신 마음 속 소년이 누군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그 소년을 알고 있다. 
 
그녀의 마음 속에 소녀가 있다. 길가에 버려진 소녀. 지나가는 사람은 많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 갖지 않는다. 때리는 아빠가 무서워 집을 도망쳐 나온 소녀. 엄마를 찾아갔지만 커다란 대문은 잠겨있다. 소녀는 발걸음을 돌려 길을 걷는다. 길에서 날리는 먼지가 머리에 뽀얗게 앉는다. 
 
두 눈에 눈곱이 구슬처럼 박혀있고, 눈물과 콧물자국이 얼굴에 굽이굽이 골목을 냈다. 비가 와서 옷이 젖고, 해가 떠서 다시 마르고. 옷은 종이처럼 너덜거린다. 신발은 닳아서 뒤꿈치가 땅에 닿는다. 소녀는 갈 곳이 없다. 
 
걷다 지친 소녀는 길가에 앉는다. 지나가는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한 사람이 다가왔다. 손가락은 두툼하고 굳은살이 박였다. 소매 밖으로 팔을 타고 오르는 용의 꼬리가 보인다. 짧은 머리카락은 송곳처럼 삐쭉 서있다. 껌을 씹으면서 소녀에게 말한다. 
 
“나랑 가자. 좋은 데 알려줄게.” 
 
소녀는 무섭다. 가면 안 된다. 그러나 소녀는 남자를 따라간다. 길가에 버려진 것보다 나으니까. 누군가 뒤에서 소리친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남자에게서 소녀를 빼앗는다. 남자는 놀란다. 눈치를 보다가 멀리 도망쳐 버린다. 그녀가 소녀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내가 널 돌봐줄 거야. 넌 버려진 아이가 아니야. 그렇게 아무나 따라다녀서는 안 돼. 사랑을 구걸해서는 안 된다고. 이제 외롭지 않을 거야. 같이 있을 거니까.” 
 
소녀를 찾아 나선 사람은 바로 그녀, 
그녀 자신이었다. 
 
외로움은 그녀 자신이 아니다. 외로움은 그녀 감정이다. 그녀는 소녀를 돌보기 시작했다. 그녀가 한 눈 판 사이에 소녀가 사라질지 모른다. 누군가 내민 손을 잡고 어디론가 가버릴 것이다. 소녀는 아무나 따라간다. 소녀를 해칠지 모르는 위험한 사람이라도. 소녀와 함께 하는 삶이 익숙해지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소녀는 변하지 않으니까. 
 
상처와 싸우는 사람은 고통 받지만,    
상처를 돌보는 사람은 치유된다.

엄마, 미안해

“모든 것이 제 잘못처럼 느껴져요. 사람들이 직접 말하지 않지만 느낄 수 있어요.” 
 
B가 세 번째 직장을 그만둔 직후였다. 마케팅 회사를 다녔던 그녀는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에 선배와 참여했다. 발표를 맡은  선배의 자료 파일 화면을 넘겨주기로 했다. 그런데 프레젠테이션이 중간 정도 진행되었을 쯤, 동영상 파일이 열리지 않았다. 
 
B는 식은땀을 흘렸다. 선배는 당황하면서도 노련하게 상황에 대처했다. 그가 시간을 끌 동안 동영상이 다시 플레이 되었다. 청중은 실수를 알아채지 못했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 선배는 그녀에게 수고했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3일 후, 선배로부터 다른 업체가 선정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선배가 말했다. 
 
“실망하지 마. 경쟁이 원래 치열해. 이번 주에도 프레젠테이션 두 개 더 있으니까 준비 잘하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회사를 그만뒀다. 세 번째 회사를 그만둔 그녀가 다시 취업하는 건 쉽지 않았다. 면접을 볼 때마다 똑같은 질문을 받았다. 
 
“우리 회사가 네 번째네요. 지난 번 회사는 7개월 동안 다니셨네요. 나머지 두 회사는 1년 정도고,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적성에 맞지 않아 회사를 옮겼다고 말했지만 면접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3개월이 지났다. 그녀는 취업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프리랜서로 살아갈 준비를 했다. 
 
“어릴 때 만화 작가가 되고 싶었거든요. 웹툰을 그리고 있어요. 지금은 시작 단계니까 열심히 노력해야죠.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요. 모아둔 돈이 있으니까 잠깐은 버틸 수 있어요.” 
 
그녀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느낌이 싫었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짓눌리는 것처럼 답답했다. 밀폐된 공간에 머물 수 없어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가야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런 날이면 밤잠을 이룰 수가 없다. 머릿속에서 그날 그 장면이 반복적으로 생각났다. 
 
‘그 사람은 왜 내게 그런 말을 한 걸까? 무슨 뜻일까? 나는 왜 그렇게 대답을 했을까?’
 
머릿속 생각을 멈추기 위해 TV를 보고, 샤워를 해도 소용없었다. 잠시 사라졌던 생각은 금방 다시 찾아왔다. 해 뜨는 게 두려웠다. 암막 커튼으로 햇살을 가리고 알람 소리를 의지해 일어났다. 수면부족으로 몸이 무거워졌다.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가는 횟수가 늘어났다. 한 달에 한 번에서 일주일에 한 번으로, 일주일에 한 번에서 매일 한 번으로. 
 
12년 전 어느 날, 그녀는 엄마에게 짜증을 냈다. 고등학교 입학하고 야간자율학습에 적응하지 못했다. 집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여러 번 말했다. 
 
“시간이 조금 필요하지 않겠니? 이번 여름 방학 때까지만 잘 버텨봐. 그래도 힘들면, 엄마가 선생님께 말해줄게.” 
 
다음 날,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저녁 먹고 책상 앞에 앉은 그녀는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선생님께 배가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엄마에게 전화했다. 가방을 챙겨 교실 밖으로 나가 엄마를 기다렸다. 30분이 지나도 엄마가 오지 않았다. 다시 30분이 흘렀다. 벨소리가 들렸다.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왜 안 와? 빨리 와.” 
 
전화기 너머로 아빠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엄마가 운전했던 차는 음주운전 차량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날 전화하지 않았다면…. 그날 그냥 교실에 있었다면…. 엄마는 죽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울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끊었던 술을 다시 입에 대면서 간경화가 진행되고, 아버지가 성급하게 재혼해서 새엄마와 관계가 엉망이 된 것. 모두 자기 탓이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되면 혀가 꼬부라져 하는 말이 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네가 그런 말 할 때마다 아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그날 내가 갔어야 했어. 엄마가 아니라 아빠가 운전을 했어야 했다고…. 아빠 잘못이야….” 
 
그녀는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아니에요. 아빠, 제 잘못이에요.’ 
 
그녀 아버지, 친척, 친구, 모두가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비난 받을 사람이 있다면 그날 술을 먹고 운전한 그 자식이야. 그 자식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그녀의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애써 위로하려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녀는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자신을 숨겼다. 
 
***
 
사람이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하면, 그 사건 이전을 기억하지 못할 수 있다. 충격과 함께 기억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12년 전, 사고가 일어난 이후 그녀는 엄마를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의 창고 후미진 곳에 엄마에 대한 기억을 가두고 문을 걸어 잠갔다. 
 
엄마를 기억하면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의도적으로 기억하지 않는 편을 택했다. 엄마가 그리워지면, 그녀는 사건이 일어난 그날 밤 고통스런 순간으로 되돌아간다. 내면에 구간반복 기능이 켜진다. 고통스러운 장면을 무한 반복한다. 누군가 구간반복 기능을 꺼준다면, 엄마에 대한 소중한 기억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 기능을 끌 수 있는 사람은 그녀 자신뿐이다.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다. 엄마에 대한 기억을 되찾으려면, 걸어 잠근 문을 열어야 한다. 고통스런 기억을 꺼내는 것이다. 그곳에 자유가 있다.  
 
“제가 다섯 살쯤인 것 같아요. 엄마가 동화책을 읽어주는 장면이 생각나요. 엄마 무릎에 앉으면 엄마는 두 팔을 둥그런 원으로 만들어 그 안에 저를 담았죠. 두 손으로 책을 들고 있었고요. 엄마가 만든 둥그런 원이 좋았어요. 아늑하고….” 
 
다섯 살 꼬마로 되돌아간 그녀는 엄마 품에 안겨 말했다. 
 
“엄마, 미안해.” 
 
“뭐가?” 엄마가 말했다. 
 
“내가 그날 전화만 하지 않았어도…. 나 때문에 많이 아팠지?” 
 
“아니야, 엄마가 미안해. 같이 있어주지 못해서…. 우리 딸 엄마 없이 잘 할 수 있지?”
 
“응….”
 
현실의 그녀는 오열했다. 
 
사건을 바꿀 수는 없지만,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꿀 수 있다. 그날의 기억을 지울 수 없지만, 그날의 사건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날 그 사건은 그녀 잘못이 아니다. 아버지 잘못 또한 아니다.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고, 아무도 대비할 수 없었다. 그 일이 일어났고, 그 일은 막을 수 없었다. 이것이 진실이다. 
 
진실을 받아드리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설득으로 외부에서 주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내면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일이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두려움과 마주할 용기이다. 현실에서 그녀는 두려운 상황과 마주할 것이다. 사랑, 일,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그녀의 구간반복 기능이 켜진다. 
 
“모든 것이 다 내 잘못이야.” 
 
그때마다, 그녀는 리모컨 버튼을 누르듯, 자기 비난의 목소리를 꺼야 한다.  
 
“전부 내 잘못은 아니지. 어쩔 수 없는 일도 있잖아.”   
 
사람마다 자기 비난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하고 자신에게는 무자비한 목소리. 우리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산다. 목소리를 만드는 것도 자신이고, 고통받는 것도 자신이다. 반대로, 목소리를 거부하는 것도 자신이다. 왜 그 목소리가 들리는지 아무도 모른다. 선택만이 남았다. 듣느냐, 마느냐.

내 상처가 뭔지 알아요

나는 내 안의 상처가 뭔지 알아요. 오랫동안 고통받았거든요. 하지만, 마주하고 싶지 않아요. 두려워서 엄두가 안 나요. 회피하고 있어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죄송하지만, 상처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말이 살짝 의심스럽습니다. 회피하고 있는 모습 역시 상처의 일부가 아닌지 고민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내 문제는 이거다. 나는 지금 회피하고 있다.”라는 말에는 내가 문제를 알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회피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문제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이 커질 거예요. 실체를 보지 못하면 심리적으로 훨씬 두렵지요. 검은 그림자가 두려워 도망치면, 실체를 볼 수 없습니다. 직접 가서 확인해봐야 곰인형인지, 실제 곰인지 알 수 있어요. 
 
빙산의 일각이란 말이 있어요. 수면 위에 드러난 빙산은 전체 빙산의 10%입니다. 눈에 보이는 빙산이 아무리 선명해 보여도, 빙산의 뿌리는 수면 아래 깊이 가라앉아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빙산의 일부를 보며, “저게 빙산 전체다”,라고 말한다면 오산이에요. 수면에 드러난 빙산을 피했다고 안심하다, 빙산 뿌리에 걸려 배가 가라앉습니다. 피한 건 피한 게 아닙니다. 
 
상처를 안다고 생각하지 말고, 모른다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몰라서 두려운 겁니다. 지금부터라도 관점을 바꿔서 “나는 아직 나를 잘 모른다. 몰라서 두려운 거다.”라고 생각하면, 자신을 돌보기도 수월하고, 주님께 그런 자신을 데려다주기도 훨씬 편합니다. 나도 모르는 나 자신을 주님께 돌봐달라고 하세요. 주님은 따뜻하게 돌봐주십니다. 

내 목소리 기억나?

“내 목소리 기억나?” 
 
문득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번호였고, 낯선 목소리였다. 
 
“잘 모르겠어요. 누구시죠?” 
 
애써 친절하게 말했다. 혹시라도, 실수할까 걱정스러웠다. 아는 사람의 전화번호를 저장하지 않고 있다가 서운하게 한 일이 종종 있었다. 
 
“나 기억 못 하나 보네. 나 민혁이야. 정민혁.” 
 
그의 이름을 들었을 때, 내 시간은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비디오테이프를 거꾸로 감듯이, 온 세상이 삐리릭 거리며 빠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의 목소리가 나를 십 년 전 어느 날로 잡아당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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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사람이 죽는 걸 직접 본 적 있어? 난 본 적 있거든. 정말 무섭더라. 
 
내 눈앞에서, 아빠가 농약을 먹고 자살을 했어. 며칠 전부터 이상하더라고. 갑자기 나한테 통장이랑 도장을 주면서 비밀번호를 알려줬어. 뭔가를 결심한 눈빛이었고.
 
일요일 아침이었는데, 마당에서 우당탕 소리가 났어. 깜짝 놀라 뛰어나갔지. 문을 열고 보니까, 아빠가 입에 거품을 물고 비틀거리고 있더라고. 
 
아빠와 눈이 마주쳤는데, 아빠의 눈빛을 아직도 못 잊겠어. 아빠가 바닥에 쓰러졌는데, 눈을 감지 않았어. 차갑게 천천히 식어갔지. 그때 나는 얼어붙어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어. 눈물조차 나지 않더라고. 
 
한참 동안 멍하게 서 있다가, 아빠에게 천천히 다가갔어. 내 손으로 아빠의 얼굴을 쓸어내렸어. 아빠의 눈을 감겨주려고. 시뻘겋게 충혈된 아빠의 눈이 무섭기도 했고, 마지막까지 날 바라보던 아빠의 눈이 슬프기도 했고. 아빠의 눈을 감겨주는데, 눈물이 울컥 나더라고.” 
 
통장의 돈은 백만 원 남짓이었다. 중학생 용돈으로는 큰돈이었을지 몰라도, 소년 가장의 생활비로는 물 한 방울처럼 적은 돈이었다. 석 달 만에 통장의 모든 돈이 사라졌다. 
 
시골 마을, 인심은 좋았다. 민혁이가 불쌍하다며, 마을 어른들이 먹을 것을 가져다줬다. 그러나, 그 또한 잠시뿐이었다. 마을 어른들은 민혁이를 오롯이 돌볼 수 없었다. 마을 이장님은 기관을 알아봐 주었다. 
 
마땅한 기관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 옆 마을에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소식이 이장님 귀에 전해졌다. 이장님은 한 마디 예고도 없이, 옆 마을 어른과 민혁이를 찾아왔다. 민혁이는 대충 짐을 싸서, 그 아저씨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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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아, 이번에 조사 나오면, 보일러가 고장 나서 네 집에서 살 수 없다고 말해. 그러면, 보상금 나오거든.”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민혁이는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날 밤, 아저씨 가족은 차를 몰고 시내로 나가 자기들끼리 외식을 했다. 
 
민혁이는 창고처럼 간단히 꾸며진 공간에 우두커니 혼자 남겨졌다. 차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민혁이는 밖으로 나가 인사를 했다. 
 
차 문이 열리자, 숯불에 구워진 고기 냄새가 민혁의 콧구멍을 찔렀다. 차에서 흘러나온 진한 고기 냄새는 매정했다. 민혁의 몸에 밴 라면 냄새를 한 꺼번에 몰아냈다. 
 
자기 이름으로 들어오는 지원금을 아저씨가 가로채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민혁이는 그 집을 나왔다. 석 달 만이었다.
 
갈 곳이 없어진 민혁이는 여기저기 전전했다. 그러다, 시내의 작은 교회 목사님을 만났다. 아주 잠시 동안이라도 머물 곳을 찾은 것이다. 
 
학교에서 만나는 민혁이는 항상 밝았다. 책을 좋아했고, 글을 잘 썼다. 창의적인 방법으로 친구들을 웃겼다. “훈민정음 2”라는 민혁이의 노트가 교실 안을 돌아다녔다. 민혁이는 한글을 조합해서 새로운 글자를 만들었다. 친구들은 그 문자를 발음하기 위해서 애를 썼다. 아무도 “훈민정음 2”에 기록된 문자를 제대로 발음할 수 없었다. 민혁이는 새로운 문자의 창시자였다.  
 
나는 그런 민혁이가 신기해 보였다. 운동장 귀퉁이에 앉아 과자를 까먹으면서 “나중에 뭐가 되고 싶냐?”라고 넌지시 물었다.   
 
민혁이는 돈을 많이 벌어서, 한국에서 제일 큰 서점을 열고 싶다고 했다. 4층으로 지어서, 층마다 다르게 꾸미고, 마치 다른 나라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싶다고 했다. 시골 마을을 벗어나 본 적 없는 민혁이는 세계를 동경하는 듯했다. 나는 꿈마저도 창의적인 민혁이가 부러웠다.  
 
그 후 추운 겨울이 찾아왔고, 우리는 중학교를 졸업했다. 민혁이는 일을 하면서,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산업체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날 이후, 민혁이와의 소식은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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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 그럼 목사 되는 거야?”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민혁이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나를 현재의 시간으로 돌려놓았다.
 
“어쩌다 그렇게 됐네.” 나는 피식 웃었다. 
 
민혁이의 기억이 그 당시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면, 기가 막힐 노릇이었을 것이다. 민혁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내가 겪은 일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사용하는 종교의 언어는 어쩌면 그에게 “훈민정음 2”처럼 낯설게 들렸을지 모른다. 
 
민혁이는 결국 통화하게 된 목적을 말했다. 
 
“야, 사실 내가 조금 이상한 것 같아.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른 것 같거든. 오래전부터 네가 생각나더라. 너를 만나면 왠지 대답을 해줄 것 같아서. 우리 시간 내서 잠시 볼 수 있을까?”
 
물론이었다. 나 역시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민혁이를 보고 싶었다. 민혁이는 자신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고, 나는 바로 그다음 날, 민혁이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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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이가 있던 곳은 도봉산역 근처 구석진 판자촌이었다. 주유소에서 밤낮으로 일하고, 집에 들어가 잠시 눈을 붙이는 삶을 반복하고 있었다. 
 
집이라고 해봐야,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신발을 벗으면 곧바로 방이었는데, 한 사람이 누우면 머리끝과 발끝이 벽에 닿을 지경이었다. 한 사람이 누워서 양쪽으로 팔을 벌릴 수 없을 만큼 폭이 좁았다. 
 
좁은 방에 들어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민혁이가 담배를 꺼내 깊이 한 모금을 들이마셨다. 가슴속에 간직한 비밀을 연기로 건져올리듯, 그는 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토끼 가면이 잊혀지지 않아. 그날 밤 끔찍한 일이 있었거든. 그 사건 이후로, 뭔가 잘못된 것 같아.”
 

 
“아빠가 내 앞에서 농약을 먹고 눈앞에서 죽은 이후로 내가 지낼 곳이 없었어. 사기꾼 같은 놈한테 이용당하다, 시내에 어떤 교회 목사님을 만났지. 
 
목사님이 친절하시더라고. 교회 구석진 곳에 작은 공간이 있었는데, 나보고 거기서 먹고 자고 하라고 했어. 내가 갈 데가 어디 있었겠어. 이래저래 고맙더라고.   
 
일주일이 지났나. 밤에 자고 있는데,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교회에 기도하러 왔나 보다 생각했지. 뒤돌아 누워 자려고 하는데, 방문이 열리는 거야.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어. 
 
덩치 큰 남자가 토끼 가면을 쓰고 있었어. 그 남자가 날 덮치고 강간했어. 지금이라면, 볼펜이라도 들어서 그 사람 목이라도 찔렀을 텐데, 그때는 너무 무섭기만 했어. 뒤돌아 울면서, 끔찍한 시간이 끝나기만 바랐지. 
 
다음 날 아침, 바로 그곳을 나왔어. 그대로 있다가는 똑같은 일을 당할 것 같아서.
 
그런데, 문제가 뭔지 알아? 밤마다 토끼 가면이 떠오른다는 거야. 밤이 되면, 생각나. 불을 끄고 잘 수가 없어. 저기 저 문이 갑자기 열릴 것 같거든. 밤이 되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발자국 소리도 무서워.”
 
내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떨어졌다. 눈물을 숨기려 눈을 비볐다. 민혁이는 방 안에 가득 찬 담배 연기 때문인 줄 알고,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작은 창문조차 달려 있지 않는 방이었다. 손으로 휘휘 저어 연기를 내보내면서, 민혁이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나한테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남자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거야. 지금까지 세 번 정도 여자를 사귀어 봤거든. 당연히, 같이 자 본 적도 있지. 생각보다 별로였어.” 
 
민혁이는 양쪽 팔소매를 어깨까지 걷어올렸다. 그리고, 뒤돌아서서 상의를 벗어서 등짝을 드러냈다.      
 
팔부터 시작된 문신은 어깨를 타고 등판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날카롭게 발톱을 드러낸 용이, 화가 난 듯 코에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여자에게 감정을 못 느끼니까, 엄청나게 불안한 거야. 야, 이거 뭐가 잘못됐다. 그래서, 몸에 그림을 좀 그렸어. 나 남자다, 뭐 이런 거? 조금은 나아질 줄 알았거든. 그게 아니더라고. 문신을 이렇게나 크게 그렸는데도 불안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 도로 한가운데를 미친놈처럼 달렸지. 한참을 뛰다가, 지쳐서 바닥에 주저앉았어. 손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거야. 문신한 자리에서 땀처럼 피가 나더라고. 맨살을 바늘로 찔러대니 그런 거지.”
 
민혁이의 말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지하철 막차가 올 시간이 돼서야, 나는 시계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하철역까지 날 바래다주면서, 민혁이가 말했다. 
 
“어릴 때부터 있잖아. 너를 만나면, 마음이 참 편했어. 오늘도 그래. 해결된 건 없지만, 오늘 하루는 마음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민혁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음 주 이 시간에 다시 올 테니까, 그때는 잠시 동안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민혁이는 기뻐하는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좋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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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이에게 가는 길은 짧지 않았다. 나는 상록수역에서 지하철을 탔고, 도봉산역에서 내렸다. 거의 두 시간 거리였다. 민혁이를 보러 가는 날에는, 하루를 온전히 비워야 했다. 
 
나 역시 계속되는 아르바이트와 대학생활로 몸과 마음이 피곤한 상태였다. 시간과 돈이 빠듯했지만, 민혁이를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민혁이를 만나면, 먼저 짜장면을 사줬다. 그리고, 예수님을 전했다. 그에게는 “훈민정음 2”라고 여겨질 만큼 낯설고 불편한 것이었지만, 나는 우정이라는 강력한 신뢰의 다리 위로 끊임없이 복음을 실어 날랐다. 
 
어느 날, 심각해진 민혁이가 담배를 입에 물고, 성경을 뒤적거렸다. 그의 손이 빨라지면서, 담뱃재가 성경에 떨어졌다.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손으로 대충 털어내면서 말했다. 
 
“여기 나오는 이야기를 어떻게 믿냐? 너는 이게 믿어지냐?” 
 
나는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믿으니까, 믿어보라고 말하지 않겠어?”  
 
민혁이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믿는 거 맞아?”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랐다. 나는 엄마 몰래 사탕을 훔쳐 먹은 아이처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댔다. 
 
당시, 나는 신학교 2학년이었다. 나는 신앙의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열여섯 살에 회심하고, 성경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단순하게 믿었던 나는, 신학교에서 배운 지식으로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면서, 다른 종교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내 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았다. 부끄러운 감정을 숨기려고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내가? 아니야. 내가 못 믿는 걸 어떻게 너한테 말해.” 
 
민혁이는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 담배 연기를 내 얼굴에 내뱉으며 말했다. 
 
“가면 벗어, 자식아.” 
 
그 순간, 나는 민혁이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그를 덮쳤던 토끼 가면과 나를 동일시 하다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멱살을 잡고 앞뒤로 흔들면서, “어디서 감히, 그딴 놈과 나를 비교해? 내가 그딴 놈이랑 같냐?”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민혁이는 방문을 열어젖히고 말했다. 
 
“오늘은 그냥 가라. 다음부터는 다른 이야기하자. 성경 이야기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나는 그날 밤, 무기력하게 민혁이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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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가 지나고, 나는 민혁이를 다시 찾아갔다. 지난번 일을 사과하고 싶었다. 확신 있게 믿게 되면, 다시 찾아올 테니, 당분간 잘 지내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민혁이는 주유소에 없었다. 같이 일하는 직원에게 “민혁이 어디있냐”라고 물었다. 직원은 밀려드는 자동차를 혼자 감당하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몰라요. 며칠째 말도 없이 안 나와요. 일 좀 제대로 하라고 말해주세요. 힘들어 죽겠어요.”
 
불길했다. 민혁이의 집으로 냅다 뛰었다. 도착하자마자, 그의 집 문을 거세게 열었다.
 
문을 열고, 내가 마주한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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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이는 나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애원하듯 내게 말했다.  
 
“여기 전기장판 코드 좀 빨리 뽑아줘.”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민혁이가 시키는 대로, 전기장판 코드를 뽑았다. 코드를 꽂는 곳은, 민혁이 발치에 놓여있었다. 
 
민혁이의 등이 전기장판의 전선 자국을 따라 하얗게 타들어간 상태였다. 등 전체는 열에 타서 시커멓고, 전선이 직접 닿은 곳은 오징어처럼 하얗게 익어버린 것이다.
 
민혁이가 말했다. 
 
“며칠 전에 허리가 너무 아픈 거야.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어. 병원에 갔더니, 허리가 심각하게 망가졌데. 절대로 일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하더라. 불구로 살 수 있다고 하는 말에 충격을 받았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데, 어떻게 쉬겠어. 나가서 일했지. 그다음 날,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픈 거야. 아예 일어나지도 못하겠어. 이틀 동안 꼬박 누워서 아무것도 못 했어. 몸을 일으킬 수도 없었으니까.
 
뜨거운 열로 지지면 조금 나아질까 싶어서 전기장판을 최대로 하고 잠에 들었어. 뭔가 이상해서 눈을 떴는데, 연기가 나는 거야. 내 등이 타고 있는지 누가 알았겠어. 
 
오늘 아침부터 옆으로 몸을 돌리고 누워 있었어. 합선이 된 건지, 전원이 안 꺼지더라고. 너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날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 주유소에서 같이 일하는 직원들도 내가 어디 사는 지 몰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민혁이를 데리고 병원에 갈 수도 없었고, 며칠 동안 먹고살라고 돈을 쥐여줄 수도 없다. 무능했다. 한숨을 내쉬며, “미안하다”라고 말했다. 
 
민혁이는 내 손을 잡아주며, “미안하기는 뭘 미안해. 네가 와줘서 난 고맙기만 한데.”라고 말했다. 
 
나는 민혁이의 손을 꼭 잡으며 물었다. “내가 기도를 한 번 해도 될까? 내가 너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잠시 동안, 묘한 긴장이 흘렀다. 민혁이는 생각 끝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라고 했다. 
 
나는 민혁이를 돌려 눕혔다. 민혁이의 허리에 살며시 손을 얹고 기도를 시작했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민혁이는 반드시 나아야 했다. 낫지 않으면 굶어죽을지도 몰랐다. 내가 의심하는 하나님이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도와주셔야 했다. 하나님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했다.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떼를 쓰며 기도했다. 
 
온몸이 땀에 젖었다. 사력을 다해 기도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몰랐다. 기도 마지막에 비장한 각오로 선언하듯, 말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한다. 일어나, 걸어라.” 
 
민혁이는 고개를 돌려, 날 쳐다보며 물었다. 
 
“이제 일어나면 되는 거야?” 
 
나는 긴장한 채로, 말했다. 
 
“천천히 일어나 봐. 다칠 수도 있으니까.” 
 
민혁이는 고개를 떨구고, 민망한 듯 말했다. 
 
“나 못 일어나겠어. 허리가 너무 아파.” 
 
나는 화를 내듯 말했다. 
 
“그럴 리 없어. 도무지 말이 안 된다고.” 
 
민혁이는 당황했다. 
 
나는 민혁이 허리에 손을 얹고 다시 기도했다. 목이 쉴 정도로 큰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더 이상 기도를 할 수 있는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민혁이가 돌아보며, 물었다. 
 
“언제 끝나? 이제 그만하자. 허리를 누르니까, 더 아파.” 
 
나도 지칠 대로 지쳐버린 상태였다. 푸념하듯 말했다. 
 
“그래, 그만하자.”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민혁이를 외면하는 하나님을 더 이상 믿고 싶지 않았다. 
 
나는 차비를 제외한 모든 돈을 민혁이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굶지 말고, 짜장면이라도 시켜 먹어. 내일모레 또 올게. 그때는 먹을 것 좀 사 올게. 일단, 견뎌. 알겠지?” 
 
나는 민혁이의 집을 나섰다. 밤길이 어두웠다. 새들이 구슬프게 우는소리, 의미 없이 울려 퍼지는 고양이의 울음 소리마저도, 나를 비웃는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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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일찍, 나는 민혁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만큼 걱정스러웠다. 민혁이는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주변이 자동차 소리로 시끄러웠다.
 
민혁이가 말했다. 
 
“나 지금 바쁘니까, 이따 통화하자. 지금 일하고 있어,.” 
 
내가 한 마디 던질 겨를 없었다. 민혁이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전화기를 귀에 댄 채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너 지금 아프잖아. 허리가 아파서 일어나지도 못했잖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나는 민혁이의 전화를 기다릴 수 없었다. 곧바로 지하철에 몸을 싣고, 민혁이에게로 갔다. 가는 내내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주유소에 도착해서, 민혁이를 찾았다. 민혁이는 여느 때처럼,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민혁이는 잠시 한가한 틈을 타서,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잘 들어봐. 정말 신기한 일이 있었어. 어제 너 가고 나서 꿈을 꿨어. 토끼 가면을 쓴 그 자식이 또 꿈에 나오더라고. 예전에는 있잖아, 너무 무서운데, 도망을 못 가고 밤마다 그 짓을 당했었거든. 
 
이번에는, 꿈속에서 내가 도망을 치더라고. 그놈을 밀치고, 반대편으로 힘껏 뛰었어. 그 자식이 엄청난 속도로 뒤따라 오더라. 나도 미친 듯이 뛰었지. 
 
이러다 잡히겠다 하는데, 눈앞에 하얀색 빛이 나타났어. ‘어, 이거 뭐지?’하는데,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두 팔로 날 안아주시는 거야. 짧은 순간이었지만, 정말 따뜻했거든. 
 
깜짝 놀라 잠에서 깼어. 잠에서 깨서 보니까, 내가 상체를 일으키고 있더라고. 벌떡 일어나 앉아 있는 거야. 
 
꿈에서 놀라 깼는데, 꿈을 깨고 나서 더 놀랐어. 허리가 안 아픈 거야. 일어나서 움직여보는데, 정말 하나도 안 아프더라고. 
 
그 하얀 옷을 입은 분이, 네가 말한 하나님인가, 예수님인가 하는 그분이 아닐까?”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민혁이는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다시 일을 하러 갔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민혁이를 기다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쁘게 일을 하는 민혁이를 바라보면서, 복잡한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 후로, 오랫동안 민혁이는 나에게 복음을 말할 기회를 줬다. 민혁이에게 복음을 전하는 동안, 나 자신도 의심을 지나, 확신의 길로 돌아설 수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배려하신 것이 분명했다. 
 
민혁이와 함께 겪은 사건은 내 인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날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민혁이에게 전화가 오지 않았다면, 민혁이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민혁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신학교를 그만두고 다른 길을 갔을지도 모른다. 
 
민혁이를 위해 기도해줄 때, 민혁이가 그 자리에서 즉시 나았다면, 나는 치유에 대해 오해했을 것이다. 
 
마치 내 능력이라도 되는 듯, 교만해졌을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기도하는 동안, 아무런 일도 없게 하셨다. 시간적 간격을 두시고, 내가 없을 때, 민혁이를 고쳐주셨다. 
 
내가 없는 동안,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나는 분명히 안다. 궁극의 치유는 치유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치유를 실행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만약 민혁이의 허리만 나았다면, 나는 반쪽짜리 치유를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민혁이의 정서와 육체를 동시에 치유해주셨다. 토끼 가면으로부터 도망쳐,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하셨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나타난 일회적인 사건일지 모르지만, 민혁이의 삶의 구조를 바꿀 만큼 위력적인 경험이었다. 
 
기억 속에서 토끼 가면이 나타날 때마다, 민혁이는 그로부터 도망칠 것이다. 꼼짝도 못 한 채로, 끔찍한 일을 반복적으로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서 벗어나 따뜻한 하나님의 품에 안기고자 할 것이다. 
 
복음적인 치유는 전인격적이다. 육체와 정서를 아우른다. 심리치료가 따라올 수 없는 지점이다. 하나님께서 상처 입은 한 사람의 인생에 개입하실 때 일어나는 일을, 나는 생생하게 목격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도, 내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유다. 나는 보았고, 들었다. 치유는 나의 믿음에 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것이다. 나의 연약한 믿음, 무지와 무능이 치유의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불가능은 없다.  
 
하나님이 치유의 근원이시다.

나 무섭단 말이야

“저는 방에 숨었고, 남편이 발로 문을 차면서 열라고 했어요. 순간, 저는 기절했고, 이후는 기억나지 않아요.”  
 
G는 결혼 5년 차, 서른여덟 살의 여성이다. 결혼 1년 후부터 남편의 폭력적인 행동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수건, 휴지 같이 깨지지 않는 물건을 던졌다. 물건은 점점 무거운 것으로 바뀌었다. 수저, 탁상시계, 가습기, 선풍기. 
 
처음에는 남편이 소리를 지르면 그녀도 같이 목소리를 높여 싸웠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남편이 무섭다. 남편 목 혈관이 두꺼워지고 눈이 충혈 되면, 그녀는 두려워서 안방으로 뛰어가 숨었다. 문을 잠그고 남편의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남편은 발로 문을 차면서 당장 나오라고 소리치고, 그녀는 문에 등을 기댄 채 울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문이 열릴까 두려워 몸으로 문을 막았다. 덜컹거리는 문이 그녀의 등짝을 후려치는 채찍처럼 느껴졌다. 
 
한번은 남편이 선풍기를 바닥에 내던졌다. 아내는 숲 속에서 뱀을 본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방으로 달려가 숨었다. 문을 닫고 잠그는 순간, 숨을 잘 쉴 수가 없었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쓰려져도 침대에 쓰려야져야 한다고 생각한 그녀는 힘을 다해 침대로 걸어갔다. 침대 모서리 이불을 손으로 쥔 채 방바닥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창가로 쓰며든 햇살이 그녀를 깨웠다. 전날 밤 일이 기억나지 않았다. 차가운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아 울기 시작했다. 그녀가 흘린 눈물이 조용히 침대 위로 떨어졌다. 
 
“제가 꿈꾸던 결혼 생활은 이런 게 아니었어요. 남편은 결혼 전에 저를 아기처럼 조건 없이 사랑해줬어요.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만났던 남자들은 정말 이기적이었어요. 그런데 남편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죠. 
 
남편이 왜 이렇게 변한 걸까요? 제가 속은 걸까요 아니면 제가 그를 그렇게 만든 걸까요? 혼란스러워요. 남편은 화날 때만 무섭고 평소에는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에요. 갑자기 화내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사는 느낌이랄까…. 저는 불안해서 약을 먹기 시작했어요.” 
 
남편이 말했다. 
 
“내가 문을 발로 찼다고? 제발 그렇게 말하지 마. 손으로 문고리를 잡고 열려고 한 거야. 대화하다가 갑자기 방으로 들어가면 나보고 어쩌라고. 대화를 해야 문제가 풀릴 거 아니야. 당신이 내 말을 들어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말하잖아.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당신은 들을 생각을 안 하잖아. 그럴 때마다 내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아. 
 
물건을 던진 건 내 잘못이야. 그러고 나면 얼마나 마음이 힘든 줄 알아. 당신은 내가 매일 물건을 던지는 것처럼 말하는데, 단 두 번뿐이야. 당신의 말은 엄청나게 과장된 거라고. 제발 진실을 말해. 당신 혼자만의 세상에서 벗어나란 말이야!” 
 
아내는 조용히 눈물을 흘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보이지 않는 방에 가두었다.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고, 아내는 그 안에 들어가 숨는 것이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은 매서운 눈으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면 폭발해버릴 듯한 눈빛으로. 
 
아내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사실… 나, 기억이 잘 안나. 당신이 너무 무섭단 말이야. 당신이 소리 지르면 정신이 나가버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소리 지르지 마. 제발 부탁이야….” 
 
남편은 목이 메는 듯, 어렵게 말을 꺼냈다. 
 
“사실, 어젯밤에 결혼식 앨범을 꺼내봤어요. 사진을 보면서 생각했죠. ‘우리 행복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아내에게 더 이상 상처주고 싶지 않아요.” 
 
아내가 여덟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투병 생활은 길었다. 어머니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다. 아홉 살,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녀는 친구들과 정신없이 놀다가 해질녘에 집에 들어왔다. 엄마는 딸의 머리채를 잡고 화장실로 끌고 가서 회초리로 온몸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울면서 살려달라고  말했다. 평소 엄마의 눈빛이 아니었다. 빨갛게 충혈 된 눈은 무언가에 씌인 것 같았다. 어머니는 실성한 듯 그녀를 심하게 때렸다. 그녀는 죽음의 두려움을 느끼고, 화장실에서 뛰쳐나와 방으로 도망쳤다. 
 
문을 잠그고 엄마 눈이 원래대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방에 갇힌 그녀는 귀를 막았다. 방문 너머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 아빠를 닮아 그 모양이지. 너도 죽어. 다 필요 없어. 다 같이 죽어!” 
 
그녀는 아버지가 그리웠다. 
 
“아버지는 제게 한 번도 화낸 적이 없었어요.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좋았을 텐데…. 아버지가 너무 그리웠어요. 너무 보고 싶고, 생각나고…. 엄마도 힘들었을 거예요. 지금은 이해할 수 있어요. 마음에 상처는 남았지만, 그때 엄마도 아마 어쩔 수 없었을 거예요.” 
 
남편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연예인이 되고 싶었다. 연극영화과에 지원하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반대했다. 아버지에게 맞설 수 없었다. 아버지의 생각은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으니까. 아버지 뜻을 거스르면 뺨을 맞거나 매질을 당했다. 아버지와 직접 대화할 수 없어서 늘 엄마가 중간 역할을 했다. 
 
“아버지 생각은 이래. 그러니까 네가 이해하렴.” 
 
어머니는 아버지가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상황을 설명해줘도 속 시원하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들은 동의할 수 없었다. 
 
방학 중에도 그는 아버지의 기상 시간에 맞춰 일어나 밥을 먹었다. 해도 뜨기 전, 이른 새벽 시간에 식사를 했다. 그리고 단정히 옷을 입고 도서관에 갈 준비를 하는 척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출근하시면 다시 옷을 갈아입고 모자란 잠을 잤다. 
 
그는 늘 아버지 눈치를 봤다. “영화배우는 안 된다”라는 아버지의 말 한 마디에 진로를 정하지 못하고 오랜 시간 방황했다. 
 
두 사람은 지인의 소개로 만났다. 
 
남편이 말했다. 
 
“아내는 있는 그대로 저를 인정해줬어요. 기를 살려줬다고 해야 하나… 사실 저는 부족한 게 많거든요.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성격이 좋은 것도 아니고요. 아내는 얼굴도 마음도 예뻐서 한눈에 반했죠. 사실 지금도 그래요. 가끔 아내를 보면서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나? 이렇게 사랑스런 여자에게’라고 생각해요.” 
 
아내가 말했다. 
 
“남편이 사랑해주는 게 느껴졌어요. 그의 눈빛이 따뜻했어요. 저를 아기처럼 쓰다듬으며 사랑한다고 말해줬거든요. 남편이 손을 잡아주면서 결혼하자고 했을 때 저는 감격해서 울었어요. 그를 만나기 전까지 제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두 사람의 존재는 서로에게 축복이었다. 향기 가득했던 신혼집은 사랑이라는 꽃이 시들면서 악취가 났다. 남편의 거친 입에서 풍기는 침냄새와 아내가 문고리를 잡고 버티며 흘린 땀냄새로 얼룩졌다. 
 
***
 
물에 빠져 죽을 뻔 했던 사람은 물이 두렵다. 물을 볼 때마다 두렵다. 다른 사람 눈에는 에메랄드빛으로 보이는 물이 그에게는 시커멓게 보인다. 물에 대한 기억이 물 색깔을 결정한다. 눈에 보이는 물 색깔을 바꾸려면 물속에 들어가야 한다. 
 
발부터 시작해서 허리, 목까지 천천히 담그자. 방심하지 말자. 물속에서 손발을 사용해서 앞으로 나아가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아내는 아버지가 그립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아버지를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어머니의 불안한 감정 상태, 학대와 상처 주는 말이 그녀를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에게 도피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남편을 처음 만나 가진 느낌, “아기처럼 예뻐해줬다”라는 말은 연인 사이에서 쓰는 말보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쓰는 말에 가깝다. 아버지 모습이 투영된 남편에게 끌린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아버지가 아니다. 그녀가 남편을 통해 보았던 아버지는 사막에 신기루 같은 것이다. 멀리서 아버지처럼 보였지만 가까이 가보니 모래 언덕이다. 착시현상이다. 아버지가 없다는 상실로 쓰러진 그녀에게 사정없이 모래바람이 불었다. 코와 눈에 모래가 가득 끼어 앞을 볼 수도, 숨을 쉴 수 없다. 
 
어머니가 남긴 상처는 그녀를 파괴했다. 남편 눈빛이 엄마 눈빛과 연결된다. 어린 시절, 그녀는 어머니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대항하지 않아 모진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았다. 남편에게는 달랐다. 사력을 다해 그에게 대항했다. 두 번 다시 고통  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독설이 나갔다. 남편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살기 위한 투쟁이었다. 그녀의 정서는 아홉 살 어느 여름 날, 엄마의 집 화장실 안에 갇혀있었다. 방으로 도망가 문을 잠근 사람은 현재의 그녀가 아니다. 아홉 살 소녀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느끼는 두려움은 같다. 그녀를 기절시킨 사람은 누구인가? 엄마인가, 남편인가?
 
남편이 말했다.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사람이 자기 목소리를 녹음하면 그 소리가 낯설게 들리잖아요. 제가 말을 할 때, 목소리가 이렇게 컸나요? 전혀 몰랐어요. 아내는 체구도 작은데 제 목소리가 커지면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저는 먼저 화를 낸 사람이 아내라고 생각했어요. ‘이 여자는 작은 것 하나도 그냥 못 넘어가나?’ 생각했죠. 그녀가 사나운 고양이처럼 날뛰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흥분해서 몰아세우는데 정말 답답했거든요. 제가 아니라고 말해도 귀를 막고 듣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 이 사람은 대화하고 싶은 게 아니구나. 그냥 날 이기고 싶은 거구나.’ 혼자 결론을 내렸어요. 그 다음부터는 아내가 무슨 말을 하면 입을 막으려고 했어요. 화를 참지 못하고 실수할 것이 뻔하니까요.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게 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제 깨닫게 되었네요. 아내가 무서워서 그런 거예요. 아내를 지켜줘야 할 사람이 아내를 두렵게 만든 거죠.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만약 제가 아내의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아내의 손을 잡고 말했을 거예요. ‘이제 무서워하지 마. 이제부터는 내가 곁에 있어 줄 거야’라고요.”
 
아내는 남편 옆에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남편은 아내 손을 조용히 잡아주었다. 두 사람이 맞잡은 손에서 다시 향기가 났다. 더 이상 남편의 침냄새, 아내의 땀냄새가 나지 않았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혈액처럼 따뜻한 사랑이 아내의 손을 타고 흘렀다. 아내의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모래시계를 두 번 뒤집은 것처럼 긴 시간이 흐른 후에 그녀가 말했다.  
 
“제가 만일 남편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면 남편을 대신해서 아버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요? 그거야 간단하죠. ‘아버님, 왜 제 남편의 기를 죽이세요. 남편이 아니라잖아요. 왜 그의 말을 끝까지 안 들으세요? 끝까지 들으시고 하고 싶은 말을 하세요. 제 남편은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제발 아버님 방식대로 생각하지 말고, 남편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세요, 제발!’이라고요.”  
 
그녀는 남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을 타고 따뜻한 기운이 흘렀다. 조용히 손을 잡은 채, 울기 시작했다.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은 남편이 엎드려 우는 순간, 아내는 두 손으로 남편 등을 감쌌다. 그녀가 남편을 안은 것인지, 그에게 안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남편 등에 기댄 그녀는 편안해보였다. 
 
남편이 뭐라고 말했다. 등 근육이 울리면서 남편의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닿았다. 그녀가 문 넘어 듣던 무서운 목소리와 달랐다. 남편 등에서 울린 소리가 아내의 마음을 울렸다. 
 
“여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위로 받아야 할 사람은 당신이야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요. 차라리 제가 없는 게 낫겠죠.”
 
C는 사십 대 중반의 가장이다. IT 기업 영업 부서에서 일한다. 아내 권유로 상담 받기 시작했다. 그는 13년 동안 우울증으로 고통 받았다. 오랜 불면증에 시달린 그는 창백해 보였다. 핏기 없는 입술은 “만사가 귀찮으니 나를 좀 내버려 둬”라고 말했다. 아내는 남편이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두려웠다. 남편에게 상담 받자고 애원했다. 
 
“남편은 밝고 명랑한 사람이었어요. 대학 졸업하고 남부럽지 않은 회사에 들어갔고, 우린 결혼했죠. 회사 생활도 재미있게 했어요. 밝은 모습으로 퇴근했던 남편이 기억나요. 어느 날부터, 남편이 잠을 설치기 시작했어요. 옆에서 조금만 움직여도 짜증을 내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10년 넘는 시간 동안 우울한 기분으로 사는 것 같아요. 
 
일주일 두세 번은 자기 방에 들어가 방문을 닫고 나오지 않아요. 딸이 아빠 뭐 하냐고 문을 열면 불같이 화를 내요. 좋을 때는 일주일에 하루 정도? 그날은 가족이 같이 저녁을 먹고 대화하고 그래요. 좋은 분위기를 유지하고 싶어서 남편을 관찰했죠. 방법을 찾고 싶었어요. 모르겠더라고요. 남편이 자기 세계로 들어가면 우린 감옥에 갇힌 것 같아요. 걷는 것도 조심하고, TV소리도 줄이고.
 
이 사람이 얼마 전부터 죽고 싶다는 말을 반복해요. 제가 울면서 그러지 말라고 아무리 부탁해도, 멈추지 않아요. 자기가 죽어도 슬퍼할 사람이 없을 것 같다고. 나와 아이들은 어떻게 하냐고 하니까, 유서에 써 놨다고 해요. 경제적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하면서. 돈이 문제가 아니잖아요. 이 사람이 없으면, 저와 아이들은….” 
 
그녀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남편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작은 건어물 가게를 운영했고, 어머니는 몸이 아파 집에 누워있는 날이 많았다. 아버지 수입은 대부분 어머니 병원비로 들어갔다. 형, 누나가 있었지만,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그는 언제나 몸이 아파 누워있는 엄마 옆을 지켰다. 
 
초등학교 5학년 어느 여름날이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온 그가 엄마를 살폈다. 엄마 몸이 뜨거웠다.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불안했고 무서웠다.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응급차가 도착했다. 주황색 옷을 입은 남자 두 명이 집으로 들어왔다. 엄마를 들고나갔다. 엄마를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아버지는 가게 문을 닫고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매일 술에 취해 있었다. 작은 꼬투리 하나 잡히면 그는 아버지에게 사정없이 맞았다.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학교 마치면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놀았다. 집 문 앞에서 아버지가 곯아떨어지기 기다렸다. 아버지가 잠들면 집에 들어갔다. 
 
공부에 흥미가 없었다. 성적은 중하위권에 머물렀다. 새 학기 시작되면서 새로운 담임선생님을 만났다. 엄마와 비슷한 이미지의 선생님에게 호감을 느꼈다. 선생님이 잊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선생님이 보니까, 너는 눈이 초롱초롱해. 이해력도 좋은 것 같고, 집중력도 좋은 것 같고. 조금만 노력하면 정말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선생님이 도와줄 테니까 열심히 해보자.” 
 
그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공부했다. 성적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랐다. 다음 학기 전교 1등을 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다니는 동안 최상위 성적을 유지했다. 학교에서 거는 기대가 컸다. 법학과에 진학하기를 원했다. 적성에 맞다고 생각했다. 원서 쓰기 전에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아버지는 노발대발 화냈다. 집이 가난한데 졸업하고 빨리 취직해 돈 벌 생각을 해야지, 언제 사법고시 보고 변호사 되고 돈 버냐고. 옆에 있던 형과 누나도 아버지를 거들었다. 법학과는 돈 많고 배경 좋은 애들이 가는 데지, 너 같은 애들이 가는 데가 아니라고. 그는 집을 뛰쳐나갔다. 달리고 또 달렸다. 학교 운동장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울었다.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졸업할 때쯤 여기저기 원서를 냈다. 오라는 곳이 많았다. 가장 좋은 회사를 선택했다. 입사 1년 차, 아버지가 쓰러졌다. 당뇨가 심각했다. 아버지는 인슐린 대신 술병을 달고 살았다. 병원에서 가망 없으니 집에서 1년 정도 쉬라고 말했다. 형, 누나를 만났다. 아버지를 누가 모실 것인지 이야기가 오갔다. 형이 말했다. 
 
“형, 누나는 지금 가정이 있고 먹고 살기 빠듯하다. 좋은 회사 다니는 네가 결혼하기 전까지 모셔라. 1년 뒤에 아버지 하늘나라 가시고 나면 그때 결혼해도 늦지 않는다.” 
 
그는 말이 많은 성격이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는다. 내성적인 사람이다. 침묵했다. 
 
회사 근처 원룸에 아버지를 모셨다. 회사에서 일하다가 점심시간, 저녁 시간, 틈나는 대로 아버지를 확인했다. 외부 출장 가는 날은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는 여자친구, 지금의 아내에게 아버지를 부탁했다. 회사의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면서 아버지를 돌봐야 했다. 아버지 건강은 날로 악화되었다. 
 
아버지를 집에서 돌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그는 적금을 깨서 요양병원에 모셨다. 요양 병원에 모시기 하루 전, 그는 술에 잔뜩 취해 집에 들어갔다. 의식 없이 누워있는 아버지 옆에 누웠다.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무엇 때문에 슬픈지 알 수 없었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일까,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일까?  
 
아버지 돌아가시고 석 달 뒤, 아내와 결혼했다. 힘든 시기를 말없이 견뎌준 아내가 고마웠다. 예쁜 딸 하나를 낳았다. 
 
딸이 태어나고 얼마 후, 갑자기 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병원에서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치료를 받아도 개선되지 않았다. 상황은 점점 심각해졌다. 윙윙 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 뜬 눈으로 밤을 새는 날이 계속되었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어도 그 소리가 들렸다. 신경이 예민해졌다. 별일 아닌 일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오늘은 참자 다짐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사람을 만나는 영업부서에서 대인관계는 특별히 중요했다. 업무에 지장이 생기면서 주눅이 들었다. 가족에게도 예민해졌다. 혼자 방 안에 들어가 문을 잠그는 날이 많아졌다.
 
“가족만큼은 보호하고 싶었어요. 예민해지면 감정을 다스릴 수 없거든요. 아내와 딸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고 나면 죽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사랑하는 가족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서 제 자신을 방안에 가두고 격리하는 겁니다. 방 안에서 생각하죠. 
 
문을 열고 나가서 딸을 안아주고 싶고, 딸의 볼에 입 맞추고 싶고, 딸의 이야기를 듣고 싶죠.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친구들과 뭐 하고 놀았는지…. 하지만, 그럴 수 없어요. 문을 열고 나가서 성공한 적이 없어요. 제가 나가면 아내와 딸은 하던 일을 멈추고 긴장해요. 딸은 TV를 끄고, 아내는 하던 일을 멈추고 다가와 뭐 필요한 게 있냐고 묻죠. 궁색하게 물 한 잔 마시고 다시 제 방으로 들어옵니다.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어요. 생각을 차단하고 싶어서. 제가 중국어를 배울 필요는 없거든요. 가만히 있으면 미칠 것 같아서…. 그래서 그냥 책을 펴고 보는 겁니다. 물끄러미 책을 보다가 생각해요.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내가 없어도 아내와 딸은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다. 내가 있는 게 두 사람에게 더 큰 고통이다. 남편, 아빠로서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 뭐, 이런 생각을 하면… 걷잡을 수 없는 충동이 생깁니다.”
  
***
 
멈추지 않고 달리는 차는 금방 망가진다. 멀리 왔다 싶으면 잠시 멈춰야 한다. 사람도 똑같다. 쉬지 않고 달리는 사람은 금방 망가진다. 다리 아프고, 팔 아프고, 숨차면 잠깐 멈춰 그늘에서 쉬어야 한다. 
 
목표까지 달릴 수 있느냐, 몇 등으로 들어가느냐 생각하면 그늘에서 쉴 수 없다. 목표까지 가는 동안 한 번도 쉬지 못하고 달리면 목표에 도착하기 전에 쓰러진다. 한 번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기 힘들다. 쉬는 것은 낭비가 아니라, 원하는 목표를 이루는 전략이다. 
 
C가 실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는 그저 낙심한 것뿐이다.  
 
우울증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정당하지 못하다. 사람들은 그들이 낙오자, 패배자, 나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우울증, 공황 장애, 불안 장애로 고통 받는 사람들 대부분 유능한 사람들이다. 왜 그런 사람들이 우울증, 불안 장애로 고통 받는가? 나도 처음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은 어린 시절 시절 겪은 사건과 그에 대한 해석으로 자신의 신념을 구성한다. 한 번 구성된 신념이 해체되거나 변형되는 것은 쉽지 않다. 신념은 하나가 아니고 복합적이며 서로 맞물려 한 사람의 체계를 형성한다. 체계가 추구하는 방향을 우리는 ‘목적’이라고 부르자. 
 
사람은 자신만의 목적을 추구한다. 그 목적이 다른 것으로 대체되기 어렵다. 혹시라도, 그 목적이 대체되는 사건이 일어나면 인생에서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뜻이다.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부정적인 변화가 일어나면, 정반대의 일이 벌어진다. 삶이 고통스러워진다.  
 
우울증과 불안 장애의 근본 원인은 목적 상실이다. 목적을 잃거나, 이루거나. 눈앞에서 목적이 사라져 버린다. 목적이 사라지면, 자신을 지탱하던 체계가 무너진다. 왜곡된 신념이 자신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나는 실패 했어. 나는 패배자야.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질 수 없어.’ 
 
목적을 상실한 사람은 왜곡된 신념이 진실이라고 믿게 된다. 거짓이 진실이 되는 순간, 사람들은 우울과 불안으로 고통 받는다.
 
목적이 멀어진 사람은 무기력 해진다. 반복되는 실패로 낙심한다. 혼자 결론 내린다.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능력이 부족해. 재능이 부족해. 이 길이 아니야.’ 
 
거대한 성벽을 쌓고 그 안에 들어가 은둔한다. 그를 꺼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다리는 성벽 밖이 아니라, 성벽 안에 놓여 있다. 성벽 안에서만 타고 오를 수 있다.    
 
목적을 이룬 사람 역시 고통 받을 수 있다. 목적이 사라지면 체계가 무너진다. 혼란 속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막대한 빚을 지고 수 년 동안 그 빚을 갚은 사람, 오랜 무명 시절을 거쳐 유명해진 가수, 배우, 작가. 
 
‘아 이제 편안하다.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아’라고 느끼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 목을 조른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목적을 이룬 이후에 펼쳐질 삶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쉬지 않고 달려오면서 
목적이 사라지는 상황을 예상할 수 없었다. 
 
그는 쉬지 않고 달렸다. 어머니를 떠난 보낸 상실의 아픔을 이겨내느라, 형과 누나 대신 아버지 돌보느라, 가난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삶의 안정을 추구하느라, 불행한 성장과정을 뒤로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느라, 쉴 틈 없이 살았다. 그의 성취는 엄마 이미지를 가진 선생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관심 받지 못하던 학생에서 주목받는 학생이 되었다. 성취가 그의 원동력이었다. 
 
그의 열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누군가 그의 열정을 촛불 끄듯 훅 불어 꺼렸다. 아버지, 형, 누나는 법학과에 진학하고 싶었던 그에게 가난이라는 족쇄를 채웠다. 그는 삶의 주체가 될 수 없었다. 
 
“저는 다른 사람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에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 조용히 생각하는 걸 좋아하죠. 제가 하는 일은 사람에게 시달리는 일이에요. 벗어나고 싶었어요. 후회해도 소용없지만, 옛날 일이 자꾸 떠올라요.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왜 내가 법학과에 원서를 넣지 않았을까? 왜 아버지, 형, 누나 말을 듣고 꿈을 포기했을까? 형과 누나, 꼴보기 싫어서 만나지 않고 있어요. 아버지 돌아가신 이후로 연락하지 않고 지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는 해방감을 느꼈다. 해방감은 그에게 죄책감을 주었다. 아버지가 죽기를 바란 것은 아닌가, 아버지가 죽어서 마음이 편해진 것은 아닌가. 죄책감은 그를 갉아먹었다. 그는 결혼했고, 아내와 행복했고, 사랑하는 딸을 낳았다. 회사에서 승진했고, 연봉은 두 배로 올랐다. 아버지 죽음 이후에 그는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절을 보냈다. 죄책감은 날로 심해졌다. 그의 귓가에 누군가 속삭였다.   
 
‘너는 아버지가 죽기를 바란 거야.’ 
 
그는 행복하고 싶었다. 어린 시절 상처가 그에게 행복한 가정을 동경하게 만들었다. 대가를 지불하고 목적에 도달했다고 느낀 순간, 그가 꿈꾸던 행복한 가정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상상했던 가정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후회와 죄책감으로 망가진 자신을 직면했다. 아내와 딸에게 행복을 주기는커녕 두려운 존재가 되어갈수록 그는 고통스러웠다. 그가 사라진다면 가족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그리던 행복한 가정은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그에게는 새로운 목적이 필요하다. 그 목적은 실현 가능하지만, 도달할 수 없어야 한다. 인생에서 도달할 수 없는 거대한 산맥 같은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그가 살 길이다. 동시에 실현 가능해야 한다. 
 
한 걸음씩 그 목적에 도달하는 성취감이 있어야 한다. 한 걸음씩 걸어서 앞으로 가되 그의 인생을 다 바쳐 노력해도 도달할 수 없는, 거대한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행복할 수 있다. 행복은 산 너머에 있지 않다. 산을 오르는 과정에 있다. 같이 걷는 사람들, 가족, 친구, 동료들. 그들과 함께 숲에서 들리는 새소리, 벌레소리, 계곡물소리를 들으며 그저 걷는 것이다. 
 
그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어두운 터널을 지난 것처럼 그는 닫혀 있던 방문을 열고 두려운 현실을 마주했다. 그의 노력과 성취는 놀라웠다.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고, 건조했던 그의 입술은 촉촉해 보였다.
 
“그날 밤도 가슴이 짓눌려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옆에서 아내가 울어요. 아내에게 손을 뻗어서 아내 손을 꼭 잡았어요. ‘괜찮아. 조금 있으면 괜찮아져. 조금만 기다려.’ 아내는 입을 막고 울더군요. 아내가 말했어요. ‘여보, 그만해. 그 말을 할 사람은 나야. 내가 위로해주고 싶다고. 위로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야.’ 처음이었습니다. 그렇게 목 놓아 울어본 적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내 품에 안겨서….”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강박증에 시달려요

강박증이 있어요.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저도 모르게 아무 연관 없는 행동을 하면서 불안을 달래요. 예를 들면, ‘내가 지금 이 컵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기면 잘 될거야.’ , ‘내가 지금 설거지를 하면 그 일이 잘 될거야.’ 아무 상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생각과 행동을 멈출 수가 없어요.   
 
솔직하게 말해주셔서 감사해요.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자신이 강박증이라고 결론을 내린 근거가 무엇인가요. 병원에 가셔서 진단을 받으신 건가요, 아니면 상담 센터에서 전문상담사가 말해준 건 가요. 만일 그런 경우라면, 지금처럼 지속적인 치료를 받기를 권장합니다.   
 
하지만, 자매님이 스스로 강박증이라고 진단을 내렸다면 함게 나누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크고 작은 강박 증세가 있습니다. 나도 예외가 아니지요. 자동차를 삐뚤게 주차하면 마음이 편하지 않아요. 다시 시동을 켜고 선을 맞추어 주차합니다. 이유는 모릅니다. 그냥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러니까 괜찮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나는 자매님의 문제를 가볍게 대하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다른 관점을 가져보면 어떨까 제안하는 겁니다. 만약 자매님이 스스로를 강박증 환자로 받아들이면, 그 순간부터 자신을 고치려 들겁니다. 기계가 아닌데 뜯어 고치려고 하는 겁니다. 
 
강박적인 생각을 하면 자책합니다. 물건이 아니니까 버리지도 못하고, 고치자니 고칠 수도 없고, 그냥 데리고 삽니다. 괴로운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강박적인 생각 그 자체보다 중요한 건 강박을 대하는 관점입니다. 자신이 강박증 환자라고 정의내리지 마세요. 
 
나는 진단과 치료를 위한 목적으로 진단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문가들끼리 내담자의 정보를 공유할 때 편합니다. 하지만, 상담실 안에서 진단명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우울증, 불안 장애 등의 말을 쓰기 시작하면 환자가 스스로를 정의내립니다. “나는 강박증이다.” 이렇게 하면, 라벨링이라는 인지 오류에 빠질 위험이 있어요. “나는 원래 그렇다.”라고 정의내리면, 치료 기간이 더 오래 걸립니다. 
 
내담자가 상담실에 들어오기 전에, 자가 진단을 내린 경우도 많아요. 오히려, 진단을 내려보면 아닌 경우도 많습니다. 자신을 특정 진단명으로 정의내리면, 그다음부터는 그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우울증, 불안 장애라는 진단명 안으로 쏙 들어가버리면, 밖으로 빼오기가 더 힘듭니다.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나는 강박증이 있다. 나는 우울증이 있다.” 스스로를 고치려고 듭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결핍이 있다. 내 안에 결핍이 자꾸 강박적인 사고를 하게 만든다.” 같은 말이라도 자신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자신을 고치려 들지 않아요.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 합니다.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안정적인 환경을 만들 수 있어요. 
 
강박적인 사고를 할 때마다, “너 또 그랬네.”가 아니라 “나 또 왜 이러지.”라고 생각이 달라지만, 일단 성공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러지, 뭐가 불안하지, 뭐가 무섭지.” 질문에 질문이 꼬리를 문다면, 그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결국, 두려움의 실체를 마주하게 될 테니까요. 
 
그림자만 봐도 놀라는 상황에서는 실체에 다가갈 수 없습니다. 실체가 두려워서 그림자 조차 쳐다보고 싶지 않은 겁니다. 그림자에 미리 놀랄 필요 없습니다. 실체를 확인하고 놀라도 늦지 않아요. 그림자의 주인이 곰인형인지, 실제로 굶주린 야생 곰인지 일단 가까이가서 확인해봐야 합니다. 나는 곰돌이 인형에 여러 번 놀랐습니다. 아직까지 실제 야생 곰을 본 적은 없습니다.    
 
자신을 강박증 환자로 정의내리지 말아주세요. 강박이 아니라 결핍이 있는 겁니다. 고치려 하지 마시고, 돌봐주세요. 시간 오래 걸립니다.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실패한 상담자

“내 이야기를 들으면 상처받으실 수도 있어요. 사람들이 내게 그랬거든요. 네 이야기를 들으면, 나까지 이상해지는 것 같다고.” 
 
주연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녀가 처음 내뱉은 말의 의미를 굳이 묻지 않았다. 
 
주연은 한참을 기다리다, 다시 말했다. 
 
“괜찮으시겠어요? 내 말을 들으면, 목사님도 상처받을 수 있어요.”
 
나는 말했다.  
 
“나는 이미 상처받았어요. 흉터 하나 더 생긴다고 무슨 일 있겠어요. 제 걱정 마시고, 편안하게 이야기하세요.” 
 
주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아마 혼자 계실 때 알게 되실 거예요. 가끔 저는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게 보여요. 목사님도 저와 대화를 시작하시면,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영향을 받으실 거예요.” 
 
그 순간 내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얼굴 근육이 마비가 된 듯했다. 표정 관리를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섬뜩했다. 
 
주연은 알 수 없는 미소를 띠어 보이며, 내게 동의를 구했다. 
 
“정말로 괜찮으시겠어요?”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 걱정은 마세요. 편하게 이야기하시면 돼요.” 
 
주연은 차분한 말투로 물었다. 
 
“목사님은 귀신을 본 적 있으세요?” 
 
주연은 내가 대답할 기회를 주지 않고 혼잣말로 속삭였다.   
 
“나는 귀신을 본 적 있어요.” 
 

 
새벽 예배를 마치고, 주연은 싱글벙글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을 챙겨 학교에 보내고, 집안을 대충 치우고 교회에 갈 작정이었다. 시계가 9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교회 성경공부 모임에 늦고 싶지 않았다. 
 
주연은 부리나케 화장실에 들어갔다. 샤워기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몸을 적시고, 손바닥에 샴푸를 담았다.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감는데, 주연의 등골이 오싹했다. 
 
누군가 위에서 그녀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주연은 비명을 질렀다. 
 
젖은 머리카락에 샴푸 거품이 뒤엉킨 채 화장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거실에서 신문을 보고 있던 남편에게 달려가 매달렸다. 
 
“여보, 화장실에 뭔가 있어. 시커먼 게 나를 보고 있었다고.” 
 
주연의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남편의 손에 들린 신문을 적셨다. 주연이 말하는 동안에도, 거품 낀 물방울이 남편의 옷과 얼굴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남편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또 시작이네. 당신이 애야? 화장실에 뭐가 있다고 그래. 제발 좀 그만해.” 
 
“여보, 그게 아니고, 정말 뭐가 있다니까. 당신이 한 번 가봐. 응? 제발 부탁이야.” 
 
남편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문을 열었다. 주연은 거실 귀퉁이에 앉아 손과 발을 벌벌 떨었다. 남편은 의도적으로 화장실 불을 몇 번이나 껐다 켜면서, 주연을 안심시켰다. 
 
“아무것도 없지?” 
 
남편의 물음에, 주연은 고개를 끄떡였다. 
 
남편은 주연에게 다가와 진지하게 말했다. 
 
“여보, 당신 정말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정신과 치료를 받아보면 어때?” 
 
주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난번에도 가봤잖아. 그냥 약만 주고, 별다른 도움도 못 받잖아. 나 약 먹기 싫어. 약 기운에 하루 종일 누워서 지낸단 말이야.” 
 
“아니, 그럼 뭐 어떻게 하려고 그래. 당신, 애들은 생각 안 해?” 
 
“내가 애들 생각 안 한 게 뭐 있어?” 
 
“당신이 지금 정상이야? 애 둘만 싸질러 낳고, 엄마 구실을 못하잖아.” 
 
“뭐? 당신 지금 말 다 했어?” 
 
“내가 무슨 틀린 말 했어? 당신 올해 들어 집에서 몇 번이나 잤어. 하루가 멀다 하고 교회 가잖아. 왜 멀쩡한 집을 놔두고 교회에서 잠을 자? 애들 뒤치다꺼리는 누가 하라고?”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래? 나도 지금 미칠 것 같아.” 
 
“그러니까, 정신과 치료를 꾸준히 받으라고.”
 
“내가 그랬잖아. 약 먹기 싫다고. 나 기도해서 고칠 거야.”  
 
남편은 어이가 없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하자. 더 말하면 나 미칠 것 같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남편은 차가운 말을 내뱉고, 베란다로 나갔다.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주연은 남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주연은 남편에게 서운하면서도,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 주연을 괴롭히는 문제가 담배 연기처럼 허공에서 사라지기를 바랐다. 
 
서러운 감정이 주연을 덮쳤다. 소파에 엎드려 하염없이 울었다. 수건으로 둘둘만 머리카락 끝자락에서 거품이 뒤섞인 물방울이 거실 바닥에 뚝뚝 떨어져 내렸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이었다. 
 
남편은 24시간 하루 근무, 24시간 하루 휴식의 일정을 반복했다. 
 
남편이 집에 없는 날이면, 주연은 혼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문을 이중으로 잠가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주연은 두려움을 이길 수 없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엄마 집으로 도망쳤다. 
 
주연은 엄마와 같은 방에서 함께 자기를 원했다. 
 
“오늘 외할머니 오셨으니까 불편하더라도 외할머니하고 같이 자. 엄마가 오늘은 혼자 자고 싶어.” 
 
주연은 가만히 고개를 끄떡였다. 
 
밤새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주연은 벽에 기대 우두커니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인기척에 놀라 잠에서 깬 할머니가 말했다. 
 
“으미, 깜짝이야. 너 시방 뭐 하는 거여. 누워야 잠이 오제, 어찌 앉아서 잠을 잔다야. 빨랑 누워, 이것아.” 
 
“신경 쓰지 말고 자, 할머니. 나는 잠이 안 와. 밤마다 이래.” 
 
“별 희한한 일 다 보겠구먼. 잠을 안 자면 사람이 어떻게 산데….” 
 
할머니는 밤새 주연과 대화를 나누었다. 동이 틀 무렵 할머니는 피곤했는지, 코를 골며 잠에 들었다. 
 
주연은 주섬주섬 이불을 정리하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남편이 오기 전에 집에 도착해, 아침 식사를 준비할 작정이었다. 
 
할머니는 엄마에게 주연의 상태를 물었다. 
 
“걔가 언제부터 그러데? 밤새 잠을 못 자면 사람이 어떻게 산데?” 
 
엄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다 큰 애가 뭐가 무섭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 혼자 잠을 못 자. 안 그러던 애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그래.” 
 
할머니는 진지하게 말했다. 
 
“애가 눈빛이 영 이상해. 점을 한 번 보러 가야 쓰것어. 애 눈을 보는데 섬뜩하더라니까.”
 
할머니는 주연을 챙겨,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갔다. 
 
무당은 주연의 눈빛을 살피더니, 뭐에 씌인 것 같다며 크게 굿을 한 판 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연은 내심 걱정이었다. 굿을 하는데, 당장 수백만 원이 필요했다. 주연은 망설였다. 남편에게 굿을 하자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주연은 쓸데없는 짓이라며,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터벅터벅 집으로 향하는 길에, 도로 옆 교회의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십자가를 올려다보는 순간,  햇빛으로 눈이 부셨다. 인상을 찌푸렸지만, 주연의 마음은 이상하게 편했다.
 
‘굿은 무슨 굿이야. 차라리 교회를 나가보자.’ 
 

 
“사모님 죄송한데, 어려운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사모는 멈칫하며 주연의 말을 기다렸다. 
 
“사실 제가 요즘 잠을 잘 못 자요. 혼자 방에 누우면, 천장에서 마주하는 얼굴이 있어요. 눈을 감으면, 천장에서 그 얼굴 뚝 떨어져 나를 덮칠 것 같거든요. 너무 무서워요.” 
 
주연은 슬픈 감정에 사로잡혔다. 눈물이 얼굴을 뒤덮었다. 
 
“마귀가 역사하네요. 기도하면 나아질 거예요.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죠?” 
 
사모가 물었다. 
 
“교회에서 잘 수 있게 해주시겠어요? 교회에 오면, 마음 편하게 잠을 잘 수 있거든요. 불편하게 하지는 않을 게요.” 
 
사모는 그게 뭐 어려운 일이겠냐며, 주연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 
 
“그럼요, 언제든 오셔서 주무세요. 저랑 같이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고 하면 되죠. 저도 가끔 교회에서 자고 그래요.”
 
주연은 사모에게 거듭 감사하다 말했다. 사모는 주연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주연은 밤낮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집과 거리, 어느 곳 하나 예외가 없었다. 
 
두려움이 엄습하지 않는 유일한 장소는 교회뿐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아무도 없는 교회에 혼자 가는 건 무섭지 않으세요?” 
 
“아, 무섭지 않아요. 어두운 예배실에 들어서면 잠깐 움찔은 해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편해져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교회에 가면, 예수님이 날 지켜주시는 것 같아요. 건물 위층에 사모님도 계시고요. 그 위에서 사시거든요.” 
 
“두려움을 없애주는 사람이 예수님인가요, 사모님인가요?” 
 
“물론, 예수님이죠. 하지만, 사모님도 필요해요. 솔직히 말하면, 사모님이 성품이 따뜻하신 분은 아니에요. 그래도, 당분간은 사모님이 필요해요.” 
 
어려운 개척교회였다. 사모는 주연의 부탁으로 예배실 옆에 마련된 작은 공간에서 주연과 함께 잤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연이 교회에서 잠을 자도록 허락해 준 것으로만 알았던 것이다. 
 
사모는 밤마다 사택에서 내려와 주연과 함께 지냈다. 사모 입장에서도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모의 불편한 감정이 주연에게도 전해졌다. 그러나, 주연은 불편한 감정을 감수하고라도 사모 곁에 있고 싶었다.
 
주연은 물에 빠진 심정이었다. 구명조끼를 던져주는 사람의 표정을 살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관계의 유통기한이 생각보다 짧다는 것을 주연은 분명히 알았다. 사모는 주연이 의존한 세 번째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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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과 사모가 함께 성경을 읽는 자리에, 목사가 들어와 한 마디를 꺼냈다. 
 
“자꾸 대출이자 때문에 은행에서 전화가 오네.”
 
사모는 주연을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우리 교회 팔리면, 이제 주연 자매는 어떻게 해? 기도 많이 해야겠어. 우리야 어디 가서 또 목회하면 되지만, 주연 자매는 우리 없으면 어떻게 할 거야?” 
 
주연은 당황했다.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어색한 웃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교회가 어려울 때마다, 주연이 큰마음을 먹고 헌금을 한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감사한 마음에 헌금을 한 것을 두고, 사모가 그런 태도를 보인 것에 주연은 실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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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나빴어요. 무시를 당한 것 같았거든요. 마음 같아서는 ‘나를 뭘로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라고 대꾸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죠. 
 
자존심이 상해서, 두 번 다시는 사모님을 의지하지 않고 싶다고 결심했어요.”
 

 
사모가 내뱉은 말이 떠오를 때마다, 주연은 짜증 섞인 혼잣말을 내뱉었다. 
 
“내가 뭐, 지 아니면 안 될 줄 알고?”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주연은 마음이 급해졌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를 정도로 불안했다. 
 
밤새도록 혼자 있을 것을 생각하니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괴로웠다. 
 
저녁을 대충 차려놓고 남편을 기다렸다. 학원에서 아이들이 먼저 돌아오고, 남편이 뒤늦게 들어왔다. 
 
남편이 들어오자마자, 주연은 바통을 넘겨주듯 말했다. 
 
“여보, 미안해. 나 오늘 상태가 너무 안 좋아. 애들하고 저녁 먹고 뒷정리 좀 부탁해.” 
 
남편은 한심한 듯 말했다.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 그 사모가 뭐라고 그렇게 매달려. 그러다, 또 실망하고 뭐하고 비참해진다며? 제발 작작 좀 해.” 
 
주연은 남편의 말에 대꾸할  여유조차 없었다. 집에서 교회까지 쉬지 않고 뛰었다. 
 
교회에 도착한 주연은 예배실 문을 열었다. 예배실은 조용했다. 어두운 예배실 안에서 주연은 안정을 되찾았다. 
 
불안에 떨면서 감정 소모가 심한 탓인지, 주연은 엎드린 채로 기도하다 잠에 들었다.
 
주연은 팔이 잘려나가는 꿈을 꾸었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꿈에서 본 것처럼 팔에 감각이 없었다. 팔을 베고 잔 탓에 피가 통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주위를 살폈다. 예배실 뒤편에 작은 할로겐 조명이 켜진 채였다. 
 
사모가 들어온 것이다. 
 
주연은 교회 뒤편 마련된 작은방을 살폈다. 사모가 피곤했는지 미리 이불을 펴고 잠든 후였다. 
 
주연은 잠시 멈칫했다. 
 
‘우리 없으면, 이제 주연 자매 어떻게 해?’ 
 
며칠 전 사모가 내뱉은 말이 생각났다. 
 
그러나, 차마 집으로 돌아갈 용기는 없었다. 주연은 가만히 들어가 사모 옆자리에 이불을 펴고 누웠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서글픈 감정이 밀려왔다. 주연은 사모 옆에 자리를 폈지만, 사모를 등지고 뒤돌아 누워 하염없이 울었다. 
 

 
“부모님은 내가 어릴 때, 자주 심부름을 시켰어요. 밤에 슈퍼를 가려면 대나무숲을 지나야 했거든요. 가로등 하나 없는 길을 지나가는데 너무 무서웠어요. 
 
항상 누가 쫓아오는 느낌이 들어서, 죽도록 뛰었거든요. 가끔 엄마가 사 오라고 했던 물건을 떨어뜨리고 그냥 집으로 뛰어온 적이 있어요. 
 
그러면, 엄마가 엄청나게 화를 내면서, 다시 가서 가져오라고 그러죠. 저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만큼 무서웠거든요.” 
 

 
나는 주연의 공포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녀가 살아온 인생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주연은 적극적이었다. 공포심을 물리치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내게 전해졌다. 그녀는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기억들을 순서 없이 말했다. 
 

 
“증조할머니가 무당이었어요. 할머니가 굿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죠. 어머니는 할머니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 같아요. 자녀들을 사랑할 줄 모르는 분이셨어요.” 
 
주연은 그녀의 어머니가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상한 미신 같은 것을 잘 믿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그녀가 20살 남짓 되던 해에, 고기를 먹다가 급하게 체한 적이 있었다. 소화제를 먹어도 소용이 없어, 시름시름 앓았다. 
 
주연의 어머니는 낯선 남자에게 주연을 데려갔다. 
 
낯선 남자 앞에서, 주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가 모든 상황을 설명했다. 
 
남자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옆에 마련된 세면기에 손을 씻었다. 
 
남자는 주연에게 다가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입을 벌렸다. 주연은 당황스러웠다. 남자는 사정없이 솥뚜껑 만한 손을 주연의 입속에 밀어 넣었다. 
 
남자의 억센 손은 목구멍을 타고 가슴 안으로 들어갔다. 주연은 외마디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헛구역질이 나서 웩웩 소리를 지르는 찰나에, 남자는 주연의 목구멍에서 손을 빼냈다. 
 
남자의 손은 주연의 타액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남자가 손을 펴자 그 안에는 작은 고기 조각이 들려 있었다. 
 
남자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다시 세면기로 가서 손을 씻었다. 
 
어머니는 남자에게 돈을 지불하고 돌아서며, 주연에게 말했다. 
 
“속이 뻥 뚫려서 후련하지. 집에 가자.”
 

 
나는 충격에 빠졌다.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내 귀가 의심스러웠다. 
 
주연이 말하는 동안, 무심결에 그 장면을 상상했는데, 그 자체로 역겨웠다. 헛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나는 내담자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버렸다. 
 
“사실인가요?” 
 
주연은 내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믿기 힘드실 텐데, 정말이에요. 가끔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은 진짜였어요. 제가 고기를 먹으면 자주 체하거든요. 그 후로도 그 사람을 몇 번 찾아갔어요.” 
 
주연의 말을 억지로 믿었다. 그러나, 내 진심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듯했다. 나는 그날 밤 악몽을 꾸었고, 섬뜩한 남자에게 내 입을 벌려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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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의 근원을 찾으려는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사방이 막혀 있는 듯 답답했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나는 주연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들이 무서웠다.  
 
첫 세션에서 주연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사람들이 내게 그랬거든요. 너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까지 이상해지는 것 같다고.”
 
주연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사람들 역시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내 감정을 주연에게 효과적으로 설명해야 했다. 
 
“당신 이야기가 너무 기괴하고 무섭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방식은 옳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첫 발을 내디뎠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내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생각나요. 
 
할머니가 사랑방에 손주들을 모아놓고, 호롱 불을 하나 켜셨거든요. 호롱 불이 불규칙적으로 흔들리니까, 그림자가 춤을 추는 것 같더라고요. 
 
할머니는 군밤을 까주시면서, 할머니가 어려서 시골에서 겪었던 기괴하고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할머니가 어린 시절에 살았던 시골 마을에 들어가려면 고개를 하나 넘어야 했데요. 자정에 고개를 넘을 때는, 절대로 혼자가면 안된다고 했어요. 
 
자정이 지나면, 푸른 불빛이 사람을 홀려서 깊은 숲속으로 끌어들인다고 했어요.
 
마을 어른 여럿이 푸른 불빛 때문에 죽어나갔다고 했죠. 
 
긴장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 할머니는 “워!”라고 소리를 질렀죠. 손주들 중에 내가 제일 컸는데, 나마저도 울음을 터뜨릴 뻔했어요. 
 
나는 그날 밤, 이불에 오줌을 쌌어요. 잠에서 깼지만, 혼자 화장실에 갈 용기가 없었거든요.”
 
 주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묻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처음부터 두려운 감정을 가진 것 같아요.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랐지만,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아요. 
 
당신은 직접 말로 표현한 적 없지만, 지속적으로 내게 똑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어요. 
 
‘자, 잘 들어보세요, 지금부터 내가 무서운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우리는 무서움의 근원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고, 당신은 계속 내게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어요. 
 
내가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당신과 동일한 두려움을 느낄 수 있어야 당신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에요. 당신을 두려움의 소용돌이에서 구해주려면, 나는 소용돌이 밖에 서 있어야 해요. 그래야, 당신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으니까요.
 
나는 이 지점에서 실패했어요. 이미 나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어요. 당신의 이야기가 섬뜩하고 무서웠거든요. 
 
당신 말대로 나는 당신의 이야기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어요. 
 
내 일상에서 악몽을 몇 차례 꾼 적이 있거든요. 악몽은 내게 드문 일이에요. 당신과의 상담 전후에 있었던 일이에요. 
 
당신이 나를 완벽히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조용히 상담을 받던 당신이 일어서는 거죠. 그리고, 상담실 안에 시커먼 것이 있다고 말하며, 혼비백산해서 상담실 밖으로 도망을 쳐버리면 돼요. 그러면, 나는 완전히 무너질 거예요.
 
내게는 그것이, 호롱불 아래서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던 할머니의 “워!”라는 메시지겠죠.” 
 
주연은 가만히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내려놓은 듯 안정적인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누군가 한 사람은 내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주기를 바랐어요. 
 
사람들은 다 똑같아요. 내가 무섭다고 말하면, 다들 무시해요. 다 큰 어른이 무섭다고 말하니, 한심하다고 생각하죠.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애써 무섭지 않은 척 해요. 두려운 감정을 부정하는 거죠. 소리 없이 내 곁을 떠나요.
 
이해해요. 사람들이 내게 거리를 두면, 내가 느끼는 두려움에서 멀어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나를 데리고 살아야 해요. 내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는 사람들은 내 곁에 남아 있지 않아요.  
 
내 이야기를 듣고, 솔직히 무섭다고 말해준 사람이, 목사님이 처음이에요.”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울기 시작했다. 작은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정말로, 무서웠어요.” 
 
그녀는 울음소리는 점점 커지고 격해졌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를 내며 우는 동안, 나는 기다렸다. 간간이 손으로 내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가면서 조용히 창밖을 응시했다. 
 

 
그녀의 감정이 차분해지고, 다시 대화가 가능해진 상황에서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주연의 차분했던 감정이 다시 울컥했다. 눈물이 쏟아져 내릴까 걱정스러운 듯, 손바닥을 가슴에 올려놓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주연은 차분히 말했다. 
 
“제 마음을 공감해주신 것 같아요. 제가 확대해석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주신 것 같아요. 그 순간,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들어왔어요.” 
 
주연의 말을 한참 동안 듣고 나서, 내 생각을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당신과의 상담에서 실패했어요. 나는 당신 안의 두려움의 근원을 찾아내고 싶었어요. 두려움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싶었고요. 
 
두려움의 소용돌이 빠진 당신을 구해주려다, 나까지 소용돌이에 빠져 버린 꼴이죠. 마음이 급했나 봐요. 유능한 상담자라면, 당신을 제대로 도와줄 수 있었을 거예요. 당신에게 미안해요, 정말로.”
 
주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목사님은 실패하지 않았어요. 소용돌이라고 말씀하시니까, 언뜻 떠오른 생각이 있어요. 
 
솔직히 그동안은 극단적인 생각을 했거든요. 나 같은 인생 살아서 뭐해. 죽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누군가 내 마음을 알아줬다는 사실에 문득 호기심이 생겼어요.
 
예수님은 날 어떻게 생각하실까? 
 
그동안 나는 감히 예수님 앞에 설 수 없었거든요. 나를 비난하시는 것 같아서요. 
 
제가 무서운 것을 본다는 것 자체가 믿음이 없어서 그런 거잖아요. 
 
예수님 앞에 떳떳이 설 수가 없었어요. 밤마다 교회에서 회개 기도를 했어요. 이런 나를 용서해달라고. 
 
목사님께 조심스럽게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예수님도 나를 비난하지 않으시겠죠? 얼마나 무섭겠냐고 공감해주시겠죠? 
 
나를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원해서 이런 게 아니거든요.” 
 
주연은 또다시 얼굴을 감싸 쥐고 울기 시작했다. 
 
나도 함께 울었다. 
 
감정의 소용돌이에 함께 빨려 들어가면서,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불렀다.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셔서 우리 둘을 살려주시기를 바랐다. 
 

 
급류에 영향받지 않는 존재는 오직 예수님뿐이다. 
 
예수님은 그녀를 찾아가셨고, 그녀를 건져주셨다. 나는 그다음으로 건져졌고, 간신히 내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가 상담실 안에서 머무는 동안, 나는 내가 할 일을 했다. 
 
예수님과의 왜곡된 관계를 복음적 관계로 전환하기 위한 몇 가지 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사모를 극단적으로 의존하는 관계를 정리하고, 남편에게 돌아가 온전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방향을 제시했다. 
 
장기적인 정신과 치료 역시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하며, 시간과 비용이 허락하는 한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정신과에서 처방해준 약을 먹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약을 먹는 것이 신앙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며, 적절한 범위 안에서 유익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그녀에게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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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떠나보낸 지금에도, 나는 여전히 그녀가 느끼는 두려움의 출처를 모른다. 
 
그녀는 여전히 두려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까. 아니면, 조금이나마 평안을 누리고 있을까. 아니면, 견딜 수 없는 두려움으로 또 다른 사람을 찾아내서 매달리고 애원하고 있을까. 
 
평온한 일상에서 문득 그녀가 떠오르면, 죄책감을 느낀다. 
 
나 역시 그녀를 밀어낸 것은 아닌가. 
 
어쩌면, 그녀가 말한 대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를 버린 사람들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잔잔한 죄책감은 바람을 타고 거센 파도가 되어 내 가슴을 퍽퍽 치고 쓸어내렸다. 
 
나는 잠시 상담을 멈추고 나 자신을 돌봐야 했다. 
 
조용한 곳에 내 몸을 밀어 넣고,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죄책감을 떨쳐내고 싶었다. 
 
바쁜 일정 중에 시간을 내는 것이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옳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내 안의 죄책감처럼, 그녀 안의 두려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그녀 안의 두려움은, 내 안의 죄책감처럼 그리스도에게로 달려가는 강렬한 욕망이 될 것이다. 
 
두려움은 절대로 그녀의 인생을 집어삼킬 수 없을 것이다. 두려울수록 그리스도가 더욱 절실할 것이다. 
 
나는 물러났어도, 그리스도는 절대로 물러나지 않으실 것이다. 그녀 안의 그리스도가 그녀와 영원토록 함께하실 것이다.

상처의 속성은 반복이다

지연의 오전은 한가롭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고, 집 안에 머문다. 커피를 내리고, 소파에 앉은 지연은 평온해 보인다. 잠시 후, 그녀는 쓰러지듯 소파에 누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석 달 전, 그녀는 끔찍한 일을 겪었다. 
 
빨랫감을 정리하다가 남편의 주머니에서 유흥업소의 명함을 발견했다. 아내는 충격을 받았다. 빨랫감을 집어던지고,  소파에 앉은 남편에게 소리를 질렀다. 
 
“당신 이게 뭐야?” 
 
남편은 당황했다. 
 
“뭐가?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래?” 
 
“왜 이런 게 당신 주머니에 있어?” 
 
지연은 유흥업소의 명함을 남편에게 집어던졌다. 남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 그거 어제 술에 취해서 받은 거야. 친구랑 포장마차에서 술 마시고 대리기사 기다리는 동안, 길에서 나눠주는 거 받은 거네. 술에 취해서 기억을 못 했어, 내가….” 
 
“그게 지금 말이 되는 소리야?” 
 
“말이 안 되면 뭐 어떻게 해. 그게 사실인데. 당신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지연은 남편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남편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남편은 술을 즐겨마시는 사람이 아니었다. 남편의 친구 A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는 말에 모처럼 만난 자리였다. 
 
“정말 믿어도 되는 거지? 당신 나한테 숨기는 거 없지?” 
 
“아, 그런 거 없다니까.” 
 
지연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사흘 뒤, 지연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남편 친구 A의 아내였다. 지연이 전화를 받아들었을 때, A의 아내가 흐느껴 우는 소리부터 들려왔다. 
 
“언니, 알고 있었어요?”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지연이 되물었다. 
 
“우리 오빠하고 언니 남편하고, 성매매 업소 갔다 왔어요.” 
 
지연은 귀를 의심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오빠가 PC로 카카오톡 메신저를 하다가, 로그아웃을 안 하고 나갔어요. 거기서 두 사람 대화를 읽었는데, 서로 그 짓을 하러 다닌 거예요.” 
 
지연은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사실이야?” 
 
“사실이라니까요. 우리 오빠는 인정했어요. 내가 어제 미친 여자처럼 살림 부수고 난리 쳤다니까요. 언니 이제 우리 어떻게 해요? 저 이 남자랑 못 살아요.” A의 아내는 다시 흐느껴 울었다. 
 
지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떨리는 입술을 이빨로 꽉 깨물고, 뭉개진 발음으로 말했다. 
 
“일단, 전화 끊어.” 
 
남편은 회사에서 조퇴를 하고 한 걸음에 집으로 달려왔다. 무릎을 꿇고 빌었다. 지연은 남편의 옷가지를 집어던지며, 당장 집을 나가라고 울부짖으며 소리를 질렀다.
 
남편의 얼굴조차 보고 싶지 않았다. 새벽에 출근하고 저녁 늦게 퇴근하라고 말했다. 각방을 쓰면서 얼굴조차 마주치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남편은 아내가 시키는 대로 했다. 
 
한 달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지연의 몸과 마음이 망가졌다. 지연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같은 일로 이혼한 선배 언니의 조언이 냉수처럼 지연을 일깨웠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혼은 아니야. 나는 너무 후회스러워. 부부 상담이라도 받아봐.”
 
지연은 남편에게 통보하듯 말했다. 
 
“부부 상담이라도 받자. 이대로 당신도 나도 못 살아.” 
 
남편은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아내가 하자는 대로 했다. 
 
상담 안에서, 두 사람은 일상 대화에서 불가능했던, 진심을 공유했다. 남편은 아내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다. 아내는 오열하듯 고통스러운 감정을 쏟아내었고, 남편은 그 감정을 오랜 시간 받아냈다. 
 
아내는 남편을 용서하고 새로운 기회를 주었다. 남편 역시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노라고 약속했다. 표면적으로, 두 사람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내는 반복되는 기억으로 고통받았다. 
 
남편이 식탁 앞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거짓말을 했던 모습이 떠오르면, 남편을 향한 분노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분노를 느낄 때마다 쥐잡듯 남편을 잡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될 것이 뻔했다. 두 사람의 회복을 위해 혼자 간직해야 할 것으로 여겼다. 
 
남편을 향한 분노는 점차 스스로를 비난하는 목소리로 변질되어갔다. 
 
‘왜 몰랐을까? 얼마나 어리석으면 몰랐을까? 남편 친구의 아내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평생 모르고 살았지 않았을까? 얼마나 멍청하면 그랬을까?’ 
 
지연은 하루에도 몇 번씩 소리 없이 무너졌다.  
 

 
상처의 사건은 일시적이지만, 상처의 기억은 무한 반복이다. 상처의 무시무시한 속성이다. 
 
피해자의 의견을 묻지 않고, 제멋대로 기억을 재생한다. 피해자를 의자에 묶어놓고, 바로 눈앞에서 끔찍한 장면을 무한 반복, 자동 재생하는 것이다.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는 것만으로 상처의 공격을 버텨낼 수 없다. 현명한 전략이 필요하다. 상처의 속성을 알고 올바르게 대처하는 것이다. 
 
첫째, 의자에 묶이면 안 된다. 몸을 움직여라. 아등바등 움직여서, 꽉 묶인 밧줄에 공간을 만들어라. 손목 하나라도 뺄 수 있다면, 밧줄을 풀고 의자에서 탈출할 수 있다. 
 
둘째, 눈을 감지 말아라. 눈을 뜨고 놓친 장면을 세세히 살펴라. 눈으로 바라보는 모든 장면은 상처가 각색하고 편집한 장면이다. 편집되고, 왜곡된 장면을 찾아내라. 상처가 일부러 도려낸 장면이 있다. 찾아내서 원래의 자리에 끼워 넣어라. 
 
지연의 잘못은 없다. 이것이 나의 결론이다. 그러나, 지연은 상처의 왜곡된 기억으로 스스로를 자책하며 끔찍한 시간을 보낸다. 남편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순간의 결단보다 중요한 것은, 용서로 다시 시작된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다. 
 
남편을 용서한 지연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다. 용서의 결단이 고통스럽게 반복되는 기억을 지워주지 않는다. 반복되는 기억으로 고통받는 과정을 남편과 공유해야 할 용기가 필요하다. 
 
고통을 표현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고통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솔직한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다. 
 
“나 오늘도 문득 그 기억이 찾아왔어.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 생각나. 내가 기억으로 힘들 때마다, 내 곁에 있어줄 수 있어? 내가 힘들어서 울면, 따뜻하게 안아줘.” 
 
남편을 향한 비난을 제거하고, 진심을 담아라.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고,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남편은 기꺼이 아내를 돌볼 것이다. 
 
용서받은 남편에게 부탁한다. 상처의 속성은 반복이다. 일 년이든 십 년이든, 아내가 반복되는 상처에서 벗어날 때까지, 남편은 지치지 않고 아내를 돌봐야 한다. 
 
남편이여, 자존심 때문에 과거를 부정하지 말아라. 아내가 용서했다면, 과거는 남편의 실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아내의 상처에 관한 것이다. 용서는 순간이지만, 기억은 평생 간다.    
 
남편의 자존심 때문에, 아내가 툭하면 과거를 꺼내서, 남편의 발목을 잡으려는 것으로 오해한다. 남편의 약점을 언급해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다. 아내가 서툴러서 그렇다.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는 것이다. 
 
진심은 간단하다. 
 
“과거의 기억으로 아프다.”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아라. 
 
“너 때문에 아프다.”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아내가 과거를 언급하며 괴로운 감정으로 되돌아간다면, 아내를 위한 치유자가 되라. 오해를 넘으려면,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아내를 과거에 얽매여 사는 나약한 여자로 취급하지 말고,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불쌍한 여자로 보라.  
 
아내가 남편의 가치를 안다. 그래서, 절망했고, 그래서, 포기할 수 없었다. 상처의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면서도, 남편을 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남편, 당신은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다. 
 
잘못이 후회된다면, 그만큼 아내에게 정성을 쏟아라. 당신의 가치는 변하지 않았고, 고통의 시간을 지나면서,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그날이 오기까지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

“엄마 자격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아이들을 보면 미안한 마음뿐이에요. 남편에게도 마찬가지죠.”  
 
K, 그녀는 서른세 살, 두 아이의 엄마이다. 남편은 그녀보다 열 살 이상 나이가 많다. 그는 젊은 시절 유통 업체에서 일하다, 독립해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성장했다. 바쁜 시간 속에서도 남편은 가정에 최선을 다했다. 주말은 가족과 함께 보내기 위해 애를 썼다. 남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사랑받는다고 느꼈다. 
 
어느 날,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녀는 햇살 좋은 아침에 혼자 마트에 갔다. 물건을 사서 집에 돌아오는 길, 자동차에 주유경고등이 들어왔다. 그녀는 주유소에 방문했다. 자동차 기름 냄새를 맡자마자 불현듯 잊혀진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분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자격 없는 여자야.” 
 
이 문장이 떠오른 그날부터 우울증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남편과 아이들의 눈을 보면 죄책감이 느껴졌다. 주유소 기름에서 기름 냄새를 맡았을 때, 죄책감이 찾아왔다고 했다. 왜 그랬을까? 주유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실 남편에게 말 못할 비밀이 있어요. 언젠가는 말하고 싶지만, 남편은 저를 용서하지 못할 거예요. 젊은 날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거든요.” 
 
그녀는 상고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했다. 처음 일하던 곳은 직원이 10명이 되지 않는 작은 회사였다. 서류 업무로 시작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 매일 똑같은 업무가 지루했다. 그녀는 회사를 그만두고 의류 회사 점원으로 취직했다. 매장에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어울리는 옷을 추천하고 구매로 이어지는 일이 적성에 맞았다. 2년 지나고, 부모님 도움으로 자기 매장을 차렸다.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틀에 박힌 일이 정말 싫었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좋아요. 이런 제가 좋았어요. 그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말이죠.” 
 
어느 날, 매장에 남자 손님이 찾아왔다. 티셔츠 한 장을 구매하고 갔다. 그날부터 매주 정해진 요일이 되면 그가 나타났다. 월요일 오후 7시. 그 남자가 매일 매장을 방문했던 날이다. 짧은 대화가 시작되었다. 사업을 하느라 그동안 제대로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해서 일까. 그 남자의 따뜻한 눈빛과 조금 썰렁한 유머가 좋았다. 
 
그 남자가 데이트 신청을 했다. 그녀는 응했다. 두 사람은 연애를 시작했다. 추운 겨울이 두 번 지났다. 그녀는 남자 친구에게 결혼할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 그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결혼은 나중에 생각하자고 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겨울이 지났다.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매장에 손님이 많아서 받지 못했다. 전화가 다시 왔다. 받지 못했다. 두 세 차례 전화가 걸려왔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 손님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전화기를 들여다보았다. 전화기에는 짧은 문자가 와 있었다. 
 
“000의 아내입니다. 시간 되실 때 전화 부탁 드립니다.”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남자 친구, 그의 아내에게 문자가 온 것이다. 그녀는 탈의실에 들어가 울기 시작했다. 이성을 잃은 그녀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랐다.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100번이 넘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그녀는 남자 친구의 회사도, 집에도 가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그의 전화번호뿐이었다. 일주일 동안 전화기를 붙잡고 살았지만, 남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의 아내와 통화할 수도 없었다. K는 그녀의 남자 친구에게, 그의 아내는 K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통화에 성공한 사람은 없었다.
 
한 달이 지난 후, 그의 아내로부터 다시 문자가 왔다.
 
“그 사람, 세상을 떠났어요.” 
 
K는 반쯤 미친 사람이 되었다. 그녀의 모든 삶이 무너져 내렸다.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했다. 그녀는 그날 이후 6개월 동안 방에 틀어박혀 밖에 나오지 않았다. 매장 매출이 급감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매장 문을 닫았다. 그녀를 살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전국에 유명한 목사님을 찾아다니며 상담 받고 기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높은 곳에 올라가 떨어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녀가 뛰어내리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는 부모님이었다. 부모님을 슬프게 만들 수 없었다. 아파트 옥상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다 내려온 것이 여러 번 이었다. 부모님의 기도 덕분이었을까. 그녀는 조금씩 안정감을 찾았다. 
 
일 년이 지난 후, 그녀는 부모님 일을 돕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주유소를 경영하고 있었다. 딸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전에 바람이나 쐬라고 주유소 경리 일을 맡겼다. 매장을 경영해본 그녀는 주유소 경리 일이 어렵지 않았다. 20대 젊은 아르바이트 직원들과 같이 일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같이 밥을 먹고, 함께 어울리면서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큰 트럭 한 대가 주유소 안으로 들어왔다. 트럭을 운전하던 남자는 기름을 가득 채워달라고 말한 후에 차에서 내렸다. 화장실에 다녀온 그는 유리창 너머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K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날부터 그 남자는 주유소에 매일 기름을 넣으러 왔다. 한 달이 지난 후, 그가 말을 걸었다. 
 
“시간 되세요?” 
“아니요.”
“밥이나 한 번 먹죠?” 
“아빠한테 혼나요.”
“다 큰 어른이 아빠 눈치는.”
“나가세요.”
“알겠어요. 내일 또 봅시다.”
 
어색한 첫 인사를 나눈 그 남자는 현재 그녀의 남편이 되었다.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그에게 말해야 했어요. 자격 없는 여자라고. 그럴 수 없었어요. 용기가 나지 않았거든요. 평생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 남자에게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나는 당신이 아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 말하기로 결심한 날, 남편의 프러포즈를 받았어요. 끝내 말하지 못했죠. 가슴 속 깊은 곳에 진실을 묻어 둔 채 살았어요.”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녀는 행복했다. 두 아이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변함없이 아내를 사랑했다. 성실하게 일했고, 가정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겉으로 보기에 부족함 없어 보이는 그녀에게 우울증이 찾아온 원인을 남편은 알 수 없었다. 
 
“제게는 모든 것이 과분해요. 남편도, 아이들도. 저는 자격 없는 사람이니까요. 솔직한 생각을 말해 드릴까요? 언젠가는 제가 이렇게 행복하게 사는 것을 그 여자가 알게 될 거예요. 그리고 제 남편에게 전화 하겠죠. 그리고 모든 진실을 까발릴거예요. 남편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저는 버려질 거예요. 두 번 다시, 아이들 얼굴을 볼 수 없겠죠. 저의 행복은 유통기한이 정해져 있는 냉장고 음식 같은 거예요. 차갑게 식어버린, 그러나 아직은 상하지 않은.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되요.” 
 
***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날지 모르는 사건이 그녀의 삶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녀가 가진 두려움은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다. 행복한 일상을 누리다가 어느 날, 전화를 받는다. 이전 남자 친구의 아내다. 남편에게 연락이 간다. 남편이 모든 것을 알아버린다. 그녀를 버린다. 아이들을 두고 집을 떠난다. 홀로 남겨진다. 비참한 삶을 산다. 
 
누구도 원망할 수 없다.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정해진 기한만큼, 모든 것이 밝혀지기 전까지만, 그녀는 현재의 삶을 유지할 수 있다. 그녀만의 세상이 흘러가는 방식이다. 
 
과거의 고통으로 인해 비틀어진 관점은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쉽게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깨진 유리 조각을 다시 붙여서 원래의 모습으로 만드는 것만큼 어렵다. 그녀에게 “당신이 두려워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요”라고 말한다면 그녀에게 위로가 될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이미 일어난 일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할 방법은 없다. 그녀는 이미 일어난 일처럼 생각하고 느낀다. 
 
이 상황을 정면 돌파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이 있다. 가장 두려워하는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가정하고 대화를 하는 것이다. 가장 두려워하는 일,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 벌어지는 최악의 상황에 그려본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가장 두려워하는 사건을 외면한다. 두려움의 중심에 서지 않는다. 
 
태풍 변두리가 바람이 가장 세다. 용기를 내어 바람을 뚫고 태풍의 중심에 가 본 사람은 안다. 태풍의 중심은 고요하다. 그 일이 벌어지면 인생이 파멸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그 사건을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할 뿐, 그 사건을 전개하지 않는다. 멀리서만 지켜보고 두려워 떠는 것이다. 
 
그 사건을  끝까지 전개해야 한다. 상상력을 발휘해 그 사건을 머릿속에서 전개해야 한다. 사건을 끝까지 전개시키고 나면, 자신이 맞이할 가장 두려운 상황이 의외로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삶을 파괴할지 모르는 최악의 상황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으로 들어온다. 
 
고통의 대가를 지불하고 태풍의 중심으로 들어간 사람은 삶이 고요해진다. 최악의 상황을 대처할 수 있는 강인한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녀는 태풍의 위력을 느낀다. 멀리서 태풍이 불어오고 있다. 시커먼 비구름이 몰려와서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태풍이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앞집이 무너진 것처럼 내 집이 무너질지 모른다. 그녀는 두려워서 눈을 감는다. 눈을 감으면 태풍이 위력은 더욱 거세진다. 엎드려 운다. 다 끝났다고. 모든 것이 파괴될 것이라고 말한다. 
 
우르르 쾅쾅! 번개 소리를 들은 그녀는 갑자기 정신을 차린다.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갑자기 차를 몰고 태풍으로 달려든다. 강한 바람에 차가 흔들리지만, 그녀는 속도를 올린다. 흔들리던 차는 다시 고요해진다. 시커먼 비구름 역시 사라져 버렸다. 고요함만이 남는다. 그녀는 깨닫는다. 태풍은 강했지만, 자신의 집을 파괴해 버릴만큼은 아니었다고. 태풍을 미리 경험해보고 나서 깨닫게 된 사실이다.
 
남편이 모든 것을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까. 그녀를 버릴까. 아니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처럼 살아갈 것인가. 아무도 모른다. 태풍의 바람은 거셀 것이다. 남편이 흔들리다 쓰러질지, 아니면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설지. 남편의 반응은 예상할 수 없다. 
 
견뎌주면 아내와 살고, 견디지 못하면 아내를 버리게 될 것이다. 남편의 반응이 태풍이라고 전제한다면,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남편 반응은 태풍이 아니다. 태풍의 실체는 그녀 마음 속 두려움이다. 
 
그녀는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다. 그녀는 이전 남자친구가 유부남인 것을 알지 못했다. 유일한 잘못은 그녀의 남자 친구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녀는 신이 아니다. 그녀의 잘못이 아니란 뜻이다. 그녀가 죄책감을 느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무죄이다. 그녀는 비난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다. 
 
그녀가 남편에게 모든 사실을 미리 말해야 할 책임은 없다. 끝까지 숨겨야만 한다는 말도 아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인생을 살면서 때로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일이 있다. 가장 두려운 일을 마음속으로 미리 경험한 사람은, 다가올 일에 대해 편안하다. 
 
그 일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것이다. 그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세상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준비를 오랫동안 한 사람이라면, 그 일이 일어난 다음부터, 자신의 진정한 가치가 빛을 발하기 발한다.

커터칼로 자해를 합니다

남자친구와 헤어졌어요. 석 달 전부터 손목에 커터칼로 자해를 해요. 피가 송글 맺힌 걸 보면 마음이 놓인다고 할까요. 엄마가 알았어요. 등짝을 때리고 울고 불고 했는데, 나는 마음이 편했어요. 누구라도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내가 얼마나 아픈지.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시군요. 마음이 아픕니다. 절망적인 순간에 나에게 질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짧은 말 몇 마디보다 내 진심이 먼저 전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용기 내어 몇 자 적어봅니다.  
 
당신의 힘든 마음, 사람은 몰라도 주님은 아십니다. 
 
사람은 모른다는 말을 먼저 하고 싶습니다. 여기에는 당신도 포함됩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자신이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 모르고 살아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의존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거나, 다른 일에 몰두해서 외로움을 잊으려 했을 겁니다. 자세한 정보가 없으니 추측할 뿐입니다.  
 
추측을 했으니, 근거가 있어야겠지요. 남자친구와 헤어졌을 때, 당신이 선택한 행동은 당신의 모든 세계가 무너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별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며, 스스로를 비난할지 모릅니다. 공격 대상이 상대방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근거입니다. 
 
이별에는 서로의 이유가 있는 겁니다. 아무도 일방적으로 잘못하지 않아요. 아무리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도 소용 없겠지요. 이별이 주는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니까요. 
 
당신은 하루 아침에 극단적인 행동을 한 게 아닙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을 겁니다. 말할 사람 조차 생각나지 않을 거예요. 슬픔을 어떻게 표현할 지 몰라 답답할 겁니다. 아픈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서, 자신을 파괴하는 행동을 선택한 겁니다. 
 
어머니가 그 장면을 목격했을 때, 당신이 느낀 감정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어머니가 당신의 자해를 발견했을 때, 그 순간 마음이 편해졌다는 건 상황과 맞지 않는 독특한 감정입니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준 거니까요. 
 
주변에 마음 터놓고 말할 사람이 없을까요. 단 한 사람이라도 당신을 지켜줄 사람이 있기를 바랍니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슬픔이 때문에, 일시적으로 자신을 고립시킨 것이기를 바랍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을 때, 한 사람이라도 당신을 안아주기를 바랍니다. 
 
만약 생각나는 사람이 없다면, 전문적인 도움을 받으셔야 합니다. 상담이나 치료를 받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손목의 상처는 가벼워도, 마음의 상처는 심각합니다. 잠시라도, 자신을 돌볼 시간을 가지세요.   
 
당신이 얼마나 아픈지 당신 스스로 모릅니다. 당신이 표현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도 모릅니다. 그러나, 절망할 필요 없습니다. 
 
당신이 다른 누군가를 찾기 전에 목사인 나에게 질문한 이유가 있겠지요. 나는 그에 맞게 대답을 하겠습니다. 사람은 몰라도 주님은 아십니다. 
 
 당신의 모든 감정, 예수님께 전부 표현하세요. 서투르게라도 예수님께 표현하다 보면, 언젠가는 사람들에게도 편안하게 자신의 감정을 말할 수 있을 겁니다.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천사의 노래

“아까 은아가 뭐라고 한 거야?” 
 
미주가 남편에게 물었다. 
 
“뭘 뭐래? 검정고시 일주일 남아서 긴장되니까, 은아가 기도해달라고 했어.” 
 
미주의 표정이 좋지 않자, 주혁이 미주에게 되물었다. 
 
“왜? 기분 나빴어?”
 
“기분 나쁠 게 뭐가 있어. 목사가 기도해주는 거 당연하지.” 
 
“근데, 분위기가 왜 이래? 말하고 표정 하고 다르잖아.” 
 
“내가 부탁 하나 할까?”
 
“뭔데?” 
 
“기도는 보이는 데서 해도 되는 거잖아. 굳이 그 좁은 방에 기어들어갈 필요는 없어.”
 
“기어 들어가?”
 
“둘이 문 닫고 방에 들어가는 게 불편하다는 말이야.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아니, 은아가 따로 할 말이 있다고 하는데, 어떡해?” 
 
“몰라, 나는 기분 나빠. 은아가 당신을 쳐다보는 눈빛도 그렇고, 당신 눈빛도 마찬가지고.” 
 
“살다 살다 참 별말을 다 듣네. 당신 이러는 거 유치하지 않아? 그냥 고등부 학생이야.” 
 
“나도 알아. 그러니까, 신경 쓰이게 하지 말라고.” 
 
“당신이 신경 쓰지 마.” 
 
“나 지금 말장난하는 거 아니야. 걔가 하고 다니는 것 좀 봐. 나보다 성숙해.” 
 
“그만하자. 나 이러다 폭발하겠어. 사람을 뭘로 보고.” 
 
“내 말은 듣기 싫고, 은아 말은 귀에 쏙쏙 들어오나 봐?” 
 
“아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잖아.” 
 
주혁은 숟가락으로 식탁을 내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쿵 하고 문을 닫는 소리가 미주의 고막을 후려쳤다. 
 
미주는 식탁에서 일어나, 식탁에 놓인 그릇을 싱크대에 옮겨 담았다. 손도 대지 않은 음식이 고스란히 버려졌다. 
 
#
 
“처음에는 ‘내가 너무 민감한가?’ 그 정도로만 생각했어요. 하지만, 날이 갈수록 은아에 대한 집착이 심해졌어요. ‘내 판단이 옳았구나’ 확신을 가진 건 한참 뒤였어요.”
 
미주는 차분하게 말했다.  
 

 
“나 오늘 늦게 들어가.” 전화기 너머로 주혁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왜 무슨 일 있어?” 미주가 물었다. 
 
“오늘 수련회 답사야. 주말이라 고속도로 많이 막힐 거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알겠어. 조심해서 다녀와.” 
 
주혁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렸다. 미주는 불안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미주는 주혁의 서재실로 성큼성큼 들어가, 지난주 고등부 주보를 살폈다. 수련회 일정과 장소가 적혀 있었다. 
 
미주는 소파에 걸 터 앉아 손톱을 자근자근 깨물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아니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게 차라리 나아.’ 서로 다른 생각들이 미주를 덮쳤다. 미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직접 가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두어 시간 만에 수련회 장소에 도착했다. 경비실에 들러, 주혁의 자동차 종류와 색상을 설명했다. 경비는 그런 차가 온 적이 없다고 말했다. 
 
자신이 먼저 도착했다는 사실에 미주는 안심했다. 
 
구석진 곳에 차를 세우고, 의자 시트를 눕혔다. 멀리서 남편이 오는 것을 살펴볼 작정이었다. 
 
그렇게 밤이 되었다. 
 
미주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다. 주차장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미주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마트폰을 꺼내,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잘 도착했어?” 
 
곧바로 주혁에게 답장이 왔다. 
 
“지금 다시 올라가는 길이야. 길이 너무 막혀서 새벽쯤에 도착할 것 같아.” 
 
주혁의 문자를 받고, 미주는 황급히 차에서 내려 경비실을 향해 뛰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경비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검은색 카니발 차량 들어온 적 있나요?” 
 
경비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아니, 아직도 여기 계신 거예요?” 
 
“네, 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요. 검은색 카니발 차량 들어온 적 없다는 거죠?” 
 
“없었다니까요. 오늘 차가 딱 세 대만 들어왔는데, 여기 공사하는 차량이에요.”
 
“알겠어요.”
 
미주는 다시 주혁에게 문자를 보냈다. 
 
“장난해?”
 
주혁이 답장을 했다. 
 
“뭐가?”
 
미주는 다시 차에 몸을 실었다. 시동을 걸고, 무서운 속도로 내달렸다. 
 
미주에게 답장이 없자, 주혁은 전화를 걸었다. 
 
“당신 왜 그래?”
 
“지금 어디야?” 
 
“말했잖아. 수련회 답사 다녀오는 길이라고. 길도 막혀서 짜증 나는데, 왜 자꾸 그래?” 
 
미주는 참을 수 없었다. 
 
“길이 막히기는 뭘 막혀? 지금 시속 160이야. 너 지금 어디서 뭐하고 있어?” 
 
주혁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나 지금 미행한 거야?”
 
“내가 묻는 말에나 대답이나 해. 너 지금 은아랑 같이 있지?” 
 
“또 그 소리야?” 
 
“묻는 말에만 대답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진짜 미쳤나 봐. 전화 끊어!”
 
주혁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미주는 갓길에 차를 세웠다. 운전대를 잡은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목사님, 저 은아인데요.” 
 
주혁의 전화기 너머로 은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은아야. 웬일이야?” 
 
“목사님 혹시 이번 주 주말에 시간 되세요?” 
 
“이번 주 주말? 글쎄…. 무슨 일 있어?” 
 
“다름이 아니라요. 요즘 공부가 안돼서 너무 답답해요. 바람도 쐴 겸, 제가 가고 싶은 대학에 한 번 가보려고요.” 
 
“그거 좋은 생각이네.”
 
“그런데, 목사님.”
 
“응.” 
 
“혹시 시간 되시면 같이 가주실 수 있으세요?” 
 
주혁은 당황했다. 
 
“그건 생각을 조금 해봐야 할 것 같은데…. 주말에 목사님이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 
 
“아, 그래요…. 그러면, 목사님 시간 되시는 날 같이 가요. 그래 주실 수 있죠?” 
 
주혁은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러자, 그럼.” 
 
반대편에서 은아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통화를 끊고 주혁은 생각에 잠겼다. 
 
옳지 않은 결정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주혁은 은아를 외면할 수 없었다. 
 

 
“은아는 결핍이 있는 아이에요. 저도 처음에는 은아가 불쌍해서 잘 챙겼거든요. 이렇게 결론이 날지는 꿈에도 몰랐어요.
 
은아는 선교사님 자녀에요. 어릴 때부터 마음고생을 했겠죠. 현지에서 적응을 못했어요. 은아 부모님이 고민이 많았겠죠. 결국, 한국에 있는 친구 목사님 가정에 은아를 맡겼어요. 
 
그 친구 목사님이 저희가 모시는 담임 목사님이세요. 제 남편은 그 교회 부목사인 거죠. 남편이 고등부를 맡은 시점에 은아가 온 거예요. 
 
남편이 은아를 데려다가 저녁 한 번 먹이자고 말하길래 그러자고 했죠. 저녁을 먹으면서 은아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는데,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남편과 제가 은아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어요. 
 
그때부터 남편이 은아에게 연민을 느낀 것 같아요. 은아와 자주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잘 챙겼죠. 은아를 만나고 온 날이면, 저녁 늦게까지 은아 이야기를 했어요.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닌데, 시간이 갈수록 기분이 이상해지는 거예요. 마음 같아서는 “왜 하루 종일 은아 이야기야? 내 이야기는 안 들어줘?”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한 마디 쏘아붙이고 싶은데, ‘유치하게 내가 왜 그러지?’ 생각하고 말았죠. 자존심 상하잖아요. 그냥, ‘저러다 말겠지. 언제까지 저러겠어.’ 그 정도로만 생각했어요.” 
 
남편이 은아 이야기를 할 때마다, 가슴에 뭐가 걸린 것처럼 답답했거든요. 그때는 이유를 몰랐지만, 지금은 알아요. 남편도 결핍이 있는 사람이거든요. 남편이 은아에게 빠져버릴까 두려웠던 거죠.  
 
은아의 결핍과 남편의 결핍이 교묘하게 만나서, 이런 상황까지 온 것 같아요.”
 
“남편과 제가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말씀드리고 싶어요. 은아와 저는 겹치는 게 많아요. 아마 남편은 스스로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저에게서 느꼈던 감정을 은아에게도 느끼는 것 같아요. 남편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요.” 
 

미주의 직업은 간호사였다. 3교대로 돌아가는 고된 일은 미주의 삶을 갉아먹었다. 미주는 버텨야 했다. 미주의 월급은 미주의 독립이었다. 
 
스스로 돈을 벌면서, 지긋지긋한 집을 떠났다. 미주는 아버지가 싫었다. 폭력적인 아버지는 미주가 성인이 되어서까지 손찌검을 했다. 
 
아버지의 맨손이 얼굴에 닿을 때, 미주는 소름이 돋았다. “차라리 매로 때리라”고 울부짖어도 소용없었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자기감정에 충실할 뿐이었다. 
 
아버지의 폭력에 견디다 못한 미주는 맨발로 집을 뛰쳐나왔다. 갈 곳이 없었다. 미주는 주머니에 담겨 있던 자동차 열쇠를 발견했다. 엄마의 부탁으로 저녁에 장을 보고 와서 미처 빼놓지 못한 열쇠였다. 
 
 미주는 가만히 운전석에 앉았다. 서러운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미주는 울다 지쳐 잠에 들었다.
 
퍽, 퍽, 퍽. 
 
미주를 깨운 것은 야구방망이었다. 아버지는 술기운에 야구방망이를 들고, 미주를 찾아다닌 것이다. 차 안에서 자고 있던 미주를 발견한 아버지는, 야구방망이로 사정없이 유리창을 내리쳤다. 
 
자동차의 경보음이 울리고, 경비가 와서 말려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욕을 하면서, 미주를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자동차 유리창이 사정없이 갈라졌다. 유리창에 새겨진 촘촘한 거미줄이 미주를 덮쳤다. 손가락 하나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미주는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집을 떠났다. 
 

“제가 일하는 병원하고 집하고 두 시간 넘는 거리였거든요. 병원 가까운 쪽에 원룸을 얻었어요. 당연히 교회도 옮겨야 했어요. 집 근처 교회를 가면, 아버지를 우연히라도 마주칠까 봐 두려웠거든요. 
 
남편을 만난 것도 그때쯤이에요. 새로 다니기 시작한 교회에서 남편을 처음 만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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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혁의 전화기에 은아의 이름이 새겨졌다. 주혁은 전화를 받아들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그래. 은아야.” 
 
“목사님, 바쁘실 때 전화드렸죠? 
 
“아니 괜찮아. 말해.”
 
“혹시, 이번 주말에는 시간 되세요?”
 
같은 질문만 세 번째였다. 
 
“이번 주말은….”
 
“바쁘신 거죠?” 
 
은아는 풀이 죽었다.
 
“아니야…. 차라리 이번 주에 가자. 다음 주부터는 더 바빠질 것 같아.” 
 
“정말이에요, 목사님?” 
 
“그럼. 그런데, 은아야. 목사님이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뭔데요?”
 
“아무래도 은아하고 목사님만 단둘이 가면, 사람들한테 오해를 받을 것 같아. 혹시, 둘이 같이 가는 거 비밀로 해줄 수 있어?”
 
“그럼요, 목사님. 그렇게 할게요. 저도 비밀로 하고 싶었어요.” 
 
“그래, 고마워. 그럼 주말에 보자.”
 
“아, 잠깐요, 목사님. 제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응, 말해.” 
 
“저, 있잖아요. 목사님이 좋아요.” 
 
“고마워. 나도 그래.” 
 
“그게 아니라요, 목사님. 저 진심으로 목사님을 좋아한다고요.”
 
“….” 
 

“남편이 은아에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알 것 같아요. 우리도 비슷하게 시작했거든요. 
 
교회를 옮기고 처음 간 수련회에서 간증을 한 적이 있어요. 하나님이 제게 은혜를 주셨거든요. 그동안 제게 있었던 일들을 솔직하게 말했어요. 
 
간증이 끝나고, 남편이 제게 다가왔어요. 많이 힘들었겠다면서 위로해주는데, 남편의 태도나 눈빛이 너무 좋더라고요. 
 
그다음부터 남편이 계속 연락을 했어요.  거절을 하다가, 결국 처음 만나 식사를 했죠. 그 자리에서 제가 그랬거든요. ‘지금 누구를 만날 상황이 아니다.’ 
 
남편은 괜찮데요. 자기는 충분히 기다릴 수 있다고. 솔직히 남편이 그렇게 말할 때, 좋았어요. 저도 사랑받고 싶었나 봐요. 
 
제가 거리를 두고 지냈는데도, 남편은 저를 기다리면서, 헌신적으로 사랑하고 아껴줬어요. 결국, 제 마음도 열렸죠. 
 
남편은 섬세하고 따뜻한 사람이에요. 은아를 만나기 전까지는, 나만 사랑해줬어요. 귤 하나를 먹어도, 제 입에 먼저 넣어줄 정도로 다정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
 
주혁은 자정이 넘어서 집에 들어왔다. 
 
미주는 미쳐 날뛰고 싶었지만, 주혁의 말을 끝까지 들어볼 작정이었다. 
 
“지금 어디 있다 오는 건데? 수련회 답사 갔다 온다며? 은아랑 같이 있었지?”
 
“나중에 이야기하자. 지금은 상황이 복잡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주혁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당신 정말 미쳤어? 고등부 제자하고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기는 뭐가 아니야! 그럼, 뭔데?”
 
“지금 말하기 싫다고 했잖아.” 
 
“너 목사 아니야. 목회하지 마. 너 그럴 자격 없어. 당장 교회에 알리고, 너 같은 놈 두 번 다시 목회 못하게 할 거야.” 
 
“그래, 잘 됐다. 제발 그렇게 해줘! 누가 목회하고 싶다고 했어? 지금까지 억지로 한 거야. 사람들 눈치 보는 것도 이제 지긋지긋해! 다른 일하면서, 나답게 살 거야. 알겠어?”
 
미주는 충격을 받았다. 주혁이 그러지 말라고 사정할 줄 알았던 것이다. 남편의 당당함에 미주는 무너졌다.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기에,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너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완전 돌았어. 경찰에 신고할 거야.” 
 
“은아 고3이야. 내년에 대학 가. 이제 몇 달 안 남았어. 나 이혼하고 싶어.” 
 
미주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그녀의 결혼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릴지 몰랐던 것이다. 
 

“은아가 성인이 되면, 정식으로 마음을 고백하겠다고 했어요. 
 
은아가 받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바보 같은 말도 했고요. 자기 마음을 받아줄 때까지 기다린데요. 언제든 곁에서 지켜줄 거라고….” 
 
미주는 남편이 은아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여주었다.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동안, 은아와 주고받은 연애편지였다. 
 
편지에는 도발적인 내용이 담겨있었다. 
 
“차 안에서 너를 안고 있는 동안, 절제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들었어. 너의 호흡, 너의 살결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거든. 하지만, 참을 거야. 은아가 성인이 될 때까지, 소중하게 지켜줄 거야. 우리 조금만 견디자.” 
 
주혁은 유치하다 못해, 파렴치했다. 피가 거꾸로 쏟는 듯했다. 미주가 편지를 찢어버리지 않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미주를 바라보았다. 미주는 내 눈빛에 대한 응답으로 차분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미치겠죠, 목사님? 저도 그랬어요. 왜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지는 모르겠는데, 한 편으로는 이 인간이 불쌍하더라고요.”
 
예상치 못한 미주의 답변에 내 작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주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저도 이 인간이 미웠어요. 지금도 밉고요. 그런데, 문득 궁금하더라고요. 도대체 이 인간이 왜 이럴까? 그러다, 알게 되었죠. 시어머니가 남편을 이렇게 키웠어요.
 
남편은 목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요. 시어머니의 강요로 목사가 된 거죠. 황당하게 들리시겠지만, 사실이에요. 
 
남편은 시어머니에게 반항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살았어요. 착한 아들이었죠. 남편이 어머니 말에 순종한 덕분에, 전도사 때부터 어머니가 꼬박꼬박 생활비를 지원해줬어요. 
 
좋은 목사님 밑에서 잘 배우라고 지금  사역하는 교회를 소개해 준 거고요. 몇 년 후에는 교회도 개척시켜주신다고 자주 말씀하셨어요. 크게 건물은 못 지어줘도, 상가 하나는 얻어줄 수 있다고 명절마다 말씀하셨거든요.  
 
그럴 때마다 남편은 기가 죽었어요. 옆에서 지켜보는 저도 속이 상했죠. 그 사람도 그 사람 나름의 상처가 있을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제 잘못은 아니겠지만, 제 안에서도 이유를 찾아봤어요. 남편이 왜 그랬을까?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요. 남편이 힘들어하는 동안, 제가 남편 곁에 없었거든요. 
 
엄마가 많이 아팠어요. 엄마가 암 투병을 하는 동안 제가 엄마를 돌봤거든요. ‘엄마를 혼자 두고 나와서 엄마가 그런 몹쓸 병에 걸린 건 아닌가’, 하루에도 몇 번씩 무서웠어요. 엄마가 이대로 세상을 떠날까 봐서요. 
 
다행히 엄마는 회복되셨어요.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엄마 곁에 있었네요. 남편이랑 여행이라도 한 번 다녀올 생각이었어요. 남편에게도 미안했고, 저도 많이 지쳐있었고….” 
 
미주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조용히 우는 동안, 나는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눈을 찌르는 바람에, 자꾸 눈물이 났다. 
 
“그런데, 목사님. 제가 엄마가 아플 때, 엄마 옆에서 기도를 했거든요. 엄마 대신 제가 아파도 되니까, 엄마를 낫게 해달라고요. 그런 기도가 응답되나 봐요.
 
남편이 속 썩일 때, 몸이 조금 이상하더라고요.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는데, 종양이 발견된 거예요. 곧바로 수술을 받았어요. 
 
혼자 수술을 받고, 나오는데 서러워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날 결심했어요. 남편도 보내주고, 엄마도 내려놓고, 이제 나를 위해 살고 싶다고….”
 

 
병원에서 돌아온 미주는, 차분한 목소리로 주혁에게 말했다. 
 
“이혼해 줄게.” 
 
“정말?”
 
주혁은 미주의 말을 반겼다. 
 
“응. 며칠 만 기다려 줘. 나도 내가 살 집은 구해야 하니까.”
 
“그럼, 물론이지.” 
 
“최대한 빨리 나갈 거니까, 걱정은 하지 말고.”
 
“알겠어. 그동안 고마웠어, 미주야. 나 만나서 고생 많았고. 앞으로 잘 살아. 나도 잘 살게.” 
 
“우리 앞으로 이혼 관련해서 꼭 필요한 말만 하고, 서로 말 걸지 말자.” 
 
“그러고 싶어?”
 
“응. 나 더 이상 당신하고 말하고 싶지 않아.” 
 
“알겠어, 그럼. 꼭 필요한 말은 문자로 할게.” 
 
“그렇게 해.” 
 
주혁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서재로 들어갔다. 은아와 통화하는 주혁의 목소리가 거실을 넘어, 미주가 있는 안방까지 크게 들렸다. 
 
“응, 허락받았어. 이혼해준대. 응, 그래. 진짜라니까. 그래, 확실해. 이따 저녁에 만나. 응…. 나도.” 
 
미주는 화장대 위에 놓인 액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주와 주혁이 신혼 때 찍은 사진이었다. 
 
미주는 아무런 감정도 없이, 액자에서 사진을 분리했다. 사진은 구겨져서 쓰레기통에 버려졌고, 액자는 상자에 가지런히 담겼다. 미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옷가지들을 꺼냈다.
 
여행을 가듯, 홀가분한 마음이었다.    
 

 
“목사님, 제가 한 달 정도 상담을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선교지에 잠시 다녀오고 싶거든요. 
 
제가 청년 때, 단기선교를 갔다가 은혜받은 곳이 있어요. 그곳에 계신 선교사님께서 저를 많이 아껴주셨거든요.
 
꼭 다시 가보고 싶었는데, 살다 보니까 기회가 없었어요. 이제 홀가분해졌으니까, 한 번 다녀오려고요. 도착하면 바로 연락드릴게요.” 
 
그녀가 선교를 떠난 한 달 동안, 그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나는 그야말로 무능력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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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이라는 시간은 의외로 짧았다. 그녀는 밝은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났다. 
 
“선교지에서 뜻하지 않은 은혜를 받았어요. 그곳에서 아이들을 다시 만났을 때, 저는 깨달았어요. 내가 무너지는 동안, 예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놓치고 있었구나. 
 
아이들이 다른 언어로 해맑게 찬양을 하는데, 천사의 노랫소리를 듣는 것 같았어요. 내 안의 모든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이랄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르더라고요. 
 
잠깐의 위기도 있었어요. 선교지에 있는 동안, 남편이 이혼소송과 관련해서 메신저로 말을 걸었는데, 나쁜 감정이 몰려오더라고요. 메신저 프로필이 커플링 사진으로 바뀌어 있었거든요. 둘이 손을 잡고 커플링이 크게 보이게 사진을 찍었더라고요.
 
당분간은 힘들겠죠. 계속 화나고 혼자 울고. 마음 같아서는 두 사람이 끔찍한 벌이라도 받았으면 좋겠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마음은 아니겠죠.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요. 
 
하나님께서 내게 건강을 주시고, 새로운 은혜를 부어주시면, 다시 선교지로 나가고 싶어요. 선교지에서 제가 확실히 깨달은 게 있거든요. 
 
“예수님은 정말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미주는 목이 메이는지, 잠시 감정을 추슬렀다. 다음에 일어날 일을 예상이라고 했다는 듯이,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남편도, 부모도,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지만, 예수님은 정말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미주는 오열했다. 
 
나는 손수건이 없었다. 눈물이 흐르면, 흐르는 데로 내버려 두었다. 다행이었다. 미주는 손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려서 나를 볼 수 없었다. 
 
나는 미주를 바라보았다. 눈물로 굴절된 시선은 착시현상을 일으켰다. 소파에 기대어 앉은 미주가 마치 예수님 품에 안겨 있는 듯했다. 
 
나는 안심했다. 상담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걱정하지 않았다. 그동안 참아왔던 눈물을 마저 쏟아냈다. 
 

 
상담을 종결하고 내 일상을 살던 어느 날, 미주는 내게 메신저로 안부를 전했다. 그것은 마치 손으로 정성스럽게 써 내려간 편지 같았다.  
 
“목사님, 저는 요즘 풍랑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있어요. 말 안 해도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두려움과 평안함 사이를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 갔다 해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 지금 잠시 외국에 나와 있어요.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거든요. 다시 한국에 돌아가면, 그동안 못 해본 것들을 해보고 싶어요.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내면서, 계속 기도하고 있어요. 선교지에 가서 아이들을 돌보며 살고 싶은데, 그 꿈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지 모르겠어요. 생각나실 때, 함께 기도해주세요.” 
 
그녀가 보낸 글의 분량만큼 나도 답장을 보냈다. 답장의 세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응원이나 격려였을 것이다.  
 
다만, 여러 번 썼다 지웠던 문장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마음속에 담아두고 끝내 보내지 못한 문장이었다. 
 
“당신은 나를 치유했고, 내게 복음을 전했어요. 당신은 더 이상 내담자가 아니에요. 당신은 치유자이며, 동역자입니다.”
 
과도한 기대로 미주가 부담을 느낄까 두려웠다. 힘든데 씩씩한 척할까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내 가슴에 묻어둔 말은 진실이었다. 
 
미주는 치유자이며, 전도자이다. 
 
그녀는 몰라도, 주님은 아신다.

분명히 보았다

“야, 너 서울에서 전학 왔다며?” 
 
“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나는 대답했다. 
 
명식이 형은 마을의 전설이었다. 서울에서 이사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명식이 형의 클럽에 가입을 했다. 
 
명식이 형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명식이 형이 데리고 다니는 또래 역시 전부 초등학생이었다.
 
그렇다면, 명식이 형은 중학생이었을까? 고등학생이었을까? 아니다. 
 
어른이었다. 
 
흐릿한 기억을 추적해보건데, 적어도 이십 대 중후반이었을 것이다. 다 큰 어른이 동네 꼬마들 사이에서 골목대장을 하고 있으니, 중고등학교 형들도, 클럽에 소속된 아이들을 섣불리 건드릴 수가 없었다. 
 
한 번은 우리 동네 규칙을 아무것도 모르는 다른 동네 중학생이, 명식이 형이 돌봐주는 애 하나를 잘못 건드렸다 봉변을 당했다. 
 
명식이 형은 중학생에게 맞았다는 아이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다른 동네까지 직접 찾아갔다. 클럽 아이를 때리고 도망간, 중학생을 기어코 찾아내서 사정없이 패줬다. 부모가 달려 나와 욕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뜯어말려도 소용 없었다. 
 
말리는 부모를 밀쳐내고, 그 집 아들을 두들겨 팰 정도니 명식이 형이 나타났다고 하면, 동네 어른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명식이 형은 동네 꼬마들을 모아놓고 틈만 나면, 강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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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강해야 돼, 알아? 약하잖아? 그거 등신이야, 등신. 남자가 힘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야.” 
 
한심한 듯이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주먹을 쥐는 방법을 제대로 가르쳐 준다며,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자, 먼저 손바닥을 쭉 펴봐. 그리고, 손가락 네 개를 반으로 접어. 그다음, 손바닥 안의 살을 움켜쥔다고 생각하고, 주먹을 꽉 쥐는 거야. 그럼, 엄지손가락이 자연스럽게 딸려오거든. 주먹 안에 살이 조금 잡혀야 힘이 꽉 들어가는 거야. 그다음에는 이걸로, 그냥.”
 
명식이 형은 이론만으로는 안되겠다는 듯이 아이들을 비슷한 체형으로 둘씩 짝을 지었다.  
 
“야, 이제부터 내 말 잘 들어. 오늘부터 서바이벌이야. 이긴 놈만 살아남는다. 지는 놈은 이제부터 우리 클럽 아니야. 바로 탈락이다.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죽도록 싸워. 알겠지?” 
 
서로 눈치를 보고 서성거리니까, 명식이 형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미치겠네. 야, 공과 사를 구분 못해? 지금은 친구가 아니라, 적이라고. 미친 듯이 싸워라. 싸우는 척만 하면, 나한테 죽는다.” 
 
아이들의 반응은 대략 둘로 나뉘었다. 
 
“너 죽었어”,라고 기세등등하게 상대를 바라보는 아이들. 그리고, 잔뜩 주눅이 들어 겁을 먹고,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만 같은 아이들.
 
승부는 금세 갈렸다. 
 
명식이 형은 패배자들을 한 줄로 세웠다. 그리고, 말했다. 
 
“여기 이놈들은 패배자야. 우리 동네에 같이 살아도, 더 이상 우리 클럽은 아닌 거지. 야, 한 줄로 나와서 이 새끼들 신발에 침 뱉어.” 
 
나는 한 살 많은 형의 신발에 침을 뱉어야 했다. 뱉고 싶지 않았다. 그 형은 이미 울고 있었다. 그렇게, 비참한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엉거주춤 망설였다. 
 
명식이 형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뭔가 번쩍했고, 나는 잠깐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코밑으로 진한 쑥 냄새가 났다. 쑥을 빻아 둥그렇게 말아서 콧구멍에 쑤셔 박은 것이다. 그러면, 피가 멈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어린 마음에 서러워서 눈물을 흘렸다. 명식이 형은 그것마저 못마땅했는지, 내 볼을 두 손가락으로 세게 움켜쥐고 사정없이 흔들면서 말했다. 
 
“야, 울어? 남자 새끼가 우냐고? 죽고 싶지 않으면, 그만 울어라.” 
 
살아남은 아이들은 다음 날부터 싸움 기술을 배웠다. 애들끼리 마주 서서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학교 마치고 집에 오면 학원 가듯 명식이 형의 클럽으로 가야 했다. 그것이 하루 일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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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을 가르치는 시간을 제외하면, 명식이 형은 친구처럼 다정했다. 
 
“우리 삼촌이 비디오 가게 하거든. 언제든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구해다 줄게.”
 
명식이 형의 집에 놀러 가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수 십 개의 비디오테이프였다. 책상 위에 책 대신 비디오테이프가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제목은 다양했지만, 장르는 단순했다. 무술 영화 아니면 액션 영화였다. 
 
명식이 형의 집에서 영화를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영화를 보다가 배가 고프면, 명식이 형이 끓여준 라면을 먹었다. 그리고 또 영화를 봤다. 
 
화면이 유난히 밝게 빛나는 것 같으면, 바깥이 어두워졌다는 뜻이었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삼삼오오 집으로 흩어졌다. 
 
나는 영화를 좋아했다. 영화를 계속 보기 위해서라도 명식이 형의 클럽에 계속 남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낯선 남자가 찾아왔다.  
 
“여기 혹시 왕명식 씨 댁이 어딘가요?” 
 
마을 입구에서부터 보이는 십자가를 보고, 교회다 싶었는지, 낯선 남자는 우리 집을 찾아와 길을 물었다.
 
아버지는 손가락을 이리저리 사용해 명식이 형의 집을 알려줬다. 명식이 형은 집에 없었다. 나 역시 명식이 형을 따라다니느라 낯선 남자가 우리 집에 찾아와 아버지에게 길을 물었는지 알지 못했다. 
 
낯선 남자는 명식이 형의 집 앞에서 명식이 형을 한참 동안 기다렸다. 
 
동네 꼬마들을 거느리고 자기 집으로 들어가려던 명식이 형은, 멀리서 자기 집 앞에 서 있는 낯선 남자를 발견했다. 당황한 티도 내지 않고, 곧바로 뒤돌아서서, 꼬마들에게 말했다. 
 
“야, 오늘은 뱀 잡으러 가자. 지금 산딸기 철이니까, 산딸기도 먹고 하면 되겠네. 뒤로 돌아!” 
 
저녁쯤해서,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오늘 읍내 비디오 가게 사장님이 우리 집에 와서, 명식이 집을 묻더라고. 명식이가 빌리고 안 갖다 준 비디오테이프가 수 십 개라네. 아무리 전화를 해도 안 받아서, 집까지 찾아온 거야. 연체료가 수 십만 원인데, 그놈이 그 돈을 어디서 구한다냐.” 
 
나는 명식이 형에게 들은 말이 있어서, 아버지의 말이 끝나자마자 명식이 형의 편을 들었다. 
 
“아니야, 아빠. 명식이 형이 그랬어. 삼촌이 비디오 가게를 한다고. 거기서 가지고 온 거야.” 
 
아버지는 으흠하고 팔짱을 끼시더니, 타이르듯 내게 말했다. 
 
“요즘 너, 명식이네 너무 자주 가는 것 같아. 거기서 무슨 일이 있어? 동네 애들도 그 집에서 살다시피 하던데. 아빠가 걱정 안 해도 되는 거지?” 
 
나는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해서라도, 명식이 형의 집에 놀러 가고 싶었다.  
 
“아니야. 명식이 형이 숙제도 도와주고 그래. 모르는 문제도 알려주고. 그러니까, 애들이 좋아서 가는 거지. 나도 그렇고.” 
 
아버지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셨다가, “알겠다”라고 짧게 말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명식이 형이 한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온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글을 모르는 명식이 형이, 동네 아이들의 숙제를 가르쳐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내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순간적으로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아버지는 놀라셨을 것이고, 그 이유가 궁금하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 몰래 명식이 형을 찾아가셨고, 명식이 형을 차에 태우고 직접 운전을 해서 비디오테이프를 가게에 돌려주었다. 사장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밀린 연체료를 최대한 줄여서 명식이 형 대신 연체료를 해결해주었다. 
 
아버지는 그 모든 사실을 당시에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명식이 형이 마을을 떠나고 나서야, 어머니를 통해 전해 들은 것이다. 
 
나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명식이 형을 따랐고, 명식이 형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이들을 거느렸다. 
 
적어도, 그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야, 우리 오늘 한댁 개울에 물고기 잡으러 가자. 형이 모래무지 잡아서, 기름에 바로 튀겨줄게. 라면도 사가서 같이 끓여먹자.” 
 
나를 비롯한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개울을 따라 걷는데, 그 발걸음이 얼마나 신나던지, 태평양 너머의 디즈니랜드를 가는듯했다. 
 
“물속을 걸어 다닐 때, 조심해야 돼. 포클레인이 모래 퍼간다고 깊이 파놓은 곳이 있어. 발 잘 못 디뎌서 빠지면 큰일 난다. 내 눈앞에서만 놀아.”
 
아이들은 흥분한 상태였다. 앞뒤 안 가리고 물에 뛰어들어 정신없이 물장구를 쳤다. 
 
명식이 형이 물속에서 그물을 들고, 앞으로 걸어나가면, 아이들은 명식이 형의 뒤를 졸졸 따랐다. 물고기가 놀라 도망치지 않도록 살살 걸으니, 그 장면이 마치 비밀작전 같았다. 
 
물고기가 꽤 많이 잡혔다. 명식이 형이 실력을 발휘했다. 버너 두 개를 준비해서, 한쪽에는 기름을 올리고, 다른 한쪽에는 물을 올렸다. 약속대로 물고기를 튀기고, 라면을 끓여줄 생각이었다. 
 
물고기를 산 채로 튀기는 것을 처음 봤다. 명식이 형은 손가락 길이만한 크기의 모래무지를 들어 올리더니, 순식 간에 내장을 발라냈다. 머리 부분을 잡고, 몸통을 걸쭉한 튀김 반죽에 담갔다 빼서, 바로 달궈진 기름 냄비에 넣었다. 젓가락으로 머리 부분을 잡고 있어서, 튀김옷을 입은 몸통 부분만 아삭하게 튀겨졌다. 
 
어찌나 고소하고 맛있던지, 둥지에서 어미 새를 기다리는 새끼 새 마냥, 아이들이 입을 벌리고 줄을 서서 명식이 형이 모래무지를 입안에 떨궈주기만 기다렸다. 
 
옆 냄비에서 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명식이 형은 파를 쏭쏭 썰어 넣고 라면을 맛있게 끓였다. 아이들은 각자 나무젓가락을 들고, 라면에 달려들었다. 
 
환상적인 경험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다다다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길가를 지나가는 엔진 소리가 아니라, 이곳을 향해 긴박하게 다가오는 거친 소리였다. 
 
두 명의 남자 어른이었다. 둘 다 민소매티를 입었는데, 두 사람의 어깨에 비슷한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뒤에 타고 있던 남자가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어이, 명식이. 너 여기서 뭐 하냐? 동네 꼬마들 데려다가 또 대장 놀이하냐?” 
 
나와 함께 있던 모든 아이들은 기대감에 설레었다. 드디어 명식이 형의 싸움 실력을 직접 보게 된 것이다. 시원하게 한 방 날려주기를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상황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명식이 형은 잔뜩 얼어붙은 채, 말까지 더듬었다. 
 
“아.. 니야. 그게… 아니라….”
 
남자는 껄렁껄렁 걸어와서 물고기를 담아놓은 플라스틱 바구니를 발로 차서 뒤집어엎었다. 
 
모래 위에 엎어진 바구니는 구토를 하듯, 물과 물고기를 쏟아냈다. 모래사장은 기다렸다는 듯, 순식 간에 물을 빨아들였다. 마른 모래로 범벅이 된 물고기들은 금방이라도 호흡이 끊어질 것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남자는 물고기를 찌익 밟고, 명식이 형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협박하듯 말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여기서 이러고 노니까 좋냐? 너 어제 왜 술 먹다 그냥 갔어? 내가 분명히 말했지? 술값 내고 가라고.”
 
명식이 형은 천천히 뒷걸음질 치면서 말했다. 
 
“그게 아니라, 매번 내가 돈을 내니까…. 나도 돈이 없어서….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 애들이 보고 있으니까 그만하자. 부탁이야.” 
 
남자는 우리 쪽을 바라보고, 알 수 없는 미소를 띠더니, 명식이 형의 뺨을 후려쳤다. 
 
“그만하기는 뭘 그만해. 콱 그냥 죽여버릴까 보다. 야, 오토바이에서 가위 꺼내. 이 새끼 이거, 정신을 차리게 해줘야 돼.”  
 
오토바이에 걸 터 앉아, 그 장면을 지켜보던 남자가 오토바이에서 가위를 꺼내 가져왔다. 그리고, 우리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른 말 잘 들어야 돼. 말 안 들으면 이렇게 된다, 알겠지?” 
 
우리는 얼어붙은 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구라도 먼저 울음을 터뜨리면, 모두가 함께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두 남자는 명식이 형을 힘으로 짓눌렀다. 주먹으로 얼굴을 사정없이 내려치고, 꿇어 앉혔다. 
 
가위를 가져온 남자가 명식이 형의 뒤에서 팔로 목을 조였다. 가위를 받아든 남자는 명식이 형을 마주 보고 가위로 머리카락을 뜯어내듯 닥치는 대로 잘라냈다. 
 
명식이 형의 얼굴이 떨어져 내리는 머리카락으로 뒤덮였다. 그 순간 나는, 명식이 형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분명히 보았다. 
 
그는 울고 있었다. 잘린 머리카락 사이로 명식이 형이 애처롭게 울고 있는 모습을, 나는 분명히 보았다. 
 
“이 새끼 이거 꼴좋다. 다음부터 정신 똑바로 차려라. 다음에는 죽여버린다, 진짜.” 
 
남자는 바닥에 가래침을 뱉고, 짜증 난다는 듯이 손등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털어냈다. 다시 오토바이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었다. 
 
명식이 형은 무릎을 꿇고 엎어져서, 머리를 가리고 웅크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희미해져서 귀에 들리지 않게 되었다. 오토바이가 사라지고 나서도, 명식이 형은 웅크린 채 그대로였다. 
 
누구 하나 명식이 형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버너 위에 라면은 냄비에 꺼멓게 달라붙어서, 코끝을 찌르는 쓴 냄새를 풍겼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명식이 형에게 물었다.
 
“형, 괜찮아?”  
 
명식이 형은 움직이지 않았다. 웅크린 채로 목소리만 들렸다. 
 
“다… 꺼져. 지금부터 셋 셀 동안 안 꺼지면, 전부 죽여버린다. 하나. 둘….” 
 
모래사장에 폭탄이 떨어진 것 같았다. 아이들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고, 소리를 지르며 사방팔방 흩어졌다. 
 
나는 울음이 터졌다. 셋을 세고 나면, 명식이 형이 정말로 우리를 죽여버릴 것 같았다. 나는 두려움에 압도되었다. 
 
아이들 모두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엉엉 울면서 각자 살아보자고 죽을 힘을 다해 뛰어서 도망쳤다. 
 
그렇게, 명식이 형의 클럽은 하루아침에 공중분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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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 명식이 형을 마을에서 본 사람은 없었다. 명식이 형이 사라진 마을은 적막했다.  
 
상처는 깊었다. 아이들 모두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식사 자리에서 부모님이 명식이 형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지가 열무김치를 집어 들면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명식이가 사라졌다고 마을 사람들이 난리야. 이 녀석, 도대체 어디로 간 건지, 도통 소식을 모르겠네.” 
 
명식이가 마을을 떠난 것이 어른들 사이에서도 뉴스거리였다. 명식이 형은 마을에 남은 몇 안 되는 젊은 일꾼이었다. 
 
명식이 형은 하루 일당을 받으면, 두세 명의 장정이 해야 할 일을 혼자서 너끈히 해냈다. 농사일이 바빠질 무렵에, 명식이 형이 한 마디 말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은 어른들에게 이만저만 아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그러게. 명식이 걔 정말 불쌍한 앤데. 명식이 어릴 때, 아빠는 사고로 죽고, 엄마는 신 내려서 무당 한다고 명식이 버리고 떠났잖아. 동네 사람들이 명식이를 자식처럼 키웠는데, 갑자기 사라지니까 자식을 잃은 것 같지.” 
 
갑자기 눈물이 났다. 밥을 먹다가 내가 우니까, 부모님이 놀랐다. 당황한 아버지가 아버지가 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 가만히 나를 쳐다보고, 차분하게 말했다. 
 
“너도 명식이가 떠나서 허전하겠다.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그 녀석 다시 올 거니까.” 
 
나는 팔 등으로 눈물을 닦아내면서, 말했다. 
 
“그 형 안 와. 절대로 안 올 거야. 동네 애들도 다 알아. 그래서, 못 온다고.” 
 
부모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나는 밥이 가슴에 얹혀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밖으로 나가서, 골목길을 내달렸다. 명식이 형의 집 앞에 섰다. 
 
마당에서 주먹만 한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명식이 형의 집 대문에 돌멩이를 세차게 내던졌다. 
 
빈 집이었다.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문이 부서져라 흔들었다. 손과 발로 사정없이 문을 때렸다. 분하고 슬퍼서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동굴에 갇힌 남편

“이상한 습관이 생겼습니다. 회사 일이 뜻대로 안 되면 집에 와서 가족들과 말을 하지 않아요. 방에 혼자 들어가 저만의 시간을 보냅니다. 아내든, 아이들이든 그 시간을 방해하면 화를 참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안 되는데, 가족들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던진 적이 있어요. 
 
요즘 회사가 힘들어서 혼자 감당하기 힘들어요. 가족에게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워낙 예민해진 상태니까, 감정을 다스리기 어렵습니다. 당분간만 가족이 이해해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제 이런 모습이 오래가지는 않을 거니까 조금만 배려해주면 좋겠어요.”
 
그는 사십 대 초반, 결혼 10년 차, 열두 살, 여덟 살 두 아들의 아버지이다. 결혼하고 두 아들이 태어나자 지금보다 더 많은 수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 초기 힘들고 어려운 일도 있었지만, 잘 이겨냈다. 
 
사업 시작 후 5년 정도 지나자 업계에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매출이 두 배 세 배 늘면서, 더 많은 직원을 채용하고, 사업 규모를 키웠다. 사업 규모가 커지자 고민도 그만큼 깊어졌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었지만, 현재 상황은 자신이 원하는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과연 사업을 지속해야 할 이유가 있는지 의문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앞으로 밀고 가야 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일에 대한 만족이 사라지자 우울한 기분으로 하루하루 살았다. 어두운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는 이해받기 원했다. 가족은 받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희망사항이었다. 아내는 남편 곁에서 점점 지쳐갔다. 처음에는 남편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했지만, 그마저 그만뒀다. 이제 남편이 집에 들어와 안방 문을 닫으면, 아내와 아이들은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었다. 남편, 아빠가 없어도 전혀 지장 받지 않는 가정이 되어갔다. 남편은 불안했다. 
 
아내가 말했다. 
 
“남편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남편이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면 마음 아프죠. 그렇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는 없다고 생각해요. 더 이상 남편 비위를 맞추는데 지쳤어요. 아이들이 없었다면, 남편을 더 배려해줄 수 있었겠죠. 그렇지만, 아이들이 있잖아요. 아빠 눈치만 보면서 살얼음 위를 걷게 할 수는 없어요. 
 
자기 감정은 자기가 책임져야 하잖아요. 우린 둘 다 성인이에요. 힘들고 어려운 일을 각자 극복할 수 있어야죠. 남편 감정을 대신 책임져 줄 수는 없어요. 우리가 부부인 것은 맞지만, 각자의 몫이 있는 거죠. 남편이 스스로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지 않는 한 아무도 남편의 비위를 맞춰줄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문 닫고 들어가 있는 남편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면 할수록, 제 자존감이 낮아졌어요. 비참하다는 생각까지 했죠. 제가 노력하면 남편이 기분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뒤늦게 깨달았죠.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을. 남편도 알거예요. 남편은 혼자가 아니에요. 책에서 보니까 남자는 자신 만의 동굴이 있다면서요. 동굴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남편이 힘들어하는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녀 역시 마음이 괴로웠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 말을 걸어보기도 하고, 아이들을 시켜서 아빠에게 말을 걸어보기도 했다. 남편은 반응하지 않았다. 귀찮다는 듯 방문을 잠궈버렸다. 노크해도 반응이 없었다. 아내는 그런 남편에게 더욱 지쳐갔다. 
 
남편이 퇴근한 후에 대화를 시도했다. 남편은 지금 말할 기분이 아니니까 나중에 말하자고 퉁명스럽게 한 마디 내뱉고는 방으로 들어가 씻고 침대에 누워 움직이지 않았다. 남편이 차갑게 말할 때마다 그녀는 상처를 입었다. 마음 한 편으로 남편을 이해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남편이 싫어졌다. 
 
남편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에서 성장했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무리하게 사업을 시작했다. 친척, 친구, 주변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서 사업을 시작했지만, 일 년 만에 망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구박하기 시작했다. 사람 취급 하지 않았다. 인격적으로 무시했다. 
 
돈을 빌려준 사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집으로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 어머니가 그 사람들을 상대했다. 조금만 시간을 주면 갚겠다고 설득했다. 소용없었다. 어머니를 밀쳐서 어머니가 다치기도 했다.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오면 아버지는 뒷문으로 도망쳤다. 
 
술에 잔뜩 취해 길에 쓰러진 아버지를 누군가 발견해 연락하면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서 업고 온 날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항상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간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빚을 청산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 빚을 고스란히 떠안고 조금씩 갚아나갔다. 
 
어머니의 팽팽했던 피부가 주글주글 주름질 때쯤, 모든 빚을 갚았다. 아버지가 남긴 빚이 어머니의 젊음을 빼앗았다. 단 한 번이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 그 한 번의 아버지 사업 실패가 그의 어린 시절을 어둠으로 몰아넣었다. 그가 사업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반대했다. 아버지 망하는 거 보고 정신을 못 차렸다고. 피는 못 속인다고. 
 
아내 역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 아버지는 예민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감정 기복이 심했다. 어머니는 아버지 성격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일생 동안 그랬다. 아버지는 항상 갑이었고, 어머니는 을이었다. 
 
아버지 독재는 그녀가 결혼해 독립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노예였다. 그녀가 어머니를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들어온 날은 아버지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것이라고, 아버지가 주말에 낮잠을 자고 있으면, 아버지가 피곤해서 그런 것이라고 아버지를 감쌌다. 어머니는 아버지 위주로 생각하고 말했다. 
 
그녀는 어머니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이 아버지를 응석받이로 만들었다고 인식했다.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모든 상황이 흘러간 것이 결국 아버지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생활비만 가져다주고 아버지, 남편으로써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태도가 싫었다. 아버지와 어긋난 관계는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조금 시간이 필요해.”
그가 말했다.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지.” 
그녀가 말했다. 
 
“우리 부부 아닌가? 남처럼 말하네.” 
“부부니까 이렇게 말하지.”
“사업 힘들어지니까, 남편이 남편같이 안보이지?” 
“아니, 나는 그런 말 한 번도 한 적 없는데.”
“말 안한다고 내가 모를 것 같아?”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한 것 같은데.” 
“말만 아니라고 하지. 사업 어려워진 다음부터 당신이 날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어.”
“아니라고 했잖아.” 
“갑자기 차갑게 대하는데 그걸 못 느낄 사람은 없지.” 
“내가 잘해줘도 소용없잖아.”
“아니, 사업 때문에 힘들다고 말한 그 순간부터, 당신이 날 무시하기 시작했다고.” 
“또, 또, 또 시작이야! 아니라고! 억지로 끼워 맞추지 말라고.”
 
“사업이 힘들어졌다고 말한 그 순간부터 절 대하는 태도가 싹 달라졌죠. ‘아, 이 여자는 내가 사업 실패하면 날 버리겠구나’ 생각하고 있어요. 솔직히 제가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아세요. 아이들 크면 이혼하려고 해요. 이 사람은 제가 필요한 게 아니라, 제가 벌어다주는 돈이 필요한 거예요.”
 
그가 말했다.  
 
“매번 이런 식이에요. 아니라고 말해도, 자기 세계에 빠져서 똑같은 말만 되풀이한다니까요. 차라리 방문을 닫고 있는 게 서로에게 편한 것 같아요. 이상한 사람이요, 정말.” 
 
그녀가 말했다.    
 
***
 
그 누구도 어린 시절 상처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과거 지향적인 사람이 되라는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그런 말 아니다. 과거를 소중히 다루어줬으면 하는 부탁이다. 과거나 현재나 자신은 항상 자기 자신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라는 존재와 함께 살아간다. 
 
“내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혼자일 때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보고 싶은 대로 보면 되니까. 그 또한 개성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결혼해서 배우자와 함께 살아가게 되면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눈앞에 배우자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로 부부의 관계가 정의되기 때문이다. 
 
배우자를 바라보는 관점은 주로 부모에게서 학습된다. 어린 시절 부모가 서로를 바라보는 관점이 배우자를 바라보는 관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과거일 뿐이다. 내 부모는 나와 상관이 없다”라고 단정 짓는다면 인생을 쉽게 생각하는 것이다. 과거를 외면하는 사람에게 성장은 없다. 
 
남편은 불안감을 숨기지 못한다. 사업이 망하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가족에게 버림받는 것이다. 사업에는 언제나 리스크가 따른다. 롤러코스터를 타듯 사업은 오르락내리락 한다. 남편 사업이 잠시 자금난으로 어려워진 것은 맞지만, 결과적으로 사업은 성장하고 있다. 
 
사업이 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울했다. 그가 느끼는 우울한 감정은 사업 그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내면 깊숙한 곳에 시작되는 것이다. 사업이 그의 내면에 만족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해야 한다. 그가 사업을 시작한 이유는 가족 때문이었다. 행복하고 풍족한 삶을 선물하고 싶었다. 
 
순조로운 인생에 먹구름이 드리운 것은 사업이 잠시 흔들리기 시작할 그 시점이었다. 사업이 어려워진 순간부터 아내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아내를 바라보는 관점이 왜곡되어 있다. 아내가 아니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그는 아내의 말을 듣지 못한다. 
 
어린 시절 상처가 그의 눈과 귀를 가려버렸다. 아버지의 무리한 사업, 부도, 가난, 재기 실패, 어머니의 남편 구박, 어머니의 희생. 생생하게 떠오르는 아픈 기억이 그를 괴롭힌다. 그의 내면 어딘가에 곪아터진 상처가 썩어들어가고 있다. 도려내지 않으면, 가정이 깨질 것이다. 
 
남편이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이유는 아내의 배타적인 태도에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내가 배타적인 태도를 취했는가, 취하지 않았는가?” 형사처럼 조사해서 진실을 파헤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황과 상관없이 남편에게는 왜곡된 진실이 확인된 진실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왜곡된 인식을 바로 잡고 진실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고무보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어머니에게 구박받았던 아버지와 현재의 자신을 분리하는 것. 변화의 첫 시작이다. 
 
방에 갇힌 사람은 남편 자신이 아니라, 남편 안에 드리운 아버지 그림자이다. 그는 혼란스럽다. 그림자 주인이 자신인지, 아버지인지 구분할 수 없다. 아내의 말 한 마디, 작은 표정 하나가 아버지 그림자와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림자의 주인은 실제로 자신이 아니다. 그림자를 지워내는 방법은 단 하나, 정수리 위에서 찬란하게 비추는 빛이다. 비스듬히 비친 빛은 그림자를 만든다. 관점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정수리에서 위에서 직각으로 비추는 빛은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정면에서 올바른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가 추구하는 목적이 그를 병들게 할지 모른다. 결핍으로 시작된 이상적인 목표, 행복에 대한 막연한 생각이 그를 실패하게 만든다. 남편이 말하는 행복은 지나치게 추상적이다. 아버지, 남편 이미지에 대한 부재는 그에게 허구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게 된다. 완벽한 남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높은 기준을 가진 사람은, 배우자가 던진 사소한 말 한 마디에 자존감이 무너질 수 있다. 상식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업은 어려워질 수 있다. 남편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내 역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행복할 수 없고, 언제나 불행할 수 없는 것이다. 남편이 행복하면, 아내도 행복해진다. 남편이 불행하면 아내도 불행해진다. 어쩌면 사업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아내 역시 아버지에 대한 상처 때문에 남편을 건강하게 바라보지 못한다. 남편에게 거절감을 느끼는 강도가 세다. 남편이 힘들고 어려움을 느낄 때, 지지해주고 격려해줄 수 있는 여유가 아내에게 없다. 아내가 말한 대로, 남편이 우울감을 느끼는 것은 아내 책임이 아니다. 그 감정을 처리해야 할 사람은 남편 자신뿐이다. 감정을 대신 책임지려고 하면 오히려 부작용이 심해진다. 
 
그러나 아내가 가정 안에서 격려와 지지의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은 중요하다. 그에 대한 책임은 아내에게 있다. 남편이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는 순간에도 인정받는다는 느낌이 있어야 한다. 아내가 남편을 인정해주기보다는 방치하고 있지 않은가 묻게 된다. 아내는 남편의 부정적인 감정이 괴롭기 때문에 그 감정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내가 어떻게 하면, 남편의 감정을 바꿔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고 문제에 접근한다면  금방 상처받을 것이다. 기다려주는데 익숙해져야 한다. 기다리는 과정에서 아내의 진정한 실력이 발휘되는 것이다. 편안하게 기다려주는 연습을 해야 한다. 
 
아내여, 어디서 들었다고 하지 않았나. 남자가 동굴에 스스로를 가둔다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혼자 있고 싶어 동굴로 들어가지만, 바깥 상황이 궁금한 것이 남자이다. 자신이 사라져 버린 동굴 밖 상황이 궁금한 것이다. 자기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 두렵기도 하다. 그래서 남자는 동굴 안에서 밖을 보고 앉는다. 여자는 이 사실을 모른다. 
 
남자는 동굴 안에서 오래 못 산다. 며칠 내로, 밖으로 나온다. 자신이 지켜보고 있었던 동굴 밖 상황으로 돌아온다. 자신이 필요 없다 생각되면, 그는 목적을 상실한 채로 현실에 순응하며 산다. 자신이 사라져도 전혀 지장이 없는 세계로 돌아오는 남자에게 어떤 희망이 남아있을까? 그러나 자신이 필요했다고 생각되면 당당하게 산다. 그것이 착각이라도 상관없다. 의욕적으로 산다. 동굴 밖 상황에 대한 남자의 관심은 참으로 미묘한 것이다. 
 
남편이 혼자만의 생각에서 벗어나기를 기대한다. 아내가 지치지 않기를 바란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다. 두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세상에 도깨비 방망이 따위는 없으니까.

이별을 견딜 수 없어요

누군가와 헤어지는 상황을 견딜 수 없어요.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요. 졸업식이 힘들었어요. 선생님, 친구들과 헤어진다는 슬픔 때문에요. 선생님이 전근가실 때도 울고, 목사님이 바뀔 때도 울고, 함께 일하던 동료가 회사를 그만 둘 때 울어요. 친구들 결혼식도 못 봐요.
 
이제 동생이 결혼을 해요. 동생을 떠나보낸다는 생각에 눈물이 나요. 교회 상담실에서 상담을 받아봤어요. 그런데, 심각한 게 아니라는 듯 끝났어요. 동생 결혼식에서 웃으며 축복해주고 싶어요. 하지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울음을 참을 수 없으니 걱정이에요.
 
저는 3남매 중 첫째에요. 한 살 어린 남동생, 네 살 어린 여동생이 있어요. 남동생이 생기면서 저는 할머니에게 갔어요. 할머니가 엄마인 줄 알고 지냈어요. 여동생이 엄마 뱃속에 있을 때, 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저는 다시 엄마 집으로 오게 되었어요. 아이가 셋이다 보니 엄마는 주로 저를 집에 혼자 두고 다녔어요. 막내인 여동생은 늘 데리고 다녔고요.
 
할머니 돌아가신 날이 기억나요. 할머니와 살던 저는 엄마 집에 놀러 왔어요. 할머니는 평소와 다름없이 막걸리를 한 잔 드시고 낮잠을 주무셨어요. 어린 저와 동생은 할머니 양옆에 누워 같이 잠을 잤어요. 잠이 깬 저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걸 제일 먼저 발견했어요. 눈을 뜨고 돌아가셨어요.
 
엄마가 그랬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제가 할머니가 꽃가마 타고 가는 꿈을 꿨다고. 할머니가 내 꿈을 듣고 말했다고 했어요. “아이고, 내가 꽃가마를 타고 어디를 간다는 거 보니까 세 밤 자면, 죽으려나 보다.” 그날 이후, 엄마가 꿈에 나올까 무서웠어요. 내 꿈 때문에 돌아가실까 봐….
 
자매님, 용기 내어 사연 보내주셔서 감사드려요. 자매님이 보내주신 사연을 읽어보면, 자매님은 누군가와 헤어질 때 슬픈 감정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어요. 하지만, 내 생각에 자매님은 이별의 슬픔으로 고통받는 게 아니에요. 나는 다른 관점으로 이 상황을 보고 싶어요. 자매님은 혼자 남겨지는 게 두려울지 몰라요. 외로워서 우는 게 아니라 무서워서 우는 것 같아요.
 
부족한 정보로 추측할 뿐이에요. 하지만, 그 나름의 근거가 있어야겠지요. 자매님은 바로 아래 동생이 엄마 뱃속에 있을 때 할머니 댁에 맡겨졌어요. 한 살 어린 남동생이니까 자매님은 돌이 되기도 전에 할머니 댁에 맡겨진 거예요. 그리고, 여동생과 세 살 차이가 나니까 할머니 댁에서 최소 3년 이상 산 거예요.
 
애착 형성에 중요한 생후 3년 전후로 자매님은 두 번의 큰 상실을 경험했어요. 엄마와의 이별이 있었어요. 동생의 존재만으로 자매님은 이미 존재감에 큰 타격을 입었을 거예요. 엄마와 생이별을 했으니 고통은 더 컸을 거예요. 단지 어려서 표현할 수 없었던 거죠.
 
할머니와의 이별이 있었어요. 자매님은 할머니를 엄마처럼 생각했어요. 그런 할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자매님에게는 할머니의 죽음이 엄마의 죽음과 같았어요. 세상이 하루아침에 멸망한 것처럼 무서웠을 거예요. 할머니가 눈을 뜨고 돌아가셨다는 표현에는 자매님이 느끼는 두려움의 정서가 반영되어 있어요. 어린아이가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자매님은 혼자 있을 때 외롭기보다 무서울 거예요. 성인이 된 지금 외롭다는 말은 할 수 있어도 무섭다는 말을 하기 어려울 거예요. 하지만, 괜찮아요, 자매님. 누군가 떠날 때 무서운 감정을 느끼는 건 자매님에게 정당한 감정이에요. 스스로를 자책하지 마세요.
 
자매님은 마음속 어린아이를 돌봐줘야 해요. 눈을 뜨고 돌아가신 할머니를 보고 겁먹은 네 살짜리 여자아이가 있어요. 성인이 된 자매님이 그 아이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어떻게 위로해 줄 수 있을까요. 그 아이는 너무 놀라 울지도 못해요. 소리쳐 주변에 알리지도 못해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 해요.
 
우리 그 아이를 위로해 줄까요. 겁먹은 그 아이를 들어 올려 안아주세요. 등을 다독여 주세요. 품에 안고 따뜻하게  말해주세요.
 
“괜찮아, 아가. 많이 무서웠지. 이제 괜찮아. 네 잘못 아니야. 할머니는 네가 꾼 꿈 때문에 돌아가신 게 아니야. 괜찮아, 아가…. 정말로 괜찮아….”
 
마음속 그 아이는 여전히 무서워해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아요. 누군가 떠날 때, 무서워서 옷자락이라도 잡고 싶어 해요. 그 아이를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마세요. 무서워서 그러는 거예요. 그 아이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다독여 주세요. 그 아이가 안심할 때까지 따뜻하게 안아주세요. 남은 삶 동안 포기하지 않고 돌봐주셔야 해요.
 
사람들은 자매님을 떠나요. 목사님도, 선생님도, 친구들도, 가족들도. 언젠가 모두 떠날 거예요. 필요할 때 옆에 없을 거예요. 하지만, 걱정은 마세요. 예수님은 절대로 자매님을 떠나지 않으실 거예요. 언제나 어디서나 따뜻하게 자매님을 안아주시는 예수님을 믿기에 나는 여기서 글을 마칩니다.

도둑을 지키는 여자

희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앞에 앉았다. 
 
아파트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녀는 손에 쥔 야구방망이를 단단히 잡았다. 혹시라도 누군가 문을 열면, 사정없이 내려칠 작정이었다. 
 
그녀가 열여덟 살 때였다. 
 
“희수야. 너 잠 안 자고 뭐 하는 거야?” 
 
인기척을 느낀 엄마가 현관 앞에 우두커니 앉은 희수에게 물었다. 
 
희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을 안 자고 뭐 하냐고 희수야?” 
 
희수는 현관문을 똑바로 응시한 채,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둑 지키잖아.” 
 
엄마는 당황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희수야?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빨리 가서 자.” 
 
“엄마는 상관하지 마.”
 
다음 날, 희수는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정신과 의사는 희수에게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말했다. 
 
“요즘 고등학생들이 스트레스가 많아요. 입시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희수의 엄마는 불안했지만, 의사의 말을 신뢰하고 싶었다. 
 
정신과에 다녀온 이후에도, 희수는 한 달에 한 번꼴로 밤에 일어나, 도둑을 지켰다. 
 
그녀의 엄마는 시간이 빨리 흘러, 희수가 이상한 증상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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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 달에 한 벌꼴인지 아세요? 제가 생리하는 주기마다 도둑을 지킨 거예요. 엄마는 같은 여자면서, 그것도 모른 거죠. 얼마나 무심한 여자인지 아시겠죠? 저한테 관심이 없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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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주섬주섬 내리는 토요일 아침이었다. 
 
“희수야. 그만 좀 자고 일어나. 너는 주말마다 그렇게 늦잠을 자니? 엄마, 지금 오빠랑 백화점에 다녀올 테니까, 일어나면 아침밥 챙겨 먹어.” 
 
희수는 샛눈을 뜨고, 시계를 확인했다. 엄마를 힐끔 보고는, 짜증 난다는 듯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뒤돌아누웠다. 
 
“고등학생이 잠을 저렇게 자.” 
 
현관에서, 오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게 말이다. 어쩌려고 저러는지 모르겠어.” 
 
엄마가 장단을 맞췄다. 
 
“한심하다, 한심해.” 
 
오빠가 남긴 마지막 말에, 희수는 정신이 또렷해졌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머그컵에 우유를 따라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코코아 분말 가루를 세 숟가락 넣었다. 차 스푼으로 코코아를 저으며, 창가에 섰다. 주섬주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머그컵 안의 코코아가 입술에 닿았을 때, 쇠로 된 현관문이 쿵쿵 울렸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손에 들고 있던 코코아를 놓쳤다. 머그컵은 바닥에 내동댕이 쳐지고, 코코아는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그녀는 얼어붙은 채,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저 택배인데요, 반품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안에 계시나요?”
 
그녀는 숨을 죽였다. 
 
인터폰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카메라에 비친, 남성은 검은색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랫도리에서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 코코아 위에 주저앉아서 그런 게 아니었다. 때아닌 생리가 시작된 것이다. 
 
“뭐야, 이거? 집이 왜 이렇게 난장판이야?” 
 
오빠가 말했다. 
 
“희수야! 이게 뭐야.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엄마가 말했다. 
 
사방으로 튀겨서 굳어버린 코코아 자국은 차갑게 식어버린 핏자국처럼 참혹했다. 마치 살인사건의 현장을 방불케 했다. 
 
“이게 무슨 일이래?” 
 
희수의 엄마는 물걸레로 사방에 새겨진 코코아 자국을 닦아내면서 짜증스럽게 말했다. 
 
침대에 누워 울고 있는 그녀를 그대로 내버려 둔 채였다. 
 
자정이 넘은 시각, 그녀는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앞 베란다 창고에서, 오빠가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야구방망이를 꺼냈다. 정자세로 현관 앞에 앉아, 밤을 지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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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꿔요. 지금까지 여러 명의 상담자를 만나봤지만, 내가 왜 이런 꿈을 꾸는지 정확히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나는 왜 이런 꿈을 꾸는 걸까요?” 
 
그녀는 꿈에 대해 말했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내 방에 들어와요. 검은 모자에 검은 마스크, 나는 그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없어요. 그 남자는 내 존재를 알지 못해요. 
 
나는 이 모든 것을 내 옷장에서 지켜보고 있어요. 그 남자는 옷장으로 다가와, 옷장 아래 서랍을 열죠. 나는 살짝 열린 옷장 틈으로, 그 남자를 마주 봐요. 
 
그 남자는 서랍을 열고, 내 양말을 훔쳐서 달아나요. 그 남자가 떠나고 나면, 나는 내 양말을 돌려달라며 엉엉 울죠.
 
이 꿈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녀와 나 사이에 묘한 긴장이 흘렀다. 그녀는 차분하게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궁금해서 던진 질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의도가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내게 퀴즈를 낸 것이다. 내가 안전하고 믿을만한 사람인지 그녀의 방식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그녀는 상담실에 남을 수도, 상담실을 떠날 수도 있었다. 그녀는 이미 여러 명의 상담자를 만나봤고, 그동안의 상담이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새로운 상담자를 끊임없이 찾아다닌다. 그녀는 왜 다른 내담자들처럼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말해주지 않는가? 알 수 없었다.
 
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떠올랐다. 
 
첫째, 그녀가 그렇게 질문한 의도를 묻는다. 의도를 묻는 과정에서, 그녀 자신만의 고유한 “의미”를 찾아낸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녀가 무슨 일을 겪었고, 왜 그런 꿈을 꾸는지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 앞에 꼿꼿하게 서 있는 그녀는 자신이 겪은 일을 순순히 말해줄 의도가 없어 보였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판단하냐고 묻는다면, 나도 모르겠다. 그녀의 눈빛은 내게 답을 맞힐 수 있겠냐고 묻는듯했다. 
 
둘째, 그녀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상담자와 내담자의 관계를 건강하게 설정하기 위해, 잠시 동안 교육적인 대화를 나눈다. 
 
상담자는 초능력자나 점쟁이가 아니다. 내담자가 모르는 것을 상담자가 알 수는 없다. 
 
내담자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정리해서, 보다 명확하게 내담자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상담자의 역할이다. 
 
내담자가 상담자의 능력을 테스트한다거나, 상담자와 힘겨루기를 한다면 상담의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다. 
 
교육적인 대화를 통해, 내담자가 상담자를 바라보는 관점에 변화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도 효과가 없을 것 같았다. 
 
만약 내가 그런 태도를 취한다면, 그녀는 예의 바르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자리를 떠날 것이다. 
 
셋째, 솔직하게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때로는 상담자 스스로가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는 것이 상담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간다. 
 
상담자가 솔직하게 자신을 개방했기 때문에, 내담자가 적극적으로 자신을 개방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이다. 
 
단, 기술이 아닌 진심을 담아야 한다. 진심이 없으면, 상담자는 실제로 무능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진심을 담으면 무능함도 실력이 될 수 있다. 
 
내가 “모르겠다.”라고 솔직히 말한다면, 그녀가 어떤 결정을 내릴까? 
 
상담은 즉시 종결될 것이었다. 내가 그 말을 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상담실을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그녀가 원하는 방식으로 대화하는 것이다. 그녀가 묻는 말에, 군더더기 없이 대답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틀린다면? 
 
어차피 그녀는 떠날 것이다. 
 
만약 내가 맞춘다면? 
 
몇 세션을 더 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그것이 내게 실제적인 유익이 있을까?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상담은 일대일로 비밀리에 진행된다. 그녀가 나를 유능한 상담자로 인정해준다고 해도 다른 내담자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녀와의 상담을 지속하고 싶은가? 
 
자존심 때문일까? ‘너도 다른 상담자들과 다를 바 없구나’라는 식으로 나를 평가하는 것이 불편한 것일까? 
 
전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지만, 단지 그런 이유에서 상담을 지속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나는 왜 그녀와의 상담을 지속하고 싶은 것일까? 
 
이미 중년이 되어버린 그녀는 이제껏 자신을 안전하게 개방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퀴즈를 멈추지 않는 이상, 상담실을 전전하는 기약 없는 여정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멈춰야 했다. 그리고, 진실을 말해야 했다. 그곳에 진정한 자유가 있었다. 
 
꼭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그 일을 해주기를 바랐다. 
 
그녀는 유능한 상담자들을 십수 년 간 만나온 터였고, 기적은 없었다. 무능한 내가 그녀를 마주한 이유였다. 유능한 상담자들을 거치고 거쳐, 나에게 흘러든 것이다.  
 
제아무리 유능한 상담자라도, 스스로 상담실을 떠나려는 내담자를 변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상담자는 상담실 밖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무모해지기로 했다. 
 
정면돌파를 선택한 것이다. 
 
“당신은 어릴 때, 성적인 공격을 받았을 거예요. 옷장에 숨을 수 있는 나이였다면, 아주 어린아이였겠죠. 
 
끔찍한 일을 저지른 사람은 아는 사람은 아닐 겁니다. 익명의 사람일 거예요. 
 
당신이 고등학교 때 겪은 일은, 최초의 사건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나에게 그것이 최초의 사건인 것처럼 말했어요. 의도적으로 나를 혼란스럽게 한 것이죠.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나에게 제시한 유일한 단서이자 힌트였을 겁니다. 내가 문제를 맞추기를 바란 것이죠. 
 
고등학교 때, 당신이 인터폰 앞에서 마주한 남자가 쇠사슬을 끊은 거예요. 그 바람에, 지하 감옥에 가둬놓은 괴물이 탈출한 것이죠. 
 
당신의 내면 깊숙이 숨겨진 상처를 그 사건이 끄집어 낸 겁니다.  
 
당신이 어린 시절 끔찍한 일을 겪은 그날에도, 비가 내렸을 가능성이 높아요. 
 
평소에 나는 절대로 내담자가 말하지 않는 내용을 앞서서 추측하지 않습니다. 내담자의 인격을 무시하는 행동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나는 지금 무모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당신이 원했기 때문에, 내 멋대로 당신을 추측해버린 겁니다. 
 
자,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실 건 가요? 아니면, 평소처럼 예의 바르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상담실을 떠나버리실 건가요?”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녀가 침묵한 몇 초의 시간 동안, 나는 늙어버릴 지경이었다. 
 
그녀는 자세를 고쳐앉고,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다섯 살 때였어요.” 
 

 
“희수야. 엄마 나갔다 올 테니까, 잠깐만 집에 있어.” 
 
“어디 가는데, 엄마?” 
 
“갑자기 비가 오잖아. 오빠가 우산도 없이 학교에 갔어. 오빠 비 맞으면 안 되니까, 엄마가 데리러 가려고. 잠깐만 집에 있어. 우리 희수 씩씩하잖아.” 
 
희수의 오빠는 그녀보다 일곱 살이나 많았다. 열두 살 남자아이에게 비를 맞히지 않으려고, 다섯 살 난 여자아이를 집에 혼자 남겨둔 것이었다. 
 
엄마는 우산을 챙겨들고 나가면서, 실수로 문을 잠그지 않았다. 단독주택이라 길 가던 사람이 담장 너머로 고개를 들면 거실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희수는 거실에 누워 TV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거실 문이 열리고, 도둑이 들어왔다. 검은 모자, 검은 마스크를 쓴 강도는 희수를 덮쳤다. 어린 희수는 고통스러웠다. 하반신이 잘려나가는 듯했다. 
 
비에 젖은 남자의 냄새는 역겨웠다. 남자는 희수를 바닥에 내버려 두고, 안방으로 들어가 돈이 될 물건들을 훔쳐서 달아났다. 
 
희수는 가만히 일어나, 옷장으로 걸어갔다. 피에 젖은 속옷을 벗어서 세탁기에 넣고, 새로운 속옷으로 갈아입었다. 
 
“희수야! 이게 무슨 일이야?” 
 
엄마는 안방으로 달려 들어가, 잃어버린 물건들을 살폈다. 장롱 안에 곗돈이 사라진 것을 알고 나서, 엄마는 하얗게 질려버렸다. 
 
희수를 째려보며 말했다. 
 
“넌 그때 뭐하고 있었어?”
 
희수는 소파에 엎드린 채로 말했다. 
 
“여기 이렇게 누워 있었어.”
 
엄마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이 바보 같은 계집애야. 도둑이 들었으면, 얼른 도망쳐야지. 거기 그러고 있으면 어떻게?” 
 
오빠가 옆에서 거들었다. 
 
“내가 있었으면, 야구 방망이로 콱 그냥 때려 눕혔을 텐데….” 
 
희수는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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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충격에 손발이 떨렸다. 손에 쥐었던 만년필을 놓치고 말았다. 만년필이 그녀의 발 앞으로 굴러떨어졌다. 곧바로 몸을 숙여 만년필을 집어 들 여유가 없었다. 
 
그런 내 심정을 이해라도 한다는 듯이, 그녀는 차분하게 몸을 숙여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만년필을 건내주면서, 그녀가 말했다. 
 
“처음이에요. 다른 누군가에게 그날의 일을 말해 본 게….”
 
나를 진정시킨 것은 그녀였다. 그녀의 도움으로 나는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가 따뜻한 표정으로 나를 기다려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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댐의 수문이 열리듯, 그녀는 자신 안에 담겨 있던 이야기를 방출했다. 
 
“엄마는 오빠밖에 몰랐어요. 내가 정신과를 들락거릴 때, 오빠는 유학 준비를 하고 있었거든요. 
 
단독주택을 팔아서, 복도식 아파트로 이사를 했어요. 그 돈으로 오빠 유학 자금을 만들어준 거예요. 오빠는 지금 잘 먹고 잘 살아요. 
 
엄마가 저한테는 뒷바라지 못해준다고, 독일로 유학 가라고 했어요. 거기는 학비가 없으니까, 아무래도 수월하지 않겠냐고. 
 
가서 일 년쯤 지났나? 오빠가 전화를 했어요. 엄마가 아프니까 귀국하라고. 돌봐줄 사람이 없으니까, 나보고 돌봐주라는 거죠. 
 
오빠가 그랬어요. ‘나는 결혼해서 신혼인데, 어떻게 아내에게 병수발을 들게 하냐’고요. ‘네가 와서 돌봐야 한다’고.  
 
저도 참 어리석었죠. 엄마가 아프다는 말에, 걱정이 되더라고요. 귀국해서 엄마를 돌봤어요. 그렇게 십 년이 지났죠. 
 
엄마 돌아가실 때까지 내가 병수발을 다했는데, 엄마가 내 앞으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셨어요. 오빠 앞으로 전부 돌려놓고 세상 떠나셨죠. 
 
내가 이렇게까지 해도, 소용없는 건가? 엄마한테는 오빠밖에 없는 건가? 많이 슬프더라고요. 
 
장례식장에서 오빠가 그랬어요. ‘고생했다. 이제 네 인생 살아라.’라고. 
 
답답했어요.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몰랐거든요. 내 인생을 갈아 넣어서, 엄마를 보살핀 것 같았어요. 세상을 떠난 엄마가 부러울 정도였으니까요. 
 
엄마 돌아가시고, 오빠가 아파트를 팔았어요. 오피스텔을 장만해주더라고요. 그래도, 양심은 있구나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오피스텔이 오빠 명의로 되어 있었어요. 
 
지금은 연락도 안 하고 살아요. 오빠를 보고 싶지 않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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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내게 용서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어떻게 하면, 엄마를 용서할 수 있는지 물었다. 세상을 떠난 엄마가 미워질 때는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어떻게 하면, 오빠를 용서할 수 있는지 물었다.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오빠를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양심이 찔린다고 말했다. 
 
‘용서라니….’ 
 
내 안에 분노가 일어났다.
 
상담이 궤도를 이탈했다. 상담자, 목사와 같은 호칭이 얼굴에 엉겨 붙은 거미줄 같았다. 
 
나 역시 사람이었다. 상담자의 기능을 벗겨내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 그녀 앞에 마주 섰다. 
 
나는 말했다.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은 당신이 아닙니다.” 
 
그녀가 움찔했다. 
 
“네?”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그들입니다.”  
 
다소곳하게 앉아 있던 그녀는 몸의 균형을 잃었다.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짚었다. 점차 그녀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어갔다. 
 
그녀는 이내, 폭포수와 같은 눈물을 쏟아냈다. 감옥에서 풀려난 괴물이 떠내갈 만큼, 강력한 물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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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어요. 남자에 대한 호감조차 없었거든요. 젊을 때, 내가 좋다고 따라다닌 남자들이 있었는데, 번거롭게 느껴져서 떼어내는데 힘들었어요.”
 
그녀가 살아온 인생에서 연애와 관련된 기록은 단 한 줄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남자와의 사랑, 이것은 그녀가 살아온 인생과 전혀 관련 없었다. 그곳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남자분들이 가까이 다가오면, 저는 부담스러워서 멀리하고 싶거든요. 때로는 일상생활에서 부딪힐 때가 있어요.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얼마 전에, 교회에서 행사가 있었거든요. 같이 봉사하다가, 어느 남자 성도하고 사소한 의견 충돌이 있었어요. 너무 사소해서 그분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채지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복잡한 감정으로 빠져들었어요. 괴로워서 미칠 지경이었죠.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어요. 곧바로 집으로 와 버렸죠. 수면제를 한 알 먹고, 바로 잠들었어요. 미쳐버릴 것 같았거든요.”
 

 
“여기 의자는 뭐죠?” 
 
A가 말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남성이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럼, 이것 좀 치우죠. 사람들이 지나는 자리에 이런 게 있으면 다칠 수도 있잖아요.” 
 
“제가요?” 
 
“아, 아니에요. 제가 말실수를 했네요. 그냥 제가 치울게요.” 
 
A는 허리를 굽혀 의자를 들어 올렸다. 몇 걸음 걸어서, 구석진 곳에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A와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A는 그녀의 노력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안내한다고, A가 계속 나서는 바람에, 그녀와의 동선이 겹쳤다. 한꺼번에 사람들이 몰려들어오는 탓에, 자리를 안내하는 사람들이 분주했다. 그 과정에서, A와 그녀가 살짝 부딪혔다.
 
A가 전혀 의식하지 못할 정도의 충돌이었다. A는 여전히 자기 자리에서 서서, 밝게 웃으며 다른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 그녀를 짓눌렀다. 
 
그녀는 함께 행사를 준비하는 여자 전도사님께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다는 말을 남기고 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나는 남자 상담자인데, 그건 괜찮으신 가요?”
 
내가 물었다. 
 
“교회에 계신 목사님들에게는 불안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아요.” 
 
그녀가 말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글쎄요. 목사님들은 조금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아무래도 일반 사람들하고는 다르신 분들이니까요. 물론, 그렇지 않은 목사님들도 계시기는 한데, 대부분 좋은 분들이니까요.”
 
“그렇군요. 한 가지만 더 묻고 싶어요. 내가 당신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목사님도 상처받으셨잖아요. 적어도, 나를 비난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솔직히 제가 이상한 사람이잖아요.  
 
내 인생 밑바닥에 숨겨둔 진실을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 내가 그 말을 내뱉은 순간, 내 자아가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어요. 
 
목사님의 책이나 설교를 듣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용기를 냈죠.  
 
막상 목사님을 만나니까, 또다시 두려운 거예요. 예의 없는 행동이었지만, 다른 상담자들에게 했던 방식으로 목사님을 테스트 한 거죠. 
 
사실 저는, 처음부터 목사님께 제 이야기를 전부 꺼내놓고 싶었어요. 목사님이 내 꿈 이야기를 듣고, 엉뚱한 이야기를 하셨더라도, 제 이야기를 하고 말았을 거예요. 
 
상처받은 사람만이 상처받은 사람의 심정을 알겠죠. 목사님은 이해해주실 것 같았어요. 목사님도 아프셨으니까요.” 
 
탐정놀이는 어리석은 것이었다. 
 
나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점차 희미해졌다. 두 눈에 눈물이 고여, 초점이 흐려졌다. 
 
나는 도무지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 그러면, 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잠시의 공백을 두고, 나는 감정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상담 과정에 충실했다. 
 
상담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나의 미천한 능력과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을 개방하기로 결단했고, 변화의 의지 또한 누구보다 강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진실한 마음이 상담을 더욱 효과적으로 이끌었다. 
 
상처는 완치될 수 없지만,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상처를 돌볼 수 있다는 나의 견해에 그녀는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그녀와의 상담을 종결하는 순간이 생생히 기억난다. 나는 그녀의 삶을 축복했고, 그녀는 밝은 미소를 남겨두고 상담실을 떠났다. 
 
물가에 아이를 내놓는 부모처럼 마음 한편으로 두려웠으나, 그것은 잘못된 감정이었다. 그리스도가 그녀를 지켜주실 것이다. 나는 안심해야 했다. 
 
“예수님은 여기 좁은 상담실 안에 머물지 않으신다. 이곳을 떠나는 그녀와 동행하신다. 상담은 종결되어도, 사랑은 종결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그녀와 함께 하신다.” 
 
이것이 나의 고백이었다.  
 
그녀가 떠나고, 나는 창가에 서서 한참을 머물렀다. 마음속으로 간절한 기도가 흘러나왔다. 나의 진심이 예수님께 전해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녀를 떠나보낸, 저녁이었다. 
 
피곤한 몸으로 집에 들어서자, 다섯 살 난 막내딸이 뛰어나왔다. 
 
“아빠!” 
 
현관 앞에서 마주한, 다섯 살 자리 여자아이. 
 
내 딸과 그녀가 겹쳤다. 
 
그날 그녀는 혼자였다. 그녀가 애처롭게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나를 바라보며,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아이를 끌어 앉았다. 왈칵 눈물이 터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친 곳이 없는지 살폈다. 나는 그대로 아이를 끌어안고, 하염없이 토닥여주며 귓가에 속삭였다. 
 
“많이 무서웠지? 걱정하지 마. 이제, 안전해.” 
 
자신을 끌어안고 엉엉 우는 아빠를, 아이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이도 무언가를 느꼈는지,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아빠, 울지 마. 나 씩씩해.” 
 
울고 있는 나를 달래느라, 아이는 오랜 시간 내 품에 머물렀다.

차가운 목도리

연수는 멈칫했다. 
 
신중하게 내 표정을 살폈다. 나의 반응이 궁금한 것 같았다. 물 밖에서 물속의 깊이를 알 수 없듯, 연수는 내 속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나는 온화한 표정으로 기다렸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말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였어요. 학원 기사 아저씨가 있었거든요. 그 아저씨에게 순결을 잃었어요.” 
 
내가 멈칫하는 순간, 연수는 마치 내가 질문이라도 했다는 듯이 말했다. 
 
“왜 신고하지 않았냐고요? 그때 당시에는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주 잠시 동안이지만,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거든요.” 
 
학원 운행노선 끝자락에 연수의 집이 있었다. 학원차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집 앞에 머물렀다. 학원차가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집 안의 모든 불은 이미 꺼진 후였다. 그녀가 오기 전에 모두가 잠든 것이다. 
 
연수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기사 아저씨와 대화를 나눴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아무도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은 덕분에, 아저씨는 그녀의 대화 상대가 될 수 있었다. 대화는 점점 깊어졌다. 연수는 학원 아저씨와 단둘이 집에 가는 시간이 기다려졌다. 
 
아저씨는 연수의 생일을 기억했다. 텅 빈 차 안에서 그녀에게 생일 선물을 건넸다. 목도리였다. 아저씨는 연수에게 목도리를 둘러주고, 볼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연수를 끌어안았다.
 
한 시간이나 늦게 학원차가 집 앞에 도착했다. 아무도 깨어있지 않았다. 집에 도착한 연수를 맞이한 것은, 환하게 빛나는 생일 케이크이 아니었다. 적막한 어둠뿐이었다. 생일 저녁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연수의 순결을 목도리와 맞바꿨다는 사실을 가족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연수는 엄마에게 학원을 옮겨달라고 말했다. 엄마는 딸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지금 학원을 옮겨달라고?” 
 
연수는 엄마의 말 한마디에 감정이 상했다. “됐으니까, 알아서 하겠다”라고 말했다. 
 
연수는 더 이상 학원에 가지 않았다. 학교에서 가까운 독서실에 다녔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그녀는 목도리를 두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목도리로 목을 감싸자 온기가 느껴졌다. 
 
  연수는 목도리를 버리지 않았다.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10년이 지났지만, 연수는 그때의 사건과 감정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밤 제가 엄청난 실수를 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되돌릴 수 없어 슬펐고요. 집에 와서 침대에 누워 많이 울었어요. 내가 이런 일을 당했다는 사실에 슬펐고, 그런 일을 당했는데 싫지만은 않았다는 것이 슬펐어요. 저는 많이 외로웠거든요.” 
 
기사 아저씨를 다시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학원을 끊은 이유였다. 그러나, 사랑받은 기억은 소중했다. 아저씨의 따뜻한 표정, 친절한 말투가 그리웠다. 
 
목도리를 두를 때마다, 그녀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연수는 끔찍한 기억을 뒤로하고, 좋은 기억만을 간직했던 것이다. 
 
그녀는 10년이나 지나버린 일을 들춰내기 위해, 나를 찾아온 것일까? 
 
아니었다. 
 
연수는 엄연히 현실의 문제로 고통받았다. 
 
연수의 남자가 떠났다. 어떻게든 다시 만나고 싶은 것이 그녀의 바람이다. 
 
3개월이 지났다. 연락이 닿지 않았다. 전화는 물론이고 문자 역시 무시당했다. 그럴수록 그녀는 고통받았다.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다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과 말투에서 그녀의 상실감이 전해졌다. 그녀의 교제 기간은 6개월에 불과했다. 
 
4살 연상의 남자, 제준을 크리스천 데이팅 앱으로 만났다. 눈에 띄는 외모였다. 크리스천으로 진지하게 살아가려는 그에게 끌렸다. 지금까지 만나왔던 남자들과는 ‘뭔가 다르겠지’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만나온 남자들 중에 크리스천은 없었다.  
 
그동안 연수는 자신을 좋아해 주는 남자들과 사귀었다. “좋아한다, 사귀자”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설레었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보다, 나를 사랑해주는 남자와 사귀자.” 그녀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제준은 신중한 남자였다. 사귀자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우리 한 번 사귀어보면 어떨까요?” 
 
연수가 먼저 물었다.
 
그녀가 먼저 남자에게 사귀자고 말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가 대답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제가 헤어진 지 얼마 안 되었어요. 연수 씨를 정말로 좋아하는 건지, 외로움을 달래려고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연수 씨를 좋아한다는 확신이 들면, 제가 먼저 말할게요.”
 
그것으로 충분했다. 연수에게 제준은 사려 깊은 남자였다. 그날 이후 연수는 새벽예배를 다니면서, 제준과의 만남을 위해 기도했다. 그를 좋아하는 감정만큼 그녀의 기도 역시 간절했다. 
 
크리스마스 이브, 제준은 연수와 함께 했다. 그가 사귀자고 말했을 때, 연수는 눈물을 흘렸다. 외로움으로 고통받았던 아픔을 한꺼번에 보상받는 듯했다. 
 
두 사람은 그날 밤 함께 했다. 연수는 죄책감을 느꼈지만, 곧 결혼할 사이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연수에게 제준은 완벽한 남자였다. 하루하루가 행복할 뿐이었다. 자신 안의 상처를 온전히 이해줄 사람이라고 믿었기에, 언젠가는 진실을 말해도 괜찮을 것이라 믿었다. 
 
“나 사실 오빠에게 말 못 할 비밀이 있어. 오빠가 감당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속이고 결혼하고 싶지는 않아.” 
 
연수는 목도리에 대해 말했다. 
 
제준의 반응은 태연했다. 그는 “괜찮다”라고 말했다. 
 
연수는 홀가분했다. 제준은 몇 마디 말로, 연수를 위로했다. 평소처럼, 둘은 함께 식사하고 커피를 마셨다. 단 하나의 절차만이 생략되었다. 그날 밤, 제준은 연수를 안아주지 않았다. 
 
그날 이후 일주일 동안, 연락이 되지 않던 제준이 연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시간 되면, 잠깐 만나서 이야기 좀 하자.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연수는 제준의 무뚝뚝한 목소리에 당황했다. 손이 떨리고 가슴이 답답해 더 이상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말하고 일찍 회사를 나왔다. 
 
그녀가 찾은 곳은 병원이 아니라, 그를 만나기로 한 카페 근처 공원이었다. 숨을 쉴 수 없었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던 그녀는 하염없이 산책로를 걸었다. 
 
“나 도착했어. 어디야?” 
 
카페에 먼저 도착한 제준이 전화를 걸 때까지, 연수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공원을 누볐다. 땀으로 화장이 망가져 버렸다. 공원 화장실에서 얼굴을 대충 고치고, 제준의 앞에 앉았다. 
 
그녀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제준이 말했다. 
 
“나 오래 생각해봤는데, 우리 그만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으면, 네가 오해할까 싶어 만나서 직접 설명하고 싶었어. 
 
목도리 사건,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것 때문에 헤어지는 건 아니야. 오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너를 만나는 동안, 계속 생각해봤는데 내가 아직 이별에 대한 상처가 있는 것 같아. 너를 정말로 사랑한 건지, 아니면 내가 외로워서 너를 만난 건지 판단이 안 서거든. 
 
사랑해서 사귄 거라고 믿었는데, 점점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어. 더 늦기 전에,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정말 미안해.” 
 
연수는 침묵했다. 
 
연수의 침묵이 불안했는지, 제준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  
 
“연락은 계속해도 되는 거지?” 
 
“그건 너 편할 대로 해. 그게 전부야?” 
 
제준은 당황한 듯 말했다. 
 
“응, 그게 전부야.” 
 
그러나, 제준은 연수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아마 제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궁금하실 거예요. 저는 솔직히 이별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어요. 연락이라도 받아주면, 언젠가 기회가 다시 있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연수는 제준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 같았다. 
 
연수에게 제준은 이상적인 남자로 왜곡되어 있다. 그러나, 상식적인 관점에서 제준은 이상적인 남자가 아니라 이상한 남자다.  
 
제준이라는 남자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자기 외로움을 달래려 연수을 선택했고, 그녀가 자기 기준에 맞지 않자 자기 외로움을 핑계로 그녀를 버린 것이다. 
 
처음부터 그에게는 연수을 진지하게 만나려는 의도가 없었을지 모른다. 제준은 본능적으로 연수가 취약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사귀자고 말한 첫날 그는 연수를 안았다. 사귀는 것과 자는 것, 어쩌면 그에게 같은 의미였을지도 모른다. 
 
목도리 사건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도 거짓처럼 보였다. 연수가 비밀을 털어놓은 그날 밤, 그는 연수를 안아주지 않았다. 심경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연수의 비밀을 알게 된 순간, 그가 마음을 닫지 않았을까? 
 
그의 말과 행동에서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제준이 무슨 자격으로 그녀의 상처를 이해하고 말고를 결정할 것인가? 
 
그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떠났다. 연수는 상처의 늪에 빠져버렸다. 취약한 그녀가 더욱 취약해진 것이다. 
 
나는 제준에게 한 마디 말도 건넬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그녀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과거로 돌아가자. 그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어떤 인생을 살았는가. 무엇이 그녀를 취약하게 만든 것인가. 목도리 이전의 사건들을 알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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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친년은 왜 여기 서 있어. 걸리 적 거리게.” 
 
할머니는 분을 못 참고, 어린 연수의 뺨을 후려쳤다. 
 
“왜 애한테 화풀이를 하세요!” 
 
그녀의 엄마가 할머니에게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격한 몸싸움을 했다. 
 
연수의 나이 여섯 살, 잊을 수 없는 기억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가족은 친할머니 댁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져서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기 가족을 어머니에게 맡겨놓고 밤늦도록 일에 매달렸다. 고부 갈등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버지가 밤늦도록 일에 매달리는 사이, 집안은 아수라장이었다. 할머니는 아들에 대한 분풀이를 며느리에게 쏟아부었다. 엄마는 질세라 할머니에게 덤벼들었다. 엄마의 잘못이라면, 무능한 남자와 결혼한 것뿐이었다. 
 
그녀의 엄마와 할머니가 격하게 다투는 날이면, 살림살이가 허공을 날아다녔다. 어린 그녀는 방구석에 움츠러들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울었다. 한바탕 소동이 나면, 어린 그녀는 엄마에게 다가가 엄마 무릎에 앉았다. 
 
딸을 안아줄 여유가 없었던 엄마는 연수을 땅에 내려놓고, 뒤돌아 앉았다. 
 
엄마가 뒤돌아 앉은 날이면, 그녀는 할머니 감정이라도 풀어보려는 듯, 할머니를 주변을 서성거렸다. 할머니는 그녀를 차가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그런 날의 반복이었다. 
 
감정이 사그라들지 않았던 할머니는 며느리가 보라는 듯이 어린 손녀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어린 그녀는 균형을 잃었다. 옆으로 주춤거리며 몇 발을 내딛다,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엄마가 할머니에게 달려들었다. 할머니는 엄마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아무도 말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엄마와 할머니, 두 사람이 체력이 다해 스스로 멈출 때까지 싸움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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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그녀의 볼에 파란 멍이 들었다. 선명하게 손바닥 자국이 새겨졌다. 
 
어린 연수가 말했다. 
 
“엄마, 나 오늘 어린이집 안 가면 안 돼? 너무 창피해.”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수의 머리카락에 빗질을 하며, 머리카락을 바짝 묶어 올렸다. 
 
“엄마, 머리 너무 세게 묶지 마. 아프단 말이야.”  
 
아프다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엄마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딸의 머리카락을 끌어 머리 한가운데서 세게 묶었다. 
 
엄마가 같이 나갈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엄마의 눈치를 살피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나 오늘 안 데려다줘?”  
 
엄마의 표정은 차가웠다. 파리를 내쫓는 손동작으로 그녀를 밖으로 내보냈다. 
 
연수는 혼자 주섬주섬 신발을 신었다. 마당을 지나 대문을 나서자, 또래 친구들이 각자의 엄마와 함께 공터로 모여들였다. 곧 어린이집 차량이 도착할 시간이었다. 
 
혼자 멍하게 서 있던 그녀에게, 옆집 아줌마가 깜짝 놀라 물었다. 
 
“어머, 너 얼굴이 왜 그러니?” 
 
연수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머, 어른들이 때렸니?” 
 
연수는 가만히 고개를 끄떡였다. 옆집 아줌마는 충격을 받은 듯, 멈칫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누가?” 
 
“할머니….” 
 
“할머니가?”
 
연수는 파랗게 멍든 볼을 손으로 숨기고, 고개를 끄떡였다. 
 
옆집 아줌마는 그럴 리 없다는 듯, 화들짝 놀랐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옆집 아줌마의 반응에, 연수의 등골이 오싹했다. 
 
여섯 살 아이가 섬뜩한 생각을 하고 만 것이다. 어쩌면 엄마는 일부러 머리를 묶어 올렸을지 모른다. 그녀의 볼에 새겨진 선명한 멍 자국을 온 동네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작은 마을에서 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던 할머니는 후한 인심으로 평판이 좋았다. 사나운 며느리를 만나 노년이 불행해졌다는 소문이 마을에 돌았다. 
 
마을 사람들이 엄마를 바라보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녀의 볼에 새겨진 멍 자국은 그녀의 할머니가 얼마나 지독한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그날 밤, 할머니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엄마에게 달려들어 엄마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네가 무슨 짓을 했길래, 동네 사람들이 나를 개처럼 쳐다보는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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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아픈 과거를 회상하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 지난 일이라는 듯,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할머니는 독했어요. 제가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 엄마를 들들 볶았죠. 엄마는 우울증이 분명했어요. 
 
중학교 2학년 때쯤인가, 아빠와 같이 살게 됐어요. 아빠도 자기 나름대로 악착같이 산 거죠. 사업으로 돈을 조금 번 것 같았어요. 
 
할머니 집에서 벗어나 엄마 아빠랑 살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완전한 착각이었죠.”
 
“아빠, 자꾸 어디 가?”
 
“잠시만, 아까부터 계속 전화가 와서….” 
 
아빠는 저녁을 사준다며, 연수가 다니는 학원 앞으로 찾아왔다. 아빠가 평소와 달라 보였다. 아빠는 연수의 눈치를 살피며 계속 밖으로 나가 전화 통화를 했다. 
 
아빠가 다시 와서 앉았을 때, 연수가 물었다. 
 
“아빠, 혹시 엄마 몰래 만나는 여자 있어?” 
 
아빠는 정색을 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뜬금 없이….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 
 
“아빠 오늘 평소와 다른 거 알지?” 
 
철없는 아빠는 딸에게 비밀을 털어놓았다. 
 
“사업하다가 잠시 만난 여자가 있는데, 이상하게 자꾸 연락을 해. 아빠가 외로울 때, 잠시 만났던 사람이야. 이제 엄마랑 같이 사니까, 아빠가 알아서 정리할게. 그때까지 엄마한테는 비밀이다. 꼭 비밀 지켜야 해.” 
 
그녀의 눈에 비친 아빠는, 덩치만 큰 철부지 어린애였다. 아빠가 없는 동안, 엄마와 딸이 흘린 눈물, 고통스러운 날들은 새로 장만한 아파트로 만회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연수는 아빠의 비밀을 엄마에게 말할 수 없었다. 함께 산지 일 년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엄마와 아빠가 헤어진다면, 이제 돌아갈 곳도 없었다. 
 
그녀는 침묵을 선택했다. 
 
며칠 후, 엄마가 연수에게 심문하듯 물었다.
 
“너 알고 있었지?”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뭘?” 
 
“아빠 말이야. 다른 여자 만나는 거 알고 있었잖아?” 
 
“아빠가 그래?” 
 
“알고 있었네. 엄마한테 왜 말 안 했어?” 
 
“말하면 어떻게 되는데?” 
 
엄마는 말 대신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그걸 말이라고 해. 미리 말했으면, 엄마가 가만히 있었을 것 같아?” 
 
연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왜 나한테 그래?”
 
“너도 똑같아. 하는 짓이 어떻게 그렇게 아빠를 닮았니?” 
 
연수는 참을 수 없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연수가 대들자, 엄마는 미친 사람처럼 오열하며 살림살이를 부수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 들고, 연수에게 던졌다. 
 
삐리릭. 
 
아빠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난장판이 된 거실 한가운데 서서 아내에게 말했다. 
 
“이 여자가 미쳤나.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아빠가 순간 멈칫했다. 입이 바짝 말랐다. 연수을 바라보며, 궁색하게 물었다. 
 
“연수아, 너 엄마한테 말했니?” 
 
연수는 폭발했다. 
 
“그래. 내가 말했다. 뭐 어쩔래! 왜 전부 나한테만 지랄이냐고!” 
 
엄마는 남편을 쏘아보고, 돌아서서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빠가 연수에게 말했다.   
 
“이런 미친년. 아빠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아빠가 오해라고 했잖아. 아무 일도 없었다고 몇 번을 말했어? 계속 연락을 해서, 아빠도 힘들다고 말한 거잖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엄마에게 말하면 어떻게 해? 널 믿은 내가 바보지.” 
 
그녀의 아빠는 굳게 닫혀버린 안방 문 앞에서, 엄마에게 사정하듯 말했다.   
 
“여보, 오해야. 정말 오해라고. 내가 설명할게. 문 좀 열어 봐.” 
 
연수는 견딜 수 없었다. 집을 뛰쳐나갔다. 텅 빈 운동장 한 귀퉁이에 앉아 엎드려 하염없이 울었다. 
 
“아직도 두 분은 저를 오해하고 있을 거예요. 나 때문에 이혼할 뻔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죠. 오해를 바로잡고 싶지도 않아요. 저는 그냥 두 분이 한심하다고 생각거든요.
 
엄마도 아빠도, 제가 어떻게 되든 상관 안 하셨어요. 학교 보내주고, 학원 보내주고. ‘그거면 됐지’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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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과거에서 나는 치명적인 손상을 발견했다. 그녀는 거절과 비난을 반복적으로 경험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면서, 다른 누군가가 내다 버린 감정은 고스란히 마음에 담는다. 받아들이면 절대로 안 되는 감정조차, 그녀는 거부할 수 없다.
 
제준은 자신 안의 외로움을 연수라는 존재로 달랬다. 안전한 방식으로 자신 안의 욕구를 채우고, 연수을 버리고 떠났다. 
 
학원 운전기사 역시 마찬가지다. 어린 연수의 취약함을 이용해, 자신의 욕구를 채웠다.  
 
그녀는 평생 목마른 사람처럼, 사랑을 구걸하며 다닐지 모른다. 자기 아닌 모습으로 살아가면서, 남이 베푸는 작은 호의에 마음이 끌리고,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에게 의지해 살아갈지 모른다. 
 
평생을 외로움으로 허덕였던 그녀의 삶을 어떻게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상담이 어떻게 끝나게 될지 예측할 수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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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멍이 들어, 혼자 어린이집 버스를 기다리는 어린 연수가 기억나세요?”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기억나요.” 
 
“어린 연수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요?”
 
“글쎄요…. 아마도 외로움이 아닐까요?”
 
“조금 더 자세히 말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냥 공터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아이가 불쌍해 보이거든요.” 
 
“그렇군요. 그럼, 이제부터 나와 잠시 역할극을 해 볼 거예요. 조금은 어색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주세요.” 
 

 
나는 혼자 공터에 서 있는 어린 연수에게, 현재의 연수를 데리고 갔다. 나는 어린 연수를 역할을 맡았고, 그녀는 현재의 자신이었다. 
 
나는 어린 연수의 입장에서, 당시의 상황과 감정을 설명하고, 현재의 연수에게 “도와달라”라고 말했다. 
 
현재의 연수는 어린 연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어린 연수를 위로해줄 말이 단 한 마디도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상처 입은 자신을 공터에 버려두고 방치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상처 입은 자신과 마주한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작업을 중단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지금 무엇이 스쳐 지나갔죠?”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터에 혼자 서 있는 아이에게 아무 말도 못 해주고, 그 옆에서 서서 울고 있는 나를 발견했어요.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로 모르겠어요.”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의 말속에 깊게 배어든 절망감이 내게 전해졌다. 
 
나는 그녀를 그리스도에게로 데려가야 했다. 
 
“다시 한 번 작업을 시도할 거예요. 지금처럼 솔직하게 반응해주시면 돼요. 그럼, 시작해 볼게요.”
 
나와 그녀 사이에 그리스도가 계시듯, 상처 입은 그녀와 현재의 그녀 사이에도 그리스도가 계시다. 
 
현재의 그녀가 어린 연수를 그리스도에게 데려다준다면,  그녀는 예수님께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나는 정말로 궁금했다. 
 
그녀는 어렵게 첫 마디를 꺼냈다. 
 
“예수님, 이 아이는 어린 시절 저예요.” 
 
그녀의 감정이 요동쳤다.  
 
“저는 상처가 많아서, 도저히 연수를 돌봐줄 수 없어요. 이십 년이 지나도 연수는 스스로를 돌볼 수 없어요. 너무 불쌍한 아이에요. 
 
제가 치유돼서 연수를 돌볼 수 있을 때까지, 예수님이 대신 돌봐주시면 안 돼요? 
 
예수님이 연수를 잠시만 맡아주세요. 제가 치유되면… 어린 연수를 찾으러 올게요….” 
 
그녀는 오열하며 울었다. 
 
그녀의 마지막 말에, 나 역시도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내가 들고 있던 노트에 눈물이 투두둑 떨어졌다. 그녀의 말을 받아 적던 메모가 번졌다. 
 
나는 잉크가 번져나가는 노트에 시선을 고정하고, 그녀가 마음껏 울도록 충분한 시간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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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감정이 차분해졌을 때, 나는 다시 물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할 때, 예수님의 표정이 어떠셨나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그녀가 만난 예수님은 말로 다할 수 없이, 따뜻했다. 정서적, 신학적으로 온전한 예수님이셨다. 
 
내가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었다.
 
그녀가 말했다.  
 
“내가 나를 돌보지 못할 때에도, 나를 돌봐줄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 같아요. 
 
상처 입은 나를 예수님께 데려다줄 수 있다니, 그 자체만으로 안심이 돼요. 
 
지금까지 나는, 다른 누군가를 끊임없이 찾아다녔거든요.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치 마약에 중독된 사람처럼 끊을 수 없었어요. 
 
말씀해주신 대로, 상처에는 완치가 없다는 말에 동의해요. 과정이 쉽지는 않겠죠. 
 
하지만, 이제부터, 저는 나 자신을 돌볼 거예요. 절대로 공터에서 혼자 울게 내버려 두지 않으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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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스러운 감정이 밀려들었다. 
 
나는 그녀가 부러웠다. 
 
역설적인 상황이었다. 
 
나는 그녀와 똑같은 성경을 읽고, 똑같은 예수님을 믿는다. 그러나, 나의 예수님은 그녀처럼 따뜻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그녀보다 지식적으로 예수님을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성경 구절을 외우고, 더 많은 시간 기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따뜻함에 관한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누구를 원망하겠나. 아무도 원망할 수 없다. 내가 살아온 인생이었다.  
 
그녀와 똑같은 방식으로 나는 상처 입은 나 자신을 예수님께 내어 맡긴다. 
 
좁고 어두운 방 안에 홀로 갇혀 매질을 당하는 아이는 삼 십 년이 지나도, 두려움에 떤다. 
 
사라지지 않는 두려움으로 평생을 고통받는 아이는, 여전히 두려운 채로 상담실 안에 머문다. 
 
좁고 어두운 방 안에, 자신을 만나주셨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을 직접  다시 만날 때까지 좁고 어두운 방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나의 예수님은 따뜻하지 않아도, 상처 입은 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따뜻하시다. 나는 같은 공간에서 따스한 온기를 느낀다. 
 
내가 상처 입은 한 사람을 저버리지 못하는 이유다. 어쩌면, 나는 예수님께 사랑받기 위해, 상처 입은 한 사람을 마주하는 것이다. 
 
나는 따뜻한 예수님이 미치도록 그립다.

울어도 괜찮아요

슬픈 이야기네요.
마음이 아파요.
 
나는 울고 싶었어요.
당신이 웃는 바람에
나도 따라 웃었죠.
 
어쩌면 그 웃음으로
지금까지 버텨왔겠죠.
 
누가 아나요.
웃음 뒤에 슬픔을.
슬픔 뒤에 절망을.
 
아마 울면 안 됐을 거예요.
당신마저 무너지면 안 됐겠죠.
 
버티고 견디면서
밝은 모습 보여줬을 거예요.
 
같이 있는 당신
혼자 있는 당신
서로 다른 당신.
 
안심하세요.
여기서는 울어도 괜찮아요.
 
울어야만 해요.
그래야 사니까.
 
나 있잖아요.
사람들이 울보래요.
 
설교하다 울고
기도하고 울고
상담하다 우니까.
 
울지 말란 말
많이 들었어요.
 
설교하다 울면 안 돼.
감정에 호소하는 거잖아.
 
기도하다 울면 안 돼.
성도가 걱정해.
 
상담하다 울면 안 돼.
내담자가 의존해.
 
다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안되는걸요.
안되는 걸 어떻게 해요.
 
오히려 나는 내 마음이
메마를까 걱정이에요.
 
내 몸에도 눈물이 있다는 걸 알고
얼마나 기뻤는데요.
 
오랫동안 눈물이 마른 적이 있어요.
그 시기에 자주 들은 말이 있어요.
 
든든하다.
듬직하다.
 
그 말 때문에 더 못 울었어요.
든든한 사람 되고 싶어서.
듬직한 사람 되고 싶어서.
 
눈물을 되찾은 날 행복했어요.
슬플 때 울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눈물이 마르면
난 사람들 곁을 떠날 거예요.
 
사람이 앞에서 우는데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프로는 될 수 있지만
목자는 될 수 없어요.
 
기능할 수 있지만
사랑할 수 없어요.
 
울고 싶으면 우세요.
울어도 괜찮아요.
 
민망하지 않을 거예요.
나도 따라 울 거예요.
 
당신을 치유하는 건
내가 아니니까
울음 참지 않으려고요.
 
나와 당신 사이
그분이 함께 계시죠.
 
울고 나면
당신도 알게 될 거예요.
 
말할 수 없는 평안을.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아내가 과거의 잘못을 들춰냅니다

아내가 지난 일에 대해 자주 이야기합니다. 과거에 상처 준 시간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아내가 알아주지 않아 괴롭습니다. 그동안의 모든 노력이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솔직한 질문 감사드립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이 아무 의미 없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동안 최선을 다해 노력하신 것, 아내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아내가 고마운 마음을 남편에게 안심하고 표현하지 못한 겁니다. 포기하기에는 이릅니다. 조금만 참고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아내의 상황을 먼저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상처는 시간이 흐른다고 쉽게 잊혀지지 않습니다. 아내가 지난 일에 대해 말할 때, 남편을 비난하는 게 아닙니다. 과거의 잘못을 들춰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남편에게 솔직한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겁니다. 과거에는 남편에게 아무리 표현해도 이해 못 한다 생각했기 때문에 아내가 말하지 않고 혼자 참은 겁니다. 아내가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했다는 건 남편이 그동안 노력한 결과입니다. 그러니, 힘들어도 잘 들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상처는 순간입니다. 치유는 과정입니다. 진심으로 용서받기 원하신다면, 아내가 남편에게 지난 일을 말할 때마다, 치유되는 시간이라고 믿고 아내에게 반복해서 용서를 구하세요. 용서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래 걸립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풀릴 일이라면, 아내가 긴 시간 상처로 고통받지 않았겠지요. 아내가 지난 일 웃으며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자존심 내려놓고 진심으로 사과해주세요. 
 
아내 역시 용서하려니 고통스러울 겁니다. 아내가 이 글을 보고 있다면, 조심스럽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남편이 포기하지 않도록 자신의 내면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말해주세요. 남편이 노력하는 모습이 고마울 겁니다. 고마운 건 고맙다고 말해주세요. 하지만,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해주세요. 
 
그리고, 예수님께 나아가세요. 남편이 천 번을 미안하다고 말해도 용서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남편이 아내 옆에서 일생 동안 죄책감으로 고통받으며 살아간다고 해도 그 마음 풀리지 않을지 모릅니다. 예수님께 아픈 마음 가져가세요. 예수님이 위로해주셔야 그 마음 풀립니다. 지난 일이니 다 잊으라는 말 아닙니다. 잊지 마세요. 하지만, 상처만 기억하지 마시고 예수님도 기억해주세요. 그래야, 삽니다.

넌 엄마의 인형 같아

“‘이상하다, 이 남자가 왜 이러지?’ 하면서도 거절하지 못했어요. 결국 석 달 만에 결혼했죠.”
 
M은 서른두 살이고, 세 살 된 아들의 엄마이며 현재 별거 중이다. 그녀는 5년 전 남편을 만났다. 친구 소개로 만난 그는 성격이 시원시원했다. 평소 내성적인 자기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녀는 그에게 끌렸다. 두 사람은 연애 3개월 만에 결혼했다. 
 
남편은 유통마트 지점 하나를 관리하는 매니저였다. 신혼 초에는 출퇴근 시간이 분명했다. 그런데 출근 시간이 조금씩 늦어지고, 퇴근 시간에 맞춰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늘어났다. 알아서 하겠지, 남편을 믿었다.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남편의 통화를 엿듣게 되었다. 친구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이 해외여행을 가려고 하는 것 같았다. 아내가 임신했기 때문에 남편의 도움이 필요했다. 친구와 해외여행을 간다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남편은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아내는 남편 친구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필리핀 여행을 가려고 했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내는 남편에게 집요하게 물었고, 필리핀에 성매매 여행을 떠나려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내는 살림을 던지면서 울부짖었고, 남편은 집을 나갔다. 
 
남편이 집을 나간 후, 아내는 청소를 하다가 우연히 외장하드를 발견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외장하드 안에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야한 영상이 가득했다.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본능적으로 잘못된 결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에게 그나마 남아 있던 정이 뚝 떨어졌다. 아내는 법률사무소를 찾아가 이혼을 준비했다. 
 
남편은 아내에게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각서를 썼다. 아내는 용서할 수 없었지만 뱃속에 아이가 마음에 걸렸다. 아빠 없는 아이로 키우고 싶지는 않았다. 남편에게 성 중독 치료를 받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줬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남편은 또 다시 문제를 일으켰다. 저녁에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일주일에 여러 번이었다. 
 
아내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남편이 일하는 회사에 찾아갔다. 그런데 남편이 두 달 전에 사직서를 내고 일을 그만두었다는 말을 들었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이 물려준 유산을 현금화해서 가지고 있던 통장을 결혼 초에 남편이 애원하면서  달라고 했다. 거절하기 힘들었던 아내는 그에게 통장을 맡겼다.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고 인근지역에 대형 마트를 인수하기 위한 계약을 했다고 주변 사람들이 말했다. 그녀가 남편을 찾으려고 수소문 해봤지만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남편은 사기를 당해서 돈을 전부 날려버리고 잠적했다. 그녀는 답답해서 견딜 수 없었다. 시어머니를 찾아갔다. 시어머니는 잠적한 남편에게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 이해하라는 식으로 말했다. 어디 숨어서 뭘 하고 있는지 시어머니는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녀는 변호사를 다시 찾아갔다. 이혼 절차를 진행하고 있을 때, 남편을 소개시켜 준 친구가 찾아왔다. 성급한 결론을 내리면 안 된다고 설득했다. 남편이 돌아온 다음에 말을 들어보고 이혼해도 늦지 않다고 했다. 뱃속에 아이는 어떻게 할 거냐고. 혼자서 어떻게 살아갈 거냐고. 옆에서 도와줄 테니 이혼하지 말고 그를 기다려보자고 했다. 
 
그녀는 마음이 흔들렸다. 변호사는 법적인 절차를 진행해야 남편도, 돈도 찾는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친구 말을 따랐다. 당시에는 그 친구가 남편과 한편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남편은 친구에게 돈을 보냈고, 친구는 남편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었다. 
 
그 사이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를 먹여 살리려면 어떤 일이라도 해야 했다. 시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편의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녀는 마음의 병을 얻었다. 술에 취해 집에 들어가 시어머니에게 행패를 부렸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말라고 말했다. 술을 끊지 않으면 아이를 다시는 보여주지 않겠다고.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다. 
 
“저는 엄마가 원망스러워요. 엄마가 공주처럼 키웠거든요. 대학에 다닐 때, 남자친구가 ‘너는 사람 같지 않고 인형 같아. 엄마의 인형. 엄마 없이 아무 것도 못하잖아. 말끝마다 엄마, 엄마, 엄마!’라고 말했어요. 처음 그 말을 듣고 충격 받았던 기억이 나요. 그 말을 부인할 수 없었거든요. 
 
그랬던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신 이후, 제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어요. 혼자서 살아갈 수가 없었죠. 누굴 원망하겠어요? 남편을 선택한 건 제 자신이니까요. 당시에는 너무 불안정했어요. 엄마가 사라지고 나서 도저히 혼자 견딜 수 없었거든요….” 
 
그녀의 아버지는 이미 가정이 있던 남자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돌이킬 수 없었다. 뱃속에 아이가 생겨버렸다. 아버지는 이혼하지 않은 채로 그녀의 엄마와 함께 살았다. 겉으로 보면 정상적인 가정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외동딸로 부족함 없이 자랐다. 엄마가 세상의 전부였다. 엄마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엄마의 사랑과 집착이 혼란스럽게 뒤엉킨 채 그녀는 성장했다. 그녀가 중학교 다닐 때, 아버지는 엄마를 떠났다. 그러면서 엄마의 집착이 더욱 심해졌다. 
 
“엄마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예쁜 줄 알았나봐요.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지역 미인대회에 내보냈어요. 제 외모가 그 정도는 아닌데, 제가  싫다고 해도 들은 체도 안했어요. 넉 달 정도 준비하고 나갔지만 결과는 뻔하죠. 엄마는 제가 실망한 줄 알았나 봐요. ‘괜찮다. 심사위원들이 네 가치를 몰라서 그렇다. 실망하지 마라’라고 일주일 내내 말했어요. 
 
어차피 기대를 안 해서 실망도 하지 않았어요. 엄마가 나가보라고 하니까 나간 거죠. 그때 친구들 앞에서 얼마나 창피했는지,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녀의 전부였던 엄마는 어느 날 갑자기 암 진단을 받았다. 6개월 투병 생활을 하는 동안, 그녀는 휴학하고 엄마 곁을 지켰다. 엄마는 점점 작아졌다. 얕은 언덕처럼 보였던 엄마의 볼은 움푹 파인 구덩이가 되었다. 팔 다리는 짝이 맞지 않는 젓가락처럼 보였다. 엄마는 그녀 곁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기억했다. 
 
“엄마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 텐데…. 제가 걱정이 되셨는지 똑같은 말을 반복했어요. ‘사인 막 해주지 마라. 잘 읽어보고 해라. 모르겠으면 변호사를 찾아가라’라고요. 아무래도 아버지 재산 때문에 그랬겠죠. 제가 불안해 보였나봐요. 잘 읽어보고 사인했는데 제가 졌어요.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 매일 술 마시고, 남자를 만나며 방황했어요. 혼자 있고 싶지 않았죠. 가장 좋은 방법이 뭘까 생각했어요. 결혼해서 안정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남편을 만났어요. 인생 최악의 실수를 한 거죠.” 
 
***
 
배고픈 아이는 음식을 급하게 먹는다. 급하게 먹은 음식은 반드시 탈이 난다. 배가 아파 발을 동동 구르다 구토한다. 한 번 고생하고 나서 다시는 음식을 급하게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소용없다. 배고프면 또 닥치는 대로 먹는다. 절제하지 못하고 음식을 먹는 아이를 도와줄 사람은 부모다. 부모가 적절한 음식을 적당한 양만 먹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나 아이가 음식을 급하게 먹든 천천히 먹든 관심 없는 부모가 있다. 그저 아이가 먹는 모습이 사랑스럽다고 무절제하게 음식을 먹인다. 자꾸 밥상에 음식을 가져다 놓는다. 몸에 좋으니 먹으라고 한다. 아이는 부모가 먹으라는 대로 먹어 치운다. 
 
문제는 어느 날, 밥상을 차려주는 부모가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숟가락 하나로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던 아이는 부모가 사라지는 즉시 텅 빈 밥상을 받는다. 음식을 차려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아이는 굶는다. 스스로 밥을 지어먹을 수 없는 아이는 학교 앞 문방구로 간다. 
 
새빨간 사탕, 새파란 아이스크림, 현란한 먹거리가 아이를 유혹한다. 닥치는 대로 형형색색 불량식품을 먹은 아이는 틀림없이 병원 신세를 진다. 그녀의 상황이 이와 같다. 
 
그녀의 남편에 대해 생각해보자. 남편은 나쁜 사람이다. 훈육이 되지 않은 사람이다. 남편 안에 자리 잡은 특정한 결핍이 문제 행동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아내가 임신했을 때 외국에 나가 성매매를 시도한 일, 음란물에 중독된 상황, 아내 돈을 허락 없이 가져다 다른 사람에게 사기를 당한 일, 모든 책임을 외면하고 딸과 아내를 두고 잠적한 일. 모두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녀와 남편을 나란히 놓고 바라본다면 그녀는 확실한 피해자다. 
 
그러나 그녀를 마냥 위로해줄 수만은 없다. 결혼은 성인 남녀가 상호 합의 통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 결혼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녀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왜 문제 많은 남자를 선택했을까? 
 
그녀는 엄마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딸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았다. 그녀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과정을 겪지 않았다. 엄마가 딸을 대신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책임졌기 때문이다. 딸에 대한 애착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미 가정이 있는 남자와 불안한 결혼 생활을 하며 안정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존재가 그녀의 딸이었다. 아름답고 따뜻한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의도와 달리 엄마는 딸의 눈가리개가 되어버렸다. 엄마가 손을 잡아주면 어둠 속에서 앞이 보이지 않아도 괜찮았다. 딸은 엄마가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어둠 속을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엄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앞을 볼 수 없는 딸을 그대로 둔 채로. 그녀는 넘어져서 다시 일어설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부를 노래도, 노래를 부를 의지도 없었다. 엄마 목소리가 사라진 세상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마저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의 엄마는 그녀에게 우주와 같았다. 엄마 없는 세상에서 살 준비가 되지 않은 스물여섯 살의 성인, 그녀는 낯선 세상에 고아처럼 버려졌다. 엄마가 사라지고 난 그 순간, 눈가리개를 한 채로 더듬더듬 길가의 벽을 의지해 걷다가 만난 낯선 남자의 손을 잡은 것이다. 
 
남자는 그녀의 손을 잡고 안전한 곳으로 대려다 주는 대신 좁고 위험한 길로 그녀를 이끌었다. 위험한 길가에서 아이를 낳게 하고 갓난아이를 여자 품에 버려둔 채 도망쳐버렸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녀는 아이를 안은 채 어둠 속을 헤매고 있다. 
 
“어쩔 수 없었다고 할까요. 두 번 만나고 나서 바로 그 남자가 결혼하자고 했어요. ‘이상하다, 이 남자가 왜 이러지?’ 하면서도 거절하지 못했죠. 결국 석 달 만에 결혼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제 친구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제 유산에 대해 남편에게 말해준 것 같아요. 결혼이 목적이 아니라 돈이 목적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는 거죠. 알면서도 당한 거예요. 엄마가 돌아가신 후 미친 여자처럼 살다가 갑자기 내게 잘해주는 사람이 나타나니까 거부할 수 없었던 거죠….” 
 
그녀는 새로운 직장을 구했다. 월급은 적지만 아이를 되찾고 월세 방을 얻어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고통스럽고 힘든 인생 길에서 그녀는 쓰려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한다. 때로는 바닥난 통장 잔고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때로는 아이가 방긋 웃는 모습에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넘어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면서도 아이를 품에 안고 걷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는 더 이상 길가의 벽을 의지하지 않는다. 눈가리개를 스스로 벗어던지자 갑작스러운 빛이 그녀의 눈을 찌른다. 눈앞에 형체들이 희미하게 보이지만 머지않아  시력을 회복할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선명하게 모든 것을 보게 된 그녀 앞에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날지.

엄마도 내가 이상해?

“소희 선생님, 잠깐 나 좀 봅시다.” 교무실 중앙에 책상을 놓고 앉은 교감 선생님이 말했다. 
 
한소희는 중저음의 목소리를 듣고 얼어붙고 말았다. 권위적인 말의 무게에 짓눌려,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잠깐 이리 와보시라니까!” 더 커진 교감의 목소리에 한소희는 움찔했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교감 선생님을 향해 걸어갔다. 주위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사람들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레이저 반점이 그녀의 온몸을 가득 매웠다. 걷다가 주춤하면, 일제히 쏴버릴 기세였다. 
 
“아니, 말 길을 한 번에 못 알아들으시는 거야? 바로 앞에 앉은 사람을 몇 번을 불러야 대답을 해요?” 
 
“죄송합니다….”
 
“내가 왜 부른지 알죠?”
 
“….” 
 
“두 달 동안 교육감 온다고 학교 전체가 들썩거리면서 준비를 했잖아. 왜 한소희 선생님만 준비를 안 한 거야? 개망신을 당했잖아! 어떻게 책임질 거야!”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면, 다야? 지금 기간제라고 대충대충 하는 거야?”
 
“….” 
 
“어떻게 두 달 동안 가만히 있다가, 교육감 오는 당일에 준비를 못 했다는 거야? 실험실에서 아이들이 교과서만 가지고 공부하는 게 말이 돼! 빔 프로젝터도 안되고 말이야.” 
 
한소희의 옆자리에 앉은 K 교사가 보다 못해 나섰다. K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교감에게 말했다. 
 
“교감 선생님, 사석에서 이야기하는 게 어떨까요? 사람들 다 보는데, 너무 심하시잖아요.” 
 
교감의 얼굴빛이 붉게 변했다. 헛기침을 하더니,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 됐으니까, 자리로 돌아가 보세요. 그리고, 내년에는 다른 학교 알아보세요. 정교사처럼 일하라고 했더니, 건성건성….” 
 
다음 수업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교무실에 울려 퍼졌다. 선생님들은 썰물처럼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교감은 인파에 몸을 숨겨 도피하듯이, 책상 위에 놓인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K 교사 역시, 한소희에게 한 마디도 건네지 못한 채, 다급하게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교무실은 고요했다.
 
한소희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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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상담 일정을 확인했다. 나의 시선이 월요일 오후 7시에 머물렀다. 한소희가 첫 세션을 시작하기로 예정된 시간이었다. 그녀와의 통화를 떠올렸다. 다급했던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듯했다. 
 
“저는 한소희라고 해요. 목사님이 쓰신 책을 읽고, 연락드렸어요. 지금 제 상황이 절박해서, 당장 내일이라도 상담을 받고 싶어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였다. 
 

 
한소희는 서른두 살의 여성이었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푸른색 긴 코트를 입은 채였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 보였다. 
 
“급하게 연락드렸는데, 시간 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하지요.”
 
한소희는 교무실에서 그녀가 겪은 사건을 말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상담실에 오기 전까지, 그녀는 이틀 밤을 꼬박 뜬 눈으로 지새웠다. 소화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이틀 동안 간단한 음식을 두 끼 밖에 먹지 못했다. 
 
정서적인 문제도 심각했다.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몸살 기운과 두통, 어깨결림, 손떨림 증상까지 그녀를 괴롭혔다. 해가 뜨는 것이 두려웠다. 교감 선생님, 동료 선생님, 그리고 학생들 마저도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았다.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무리 기간제 교사라도 학교의 평가는 중요했다. 다른 지역 다른 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를 지원한다고 하더라도, 무책임하게 학교를 떠난 교사에게 기회를 줄 가능성은 낮았다. 남은 두 달을 어떻게든 버터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결론이었다. 
 
남은 두 달을 혼자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상담을 택한 것이다. 
 
“마음을 열고 이야기해주신 덕분에, 소희 씨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제가 궁금한 것들을 차례대로 질문해 볼게요. 지금처럼 편안하게 답변해주시면 됩니다.” 
 
교무실에서 그녀에게 일어난 사건을 자세히 알고 싶었다. 교감이 그녀를 부르기 전에,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소희 선생님, 교육감 참관수업 많이 긴장되지?” K 교사가 물었다. 
 
“네, 조금이요.” 
 
“너무 긴장하지 마. 어차피 내가 다 준비해야 하는 거니까. 소희 선생님은 내가 부탁하는 것만 옆에서 도와주면 돼.” 
 
“네, 선생님.” 
 
K 교사는 책상 위 책꽂이에서 파일첩을 꺼내들었다.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서류 한 장을 한소희에게 넘겼다. 
 
“여기 이 목록에 있는 물품들 한 번 확인해주고, 없는 물품은 체크 좀 해줘. 이것만 확인해서, 나한테 넘겨주면 돼.” 
 
한소희는 K 교사가 넘겨주는 종이 한 장을 받아들었다. 의외로 간단한 일이었다. 
 
“간단한데요.” 
 
“그럼, 간단하지. 내가 뭐 그렇게 어려운 일 시키겠어? 나머지는 내가 할 거야. 수업 내용 정리해서 이메일로 보내주면, PPT만 하나 만들어줘. 내가 나이가  있다 보니까, 센스가 떨어지는 것 같아. 소희 선생님은 아직 젊잖아. 센스 있게 잘 만들어 봐.”  
 
“지난번에 보니까, 잘 만드시던데요?”
 
“그것도 내 딸한테 부탁한 거야. 이제 고3이라고, 내가 시중들고 있어.”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다, 풋 하고 웃음이 터졌다.
 
“알겠어요, 선생님. 나중에 이메일 보내주세요.” 
 
“항상 고마워, 소희 선생님.” 
 
“제가 고맙죠. 항상 도와주시잖아요.” 
 
한소희는 점심시간에 과학실에 내려갔다. K 교사에게 받은 물품 목록을 확인했다. 단순한 일이었다. 점심시간마다 내려와서 물품을 확인한다면, 한 주 내로 충분히 끝날 일이었다. 
 
일주일 후, 한소희가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 책상 앞에서 수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K 교사가 정시에 맞춰 허겁지겁 교무실에 들어왔다. 
 
“오늘 출근길에 접촉사고가 났어. 사고 처리하느라고 늦었네. 운전에도 나이 제한이 있어야 할 것 같아. 연세 많으신 할아버지가 뒤에서 내 차를 받았지 뭐야.” 
 
한소희는 깜짝 놀랐다. 
 
“병원에 가보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 정도는 아니야. 살짝 부딪혔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래도, 병원에 가보셔야 해요. 교통사고는 사고 난 당시에는 잘 모르거든요.” 
 
“그래, 그렇게 할게.” 
 
“참, 선생님께서 지난 번에 부탁한 물품 확인 끝냈어요.” 
 
한소희는 파일첩을 펼쳐들어, K 교사에게 확인을 부탁했다. 
 
“잘 했네. 이렇게 하면 돼. 나도 수업 내용 정리 거의 끝냈으니까, 이번 주 내로 이메일 보내줄게.”
 
K 교사는 한소희에게 전해 받은 파일첩을 책상 위 책꽂이에 끼워 넣었다. 첫 수업을 알리는 벨이 울리자,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교실로 향했다. 
 
다음 날, 아침 K 교사는 출근하지 않았다. 한소희는 K 교사가 걱정돼, 문자를 보냈다. K 교사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나 방심했나 봐. 어젯밤에 허리가 아파서 한숨도 못 잤어. 일주일 정도 입원해서, 치료받으려고.” 
 
“잘 하셨어요. 아무 걱정 마시고, 일주일 푹 쉬다 오세요.”  
 
한소희는 교육감 참관 수업이 은은하게 걱정되었다. 혹시라도 K 교사의 퇴원이 늦어진다면, 열흘 뒤에 있을 교육감 참관 수업이 자신의 몫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소희는 교육감 참관수업 일정이 다가올수록 불안하고 초조했다. K 교사에게 하루라도 빨리 퇴원하라고 다그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 주 내로 보내주겠다던, 이메일은 깜깜무소식이었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에 새벽 예배를 나가기 시작했다. K 교사가 하루라도 빨리 퇴원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아니면, 이메일이라도 하루빨리 받아보기 원했다. K 교사가 이메일을 보낸다는 것은, K 교사가 직접 수업하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한소희의 기대와는 달리, K 교사는 일주일 내내 연락을 하지 않았다. 교육감 참관 수업이 3일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다. 한소희는 K의 문병을 갔다. 만나서 직접 확인할 생각이었다. 
 
한소희는 K가 입원한 병실에 들어가, 인사치레의 안부를 묻고 나서, 참관 수업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선생님, 혹시 참관 수업은 예정대로 진행하실 수 있으신 거죠?” 
 
“그래야지. 내일이나 모레 퇴원할 생각이야.” 
 
한소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희 선생님, 많이 걱정했구나. 뭘 그런 걸 걱정해? 그거 확인하려고 병원까지 온 거야?”
 
한소희는 움찔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K가 피식 웃었다. 
 
“뭘 그런 게 아니야. 솔직히 말해도 돼.” 
 
K의 말에, 한소희 역시 긴장이 풀렸다. 
 
“솔직히 조금 걱정됐어요. 혹시라도, 내가 수업을 맡게 되면 어떻게 하지…. 평소에 안 나가던, 새벽 예배까지 나갔다니까요.” 
 
“걱정도 팔자다, 소희 선생님.”
 
K는 한소희의 한쪽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제가 소심한 성격이라니까요.” 
 
한소희는 어색하게 웃었다. 
 
한소희는 일단 안심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주말을 보내면 될 일이었다. ‘월요일이 되면 K 교사가 퇴원을 할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K 교사는 퇴원하지 않았다. 한소희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참관 수업을 맞이했다. 과학실의 보조교사 역할을 맡았던, 한소희가 교육감이 참관하는 수업에서 홀로 서서 수업을 진행해야 했던 것이다. 
 
결과는 최악이었다. 
 
모든 책임을 한소희가 짊어져야 했다. K 교사는 참관 수업 일정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퇴원을 했다. 당일 오후가 돼서야, 학교에 들른 것이다.
 
상식적으로 보면, K 교사가 비난받아야 하겠지만 아무도 나서서 한소희를 두둔해주는 교사는 없었다. 전후 맥락을 모르는 다른 교사들은 아마도 K 교사의 부득이한 사정으로, 한소희가 책임지고 수업을 진행해줄 것이라 예상했을 것이다. 
 
교감 선생님의 혹독한 비난이 쏟아져 내릴 때, 한소희를 감싸준 K 교사였다. K 교사의 행동을 지켜본 다른 교사들은 지레짐작 판단했을 것이다. 신입 기간제 교사의 명백한 실수라고. 
 

 
“그날 사건에 대해, K 교사와 따로 이야기해보셨나요?” 내가 물었다. 
 
“네, 아주 짧게 대화를 나눴어요.” 
 
“K 교사가 뭐라고 하던가요?” 
 
“미안하다고 했어요. 몸이 계속 아파서, 도저히 퇴원할 수가 없었다고 했죠. 상황이 이렇게 될지 몰랐다면서, 이해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자매님의 반응은요?” 
 
“그래도 너무하신 거 아니냐고 물었어요. 그 말을 할 때는 저도 흥분한 상태라 예민한 말투였어요.”
 
“K 교사 자기 잘못을 인정하던가요?” 
 
“아니요. 제가 공격적으로 말하니까, K 선생님도 당황하셨나 봐요. 갑자기 태도를 바꾸시더라고요.” 
 
“어떻게요?”
 
“그날 소희 선생님이 문자로 “아무 걱정 하지 말고 푹 쉬라고” 말하지 않았냐고. 그래서, 아무 걱정 없이 쉬다 왔는데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하냐고. 오히려 저한테 따지시더라고요. 거기서 제가 할 말을 잃었어요. 대화가 중단됐죠.”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으셨어요?”
 
“아니요. 머리가 멍해지면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어요.”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어떤 심정이었는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두려웠던 것 같아요. 이미 지나간 일이고, 상황은 바꿀 수 없잖아요. 나는 기간제 교사이고, 그분은 정교사이고요.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내 잘못 아니라고 말할 자신까지는 없었어요.” 
 
“무엇에 대한 두려움일까요?”
 
“….”
 
한소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두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티슈로 눈물을 닦아내며, 감정을 애써 진정시키고자 했다.
 
 나는 침착하게 기다렸다. 그녀가 천천히 생각하기를 바랐고,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둔 진실을 말하기 원했다. 
 
“사람들이 저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봐 두려웠어요. 제가 조금 더 강하게 말했다면, K 선생님뿐만 아니라, 주변 모든 선생님들이 저를 이상하게 봤을 거예요. 그런 상황을 감당할 힘이 저한테 없거든요. 저는 그냥 사람들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아요. 조용히 지내고 싶거든요.” 
 
그녀가 진실을 말했다. 그녀의 마음속에 숨겨진 비밀의 문이 비스듬히 열렸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두렵다는 말이 무슨 뜻이죠?” 
 
“제가 살짝 이상하지 않나요? 말투도 어눌하고, 걷는 모습도 조금 이상하고. 목사님은 제가 상담실을 들어올 때, 제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셨나요?” 
 
그 순간이었다. 비디오테이프가 빠른 속도로 뒤로 감기듯이, 한소희가 상담실에 처음 들어오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한소희는 미세하게 절뚝거렸다. 상담실 입구와 상담실 내부까지의 거리는 짧았다. 내담자를 안내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는 한소희보다 한 걸음 앞서 걸어야 했다. 한소희가 걷는 것을 볼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는 상담실에 들어선 그녀가 의자에 앉기까지였다. 굳이 걸음걸이를 세어본다면, 세네 발자국이었다.  
 
한소희의 말투 역시 느리고 차분했다. 가끔 복잡한 단어를 말할 때,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상담과 관련해서 중요한 정보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에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면, 상담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소희가 자신의 말투와 걸음걸이를 상담실 테이블에 올려놓는 순간, 그녀의 말투와 걸음걸이는 반드시 언급하고 넘어갈 중요한 의제가 됐다. 열리다 멈춰버린, 비밀의 문을 그녀가 활짝 열어젖힌 것이다.
 

 
한소희가 9살이었던, 3월의 주말이었다. 그녀의 가족은 가까운 놀이공원에 갈 예정이었다. 마음이 들뜬 한소희는 부모가 준비하는 동안, 집 안에 머무를 수 없었다. 
 
“엄마, 나 먼저 나가서 기다릴게.” 
 
“안돼, 같이 나가. 조금만 기다려.” 
 
“나 잠깐 슈퍼에서 살 거 있단 말이야.” 
 
“안 된다고. 어차피 우리도 슈퍼 잠깐 갈 거야. 같이 나가.” 
 
“싫어. 나 혼자 갔다 올 거야.” 
 
한소희가 신발을 신고, 현관 밖으로 나가는 동안 엄마는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고 있었다. 두 손가락에 로션을 잔뜩 묻혀 얼굴에 바르면서, 현관 밖을 나가는 한소희에게 소리쳤다. 
 
“너 차 조심해야 돼! 앞에 잘 보고 다녀.”
 
화장실에서 씻고 나오던, 그녀의 아빠가 아내에게 말했다. 
 
“아니, 소희 혼자 나가게 내버려 뒀어?” 
 
“몰라, 혼자 간 데. 바로 집 앞인데, 뭐.” 
 
“걱정인데….”
 
“그렇게 걱정되면, 당신이 나가봐. 당신은 옷만 입으면 되잖아.” 
 
그녀의 아버지는 이상하게 불안했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딸을 따라나섰다. 
 
한소희가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걸을 때,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한소희는 까치발을 하고, 집집 사이에 좁은 골목 틈새로 연기가 나는 곳을 찾았다. 그녀의 눈에 펼쳐진 것은 봄날의 맑은 하늘뿐이었다. 연기가 나는 곳은 없었다. 
 
한소희는 손바닥으로 담장을 짚어가며, 골목을 따라 걸었다. 그녀가 코너를 돌아, 슈퍼 앞 사거리에 들어섰을 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하얀색 승합차가 그녀를 들이박은 것이다. 그녀의 몸이 공중에 떴다가,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응급환자를 싣고 가던 구급차가 좁은 골목길을 과도한 속도로 달리다, 한소희를 치어 버린 것이다. 구급 대원이 부리나케 차에서 내려, 한소희를 살폈다. 
 
그녀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무릎은 반대쪽으로 꺾여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중대한 상황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구급 대원은 한소희를 구급차에 태우고, 병원으로 이송했다. 
 
멀리서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에, 한소희의 아버지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가 사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  슈퍼의 사장이 덜덜 떨리는 손짓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한소희의 아버지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멘트 바닥에 흥건한 피를 보고, 잠시 기절했다. 
 

 
“머리를 심하게 다쳐서 큰 수술을 여러 번 받았어요. 일 년 내내 병원에 살다시피 했죠. 어렸지만, 정말 힘들었던 것 같아요. 이마부터 뒤통수를 가로지르는 수술 자국이 생겼거든요. 지금은 머리카락으로 가릴 수 있는데, 당시에는 수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머리카락이 없었어요. 
 
부모님이 조금만 신중하셨더라면, 머리카락이 자란 다음에 학교에 보내셨을 텐데, 저희 부모님은 그러지 않으셨어요. 출석 일수를 채우지 못하면 큰일 나는 줄 아셨나 봐요. 머리에 수술 자국이 선명한데, 바로 학교에 갔어요.”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녀가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이유, 그녀의 얼굴이 유독 하얗고 창백한 이유를 그제서야  알게 된 것이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파란 코트 역시, 그녀의 걸음걸이를 조금이라도 숨겨볼 의도였던 것이다. 
 
9살의 교통사고 이후, 한소희가 받은 고통을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목이 메였다. 내가 입술을 떼서, 그녀에게 말을 건네려고 하는 순간, 눈물이 터져버렸다. 한소희도 함께 울었다. 
 
“그날 차라리 죽었어야 했나 봐요.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들어요, 목사님….” 
 

 
“괴물이래요, 괴물이래요.” 
 
한소희의 같은 반 남학생들이 떼를 지어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친구들이 두려웠다.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에 숨어들었다. 변기에 앉아 다음 수업을 알리는 벨이 울리기만을 기다렸다.  
 
“엄마, 나 학교 가기 싫어.” 
 
한소희는 엄마에게 참아왔던 말을 내뱉었다. 
 
“친구들이 나를 이상하게 본단 말이야.” 
 
엄마는 딸의 이야기를 한참 동안 들어주었다. 한소희가 말을 마치자, 엄마는 딸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엄마도 내가 이상한 것 같아?” 엄마 품에 안겨 있던, 한소희가 물었다. 
 
“아니, 엄마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소희가 아파서 그런 거야. 다 나으면 괜찮아져. 조금만 참아, 소희야.” 
 
한소희는 엄마의 위로에 힘을 얻었다. 학교 친구들을 상대하는 것이 불편하고 힘들었지만, 견디고 견뎠다. 해가 바뀌고, 학년이 바뀌고, 친구들도 바뀌었다. 그녀의 머리카락 속에 감춰진 흉터를 기억하는 사람도 하나 둘 사라졌다.  
 

 
더운 여름날의 체육시간이었다. 체육 선생님은 내리쬐는 햇볕을 피하고자, 학교 공터 그늘로 아이들을 이끌었다. 한소희도 줄을 맞추어 걸었다. 그때였다. 한소희는 갑자기 몸의 균형을 잃고 맥없이 넘어졌다. 일어나려고 해도,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소희야, 괜찮니?” 
 
한소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혀가 굳어버린 것 같았다. 온몸의 근육에 경련이 일어났다. 반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선생님은 다급하게 한소희를 들쳐 업고, 양호실로 뛰었다. 
 
학교 운동장에 구급차가 도착했다. 한소희는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구급차로 옮겨졌다. 체육 선생님이 구급차에 함께 올랐다. 의사에게 상황을 설명할 의도였다. 
 
한소희는 그날 이후 미세하게 다리를 절게 되었다. 뇌 수술의 후유증이었다. 
 
한소희는 몸에 일어난 변화를 감지했다. 두려움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학교에도 갈 수 없었다.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끔찍한 기억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그녀의 엄마가 딸을 위로했다. 마음을 추스를 수 있도록 옆에서 도운 것이다. 
 
“소희야, 괜찮아. 의사 선생님이 약만 제때 잘 먹으면, 두 번 다시 그런 일 없을 거라고 했어.” 
 
“거짓말이잖아. 엄마는 맨날 나 걱정할까 봐 일부러 거짓말하잖아.” 한소희가 울면서 말했다. 
 
“아니야. 소희야. 엄마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오늘 병원에 같이 가서, 의사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 들어보면 되잖아. 엄마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엄마는 속상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남편과 함께, 딸을 챙겨 집을 나섰다. 셋이 나란히 걷다가, 엄마가 지갑을 두고 나왔다며,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한소희는 무심결에 앞서 걸었고, 그녀의 아버지는 길가에 멈춰 엄마를 기다렸다. 지갑을 챙겨 나온 엄마가 빠른 걸음으로 아빠에게 다가왔다. 한소희는 부모님보다 열 걸음 앞서 걸었다. 
 
아빠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몰라. 요즘 내 정신이 아니야.” 
 
“그나저나 갑자기 병원은 왜 가는 거야?” 
 
아빠가 그렇게 말하자, 엄마는 아빠의 팔을 세게 꼬집으면서,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엄마가 작은 목소리로 아빠에게 말했다.
 
“저거 안 보여? 소희가 지금 다리를 절잖아. 당신은 그것도 몰랐어?” 
 
“뭐가? 난 모르겠는데.” 아빠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세히 좀 봐. 이상하잖아. 어떻게 아빠가 그것도 몰라.” 
 
한소희는 충격에 빠졌다. 부모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속삭 말한 모든 대화를 듣고 만 것이다. 한소희는 울음을 터뜨렸다. 뒤돌아서서 부모를 가로질러 집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에 엎드려 하염없이 울었다.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온 부모님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엄마가 문을 두드리며,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돼서 그랬어, 소희야. 엄마 착각일 수도 있잖아. 괜히 너 걱정할까 봐 말 못 했어. 미안해, 소희야. 문 좀 열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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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이해할 수 있어요. 제가 걱정할까 봐 그러셨겠죠. 엄마 한 사람이라도 괜찮다고 말해주시지 않았다면, 제가 견딜 수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아쉬워요. 제 상태를 부정하거나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주셨으면 어땠을까? 혼자 생각해보거든요. 어차피, 다 지난 일이지만요.”
 
한소희가 들려준 이야기를 마음속으로 되새겨보았다. 한소희는 스스로를 “이상한 사람”으로 정의 내렸다.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마도 교무실에서 일어난 사건은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걸었던 골목길로 그녀를 소환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끔찍한 교통사고를 극복하고 살아돌아온 한소희를 세상은 반겨주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마저도 비웃음거리가 되었던 어린 시절이 그녀가 살아갈 세상을 두렵게 만든 것이다. 
 
그것은 아이러니였다. 이상한 사람은 한소희가 아니라, K 교사이며 교감이었다. 
 
사소한 접촉사고를 핑계로, 자신의 업무적 과실을 한소희에게 떠넘긴 K교사는 이상한 사람이다. 한소희가 K를 대신해, 교감 선생님에게 인격적인 모독을 당할 때, 좋은 사람인 척 한 K 교사는 위선적인 사람이다.  
 
교감은 자초지종을 들어보지도 않은 채, 한소희를 인격적으로 모독했다. 정교사와 기간제 교사를 운운하며, 사람을 자기 방식으로 평가하는 태도 역시 옳지 않다. 그는 여러 면에서 이상한 사람이다. 
 
한소희는 이상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정작 자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몸이 불편한 한소희를 은은하게 무시했던 사람들은, 그녀가 어린 시절에 “괴물”이라고 놀리며 비웃던 사람들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괴물의 사전적 의미는 괴상하게 생긴 물체다. 교무실에서 그녀에게 쏠린 다수의 시선은, 그녀를 괴상하게 여겼다. 어린 시절 교실에서, 사리분별하지 못했던 악동들에게 받았던 고통이 십수 년 뒤에 고스란히 되살아난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은 진실을 알지 못했다. 
 
한소희는 죽음을 이긴 진정한 승리자였다. 
 

 
“참 이상하네요. 정말 이상한 사람이에요.” 내가 말했다. 
 
한소희는 가만히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K 교사 말이에요. 상식 이하의 사람이군요. 어떻게 그런 식으로 행동할 수가 있죠? 교감도 마찬가지예요. 그런 사람 꼭 있죠. 권위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요. 제가 볼 때, 두 사람 모두 이상한 사람들이에요.” 
 
한소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만약에 소희 씨가 나를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준다면, 나는 이 상황을 간단히 정리하고 싶어요. ‘이상한 사람들은 정작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을 모른다. 정작 멀쩡한 사람이 상담을 받으러 왔다.’ 제가 전해드린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한소희는 머뭇거렸다. 그러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내담자라서 그런 말을 해주시는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너무 제 입장에서만 말했나 봐요. 그분들 이야기를 들어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거예요. 그분들께 괜히 죄송하네요.”
 
나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나도 나름 상식적인 사람이에요. 한 사람 말만 듣고 쪼르르 달려가 그 사람 편을 들 정도로 어리석지 않아요. 소희 씨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소희 씨는 나를 설득하고 있어요. 내 생각을 바꾸고 싶어 해요. ‘내가 이상한 사람이에요.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해주세요.’ 진실은 그게 아니죠. 이상한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에요.”
 
한소희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소희 씨, 속지 마세요. 당신은 정상이에요. 그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이라고요. 세상에는 의외로 이상한 사람들이 많아요.” 
 
한소희는 감정이 격해져,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한소희와 여섯 번의 상담 세션을 지속했다. 그 과정에서 한소희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현재의 대인관계에서 적절히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제시하고 연습했다. 
 
관계에서 갈등이 일어날 때, 방아쇠처럼 당겨지는 “나는 이상한 사람이야.”라는 파괴적인 생각은 적어도 완화되거나 지연되었다. 그러나, 언제든 반복될 수 있었다. 그에 따른 후속 조치로 긴급 상담을 이어갈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한소희를 배웅하고 돌아와, 상담 일지에 간단한 메모를 남겼다. 
 
언제나 한소희가 옳으냐고? 물론, 아니다. 상대방 잘못이라고 결론을 내리면 뭐가 달라지냐고? 모르는 소리다. 그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았다. 정당하지 못한 비난마저도 스스로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관계의 문제는 언제나 상대방이 존재한다.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잘못하지 않는다. 갈등은 상호 책임이다. 
 
한소희는 상대방의 책임을 빼앗아버렸다. 모든 것을 그녀의 잘못으로 여긴 것이다. 극단은 좋지 않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객관적으로 따져볼 기회를 가져야만 했다. 그것은 곧, 그녀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표현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소희가 건물 밖을 걸어나고 있었다. 절뚝거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울컥 눈물을 흘렸다. 동정심은 아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것은 경외심이었다. 
 
그녀는 생존자이며, 위대한 승리자였다.

기억은 지독하다

사람마다 끔찍한
기억이 있어요.
 
기억이 떠오르면
우울해져요.
 
벗어나고 싶으니까
잊으려 해요.
 
잊으려 마세요.
잊을 수 없어요.
 
잊으려 할수록
생생해져요.
 
증명해볼까요.
따라 해보세요.
 
지금 이 순간부터 절대로
토끼 생각하지 마세요.
 
하얀색 털이 뽀송뽀송한
토끼를 떠올리지 마세요.
 
토끼 등에 빨간색으로
숫자 5라고 쓰여 있어요.
 
보면 안 돼요.
절대로 떠올리지 마세요.
 
아….
당신은 결국 보고 말았네요.
 
이제 아시겠죠.
기억은 지독한 녀석이에요.
 
잊으려 할수록
더 생생해지죠.
 
새로운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잊지 않고
기억하는 거예요.
 
끔찍한 기억을 계속
떠올리는 말인가요?
 
아니요.
그런 말이 아니에요.
 
기억하는 방식을
바꿔보자는 말이에요.
 
기독교는
기억하는 종교에요.
 
사람은 자꾸 잊어버리고
하나님은 자꾸 기억나게 하세요.
 
성경 전체에서
계속되는 이야기죠.
 
사람이 은혜를
잊으면
 
하나님은 은혜를
기억나게 하세요.
 
사람이 사랑을
잊으면
 
하나님은 사랑을
기억나게 하세요.
 
언제나 하나님은
잊혀진 기억을 되살려주시죠.
 
기억이 끔찍한 이유는
그곳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에요.
 
잊지 말고
기억하세요.
 
그곳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지금 무슨 말하는 거예요!
난 완전히 혼자였다고요!
 
하나님은커녕
상처 입은 나만 보여요.
 
맞아요.
쉽지 않아요.
 
부탁드려요.
포기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끝까지 찾아내세요.
 
하나님은 그곳에 계세요.
당신은 혼자일리 없어요.
 
어둠 속에서 울고 있는
꼬마가 있어요.
 
울긋불긋 온몸에
멍 자국 난 아이.
 
죽은 시체처럼
담요에 덮여 있었죠.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어요.
 
잊혀지지 않아요.
어제처럼 생생하죠.
 
난 고통받을까요.
아니요.
 
난 혼자가
아니었어요.
 
끔찍한 기억에 찾아와 주신
하나님 덕분에
 
이제 나는 마음 편히
그 사건을 기억할 수 있죠.
 
그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살아나거든요.
 
삶이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
나는 그 꼬마와 눈이 마주쳐요.
 
너도 살았으니
나도 살 거다.
 
당신이 내 글을 읽는
이유를 알아요.
 
내 기억 때문이고
당신의 기억 때문이죠.
 
내가 혼자가 아니듯이
당신도 혼자가 아니에요.
 
사건을 기억하면
당신은 불행해져요.
 
하나님을
기억하세요.
 
나는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라니까요.

남편의 옛날 사진을 발견했어요

오래전에 오랫동안 만났던 남자 친구에게 받은 상처가 있어요. 저와 사귀는 도중에 옛 여자 친구를 만났고, 그 사실을 숨겼어요. 그로 인해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을 만나 오면서 늘 마음 한구석에 불신이 있었어요. 상대방이 좋아해 주는 것에 익숙했어요. 몇 번의 이별을 겪고, 남편을 만났어요.
 
남편은 저를 사랑해줬어요. 만난 지 2주 만에 남편은 저 모르게 예식장을 예약했어요. 나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주는 남편에게 마음이 열렸어요. 서로 돕는 배필이라 여기면서 별다른 다툼 없이 잘 지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우연히 남편이 옛 여자 친구와 찍은 사진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저를 만나기 전에 찍은 사진이라고 했고, 본인도 기억 못 할 정도라고 했어요. 그런 흔적을 보인 것에 대해 미안해했고, 더 큰 사랑으로 보듬어 줬어요.
 
하지만, 저는 그날 이후, 아무 때나 그 장면이 떠올라요. 괴로워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예전의 상처와 겹쳐져서 남편을 의심하게 돼요. 남편도 제가 만나왔던 사람들처럼 날 속일까 봐요.
 
나한테 이렇게 잘하는 것을 보면, 예전에 다른 누군가에게도 이렇게 잘했겠지. 질투가 나면서 남편에게 퉁명스럽게 행동할 때가 있어요.
 
제 결혼생활은 겉보기에 아무 흠이 없어요. 이럴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해요. 제가 옛 기억으로 힘들어하고 그로 인해 불신의 틈을 만들고 있는 것 같아 죄책감을 느껴요. 자꾸 나쁜 생각을 하게 되니까요. 제 안에 치유되지 않은 상처로 인해 남편을 아프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 불안해요.
 
생각의 끈을 잘라내고 과거로부터 해방되고 싶어요.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자매님이 느끼는 의심과 불안은 정당한 감정이에요. 자책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현재 결혼 생활이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나는 자매님이 지금보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상처는 시간이 흘러도 저절로 치유되는 게 아니에요. 고통스럽더라도 마주해야 해요. 자매님도 이미 알고 있듯이, 과거에 받은 상처는 치유되지 않은 채 자매님 내면 깊숙한 곳에 머물러 있어요. 그 상처를 직면하고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상처는 아물지 않은 채 방치된 거예요.
 
상처를 외면하면, 사람은 대안을 찾아요. 상처를 만회할 방법을 찾거든요. 다른 누군가를 만나 확인하고 싶었던 거예요. 세상 어딘가에는 진실된 사랑이 있지는 않을까. 하지만, 진실된 사랑은 없었어요. 그들은 같은 방식으로 자매님에게 고통을 주었어요.
 
우연히 남편의 사진을 보게 되었을 때, 자매님이 상처를 가두고 굳게 잠가 놨던 방문이 열린 거예요. 아수라장이 된 채로 열려서 감당할 수 없었던 거죠. 불안하고 의심스러운 마음, 연이어 반복되는 감정의 기복, 극단적인 생각. 모두 자연스러워요. 방금 전까지 남편만은 예외였는데, 남편도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된 거죠.
 
자매님은 딜레마에 놓였어요.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남편을 그들 모두와 같은 사람으로 취급할 수 없으니까요. 남편은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에요. 자매님께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이 지점에서 자매님의 죄책감이 시작돼요. 조심스럽게 자매님의 감정을 추론해 볼게요.
 
“이렇게 좋은 사람과 행복한 결혼 생활을 시작했는데, 내가 의심해서 모든 것을 망쳐 버리지는 않을까. 나만 참으면 우리는 아무 문제가 없어. 이 남자는 좋은 남자야. 내 상처 때문에 오해하는 거야. 그럼, 안돼. 다 지난 일이잖아. 의심하는 네가 나빠. 나는 왜 이럴까.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과거에 매여 고통받고 있어. 내 문제야. 나만 참으면 돼.”
 
자매님, 그럼 안돼요. 절대로 참으면 안 돼요. 표현하셔야 해요. 표현해야 자매님이 살아요.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자매님도 남편도 더욱 고통받아요. 억누르는 능력을 키우지 말고, 표현하는 능력을 키워주세요. 억누르다가 새어 나오는 감정은 관계를 파괴해요. 뚜껑을 열어놓고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 해요.
 
말처럼 쉽지 않을 거예요. 두 분은 서로 사랑하지만,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기 어려울 수 있어요. 결혼한 지 3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서로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주기에는 조금 불안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남편은 자매님을 만난 지 2주 만에 예식장을 예약했어요. 자매님과 상의하지 않았어요. 매우 드문 일이에요. 자매님이 그 당시 느꼈던 감정을 남편에게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었을 지 묻고 싶어요. 그만큼 솔직히 표현하기 힘들겠지만,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남편과 치유되는 과정을 공유해주기를 부탁드려요. 있는 그대로의 감정, 진행되고 있는 감정을 표현해주세요. 표현하려는 의지와 함께 표현하는 방식도 중요해요. 쉽지는 않지만, 자매님이 노력해주시리라 믿어요.
 
주어와 동사를 바꿔주세요. 주어는 “나”로, 동사는 “그렇다고.”로 표현해주세요. “나 그렇다고.”라고 표현하면 성공입니다.  표현 방식을 의식하지 않고 느껴지는 대로 말하면, 주어가 “너”로, 동사는 “그랬잖아.”로 말하게 돼요. “너 그랬잖아.”라고 말하면 관계가 망가져요.
 
예를 들어 볼게요.
 
“당신이 의심스러워. 그 여자한테도 다정했었지? 이런 오해받고 싶지 않았다면, 사진을 잘 처리했어야지. 내가 사진을 보게 만들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잖아. 그래서, 내가 고통받잖아.”
 
여기서의 주어는 “당신, 너”이고, 동사는 “그랬잖아.”에요. 이런 식으로 표현하면, 배우자는 반박할 말이 필요해요. 비난으로 들리기 때문이죠. “당신이 그랬잖아.”라고 말한 거니까, “아니, 나는 안 그랬어.”로 답하고 싶을 거예요. 서로 고통받을 수밖에 없어요.
 
주어를 “나”로, 동사를 “그렇다고.”로 바꿔볼게요.       
 
“나는 지금 당신을 오해하고 있어. 당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마음과 치유되지 않은 내 상처 사이에서 나는 고통받고 있어. 그러고 싶지 않은데, 하루 종일 생각나. 의심과 불안으로 고통받고 있는 나를 이해해줄 수 있어주면 좋겠어. 내 감정 숨기지 않고 당신에게 말하고 싶어. 나 당신이 필요해. 나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줘, 여보.”
 
여기서의 주어는 “나”이고, 동사는 “그렇다고.”에요. 배우자는 반박하지 않아요. 오히려, 책임감을 느껴요. 돕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될 거예요. “나 그렇다고.”라고 말했으니, 배우자는 “너 그렇구나. 나 몰랐어. 내가 도와줄게.”라고 생각해요. 힘든 시간이지만, 서로 격려할 수 있어요.
 
말처럼 쉬운 건 아니지만, 나는 자매님이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해주기를 바라요.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자매님은 고통받아요. 남편에게 하기 어렵다면, 먼저 예수님께 솔직하게 말하세요. “나 그래요, 예수님. 나 상처 입어서 괴로워요. 의심하고 불안한 나를 보며 자책해요.” 예수님은 자매님에게 말씀하실 거예요. “내 딸 그렇구나. 많이 힘들구나. 내가 도와줄게.”
 
오늘은 말이 길어졌어요. 두서 없이 길게 말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내 진심은 전해졌기를 바라요. 나는 자매님이 상처에서 벗어나서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하나님과 남편에게 온전히 사랑받기 충분한 자매님, 오늘 하루 행복하길 바랄게요.

마음이 잠시 흔들렸을 뿐

“목사 아내가 될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죠. 어느 날, 남편이   목사가 되겠다고 하는 바람에….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그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어요. 목사가 된다고 하는데 이혼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사모로 살아가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더군요. 어항 속에 사는 느낌이랄까…. 제 표정, 말투, 입는 옷, 아이들.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구설수에 올랐어요. 남편은 자기가 원해서 하는 일이지만, 저는 그렇지 않거든요. 사모가 상담을 받는다는 소문이 퍼지면 어떻게 될지…. 아마 목사 자격 없다, 사모 자격 없다고 뒤에서 욕하겠죠. 결국 우리 부부를 쫓아낼 방법을 찾을 거예요. 
 
요즘 이상한 꿈을 자주 꿔요. 자다가 눈을 뜨면 천장이 내려앉는 거예요. 천천히 내려앉는 천장을 보면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요. 깜짝 놀라 일어나면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어요. 요즘은 꿈꾸는 횟수가 늘어났어요. 예전에는 한 달에 한두 번 꾸던 꿈이었는데, 이제는 일주일에 한두 번으로 늘었어요.” 
 
P는 금융회사에 다니던 남편과 결혼했다. 그녀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교회에서 만나 4년 동안 연애를 했다. 두 사람은 해외 단기선교로 신혼여행을 대신할 만큼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남편은 회사에서 업무 능력을 인정받으며 승승장구했다. 자녀들 역시 잘 자라주었다. 
 
결혼하고 11년이 지난 어느 날, 남편은 아내를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으로 불러냈다. 분위기를 한껏 잡고서 폭탄선언을 했다. 신학교에 입학해서 목사의 길을 걷겠다고. 아내는 충격을 받았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충분한 시간을 갖고 생각해보자고 했다. 
 
그날부터 아내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사명을 주셨는데, 자신이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쉽게 그의 뜻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그동안 자신이 만났던 목사 아내들의 고통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기도의 자리를 피했다. 기도하다가 덜컥 하나님이 순종하라고 하시면 도망칠 길이 없기에. 
 
“거실에서 빨래를 개고 있는데, 갑자기 마음에 외침 같은 것이 있었어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죠. 더 이상 질질 끌 수 없다고 생각해서 남편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어요. 남편에게 원하는 대로 하자고 말했을 때, 그가 저를 끌어안고 고맙다며 눈물을 흘렸어요. 저도 남편이 참 고마웠어요. 독단적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제 결정을 기다려줬거든요. 두려운 마음은 있었지만 그를 믿었어요. 지금처럼 배려해주고 존중해준다면 어려운 길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남편이 신학교에 입학하고, 목사의 삶을 준비하는 동안에 그녀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남편이 목사가 된 이후에 S시에 위치한 교회에서 연락이 왔다. 담임목사로 와달라고. 남편은 그녀와 상의한 후에 부임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목회가 시작되면서 아내는 생각하지 못한 문제로 시달리게 되었다. 처음 불거진 문제는 그녀의 옷차림이었다. 교인들이 사모가 너무 화려하게 입는다고 수군거렸다. 그녀는 옷차림으로 남편의 목회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화려한 옷은 장롱 구석에 처박아놓고 편안한 옷을 꺼내 입었다. 
 
한 달의 시간이 흐르자 반대의 소문이 들렸다. 옷차림이 너무 촌스럽다는 말이었다. 아내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모든 사람의 비위를 맞출 수 없었다. 그녀에게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옷차림으로 시작된 말은 점점 삶의 모든 것으로 확대되기 시작했어요. 다른 건 다 참아도 자녀들에 대한 말이 사람들 사이에 돌아다니는 건 참을 수 없었어요. 남편이 자녀 교육에 대해서 설교한 날이었죠.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우연히 식당에서 몇 사람이 하는 말을 들었어요. 
 
‘목사님은 자기 자녀도 제대로 못 키우시는 것 같은데, 우리한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건가?’ 
 
저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마음 같아서는 머리채를 휘어잡고 제대로 싸우고 싶더라고요. 아마 남편이 알면 스트레스 받아서 종일 누워 있을 거예요. 일 년에 한두 번은 꼭 몸이 아파서 누워요. 사람들 때문이죠.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는다고 괴로워해요. 그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전 힘들다는 말을 못해요. 저까지 힘들다고 하면 아마 남편이 못 견딜 거예요.”
 
집안일, 자녀 양육은 고스란히 아내가 떠맡았다. 남편은 평일, 주말 구분 없이 새벽부터 늦은 시간까지 바빴다. 아내는 점점 외로움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삶이 통째로 흔들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아이들이 중학교에 입학하자, 그녀의 삶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가까운 대학의 평생교육원에 입학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이 삶에 활력을 가져다주었다. 여러 사람을 편하게 사귀던 중에 한 남자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대화를 하면서 서로 호감을 느꼈다. 
 
‘이러면 안 되지’ 하면서 이상하게 빠져들었다. 깊은 대화를 하고, 함께 식사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녀는 남편에게도 말하지 못한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경청해주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깊어졌다. 
 
“서로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죠. 그 역시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거든요. 출장이 많은 일을 하고 있어서 아내와 함께할 시간이 부족했나 봐요. 제게 외롭다는 말을 자주 했죠. 안아보고 싶다고, 딱 한 번만 허락해달라고. 그의 품에 딱 한 번 안겨봤어요. 성적인 관계를 맺거나 한 건 아니에요.  
 
선을 넘을까 두려웠어요. 그래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에게  이제 그만하자고, 더 늦게 전에 정리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죠.  그제야 그도 정신을 차린 것 같아요. 제 말에 동의해주었어요. 그 이후로 서로 연락을 하지 않고 있어요. 
 
그런데 그가 떠나자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그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게 아니에요. 그가 떠난 자리가 너무 크다는 거죠. 제 선택에 후회는 안 해요. 만일 그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고 선을 넘었다면 더 후회를 했겠죠.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거든요. 정리하면 죄책감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심해졌어요. 
 
가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진 않을까 스스로 걱정이 되요. 제가 인생을 살면서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게 된 거죠. 항상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제게 벌어졌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통을 받고 있어요.” 
 
남자를 떠나보낸 이유는 간단했다.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에게 마음을 빼앗기면서 그녀는 하나님께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나님과 그녀 사이에 알 수 없는 벽이 있는 것 같았다. 그에게 이별을 통보한 후에 그녀가 되찾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과 막힘없는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떠난 후에도 하나님과 관계는 예전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무거운 돌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더 고통스러웠다. 그녀의 고통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남편이 아는 순간, 그의 세계는 무너질 것이다. 그는 교과서처럼 정해진 대로, 주어진 대로, 불평 한 마디 없이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이었다. 교회 사람들이 술 한 모금 입에 대는 것마저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기에 아내가 다른 사람에게 잠시나마 마음을 줬다는 것을 용납할 리 없었다. 영원히 비밀로 간직하고자 했지만 그 무게를 견딜 수 없었다. 
 
“마음속에서 싸움이 있음을 느껴요. ‘내가 정말 잘못했지. 다른 사람에게 감정을 주지 말아야 했어. 도대체 왜 그랬을까?’  하면서도 정반대의 생각도 들어요. ‘내가 그와 뭘 했는데? 그냥 밥 먹고 차 마신 게 다잖아. 선을 넘은 적도 없고. 마음이 잠시 흔들렸을 뿐 그 이상은 아니잖아. 결국 옳은 선택을 했으니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전혀 없어’ 라고 스스로 다짐하지만 마음이 복잡해요. 
 
하나님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회개했으니까 용서받은 걸까요? 아니면 정말로 반성하지 않으니까 용서받지 못한 걸까요? 너무 혼란스러워요.” 
 
***
 
그녀는 취약하다. 외로움에 노출되기 쉽다. 고립된 섬에서 외롭게 생활하다가 그 섬에 낯선 남자가 갑자기 찾아왔고, 그에게 매력을 느꼈다. 그녀는 사람들과 함께 머물고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가까이 가지 않았다. 가까이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녀에게 따뜻하지 않았다. 반복되는 비판 속에서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그녀에게 비판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호적인 사람들은 그녀의 눈에 보이지 않고, 비판적인 사람들만 보였다. 결국 공동체 모두가 그녀를 비난하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사실이 아님에도 그녀에게는 사실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수많은 목사 아내들이 지독한 외로움으로 고통 받는다. 사람들의 높은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채, 스스로 결론내리고 절망하면서 마음의 병을 얻는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을 통해 치유하려고 하면 부작용이 생긴다. 위험한 관계로 빠져든다. 
 
남편 역시 목회가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간다. 아내를 세심하게 돌볼 상황이 아니다. 남편이 아내를 돌봐주지 않아서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잠시나마 마음을 줬다고 하는 것은 무리일까. 사모 역시 목사와 다를 바가 없으니 어떤 위기 속에서도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인가? 
 
아내가 취약해진 결정적인 이유는 남편과 관계가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선순위에서 밀린 아내는 비참해진다. 회사 일이 바빠서 아내를 뒷전으로 미룬 사람을 좋게 평가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아내보다 앞선다고 말하는 사람은 어떤가? 단순하지 않다. 
 
이 과정에서 남편들은 실수한다. 하나님이 아닌 교회 일에 파묻혀서 아내를 뒷전으로 미루는 것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교회 업무를 구분해야 한다. 회사 일로 밀려난 아내나 교회 일로 밀려난 아내나 그 심정은 똑같이 비참하다. 교회 일로 밀린 아내에게 더 고귀한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아내보다 앞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내가 가장 우선되는 성도라는 것을 잊은 것이다. 아내는 그 누구보다 목사의 사랑과 돌봄이 필요한 최우선 순위의 성도이다. 
 
아내는 고립된 섬에서 스스로 탈출해야 한다. 계속 무인도에 스스로를 가둔다면 지나가는 배 위에서 의미 없는 손짓으로 인사하는 사람마저 반갑게 느껴진다. 취약한 상태가 계속된다. 남편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한 가지는 그와 공유해야 한다. 
 
“나는 지금 외롭다. 당신이 필요하다.” 
 
외로움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남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건강한 공동체를 찾아서 소속감을 느끼기를 바란다. 목사 아내는 목사 아내의 고통을 안다.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맞는 사모들을 모아서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마저 힘들다면 일대일로 연락을 해서 정기적으로 마음속에 있는 답답함을 털어놓는 것도 좋다. 무인도를 디즈니랜드로 만드는 것은 어렵지만 낭만적인 여행지로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쉽다. 방법은 간단하다. 사람을 기다리지 말고,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남편이 목사의 사명을 받을 때, 아내 역시 사명을 받은 것이라고 쉽게 결론 내린다. 같은 사명을 받았으므로 목사가 짊어진 사역의 무게를 아내에게 고스란히 짊어지게 한다. 그러나 그녀는 사모가 되기 위해 남편과 결혼하지 않았다. 한 남자를 사랑한 것뿐이다.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했고, 따뜻한 가정을 이루기 원했다. 
 
남편이 목사가 된다고 했을 때, 그녀는 동의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어서가 아니다. 그녀가 기꺼이 목사 아내로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가끔 목사 남편보다 더 열정적인 목사 아내들을 만나지만 그녀는 그들과 다르다. 
 
한 남자를 사랑했다는 이유 하나로 견딜 수 없는 인생의 무게를 견뎌야 했다. 그녀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떨까? 화가 나실까, 답답하실까? 하나님은 그녀를 바라보시며 마음 아파하실 것이다. 고통 받는 그녀를 위로하기 원하실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사모로서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잠시 흔들렸던 그녀를 비난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부탁이다. 그런 말 하지 마라. 그녀를 목사 아내가 아닌 외로움으로 고통 받는 한 여자로 바라보라. 누가 그녀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가!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온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비난이 아닌 사랑이다. 

기억의 전이

“내가 바보 천치인 줄 알지? 당신이 아랫집 남자와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거 내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 운동은 무슨 운동, 새벽마다 그 남자하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남편은 오늘도 어김없이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 정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갈 때까지, 남편은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욕설을 쉬지 않고 내뱉었다. 
 
정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현관문을 열었다. 
 
아직 동이 트기 직전이었다. 삼십 년 지기 친구, P를 산책로 입구에서 만났다.
 
“오늘도 영감이 욕하는 소리가 창밖으로 다 들리데? 밤낮 그 소리여?” 
 
P가 물었다. 
 
“나도 모르것어. 갈수록 심해져. 딸들이 병난 것 같다고, 요양원에 보내자는데, 사지가 멀쩡한 사람을 어떻게 요양원에 보내것어. 내가 그냥 참고 살아야 제” 
 
정희가 말했다. 
 
두 사람은 산책로를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정희는 요즘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찌근거려서 산책을 나갔다 오면, 오전 내내 침대에 누워 움직일 수 없다고 말했다. P는 당뇨가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걱정이라고 말했다. 
 
삼십 년 동안 매일 아침마다 대화를 나누어도, 소재는 고갈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치 세상에 존재하기 이전부터, 서로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정희가 산책을 마치고, 집에 들어서자 남편이 쏜살같이 달려들어 말했다. 
 
“이 여편네 얼굴 좀 봐. 그리도 좋았어? 늙어서 추하게, 쓸데없는 것에 맛 들여 가지고, 부끄러운 줄 알아!” 
 
정희는 남편을 무시하듯, 화장실을 향했다. 
 
남편은 정희에게 따라붙으며, 말했다. 
 
“암, 그래야지. 흔적은 확실히 지워야지. 내 집에 들어왔으니까, 그 더러운 놈의 흔적은 지우는 게 맞지.” 
 
나이 팔십이 넘어, 이렇게 추한 꼴을 당할지, 정희는 몰랐다.
 

 
“이 여편네, 당장 문 열어. 문 닫고 지금 뭐 하는 거야?” 
 
남편은 문 손잡이를 부러뜨릴 기세였다. 
 
정희는 어지러워 침대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남편은 문을 발로 차고, 뒤흔들더니 갑자기 조용해졌다. 밖에서 찰랑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남편이 마스터키를 가져온 것이다. 
 
“아랫집 그놈, 벌써 창문으로 내뺐구먼. 이 여편네 이거 기운이 하나도 없네. 지 몸뚱이 지가 몰라? 늙어서 그 짓을 하니까, 몸이 견뎌나겠어? 제발 정신 좀 차려, 이 여편네야.” 
 
정희의 의식이 희미해졌다. 사력을 다해, 남편에게 말했다. 
 
“영감, 구급차 좀 불러줘. 나 지금 큰일 난 것 같아.” 
 
남편은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양심도 없는 여자 같으니라고.”
 
남편은 구급차를 불렀다. 정희는 가까운 병원에 입원을 했다. 수액을 맞으며 기운을 차리고 있는데, P가 다급하게 들어왔다. 
 
“정희야. 너 아무래도 안되겠다. 지금 나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 요양원에 가든지, 딸네 집에 가든지 해야 할 것 같아.” 
 
정희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내가 이 동네에서 삼십 년을 살았는디, 어디를 가서 살어. 쓸데없는 소리 말어.” 
 
P가 정희의 말을 받아치려는 순간, 정희의 전화기가 울렸다. 
 
“엄마, 지금 병원이야?” 
 
호주에 사는 큰딸, 미숙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아니, 그걸 어찌 알았데?” 
 
“P 아줌마한테 방금 전화 왔었어. 엄마 그런 일이 있으면 나한테 먼저 말해야지. 왜 말을 안 해?” 
 
“아니, 알아도 어찌한데? 호주에 있는데, 걱정만 하지. 별일 아니니께, 걱정하지 말어. 기운 차리면, 바로 집으로 들어갈 거여.” 
 
“안 돼, 엄마. 지금 미현이 보냈어. 엄마 데리러 갈 거야. 절대로 집으로 들어가지 마. 그러다, 엄마 죽어.” 
 
“쓸데없는 소리 말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죽기는 죽는다고 호들갑이여.” 
 
정희는 미숙의 전화를 끊고, P를 쳐다봤다. P는 뭘 그리 빤히 쳐다보냐는 말투로 정희에게 말했다. 
 
“그래, 내가 말했어. 너라도 그랬을 거야. 고집 좀 그만 부려. 지금 미현이 온다고 했으니까, 미현이 따라 미숙이 집으로 가.” 
 
P의 말이 끝나자마자, 미현이가 병실로 들어왔다. 호주에 있는 언니의 연락을 받고, 한 걸음에 달려온 것이다. 
 
“엄마, 괜찮아?”
 

 
미현은 엄마가 수액을 맞는 동안, 엄마 짐을 대충 챙겨올 생각으로 엄마의 집으로 갔다.
 
미현이 집에 들어서자, 아빠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거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네 엄마가 시켰냐?” 
 
“아니에요, 아빠. 엄마가 당분간 병원에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짐 좀 챙기러 왔어요.” 
 
“엄마가 왜 아픈지 알지? 검사해봐라. 아마 몹쓸 병에 걸렸을 거야.” 
 
미현은 피가 거꾸로 솟는듯했다. 
 
“엄마가 무슨 몹쓸 병에 걸려요? 그만 좀 하세요, 이제.” 
 
“뭐 그런 병 있잖냐. 다른 사람에게서 옮는 병, 그거 약도 없다는데…. 늙어서 추하게 그게 뭔 짓인지, 원.”
 
미현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받쳤다. 멀쩡한 사람도 쓰러뜨릴 것처럼, 집 안의 공기가 탁했다. 
 
“엄마 없어도 밥 잘 챙겨드시면서, 운동 꾸준히 하세요. 제가 자주 들여다볼게요.” 
 
아빠는 여전히 신문에 시선을 고정하고 말했다. 
 
“올 것 없다.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가서 네 엄마한테도 전해라. 이참에 갈라서자고.”
 
미현은 혼란스러웠다. 
 
치매라고 하기에는 아버지가 너무나 멀쩡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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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이 그러다 엄마 큰일 난다고, 얼른 그 집에서 나오라고 하도 극성을 부려서, 일단 큰 딸 집으로 나왔어요. 큰 딸이 사위랑 호주에서 사는데, 자기 없는 동안 집에 와 있으라고 해서요. 아따 근데, 여기 아는 사람 한 명 없고 답답해 죽겄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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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미현의 차에서 내리는 정희를 손녀 재희가 맞이해주었다. 호주에서 나고 자란, 재희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서 취업을 했다. 
 
호주에 사는 큰딸, 미숙은 정희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재희가 챙겨줄 것이라고 믿었다.
 
내가 정희를 상담하게 된 시점도 그쯤이었다.
 

 
“상담을 신청하셨죠? 그래서, 연락드렸어요.” 
 
내가 말했다. 
 
“딸이 신청한 것 같아요.” 
 
정희의 말에, 나는 당황했다. 
 
“아, 본인이 아니라 따님이 신청하셨다고요?” 
 
“긍께, 내가 그러지 말라고 하는데, 딸이 고집을 부려가지고 어디 안 할 수가 있어야지요.” 
 
나는 참으로 난처했다. 당사자가 동의하지 않는 상담을 진행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상황이 어렵겠다고 판단했다. 내 입장을 충분히 설명하고, 예의 바르게 전화를 끊을 작정이었다. 
 
그때, 정희가 말했다. 
 
“딸이 그러데요. 목사님이 쓸데없는 말 하시것냐고. 가만히 이야기 들어보면, 좋은 말씀 많이 해주실 거니까 일단 상담받아보라고.”
 
나는 웃음이 터졌다. 
 
“따님이 그러셨어요?” 
 
“아따, 말도 마세요. 어찌나 설득을 하던지, 안 받는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니까요.” 
 
“딸이 저에 대해 뭐라던가요?”
 
“아, 젊어서 고생 많이 하셨다고. 엄마 이야기 잘 들어주실 거라고 그러더라고요.”
 
정희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동안, 나는 본능적으로 큰딸 미숙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저 멀리 호주에서 엄마를 걱정하는 딸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에게 엄마를 부탁한 것이다.’ 
 
나는 정희와의 상담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 소식을 딸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목사님이시죠?” 
 
정희가 상담을 받기로 했다고 하자, 정희의 둘째 딸 미현이 전화를 걸었다. 
 
“아, 그러시군요. 반갑습니다.” 
 
미현은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히 전해줬다. 그리고, 대화 말미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사실, 언니가 목사님에게 상담을 신청했다고 해서 놀랐어요.”
 
“그게 무슨 뜻이죠?”
 
“아, 제 표현이 조금 이상했죠? 오해하지는 마세요, 목사님. 사실, 저나 엄마는 교회에 다니지 않거든요. 심지어, 엄마는 젊으셨을 때 불교셨어요. 언니만 교회 다녀요.” 
 
“아, 괜찮습니다. 전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상담 전에, 어머니에 관한 중요한 이야기를 해주셔서, 여러모로 감사드립니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통화를 끊고,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나는 내 생애 가장 어려운 내담자를 만난 것일지도 몰랐다. 
 

 
“사람이 그렇게 멀쩡해 보이는데, 치매라고 할 수 있나요?” 
 
정희는 여러 번 반복해서 물었다. 나로서는 확답을 줄 수 없었다. 나는 딸들의 판단을 옳게 여겼고, 상식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정희는 내가 딸들과 같은 답변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담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 말을 더욱 신뢰하는 듯했다. 
 
“그 양반이 그래서 그랬구먼요. 같이 있으면 멀쩡하다니까요. 참 신기하네요.” 
 
나는 자신의 기억을 조금씩 잃어가는 정희의 남편이, 왜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는지 궁금했다. 
 
정희와 남편이 살아온 세월 동안, 외도와 관련된 이슈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정희는 내 질문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더러운 짓은 그 양반이 했지요. 아따 그 양반이 젊었을 때, 얼마나 내 속을 썩였는지, 말도 마요. 내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어요.” 
 
정희는 마음속 깊이 담아두었던 말을 꺼냈다. 
 

 
정희는 시골에서 자랐다. 부모님이 논밭에서 일하는 동안, 정희는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동생들을 챙기느라, 결혼할 나이도 지나버렸다. 
 
스물일곱이 되어, 한 남자를 소개받았다. 남자는 정희보다 두 살이 많았다. 대학까지 나오고, 성실하게 산다고 마을에 소문이 자자했다. 
 
서울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는 남자는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뵈러, 명절이나 가끔 내려오는 정도였다. 다급해진 남자의 부모가 마을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정희를 소개하고 나선 것이다. 
 
정희는 집을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남자와 결혼한다면, 지긋지긋한 시골집을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희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첫아이를 임신한 순간부터, 두 사람은 어긋나기 시작했다. 
 
남편은 하루가 멀다 하고 외박을 했다. 정희가 이유를 물으면, 남편은 공무원 일이 다 그런 거라며, 대답을 회피했다.
 
정희가 거세게 따져 물으면, 남편은 정희를 때릴 기세로 달려들었다. 뱃속에 아이가 아니라면, 벌써 매서운 손이 날아왔을 것이다. 
 
“초등학교 밖에 안 나온 무식한 년이, 나랑 무슨 대화를 한다고. 입 다물어 이년아.” 
 
정희는 남편을 포기했다. 
 

 
“내가 제대로 배운 여자였으면, 그런 남편하고 살지도 않았을 거예요. 여우처럼 야무졌으면, 당장에 뛰쳐나왔을 텐데, 곰처럼 미련해서 참고 살았어요.” 
 

 
둘째 딸 미현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집으로 남편을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건 사람은 남편의 내연녀였다. 
 
공무원을 때려치우고, 사업을 시작한 남편이 회사 직원과 바람이 났다. 
 
정희는 남편이 그동안 만나왔던 여자들을 알지 못했다. 한 가지 아는 것이 있다면, 남편이 오랫동안 한 여자를 만날 성격이 못된다는 것이다. 
 
전화를 건 여자 역시, 잠시 만나고 헤어질 사람이라 여겼다. 
 
그러나, 정희의 예상은 빗나갔다. 
 
남편은 그 여자와 살다시피 했다. 그의 아내는 정희가 아니라 내연녀였다. 
 
그러나, 내연녀는 정희처럼 순진하고 착한 여자가 아니었다. 
 
내연녀는 남편을 만나는 동안, 또 다른 남자를 만나면서 남편을 괴롭혔다. 
 
정희는 남편이 거실에 앉아 엉엉 우는 모습을 봤다. 내연녀가 다른 남자와 여행을 떠나, 며칠 동안 남편의 전화를 받지 않은 것이다. 
 
정희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한 편으로 내연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 여자가 정희 대신 남편에게 통렬하게 복수를 해줬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남편은 그 여자에게 집요하게 매달렸다. 이십 년의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버렸다. 길고 긴 세월 동안, 남편은 내연녀와 부부처럼 살았다. 
 
“남편과 내연녀와의 관계는 어떻게 정리가 되었나요?” 
 
나는 정희에게 물었다. 
 
정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한심한 듯 말했다. 
 
“그 여자가 남편 돈을 훔쳐서 달아났어요. 남편이 평생 모든 돈 전부는 아니었어도, 절반은 넘어요. 남편이 미친 사람처럼 돼서, 그 여자를 찾아다녔는데 결국 못 찾았어요. 사람이 얼마나 한심해요. 대학 나오고 잘 배운 사람도 그리 어리석은 짓을 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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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기억은 정희의 것이 아니었다. 남편의 젊은 날, 내연녀에게 받았던 배신감과 집착이 아내에게 투영된 것이다. 
 
정희가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그녀는 팔십이 넘은 노인이었다. 가냘픈 몸을 의자에 기대어 가만히 앉은 정희를 바라보며, 나는 연민을 느꼈다. 
 
“다 지난 일인데, 그 양반만 멀쩡하면, 그 동네 가서 살고 싶어요. 딸네 집은 좋고 편하기는 한데, 도대체 아는 사람이 있어야지. 내 친구 P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두통과 관절염으로 거동이 불편한 정희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친구 P를 만나러 가는 길이 몹시 긴장되었다. 혹시라도, 동네에서 남편을 만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던 차에, 둘째 딸 미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시골 친척 집에 장례가 나서 아버지가 급하게 시골에 내려가야 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정희는 다급하게 친구 P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에 바퀴 달린 큰 가방 있어? 이따가 나올 때, 그것 좀 들고 나와. 병원에서 바로 딸네 집에 갔더니, 입을 것이 하나도 없었어. 그 양반 없는 참에 짐 좀 챙겨 나올 것이여.” 
 

 
정희는 친구 P를 시켜, 집안에 남편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 정희는 현관문 앞에서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세 차례 같은 번호를 눌렀지만,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남편이 비밀번호를 변경한 것이다. 정희는 억장이 무너졌다. 남편이 미쳐도 단단히 미쳐버린 것 같았다. 
 
정희의 머릿속에서 남편이 내뱉었던 독한 말들이 선명하게 스쳐 지나갔다. 남편의 기억은 비밀번호를 바꿀 만큼 또렷했던 것이다. 남편의 모든 독설이 진실처럼 다가왔다. 
 
아버지를 모시고, 시골집에 내려가던 미현이 정희의 전화를 받았다. 문이 잠겨 있다는 말에 발끈해서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빠, 혹시 현관문 비밀번호 바꾸셨어요?” 
 
아버지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암, 그랬지. 그 여자가 내 돈을 얼마나 노리는 줄 알아? 나 없는 틈에 금고 열어서 돈 가지고 도망가면, 나는 다 늙어서 굶어죽으라고? 그건 안되지.” 
 
미현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수화기 너머로 전해진, 미현의 숨소리는 정희의 귀를 후벼팠다. 
 
“어쩌면, 사람이 그럴 수 있어요. 나는 도무지 그 양반이 이해가 안 돼요.” 
 
정희가 말했다. 
 

 
정희는 하루 종일 남편의 독설에 시달렸다. 정희가 침대에 누우면, 남편은 하루 종일 정희의 천장을 거닐며, 정희를 괴롭힌다. 물리적으로 남편을 떠났지만, 정서적으로 남편을 떠날 수는 없었다. 
 
정희에게 천장은 영화 스크린이다. 지난날의 상처와 고통이 편집 없이 상영된다. 정희에게는 천장을 벗어날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다. 가냘픈 몸을 침대에 파묻고,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나는 정희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무슨 힘으로 버텨오셨어요.” 
 
내가 질문하자, 정희는 끝내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애들이지요. 애들이 잘 컸어요. 나는 무식했는데, 애들은 똑똑 허니 잘 배웠어요. 얼마나 착한지, 애들 때문에 마음고생한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요.” 
 

 
둘째 딸 미현이 시골 친척의 장례를 마치고, 정희를 찾아왔다. 기운 없이 침대에 누워있는 정희를 끌어안았다. 미현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정희를 아기처럼 품에 안고, 쓰다듬었다.
 
미현은 아이에게 옛날이야기를 전해주듯, 따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나는 있잖아. 엄마가 내 엄마여서 너무 감사해. 엄마가 없었으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자꾸 눈물이 났다. 미현은 한 손으로는 엄마의 머리를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눈물을 닦았다. 
 
“뭐가 고맙다는 말이여. 나 같은 엄마 만나서 고생만 했지. 엄마가 잘 배운 여자였으면, 너희들 데리고 나와서 험한 꼴 안 보여주면서 살았을 텐데, 내가 능력이 없어서 그랬지. 엄마는 못 배운 게 평생 후회여.” 
 
“아니야. 엄마 덕분에 언니랑 나랑 잘 컸잖아. 이제, 엄마만 생각해. 다른 걱정은 하지 말고….” 
 
미현은 한참 동안 엄마를 품에 안고 토닥거렸다. 정희의 머리통을 으깨려는 듯이 달려들던 두통도 잠시 멈칫했다. 
 

 
“호주에 사는 딸은 전화기만 들면 울어요. 울지 말라고 해도 소용이 없어요. 매일 엄마 생각하면서, 교회 가서 기도한다고, 그러데요.” 
 
나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정희의 입 밖으로, 기도라는 말이 흘러나왔을 때, 나는 뛸 듯이 기뻤다.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딸이 엄마를 위해 무슨 기도를 할까요?” 
 
“글쎄요. 뭐 그냥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을까요?” 
 
“그럴 거예요. 그 기도를 빼놓지는 않겠죠. 하지만, 딸은 거기서 멈추지 않을 거예요. 제가 목사인 거 아시죠? 딸이 무슨 기도를 하는지 알려드려도 될까요?” 
 
정희는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기도에 관한 가르침에 관심을 보인 것이 아니라, 딸이 무슨 기도를 할까 궁금했던 것이다. 
 
“제가 따님은 아니지만, 따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인생을 살아왔아요. 아마도 따님이 저를 어머니와 연결해준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일단, 제가 살아온 이야기부터 짧게 전해드릴게요.” 
 
정희는 경청했다. 중간중간 눈물을 닦아내며, 내 이야기를 끊지 않고 들어주었다. 내가 살아온 인생을 진지하게 들어준 정희에게 고마웠다.
 
“아따, 젊은 양반이 고생을 많이 했네요. 생긴 건 멀쩡하구먼, 속은 많이 아팠겠어요. 어찌 그런 일을 겪고, 이런 일을 한데요.”
 
나는 정희의 따뜻한 목소리와 눈빛에 위로를 받았다. 그 순간의 정희는 동화책에 나오는 마음씨 따뜻한 할머니였다. 
 
“제가 딸이라면 이런 기도를 할 것 같아요.” 
 
정희는 다시 한 번 나에게 집중했다. 나는 정희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입술을 뗐다.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첫째 딸 미숙의 심정을 정희에게 전했다. 내 감정에 동요가 일어나 눈물을 쏟아지고, 정희가 함께 따라 울 때,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나는 정희의 딸이 아니었다. 정희가 내 어머니였다. 
 
정작 나는 내 어머니에게 전하지 못한 진심을, 내 목소리로 정희에게 전한 것이다. 
 
엄마, 미안해. 
엄마, 고마워. 
엄마, 사랑해. 
 
감정의 홍수였다. 갑작스럽게 불어난 물살에 내 자아가 떠내려갔다. 정희를 혼자 남겨두고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상담자로서의 완전한 실책이었다. 
 
그때, 정희가 내 손을 붙잡았다. 
 
“목사님, 엄마도 알 거예요. 목사님이 직접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엄마니까 알아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마음 가져줘서, 고마워요.”
 
나는 후회했다. 정희의 나이 절반도 살지 못한 내가, 얇퍅한 상담의 기술로 무엇을 하려고 했던가. 
 
정희는 상처 입은 내담자였지만,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위대한 어머니였다. 
 
미숙한 상담자로 잠시 역전이가 일어나 정희를 어머니로 여긴 순간에도,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나는 잠시 동안 따뜻한 어머니를 만났고, 정희는 가족이라는 주관적인 울타리를 넘어 객관적으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가치를 재평가하게 되었다. 
 
무능한 상담자에게 베풀어진 과도한 은혜였다. 
 
정희는 내게 고맙다는 말을 남겼다. 나는 두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정희, 그리고 호주에서 나를 정희와 연결해준 미숙이었다. 
 
정희를 돌려보내고, 나는 창가로 먼 산을 바라봤다. 전화기를 손에 잡고 머뭇거렸다. 그러다, 용기를 내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엄마. 뭐해? 그냥 전화 걸었어.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나서….”

우리는 용서할 겁니다

용서 못하는 사람을 
다그치는 사람이 있어요. 
 
단호하게
큰소리로 말해요.
 
성경에 쓰여있잖아. 
용서해야 천국 가.
 
나도 알아요.
묻고 싶어요.
 
용서 못한 사람이
불편한 이유가 뭔가요.
 
용서 못한 사람을 
용서 못한 건 아닌가요. 
 
용서 못한 사람도
용서해주세요. 
 
당신이 용서한 만큼은 
나도 용서했어요. 
 
세상 모든 사람을 
완전히 용서한 사람처럼
말하진 말아주세요.
 
용서했다고 한 말
믿어 볼게요.
 
그 힘이 어디서 나왔나요?
용서할 수 있었던 힘.
 
당신인가요. 
주님인가요. 
 
당신 안에서 나왔다고 하면
나 뒤돌아서서 갈 거예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주님 안에서 나왔다고 하면
나 참았던 말할 거예요.
 
자기 능력으로
용서한 것도 아니면서 
무슨 생색인가요. 
 
말이 심했죠. 
용서해주세요. 
 
다른 사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부탁드려요.
진심으로. 
 
당신도 아프고
힘들었잖아요.
 
잊지 말아 주세요. 
고통의 기억을.
 
마음 가다듬고 
내가 하고 싶은 말할게요.   
 
나 오늘 용서한다.
다 용서했다.
 
용서를 선언하지 마세요. 
그건 구호일 뿐이에요.
 
선언하고 싶다면
하나님 앞에서만 선언하세요. 
 
성급하게 사람 앞에서
선언하면 부작용 나요.
 
용서는 성취가 아니라 
방향이에요.
 
그리스도를 향해 걷다 보면
우린 용서할 겁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건
고통스러워요. 
 
주님을 사랑하는 건
행복하죠.
 
원수가 미울수록
주님을 사랑하세요.
 
원수를 묵상하지 말고
주님을 묵상하세요.
 
주님을 사랑하면
원수를 사랑하게 돼요.
 
아직 용서 못했는데
나는 주님을 사랑하는 건가요.
 
내 사랑은 가짜 아닌가요.
이렇게 모자란데.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조급할 필요 없어요.
시간이 필요 해요. 
 
복수의 길을 돌아 나와 
용서의 길로 들어섰다면 
이제 안심하세요. 
 
좁고 험하다고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저 끝에
나와 당신의 주님이
미소 짓고 계시니까요.

아빠가 돌아가셨어요

아빠가 오랜 투병생활을 하시다가, 지난달에 돌아가셨어요. 아버지의 죽음이 너무나 슬퍼요. 교회 공동체에서 맡았던 일을 내려놓고 잠시 쉬려했는데, 주변에서 그러지 말래요. 그럴수록 하나님을 더 붙잡으라고. 슬픔의 영에 사로잡히면 일어서기 어렵다고 참고 견디래요. 
 
슬퍼하세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슬프지 않겠어요. 일 년이든, 십 년이든, 평생이든 슬프면 우세요. 아버지가 일생 동안 그립다면, 그건 감사한 겁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는 감정에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건 잘못된 겁니다. 
 
나는 자매님에게 “슬픔의 영”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말한 사람의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성경 어디서 나온 말인가요. “슬픔의 영”이란 표현은 처음 들어봅니다. “슬픔의 영”이란 말은 문맥상 부정적인 뜻이겠지요. 나는 목사입니다.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사람이에요. 이 순간만큼은 권위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성경에 그런 말 없습니다.      
 
그 말을 전해 들을 당시의 상황과 분위기 나는 모릅니다. 섣불리 그분에 대해서 평가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성경에 없는 말을 하면 위험합니다. 성경을 왜곡하면 안 됩니다.  
 
쉬고 싶으면 쉬세요. 교회 일을 감당하는 것 자체가 본질이 아닙니다. 자매님이 원하시는 대로 결정하세요. 교회 봉사할 사람 항상 부족해도, 교회 문 안 닫습니다. 하나님이 잘 이끌어가십니다. 자매님 하나 쉰다고 교회 멈추는 거 아니에요. 잠시 쉬다가 기운 나면 다시 섬겨주세요. 
 
아버지 잃은 슬픔은 잘 간직하세요. 울고 싶으면 울고, 슬프면 슬프세요. 나는 몇 년 전, 3월에 장인어른을 잃었는데, 지금도 슬퍼요. 보고 싶고 생각나고 그래요. 매년 3월이 되면, 울적하고 괴롭습니다. 보고 싶고 그리우면 장인어른 묻혀 계신 추모 공원에 아내 몰래 다녀오고 그럽니다. 내 아내의 아버지를 잃은 슬픔도 이리 큽니다. 자매님의 슬픔은 말로 할 수 없지요.
 
누군가 아직도 거기에 머물러 있냐고 비웃어도 상관없어요. 내 믿음을 똥값으로 취급해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자매님의 믿음이 고귀하다고 생각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세요. 그 눈물 마를 때까지 주님이 위로해주실 거예요. 오늘부터는 마음 편히 우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지극히 정상이야

“정상적인 삶을 원했어요. 제 인생이 이 정도로 망가질 줄은 몰랐죠.” 
 
O는 마흔한 살, 결혼 12년 차, 두 딸의 아빠다. 그는 우울증,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 아내와 사는 것이 힘들다고 말했다. 결혼 초부터 아내의 정신적인 문제가 심각해보였다. 
 
부부 싸움을 했던 어느 날, 아내는 안방으로 들어가 울부짖으며 옷장 안에 있는 옷들을 꺼내 가위로 자르고 손으로 찢기 시작했다. 그가 그만하라고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는 무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더니 가위로 위협했다. 
 
그날 이후, 부부 싸움 할 때마다 이상한 행동을 했다. 신발을 모조리 꺼내 현관문으로 던진다든지, 다리미로 문을 부순다든지. 아내에게 정신질환이 생긴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남편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힘들고 답답한 마음이 들 때마다 새벽에 교회에 가서 기도했다. 12년 동안, 아내를 위해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더 이상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목 놓아 우는 순간,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상처 많은 딸을 네게 맡겼으니 절대로 버리지 마라.’
 
그는 더욱 힘을 냈다.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목사님을 비롯한 교회 사람들에게 아내의 상황을 알렸다. 아내에게 상담을 받자고 설득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거절했다. 
 
아내의 반발은 갈수록 심해졌다. 남편은 다른 사람들에게 아내 문제를 말하고 동의 없이 상담을 신청했다. 아내는 분노했다.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 그녀를 볼 때마다 남편은 속이 터졌다. 견딜 수가 없어서 혼자 상담실을 찾아왔다. 
 
“제가 바라는 것은 기본적인 것들이에요. 아이가 아프면 엄마가 밥에 물이라도 말아 먹이고, 그 다음 약을 먹여야죠. 아내는 애가 아파도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어요. 제가 뭐라도 좀 먹어야 하지 않겠냐고 하면 아내가 기다렸다는 듯 말합니다. ‘당신이 해. 당신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제가 ‘그건 당신이 좀 해줘야지’라고 해도 아내는 눈 하나 깜짝 안 해요. 답답하니까 제가 편의점에 가서 삼각김밥을 사와서 먹여요. 이게 정상입니까?”
 
그는 반복적으로 아내의 문제 행동에 대해 말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저는 아내가 화장실에서 뭘 하고 있는지 몰랐어요. 그런데 갑자기 딸이 배가 아프다는 거예요. 너무 급하다고 해서 아내에게 화장실 문을 열어달라고 했죠. 아내는 안 된다고 해요. 너무 화가 나서 아내에게 당장 문을 열라고 했는데도 안 열어줘요. 
 
아이가 울려고 하기에 손잡이를 힘으로 비틀어 열었죠. 아내가 당황하더라고요. 제가 아내에게 막 뭐라고 했어요. 그것  하나 때문에 아내가 일주일 내내 말을 안 하더라고요. 저는 그런 아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요.” 
 
남편이 계속 말했다.
 
“명절에 제 어머니, 여동생, 아내와 어디 다녀올 일이 있었어요. 운전하는데 길이 막혀 제가 짜증이 난 상태였어요. 그런데 아내와 여동생이 별 것도 아닌 일로 예민하게 대화를 하는 거예요. 서로 싸울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아내에게 그만하라고 했더니 저를 째려보더라고요. 여동생보다 아내가 나이가 더 많아요. 언니가 참는 게 당연하죠. 아내가 뭐하는 짓이냐고 따지기에 그만하라고 했어요. 아내는 멈추지 않았죠. 시어머니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더라고요. 
 
저를 막 비난하는 거예요. 참을 수가 없어서 갓길에 차를 대고 아내에게 소리를 질렀어요. ‘제발, 그만하라고!’ 아내는 혼자 막 울더니 차에서 내렸어요. 그러고는 반대편 도로 쪽으로 건너가더니 골목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거예요. 미칠 노릇이었죠.” 
 
교회 모임에서 그가 마음을 열고 고민을 나누면, 교회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했다. 
 
“고생이 많다. 아내를 위해 기도하자. 언젠가는 변화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도에 응답해주실 것이다.”
 
사람들이 위로해줬지만, 그는 위로받지 못했다. 도저히 버틸 수 없어 포기하고 싶은 생각 찾아올 때, 하나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상처 많은 딸을 네게 맡겼으니 절대로 버리지 마라.’ 
 
그는 생각했다. 힘들다고 아내와 이혼하면 하나님 말씀을 어기는 것이다. 아내만 변화된다면 그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는 더욱 간절히 기도했다. 
 
그는 반복해서 말했다. 아내가 상처 많은 사람이라 계속 문제가 일어난다고. 어린 시절, 그녀는 엄마에게 신체적 학대와 언어폭력을 당했다.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았는지 아내는 엄마 얼굴을 보지 않는다. 남편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아내와 장모님의 관계는 나아지지 않았다. 
 
남편은 아내가 장모님을 용서하지 않으면 좋은 엄마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더 이상 시간 끌지 말고 엄마를 용서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내가 아이들에게 던지는 거친 말들이 거슬렸기 때문이다. 
 
“그만해! 너네 미친 거 아니야? 누구 닮아서 저러는 거야.” 
 
아내 입에 습관처럼 달라붙은 말이다. 거친 말을 들을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는다. 그녀는 자신이 상처 입은 사람이라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남편 역시 역기능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가정 살림을 부수거나 어머니를 때렸다. 폭력적인 아버지 모습을 보면서 청소년기에 방황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했고, 그는 어머니를 따라 집을 나왔다. 
 
남편은 자신 안에 상처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 상처를 신앙의 힘으로 극복했다고 말했다. 군대 생활을 포함한 다른 어떤 대인관계에서도 화를 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상처 많은 가정에서 자랐지만, 그 상처를 극복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확신이 있는 듯 했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일주일 전에 부부 싸움을 하고 아내가 집을 나갔어요. 인도네시아로 가버렸어요. 거기에 아는 선교사님이 계시거든요. 지금 아이들이 방학 기간도 아닌데 혼자 가버리니까 어처구니가 없죠. 
 
제가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어머니, 장모님이 교대로 아이들을 봐주고 계세요. 깊이 고민하고 있어요. 결혼생활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아내 얼굴을 다시 보게 되면 미쳐버릴 것 같아요. 저는 아무리 힘들어도 버텼는데 아내는 힘들다고 아이들을 버려두고 다른 나라로 떠나버렸어요. 엄마가 아닌 거죠. 
 
아내에게 연락이 오기는 했어요. 한 달 뒤에 다시 돌아올 거라고.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다고 말하네요. 미쳐버릴 사람은 아내가 아니라 접니다. 이제 정말 그만하고 싶어요.”
 
아내가 집 나가기 전날 밤, 남편은 이성을 잃었다. 아내가 침대에 누워 휴대폰으로 게임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 짜증이 났다. 남편은 아내에게 말했다. 
 
“내일 새벽 출근해야 하니까, 아이들 재워주고 와.”
 
아내는 아직 잘 시간이 아니라고 말했다. 세탁기 타이머가 10분 정도 남았으니까 조금 있다 재운다고 했다. 그는 아내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벽에 던져버렸다. 아내도 지지 않았다. 남편의 노트북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노트북이 산산조각이 났다. 남편은 이성을 잃고 베란다에서 락스를 꺼내왔다. 그것을 방바닥에 뿌리면서 말했다. 
 
“우리 같이 죽자. 더 이상 살아서 뭐해.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 
 
락스의 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의 아내는 하얗게 질렸다. 다음날, 남편이 출근한 틈에 아내는 남편 곁을 떠나버렸다. 
 
***
 
그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논리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주장한다. 
 
“나는 항상 옳다.” 
 
아마  교회 사람들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이 그의 아내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남편 입장에서 그의 아내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아내의 이상 행동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의 아내를 만날 기회가 없었기에 추측할 뿐이다. 남편의 유창한 말은 아내를 끔찍한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 아내의 이상 행동은, 사람의 감정이 극단적으로 억눌렸을 때 나타는 행동이다. 손으로 옷을 찢거나, 다른 물건으로 문을 부수는 행동은 억눌린 감정을 표출하기 위한 생존수단이다. 
 
안전핀이 빠진 수류탄을 혼자 끌어안고 있다가 내면이 여러 번 산산조각 난 아내는 수류탄을 밖으로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야 그녀도 사니까. 아내의 폭력적인 행동을 정당화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살핀 것이다. 
 
남편과 대화하면 아내는 벼랑 끝에 몰린다. 남편은 싸울 때마다 아내의 감정을 무시하고 오직 이치에 맞는 말, 논리적인 대화만을 원한다. 말 잘하는 남편과 말싸움을 하면 아내는 불리하다. 승자는 언제나 남편이다. 
 
그에게 조용히 묻고 싶다. 그렇게 말을 잘할 필요가 있을까? 또박또박 유창한 말을 하면서 아내를 짓밟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물러서고 싶지 않은 마음은 안다. 아내를 짓밟을 의도가 없다는 것도 안다. 그렇다면 당신의 의도는 무엇인가? 진지하게 생각해보라.  
 
남편은 반복해서 말했다. 
 
“나는 정상적인 가정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가정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문장이 하나 숨어 있다. 
 
“나는 지극히 정상입니다.”
 
이 문장을 앞의 두 문장 사이에 끼워 넣으면 그의 신념을 분명이 알 수 있다. 
 
“나는 정상적인 가정을 원했습니다. 나는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결혼생활을 파괴하고 있던 왜곡된 신념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 신념의 실체는 다음과 같다. 
 
“나는 정상적인 가정을 원했습니다. 나는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내가 정상이 아니거든요.”
 
남편은 무의식 중에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있다. 
 
“내 아내는 정상이 아니에요. 당신도 그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고통 받고 있는지 아셔야 해요. 내가 비정상적인 여자와 결혼을 해서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기 위해 얼마나 헌신적으로 노력하는지. 저는 신앙의 힘과 강한 의지력으로 이혼하지 않고 버텨왔습니다. 당신도 이것을 인정해줘야 합니다. 하나님도 인정하셨거든요. 상처 많은 아내를 위해 내가 얼마나 희생하고 있는지.” 
 
남편은 정상이고, 아내는 비정상이라는 말은 전혀 근거가 없다. 여기 등장하는 남편뿐만 아니라 많은 부부가 자신이 아닌 배우자에게 문제가 있다고 근거 없는 결론을 내린다. 
 
“나는 문제가 없어. 당신이 문제야.”  
“제가 왜 상담을 받아요? 저는 문제가 없어요.” 
“왜 저한테 뭐라고 하세요? 저는 잘못이 없는데.” 
“아무리 노력하면 뭐합니까? 저 사람은 노력하지 않는데.” 
 
부부 상담은 개인 상담보다 효과가 낮은 경향이 있다. ‘비난할 대상’이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결혼 전 남녀는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의지를 가진다. 부모에게 받은 상처, 다른 사람에게 받은 상처, 어찌되었건 피해자는 자신이다. 그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피해를 입는다는 것을 안다. 상처를 인정하고 그것을 돌보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부 상담은 다르다. 비난할 대상이 바로 눈앞에 있기 때문에 문제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하기 어렵다. 
 
“잘못한 사람은 바로 접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제게 있습니다. 저만 변화되면 우리 가정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나는 아직 한 번도 만난 본 적이 없다. 
 
남편이 아내보다 월등히 성숙한 사람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남편 말이 사실이라면, 아내가 아무리 상처 많은 사람이라도 결혼생활 12년 동안 치유되고 성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아내의 상처가 악화된 것처럼 보인다. 없던 상처도 생긴 것 같다. 그러므로 남편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남편은 아내보다 월등히 성숙한 사람이 아니다. 남편과 아내, 두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 그 증거가 현재 둘의 상황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남편의 폭력적인 성향이 아내를 두렵게 했고, 아내는 남편과 아이들을 내버려두고 다른 나라로 떠나버렸다.  
 
하늘에서 내린 비는 낮은 곳에 고인다. 높은 곳에는 절대로 물이 고이지 않는 법이다. 참회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있는 말이다. 참회하는 사람만이 성장할 수 있다. 참회를 모르는 사람에게 은혜가 임할 자리는 없다. 
 
은혜가 사라진 기독교는 종교가 되어버린다. 내용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은 껍데기가 되는 것이다. “자기 의로움을 주장하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입증하라”라는 교리는 기독교에 없다. 
 
‘상처 많은 딸을 네게 맡겼으니 절대로 버리지 마라.’ 
 
남편이 마음에 간직한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닐 것이다. 자기 의로움에서 비롯된 말이다. 자기 위선이 하나님 말씀으로 위장하는 순간, 행복은 더욱 멀어진다. 
 
“차라리 속이 시원하네요.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주위 사람들은 제가 옳다고 말했죠. 이제 알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아내가 힘들어했는지. 맞아요. 제 잘못도 있어요. 100퍼센트는 아니지만. 어떻게 그 사람에게만 잘못이 있다고 말하겠어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그의 말이 진심이기를 바랄 뿐이다. 그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적나라하게 지적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의 진심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술대에 누워있는 환자가 의사에게 “다른 부위에도 암이 퍼졌다면 모조리 제거해주세요”라고 말할 때, 알겠다고 말하는 의사는 없을 것이다. 
 
수술 부위를 열었을 때, 암이 사방팔방 퍼져있으면 일단 덮는 것이 맞다. 여기저기 헤집다가 봉합도 못한 채 환자가 깨어난다면, 그것은 재앙이다. 보인다고 다 떼어낼 수는 없지 않은가. 한 번에 하나씩이다. 환자가 여러 번 수술대 위에 눕더라도 천천히 가야 한다. 
 
시간이 없다면 악성 종양부터 떼어내자. 악성 종양은 ‘자기 우월감’이다. 빨리 떼어내지 않으면 ‘결혼’이라는 환자는 죽는다.        

상처가 많아서 그런가봐

혜연은 용기를 내서 목사님과 마주했다. 교회 목사님이 혜연의 집을 방문한 것이다. 
 
밤새 고민하며, 정리해 두었던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사막에 혼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엄마는 그런 혜연이 답답했는지, 옆구리를 꾹 찌르며 속삭이듯 말했다. 
 
“뭐 한다냐? 목사님 모셔다 놓고.” 
 
혜연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목사님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제가 오랫동안 고민해 온 문제가 있어요. 저는 목사님이 무서워요.” 
 
목사는 당황했다. 그러다, 이내 차분해졌다. 오랜 경륜으로 산전수전 다 겪어봤다는 표정이었다. 
 
“제가 무섭다고요?” 
 
혜연은 움찔했다. 파도처럼 후회가 밀려왔다. 엎질러진 물이었다. 목사는 이유를 알고 싶어 했다.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겠어요?” 
 
혜연은 혹시라도 목사님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주일 설교를 하실 때와 수요 예배 설교를 하실 때, 목사님의 설교 스타일이 조금 다르신 것 같아요….” 
 
“네, 정확히 아시네요. 주일 설교와 수요 설교는 청중이 다르잖아요. 주일에는 교회에 처음 나오시는 분들이 계시니까, 아무래도 부드럽게 설교하지요. 하지만, 수요 예배는 청중이 달라요. 헌신된 분들이고, 말씀을 사모하는 분들이니까 그에 맞게 설교하지요.” 
 
“저는 수요 예배에 가면 무서워요, 목사님.” 
 
“그러니까, 뭐가 무섭다는지 말씀해 주세요.” 
 
혜연은 다시 움츠러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도망치고 싶었다. 심장이 요동치고, 호흡이 가빠졌다. 그녀는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말씀을 전하시다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시면 저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요.” 
 
목사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아,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수요 예배에서는 제가 조금 강하지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요즘 마음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려는 분들이 많아서요. 
 
언제까지나 새가족일 수는 없잖아요. 교회 오래 다니셨으면, 말씀을 듣고 자라나야죠.자매님도 시간이 조금 지나면 적응이 되실 거예요.”
 
벌써 6년이었다. 혜연은 적응할 수 없었다. 
 
생각에 잠긴, 혜연에게 목사가 다시 물었다. 
 
“최근에 그런 적 있으세요?” 
 
“지난주에,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시다가 성도들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드셨나 봐요. 갑자기 소리를 지르셨어요. 말씀을 듣는 태도가 그게 뭐냐고. 그게 성도의 바른 자세냐고. 저는 목사님이 소리를 지르시자마자,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어요.” 
 
“아, 기억나요. 그날 몇 사람이 꾸벅꾸벅 졸더라고요. 그래서, 깨워준 거예요. 제가 소리를 질렀다고 해서, 화가 났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제가 소리를 지른 건,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서예요. 항상 깨어서 말씀을 들어도 모자란 판에, 예배 시간에 졸다니요. 그럴 수는 없지요.” 
 
목사는 혜연의 반응을 살폈다. 
 
“맞아요, 목사님. 저도 목사님이 무슨 말씀 하시는지 알아요. 일상생활에서 목사님 말투는 설교하실 때와 다르시거든요. 평소에는 지금처럼 편안하게 말씀해주시잖아요. 하지만, 저한테는 설교하는 목사님과 대화하는 목사님이 구분이 되지 않아요. 지금처럼 편하게 대화하다가도 목사님이 버럭 화를 내실까 무섭거든요.” 
 
목사는 시계를 바라보며, 조급한 심정을 드러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던 것이다. 
 
“혹시, 어릴 때 상처받은 기억이 있으세요? 저는 한 교회에서 10년 넘도록 목회를 했는데, 자매님처럼 말씀하시는 분은 처음 만나보거든요.” 
 
혜연은 깜짝 놀랐다. 친정 엄마가 옆에 있는 상황에서, 어린 시절의 상처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서운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혜연의 그런 모습이 답답했는지, 그녀의 엄마가 나섰다. 
 
“목사님, 말씀 들으니께, 생각나는 것이 있네유. 사실, 얘 시아버지가 그리 무섭다네유. 신혼 초에 아주 무서워서 혼났다고, 그리 말한 기억이 나유. 혹시 그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유?” 
 
목사는 “아하!”하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그랬구나’라는 단서를 발견한 것이었다. 혜연을 대하는 태도가 급변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매님, 그럴 수 있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실 거예요. 저도 당분간은 소리를 지르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자매님 역시, 그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셔야 해요. 주님이 도와주실 겁니다.” 
 
혜연은 엄마가 야속했다. 
 
목사는 심방을 마무리하는 기도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상처가 치유될 것이라고 강하게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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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연은 감정을 추슬러야 했다. 엄마에게 공격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평정심을 되찾기까지 꼬박 하루가 걸렸다. 
 
마트에 장을 보러 가는 길에, 차 안에서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어제 목사님 앞에서 왜 그렇게 말했어? 나 속상했어. 내가 무슨 환자 같았잖아. 엄마까지 그렇게 말하면 난 어떻게 하라고. 목사님이 나를 얼마나 오해하시겠어.” 
 
혜연의 엄마는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뭐 잘못했다냐. 니가 그래 말을 안하고 있으니까, 내가 대신 말해준 것이여! 니가 또박또박 말을 했으면, 엄마가 그리 말을 했것어? 답답하면 말을 해야지, 왜 말을 한 마디도 못 혀…. 다 커 가지고 답답해 죽것네. 그래서, 지금 엄마한테 따지고 있는 겨?” 
 
운전대를 잡고 있던 혜연은 엄마가 내던진 말에 화가 났다. 빨간색 신호 앞에서 차가 멈춰 섰을 때, 혜연은 엄마를 돌아보며 말했다. 
 
“엄마는 왜 항상 그런 식으로 말해? 나 정말 답답해.” 
 
엄마는 뒷자리에 앉아, 딸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고, 이게 뭔 일이래. 엄마가 입을 처닫고 쥐 죽은 듯이 있어야, 니 속이 편하제? 알것어. 이제 그럴 겨. 교회도 이제 너 혼자 나가 이것아. 억지로 늙은 애미 끌고 나가지 말고!” 
 
마트에 도착할 때까지, 혜연은 엄마의 푸념을 들어야 했다. 그녀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마트 사이를 거닐었고, 택배 직원처럼 식재료를 차에 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혜연의 엄마는 쉬지 않고 푸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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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어요. 교회 목사님 말씀대로, 제 상처 때문에 그런 걸까요? 이런 문제로 상담받는 게 조금 웃기지만, 상처 때문이라면 치유받고 싶어요.” 
 
나는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가, 의도적으로 무례한 질문을 던졌다. 진실에 한 걸음 다가가기 위한, 직설적인 질문이라고 말했다. 
 
“교회를 옮기고 싶은 생각은 없으신가요? 더 건강하고 따뜻한 교회도 있어요.” 
 
“아니요, 그런 생각은 전혀 없어요.” 
 
혜연은 밝은 목소리로 즉시 대답했다. 의외였다. 
 
“그럴 수는 없어요. 저는 제가 다니는 교회가 좋아요. 목사님의 말씀으로 은혜받고 있고요. 단지, 목사님의 표현 방식이 제게 고통스러운 것 같아요. 목사님이 심방 오셨을 때, 제 생각을 솔직히 표현을 못 해서 답답했던 거예요.”
 
그녀는 잠시 기억에 잠긴 듯했다. 
 
“이 교회가 저의 첫 교회에요. 여기서 예수님을 처음 만났거든요. 나는 내 발로 교회를 떠나지는 않을 거예요. 절대로 그럴 수는 없어요.” 
 
나는 마음이 울컥했다. 감동의 파장은 컸다. 나는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추슬러야 했다. 내가 아는 한, 그녀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그녀의 청량한 말투는, 먹구름 사이에서 직선으로 쏟아져 내리는 강렬한 빛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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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나 몸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아. 아기가 나오려나 봐.” 
 
예정보다 두 달이나 빨리 산통이 찾아왔다. 남편은 아내를 급하게 챙겨, 병원으로 데려갔다. 
 
“괜찮습니다. 너무 무리하신 것 같아요. 스트레스 관리를 잘하셔야 해요. 엄마가 마음이 편해야, 아이도 뱃속에서 마음 편하게 잘 지냅니다.” 
 
의사가 혜연을 안심시키며 말했다. 
 
돌아오는 길에, 혜연은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내가 극성떨어서 미안해. 당신 잠도 못하고 피곤할 텐데….” 
 
남편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혜연의 손을 꼭 붙잡았다. 
 
큰일이 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아기는 뱃속에서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두 달 뒤에 태어날 아기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부부는 행복했다.
 
일주일 뒤, 혜연에게 똑같은 증세가 나타났다. 배가 찢어질 듯 아팠다. 남편은 어제 저녁 야근으로 피곤해서 잠을 자고 있었다. 
 
혜연은 지난번의 경험을 떠올렸다. 남편을 깨우고, 병원에 가는 동안 통증이 가라앉았다. 남편을 깨워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소파에 몸을 기대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두세 시간만 버티면, 통증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여보!” 
 
남편이 부르는 소리에 혜연은 의식을 되찾았다. 눈을 뜨고, 맞이한 것은 하얀색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였다. 
 
혜연은 소파에서 의식을 잃고, 기절해버렸다. 잠에서 깬 남편이 의식을 잃은 아내를 병원으로 데려온 것이다. 
 
곧바로 수술이 이어졌다. 
 
혜연은 예정보다 이른 시기에, 아기를 받아들었다. 그러나, 그녀를 기다린 것은 축복의 메시지가 아니었다. 
 
의사는 혜연에게 끔찍한 소식을 전했다. 
 
엄마가 기절해 있는 동안, 아기는 치명적인 사고를 당했다. 산소가 원활히 공급되지 않아, 아기의 뇌가 망가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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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기다려야지. 손으로 음식을 먹으면 안 돼.” 
 
혜연의 남편은 아들에게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들은 가만히 손을 내리고, 아빠의 눈치를 봤다. 아빠가 한 눈을 판 사이에, 손으로 스팸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내려놔! 아빠가 몇 번 말했어? 손으로 음식을 집어 들면 안 된다고!” 
 
남편이 큰 목소리로 말하자, 혜연은 깜짝 놀랐다. 
 
“태호야. 아빠 말 들어야지. 엄마랑 있을 때는 잘하잖아. 조금만 기다려. 엄마가 국만 뜨고, 바로 갈게.” 
 
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식사를 마쳤다. 태호가 엄마의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주말 아침 두 시간 동안은, 마음껏 스마트폰을 쓰게 해준다는 규칙을 따른 것이다.  
 
태호가 방으로 들어가자, 혜연은 남편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여보, 내가 부탁했잖아. 소리는 지르지 말라고. 태호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깜짝깜짝 놀란다니까.” 
 
남편이 말했다. 
 
“그러게. 알면서도 잘 안되네. 답답해서 그랬어.” 
 
“아니야, 여보. 나도 심하게 말해서 미안해. 당신 같은 아빠 없어. 우리 태호가 특별한 거잖아.”
 
남편은 식탁에서 일어났다. 야구 배트와 글러브를 챙겨서 태호를 불렀다. 태호는 신이 나서, 아빠를 따라나섰다. 
 
혜연은 현관까지 걸어 나와, 남편의 볼과 태호의 이마에 차례로 입을 맞췄다. 
 
“태호랑 조금만 놀다 올 테니까, 당신도 집안일 하지 말고 눈 좀 붙여. 내가 갔다 와서 할 테니까.” 
 
“응, 알았어.” 
 
두 사람을 내보내고, 혜연은 싱크대에 서서 물을 틀었다. 수세미에 거품을 내고, 접시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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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야! 너 정말 왜 그래?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고, 엄마가 몇 번을 말해?” 
 
태호는 공중에 팔을 휘저으며, 엄마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태호를 당해낼 수 없었다. 팔을 휘젓고 몸을 비틀어서, 엄마 품에서 빠져나온 태호가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며 말했다. 
 
“엄마, 미워.” 
 
혜연은 지쳐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엄마가 왜 미워? 엄마가 얼마나 힘들게 노력하는데, 태호는 그것도 몰라?” 
 
“몰라. 엄마 나가. 엄마 내 방에서 나가.” 
 
“태호야. 엄마가 왜 나가. 제발 엄마 말 좀 들어. 엄마 힘들어서 미치겠어.” 
 
“싫어. 엄마 싫어.”
 
혜연은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어깨를 떨면서, 그 자리에서 한참을 울었다. 
 
감정을 추스르고 고개를 들어보니, 태호는 책상 밑에서 새근새근 잠에 들었다. 차분해진 아이를 품에 안아, 침대에 눕혔다. 
 
잠에 든 태호는 여느 아이와 다를 것이 없었다. 태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혜연은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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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가 오래 못 버틸 것 같아요.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겠습니다.” 
 
혜연이 피곤해 잠시 눈을 붙인 사이, 태호가 자전거를 타고 아파트 주변을 돌아다녔다. 
 
호기심이 많은 태호는 마음 가는 대로 자전거를 몰았고, 결국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도로 위를 달렸다. 
 
그러다, 거세게 달리는 레커차와 부딪혔다. 무전기로 교통사고 소식을 수신 받은 레커차가 무리한 속도로 갓길을 달리다가, 태호를 치어버린 것이다. 
 
사고가 난지 사흘 만에 태호는 세상을 떠났다. 태호가 세상을 떠나는 날, 혜연의 세상은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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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제를 처방받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 없었어요. 남편도 마찬가지였어요. 주말이면, 남편과 저는 소파에 앉아, 태호의 사진을 바라봤죠.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거예요.” 
 
혜연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했다. 기력이 없이 침대에 누워있는데, 현관의 벨이 울렸다. 
 
혜연의 반응이 없자,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교회에서 나왔어요. 잠시 문 좀 열어주실 수 있나요?”라는 말이 들렸다. 
 
혜연은 침대에 누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옆집으로 옮겨갔고, 옆집의 옆집으로 옮겨갔다. 목소리는 점차 멀어졌고, 이내 안 들리게 되었다. 
 
남편이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문틈에 꽂혀있는, 전단지 뭉치를 가지고 들어왔다. 식탁 구석으로 던져놓고, 피곤한 듯 넥타이를 풀었다. 
 
그날 밤, 혜연은 태호의 꿈을 꾸었다. 
 
꿈에서 태호는, 아픈 아이가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을 또박또박 말했다. 
 
“엄마, 자살하면 지옥 가요?” 
 
“그게 무슨 소리야, 태호야.” 
 
“내가 엄마를 너무 힘들게 하는 것 같아요. 차라리 죽고 싶어요, 엄마.” 
 
“태호야, 아니야. 그러면 안 돼.” 
 
“미안해요, 엄마. 엄마를 너무 힘들 게 해서….” 
 
“태호야….” 
 
태호는 점점 작아지더니, 어두운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혜연이 태호를 애타게 불렀지만, 태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태호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벽에 부딪혀 메아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잠에서 깼다. 눈물이 베개를 적셨다. 목이 메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거실로 걸어 나와 물 한 컵을 들이킨 혜연은 식탁 위에 놓여 있는 교회 전단지를 발견했다. 
 
푸른 초장 위에 세워진 아담한 교회 건물과 아이들이 밝게 웃는 사진이 파스텔톤으로 합성된 전단지였다. 
 
교회 이름이 익숙했다. 잊혀진 기억이 떠올랐다. 태호와 잠시 함께 다녔던 바로 그 교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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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가 교회를 좋아하네요. 자주 나오시고 그러세요.” 
 
무뚝뚝해 보이는 목사가 다정하게 말하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다. 혜연은 어색한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어린이집에 다닐 수 없는 태호가 혹시라도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 싶어 아파트 단지 내의 교회에 잠시 들렀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에게 솜사탕을 나눠주던 교회 봉사자들을 만나고, 호기심이 생긴 터였다. 
 
태호는 교회를 좋아했지만, 혜연은 교회가 편하지 않았다. 새로운 사람들을 한꺼번에 만난다는 것이, 혜연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두어 달 교회를 나가다 그만두었다. 
 
태호는 교회에 가자고 고집을 부렸고, 그때마다 혜연은 태호를 타일렀다. 
 
일요일 아침, 혜연은 늦잠을 자고 일어났다. 태호의 방문을 열었을 때, 태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남편이 부리나케 옷을 챙겨 입고 태호를 찾으러 나섰다. 혹시나 하고 교회를 찾아갔을 때, 신나게 놀고 있는 태호를 발견했다. 남편이 씻지도 않은 얼굴로 교회에 들어가 태호를 끌어안고 나오는 민망한 일이 여러 번이었다. 
 
교회 전단지를 붙잡고 있던 혜연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전단지에 합성된 이름 모를 소년과 태호의 얼굴이 겹쳤다.
 
“엄마….”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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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교회를 나갔는 때는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어요. 목사님 설교도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요. 남편이 혼자 가면 민망하니까, 함께 가준다고 해서 그나마 다행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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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연은 꾸준히 교회에 나갔다. 목사님의 설교가 조금씩 귀에 들어왔다. 아는 사람도 늘어갔다. 혜연은 용기를 냈다. 태호와 같은 또래 아이들을 가르치는 주일학교 교사가 된 것이다. 
 
교회를 나간 첫해, 여름 수련회 준비로 바빴다. 목사님은 마음이 분주할수록, 더욱 기도로 준비해야 한다면서, 교사들을 기도의 자리로 이끌었다. 여름 수련회를 앞두고, 일주일 동안 새벽 예배에 나오라고 독려했다. 
 
세 번째 날이었다. 그녀가 눈을 감고 기도하는데, 어디선가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혜연아, 많이 힘들지?” 
 
그녀는 목이 메어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고개를 숙이고 흐느껴 울 뿐이었다. 
 
그날 밤, 혜연은 수면제를 복용하지 않고, 편안히 잠들었다. 
 
주일 학교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보면서, 혜연은 생각했다. 
 
“이 아이들이 태호다. 예수님이 나에게 새로운 자녀를 맡겨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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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를 잃은 슬픔을 예수님이 위로해주셨어요. 마음이 조금 안정되나 싶었을 때, 엄마가 전화를 했죠.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혜연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아버지의 젊은 날, 가정은 쑥대밭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아내와 아이들을 두들겨 팼다. 술과 도박에 빠져, 가정은 가난에 찌들었다. 
 
혜연의 어머니는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다. 건어물 노점상을 시작해서, 죽도록 일을 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았다. 어머니가 밖에서 벌어준 돈으로 입에 풀칠을 하며 살았다. 
 
혜연은 말이 없는 아이였다. 항상 혼자였다. 그녀는 사춘기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존재감 없는 아이로 자란 것이다. 대학에 가서도, 흔한 미팅 한 번 하지 않았다. 같은 과 선배였던 남편이, 적극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면 결혼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말을 듣고, 혜연의 마음은 복잡했다. 
 
억지로 병원을 찾았던 혜연은, 막상 의식 없이 누워있는 아버지를 바라보자, 생각이 달라졌다. 
 
아버지 옆에 앉아,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혜연은 다짐했다. 
 
‘제가 아빠를 돌봐줄게요.’ 
 
의사는 ‘아버지가 의식은 깨어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혜연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혜연은 남편에게 양해를 구하고, 병원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아버지를 간호했다. 여름에 쓰러진 아버지는, 그 해 첫눈이 내리고 며칠이 지나, 세상을 떠났다. 
 
혜연은 말했다. 
 
“아빠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신 몇 달은 제게 치유의 시간이었어요. 그동안 아빠에게하지 못한 말을 마음껏 했거든요. 혼자 웃고 울고 하면서, 정말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어요. 눈을 감고 있는 아빠가 친밀하게 느껴질 정도였거든요. 나중에는 복음을 전했어요. 천국에서 아빠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요. 아버지가 복음을 듣고, 주님 품에 안기셨기를 바랐거든요.
 
그리고, 아빠에게 부탁했어요. 천국에서 우리 태호를 만나면, 아빠가 잘 돌봐주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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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연은 혼자 남은 어머니를 돌보고 싶었다. 남편도 흔쾌히 동의했다. 까다로운 시부모를 자기 부모처럼 생각해주는 아내에게 고마웠다. 예상과 달리,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힘들어진 사람은 남편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저는 엄마와 친밀하지 않아요. 같이 있으면, 너무 불편하거든요. 생각해보니까, 엄마와 함께했던 기억이 전혀 없어요. 
 
그렇게 술 주정을 했던 아빠도 나중에는 친밀하게 느껴지던데, 엄마는 왜 이렇게 어색할까요?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지겠지 했는데, 점점 심각해지는 것 같아요.” 
 
혜연의 어머니는 거친 성격이었다. 술주정하는 남편 대신 생계를 책임지고, 살림을 해야 했으니, 억세게 살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혜연은 기억했다. 
 
“엄마는 아빠처럼, 집안 살림을 부수거나 우리를 때리지는 않았지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죠. 이렇게 말하면 웃기지만, 저는 차라리 맞는 게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요. 일곱 살 때였을까요? 엄마가 소리를 지르니까, 제가 기절을 했어요. 어린애가 무서웠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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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시대가 좋아졌다고 해도, 스마트폰으로 성경을 찾는 게 지금 말이 됩니까? 북한이 쳐들어와서, 전쟁이라도 나면, 스마트폰 들고 싸울 거예요? 총 들고 싸워야 될 것 아니에요! 영적 전쟁은 그보다 더 치열한 싸움이에요. 성경을 손에서 놓으면  안 된다고요! 예배 오실 때, 성경 좀 가지고 다니세요! 말씀을 의지할 생각을 해야지,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도대체 어떻게 합니까?!” 
 
수요 예배였다. 목사는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혜연은 성경을 가지고 왔지만, 그 자리에 앉아 독설을 들어야 했다. 심장이 뛰고, 식은땀이 났다.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혜연의 엄마가 억세게 말했다. 
 
“그딴 교회를 뭣 하러 나가는 겨? 목사라는 사람이, 오늘도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피우더구먼. 나는 도대체 너 속을 모르것어. 왜 나까지 데리고 나가서, 이렇게 화병이 나게 하는 겨? 말 좀 해봐, 이것아!” 
 
그녀는 말없이 운전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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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신앙이 올바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상담을 받고 있으니까 솔직히 말하고 싶어요.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겠지만, 혹시라도 목사님이 교회 돈을 횡령하거나, 여자 문제로 교회를 쑥대밭을 만들어도 저는 교회를 떠나지 않을 거예요.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우리 태호처럼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돌보고 있어요. 세상 어느 교회를 가도, 예수님이 계시겠죠. 하지만, 우리 교회에도 예수님이 계세요.  
 
예수님만 바라보고 싶어요. 예수님처럼 어린 아이들을 사랑하면서 신앙생활 하고 싶어요. 목사님이 서툰 방식으로 성도들을 대하시더라도 이해할 수 있어요. 제가 상처가 많아서 그런 거니까요. 
 
엄마도 여자로 보면, 정말 불쌍하다는 생각을 해요. 지금까지 고생만 하셨잖아요. 저한테 투정을 안 부리면 어디 가서 그러시겠어요. 힘들어도, 이해하고 싶어요. 아빠도 전도했으니까, 엄마도 전도해야죠. 
 
제 꿈이 뭔지 아세요? 
 
천국에서 우리 가족이 다 같이 만나는 거예요.”
 
그녀는 손가락을 구부려가며, 셈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태호…. 아빠, 엄마. 남편, 그리고 나…. 천국에서 다 함께 만나는 꿈을 꿔요.”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흐느꼈다. 그리고, 부끄러운 듯 내게 물었다. 
 
“제가 이상하게 믿죠? 상처가 많아서 그런 가봐요.” 
 
나는 눈물을 머금은 채로,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내 진심이 그녀에게 전해지기 바랐다. 
 
그녀는 상처 입은 치유자다.

상처는 숨을 곳을 찾는다

“목사님, 그런 식으로 하시면, 당회가 무슨 필요가 있습니다. 절차를 밟아서 일을 진행하세요. 주변 사람들 의견도 경청하시고요. 참다 참다 말씀드리는 겁니다.” 
 
최도훈 장로가 얼굴이 시뻘게 지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옆에 앉은 동갑내기 장로가 최도훈 장로의 팔을 붙잡고 진정하라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김호열 목사는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를 어쩌나 하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장로님, 죄송합니다. 제가 장로님을 불편하게 한 것 같습니다.  진정하시고, 차분하게 대화를 해보는 게 어떨까요?”
 
최도훈 장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그딴 식으로 목회하지 마세요.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최도훈 장로의 협박스러운 말투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참다못했는지, 나이 많은 장로가 최도훈 장로에게 말했다. 
 
“이봐, 최 장로. 너무 나갔어. 그렇게 감정이 앞서면 옳은 말도 틀린 말로 들리는 거야. 일단, 자리에 앉게. 대화로 해결해야지, 이 사람아.” 
 
그리고, 나이 많은 장로는 목사님을 바라보며 말했다. 
 
“목사님, 아무래도 회의를 일찍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너무 심려 마시고, 다음 주에 만나 뵈시죠.” 
 
김호열 목사는 고개를 끄떡일 뿐이었다. 달리 다른 방도가 없었다. 
 
다른 장로들 역시 나이 많은 장로의 지혜로운 처사에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최도훈 장로만 예외였다. 나이 많은 장로에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장로님, 그런 식으로 좋은 게 좋다고 하니까, 목사님이 당회를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하는 겁니다. 나는 용납 못해요. 끝장을 볼 겁니다.” 
 
최도훈 장로는 화가 풀리지 않는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문이 부서져라 힘껏 닫았다. 쾅 하는 소리를 끝으로, 당회실은 적막해졌다. 다들 심각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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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표정이 왜 그래? 오늘 교회에서 무슨 일 있었어?”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서 들어온 최도훈 장로에게 그의 아내가 물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아내는 하던 일을 멈추고, 남편에게 다가왔다. 
 
“여보, 무슨 말 좀 해봐. 왜 그래 도대체?” 
 
남편이 말없이 TV만 응시하자, 아내는 뭔가를 눈치챘다는 듯 말했다. 
 
“오늘 당회하고 왔구나. 또 목사님한테 험한 말 했지? 이제 그만해, 여보. 당신 그거 완전히 오해라니까. 다른 사람들은 괜찮다는데, 왜 당신만 그렇게 핏대를 세우고 반대를 해?”
 
아내의 말은 그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었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리모컨을 바닥에 내던지며 소리쳤다.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거야? 그 쓰레기 같은 목사가 위선을 떨면서 앉아 있는 거 안 보여? 목사가 되기 전에, 사람이 돼야지. 기본적인 인성도 안 된 사람이 무슨 목사야? 두고 봐. 내가 그 자식을 가만히 두나. 끝까지 물고 늘어질 거야, 알겠어? ” 
 
그의 아내는 발을 동동 구르며, 울기 시작했다. 
 
“여보! 당신 완전히 오해라니까. 계속 왜 그래. 당신 그날 말하는 거지? 목사님 우리 집에 심방 오신 날? 그거 아니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 당신 정말 오해하는 거라고!” 
 
그는 아내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그딴 짓을 당하고도, 그놈을 감싸고돌아? 내 편을 안 들고, 어떻게 그놈 편을 드냐고!” 
 
그의 아내는 포기한 듯,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흐느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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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도훈은 젊은 시절, 의류 유통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세상 무서운 게 없었다. 아내가 아무리 교회에 가자고 해도, 들은 체도 안 했다. 
 
그러다, IMF를 만났다. 돈과 사람,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다. 살던 집에 빨간 색 딱지가 덕지덕지 붙었다. 옷 가지 몇 개를 챙겨 나온 게 전부였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장모님이 당분간 시골에 내려와 지내라고  설득했다. 괜찮다고 여러 번 말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모텔, 여관방을 전전하다가 시골로 내려갔다. 
 
장모님이 살던 시골집은 최도훈의 가족이 함께 살기에는 비좁았다. 마당 한 귀퉁이에 컨테이너 박스를 가져다 놓고, 온 가족이 그 안에서 생활을 했다. 가까이 지내던, 이웃이 딱한 사정을 듣고, 컨테이너를 잠시나마 빌려준 것이다.  
 
시골에 내려온 그날부터, 그의 아내는 새벽마다 교회에 가기 시작했다. 밤새 한숨도 잘 수 없었던 최도훈은 아내의 인기척을 느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말없이 아내를 따라나섰다.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걷게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시골 교회 새벽 예배의 풍경은 가관이었다. 피곤에 쩔은 목사가 대충 설교를 하는데, 앉아서 듣는 사람이라고는 머리가 새하얀 노인  세 사람뿐이었다. 그중 한 사람은  장모님이었다. 어이가 없었는지, 최도훈은 피식 웃고 말았다. 
 
목사의 설교가 끝나고 교회 안이 어두워지자 아내가 소리 없이 울었다. 그의 마음이 뭉클했다. 아내가 기도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내는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돈을 실컷 벌어다 줄 때는, 아내가 마음 편히 사니까 교회 나가서 교양이나 떠는 줄 알았다. 사업이 망한 후에도 한결같이 신앙생활을 지속하는 아내에게 숙연한 감정을 느꼈다.
 
사업할 때는, 사업으로 바쁘다고 아내를 돌봐주지 못했다. 사업을 하지 않는 지금은, 그야말로 돈이 없어서 아내를 돌봐주지 못한다. 아내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아내가 진심을 다해, 기도하는 소리를 듣게 되자, 그의 눈이 촉촉해졌다. 어딘가, 신이 존재한다면, 바지 가랑이라도 붙잡고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그의 마음이 열렸다. 처음에는 새벽어둠 속에 자신을 숨기고 민망한 듯 교회에 나갔지만, 이내 조금씩 용기가 났다. 밝은 낮에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에 나간 것이다. 
 
모든 것이 어색했지만, 마음을 활짝 열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몸과 마음이 새롭게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의 인생을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최도훈은 농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지만, 유통에 밝았다. 인터넷이 활성화되던 시기를 기회로 잡고, 직접 재배한 농작물을 고객에게 직접 유통했다. 수익은 고스란히 사업의 규모를 키우는데 투자했다. 땅을 사고, 재배량을 늘리는 일에 집중했다. 
 
그러다, 뉴스에서 신도시 계획을 듣게 되었다. 소파에 앉아 뉴스를 보고 있던 그는, 아내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가 사 모은 땅은  기하급수적으로 가격이 올랐고, 땅을 매각해서 큰돈을 벌었다. 
 
상가 건물 몇 채를 사들였다. 임대료 수익으로 먹고 살 수 있게 되자, 제법 시간이 많아졌다. 자연스럽게 교회 이곳저곳에서 봉사할 일이 늘어났다. 그는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었다.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었다. 
 
사람들도 그의 진심을 알았는지, 그는 어느덧 장로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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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업이 번창하듯, 교회 역시 성장했다. 신도시가 조성되고 사람들이 몰려들자, 교회는 두 번에 걸쳐 넓고 좋은 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김호열 목사는 예배시간에 중대한 발표를 하겠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기도 중에, 교회 건축을 하라는 응답을 받았다고 했다. 성도들은 비좁고 불편한 상가 건물이 불편했던 터라, 담임 목사의 기도 응답에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최도훈 장로는 심기가 불편했다. 다른 장로들의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표정을 제대로 읽어낼 수 없었다. 표정이 모두 제각각이었다. 
 
김호열 목사는 예배를 마치고, 당회를 열었다. 당회에서 겸손한 태도로 장로들에게 사과의 말을 먼저 덧붙였다. 장로님들과 먼저 상의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이었다. 
 
그러고 나서, 나름의 논리로 장로들을 설득했다. 높아지는 임대료와 몰려드는 사람들을 계산했을 때, 땅값이 더 오르기 전에 서둘러 교회를 짓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논리였다. 
 
가만히 목사의 말을 경청하던 장로들 사이에 냉랭한 기운이 돌았다. 이치에 맞는 말이었지만, 손뼉을 치면서까지 동의할 내용은 아니었던 것이다. 
 
최도훈 장로는 참았던 말을 하고 말았다. 
 
“목사님, 땅값이 오르기 전에 교회를 서둘러 지어야 한다는 말이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에, 김호열 목사는 당황했다. 그리고, 어색하게 웃으며 답변했다. 
 
“장로님, 성경에 그런 말은 안 나옵니다. 지혜로운 선택을 내리자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지 않았습니까? 성경을 잘 풀고 해석해서 지혜로운 선택을 내려야지요.” 
 
최도훈 장로는 물러서지 않았다. 목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곧바로 되물었다. 
 
“성경 어느 구절을 해석하면, 그런 지혜가 나옵니까?”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김호열 목사는 한 걸음 물러섰다. 
 
“아이고, 장로님. 제가 장로님 심기를 불편하게 했나 봅니다. 제가 죄송합니다.” 
 
최도훈 장로는 다른 장로들을 둘러보며,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장로님들, 어떻게 이런 말을 듣고 가만히 계십니까? 땅값 오르기 전에 땅을 사서 교회를 짓자는 게 말이 됩니까? 이게 땅 투기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지, 목사님이 하실 말씀이냐고요?” 
 
김호열 목사의 이마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수습해야 했다. 이대로 당회를 마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차분한 어조로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제 말에 오해가 있으신 것 같아요. 제가 조금 더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교회 건축, 안 해도 됩니다. 불편해도 그냥 참고 지내면 되는 거예요. 
 
하지만, 다음 세대는 어떻게 합니까. 아이들이 예배드리는 곳을 한 번 둘러보세요. 아주 난리예요. 교회마다 아이들이 없어서 고민인데, 우리는 아이들이 너무 많이 와서 걱정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아이들이 생각납니다. 아이들이 마음 편하게 예배드리는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요. 
 
그래서, 어려운 말씀드린 겁니다. 교회 건축 안 해도 되니까, 제발 노여움 푸세요.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김호열 목사의 말을 듣고, 다른 장로들은 공감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장면을 본 최도훈 장로는 미칠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목사의 멱살이라도 움켜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야, 이 가식적인 놈아. 말만 그럴듯하지. 나는 네놈의 실체를 다 알고 있어. 이 쓰레기 같은 놈아.” 
 
마음속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최도훈 장로는 그런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오랜 시간, 가슴에 담아둔 말이었다. 세상 그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그는 잊지 못했다. 김호열 목사가 자신의 눈앞에서 저지른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집사님, 저와 같이 심방을 가셔야 할 것 같아요.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신가요?” 
 
같은 마을 김 씨가 교회에 등록했다. 서울에서 반듯하게 살다가,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시골에 내려온 것이다. 김 씨가 시골에 내려온다는 소식을 온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김 씨는 도시로 유학을 떠났다. 혼자 공부해서 어렵다는 사관학교에 들어갔다. 별을 달고 예편해서 군수물품을 제조하는 중소기업의 임원이라고 했다.   
 
김 씨는 2층짜리 전원주택이 완공된 다음에 심방을 받고 싶다고 했다. 목사님을 누추한 곳에 모실 수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김호열 목사는 남자 성도가 귀한 마당에, 외지에서 내려와 시골에서 잘 정착한 최도훈이 김 씨에게 좋은 말벗이 되어줄 것이라 했다.  
 
김호열 목사가 최도훈에게 김 씨의 집에 함께 심방을 가자고 제안한 이유였다. 
최도훈은 목사의 말을 따를 생각이 없었다. 며칠 전, 길에서 김 씨를 만나지 않았다면, 절대로 목사와 마주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이, 자네. 목사님 심방 오실 때, 같이 올 거지? 내가 귀한 음식 차릴 거니까, 자네도 꼭 와. 절대 후회 안 할 거라고.” 
 
최도훈은 마지못해 알겠다고 말했다. 심방 당일, 김호열 목사와 심방 전도사, 그리고 최도훈 장로와 그의 아내가 김 씨의 집을 방문했다. 
 
간단히 예배를 드리고, 음식을 대접받았다. 김 씨의 말은 허세가 아니었다. 잔치라도 벌어진 듯, 온갖 음식이 나왔다. 김 씨는 목사님에게 말했다. 
 
“목사님, 이것 좀 드셔보세요. 이게 뭐냐면요. 과메기라는 거예요. 제 친구가 포항에 사는데, 이게 딱 한 철에만 나오는 거라, 그 동네 사람에게도 귀한 음식이라고 하네요. 철마다 친구가 보내주는데, 저는 이거 먹는 게 한 해의 낙이랍니다.” 
 
김호열 목사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그래요?”라고 물었다. 들뜬 얼굴로 과메기를 미역에 싸더니, 초장에 찍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다른 사람들이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특히, 김 씨가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그러나, 최도훈은 웃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김 씨는 집안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김호열 목사는 “그럼, 그럴까요?”라는 말과 함께 심방 전도사에게 눈빛을 보냈다. 심방 전도사는 전화기를 들고, 거실 구석으로 가더니, 다음 심방을 뒤로 미루는 듯 보였다. 서로 이야기가 잘 되었는지, 밝은 표정으로 김호열 목사에게 “편안히 보셔도 될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김 씨의 안내로 집안 구석구석을 들여다봤다. 그러다, 2층 서재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김 씨가 만년필을 수집하는지, 유리로 된 장식장에 다양한 만년필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서글서글 대충대충 보이던, 김 씨의 이미지가 한순간에 바뀌던 순간이었다. 
 
함께 서 있던 모든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만년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김 씨가 입을 열었다. 
 
“목사님, 관심 가는 물건 있으시면, 하나 골라보세요. 다 제 자식 같은 놈들이지만, 목사님께 하나 드리려고 생각해서 오늘 오시라고 했습니다. 걱정 마시고, 하나 골라보세요.”
 
김호열 목사는 거듭 사양했지만, 김 씨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만년필 하나를 집어 들었다. 김 씨는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봤다. 
 
김호열 목사가 차에 올라타서, 김 씨의 집을 떠나려고 하자, 김 씨는 농담처럼 목사에게 말했다. 
 
“목사님, 역시 보는 눈이 있으세요. 지금 타고 가시는 자동차보다 비싼 녀석을 주머니에 넣고 가시는 거예요. 오래오래 간직해주세요.” 
 
김호열 목사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감사하는 말을 두세 번 내뱉었다. 김호열 목사가 돌아간 뒤, 최도훈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세 시간이 넘도록 김 씨에 집에 머문 것이다. 최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실룩거리며 말했다. 
 
“쓰레기 같은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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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도훈이 아내를 따라, 교회를 나간지 얼마 되지 않아, 목사님이 심방을 오신다고 했다. 최도훈은 컨테이너 박스에서 누추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아내는 남편을 여러 번 설득했다. 
 
“여보, 목사님이 무슨 성도들이 얼마나 잘 먹고 사나 보시는 줄 알아? 그런 거 아니야. 편안하게 생각해.” 
 
최도훈은 마지못해 심방을 받기로 했다. 
 
막상 심방을 받게 되자, 목사님이 방문하기 며칠 전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설레었다. 
 
최도훈의 마음이 힘들 때마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에 딱 맞는 설교 말씀을 해주시는 목사님에게 고마웠다. 교회에서 데면데면 할 때는 민망해서 표현을 못 했지만, 심방을 받을 때는 제대로 감사하다는 말을 할 작정이었다.  
 
없는 돈에, 나름대로 저녁 상을 차리고 목사님을 기다렸다. 시간에 맞춰, 김호열 목사가 나타났다. 
 
컨테이너 박스에 들어선 김호열 목사는 안을 들여다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컨테이너 박스도 잘 꾸미니까 그럴 듯하군요.” 
 
무슨 의도였는지는 모르지만, 단 번에 최도훈의 기분이 상했다. 그의 아내는 속도 없는지, 다정한 말투로 목사에게 말했다. 
 
“옆집에서 쓰던 거 잠시 빌려주셨어요. 이렇게라도 살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하죠. 하나님 은혜에요, 목사님” 
 
김호열 목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두 분 고생하시는 거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렇게 좋은 마음 가지고 계신데, 하나님께서 좋은 집으로 인도해주실 거예요.” 
 
아내는 손뼉을 치며, 아멘이라고 말했다. 최도훈은 이게 뭔가 싶었다.  
 
김호열 목사는 성경을 펴고, 말씀을 한 줄 읽었다. 그리고는, 잠시 동안 설교했다. 그리고는,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아이고, 죄송합니다. 다음 심방이 있어, 이만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아내가 최도훈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아내 눈치를 살피던, 최도훈은 어색하게 웃으며 김호열 목사에게 말했다. 
 
“목사님, 저녁 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차린 건 별로 없지만, 목사님 오신다고 식사를 준비했어요. 금방  차릴테니까, 5분만 드시고 가세요.”
 
김호열 목사는 정중히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무리하게 일정을 잡았나 봐요. 시간이 조금씩 뒤로 밀려서, 이렇게 됐습니다. 이해 부탁드리겠습니다, 형제님.”
 
아쉬운 마음에 최도훈은 “설교 참 감사합니다. 많이 위로받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김호열 목사는, “제가 감사하지요.”라는 말과 함께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김호열 목사가 최도훈의 집에 도착해 차를 타고 떠나기까지 십오 분이 걸렸다. 교회의 모든 것이 낯설었던 최도훈은 아내에게 물었다. 
 
“여보, 목사님이 시간이 철저하신 분인가 봐. 15분 단위로 사람을 만나네. 나는 사업할 때, 저런 식으로 안 했는데. 사람들이 좋아할까? 나는 기분이 별로야.” 
 
아내는 남편을 꾸짖듯이 말했다. 
 
“당신이 몰라서 그래. 목사님들이 얼마나 바쁘신데. 휴일도 없이 저렇게 일하시는 거야. 당신이 옆에서 많이 도와드려.” 
 
최도훈은 끝내 시계를 들여다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원래 저런 거야, 아니면 나를 무시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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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도훈은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리며, 나에게 말했다.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시간이 흐르니까, 말도 안 되는 일을 당한 거예요. 앞뒤를 맞춰보니까, 완전히 무시를 당한 거죠. 
 
그 목사는 내 사업이 성공할지 몰랐을 거예요.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관심도 없었겠죠. 
 
그날 컨테이너 박스에서 가난하게 사는 나를 보면서,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죠. 별 볼 일 없는 내가 장로까지 되었으니 얼마나 당황스러울까요.
 
표현은 못 해도 아마 속으로 미칠 지경이겠죠. 장로가 항존직이라고 그랬나요? 한 번 직분을 받으면, 죽을 때까지 유효하다면서요? 어디 보세요. 내가 끝까지 괴롭혀 줄 거니까.”  
 
그는 화가 나서,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그 손으로 테이블이라도 내리칠 것만 같았다. 
 
그가 꽉 움켜쥔 손에 무엇을 숨겼는지 궁금했다. 그는 스스로 손을 펴지 못했다. 움켜쥐는 것으로 근육이 적응했을 것이다. 상처는 언제나 숨을 곳을 찾는다. 그의 상처는 분노 뒤에 숨었다.  
 

 
“난 고아였어요. 부모님의 얼굴을 알지 못해요. 부모도 없는 게, 싸가지도 없었는지, 12살에 고아원에서 쫓겨났어요. 
 
밤낮으로 나를 괴롭히는 친구가 있었어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 친구 손등을 망치로 내려쳤거든요. 고아원 원장한테 뺨 한 대 얻어맞고, 그날로 쫓겨났죠. 그 녀석이 원장님 아들이었거든요.  
 
고아원에서 쫓겨나서, 개처럼 살았어요. 구걸도 해보고, 도둑질도 해봤는데 이건 아니다 싶더라고요. 동대문에서 트럭에 옷을 실어주는 일을 했는데, 거기 사장님이 날 좋게 본 거죠. 
 
일을 가르쳐 주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정도 먹고살게 됐고, 아내도 만나고 그랬죠. 
 
사장하고 잘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사장이 날 보는 눈빛이 이상해요. 알고 보니까, 거래처 사람들이 이간질을 하고 있더라고요. 아니, 자기 밑에서 뼈빠지게 일하는 내 말을 안 믿고, 계산기나 두드리는 그런 사람들을 믿는 게 말이 되나요. 기분 더러워서 당장 그만뒀어요. 
 
보란 듯이 성공해서,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마음먹었죠. 더 좋은 조건으로 그 사장의 거래처를 내가 다 빼앗아 왔어요. 거래처 사장들은 내가 잘 데리고 있다가, 물량을 확 끊어버려서 망하게 했고요. 다른 곳에서도 내 눈치 보느라 그쪽에 납품 안 했어요. 나한테 잘못 보이면, 끝장난다는 소문이 업계에 돌았죠. 
 
내가 왜 이런 성격인가 생각을 해봤어요. 연관성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기억이 났으니까 일단 이야기를 해볼게요. 
 
그 고아원 원장 있죠? 아이들 열 명 정도 데리고 있었는데, 완전히 위선 덩어리였어요. 거기 오는 후원자들 중에 잘 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 있는데, 유독 잘 사는 사람한테 그렇게 잘했어요. 
 
어려운 살림에 쌀 20Kg짜리 하나 어깨에 짊어지고 온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앞에서는 감사하다 뭐다 갖은 말을 다하더니, 그 사람 가니까 표정이 싹 변해요. 
 
“요즘 세상에 누가 쌀을 줘. 돈으로 가져와야지. 이거 몇 푼이나 한다고 생색을 그리 내. 내가 자존심이 상해서, 이 짓도 못해 먹겠다, 진짜.” 
 
돈 많은 집에서 후원하러 오잖아요. 그러면, 신발도 안 신고 마당으로 뛰어나가서 인사를 해요. 그거 보고 있으면, 구토가 나오죠. 나는 그 여자 사람으로 안 봤어요. 
 
그 아들자식은 고아원 애들 후원 들어온 걸로, 아주 호강을 했어요. 어린 제 눈에는 없는 게 없는 걸로 보였으니까요. 그 자식이 심심풀이로 애들 때리고, 괴롭히고 그래도, 아무도 말 못 했죠. 
 
그놈하고 싸움 붙는 놈은, 가차 없이 쫓겨나거든요. 갈 곳 없는 어린애들이 어쩌겠어요. 그냥 참는 거죠. 
 
자고 있는데, 그 자식이 내 발가락에 불침을 놨어요. 발가락 사이에 휴지를 끼워서 불을 붙이면, 화상을 입죠. 여름이었는데, 물집이 잡히고 터지고 곪아서 걷기도 힘들더라고요. 그만두라고 해도, 계속 그 짓을 해요. 발가락이 성할 날이 없었어요. 
 
자다가 느낌이 이상해서 깼는데, 또 그 짓을 하고 있어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 되었죠. 당장 죽여버릴 생각으로 망치를 가져왔어요. 차마, 죽일 수는 없어서 손등을 내려친 거죠. 
 
지 자식이 아프다고 울고불고 하니까 원장이 깜짝 놀라 잠에서 깼죠. 지 자식을 끌어안고, 내 뺨을 때리더라고요. 그 새벽에 날 쫓아낸 거죠. 홧김에 불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다른 애들 때문에 참았죠. 그 아이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아직도 가끔 그날이 생각나요. 그 쓰레기 같은 원장 얼굴도 떠오르고요.” 
 
그의 말을 듣고, 잠시 동안 내 생각을 전해주었다. 그는 긴 한숨을 쉬더니, 한참을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흥미롭네요. 원장에게 쓰던 쓰레기라는 말을 목사에게 같이 쓰고 있네요. 생각지도 못했거든요.” 
 
그는 여유를 되찾았는지,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에효. 목사도 사람인데, 그럴 수도 있죠. 나도 뭐 사람인데요. 예수님 앞에서 도토리 키재기죠. 사람한테 뭐 기대할 게 있겠어요. 다 부질없는 짓이죠. 이제 교회에서 목사하고 싸움박질하는 것도 지쳤어요. 때가 되면 떠나야죠. 
 
소박한 꿈이 하나 있거든요. 시골 마을에 조용하고 따뜻한 고아원 하나 짓는 거예요. 사실, 아내와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나처럼 부모 없는 아이들, 갈 곳 없는 아이들, 상처받지 않도록 잘 키워내고 싶어요. 
 
그렇게 하려면, 제 상처부터 먼저 치유해야겠지요?”
 
최도훈은 그의 꿈을 말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의 머리카락에 하얀 새치가 드문드문 보였지만, 내 눈에는 그가 12살 꼬마로 보였다. 그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아주었다. 그는 아주 잠시 동안 나를 끌어안고, 아이처럼 울었다.

당신이 수치스러워

“남편에게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요. 그를 믿었거든요.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 착각이었죠. 결혼 생활이 파탄 나고 있어요.” 
 
결혼 3년 차, 아이는 없었다. 부부 침실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남편과 성관계를 원하지 않았다. 연애를 포함해서 지금까지 한 번도 남편이 원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본 기억이 없다. 그녀에게 성관계는 고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이를 갖고 싶어서 배란일에 맞춰 의무적으로 한 번씩 관계를 맺었다. 서로 사랑해서가 아니라 부모가 되기 위해 치르는 행사가 되어버렸다. 남편은 아내를 안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아내는 계속 거절했다. 남편의 집착은 심해졌다. 
 
그럴수록 아내는 남편을 밀어냈다. 해야 할 일이 있다는 핑계로 남편이 잠들면 옆에 누웠다. 그가 안으려고 하면 피곤하다며 돌아누웠다. 
 
결혼하고 세 달이 넘도록 성관계를 하지 못한 남편이 화를 냈다. 아내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한 그가 집요하게 이유를 물었다. 어떤 말을 해도 괜찮다는 말로 아내를 안심을 시키며 끊임없이 캐물었다. 아내는 남편의 추궁을 견디다 못해  숨겨둔 비밀을 말했다. 남편에게 버림받지 않을까 두려워 꽁꽁 감춰두었던 이야기를.
 
대학에 입학하여 남자친구를 만났다. 기독교 가정에서 보수적으로 자란 그녀는 혼전순결을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남자친구를 사귀어도 결혼 전에는 성관계를 맺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혼자만의 결심으로 순결을 지켜낼 수 없었다. 그녀와 남자친구는 선을 넘었다. 죄책감이 밀려왔다. 
 
결국 그와 헤어지게 되었다. 죄책감이 직접적인 이유는 아니었지만 그것이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을 가져왔고, 그녀가 남자친구를 밀어내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 남자친구와 헤어진 다음에 발생했다. 그가 스토커처럼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가 혼자 자취하는 집으로 계속 찾아왔다. 
 
어느 날, 그가 술에 취해 현관문 앞에 엎드려 있었다. 그녀가 집에 보내려고 일으켜 세우는 순간, 그의 애원이 시작되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을 테니까 잠깐만 대화를 하자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집으로 들였다. 집에 들어선 남자친구는 이성을 잃었다. 강제로 그녀와 성관계를 맺었다. 그녀는 울면서 경찰서로 향했다. 그는 처벌받았다. 
 
그녀는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어 다닐 수 없어 휴학을 하고 배낭여행을 떠났다. 모든 상처를 먼 곳에 가서 털어내고 싶었다. 배낭여행에서 돌아온 그녀는 아픈 과거를 뒤로 하고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서른두 살에 남편을 만났다. 그는 그녀보다 두 살 어렸지만 책임감이 강하고 듬직했다. 1년 남짓 연애를 하고 결혼했다. 연애 시절, 남편이 그녀를 안고 싶어 할 때마다 그녀는 마음 속 거부감을 숨기고 말했다. 혼전순결을 지키고 싶다고. 
 
그 말을 하며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이미 더럽혀진 몸’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지워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비밀을 들은 남편은 충격에 빠졌다. 
 
“수치스러워. 당신이 얼마나 처신을 잘못했으면 그런 일을 당했겠어! 당신에 대한 모든 신뢰가 무너졌어.” 
 
예상과 다른 남편의 반응에 아내 역시 충격에 빠졌다. 아프고 힘든 상처를 솔직히 털어놓고 나서, 그녀는 일시적인 해방감을 느꼈다. 죄책감이 잠시 사라진 기분이었다. 그러나 남편이 그녀에게 내뱉은 말이 더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날 밤, 남편에 대한 모든 신뢰가 무너져 내렸다.
 
남편은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 대해 집요하게 물었다. 그때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 왜 그 남자를 집으로 들어오게 했는지, 그에게 은근히 안기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왜 미리 경찰서에 신고하지 않았는지. 그녀가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없었다. 남편은 구간반복 기능이 켜진 녹음기처럼 반복했다. 
 
그녀는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불면증도 찾아왔다. 일주일에 이틀은 수면제를 복용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하루도 편하게 잠들 수 없었다. 진실을 말해버린 이후, 마치 지옥에 떨어진 것 같은 고통이 시작되었다. 
 
남편에게 다시 신뢰를 얻기 위한 노력이 그녀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남편은 집안일에 사사건건 참견했다. 살림을 제대로 못한다고 구박을 하고, 돈을 허튼 데 쓴다며 견딜 수 없는 잔소리를 하기 시작되었다. 가장 힘든 것은 그녀의 부모에 대한 비난이었다. 친정 부모님에 대한 거침없는 욕설은 기본이었다. 
 
그녀는 모든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그가 이해해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잘못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고, 과거는 바꿀 없으므로. 남편에게 그 기억을 지우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니까. 
 
“남편에게 말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차라리 남편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전 혼자 살았어야 했나 봐요. 괜히 결혼해서 한 남자의 인생까지 망쳐버린 기분이에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남편을 놔줘야죠.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지만 생각할 게 많네요. 사람이 미쳐버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아요.” 
 
***
 
남편에게 신뢰를 얻으려 노력할수록 그녀는 더욱 비참해질 것이다. 노력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녀가 성폭행 당한 것은 바꿀 수 없다. 일어난 일을 일어나지 않았던 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꿀 수 있는 것은 그 사건이 아니라 그에 대한 관점뿐이다. 그 사건에 대한 관점이 왜곡되어 있다. 두 사람 모두 그 관점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계속 고통 받게 될 것이다. 
 
남편은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피해자가 아니다. 아내가 겪은 고통을 올바른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그는 또 다른 가해자가 된다. 이미 그는 성폭력을 당한 아내에게 언어폭력을 가하고 있다. 
 
바로 잡지 않으면 더욱 심각한 문제로 발전할 것이다. 강박증이나 의처증으로 발전한다면 남편은 자신의 삶뿐 아니라 가정도 파괴할 수 있다. 그의 왜곡된 관점은 왜곡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수치심이다. 그는 아내에게 “수치스럽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아내가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이 그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가 느낀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자신의 아내는 그런 일을 겪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아내가 그런 수치스런 일을 겪을 수 있는가!’ 
 
이 감정은 남편의 지나친 자기애의 부작용이다. 세상에 나쁜 감정은 없지만 남편이 느끼는 수치심은 정당하지 못하다. 왜곡된 인식이 왜곡된 감정을 만들었다. 
 
남편이 아내를 바라보는 관점을 문장으로 표현해보자. 
 
“내 아내가 성폭행을 당했다니, 수치스러워. 분명 아내가 사건에 빌미를 제공했을 거야. 틈을 주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겠지. 술 취한 남자친구를 집 앞에서 발견했을 때, 왜 신고하지 않고 집으로 데리고 들어간 거야? 그 상황을 견딜 수 있는 남자가 어디에 있어? 그도 피해자 아니야? 전과자가 되었으니. 나도 망가져 버렸어. 도저히 이 여자와 살 수 없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남편을 망가뜨리는 사람은 아내가 아니라 그 자신이다. 남편이 바라보는 관점이 자신을 파괴한다. 아내는 가해자나 공범자가 아니다. 피해자다. 남편의 여동생이 성폭행을 당했다고 해도 똑같은 생각과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아닐 것이다. 
 
모든 분노는 가해자에게 집중될 것이다. 여동생은 피해자일 뿐이다. 누군가 남편에게 “처신을 못했네. 그 시간에 남자를 왜 만나? 그것도 짧은 치마를 입고. 그러니 그런 일을 당하지”라고 말한다면 그는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날릴 것이다. 그런데 남편은 그 끔찍한 말을 아내에게 끊임없이 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아내 역시 그 사건의 트라우마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침실에서 일어난 일이 그 증거다. 그녀가 사랑스러워 안아 주려는 남편의 손길을 거부했다. 남편과 결혼할 때, 아내는 “과거에 겪은 사건은 과거일 뿐이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잊고 싶은 과거이기 때문에 잊으려 노력했을 것이다.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한 남자를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되었고, 결혼까지 결심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트라우마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트라우마는 지독히 끈질긴 녀석이다. 직면하지 않으면 일생 동안 따라다니면서 한 사람을 파괴한다. 
 
성폭행을 당한 후, 그녀는 별도로 치료를 받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그녀에게 치료가 필요하다. 트라우마는 오랜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치유되지 않는다. 
 
아내는 바꿀 수 없는 것에 집중하지 말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남편에게 신뢰를 얻기 위한 모든 노력을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 의미 없는 노력이다.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스스로가 비참해질 것이다. 목표를 바꾸자. 다시 신뢰를 얻으려 노력하지 말고, 남편을 상담실에 데리고 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 남편 스스로 바꿀 수 없는 생각이 있다. 그의 왜곡된 생각은 왜곡된 감정을 불러일으켜 아내에게 더 큰 상처를 주었다. 
 
기계처럼 순서대로 되는 일이 아니지만 그 중심에 검증되지 않고 객관적이지 않은 자기만의 생각이 있다. 그 왜곡된 생각을 노출시키지 않으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한 사람이 배우자를 바라보는 관점은 지독히 폐쇄적이며 개인적이다. 죽을 때까지 노출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남편을 빛으로 인도해라. 두려움을 떨쳐내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라. 
 
남편이여, 당신의 아내는 희생자다. 그녀가 원해서 벌어진 일이 절대 아니다. 당신 안에 재생되고 있는 구간 반복 녹음기를 꺼라. 버튼을 눌러도 멈추지 않는다면 밖으로 던져버려라. 그래도 소리가 들린다면 전문가를 찾아가라. 그에게 당신이 피해자라고, 수치스럽다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아내에게는 안 된다. 그녀는 당신이 싫어서가 아니라 상처 때문에 당신에게 안기지 못한 것이다. 불쌍한 여자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좋겠다.

용서 못 하는 나 자신이 싫어요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건 머리로는 알겠어요. 하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아요. 용서 못 하는 제 자신이 싫어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것 같거든요. 오랫동안 이 문제를 피해 도망 다녔지만 벗어나지 못했어요. 정말 용서하고 싶지 않은데, 용서해야만 하나요.  
 
용서 못 하는 자신을 용서해주세요. 용서는 과정이지, 성취가 아닙니다. 용서하겠다는 마음을 가진 그 순간부터 용서가 시작된 겁니다. 조급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용서하는 삶이 시작되었으니, 용서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정죄하시면 안 됩니다. 끔찍한 일을 당한 건 당신입니다. 당신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비난한다면, 나는 슬픕니다. 세상에 그런 일은 없습니다. 억울한 일이에요. 그러니, 자신을 비난하지 말아주세요.
 
아직 용서하지 못했다는 생각은 감정에서 비롯되었을 겁니다. 마음으로는 용서하고 싶은데 그 사람, 그 상황을 생각하면 분노가 일어나겠지요. 분노라는 감정과 용서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용서는 지난 일이고, 감정은 지금 일이죠. 감정이 남아 있다고 해서, 용서 못 한 게 아닙니다. 감정과 용서를 구분할 수 있어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끝나도 감정은 느껴집니다. 없애려 하지 마세요. 사라지지 않습니다. 숨기면 강해지는 게 감정이고, 표현하면 사라지는 게 감정입니다. 격한 감정을 사람에게 표현하면, 부작용 있으니 예수님께 표현하세요. 차분히 누그러질 때까지 마음껏 표현하세요. 예수님은 하품 한 번 안 하고 끝까지 들어주십니다. 
 
용서하고 싶은데 감정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면, 이미 용서하신 겁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감정을 돌보세요. 분하고 화나도 참지 말고 표현하세요. 그 과정에서 감정마저 편안할 날 올 겁니다. 감정을 느끼는 동안, 자책하지 마시고 기다려주세요. 용서의 삶을 시작한 당신을 바라보시며, 예수님이 기뻐하십니다.

엄마가 내 초콜릿 먹었어?

“지훈아, 원두 로스팅 하는 동안 주문 좀 받아줄래?” 
 
문영린은 이른 아침, 카페 문을 연다. 딸의 남자 친구 김지훈이 문영린의 일손을 거들었다. 김지훈은 한 달 전에 군 복무를 마쳤다. 영어 학원에 다니면서, 오전에 잠깐 문영린을 돕는 것이다. 
 
원두 로스팅을 할 때마다, 문영린은 예민해졌다. 정확한 시간에 맞춰 기계를 켜고 꺼야 했다. 출근길에 잠시 들러 커피를 주문을 하는 손님을 맞이하다 보면, 로스팅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생이 그만두는 바람에 문영린은 난처해졌다. 마침 딸의 남자 친구, 김지훈이 그녀를 기꺼이 돕겠다고 나섰다. 
 
로스팅을 마친 문영린은 카페 한 귀퉁이에 앉았다.  
 
“지훈아, 제대하고 쉬고 싶을 텐데 아침 일찍 나와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제대하고 생활리듬 깨질 뻔했는데, 일찍부터 나와 일하니까 좋죠, 뭐. 
 
김지훈은 멋쩍은 듯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테이블 위에 팔을 걸치고 편안하게 서 있던 김지훈은, 문영린의 진지한 질문에 자세를 고쳤다.
 
“조금 있다가 복학해야죠.” 
 
“우리 미혜와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물은 거야. 우리 미혜가 그렇게 좋아?” 
 
김지훈의 긴장이 풀어졌다. 
 
“그럼요.” 
 
“뭐가 그렇게 좋은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아요.” 김지훈은 민망함을 감추려고 주문 테이블 구석에 놓인 초콜릿 상자를 문영린에게 가져갔다. 
 
“이거 드셔보세요. 제가 제주도 갔을 때 사온 초콜릿인데, 맛있어요.” 
 
초콜릿을 받아들고 입에 넣으며 문영린이 말했다. 
 
“얼렁뚱당 넘어가려고 하네. 아직 질문에 대답도 안 했어.” 
 
김지훈은 문영린은 진지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미혜를 정말 좋아해요. 제가 군대 있을 때도 한결같이 사랑해줬잖아요. 이제 제가 지켜줄 차례에요.”     
 
문영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젊은 시절 남편과 이혼해 미혜를 혼자 키웠다. 그녀에게 미혜가 전부였다. 대학에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 동갑내기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말에 당황한 영린이었지만, 지훈의 듬직한 모습에 점차 안심이 되었다. 
 
“둘 만 사이좋게 잘 지내. 싸우지 말고. 그럼 됐지 뭐.” 
 
문영린은 테이블에서 일어나, 시계를 보며 말했다. 
 
“지훈아, 이러다 학원 늦겠다. 어서 가.” 
 
혼자 남은 문영린은 창가에 섰다. 언젠가 미혜가 그녀의 곁을 떠날 것이다. 그녀는 아직 미혜를 떠나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 김지훈이 믿음직스러운 것과 미혜를 떠나보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녀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녀는 긴 한숨을 쉬면서, 에스프레소를 내려마셨다. 진하게 농축된 커피 향기가 그녀의 미간에 잡힌 주름을 잠시 동안 풀어주었다.  
 
늦은 오후, 미혜에게 문자가 왔다. 문영린은 문자의 내용을 언뜻 이해할 수 없었다. 두 번 세 번 다시 읽어봐도, 그녀가 제대로 문장을 읽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엄마, 아침에 내 초콜릿 먹었어? 그거 내가 얼마나 아끼는 건데, 엄마가 먹어?”
 
기가 막혀 눈물이 났다. 딸에게 답장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문영린은 김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훈아, 지금 잠시 통화되니? 미혜가 나한테 말도 안 되는 문자를 보냈어. 도대체 무슨 일인 거야. 미혜가 나한테 이럴 리 없는데, 너희 둘이 무슨 일 있었어?”
 
김지훈도 당황한 듯 말했다. 
 
“모르겠어요. 미혜가 이상해요. 점심시간에 미혜하고 잠깐 통화하면서 어머니도 초콜릿 좋아하신다고 말했거든요. 맛있게 드시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고 말했는데, 그다음부터 미혜가 다짜고짜 화를 내더라고요. 퇴근하고 보기로 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미혜가 술에 취해 저녁 늦게 들어왔다. 문영린은 딸의 모습에, 감당할 수 없는 분노가 일어났다. 마음 같아서는 등짝을 후려치고 싶었지만, 감정을 억누르고 말했다. 
 
“늦었어. 빨리 씻고 자. 내일 출근해야지.”  
 
미혜는 몸을 가누기도 힘든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그거 왜 먹었어? 그게 엄마 거야? 그거 내 거야. 지훈이가 나 주려고 사온 거라고. 엄마 눈에 보이면, 그게 다 엄마 거야?” 
 
문영린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미혜에게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이 미친년아.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엄마가 초콜릿 하나 먹었다고 이 지랄이야?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들도 안 그러겠다. 이 미친년아!” 
 
미혜는 지지 않고 말했다. 
 
“매일 똑같은 소리지. 누가 엄마 보고 희생하랬어? 엄마는 항상 보상받고 싶어 하잖아. 나는 평생 엄마가 시키는 대로 살았어. 엄마가 원하는 대로 살고 있다고. 내 인생이 어디 있어? 어디 있냐고! 앞으로 내 인생에 끼어들지도 말고, 내 물건도 건드리지 마. 나 이제 엄마랑 안 살아! 지긋지긋해.” 
 
문영린은 미혜와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없었다. 침실에 들어가 문을 닫고 누웠다.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소리 없이 울었다. 울어도 울어도 슬픈 감정을 덜어낼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문영린은 식탁 위에 놓인 짧은 메모지를 발견했다. 미혜가 남기고 간 메모였다. 
 
“엄마, 나 이렇게는 살고 싶지 않아. 혼자 살 거야. 갑자기 결정한 거 아니야.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생각했어. 엄마도 이제 엄마 인생 살아. 나도 내 인생 살 거니까.”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 자리에 쓰려져 하염없이 울었다.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카페에 나갔다. 며칠 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김지훈이 문영린에게 문자를 보냈다. 
 
“어머니,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미혜가 지금 제가 사는 오피스텔에서 함께 지내고 있어요. 이건 아니라고 계속 설득했는데, 소용없더라고요. 제가 잘 타일러서 돌려보낼 테니까,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제가 꼭 돌려보낼게요. 죄송합니다, 어머니.”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문영린의 세상은 종말을 맞이했다. 
 
딸은 반 년이 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극심한 우울증으로 고통에 시달렸다. 고소하고 향긋한 커피향마저도 그녀에게 쓰디쓰게 느껴졌다.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으로 하루하루를 버텨갈 뿐이었다.   
 
“초콜릿 하나로 이렇게 될 수 있는 건가요? 이제 초콜릿이라는 말만 들어도 소름이 돋아요.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요. 그날만 생각하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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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딸이 집을 나간 이유가 무엇일지 오랫동안 진지하게 고민해보셨을 것 같아요.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해 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초콜릿이죠. 초콜릿이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딸이 문자로 ‘왜 먹었냐고’ 따졌을 때, 그냥 미안하다고 말했으면 아무 문제 없었을지도 몰라요. 제가 지훈이에게 전화를 걸어서 문제가 더 커졌나.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뭔가 마음이 불편했겠죠, 미혜도.”  
 
그녀는 초콜릿이라는 단편적인 사건에 집중하고 있었다. 사건 자체가 없었기를 바라는 마음이나, ‘그 당시 엄마가 다른 반응을 보였다면’이라는 가정은, 그녀를 지독하게 괴롭혔다. 만약 초콜릿을 먹지 않았다면, 그녀의 딸이 집을 나가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엄마가 딸의 초콜릿을 먹었다는 것, 그것이 딸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다 큰 애가 초콜릿 하나 먹었다고, 그럴 수가 있나요. 저는 평생 동안 미혜를 위해 희생했어요. 미혜가 잘 되기를 바랐죠. 아빠 없는 아이, 기죽이지 말라고 잘 먹이고 잘 입히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요.” 
 
나는 그녀의 말에 부분적으로 동의했다. 그러나, 나는 멈출 수 없었다. 한 걸음 더 들어가고 싶었다. 그녀가 튕겨나가지 않도록 신중해야 했다. 
 
“저 역시도 다 큰 딸이 초콜릿 하나로 집을 나갔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이 있거든요.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빙산은 전체 크기의 10분의 1 밖에 되지 않아요. 나머지 10분의 9는 바다 아래 잠겨 있거든요. 
 
딸이 집을 나간 이유가 표면적으로는 초콜릿처럼 보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근원적인 이유가 있을지 몰라요. 
 
제가 집중하고 싶은 부분은 딸과 엄마의 관계에요.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문제가, 초콜릿이라는 매개체로 촉발된 거죠. 보이지 않는 부분을 설명해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그제서야, 그녀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빠른 속도로 말을 이어갔다. 
 
“아, 그렇군요. 그 말을 들으니까, 생각나는 게 있어요. 미혜가 술에 취해 들어온 날, 제게 한 말이 있어요. 그 말이 미혜의 진심일지도 몰라요. 자기가 원하는 인생이 아니라, 엄마가 원하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딸을 엄격하게 키웠거든요. 대학 들어가기 전까지, 쉴 틈 없이 몰아붙였어요. 그 덕분에 좋은 대학에 갔잖아요. 졸업하자마자 취직도 바로 되고요. 머리는 좋은 아이였어요. 그러니까, 그만큼 투자를 했겠죠.” 
 
나는 또다시 질문했다. 
 
“만약에 제가 딸을 찾아가서, ‘당신의 어머니는 어떤 사람인가요?”라고 묻는다면, 딸이 뭐라고 대답할까요?”
 
물론, 실제로 그녀의 딸을 찾아갈 생각은 없었다. 그녀와 딸의 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글쎄요. 어려운 질문이네요. 딸이 어떻게 대답할까요.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천천히 대답할게요.”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고 힘겹게 말했다. 
 
“아마도, ‘엄마는 이기적인 사람이에요.’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미혜는 아마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울기 시작했다. 
 
눈물을 흘릴 것이라 미리 예상했는지, 그녀는 가방에서 새것처럼 보이는 손수건을 꺼냈다. 어쩌면, 그녀는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손수건을 쓸 일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의 손수건은 그녀의 비장한 의지를 보여주는 단서다. 마음속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진실을 꺼내고자 하는 그녀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만약 딸이 ‘엄마는 이기적인 사람이에요.’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실 수 있나요?” 
 
“아니요. 딸에게 진지하게 단 한 번 만이라도 제대로 말하고 싶어요. 오해라고. 그거 정말 오해라고. 엄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요. 사실 딸에게 아직 말해주지 못한 비밀이 있어요. 마음속 깊은 곳에 담아둔 비밀이 있는데,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잠시 동안 대화를 멈추었다. 그녀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흐느껴  울었다. 수문이 열리듯, 그녀는 십수년 동안 간직했던 눈물을 방출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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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정말 미안해. 잠깐 실수한 거야. 다시는 안 그럴게. 한 번 만 용서해줘.”
 
문영린의 남편은 거실 한가운데서, 무릎을 꿇고 빌었다. 일주일 전, 바다낚시를 간다며 집을 나간 남편은 다른 여자와 함께 있었다. 문영린의 고등학교 동창이 우연히 두 사람을 목격하고 사진을 찍어 보내주었다. 
 
문영린은 남편의 진심을 느낄 수 없었다. 벌써 세 번째였다. 세 번 무릎을 꿇는 동안, 남편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그녀는 남편과 이혼했다. 더 이상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혜가 여섯 살 때였다. 아빠가 눈앞에서 사라진 그날부터 미혜는 아빠를 찾았다. 아내에게는 무뚝뚝하고 이기적인 남편이었어도, 딸에게만큼은 다정다감한 아버지였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이라고 여러 번 말했던 남편이었다.  
 
문영린은 남편과 이혼한 이유를 딸에게 말할 수 없었다. 미혜가 어릴 때, 아빠가 외국으로 돈을 벌러 나갔다고 했다. 미혜는 착각했을 것이다. 미혜가 누리는 삶이 아버지가 벌어다 준 돈 때문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오백 원짜리 동전 하나 보태지 않았다. 
 
미혜가 고등학생 때, 엄마에게 진지하게 아빠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더 이상 궁색한 변명이 통하지 않을 것을 문영린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미혜는 진실을 원한 것이다. 그러나, 문영린은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딸에게 아버지가 좋은 기억으로 남기를 바랐다. 
 
미혜는 궁금했을 것이다. 외국으로 돈을 벌러 나간 아빠가 왜 전화 한 통 없는지. 미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그녀의 아버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남편의 가족들은 집안 어른들 보기 부끄럽다며, 조용히 가족장을 치렀다. 모든 장례 절차가 끝나고 나서야, 시누이에게 전화 한 통 받은 것이 전부였다.
 
문영린은 알 수 없었다. 미혜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차라리 진실을 말하는 것이 낫다고 여러 번 생각했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물러섰다. 미혜의 높은 성적이 곤두박질칠까 두려웠다. 입시가 끝나면 모든 것을 말해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에둘러 말하며 진실의 순간을 외면했다. 
 
미혜가 대학에 입학하고,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와 아빠에 대해 물었을 때도 문영린은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이제 문영린 스스로도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막연한 두려움이 그녀를 엄습했다. 
 
제대한 남자 친구와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고 미혜가 말했을 때, 문영린은 단 번에 딱 잘라 말했다. 
 
“그딴 생각 하지도 마. 너는 엄마처럼 살면 안 돼. 연애만 해. 결혼 따위는 생각하지도 말고.” 
 
미혜는 처마 아래 매달린 고드름처럼 서서히 얼어붙었다. 바람이라도 불면, 부러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아차, 했던 문영린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아직 결혼하기에는 너무 어리잖아. 지훈이도 제대한 지 얼마 안 됐고.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해보자.” 
 
문영린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주워 담으려 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그녀가 내뱉은 말은 바람에 날린 민들레 씨앗처럼 홀홀 날아가 미혜의 황량한 가슴에 내려앉아 뿌리를 내렸다. 
 
미혜의 시선에서 문영린은 이기적일 것이다.  미혜는 아버지가 보고 싶다. 그러나, 아버지를 볼 수 없다. 아버지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조차 미혜는 알지 못한다. 문영린은 그만큼 철저하게 비밀을 지켜냈다. 
 
결혼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두 사람 사이에 등장했을 때, 문영린은 서툴렀다. 성급하게 내뱉은 말 하나로, 미혜의 판단이 뒤집혔다. ‘엄마가 날 위해 희생했다’ 가 아니라, ‘내가 엄마를 위해 희생한 것’으로. 명백한 오해였지만, 미혜의 세상에서는 진실처럼 받아들여졌다.  
 
그 사건이 있었던 바로 다음 날, 문영린은 미혜의 문자를 받았다.
 
“엄마, 아침에 내 초콜릿 먹었어? 그거 내가 얼마나 아끼는 건데, 엄마가 먹어? 그거 왜 먹었어? 그게 엄마 거야? 내 거야. 엄마 눈에 보이면, 그게 다 엄마 거야? 다 엄마 거냐고!”
 
차곡차곡 쌓아올려진 폭발물에 불꽃이 튀어버린 것이다. 작은 불꽃이라도 충분했다. 도화선에 불을 붙일 수만 있다면, 온 세상을 날려 버릴 것이다. 모녀 관계조차도. 
 
문영린의 세상에서는 초콜릿이 보인다. 미혜의 세상에서는 한 번도 발을 들인 적 없는, 어두침침한 탄약고가 보인다. 같은 사건이 두 사람에게 서로 다르게 보인다. 문영린이 아는 만큼, 미혜도 알아야 한다. 두 사람의 시선에 겹치는 지점에  공감이라는 해독제가 놓여있다. 
 
아직 늦지 않았다. 문영린에게 기회가 있다.  지금이라도 달려가 도화선을 따라 거세게 타들어가는 불씨를 발로 짓밟아 꺼야 한다. 어두침침한 탄약고에서 울고 있는 딸을 꺼내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문영린 뿐이다. 
 
김지훈의 오피스텔은 미혜의 안식처가 아니다. 도피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미혜가 안식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 잠시라도 쉴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어쩌면, 미혜는 돌아올 명분이 필요할지 모른다.    
 

 
“미혜하고 영화를 봤어요.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했고요. 지훈이와 지내는 게 불편한 가봐요. 다음 주에 집에 들어갈 테니, 자기 방 좀 치워놓으라고 하더라고요. 
 
피식 웃으면서 ’엄마가 무슨 청소부니?’라고 말을 하는데, 고마워서 눈물이 났어요. 
 
미혜도 말없이 따라 울더라고요. 그날은 서로 그렇게 울기만 했어요. 딸이 다시 돌아오면, 거실에서 두런두런 못다 한 이야기해야죠. 딸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제자리에서 서서 그녀의 뒷모습에서 바라봤다. 세월의 거센 흔적이 깃든 흰머리조차도 내게는 찬란한 광채로 느껴졌다. 상담실을 나서는 그녀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그녀에게 상담실은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도피처였던 것이다. 안식처는 그녀의 집이다. 딸과 함께 머무는 그녀의 가정인 것이다. 언젠가 딸이 엄마를 떠날 때, 그녀는 행복한 미소로 보내줄 것이다. 그녀의 뒷모습이 그렇게 말했다.

용서 못해도 괜찮아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지금까지 잃어버렸던 제 자신을 되찾을 거예요.”
 
H는 5살 아들을 둔 엄마이다. 그녀는 결혼 생활 7년을 뒤로 하고 이혼했다. 결혼하고 3년 후부터 남편은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렸고, 결국 이혼했다. 
 
아들 어린이집 재롱잔치가 있던 날, 남편의 외도를 처음 알았다. 그는 일이 많아 토요일에 출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내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달 전 부터 미리 알려준 일정이었다. 그날 남편이 오지 않으면 아들이 서운할 게 뻔했다. 아내는 일단 왔다가 얼굴이라도 보이고 가라고 부탁했다. 남편은 짧게 알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지 않았다. 
 
저녁 늦게 퇴근해서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말로 넘어가려고 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불안감을 이겨낼 수 없었다. 남편이 잠든 사이에 그의 휴대폰을 확인했다. 비밀번호가 걸려있었다. 그날 밤, 아내는 한숨도 못 잤다. 긴 한숨이 베개를 타고 침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전화가 걸려오면 남편은 밖으로 나갔다. 안에서 받으라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남편이 화장실에 갔을 때 전화가 걸려왔다. 거래처 이름이 떴다. 퇴근, 주말 구분 없이 자주 걸려 오는 전화라 의심스러웠다. 아내는 긴장한 채로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지금 나올 수 있어?” 
 
아내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어서 서둘러 종료버튼을 눌렀다. 화장실에서 나온 남편이 말했다. 
 
“뭐야? 당신, 내 전화 받았어?” 
 
아내는 일어나 남편의 뺨을 후려쳤다. 그리고 자신이 뺨을 맞은 듯, 그녀는 그의 발 앞에 맥없이 쓰러졌다. 남편은 아내에게 용서를 구했다. 실수라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가 아무리 용서를 구해도 아내는 용서하지 않았다.
 
남편은 죽은 듯이 아내 옆을 지켰다. 아내의 눈치를 보면서 평소에 하지 않는 집안일과 육아를 도왔다. 먼저 안부를 묻지 않았던 친정 엄마에게도 주말마다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남편의 위선이 싫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목사님이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설교를 했다. 양심에 가책이 들었다.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반성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날 저녁, 감정은 따라주지 않았지만 의지를 발휘해서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나 당신을 용서하려고. 다시는 내게 상처주지 말아줘. 다 잊을게.” 
 
“아니야, 여보, 내가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아내가 예상한 답변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아니. 나 이제 너랑 안 살려고. 더 이상 못살겠어. 내가 왜 다른 사람을 만났는지 생각해봤어? 나만 잘못한 것 같아? 우리  사이가 안 좋잖아. 대화도 안 되고. 전부 내 잘못이라고 하면 난 억울한데? 나 집 나가려고 원룸 알아봤어. 주말에 와서 애랑 놀아줄게. 평일에는 거기서 살 거야. 나 없다고 생각해. 이혼은 안 하지만 너랑은 살고 싶지 않으니까.” 
 
아내가 말했다. 
 
“그 말을 하지 말 걸 그랬어요. 제가 용서하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올 줄 알았거든요. 사실 저는 남편을 용서한 것도 아니었어요. 용서에는 의지가 필요하다고 들었어요. 의지를 가지고 용서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라고. 저는 그렇게 믿었어요. 하지만 그의 반응은 제 예상과 전혀 달랐죠. 
 
그가 밖에 나가 혼자 산다고 했을 때, 그러라고 동의한 건 솔직한 제 심정이었죠. 저도 남편하고 살고 싶지 않았거든요. 밖에 나가서 제멋대로 하고 살라고. 나도 너 필요 없다고. 너무 괘씸했어요. 차라리 안 보니까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평일에는 아이와 단 둘이, 주말에는 남편과 같이 시간을 보냈다. 주말에 남편을 만나도 말 한 마디하지 않았다. 부부 관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주말에 아이와 있는 남편을 보면 그 여자와 완전히 끝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실 남편 모르게 젊은 여자를 만나서 말했다. 그녀는 울면서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다시는 남편을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허무하게 대화가 끝났다. 그녀의 마음은 조용히 무너졌다. 
 
주말에 아이와 아파트 단지 앞에 자전거를 타러 나간 남편이 전화기를 두고 나갔다. 문자 알림이 울렸다. 일부러 본 것이 아니었다. 메신저 알림에 한두 줄 문장과 함께 그녀의 프로필 사진이 떴다. 그걸로 끝이었다. 남편의 전화기를 건드리지 않았다. 문자 내용 역시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알게 되었다. 남편은 그 젊은 여자와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남편이 아이와 집에 들어오자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주말에도 오지 마.” 
 
남편은 무릎을 꿇고 빌었다. 
 
‘이건 뭘까? 남편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누구를 위해 이러는 것일까? 나를 위해 아니면 그 젊은 여자를 위해?’ 
 
머리가 아팠다.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에는 이혼 서류가 보였고, 눈동자로 서류 위에 사인했다. 편안했다. 두 번 다시 남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사인을 하자, 장면이 바뀐다. 천장에 갑자기 남편의 웃는 모습이 그려졌다. 젊은 여자 얼굴도 보였다. 둘이 비웃듯이 자신을 내려 본다. 소름 끼쳤다. 
 
‘이대로 이혼해 줄 수는 없지.’ 
 
아내는 결심했다. 남편에게 복수하고 난 다음에 이혼한다고.  남편에게 짧은 문자를 보냈다. 당장 원룸을 정리하고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남편이 다니는 회사와 젊은 여자가 다니는 대학에 진실을 알리겠다고. 그녀는 단 하루의 시간을 줬다. 
남편은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처음 외도를 들켰던 때처럼 집안일과 육아를 도왔다. 아내는 그런 남편이 정상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네 인생도 비참하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사냐!’ 
 
아내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6개월 동안 남편에게 고통을 줬다. 조용한 복수극이 끝나고, 그녀는 이혼했다. 남편이 없는 지금, 그녀는 10년 동안 잃어버렸던 자신을 되찾았다고 말했다. 
 
“복수극은 끝났어요. 충분하지는 않지만 아쉬움은 없어요. 이제 그 둘이 어떻게 살든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죠. 다 잊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슬프게 들렸다. 
 
“그러니까… 만약, 친구가 이런 일을 겪었고 제가 그 친구를 위로해준다고 하면 무슨 말을 해주고 싶냐고요? 참 어려운 질문인데요. 음… 저라면….”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다 지난 일이라고 쿨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어가던 그녀가 갑자기 오열했다. 좋은 회사에 다니며 많은 연봉을 받는 그녀는 이혼하고 나서 당당하게 살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질문에 답하면서 그녀의 비밀창고가 열렸다. 댐의 수문이 열린 것처럼 쏟아져 내리는 눈물에 주변 모든 것이 떠내려가는 것 같았다. 
 
처음 남편을 만났을 때, 호감을 느끼지 못했다. 무시하고 거절해도 한결같이 자기를 좋아해주는 모습에 끌렸다. 그와 같이 있으면 왠지 모를 우월감이 느껴졌다. 그가 자신을 더 좋아하니까. 남편에게 조금씩 빠져들었다. 
 
결혼하고 많은 것이 변했다. 육아와 일로 정신이 없었다. 쏜살같이 시간이 흘렀다. 부부가 아닌 파트너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의 기능을 하고, 자신은 자신의 기능을 하는 형식적인 관계가 되었다. 서로 대화할 시간이 부족했다. 
 
“저는 가정이 깨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요. 부모님도 사이가 좋지 않았거든요. 어머니가 아버지를 찾아오라고 해서 동생과 어떤 집에 갔던 기억이 나요. 모르는 아줌마가 문을 열어줬고, 아빠가 현관에 나와 용돈을 주면서 나중에 집에 갈 거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말했어요. 
 
저는 그 돈으로 동생이랑 문방구에 들러서 이것저것 사먹었죠. 어려서 상황 판단을 못했어요. 어머니는 이혼하지 않았죠. 아버지와 싸우면서 우리에게 물었어요. 누구와 살 거냐고. 저는 울면서 대답을 못했어요. 엄마를 대답하라고 고함을 쳤고, 저는 더 크게 울었죠. 아버지는 그 모습을 보고 집을 나갔어요. 
 
몇 년이 지나자 아버지가 짐을 싸서 다시 들어왔죠. 그 이후로 며칠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은 적은 있었지만 집을 나가진 않았어요. 둘은 부모 자리만 지키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서로 무언가를 요구하지도 않고, 해주려고 하지도 않았죠. 
 
여름휴가도 자식들 때문에 마지못해 가는 것 같았으니까. 결혼은 유지했지만 부부 관계는 깨진 채로 산 거죠. 어릴 때는 원망을 많이 했는데 다 크고 나니까 고맙더라고요. 어쨌든 가정은 유지했으니까요. 저도 어머니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원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처럼 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이혼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아이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 반복해서 말했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엄마보다 강하다. 남편 없이 아이를 더 잘 키울 수 있다.” 
 
애써 노력했지만, 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부러졌다. 차고 넘치는 슬픔과 분노를 억누르자 댐이 무너지면서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아까 하신 질문에 답할게요. 친구가 저와 같은 일을 겪었다면 이렇게 말할 거예요. ‘지금까지 참 수고 많았어. 잘 견뎌줘서 고마워. 힘들지만 이제 널 되찾았으면 좋겠어. 한 사람의 아내와 엄마로서 이름 없는 존재가 아니라 온전한 네 자신이 되어서 너를 돌봐주기를 바라. 그리고 말이야, 네가 원수를 사랑하면 하나님이 널 사랑하시는 게 아니래. 그러니 용서 못해도 괜찮아. 하나님은 여전히 널 사랑하시니까. 네게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 내가 항상 곁에 있어줄게. 힘내!’” 
 
***
 
그녀는 스스로를 치유하고 있었다. 비밀창고에 물이 빠지고 나서 남은 것은 조그만 상자였다. 그 상자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그녀는 상자 안을 혼자 들여다보고, 안에 든 것에 대해 말했다. 그것은 ‘조건 없는 사랑’이라고. 인간이 만들어낼 수 없는 초월적인 사랑이 그녀에게 필요했나보다. 
 
사랑이 의무가 되면 메마른다. 사랑을 강요하면 짓눌린다. 사랑은 자유다. 처음으로 그녀의 미소를 보았다. 억지웃음이 아니라 입술 끝자락이 내면에 닿아있는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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