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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은혜

다른 무엇으로 너를 대신할 수 없단다

나의 자녀야, 
내게로 와줘서 고맙다
 
내게 오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니 
내가 너의 진심을 안다
 
죄책감으로 고통받았던 
지난날을 뒤로하고
나의 사랑으로 평안하거라
 
사람들은 너를 과거의 시선으로 
바라볼지 모른단다
 
너의 모든 잘못을 
깨알같이 기억하고 비난하는 
그들 앞에 서기 두렵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나의 자녀야
용기를 내렴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말거라
나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한단다
 
내게로 나올 때 망설이지 말거라
나는 이미 너를 용서했단다
나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단다
 
너는 내게 보답하고 싶겠지만
나는 이미 가장 좋은 것을 받았단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네 손에 들린 무엇이 아니라 
바로 너 자신이란다 
 
나에게는 값비싼 향유보다 
너의 눈물이 값지단다
 
다른 무엇으로 너를 대신할 수 없단다
나에게는 오직 너뿐이란다
 
사랑한다, 나의 자녀야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누가복음 7:37-38

과거를 그리워할 필요 없어

“열정이 식었어.
뜨거웠던 시절이 그리워.”  
 
봄바람은 봄에만 불어. 
겨울에는 불지 않아. 
 
성령의 바람은 
하나님이 몰고 와. 
 
선풍기를 켜듯, 
간단한 게 아니야. 
 
민들레 씨앗은 
바람을 탄데. 
 
그러다, 
땅에 내려앉아
뿌리를 내린데. 
 
뿌리를 내린 씨앗은 
바람만으로는 못 자라.
 
땅속으로 파고들어 
양분을 당기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은혜를 구걸하지 마.
 
씨앗이 뿌리를 내리듯 
성경에 파묻혀. 
 
한 장 한 장 
성경을 넘기면 
바람이 불 거야. 
 
어디서 어떻게 불어오는지 모르는 
성령의 바람. 
 
종이 한 장이 일으키는 바람이 
너의 가슴을 뛰게 할 거야. 
 
과거를 그리워할 필요 없어. 
오늘 부는 바람으로  
훨훨 날아올라 뜨거워질 테니.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요한복음 3:8>

너라서 버틴 거야

“용서가 힘들어. 
슬퍼서 눈물 나.” 
 
울고 싶으면 울어. 
넌 그럴 자격 있어. 
 
약한 거 아니야. 
너라서 버틴 거야. 
 
지금까지 잘 했어. 
여기까지 잘 왔어. 
 
이제, 
하나님 차례야. 
 
천 배, 만 배로 
하나님이 갚아주실 거야.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창세기 45:2> 

예수님이 멀게 느껴져요

예수님만 바라보라고 하잖아요.
나는 그 말이 뭔지 몰라요.
예수님이 친밀하지 않아요.
멀게만 느껴지고.
 
사람들하고 기도하면서 같이 울잖아요.
같이 울어도 똑같이 우는 게 아니에요.
내 눈물은 성분이 달라요.
감사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에요.
서러워서 흘리는 눈물이에요.
 
왜 나를 만들었나.
왜 나만 차별하나.
서럽고 외로워서 눈물만 흘러요.
어떻게 해야 주님을 만날 수 있나요.
방법을 알고 싶어요.
 
상투적인 말부터 해야겠네요.
지루하더라도 참고 들어주시겠어요?
듣다 보면 남는 건 있을 거예요.
 
데이트해보셨지요.
상대방을 알아가는 과정이 있어요.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야 해요.
그 사람이 했던 말과 행동.
그 사람의 태도와 감정.
알면 알수록 좋아요.
 
친구들을 만나보는 것도 좋겠죠.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에 대해
뭐라 말하나 들어봐야죠.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운다면
좋은 사람이란 뜻이죠.
 
결혼을 전제로 만난다면
더욱 신중해야겠죠.
섣불리 결론 내리면 안 돼요.
따질 건 전부 따져봐야죠.
 
예수님도 마찬가지예요.
신랑을 고르는 것과 비슷해요.
많이 알면 알수록 좋아요.
따질 건 전부 따져보세요.
 
예수님이 하신 말,
예수님에 대한 말,
모두 성경에 있어요.
신중하게 읽고 생각하세요.
 
예수님에 대해 알았다고 해서
바로 믿어지는 건 아니에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려면
성령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마른 장작에 불을 붙여야죠.
그래야 활활 타오르니까요.
성령님이 불을 붙어주시면
고백할 수 있어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나는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까요.
설명하기 힘들어요.
어느 날, 예수님이 찾아와 주셨어요.
 
나도 혼자라고 생각했어요.
아무도 날 지켜주지 않았으니까요.
저러다 애 죽겠다 싶으니까
급하게 찾아 오셨나 봐요.
조금만 늦게 오셨어도 나는 세상에 없겠죠.
간신히 살았어요, 정말로.
 
바로 질문하겠죠.
왜 나에게는 안 오시나요?
나도 믿고 싶은데.
사람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혼자라고 느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예수님은 차별하지 않으세요.
예수님은 당신 곁에 오셨어요.
당신도 혼자가 아니에요.
 
당신이 내 앞에서
혼자라고 말하면서 우는데
이상하게 나는 불안하지 않아요.
이제야 알 것 같아요.
당신의 진심을.
 
당신은 그리워하고 있어요.
예수님과 친밀했던 그 시절을.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것처럼 말해서
정말 그런 줄 알았어요.
내가 잘못 알아들었어요.
주님의 따뜻한 품이 그리운 거예요.   
 
처음부터 당신의 마음을 알았다면
길게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내가 무뎠어요.
 
이제 알았으니 부탁할게요.
조급할 필요 없어요.
기다려주세요.
주님이 다시 만나주실 거예요.
 
옛사랑을 그리워하는 당신이 아니라
오늘 주신 사랑으로 설레는 당신이 되기를
나는 바랍니다.

말씀을 읽어도 은혜가 없네요

말씀을 읽어도 은혜가 없다는
사람을 만납니다.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이런 말이겠지요.
 
예전에는 말씀을 읽을 때
마음이 뜨겁고 감동이 되었는데
요즘에는 뭐가 잘못되었는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없어요.
 
은혜가 없으면 조급해집니다.
만회할 방법을 찾습니다.
 
뭔가 잘못되었다.
그러니, 은혜가 없지.
 
불안 요소를 하나둘 제거합니다.
거리끼는 게 없나 계속 살핍니다.
 
그러다 지치면 본색이 드러납니다.
슬슬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밉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안되네.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지?
 
나는 묵상과 글쓰기가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남이 쓴 글을 읽기만 할 때는
전혀 몰랐던 게 있어요.
 
글을 잘 쓰려면
특별한 영감이나
재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특별한 영감이 떠올라야
특별한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틀린 말이에요.
 
가끔 글을 쓰는 사람은
영감을 기다릴 수 있겠지요.
 
유유자적 편하게 지내다가
영감이 떠오르면 글을 쓰는 거죠.
 
미안하지만
그건 영화의 한 장면일 뿐
실제 벌어지는 일은 아니에요.
 
영감을 기다리는 사람은
오랫동안 글을 쓸 수 없어요.
 
매일 글을 쓰는 사람은
저마다 자신만의 루틴이 있습니다.
 
절제된 삶을 살면서
공장처럼 일정 분량의 글을
매일 찍어냅니다.
 
영감 따위는 믿지도 않고
기다리지도 않아요.
 
그런데, 어떻게 매일 글을 쓰나요?
특별한 비결이라도….
 
없어요. 그런 거.
그냥 쓰는 겁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냥 써 내려가는 거예요.
 
반복하다 보면 가끔
놀라운 일을 겪어요.
 
내 수준을 넘는
특별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아마 사람들이 이런 걸
영감이라 부르나 봅니다.
 
아쉽게도 영감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냥 왔다가
그냥 사라져요.
 
붙잡아두고 싶지만,
어쩔 수 없어요.
 
인정할 건 빨리
인정하는 게 나아요.
 
아! 내가 글쓰기와 묵상이
닮았다고 했지요.
 
나는 매일 글을 쓰기 전에
항상 성경을 읽습니다.
 
특별한 은혜가 없어도
매일 꾸준히 읽습니다.
 
마음이 메마르지 않았나.
그런 고민은 아예 하지 않습니다.
 
하루 세 끼 밥 먹듯이
그냥 앉아서 말씀을 섭취해요.
 
야금야금
잘 씹어 먹습니다.
 
매일 말씀을 읽다 보면
가끔 폭포수 같은 은혜가 느껴져요.
 
매일이 아니라
아주 가끔.
 
성경을 펼칠 때마다
은혜가 있기를 바라죠.
 
하지만, 그건 내 바람일 뿐
현실이 아니에요.
 
내가 통제할 수 없잖아요.
은혜를 만들어 낼 수도 없고.
 
쥐어짜도
발버둥 쳐도
소용없어요.
 
그건 선물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
 
선물을 보내야
선물을 받지요.
 
아까 했던 질문
다시 해볼까요?
 
어떻게 성경을 매일 읽나요?
비결이라도….
 
없어요. 그런 거.
그냥 읽는 겁니다.
 
은혜가 있든 없든
매일 성경을 펼쳐야
평생 동안 읽을 수 있습니다.
 
매일 내리는 비는 장마.
가끔 내리는 비는 단비.
 
둘 중 하나 선택하라면
나는 단비가 좋습니다.
 
매일 비가 내리면
비의 소중함을 모를 테니까요.
 
자책은 이제 그만.
그냥 성경을 펼치세요.

기억은 지독하다

사람마다 끔찍한
기억이 있어요.
 
기억이 떠오르면
우울해져요.
 
벗어나고 싶으니까
잊으려 해요.
 
잊으려 마세요.
잊을 수 없어요.
 
잊으려 할수록
생생해져요.
 
증명해볼까요.
따라 해보세요.
 
지금 이 순간부터 절대로
토끼 생각하지 마세요.
 
하얀색 털이 뽀송뽀송한
토끼를 떠올리지 마세요.
 
토끼 등에 빨간색으로
숫자 5라고 쓰여 있어요.
 
보면 안 돼요.
절대로 떠올리지 마세요.
 
아….
당신은 결국 보고 말았네요.
 
이제 아시겠죠.
기억은 지독한 녀석이에요.
 
잊으려 할수록
더 생생해지죠.
 
새로운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잊지 않고
기억하는 거예요.
 
끔찍한 기억을 계속
떠올리는 말인가요?
 
아니요.
그런 말이 아니에요.
 
기억하는 방식을
바꿔보자는 말이에요.
 
기독교는
기억하는 종교에요.
 
사람은 자꾸 잊어버리고
하나님은 자꾸 기억나게 하세요.
 
성경 전체에서
계속되는 이야기죠.
 
사람이 은혜를
잊으면
 
하나님은 은혜를
기억나게 하세요.
 
사람이 사랑을
잊으면
 
하나님은 사랑을
기억나게 하세요.
 
언제나 하나님은
잊혀진 기억을 되살려주시죠.
 
기억이 끔찍한 이유는
그곳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에요.
 
잊지 말고
기억하세요.
 
그곳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지금 무슨 말하는 거예요!
난 완전히 혼자였다고요!
 
하나님은커녕
상처 입은 나만 보여요.
 
맞아요.
쉽지 않아요.
 
부탁드려요.
포기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끝까지 찾아내세요.
 
하나님은 그곳에 계세요.
당신은 혼자일리 없어요.
 
어둠 속에서 울고 있는
꼬마가 있어요.
 
울긋불긋 온몸에
멍 자국 난 아이.
 
죽은 시체처럼
담요에 덮여 있었죠.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어요.
 
잊혀지지 않아요.
어제처럼 생생하죠.
 
난 고통받을까요.
아니요.
 
난 혼자가
아니었어요.
 
끔찍한 기억에 찾아와 주신
하나님 덕분에
 
이제 나는 마음 편히
그 사건을 기억할 수 있죠.
 
그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살아나거든요.
 
삶이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
나는 그 꼬마와 눈이 마주쳐요.
 
너도 살았으니
나도 살 거다.
 
당신이 내 글을 읽는
이유를 알아요.
 
내 기억 때문이고
당신의 기억 때문이죠.
 
내가 혼자가 아니듯이
당신도 혼자가 아니에요.
 
사건을 기억하면
당신은 불행해져요.
 
하나님을
기억하세요.
 
나는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라니까요.

외로움이라는 감정

<열왕기상 19:9>

시내 산에 도착한 엘리야는 한 동굴 속에 들어가 밤을 지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야,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절망에 빠진 사람은 누구나 혼자가 돼요. 깊은 동굴 속으로 숨어버리죠. 두 번 다시 상처받기 싫으니까,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아요. 어쩌면, 하나님에게도.
 
엘리야가 깊은 절망에 빠져 동굴에 숨어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물으셨어요. “엘리야야, 왜 여기 있느냐?” 
 
엘리야의 감정이 어땠을까요? 화났을 것 같아요. “그걸 몰라서 물으세요, 하나님? 동굴 밖으로 나가면, 저 죽어요.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도대체 이게 뭐예요. 내 옆에는 아무도 없어요.”
 
엘리야는 깊은 절망에 빠져서, 하나님의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어요. 하나님은, “왜 거기 있느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왜 여기 있느냐”라고 물으셨어요. 
 
“거기”와 “여기”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하나님이 “거기”라고 말씀하셨다면, 엘리야는 정말로 혼자였을 거예요. 하나님이 동굴 밖에 계시다는 뜻이니까요. 동굴 밖에서, 남의 일 보듯 말씀하시는 거죠. “너 거기서 뭐 하니? 힘든척하지 말고, 얼른 나와라.“
 
하나님은, “거기”가 아니라 “여기”라고 말씀하셨어요. 하나님이 지금 어디 계신 걸까요? 엘리야가 동굴의 어둠 속에 머리를 파묻고 “나는 혼자”라고 말할 때에도, 하나님은 엘리야와 함께 계셨어요.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좁고 어두운 동굴에 찾아오셨어요.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혼자두지 않으세요.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우리를 속여요. “넌 혼자야. 아무도 네 맘 알아주는 사람 없어.” 감정이 하는 말에 속지 마세요.
 
당신에게 진실을 말할게요.
 
하나님은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하세요.

왜 나를 거절하세요?

From 거라사의 광인 
 
당신도 나를 알지요? 성경에서 내가 꽤나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당신이 알듯이, 나는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사람입니다. 
 
나는 수많은 귀신들에게 시달리며, 나 자신을 학대했습니다. 온몸을 찢으며, 귀신이 떠나가기를 바랐지만, 귀신들은 나를 조롱하고 지배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치유됐습니다. 귀신이 완전히 떠나가고, 내 정신과 감정이 멀쩡해진 것이지요. 안타깝게도,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내 앞에 서 계신 예수님뿐이었지요.  
 
정신을 차린 나는, 혼자 남겨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언제라도 귀신들이 다시 찾아와 나를 지배할 수도 있으니까요. 나는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사정하듯 말했습니다. 
 
“예수님, 저도 예수님을 따라가고 싶습니다. 혼자 남겨지는 것이 무섭습니다.” 
 
나는 내심 기대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수 있게 해주신다면, 나는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저 열두 사람처럼, 내 인생 전부를 바쳐 예수님을 도와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저를 집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나를 미워하고, 거절하고, 조롱했던 마을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라고 한 것이죠. 예수님은 하루도 머물지 않고, 곧바로 내 곁을 떠나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웠지만,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집으로 돌아가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을 말했습니다. 
 
온 도시의 사람들이 나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나를 비웃고 조롱할 여유조차 없었지요.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광야를 헤매던 미친 사람이었으니까요. 
 
혼자 있을 때, 나는 가끔 생각에 잠겼습니다. 
 
‘예수님은 왜 나를 거절하셨을까? 왜 나를 혼자 남겨두셨을까? 나는 아직도 무서운데….’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떠올랐습니다. 
 
‘내 과거가 문제가 된 게 아닐까?’
 
나는 더 이상 귀신들린 사람이 아니지만, 얼굴과 몸의 흉터를 지울 수 없었습니다. 내 얼굴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겁니다. 여기저기 찢어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으니까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나를 비교하게 되더군요. 
 
‘그들에게는 뭔가 특별한 게 있을 거야.’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의문을 해소할 길이 없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내 자리를 묵묵히 지켰습니다. 
 
그렇게 2-3년이 흘렀을 때, 예루살렘에서 슬픈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요. 나는 땅바닥에 쓰러져 엉엉 울었습니다. 
 
나는 당장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온갖 수소문 끝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곧 다시 오실 거라며 기뻐했습니다. 
 
나는 제자들과 함께 머물면서, 마음속 깊은 고민을 꺼내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왜 나를 거절하셨을까? 나의 과거 때문에? 내가 준비되지 않아서?’ 
 
내가 깊은 한숨을 내쉴 때, 베드로라는 제자가 말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딱 3년을 함께 했습니다. 상대적으로 3년이 길게 느껴지실 수도 있지만, 제 입장에서는 눈 깜짝할 사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잠시 잠깐 우리 곁에 계시다가, 홀연히 떠나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떠나보내실 때, 당신에게 남기셨던 그 말씀을 우리에게도 똑같이 남기셨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그리고 땅 끝까지 가서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사도행전 1:8
 
우리에게 당신보다 거창한 말씀을 하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집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당신이 살았던 도시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난 곳 방언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곳으로, 우리가 필요한 곳으로 사방팔방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당신과 우리는 같은 사명을 받았습니다. 온 도시와 마을로 흩어져,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보다 당신을 먼저 파송하신 것이지요. 시기의 차이일 뿐, 조건의 차이는 아닙니다.   
 
참, 당신은 모르시지요? 당신을 만나러 가다가  우리가 모두 바다에 빠져 죽을 뻔했습니다. 우리 목숨을 담보로 어디를 가시나 했더니, 당신을 찾아가시더군요. 
 
당시에는 예수님의 깊은 뜻을 몰라, 화가 났습니다. 나도 모르게 속으로 말했지요. 
 
‘고작 이런 미친 사람 하나를 구하려고, 우리 모두의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
 
미안합니다. 너무 솔직했나요? 예수님은 당신 한 사람을 만나시려고, 그 먼 길을 가신 겁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아시겠지요? 당신의 얼굴의 난 흉터, 당신의 모든 과거, 예수님은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자격을 갖춰서 부름을 받은 사람은 여기 아무도 없습니다. 당신과 나, 우리 모두는 자격 미달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세상 모두가 짐승처럼 여기던 나였습니다. 내가 뭐라고 예수님이 그 멀리서 목숨을 걸고, 나를 찾아와 주신 걸까요?
 
나는 예수님을 오해했습니다. 내 과거, 내 흉터. 예수님께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자격 없는 나를, 예수님은 조건 없이 사랑해 주셨습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것을 압니다. 당신이 깊은 절망 속에서 울고 있을 때, 예수님이 찾아와주셨지요? 당신도 나처럼 혼자 남겨지기 싫었지요? 
 
당신 마음, 나도 조금은 압니다. 혼자 남겨진 당신은, 예수님에게 거절당한 사람처럼, 외로우실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나처럼 예수님을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멀어진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은 감정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떠난 적이 없으십니다. 
 
나를 위해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다를 건너셨듯이,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혼자라고 외롭다고 울지 마세요.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과 함께하십니다. 

마음을 쏟아놓는 기도

From 한나(사무엘의 어머니)
 
내 남편 엘가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어요. 매년 세 번씩 의무적으로 지키는 절기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가 따로 시간을 내서 하나님께 예배했으니까요. 게다가, 남편은 자상한 사람이었어요. 
 
남편이 믿음 좋고, 자상하고, 부자였으니까 남부럽지 않게 살았을 거라고 생각하면, 저는 억울해요. 저는 남들이 모르는 슬픔을 마음속 깊이 간직한 채로 살았어요. 
 
내 인생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어요. 겉만 번드레 한 인생이었어요. 마음은 텅 빈 채로, 쓸쓸하게 살았어요.  
 
남편의 사랑의 의심하지는 않았어요. 남편의 진심도 알았고요. 하지만, 남편이  내 모든 고통을 해결해 줄 수는 없잖아요. 
 
나는 아이를 못 낳았어요. 남편이 따로 얻은 브닌나라는 여자는, 남편이 내게 눈빛을 주는 것조차 견딜 수 없어했어요. 아이를 못 낳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를 못살게 굴었죠. 
 
나는 당당할 수 없었어요. 내가 살았던 시대에, 아이가 없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만큼 괴로운 일이었어요. 사람들의 동정하는 눈빛, 쯧쯧 혀를 차는 소리…. 나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어요. 
 
가족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 나 혼자 이방인 같더라고요. 도저히 함께 할 수 없었어요. 내가 식탁에서 일어나자, 남편은 걱정스러운 듯 말하더군요. 
 
“여보, 왜 그래요? 왜 이렇게 슬퍼하세요? 자식이 없으면 어때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잖아요. 나 하나로 만족 못 해요? 더 이상 슬퍼하지 마세요.” 
 
남편이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저렇게 눈치가 없나’ 속상하더라고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어요. 간신히 눈물을 참고 자리를 벗어났어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세상이 떠나가라 엉엉 울었죠. 참았던 설움이 터져 나왔어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 따지듯 물었어요. 
 
“하나님, 내 마음을 이렇게 모르세요? 남편이 저를 사랑해도, 저는 행복하지 않아요. 가슴이 뻥 뚫려버린 것처럼 외로워요. 하나님은 내 모든 필요를 아신다면서요?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세요.” 
 
엎드린 채로 한참을 기도했어요. 그때, 엘리 제사장이 나에게 다가와,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죠. 
 
“이보시오. 술을 먹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시겠소? 언제까지 취한 채로 살아갈 것이요. 하루라도 빨리 술을 끊으시오.” 
 
저는 당황했어요. 남편도, 하나님도 내 마음을 몰라주는데, 제사장마저도 내 마음을 모르니,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거잖아요. 
 
나는 울먹이며 말했어요. 
 
“아니에요, 제사장님. 저는 술을 마시지 않았어요. 너무나 큰 고통을 겪고 있어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놓으며 기도했어요.” 
 
엘리 제사장은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더니, 그제야 실수를 깨달았어요. 어찌할 바를 몰라 우물쭈물하다가 민망한 표정으로, 내게 축복의 말을 전해주었죠. 
 
“그러셨군요. 이제 평안하세요. 하나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까요? 엘리 제사장이 그렇게 말했을 때, 내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어요. 하나님께 직접 응답을 받은 건 아니지만, 사람을 통해서라도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께 그저 감사했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어요. 얼굴을 씻고, 밝은 얼굴로 가족에게로 돌아가 함께 식사를 했어요. 
 
솔직히 말하면, 그동안 가족이라고 해도 나는 가족과 섞이지 못했어요. 언제나 이방인 같은 심정이었거든요.
 
남편 엘가나, 브닌나,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 나는 그 사이에 덩그러니 혼자 존재했죠. 그들이 하하 호호 웃을 때마다, 그 웃음소리에 짓눌리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거든요.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놓고, 엘리 제사장의 위로를 듣고, 다시 내 삶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다시 한번 희망으로 살아갈 용기를 얻었어요. 
 
그로부터 1년 후, 하나님은 정말로 내게 아들을 주셨어요. 하나님은 내 모든 슬픔을 아시고, 내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세요. 
 
훗날 나는 깨달았아요.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놓고 그저 울었을 뿐인데, 하나님은 그것을 참된 믿음으로 인정해 주신다는 사실을요. “마음을 쏟아놓다”는 말과 “믿는다”는 말이 같은 뜻이더라고요. 
 
아무도 당신 마음 모를 거예요. 남편도 가족도, 친구도, 목사님도 당신이 왜 우는지 몰라요. 하지만, 슬퍼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아세요. 
 
당신이 울부짖으며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은 듣고 계세요. 하나님이 침묵하셔도,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놓으세요. 당신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아요.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실 거예요. 
 
당신을 위해 기도할게요. 오늘 하루도 포기하지 마세요. 

나도 당신처럼 두려웠어요

<창세기 22장 7절>

이삭이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했습니다. “불과 장작은 있는데, 번제로 바칠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이삭이 물었습니다.
 
From 이삭
 
어느 날부터 아버지가 이상했어요. 항상 밝게 웃던 아버지가 웃음을 잃으셨거든요. 내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아버지는 내 앞에서 웃음을 잃은 적이 없어요. 오죽하면 내 이름을 “웃음”이라고 지었겠어요. 
 
웃음을 잃은 아버지는 며칠 동안 시름 시름 앓아누우셨어요. 그러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러 가자고 말씀하셨죠. 
 
몸도 안 좋으면서 그 높은 산을 어떻게 올라가려 하는지 걱정스러웠어요. 가는 내내 아버지는 쉬었다 걸었다를 반복했어요. 산이 가까워질수록 아버지의 발걸음은 점점 느려졌죠. 
 
산 입구에서 아버지는 종들에게 더 이상 따라오지 말라고 했어요. 나와 아버지, 단둘이 산을 오르기 시작했죠. 나는 불안했어요. 아버지가 평소와 달랐거든요. 하나님께 바칠 어린 양이 없었어요.  
 
나는 그제야 알았죠. 아버지가 나를 죽여서 바치려 한다는 사실을. 미치도록 두려웠어요. 다리가 후들거려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아버지를 거역할 수 없었죠. 
 
아버지가 날 죽이려 한다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온몸이 꽁꽁 묶일 때까지 나는 반항하지 않았어요. 제단에 누워 눈물만 흘렸지요.
 
아버지는 내 눈을 쳐다보지 않았어요. 칼을 뽑아들고 내 목을 찌르려 했어요.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숨을 멈췄어요. 이렇게 끝이구나 생각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어요. 아버지를 부르는 목소리였죠.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역시 그랬어요. 하나님이 아버지를 시험하셨던 거예요. 아버지가 아무 이유 없이 날 죽일 리 없었어요. 아버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마자 미친 사람처럼 흐느끼며 날 묶었던 끈을 풀어줬어요. 나를 힘껏 끌어안아주시며 엉엉 우셨어요. 날 안아주신 아버지의 품을 잊을 수 없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도 그 품이 그리울 정도니까요. 
 
하나님은 나 대신 숫양을 준비해주셨어요. 날 대신해서 죽은 숫양 덕분에 내가 살 수 있다는 감정이 정말 묘했어요.  
 
사람들이 묻더군요. 어떻게 어린아이가 모든 장면을 정확히 기억하냐고요? 오해하고 계세요. 어리지 않았어요. 영화에서 보니까 내가 꼬마 아이던데, 맞나요? 사실이 아니에요. 
 
나는 청년이었어요. 산을 오를 때, 장작을 짊어진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 나예요. 나는 아버지보다 힘도 세고 발도 빨랐어요. 
 
아버지는 백 살에 나를 낳았어요. 아버지가 날 힘으로 결박한 게 아니라, 내가 반항하지 않은 거예요. 내가 먼저 제단에 올라가 눕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힘으로 나를 제단 위로 올릴 수 없었지요. 
 
사람들이 내게 가끔 물어요. 아버지가 당신을 죽이려 했는데, 상처받지 않았냐고. 대답은 간단해요. 상처받지 않았어요. 그날 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하나님은 언제나 아버지의 하나님이셨어요. 처음으로 하나님 목소리를 직접 들었죠.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는 순간이었어요. 만약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상처받은 채 고통받으며 살았겠죠. 
 
내가 서 있었던 그 자리는 상처와 눈물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어요. 하늘의 별처럼 많아진 나의 후손들은 이 산을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기억했어요.    
 
나는 이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아버지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사람들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아버지가 주인공처럼 보일 거예요. 이 사건의 주인공은 아버지가 아니에요. 이 사건의 주인공은 바로 하나님이죠. 
 
일의 시작도 하나님이고, 일의 마침도 하나님이에요. 나와 아버지는 그저 무서웠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어요.   
 
나도 당신처럼 두려웠어요.
하나님이 살려주셨죠.

기다림이 은혜입니다

<출애굽기 14:14>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하시오.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위해 싸워 주실 것이오.
 
나는 자주 무너집니다. 일에 진보가 있을 때는 삶에 의욕이 넘칩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낙심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성과가 없다고 느껴지면, 나도 모르게 지칩니다. 
 
내 글쓰기가 작년보다 더 나아졌을까요? 글쎄요. 내 글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될까요? 모르겠습니다. 나는 기질적으로 내 성취에 도취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제자리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무얼 하겠다고 이렇게 바보같이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절망적인 생각에 사로잡히면, 혼자 조용히 무너집니다. 무슨 걱정이 그리 많은지, 며칠 전에, 새벽이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잠을 포기하고 책상 앞에 앉아 성경을 펼쳤습니다. 참 희한합니다. 아무리 걱정이 많아도 말씀을 읽다 보면, 무엇 때문에 걱정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립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놀라지요. 걱정은 사라지고, 은혜만 남습니다. 
 
“보아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높은 곳에서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라.”
누가복음 24:49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성경을 쭉 읽어내려가는데, 불쑥 이 말씀을 만나게 하신 것이죠. 울컥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내게는 이렇게 들렸습니다. 
 
“기다려라. 기다림이 능력이다. 나의 때가 있다. 내가 하늘 문을 연다. 나의 때에, 나의 일을 할 것이다. 그때까지 머물러야 한다. 무섭다고, 두렵다고 도망치지 말거라.”
 
주관적인 해석일 수도 있겠지요. 다음 날 아침 일찍 본문을 연구했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가 성경의 맥락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걱정하지 말고 마음 편히 푹 자라고 은혜를 베푸신 것이지요. 
 
예수님이 눈앞에서 사라진 마당에,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로마 군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의 시선을 피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벗어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까, 그저 순종한 것이지요. 두려웠지만, 머물렀습니다. 
 
“머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사도행전과 연결해서 읽으면, 그 뜻이 명확해집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과 성도들이 기도하다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셨을 때, 놀라운 광경이 펼쳐집니다. 술에 취했다 조롱하는 사람들을 향해, 베드로가 담대히 설교합니다. 베드로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꿰뚫어, 예수님이 메시아였다고 선포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변화된 사람들이 삼천 명입니다. 쾅 하고 방아쇠를 당기듯,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질주하듯, 온 세계 열방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온 세계로 전해지는 복음이지만, 그 시작은 유대의 중심 예루살렘이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약속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예루살렘에 머물게 하셨고, 성령을 보내주셨고,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세상은 가만히 있는 사람을 무시합니다. 하나님은 가만히 있는 사람을 주시합니다.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능력을 베푸시고 붙잡아 사용하십니다. 
 
머무는 것이 능력입니다. 기다림이 은혜입니다. 노력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두렵다고 먼저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도망가고 싶어도, 참고 머무르며 지속하십시오. 포기하고 싶은 그 순간에, 하늘 문이 열립니다. 
 
가만히 울고 있는 당신을 위로하고 싶습니다. 가만히 있는 당신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두렵고 무서워도 머물러 주세요.
 
나도 당신 곁에 머물겠습니다. 절대로 도망가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무능한 나를 통해서라도, 예수님의 사랑이 당신에게 전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것만으로 나는 충분합니다.

감정에 속지 마세요

<창세기 3: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졌어요. 서로가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았죠.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어요. 무화과 나뭇잎으로 수치를 가리고, 숲속 깊은 곳에 들어가 서로 다른 곳에 꼭꼭 숨었죠.
 
아담과 하와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은혜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따뜻하게 느껴져요. 은혜가 풍성할 때, 하나님이 부르신다면, 당장에 달려가 그 품에 안길 수 있어요.  
 
하지만, 은혜가 사라졌다고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이 따뜻하지 않아요. 죄를 짓고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이 두렵게 느껴져요. 
 
감정에 속아서 하나님을 오해하면, 
하나님이 무서워요. 
 
음산한 분위기의 스릴러 영화처럼, 하나님이 나를 잡아가실까 두렵거든요. 나무 틈 사이에 숨어서 식은땀을 흘려요. 하나님이 나를 못 보고 지나가시기를 바랄 뿐이에요. 
 
감정에 속으신 거예요. 
하나님을 오해하시면 안돼요. 
 
하나님은 우리를 잡아서 벌주시려고 에덴동산에 나타나신 게 아니에요. 평소처럼 우리가 보고 싶어서 오셨는데, 그 사이에 끔찍한 일이 벌어진 거죠.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은 우리가 걱정스러우셨어요.   
 
“내 자녀 어디 있니? 어디 숨어서 슬프게 울고 있니…. 두려워할 필요 없단다. 내게 나아오렴. 내가 너를 용서했단다.” 
 
잃어버린 자녀를 자녀를 찾듯이, 하나님은 간절히 우리의 이름을 부르세요. 아담과 하와를 찾아내신 하나님은, 부끄러움을 가려주셨어요. 
 
두려움에 떠는 아담과 하와에게 물으셨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셨지요. 일방적으로 혼내지 않으셨어요. 자초지종을 들어주셨고, 용서해주셨고, 새로운 기회를 주셨어요. 
 
하나님이 화내지 않으셨나고요?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세요. 하나님은 온유하셨어요. 아담이 하와에게 책임을 떠넘겨도, 하와가 변명해도, 하나님은 화내지 않으시고 끝까지 들어주세요. 
 
하나님은 딱 한 번 화를 내세요. 아담과 하와가 아닌 뱀에게요. 다시 한번 말할 게요.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화낸 적 없으세요. 뱀에게만 화를 내셨어요. 하나님을 절대로 오해하지 마세요. 
 
아담과 하와가 저주받지 않았나고요? 표면적으로 그렇죠. 하지만, 자세히 보면 저주라고 단정하기 어려워요. 노동의 고통은 보람의 열매이고, 출산의 고통은 해산의 기쁨이죠. 노동 자체는 신성한 것이고, 생명의 고귀함은 말할 것도 없지요.  
 
죄에 대한 대가는 죽음이었어요.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죽이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피할 길을 내시고, 참고 기다려주셨어요. 우리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세요. 
 
그래도 누군가는 벌을 받아야겠죠? 유일하게 저주받은 존재는 뱀이었어요. 뱀은 저주를 피할 수 없었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했으니까요. 뱀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을 하나님도 알고 계셨기에, 하나님은 확실한 약속을 주셨어요. 
 
“내가 너와 여자를 서로 원수가 되게 하고, 네 자손과 여자의 자손도 원수가 되게 할 것이다. 여자의 자손이 네 머리를 부수고, 너는 그의 발꿈치를 물 것이다.” – 창세기 3:15
 
성경에서 처음으로 선포되는 복음이에요. 여자의 자손은, 바로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이죠. 죽음으로 승리하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고, 어둠의 권세를 짓밟아주신다고 약속하셨어요. 
 
죄로 인한 수치심이 우리를 짓눌러도, 절대로 잊지 마세요. 수치심은 감정일 뿐이에요. 감정에 속지 마세요. 우리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세요.

교회에서 봉사하고 상처받아요

보상을 바라지 않고 봉사하는 방법이 없을까요? 바쁜 시간 쪼개가면서 최대한 봉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고맙다는 말을 해주기를 바라지는 않아요. 최소한 상처를 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힘들게 봉사하고 돌아오는 건 상처뿐입니다. 
 
보상이라는 단어를 어떤 의미로 쓰셨는지 묻고 싶습니다. 보상은 “받는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갚는다”라는 뜻입니다. 남을 위해 애쓴 것에 대한 대가를 인정받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미리 받은 혜택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플러스알파가 아니라 플러스제로입니다. 성경적인 의미를 말하는 게 아니라 사전적 의미를 말하는 겁니다. 내 말이 의심스럽거든 국어사전을 찾아보세요. 
 
봉사라는 단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남을 돕기 위해 애를 쓴다는 뜻입니다. 받은 것이 없는 사람이 대가 없이 순수하게 봉사하면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러나, 받은 것이 많은 사람이 받은 것의 일부를 다시 돌려주는 건 상식입니다. 봉사했다고 생색내면, 본인의 순수한 의도마저 사라져 버립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남는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 발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교회에서 받은 게 없다. 교회에서는 자기들 필요할 때만 실컷 부려먹다가 힘들어서 잠깐 쉰다고 하면 믿음 없는 사람이라고 정죄한다. 그동안 참았다. 더 이상은 못하겠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 마음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우리 서로 같은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성도니까 목사에게 분풀이라도 할 수 있지만, 나는 목사니까 어디다 하소연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말했습니다. 화가 잔뜩 난 채로 말입니다. 
 
교회 사람, 교회 구조를 먼저 생각하면 당연히 화납니다. 봉사할 맛 안 납니다.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봉사하는 대상이 잘못되면, 실망하고 지칩니다. 봉사하는 대상을 바꾸세요. 봉사의 대상은 사람이 아닙니다. 올바른 대상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봉사하면, 상처받을 일 없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면, 받은 은혜가 먼저 떠올라야 합니다. 감격으로 봉사해야 상처 안 받습니다. 예수님께 받은 게 없으면 봉사하면 안 됩니다. 봉사 먼저 하고 나중에 보상받으려고 하면 사람 망가집니다. 예수님 없이 봉사하는 삶,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러니, 잘 분별하세요.  
 
지금 하고 있는 봉사 안 해도 하나님 나라에 지장 없습니다. 은혜 먼저 받으세요. 차고 넘치도록 받으세요. 은혜받은 만큼만 봉사하세요. 그래도, 충분합니다. 은혜가 비어버리면, 다 끝입니다. 은혜 없이 죽도록 봉사해도 자기만족입니다. 당신의 삶에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넘쳐흐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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