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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치유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상처로 아파하는 당신에게

나는 오랜 시간 나 자신을 탓하며 살았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청소년기, 나는 내 인생을 비관하며 자살을 시도했었다.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열정으로 20-30대를 보냈지만, 내 마음속 한구석에는 내가 부정하고 싶은 어두운 감정들이 남아 있었다. 

불안, 두려움, 외로움…. 

벗어나고 싶은 감정이었다. 

하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그 감정들을 외면했고 괜찮은 척 아닌 척 애써 노력했다. 

그러다, 나는 무너졌고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나는 내가 고장 난  줄 알았다. 
고쳐서 쓸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나는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나의 상처는 그대로였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나는 알게 되었다. 

나의 모든 고통은 나의 상처를 외면한 결과였다. 

사람들은 모른다. 

부모와의 안정적인 애착이 결여된 채 정서적 신체적 학대를 받은 아이들이 겪는 고통을… 

“누가 상처 없이 자랐겠냐고, 누구나 저마다의 아픔이 있다고, 그러니 과거는 그만 말하자”라는 사람과는 대화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끔찍한 일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다. 

끔찍한 일을 겪은 사람은, 그 기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장면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를 기억하는 것이다. 

현재의 삶이 아무리 행복하고 만족스럽다고 할지라도, 근거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 내면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린다. 

나의 불안, 나의 두려움, 나의 외로움이 나의 믿음 없음으로 인한 감정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자책했다.  

나와 같은 아픔으로 고통받는 당신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들려주고 싶다. 

누가복음 5:31-3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당신과 나를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 

종교의 관점에서는, 말끔한 척 성숙한 척하는 사람들이 주목받는다. 

아프고 병들고 가난하고 죄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비난받는다. 

예수님 당시가 그랬다. 

복음의 관점에서는, 안 아픈 척, 죄 없는척 하는 사람들이 외면당한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아프고 병들고 가난하고 죄에 허덕이는 사람들이야말로 예수님이 필요하다. 

상처로 아파하는 당신을 위로하고 싶다. 

어린 시절, 당신 겪은 끔찍한 일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치유하기 원하신다.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가자. 

예수님은 당신을 치유하고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복음이 당신을 치유합니다

온갖 상담 이론은
과정을 탐구합니다.
 
결론은 저마다 다릅니다.
궁극의 해답은 없습니다.
 
너도 옳고 나도 옳고
자기한테 맞는 거 갖다 쓰면 된다.
 
상담 이론의 홍수 시대입니다.
물이 많아도 마실 물이 없지요.
 
말씀을 다루는 사람은
답을 알고 있습니다.
 
답을 아니까
과정에서 게을러집니다.
 
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냐.
 
풀이 과정을 아는 사람에게는
답이 필요합니다.
 
풀이 과정 한바닥 쓰고
답이 400개가 넘으면 곤란하지요.
 
답을 아는 사람에게는
풀이 과정이 필요합니다.
 
문제가 한바닥인데 풀이 과정 한 줄 없이
답은 3번이다.
 
왜 답이 3번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답은 맞았는데 이상하게 자신이 없습니다.
 
나 우울해요.
나 불안해요.
 
약 드세요.
좋게 생각하세요.
시간 지나면 괜찮아요.
 
나 우울해요.
나 불안해요.
 
기도하세요?
말씀보세요?
그러니까 그렇죠.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나는 답답합니다.
 
너는 뭐 특별하냐.
아니요.
 
내가 특별하진 않습니다.
복음이 특별합니다.
 
너무 익숙해서 지루해진 복음을
새로운 언어로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여전히 실험 중입니다.
바로 나 자신에게.
 
복음은 과연
나를 치유하는가.
 
나는 오랜 시간 다양한 상담 이론을
내 삶에 적용했습니다.
 
다양한 이론을 내 삶에 적용하면서
나는 깨달았습니다.
 
복음이야말로 세상 모든 이론보다
뛰어난 처방전이란 사실을.
 
혼자만 알고 있을 수 없지요.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이 당신을 치유합니다.
복음이 궁극의 해답입니다.
 
아, 편협하다.
아, 배타적이다.
 
이 말을 하는 사람은
둘 중 하나겠지요.
 
복음을 알지 못하거나
복음에 관심이 없거나.
 
당신의 비판을
나는 반박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심리학자입니다.
 
오직 말씀이지.
무슨 상담 이론이냐.
 
당신의 비판을
나는 반박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신학자입니다.
 
상담하는 목사.
내게 어울리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복음의 사람이고 싶습니다.
내 삶을 마치는 그날까지.
 
당신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복음만이 당신을 치유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 바라본다는 말

예수님만 바라보는 삶,
적지 않은 사람이 오해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자고 하면
예수님 보려고 노력합니다.
 
예수님 모습을 떠올리려고
애를 씁니다.
 
커다란 스크린에
예수님이 고난받으시는
장면이라도 틀어주면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릅니다.
 
혼자 기도할 때
예수님 이미지가 떠오르면
감격이 밀려옵니다.
 
시간이 갈수록 예수님 이미지는
더 나은 이미지로 교체됩니다.
 
어릴 때 봤던 예수님 얼굴보다
지금 예수님 얼굴이 더 낫습니다.
 
아쉽게도 예수님 얼굴을
실제로 본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자.
예수님을 보자.
 
두 문장이 같다고 생각해서
발생한 오해입니다.
 
두 문장은
같은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 이미지를
떠올리려 할수록
우리는 약해집니다.
 
예수님 이미지가
효력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이미지는
상상으로 지어낸
허구에 불과합니다.
 
유명 영화배우의 얼굴이나
어느 화가의 작품이겠지요.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건
예수님 얼굴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예수님 말씀을 바라보는 겁니다.
 
눈보다는
귀를 사용해야 합니다.
 
귀보다는
마음을 사용해야 합니다.
 
예수님 얼굴을 떠올리지 말고
예수님 말씀을 떠올리십시오.
 
예수님에 대한 말씀.
예수님이 하신 말씀.
 
성경 전부를 뜻합니다.
모든 구절을 뜻합니다.
 
치유하는 능력은
예수님 얼굴이 아니라
예수님 말씀에서 나타납니다.

왜 나를 거절하세요?

From 거라사의 광인 
 
당신도 나를 알지요? 성경에서 내가 꽤나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당신이 알듯이, 나는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사람입니다. 
 
나는 수많은 귀신들에게 시달리며, 나 자신을 학대했습니다. 온몸을 찢으며, 귀신이 떠나가기를 바랐지만, 귀신들은 나를 조롱하고 지배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치유됐습니다. 귀신이 완전히 떠나가고, 내 정신과 감정이 멀쩡해진 것이지요. 안타깝게도,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내 앞에 서 계신 예수님뿐이었지요.  
 
정신을 차린 나는, 혼자 남겨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언제라도 귀신들이 다시 찾아와 나를 지배할 수도 있으니까요. 나는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사정하듯 말했습니다. 
 
“예수님, 저도 예수님을 따라가고 싶습니다. 혼자 남겨지는 것이 무섭습니다.” 
 
나는 내심 기대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수 있게 해주신다면, 나는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저 열두 사람처럼, 내 인생 전부를 바쳐 예수님을 도와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저를 집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나를 미워하고, 거절하고, 조롱했던 마을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라고 한 것이죠. 예수님은 하루도 머물지 않고, 곧바로 내 곁을 떠나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웠지만,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집으로 돌아가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을 말했습니다. 
 
온 도시의 사람들이 나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나를 비웃고 조롱할 여유조차 없었지요.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광야를 헤매던 미친 사람이었으니까요. 
 
혼자 있을 때, 나는 가끔 생각에 잠겼습니다. 
 
‘예수님은 왜 나를 거절하셨을까? 왜 나를 혼자 남겨두셨을까? 나는 아직도 무서운데….’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떠올랐습니다. 
 
‘내 과거가 문제가 된 게 아닐까?’
 
나는 더 이상 귀신들린 사람이 아니지만, 얼굴과 몸의 흉터를 지울 수 없었습니다. 내 얼굴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겁니다. 여기저기 찢어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으니까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나를 비교하게 되더군요. 
 
‘그들에게는 뭔가 특별한 게 있을 거야.’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의문을 해소할 길이 없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내 자리를 묵묵히 지켰습니다. 
 
그렇게 2-3년이 흘렀을 때, 예루살렘에서 슬픈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요. 나는 땅바닥에 쓰러져 엉엉 울었습니다. 
 
나는 당장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온갖 수소문 끝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곧 다시 오실 거라며 기뻐했습니다. 
 
나는 제자들과 함께 머물면서, 마음속 깊은 고민을 꺼내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왜 나를 거절하셨을까? 나의 과거 때문에? 내가 준비되지 않아서?’ 
 
내가 깊은 한숨을 내쉴 때, 베드로라는 제자가 말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딱 3년을 함께 했습니다. 상대적으로 3년이 길게 느껴지실 수도 있지만, 제 입장에서는 눈 깜짝할 사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잠시 잠깐 우리 곁에 계시다가, 홀연히 떠나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떠나보내실 때, 당신에게 남기셨던 그 말씀을 우리에게도 똑같이 남기셨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그리고 땅 끝까지 가서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사도행전 1:8
 
우리에게 당신보다 거창한 말씀을 하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집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당신이 살았던 도시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난 곳 방언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곳으로, 우리가 필요한 곳으로 사방팔방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당신과 우리는 같은 사명을 받았습니다. 온 도시와 마을로 흩어져,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보다 당신을 먼저 파송하신 것이지요. 시기의 차이일 뿐, 조건의 차이는 아닙니다.   
 
참, 당신은 모르시지요? 당신을 만나러 가다가  우리가 모두 바다에 빠져 죽을 뻔했습니다. 우리 목숨을 담보로 어디를 가시나 했더니, 당신을 찾아가시더군요. 
 
당시에는 예수님의 깊은 뜻을 몰라, 화가 났습니다. 나도 모르게 속으로 말했지요. 
 
‘고작 이런 미친 사람 하나를 구하려고, 우리 모두의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
 
미안합니다. 너무 솔직했나요? 예수님은 당신 한 사람을 만나시려고, 그 먼 길을 가신 겁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아시겠지요? 당신의 얼굴의 난 흉터, 당신의 모든 과거, 예수님은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자격을 갖춰서 부름을 받은 사람은 여기 아무도 없습니다. 당신과 나, 우리 모두는 자격 미달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세상 모두가 짐승처럼 여기던 나였습니다. 내가 뭐라고 예수님이 그 멀리서 목숨을 걸고, 나를 찾아와 주신 걸까요?
 
나는 예수님을 오해했습니다. 내 과거, 내 흉터. 예수님께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자격 없는 나를, 예수님은 조건 없이 사랑해 주셨습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것을 압니다. 당신이 깊은 절망 속에서 울고 있을 때, 예수님이 찾아와주셨지요? 당신도 나처럼 혼자 남겨지기 싫었지요? 
 
당신 마음, 나도 조금은 압니다. 혼자 남겨진 당신은, 예수님에게 거절당한 사람처럼, 외로우실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나처럼 예수님을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멀어진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은 감정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떠난 적이 없으십니다. 
 
나를 위해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다를 건너셨듯이,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혼자라고 외롭다고 울지 마세요.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과 함께하십니다. 

예수님께 데려다줄게요

From 목격자 (중풍병자의 친구)
 
나의 소중한 친구 세르오는 앞날이 창창한 20대에, 뇌혈관이 터져 온몸이 굳어버렸습니다. 밭에 쓰려져 숨만 쉬고 있던 세르오를, 마을 사람들이 발견해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요. 
 
세르오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내가 세르오를 찾아갈 때마다, 차라리 자기를 죽여달라고 울부짖었지요. 나는 그를 사랑했지만,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을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나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병을 고치고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그분에게, 내 친구 세르오를 데려다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장에 세르오에게 달려갔지요. 
 
“세르오! 우리 마을에 예수님이 오신대! 이제 너도 걸을 수 있어. 내가 너를, 예수님에게로 데려다줄게.” 
 
세르오는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눈물을 쏟아냈지요. 나는 세르오를 부둥껴 안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부디, 내 친구 세르오를 고쳐주시라고요. 
 
나는 다른 친구 셋을 불러, 세르오를 들것에 실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장소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고개를 떨구고 말았습니다. 네 사람이 들것을 들고 발을 맞춰 걸으려니, 다른 사람들처럼 빨리 걸을 수가 없더군요. 
 
우리는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구름 떼처럼 많은 사람들이 겹겹이 쌓여있었습니다. 군중 밖으로 떠밀려, 예수님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지요. 
 
세르오가 말했습니다. 
 
“괜찮네, 친구들. 자네들이 나를 위해 여기까지 와준 것만으로 고맙다네.” 
 
나는 세르오의 손을 꼭 잡고 말했습니다.
 
“세르오, 절대로 포기하지 말게. 나는 자네를 꼭 살려야겠네. 자네를 예수님에게로 데려다주겠어.” 
 
 나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세르오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밖에는 없었습니다. 나와 친구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었습니다. 
 
지붕 위에 구멍이 생기자, 예수님 발 앞에 흙이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집 안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얼마나 걱정이 되던지요. 
 
내가 먼저 고개를 내밀어 안쪽의 상황을 살폈습니다. 그때,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예수님은 따뜻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시며, 말없이 고개를 끄떡이셨습니다. 
 
나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수평을 맞추어 조심히 세르오를 내려보냈습니다. 지붕에서 세르오를 내리는 동안, 예수님은 단 한순간도 시선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세르오가 바닥에 내려진 순간, 예수님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네 죄가 용서되었다. 침상을 들고 일어나렴. 이제 너는 걸을 수 있단다.” 
 
세르오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일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순간이었습니다! 세르오의 굳은 몸이 풀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지붕에서 떨어질 뻔했습니다. 나와 친구들은 너무나 감격해서, 서로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르오를 안아주시며, 등을 두드려 주셨습니다. 
 
세르오의 어깨너머로 예수님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올려다보시며, 인자하게 웃으셨습니다. 이제 세르오는 건강하고 밝은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내게 말하더군요. 세르오가 나은 건, 모두 내 덕분이라고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어색하게 웃을 뿐입니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세르오를 예수님에게 데려다준 것뿐이에요.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세르오는 여전히 절망 속에 있었겠지요.  
 
훗날, 예수님이 우리의 믿음을 언급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와 친구들의 믿음 때문에, 세르오를 고쳐주셨다고요. 자칫 잘못하면, 나와 친구들의 믿음으로 세르오가 나았다고 오해하실 것 같아요. 
 
예수님은 네 사람의 믿음이 아니라, 다섯 사람의 믿음을 보신 겁니다. 세르오 역시 간절히 치유되기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믿음을 보신 거예요. 예수님은 우리의 작은 믿음을 기뻐하시며, 세르오를 고쳐주셨습니다. 
 
사람들은 계속 말을 만들지요. 부정적인 소식은 빨리도 퍼집니다. 들것을 함께 들어준 친구가 어느 날, 내게 속상한 말을 전하더군요. 
 
“이봐, 자네도 들었나? 마을에서 이상한 말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네. 예수님이 세르오에게 “네 죄가 용서되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그 말을 오해한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야. 세르오가 중풍병에 걸린 게, 세르오의 죄 때문이라고…. 이런 터무니없는 말이 어디 있나? 세르오가 그 말을 듣게 되면, 얼마나 상처를 받겠나.”
 
나는 친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해서 실수한 것이라도, 제아무리 상처를 줄 의도가 없다고 하더라도, 세르오가 들으면 마음이 아플 것이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르오의 죄를 지적하신 게 아닙니다. 죄 때문에 세르오가 병든 게 절대로 아닙니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아픈 것도 전부 네 잘못이다”라고 말하다니요.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끔찍한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한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세르오의 질병을 치유하신 것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치유해 주신 겁니다. 참된 자유를 선포하신 것이지요. 예수님은 치유와 용서의 예수님이십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돌보며, 함께 기도하는 당신을 위로하고 싶습니다. 나와 당신은 무능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상처 입은 한 사람을 예수님에게 데려다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나는 못한다고, 나는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다고, 절망하지 마세요. 
 
우리는 못해도, 예수님은 하십니다. 예수님이 반드시 치유하십니다. 당신과 나는 치유자가 아니라, 목격자입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상처 입은 한 사람을 예수님에게로 데려다주세요. 
 
내 이름은 남기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머문 자리, 우리의 이름 대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남겨지기를 소망합니다.

내 목소리 기억나?

“내 목소리 기억나?” 
 
문득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번호였고, 낯선 목소리였다. 
 
“잘 모르겠어요. 누구시죠?” 
 
애써 친절하게 말했다. 혹시라도, 실수할까 걱정스러웠다. 아는 사람의 전화번호를 저장하지 않고 있다가 서운하게 한 일이 종종 있었다. 
 
“나 기억 못 하나 보네. 나 민혁이야. 정민혁.” 
 
그의 이름을 들었을 때, 내 시간은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비디오테이프를 거꾸로 감듯이, 온 세상이 삐리릭 거리며 빠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의 목소리가 나를 십 년 전 어느 날로 잡아당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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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사람이 죽는 걸 직접 본 적 있어? 난 본 적 있거든. 정말 무섭더라. 
 
내 눈앞에서, 아빠가 농약을 먹고 자살을 했어. 며칠 전부터 이상하더라고. 갑자기 나한테 통장이랑 도장을 주면서 비밀번호를 알려줬어. 뭔가를 결심한 눈빛이었고.
 
일요일 아침이었는데, 마당에서 우당탕 소리가 났어. 깜짝 놀라 뛰어나갔지. 문을 열고 보니까, 아빠가 입에 거품을 물고 비틀거리고 있더라고. 
 
아빠와 눈이 마주쳤는데, 아빠의 눈빛을 아직도 못 잊겠어. 아빠가 바닥에 쓰러졌는데, 눈을 감지 않았어. 차갑게 천천히 식어갔지. 그때 나는 얼어붙어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어. 눈물조차 나지 않더라고. 
 
한참 동안 멍하게 서 있다가, 아빠에게 천천히 다가갔어. 내 손으로 아빠의 얼굴을 쓸어내렸어. 아빠의 눈을 감겨주려고. 시뻘겋게 충혈된 아빠의 눈이 무섭기도 했고, 마지막까지 날 바라보던 아빠의 눈이 슬프기도 했고. 아빠의 눈을 감겨주는데, 눈물이 울컥 나더라고.” 
 
통장의 돈은 백만 원 남짓이었다. 중학생 용돈으로는 큰돈이었을지 몰라도, 소년 가장의 생활비로는 물 한 방울처럼 적은 돈이었다. 석 달 만에 통장의 모든 돈이 사라졌다. 
 
시골 마을, 인심은 좋았다. 민혁이가 불쌍하다며, 마을 어른들이 먹을 것을 가져다줬다. 그러나, 그 또한 잠시뿐이었다. 마을 어른들은 민혁이를 오롯이 돌볼 수 없었다. 마을 이장님은 기관을 알아봐 주었다. 
 
마땅한 기관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 옆 마을에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소식이 이장님 귀에 전해졌다. 이장님은 한 마디 예고도 없이, 옆 마을 어른과 민혁이를 찾아왔다. 민혁이는 대충 짐을 싸서, 그 아저씨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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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아, 이번에 조사 나오면, 보일러가 고장 나서 네 집에서 살 수 없다고 말해. 그러면, 보상금 나오거든.”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민혁이는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날 밤, 아저씨 가족은 차를 몰고 시내로 나가 자기들끼리 외식을 했다. 
 
민혁이는 창고처럼 간단히 꾸며진 공간에 우두커니 혼자 남겨졌다. 차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민혁이는 밖으로 나가 인사를 했다. 
 
차 문이 열리자, 숯불에 구워진 고기 냄새가 민혁의 콧구멍을 찔렀다. 차에서 흘러나온 진한 고기 냄새는 매정했다. 민혁의 몸에 밴 라면 냄새를 한 꺼번에 몰아냈다. 
 
자기 이름으로 들어오는 지원금을 아저씨가 가로채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민혁이는 그 집을 나왔다. 석 달 만이었다.
 
갈 곳이 없어진 민혁이는 여기저기 전전했다. 그러다, 시내의 작은 교회 목사님을 만났다. 아주 잠시 동안이라도 머물 곳을 찾은 것이다. 
 
학교에서 만나는 민혁이는 항상 밝았다. 책을 좋아했고, 글을 잘 썼다. 창의적인 방법으로 친구들을 웃겼다. “훈민정음 2”라는 민혁이의 노트가 교실 안을 돌아다녔다. 민혁이는 한글을 조합해서 새로운 글자를 만들었다. 친구들은 그 문자를 발음하기 위해서 애를 썼다. 아무도 “훈민정음 2”에 기록된 문자를 제대로 발음할 수 없었다. 민혁이는 새로운 문자의 창시자였다.  
 
나는 그런 민혁이가 신기해 보였다. 운동장 귀퉁이에 앉아 과자를 까먹으면서 “나중에 뭐가 되고 싶냐?”라고 넌지시 물었다.   
 
민혁이는 돈을 많이 벌어서, 한국에서 제일 큰 서점을 열고 싶다고 했다. 4층으로 지어서, 층마다 다르게 꾸미고, 마치 다른 나라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싶다고 했다. 시골 마을을 벗어나 본 적 없는 민혁이는 세계를 동경하는 듯했다. 나는 꿈마저도 창의적인 민혁이가 부러웠다.  
 
그 후 추운 겨울이 찾아왔고, 우리는 중학교를 졸업했다. 민혁이는 일을 하면서,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산업체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날 이후, 민혁이와의 소식은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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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 그럼 목사 되는 거야?”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민혁이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나를 현재의 시간으로 돌려놓았다.
 
“어쩌다 그렇게 됐네.” 나는 피식 웃었다. 
 
민혁이의 기억이 그 당시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면, 기가 막힐 노릇이었을 것이다. 민혁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내가 겪은 일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사용하는 종교의 언어는 어쩌면 그에게 “훈민정음 2”처럼 낯설게 들렸을지 모른다. 
 
민혁이는 결국 통화하게 된 목적을 말했다. 
 
“야, 사실 내가 조금 이상한 것 같아.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른 것 같거든. 오래전부터 네가 생각나더라. 너를 만나면 왠지 대답을 해줄 것 같아서. 우리 시간 내서 잠시 볼 수 있을까?”
 
물론이었다. 나 역시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민혁이를 보고 싶었다. 민혁이는 자신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고, 나는 바로 그다음 날, 민혁이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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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이가 있던 곳은 도봉산역 근처 구석진 판자촌이었다. 주유소에서 밤낮으로 일하고, 집에 들어가 잠시 눈을 붙이는 삶을 반복하고 있었다. 
 
집이라고 해봐야,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신발을 벗으면 곧바로 방이었는데, 한 사람이 누우면 머리끝과 발끝이 벽에 닿을 지경이었다. 한 사람이 누워서 양쪽으로 팔을 벌릴 수 없을 만큼 폭이 좁았다. 
 
좁은 방에 들어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민혁이가 담배를 꺼내 깊이 한 모금을 들이마셨다. 가슴속에 간직한 비밀을 연기로 건져올리듯, 그는 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토끼 가면이 잊혀지지 않아. 그날 밤 끔찍한 일이 있었거든. 그 사건 이후로, 뭔가 잘못된 것 같아.”
 

 
“아빠가 내 앞에서 농약을 먹고 눈앞에서 죽은 이후로 내가 지낼 곳이 없었어. 사기꾼 같은 놈한테 이용당하다, 시내에 어떤 교회 목사님을 만났지. 
 
목사님이 친절하시더라고. 교회 구석진 곳에 작은 공간이 있었는데, 나보고 거기서 먹고 자고 하라고 했어. 내가 갈 데가 어디 있었겠어. 이래저래 고맙더라고.   
 
일주일이 지났나. 밤에 자고 있는데,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교회에 기도하러 왔나 보다 생각했지. 뒤돌아 누워 자려고 하는데, 방문이 열리는 거야.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어. 
 
덩치 큰 남자가 토끼 가면을 쓰고 있었어. 그 남자가 날 덮치고 강간했어. 지금이라면, 볼펜이라도 들어서 그 사람 목이라도 찔렀을 텐데, 그때는 너무 무섭기만 했어. 뒤돌아 울면서, 끔찍한 시간이 끝나기만 바랐지. 
 
다음 날 아침, 바로 그곳을 나왔어. 그대로 있다가는 똑같은 일을 당할 것 같아서.
 
그런데, 문제가 뭔지 알아? 밤마다 토끼 가면이 떠오른다는 거야. 밤이 되면, 생각나. 불을 끄고 잘 수가 없어. 저기 저 문이 갑자기 열릴 것 같거든. 밤이 되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발자국 소리도 무서워.”
 
내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떨어졌다. 눈물을 숨기려 눈을 비볐다. 민혁이는 방 안에 가득 찬 담배 연기 때문인 줄 알고,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작은 창문조차 달려 있지 않는 방이었다. 손으로 휘휘 저어 연기를 내보내면서, 민혁이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나한테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남자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거야. 지금까지 세 번 정도 여자를 사귀어 봤거든. 당연히, 같이 자 본 적도 있지. 생각보다 별로였어.” 
 
민혁이는 양쪽 팔소매를 어깨까지 걷어올렸다. 그리고, 뒤돌아서서 상의를 벗어서 등짝을 드러냈다.      
 
팔부터 시작된 문신은 어깨를 타고 등판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날카롭게 발톱을 드러낸 용이, 화가 난 듯 코에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여자에게 감정을 못 느끼니까, 엄청나게 불안한 거야. 야, 이거 뭐가 잘못됐다. 그래서, 몸에 그림을 좀 그렸어. 나 남자다, 뭐 이런 거? 조금은 나아질 줄 알았거든. 그게 아니더라고. 문신을 이렇게나 크게 그렸는데도 불안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 도로 한가운데를 미친놈처럼 달렸지. 한참을 뛰다가, 지쳐서 바닥에 주저앉았어. 손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거야. 문신한 자리에서 땀처럼 피가 나더라고. 맨살을 바늘로 찔러대니 그런 거지.”
 
민혁이의 말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지하철 막차가 올 시간이 돼서야, 나는 시계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하철역까지 날 바래다주면서, 민혁이가 말했다. 
 
“어릴 때부터 있잖아. 너를 만나면, 마음이 참 편했어. 오늘도 그래. 해결된 건 없지만, 오늘 하루는 마음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민혁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음 주 이 시간에 다시 올 테니까, 그때는 잠시 동안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민혁이는 기뻐하는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좋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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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이에게 가는 길은 짧지 않았다. 나는 상록수역에서 지하철을 탔고, 도봉산역에서 내렸다. 거의 두 시간 거리였다. 민혁이를 보러 가는 날에는, 하루를 온전히 비워야 했다. 
 
나 역시 계속되는 아르바이트와 대학생활로 몸과 마음이 피곤한 상태였다. 시간과 돈이 빠듯했지만, 민혁이를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민혁이를 만나면, 먼저 짜장면을 사줬다. 그리고, 예수님을 전했다. 그에게는 “훈민정음 2”라고 여겨질 만큼 낯설고 불편한 것이었지만, 나는 우정이라는 강력한 신뢰의 다리 위로 끊임없이 복음을 실어 날랐다. 
 
어느 날, 심각해진 민혁이가 담배를 입에 물고, 성경을 뒤적거렸다. 그의 손이 빨라지면서, 담뱃재가 성경에 떨어졌다.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손으로 대충 털어내면서 말했다. 
 
“여기 나오는 이야기를 어떻게 믿냐? 너는 이게 믿어지냐?” 
 
나는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믿으니까, 믿어보라고 말하지 않겠어?”  
 
민혁이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믿는 거 맞아?”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랐다. 나는 엄마 몰래 사탕을 훔쳐 먹은 아이처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댔다. 
 
당시, 나는 신학교 2학년이었다. 나는 신앙의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열여섯 살에 회심하고, 성경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단순하게 믿었던 나는, 신학교에서 배운 지식으로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면서, 다른 종교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내 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았다. 부끄러운 감정을 숨기려고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내가? 아니야. 내가 못 믿는 걸 어떻게 너한테 말해.” 
 
민혁이는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 담배 연기를 내 얼굴에 내뱉으며 말했다. 
 
“가면 벗어, 자식아.” 
 
그 순간, 나는 민혁이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그를 덮쳤던 토끼 가면과 나를 동일시 하다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멱살을 잡고 앞뒤로 흔들면서, “어디서 감히, 그딴 놈과 나를 비교해? 내가 그딴 놈이랑 같냐?”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민혁이는 방문을 열어젖히고 말했다. 
 
“오늘은 그냥 가라. 다음부터는 다른 이야기하자. 성경 이야기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나는 그날 밤, 무기력하게 민혁이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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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가 지나고, 나는 민혁이를 다시 찾아갔다. 지난번 일을 사과하고 싶었다. 확신 있게 믿게 되면, 다시 찾아올 테니, 당분간 잘 지내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민혁이는 주유소에 없었다. 같이 일하는 직원에게 “민혁이 어디있냐”라고 물었다. 직원은 밀려드는 자동차를 혼자 감당하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몰라요. 며칠째 말도 없이 안 나와요. 일 좀 제대로 하라고 말해주세요. 힘들어 죽겠어요.”
 
불길했다. 민혁이의 집으로 냅다 뛰었다. 도착하자마자, 그의 집 문을 거세게 열었다.
 
문을 열고, 내가 마주한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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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이는 나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애원하듯 내게 말했다.  
 
“여기 전기장판 코드 좀 빨리 뽑아줘.”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민혁이가 시키는 대로, 전기장판 코드를 뽑았다. 코드를 꽂는 곳은, 민혁이 발치에 놓여있었다. 
 
민혁이의 등이 전기장판의 전선 자국을 따라 하얗게 타들어간 상태였다. 등 전체는 열에 타서 시커멓고, 전선이 직접 닿은 곳은 오징어처럼 하얗게 익어버린 것이다.
 
민혁이가 말했다. 
 
“며칠 전에 허리가 너무 아픈 거야.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어. 병원에 갔더니, 허리가 심각하게 망가졌데. 절대로 일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하더라. 불구로 살 수 있다고 하는 말에 충격을 받았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데, 어떻게 쉬겠어. 나가서 일했지. 그다음 날,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픈 거야. 아예 일어나지도 못하겠어. 이틀 동안 꼬박 누워서 아무것도 못 했어. 몸을 일으킬 수도 없었으니까.
 
뜨거운 열로 지지면 조금 나아질까 싶어서 전기장판을 최대로 하고 잠에 들었어. 뭔가 이상해서 눈을 떴는데, 연기가 나는 거야. 내 등이 타고 있는지 누가 알았겠어. 
 
오늘 아침부터 옆으로 몸을 돌리고 누워 있었어. 합선이 된 건지, 전원이 안 꺼지더라고. 너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날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 주유소에서 같이 일하는 직원들도 내가 어디 사는 지 몰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민혁이를 데리고 병원에 갈 수도 없었고, 며칠 동안 먹고살라고 돈을 쥐여줄 수도 없다. 무능했다. 한숨을 내쉬며, “미안하다”라고 말했다. 
 
민혁이는 내 손을 잡아주며, “미안하기는 뭘 미안해. 네가 와줘서 난 고맙기만 한데.”라고 말했다. 
 
나는 민혁이의 손을 꼭 잡으며 물었다. “내가 기도를 한 번 해도 될까? 내가 너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잠시 동안, 묘한 긴장이 흘렀다. 민혁이는 생각 끝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라고 했다. 
 
나는 민혁이를 돌려 눕혔다. 민혁이의 허리에 살며시 손을 얹고 기도를 시작했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민혁이는 반드시 나아야 했다. 낫지 않으면 굶어죽을지도 몰랐다. 내가 의심하는 하나님이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도와주셔야 했다. 하나님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했다.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떼를 쓰며 기도했다. 
 
온몸이 땀에 젖었다. 사력을 다해 기도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몰랐다. 기도 마지막에 비장한 각오로 선언하듯, 말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한다. 일어나, 걸어라.” 
 
민혁이는 고개를 돌려, 날 쳐다보며 물었다. 
 
“이제 일어나면 되는 거야?” 
 
나는 긴장한 채로, 말했다. 
 
“천천히 일어나 봐. 다칠 수도 있으니까.” 
 
민혁이는 고개를 떨구고, 민망한 듯 말했다. 
 
“나 못 일어나겠어. 허리가 너무 아파.” 
 
나는 화를 내듯 말했다. 
 
“그럴 리 없어. 도무지 말이 안 된다고.” 
 
민혁이는 당황했다. 
 
나는 민혁이 허리에 손을 얹고 다시 기도했다. 목이 쉴 정도로 큰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더 이상 기도를 할 수 있는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민혁이가 돌아보며, 물었다. 
 
“언제 끝나? 이제 그만하자. 허리를 누르니까, 더 아파.” 
 
나도 지칠 대로 지쳐버린 상태였다. 푸념하듯 말했다. 
 
“그래, 그만하자.”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민혁이를 외면하는 하나님을 더 이상 믿고 싶지 않았다. 
 
나는 차비를 제외한 모든 돈을 민혁이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굶지 말고, 짜장면이라도 시켜 먹어. 내일모레 또 올게. 그때는 먹을 것 좀 사 올게. 일단, 견뎌. 알겠지?” 
 
나는 민혁이의 집을 나섰다. 밤길이 어두웠다. 새들이 구슬프게 우는소리, 의미 없이 울려 퍼지는 고양이의 울음 소리마저도, 나를 비웃는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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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일찍, 나는 민혁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만큼 걱정스러웠다. 민혁이는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주변이 자동차 소리로 시끄러웠다.
 
민혁이가 말했다. 
 
“나 지금 바쁘니까, 이따 통화하자. 지금 일하고 있어,.” 
 
내가 한 마디 던질 겨를 없었다. 민혁이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전화기를 귀에 댄 채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너 지금 아프잖아. 허리가 아파서 일어나지도 못했잖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나는 민혁이의 전화를 기다릴 수 없었다. 곧바로 지하철에 몸을 싣고, 민혁이에게로 갔다. 가는 내내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주유소에 도착해서, 민혁이를 찾았다. 민혁이는 여느 때처럼,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민혁이는 잠시 한가한 틈을 타서,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잘 들어봐. 정말 신기한 일이 있었어. 어제 너 가고 나서 꿈을 꿨어. 토끼 가면을 쓴 그 자식이 또 꿈에 나오더라고. 예전에는 있잖아, 너무 무서운데, 도망을 못 가고 밤마다 그 짓을 당했었거든. 
 
이번에는, 꿈속에서 내가 도망을 치더라고. 그놈을 밀치고, 반대편으로 힘껏 뛰었어. 그 자식이 엄청난 속도로 뒤따라 오더라. 나도 미친 듯이 뛰었지. 
 
이러다 잡히겠다 하는데, 눈앞에 하얀색 빛이 나타났어. ‘어, 이거 뭐지?’하는데,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두 팔로 날 안아주시는 거야. 짧은 순간이었지만, 정말 따뜻했거든. 
 
깜짝 놀라 잠에서 깼어. 잠에서 깨서 보니까, 내가 상체를 일으키고 있더라고. 벌떡 일어나 앉아 있는 거야. 
 
꿈에서 놀라 깼는데, 꿈을 깨고 나서 더 놀랐어. 허리가 안 아픈 거야. 일어나서 움직여보는데, 정말 하나도 안 아프더라고. 
 
그 하얀 옷을 입은 분이, 네가 말한 하나님인가, 예수님인가 하는 그분이 아닐까?”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민혁이는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다시 일을 하러 갔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민혁이를 기다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쁘게 일을 하는 민혁이를 바라보면서, 복잡한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 후로, 오랫동안 민혁이는 나에게 복음을 말할 기회를 줬다. 민혁이에게 복음을 전하는 동안, 나 자신도 의심을 지나, 확신의 길로 돌아설 수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배려하신 것이 분명했다. 
 
민혁이와 함께 겪은 사건은 내 인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날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민혁이에게 전화가 오지 않았다면, 민혁이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민혁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신학교를 그만두고 다른 길을 갔을지도 모른다. 
 
민혁이를 위해 기도해줄 때, 민혁이가 그 자리에서 즉시 나았다면, 나는 치유에 대해 오해했을 것이다. 
 
마치 내 능력이라도 되는 듯, 교만해졌을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기도하는 동안, 아무런 일도 없게 하셨다. 시간적 간격을 두시고, 내가 없을 때, 민혁이를 고쳐주셨다. 
 
내가 없는 동안,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나는 분명히 안다. 궁극의 치유는 치유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치유를 실행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만약 민혁이의 허리만 나았다면, 나는 반쪽짜리 치유를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민혁이의 정서와 육체를 동시에 치유해주셨다. 토끼 가면으로부터 도망쳐,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하셨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나타난 일회적인 사건일지 모르지만, 민혁이의 삶의 구조를 바꿀 만큼 위력적인 경험이었다. 
 
기억 속에서 토끼 가면이 나타날 때마다, 민혁이는 그로부터 도망칠 것이다. 꼼짝도 못 한 채로, 끔찍한 일을 반복적으로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서 벗어나 따뜻한 하나님의 품에 안기고자 할 것이다. 
 
복음적인 치유는 전인격적이다. 육체와 정서를 아우른다. 심리치료가 따라올 수 없는 지점이다. 하나님께서 상처 입은 한 사람의 인생에 개입하실 때 일어나는 일을, 나는 생생하게 목격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도, 내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유다. 나는 보았고, 들었다. 치유는 나의 믿음에 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것이다. 나의 연약한 믿음, 무지와 무능이 치유의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불가능은 없다.  
 
하나님이 치유의 근원이시다.

상처는 숨을 곳을 찾는다

“목사님, 그런 식으로 하시면, 당회가 무슨 필요가 있습니다. 절차를 밟아서 일을 진행하세요. 주변 사람들 의견도 경청하시고요. 참다 참다 말씀드리는 겁니다.” 
 
최도훈 장로가 얼굴이 시뻘게 지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옆에 앉은 동갑내기 장로가 최도훈 장로의 팔을 붙잡고 진정하라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김호열 목사는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를 어쩌나 하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장로님, 죄송합니다. 제가 장로님을 불편하게 한 것 같습니다.  진정하시고, 차분하게 대화를 해보는 게 어떨까요?”
 
최도훈 장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그딴 식으로 목회하지 마세요.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최도훈 장로의 협박스러운 말투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참다못했는지, 나이 많은 장로가 최도훈 장로에게 말했다. 
 
“이봐, 최 장로. 너무 나갔어. 그렇게 감정이 앞서면 옳은 말도 틀린 말로 들리는 거야. 일단, 자리에 앉게. 대화로 해결해야지, 이 사람아.” 
 
그리고, 나이 많은 장로는 목사님을 바라보며 말했다. 
 
“목사님, 아무래도 회의를 일찍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너무 심려 마시고, 다음 주에 만나 뵈시죠.” 
 
김호열 목사는 고개를 끄떡일 뿐이었다. 달리 다른 방도가 없었다. 
 
다른 장로들 역시 나이 많은 장로의 지혜로운 처사에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최도훈 장로만 예외였다. 나이 많은 장로에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장로님, 그런 식으로 좋은 게 좋다고 하니까, 목사님이 당회를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하는 겁니다. 나는 용납 못해요. 끝장을 볼 겁니다.” 
 
최도훈 장로는 화가 풀리지 않는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문이 부서져라 힘껏 닫았다. 쾅 하는 소리를 끝으로, 당회실은 적막해졌다. 다들 심각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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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표정이 왜 그래? 오늘 교회에서 무슨 일 있었어?”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서 들어온 최도훈 장로에게 그의 아내가 물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아내는 하던 일을 멈추고, 남편에게 다가왔다. 
 
“여보, 무슨 말 좀 해봐. 왜 그래 도대체?” 
 
남편이 말없이 TV만 응시하자, 아내는 뭔가를 눈치챘다는 듯 말했다. 
 
“오늘 당회하고 왔구나. 또 목사님한테 험한 말 했지? 이제 그만해, 여보. 당신 그거 완전히 오해라니까. 다른 사람들은 괜찮다는데, 왜 당신만 그렇게 핏대를 세우고 반대를 해?”
 
아내의 말은 그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었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리모컨을 바닥에 내던지며 소리쳤다.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거야? 그 쓰레기 같은 목사가 위선을 떨면서 앉아 있는 거 안 보여? 목사가 되기 전에, 사람이 돼야지. 기본적인 인성도 안 된 사람이 무슨 목사야? 두고 봐. 내가 그 자식을 가만히 두나. 끝까지 물고 늘어질 거야, 알겠어? ” 
 
그의 아내는 발을 동동 구르며, 울기 시작했다. 
 
“여보! 당신 완전히 오해라니까. 계속 왜 그래. 당신 그날 말하는 거지? 목사님 우리 집에 심방 오신 날? 그거 아니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 당신 정말 오해하는 거라고!” 
 
그는 아내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그딴 짓을 당하고도, 그놈을 감싸고돌아? 내 편을 안 들고, 어떻게 그놈 편을 드냐고!” 
 
그의 아내는 포기한 듯,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흐느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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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도훈은 젊은 시절, 의류 유통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세상 무서운 게 없었다. 아내가 아무리 교회에 가자고 해도, 들은 체도 안 했다. 
 
그러다, IMF를 만났다. 돈과 사람,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다. 살던 집에 빨간 색 딱지가 덕지덕지 붙었다. 옷 가지 몇 개를 챙겨 나온 게 전부였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장모님이 당분간 시골에 내려와 지내라고  설득했다. 괜찮다고 여러 번 말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모텔, 여관방을 전전하다가 시골로 내려갔다. 
 
장모님이 살던 시골집은 최도훈의 가족이 함께 살기에는 비좁았다. 마당 한 귀퉁이에 컨테이너 박스를 가져다 놓고, 온 가족이 그 안에서 생활을 했다. 가까이 지내던, 이웃이 딱한 사정을 듣고, 컨테이너를 잠시나마 빌려준 것이다.  
 
시골에 내려온 그날부터, 그의 아내는 새벽마다 교회에 가기 시작했다. 밤새 한숨도 잘 수 없었던 최도훈은 아내의 인기척을 느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말없이 아내를 따라나섰다.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걷게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시골 교회 새벽 예배의 풍경은 가관이었다. 피곤에 쩔은 목사가 대충 설교를 하는데, 앉아서 듣는 사람이라고는 머리가 새하얀 노인  세 사람뿐이었다. 그중 한 사람은  장모님이었다. 어이가 없었는지, 최도훈은 피식 웃고 말았다. 
 
목사의 설교가 끝나고 교회 안이 어두워지자 아내가 소리 없이 울었다. 그의 마음이 뭉클했다. 아내가 기도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내는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돈을 실컷 벌어다 줄 때는, 아내가 마음 편히 사니까 교회 나가서 교양이나 떠는 줄 알았다. 사업이 망한 후에도 한결같이 신앙생활을 지속하는 아내에게 숙연한 감정을 느꼈다.
 
사업할 때는, 사업으로 바쁘다고 아내를 돌봐주지 못했다. 사업을 하지 않는 지금은, 그야말로 돈이 없어서 아내를 돌봐주지 못한다. 아내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아내가 진심을 다해, 기도하는 소리를 듣게 되자, 그의 눈이 촉촉해졌다. 어딘가, 신이 존재한다면, 바지 가랑이라도 붙잡고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그의 마음이 열렸다. 처음에는 새벽어둠 속에 자신을 숨기고 민망한 듯 교회에 나갔지만, 이내 조금씩 용기가 났다. 밝은 낮에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에 나간 것이다. 
 
모든 것이 어색했지만, 마음을 활짝 열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몸과 마음이 새롭게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의 인생을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최도훈은 농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지만, 유통에 밝았다. 인터넷이 활성화되던 시기를 기회로 잡고, 직접 재배한 농작물을 고객에게 직접 유통했다. 수익은 고스란히 사업의 규모를 키우는데 투자했다. 땅을 사고, 재배량을 늘리는 일에 집중했다. 
 
그러다, 뉴스에서 신도시 계획을 듣게 되었다. 소파에 앉아 뉴스를 보고 있던 그는, 아내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가 사 모은 땅은  기하급수적으로 가격이 올랐고, 땅을 매각해서 큰돈을 벌었다. 
 
상가 건물 몇 채를 사들였다. 임대료 수익으로 먹고 살 수 있게 되자, 제법 시간이 많아졌다. 자연스럽게 교회 이곳저곳에서 봉사할 일이 늘어났다. 그는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었다.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었다. 
 
사람들도 그의 진심을 알았는지, 그는 어느덧 장로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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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업이 번창하듯, 교회 역시 성장했다. 신도시가 조성되고 사람들이 몰려들자, 교회는 두 번에 걸쳐 넓고 좋은 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김호열 목사는 예배시간에 중대한 발표를 하겠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기도 중에, 교회 건축을 하라는 응답을 받았다고 했다. 성도들은 비좁고 불편한 상가 건물이 불편했던 터라, 담임 목사의 기도 응답에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최도훈 장로는 심기가 불편했다. 다른 장로들의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표정을 제대로 읽어낼 수 없었다. 표정이 모두 제각각이었다. 
 
김호열 목사는 예배를 마치고, 당회를 열었다. 당회에서 겸손한 태도로 장로들에게 사과의 말을 먼저 덧붙였다. 장로님들과 먼저 상의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이었다. 
 
그러고 나서, 나름의 논리로 장로들을 설득했다. 높아지는 임대료와 몰려드는 사람들을 계산했을 때, 땅값이 더 오르기 전에 서둘러 교회를 짓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논리였다. 
 
가만히 목사의 말을 경청하던 장로들 사이에 냉랭한 기운이 돌았다. 이치에 맞는 말이었지만, 손뼉을 치면서까지 동의할 내용은 아니었던 것이다. 
 
최도훈 장로는 참았던 말을 하고 말았다. 
 
“목사님, 땅값이 오르기 전에 교회를 서둘러 지어야 한다는 말이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에, 김호열 목사는 당황했다. 그리고, 어색하게 웃으며 답변했다. 
 
“장로님, 성경에 그런 말은 안 나옵니다. 지혜로운 선택을 내리자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지 않았습니까? 성경을 잘 풀고 해석해서 지혜로운 선택을 내려야지요.” 
 
최도훈 장로는 물러서지 않았다. 목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곧바로 되물었다. 
 
“성경 어느 구절을 해석하면, 그런 지혜가 나옵니까?”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김호열 목사는 한 걸음 물러섰다. 
 
“아이고, 장로님. 제가 장로님 심기를 불편하게 했나 봅니다. 제가 죄송합니다.” 
 
최도훈 장로는 다른 장로들을 둘러보며,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장로님들, 어떻게 이런 말을 듣고 가만히 계십니까? 땅값 오르기 전에 땅을 사서 교회를 짓자는 게 말이 됩니까? 이게 땅 투기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지, 목사님이 하실 말씀이냐고요?” 
 
김호열 목사의 이마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수습해야 했다. 이대로 당회를 마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차분한 어조로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제 말에 오해가 있으신 것 같아요. 제가 조금 더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교회 건축, 안 해도 됩니다. 불편해도 그냥 참고 지내면 되는 거예요. 
 
하지만, 다음 세대는 어떻게 합니까. 아이들이 예배드리는 곳을 한 번 둘러보세요. 아주 난리예요. 교회마다 아이들이 없어서 고민인데, 우리는 아이들이 너무 많이 와서 걱정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아이들이 생각납니다. 아이들이 마음 편하게 예배드리는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요. 
 
그래서, 어려운 말씀드린 겁니다. 교회 건축 안 해도 되니까, 제발 노여움 푸세요.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김호열 목사의 말을 듣고, 다른 장로들은 공감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장면을 본 최도훈 장로는 미칠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목사의 멱살이라도 움켜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야, 이 가식적인 놈아. 말만 그럴듯하지. 나는 네놈의 실체를 다 알고 있어. 이 쓰레기 같은 놈아.” 
 
마음속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최도훈 장로는 그런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오랜 시간, 가슴에 담아둔 말이었다. 세상 그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그는 잊지 못했다. 김호열 목사가 자신의 눈앞에서 저지른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집사님, 저와 같이 심방을 가셔야 할 것 같아요.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신가요?” 
 
같은 마을 김 씨가 교회에 등록했다. 서울에서 반듯하게 살다가,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시골에 내려온 것이다. 김 씨가 시골에 내려온다는 소식을 온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김 씨는 도시로 유학을 떠났다. 혼자 공부해서 어렵다는 사관학교에 들어갔다. 별을 달고 예편해서 군수물품을 제조하는 중소기업의 임원이라고 했다.   
 
김 씨는 2층짜리 전원주택이 완공된 다음에 심방을 받고 싶다고 했다. 목사님을 누추한 곳에 모실 수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김호열 목사는 남자 성도가 귀한 마당에, 외지에서 내려와 시골에서 잘 정착한 최도훈이 김 씨에게 좋은 말벗이 되어줄 것이라 했다.  
 
김호열 목사가 최도훈에게 김 씨의 집에 함께 심방을 가자고 제안한 이유였다. 
최도훈은 목사의 말을 따를 생각이 없었다. 며칠 전, 길에서 김 씨를 만나지 않았다면, 절대로 목사와 마주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이, 자네. 목사님 심방 오실 때, 같이 올 거지? 내가 귀한 음식 차릴 거니까, 자네도 꼭 와. 절대 후회 안 할 거라고.” 
 
최도훈은 마지못해 알겠다고 말했다. 심방 당일, 김호열 목사와 심방 전도사, 그리고 최도훈 장로와 그의 아내가 김 씨의 집을 방문했다. 
 
간단히 예배를 드리고, 음식을 대접받았다. 김 씨의 말은 허세가 아니었다. 잔치라도 벌어진 듯, 온갖 음식이 나왔다. 김 씨는 목사님에게 말했다. 
 
“목사님, 이것 좀 드셔보세요. 이게 뭐냐면요. 과메기라는 거예요. 제 친구가 포항에 사는데, 이게 딱 한 철에만 나오는 거라, 그 동네 사람에게도 귀한 음식이라고 하네요. 철마다 친구가 보내주는데, 저는 이거 먹는 게 한 해의 낙이랍니다.” 
 
김호열 목사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그래요?”라고 물었다. 들뜬 얼굴로 과메기를 미역에 싸더니, 초장에 찍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다른 사람들이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특히, 김 씨가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그러나, 최도훈은 웃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김 씨는 집안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김호열 목사는 “그럼, 그럴까요?”라는 말과 함께 심방 전도사에게 눈빛을 보냈다. 심방 전도사는 전화기를 들고, 거실 구석으로 가더니, 다음 심방을 뒤로 미루는 듯 보였다. 서로 이야기가 잘 되었는지, 밝은 표정으로 김호열 목사에게 “편안히 보셔도 될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김 씨의 안내로 집안 구석구석을 들여다봤다. 그러다, 2층 서재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김 씨가 만년필을 수집하는지, 유리로 된 장식장에 다양한 만년필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서글서글 대충대충 보이던, 김 씨의 이미지가 한순간에 바뀌던 순간이었다. 
 
함께 서 있던 모든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만년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김 씨가 입을 열었다. 
 
“목사님, 관심 가는 물건 있으시면, 하나 골라보세요. 다 제 자식 같은 놈들이지만, 목사님께 하나 드리려고 생각해서 오늘 오시라고 했습니다. 걱정 마시고, 하나 골라보세요.”
 
김호열 목사는 거듭 사양했지만, 김 씨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만년필 하나를 집어 들었다. 김 씨는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봤다. 
 
김호열 목사가 차에 올라타서, 김 씨의 집을 떠나려고 하자, 김 씨는 농담처럼 목사에게 말했다. 
 
“목사님, 역시 보는 눈이 있으세요. 지금 타고 가시는 자동차보다 비싼 녀석을 주머니에 넣고 가시는 거예요. 오래오래 간직해주세요.” 
 
김호열 목사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감사하는 말을 두세 번 내뱉었다. 김호열 목사가 돌아간 뒤, 최도훈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세 시간이 넘도록 김 씨에 집에 머문 것이다. 최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실룩거리며 말했다. 
 
“쓰레기 같은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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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도훈이 아내를 따라, 교회를 나간지 얼마 되지 않아, 목사님이 심방을 오신다고 했다. 최도훈은 컨테이너 박스에서 누추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아내는 남편을 여러 번 설득했다. 
 
“여보, 목사님이 무슨 성도들이 얼마나 잘 먹고 사나 보시는 줄 알아? 그런 거 아니야. 편안하게 생각해.” 
 
최도훈은 마지못해 심방을 받기로 했다. 
 
막상 심방을 받게 되자, 목사님이 방문하기 며칠 전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설레었다. 
 
최도훈의 마음이 힘들 때마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에 딱 맞는 설교 말씀을 해주시는 목사님에게 고마웠다. 교회에서 데면데면 할 때는 민망해서 표현을 못 했지만, 심방을 받을 때는 제대로 감사하다는 말을 할 작정이었다.  
 
없는 돈에, 나름대로 저녁 상을 차리고 목사님을 기다렸다. 시간에 맞춰, 김호열 목사가 나타났다. 
 
컨테이너 박스에 들어선 김호열 목사는 안을 들여다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컨테이너 박스도 잘 꾸미니까 그럴 듯하군요.” 
 
무슨 의도였는지는 모르지만, 단 번에 최도훈의 기분이 상했다. 그의 아내는 속도 없는지, 다정한 말투로 목사에게 말했다. 
 
“옆집에서 쓰던 거 잠시 빌려주셨어요. 이렇게라도 살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하죠. 하나님 은혜에요, 목사님” 
 
김호열 목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두 분 고생하시는 거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렇게 좋은 마음 가지고 계신데, 하나님께서 좋은 집으로 인도해주실 거예요.” 
 
아내는 손뼉을 치며, 아멘이라고 말했다. 최도훈은 이게 뭔가 싶었다.  
 
김호열 목사는 성경을 펴고, 말씀을 한 줄 읽었다. 그리고는, 잠시 동안 설교했다. 그리고는,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아이고, 죄송합니다. 다음 심방이 있어, 이만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아내가 최도훈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아내 눈치를 살피던, 최도훈은 어색하게 웃으며 김호열 목사에게 말했다. 
 
“목사님, 저녁 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차린 건 별로 없지만, 목사님 오신다고 식사를 준비했어요. 금방  차릴테니까, 5분만 드시고 가세요.”
 
김호열 목사는 정중히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무리하게 일정을 잡았나 봐요. 시간이 조금씩 뒤로 밀려서, 이렇게 됐습니다. 이해 부탁드리겠습니다, 형제님.”
 
아쉬운 마음에 최도훈은 “설교 참 감사합니다. 많이 위로받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김호열 목사는, “제가 감사하지요.”라는 말과 함께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김호열 목사가 최도훈의 집에 도착해 차를 타고 떠나기까지 십오 분이 걸렸다. 교회의 모든 것이 낯설었던 최도훈은 아내에게 물었다. 
 
“여보, 목사님이 시간이 철저하신 분인가 봐. 15분 단위로 사람을 만나네. 나는 사업할 때, 저런 식으로 안 했는데. 사람들이 좋아할까? 나는 기분이 별로야.” 
 
아내는 남편을 꾸짖듯이 말했다. 
 
“당신이 몰라서 그래. 목사님들이 얼마나 바쁘신데. 휴일도 없이 저렇게 일하시는 거야. 당신이 옆에서 많이 도와드려.” 
 
최도훈은 끝내 시계를 들여다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원래 저런 거야, 아니면 나를 무시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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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도훈은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리며, 나에게 말했다.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시간이 흐르니까, 말도 안 되는 일을 당한 거예요. 앞뒤를 맞춰보니까, 완전히 무시를 당한 거죠. 
 
그 목사는 내 사업이 성공할지 몰랐을 거예요.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관심도 없었겠죠. 
 
그날 컨테이너 박스에서 가난하게 사는 나를 보면서,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죠. 별 볼 일 없는 내가 장로까지 되었으니 얼마나 당황스러울까요.
 
표현은 못 해도 아마 속으로 미칠 지경이겠죠. 장로가 항존직이라고 그랬나요? 한 번 직분을 받으면, 죽을 때까지 유효하다면서요? 어디 보세요. 내가 끝까지 괴롭혀 줄 거니까.”  
 
그는 화가 나서,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그 손으로 테이블이라도 내리칠 것만 같았다. 
 
그가 꽉 움켜쥔 손에 무엇을 숨겼는지 궁금했다. 그는 스스로 손을 펴지 못했다. 움켜쥐는 것으로 근육이 적응했을 것이다. 상처는 언제나 숨을 곳을 찾는다. 그의 상처는 분노 뒤에 숨었다.  
 

 
“난 고아였어요. 부모님의 얼굴을 알지 못해요. 부모도 없는 게, 싸가지도 없었는지, 12살에 고아원에서 쫓겨났어요. 
 
밤낮으로 나를 괴롭히는 친구가 있었어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 친구 손등을 망치로 내려쳤거든요. 고아원 원장한테 뺨 한 대 얻어맞고, 그날로 쫓겨났죠. 그 녀석이 원장님 아들이었거든요.  
 
고아원에서 쫓겨나서, 개처럼 살았어요. 구걸도 해보고, 도둑질도 해봤는데 이건 아니다 싶더라고요. 동대문에서 트럭에 옷을 실어주는 일을 했는데, 거기 사장님이 날 좋게 본 거죠. 
 
일을 가르쳐 주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정도 먹고살게 됐고, 아내도 만나고 그랬죠. 
 
사장하고 잘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사장이 날 보는 눈빛이 이상해요. 알고 보니까, 거래처 사람들이 이간질을 하고 있더라고요. 아니, 자기 밑에서 뼈빠지게 일하는 내 말을 안 믿고, 계산기나 두드리는 그런 사람들을 믿는 게 말이 되나요. 기분 더러워서 당장 그만뒀어요. 
 
보란 듯이 성공해서,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마음먹었죠. 더 좋은 조건으로 그 사장의 거래처를 내가 다 빼앗아 왔어요. 거래처 사장들은 내가 잘 데리고 있다가, 물량을 확 끊어버려서 망하게 했고요. 다른 곳에서도 내 눈치 보느라 그쪽에 납품 안 했어요. 나한테 잘못 보이면, 끝장난다는 소문이 업계에 돌았죠. 
 
내가 왜 이런 성격인가 생각을 해봤어요. 연관성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기억이 났으니까 일단 이야기를 해볼게요. 
 
그 고아원 원장 있죠? 아이들 열 명 정도 데리고 있었는데, 완전히 위선 덩어리였어요. 거기 오는 후원자들 중에 잘 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 있는데, 유독 잘 사는 사람한테 그렇게 잘했어요. 
 
어려운 살림에 쌀 20Kg짜리 하나 어깨에 짊어지고 온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앞에서는 감사하다 뭐다 갖은 말을 다하더니, 그 사람 가니까 표정이 싹 변해요. 
 
“요즘 세상에 누가 쌀을 줘. 돈으로 가져와야지. 이거 몇 푼이나 한다고 생색을 그리 내. 내가 자존심이 상해서, 이 짓도 못해 먹겠다, 진짜.” 
 
돈 많은 집에서 후원하러 오잖아요. 그러면, 신발도 안 신고 마당으로 뛰어나가서 인사를 해요. 그거 보고 있으면, 구토가 나오죠. 나는 그 여자 사람으로 안 봤어요. 
 
그 아들자식은 고아원 애들 후원 들어온 걸로, 아주 호강을 했어요. 어린 제 눈에는 없는 게 없는 걸로 보였으니까요. 그 자식이 심심풀이로 애들 때리고, 괴롭히고 그래도, 아무도 말 못 했죠. 
 
그놈하고 싸움 붙는 놈은, 가차 없이 쫓겨나거든요. 갈 곳 없는 어린애들이 어쩌겠어요. 그냥 참는 거죠. 
 
자고 있는데, 그 자식이 내 발가락에 불침을 놨어요. 발가락 사이에 휴지를 끼워서 불을 붙이면, 화상을 입죠. 여름이었는데, 물집이 잡히고 터지고 곪아서 걷기도 힘들더라고요. 그만두라고 해도, 계속 그 짓을 해요. 발가락이 성할 날이 없었어요. 
 
자다가 느낌이 이상해서 깼는데, 또 그 짓을 하고 있어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 되었죠. 당장 죽여버릴 생각으로 망치를 가져왔어요. 차마, 죽일 수는 없어서 손등을 내려친 거죠. 
 
지 자식이 아프다고 울고불고 하니까 원장이 깜짝 놀라 잠에서 깼죠. 지 자식을 끌어안고, 내 뺨을 때리더라고요. 그 새벽에 날 쫓아낸 거죠. 홧김에 불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다른 애들 때문에 참았죠. 그 아이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아직도 가끔 그날이 생각나요. 그 쓰레기 같은 원장 얼굴도 떠오르고요.” 
 
그의 말을 듣고, 잠시 동안 내 생각을 전해주었다. 그는 긴 한숨을 쉬더니, 한참을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흥미롭네요. 원장에게 쓰던 쓰레기라는 말을 목사에게 같이 쓰고 있네요. 생각지도 못했거든요.” 
 
그는 여유를 되찾았는지,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에효. 목사도 사람인데, 그럴 수도 있죠. 나도 뭐 사람인데요. 예수님 앞에서 도토리 키재기죠. 사람한테 뭐 기대할 게 있겠어요. 다 부질없는 짓이죠. 이제 교회에서 목사하고 싸움박질하는 것도 지쳤어요. 때가 되면 떠나야죠. 
 
소박한 꿈이 하나 있거든요. 시골 마을에 조용하고 따뜻한 고아원 하나 짓는 거예요. 사실, 아내와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나처럼 부모 없는 아이들, 갈 곳 없는 아이들, 상처받지 않도록 잘 키워내고 싶어요. 
 
그렇게 하려면, 제 상처부터 먼저 치유해야겠지요?”
 
최도훈은 그의 꿈을 말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의 머리카락에 하얀 새치가 드문드문 보였지만, 내 눈에는 그가 12살 꼬마로 보였다. 그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아주었다. 그는 아주 잠시 동안 나를 끌어안고, 아이처럼 울었다.

한 사람이 정말 중요한가요?

개인적인 질문에 일일이 답변해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한 사람의 문제는 그저 한 개인의 문제일 수 있는데요. 다수를 위해 보편적인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을까요?
 
나는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인 질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거창해 보이는 질문이라도 결국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하니까요.
 
오래전부터 그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고 싶었습니다. 다수를 위한 삶을 의도적으로 피했어요. ‘상처 입은 한 사람’을 위해 글 쓰고 말하는 것이 내 사명이 아닐까 고민하며 삽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에는 지극히 보편적인 이야기가 담겨요. 우리가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는 이유입니다. 등장인물이 개인적으로 겪는 이야기에 사람들이 공감하지요.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야기에 빠져들어 울고 웃습니다.
 
내게 한 사람의 존재는 우주이며 온 세상이에요. 한 사람을 위해 글 쓰고 말하는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아요. 책을 쓰고, 설교하는 것도 대중을 위한 것은 아닐 겁니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꿈이 작다 못해 초라한 것 아니냐?”라는 억센 질문을 받을지 모르겠네요. 남 생각이야 어떻든 당분간 고집을 꺾지 않을 겁니다.
 
굳이 효율을 따지자면 한 사람을 위해 글 쓰고 말하는 것이 다수를 위해 하는 것보다 효율적이라고 생각해요. 목회 사역을 처음 시작하고 가장 난처한 것이 설교였습니다. ‘누구를 위해 어떻게 설교를 준비해야 하지?’ 고민했지만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 정거장에 붙어 있는 광고 포스터를 우연히 보았어요. 매력적인 여성이 정면을 보고 찍은 화장품 광고였어요. 사진 속 그녀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어서 버스 정거장 어디에서도 그 시선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시선이 렌즈를 빗나갔다면, 나 역시 피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때 책상에 앉아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고민해도 풀리지 않던 의문이 풀렸어요. 이전까지 나는 연령과 직업, 취향 같은 것으로 청중을 분류했어요. 숫자처럼 모두 더하고 나누어 평균을 내는 방식으로요. 치명적인 실수였지요. 나는 청중을 짐작했을 뿐 정확히 몰랐습니다.
 
어리석게도 그 자리에 없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설교한 겁니다. 이후부터는 과감히 설교 준비부터 설교하는 순간까지 단 한 사람을 위해 준비하고 전했습니다.
 
한 사람을 위한 설교는 아무도 배제하지 않아요. 누군가가 ‘아, 저건 내 이야기다. 어떻게 내 마음을 저렇게 잘 알지?’라고 생각한다면 아마 그 자리에 있는 다수의 사람 역시 같은 마음 이지 않을까요?
 
글을 쓰기 시작할 때도 독자가 누구인지 몰랐어요. 처음 설교 할 때와 같은 실수를 반복했지요. 독자를 더하고 나누면서 짐작했어요. 평균치의 독자를 예상하고 글을 썼어요.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쓰느라 적지 않은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하나님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한 사람을 바라보고 글을 쓸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어요. 그러자 사람들이 공감해주기 시작했지요. 참 알 수 없는 일이죠. 한 사람을 위해 쓴 글이 다수에게 읽히다니요.
 
그래서 나는 한 사람의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에 성실히 답합니다. 진심을 담아 답변하고, 그가 도움을 받았다면 만족합니다. 아마도 다수를 위해 글을 쓰고 말하는 날은 내 인생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나는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고 싶습니다.

결론은 무조건 예수님인가요?

목사님이나 기독교 상담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말로 시작하더라도 결국 “예수님을 바라보라”라고 말하는데, 솔직히 너무 쉽고 뻔한 대답 아닌가요? 아무도 반박할 수 없잖아요. 결론은 무조건 예수님인가요?
 
좋은 질문입니다. 나도 오랫동안 고민해온 문제거든요. 저 역시 말끝마다 “예수님, 예수님” 하는 사람들에 대한 시선이 곱지 못했어요. 예수님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왜 정답인지 알고 싶었어요.
 
상처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기도했어? 성경은 읽어? 그런데, 왜그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솔직히 이런 태도로 대화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이 남용되고 있다는 생각도 했어요. 문제의 실체에 다가가지 못하고, 대충 덮어버리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풀이 과정 없이 정답만 있는 답지를 보면 마음이 후련한가요? 그렇지 않아요. “뭘 그렇게 고민해? 이 문제 답은 3번이야. 빨리 채점해”라고 말한다고 가정해보세요. 답을 맞혀도 답답합니다. 맞고 틀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왜 그 문제의 답이 3번인지 알아야겠지요.
 
친절한 선생님은 정답만 설명해주지 않아요. 1번, 2번이 왜 답 이 될 수 없는지 설명하지요. 그래야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서 오답을 피해갈 수 있습니다. 나도 그런 방식으로 말해볼게요.
 
요즘 유행하는 ‘마음 챙김’과 ‘인지행동치료’라는 상담 방법론이 있어요. 아마 당분간 상당한 인기를 누릴 겁니다. 마음 챙김은 불교의 명상에서 시작됐습니다. 구글의 명상 전문가 차드 멩 탄이 《너의 내면을 검색하라》에서 ‘할머니의 마음’이라는 기법을 소개하지요.
 
스스로를 자애로운 할머니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할머니의 눈으로 보면 각자는 모든 면에서 완벽하며, 할머니는 누군가 못된 짓을 해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고요.
 
이 이론을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 사람마다 할머니에 대한 정서가 다르다고 말하고 싶어요. 할머니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거든요. 내가 떠올린 할머니가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준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내담자 중에 할머니에게 학대를 받은 사람도 있고, 반감이나 두려움을 가진 사람이 있었어요. 눈을 감고 따뜻한 할머니를 떠 올리자고 하면 감정이 저마다 다를 거예요. 그러니 기법에 대한 효과도 다르겠지요.
 
인지행동치료의 기법을 한 가지 소개할게요. 인지오류에 빠져서 자신을 합리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내담자에게 ‘소중한 친구’가 찾아와 자신과 똑같은 고민을 털어 놓는다면 뭐라고 말할까요? 소중한 친구니까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이해해주고 공감해줄 거예요.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소중한 친구에게는 공감해주면서, 자신은 왜 비난하시나요?” 라고 되물으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돕습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소중한 친구의 개념이 상대적이지 않을까요? 지금 당장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생각하는 우정의 크기만큼 큰돈을 꿔달라고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거절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서겠지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친구는 상상 속에나 있어요.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담자 중에는 소중한 친구가 한 명도 없거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사람도 있었어요. 친구는 친구일 뿐입니다. 우정은 언제든 깨질 수 있고, 아무리 소중한 친구라도 절대적이지 않아요.
 
내게 ‘따뜻한 할머니’와 ‘소중한 친구’, 그리고 ‘예수님’ 중에 누구를 택할 거냐고 묻는다면, ‘예수님’을 택할 거예요.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내가 믿는 답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합리적인 선택을 하게 돕고 싶어요.
 
다른 상담 이론을 무시할 의도는 없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자애로운 할머니를 바라보자고 하면 웃음이 터질 것 같아요. 또 소중한 친구를 바라보자고 해도 썩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아요.
 
하지만 내게 “예수님을 바라보자”라는 말은 설득력이 있어요. 할머니나 친구를 바라보자는 말보다 훨씬 듣기 좋아요. 예수 님의 사랑은 절대적이에요. 세상이 무너져도 그분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할머니와 친구에게 감히 비교할 대상이 아니지요. 그래서 나는 제안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건 어때요?”
 
만약 당신이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을 믿게 된다면 당신 안에 기적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당신을 있는 그대 로 사랑하는 그분을 만날 수 있으니까요.
 
사람마다 예수님을 다르게 말하겠지만, 성경은 한결같이 동일한 그분을 말해요. 그 사랑은 변치 않고 영원합니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용기 내어 고백합니다. 결론은 ‘예수님’입니다.

나는 무엇이 문제일까요?

일단 내 이야기를 들려줄게요. 그리고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말해줘요. 문제를 발견하면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거예요. 무엇이 문제인지 진심으로 알고 싶어요.
 
나는 초능력자나 예언가가 아닙니다. 만약 내게 사람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있어도 당신의 이야기를 잠깐 듣고, “당신은 이런 사람이고, 이런 문제가 있다”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건 예의 없는 행동이거든요. 누가 누구를 판단하고 정의하나요.
 
오히려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어요. 만약 다른 누군가에게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면 아마 당신은 그에게 휘둘릴 거예요. 그러면 관계를 지속하기 어렵지요. 당신을 평가하고 판단한다고 느끼거든요. 관계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부담스러워서 멀리하게 될 거예요.
 
마음을 조금 편하게 가져요.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문제가 있고, 고민하며 삽니다. 문제없는 척하는 것도 문제지만,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문제라는 말 대신 다른 표현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상처’라는 말은 어때요? 경우에 따라 받아들이는 의미가 다르겠지만 문제라는 말보다 나은 것 같아요. 문제는 고치거나 해결해야 하는데, 인생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하나의 과정을 마치고 다음 과정으로 들어가지 않아요. 하나의 과정으로 쭉 이어져 있지요. 마무리도, 완성도 없어요.
 
상처에는 치유나 치료라는 말을 쓰지요. 상처가 아물면 그대로 끝이 아니에요. 한번 상처 난 부위는 흉터가 남습니다. 겉은 멀쩡해 보여도 누르면 아플 수 있어요. 상처 부위가 약해져서 같은 곳을 두 번 다칠 수도 있고요. 상처에 완치는 없어요. 계속 조심하며 상처를 돌봐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당신에게 문제가 없다고 말하고 싶어요. 다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자신 안의 상처를 스스로 발견하기를 바라요. 다른 사람은 절대 당신의 상처를 대신 찾아낼 수 없어요.
 
아파서 병원에 가면 의사에게 “내가 어디 어디가 아파요”라고 합니다. 의사는 여기저기 확인해보고 처방을 해줍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워요. 아프다고 먼저 말해야 의사도 왜 아픈지 말해 줄 수 있거든요.
 
만약 의사에게 “내가 어디가 아플까요? 한번 말해보세요”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이런 기가 막히는 일이 상담실 안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내담자가 원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상담자가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나는 상담자가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에 묶여서 오랜 시간 고통받은 내담자를 적지 않게 만나왔어요.
 
목회자, 상담자를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자신 위에 군림할 기회를 주지 마세요. 상처로 오랜 시간 고통받으면 약해져서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요. 위로나 통찰력 있는 말 한마디를 해 주면 그에게 의존하게 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요. 끝이 좋지 않거든요.
 
상담이나 심방을 받을 때나 기준을 최대한 낮게 잡으세요. 내가 모르는 상처를 누군가가 기가 막히게 발견해서 치유하는 게 아닙니다. 내 안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는 없어요.
 
이미 충분히 아프고 힘든 문제를 함께 나누세요. 상담하는 과정에서 용기를 얻고 힘을 얻는 거예요. 상담자가 아무리 유능해도 소용없어요. 자기 자신은 결국 자신이 돌봐야 합니다.
 
내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온전히 사랑해주실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같은 질문을 사람이 아니라 예수께 던지면 당신은 안전할 수 있어요. 그분은 당신 위에 군림하거나 당신의 약함을 이용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의존하고 싶은 만큼 예수님을 의존하세요. 그럴수록 당신은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사람이 될 겁니다.
 
상담자나 목회자마다 서로 다른 말을 한다면 답은 한 가지에요. 모든 말과 조언을 평정할 만한 가르침은 결국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묻지 말고, 예수께 여쭈어요. 그분은 당신이 원할 때마다 딱 맞는 일관된 진리를 계속 말씀해주실 겁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까요.

나 같은 사람도 치유될까요?

나는 어릴 때부터 많은 상처를 받고 자랐어요. 치유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 사람들이 나 같은 일을 겪었다면, 치유될 수 있었을까?’라고 속으로 말합니다. 그들이 겪은 일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인생을 살았거든요.
 
인생의 고통은 서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듣고 나보다 더 힘들었다 혹은 덜 힘들었다고 비교할 수 없어요. 각자 말할 수 없이 고통받으며 살아온 삶을 위로하고 격려하기를 바라요. 모두 여기까지 오느라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당신의 질문에서 “다른 사람은 치유되어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데, 나는 아직 치유되지 않았다”라는 서운한 마음이 느껴지네요. 하지만 당신도 치유될 거예요. 단지 조금 오래 걸릴 뿐 입니다.
 
당신의 상처가 다른 사람보다 깊어서가 아닙니다. 상처의 깊이에 따라 치유되는 시간이 결정되는 게 아니거든요. 치유는 하나님의 손에 달렸어요. 하나님 입장에서는 더 큰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더 능력이 필요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이시고, 말씀 한마디로 우리를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마음이 급할수록 치유가 오래 걸린다고 느낄 거예요. 주변을 보면 자신을 빼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치유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 진실이 아니에요. 각자 자기 문제로 충분히 고통받아요. 말끔히 치유된 게 아니라 그 과정 가운데 있습니다.
 
누군가 “나는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 이렇게 치유되었다”라고 말했다고 치유가 끝났다는 의미는 아닐 거예요. 치유가 시작되었고, 과정 중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위축되지 마세요. 당신이 예수님을 만났다면, 당신 역시 치유되는 과정인 겁니다.
 
나도 아내 앞에서 바보처럼 울어버린 적이 있거든요. 아내에게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치유하겠어. 나도 아직 치유되지 않았고, 당신도 행복하지 않은데 내가 어떻게 다른 부부를 돕겠어…”라고 하면서요.
 
예전에 심방을 갔는데 한 부부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며 상담을 요청했어요. 아내가 남편 때문에 살기 싫다고 하는데, 듣고 보니 그 남편이 나보다 좋은 남편이었어요. 나는 생각했어요.
 
‘만약 내가 행복한 가정에서 상처 없이 자랐어도 이렇게까지 힘들까?’
 
내가 보기에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목회자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목회도 편히 하는 것 같았어요. 나는 너무 답답하고 서러워서 아내에게 말하며 엉엉 울었습니다. 아내가 도와준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서 버틸 수 있었어요.
 
나는 지금도 내가 치유되고 있다고 믿어요. 오래 걸리겠지만 기다리려 해요. 조급해한다고 더 빨리 치유되는 게 아니니까요.
 
당신은 남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 았어요. 당신이 겪은 일과 고통은 아무도 모를 거예요. 하지만 걱정 말아요. 주님이 아시고 당신을 도와주실 거예요.
 
당신의 생각보다 더딜 뿐, 치유는 이미 시작되었어요. 주변을 바라보면 속도에 신경을 쓰고,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비교하게 됩니다. 예수님만 바라보세요. 그러면 방향에 신경을 쓰게 됩니다. 그분이 눈앞에 보이면 안심되고,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다면 안전한 거예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걸어요. 몇 걸음 걸었나, 몇 걸음 남았나 계산하지 말아요. 멀어서 안 보이는데, 예수님도 걸어 오고 계세요. 당신이 그분 품에 안겨 함박웃음 짓는 날까지 당신을 응원할게요.

왜곡을 다루는 방법

크리스천이라면 당연히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상처를 치유하고 싶을 거예요.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아서 문제지요.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세요.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상처를 치유하자는 말을 들으면 막연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요. 나 역시 그랬으니까요.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내 상처를 어떻게 돌볼지 몰라 힘들었어요.
 
예수님을 사랑해도 아프니까 내 믿음이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분을 사랑하면 상처로 고통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예수님을 오해한 거예요.
 
뒤늦게 내가 고통받을 때, 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았어요.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감정으로 고통받을 때, 그에 앞서 특정한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 생각이 파괴적이면 인생이 파괴됩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시작되지요.
 
예를 들어볼게요. 사람들은 설교 잘하는 목사를 좋아합니다. 나 역시 설교를 잘하고 싶어요. 그래서인지 목회할 때나 지금이나 설교가 항상 부담입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설교하거나, 청중의 수준이 높으면 더 큰 부담을 느끼지요.
 
나는 왜 설교를 잘하고 싶을까요? 나는 답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내가 앞서기 때문이에요. 설교 잘해서 인정받고 싶은 겁니다. 뻔한 답이지만 나는 자주 잊어요.
 
설교라는 행위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설교를 대하는 특정한 생각이 문제입니다.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생각이 찾아오는데, 그 생각에 복음이 없으면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복음 없는 생각을 발견하면, 그 생각을 구체화해서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정확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돌볼 수 있습니다.
 
설교를 망치면 사람들이 날 무시할 거야.”
“더듬거리거나 실수하면 내가 준비가 안 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
“설교로 감동을 주지 않으면 사람들이 더 듣지 않을 거야.”
 
모두 거짓말이지만, 내게는 진실처럼 다가옵니다. 이때 나를 돌보지 않으면 나는 빠른 속도로 파괴됩니다. 빨리 멈춤 버튼 을 누르고, 복음이 없는 지점을 찾아야 해요. 그리고 명확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마치 적의 심장부에 폭격을 하듯이.
 
그리고 거짓에 대응하는 진실을 찾아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복음적인 문장을 찾아내서 파괴적인 문장과 일대일 대응을 시키지요. 이것은 쉽지 않아요. 복음적인 문장이 떠오 르지 않으면 예수님과 가상의 대화를 시도합니다.
 
“예수님, 설교가 부담스러워요. 제가 더듬거나 실수하면 사람들이 저를 무시하고 속으로 비웃을 거예요. 저는 꼭 사람들을 감동시켜야 해요. 그래야 제 이야기를 들어줄 거니까요. 사람들이 더 이상 날 찾지 않으면 어쩌죠.”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해주실까요? 어떤 말씀을 해주시는지에 따라 내가 그분을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먼저 내가 오랫동안 오해한 예수님을 말해볼게요.
 
“두려워 마라. 내가 너를 세웠다. 담대하게 선포하라. 내가 너를 도울 것이다. 너는 작은 그릇이 아니라 큰 그릇이다. 내가 너를 수많은 사람 앞에 세우고, 내 영광을 드러내겠다. 이제 시작이다. 더 큰 꿈을 꿔라.”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성경에 비슷한 말씀이 여러 군데 있지요. 문제는 말씀 자체가 아니라 내 욕망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교묘하게 섞어서 포장을 제법 잘한 겁니다. 나 자신도 모를 만큼 그럴싸하게 잘 섞어서 나도, 다른 사람도 속인 겁니다.
 
지금 나는 과거와 다른 예수님을 만납니다. 따뜻하게 나를 돌봐주시고, 한없이 사랑해주시고, 온전히 이해해주시는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그래, 정말 두려울 거야. 하지만 포기하지는 말렴. 지금처럼 용기를 내서 나를 전해주겠니? 나는 사람들이 너를 기억하지 않고 나를 기억하길 바란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에 대해 말해주겠니? 사람들이 널 잊을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단다. 사람 들이 더 이상 널 찾지 않아도, 내가 너를 기억하고 책임질 거니까. 지금부터는 오히려 잊히기 위해 애를 쓰렴.”
 
예수님은 먼저 내 감정을 사랑으로 받아주십니다. 그리고 진실을 말해주십니다. 진실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분의 사랑과 말씀으로 나를 돌본다는 말은, 내 감정을 수용해주시며 진실을 말씀해주신다는 뜻입니다.
 
내게는 말할 수 없이 큰 위로입니다. 나는 상처를 외면하거나 고통을 만회할 대안을 찾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품에 안길 뿐이에요. 그 순간만큼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나는 매주 여러 번 설교합니다. 부담은 여전하지만 내가 나를 돌보지 않으면 사람들의 인정을 구걸하다가 스스로 포기해버리고 말겠죠.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나를 돌보면서 지속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기억해주시는 한, 그분을 전할 것입니다. 내 설교가 형편없어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전하고 싶습니다.
 
고통이 시작될 때, 자신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그리고 그 안에서 복음 없는 생각을 찾아내어 명확한 문장으로 표현해보세요. 그리고 예수님과 솔직한 대화를 시작하세요. 그분이 따뜻한 진실을 말씀해주실 거예요.
 
포기하지 마세요. 평생 반복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분의 사랑과 말씀으로 나를 계속 돌봐주세요.

나를 어떻게 돌보나요?

자기를 돌보자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에요. 하지만 나 자신을 어떻게 돌볼지 모르겠습니다. 자기를 돌보자는 말이 무슨 뜻인가요?
 
먼저 ‘자기 사랑’과 ‘자기 돌봄’이 다름을 말하고 싶어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쓰는지 모르지만 나는 두 단어를 다른 의미로 씁니다. ‘자기 사랑’이란 말 자체를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삶은 때로는 이기적으로 변질될 수 있거든요. 세상은 이미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넘쳐납니다. 또 많은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자는 구호를 외칩니다. 나까지 소리치지 않아도 이미 귀가 아프도록 같은 말을 듣고 있지요.
 
솔직히 ‘자기 사랑’이란 말 자체가 성경적인가 의심스럽습니다. 단정적으로 표현해서 오해를 살까 걱정이 되지만, 기독교는 ‘자기 사랑’이 아니라 ‘자기 부인’을 말합니다. 자신을 부인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를 사랑하지 말고, 나를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이 역설적으로 자신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사랑할 수 없는 이유는,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잘 알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예수님 앞에 서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형편없어도 그분 앞에 서면 고귀한 존재로 변화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만큼 확신 있게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삶이 자기를 돌보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으로 자신을 이끌어주는 삶이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에 관한 말씀, 그분이 하신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은 예수님에 관한 말씀이고, 신약성경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말 그대로 성경 전체입니다. 성경으로 우리 각자를 이끌어가는 삶이 곧 자기 돌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께 사랑받아야 합니다. 나는 상담을 하면서 ‘예수님을 진지하게 따르기는 하지만, 그분께 사랑받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은 예수님이 따뜻하지 않습니다. 그분께 거절당할까,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면서 따르지요. 예수님이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정서적으로 그분을 누리지 못합니다.
 
이것은 말씀 자체의 결함이 아닙니다. 말씀은 그 자체로 완전합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안의 해결되지 않은 상처와 상처로 고통받는 기억이 말씀과 예수님의 사랑을 왜곡시킵니다.
 
나 역시 상처 입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며 누구보다도 열심히 성경을 연구했지만, 그분을 단단히 오해하며 살았습니다. 상처의 렌즈로 말씀을 읽었고, 예수님과 비틀어진 관계로 오랜 시간 고통받았지요.
 
이제, 나는 당신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자신 안의 상처를 돌보는 삶을 시작하자고. 그분의 사랑과 말씀으로 자신 안의 상처를 따뜻하게 돌봐야 치유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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