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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자녀교육

당신은 좋은 부모가 될 수 없어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아요.
용서했지만 친밀해지기 힘들어요.
그냥 그런가 보다 해요.
어쩔 수 없으니까요.
 
나도 엄마가 되었어요.
아이가 어릴 때는 몰랐는데
지금은 말이 통하지 않아요.
아이가 날 원망하면 어떻게 하죠.
엄마가 내 인생 망쳤다고.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어요.
나처럼 키우고 싶지 않아서
최선을 다했는데
결국 이렇게 돼버렸어요.
 
나 때문이에요.
내가 상처 없이 자랐다면
내가 사랑받고 자랐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예요.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당신은 좋은 엄마예요,
라는 말은 안 할게요.
그런 말 많이 들었을 거예요, 아마.
가벼운 위로는 안 하고 싶어요.
 
그 대신 질문할게요.
당신은 당신 엄마보다 좋은 엄마인가요.
네,라고 말씀하셨어요.
나도 동의해요.
당신은 노력했어요.
 
내가 당신의 말을 잘 이해했다면
당신은 희망을 품고 날 찾아온 거예요.
그 마음을 잘 표현하면 이런 뜻이에요.
나는 지금보다 더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
 
지금까지 아이를 잘 키우다가
특정한 상황에 놓여
잠시 절망하신 것 같아요.
지금이 힘든 거예요.
지금까지 잘 견뎌주셨어요.
 
앞으로 어떻게 할까 알려드리고 싶은데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어요.
 
좋은 부모가 되는 방법
나는 몰라요.
내가 좋은 부모가 아니라서요.
어쩌면 당신보다 내가 더 심각한 상황일지 몰라요.
아이들을 끌어앉고 절벽으로 뛰어내렸으니까요.
아빠로서 죄책감이 심해요.
 
가끔 상상을 해요.
누군가 다가와서 말해요.
너는 상처가 많아서 좋은 아빠가 될 수 없어.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가 있어.
내가 화내며 대꾸하겠죠.
 
상처받으며 산 건도 억울한데
상처 때문에 좋은 아빠가 될 수 없다니요.
어릴 때 맞은 매보다 그 말이 더 아파요.
차라리 나를 벌거벗겨 놓고
온몸이 파래질 때까지 때리세요.
그게 덜 아플 것 같아요.
나한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에이, 말이 그렇다는 거죠?
누가 그런 나쁜 말을 하겠어요.
다들 상식이 있는데.
 
남 일이라고 쉽게 생각하시네요.
내가 나한테 자주 그런 말해요.
애써 부인해보지만 사실이에요.
내 상처 때문에 좋은 아빠 되기 힘들어요.
내가 살면서 느껴요.
 
아무도 모를 거예요.
내가 얼마나 못난 아빠인지.
애들만 생각하면 눈물이 흘러요.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어요.
내 몸에서 나쁜 피를 전부 뽑아내고
새로운 피로 바꿔서라도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어요.
 
나중에 깨달았어요.
그럴 필요 없다는 사실을.
이제 내 몸에는 새로운 피가 흐르거든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그 보혈의 능력으로
나는 새로운 혈액형을 받았죠.
 
내 아이들은 나의 피를 물려받지 않아요.
내 아이들의 몸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흘러요.
그 피로 심장이 뛰고
그 피로 키가 자라고
그 피로 강해질 거예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엄마,
기도하는 모습이 아름다운 당신 덕분에
아이들은 당신처럼 자라지 않을 거예요.
예수님처럼 자랄 거예요.
 
예수님 닮은 당신을 통해
당신의 아이가 예수님 닮기를
나는 간절히 바랍니다.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하나님 사랑이
느껴지지 않아요.
 
하나님은
날 사랑하지 않아요.
 
사랑받은 적 있나요.
누구에게라도.
 
아무도 없었군요.
내 마음이 아파요.
 
내 부모도 날 사랑하지 않았어요.
이제 하나님도 날 거부해요.
 
하나님이라고 부르면
그나마 괜찮은데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면
마음이 불편해요.
 
아버지라고 하는 순간
복잡한 감정이 밀려와요.
 
무서운 아버지.
무관심 아버지.
 
그 아버지가
이 아버지가 아닌데.
 
이상하다.
참 이상하다.
 
외롭고
쓸쓸해져요.
 
그렇군요.
그럴 수 있어요.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을 수 있죠.
 
사랑받은 적 없어서
사랑받는 게 뭔지 모른다고 하셨죠?
 
자녀를
사랑하시나요.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고요.
 
자녀 대신
죽을 수도 있다고요.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다면서
자녀를 사랑하는 이유가 뭔가요.
 
어디에서
시작된 사랑일까요.
 
당신 안에 사랑이 없잖아요.
사랑받지 못했다면서요.
 
자녀 대신 죽을 수 있다는 말,
진심이란 걸 알아요.
 
혹시,
정말 혹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랑
받은 적 있나요.
 
누군가 당신을 위해
대신 죽기라도 한 것처럼
 
당당해서
물었어요.
 
이제 아시겠나요.
당신은 사랑받고 있어요.
 
부모 사랑으로
하나님 사랑을 느낄 수 없다면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추적하세요.
 
상처투성이 당신도
자녀를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으면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쉽게 결론 내릴 수 있나요.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사랑을 느껴보세요.
 
내 이야기
잠시 해도 될까요.
 
내 딸이 이마에 깊은 상처를 입어
피를 콸콸 쏟은 적이 있어요.
 
이 삼십 바늘 꿰매서
치료했어요.
 
딸을 지켜주지 못했단 생각에
나는 괴로웠어요.
 
밤이면 밤마다 딸이 잠들면
그 옆에서 울고 또 울었죠.
 
속상해 죽겠는데
하나님이 한 마디 툭 던졌어요.
 
네 딸 살이 찢기니 괴롭겠구나.
나도 내 아들 살이 찢길 때 괴로웠다.
 
온 세상이 멈춘 것처럼
고요했어요.
 
내가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내 딸이 다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토록 깊이 느낄 수 있었을까요.
 
부모인 우리는 자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어요.
 
나 외로워요.
당신은 어디 있나요.
 
당신이 하나님을 찾을 때마다
그가 말씀하시기를 바랍니다.
 
네가 네 자녀를 사랑하듯
나도 너를 사랑한다.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
 
당신이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든지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이
당신에게 전해지기를 기도합니다.

당신은 좋은 부모인가요

당신은
좋은 부모인가요?
 
네, 물론이죠.
나는 좋은 부모입니다.
 
두 번 자녀를 키워도
이렇게 못 키워요.
 
우리 애들 부족한 거 없어요.
나는 얼마나 어렵게 컸는데.
 
내가 해줄 말이 별로 없네요.
그럼, 안녕히.
 
당신은요?
당신은 좋은 부모인가요.
 
아니오.
나는 좋은 부모가 아니에요.
 
애들한테 너무 미안해요.
못 해준 게 너무 많아요.
 
나 같은 부모 만나서
우리 애들 고생 많이 했어요.
 
그렇군요.
대화 좀 할까요, 우리.
 
당신은 좋은 부모일지도 몰라요.
한 가지만 조심한다면.
 
그건 뭔가요?
죄책감입니다.
 
죄책감이 자녀를
망칠 수 있어요.
 
자녀 앞에서
당당한 사람 불안해 보여요.
 
자신감 없는 게
오히려 다행이에요.
 
당당한 부모를
만난 적이 있어요.
 
당당한 부모는   
주눅 든 자녀가 있어요.
 
나는 최선 다한다.
넌 이게 뭐냐.
 
왜 노력 안 하냐.
결과가 이게 뭐냐.
 
자녀는 고개만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못해요.
 
그런데, 참 이상하죠.
정반대의 경우도 있어요.
 
주눅 든 부모 옆에는
당당한 자녀가 있어요.
 
내가 이렇게 된 게
다 부모 때문이다.
 
내 인생 망가졌다.
내 멋대로 살 거다.
 
터무니없는 말을 하고
그 말을 믿고 살아요.
 
부모가 죄책감을 느끼는 사이
자녀는 책임감에서 벗어난 거죠.
 
부모가 당당하면
자녀가 주눅 들고
 
부모가 주눅 들면
자녀가 당당하니
 
어떻게 할까요.
답답하죠, 정말.
 
내 이야기 잠시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내 부모님은 나에게
늘 미안하다고 말해요.
 
아니라고 괜찮다고 말해도
소용없어요.
 
많이 우세요.
난 속상하죠.
 
나는 진심이에요.
정말 감사해요.
 
내 부모님은 나에게
예수님을 전해줬어요.
 
모든 것을 받은 거죠.
예수님을 선물 받았으니까.
 
아버지가 시골에서 목회할 때
성도 한 명 없어요.
 
그때는 몰랐죠.
정말로 몰랐죠.
 
내게 복음이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처받은 내가 자녀를
잘 키우고 있을까요.
 
정말 모르겠어요.
확신이 없어요.
 
언젠가 청년이 된 내 아들과
대화하는 장면을 상상해요.
 
아빠, 나 아빠한테
하고 싶은 말 있어.
  
아빠가 나 사랑하고
아빠가 최선을 다했다는 거 알아.
 
하지만, 아빠가 했던 말과 행동이 내게
상처 될 때도 있었어.
 
솔직히 말하면,
나 아빠처럼 살고 싶지 않아.
 
나 이해해줄 수 있지,
아빠?
 
하지만, 나….
예수님처럼 살고 싶어.
 
그래, 아들.
아빠는 괜찮아.
 
아빠처럼 살지 말고
예수님처럼 살아다오.
 
속상해야 하는데.
서운해야 하는데.
 
아빠는 왜 이렇게
눈물이 나고 행복할까.
 
그날을 꿈꾸면서 나는
자녀에게 꾸준히 예수님을 전해요.
 
내 상처가 혹시라도
자녀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무섭고 두려울 때마다
예수님께 말해요.
 
나 대신 내 자녀들
잘 키워주세요.
 
당신과 함께 하고 싶어요.
약속해요, 우리.
 
죄책감이 찾아올 때마다
우리 자녀에게
예수님의 따듯한 사랑 전해주기로.

당신의 오늘이 있기까지

From 어린 사무엘 
 
누구나 부모님께 서운한 일이 있겠지요. 나도 마찬가지였어요. 내가 젖을 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나를 하나님께 바쳤어요.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순종을 이해하기 어린 나이였지요. 
 
나는 항상 어머니의 품이 그리웠어요. 어머니가 한 번씩 예배하러 올라오시면, 나를 마주 앉혀 놓고,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어요. 어머니와 함께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낸 적이 없어요. 말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지요. 
 
어머니가 왔다가 떠나간 그날 밤은, 외롭고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어두운 성막 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 많이 울었어요. ‘어머니는 왜 나한테 한 번도 묻지도 않고, 나를 이런 곳에 버려두었을까?’ 
 
어머니는 항상 말했어요. 내가 하나님의 응답으로 태어난 아이라고. 하나님과의 약속이니, 어쩔 수 없다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속상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어요. 엘리 제사장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사무엘아!”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엘리 제사장에게로 달려갔어요.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부르셨습니까?” 
 
하지만, 엘리 제사장은 저를 부르지 않았다고 말했어요. 
 
“나는 너를 부르지 않았다. 돌아가 자라.”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붙이려 하는데, 또다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사무엘아!”
 
세 번이나 같은 일이 반복되었어요. 세 번째 엘리 제사장에게 찾아갔을 때, 엘리 제사장은 침대에서 비대한 몸을 일으키며, 내게 말했지요. 
 
“잠자리로 돌아가거라. 다시 너를 부르는 소리가 나면 ‘여호와여, 말씀하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제가 듣겠습니다’라고 말하여라.”
 
엘리 제사장의 말을 듣는 순간,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움찔했어요. ‘내가 지금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어머니에게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고?’ 
 
나는 침대에 누워있을 뿐,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어요. 이리저리 뒤척이며, 빨리 아침이 되기를 바랐지요. 하지만, 또다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어요. 
 
“사무엘아, 사무엘아”
 
나는 엘리 제사장이 시키는 대로, 침대에서 내려와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대답했어요. 
 
“여호와여, 말씀하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제가 듣겠습니다.”
 
하나님은 내게 엘리 제사장과 그 가문에 대해, 자세한 말씀을 전해주셨어요. 
 
“내가 이스라엘에 어떤 일을 하려고 한다. 그 일을 듣는 사람은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그 날에 내가 엘리와 그의 집안에게 말했던 일을 다 이룰 것이다. 하나도 빠짐없이 이룰 것이다.
 
엘리는 자기 아들들이 나쁘다는 것을 알았다. 또 자기의 아들들이 나를 배반한 것도 알았다. 그러나 엘리는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엘리의 가족을 영원토록 벌주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엘리의 가족에게 이렇게 맹세했다. ‘엘리 가족의 죄는 제물이나 예물로도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어요. 아침이 되자마자, 나는 언제 그랬냐는듯이 평소처럼 여호와의 집 문을 열었어요. 엘리 제사장이 어젯밤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렸기를 바라면서요. 
 
내 바람과는 달리, 엘리 제사장은 내가 문을 열기가 무섭게 나를 찾으셨어요. 나를 불러 세우고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물었지요. 
 
나는 두려웠지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어요. 누가 가르쳐준 적은 없지만, 웬지 그래야 할 것 같았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니까요. 
 
엘리 제사장은 내 말을 끝까지 듣더니,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어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차분하게 말했지요. 
 
“그분은 여호와시다. 여호와께서는 스스로 생각하셔서 옳은 대로 하실 것이다.”
 
엘리 제사장이 측은해 보였어요. 제발 그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내가 그에게 전한 모든 메시지는 현실이 되었어요. 엘리 제사장과 그의 두 아들은 심판을 받았어요. 
 
그렇게 하나님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어요. 그날 이후로, 하나님은 수시로 나를 찾아와 말씀해 주셨어요. 나는 하나님께 들은 말씀, 있는 그대로를 사람들에게 전했어요.  
 
그 모든 말씀은 모두 현실이 되어 이루어졌어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의 사람들이 나를 예언자라고 불렀어요. 나는 그저 하나님께 들은 말씀을 전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했지요. 
 
어머니를 만나주신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셨을 때, 그제서야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동안 어머니를 적지 않게 오해했거든요. 
 
‘아무리 하나님이 좋지만, 어떻게 자식한테 이렇게까지 하시나?’ 
 
어머니가 자녀인 나를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한 것 같아서, 속으로 원망했지요. 하지만, 이제는 분명히 알아요. 어머님이 하나님께 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찾아와 만나주신 것이지요. 
 
어머니의 기도와 헌신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와 만나주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예요.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어주셨어요. 
 
세월이 흐르고 장성하면, 어머니의 신앙이 맹목적으로 보일 거예요. ‘뭘 저렇게까지 하시나?’ 어머니의 신앙에 동의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거 아세요? 
 
어머니는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할 줄 몰라요. 당신 자신을 위한 기도를 잊은 지 오래거든요.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 기도해요. 자녀의 이름을 부르고, 목이 메어 한 마디도 못하다가, 잘못한 기억이 떠오르면, 엉엉 울어요. 
 
당신이 주님을 만났다면, 어머니에게 감사하세요. 당신의 오늘이 있기까지, 어머니가 눈물로 기도했어요. 당신이 이룬 모든 것, 하나님이 어머니의 기도에 응답하신 거예요.  
 
어머니를 만나시면, 말없이 따뜻하게 안아주세요. 그러면, 내가 당신에게 편지를 쓴 보람이 있을 거예요. 내 편지를 끝까지 읽어준 당신에게 고마워요. 

아내의 빈자리

From 엘가나 (한나의 남편, 사무엘의 아버지)
 
내 아내 한나는 사랑스러운 여자입니다. 아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지요. 내가 최선을 다하면, 아내가 행복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인생이 뜻대로 안 되더군요. 
 
우리는 신혼 초부터 일찌감치 아이를 낳기로 했습니다. 한나는 하루라도 빨리, 아이를 품에 안아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질게도, 한나에게 아이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아내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습니다. 밤마다 슬프게 우는 아내를 안아주는 것이 일상이 되어갔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울면서 제게 말하더군요. 
 
“여보, 나는 당신을 위해 아이를 낳아줄 수가 없어요. 나를 버리시든가, 나를 대신할 다른 여자를 얻으셔야 해요.” 
 
나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화들짝 놀랐어요. 두 번 다시 그런 소리를 하지 말라고 했지만, 아내는 물러서지 않았어요. 내가 없는 틈을 타서, 브닌나라는 다른 여자를 데려다 놓았지요. 
 
나는 억지로 그 여자와 동침했고, 아이를 낳았어요. 모두 한나를 위한 것이었지요. 한나가 시키는 대로 하면, 한나가 행복할 것이라고 믿었어요. 역시나,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더군요.  
 
브닌나가 한나를 핍박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내 눈치를 보는 것 같더니, 아이를 낳은 이후부터는 대놓고 한나를 무시하더군요. 나는 두 여자 사이에서 말할 수 없이 괴로웠지요. 
 
하지만, 나는 한나를 더 사랑했어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나에게 더 많은 것을 주었지요. 브닌나도 그것을 알았고, 한나는 더 큰 고통에 놓이게 된 것이지요. 
 
한나는 성품이 온유한 사람이었어요. 정면으로 대응하는 법이 없었지요. 억울하고 답답할 때마다, 항상 하나님을 찾았어요. 남편이 얼마나 무능한지 알았던 것이지요. 
 
내가 어찌 그런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어요. 한나는 지혜롭고, 현명하고, 성숙한 여인이었어요. 남편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나에게 늘 반했지요. 
 
어느 날부터인가, 한나는 밝은 웃음을 되찾았어요. 마치 아기를 낳은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했지요. 나는 은근히 마음이 불안했어요. 하루아침에 사람이 그렇게 달라지니, 혹시 정신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싶었지요. 
 
내가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한나가 내게 말하더군요. 
 
“여보,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셨어요. 제게 자녀를 주신다고 약속했어요.” 
 
한나의 들뜬 감정을 망치고 싶지 않았어요. 분위기를 맞춰줬지요. 한나의 의견을 존중하고, 따랐어요. 내게 믿음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어요. 한나는 이미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하나님이 보란 듯이 아이를 주셨을 때, 나는 부끄러웠지요. 한나의 말은 모두 진실이었고, 하나님은 한나의 말대로 모든 상황을 인도해 주셨어요. 한나의 하나님은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셨어요. 
 
한나가 사무엘을 애지중지 키우는 것을 보며, 나는 한편으로 마음이 아팠어요. 한나는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칠 것이라 말했고, 그 표정이 슬퍼 보였거든요. 나는 조심스럽게 한나에게 부탁했어요. 
 
“여보, 그냥 아이를 우리가 데리고 키우면 안 되겠소? 어차피, 이 아이는 나실인이요. 우리가 품에 안고 거룩하게 키웁시다.” 
 
한나는 그럴 수 없다고 주저하지 않고 말하더군요. 한나의 목소리와 말투가 사뭇 진지해, 그다음부터는 말도 못 꺼냈지요. 한편으로는, 한나가 과연 사무엘을 떠나보낼 수 있을까, 걱정스럽더군요. 
 
사무엘이 젖을 떼자, 한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성전으로 올라가자고 말했어요.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목소리였지요. 성전으로 올라가는 여정 내내, 한나는 사무엘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어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프더군요. 
 
한나는 결국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쳤고, 사무엘은 성전에서 자라게 되었지요. 하나님은 사무엘을 민족의 지도자로 세워주셨고, 우리에게 또 다른 다섯 자녀를 선물로 주셨지요.  
 
나는 아내를 마음속 깊이 존경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연약한 여자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요. 그녀의 믿음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이지만, 아내를 위해 모든 것을 해줄 수 없습니다. 아내를 위해 최선을 다해도, 언제나 빈자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같이 있어주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을 경험해본 남편이라면, 내 말에 공감되시겠지요. 
 
당신이 나와 같은 남편이라면, 하나님이 절실합니다. 하나님만이 아내의 빈자리를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아내가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 아내 곁에 있어주셔야 합니다. 기도는 아내의 몫이라고, 뒷짐을 지고 계시면 안 됩니다. 
 
내가 못해주는 것을 하나님이 해주실 때,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내의 기도를 통해,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의 자녀 역시 혜택을 봅니다. 당신은 아내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아내가 원할 때, 언제든 따뜻하게 안아주세요. 
 
하나님이 아내의 빈자리를 채우시고, 아내의 기도와 헌신은 당신의 빈자리를 채웁니다. 절대로 손해 보는 일 아닙니다. 목숨을 다해, 아내를 사랑하세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엄마 품을 떠난 아이

From 한나
 
하나님은 내게 자녀를 주셨어요. 나는 그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지었지요. 사무엘이 방긋방긋 웃을 때마다, 천사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했어요. 하나님은 내 모든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주셨어요. 아기를 키우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지요. 
 
어느 날, 남편 엘가나가 조심스럽게 말하더군요. 
 
“부인, 사무엘을 성전에 바치지 말고, 우리가 데리고 키워봅시다. 사무엘을 굳이 성전에 바치지 않아도, 거룩한 나실인으로 키울 수 있소. 내가 매년 수차례 성전에 올라가니, 그때마다 사무엘을 데리고 다닙니다.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정을 이해하실 거요. 당신과 사무엘이 생이별을 하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을 것 같소.”
 
남편의 말에, 마음이 잠시 흔들렸어요. ‘정말 그럴까? 하나님도 이해해 주시지 않을까?’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셨어요. 아이를 품에 안고 기도할 때마다, 평안한 마음을 주셨어요. 
 
‘하나님께 눈물로 호소하여 얻은 아기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남편이 절기마다 성전에 올라갈 때, 함께 따라나서지 않았어요. 사무엘과 함께 있는 하루하루가 소중했으니까요. 사무엘과 하루라도 더 같이 있고 싶었거든요. 
 
나는 남편에게 말했어요.  
 
“이 아이가 젖을 떼면, 이 아이를 데리고 여호와를 뵈러 가겠어요. 그리고 이 아이를 영원히 그곳에 있게 하겠어요.”
 
남편은 나를 온전히 이해해 줬어요.  
 
“당신이 편한 대로 하시오. 아기가 젖을 뗄 때까지 나를 따라나서지 말고, 사무엘과 함께 집에 머무시오. 여호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오.” 
 
3년이 지나고, 사무엘이 젖을 뗐어요. 나는 사무엘을 품에 안고, 남편을 따라나섰지요. 남편과 함께 실로의 성전을 향하는 동안, 나는 잠시도 사무엘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사무엘이 방긋 웃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졌어요. 사무엘을 끌어안고 엉엉 울어버렸죠. 남편 엘가나가 말없이 내 등을 토닥였어요. 남편도 고개를 돌리고, 조용히 눈물을 닦았어요. 
 
우리는 금방 성전에 도착했어요. 분명 먼 길이었는데, 그 길이 그리도 짧게 느껴진 것이지요. 
 
성전에 들어가, 엘리 제사장을 만났어요. 엘리 제사장은 단 번에 나를 알아보더군요. 나는 엘리 제사장에게 무릎을 꿇고 말했어요. 
 
“제사장님, 저는 제사장님 가까이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드렸던 그 여자입니다. 저는 아이를 가지기 위해 기도드렸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제 기도를 들어 주시고 이 아이를 저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이 아이를 여호와께 다시 돌려 드립니다. 이 아이는 평생토록 여호와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감격한 얼굴로 사무엘을 받아들었어요.  
 
그날부터 나는, 성전에 올라가 제사를 드릴 때마다, 손으로 직접 만든 겉옷을 가지고 올라갔어요. 사무엘은 무럭무럭 자랐어요. 한 번 올라갈 때마다, 팔이 짧아진 겉옷을 입고 있는 사무엘과 마주했으니까요. 새 옷을 갈아입히면서, 생각했지요. 
 
 ‘사랑스러운 우리 아들, 하나님의 성전에서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구나.’  
 
울컥 눈물이 쏟아나더군요. 엘리 제사장은 그런 내 모습이 측은했는지, 우리 부부에게 다가와 축복해 주었어요. 
 
“당신이 기도하여 얻은 아이를, 여호와께 다시 바쳤소. 사무엘을 대신해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다른 자녀를 주시기를 바라오.” 
 
엘리 제사장의 말은 현실이 되었어요. 하나님은 우리 부부에게, 아들 셋 딸 둘, 다섯 아이를 선물로 주셨어요. 
 
사무엘은 자라면서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겼어요. 하나님은 사무엘의 민족의 지도자로 세워주셨어요. 내 아들을 통해, 하나님은 다윗에게 기름 부으셨고, 위대한 왕국을 이루셨지요.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있다니요. 감히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에요. 나는 아이 없는 서러움에 복받쳐 엎드려 울었을 뿐이고, 하나님이 주신 아이를 다시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드린 것뿐이에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요. 
 
자녀는 언젠가 엄마 품을 떠나요. 나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 일찍 자녀를 떠나보낸 거예요.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아요. 내 품을 떠난 아이가, 하나님 품 안에서 자랐다는 사실을요. 
 
당신은 나처럼 독특한 경우가 아닐 거예요. 하지만, 다 큰 아이를 품에 안고 키우지 마세요. 아이가 젖을 떼고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면, 아이가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자녀를 키우면서 반복했던 수많은 실수와 후회 속에서 엎드려 눈물 흘리겠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위로하기 원하세요. 자녀가 엄마 품에서 벗어나, 자기 길을 간다고 말할 때, 축복해 주세요.  
 
당신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될 거예요.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귀하게 사용해 주실 거예요. 당신의 자녀는 당신의 자녀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이니까요. 하나님이 반드시 끝까지 책임져 주실 거예요.

아버지의 피눈물

From 엘리 제사장
 
내 자녀들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두 아들은 한 날 한 시에 함께 죽을 것입니다. 자녀가 죽을 날을 받아놓고,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아가는 부모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예언은 이루어질 것이고, 우리 가문도 끝입니다. 
 
자녀를 의도적으로 망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습니다. 기다려주고 참아주면, 언젠가 깨달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괜찮아, 괜찮아. 잘 되겠지, 잘 크겠지. 언제까지 그러겠어….’ 그러다, 여기까지 왔습니다. 
 
나는 제사장입니다. 성전에서 평생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틈 없이, 주님을 위해 일했습니다. 내 자녀를 돌볼 시간은 없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면, 내 자녀는 하나님이 책임지신다고 믿었습니다. 
 
착각이었습니다. 내 자녀가 맞나 싶을 정도로, 막무가내였습니다. 자녀들의 죄는 갈수록 심각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무시하고, 자기들의 이득을 챙기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제물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 전에, 자기들이 먼저 가서 가장 좋은 부위를 취하고, 성전에서 일하는 남자들을 협박해서 제물을 빼앗고, 성전에서 일하는 여자들과 몸을 뒤섞는 자식이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두려워, 두 아들을 불러다 놓고 말했습니다. 
 
“얘들아,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도와 주실 수 있지만, 하나님께 죄를 지으면 누가 구해 줄 수 있겠느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죄에서 돌아서서 회개하라고 말한 것이지요. 하지만, 자녀들은 눈을 부릅뜨고 대들었습니다. 
 
“아버지가 그런 말 자격이 있으세요? 저희가 빼돌린 음식을 맛있게 잡수실 때는 언제고,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거리고, 아버지의 평판이 나빠지니까, 이제 와서 발을 빼시는 거예요? 이러시면 안되죠! 아버지와 우리는 한배를 탔어요. 이게 다 아버지를 위한 거라고요!” 
 
부끄러웠습니다. 나는 자식과 공범이었습니다. 나는 자녀들이 하나님도 잘 믿고, 세상에서도 남부럽지 않게 살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자녀들은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들의 탐욕에 눈이 팔려, 하나님과 사람을 속여서 부와 명예를 축척한 것입니다. 
 
나는 자녀들이 갖다 주는 더러운 음식을 따박따박 받아먹으면서, 호강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알았는데, 나만 몰랐습니다. 모두 내 잘못입니다. 나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지만, 내 자녀에게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안 가르친 것은 아닙니다. 나를 비롯한 유대인 부모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가르칩니다. 명색이 제사장인데, 대충 했겠습니까? 나도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자녀들의 삶 깊숙한 곳에, 하나님을 심지 못했습니다. 내 자녀들은 하나님을 피상적으로 알았습니다. 
 
자녀들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종교적 관습에 익숙해진 것이었습니다. 그저 내가 시키는 대로 성전을 왔다 갔다하며, 눈속임을 한 것이지요. 하나님을 믿은 척을 한 것이지, 실제로 믿은 게 아니었습니다.  
 
자녀들에게 진심을 담아 죄에서 돌이키라고 말해도, 자녀들은 내 자존심, 내 체면 때문에 자기들을 무시하는 것으로 단정해버렸습니다. 그저 부모의 잔소리로 취급한 것이지요. 
 
아버지의 심정도 모르는 자녀가,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알겠습니까?   
 
어릴 때부터 마주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피상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삶의 중심이 되시는 하나님을 전해야 했습니다. 
 
나는 몰랐습니다. 피멍이 들도록 가슴을 쳐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당신에게 아직 기회가 있다면, 나처럼 어리석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녀를 위해, 시간을 따로 떼어 내십시오. 아무리 바빠도 자녀와 일대일로 마주 앉아, 대화를 하십시오. 자녀가 무엇을 고민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정답 보다 중요한 것은 과정입니다. 자녀는 자기 대신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부모가 아니라, 공감하고 믿고 기다려주는 부모가 필요합니다. 자녀의 마음속 빈자리에, 복음을 전하십시오.
 
자녀의 인생이 막힐 때, 자녀는 부모가 만난 하나님을 듣고 싶어 합니다. 차분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당신이 만난 하나님을 전하십시오. 자녀의 마음속 빈자리에 복음이 전해질 것입니다. 
 
내 나이 98세입니다. 피눈물을 흘리며, 후회합니다. 당신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부디, 나처럼 못난 아비가 되지 마세요.

모든 자녀는 서로 다르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는데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요? 큰 아이는 걱정 없이 키웠는데, 작은 애는 문제가 많아요.” 
 
D는 엄마로서 작은 아들을 키우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작은 아들이 담배를 피우다 들킨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아들 몸에서 담배 냄새가 나서 물으니 아이는 태연하게 PC방에서 냄새가 밴 것 같다고 말했다. 의심스러운 말투였다. 
 
그다음부터 아들의 행동에 민감해졌다. 교복을 세탁기에 넣으면서 주머니를 뒤졌다. 오래된 담배 한 개비가 부서진 채 나왔다. 그녀가 남편에게 말했다. 
 
“당신 아들하고 이야기 좀 해봐. 나는 도저히 방법을 모르겠어.” 
 
남편은 아들 키우면서 그 정도 일로 머리가 아프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해결해보겠다고 말했다. 아빠는 아들과 한바탕 대화를 끝냈다. 아들의 몸에서 더 이상 담배 냄새가 나지 않았다. 
 
며칠 뒤, 조용한 거실에서 정적을 깨는 벨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맞으시죠? 아드님이 지금 친구들하고 경찰서에 있으니까 지금 와주셔야 합니다.” 
 
학원에 간 줄 알았던 아들이 친구들과 PC방에서 게임을 하고 나오다 골목에서 자전거 한 대를 발견했다. 한 친구가 적어도 5백만 원은 될 것 같다고, 삼촌이 자전거 마니아라 잘 안다고 말했다. 
 
그 자전거를 훔쳐서 중고 매물로 내놓고 팔리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자전거를 보고 전화한 사람은 구매자가 아니라 경찰이었다. 고가의 자전거에는 고유번호가 있다는 사실을 아이들이 몰랐던 것이다. 
 
아들은 너그러운 자전거 주인을 만난 덕분에 각서를 쓰고 풀려났다. 아들이 집으로 들어오자 아빠는 아이를 때리기 시작했다. 아들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갈대처럼 흔들리더니 바닥에 쓰러졌다. 아빠는 쓰러진 아들을 밟기 시작했다. 아들의 몸이 둥그렇게 말렸다. 아빠가 때리다 지쳤는지,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너 같은 새끼, 키워서 뭐 해. 필요 없으니 나가!” 
 
그 후로, 5개월 동안 아들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경찰의 도움을 받아 아들을 다시 만난 곳은 허름한 주유소였다. 부모를 발견한 아들은 반대편으로 뛰었다. 아빠는 뛰어가 아들을 잡았다. 어쩌면 아들이 잡혀 준 것일지 모르겠다. 아들을 설득해 집으로 데려왔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시작되었다. 부부 사이가 급격히 나빠진 것이다. 
 
“당신, 성질 좀 참아. 애가 또 집을 나가면 어쩌려고. 다시 나가면 찾지도 못해. 애 좀 그냥 내버려 둬!”
 
아내가 말했다. 
 
“그게 내 잘못이었구나. 당신 집에서 뭐 했어? 애를 똑바로 안 키우고 뭐 했냐고!” 
 
남편이 말했다. 
 
누가 옳은지 판단해달라는 듯, 두 사람은 자기 입장을 말했다.  
 
“작은 애가 힘든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요즘은 남편이 더 힘들게 해요. 애한테 화가 나면 제게 풀려고 하니까요. 아이가 다시 돌아왔을 때도 아이한테 사과하라고 몇 번을 부탁했는데 남편은 아이와 마주 앉지도 않았어요.” 
 
“아내가 제 탓을 할 때마다 견딜 수가 없어요. 그날 있었던 일이 제 책임인가요? 애를 때린 건 잘못이죠. 그건 저도 알아요. 그런데 엄마라는 사람이 애가 학원에 안 간 것도 모르고, 어떤 친구와 어울리는지도 모르고. 만약 미리 알았다면 이런 일이 생기기 않았겠죠. 아내 탓이라는 말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아내도 제 탓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이에게 사과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요? 아내가 계속 감싸니까 그놈이 정신을 못 차린 거죠. 계속 밖으로만 나도니….”
 
두 사람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깊은 숨소리만 들렸다. 변론을 끝낸 변호사가 판사의 판결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들은 침묵으로 ‘이제 누가 옳은지 판결해주세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
 
부부가 위기를 만나면 서로 비난하고 책임을 떠넘긴다. 사람의 본능이다. 서로 기대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기대하는 만큼 실망한다.
 
부부가 싸워야 할 대상은 마주 앉은 배우자가 아니다. 부부가 힘을 합쳐 싸워야 할 대상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위기를 만나 서로 비난하는 상태에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공동의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협력해야 한다. 서로 비난하고 책임을 떠넘기면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두 아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존재감 전쟁이다. 큰 아들은 전쟁에서 유리하다. 이미 부모가 존재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부모의 말과 행동, 태도에서 큰 아들에 대한 인정이 자연스럽게 전해졌을 것이다. 작은 아들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 의도적으로 부모를 괴롭히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작은 아들도 처음 몇 년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알리기 위해 형과 경쟁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반복되는 실패를 통해 깨닫는다. 형과 똑같은 방식으로 경쟁하면 형을 앞지를 수 없다는 것을.  
 
방법을 바꾸어 형과 대립하는 방식을 택한다. 형과 정반대의 성향을 갖게 된다. 형이 덥다고 창문을 열면 동생은 창문을 닫는다. 형이 운동을 좋아하면, 동생은 운동을 싫어한다. 형이 내성적이면 동생은 외향적이고, 형이 무디면 동생이 예민하다. 형이 순종적이면 동생은 반항적이다. 
 
형과 대립함으로써 자신이 살아있다고 느낀다. 형과 반대의 성향을 가짐으로써 부모의 관심을 받을 수 있음을 무의식적으로 깨닫는다. 형을 그대로 따라 하면 형에게 묻혀버리니까. 
 
형과 다른 성향을 갖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적절하지 않은 방식으로 부모 관심을 받으려 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부모를 장악하는 전쟁은 오래 전에 끝났다. 
 
형이 장악해 버린 세상에 짓눌려 살던 동생은 살려고 발버둥을 친다. 동생은 도무지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자폭한다. 반전을 노리는 것이다. 기회를 엿보면서 부모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어떤 아이는 아프다. 의학적으로 문제가 없는데 자주 아픈 아이가 있다. 아프면 부모가 자신을 지극 정성으로 돌본다. 부모를 독차지할 수 있다. 어떤 아이는 사고를 친다. 부모가 욕을 하든 더 잘해주든 자신에게 관심을 가진다. 어찌 되었든 무관심보다 낫다. 부모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면 패배한 자녀는 승리의 쾌감을 맛본다. 자녀는 통하는 방법을 반복하고, 반복은 패턴이 된다. 
 
왜곡된 패턴을 깨고 새로운 패턴으로 가고 싶다면, 성향이 서로 다른 자녀를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한다. 작은 아들이 목표를 세우고 철저히 계획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게 아니다.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것뿐이다. 
 
그의 마음 한구석에 부모에 대한 갈망이 있다. 모자란 그 무언가를 다른 것으로 채우고자 할 때, 문제가 일어난다. 자녀 마음속 텅 빈 공간을 부모 사랑으로 채우자. 테러를 막는 근본적인 대책이다. 
 
아빠가 아들을 발로 밟았을 때, 자존감도 함께 짓밟은 것이다. 그것은 시간이 흐른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아내는 남편을 도울 수 있다. 아빠가 후회하고 있고,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아들에게 ‘감정’적으로 전해 줄 수 있다. 
 
남편이 아들과 대화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돕는다. 아내 도움 없이 남편이 아들에게 다가서면 마음 열기가 힘들다. 아빠가 한 걸음 다가오면 한 걸음 물러선다. 아빠 마음을 엄마가 전달해주고, 아들 마음이 어느 정도 준비가 되면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아빠는 정확한 말로 표현해야 한다. 
 
“아빠가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어.” 
 
아들이 반응하지 않는다고 실망할 필요 없다. 보이지 않지만 아들의 마음속 빙산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 얼음이 녹는 동안, 계속 따뜻해야 한다. 추워지면 빙산은 다시 언다. 아빠 마음이 잘 전해지면 아들은 잘못을 뉘우칠 것이다. ‘부모에 대한 분노’가 사라지면 아이는 조용히 자기를 직면하게 된다. 더 이상 자기 변명을 할 수 없다. 
 
부부가 서로 싸울 것이 아니라 서로의 힘을 합쳐 문제와 맞서 싸워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빠 엄마는 날 사랑하지 않아. 나보다 형을 더 사랑해’라는 자녀의 왜곡된 인식을 바꾸려면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부부가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자녀의 패턴에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 남자와 여자의 특성을 반영해 자녀를 양육하기 바란다. 
 
엄마는 자녀의 정서적 측면에 아빠보다 많은 영향을 끼친다. 아빠는 자녀의 가치관 형성에 엄마보다 많은 영향을 준다. 칼로 두부를 자르듯이 딱 나눠지는 것은 아니지만 엄마 아빠의 서로 다른 강점을 인정해야 한다. 
 
엄마는 상처받은 아들에게 부모 사랑을 감정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눈빛, 태도, 말투, 스킨십 등에서 따뜻함이 느껴지면 자녀는 엄마에게 사랑받는다고 느낀다. 
 
아빠는 엄마와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아빠는 자녀와 함께하는 활동을 통해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 함께 외출해서 점심을 먹거나, 자전거를 같이 타거나, 단둘이 여행을 떠나는 등 활동 위주로 시간을 보낸다. 아빠가 아이와 활동하면서 소중한 시간을 함께 보내면 자녀에게 건강한 가치관을 심어줄 수 있다.
 
‘아빠는 내게 관심이 많구나. 아빠는 가족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구나.’ 
자녀 역시 가정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자녀에게 부모 둘 다 필요하다. 가족이 소중한 이유이다. 동생이 형과 경쟁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면 자기답게 살고 싶은 용기가 생긴다. 자기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찾고 즐긴다. 자기다운 모습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세상은 더 이상 무시무시한 곳이 아니라 용기를 내어 살아볼 만한 세상이 된다. 차별 없는 사랑이 유일한 방법이다. 

차별 없이 키울 거예요

“제발 아내가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을 망치고 있거든요.” 
 
N은 마흔둘, 열 살 아들, 일곱 살 딸의 아빠다. 그는 아내가  과도할 정도로 아이들 교육에 집착하는 것을 걱정한다. 임신한  순간부터 아내는 태교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몸에 좋다는 음식을 먹고, 아이의 두뇌 발달에 도움을 주는 음악을 듣고, 정서에 도움이 된다는 책을 읽었다. 
 
처음에는 남편도 아내의 적극적인 노력이 싫지 않았다. 웹서핑을 하다가 유익한 정보를 발견하면 그녀에게 문자를 보내주기도 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첫 아이가 태어난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남편이 생각할 때, 아내는 너무 이른 나이부터 아들에게 글자와 숫자를 가르쳤다. 아이가 하기 싫다고 우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간식으로 아이를 달래면서 공부를 시켰다. 아내의 양육 방식에 대해 남편이 대화를 시도하면, 그녀는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잔소리를 한다고 입을 막아버렸다. 
 
남편은 아이들과 마음껏 놀 수도 없었다. 학원 숙제, 엄마가 내준 숙제를 하느라 아이들이 바빴다. 남편이 애들 얼굴이라고 보고 싶어서 아이들 방문을 열면, 아내가 거실에서 말했다. 애들 방해하지 말고 방에서 나오라고. 
 
“저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첫째는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이고, 둘째는 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에요. 도대체 아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과연 나중에 애들이 엄마에게 고맙다고 할까요? 아닐 걸요. 지금 애들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밖에서 뛰어놀아야 한다고요. 우리 애들이 공장에서 찍어낸 물건과 뭐가 달라요? 전 아내의 방식에 동의할 수 없어요.” 
 
아내도 가만있지 않았다. 
 
“여보, 당신은 참 마음 편하게 산다. 아파트의 다른 엄마들 이야기를 좀 들어보라고. 우리 애들만 놀이터에서 키우면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 알아? 바보 되는 거야. 우리 어린 시절하고 완전히 다르다고. 애들이 스스로 할 때까지 기다려주다가 애들 기죽으면 어떻게 할 건데? 학교 수업을 못 따라간다니까. 다른 애들은 선행을 다 해서 따라갈 수가 없다고. 
 
그러면 학교에서 전화 온대. 학원 보내라고. 누군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안 도와줘도 되니까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 마. 나도 힘들어.” 
 
남편이 다시 말했다. 
 
“그래도 이건 아동학대라고.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여보, 제발 그만해.” 
 
아내는 ‘아동학대’라는 말을 듣고 눈이 뒤집혔다. 남편에게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들었다. 처음 보는 아내 모습이었다. 남편은 절망했다. 다시 예전처럼 지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부터 남편은 아내가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에 불만을 느껴도 표현하지 않았다. 
 
아내가 아이들을 혼내는 소리가 방문 너머에서 들리면 밖으로 나갔다. 매번 아내와 다툴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파트 주변을 한 바퀴를 돌며 끊었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어 보지만 공허한 마음을 달랠 수 없었다. 
 
“남편이 아동학대라는 표현을 쓰다니요. 말도 안 되죠. 그는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거라고요. 제가 하루 동안 아이들과 어떻게 지내는지 남편이 알아야 해요. 아이들 준비시켜서 학교에 보내고, 집안일을 하고, 간식을 준비하고, 공부시키고, 저녁 준비를 하고, 애들을 씻기고 재워요. 
 
남편은 집에 와도 도와줄 생각은 안하죠. 이건 아닌 것 같다? 그런 말은 누가 못하나요. 남편은 아이들만 걱정하지 제 걱정은 전혀 안 해요. 저도 지쳤어요.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남편은 버스가 하루에 일곱 번 밖에 들어오지 않는 시골에서 자랐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누나 셋. 셋째 누나와 여섯 살 터울이 지는 막내로 태어나 사랑받고 자랐다. 
 
다른 집 아이들은 어린 시절 농사일을 도와주러 밭에 나갔지만 남편 부모님은 절대로 일을 시키지 않았다. 누나 셋이 일을 거들었다. 남편은 책을 좋아했고, 공부도 제법 잘했다. 시골에서 초등학교 졸업하고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했다. 
 
오고가는 시간이 아까워 영어 단어를 외웠다. 중학교 졸업하고 수도권에 있는 명문고에 진학했다. 성적은 최상위권이었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들어갔다. 
 
“공부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가 하고 싶을 때 하는 거죠. 만약 부모님이 강제로 공부를 시켰다면 저는 절대 공부하지 않았을 거예요. 필요하면 하는 거죠. 아이들이 어릴 때는 밖으로 나가 뛰어놀아야 정상이에요. 언제 놀아보겠어요? 아마 우리 애들은 공부를 못할 거예요. 벌써 질려버렸을 테니까. 더 늦기 전에 이 상황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내는 경찰 공무원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 어머니, 세 살 위 오빠.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순종적인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아내는 차별 받았다고 생각한다. 오빠만 다닌 피아노 학원, 속셈 학원, 태권도 학원. 그녀는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녀가 배우고 싶은 것이 있어도 부모님은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 독하게 노력했다. 중학교에 올라간 다음부터는 오빠보다 학교 성적이 좋았다. 관심 받고 싶어 노력한 결과였다. 그러나 부모님은 그녀가 만족할만한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그러다 절망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녀가 대학 합격 통보를 받은 날, 부모님이 말했다. 대학 등록금은 스스로 마련해서 다니라고. 오빠도 그렇게 했다고. 오빠 역시 그랬다니 부모님의 말에 따랐다. 오빠가 제대하고 단 둘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그녀는 짧은 투정을 부렸다. 등록금을 벌면서 학교에 다니기가 너무 힘들다고, 오빠는 힘들지 않았냐고 물었다. 오빠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직감했다. 오빠와 자신의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그날 저녁, 술에 잔뜩 취해 집에 들어가 부모님에게 처음으로 대들었다. 부모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늘 오빠, 오빠, 오빠였어요. 저는 무슨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패배한 거죠. 독한 마음을 먹고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았어요. 내 아들, 딸은 차별 없이 키울 거예요. 차별하지 않고 공평하게 최선을 다해 교육하려고요. 
 
아이들을 패배자로 키우고 싶지 않아요. 잘 키워서 보란 듯이 세상에 내놓을 거예요. 대학 졸업할 때까지 배우고 싶고,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최선을 다해 지원할 거예요. 그 다음은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죠. 아이들이 독립할 때까지는 어쩔 수 없어요.” 
 
***
 
자녀 교육에 대한 관심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부모 내면에 상처가 도사리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투수가 손으로 꽉 쥐고 던진 공은 포수의 글러브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원하는 방향으로 정확히 던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무줄에 묶어 빙빙 돌리다 끊어진 공은 원치 않는 방향으로 날아간다. 누군가에 몸에 맞아 상처를 낸다. 
 
아내가 던지는 공은 손으로 꽉 쥐고 던진 공이 아니라 고무줄에 묶어 빙빙 돌리는 공이다. 아내의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아이들 마음에 또 다른 상처를 준다. 상처 입은 그녀는 자기답지 못한 방식으로 자녀를 키운다. 
 
그녀 마음에 자리 잡은 감정은 두려움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지켜내지 못하면 다른 사람과 경쟁에서 지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이 그녀를 억누르고 있다. 아이들이 세상이 뒤처지면 안  된다는 엄마의 왜곡된 신념은 두 아이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엄마가 느끼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자녀에게는 엄마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그녀의 왜곡된 신념을 건강한 신념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남편이다. 그러나 그는 아내를 도와주지 못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역시 두렵기 때문이다. 부부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 자체가 두렵다. 그것이 아내와 대화를 단절시키고, 아이들이 처한 상황을 외면하게 만든다. 남편에게는 회피 행동이 보인다. 
 
자녀 교육에 대한 갈등이 일어나면 그는 밖으로 나간다. 아내가 아이들에게 언어폭력을 휘두르면 괴로운 마음을 억누르고  상황을 회피한다. 아내에게 아동학대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남편 또한 아이들을 외면하거나 방치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부모 중 한 사람에게 아동학대 당한 성인은 누가 자신을 때렸는지 분명하게 기억한다. 그러나 그가 매질을 당할 때, 자신을 때리지 않았던 부모는 무엇을 하고 있었냐는 질문에 분명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기억하지 못한다.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은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아버지에게 맞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지만 어머니가 당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자신이 맞을 때마다 어머니가 집에 없었을 리 없다. 단 한 번도 같은 공간 안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죄 없는 아이는 왜 아버지의 매질을 당해야 했을까? 그를 보호해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폭력적인 남편과 사는 아내는 두려움으로 인해 남편에게 맞서지 못한다. 고통스러운 상황을 목격하면 침묵하거나 집을 나가 버린다. 아이를 보호해줄 유일한 사람이 도망치는 것이다.  
 
남편이 빨간 망토를 몸에 두르고, 언어폭력에서 아이들을 구해내는 슈퍼 영웅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상황을 피하지 말고 아내와 대화해야 한다. 담배 하나 물고 아파트 주변을 서성거리는 동안, 둘 사이에 해결해야 할 문제는 그만큼 복잡해진다. 더 이상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도망치지 마라. 두려움을 극복하고 아내와 대화하자. 
 
또한 남편은 자녀 교육에 대한 모든 책임을 아내에게 떠맡기고 있다. 아이들 교육에 대한 스트레스는 결코 가볍지 않다. 아이들은 뜻대로 자라주지 않는다. 남편이 뒤로 물러나면 아내의 짐은 무거워진다. 
 
남편이 퇴근 후에 잠시 돌보는 아이들과 아내가 종일 돌보는 아이들은 완전히 다르다. 종일 돌보는 아이들이 훨씬 감당하기 힘들다. 육아는 ‘아내의 과업’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부부의 공동 과업이라고 생각하자. 
 
그러면 남편은 아내에게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아내의 신념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아내 상처를 치유할 사람은 남편이다. 따뜻한 사랑으로 그녀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다.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여 아내와 함께 하라. 
 
이 순간에도 차별 받으며 받으며 성장하는 아이가 있다. 차별 받으며 성장했던 부모가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 역시 자녀에게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예민한 첫 아이를 마음속으로 밀어내지는 않았는가? 자신과 성향이 너무 다른 아이를 밀어내지는 않았는가? 유독 손이 많이 가는 아이에게 모든 관심을 쏟아 부은 나머지 다른 자녀를 돌아볼 여유가 없는 것은 아닌가? 
 
상처 입은 우리가 어느덧 부모가 되었다. 우리 안에 상처를 보듬어가는 힘으로 자녀 마음속의 상처를 치유하는 부모로 성장하자. 그것이 나와 당신과 책임이자 의무이다.  

하나님보다 자녀를 사랑해요

자녀가 우상이 되면 안 된다는 설교를 자주 듣습니다. 말 자체에는 동의가 되는데, 구체적으로 실천하려면 답답해집니다. 자녀가 우상이 되지 않으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자녀를 양육해야 할까요? 
 
뻔한 답변부터 하겠습니다. 자녀가 우상이 되면 안 된다는 말뜻은 단순합니다. 자녀가 하나님보다 앞서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같은 말을 들어도, 듣는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당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 어떻게 자녀가 하나님보다 앞설 수 있겠어. 하나님이 우선이야.”하나님이 최우선이라고 믿으니까, 그다음부터는 별 고민 없이 마음 편하게 삽니다. 자녀에게 올인하더라도, 위기의식이 없습니다. 자녀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 되니까요. 바른 적용 아닙니다. 자기 합리화입니다. 
 
자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자녀를 하나님보다 사랑했구나. 잘못 살았어. 회개하자.”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회개하고 난 다음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반복되는 죄책감을 느낍니다. 자녀 앞에서는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자책합니다. 하나님과 자녀 사이에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괴롭습니다. 바른 적용 아닙니다. 자기 비하입니다. 
 
조심스럽게 내 생각을 말해보겠습니다. 질문 자체에 해답이 있습니다. 당신은 자녀가 우상이 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뜻인지 정말로 알고 싶은 겁니다. 문제를 붙잡고 고민하는 그 과정 자체가 해답입니다. 고민이 멈추지 않는 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내가 정답이라고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정답과 해답은 뉘앙스가 다릅니다. 정답은 이미 정해진 답입니다. 해답은 풀이 과정에서 도출된 결과입니다. 자녀 양육에 정답은 없습니다. 해답이 있을 뿐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자녀를 제대로 키우고 있느냐, 중간에 채점할 정답지가 없습니다. 자녀를 다 키워보고 나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평가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니, 정답이 아니라 해답입니다. 
 
계속 고민하면서 자녀를 키우면 좋겠습니다. 자만하지 말고, 확신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계속 고민하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계속 고민하면서, 자녀 앞에 서야 합니다. 엎드리고 서기를 반복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목사라고 자녀 잘 키우는 거 아닙니다. 오히려, 빈틈이 많습니다. 아이들 어릴 때, 목회 바쁘다고 함께 있어주지 못한 게 미안합니다. 보상해주고 싶은 게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자녀 욕심이 앞서면, 공감 없는 명분 앞세워 교회와 세상 앞에서 부끄러운 선택을 하게 됩니다. 목사라고 예외 없습니다. 나도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부탁입니다. 계속 고민하세요. 고민이 끝나면 성장도 멈춥니다. 고민하는 당신은 안전합니다. 고민 없는 당신은 불안합니다. 다행입니다. 아직은 고민하고 계시니까요. 고민하는 한, 당신의 최우선 순위는 하나님입니다. 우상 숭배 그리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은 참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딸이 결혼하고 신앙을 버렸습니다

딸이 믿지 않는 남편과 결혼했습니다. 주말마다 교회를 출석하지 않고 놀러 다니더니, 이제 신앙을 버렸습니다. 걱정이 돼서, 한 마디 했더니 자기는 그동안 엄마 신앙으로 교회 다닌 거라고 하네요. 마음이 아픕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먼저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당신의 아픈 마음, 하나님이 아십니다. 하나님께 아픈 마음 솔직히 표현해주세요. 딸이 하나님과 멀어질 때, 엄마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지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겁니다. 그저 위로만 할 수 없으니, 조심스럽게 내 생각을 말해보겠습니다. 
 
우리 함께 믿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딸은 당신의 딸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딸이니,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하나님이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실 겁니다. 두렵고 걱정되지만, 우리 함께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조급하거나 자책하지 않습니다. 
 
조급하면 안 됩니다. 딸의 곁에서 조급하게 행동하고 말하면 딸은 입을 닫을 것입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신앙과 관련된 어떤 말도 듣지 않게 될 것입니다. 자책해서도 안됩니다. 엄마가 딸 앞에서 자책하면, 딸은 엄마에게 미안해서 드문드문 교회에 나갈 것입니다. 마지못해 나가는 것이니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둘 중 어느 것도 바람직한 결론이 아닙니다.
 
딸의 친구가 되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자식이지만, 친구라고 생각해주세요. 아무리 친해도 친구 전도하기 어렵지요. 가까운 관계라고 생각했다가 교회 가자고 불쑥 말해버리면 어색해집니다. 딸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딸이라고 마음 편하게 교회 가라고 불쑥 말해버리면, 기분 나빠합니다. 처음에는 잔소리하지 말라고 짜증 섞인 반응이라도 해주지만, 잔소리에 익숙해지면 무시하듯 듣고 맙니다. 그러니, 좋은 친구가 되어주셔야 합니다. 딸이 언제 어디서든 믿고 찾을 수 있는 친구가 되어주세요. 
 
딸이 얼마나 힘든 시간 보내고 있을까요. 신혼에, 육아에, 시부모에 복잡할 겁니다. 엄마 한 사람 만이라도 딸의 온전한 친구가 되어준다면, 딸이 든든할 겁니다. 딸의 마음이 열릴 때까지, 아낌없이 사랑해주시고 돌봐주세요. 잃어버린 영혼 주께 돌아오기 어렵습니다. 딸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엄마와 딸의 관계는 독특합니다. 엄마이기 전에, 딸이셨으니 누구보다 잘 아시겠지요. 애증의 관계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요. 엄마와 딸 사이 사랑하는 마음, 서운한 마음이 엎치락뒤치락 합니다. 교회 다니라는 몇 마디 잔소리로 딸과의 소중한 시간을 희생하지 마세요. 딸과 함께 있는 소중한 시간에 예수님의 따뜻한 사랑 전해주세요. 
 
딸을 사랑하는 만큼 답답할 겁니다. “딸이 어렸을 때 신앙교육을 잘 시켰어야 했나, 믿지 않는 남편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 죽기 살기로 말렸어야 했나.”온갖 파괴적인 생각이 몰려올 겁니다. 모두 진실이 아닙니다. 진실을 알고 싶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세요. 딸이 딸을 위해 기도하는데, 외면하실 수 없습니다. 당신이 기도할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좋겠습니다. “딸아, 걱정 마라. 너의 딸이 나의 딸이다.”

자녀교육에 대한 생각이 너무 다릅니다

아이 둘 키우며 직장생활을 하는 워킹맘입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정서적 안정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부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아직 어리니까요. 남편은 제 생각에 동의하지 않아요. 계획을 세워서 철저히 공부를 가르치라고 합니다. 교육관이 서로 달라 힘듭니다.   
 
겉으로 볼 때는 교육관이 서로 달라서 갈등이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화 방식이 문제입니다. 부부의 생각은 다를 수 있습니다. 당연한 겁니다. 생각이 달라도 서로를 신뢰한다면, 대화할 수 있습니다. 서로 신뢰하지 못한다면, 서로 다른 생각이 서로에게 틀린 생각이 됩니다. “너도 맞고, 나도 맞다”가 아니라,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가 되면, 부부 갈등은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대화가 되지 않으니 부부 중 한 쪽의 생각만 반영됩니다. 당연히, 주도권을 잃은 배우자는 감정이 상합니다. 자녀의 미래가 달린 문제니, “내가 양보하지 뭐”라고 말하면서, 가볍게 넘어갈 수도 없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자녀를 잘 키울 수 있을까?” 같은 고민입니다. 같은 고민에 서로 다른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지요. 조금 억지스럽더라도, 아내와 남편의 입장 차이를 표현해보겠습니다. 
 
“정서가 중요하다. 정서적으로 안정된 아이는 나중에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발견하면 열심히 노력할 거다. 하고 싶지도 않은데 억지로 시키면, 아이가 공부에 반감을 갖게 된다. 조급하면, 아이 인생 망친다. 아이에게 기회를 주고 차분하게 기다려야 한다. 아이를 믿어주고 기다리면, 아이 스스로 공부할 날이 온다.” 
 
“누가 모르냐. 그건 나도 안다. 하지만, 세상이 변했다. 세상이 우리 어릴 때와 다르다. 경쟁은 이미 시작됐다. 벌써부터 뒤처지면 나중에 따라갈 수 없다. 나중에 아이들이 정신 차리고 제대로 공부하려고 하면 그때는 이미 늦는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없는 구조다. 어느 정도는 시키자. 그래야, 나중에 스스로 노력할 때, 그동안 해놓은 것을 바탕 삼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
 
아내와 남편, 두 사람이 한 말 모두 맞습니다. 정서도 중요하고, 엄연한 사회 현실도 있습니다. 옳고 그름으로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서로 대화해서 생각의 차이를 좁혀야 합니다. 부부가 서로 합의해서 일관된 방식으로 아이를 양육하는 게 아이들의 정서적 안정감에 가장 중요합니다. 공부 부담 안 주고, 마냥 놀게 한다고 정서적으로 안정되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남편 말대로 애들을 밤낮없이 학원으로 돌린다고 아이에게 밝은 미래가 보장되는 게 아니겠지요. 두 사람의 생각 차이를 좁히고, 중간 어디서 만나야 합니다.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가 있을 겁니다. 자신 안에 있는 결핍이 자녀 양육에 반영됩니다. 서로의 주장에는 서로의 결핍이 있습니다. 아내의 주장에는 아내의 결핍이, 남편의 주장에는 남편의 결핍이 있는 것이지요. 자신의 성장 과정을 돌아보면, 아쉬운 장면이 떠오릅니다. 자녀에게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욕구는 아내와 남편 둘 다 같습니다.  
 
남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에게도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 그 안에 결핍이 있을 겁니다. 아내가 질문한 것이니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부탁합니다. 남편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세요. 남편이 하자는 대로 군말 없이 따르라는 말이 아닙니다. 중간에 말을 끊고, 된다 안된다로 판단하지 마시고, 남편의 생각에 공감해주세요. 남편의 진심이 아내와 아이들에게 전달되는 게 중요합니다.  
 
마음을 열고, 서로의 결핍을 공유하면 좋겠습니다. 결핍을 공유하고,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그 과정을 생략하면, 서로 오해합니다. 자녀 양육이 주도권 싸움으로 변질됩니다. 부부가 서로의 약점을 공유하면, 서로의 장점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엄마는 엄마대로, 아빠는 아빠대로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게 다릅니다. 각자의 강점을 활용해야 아이들이 잘 큽니다. 그러니, 대화하세요. 목소리보다 마음의 소리가 중요합니다. 마음의 소리를 들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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