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bpx 김유비닷컴

Tag: 외도

당신이 살아나기를

“갑자기 남편이 죽었어요. 작년 어느 날, 사고로 떠나버렸죠. 남편을 따라 죽고 싶었지만 아이들만 두고 갈 수는 없잖아요. 힘들어도 참고 또 참았어요. 나중에 천국에서 남편을 만나면 수고했다고 말해주지 않을까 싶어서요.” 
 
T는 마흔일곱, 두 아들의 엄마다. 남편은 포크레인 기사였다. 신도시 예정지구에 대규모 공사가 진행되면, 그의 얼굴을 몇 달 동안 볼 수 없었다. 아내는 남편이 보내오는 돈으로 살림을 하고 아이를 키웠다. 날씨가 춥거나 더운 날이면 남편이 걱정스러웠다. 
 
가족을 위해 고생하는 남편에게 어떻게든 힘이 되고 싶어 아이들 사진을 열심히 찍어서 보내줬다. 남편이 집에 오는 날이면 그가 좋아하는 삼계탕을 끓어주며 힘내라고 말했다. 남편은 그저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아내는 남편이 표현을 못해도 가족을 끔찍하게 사랑한다고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과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서 전회가 왔다. 남편이 교통 사로고 숨졌다고. 다급하게 병원으로 가서 싸늘하게 식은 남편을 보는 순간, 그녀는 기절했다. 
 
남편은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웠다가 변을 당했다. 차에서 내려 담배를 한 대 태우고 다시 차에 타려는 순간, 자동차 타이어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아 플래시를 가져와 바닥에 엎드려 타이어를 살펴보고 다시 몸을 일으키는 순간, 쾅 소리가 났다. 도로 위를 달리던 1톤 트럭 사이드 미러에 머리를 부딪쳤다.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미 그는 숨을 거둔 뒤였다. 
 
남편 죽음에 대해 말하던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그녀의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은 슬픔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흔들렸다. 그녀는 울어야 했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그녀는 두 아이들을 위해서 꿋꿋이 살아야 했다. 강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감정을 억누르며 살았다. 
 
갑작스럽게 떠난 남편을 뒤로 하고, 그녀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그녀는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두 달이 흘렀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 유품을 정리하다가 남편의 트럭에서 낯선 휴대폰을 발견했다. 
 
그 안에는 낯선 여자와 찍은 사진이 담겨 있었다. 주고받은 문자에는 성적인 농담, 진한 애정 표현이 가득했다. 마음속에서 흙탕물이 일었다. 남편을 그리워하던 감정이 증오심으로 바뀌었다.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제가 남편을 잘못 본 걸까요? 남편에 대한 모든 신뢰가 무너졌어요.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이제 더 물어볼 수도 없어요. 가슴 속에 묻고 살아야겠죠. 남편이 미워요.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요?”
 
그녀는 삶을 포기하려고 수면제를 사 모았다. 유서를 지니고 다녔지만 실행할 수 없었다. 아이들 때문이었다. 두 아이는 엄마가 아니면 아무도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자랐다. 
 
시댁은 남편이 죽고 나서 돈 문제로 갈라섰다. 트럭을 매입할 때 돈이 모자라 남편 형의 명의로 대출을 받았다. 남편이 죽자 아주버니는 트럭을 자신의 회사에 귀속시키고 돈 한 푼 가져다주지 않고 인연을 끊었다. 아이들에게는 엄마뿐이었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
 
그녀를 위로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떤 영화나 소설보다도 비극적이다.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은 그녀에게 남겨진 것은 유산이 아니라 남편의 불륜 증거뿐이었다. 그 고통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마치 길을 걷다 강도 만난 사람 같다. 어두운 밤길을 걷던 그녀는 강도가 휘두른 칼에 배를 찔린다. 길에 쓰러진 그녀는 살아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두 아이가 생각나서 더듬더듬 주머니에 손을 넣고 휴대폰을 꺼내 구급차를 부른다. 사이렌 소리를 들은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구급차 안에서 그녀는 생각한다. 
 
‘살아야 한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살아야 한다. 살아서 아이들 곁으로 가야 한다.’   
 
상담실을 찾은 사람은 용기 있는 사람이다. 그녀는 자기 손으로 상담실에 전화를 걸었다. 피를 흘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 신고를 한 것이다.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위해 꼭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수술대 위에 누워 상처 부위를 치료받기 원했다. 찢고 꿰매는 수술의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기 원했다.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길 위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간다. 자신을 기다리는 소중한 가족을 남기고 눈을 감는다. 그녀는 생존자다. 극적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다. 
 
수술대 위에 누운 그녀에게 필요한 처방은 ‘격려’다. 격려는 절망을 넘어 용기로 나아가게 한다. 진부한 말이지만 진실을 말하고 싶다. 그녀는 자신을 절망을 확대하는 동시에 잠재력을 축소하고 있다. 승리의 소식은 묵인하고, 패배의 소식을 수용한다. 이미 일어난 일을 바꿀 수는 없다. 남편을 살릴 수 없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고 물을 수 없다. 과거에 일어난 일이다. 
 
그녀를 짓누르는 절망의 실체는 미래에 관한 것이다. 미래에 대한 절망에는 근거가 없다. 미래에 대한 절망은 그녀의 추측으로 구성되어 있을 뿐이다. 그 절망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녀는 자신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다고 한다. 자신이 죽어 없어지면 아이들이 살아남을 수 없다. 그래서 그녀는 생존한다. 
 
하지만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는 건 진실이 아니다. 그녀는 이미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감정이 그녀를 속인다. 살아남은 그녀에게 죽으라고 말한다. 
 
희망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녀가 살아남은 경험이다. 이 경험이 그녀를 끝까지 지켜줄 것이다. 그녀의 본능 속에 생존의 DNA가 숨어있다. 절망이 축소되면 잠재력이 고개를 든다. 그녀는 책임지는 사람이다. 회피하거나 외면하거나 변명하지 않는다. 아이들에 대한 책임을 고스란히 그녀의 두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 
 
그 무게는 상당하지만, 그녀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기운을 차릴 동안 누군가 그녀를 포기하지 않도록 격려해준다면 그녀는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고통스런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더 깊은 의미를 발견하며 미래로 나아갈 것이다. 
 
그녀는 한 달 전부터 집 앞 공방에 나가 퀼트를 배우기 시작했다. 교회에서 가족처럼 지내던 한 언니의 부탁을 더 이상 거절 할 수 없었다. 손으로 작은 천 조각을 이어 붙이는 게 무슨  도움이 될까 생각했다. 그런데 남편에 대한 슬픔, 원망이 머릿속에서 잠시나마 사라진 경험을 했고,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일주일 동안 매달려 작은 작품 하나를 완성하자 성취감이 밀려왔다. 일상의 변화가 찾아왔다. 아이들 간식을 준비하고, 숙제를 도와주는 자신을 발견했다. 
 
집 앞에 작은 공방을 열고 싶다는 꿈도 생겼다. 아이들 등교 시간에 공방을 열고, 하교 시간에 맞춰 공방을 닫으면 된다. 아이들 곁을 지키면서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었다. 차분히 준비하고 기다리면서 그녀는 다음 인생을 준비했다. 
 
“지금은 제 몸 하나 추스르기 힘들지만 언젠가는 다른 사람은 돕고 싶어요. 이번 일로 많은 것을 깨달았거든요. 예전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니까. 제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을 고민하면서 살아야죠. 모든 고난에는 뜻이 있어요. 단지 아직 그걸 발견하지 못한 것뿐이죠.” 
 
죽음과 생명의 경계에는 사건이라는 울타리가 있다. 그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은 우리의 선택이다. 사건은 사건일 뿐이다. 그 사건에 대한 관점이 우리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나는 바란다. 당신이 살아나기를. 소소한 행복에 대해 잠시 떠올리며 미소 짓는 것만으로 당신은 살아날 수 있다. 어서 일상으로 돌아오라. 그것이 당신이 그토록 바라는 행복일 테니.

돌이킬 수 없는 실수

“엄마 자격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아이들을 보면 미안한 마음뿐이에요. 남편에게도 마찬가지죠.”  
 
K, 그녀는 서른세 살, 두 아이의 엄마이다. 남편은 그녀보다 열 살 이상 나이가 많다. 그는 젊은 시절 유통 업체에서 일하다, 독립해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성장했다. 바쁜 시간 속에서도 남편은 가정에 최선을 다했다. 주말은 가족과 함께 보내기 위해 애를 썼다. 남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사랑받는다고 느꼈다. 
 
어느 날,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녀는 햇살 좋은 아침에 혼자 마트에 갔다. 물건을 사서 집에 돌아오는 길, 자동차에 주유경고등이 들어왔다. 그녀는 주유소에 방문했다. 자동차 기름 냄새를 맡자마자 불현듯 잊혀진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분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자격 없는 여자야.” 
 
이 문장이 떠오른 그날부터 우울증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남편과 아이들의 눈을 보면 죄책감이 느껴졌다. 주유소 기름에서 기름 냄새를 맡았을 때, 죄책감이 찾아왔다고 했다. 왜 그랬을까? 주유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실 남편에게 말 못할 비밀이 있어요. 언젠가는 말하고 싶지만, 남편은 저를 용서하지 못할 거예요. 젊은 날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거든요.” 
 
그녀는 상고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했다. 처음 일하던 곳은 직원이 10명이 되지 않는 작은 회사였다. 서류 업무로 시작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 매일 똑같은 업무가 지루했다. 그녀는 회사를 그만두고 의류 회사 점원으로 취직했다. 매장에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어울리는 옷을 추천하고 구매로 이어지는 일이 적성에 맞았다. 2년 지나고, 부모님 도움으로 자기 매장을 차렸다.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틀에 박힌 일이 정말 싫었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좋아요. 이런 제가 좋았어요. 그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말이죠.” 
 
어느 날, 매장에 남자 손님이 찾아왔다. 티셔츠 한 장을 구매하고 갔다. 그날부터 매주 정해진 요일이 되면 그가 나타났다. 월요일 오후 7시. 그 남자가 매일 매장을 방문했던 날이다. 짧은 대화가 시작되었다. 사업을 하느라 그동안 제대로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해서 일까. 그 남자의 따뜻한 눈빛과 조금 썰렁한 유머가 좋았다. 
 
그 남자가 데이트 신청을 했다. 그녀는 응했다. 두 사람은 연애를 시작했다. 추운 겨울이 두 번 지났다. 그녀는 남자 친구에게 결혼할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 그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결혼은 나중에 생각하자고 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겨울이 지났다.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매장에 손님이 많아서 받지 못했다. 전화가 다시 왔다. 받지 못했다. 두 세 차례 전화가 걸려왔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 손님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전화기를 들여다보았다. 전화기에는 짧은 문자가 와 있었다. 
 
“000의 아내입니다. 시간 되실 때 전화 부탁 드립니다.”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남자 친구, 그의 아내에게 문자가 온 것이다. 그녀는 탈의실에 들어가 울기 시작했다. 이성을 잃은 그녀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랐다.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100번이 넘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그녀는 남자 친구의 회사도, 집에도 가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그의 전화번호뿐이었다. 일주일 동안 전화기를 붙잡고 살았지만, 남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의 아내와 통화할 수도 없었다. K는 그녀의 남자 친구에게, 그의 아내는 K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통화에 성공한 사람은 없었다.
 
한 달이 지난 후, 그의 아내로부터 다시 문자가 왔다.
 
“그 사람, 세상을 떠났어요.” 
 
K는 반쯤 미친 사람이 되었다. 그녀의 모든 삶이 무너져 내렸다.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했다. 그녀는 그날 이후 6개월 동안 방에 틀어박혀 밖에 나오지 않았다. 매장 매출이 급감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매장 문을 닫았다. 그녀를 살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전국에 유명한 목사님을 찾아다니며 상담 받고 기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높은 곳에 올라가 떨어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녀가 뛰어내리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는 부모님이었다. 부모님을 슬프게 만들 수 없었다. 아파트 옥상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다 내려온 것이 여러 번 이었다. 부모님의 기도 덕분이었을까. 그녀는 조금씩 안정감을 찾았다. 
 
일 년이 지난 후, 그녀는 부모님 일을 돕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주유소를 경영하고 있었다. 딸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전에 바람이나 쐬라고 주유소 경리 일을 맡겼다. 매장을 경영해본 그녀는 주유소 경리 일이 어렵지 않았다. 20대 젊은 아르바이트 직원들과 같이 일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같이 밥을 먹고, 함께 어울리면서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큰 트럭 한 대가 주유소 안으로 들어왔다. 트럭을 운전하던 남자는 기름을 가득 채워달라고 말한 후에 차에서 내렸다. 화장실에 다녀온 그는 유리창 너머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K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날부터 그 남자는 주유소에 매일 기름을 넣으러 왔다. 한 달이 지난 후, 그가 말을 걸었다. 
 
“시간 되세요?” 
“아니요.”
“밥이나 한 번 먹죠?” 
“아빠한테 혼나요.”
“다 큰 어른이 아빠 눈치는.”
“나가세요.”
“알겠어요. 내일 또 봅시다.”
 
어색한 첫 인사를 나눈 그 남자는 현재 그녀의 남편이 되었다.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그에게 말해야 했어요. 자격 없는 여자라고. 그럴 수 없었어요. 용기가 나지 않았거든요. 평생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 남자에게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나는 당신이 아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 말하기로 결심한 날, 남편의 프러포즈를 받았어요. 끝내 말하지 못했죠. 가슴 속 깊은 곳에 진실을 묻어 둔 채 살았어요.”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녀는 행복했다. 두 아이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변함없이 아내를 사랑했다. 성실하게 일했고, 가정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겉으로 보기에 부족함 없어 보이는 그녀에게 우울증이 찾아온 원인을 남편은 알 수 없었다. 
 
“제게는 모든 것이 과분해요. 남편도, 아이들도. 저는 자격 없는 사람이니까요. 솔직한 생각을 말해 드릴까요? 언젠가는 제가 이렇게 행복하게 사는 것을 그 여자가 알게 될 거예요. 그리고 제 남편에게 전화 하겠죠. 그리고 모든 진실을 까발릴거예요. 남편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저는 버려질 거예요. 두 번 다시, 아이들 얼굴을 볼 수 없겠죠. 저의 행복은 유통기한이 정해져 있는 냉장고 음식 같은 거예요. 차갑게 식어버린, 그러나 아직은 상하지 않은.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되요.” 
 
***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날지 모르는 사건이 그녀의 삶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녀가 가진 두려움은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다. 행복한 일상을 누리다가 어느 날, 전화를 받는다. 이전 남자 친구의 아내다. 남편에게 연락이 간다. 남편이 모든 것을 알아버린다. 그녀를 버린다. 아이들을 두고 집을 떠난다. 홀로 남겨진다. 비참한 삶을 산다. 
 
누구도 원망할 수 없다.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정해진 기한만큼, 모든 것이 밝혀지기 전까지만, 그녀는 현재의 삶을 유지할 수 있다. 그녀만의 세상이 흘러가는 방식이다. 
 
과거의 고통으로 인해 비틀어진 관점은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쉽게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깨진 유리 조각을 다시 붙여서 원래의 모습으로 만드는 것만큼 어렵다. 그녀에게 “당신이 두려워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요”라고 말한다면 그녀에게 위로가 될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이미 일어난 일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할 방법은 없다. 그녀는 이미 일어난 일처럼 생각하고 느낀다. 
 
이 상황을 정면 돌파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이 있다. 가장 두려워하는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가정하고 대화를 하는 것이다. 가장 두려워하는 일,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 벌어지는 최악의 상황에 그려본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가장 두려워하는 사건을 외면한다. 두려움의 중심에 서지 않는다. 
 
태풍 변두리가 바람이 가장 세다. 용기를 내어 바람을 뚫고 태풍의 중심에 가 본 사람은 안다. 태풍의 중심은 고요하다. 그 일이 벌어지면 인생이 파멸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그 사건을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할 뿐, 그 사건을 전개하지 않는다. 멀리서만 지켜보고 두려워 떠는 것이다. 
 
그 사건을  끝까지 전개해야 한다. 상상력을 발휘해 그 사건을 머릿속에서 전개해야 한다. 사건을 끝까지 전개시키고 나면, 자신이 맞이할 가장 두려운 상황이 의외로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삶을 파괴할지 모르는 최악의 상황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으로 들어온다. 
 
고통의 대가를 지불하고 태풍의 중심으로 들어간 사람은 삶이 고요해진다. 최악의 상황을 대처할 수 있는 강인한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녀는 태풍의 위력을 느낀다. 멀리서 태풍이 불어오고 있다. 시커먼 비구름이 몰려와서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태풍이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앞집이 무너진 것처럼 내 집이 무너질지 모른다. 그녀는 두려워서 눈을 감는다. 눈을 감으면 태풍이 위력은 더욱 거세진다. 엎드려 운다. 다 끝났다고. 모든 것이 파괴될 것이라고 말한다. 
 
우르르 쾅쾅! 번개 소리를 들은 그녀는 갑자기 정신을 차린다.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갑자기 차를 몰고 태풍으로 달려든다. 강한 바람에 차가 흔들리지만, 그녀는 속도를 올린다. 흔들리던 차는 다시 고요해진다. 시커먼 비구름 역시 사라져 버렸다. 고요함만이 남는다. 그녀는 깨닫는다. 태풍은 강했지만, 자신의 집을 파괴해 버릴만큼은 아니었다고. 태풍을 미리 경험해보고 나서 깨닫게 된 사실이다.
 
남편이 모든 것을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까. 그녀를 버릴까. 아니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처럼 살아갈 것인가. 아무도 모른다. 태풍의 바람은 거셀 것이다. 남편이 흔들리다 쓰러질지, 아니면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설지. 남편의 반응은 예상할 수 없다. 
 
견뎌주면 아내와 살고, 견디지 못하면 아내를 버리게 될 것이다. 남편의 반응이 태풍이라고 전제한다면,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남편 반응은 태풍이 아니다. 태풍의 실체는 그녀 마음 속 두려움이다. 
 
그녀는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다. 그녀는 이전 남자친구가 유부남인 것을 알지 못했다. 유일한 잘못은 그녀의 남자 친구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녀는 신이 아니다. 그녀의 잘못이 아니란 뜻이다. 그녀가 죄책감을 느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무죄이다. 그녀는 비난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다. 
 
그녀가 남편에게 모든 사실을 미리 말해야 할 책임은 없다. 끝까지 숨겨야만 한다는 말도 아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인생을 살면서 때로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일이 있다. 가장 두려운 일을 마음속으로 미리 경험한 사람은, 다가올 일에 대해 편안하다. 
 
그 일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것이다. 그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세상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준비를 오랫동안 한 사람이라면, 그 일이 일어난 다음부터, 자신의 진정한 가치가 빛을 발하기 발한다.

용서 못해도 괜찮아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지금까지 잃어버렸던 제 자신을 되찾을 거예요.”
 
H는 5살 아들을 둔 엄마이다. 그녀는 결혼 생활 7년을 뒤로 하고 이혼했다. 결혼하고 3년 후부터 남편은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렸고, 결국 이혼했다. 
 
아들 어린이집 재롱잔치가 있던 날, 남편의 외도를 처음 알았다. 그는 일이 많아 토요일에 출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내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달 전 부터 미리 알려준 일정이었다. 그날 남편이 오지 않으면 아들이 서운할 게 뻔했다. 아내는 일단 왔다가 얼굴이라도 보이고 가라고 부탁했다. 남편은 짧게 알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지 않았다. 
 
저녁 늦게 퇴근해서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말로 넘어가려고 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불안감을 이겨낼 수 없었다. 남편이 잠든 사이에 그의 휴대폰을 확인했다. 비밀번호가 걸려있었다. 그날 밤, 아내는 한숨도 못 잤다. 긴 한숨이 베개를 타고 침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전화가 걸려오면 남편은 밖으로 나갔다. 안에서 받으라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남편이 화장실에 갔을 때 전화가 걸려왔다. 거래처 이름이 떴다. 퇴근, 주말 구분 없이 자주 걸려 오는 전화라 의심스러웠다. 아내는 긴장한 채로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지금 나올 수 있어?” 
 
아내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어서 서둘러 종료버튼을 눌렀다. 화장실에서 나온 남편이 말했다. 
 
“뭐야? 당신, 내 전화 받았어?” 
 
아내는 일어나 남편의 뺨을 후려쳤다. 그리고 자신이 뺨을 맞은 듯, 그녀는 그의 발 앞에 맥없이 쓰러졌다. 남편은 아내에게 용서를 구했다. 실수라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가 아무리 용서를 구해도 아내는 용서하지 않았다.
 
남편은 죽은 듯이 아내 옆을 지켰다. 아내의 눈치를 보면서 평소에 하지 않는 집안일과 육아를 도왔다. 먼저 안부를 묻지 않았던 친정 엄마에게도 주말마다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남편의 위선이 싫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목사님이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설교를 했다. 양심에 가책이 들었다.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반성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날 저녁, 감정은 따라주지 않았지만 의지를 발휘해서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나 당신을 용서하려고. 다시는 내게 상처주지 말아줘. 다 잊을게.” 
 
“아니야, 여보, 내가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아내가 예상한 답변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아니. 나 이제 너랑 안 살려고. 더 이상 못살겠어. 내가 왜 다른 사람을 만났는지 생각해봤어? 나만 잘못한 것 같아? 우리  사이가 안 좋잖아. 대화도 안 되고. 전부 내 잘못이라고 하면 난 억울한데? 나 집 나가려고 원룸 알아봤어. 주말에 와서 애랑 놀아줄게. 평일에는 거기서 살 거야. 나 없다고 생각해. 이혼은 안 하지만 너랑은 살고 싶지 않으니까.” 
 
아내가 말했다. 
 
“그 말을 하지 말 걸 그랬어요. 제가 용서하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올 줄 알았거든요. 사실 저는 남편을 용서한 것도 아니었어요. 용서에는 의지가 필요하다고 들었어요. 의지를 가지고 용서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라고. 저는 그렇게 믿었어요. 하지만 그의 반응은 제 예상과 전혀 달랐죠. 
 
그가 밖에 나가 혼자 산다고 했을 때, 그러라고 동의한 건 솔직한 제 심정이었죠. 저도 남편하고 살고 싶지 않았거든요. 밖에 나가서 제멋대로 하고 살라고. 나도 너 필요 없다고. 너무 괘씸했어요. 차라리 안 보니까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평일에는 아이와 단 둘이, 주말에는 남편과 같이 시간을 보냈다. 주말에 남편을 만나도 말 한 마디하지 않았다. 부부 관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주말에 아이와 있는 남편을 보면 그 여자와 완전히 끝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실 남편 모르게 젊은 여자를 만나서 말했다. 그녀는 울면서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다시는 남편을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허무하게 대화가 끝났다. 그녀의 마음은 조용히 무너졌다. 
 
주말에 아이와 아파트 단지 앞에 자전거를 타러 나간 남편이 전화기를 두고 나갔다. 문자 알림이 울렸다. 일부러 본 것이 아니었다. 메신저 알림에 한두 줄 문장과 함께 그녀의 프로필 사진이 떴다. 그걸로 끝이었다. 남편의 전화기를 건드리지 않았다. 문자 내용 역시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알게 되었다. 남편은 그 젊은 여자와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남편이 아이와 집에 들어오자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주말에도 오지 마.” 
 
남편은 무릎을 꿇고 빌었다. 
 
‘이건 뭘까? 남편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누구를 위해 이러는 것일까? 나를 위해 아니면 그 젊은 여자를 위해?’ 
 
머리가 아팠다.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에는 이혼 서류가 보였고, 눈동자로 서류 위에 사인했다. 편안했다. 두 번 다시 남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사인을 하자, 장면이 바뀐다. 천장에 갑자기 남편의 웃는 모습이 그려졌다. 젊은 여자 얼굴도 보였다. 둘이 비웃듯이 자신을 내려 본다. 소름 끼쳤다. 
 
‘이대로 이혼해 줄 수는 없지.’ 
 
아내는 결심했다. 남편에게 복수하고 난 다음에 이혼한다고.  남편에게 짧은 문자를 보냈다. 당장 원룸을 정리하고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남편이 다니는 회사와 젊은 여자가 다니는 대학에 진실을 알리겠다고. 그녀는 단 하루의 시간을 줬다. 
남편은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처음 외도를 들켰던 때처럼 집안일과 육아를 도왔다. 아내는 그런 남편이 정상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네 인생도 비참하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사냐!’ 
 
아내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6개월 동안 남편에게 고통을 줬다. 조용한 복수극이 끝나고, 그녀는 이혼했다. 남편이 없는 지금, 그녀는 10년 동안 잃어버렸던 자신을 되찾았다고 말했다. 
 
“복수극은 끝났어요. 충분하지는 않지만 아쉬움은 없어요. 이제 그 둘이 어떻게 살든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죠. 다 잊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슬프게 들렸다. 
 
“그러니까… 만약, 친구가 이런 일을 겪었고 제가 그 친구를 위로해준다고 하면 무슨 말을 해주고 싶냐고요? 참 어려운 질문인데요. 음… 저라면….”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다 지난 일이라고 쿨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어가던 그녀가 갑자기 오열했다. 좋은 회사에 다니며 많은 연봉을 받는 그녀는 이혼하고 나서 당당하게 살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질문에 답하면서 그녀의 비밀창고가 열렸다. 댐의 수문이 열린 것처럼 쏟아져 내리는 눈물에 주변 모든 것이 떠내려가는 것 같았다. 
 
처음 남편을 만났을 때, 호감을 느끼지 못했다. 무시하고 거절해도 한결같이 자기를 좋아해주는 모습에 끌렸다. 그와 같이 있으면 왠지 모를 우월감이 느껴졌다. 그가 자신을 더 좋아하니까. 남편에게 조금씩 빠져들었다. 
 
결혼하고 많은 것이 변했다. 육아와 일로 정신이 없었다. 쏜살같이 시간이 흘렀다. 부부가 아닌 파트너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의 기능을 하고, 자신은 자신의 기능을 하는 형식적인 관계가 되었다. 서로 대화할 시간이 부족했다. 
 
“저는 가정이 깨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요. 부모님도 사이가 좋지 않았거든요. 어머니가 아버지를 찾아오라고 해서 동생과 어떤 집에 갔던 기억이 나요. 모르는 아줌마가 문을 열어줬고, 아빠가 현관에 나와 용돈을 주면서 나중에 집에 갈 거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말했어요. 
 
저는 그 돈으로 동생이랑 문방구에 들러서 이것저것 사먹었죠. 어려서 상황 판단을 못했어요. 어머니는 이혼하지 않았죠. 아버지와 싸우면서 우리에게 물었어요. 누구와 살 거냐고. 저는 울면서 대답을 못했어요. 엄마를 대답하라고 고함을 쳤고, 저는 더 크게 울었죠. 아버지는 그 모습을 보고 집을 나갔어요. 
 
몇 년이 지나자 아버지가 짐을 싸서 다시 들어왔죠. 그 이후로 며칠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은 적은 있었지만 집을 나가진 않았어요. 둘은 부모 자리만 지키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서로 무언가를 요구하지도 않고, 해주려고 하지도 않았죠. 
 
여름휴가도 자식들 때문에 마지못해 가는 것 같았으니까. 결혼은 유지했지만 부부 관계는 깨진 채로 산 거죠. 어릴 때는 원망을 많이 했는데 다 크고 나니까 고맙더라고요. 어쨌든 가정은 유지했으니까요. 저도 어머니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원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처럼 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이혼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아이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 반복해서 말했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엄마보다 강하다. 남편 없이 아이를 더 잘 키울 수 있다.” 
 
애써 노력했지만, 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부러졌다. 차고 넘치는 슬픔과 분노를 억누르자 댐이 무너지면서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아까 하신 질문에 답할게요. 친구가 저와 같은 일을 겪었다면 이렇게 말할 거예요. ‘지금까지 참 수고 많았어. 잘 견뎌줘서 고마워. 힘들지만 이제 널 되찾았으면 좋겠어. 한 사람의 아내와 엄마로서 이름 없는 존재가 아니라 온전한 네 자신이 되어서 너를 돌봐주기를 바라. 그리고 말이야, 네가 원수를 사랑하면 하나님이 널 사랑하시는 게 아니래. 그러니 용서 못해도 괜찮아. 하나님은 여전히 널 사랑하시니까. 네게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 내가 항상 곁에 있어줄게. 힘내!’” 
 
***
 
그녀는 스스로를 치유하고 있었다. 비밀창고에 물이 빠지고 나서 남은 것은 조그만 상자였다. 그 상자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그녀는 상자 안을 혼자 들여다보고, 안에 든 것에 대해 말했다. 그것은 ‘조건 없는 사랑’이라고. 인간이 만들어낼 수 없는 초월적인 사랑이 그녀에게 필요했나보다. 
 
사랑이 의무가 되면 메마른다. 사랑을 강요하면 짓눌린다. 사랑은 자유다. 처음으로 그녀의 미소를 보았다. 억지웃음이 아니라 입술 끝자락이 내면에 닿아있는 미소였다. 

마음이 잠시 흔들렸을 뿐

“목사 아내가 될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죠. 어느 날, 남편이   목사가 되겠다고 하는 바람에….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그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어요. 목사가 된다고 하는데 이혼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사모로 살아가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더군요. 어항 속에 사는 느낌이랄까…. 제 표정, 말투, 입는 옷, 아이들.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구설수에 올랐어요. 남편은 자기가 원해서 하는 일이지만, 저는 그렇지 않거든요. 사모가 상담을 받는다는 소문이 퍼지면 어떻게 될지…. 아마 목사 자격 없다, 사모 자격 없다고 뒤에서 욕하겠죠. 결국 우리 부부를 쫓아낼 방법을 찾을 거예요. 
 
요즘 이상한 꿈을 자주 꿔요. 자다가 눈을 뜨면 천장이 내려앉는 거예요. 천천히 내려앉는 천장을 보면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요. 깜짝 놀라 일어나면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어요. 요즘은 꿈꾸는 횟수가 늘어났어요. 예전에는 한 달에 한두 번 꾸던 꿈이었는데, 이제는 일주일에 한두 번으로 늘었어요.” 
 
P는 금융회사에 다니던 남편과 결혼했다. 그녀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교회에서 만나 4년 동안 연애를 했다. 두 사람은 해외 단기선교로 신혼여행을 대신할 만큼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남편은 회사에서 업무 능력을 인정받으며 승승장구했다. 자녀들 역시 잘 자라주었다. 
 
결혼하고 11년이 지난 어느 날, 남편은 아내를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으로 불러냈다. 분위기를 한껏 잡고서 폭탄선언을 했다. 신학교에 입학해서 목사의 길을 걷겠다고. 아내는 충격을 받았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충분한 시간을 갖고 생각해보자고 했다. 
 
그날부터 아내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사명을 주셨는데, 자신이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쉽게 그의 뜻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그동안 자신이 만났던 목사 아내들의 고통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기도의 자리를 피했다. 기도하다가 덜컥 하나님이 순종하라고 하시면 도망칠 길이 없기에. 
 
“거실에서 빨래를 개고 있는데, 갑자기 마음에 외침 같은 것이 있었어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죠. 더 이상 질질 끌 수 없다고 생각해서 남편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어요. 남편에게 원하는 대로 하자고 말했을 때, 그가 저를 끌어안고 고맙다며 눈물을 흘렸어요. 저도 남편이 참 고마웠어요. 독단적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제 결정을 기다려줬거든요. 두려운 마음은 있었지만 그를 믿었어요. 지금처럼 배려해주고 존중해준다면 어려운 길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남편이 신학교에 입학하고, 목사의 삶을 준비하는 동안에 그녀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남편이 목사가 된 이후에 S시에 위치한 교회에서 연락이 왔다. 담임목사로 와달라고. 남편은 그녀와 상의한 후에 부임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목회가 시작되면서 아내는 생각하지 못한 문제로 시달리게 되었다. 처음 불거진 문제는 그녀의 옷차림이었다. 교인들이 사모가 너무 화려하게 입는다고 수군거렸다. 그녀는 옷차림으로 남편의 목회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화려한 옷은 장롱 구석에 처박아놓고 편안한 옷을 꺼내 입었다. 
 
한 달의 시간이 흐르자 반대의 소문이 들렸다. 옷차림이 너무 촌스럽다는 말이었다. 아내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모든 사람의 비위를 맞출 수 없었다. 그녀에게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옷차림으로 시작된 말은 점점 삶의 모든 것으로 확대되기 시작했어요. 다른 건 다 참아도 자녀들에 대한 말이 사람들 사이에 돌아다니는 건 참을 수 없었어요. 남편이 자녀 교육에 대해서 설교한 날이었죠.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우연히 식당에서 몇 사람이 하는 말을 들었어요. 
 
‘목사님은 자기 자녀도 제대로 못 키우시는 것 같은데, 우리한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건가?’ 
 
저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마음 같아서는 머리채를 휘어잡고 제대로 싸우고 싶더라고요. 아마 남편이 알면 스트레스 받아서 종일 누워 있을 거예요. 일 년에 한두 번은 꼭 몸이 아파서 누워요. 사람들 때문이죠.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는다고 괴로워해요. 그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전 힘들다는 말을 못해요. 저까지 힘들다고 하면 아마 남편이 못 견딜 거예요.”
 
집안일, 자녀 양육은 고스란히 아내가 떠맡았다. 남편은 평일, 주말 구분 없이 새벽부터 늦은 시간까지 바빴다. 아내는 점점 외로움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삶이 통째로 흔들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아이들이 중학교에 입학하자, 그녀의 삶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가까운 대학의 평생교육원에 입학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이 삶에 활력을 가져다주었다. 여러 사람을 편하게 사귀던 중에 한 남자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대화를 하면서 서로 호감을 느꼈다. 
 
‘이러면 안 되지’ 하면서 이상하게 빠져들었다. 깊은 대화를 하고, 함께 식사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녀는 남편에게도 말하지 못한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경청해주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깊어졌다. 
 
“서로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죠. 그 역시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거든요. 출장이 많은 일을 하고 있어서 아내와 함께할 시간이 부족했나 봐요. 제게 외롭다는 말을 자주 했죠. 안아보고 싶다고, 딱 한 번만 허락해달라고. 그의 품에 딱 한 번 안겨봤어요. 성적인 관계를 맺거나 한 건 아니에요.  
 
선을 넘을까 두려웠어요. 그래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에게  이제 그만하자고, 더 늦게 전에 정리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죠.  그제야 그도 정신을 차린 것 같아요. 제 말에 동의해주었어요. 그 이후로 서로 연락을 하지 않고 있어요. 
 
그런데 그가 떠나자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그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게 아니에요. 그가 떠난 자리가 너무 크다는 거죠. 제 선택에 후회는 안 해요. 만일 그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고 선을 넘었다면 더 후회를 했겠죠.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거든요. 정리하면 죄책감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심해졌어요. 
 
가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진 않을까 스스로 걱정이 되요. 제가 인생을 살면서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게 된 거죠. 항상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제게 벌어졌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통을 받고 있어요.” 
 
남자를 떠나보낸 이유는 간단했다.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에게 마음을 빼앗기면서 그녀는 하나님께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나님과 그녀 사이에 알 수 없는 벽이 있는 것 같았다. 그에게 이별을 통보한 후에 그녀가 되찾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과 막힘없는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떠난 후에도 하나님과 관계는 예전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무거운 돌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더 고통스러웠다. 그녀의 고통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남편이 아는 순간, 그의 세계는 무너질 것이다. 그는 교과서처럼 정해진 대로, 주어진 대로, 불평 한 마디 없이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이었다. 교회 사람들이 술 한 모금 입에 대는 것마저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기에 아내가 다른 사람에게 잠시나마 마음을 줬다는 것을 용납할 리 없었다. 영원히 비밀로 간직하고자 했지만 그 무게를 견딜 수 없었다. 
 
“마음속에서 싸움이 있음을 느껴요. ‘내가 정말 잘못했지. 다른 사람에게 감정을 주지 말아야 했어. 도대체 왜 그랬을까?’  하면서도 정반대의 생각도 들어요. ‘내가 그와 뭘 했는데? 그냥 밥 먹고 차 마신 게 다잖아. 선을 넘은 적도 없고. 마음이 잠시 흔들렸을 뿐 그 이상은 아니잖아. 결국 옳은 선택을 했으니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전혀 없어’ 라고 스스로 다짐하지만 마음이 복잡해요. 
 
하나님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회개했으니까 용서받은 걸까요? 아니면 정말로 반성하지 않으니까 용서받지 못한 걸까요? 너무 혼란스러워요.” 
 
***
 
그녀는 취약하다. 외로움에 노출되기 쉽다. 고립된 섬에서 외롭게 생활하다가 그 섬에 낯선 남자가 갑자기 찾아왔고, 그에게 매력을 느꼈다. 그녀는 사람들과 함께 머물고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가까이 가지 않았다. 가까이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녀에게 따뜻하지 않았다. 반복되는 비판 속에서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그녀에게 비판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호적인 사람들은 그녀의 눈에 보이지 않고, 비판적인 사람들만 보였다. 결국 공동체 모두가 그녀를 비난하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사실이 아님에도 그녀에게는 사실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수많은 목사 아내들이 지독한 외로움으로 고통 받는다. 사람들의 높은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채, 스스로 결론내리고 절망하면서 마음의 병을 얻는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을 통해 치유하려고 하면 부작용이 생긴다. 위험한 관계로 빠져든다. 
 
남편 역시 목회가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간다. 아내를 세심하게 돌볼 상황이 아니다. 남편이 아내를 돌봐주지 않아서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잠시나마 마음을 줬다고 하는 것은 무리일까. 사모 역시 목사와 다를 바가 없으니 어떤 위기 속에서도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인가? 
 
아내가 취약해진 결정적인 이유는 남편과 관계가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선순위에서 밀린 아내는 비참해진다. 회사 일이 바빠서 아내를 뒷전으로 미룬 사람을 좋게 평가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아내보다 앞선다고 말하는 사람은 어떤가? 단순하지 않다. 
 
이 과정에서 남편들은 실수한다. 하나님이 아닌 교회 일에 파묻혀서 아내를 뒷전으로 미루는 것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교회 업무를 구분해야 한다. 회사 일로 밀려난 아내나 교회 일로 밀려난 아내나 그 심정은 똑같이 비참하다. 교회 일로 밀린 아내에게 더 고귀한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아내보다 앞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내가 가장 우선되는 성도라는 것을 잊은 것이다. 아내는 그 누구보다 목사의 사랑과 돌봄이 필요한 최우선 순위의 성도이다. 
 
아내는 고립된 섬에서 스스로 탈출해야 한다. 계속 무인도에 스스로를 가둔다면 지나가는 배 위에서 의미 없는 손짓으로 인사하는 사람마저 반갑게 느껴진다. 취약한 상태가 계속된다. 남편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한 가지는 그와 공유해야 한다. 
 
“나는 지금 외롭다. 당신이 필요하다.” 
 
외로움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남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건강한 공동체를 찾아서 소속감을 느끼기를 바란다. 목사 아내는 목사 아내의 고통을 안다.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맞는 사모들을 모아서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마저 힘들다면 일대일로 연락을 해서 정기적으로 마음속에 있는 답답함을 털어놓는 것도 좋다. 무인도를 디즈니랜드로 만드는 것은 어렵지만 낭만적인 여행지로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쉽다. 방법은 간단하다. 사람을 기다리지 말고,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남편이 목사의 사명을 받을 때, 아내 역시 사명을 받은 것이라고 쉽게 결론 내린다. 같은 사명을 받았으므로 목사가 짊어진 사역의 무게를 아내에게 고스란히 짊어지게 한다. 그러나 그녀는 사모가 되기 위해 남편과 결혼하지 않았다. 한 남자를 사랑한 것뿐이다.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했고, 따뜻한 가정을 이루기 원했다. 
 
남편이 목사가 된다고 했을 때, 그녀는 동의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어서가 아니다. 그녀가 기꺼이 목사 아내로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가끔 목사 남편보다 더 열정적인 목사 아내들을 만나지만 그녀는 그들과 다르다. 
 
한 남자를 사랑했다는 이유 하나로 견딜 수 없는 인생의 무게를 견뎌야 했다. 그녀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떨까? 화가 나실까, 답답하실까? 하나님은 그녀를 바라보시며 마음 아파하실 것이다. 고통 받는 그녀를 위로하기 원하실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사모로서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잠시 흔들렸던 그녀를 비난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부탁이다. 그런 말 하지 마라. 그녀를 목사 아내가 아닌 외로움으로 고통 받는 한 여자로 바라보라. 누가 그녀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가!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온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비난이 아닌 사랑이다. 

넌 엄마의 인형 같아

“‘이상하다, 이 남자가 왜 이러지?’ 하면서도 거절하지 못했어요. 결국 석 달 만에 결혼했죠.”
 
M은 서른두 살이고, 세 살 된 아들의 엄마이며 현재 별거 중이다. 그녀는 5년 전 남편을 만났다. 친구 소개로 만난 그는 성격이 시원시원했다. 평소 내성적인 자기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녀는 그에게 끌렸다. 두 사람은 연애 3개월 만에 결혼했다. 
 
남편은 유통마트 지점 하나를 관리하는 매니저였다. 신혼 초에는 출퇴근 시간이 분명했다. 그런데 출근 시간이 조금씩 늦어지고, 퇴근 시간에 맞춰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늘어났다. 알아서 하겠지, 남편을 믿었다.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남편의 통화를 엿듣게 되었다. 친구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이 해외여행을 가려고 하는 것 같았다. 아내가 임신했기 때문에 남편의 도움이 필요했다. 친구와 해외여행을 간다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남편은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아내는 남편 친구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필리핀 여행을 가려고 했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내는 남편에게 집요하게 물었고, 필리핀에 성매매 여행을 떠나려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내는 살림을 던지면서 울부짖었고, 남편은 집을 나갔다. 
 
남편이 집을 나간 후, 아내는 청소를 하다가 우연히 외장하드를 발견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외장하드 안에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야한 영상이 가득했다.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본능적으로 잘못된 결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에게 그나마 남아 있던 정이 뚝 떨어졌다. 아내는 법률사무소를 찾아가 이혼을 준비했다. 
 
남편은 아내에게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각서를 썼다. 아내는 용서할 수 없었지만 뱃속에 아이가 마음에 걸렸다. 아빠 없는 아이로 키우고 싶지는 않았다. 남편에게 성 중독 치료를 받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줬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남편은 또 다시 문제를 일으켰다. 저녁에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일주일에 여러 번이었다. 
 
아내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남편이 일하는 회사에 찾아갔다. 그런데 남편이 두 달 전에 사직서를 내고 일을 그만두었다는 말을 들었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이 물려준 유산을 현금화해서 가지고 있던 통장을 결혼 초에 남편이 애원하면서  달라고 했다. 거절하기 힘들었던 아내는 그에게 통장을 맡겼다.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고 인근지역에 대형 마트를 인수하기 위한 계약을 했다고 주변 사람들이 말했다. 그녀가 남편을 찾으려고 수소문 해봤지만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남편은 사기를 당해서 돈을 전부 날려버리고 잠적했다. 그녀는 답답해서 견딜 수 없었다. 시어머니를 찾아갔다. 시어머니는 잠적한 남편에게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 이해하라는 식으로 말했다. 어디 숨어서 뭘 하고 있는지 시어머니는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녀는 변호사를 다시 찾아갔다. 이혼 절차를 진행하고 있을 때, 남편을 소개시켜 준 친구가 찾아왔다. 성급한 결론을 내리면 안 된다고 설득했다. 남편이 돌아온 다음에 말을 들어보고 이혼해도 늦지 않다고 했다. 뱃속에 아이는 어떻게 할 거냐고. 혼자서 어떻게 살아갈 거냐고. 옆에서 도와줄 테니 이혼하지 말고 그를 기다려보자고 했다. 
 
그녀는 마음이 흔들렸다. 변호사는 법적인 절차를 진행해야 남편도, 돈도 찾는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친구 말을 따랐다. 당시에는 그 친구가 남편과 한편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남편은 친구에게 돈을 보냈고, 친구는 남편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었다. 
 
그 사이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를 먹여 살리려면 어떤 일이라도 해야 했다. 시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편의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녀는 마음의 병을 얻었다. 술에 취해 집에 들어가 시어머니에게 행패를 부렸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말라고 말했다. 술을 끊지 않으면 아이를 다시는 보여주지 않겠다고.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다. 
 
“저는 엄마가 원망스러워요. 엄마가 공주처럼 키웠거든요. 대학에 다닐 때, 남자친구가 ‘너는 사람 같지 않고 인형 같아. 엄마의 인형. 엄마 없이 아무 것도 못하잖아. 말끝마다 엄마, 엄마, 엄마!’라고 말했어요. 처음 그 말을 듣고 충격 받았던 기억이 나요. 그 말을 부인할 수 없었거든요. 
 
그랬던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신 이후, 제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어요. 혼자서 살아갈 수가 없었죠. 누굴 원망하겠어요? 남편을 선택한 건 제 자신이니까요. 당시에는 너무 불안정했어요. 엄마가 사라지고 나서 도저히 혼자 견딜 수 없었거든요….” 
 
그녀의 아버지는 이미 가정이 있던 남자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돌이킬 수 없었다. 뱃속에 아이가 생겨버렸다. 아버지는 이혼하지 않은 채로 그녀의 엄마와 함께 살았다. 겉으로 보면 정상적인 가정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외동딸로 부족함 없이 자랐다. 엄마가 세상의 전부였다. 엄마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엄마의 사랑과 집착이 혼란스럽게 뒤엉킨 채 그녀는 성장했다. 그녀가 중학교 다닐 때, 아버지는 엄마를 떠났다. 그러면서 엄마의 집착이 더욱 심해졌다. 
 
“엄마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예쁜 줄 알았나봐요.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지역 미인대회에 내보냈어요. 제 외모가 그 정도는 아닌데, 제가  싫다고 해도 들은 체도 안했어요. 넉 달 정도 준비하고 나갔지만 결과는 뻔하죠. 엄마는 제가 실망한 줄 알았나 봐요. ‘괜찮다. 심사위원들이 네 가치를 몰라서 그렇다. 실망하지 마라’라고 일주일 내내 말했어요. 
 
어차피 기대를 안 해서 실망도 하지 않았어요. 엄마가 나가보라고 하니까 나간 거죠. 그때 친구들 앞에서 얼마나 창피했는지,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녀의 전부였던 엄마는 어느 날 갑자기 암 진단을 받았다. 6개월 투병 생활을 하는 동안, 그녀는 휴학하고 엄마 곁을 지켰다. 엄마는 점점 작아졌다. 얕은 언덕처럼 보였던 엄마의 볼은 움푹 파인 구덩이가 되었다. 팔 다리는 짝이 맞지 않는 젓가락처럼 보였다. 엄마는 그녀 곁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기억했다. 
 
“엄마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 텐데…. 제가 걱정이 되셨는지 똑같은 말을 반복했어요. ‘사인 막 해주지 마라. 잘 읽어보고 해라. 모르겠으면 변호사를 찾아가라’라고요. 아무래도 아버지 재산 때문에 그랬겠죠. 제가 불안해 보였나봐요. 잘 읽어보고 사인했는데 제가 졌어요.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 매일 술 마시고, 남자를 만나며 방황했어요. 혼자 있고 싶지 않았죠. 가장 좋은 방법이 뭘까 생각했어요. 결혼해서 안정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남편을 만났어요. 인생 최악의 실수를 한 거죠.” 
 
***
 
배고픈 아이는 음식을 급하게 먹는다. 급하게 먹은 음식은 반드시 탈이 난다. 배가 아파 발을 동동 구르다 구토한다. 한 번 고생하고 나서 다시는 음식을 급하게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소용없다. 배고프면 또 닥치는 대로 먹는다. 절제하지 못하고 음식을 먹는 아이를 도와줄 사람은 부모다. 부모가 적절한 음식을 적당한 양만 먹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나 아이가 음식을 급하게 먹든 천천히 먹든 관심 없는 부모가 있다. 그저 아이가 먹는 모습이 사랑스럽다고 무절제하게 음식을 먹인다. 자꾸 밥상에 음식을 가져다 놓는다. 몸에 좋으니 먹으라고 한다. 아이는 부모가 먹으라는 대로 먹어 치운다. 
 
문제는 어느 날, 밥상을 차려주는 부모가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숟가락 하나로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던 아이는 부모가 사라지는 즉시 텅 빈 밥상을 받는다. 음식을 차려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아이는 굶는다. 스스로 밥을 지어먹을 수 없는 아이는 학교 앞 문방구로 간다. 
 
새빨간 사탕, 새파란 아이스크림, 현란한 먹거리가 아이를 유혹한다. 닥치는 대로 형형색색 불량식품을 먹은 아이는 틀림없이 병원 신세를 진다. 그녀의 상황이 이와 같다. 
 
그녀의 남편에 대해 생각해보자. 남편은 나쁜 사람이다. 훈육이 되지 않은 사람이다. 남편 안에 자리 잡은 특정한 결핍이 문제 행동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아내가 임신했을 때 외국에 나가 성매매를 시도한 일, 음란물에 중독된 상황, 아내 돈을 허락 없이 가져다 다른 사람에게 사기를 당한 일, 모든 책임을 외면하고 딸과 아내를 두고 잠적한 일. 모두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녀와 남편을 나란히 놓고 바라본다면 그녀는 확실한 피해자다. 
 
그러나 그녀를 마냥 위로해줄 수만은 없다. 결혼은 성인 남녀가 상호 합의 통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 결혼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녀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왜 문제 많은 남자를 선택했을까? 
 
그녀는 엄마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딸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았다. 그녀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과정을 겪지 않았다. 엄마가 딸을 대신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책임졌기 때문이다. 딸에 대한 애착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미 가정이 있는 남자와 불안한 결혼 생활을 하며 안정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존재가 그녀의 딸이었다. 아름답고 따뜻한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의도와 달리 엄마는 딸의 눈가리개가 되어버렸다. 엄마가 손을 잡아주면 어둠 속에서 앞이 보이지 않아도 괜찮았다. 딸은 엄마가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어둠 속을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엄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앞을 볼 수 없는 딸을 그대로 둔 채로. 그녀는 넘어져서 다시 일어설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부를 노래도, 노래를 부를 의지도 없었다. 엄마 목소리가 사라진 세상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마저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의 엄마는 그녀에게 우주와 같았다. 엄마 없는 세상에서 살 준비가 되지 않은 스물여섯 살의 성인, 그녀는 낯선 세상에 고아처럼 버려졌다. 엄마가 사라지고 난 그 순간, 눈가리개를 한 채로 더듬더듬 길가의 벽을 의지해 걷다가 만난 낯선 남자의 손을 잡은 것이다. 
 
남자는 그녀의 손을 잡고 안전한 곳으로 대려다 주는 대신 좁고 위험한 길로 그녀를 이끌었다. 위험한 길가에서 아이를 낳게 하고 갓난아이를 여자 품에 버려둔 채 도망쳐버렸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녀는 아이를 안은 채 어둠 속을 헤매고 있다. 
 
“어쩔 수 없었다고 할까요. 두 번 만나고 나서 바로 그 남자가 결혼하자고 했어요. ‘이상하다, 이 남자가 왜 이러지?’ 하면서도 거절하지 못했죠. 결국 석 달 만에 결혼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제 친구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제 유산에 대해 남편에게 말해준 것 같아요. 결혼이 목적이 아니라 돈이 목적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는 거죠. 알면서도 당한 거예요. 엄마가 돌아가신 후 미친 여자처럼 살다가 갑자기 내게 잘해주는 사람이 나타나니까 거부할 수 없었던 거죠….” 
 
그녀는 새로운 직장을 구했다. 월급은 적지만 아이를 되찾고 월세 방을 얻어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고통스럽고 힘든 인생 길에서 그녀는 쓰려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한다. 때로는 바닥난 통장 잔고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때로는 아이가 방긋 웃는 모습에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넘어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면서도 아이를 품에 안고 걷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는 더 이상 길가의 벽을 의지하지 않는다. 눈가리개를 스스로 벗어던지자 갑작스러운 빛이 그녀의 눈을 찌른다. 눈앞에 형체들이 희미하게 보이지만 머지않아  시력을 회복할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선명하게 모든 것을 보게 된 그녀 앞에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날지.

천사의 노래

“아까 은아가 뭐라고 한 거야?” 
 
미주가 남편에게 물었다. 
 
“뭘 뭐래? 검정고시 일주일 남아서 긴장되니까, 은아가 기도해달라고 했어.” 
 
미주의 표정이 좋지 않자, 주혁이 미주에게 되물었다. 
 
“왜? 기분 나빴어?”
 
“기분 나쁠 게 뭐가 있어. 목사가 기도해주는 거 당연하지.” 
 
“근데, 분위기가 왜 이래? 말하고 표정 하고 다르잖아.” 
 
“내가 부탁 하나 할까?”
 
“뭔데?” 
 
“기도는 보이는 데서 해도 되는 거잖아. 굳이 그 좁은 방에 기어들어갈 필요는 없어.”
 
“기어 들어가?”
 
“둘이 문 닫고 방에 들어가는 게 불편하다는 말이야.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아니, 은아가 따로 할 말이 있다고 하는데, 어떡해?” 
 
“몰라, 나는 기분 나빠. 은아가 당신을 쳐다보는 눈빛도 그렇고, 당신 눈빛도 마찬가지고.” 
 
“살다 살다 참 별말을 다 듣네. 당신 이러는 거 유치하지 않아? 그냥 고등부 학생이야.” 
 
“나도 알아. 그러니까, 신경 쓰이게 하지 말라고.” 
 
“당신이 신경 쓰지 마.” 
 
“나 지금 말장난하는 거 아니야. 걔가 하고 다니는 것 좀 봐. 나보다 성숙해.” 
 
“그만하자. 나 이러다 폭발하겠어. 사람을 뭘로 보고.” 
 
“내 말은 듣기 싫고, 은아 말은 귀에 쏙쏙 들어오나 봐?” 
 
“아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잖아.” 
 
주혁은 숟가락으로 식탁을 내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쿵 하고 문을 닫는 소리가 미주의 고막을 후려쳤다. 
 
미주는 식탁에서 일어나, 식탁에 놓인 그릇을 싱크대에 옮겨 담았다. 손도 대지 않은 음식이 고스란히 버려졌다. 
 
#
 
“처음에는 ‘내가 너무 민감한가?’ 그 정도로만 생각했어요. 하지만, 날이 갈수록 은아에 대한 집착이 심해졌어요. ‘내 판단이 옳았구나’ 확신을 가진 건 한참 뒤였어요.”
 
미주는 차분하게 말했다.  
 

 
“나 오늘 늦게 들어가.” 전화기 너머로 주혁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왜 무슨 일 있어?” 미주가 물었다. 
 
“오늘 수련회 답사야. 주말이라 고속도로 많이 막힐 거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알겠어. 조심해서 다녀와.” 
 
주혁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렸다. 미주는 불안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미주는 주혁의 서재실로 성큼성큼 들어가, 지난주 고등부 주보를 살폈다. 수련회 일정과 장소가 적혀 있었다. 
 
미주는 소파에 걸 터 앉아 손톱을 자근자근 깨물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아니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게 차라리 나아.’ 서로 다른 생각들이 미주를 덮쳤다. 미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직접 가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두어 시간 만에 수련회 장소에 도착했다. 경비실에 들러, 주혁의 자동차 종류와 색상을 설명했다. 경비는 그런 차가 온 적이 없다고 말했다. 
 
자신이 먼저 도착했다는 사실에 미주는 안심했다. 
 
구석진 곳에 차를 세우고, 의자 시트를 눕혔다. 멀리서 남편이 오는 것을 살펴볼 작정이었다. 
 
그렇게 밤이 되었다. 
 
미주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다. 주차장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미주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마트폰을 꺼내,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잘 도착했어?” 
 
곧바로 주혁에게 답장이 왔다. 
 
“지금 다시 올라가는 길이야. 길이 너무 막혀서 새벽쯤에 도착할 것 같아.” 
 
주혁의 문자를 받고, 미주는 황급히 차에서 내려 경비실을 향해 뛰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경비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검은색 카니발 차량 들어온 적 있나요?” 
 
경비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아니, 아직도 여기 계신 거예요?” 
 
“네, 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요. 검은색 카니발 차량 들어온 적 없다는 거죠?” 
 
“없었다니까요. 오늘 차가 딱 세 대만 들어왔는데, 여기 공사하는 차량이에요.”
 
“알겠어요.”
 
미주는 다시 주혁에게 문자를 보냈다. 
 
“장난해?”
 
주혁이 답장을 했다. 
 
“뭐가?”
 
미주는 다시 차에 몸을 실었다. 시동을 걸고, 무서운 속도로 내달렸다. 
 
미주에게 답장이 없자, 주혁은 전화를 걸었다. 
 
“당신 왜 그래?”
 
“지금 어디야?” 
 
“말했잖아. 수련회 답사 다녀오는 길이라고. 길도 막혀서 짜증 나는데, 왜 자꾸 그래?” 
 
미주는 참을 수 없었다. 
 
“길이 막히기는 뭘 막혀? 지금 시속 160이야. 너 지금 어디서 뭐하고 있어?” 
 
주혁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나 지금 미행한 거야?”
 
“내가 묻는 말에나 대답이나 해. 너 지금 은아랑 같이 있지?” 
 
“또 그 소리야?” 
 
“묻는 말에만 대답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진짜 미쳤나 봐. 전화 끊어!”
 
주혁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미주는 갓길에 차를 세웠다. 운전대를 잡은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목사님, 저 은아인데요.” 
 
주혁의 전화기 너머로 은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은아야. 웬일이야?” 
 
“목사님 혹시 이번 주 주말에 시간 되세요?” 
 
“이번 주 주말? 글쎄…. 무슨 일 있어?” 
 
“다름이 아니라요. 요즘 공부가 안돼서 너무 답답해요. 바람도 쐴 겸, 제가 가고 싶은 대학에 한 번 가보려고요.” 
 
“그거 좋은 생각이네.”
 
“그런데, 목사님.”
 
“응.” 
 
“혹시 시간 되시면 같이 가주실 수 있으세요?” 
 
주혁은 당황했다. 
 
“그건 생각을 조금 해봐야 할 것 같은데…. 주말에 목사님이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 
 
“아, 그래요…. 그러면, 목사님 시간 되시는 날 같이 가요. 그래 주실 수 있죠?” 
 
주혁은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러자, 그럼.” 
 
반대편에서 은아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통화를 끊고 주혁은 생각에 잠겼다. 
 
옳지 않은 결정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주혁은 은아를 외면할 수 없었다. 
 

 
“은아는 결핍이 있는 아이에요. 저도 처음에는 은아가 불쌍해서 잘 챙겼거든요. 이렇게 결론이 날지는 꿈에도 몰랐어요.
 
은아는 선교사님 자녀에요. 어릴 때부터 마음고생을 했겠죠. 현지에서 적응을 못했어요. 은아 부모님이 고민이 많았겠죠. 결국, 한국에 있는 친구 목사님 가정에 은아를 맡겼어요. 
 
그 친구 목사님이 저희가 모시는 담임 목사님이세요. 제 남편은 그 교회 부목사인 거죠. 남편이 고등부를 맡은 시점에 은아가 온 거예요. 
 
남편이 은아를 데려다가 저녁 한 번 먹이자고 말하길래 그러자고 했죠. 저녁을 먹으면서 은아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는데,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남편과 제가 은아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어요. 
 
그때부터 남편이 은아에게 연민을 느낀 것 같아요. 은아와 자주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잘 챙겼죠. 은아를 만나고 온 날이면, 저녁 늦게까지 은아 이야기를 했어요.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닌데, 시간이 갈수록 기분이 이상해지는 거예요. 마음 같아서는 “왜 하루 종일 은아 이야기야? 내 이야기는 안 들어줘?”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한 마디 쏘아붙이고 싶은데, ‘유치하게 내가 왜 그러지?’ 생각하고 말았죠. 자존심 상하잖아요. 그냥, ‘저러다 말겠지. 언제까지 저러겠어.’ 그 정도로만 생각했어요.” 
 
남편이 은아 이야기를 할 때마다, 가슴에 뭐가 걸린 것처럼 답답했거든요. 그때는 이유를 몰랐지만, 지금은 알아요. 남편도 결핍이 있는 사람이거든요. 남편이 은아에게 빠져버릴까 두려웠던 거죠.  
 
은아의 결핍과 남편의 결핍이 교묘하게 만나서, 이런 상황까지 온 것 같아요.”
 
“남편과 제가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말씀드리고 싶어요. 은아와 저는 겹치는 게 많아요. 아마 남편은 스스로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저에게서 느꼈던 감정을 은아에게도 느끼는 것 같아요. 남편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요.” 
 

미주의 직업은 간호사였다. 3교대로 돌아가는 고된 일은 미주의 삶을 갉아먹었다. 미주는 버텨야 했다. 미주의 월급은 미주의 독립이었다. 
 
스스로 돈을 벌면서, 지긋지긋한 집을 떠났다. 미주는 아버지가 싫었다. 폭력적인 아버지는 미주가 성인이 되어서까지 손찌검을 했다. 
 
아버지의 맨손이 얼굴에 닿을 때, 미주는 소름이 돋았다. “차라리 매로 때리라”고 울부짖어도 소용없었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자기감정에 충실할 뿐이었다. 
 
아버지의 폭력에 견디다 못한 미주는 맨발로 집을 뛰쳐나왔다. 갈 곳이 없었다. 미주는 주머니에 담겨 있던 자동차 열쇠를 발견했다. 엄마의 부탁으로 저녁에 장을 보고 와서 미처 빼놓지 못한 열쇠였다. 
 
 미주는 가만히 운전석에 앉았다. 서러운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미주는 울다 지쳐 잠에 들었다.
 
퍽, 퍽, 퍽. 
 
미주를 깨운 것은 야구방망이었다. 아버지는 술기운에 야구방망이를 들고, 미주를 찾아다닌 것이다. 차 안에서 자고 있던 미주를 발견한 아버지는, 야구방망이로 사정없이 유리창을 내리쳤다. 
 
자동차의 경보음이 울리고, 경비가 와서 말려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욕을 하면서, 미주를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자동차 유리창이 사정없이 갈라졌다. 유리창에 새겨진 촘촘한 거미줄이 미주를 덮쳤다. 손가락 하나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미주는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집을 떠났다. 
 

“제가 일하는 병원하고 집하고 두 시간 넘는 거리였거든요. 병원 가까운 쪽에 원룸을 얻었어요. 당연히 교회도 옮겨야 했어요. 집 근처 교회를 가면, 아버지를 우연히라도 마주칠까 봐 두려웠거든요. 
 
남편을 만난 것도 그때쯤이에요. 새로 다니기 시작한 교회에서 남편을 처음 만났어요.”
 
#
주혁의 전화기에 은아의 이름이 새겨졌다. 주혁은 전화를 받아들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그래. 은아야.” 
 
“목사님, 바쁘실 때 전화드렸죠? 
 
“아니 괜찮아. 말해.”
 
“혹시, 이번 주말에는 시간 되세요?”
 
같은 질문만 세 번째였다. 
 
“이번 주말은….”
 
“바쁘신 거죠?” 
 
은아는 풀이 죽었다.
 
“아니야…. 차라리 이번 주에 가자. 다음 주부터는 더 바빠질 것 같아.” 
 
“정말이에요, 목사님?” 
 
“그럼. 그런데, 은아야. 목사님이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뭔데요?”
 
“아무래도 은아하고 목사님만 단둘이 가면, 사람들한테 오해를 받을 것 같아. 혹시, 둘이 같이 가는 거 비밀로 해줄 수 있어?”
 
“그럼요, 목사님. 그렇게 할게요. 저도 비밀로 하고 싶었어요.” 
 
“그래, 고마워. 그럼 주말에 보자.”
 
“아, 잠깐요, 목사님. 제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응, 말해.” 
 
“저, 있잖아요. 목사님이 좋아요.” 
 
“고마워. 나도 그래.” 
 
“그게 아니라요, 목사님. 저 진심으로 목사님을 좋아한다고요.”
 
“….” 
 

“남편이 은아에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알 것 같아요. 우리도 비슷하게 시작했거든요. 
 
교회를 옮기고 처음 간 수련회에서 간증을 한 적이 있어요. 하나님이 제게 은혜를 주셨거든요. 그동안 제게 있었던 일들을 솔직하게 말했어요. 
 
간증이 끝나고, 남편이 제게 다가왔어요. 많이 힘들었겠다면서 위로해주는데, 남편의 태도나 눈빛이 너무 좋더라고요. 
 
그다음부터 남편이 계속 연락을 했어요.  거절을 하다가, 결국 처음 만나 식사를 했죠. 그 자리에서 제가 그랬거든요. ‘지금 누구를 만날 상황이 아니다.’ 
 
남편은 괜찮데요. 자기는 충분히 기다릴 수 있다고. 솔직히 남편이 그렇게 말할 때, 좋았어요. 저도 사랑받고 싶었나 봐요. 
 
제가 거리를 두고 지냈는데도, 남편은 저를 기다리면서, 헌신적으로 사랑하고 아껴줬어요. 결국, 제 마음도 열렸죠. 
 
남편은 섬세하고 따뜻한 사람이에요. 은아를 만나기 전까지는, 나만 사랑해줬어요. 귤 하나를 먹어도, 제 입에 먼저 넣어줄 정도로 다정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
 
주혁은 자정이 넘어서 집에 들어왔다. 
 
미주는 미쳐 날뛰고 싶었지만, 주혁의 말을 끝까지 들어볼 작정이었다. 
 
“지금 어디 있다 오는 건데? 수련회 답사 갔다 온다며? 은아랑 같이 있었지?”
 
“나중에 이야기하자. 지금은 상황이 복잡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주혁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당신 정말 미쳤어? 고등부 제자하고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기는 뭐가 아니야! 그럼, 뭔데?”
 
“지금 말하기 싫다고 했잖아.” 
 
“너 목사 아니야. 목회하지 마. 너 그럴 자격 없어. 당장 교회에 알리고, 너 같은 놈 두 번 다시 목회 못하게 할 거야.” 
 
“그래, 잘 됐다. 제발 그렇게 해줘! 누가 목회하고 싶다고 했어? 지금까지 억지로 한 거야. 사람들 눈치 보는 것도 이제 지긋지긋해! 다른 일하면서, 나답게 살 거야. 알겠어?”
 
미주는 충격을 받았다. 주혁이 그러지 말라고 사정할 줄 알았던 것이다. 남편의 당당함에 미주는 무너졌다.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기에,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너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완전 돌았어. 경찰에 신고할 거야.” 
 
“은아 고3이야. 내년에 대학 가. 이제 몇 달 안 남았어. 나 이혼하고 싶어.” 
 
미주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그녀의 결혼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릴지 몰랐던 것이다. 
 

“은아가 성인이 되면, 정식으로 마음을 고백하겠다고 했어요. 
 
은아가 받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바보 같은 말도 했고요. 자기 마음을 받아줄 때까지 기다린데요. 언제든 곁에서 지켜줄 거라고….” 
 
미주는 남편이 은아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여주었다.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동안, 은아와 주고받은 연애편지였다. 
 
편지에는 도발적인 내용이 담겨있었다. 
 
“차 안에서 너를 안고 있는 동안, 절제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들었어. 너의 호흡, 너의 살결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거든. 하지만, 참을 거야. 은아가 성인이 될 때까지, 소중하게 지켜줄 거야. 우리 조금만 견디자.” 
 
주혁은 유치하다 못해, 파렴치했다. 피가 거꾸로 쏟는 듯했다. 미주가 편지를 찢어버리지 않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미주를 바라보았다. 미주는 내 눈빛에 대한 응답으로 차분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미치겠죠, 목사님? 저도 그랬어요. 왜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지는 모르겠는데, 한 편으로는 이 인간이 불쌍하더라고요.”
 
예상치 못한 미주의 답변에 내 작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주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저도 이 인간이 미웠어요. 지금도 밉고요. 그런데, 문득 궁금하더라고요. 도대체 이 인간이 왜 이럴까? 그러다, 알게 되었죠. 시어머니가 남편을 이렇게 키웠어요.
 
남편은 목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요. 시어머니의 강요로 목사가 된 거죠. 황당하게 들리시겠지만, 사실이에요. 
 
남편은 시어머니에게 반항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살았어요. 착한 아들이었죠. 남편이 어머니 말에 순종한 덕분에, 전도사 때부터 어머니가 꼬박꼬박 생활비를 지원해줬어요. 
 
좋은 목사님 밑에서 잘 배우라고 지금  사역하는 교회를 소개해 준 거고요. 몇 년 후에는 교회도 개척시켜주신다고 자주 말씀하셨어요. 크게 건물은 못 지어줘도, 상가 하나는 얻어줄 수 있다고 명절마다 말씀하셨거든요.  
 
그럴 때마다 남편은 기가 죽었어요. 옆에서 지켜보는 저도 속이 상했죠. 그 사람도 그 사람 나름의 상처가 있을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제 잘못은 아니겠지만, 제 안에서도 이유를 찾아봤어요. 남편이 왜 그랬을까?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요. 남편이 힘들어하는 동안, 제가 남편 곁에 없었거든요. 
 
엄마가 많이 아팠어요. 엄마가 암 투병을 하는 동안 제가 엄마를 돌봤거든요. ‘엄마를 혼자 두고 나와서 엄마가 그런 몹쓸 병에 걸린 건 아닌가’, 하루에도 몇 번씩 무서웠어요. 엄마가 이대로 세상을 떠날까 봐서요. 
 
다행히 엄마는 회복되셨어요.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엄마 곁에 있었네요. 남편이랑 여행이라도 한 번 다녀올 생각이었어요. 남편에게도 미안했고, 저도 많이 지쳐있었고….” 
 
미주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조용히 우는 동안, 나는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눈을 찌르는 바람에, 자꾸 눈물이 났다. 
 
“그런데, 목사님. 제가 엄마가 아플 때, 엄마 옆에서 기도를 했거든요. 엄마 대신 제가 아파도 되니까, 엄마를 낫게 해달라고요. 그런 기도가 응답되나 봐요.
 
남편이 속 썩일 때, 몸이 조금 이상하더라고요.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는데, 종양이 발견된 거예요. 곧바로 수술을 받았어요. 
 
혼자 수술을 받고, 나오는데 서러워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날 결심했어요. 남편도 보내주고, 엄마도 내려놓고, 이제 나를 위해 살고 싶다고….”
 

 
병원에서 돌아온 미주는, 차분한 목소리로 주혁에게 말했다. 
 
“이혼해 줄게.” 
 
“정말?”
 
주혁은 미주의 말을 반겼다. 
 
“응. 며칠 만 기다려 줘. 나도 내가 살 집은 구해야 하니까.”
 
“그럼, 물론이지.” 
 
“최대한 빨리 나갈 거니까, 걱정은 하지 말고.”
 
“알겠어. 그동안 고마웠어, 미주야. 나 만나서 고생 많았고. 앞으로 잘 살아. 나도 잘 살게.” 
 
“우리 앞으로 이혼 관련해서 꼭 필요한 말만 하고, 서로 말 걸지 말자.” 
 
“그러고 싶어?”
 
“응. 나 더 이상 당신하고 말하고 싶지 않아.” 
 
“알겠어, 그럼. 꼭 필요한 말은 문자로 할게.” 
 
“그렇게 해.” 
 
주혁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서재로 들어갔다. 은아와 통화하는 주혁의 목소리가 거실을 넘어, 미주가 있는 안방까지 크게 들렸다. 
 
“응, 허락받았어. 이혼해준대. 응, 그래. 진짜라니까. 그래, 확실해. 이따 저녁에 만나. 응…. 나도.” 
 
미주는 화장대 위에 놓인 액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주와 주혁이 신혼 때 찍은 사진이었다. 
 
미주는 아무런 감정도 없이, 액자에서 사진을 분리했다. 사진은 구겨져서 쓰레기통에 버려졌고, 액자는 상자에 가지런히 담겼다. 미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옷가지들을 꺼냈다.
 
여행을 가듯, 홀가분한 마음이었다.    
 

 
“목사님, 제가 한 달 정도 상담을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선교지에 잠시 다녀오고 싶거든요. 
 
제가 청년 때, 단기선교를 갔다가 은혜받은 곳이 있어요. 그곳에 계신 선교사님께서 저를 많이 아껴주셨거든요.
 
꼭 다시 가보고 싶었는데, 살다 보니까 기회가 없었어요. 이제 홀가분해졌으니까, 한 번 다녀오려고요. 도착하면 바로 연락드릴게요.” 
 
그녀가 선교를 떠난 한 달 동안, 그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나는 그야말로 무능력했기 때문이다.
 
#
 
한 달이라는 시간은 의외로 짧았다. 그녀는 밝은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났다. 
 
“선교지에서 뜻하지 않은 은혜를 받았어요. 그곳에서 아이들을 다시 만났을 때, 저는 깨달았어요. 내가 무너지는 동안, 예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놓치고 있었구나. 
 
아이들이 다른 언어로 해맑게 찬양을 하는데, 천사의 노랫소리를 듣는 것 같았어요. 내 안의 모든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이랄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르더라고요. 
 
잠깐의 위기도 있었어요. 선교지에 있는 동안, 남편이 이혼소송과 관련해서 메신저로 말을 걸었는데, 나쁜 감정이 몰려오더라고요. 메신저 프로필이 커플링 사진으로 바뀌어 있었거든요. 둘이 손을 잡고 커플링이 크게 보이게 사진을 찍었더라고요.
 
당분간은 힘들겠죠. 계속 화나고 혼자 울고. 마음 같아서는 두 사람이 끔찍한 벌이라도 받았으면 좋겠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마음은 아니겠죠.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요. 
 
하나님께서 내게 건강을 주시고, 새로운 은혜를 부어주시면, 다시 선교지로 나가고 싶어요. 선교지에서 제가 확실히 깨달은 게 있거든요. 
 
“예수님은 정말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미주는 목이 메이는지, 잠시 감정을 추슬렀다. 다음에 일어날 일을 예상이라고 했다는 듯이,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남편도, 부모도,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지만, 예수님은 정말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미주는 오열했다. 
 
나는 손수건이 없었다. 눈물이 흐르면, 흐르는 데로 내버려 두었다. 다행이었다. 미주는 손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려서 나를 볼 수 없었다. 
 
나는 미주를 바라보았다. 눈물로 굴절된 시선은 착시현상을 일으켰다. 소파에 기대어 앉은 미주가 마치 예수님 품에 안겨 있는 듯했다. 
 
나는 안심했다. 상담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걱정하지 않았다. 그동안 참아왔던 눈물을 마저 쏟아냈다. 
 

 
상담을 종결하고 내 일상을 살던 어느 날, 미주는 내게 메신저로 안부를 전했다. 그것은 마치 손으로 정성스럽게 써 내려간 편지 같았다.  
 
“목사님, 저는 요즘 풍랑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있어요. 말 안 해도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두려움과 평안함 사이를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 갔다 해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 지금 잠시 외국에 나와 있어요.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거든요. 다시 한국에 돌아가면, 그동안 못 해본 것들을 해보고 싶어요.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내면서, 계속 기도하고 있어요. 선교지에 가서 아이들을 돌보며 살고 싶은데, 그 꿈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지 모르겠어요. 생각나실 때, 함께 기도해주세요.” 
 
그녀가 보낸 글의 분량만큼 나도 답장을 보냈다. 답장의 세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응원이나 격려였을 것이다.  
 
다만, 여러 번 썼다 지웠던 문장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마음속에 담아두고 끝내 보내지 못한 문장이었다. 
 
“당신은 나를 치유했고, 내게 복음을 전했어요. 당신은 더 이상 내담자가 아니에요. 당신은 치유자이며, 동역자입니다.”
 
과도한 기대로 미주가 부담을 느낄까 두려웠다. 힘든데 씩씩한 척할까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내 가슴에 묻어둔 말은 진실이었다. 
 
미주는 치유자이며, 전도자이다. 
 
그녀는 몰라도, 주님은 아신다.

별처럼 슬픈 밤

“참 바보 같지요. 앞날이 뻔히 보이는데, 두려워서 말도 못 하고 남자친구 뒷바라지를 했으니까요.
 
그 사람은 다른 여자를 만나 결혼했어요.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보고 알았어요. 가끔 생각날 때 확인해 봤어요. 터무니없지만, 아직 기회가 있다는, 뭐 그런 생각하면서요.
 
다른 여자와 찍은 사진을 처음 봤을 때, 잠을 잘 수 없었어요. 프로필 사진이 웨딩 사진으로 바뀐 날은 죽고 싶었고요. 지금도 밤마다 생각해요. 이대로 영원히 잠들면 좋겠다. 살아서 뭐 하겠어요. 살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말했다. 남자친구가 떠나간 그날 밤, 모든 것을 잃었다고.
 
#
 
“괜찮은 남자라니까, 한 번 만나 봐.”   
 
“난 어린 사람 싫어, 언니.”
 
“일단 한 번 만나 봐. 생각도 깊고 듬직한 애야.”
 
교회 언니 소개로 그를 처음 만났다. 남자에게 흥미가 없던 터라, 일부러 남자를 만나지 않았다. 친한 사람들이 남자를 소개할 때마다 난처했다. 예의상 한 번 만나준다는 생각으로 마지못해 나갔다.
 
듬직한 체격, 다부진 어깨, 각진 얼굴. 그의 첫인상은 듬직하다 못해 부담스러웠다. 적당히 시간만 때우고 일어나자, 생각했다.
 
대화를 하는데 묘한 매력을 느꼈다. 외모와는 달리 부드러운 말투였다. 얼굴을 손을 가리고 웃는 소심함이랄까.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받았다. 한 번쯤은 더 만나도 될 것 같은 그런 남자였다.
 
두 달이 지난 후, 고백을 받았다. 어쩌면 처음이었다. 누군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설레였던 감정 말이다. 두 사람은 기념으로 반지를 맞췄다.
 
그녀의 나이 서른하나, 남자친구는 스물일곱, 네 살 연하의 남자였다. 남자친구는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해서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그녀는 회사생활 5년 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취업을 앞두고 심란해 보였던 그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 대학원에 가야 할까 봐. 하고 싶은 공부가 있어.”
 
공부를 하고 싶다는 그의 말에 그녀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녀의 나이 서른하나였다. 공부를 마치고 나면, 서른셋이 된다.
 
사귄 지 187일이다. 선뜻 ‘결혼은?’이라고 물을 수 없었다. 우리 둘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그잔을 손으로 감싸 쥐며 창밖을 바라봤다.
 
“걱정하지 마. 공부 마치면 우리 바로 결혼하자. 나 진심이야. 조금만 더 기다려줘.”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애써 태연한 척했다.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공부하는 동안 남자친구는 그녀에게 최선을 다했다. 학생의 장점이랄까. 퇴근 시간에 맞춰 그녀를 기다렸다. 카페 유리창 너머로 그를 바라볼 때마다 그녀는 행복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두 사람은 결혼 이야기를 시작했다.
 
#
 
상견례를 앞두고 그는 초초하게 말했다.
 
“사실은 우리 부모님이 조금 까다로우셔. 특히,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어머니가 결혼을 반대하셔. 하지만, 걱정 마. 계속 설득하고 있어. 반대하셔도 할 수 없잖아. 내 결심은 달라지지 않아. 너도 오래 기다렸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조각 케이크가 심장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기분이었다. 숨이 막혀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 엄마는….”
 
평소에 그는 어머니에 대해 말을 아꼈다. 어머니 이야기만 나오면, 시선을 피하고 말을 돌렸던 그였다. 그가 처음으로 어머니에 대해 말을 꺼냈다.
 
그의 아버지는 술만 먹으면 어머니에게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다.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었다. 경제적인 이유였다.
 
“내가 아버지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뭔지 아니? 너 때문이야. 너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지긋지긋한 삶도 이제 끝이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어머니가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너 결혼할 때까지는 참아야 되지 않겠니? 빨리 장가가라. 그래야, 지긋지긋한 삶에서 벗어나야 할 거 아니야.”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의 어머니는 말했다.
 
“어디서 그걸 여자라고 데리고 왔어. 내가 고작 그런 년하고 결혼시키려고 이날 이때까지 참은 줄 알아!”
 
그는 답답했는지, 커피를 물처럼 들이켰다.
 
“말하고 나니 속은 시원하네.”
 
그녀의 반응이 없자, 그가 조급한 듯 말했다.
 
“나한테 시간을 조금만 줘. 급할 거 없잖아. 올해까지 설득해보고, 그때 안되면 그냥 우리끼리 결혼해버리자.”
 
한 달이 지난 후, 그의 어머니가 전화를 했다. 교양 있는 말로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본론을 말했다.
 
“우리 애가 우유부단해서 결정을 못 내리는 애야. 그러니까, 네가 결정을 내리는 게 맞지 않니? 이제, 우리 아들 그만 만나라. 너 나이도 있는데, 하루라도 빨리 좋은 남자 만나야지.”
 
참을 수 없었다. 남자친구를 원망했다. 독설을 퍼부었다. 남자친구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는 말없이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다음 날도 그의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벨은 주말도 없이 부지런히 울렸다.
 
그녀가 전화를 받으면 릴레이 경주를 하듯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어머니에게 걸려오는 전화는 쉬지 않고 울렸지만, 남자친구의 전화기는 고요했다. 그의 전화기는 꺼져있었다. 바통터치 되지 않는 릴레이가 계속됐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한 그는 회의 핑계를 댔다. 회의 중에는 모든 직원이 전화기를 꺼둔다고 변명했다. 퇴근 후에 야근, 회식 때문에 전화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수 십 번을 전화했을 때가 그가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이성을 잃었다. 길 한복판에서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야! 너 미쳤어. 어디서 지금 이따위로 사람을 대하고 난리야. 나도 아쉬울 거 없어, 알아? 너 같은 놈 나도 싫어!”
 
그는 침묵했다. 할 말 다 했냐고 물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주말 내내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남자친구에게 문자라도 오지 않을까, 머리맡에 전화기를 뒀다. 진동이 울리면 손을 뻗어 전화기를 확인했다. 스팸문자뿐이었다.
 
‘설마, 그럴 리 없어. 나한테 이럴 수는 없어.’
 
출근은 했지만, 일을 할 수 없었다. 몸이 아프다고 핑계를 대로 집에 돌아와 누웠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전화기가 부르르 떨렸다. 그가 보낸 문자였다.
 
“오늘 퇴근 후에 잠깐 보자.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그를 만났을 때, 그는 혼자 선언하듯 말했다.
 
“우리 여기까지야. 이제 그만하자. 너도 나도 할 만큼 했어.”
 
#
 
그녀가 어릴 때 아버지는 집을 나갔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건 초등학교 오학년 여름 날이었다.
 
물건이 깨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화장대 거울에 금이 갔다. 깨진 거울에 엄마가 비쳤다. 거울에 비친 엄마 얼굴이 여러 개였다. 하나, 둘, 셋.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이대로 나가면 어떻게!”
 
“내가 말했잖아. 잠깐 피하는 거라고.”
 
아빠가 짐을 싸느라 정신이 없다.
 
“당신만 살면 되는 거야? 우린 어떻게 해?”
 
엄마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그게 아니라고 몇 번 말해. 일단 도망가야 해. 같이 살 집 구하면 내가 바로 연락할게. 일주일도 안 걸려. 나 감옥 가면, 우리 가족은 누가 먹여 살려. 나 절대로 감옥 안 갈 거야. 억울해서 미치겠다고.”
 
“여보, 다시 생각해 봐. 그래도 이건 아니야. 우리도 데려가. 제발, 여보.”
 
“애까지 데리고 어떻게 도망을 치라고. 비켜!”
 
아버지가 문을 박차고 나갔다. 엄마가 뛰어나가 아버지에게 매달렸다. 아버지는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엄마는 몇 미터 끌려다가 멈췄다. 무릎이 까진 채 엎드려 세상이 떠나가듯 울었다.
 
그녀는 창가에 서서 바닥에 쓰러져 우는 엄마를 바라봤다.   ‘내가 없었다면, 아빠는 엄마를 데려갔을까.’
 
엄마의 대본에서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엄마의 대본을 고치고 싶지 않았다. 대본대로 행동하는 게 편했다.
 
그녀는 적절한 시기마다 대본에 쓰인 대로 말했다. ‘엄마, 아빠는 언제 와?” 엄마 역시 대본에 충실했다. “곧 오실 거야.”
 
‘엄마는 정말 몰랐을까.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었을까.’
 
어린 그녀도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발걸음은 일주일짜리 발걸음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구두가 시멘트 바닥에 부딪혀 따닥따닥 내는 소리는, 모스 부호처럼 선명했다.
 
“다. 시. 는. 돌. 아. 오. 지. 않. 을. 거. 야.”   
 
#
 
아빠가 나간 후, 엄마는 시체처럼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뱃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요동해도 엄마를 깨울 수 없었다. 배가 고프다고 엄마를 깨우면, 밥 대신 욕을 얻어먹었다.
 
방은 어두웠다. 엄마는 울다 자다를 반복했다. 이틀에 한 번 엄마가 일어나 돈 만 원을 던져줬다. 돈을 집어 들고, 집 앞 가게에 가서 담배 한 갑과 라면을 사 왔다.
 
이모에게 전화를 받은 엄마가 갑자기 달라졌다. 밤마다 화장을 짙게 하고 밖으로 나갔다. 알록달록 이상한 옷들이 늘어갔다. 엄마가 먹고살려고 술집에 나가 일을 시작한 것이다.
 
밤마다 혼자 자는 게 무서웠지만, 엄마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동이 틀 때쯤 집에 들어오는 엄마는 딸보다 변기를 먼저 찾았다. 남편 대신 변기를 끌어안고 구토와 울음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
아침에 잠깐 마주하는 엄마는 칼처럼 예민했다. 작은 것 하나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말투, 눈빛에서 세상을 향한 분노가 새어 나왔다.
 
“비누 어디 갔어?”
 
엄마가 물었다.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그녀가 말했다.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우리 집에 둘 밖에 없는데.”
 
“나 정말 몰라.”
 
“이게 어디서 거짓말이야.”
 
엄마가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그날은 비누가 없어졌다. 전날은 벽 시계가 멈췄다. 택배가 늦은 날도, 가스비가 청구된 날도 그녀는 뺨을 맞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는 엄마의 쓰레기통이었다. 엄마는 구깃구깃한 감정을 딸에게 던져버렸다.
 
“어디서 거짓말을 하고 난리야. 어린 게 제 아빠를 빼다 박아가지고. 생긴 것도 모자라서 거짓말하는 것도 닮았어. 한 번 만 더 거짓말하면 그때는 가만히 안 둬, 알겠어!”
 
엄마는 저녁 10시가 되면 어김없이 집을 나갔다. 짙은 향수 냄새를 단칸방에 채워 넣고 밖에서 문을 잠갔다.
 
그녀는 저녁 대신 향수를 먹었다. 엄마가 없는 저녁마다 창문을 열었다. 바닥에 누우면 한 뺨 창밖으로 밤 하늘이 보였다. 외로웠다. 울다 잠든 날이 별처럼 많았다.
 
#
 
엄마가 없는 날, 아빠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뇌의 저편에서 아빠라는 단어가 번쩍했다. 의식에서 지워졌던 기억이 7년 만에 되살아났다. 차분하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여보세요?”
 
그녀가 말했다.
 
“잘 지내지? 아빠야.”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엄마, 지금 옆에 있니? 있으면 바꿔줄래.”
 
“….”
 
엄마는 집에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볼래. 아빠가 몇 년 만에 전화했잖아. 그동안 힘들었지. 아빠가 미안하다. 지금 최선을 다해 방법을 찾고 있으니까 아빠가 곧 데리러 갈게.”
 
“….”
 
이제 그럴 필요 없다.
 
“너 지금 우니?”
 
“….”
 
울지 않는다.
 
“그래, 그럼 알았다. 아빠가 또 연락할게.”
 
뚜 –
 
변한 건 없었다. 그녀에게는 아빠의 자리는 없었다.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다. 엄마는 엄마의 인생을 되찾았다.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고 말하면 엄마의 인생은 다시 멈춘다. 엄마를 위한 배려였다.
 
“엄마, 전화번호 바꿔줘.”
 
“왜?”
 
“옛날에 빚 갚으라 했던 사람들이 낮에 전화했어. 이러다 우리 집까지 알아내면 어떻게 해. 나 무서워.”
 
엄마는 화장을 하다 멈칫했다. 파우더를 든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를 바라보며,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알겠어. 엄마가 내일 전화번호 바꿀게.”
 
#
 
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녀는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밤늦게 집에 들어온 그녀가, 현관에서 남자 신발을 목격했다. 빨간색 뾰족구두와 밤색 구두가 뒤엉켜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엄마는 태연한 듯 행동했다. 이른 새벽, 밤색 구두의 사내는 사라지고 없었다. 엄마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엄마의 대본대로 행동했다.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엄마의 인생을 살고, 그녀는 그녀의 인생을 살았다.
 
그 남자가 집에 오는 날이 늘어갔다. 엄마가 집에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그녀의 집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집에 라면 있냐?”
 
“없어요.”
 
“그럼 가서 사 올래? 여기 돈.”
 
“아저씨가 직접 사다 드세요.”
 
“버릇없다, 진짜.”
 
“엄마도 없는데 왜 우리 집에 계세요. 불편해요, 저.”
 
“라면 한 그릇만 끓여먹고 나갈 거야. 제발 그런 눈빛 좀 하지 마라.”
 
그 말이 전해진 것 같았다. 엄마는 그날 이후 그녀를 보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주말 저녁, 엄마는 그녀를 불러 앉혔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깊이 빨았다. 그녀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엄마는 그 아저씨 좋아해. 너만 괜찮으면 같이 살자.”
 
그녀는 대답 대신 기침을 했다.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얼굴이 빨개지도록 기침을 했다. 연기에 질식한 것인지, 엄마가 내뿜은 말에 질식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반응은 중요하지 않았다. 엄마는 미리 외워둔 자기 대사를 계속했다.
 
“사실 이 집 그 사람 거야. 우리 판자촌 벗어나게 해주고, 너 학교 다니게 해준 사람이야. 그 교복도 그 사람이 해 준 거고. 같이 살기는 힘들겠지만, 적응 잘 해봐. 어차피 학교에서 밤늦게 오니까 잠깐만 참으면 되잖아.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하면 독립해. 엄마는 능력 없어.”
 
“….”
 
처음으로 엄마에게 욕을 했다. 입에 담을 수 없는 쌍욕을 무한 반복했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폭탄은 속에서 터졌다. 충격에 입술이 씰룩였지만, 엄마는 몰랐다. 이를 악물고 간신히 버텼다.
 
#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독립했다. 대학에 가서 고시원에서 살았다. 바로 취업해서 독하게 살았다. 월급을 아끼고 아껴 썼다. 오피스텔 보증금을 마련하고 고시원을 탈출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빠듯한 삶을 벗어날 수 없었다. 월급의 절반을 엄마에게 보내도 엄마는 모자라고 난리였다. 소소한 일이라도 하면서 용돈이라도 벌어보라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무리하게 몸을 쓰면 병원비로 나가는 돈이 더 많다고 말했다. 쉬면서 조용히 사는 게 돈을 아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엄마였다.
 
#
 
“딸, 엄마가….”
 
엄마가 돈을 보내달라고 하기 전에 항상 하는 말이다.
 
“지난번에 ‘미니’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왔는데, 치료가 길어질 것 같다고 해서….”
 
“엄마, 지금 개새끼한테 들어갈 돈 없어. 나도 간신히 살고 있는데 무슨 개한테 돈을 써. 안락사 시켜.”
 
“너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 그러면 못 써.”
 
“내가 여유가 없어서 그래. 아무리 힘들어도 매달 보내주는 용돈 안에서 살아야 해. 매번 이런 식으로 하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그래서, 말하잖아. 이번 한 번 만이라고.”
 
“그 말이 벌써 몇 번째야, 엄마.”
 
“무슨 몇 번째니? 오늘 처음 말한 건데.”
 
“처음 아니야. 개 갖다 버려. 끊을게, 엄마.”
 
엄마에게 전화가 온 날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옥상에 올라가 잠시 머리를 식혔다. 미니라는 개는 늙어간다. 앞이 보이지 않아 똥오줌을 못 가리고, 기운이 없어 산책도 못한다.
 
엄마는 미니와 자신을 구분하지 못했다. 엄마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듯, 하루 종일 거실에 앉아 안쓰럽게 개를 쳐다보고 쓰다듬었다.
 
결국, 엄마에게 돈을 보냈다. 그녀는 엄마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다. 감정과 상관없었다. 반사 신경처럼 그녀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아빠가 떠난 날, 엄마의 영혼도 떠났다. 술집에 나가 웃음을 팔아 번 돈으로 그녀를 키운 엄마였다. 그런 엄마라도 살아있어 감사했다.
 
#
 
잠이 오지 않았다. 남자친구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우리 여기까지야. 이제 그만하자. 너도 나도 할 만큼 했어.”
 
그녀는 혼잣말을 반복했다.
 
‘아니,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밤마다 고통이 찾아왔다. 울다 지쳐 잠드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새벽에 잠에서 깨면 식은 땀으로 온몸이 젖어 있었다. 백 일이 지나도, 일 년이 지나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
       
매일 저녁 퇴근길, 그녀는 편의점에 들렀다. 노란색 바나나 우유를 샀다. 다 마신 병을 버리지 않았다. 집에 가져와 책상에 내려놓았다. 똑같이 생긴 플라스틱병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가지런히 놓였다. 촘촘하게 일자로 놓인 플라스틱병이 책상을 가득 매웠다.
 
플라스틱병이 갈수록 늘어갔다. 책상을 가득 메운 플라스틱병은 방바닥으로 이어졌고,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집을 채웠다.
 
#
“아이고, 미친년아. 너 실성한 거 아니냐.”
 
엄마가 찾아왔다. 주말 내내 전화를 받지 않으니까, 걱정돼서 찾아온 것이다. 엄마의 잔소리에 그녀가 돌아누웠다. 엄마는 쉬지 않고 말했다.
 
“아니, 무슨 바나나랑 원수 맺었냐. 먹으면 치워야지. 왜 쓰레기를 방에 쌓아두고 있어? 이게 도대체 뭔 일이야.”
 
“엄마, 그만 나가.”
 
엄마는 듣지 못했다. 쓰레기봉투에 병을 담느라 정신이 없다.
 
“엄마, 나가라고.” 그녀가 다시 말했다.
 
엄마는 여전히 듣지 못했다. 그녀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엄마, 내 말 안 들려? 나가라고!”
 
깜짝 놀란 엄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플라스틱 통이 여기저기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녀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엄마, 나가라는 말 안 들려. 나가서 두 번 다시는 오지 마. 내 앞에 나타나지도 말고, 나한테 연락하지도 마. 꼴도 보기 싫으니까.”
 
찰싹.
 
그녀의 얼굴이 후끈거렸다. 엄마가 노려보며 말했다.
 
“별 미친년을 다 보겠네. 알겠어, 이년아. 다시는 안 오면 되잖아.”
 
#   
 
“웃기죠? 엄마는 그날 이후로 정말 연락을 안 해요. 내가 딸 노릇 한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결국 이렇게 됐네요. 남자친구에게 버림받고, 엄마에게 버림받고….
 
나같이 비참한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모든 걸 잃은 것 같아요. 밤마다 생각해요. 이대로 잠들어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녀가 비참해졌다는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녀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 했다. 어쩌면 그녀는 오래전에 버려졌다. 아빠의 말로 버려졌고, 엄마의 말로 버려졌고, 남자친구의 말로 버려졌다.
 
“애까지 데리고 어떻게 도망을 치라고. 비켜!”
“고등학교 졸업하면 독립해. 엄마는 능력 없어.”
“우리 여기까지야. 이제 그만하자.”
 
그들의 말은 차갑고 무서웠다.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한 채, 한 사람의 내면을 짓밟아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길 수는 없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다. 저마다 자신만의 이유가 있을 것이고,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면서, 이미 스스로를 용서했을 것이다.
 
그녀의 이해와 용서는 그들에게 전혀 필요하지 않다. 그들은 각자 혼자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문득문득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아쉬움이 남겠지만, 저마다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면서 각자의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인생은 그들의 것이 아니다. 그녀의 인생은 그녀의 것이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비참하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은 그녀가 그녀 스스로를 버리는 것이다. 그녀는 아직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타버린 잿더미 속에 작은 희망의 불씨가 남았다.
 
그녀는 어렴풋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돌봤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버릴 때마다, 그녀는 스스로를 다시 주웠다. 버려진 자신을 줍고 닦아서 간직했다.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죽고 싶지만, 살고 싶다. 살고 싶은 본능이 그녀를 내 앞으로 데려온 것이다. 그녀는 알고 있다. 언젠가 그녀는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일어설 것이다.
 
그녀가 고통받는 이유는 버림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고통받는 이유는 그녀가 미지의 세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해결하지 못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언제 어떻게 고통이 해결될 것인지 알지 못해 두려운 것이다.
 
고통은 영원히 미지의 세계다.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고통을 피할 수 없다면, 고통을 다루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고통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이 고통을 견딜 수 있다. 현재의 고통은 현재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다. 현재의 고통은 한 사람이 일생 동안 추구할 궁극의 의미와 맞닿아 있다.
 
버림받은 기억으로 고통받는 사람은 버림받지 않기 위해 값비싼 비용을 치른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사랑하고 희생한다. 자기 인생은 어찌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버림받을지언정,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고통이 찾아오면 깨닫는다. 자신 안의 결핍을 발견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 자신을 희생시켜 관계를 유지하는 자신을 직면한다.
 
같은 패턴으로 고통이 반복되면, 결국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절망과 좌절의 터널을 지나면서, 자신을 지키고 보호할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고통은 반복된다. 고통의 터널은 하나가 아니다. 쉬지 않고 계속 나타난다. 터널을 지날 때, 라이트는 자동으로 켜지지 않는다. 수동이다. 때에 맞춰 라이트를 켜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도로 위에 터널이 없기를 바라면 안 된다. 어두운 터널을 만나면, 침착하게 라이트를 켜라. 그러면, 당신은 안전하다.
 
#
 
“사실, 남자친구를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아요. 자기가 힘들다고 여자를 버린 사람이잖아요. 결혼했어도 행복하지 않았을 거예요. 시어머니를 제가 어떻게 감당했겠어요. 게다가 그 사람은 마마보이처럼 행동했는데요.
 
정확히 말하면, 그 남자가 그리운 게 아니에요. 사랑받았던 감정이 그리운 거죠. 남자친구의 뒷바라지를 해서라도 사랑받고 싶었던 제 자신이 후회스러운 거죠. 사랑받으려고 너무나 비싼 값을 치렀어요.
 
언젠가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도 있겠죠. 나이도 있으니, 평생 혼자 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서두르지 않으려고 해요. 누군가를 만나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지금 당장은 괜찮아진 것 같아도,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지도 모르고요. 지금은 그냥 제 자신을 조금 더 알고 싶어요.”
 
그녀가 라이트를 켰다. 터널 세 개를 지나는 동안 라이트를 켜는 방법을 깨달은 것이다. 다음 터널에서는 그녀가 때에 맞춰 라이트를 켤 수 있을 것이다.
 
라이트를 켜고 끄는 일은 번거롭다. 라이트를 제때 못 켰다고 우는 날 있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언젠가 하늘의 찬란한 빛이 그녀의 앞길을 비춰줄 것이다. 눈부신 그날이 속히 오기를 바랄 뿐이다.

엄마가 전화할게

민수는 자정이 넘어 집에 들어왔다. 수능이 10개월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다. 학원에서, 독서실로 갔다가 집으로 오는 것이 하루 일정이었다. 
 
민수가 집에 도착했을 때, 집은 난장판이었다. 아빠와 엄마가 부부 싸움을 한 것이다. 민수는 깊은 한숨을 내뱉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민수는 바로 잠에 들 수가 없었다. 학원에서 내준 과제가 적지 않았다. 졸린 눈을 비벼가며, 책상 앞에 앉았다. 
 
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지만, 익숙한 소리였다. 책에 집중하려고, 이어폰으로 귀를 막았다. 
 
그때였다. 이어폰 너머로 와장창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민수는 깜짝 놀라 밖으로 뛰어나갔다. 거실에서 부모님을 마주한 민수는 짜증이 극에 달했다. 
 
장식장이 쓰려지면서, 거실 바닥에 유리 파편을 쏟아냈다. 엄마와 아빠는 거칠게 몸싸움을 했다. 엄마는 아빠의 손목을 잡고, 사력을 다해 버텼다. 아빠는 엄마의 손목을 뿌리치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빠가 엄마의 손을 떨쳐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엄마의 뺨을 내리쳤다. 
 
찰싹.
 
아빠의 솥뚜껑 같은 손에 엄마는 힘없이 쓰려졌다. 민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아빠에게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질렀다. 
 
“제발 그만 좀 하라고!” 
 
민수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아빠가 깜짝 놀랐다. 아빠는 민수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말했다. 
 
“뭐라고? 다시 한 번 말해 봐.” 
 
“그만 좀 하라고!” 
 
민수가 아빠에게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아빠가 민수의 멱살을 잡았다. 
 
“이 자식이, 어디서 아빠한테 그딴 식으로 말해?” 
 
민수는 바닥에 쓰려져 울고 있는 엄마와 눈이 마추쳤다. 
 
민수는 이성을 잃었다. 
 
아빠의 손을 뿌리치고, 아빠의 멱살을 잡았다. 
 
“이제 그만하라고 했지! 당신이 아빠야? 왜 술만 처먹으면,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민수의 아빠도 이성을 잃었다. 민수를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민수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아빠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죽자 살자 덤벼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유리 파편 위로 넘어졌다. 민수가 아빠 위로 올라앉아서, 아빠를 사정없이 팼다. 
 
아빠는 민수를 떨쳐내고 일어서려고 온몸을 비틀었다. 유리 파편이 등에 비벼졌다. 
 
민수의 엄마는 오열하면서, 민수를 뜯어말렸다. 엄마의 울음소리를 들은 민수는 그제서야 이성을 되찾았다. 
 
미끄럼을 타듯이 아빠 몸에서 떨어져 나간, 민수는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민수의 아빠는 터진 입술에서 새어 나온 피를 빨아당겼다가, 침으로 뱉어냈다.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고는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빠의 등 뒤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엄마가 흐느껴 울면서, 아빠의 등에 박힌 유리 파편을 빼내고, 수건으로 흐르는 피를 막았다. 
 
민수는 견딜 수 없었다. 아빠를 때린 자기 손을 잘라버리고 싶었다. 주먹을 쥐고 거실 벽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시멘트로 차갑게 굳어진 벽은 민수의 손을 부러뜨렸다.  
 
퍽.
 
민수의 손가락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엄마의 귓가를 울렸다. 엄마는 민수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민수도 엄마의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엄마를 끌어안은 민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빠는 비틀비틀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  
 
“며칠 지나고, 아빠가 이야기 좀 하자고 했어요. 아빠가 맨 정신에 이야기하기 힘들다고, 술 한 잔 하자고 하시더라고요. 술은 원래 아빠한테 배우는 거라고 하셨어요.” 
 
#
 
민수의 아빠는 말없이 소주 한 잔을 따라 민수에게 건넸다. 민수는 잔을 받아들고 머뭇거렸다. 
 
아빠가 말했다. 
 
“마셔. 아빠가 주는 술은 일단 받는 거야.” 
 
민수는 소주를 입속에 털어 넣었다. 학교 사물함에 있는 가그린 맛이었다. 가그린을 삼켜버린 듯 찝찝한 기분이었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아빠가 한 잔을 더 따르며 말했다. 
 
“민수야. 아빠가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아빠는 반쯤은 울먹거리는 목소리였다. 
 
소주 병을 입에 물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꺼억하고 트림을 내뱉으면서, 민수에게 말했다. 
 
“있잖아. 아빠하고 엄마 사이에는 네가 모르는 일이 있어.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야. 어른들의 문제니까, 네가 끼어들면 안 돼.” 
 
민수는 하고 싶은 말을 참았다. 민수가 들이킨 알코올이 민수의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뜨거운 숨만 콧구멍 밖으로 새어 나올 뿐이었다. 
 
아빠의 연설은 세 시간이나 지속되었다. 아빠의 말이 장황하게 무한 반복되었지만, 민수는 아빠의 말을 경청했다. 
 
아빠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다혈질의 아빠는 풀이 죽어지냈다. 민수가 아빠에게 달려든 후로, 아빠는 집에서 존재감 없이 지냈다. 무기력한 아빠의 모습을 볼 때마다, 민수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아빠의 처량한 모습이 날개가 부러진 독수리 같았다.    
 
#
 
“아빠와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한 달이 넘도록 민수는 아빠와 말을 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서로 말다툼을 하다가도, 민수가 들어오면 서로 말을 멈췄다. 아빠는 방으로 들어가고, 엄마는 밤늦게 들어온 민수를 챙겼다. 
 
“늦게 피곤하지?” 
 
엄마가 물었다. 
 
“엄마, 나 어떻게 하지?” 
 
민수가 엄마에게 되물었다. 
 
“뭘 어떻게 해?” 
 
“답답해서 미쳐버릴 것 같아.” 
 
엄마는 할 말을 잃었다. 말없이 민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떻게 평생을 그렇게 살아? 나 때문에 참고 사는 거면, 그럴 필요 없어. 나는 괜찮으니까, 엄마도 그냥 엄마 인생 살아.” 
 
엄마는 민수의 침대에 힘없이 걸 터 앉았다.  
 
“일단, 수능부터 끝내. 그다음에 이야기하자.”   
 
민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눈물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알겠어, 엄마. 이제 나가.” 
 
엄마가 방문을 닫고 나가자, 민수는 책상에 엎드려 울었다. 지우개를 삼킨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PC방으로 와.” 민수의 친구 K가 말했다. 
 
“알겠어, 기다려.” 민수는 터벅터벅 걸어, 학원 근처 PC방으로 들어갔다. 
 
PC방을 한 바퀴 돌아봐도 K와 친구들이 없었다. 민수는 K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민수가 물었다. 
 
“아, 우리 밖으로 나왔어. 분식점으로 와.” 
 
K가 말했다. 
 
민수는 슬슬 짜증이 밀려왔다. 때마침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타고, 분식점 앞에 내렸다. 분식점에서도 친구들은 보이지 않았다. 
 
민수는 다시 K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우리 다시 PC방으로 왔어. 빨리 이쪽으로 와. 우리 지금 세 명이라, 한 명 더 필요해. 최대한 빨리 와라.” 
 
민수는 화가 치밀었다. 
 
PC방에서 마주한 친구들은 게임에 빠져있느라 민수가 온 것도 몰랐다. 민수가 K의 옆자리에 앉았다. 
 
K가 말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조금만 기다려. 이 판 끝나면, 2 대 2로 붙자.” 
 
민수는 K의 옆에 앉아, 인터넷 브라우저를 켜면서 짧게 말했다. 
 
“알겠어.” 
 

 
“화나지 않았을까? 보통 고등학생이면, 욕하고 소리 지르고 난리 한 번 났을 텐데….” 
 
내가 민수에게 물었다. 
 
“화는 났지만, 표현할 수 없었어요.” 
 
민수가 말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어?” 
 
“두려웠던 것 같아요.” 
 
“무엇이?” 
 
“친구들이 나를 따돌릴까 봐요. 예전에도 그런 적이 있어요.” 
 
“그 친구들이?”
 
“아니요. 중학생 때 친구들이요. 제가 화를 한 번 냈는데, 친구들이 나를 멀리했어요. 중학교 2학년 때 있었던 일인데, 졸업할 때까지 혼자 다니고, 혼자 밥 먹었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볼 수 있을까?” 
 
#
 
“빌려 간 만화책 언제 갖다 줄 거야?” 
 
민수가 L에게 물었다. 
 
“아, 깜빡했다. 내일 갖다 줄게.” L이 대답했다.  
 
“자꾸 왜 그래?” 
 
“뭘? 내일 준다고 했잖아.”
 
“그 소리 벌써 세 번째야.”
 
“뭐래? 갖다 준다고 이 새끼야.” 
 
L은 민수의 멱살을 잡았다. 
 
민수와 L은 서로가 휘두른 주먹에 얼굴이 상했다. 민수가 L을 힘으로 눌러 넘어뜨렸다. L의 위에 올라타, 주먹으로 L의 얼굴을 때리기 직전이었다. 
 
그 순간, 눈앞이 번쩍했다.
 
L의 절친, C가 주먹으로 민수의 관자놀이를 가격한 것이다. 민수는 의식을 잃고 쓰려졌다. L과 그의 친구들이 민수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만화책을 돌려달라는 말 한마디, 그 대가는 혹독했다. 친구들은 민수를 괴롭혔다. 같이 어울려주는 친구 하나 없이 중학교를 쓸쓸히 졸업했다. 
 

 
“그래서, 말을 못 했어요.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긴장돼요. 내가 뭔가 작은 실수라도 하면, 친구들이 나를 어떻게 하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고….” 
 
나는 민수에게 중학교 시절 그 친구들의 이름을 묻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달려가, 그 녀석들을 박살 내주고 싶었다. 
 
나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민수에게 물었다. 
 
“솔직하게 한 번 말해주지 않을래? 다시 PC방에 찾아갔을 때,  미안한 내색 하나 없던, K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뭐였을까?” 
 
민수는 생각에 잠겼다. 
 
“글쎄,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요? 막상, 말을 하려니까 생각이 잘 안 나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민수가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다, 두 손을 겹쳐서 깍지를 끼더니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어차피 다시 PC방으로 올 거면, 분식집으로 왜 부른 거야? 무슨 똥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지금 감정이 어때?” 
 
“말하고 나니까 그냥 시원한데….”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줄래?” 
 
“솔직히 저는 제가 친구들에게 말을 잘 못하고, 제 표현을 못 하는 게, 집 안에서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해요. 저는 외동이고, 부모님과도 대화를 별로 안 하니까요. 제 감정, 제 생각을 표현할 줄 모르는 것 같아요. 혼자만 계속 답답하고….” 
 

 
민수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어느 날, 도둑이 든 것처럼 집 안이 어수선했다. 
 
당황한 민수는 큰 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집에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다급하게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당황해서 닫지 못한 현관문 앞에 아빠가 나타났다.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였다. 비닐봉지에 소주와 맥주, 오징어와 땅콩 같은 것들이 담겨있었다. 
 
“엄마는요?” 
 
아빠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주 병을 손에 쥔 채, 벌컥벌컥 들이켜고,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여전히, 현관 앞에 기댄 채였다. 
 
“엄마는 어디 갔냐고요?” 
 
아빠가 소주 병을 현관 대리석 바닥에 내리꽂으며 소리를 질렀다. 소주 병이 깨지면서 유리 파편이 사방에 흩어졌다.  
 
“몰라, 이 새끼야. 내가 어떻게 알아?” 
 
민수의 예상이 맞았다. 엄마는 급하게 짐을 챙겨 집을 나간 것이다. 
 
민수가 수능을 마칠 때까지 곁에 있어주고 싶었던 엄마의 바람은 물거품이 되었다. 
 
민수는 아빠를 밀치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계단을 뛰어내려가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의 전화기는 꺼져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민수는 계단을 헛디뎌 우당탕 넘어지고 말았다. 민수에게는 일어날 기운이 남아있지 않았다. 엎드린 채로 엉엉 울었다. 
 
엄마와 함께 살고 싶었던 것이 민수의 바람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엄마와 따로 나와 살고 싶었다. 민수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민수는 그날 밤, 엄마를 잃고 자신을 잃었다. 
 

 
“민수야, 엄마야.” 
 
일주일이 지나고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 어디야?” 
 
“지금 독서실 앞이니까, 얼른 내려와.” 
 
민수는 번개처럼 계단을 뛰어내려와 엄마 앞에 섰다. 
 
“엄마!”
 
민수는 어린아이처럼 엄마를 끌어안았다. 엄마도 민수를 끌어앉고 소리 없이 울었다. 엄마를 끌어안은 채로 민수가 물었다. 
 
“엄마, 어떻게 된 거야? 왜 갑자기 집을 나갔어?” 
 
엄마는 민수에게서 몸을 떼어내고 조용한 곳에 앉아 대화를 나누자고 말했다. 두 사람은 독서실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았다.
 
엄마가 민수에게 그날 밤의 일을 말했다.  
 

 
민수의 아빠는 여느 때처럼,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왔다. 민수의 엄마는 빨래를 개고 있었다. 민수의 아빠는 다짜고짜 엄마에게 시비를 걸었다. 
 
짜증이 난 엄마는 아빠의 말을 무시했다. 엄마가 아빠를 무시하자, 아빠는 이성을 잃었다. 엄마가 개놓은 빨래를 발로 차서 헝클어뜨렸다. 
 
엄마는 아빠를 쳐다보지도 않고, 빨래를 주섬주섬 집어 들었다. 다시 자리에 앉아, 침착하게 빨래를 갰다. 
 
아빠는 엄마를 사정없이 때렸고, 엄마는 아빠에게 달려들었다. 감정이 격해진 아빠는, 주방에서 칼을 꺼냈다. 
 
엄마에게 칼을 휘두르며, 같이 죽자고 말했다. 엄마는 어디 한 번 죽여보라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아빠를 자극했다. 
 
아빠가 칼로 엄마를 내리쳤다. 엄마가 팔로 얼굴을 가렸다. 칼은 엄마의 팔 등에 부딪히고 멈췄다.
 
그 순간 아빠는 하얗게 질렸다.
 
아빠는 엄마를 위협할 생각이었다. 실제로 칼이 엄마의 몸에 닿을 줄을 몰랐던 것이다. 
 
칼날 부위가 아닌 칼등이 엄마의 팔에 내려앉았지만, 이미 늦었다. 엄마 눈에 아빠는 짐승이었다. 
 
엄마는 아빠를 밀쳐내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아빠가 뭐 하는 짓이냐고 힘으로 뜯어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이번에 칼을 집어 든 사람은 엄마였다. 칼을 휘두르며, 아빠에게 소리쳤다. 
 
“나 한 번만 더 건드리면, 그때는 죽여버릴 거야.” 
 
아빠는 물러섰다. 
 
엄마가 작별 인사도 없이 민수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엄마의 말이 끝나고, 민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집으로 뛰어가 아빠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중요한 사람은 엄마였다. 
 
민수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그럼 이제 집에 안 오는 거야?” 
 
“응, 그럴 것 같아.” 
 
“그럼, 지금은 어디서 지내?”
 
“나중에 알려줄게. 지금은 말 못 해.” 
 
“그럼, 어떻게 먹고살아? 돈은?” 
 
“그것도 천천히 생각해보려고….” 
 
민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할 뿐이었다. 
 
잠시의 침묵을 깨고, 엄마가 말했다. 
 
“민수야. 넌 엄마 이해하지? 엄마가 왜 이럴 수밖에 없는지….” 
 
엄마가 울먹거렸다. 
 
민수는 엄마의 손을 잡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전에도 말했잖아. 나는 괜찮다고. 엄마는 엄마 인생 살아. 나도 조금만 시간 지나면 독립할 거야. 그때는 내가 다시 엄마 찾으러 갈게. 우리 같이 살자. 조금만 참아, 엄마.”
 
민수의 말이 끝나자 엄마는 흐느껴 울었다. 그리고, 조금은 단호한 말투로 민수에게 말했다. 
 
“민수야. 엄마는 걱정하지 마. 너도 네 인생 살아야 해. 엄마는 씩씩하게 잘 살 거야. 너 가고 싶은 대학에 가고, 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야 해. 엄마 때문에 희생하지 말고, 알겠지?” 
 
민수는 불안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민수에게 말했다. 
 
“민수야, 너무 늦었다. 우리 이제 일어나자. 아빠한테는 엄마 만났다는 말 하지 마, 알겠지?” 
 
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언제 다시 만나?” 
 
“엄마가 다시 전화할게.” 
 

 
민수는 독서실에 올라가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아빠에게 달려가 따질 작정이었다. 모든 것이 아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민수 역시 맨 정신으로 대화할 수 없었다. 냉장고를 열어, 아빠가 사다 놓은 술을 사정없이 마셨다.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똑바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퇴근한 아빠가 집에 들어와서, 술에 취한 민수와 마주했다. 
 
아빠는 기가 막혔다. 
 
“너 지금 뭐 하는 짓이냐?”
 
“아빠 때문이야.” 
 
“뭐? 이게 미쳤나?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아빠 때문에 엄마가 나갔어.”
 
그 순간 뭔가 번쩍했다. 아빠가 민수의 뺨을 때린 것이다. 
 
“정신 차려, 이 새끼야. 어디서 아빠한테 술 주정이야!”
 
“아빠한테 배웠지. 내가 어디서 배워?” 
 
민수는 바닥에 넘어진 채로, 소금에 담근 미꾸라지처럼 온몸을 비틀었다. 머리를 쥐어뜯고, 발버둥을 치면서, 오열했다. 
 
아빠는 바닥에 누워 미쳐 날뛰는 민수에게 차가운 물 한 바가지를 쏟아부었다. 
 
“정신 차리고, 여기 앉아 봐.” 
 
민수는 어안이 벙벙했다. 몸을 일으켜 앉았는데,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래서, 엄마 지금 어디서 지낸다고 말해주디?” 
 
민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빠가 예전에 말했지. 어른들 문제니까 끼어들지 말라고.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 거 기억나지?” 
 
민수가 고개를 끄떡였다. 
 
“3년 전부터, 엄마가 이상했어. 처음에는 내가 오해하나 싶었어. 엄마가 아니라고 잡아떼니까, 뭐 방법이 있어야지.” 
 
민수의 정신이 또렷해졌다. 아빠의 말을 토씨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 상체를 바로 세웠다. 
 
“그러다, 큰맘 먹고 흥신소에 부탁을 했더니, 아니나 달라? 딱 걸렸지. 진명이 삼촌, 너도 알지? 그 새끼랑 네 엄마랑….”
 
민수는 고개를 가로 저였다. 그럴 리 없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엄마가 왜 어디있는지 말 못하는 지 알아? 그 자식이랑 같이 살림 차린 거야. 네 눈에는 엄마가 천사로 보이지? 엄마가 뭐 집에 붙어있은 줄 알아? 나 회사 가고, 너 학교 가면 엄마도 집에 없었어. 아빠가 맨 정신으로 살 수 있었겠냐? 아빠 인생은 3년 전에 끝났어.” 
 
아빠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인생의 쓴맛을 담배 연기로 누그러뜨렸다. 
 
“내가 너한테 별말을 다한다. 너는 신경 쓰지 말고 너 할 일이나 잘해. 정신 똑바로 차리고, 대학이나 가라고. 
 
아빠가 뼈빠지게 번 돈 너한테 다 쓰는 거야. 꼭 성공해서, 보란 듯이 잘 살아. 아빠처럼 살지 말고, 알겠어?” 
 
민수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물방울인지 눈물방울인지, 민수조차 알 수 없었다. 
 

 
정식 상담에서 민수를 만난 것이 아니었다. 
 
청소년 수련회 강사로 초대를 받아 저녁 집회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 담당 전도사님이 조심스럽게 민수의 이야기를 꺼냈다. 
 
수련회 일정 중에, 잠시 시간을 내어 민수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느냐는 부탁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물놀이를 할 시간에, 민수와 조용히 앉아 두 시간 정도의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두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민수의 이야기가 끝나고 남은 시간은 고작 10분이었다. 
 
산더미 같은 질문을 뒤로하고, 나는 억지로 대화를 마무리해야 했다. 
 
나는 아빠의 관계, 엄마와의 관계, 그리고 친구들과의 관계를 언급했다. 
 
교과서에서 나올 법한 진부한 말들이었다. 듣는 사람이 마음만 답답해지는 그런 말들이었다. 
 
고맙게도, 민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떡이며 경청했다. 
 
다음 집회 일정 때문에, 우리는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했지만, 못내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나는 민수의 등을 두드려주면서, 힘내라고 말했다. 
 
민수는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출입구를 향했다. 나는 그 자리에 선 채로, 민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민수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돌아서서 내게 말했다. 
 
“그런데, 목사님…. 저도 치유될 수 있을까요?” 
 
나는 블랙홀에 몸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민수는 어쩌면 나 자신이었다.
 
내가 민수를 향해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갈라진 자아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느꼈다. 
 
그대로 민수를 내보낼 수 없었다. 나는 민수에게 다가가 민수를 끌어안았다. 
 
민수는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그리고,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도 목사님처럼, 치유돼서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 좋은 아빠가 되고 싶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어요. 부모님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제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나는 민수의 손을 꼭 붙잡고, 고개를 끄떡였다. 
 
내가 위로랍시고 한마디를 내뱉는다면, 민수의 어깨에 내려앉은 희망이 깃털처럼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민수가 나가고, 나는 의자에 힘없이 걸 터 앉았다. 
 
나는 인정해야 했다. 민수는 내게 모든 것을 말했지만, 나는 민수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정작 나 자신은 치유되지도 않았고, 좋은 아빠도 아니었으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도 못했다. 
 
아버지와 단둘이 마주 앉으면 어색함이 흐르고, 어머니를 향한 연민으로 잠을 뒤척인다. 
 
아내에게는 여전히 서투른 남편이고, 자녀들에게는 욱하고 사과하는 일을 반복하는 일관성 없는 아빠다. 
 
오히려, 나는 민수에게 묻고 싶었다. 
 
‘민수야. 목사님도 치유될 수 있을까? 내가 자격 있는 사람일까? 언젠가 네가 아빠가 되어 나타난다면, 나도 그때 진실을 말할게.’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예수님을 찾았다. 집회 장소 어딘가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앉아 있는 민수를 찾아가셔서, 따뜻하게 안아주시기를 바랐다.  
 
또다시 아이러니였다. 
 
정작 나는 방문을 열고 나갈 용기가 없었다. 작은 방 안에 조용히 머무르고 싶었다. 잠시라도, 감정을 추스르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문밖에서, 누군가 노크를 했다. 담당 전도사님의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목사님, 이제 나가실 시간입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채로, 사람들 앞에 섰다. 
 
내 시선이 군중을 향했다. 아이들은 와글와글 시끄러웠다. 밝은 조명에 눈이 부셨다. 
 
나에게는 오직 한 사람, 상처 입은 한 사람만이 중요했다. 내 관심은 민수를 향했다. 
 
저 멀리 맨 뒷자리에, 민수가 보였다. 민수의 옆자리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민수는 말없이 조용했다.  
 
그날 밤, 설교는 기도였다.

남자가 그리워요

이혼해서 아이들을 혼자 키우며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권유로 연애를 했고, 재혼 이야기까지 오고 갔습니다. 결국, 상대방 부모님의 반대로 관계를 정리했어요.
 
하지만, 저는 힘든 일을 겪고 나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두 달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서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어요. 남자가 그리워졌어요. 누군가 곁에서 날 안아줬으면 하는 바람이 점점 심해졌어요.
 
다른 싱글맘들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 친구들은 참지 말고 다른 사람을 만나라고 해요. 하지만, 저는 단지 성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가벼운 만남을 이어가는 게 성경적이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런 나 자신이 낯설어 운동도 열심히 하고 바쁘게 지내고 있지만, 혼자 있을 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럴 때마다 죄책감이 들어요.
 
사실, 저는 어린 시절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어요. 가족에게 말하지 못했어요. 아빠는 술주정, 외도로 엄마에게 고통을 주었어요. 오빠는 같이 어렸고 힘이 없다고 느껴지니까 도와줄 거란 기대 조차 없었죠. 전 남편은 결혼하고 얼마 후부터 외도를 하더니 결국 날 떠나서 그 여자랑 살아요.
 
민감한 주제라 답변을 피하고 싶었어요. 용기 내어 답변하는 이유는 자매님이 살아온 삶을 자세히 적어주셨기 때문이에요. 자매님은 지금 남자가 그리운 게 아니에요. 자매님을 보호해줄 사람이 필요한 거예요. 주장을 했으니 근거를 말해야겠죠. 제가 드리는 말은 추론에 불과해요. 제 이야기에 얽매이지 마시고, 하나의 견해로 받아들여주세요. 받아들일 만큼만 받아들이면 좋을 것 같아요.
 
자매님은 초등학교 때, 집에 놀러 온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했어요. 아빠는 술에 취해 잠든 상황이었고, 오빠는 자고 있었어요. 결국 아무도 도와줄 수 없었어요. 그 사실을 지금도 숨기고 있고요. 자매님은 엄청난 일을 당했지만, 가족에게 말하지 않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자매님을 보호해 줄 수 없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에요.
 
아빠는 가정 폭력, 외도로 엄마에게 상처를 줬어요. 어린 자매님은 아빠가 칼을 들고 엄마를 죽이려고 했던 장면을 목격했어요. 아빠가 어린 자매님을 보호해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초등학교 때, 오빠와의 일도 마찬가지예요. 자매님을 괴롭혔던 덩치 큰 아이가 나타났어요. 자매님은 오빠에게 일렀어요. 오빠는 어린 자매님을 보호해준다며 대신 싸워줬어요. 하지만, 졌어요. 두 사람은 민망한 채 말없이 집으로 돌아왔어요. 오빠 역시 자매님을 보호해줄 사람이 아니었어요.
 
전 남편은 잦은 외도 자매님에게 고통을 주었고, 결국 집을 나가 바람난 여자와 살림을 차렸어요. 자매님을 보호해주기는 커녕 상처를 주고 말았죠. 가슴 아픈 한 여자의 인생을 나는 보았어요. 그래서 외면할 수 없었고, 민감한 주제이지만 답변을 하게 되었어요.
 
자매님의 이야기가 진실이라면, 자매님은 지금 사랑받고 싶은 거예요. 보호받고 싶은 거죠. 성적인 만족을 원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 따뜻하게 안아줬으면 하는 거예요.
 
그 지점에 자매님의 결핍이 있어요. 남자를 원한다는 생각은 죄책감으로 이어지지만,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감정은 자연스러운 감정이에요. 그러니까 자신을 정죄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자매님을 온전히 사랑하세요. 지금까지 상처받으며 살아온 자매님을 보시며 하나님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요.
 
자매님은 보호해줄 사람 없이 최선을 다해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요. 누군가 찾아와 따뜻하게 안아주기를 바라는 건 자연스럽고 당연한 감정이에요. 다른 대안을 찾지 않는다는 점에서 올바른 방향을 잡았다고 생각해요. 과정은 힘들 거예요. 오래 걸려요.
 
자매님에게 부탁드리고 싶어요. 외로운 자신을 정죄하지 마시고, 돌봐주셨으면 해요. 외로운 건 자연스러운 거예요. 자매님은 누구보다 외로울 수 있어요. 외로울 때마다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고 안아달라고 말씀하세요. 자매님 안의 결핍을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채워달라 기도하세요. 예수님이 자매님을 끝까지 돌보시고 책임져 주실 거라고 믿어요. 자매님의 하나님은 정죄하는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매님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되어주셔야 해요.
 
다시 누군가를 만나기 원한다면, 솔직히 하나님께 기도해 보세요. 자매님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소중한 존재니까요.

기억의 전이

“내가 바보 천치인 줄 알지? 당신이 아랫집 남자와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거 내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 운동은 무슨 운동, 새벽마다 그 남자하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남편은 오늘도 어김없이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 정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갈 때까지, 남편은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욕설을 쉬지 않고 내뱉었다. 
 
정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현관문을 열었다. 
 
아직 동이 트기 직전이었다. 삼십 년 지기 친구, P를 산책로 입구에서 만났다.
 
“오늘도 영감이 욕하는 소리가 창밖으로 다 들리데? 밤낮 그 소리여?” 
 
P가 물었다. 
 
“나도 모르것어. 갈수록 심해져. 딸들이 병난 것 같다고, 요양원에 보내자는데, 사지가 멀쩡한 사람을 어떻게 요양원에 보내것어. 내가 그냥 참고 살아야 제” 
 
정희가 말했다. 
 
두 사람은 산책로를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정희는 요즘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찌근거려서 산책을 나갔다 오면, 오전 내내 침대에 누워 움직일 수 없다고 말했다. P는 당뇨가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걱정이라고 말했다. 
 
삼십 년 동안 매일 아침마다 대화를 나누어도, 소재는 고갈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치 세상에 존재하기 이전부터, 서로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정희가 산책을 마치고, 집에 들어서자 남편이 쏜살같이 달려들어 말했다. 
 
“이 여편네 얼굴 좀 봐. 그리도 좋았어? 늙어서 추하게, 쓸데없는 것에 맛 들여 가지고, 부끄러운 줄 알아!” 
 
정희는 남편을 무시하듯, 화장실을 향했다. 
 
남편은 정희에게 따라붙으며, 말했다. 
 
“암, 그래야지. 흔적은 확실히 지워야지. 내 집에 들어왔으니까, 그 더러운 놈의 흔적은 지우는 게 맞지.” 
 
나이 팔십이 넘어, 이렇게 추한 꼴을 당할지, 정희는 몰랐다.
 

 
“이 여편네, 당장 문 열어. 문 닫고 지금 뭐 하는 거야?” 
 
남편은 문 손잡이를 부러뜨릴 기세였다. 
 
정희는 어지러워 침대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남편은 문을 발로 차고, 뒤흔들더니 갑자기 조용해졌다. 밖에서 찰랑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남편이 마스터키를 가져온 것이다. 
 
“아랫집 그놈, 벌써 창문으로 내뺐구먼. 이 여편네 이거 기운이 하나도 없네. 지 몸뚱이 지가 몰라? 늙어서 그 짓을 하니까, 몸이 견뎌나겠어? 제발 정신 좀 차려, 이 여편네야.” 
 
정희의 의식이 희미해졌다. 사력을 다해, 남편에게 말했다. 
 
“영감, 구급차 좀 불러줘. 나 지금 큰일 난 것 같아.” 
 
남편은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양심도 없는 여자 같으니라고.”
 
남편은 구급차를 불렀다. 정희는 가까운 병원에 입원을 했다. 수액을 맞으며 기운을 차리고 있는데, P가 다급하게 들어왔다. 
 
“정희야. 너 아무래도 안되겠다. 지금 나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 요양원에 가든지, 딸네 집에 가든지 해야 할 것 같아.” 
 
정희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내가 이 동네에서 삼십 년을 살았는디, 어디를 가서 살어. 쓸데없는 소리 말어.” 
 
P가 정희의 말을 받아치려는 순간, 정희의 전화기가 울렸다. 
 
“엄마, 지금 병원이야?” 
 
호주에 사는 큰딸, 미숙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아니, 그걸 어찌 알았데?” 
 
“P 아줌마한테 방금 전화 왔었어. 엄마 그런 일이 있으면 나한테 먼저 말해야지. 왜 말을 안 해?” 
 
“아니, 알아도 어찌한데? 호주에 있는데, 걱정만 하지. 별일 아니니께, 걱정하지 말어. 기운 차리면, 바로 집으로 들어갈 거여.” 
 
“안 돼, 엄마. 지금 미현이 보냈어. 엄마 데리러 갈 거야. 절대로 집으로 들어가지 마. 그러다, 엄마 죽어.” 
 
“쓸데없는 소리 말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죽기는 죽는다고 호들갑이여.” 
 
정희는 미숙의 전화를 끊고, P를 쳐다봤다. P는 뭘 그리 빤히 쳐다보냐는 말투로 정희에게 말했다. 
 
“그래, 내가 말했어. 너라도 그랬을 거야. 고집 좀 그만 부려. 지금 미현이 온다고 했으니까, 미현이 따라 미숙이 집으로 가.” 
 
P의 말이 끝나자마자, 미현이가 병실로 들어왔다. 호주에 있는 언니의 연락을 받고, 한 걸음에 달려온 것이다. 
 
“엄마, 괜찮아?”
 

 
미현은 엄마가 수액을 맞는 동안, 엄마 짐을 대충 챙겨올 생각으로 엄마의 집으로 갔다.
 
미현이 집에 들어서자, 아빠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거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네 엄마가 시켰냐?” 
 
“아니에요, 아빠. 엄마가 당분간 병원에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짐 좀 챙기러 왔어요.” 
 
“엄마가 왜 아픈지 알지? 검사해봐라. 아마 몹쓸 병에 걸렸을 거야.” 
 
미현은 피가 거꾸로 솟는듯했다. 
 
“엄마가 무슨 몹쓸 병에 걸려요? 그만 좀 하세요, 이제.” 
 
“뭐 그런 병 있잖냐. 다른 사람에게서 옮는 병, 그거 약도 없다는데…. 늙어서 추하게 그게 뭔 짓인지, 원.”
 
미현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받쳤다. 멀쩡한 사람도 쓰러뜨릴 것처럼, 집 안의 공기가 탁했다. 
 
“엄마 없어도 밥 잘 챙겨드시면서, 운동 꾸준히 하세요. 제가 자주 들여다볼게요.” 
 
아빠는 여전히 신문에 시선을 고정하고 말했다. 
 
“올 것 없다.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가서 네 엄마한테도 전해라. 이참에 갈라서자고.”
 
미현은 혼란스러웠다. 
 
치매라고 하기에는 아버지가 너무나 멀쩡해 보였다. 
 
#
 
“딸들이 그러다 엄마 큰일 난다고, 얼른 그 집에서 나오라고 하도 극성을 부려서, 일단 큰 딸 집으로 나왔어요. 큰 딸이 사위랑 호주에서 사는데, 자기 없는 동안 집에 와 있으라고 해서요. 아따 근데, 여기 아는 사람 한 명 없고 답답해 죽겄어요.” 
 
 #
 
“할머니!”
 
미현의 차에서 내리는 정희를 손녀 재희가 맞이해주었다. 호주에서 나고 자란, 재희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서 취업을 했다. 
 
호주에 사는 큰딸, 미숙은 정희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재희가 챙겨줄 것이라고 믿었다.
 
내가 정희를 상담하게 된 시점도 그쯤이었다.
 

 
“상담을 신청하셨죠? 그래서, 연락드렸어요.” 
 
내가 말했다. 
 
“딸이 신청한 것 같아요.” 
 
정희의 말에, 나는 당황했다. 
 
“아, 본인이 아니라 따님이 신청하셨다고요?” 
 
“긍께, 내가 그러지 말라고 하는데, 딸이 고집을 부려가지고 어디 안 할 수가 있어야지요.” 
 
나는 참으로 난처했다. 당사자가 동의하지 않는 상담을 진행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상황이 어렵겠다고 판단했다. 내 입장을 충분히 설명하고, 예의 바르게 전화를 끊을 작정이었다. 
 
그때, 정희가 말했다. 
 
“딸이 그러데요. 목사님이 쓸데없는 말 하시것냐고. 가만히 이야기 들어보면, 좋은 말씀 많이 해주실 거니까 일단 상담받아보라고.”
 
나는 웃음이 터졌다. 
 
“따님이 그러셨어요?” 
 
“아따, 말도 마세요. 어찌나 설득을 하던지, 안 받는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니까요.” 
 
“딸이 저에 대해 뭐라던가요?”
 
“아, 젊어서 고생 많이 하셨다고. 엄마 이야기 잘 들어주실 거라고 그러더라고요.”
 
정희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동안, 나는 본능적으로 큰딸 미숙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저 멀리 호주에서 엄마를 걱정하는 딸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에게 엄마를 부탁한 것이다.’ 
 
나는 정희와의 상담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 소식을 딸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목사님이시죠?” 
 
정희가 상담을 받기로 했다고 하자, 정희의 둘째 딸 미현이 전화를 걸었다. 
 
“아, 그러시군요. 반갑습니다.” 
 
미현은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히 전해줬다. 그리고, 대화 말미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사실, 언니가 목사님에게 상담을 신청했다고 해서 놀랐어요.”
 
“그게 무슨 뜻이죠?”
 
“아, 제 표현이 조금 이상했죠? 오해하지는 마세요, 목사님. 사실, 저나 엄마는 교회에 다니지 않거든요. 심지어, 엄마는 젊으셨을 때 불교셨어요. 언니만 교회 다녀요.” 
 
“아, 괜찮습니다. 전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상담 전에, 어머니에 관한 중요한 이야기를 해주셔서, 여러모로 감사드립니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통화를 끊고,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나는 내 생애 가장 어려운 내담자를 만난 것일지도 몰랐다. 
 

 
“사람이 그렇게 멀쩡해 보이는데, 치매라고 할 수 있나요?” 
 
정희는 여러 번 반복해서 물었다. 나로서는 확답을 줄 수 없었다. 나는 딸들의 판단을 옳게 여겼고, 상식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정희는 내가 딸들과 같은 답변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담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 말을 더욱 신뢰하는 듯했다. 
 
“그 양반이 그래서 그랬구먼요. 같이 있으면 멀쩡하다니까요. 참 신기하네요.” 
 
나는 자신의 기억을 조금씩 잃어가는 정희의 남편이, 왜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는지 궁금했다. 
 
정희와 남편이 살아온 세월 동안, 외도와 관련된 이슈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정희는 내 질문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더러운 짓은 그 양반이 했지요. 아따 그 양반이 젊었을 때, 얼마나 내 속을 썩였는지, 말도 마요. 내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어요.” 
 
정희는 마음속 깊이 담아두었던 말을 꺼냈다. 
 

 
정희는 시골에서 자랐다. 부모님이 논밭에서 일하는 동안, 정희는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동생들을 챙기느라, 결혼할 나이도 지나버렸다. 
 
스물일곱이 되어, 한 남자를 소개받았다. 남자는 정희보다 두 살이 많았다. 대학까지 나오고, 성실하게 산다고 마을에 소문이 자자했다. 
 
서울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는 남자는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뵈러, 명절이나 가끔 내려오는 정도였다. 다급해진 남자의 부모가 마을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정희를 소개하고 나선 것이다. 
 
정희는 집을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남자와 결혼한다면, 지긋지긋한 시골집을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희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첫아이를 임신한 순간부터, 두 사람은 어긋나기 시작했다. 
 
남편은 하루가 멀다 하고 외박을 했다. 정희가 이유를 물으면, 남편은 공무원 일이 다 그런 거라며, 대답을 회피했다.
 
정희가 거세게 따져 물으면, 남편은 정희를 때릴 기세로 달려들었다. 뱃속에 아이가 아니라면, 벌써 매서운 손이 날아왔을 것이다. 
 
“초등학교 밖에 안 나온 무식한 년이, 나랑 무슨 대화를 한다고. 입 다물어 이년아.” 
 
정희는 남편을 포기했다. 
 

 
“내가 제대로 배운 여자였으면, 그런 남편하고 살지도 않았을 거예요. 여우처럼 야무졌으면, 당장에 뛰쳐나왔을 텐데, 곰처럼 미련해서 참고 살았어요.” 
 

 
둘째 딸 미현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집으로 남편을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건 사람은 남편의 내연녀였다. 
 
공무원을 때려치우고, 사업을 시작한 남편이 회사 직원과 바람이 났다. 
 
정희는 남편이 그동안 만나왔던 여자들을 알지 못했다. 한 가지 아는 것이 있다면, 남편이 오랫동안 한 여자를 만날 성격이 못된다는 것이다. 
 
전화를 건 여자 역시, 잠시 만나고 헤어질 사람이라 여겼다. 
 
그러나, 정희의 예상은 빗나갔다. 
 
남편은 그 여자와 살다시피 했다. 그의 아내는 정희가 아니라 내연녀였다. 
 
그러나, 내연녀는 정희처럼 순진하고 착한 여자가 아니었다. 
 
내연녀는 남편을 만나는 동안, 또 다른 남자를 만나면서 남편을 괴롭혔다. 
 
정희는 남편이 거실에 앉아 엉엉 우는 모습을 봤다. 내연녀가 다른 남자와 여행을 떠나, 며칠 동안 남편의 전화를 받지 않은 것이다. 
 
정희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한 편으로 내연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 여자가 정희 대신 남편에게 통렬하게 복수를 해줬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남편은 그 여자에게 집요하게 매달렸다. 이십 년의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버렸다. 길고 긴 세월 동안, 남편은 내연녀와 부부처럼 살았다. 
 
“남편과 내연녀와의 관계는 어떻게 정리가 되었나요?” 
 
나는 정희에게 물었다. 
 
정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한심한 듯 말했다. 
 
“그 여자가 남편 돈을 훔쳐서 달아났어요. 남편이 평생 모든 돈 전부는 아니었어도, 절반은 넘어요. 남편이 미친 사람처럼 돼서, 그 여자를 찾아다녔는데 결국 못 찾았어요. 사람이 얼마나 한심해요. 대학 나오고 잘 배운 사람도 그리 어리석은 짓을 하데요.” 
 
#
 
남편의 기억은 정희의 것이 아니었다. 남편의 젊은 날, 내연녀에게 받았던 배신감과 집착이 아내에게 투영된 것이다. 
 
정희가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그녀는 팔십이 넘은 노인이었다. 가냘픈 몸을 의자에 기대어 가만히 앉은 정희를 바라보며, 나는 연민을 느꼈다. 
 
“다 지난 일인데, 그 양반만 멀쩡하면, 그 동네 가서 살고 싶어요. 딸네 집은 좋고 편하기는 한데, 도대체 아는 사람이 있어야지. 내 친구 P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두통과 관절염으로 거동이 불편한 정희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친구 P를 만나러 가는 길이 몹시 긴장되었다. 혹시라도, 동네에서 남편을 만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던 차에, 둘째 딸 미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시골 친척 집에 장례가 나서 아버지가 급하게 시골에 내려가야 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정희는 다급하게 친구 P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에 바퀴 달린 큰 가방 있어? 이따가 나올 때, 그것 좀 들고 나와. 병원에서 바로 딸네 집에 갔더니, 입을 것이 하나도 없었어. 그 양반 없는 참에 짐 좀 챙겨 나올 것이여.” 
 

 
정희는 친구 P를 시켜, 집안에 남편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 정희는 현관문 앞에서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세 차례 같은 번호를 눌렀지만,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남편이 비밀번호를 변경한 것이다. 정희는 억장이 무너졌다. 남편이 미쳐도 단단히 미쳐버린 것 같았다. 
 
정희의 머릿속에서 남편이 내뱉었던 독한 말들이 선명하게 스쳐 지나갔다. 남편의 기억은 비밀번호를 바꿀 만큼 또렷했던 것이다. 남편의 모든 독설이 진실처럼 다가왔다. 
 
아버지를 모시고, 시골집에 내려가던 미현이 정희의 전화를 받았다. 문이 잠겨 있다는 말에 발끈해서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빠, 혹시 현관문 비밀번호 바꾸셨어요?” 
 
아버지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암, 그랬지. 그 여자가 내 돈을 얼마나 노리는 줄 알아? 나 없는 틈에 금고 열어서 돈 가지고 도망가면, 나는 다 늙어서 굶어죽으라고? 그건 안되지.” 
 
미현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수화기 너머로 전해진, 미현의 숨소리는 정희의 귀를 후벼팠다. 
 
“어쩌면, 사람이 그럴 수 있어요. 나는 도무지 그 양반이 이해가 안 돼요.” 
 
정희가 말했다. 
 

 
정희는 하루 종일 남편의 독설에 시달렸다. 정희가 침대에 누우면, 남편은 하루 종일 정희의 천장을 거닐며, 정희를 괴롭힌다. 물리적으로 남편을 떠났지만, 정서적으로 남편을 떠날 수는 없었다. 
 
정희에게 천장은 영화 스크린이다. 지난날의 상처와 고통이 편집 없이 상영된다. 정희에게는 천장을 벗어날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다. 가냘픈 몸을 침대에 파묻고,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나는 정희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무슨 힘으로 버텨오셨어요.” 
 
내가 질문하자, 정희는 끝내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애들이지요. 애들이 잘 컸어요. 나는 무식했는데, 애들은 똑똑 허니 잘 배웠어요. 얼마나 착한지, 애들 때문에 마음고생한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요.” 
 

 
둘째 딸 미현이 시골 친척의 장례를 마치고, 정희를 찾아왔다. 기운 없이 침대에 누워있는 정희를 끌어안았다. 미현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정희를 아기처럼 품에 안고, 쓰다듬었다.
 
미현은 아이에게 옛날이야기를 전해주듯, 따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나는 있잖아. 엄마가 내 엄마여서 너무 감사해. 엄마가 없었으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자꾸 눈물이 났다. 미현은 한 손으로는 엄마의 머리를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눈물을 닦았다. 
 
“뭐가 고맙다는 말이여. 나 같은 엄마 만나서 고생만 했지. 엄마가 잘 배운 여자였으면, 너희들 데리고 나와서 험한 꼴 안 보여주면서 살았을 텐데, 내가 능력이 없어서 그랬지. 엄마는 못 배운 게 평생 후회여.” 
 
“아니야. 엄마 덕분에 언니랑 나랑 잘 컸잖아. 이제, 엄마만 생각해. 다른 걱정은 하지 말고….” 
 
미현은 한참 동안 엄마를 품에 안고 토닥거렸다. 정희의 머리통을 으깨려는 듯이 달려들던 두통도 잠시 멈칫했다. 
 

 
“호주에 사는 딸은 전화기만 들면 울어요. 울지 말라고 해도 소용이 없어요. 매일 엄마 생각하면서, 교회 가서 기도한다고, 그러데요.” 
 
나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정희의 입 밖으로, 기도라는 말이 흘러나왔을 때, 나는 뛸 듯이 기뻤다.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딸이 엄마를 위해 무슨 기도를 할까요?” 
 
“글쎄요. 뭐 그냥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을까요?” 
 
“그럴 거예요. 그 기도를 빼놓지는 않겠죠. 하지만, 딸은 거기서 멈추지 않을 거예요. 제가 목사인 거 아시죠? 딸이 무슨 기도를 하는지 알려드려도 될까요?” 
 
정희는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기도에 관한 가르침에 관심을 보인 것이 아니라, 딸이 무슨 기도를 할까 궁금했던 것이다. 
 
“제가 따님은 아니지만, 따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인생을 살아왔아요. 아마도 따님이 저를 어머니와 연결해준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일단, 제가 살아온 이야기부터 짧게 전해드릴게요.” 
 
정희는 경청했다. 중간중간 눈물을 닦아내며, 내 이야기를 끊지 않고 들어주었다. 내가 살아온 인생을 진지하게 들어준 정희에게 고마웠다.
 
“아따, 젊은 양반이 고생을 많이 했네요. 생긴 건 멀쩡하구먼, 속은 많이 아팠겠어요. 어찌 그런 일을 겪고, 이런 일을 한데요.”
 
나는 정희의 따뜻한 목소리와 눈빛에 위로를 받았다. 그 순간의 정희는 동화책에 나오는 마음씨 따뜻한 할머니였다. 
 
“제가 딸이라면 이런 기도를 할 것 같아요.” 
 
정희는 다시 한 번 나에게 집중했다. 나는 정희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입술을 뗐다.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첫째 딸 미숙의 심정을 정희에게 전했다. 내 감정에 동요가 일어나 눈물을 쏟아지고, 정희가 함께 따라 울 때,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나는 정희의 딸이 아니었다. 정희가 내 어머니였다. 
 
정작 나는 내 어머니에게 전하지 못한 진심을, 내 목소리로 정희에게 전한 것이다. 
 
엄마, 미안해. 
엄마, 고마워. 
엄마, 사랑해. 
 
감정의 홍수였다. 갑작스럽게 불어난 물살에 내 자아가 떠내려갔다. 정희를 혼자 남겨두고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상담자로서의 완전한 실책이었다. 
 
그때, 정희가 내 손을 붙잡았다. 
 
“목사님, 엄마도 알 거예요. 목사님이 직접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엄마니까 알아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마음 가져줘서, 고마워요.”
 
나는 후회했다. 정희의 나이 절반도 살지 못한 내가, 얇퍅한 상담의 기술로 무엇을 하려고 했던가. 
 
정희는 상처 입은 내담자였지만,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위대한 어머니였다. 
 
미숙한 상담자로 잠시 역전이가 일어나 정희를 어머니로 여긴 순간에도,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나는 잠시 동안 따뜻한 어머니를 만났고, 정희는 가족이라는 주관적인 울타리를 넘어 객관적으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가치를 재평가하게 되었다. 
 
무능한 상담자에게 베풀어진 과도한 은혜였다. 
 
정희는 내게 고맙다는 말을 남겼다. 나는 두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정희, 그리고 호주에서 나를 정희와 연결해준 미숙이었다. 
 
정희를 돌려보내고, 나는 창가로 먼 산을 바라봤다. 전화기를 손에 잡고 머뭇거렸다. 그러다, 용기를 내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엄마. 뭐해? 그냥 전화 걸었어.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나서….”

상처의 속성은 반복이다

지연의 오전은 한가롭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고, 집 안에 머문다. 커피를 내리고, 소파에 앉은 지연은 평온해 보인다. 잠시 후, 그녀는 쓰러지듯 소파에 누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석 달 전, 그녀는 끔찍한 일을 겪었다. 
 
빨랫감을 정리하다가 남편의 주머니에서 유흥업소의 명함을 발견했다. 아내는 충격을 받았다. 빨랫감을 집어던지고,  소파에 앉은 남편에게 소리를 질렀다. 
 
“당신 이게 뭐야?” 
 
남편은 당황했다. 
 
“뭐가?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래?” 
 
“왜 이런 게 당신 주머니에 있어?” 
 
지연은 유흥업소의 명함을 남편에게 집어던졌다. 남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 그거 어제 술에 취해서 받은 거야. 친구랑 포장마차에서 술 마시고 대리기사 기다리는 동안, 길에서 나눠주는 거 받은 거네. 술에 취해서 기억을 못 했어, 내가….” 
 
“그게 지금 말이 되는 소리야?” 
 
“말이 안 되면 뭐 어떻게 해. 그게 사실인데. 당신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지연은 남편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남편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남편은 술을 즐겨마시는 사람이 아니었다. 남편의 친구 A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는 말에 모처럼 만난 자리였다. 
 
“정말 믿어도 되는 거지? 당신 나한테 숨기는 거 없지?” 
 
“아, 그런 거 없다니까.” 
 
지연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사흘 뒤, 지연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남편 친구 A의 아내였다. 지연이 전화를 받아들었을 때, A의 아내가 흐느껴 우는 소리부터 들려왔다. 
 
“언니, 알고 있었어요?”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지연이 되물었다. 
 
“우리 오빠하고 언니 남편하고, 성매매 업소 갔다 왔어요.” 
 
지연은 귀를 의심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오빠가 PC로 카카오톡 메신저를 하다가, 로그아웃을 안 하고 나갔어요. 거기서 두 사람 대화를 읽었는데, 서로 그 짓을 하러 다닌 거예요.” 
 
지연은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사실이야?” 
 
“사실이라니까요. 우리 오빠는 인정했어요. 내가 어제 미친 여자처럼 살림 부수고 난리 쳤다니까요. 언니 이제 우리 어떻게 해요? 저 이 남자랑 못 살아요.” A의 아내는 다시 흐느껴 울었다. 
 
지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떨리는 입술을 이빨로 꽉 깨물고, 뭉개진 발음으로 말했다. 
 
“일단, 전화 끊어.” 
 
남편은 회사에서 조퇴를 하고 한 걸음에 집으로 달려왔다. 무릎을 꿇고 빌었다. 지연은 남편의 옷가지를 집어던지며, 당장 집을 나가라고 울부짖으며 소리를 질렀다.
 
남편의 얼굴조차 보고 싶지 않았다. 새벽에 출근하고 저녁 늦게 퇴근하라고 말했다. 각방을 쓰면서 얼굴조차 마주치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남편은 아내가 시키는 대로 했다. 
 
한 달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지연의 몸과 마음이 망가졌다. 지연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같은 일로 이혼한 선배 언니의 조언이 냉수처럼 지연을 일깨웠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혼은 아니야. 나는 너무 후회스러워. 부부 상담이라도 받아봐.”
 
지연은 남편에게 통보하듯 말했다. 
 
“부부 상담이라도 받자. 이대로 당신도 나도 못 살아.” 
 
남편은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아내가 하자는 대로 했다. 
 
상담 안에서, 두 사람은 일상 대화에서 불가능했던, 진심을 공유했다. 남편은 아내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다. 아내는 오열하듯 고통스러운 감정을 쏟아내었고, 남편은 그 감정을 오랜 시간 받아냈다. 
 
아내는 남편을 용서하고 새로운 기회를 주었다. 남편 역시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노라고 약속했다. 표면적으로, 두 사람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내는 반복되는 기억으로 고통받았다. 
 
남편이 식탁 앞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거짓말을 했던 모습이 떠오르면, 남편을 향한 분노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분노를 느낄 때마다 쥐잡듯 남편을 잡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될 것이 뻔했다. 두 사람의 회복을 위해 혼자 간직해야 할 것으로 여겼다. 
 
남편을 향한 분노는 점차 스스로를 비난하는 목소리로 변질되어갔다. 
 
‘왜 몰랐을까? 얼마나 어리석으면 몰랐을까? 남편 친구의 아내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평생 모르고 살았지 않았을까? 얼마나 멍청하면 그랬을까?’ 
 
지연은 하루에도 몇 번씩 소리 없이 무너졌다.  
 

 
상처의 사건은 일시적이지만, 상처의 기억은 무한 반복이다. 상처의 무시무시한 속성이다. 
 
피해자의 의견을 묻지 않고, 제멋대로 기억을 재생한다. 피해자를 의자에 묶어놓고, 바로 눈앞에서 끔찍한 장면을 무한 반복, 자동 재생하는 것이다.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는 것만으로 상처의 공격을 버텨낼 수 없다. 현명한 전략이 필요하다. 상처의 속성을 알고 올바르게 대처하는 것이다. 
 
첫째, 의자에 묶이면 안 된다. 몸을 움직여라. 아등바등 움직여서, 꽉 묶인 밧줄에 공간을 만들어라. 손목 하나라도 뺄 수 있다면, 밧줄을 풀고 의자에서 탈출할 수 있다. 
 
둘째, 눈을 감지 말아라. 눈을 뜨고 놓친 장면을 세세히 살펴라. 눈으로 바라보는 모든 장면은 상처가 각색하고 편집한 장면이다. 편집되고, 왜곡된 장면을 찾아내라. 상처가 일부러 도려낸 장면이 있다. 찾아내서 원래의 자리에 끼워 넣어라. 
 
지연의 잘못은 없다. 이것이 나의 결론이다. 그러나, 지연은 상처의 왜곡된 기억으로 스스로를 자책하며 끔찍한 시간을 보낸다. 남편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순간의 결단보다 중요한 것은, 용서로 다시 시작된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다. 
 
남편을 용서한 지연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다. 용서의 결단이 고통스럽게 반복되는 기억을 지워주지 않는다. 반복되는 기억으로 고통받는 과정을 남편과 공유해야 할 용기가 필요하다. 
 
고통을 표현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고통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솔직한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다. 
 
“나 오늘도 문득 그 기억이 찾아왔어.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 생각나. 내가 기억으로 힘들 때마다, 내 곁에 있어줄 수 있어? 내가 힘들어서 울면, 따뜻하게 안아줘.” 
 
남편을 향한 비난을 제거하고, 진심을 담아라.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고,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남편은 기꺼이 아내를 돌볼 것이다. 
 
용서받은 남편에게 부탁한다. 상처의 속성은 반복이다. 일 년이든 십 년이든, 아내가 반복되는 상처에서 벗어날 때까지, 남편은 지치지 않고 아내를 돌봐야 한다. 
 
남편이여, 자존심 때문에 과거를 부정하지 말아라. 아내가 용서했다면, 과거는 남편의 실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아내의 상처에 관한 것이다. 용서는 순간이지만, 기억은 평생 간다.    
 
남편의 자존심 때문에, 아내가 툭하면 과거를 꺼내서, 남편의 발목을 잡으려는 것으로 오해한다. 남편의 약점을 언급해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다. 아내가 서툴러서 그렇다.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는 것이다. 
 
진심은 간단하다. 
 
“과거의 기억으로 아프다.”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아라. 
 
“너 때문에 아프다.”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아내가 과거를 언급하며 괴로운 감정으로 되돌아간다면, 아내를 위한 치유자가 되라. 오해를 넘으려면,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아내를 과거에 얽매여 사는 나약한 여자로 취급하지 말고,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불쌍한 여자로 보라.  
 
아내가 남편의 가치를 안다. 그래서, 절망했고, 그래서, 포기할 수 없었다. 상처의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면서도, 남편을 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남편, 당신은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다. 
 
잘못이 후회된다면, 그만큼 아내에게 정성을 쏟아라. 당신의 가치는 변하지 않았고, 고통의 시간을 지나면서,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그날이 오기까지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