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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자기돌봄

나를 어떻게 돌보나요?

자기를 돌보자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에요. 하지만 나 자신을 어떻게 돌볼지 모르겠습니다. 자기를 돌보자는 말이 무슨 뜻인가요?
 
먼저 ‘자기 사랑’과 ‘자기 돌봄’이 다름을 말하고 싶어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쓰는지 모르지만 나는 두 단어를 다른 의미로 씁니다. ‘자기 사랑’이란 말 자체를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삶은 때로는 이기적으로 변질될 수 있거든요. 세상은 이미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넘쳐납니다. 또 많은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자는 구호를 외칩니다. 나까지 소리치지 않아도 이미 귀가 아프도록 같은 말을 듣고 있지요.
 
솔직히 ‘자기 사랑’이란 말 자체가 성경적인가 의심스럽습니다. 단정적으로 표현해서 오해를 살까 걱정이 되지만, 기독교는 ‘자기 사랑’이 아니라 ‘자기 부인’을 말합니다. 자신을 부인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를 사랑하지 말고, 나를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이 역설적으로 자신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사랑할 수 없는 이유는,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잘 알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예수님 앞에 서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형편없어도 그분 앞에 서면 고귀한 존재로 변화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만큼 확신 있게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삶이 자기를 돌보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으로 자신을 이끌어주는 삶이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에 관한 말씀, 그분이 하신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은 예수님에 관한 말씀이고, 신약성경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말 그대로 성경 전체입니다. 성경으로 우리 각자를 이끌어가는 삶이 곧 자기 돌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께 사랑받아야 합니다. 나는 상담을 하면서 ‘예수님을 진지하게 따르기는 하지만, 그분께 사랑받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은 예수님이 따뜻하지 않습니다. 그분께 거절당할까,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면서 따르지요. 예수님이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정서적으로 그분을 누리지 못합니다.
 
이것은 말씀 자체의 결함이 아닙니다. 말씀은 그 자체로 완전합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안의 해결되지 않은 상처와 상처로 고통받는 기억이 말씀과 예수님의 사랑을 왜곡시킵니다.
 
나 역시 상처 입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며 누구보다도 열심히 성경을 연구했지만, 그분을 단단히 오해하며 살았습니다. 상처의 렌즈로 말씀을 읽었고, 예수님과 비틀어진 관계로 오랜 시간 고통받았지요.
 
이제, 나는 당신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자신 안의 상처를 돌보는 삶을 시작하자고. 그분의 사랑과 말씀으로 자신 안의 상처를 따뜻하게 돌봐야 치유될 수 있습니다.

왜곡을 다루는 방법

크리스천이라면 당연히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상처를 치유하고 싶을 거예요.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아서 문제지요.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세요.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상처를 치유하자는 말을 들으면 막연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요. 나 역시 그랬으니까요.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내 상처를 어떻게 돌볼지 몰라 힘들었어요.
 
예수님을 사랑해도 아프니까 내 믿음이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분을 사랑하면 상처로 고통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예수님을 오해한 거예요.
 
뒤늦게 내가 고통받을 때, 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았어요.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감정으로 고통받을 때, 그에 앞서 특정한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 생각이 파괴적이면 인생이 파괴됩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시작되지요.
 
예를 들어볼게요. 사람들은 설교 잘하는 목사를 좋아합니다. 나 역시 설교를 잘하고 싶어요. 그래서인지 목회할 때나 지금이나 설교가 항상 부담입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설교하거나, 청중의 수준이 높으면 더 큰 부담을 느끼지요.
 
나는 왜 설교를 잘하고 싶을까요? 나는 답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내가 앞서기 때문이에요. 설교 잘해서 인정받고 싶은 겁니다. 뻔한 답이지만 나는 자주 잊어요.
 
설교라는 행위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설교를 대하는 특정한 생각이 문제입니다.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생각이 찾아오는데, 그 생각에 복음이 없으면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복음 없는 생각을 발견하면, 그 생각을 구체화해서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정확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돌볼 수 있습니다.
 
설교를 망치면 사람들이 날 무시할 거야.”
“더듬거리거나 실수하면 내가 준비가 안 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
“설교로 감동을 주지 않으면 사람들이 더 듣지 않을 거야.”
 
모두 거짓말이지만, 내게는 진실처럼 다가옵니다. 이때 나를 돌보지 않으면 나는 빠른 속도로 파괴됩니다. 빨리 멈춤 버튼 을 누르고, 복음이 없는 지점을 찾아야 해요. 그리고 명확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마치 적의 심장부에 폭격을 하듯이.
 
그리고 거짓에 대응하는 진실을 찾아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복음적인 문장을 찾아내서 파괴적인 문장과 일대일 대응을 시키지요. 이것은 쉽지 않아요. 복음적인 문장이 떠오 르지 않으면 예수님과 가상의 대화를 시도합니다.
 
“예수님, 설교가 부담스러워요. 제가 더듬거나 실수하면 사람들이 저를 무시하고 속으로 비웃을 거예요. 저는 꼭 사람들을 감동시켜야 해요. 그래야 제 이야기를 들어줄 거니까요. 사람들이 더 이상 날 찾지 않으면 어쩌죠.”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해주실까요? 어떤 말씀을 해주시는지에 따라 내가 그분을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먼저 내가 오랫동안 오해한 예수님을 말해볼게요.
 
“두려워 마라. 내가 너를 세웠다. 담대하게 선포하라. 내가 너를 도울 것이다. 너는 작은 그릇이 아니라 큰 그릇이다. 내가 너를 수많은 사람 앞에 세우고, 내 영광을 드러내겠다. 이제 시작이다. 더 큰 꿈을 꿔라.”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성경에 비슷한 말씀이 여러 군데 있지요. 문제는 말씀 자체가 아니라 내 욕망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교묘하게 섞어서 포장을 제법 잘한 겁니다. 나 자신도 모를 만큼 그럴싸하게 잘 섞어서 나도, 다른 사람도 속인 겁니다.
 
지금 나는 과거와 다른 예수님을 만납니다. 따뜻하게 나를 돌봐주시고, 한없이 사랑해주시고, 온전히 이해해주시는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그래, 정말 두려울 거야. 하지만 포기하지는 말렴. 지금처럼 용기를 내서 나를 전해주겠니? 나는 사람들이 너를 기억하지 않고 나를 기억하길 바란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에 대해 말해주겠니? 사람들이 널 잊을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단다. 사람 들이 더 이상 널 찾지 않아도, 내가 너를 기억하고 책임질 거니까. 지금부터는 오히려 잊히기 위해 애를 쓰렴.”
 
예수님은 먼저 내 감정을 사랑으로 받아주십니다. 그리고 진실을 말해주십니다. 진실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분의 사랑과 말씀으로 나를 돌본다는 말은, 내 감정을 수용해주시며 진실을 말씀해주신다는 뜻입니다.
 
내게는 말할 수 없이 큰 위로입니다. 나는 상처를 외면하거나 고통을 만회할 대안을 찾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품에 안길 뿐이에요. 그 순간만큼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나는 매주 여러 번 설교합니다. 부담은 여전하지만 내가 나를 돌보지 않으면 사람들의 인정을 구걸하다가 스스로 포기해버리고 말겠죠.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나를 돌보면서 지속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기억해주시는 한, 그분을 전할 것입니다. 내 설교가 형편없어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전하고 싶습니다.
 
고통이 시작될 때, 자신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그리고 그 안에서 복음 없는 생각을 찾아내어 명확한 문장으로 표현해보세요. 그리고 예수님과 솔직한 대화를 시작하세요. 그분이 따뜻한 진실을 말씀해주실 거예요.
 
포기하지 마세요. 평생 반복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분의 사랑과 말씀으로 나를 계속 돌봐주세요.

나 같은 사람도 치유될까요?

나는 어릴 때부터 많은 상처를 받고 자랐어요. 치유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 사람들이 나 같은 일을 겪었다면, 치유될 수 있었을까?’라고 속으로 말합니다. 그들이 겪은 일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인생을 살았거든요.
 
인생의 고통은 서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듣고 나보다 더 힘들었다 혹은 덜 힘들었다고 비교할 수 없어요. 각자 말할 수 없이 고통받으며 살아온 삶을 위로하고 격려하기를 바라요. 모두 여기까지 오느라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당신의 질문에서 “다른 사람은 치유되어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데, 나는 아직 치유되지 않았다”라는 서운한 마음이 느껴지네요. 하지만 당신도 치유될 거예요. 단지 조금 오래 걸릴 뿐 입니다.
 
당신의 상처가 다른 사람보다 깊어서가 아닙니다. 상처의 깊이에 따라 치유되는 시간이 결정되는 게 아니거든요. 치유는 하나님의 손에 달렸어요. 하나님 입장에서는 더 큰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더 능력이 필요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이시고, 말씀 한마디로 우리를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마음이 급할수록 치유가 오래 걸린다고 느낄 거예요. 주변을 보면 자신을 빼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치유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 진실이 아니에요. 각자 자기 문제로 충분히 고통받아요. 말끔히 치유된 게 아니라 그 과정 가운데 있습니다.
 
누군가 “나는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 이렇게 치유되었다”라고 말했다고 치유가 끝났다는 의미는 아닐 거예요. 치유가 시작되었고, 과정 중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위축되지 마세요. 당신이 예수님을 만났다면, 당신 역시 치유되는 과정인 겁니다.
 
나도 아내 앞에서 바보처럼 울어버린 적이 있거든요. 아내에게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치유하겠어. 나도 아직 치유되지 않았고, 당신도 행복하지 않은데 내가 어떻게 다른 부부를 돕겠어…”라고 하면서요.
 
예전에 심방을 갔는데 한 부부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며 상담을 요청했어요. 아내가 남편 때문에 살기 싫다고 하는데, 듣고 보니 그 남편이 나보다 좋은 남편이었어요. 나는 생각했어요.
 
‘만약 내가 행복한 가정에서 상처 없이 자랐어도 이렇게까지 힘들까?’
 
내가 보기에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목회자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목회도 편히 하는 것 같았어요. 나는 너무 답답하고 서러워서 아내에게 말하며 엉엉 울었습니다. 아내가 도와준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서 버틸 수 있었어요.
 
나는 지금도 내가 치유되고 있다고 믿어요. 오래 걸리겠지만 기다리려 해요. 조급해한다고 더 빨리 치유되는 게 아니니까요.
 
당신은 남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 았어요. 당신이 겪은 일과 고통은 아무도 모를 거예요. 하지만 걱정 말아요. 주님이 아시고 당신을 도와주실 거예요.
 
당신의 생각보다 더딜 뿐, 치유는 이미 시작되었어요. 주변을 바라보면 속도에 신경을 쓰고,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비교하게 됩니다. 예수님만 바라보세요. 그러면 방향에 신경을 쓰게 됩니다. 그분이 눈앞에 보이면 안심되고,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다면 안전한 거예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걸어요. 몇 걸음 걸었나, 몇 걸음 남았나 계산하지 말아요. 멀어서 안 보이는데, 예수님도 걸어 오고 계세요. 당신이 그분 품에 안겨 함박웃음 짓는 날까지 당신을 응원할게요.

나는 무엇이 문제일까요?

일단 내 이야기를 들려줄게요. 그리고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말해줘요. 문제를 발견하면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거예요. 무엇이 문제인지 진심으로 알고 싶어요.
 
나는 초능력자나 예언가가 아닙니다. 만약 내게 사람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있어도 당신의 이야기를 잠깐 듣고, “당신은 이런 사람이고, 이런 문제가 있다”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건 예의 없는 행동이거든요. 누가 누구를 판단하고 정의하나요.
 
오히려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어요. 만약 다른 누군가에게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면 아마 당신은 그에게 휘둘릴 거예요. 그러면 관계를 지속하기 어렵지요. 당신을 평가하고 판단한다고 느끼거든요. 관계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부담스러워서 멀리하게 될 거예요.
 
마음을 조금 편하게 가져요.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문제가 있고, 고민하며 삽니다. 문제없는 척하는 것도 문제지만,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문제라는 말 대신 다른 표현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상처’라는 말은 어때요? 경우에 따라 받아들이는 의미가 다르겠지만 문제라는 말보다 나은 것 같아요. 문제는 고치거나 해결해야 하는데, 인생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하나의 과정을 마치고 다음 과정으로 들어가지 않아요. 하나의 과정으로 쭉 이어져 있지요. 마무리도, 완성도 없어요.
 
상처에는 치유나 치료라는 말을 쓰지요. 상처가 아물면 그대로 끝이 아니에요. 한번 상처 난 부위는 흉터가 남습니다. 겉은 멀쩡해 보여도 누르면 아플 수 있어요. 상처 부위가 약해져서 같은 곳을 두 번 다칠 수도 있고요. 상처에 완치는 없어요. 계속 조심하며 상처를 돌봐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당신에게 문제가 없다고 말하고 싶어요. 다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자신 안의 상처를 스스로 발견하기를 바라요. 다른 사람은 절대 당신의 상처를 대신 찾아낼 수 없어요.
 
아파서 병원에 가면 의사에게 “내가 어디 어디가 아파요”라고 합니다. 의사는 여기저기 확인해보고 처방을 해줍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워요. 아프다고 먼저 말해야 의사도 왜 아픈지 말해 줄 수 있거든요.
 
만약 의사에게 “내가 어디가 아플까요? 한번 말해보세요”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이런 기가 막히는 일이 상담실 안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내담자가 원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상담자가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나는 상담자가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에 묶여서 오랜 시간 고통받은 내담자를 적지 않게 만나왔어요.
 
목회자, 상담자를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자신 위에 군림할 기회를 주지 마세요. 상처로 오랜 시간 고통받으면 약해져서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요. 위로나 통찰력 있는 말 한마디를 해 주면 그에게 의존하게 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요. 끝이 좋지 않거든요.
 
상담이나 심방을 받을 때나 기준을 최대한 낮게 잡으세요. 내가 모르는 상처를 누군가가 기가 막히게 발견해서 치유하는 게 아닙니다. 내 안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는 없어요.
 
이미 충분히 아프고 힘든 문제를 함께 나누세요. 상담하는 과정에서 용기를 얻고 힘을 얻는 거예요. 상담자가 아무리 유능해도 소용없어요. 자기 자신은 결국 자신이 돌봐야 합니다.
 
내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온전히 사랑해주실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같은 질문을 사람이 아니라 예수께 던지면 당신은 안전할 수 있어요. 그분은 당신 위에 군림하거나 당신의 약함을 이용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의존하고 싶은 만큼 예수님을 의존하세요. 그럴수록 당신은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사람이 될 겁니다.
 
상담자나 목회자마다 서로 다른 말을 한다면 답은 한 가지에요. 모든 말과 조언을 평정할 만한 가르침은 결국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묻지 말고, 예수께 여쭈어요. 그분은 당신이 원할 때마다 딱 맞는 일관된 진리를 계속 말씀해주실 겁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까요.

결론은 무조건 예수님인가요?

목사님이나 기독교 상담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말로 시작하더라도 결국 “예수님을 바라보라”라고 말하는데, 솔직히 너무 쉽고 뻔한 대답 아닌가요? 아무도 반박할 수 없잖아요. 결론은 무조건 예수님인가요?
 
좋은 질문입니다. 나도 오랫동안 고민해온 문제거든요. 저 역시 말끝마다 “예수님, 예수님” 하는 사람들에 대한 시선이 곱지 못했어요. 예수님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왜 정답인지 알고 싶었어요.
 
상처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기도했어? 성경은 읽어? 그런데, 왜그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솔직히 이런 태도로 대화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이 남용되고 있다는 생각도 했어요. 문제의 실체에 다가가지 못하고, 대충 덮어버리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풀이 과정 없이 정답만 있는 답지를 보면 마음이 후련한가요? 그렇지 않아요. “뭘 그렇게 고민해? 이 문제 답은 3번이야. 빨리 채점해”라고 말한다고 가정해보세요. 답을 맞혀도 답답합니다. 맞고 틀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왜 그 문제의 답이 3번인지 알아야겠지요.
 
친절한 선생님은 정답만 설명해주지 않아요. 1번, 2번이 왜 답 이 될 수 없는지 설명하지요. 그래야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서 오답을 피해갈 수 있습니다. 나도 그런 방식으로 말해볼게요.
 
요즘 유행하는 ‘마음 챙김’과 ‘인지행동치료’라는 상담 방법론이 있어요. 아마 당분간 상당한 인기를 누릴 겁니다. 마음 챙김은 불교의 명상에서 시작됐습니다. 구글의 명상 전문가 차드 멩 탄이 《너의 내면을 검색하라》에서 ‘할머니의 마음’이라는 기법을 소개하지요.
 
스스로를 자애로운 할머니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할머니의 눈으로 보면 각자는 모든 면에서 완벽하며, 할머니는 누군가 못된 짓을 해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고요.
 
이 이론을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 사람마다 할머니에 대한 정서가 다르다고 말하고 싶어요. 할머니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거든요. 내가 떠올린 할머니가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준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내담자 중에 할머니에게 학대를 받은 사람도 있고, 반감이나 두려움을 가진 사람이 있었어요. 눈을 감고 따뜻한 할머니를 떠 올리자고 하면 감정이 저마다 다를 거예요. 그러니 기법에 대한 효과도 다르겠지요.
 
인지행동치료의 기법을 한 가지 소개할게요. 인지오류에 빠져서 자신을 합리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내담자에게 ‘소중한 친구’가 찾아와 자신과 똑같은 고민을 털어 놓는다면 뭐라고 말할까요? 소중한 친구니까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이해해주고 공감해줄 거예요.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소중한 친구에게는 공감해주면서, 자신은 왜 비난하시나요?” 라고 되물으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돕습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소중한 친구의 개념이 상대적이지 않을까요? 지금 당장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생각하는 우정의 크기만큼 큰돈을 꿔달라고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거절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서겠지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친구는 상상 속에나 있어요.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담자 중에는 소중한 친구가 한 명도 없거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사람도 있었어요. 친구는 친구일 뿐입니다. 우정은 언제든 깨질 수 있고, 아무리 소중한 친구라도 절대적이지 않아요.
 
내게 ‘따뜻한 할머니’와 ‘소중한 친구’, 그리고 ‘예수님’ 중에 누구를 택할 거냐고 묻는다면, ‘예수님’을 택할 거예요.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내가 믿는 답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합리적인 선택을 하게 돕고 싶어요.
 
다른 상담 이론을 무시할 의도는 없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자애로운 할머니를 바라보자고 하면 웃음이 터질 것 같아요. 또 소중한 친구를 바라보자고 해도 썩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아요.
 
하지만 내게 “예수님을 바라보자”라는 말은 설득력이 있어요. 할머니나 친구를 바라보자는 말보다 훨씬 듣기 좋아요. 예수 님의 사랑은 절대적이에요. 세상이 무너져도 그분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할머니와 친구에게 감히 비교할 대상이 아니지요. 그래서 나는 제안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건 어때요?”
 
만약 당신이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을 믿게 된다면 당신 안에 기적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당신을 있는 그대 로 사랑하는 그분을 만날 수 있으니까요.
 
사람마다 예수님을 다르게 말하겠지만, 성경은 한결같이 동일한 그분을 말해요. 그 사랑은 변치 않고 영원합니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용기 내어 고백합니다. 결론은 ‘예수님’입니다.

한 사람이 정말 중요한가요?

개인적인 질문에 일일이 답변해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한 사람의 문제는 그저 한 개인의 문제일 수 있는데요. 다수를 위해 보편적인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을까요?
 
나는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인 질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거창해 보이는 질문이라도 결국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하니까요.
 
오래전부터 그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고 싶었습니다. 다수를 위한 삶을 의도적으로 피했어요. ‘상처 입은 한 사람’을 위해 글 쓰고 말하는 것이 내 사명이 아닐까 고민하며 삽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에는 지극히 보편적인 이야기가 담겨요. 우리가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는 이유입니다. 등장인물이 개인적으로 겪는 이야기에 사람들이 공감하지요.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야기에 빠져들어 울고 웃습니다.
 
내게 한 사람의 존재는 우주이며 온 세상이에요. 한 사람을 위해 글 쓰고 말하는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아요. 책을 쓰고, 설교하는 것도 대중을 위한 것은 아닐 겁니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꿈이 작다 못해 초라한 것 아니냐?”라는 억센 질문을 받을지 모르겠네요. 남 생각이야 어떻든 당분간 고집을 꺾지 않을 겁니다.
 
굳이 효율을 따지자면 한 사람을 위해 글 쓰고 말하는 것이 다수를 위해 하는 것보다 효율적이라고 생각해요. 목회 사역을 처음 시작하고 가장 난처한 것이 설교였습니다. ‘누구를 위해 어떻게 설교를 준비해야 하지?’ 고민했지만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 정거장에 붙어 있는 광고 포스터를 우연히 보았어요. 매력적인 여성이 정면을 보고 찍은 화장품 광고였어요. 사진 속 그녀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어서 버스 정거장 어디에서도 그 시선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시선이 렌즈를 빗나갔다면, 나 역시 피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때 책상에 앉아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고민해도 풀리지 않던 의문이 풀렸어요. 이전까지 나는 연령과 직업, 취향 같은 것으로 청중을 분류했어요. 숫자처럼 모두 더하고 나누어 평균을 내는 방식으로요. 치명적인 실수였지요. 나는 청중을 짐작했을 뿐 정확히 몰랐습니다.
 
어리석게도 그 자리에 없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설교한 겁니다. 이후부터는 과감히 설교 준비부터 설교하는 순간까지 단 한 사람을 위해 준비하고 전했습니다.
 
한 사람을 위한 설교는 아무도 배제하지 않아요. 누군가가 ‘아, 저건 내 이야기다. 어떻게 내 마음을 저렇게 잘 알지?’라고 생각한다면 아마 그 자리에 있는 다수의 사람 역시 같은 마음 이지 않을까요?
 
글을 쓰기 시작할 때도 독자가 누구인지 몰랐어요. 처음 설교 할 때와 같은 실수를 반복했지요. 독자를 더하고 나누면서 짐작했어요. 평균치의 독자를 예상하고 글을 썼어요.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쓰느라 적지 않은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하나님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한 사람을 바라보고 글을 쓸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어요. 그러자 사람들이 공감해주기 시작했지요. 참 알 수 없는 일이죠. 한 사람을 위해 쓴 글이 다수에게 읽히다니요.
 
그래서 나는 한 사람의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에 성실히 답합니다. 진심을 담아 답변하고, 그가 도움을 받았다면 만족합니다. 아마도 다수를 위해 글을 쓰고 말하는 날은 내 인생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나는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고 싶습니다.

더 이상 희생하지 마세요

가족을 위해
희생하지 말고
자신을 돌보세요.
 
안돼요.
그럴 수 없어요.
 
나 하나 희생하더라도
가족이 살 수 있다면
나는 괜찮아요.
 
예수님도
말씀하셨잖아요.
 
내가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오열하는 그녀의 눈물을
누가 닦아줄 수 있을까요.
 
나는 먼저
그녀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고 싶어요.
 
눈물이 마르고
마음이 진정되면
말해주고 싶어요.
그 말씀의 의미를.
 
밀알의 비유는
우리에 대한 명령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에 대한 예고였어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많은 생명이 살아날 것이란 의미에요.
 
당연히,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아야죠.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지만,
내가 가는 길을
너희가 결코 따라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가 주는 잔을 마시라고 하셨지만
내가 마시는 잔을
결코 마실 수 없다고 하셨어요.
 
예수님을 따르기는 하지만,
예수님이 될 수는 없는거죠.
 
밀, 길, 잔.
모두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하는 말이에요.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죽어야 하지만,
우리가 죽어도 예수님의 죽음과는 다르죠.
 
나는 당신에게
말하고 싶어요.
 
가족을 위해 희생할 사람은
당신이 아니에요.
 
가족을 위해 희생할 사람은
더 이상 필요 없어요.
 
예수님이 이미 희생하셨어요.
단번에 완전히 희생하셨죠.
 
당신이 아무리 희생해도
예수님 자리를 대신 할 수 없어요.
 
예수님이 되지 마시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세요.
 
어떻게 예수님과 하나
될 수 있나요.
 
예수님은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이에요.   
썩어져 죽으셨어요.
 
그리고,
예수님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
생명의 떡이에요.
다시 살아나셨어요.   
 
밀은 땅에 떨어져 썩어서
많은 열매를 맺고
생명의 떡이 되었죠.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나는 생명의 떡이다.
이 떡을 먹으라.
영원히 살 것이다.
 
생명의 떡을 먹으면
예수님과 하나 되어
영원히 살아요.
 
이제는 더 이상 죽지 마세요.
죽을 필요 없어요.
 
살아나세요.
더욱 살아나세요.
 
죽고 싶을 때마다
생명의 떡을 먹으세요.
그래야 살아요.
 
당신이 죽으려 할 때마다
예수님이 되려고 하는 거예요.
 
생명을 떡을 먹을 때마다
예수님과 하나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되지 마시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세요.
 
예수님과 하나 된 당신은
올바른 방식으로
가족과 마주할 거예요.
 
가족을 위해 희생하지 말고
가족을 사랑하세요.
 
희생 대신
사랑을 선택할 때
당신도 살고
가족도 살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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