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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창세기

하나님을 비웃어 버렸다

<창세기 17:17>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웃으며, 마음으로 혼잣말을 했습니다. “어떻게 백 살이나 먹은 사람이 아기를 낳을 수 있을까?
 
From 아브라함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다고 하셨을 때, 나는 비웃었어요. 당연하지요. 나는 이미 100세였고, 아내 사라는 90세였습니다. 늙을 대로 늙은 두 사람이 어떻게 아들을 낳겠어요? 
 
나는 말했습니다. “아이고, 하나님. 됐으니까, 지금 있는 아들에게나 복을 주세요. 종의 몸을 통해서 낳았지만, 그래도 내 자식입니다.” 
 
믿음 없는 말이지요? 하나님을 조롱할 의도는 없었지만, 그렇게 됐습니다. 무심결에 말해놓고, 잔뜩 긴장했지요.  
 
믿음 없다고 혼내실 줄 알았거든요. 별 볼일 없는 믿음에 실망해서, 나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나버리실까 걱정했지요. 
 
하나님의 반응은 내 예상과 달랐습니다. 
 
“그래, 네가 말한 그 아들에게도 복을 주겠다. 하지만, 그 아들이 내가 약속한 자녀는 아니다. 내년 이맘때 네가, 자녀를 낳을 것이다. 내가 약속한 아들이다.” 
 
하나님은 믿음이 부족한 나를 이해하셨습니다. 은혜를 베푸셨지요. 나는 당황했습니다. 덤으로, 종의 몸에서 난 아들까지 축복해주셨으니까요.    
 
내 아내 사라도 믿음이 부족한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남편에 그 아내였을까요? 아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속으로 비웃어버렸습니다. 
 
“그렇면 좋게요? 남편과 내가 이렇게 늙었는데,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겠어요?” 
 
그 당시 나와 아내는 하나님을 잘 모르고, 우리의 처지를 스스로 비웃고 조롱했지요. 
 
나도 내 나름대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내 현실이 너무나 슬프고 끔찍해서, 하나님이 바꾸실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지요. 
 
“아무리 하나님이시라도, 내 상황은 못 바꾸신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믿음 없는 나에게 막상 아들을 주시자,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비웃던 사라는, 기쁨의 웃음이 터져버렸습니다. 아이를 품에 안고 하나님을 찬양했지요.   
 
“하나님께서 내게 웃음을 주셨다.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도 나처럼 웃게 될 것이다. 내가 아이를 낳을 수 있으리라고 어느 누가 알았겠는가!”
 
그제서야, 나는 기억났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아셨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말씀입니다. 
 
“네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아들을 낳으면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여라.” 
 
내 아들의 이름은 처음부터 “이삭”이었어요. 이름의 뜻이 “웃음”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웃음”을 주신다고 했는데, 나는 믿지 못해서, 하나님을 비웃어 버렸습니다.  
 
내가 훗날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린다니, 부끄러울 뿐입니다. 내 믿음으로 이룬 결과가 아닙니다. 믿음 없는 나에게 거저 주신 은혜입니다. 
 
인생이 힘들 때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땅만 쳐다봅니다. 엄연한 현실 앞에서, 감히 꿈조차 꿀 수 없습니다. 형편과 처지를 탓하며, 자신을 조롱하고 비웃습니다.  
 
나는 부탁합니다. 당신의 믿음을 하찮게 여기지 마세요. 당신의 믿음이 부족해서, 하나님이 못 도와주실 것이라 단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입니다.  
 
당신이 힘들어서 웃을 수 없다는 걸 압니다. 나도 그랬으니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셔서, 우리를 잘 아십니다. 우리의 연약한 믿음마저도 배려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나는 당신을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약속하신 모든 일을 이루십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마세요.   
 
결국, 당신도 웃게 될 겁니다.  

존재를 받으시는 하나님

<창세기 4:4-5>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면 기뻐하실까요? 가장 좋은 것을 드려야겠지요. 동의해요. 하나님께 대충 드릴 수는 없잖아요. 
 
그러면,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인가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잘 모르겠어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고 있나요? 누군가 물으면, 가만히 고개를 숙이죠. 누가 이 질문에 떳떳하겠어요.  
 
열정적으로 헌신해 보세요. 가장 좋은 것을 드리고 싶지만, 항상 부족한 것 같아요. 더 열심히 해야 하는데…. 습관처럼 내뱉은 말이죠.  
 
과감하게 큰 금액을 헌금해보세요. 왠지 더 드려야 할 것 같아요. 불현듯 아깝다는 생각이라도 해버리면,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에 부끄러워요.  
 
직업적 성취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해보세요. 원하는 대로 안돼요. 자신보다 성공한 사람의 신앙 간증을 들으면, 나름대로 도전은 되는데, 내 인생은 이게 뭔가, 은근히 주눅 들어요. 
 
뭘 드릴까 고민하면, 하나님을 오해해요. 하나님은 당신이 가져온 것에 별로 관심 없으세요. 하나님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으세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고 싶다면, 당신이 가진 무엇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드리세요. 하나님에게 가장 좋은 것은 당신이에요. 당신이 예수님으로 기뻐하는 그 모습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세요. 
 
내 주장이 아니에요. 하나님 말씀이에요. 가인과 아벨이 아시죠? 하나님은 가인의 것은 거절하시고, 아벨의 것은 받아주셨어요. 차이가 뭘까요? 
 
제물의 종류일까요? 아벨은 피의 제사를 드려서 받아주셨고, 가인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려서 거절했을까요? 아니에요. 하나님은 곡식 제사도 받아주세요(레위기 2:2). 종류 차이는 아니에요.   
 
제물을 준비한 정성일까요? 아니요. 얼마나 정성을 다하면, 하나님이 만족하시겠어요. 아무리 정성을 다해도 부족해요. 정성 그 자체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는 없어요. 
 
그럼 뭘까요? 가인과 아벨의 제사 장면에서, 성경은 독특한 표현을 쓰거든요. 한 번 살펴볼게요. 
 
아벨과 그의 제물. 
가인과 그의 제물. 
 
제물을 드린 사람과 제물이 서로 묶여 있지요? 사람과 제물이 동시에 하나님께 드려진 거예요. 하나님은 제물을 드리는 사람과 제물 그 자체를 하나로 보세요.  
 
만약 제물이 서로 바꿔서 드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벨이 곡식을 드리고, 가인이 어린 양을 드렸다면요? 하나님이 가인의 것을 받아주셨을까요? 아니에요. 아벨의 것만 받으셨을 거예요. 
 
제물보다 사람이 중요해요. 하나님은 아벨의 중심, 다시 말해 진심을 아신 거예요. 
 
가장 좋은 것을 드린다는 명분으로, 혼자 애쓰지 마세요. 더 좋은 것을 드리다가, 가장 좋은 당신이 사라져요. 그러면, 나는 속상해요.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세요. 남들 보여주기 부끄럽고, 정성이 부족해도, 용기 내서 하나님께 나아가세요.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주눅 들지 마세요. 있는 모습 그대로의 당신을 드린다면, 그것으로 충분해요. 하나님은 말할 수 없이 기뻐하세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은 당신이에요.

나도 당신처럼 두려웠어요

<창세기 22장 7절>

이삭이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했습니다. “불과 장작은 있는데, 번제로 바칠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이삭이 물었습니다.
 
From 이삭
 
어느 날부터 아버지가 이상했어요. 항상 밝게 웃던 아버지가 웃음을 잃으셨거든요. 내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아버지는 내 앞에서 웃음을 잃은 적이 없어요. 오죽하면 내 이름을 “웃음”이라고 지었겠어요. 
 
웃음을 잃은 아버지는 며칠 동안 시름 시름 앓아누우셨어요. 그러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러 가자고 말씀하셨죠. 
 
몸도 안 좋으면서 그 높은 산을 어떻게 올라가려 하는지 걱정스러웠어요. 가는 내내 아버지는 쉬었다 걸었다를 반복했어요. 산이 가까워질수록 아버지의 발걸음은 점점 느려졌죠. 
 
산 입구에서 아버지는 종들에게 더 이상 따라오지 말라고 했어요. 나와 아버지, 단둘이 산을 오르기 시작했죠. 나는 불안했어요. 아버지가 평소와 달랐거든요. 하나님께 바칠 어린 양이 없었어요.  
 
나는 그제야 알았죠. 아버지가 나를 죽여서 바치려 한다는 사실을. 미치도록 두려웠어요. 다리가 후들거려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아버지를 거역할 수 없었죠. 
 
아버지가 날 죽이려 한다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온몸이 꽁꽁 묶일 때까지 나는 반항하지 않았어요. 제단에 누워 눈물만 흘렸지요.
 
아버지는 내 눈을 쳐다보지 않았어요. 칼을 뽑아들고 내 목을 찌르려 했어요.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숨을 멈췄어요. 이렇게 끝이구나 생각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어요. 아버지를 부르는 목소리였죠.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역시 그랬어요. 하나님이 아버지를 시험하셨던 거예요. 아버지가 아무 이유 없이 날 죽일 리 없었어요. 아버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마자 미친 사람처럼 흐느끼며 날 묶었던 끈을 풀어줬어요. 나를 힘껏 끌어안아주시며 엉엉 우셨어요. 날 안아주신 아버지의 품을 잊을 수 없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도 그 품이 그리울 정도니까요. 
 
하나님은 나 대신 숫양을 준비해주셨어요. 날 대신해서 죽은 숫양 덕분에 내가 살 수 있다는 감정이 정말 묘했어요.  
 
사람들이 묻더군요. 어떻게 어린아이가 모든 장면을 정확히 기억하냐고요? 오해하고 계세요. 어리지 않았어요. 영화에서 보니까 내가 꼬마 아이던데, 맞나요? 사실이 아니에요. 
 
나는 청년이었어요. 산을 오를 때, 장작을 짊어진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 나예요. 나는 아버지보다 힘도 세고 발도 빨랐어요. 
 
아버지는 백 살에 나를 낳았어요. 아버지가 날 힘으로 결박한 게 아니라, 내가 반항하지 않은 거예요. 내가 먼저 제단에 올라가 눕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힘으로 나를 제단 위로 올릴 수 없었지요. 
 
사람들이 내게 가끔 물어요. 아버지가 당신을 죽이려 했는데, 상처받지 않았냐고. 대답은 간단해요. 상처받지 않았어요. 그날 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하나님은 언제나 아버지의 하나님이셨어요. 처음으로 하나님 목소리를 직접 들었죠.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는 순간이었어요. 만약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상처받은 채 고통받으며 살았겠죠. 
 
내가 서 있었던 그 자리는 상처와 눈물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어요. 하늘의 별처럼 많아진 나의 후손들은 이 산을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기억했어요.    
 
나는 이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아버지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사람들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아버지가 주인공처럼 보일 거예요. 이 사건의 주인공은 아버지가 아니에요. 이 사건의 주인공은 바로 하나님이죠. 
 
일의 시작도 하나님이고, 일의 마침도 하나님이에요. 나와 아버지는 그저 무서웠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어요.   
 
나도 당신처럼 두려웠어요.
하나님이 살려주셨죠.

하나님은 존재를 받으신다

<창세기 4:4-5>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면 기뻐하실까요? 가장 좋은 것을 드려야겠지요. 동의해요. 하나님께 대충 드릴 수는 없잖아요. 
 
그러면,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인가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잘 모르겠어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고 있나요? 누군가 물으면, 가만히 고개를 숙이죠. 누가 이 질문에 떳떳하겠어요.  
 
열정적으로 헌신해 보세요. 가장 좋은 것을 드리고 싶지만, 항상 부족한 것 같아요. 더 열심히 해야 하는데…. 습관처럼 내뱉은 말이죠.  
 
과감하게 큰 금액을 헌금해보세요. 왠지 더 드려야 할 것 같아요. 불현듯 아깝다는 생각이라도 해버리면,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에 부끄러워요.  
 
직업적 성취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해보세요. 원하는 대로 안돼요. 자신보다 성공한 사람의 신앙 간증을 들으면, 나름대로 도전은 되는데, 내 인생은 이게 뭔가, 은근히 주눅 들어요. 
 
뭘 드릴까 고민하면, 하나님을 오해해요. 하나님은 당신이 가져온 것에 별로 관심 없으세요. 하나님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으세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고 싶다면, 당신이 가진 무엇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드리세요. 하나님에게 가장 좋은 것은 당신이에요. 당신이 예수님으로 기뻐하는 그 모습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세요. 
 
내 주장이 아니에요. 하나님 말씀이에요. 가인과 아벨이 아시죠? 하나님은 가인의 것은 거절하시고, 아벨의 것은 받아주셨어요. 차이가 뭘까요? 
 
제물의 종류일까요? 아벨은 피의 제사를 드려서 받아주셨고, 가인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려서 거절했을까요? 아니에요. 하나님은 곡식 제사도 받아주세요(레위기 2:2). 종류 차이는 아니에요.   
 
제물을 준비한 정성일까요? 아니요. 얼마나 정성을 다하면, 하나님이 만족하시겠어요. 아무리 정성을 다해도 부족해요. 정성 그 자체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는 없어요. 
 
그럼 뭘까요? 가인과 아벨의 제사 장면에서, 성경은 독특한 표현을 쓰거든요. 한 번 살펴볼게요. 
 
아벨과 그의 제물. 
가인과 그의 제물. 
 
제물을 드린 사람과 제물이 서로 묶여 있지요? 사람과 제물이 동시에 하나님께 드려진 거예요. 하나님은 제물을 드리는 사람과 제물 그 자체를 하나로 보세요.  
 
만약 제물이 서로 바꿔서 드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벨이 곡식을 드리고, 가인이 어린 양을 드렸다면요? 하나님이 가인의 것을 받아주셨을까요? 아니에요. 아벨의 것만 받으셨을 거예요. 
 
제물보다 사람이 중요해요. 하나님은 아벨의 중심, 다시 말해 진심을 아신 거예요. 
 
가장 좋은 것을 드린다는 명분으로, 혼자 애쓰지 마세요. 더 좋은 것을 드리다가, 가장 좋은 당신이 사라져요. 그러면, 나는 속상해요.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세요. 남들 보여주기 부끄럽고, 정성이 부족해도, 용기 내서 하나님께 나아가세요.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주눅 들지 마세요. 있는 모습 그대로의 당신을 드린다면, 그것으로 충분해요. 하나님은 말할 수 없이 기뻐하세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은 당신이에요.

남편을 통제할 수 없다

<창세기 3:16> 

하나님께서 여자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아기를 가지는 고통을 크게 하고, 너는 고통 중에 아기를 낳게 될 것이다. 너는 네 남편을 지배하려 할 것이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
 
부부 상담은 첫 세션부터 긴장돼요. 부부가 웬만한 문제로는 상담받으러 안 오거든요. 힘들게 첫걸음을 떼면, 그다음부터는 각본 없는 드라마가 펼쳐져요. 드라마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될지도 모르고, 등장인물이 무슨 말을 할지조차 몰라요. 
 
각본 없는 드라마라도 반복되는 패턴이 있겠죠? 감독, 배우, 줄거리는 달라져도, 장르가 가지는 기본적인 플롯이 있어요. 기승전결이죠. 반복되는 패턴 중에 하나를 다루어볼게요. 
 
“추격자와 도피자” 패턴이 있어요. 부부 중 한 사람은 항상 잡으러 다니고, 나머지 한 사람은 도망을 다녀요. 누가 잡으러 다니고, 누가 도망 다닐까요? 아내가 잡으러 다니고, 남편이 도망 다녀요. 예외도 있겠지만, 주로 그래요. 
 
아내는 남편과 정서적으로 멀어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껴요. 남편이 다른 일로 바쁘거나, 시댁의 편을 든다거나, 무뚝뚝하면 큰일 나요. 남편이 무심결에 그랬어도, 아내에게는 긴급상황이죠. 남편에게는 선택의 문제지만, 아내에는 존재의 문제거든요.       
 
아내는 남편과 통(通)하고 싶은 거예요. 연결되고 싶은 거죠. 하지만, 남편은 오해하거든요. 남편은 통제받는다고 느껴요. “아내 부탁 들어줘도 끝이 없다. 어느 선까지만 하고 말자.” 아내는 쫓고, 남편은 쫓기는 비극이 시작되는 거죠.  
 
오늘은 아내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할게요. 
 
남편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 하나님도 아실 거예요. 하지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에 변화가 필요해요. 지금 그 방식으로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실 거예요.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방아쇠가 당겨지거든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상태가 될 거예요. 당신만 그런 게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인류 최초의 아내, 하와도 그랬거든요. 어쩌면, 타락 이후에 반복되는 부부 문제일 수 있어요. 모든 아내들이 그렇다는 말이죠. 
 
  “너는 네 남편을 지배하려 할 것이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결핍을 가진 아내는 자기 방식대로 남편을 지배하고 싶어 해요. 결핍을 가진 남편은 자기 방식으로 가정을 다스리려고 하죠. 여기서 충돌이 일어나요.   
 
아내가 은혜받은 사람이라면, 조심스럽게 부탁드리고 싶어요. 남편을 놓아주세요. 남편을 지배하려고 하면 할수록, 남편은 도망쳐 버릴 거예요.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아내의 기준과 방식으로 짓누르지 말고, 숨을 쉬면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공간을 만들어주라는 부탁이에요. 
 
“내 남편하고 살아보세요. 온갖 나쁜 짓을 다 저지르는 사람이라고요. 술을 먹고 나를 때리고, 경제적인 능력은 쥐뿔도 없고, 심지어 다른 여자를 만나고 돌아다녀요.” 
 
나는 그런 남편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 남편이라면, 나쁜 사람이에요. 내가 마음에 두고, 아내에게 놓아주라고 부탁하는 남편은 그런 남편이 아니에요. 내가 마음에 그린 남편은, 서투른 남편이에요. 
 
내가 말하는 서투른 남편은, “자기 나름대로 한다고 하는데, 아내에게 인정도 못 받고 대우도 못 받는 남편이에요.” 아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서, 몸값이 한없이 낮아진 남편이죠.
 
하와의 결핍은 어쩌면 아담이 채워줄 수 없는 결핍이었어요. 하나님과의 단절로 일어난, 근원적인 결핍이에요. 서투른 남편이 성숙해지는 동안, 아내는 예수님께 사랑받으셔야 해요. 
 
남편과 통하고, 남편에게 사랑받아도 빈자리는 여전해요. 남편이 손에 쥔 퍼즐 조각은 아내의 빈자리에 맞지 않거든요. 예수님으로 빈자리를 채우셔야 해요. 그러다 보면, 서투른 남편도 있는 모습 그대로 이해해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거예요.  
 
더 이상 남편을 추격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따라가세요. 남편을 추격하면 남편이 도망가지만, 아내가 예수님을 따라가면 남편은 아내의 뒤를 따를 거예요. 말처럼 쉽지 않지요. 불안한 마음에, 뒤를 힐끔힐끔 보면서 남편이 잘 따라오나 확인하고 싶을 거예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남편이 금방 따라와서 아내의 손을 꼭 잡아줄 거예요. 그런 날, 꼭 올 거예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변명은 그만, 아내를 책임져라

<창세기 3: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라고 물었어요. 아담은 간단히 대답했지요. “하나님이에 저에게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줘서 먹었습니다.” 아담의 대답을 가만히 살펴보면, 자기 잘못은 전혀 없어요. 변명과 비난이에요.
 
아담은 말 한마디로, 하나님과 하와를 동시에 공격했어요. 일상적인 언어로 아담의 심정을 표현해 볼게요.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여자를 보내주셨나요? 왜 이 여자와 결혼하게 하셨어요? 내 가정이 이렇게 된 건, 전부 하나님 때문이에요. 만약 제가 이 여자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불행하지 않았을 거라고요!” 
 
아담이 자기변명을 하고, 하나님과 하와를 동시에 비난한 이유는, 죄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 때문일 거예요. 아담은 자기 합리화를 통해서, 죄의 당사자가 아니라 죄의 피해자가 되고 싶었어요. 
 
아담의 자기 합리화는 성공했을까요? 아니에요. 실패했어요. 성경은 아담이 죄의 당사자라고 분명히 말해요. 아담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요. 잘못을 책임지고 싶은 마음도 없었죠. 
 
죄를 짓고도 책임지지 않은 아담을 대신해서, 예수님이 오셨어요. 두 번째 아담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지만, 죄에 대한 책임을 지셨어요. 죽음의 형벌 앞에서 수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변명하지 않으셨어요. 죄에 대한 모든 책임을 끌어안고 죽으셨기에, 우리는 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요. 
 
불행한 결혼 생활의 중심에는 책임지지 않는 남편이 있어요. 남편은 억울하겠지요. 곧바로 따져 묻고 싶을 거예요. “나만 잘못했나요? 아내 잘못도 있어요.” 맞아요. 당신 말이 맞을 거예요. 
 
오늘은 남편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어요. 아내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어요. 기회가 되면, 나중에 할게요. 너무 억울해 마시고, 조금만 더 들어주세요. 
 
남편에게 한 가지만 더 묻고 싶어요. “남편 잘못, 아내 잘못 서로 골고루 말하면, 그에 대한 책임은 누가 감당할까요?” 각자의 잘못을 인정하면, 서로 책임질 것 같지요?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네가 그러니까, 나도 이러는 거야. 너부터 잘해. 너 하는 거 봐서, 나도 잘할게.” 조건을 붙이면, 남편과 아내 두 사람 모두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결과적으로,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요. 
 
행복한 가정에는 아내를 책임지는 남편이 있어요. 남편 혼자 감당하기 힘들겠지요. 억울하고 답답하겠지요. 남편에게 부탁하고 싶어요. 무거운 짐, 혼자 짊어지지 마세요. 예수님께 모든 책임을 떠넘기세요. 어깨가 가벼워진 남편은, 아내를 돌볼 수 있어요.  
 
나는 어떤 남편일까요? 부끄러워요.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만큼 모범적이지는 않아요.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하고 싶어요. 나는 아내에게 바라는 것 없어요. 아내가 나를 돌봐줄 필요 없어요. 아내는 나를 돌봐줘야 할 사람이 아니라, 내가 일방적으로 돌보고 책임지고 사랑해야 할 사람이에요. 
 
“아내는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마지막 영혼이다.” 
 
내 진심이에요. 하나님은 내가 수천 명을 변화시킨 것보다, 수백 가정을 회복시킨 것보다, 내 아내를 사랑하고 돌보는 내 모습에 더욱 기뻐하실 거예요. 나는 그렇게 믿어요, 정말로.

감정에 속지 마세요

<창세기 3: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졌어요. 서로가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았죠.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어요. 무화과 나뭇잎으로 수치를 가리고, 숲속 깊은 곳에 들어가 서로 다른 곳에 꼭꼭 숨었죠.
 
아담과 하와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은혜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따뜻하게 느껴져요. 은혜가 풍성할 때, 하나님이 부르신다면, 당장에 달려가 그 품에 안길 수 있어요.  
 
하지만, 은혜가 사라졌다고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이 따뜻하지 않아요. 죄를 짓고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이 두렵게 느껴져요. 
 
감정에 속아서 하나님을 오해하면, 
하나님이 무서워요. 
 
음산한 분위기의 스릴러 영화처럼, 하나님이 나를 잡아가실까 두렵거든요. 나무 틈 사이에 숨어서 식은땀을 흘려요. 하나님이 나를 못 보고 지나가시기를 바랄 뿐이에요. 
 
감정에 속으신 거예요. 
하나님을 오해하시면 안돼요. 
 
하나님은 우리를 잡아서 벌주시려고 에덴동산에 나타나신 게 아니에요. 평소처럼 우리가 보고 싶어서 오셨는데, 그 사이에 끔찍한 일이 벌어진 거죠.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은 우리가 걱정스러우셨어요.   
 
“내 자녀 어디 있니? 어디 숨어서 슬프게 울고 있니…. 두려워할 필요 없단다. 내게 나아오렴. 내가 너를 용서했단다.” 
 
잃어버린 자녀를 자녀를 찾듯이, 하나님은 간절히 우리의 이름을 부르세요. 아담과 하와를 찾아내신 하나님은, 부끄러움을 가려주셨어요. 
 
두려움에 떠는 아담과 하와에게 물으셨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셨지요. 일방적으로 혼내지 않으셨어요. 자초지종을 들어주셨고, 용서해주셨고, 새로운 기회를 주셨어요. 
 
하나님이 화내지 않으셨나고요?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세요. 하나님은 온유하셨어요. 아담이 하와에게 책임을 떠넘겨도, 하와가 변명해도, 하나님은 화내지 않으시고 끝까지 들어주세요. 
 
하나님은 딱 한 번 화를 내세요. 아담과 하와가 아닌 뱀에게요. 다시 한번 말할 게요.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화낸 적 없으세요. 뱀에게만 화를 내셨어요. 하나님을 절대로 오해하지 마세요. 
 
아담과 하와가 저주받지 않았나고요? 표면적으로 그렇죠. 하지만, 자세히 보면 저주라고 단정하기 어려워요. 노동의 고통은 보람의 열매이고, 출산의 고통은 해산의 기쁨이죠. 노동 자체는 신성한 것이고, 생명의 고귀함은 말할 것도 없지요.  
 
죄에 대한 대가는 죽음이었어요.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죽이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피할 길을 내시고, 참고 기다려주셨어요. 우리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세요. 
 
그래도 누군가는 벌을 받아야겠죠? 유일하게 저주받은 존재는 뱀이었어요. 뱀은 저주를 피할 수 없었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했으니까요. 뱀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을 하나님도 알고 계셨기에, 하나님은 확실한 약속을 주셨어요. 
 
“내가 너와 여자를 서로 원수가 되게 하고, 네 자손과 여자의 자손도 원수가 되게 할 것이다. 여자의 자손이 네 머리를 부수고, 너는 그의 발꿈치를 물 것이다.” – 창세기 3:15
 
성경에서 처음으로 선포되는 복음이에요. 여자의 자손은, 바로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이죠. 죽음으로 승리하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고, 어둠의 권세를 짓밟아주신다고 약속하셨어요. 
 
죄로 인한 수치심이 우리를 짓눌러도, 절대로 잊지 마세요. 수치심은 감정일 뿐이에요. 감정에 속지 마세요. 우리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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