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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소리 기억나?

“내 목소리 기억나?” 
 
문득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번호였고, 낯선 목소리였다. 
 
“잘 모르겠어요. 누구시죠?” 
 
애써 친절하게 말했다. 혹시라도, 실수할까 걱정스러웠다. 아는 사람의 전화번호를 저장하지 않고 있다가 서운하게 한 일이 종종 있었다. 
 
“나 기억 못 하나 보네. 나 민혁이야. 정민혁.” 
 
그의 이름을 들었을 때, 내 시간은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비디오테이프를 거꾸로 감듯이, 온 세상이 삐리릭 거리며 빠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의 목소리가 나를 십 년 전 어느 날로 잡아당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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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사람이 죽는 걸 직접 본 적 있어? 난 본 적 있거든. 정말 무섭더라. 
 
내 눈앞에서, 아빠가 농약을 먹고 자살을 했어. 며칠 전부터 이상하더라고. 갑자기 나한테 통장이랑 도장을 주면서 비밀번호를 알려줬어. 뭔가를 결심한 눈빛이었고.
 
일요일 아침이었는데, 마당에서 우당탕 소리가 났어. 깜짝 놀라 뛰어나갔지. 문을 열고 보니까, 아빠가 입에 거품을 물고 비틀거리고 있더라고. 
 
아빠와 눈이 마주쳤는데, 아빠의 눈빛을 아직도 못 잊겠어. 아빠가 바닥에 쓰러졌는데, 눈을 감지 않았어. 차갑게 천천히 식어갔지. 그때 나는 얼어붙어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어. 눈물조차 나지 않더라고. 
 
한참 동안 멍하게 서 있다가, 아빠에게 천천히 다가갔어. 내 손으로 아빠의 얼굴을 쓸어내렸어. 아빠의 눈을 감겨주려고. 시뻘겋게 충혈된 아빠의 눈이 무섭기도 했고, 마지막까지 날 바라보던 아빠의 눈이 슬프기도 했고. 아빠의 눈을 감겨주는데, 눈물이 울컥 나더라고.” 
 
통장의 돈은 백만 원 남짓이었다. 중학생 용돈으로는 큰돈이었을지 몰라도, 소년 가장의 생활비로는 물 한 방울처럼 적은 돈이었다. 석 달 만에 통장의 모든 돈이 사라졌다. 
 
시골 마을, 인심은 좋았다. 민혁이가 불쌍하다며, 마을 어른들이 먹을 것을 가져다줬다. 그러나, 그 또한 잠시뿐이었다. 마을 어른들은 민혁이를 오롯이 돌볼 수 없었다. 마을 이장님은 기관을 알아봐 주었다. 
 
마땅한 기관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 옆 마을에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소식이 이장님 귀에 전해졌다. 이장님은 한 마디 예고도 없이, 옆 마을 어른과 민혁이를 찾아왔다. 민혁이는 대충 짐을 싸서, 그 아저씨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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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아, 이번에 조사 나오면, 보일러가 고장 나서 네 집에서 살 수 없다고 말해. 그러면, 보상금 나오거든.”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민혁이는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날 밤, 아저씨 가족은 차를 몰고 시내로 나가 자기들끼리 외식을 했다. 
 
민혁이는 창고처럼 간단히 꾸며진 공간에 우두커니 혼자 남겨졌다. 차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민혁이는 밖으로 나가 인사를 했다. 
 
차 문이 열리자, 숯불에 구워진 고기 냄새가 민혁의 콧구멍을 찔렀다. 차에서 흘러나온 진한 고기 냄새는 매정했다. 민혁의 몸에 밴 라면 냄새를 한 꺼번에 몰아냈다. 
 
자기 이름으로 들어오는 지원금을 아저씨가 가로채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민혁이는 그 집을 나왔다. 석 달 만이었다.
 
갈 곳이 없어진 민혁이는 여기저기 전전했다. 그러다, 시내의 작은 교회 목사님을 만났다. 아주 잠시 동안이라도 머물 곳을 찾은 것이다. 
 
학교에서 만나는 민혁이는 항상 밝았다. 책을 좋아했고, 글을 잘 썼다. 창의적인 방법으로 친구들을 웃겼다. “훈민정음 2”라는 민혁이의 노트가 교실 안을 돌아다녔다. 민혁이는 한글을 조합해서 새로운 글자를 만들었다. 친구들은 그 문자를 발음하기 위해서 애를 썼다. 아무도 “훈민정음 2”에 기록된 문자를 제대로 발음할 수 없었다. 민혁이는 새로운 문자의 창시자였다.  
 
나는 그런 민혁이가 신기해 보였다. 운동장 귀퉁이에 앉아 과자를 까먹으면서 “나중에 뭐가 되고 싶냐?”라고 넌지시 물었다.   
 
민혁이는 돈을 많이 벌어서, 한국에서 제일 큰 서점을 열고 싶다고 했다. 4층으로 지어서, 층마다 다르게 꾸미고, 마치 다른 나라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싶다고 했다. 시골 마을을 벗어나 본 적 없는 민혁이는 세계를 동경하는 듯했다. 나는 꿈마저도 창의적인 민혁이가 부러웠다.  
 
그 후 추운 겨울이 찾아왔고, 우리는 중학교를 졸업했다. 민혁이는 일을 하면서,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산업체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날 이후, 민혁이와의 소식은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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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 그럼 목사 되는 거야?”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민혁이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나를 현재의 시간으로 돌려놓았다.
 
“어쩌다 그렇게 됐네.” 나는 피식 웃었다. 
 
민혁이의 기억이 그 당시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면, 기가 막힐 노릇이었을 것이다. 민혁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내가 겪은 일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사용하는 종교의 언어는 어쩌면 그에게 “훈민정음 2”처럼 낯설게 들렸을지 모른다. 
 
민혁이는 결국 통화하게 된 목적을 말했다. 
 
“야, 사실 내가 조금 이상한 것 같아.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른 것 같거든. 오래전부터 네가 생각나더라. 너를 만나면 왠지 대답을 해줄 것 같아서. 우리 시간 내서 잠시 볼 수 있을까?”
 
물론이었다. 나 역시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민혁이를 보고 싶었다. 민혁이는 자신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고, 나는 바로 그다음 날, 민혁이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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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이가 있던 곳은 도봉산역 근처 구석진 판자촌이었다. 주유소에서 밤낮으로 일하고, 집에 들어가 잠시 눈을 붙이는 삶을 반복하고 있었다. 
 
집이라고 해봐야,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신발을 벗으면 곧바로 방이었는데, 한 사람이 누우면 머리끝과 발끝이 벽에 닿을 지경이었다. 한 사람이 누워서 양쪽으로 팔을 벌릴 수 없을 만큼 폭이 좁았다. 
 
좁은 방에 들어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민혁이가 담배를 꺼내 깊이 한 모금을 들이마셨다. 가슴속에 간직한 비밀을 연기로 건져올리듯, 그는 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토끼 가면이 잊혀지지 않아. 그날 밤 끔찍한 일이 있었거든. 그 사건 이후로, 뭔가 잘못된 것 같아.”
 

 
“아빠가 내 앞에서 농약을 먹고 눈앞에서 죽은 이후로 내가 지낼 곳이 없었어. 사기꾼 같은 놈한테 이용당하다, 시내에 어떤 교회 목사님을 만났지. 
 
목사님이 친절하시더라고. 교회 구석진 곳에 작은 공간이 있었는데, 나보고 거기서 먹고 자고 하라고 했어. 내가 갈 데가 어디 있었겠어. 이래저래 고맙더라고.   
 
일주일이 지났나. 밤에 자고 있는데,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교회에 기도하러 왔나 보다 생각했지. 뒤돌아 누워 자려고 하는데, 방문이 열리는 거야.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어. 
 
덩치 큰 남자가 토끼 가면을 쓰고 있었어. 그 남자가 날 덮치고 강간했어. 지금이라면, 볼펜이라도 들어서 그 사람 목이라도 찔렀을 텐데, 그때는 너무 무섭기만 했어. 뒤돌아 울면서, 끔찍한 시간이 끝나기만 바랐지. 
 
다음 날 아침, 바로 그곳을 나왔어. 그대로 있다가는 똑같은 일을 당할 것 같아서.
 
그런데, 문제가 뭔지 알아? 밤마다 토끼 가면이 떠오른다는 거야. 밤이 되면, 생각나. 불을 끄고 잘 수가 없어. 저기 저 문이 갑자기 열릴 것 같거든. 밤이 되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발자국 소리도 무서워.”
 
내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떨어졌다. 눈물을 숨기려 눈을 비볐다. 민혁이는 방 안에 가득 찬 담배 연기 때문인 줄 알고,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작은 창문조차 달려 있지 않는 방이었다. 손으로 휘휘 저어 연기를 내보내면서, 민혁이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나한테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남자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거야. 지금까지 세 번 정도 여자를 사귀어 봤거든. 당연히, 같이 자 본 적도 있지. 생각보다 별로였어.” 
 
민혁이는 양쪽 팔소매를 어깨까지 걷어올렸다. 그리고, 뒤돌아서서 상의를 벗어서 등짝을 드러냈다.      
 
팔부터 시작된 문신은 어깨를 타고 등판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날카롭게 발톱을 드러낸 용이, 화가 난 듯 코에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여자에게 감정을 못 느끼니까, 엄청나게 불안한 거야. 야, 이거 뭐가 잘못됐다. 그래서, 몸에 그림을 좀 그렸어. 나 남자다, 뭐 이런 거? 조금은 나아질 줄 알았거든. 그게 아니더라고. 문신을 이렇게나 크게 그렸는데도 불안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 도로 한가운데를 미친놈처럼 달렸지. 한참을 뛰다가, 지쳐서 바닥에 주저앉았어. 손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거야. 문신한 자리에서 땀처럼 피가 나더라고. 맨살을 바늘로 찔러대니 그런 거지.”
 
민혁이의 말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지하철 막차가 올 시간이 돼서야, 나는 시계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하철역까지 날 바래다주면서, 민혁이가 말했다. 
 
“어릴 때부터 있잖아. 너를 만나면, 마음이 참 편했어. 오늘도 그래. 해결된 건 없지만, 오늘 하루는 마음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민혁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음 주 이 시간에 다시 올 테니까, 그때는 잠시 동안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민혁이는 기뻐하는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좋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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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이에게 가는 길은 짧지 않았다. 나는 상록수역에서 지하철을 탔고, 도봉산역에서 내렸다. 거의 두 시간 거리였다. 민혁이를 보러 가는 날에는, 하루를 온전히 비워야 했다. 
 
나 역시 계속되는 아르바이트와 대학생활로 몸과 마음이 피곤한 상태였다. 시간과 돈이 빠듯했지만, 민혁이를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민혁이를 만나면, 먼저 짜장면을 사줬다. 그리고, 예수님을 전했다. 그에게는 “훈민정음 2”라고 여겨질 만큼 낯설고 불편한 것이었지만, 나는 우정이라는 강력한 신뢰의 다리 위로 끊임없이 복음을 실어 날랐다. 
 
어느 날, 심각해진 민혁이가 담배를 입에 물고, 성경을 뒤적거렸다. 그의 손이 빨라지면서, 담뱃재가 성경에 떨어졌다.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손으로 대충 털어내면서 말했다. 
 
“여기 나오는 이야기를 어떻게 믿냐? 너는 이게 믿어지냐?” 
 
나는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믿으니까, 믿어보라고 말하지 않겠어?”  
 
민혁이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믿는 거 맞아?”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랐다. 나는 엄마 몰래 사탕을 훔쳐 먹은 아이처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댔다. 
 
당시, 나는 신학교 2학년이었다. 나는 신앙의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열여섯 살에 회심하고, 성경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단순하게 믿었던 나는, 신학교에서 배운 지식으로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면서, 다른 종교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내 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았다. 부끄러운 감정을 숨기려고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내가? 아니야. 내가 못 믿는 걸 어떻게 너한테 말해.” 
 
민혁이는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 담배 연기를 내 얼굴에 내뱉으며 말했다. 
 
“가면 벗어, 자식아.” 
 
그 순간, 나는 민혁이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그를 덮쳤던 토끼 가면과 나를 동일시 하다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멱살을 잡고 앞뒤로 흔들면서, “어디서 감히, 그딴 놈과 나를 비교해? 내가 그딴 놈이랑 같냐?”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민혁이는 방문을 열어젖히고 말했다. 
 
“오늘은 그냥 가라. 다음부터는 다른 이야기하자. 성경 이야기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나는 그날 밤, 무기력하게 민혁이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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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가 지나고, 나는 민혁이를 다시 찾아갔다. 지난번 일을 사과하고 싶었다. 확신 있게 믿게 되면, 다시 찾아올 테니, 당분간 잘 지내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민혁이는 주유소에 없었다. 같이 일하는 직원에게 “민혁이 어디있냐”라고 물었다. 직원은 밀려드는 자동차를 혼자 감당하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몰라요. 며칠째 말도 없이 안 나와요. 일 좀 제대로 하라고 말해주세요. 힘들어 죽겠어요.”
 
불길했다. 민혁이의 집으로 냅다 뛰었다. 도착하자마자, 그의 집 문을 거세게 열었다.
 
문을 열고, 내가 마주한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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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이는 나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애원하듯 내게 말했다.  
 
“여기 전기장판 코드 좀 빨리 뽑아줘.”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민혁이가 시키는 대로, 전기장판 코드를 뽑았다. 코드를 꽂는 곳은, 민혁이 발치에 놓여있었다. 
 
민혁이의 등이 전기장판의 전선 자국을 따라 하얗게 타들어간 상태였다. 등 전체는 열에 타서 시커멓고, 전선이 직접 닿은 곳은 오징어처럼 하얗게 익어버린 것이다.
 
민혁이가 말했다. 
 
“며칠 전에 허리가 너무 아픈 거야.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어. 병원에 갔더니, 허리가 심각하게 망가졌데. 절대로 일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하더라. 불구로 살 수 있다고 하는 말에 충격을 받았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데, 어떻게 쉬겠어. 나가서 일했지. 그다음 날,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픈 거야. 아예 일어나지도 못하겠어. 이틀 동안 꼬박 누워서 아무것도 못 했어. 몸을 일으킬 수도 없었으니까.
 
뜨거운 열로 지지면 조금 나아질까 싶어서 전기장판을 최대로 하고 잠에 들었어. 뭔가 이상해서 눈을 떴는데, 연기가 나는 거야. 내 등이 타고 있는지 누가 알았겠어. 
 
오늘 아침부터 옆으로 몸을 돌리고 누워 있었어. 합선이 된 건지, 전원이 안 꺼지더라고. 너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날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 주유소에서 같이 일하는 직원들도 내가 어디 사는 지 몰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민혁이를 데리고 병원에 갈 수도 없었고, 며칠 동안 먹고살라고 돈을 쥐여줄 수도 없다. 무능했다. 한숨을 내쉬며, “미안하다”라고 말했다. 
 
민혁이는 내 손을 잡아주며, “미안하기는 뭘 미안해. 네가 와줘서 난 고맙기만 한데.”라고 말했다. 
 
나는 민혁이의 손을 꼭 잡으며 물었다. “내가 기도를 한 번 해도 될까? 내가 너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잠시 동안, 묘한 긴장이 흘렀다. 민혁이는 생각 끝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라고 했다. 
 
나는 민혁이를 돌려 눕혔다. 민혁이의 허리에 살며시 손을 얹고 기도를 시작했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민혁이는 반드시 나아야 했다. 낫지 않으면 굶어죽을지도 몰랐다. 내가 의심하는 하나님이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도와주셔야 했다. 하나님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했다.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떼를 쓰며 기도했다. 
 
온몸이 땀에 젖었다. 사력을 다해 기도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몰랐다. 기도 마지막에 비장한 각오로 선언하듯, 말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한다. 일어나, 걸어라.” 
 
민혁이는 고개를 돌려, 날 쳐다보며 물었다. 
 
“이제 일어나면 되는 거야?” 
 
나는 긴장한 채로, 말했다. 
 
“천천히 일어나 봐. 다칠 수도 있으니까.” 
 
민혁이는 고개를 떨구고, 민망한 듯 말했다. 
 
“나 못 일어나겠어. 허리가 너무 아파.” 
 
나는 화를 내듯 말했다. 
 
“그럴 리 없어. 도무지 말이 안 된다고.” 
 
민혁이는 당황했다. 
 
나는 민혁이 허리에 손을 얹고 다시 기도했다. 목이 쉴 정도로 큰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더 이상 기도를 할 수 있는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민혁이가 돌아보며, 물었다. 
 
“언제 끝나? 이제 그만하자. 허리를 누르니까, 더 아파.” 
 
나도 지칠 대로 지쳐버린 상태였다. 푸념하듯 말했다. 
 
“그래, 그만하자.”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민혁이를 외면하는 하나님을 더 이상 믿고 싶지 않았다. 
 
나는 차비를 제외한 모든 돈을 민혁이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굶지 말고, 짜장면이라도 시켜 먹어. 내일모레 또 올게. 그때는 먹을 것 좀 사 올게. 일단, 견뎌. 알겠지?” 
 
나는 민혁이의 집을 나섰다. 밤길이 어두웠다. 새들이 구슬프게 우는소리, 의미 없이 울려 퍼지는 고양이의 울음 소리마저도, 나를 비웃는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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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일찍, 나는 민혁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만큼 걱정스러웠다. 민혁이는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주변이 자동차 소리로 시끄러웠다.
 
민혁이가 말했다. 
 
“나 지금 바쁘니까, 이따 통화하자. 지금 일하고 있어,.” 
 
내가 한 마디 던질 겨를 없었다. 민혁이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전화기를 귀에 댄 채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너 지금 아프잖아. 허리가 아파서 일어나지도 못했잖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나는 민혁이의 전화를 기다릴 수 없었다. 곧바로 지하철에 몸을 싣고, 민혁이에게로 갔다. 가는 내내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주유소에 도착해서, 민혁이를 찾았다. 민혁이는 여느 때처럼,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민혁이는 잠시 한가한 틈을 타서,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잘 들어봐. 정말 신기한 일이 있었어. 어제 너 가고 나서 꿈을 꿨어. 토끼 가면을 쓴 그 자식이 또 꿈에 나오더라고. 예전에는 있잖아, 너무 무서운데, 도망을 못 가고 밤마다 그 짓을 당했었거든. 
 
이번에는, 꿈속에서 내가 도망을 치더라고. 그놈을 밀치고, 반대편으로 힘껏 뛰었어. 그 자식이 엄청난 속도로 뒤따라 오더라. 나도 미친 듯이 뛰었지. 
 
이러다 잡히겠다 하는데, 눈앞에 하얀색 빛이 나타났어. ‘어, 이거 뭐지?’하는데,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두 팔로 날 안아주시는 거야. 짧은 순간이었지만, 정말 따뜻했거든. 
 
깜짝 놀라 잠에서 깼어. 잠에서 깨서 보니까, 내가 상체를 일으키고 있더라고. 벌떡 일어나 앉아 있는 거야. 
 
꿈에서 놀라 깼는데, 꿈을 깨고 나서 더 놀랐어. 허리가 안 아픈 거야. 일어나서 움직여보는데, 정말 하나도 안 아프더라고. 
 
그 하얀 옷을 입은 분이, 네가 말한 하나님인가, 예수님인가 하는 그분이 아닐까?”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민혁이는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다시 일을 하러 갔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민혁이를 기다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쁘게 일을 하는 민혁이를 바라보면서, 복잡한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 후로, 오랫동안 민혁이는 나에게 복음을 말할 기회를 줬다. 민혁이에게 복음을 전하는 동안, 나 자신도 의심을 지나, 확신의 길로 돌아설 수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배려하신 것이 분명했다. 
 
민혁이와 함께 겪은 사건은 내 인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날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민혁이에게 전화가 오지 않았다면, 민혁이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민혁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신학교를 그만두고 다른 길을 갔을지도 모른다. 
 
민혁이를 위해 기도해줄 때, 민혁이가 그 자리에서 즉시 나았다면, 나는 치유에 대해 오해했을 것이다. 
 
마치 내 능력이라도 되는 듯, 교만해졌을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기도하는 동안, 아무런 일도 없게 하셨다. 시간적 간격을 두시고, 내가 없을 때, 민혁이를 고쳐주셨다. 
 
내가 없는 동안,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나는 분명히 안다. 궁극의 치유는 치유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치유를 실행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만약 민혁이의 허리만 나았다면, 나는 반쪽짜리 치유를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민혁이의 정서와 육체를 동시에 치유해주셨다. 토끼 가면으로부터 도망쳐,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하셨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나타난 일회적인 사건일지 모르지만, 민혁이의 삶의 구조를 바꿀 만큼 위력적인 경험이었다. 
 
기억 속에서 토끼 가면이 나타날 때마다, 민혁이는 그로부터 도망칠 것이다. 꼼짝도 못 한 채로, 끔찍한 일을 반복적으로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서 벗어나 따뜻한 하나님의 품에 안기고자 할 것이다. 
 
복음적인 치유는 전인격적이다. 육체와 정서를 아우른다. 심리치료가 따라올 수 없는 지점이다. 하나님께서 상처 입은 한 사람의 인생에 개입하실 때 일어나는 일을, 나는 생생하게 목격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도, 내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유다. 나는 보았고, 들었다. 치유는 나의 믿음에 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것이다. 나의 연약한 믿음, 무지와 무능이 치유의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불가능은 없다.  
 
하나님이 치유의 근원이시다.

별처럼 슬픈 밤

“참 바보 같지요. 앞날이 뻔히 보이는데, 두려워서 말도 못 하고 남자친구 뒷바라지를 했으니까요.
 
그 사람은 다른 여자를 만나 결혼했어요.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보고 알았어요. 가끔 생각날 때 확인해 봤어요. 터무니없지만, 아직 기회가 있다는, 뭐 그런 생각하면서요.
 
다른 여자와 찍은 사진을 처음 봤을 때, 잠을 잘 수 없었어요. 프로필 사진이 웨딩 사진으로 바뀐 날은 죽고 싶었고요. 지금도 밤마다 생각해요. 이대로 영원히 잠들면 좋겠다. 살아서 뭐 하겠어요. 살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말했다. 남자친구가 떠나간 그날 밤, 모든 것을 잃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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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남자라니까, 한 번 만나 봐.”   
 
“난 어린 사람 싫어, 언니.”
 
“일단 한 번 만나 봐. 생각도 깊고 듬직한 애야.”
 
교회 언니 소개로 그를 처음 만났다. 남자에게 흥미가 없던 터라, 일부러 남자를 만나지 않았다. 친한 사람들이 남자를 소개할 때마다 난처했다. 예의상 한 번 만나준다는 생각으로 마지못해 나갔다.
 
듬직한 체격, 다부진 어깨, 각진 얼굴. 그의 첫인상은 듬직하다 못해 부담스러웠다. 적당히 시간만 때우고 일어나자, 생각했다.
 
대화를 하는데 묘한 매력을 느꼈다. 외모와는 달리 부드러운 말투였다. 얼굴을 손을 가리고 웃는 소심함이랄까.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받았다. 한 번쯤은 더 만나도 될 것 같은 그런 남자였다.
 
두 달이 지난 후, 고백을 받았다. 어쩌면 처음이었다. 누군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설레였던 감정 말이다. 두 사람은 기념으로 반지를 맞췄다.
 
그녀의 나이 서른하나, 남자친구는 스물일곱, 네 살 연하의 남자였다. 남자친구는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해서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그녀는 회사생활 5년 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취업을 앞두고 심란해 보였던 그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 대학원에 가야 할까 봐. 하고 싶은 공부가 있어.”
 
공부를 하고 싶다는 그의 말에 그녀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녀의 나이 서른하나였다. 공부를 마치고 나면, 서른셋이 된다.
 
사귄 지 187일이다. 선뜻 ‘결혼은?’이라고 물을 수 없었다. 우리 둘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그잔을 손으로 감싸 쥐며 창밖을 바라봤다.
 
“걱정하지 마. 공부 마치면 우리 바로 결혼하자. 나 진심이야. 조금만 더 기다려줘.”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애써 태연한 척했다.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공부하는 동안 남자친구는 그녀에게 최선을 다했다. 학생의 장점이랄까. 퇴근 시간에 맞춰 그녀를 기다렸다. 카페 유리창 너머로 그를 바라볼 때마다 그녀는 행복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두 사람은 결혼 이야기를 시작했다.
 
#
 
상견례를 앞두고 그는 초초하게 말했다.
 
“사실은 우리 부모님이 조금 까다로우셔. 특히,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어머니가 결혼을 반대하셔. 하지만, 걱정 마. 계속 설득하고 있어. 반대하셔도 할 수 없잖아. 내 결심은 달라지지 않아. 너도 오래 기다렸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조각 케이크가 심장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기분이었다. 숨이 막혀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 엄마는….”
 
평소에 그는 어머니에 대해 말을 아꼈다. 어머니 이야기만 나오면, 시선을 피하고 말을 돌렸던 그였다. 그가 처음으로 어머니에 대해 말을 꺼냈다.
 
그의 아버지는 술만 먹으면 어머니에게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다.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었다. 경제적인 이유였다.
 
“내가 아버지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뭔지 아니? 너 때문이야. 너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지긋지긋한 삶도 이제 끝이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어머니가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너 결혼할 때까지는 참아야 되지 않겠니? 빨리 장가가라. 그래야, 지긋지긋한 삶에서 벗어나야 할 거 아니야.”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의 어머니는 말했다.
 
“어디서 그걸 여자라고 데리고 왔어. 내가 고작 그런 년하고 결혼시키려고 이날 이때까지 참은 줄 알아!”
 
그는 답답했는지, 커피를 물처럼 들이켰다.
 
“말하고 나니 속은 시원하네.”
 
그녀의 반응이 없자, 그가 조급한 듯 말했다.
 
“나한테 시간을 조금만 줘. 급할 거 없잖아. 올해까지 설득해보고, 그때 안되면 그냥 우리끼리 결혼해버리자.”
 
한 달이 지난 후, 그의 어머니가 전화를 했다. 교양 있는 말로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본론을 말했다.
 
“우리 애가 우유부단해서 결정을 못 내리는 애야. 그러니까, 네가 결정을 내리는 게 맞지 않니? 이제, 우리 아들 그만 만나라. 너 나이도 있는데, 하루라도 빨리 좋은 남자 만나야지.”
 
참을 수 없었다. 남자친구를 원망했다. 독설을 퍼부었다. 남자친구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는 말없이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다음 날도 그의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벨은 주말도 없이 부지런히 울렸다.
 
그녀가 전화를 받으면 릴레이 경주를 하듯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어머니에게 걸려오는 전화는 쉬지 않고 울렸지만, 남자친구의 전화기는 고요했다. 그의 전화기는 꺼져있었다. 바통터치 되지 않는 릴레이가 계속됐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한 그는 회의 핑계를 댔다. 회의 중에는 모든 직원이 전화기를 꺼둔다고 변명했다. 퇴근 후에 야근, 회식 때문에 전화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수 십 번을 전화했을 때가 그가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이성을 잃었다. 길 한복판에서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야! 너 미쳤어. 어디서 지금 이따위로 사람을 대하고 난리야. 나도 아쉬울 거 없어, 알아? 너 같은 놈 나도 싫어!”
 
그는 침묵했다. 할 말 다 했냐고 물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주말 내내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남자친구에게 문자라도 오지 않을까, 머리맡에 전화기를 뒀다. 진동이 울리면 손을 뻗어 전화기를 확인했다. 스팸문자뿐이었다.
 
‘설마, 그럴 리 없어. 나한테 이럴 수는 없어.’
 
출근은 했지만, 일을 할 수 없었다. 몸이 아프다고 핑계를 대로 집에 돌아와 누웠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전화기가 부르르 떨렸다. 그가 보낸 문자였다.
 
“오늘 퇴근 후에 잠깐 보자.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그를 만났을 때, 그는 혼자 선언하듯 말했다.
 
“우리 여기까지야. 이제 그만하자. 너도 나도 할 만큼 했어.”
 
#
 
그녀가 어릴 때 아버지는 집을 나갔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건 초등학교 오학년 여름 날이었다.
 
물건이 깨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화장대 거울에 금이 갔다. 깨진 거울에 엄마가 비쳤다. 거울에 비친 엄마 얼굴이 여러 개였다. 하나, 둘, 셋.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이대로 나가면 어떻게!”
 
“내가 말했잖아. 잠깐 피하는 거라고.”
 
아빠가 짐을 싸느라 정신이 없다.
 
“당신만 살면 되는 거야? 우린 어떻게 해?”
 
엄마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그게 아니라고 몇 번 말해. 일단 도망가야 해. 같이 살 집 구하면 내가 바로 연락할게. 일주일도 안 걸려. 나 감옥 가면, 우리 가족은 누가 먹여 살려. 나 절대로 감옥 안 갈 거야. 억울해서 미치겠다고.”
 
“여보, 다시 생각해 봐. 그래도 이건 아니야. 우리도 데려가. 제발, 여보.”
 
“애까지 데리고 어떻게 도망을 치라고. 비켜!”
 
아버지가 문을 박차고 나갔다. 엄마가 뛰어나가 아버지에게 매달렸다. 아버지는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엄마는 몇 미터 끌려다가 멈췄다. 무릎이 까진 채 엎드려 세상이 떠나가듯 울었다.
 
그녀는 창가에 서서 바닥에 쓰러져 우는 엄마를 바라봤다.   ‘내가 없었다면, 아빠는 엄마를 데려갔을까.’
 
엄마의 대본에서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엄마의 대본을 고치고 싶지 않았다. 대본대로 행동하는 게 편했다.
 
그녀는 적절한 시기마다 대본에 쓰인 대로 말했다. ‘엄마, 아빠는 언제 와?” 엄마 역시 대본에 충실했다. “곧 오실 거야.”
 
‘엄마는 정말 몰랐을까.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었을까.’
 
어린 그녀도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발걸음은 일주일짜리 발걸음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구두가 시멘트 바닥에 부딪혀 따닥따닥 내는 소리는, 모스 부호처럼 선명했다.
 
“다. 시. 는. 돌. 아. 오. 지. 않. 을. 거.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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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나간 후, 엄마는 시체처럼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뱃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요동해도 엄마를 깨울 수 없었다. 배가 고프다고 엄마를 깨우면, 밥 대신 욕을 얻어먹었다.
 
방은 어두웠다. 엄마는 울다 자다를 반복했다. 이틀에 한 번 엄마가 일어나 돈 만 원을 던져줬다. 돈을 집어 들고, 집 앞 가게에 가서 담배 한 갑과 라면을 사 왔다.
 
이모에게 전화를 받은 엄마가 갑자기 달라졌다. 밤마다 화장을 짙게 하고 밖으로 나갔다. 알록달록 이상한 옷들이 늘어갔다. 엄마가 먹고살려고 술집에 나가 일을 시작한 것이다.
 
밤마다 혼자 자는 게 무서웠지만, 엄마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동이 틀 때쯤 집에 들어오는 엄마는 딸보다 변기를 먼저 찾았다. 남편 대신 변기를 끌어안고 구토와 울음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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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잠깐 마주하는 엄마는 칼처럼 예민했다. 작은 것 하나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말투, 눈빛에서 세상을 향한 분노가 새어 나왔다.
 
“비누 어디 갔어?”
 
엄마가 물었다.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그녀가 말했다.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우리 집에 둘 밖에 없는데.”
 
“나 정말 몰라.”
 
“이게 어디서 거짓말이야.”
 
엄마가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그날은 비누가 없어졌다. 전날은 벽 시계가 멈췄다. 택배가 늦은 날도, 가스비가 청구된 날도 그녀는 뺨을 맞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는 엄마의 쓰레기통이었다. 엄마는 구깃구깃한 감정을 딸에게 던져버렸다.
 
“어디서 거짓말을 하고 난리야. 어린 게 제 아빠를 빼다 박아가지고. 생긴 것도 모자라서 거짓말하는 것도 닮았어. 한 번 만 더 거짓말하면 그때는 가만히 안 둬, 알겠어!”
 
엄마는 저녁 10시가 되면 어김없이 집을 나갔다. 짙은 향수 냄새를 단칸방에 채워 넣고 밖에서 문을 잠갔다.
 
그녀는 저녁 대신 향수를 먹었다. 엄마가 없는 저녁마다 창문을 열었다. 바닥에 누우면 한 뺨 창밖으로 밤 하늘이 보였다. 외로웠다. 울다 잠든 날이 별처럼 많았다.
 
#
 
엄마가 없는 날, 아빠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뇌의 저편에서 아빠라는 단어가 번쩍했다. 의식에서 지워졌던 기억이 7년 만에 되살아났다. 차분하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여보세요?”
 
그녀가 말했다.
 
“잘 지내지? 아빠야.”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엄마, 지금 옆에 있니? 있으면 바꿔줄래.”
 
“….”
 
엄마는 집에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볼래. 아빠가 몇 년 만에 전화했잖아. 그동안 힘들었지. 아빠가 미안하다. 지금 최선을 다해 방법을 찾고 있으니까 아빠가 곧 데리러 갈게.”
 
“….”
 
이제 그럴 필요 없다.
 
“너 지금 우니?”
 
“….”
 
울지 않는다.
 
“그래, 그럼 알았다. 아빠가 또 연락할게.”
 
뚜 –
 
변한 건 없었다. 그녀에게는 아빠의 자리는 없었다.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다. 엄마는 엄마의 인생을 되찾았다.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고 말하면 엄마의 인생은 다시 멈춘다. 엄마를 위한 배려였다.
 
“엄마, 전화번호 바꿔줘.”
 
“왜?”
 
“옛날에 빚 갚으라 했던 사람들이 낮에 전화했어. 이러다 우리 집까지 알아내면 어떻게 해. 나 무서워.”
 
엄마는 화장을 하다 멈칫했다. 파우더를 든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를 바라보며,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알겠어. 엄마가 내일 전화번호 바꿀게.”
 
#
 
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녀는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밤늦게 집에 들어온 그녀가, 현관에서 남자 신발을 목격했다. 빨간색 뾰족구두와 밤색 구두가 뒤엉켜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엄마는 태연한 듯 행동했다. 이른 새벽, 밤색 구두의 사내는 사라지고 없었다. 엄마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엄마의 대본대로 행동했다.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엄마의 인생을 살고, 그녀는 그녀의 인생을 살았다.
 
그 남자가 집에 오는 날이 늘어갔다. 엄마가 집에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그녀의 집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집에 라면 있냐?”
 
“없어요.”
 
“그럼 가서 사 올래? 여기 돈.”
 
“아저씨가 직접 사다 드세요.”
 
“버릇없다, 진짜.”
 
“엄마도 없는데 왜 우리 집에 계세요. 불편해요, 저.”
 
“라면 한 그릇만 끓여먹고 나갈 거야. 제발 그런 눈빛 좀 하지 마라.”
 
그 말이 전해진 것 같았다. 엄마는 그날 이후 그녀를 보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주말 저녁, 엄마는 그녀를 불러 앉혔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깊이 빨았다. 그녀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엄마는 그 아저씨 좋아해. 너만 괜찮으면 같이 살자.”
 
그녀는 대답 대신 기침을 했다.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얼굴이 빨개지도록 기침을 했다. 연기에 질식한 것인지, 엄마가 내뿜은 말에 질식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반응은 중요하지 않았다. 엄마는 미리 외워둔 자기 대사를 계속했다.
 
“사실 이 집 그 사람 거야. 우리 판자촌 벗어나게 해주고, 너 학교 다니게 해준 사람이야. 그 교복도 그 사람이 해 준 거고. 같이 살기는 힘들겠지만, 적응 잘 해봐. 어차피 학교에서 밤늦게 오니까 잠깐만 참으면 되잖아.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하면 독립해. 엄마는 능력 없어.”
 
“….”
 
처음으로 엄마에게 욕을 했다. 입에 담을 수 없는 쌍욕을 무한 반복했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폭탄은 속에서 터졌다. 충격에 입술이 씰룩였지만, 엄마는 몰랐다. 이를 악물고 간신히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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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독립했다. 대학에 가서 고시원에서 살았다. 바로 취업해서 독하게 살았다. 월급을 아끼고 아껴 썼다. 오피스텔 보증금을 마련하고 고시원을 탈출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빠듯한 삶을 벗어날 수 없었다. 월급의 절반을 엄마에게 보내도 엄마는 모자라고 난리였다. 소소한 일이라도 하면서 용돈이라도 벌어보라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무리하게 몸을 쓰면 병원비로 나가는 돈이 더 많다고 말했다. 쉬면서 조용히 사는 게 돈을 아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엄마였다.
 
#
 
“딸, 엄마가….”
 
엄마가 돈을 보내달라고 하기 전에 항상 하는 말이다.
 
“지난번에 ‘미니’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왔는데, 치료가 길어질 것 같다고 해서….”
 
“엄마, 지금 개새끼한테 들어갈 돈 없어. 나도 간신히 살고 있는데 무슨 개한테 돈을 써. 안락사 시켜.”
 
“너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 그러면 못 써.”
 
“내가 여유가 없어서 그래. 아무리 힘들어도 매달 보내주는 용돈 안에서 살아야 해. 매번 이런 식으로 하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그래서, 말하잖아. 이번 한 번 만이라고.”
 
“그 말이 벌써 몇 번째야, 엄마.”
 
“무슨 몇 번째니? 오늘 처음 말한 건데.”
 
“처음 아니야. 개 갖다 버려. 끊을게, 엄마.”
 
엄마에게 전화가 온 날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옥상에 올라가 잠시 머리를 식혔다. 미니라는 개는 늙어간다. 앞이 보이지 않아 똥오줌을 못 가리고, 기운이 없어 산책도 못한다.
 
엄마는 미니와 자신을 구분하지 못했다. 엄마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듯, 하루 종일 거실에 앉아 안쓰럽게 개를 쳐다보고 쓰다듬었다.
 
결국, 엄마에게 돈을 보냈다. 그녀는 엄마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다. 감정과 상관없었다. 반사 신경처럼 그녀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아빠가 떠난 날, 엄마의 영혼도 떠났다. 술집에 나가 웃음을 팔아 번 돈으로 그녀를 키운 엄마였다. 그런 엄마라도 살아있어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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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오지 않았다. 남자친구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우리 여기까지야. 이제 그만하자. 너도 나도 할 만큼 했어.”
 
그녀는 혼잣말을 반복했다.
 
‘아니,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밤마다 고통이 찾아왔다. 울다 지쳐 잠드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새벽에 잠에서 깨면 식은 땀으로 온몸이 젖어 있었다. 백 일이 지나도, 일 년이 지나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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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저녁 퇴근길, 그녀는 편의점에 들렀다. 노란색 바나나 우유를 샀다. 다 마신 병을 버리지 않았다. 집에 가져와 책상에 내려놓았다. 똑같이 생긴 플라스틱병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가지런히 놓였다. 촘촘하게 일자로 놓인 플라스틱병이 책상을 가득 매웠다.
 
플라스틱병이 갈수록 늘어갔다. 책상을 가득 메운 플라스틱병은 방바닥으로 이어졌고,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집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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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미친년아. 너 실성한 거 아니냐.”
 
엄마가 찾아왔다. 주말 내내 전화를 받지 않으니까, 걱정돼서 찾아온 것이다. 엄마의 잔소리에 그녀가 돌아누웠다. 엄마는 쉬지 않고 말했다.
 
“아니, 무슨 바나나랑 원수 맺었냐. 먹으면 치워야지. 왜 쓰레기를 방에 쌓아두고 있어? 이게 도대체 뭔 일이야.”
 
“엄마, 그만 나가.”
 
엄마는 듣지 못했다. 쓰레기봉투에 병을 담느라 정신이 없다.
 
“엄마, 나가라고.” 그녀가 다시 말했다.
 
엄마는 여전히 듣지 못했다. 그녀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엄마, 내 말 안 들려? 나가라고!”
 
깜짝 놀란 엄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플라스틱 통이 여기저기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녀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엄마, 나가라는 말 안 들려. 나가서 두 번 다시는 오지 마. 내 앞에 나타나지도 말고, 나한테 연락하지도 마. 꼴도 보기 싫으니까.”
 
찰싹.
 
그녀의 얼굴이 후끈거렸다. 엄마가 노려보며 말했다.
 
“별 미친년을 다 보겠네. 알겠어, 이년아. 다시는 안 오면 되잖아.”
 
#   
 
“웃기죠? 엄마는 그날 이후로 정말 연락을 안 해요. 내가 딸 노릇 한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결국 이렇게 됐네요. 남자친구에게 버림받고, 엄마에게 버림받고….
 
나같이 비참한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모든 걸 잃은 것 같아요. 밤마다 생각해요. 이대로 잠들어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녀가 비참해졌다는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녀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 했다. 어쩌면 그녀는 오래전에 버려졌다. 아빠의 말로 버려졌고, 엄마의 말로 버려졌고, 남자친구의 말로 버려졌다.
 
“애까지 데리고 어떻게 도망을 치라고. 비켜!”
“고등학교 졸업하면 독립해. 엄마는 능력 없어.”
“우리 여기까지야. 이제 그만하자.”
 
그들의 말은 차갑고 무서웠다.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한 채, 한 사람의 내면을 짓밟아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길 수는 없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다. 저마다 자신만의 이유가 있을 것이고,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면서, 이미 스스로를 용서했을 것이다.
 
그녀의 이해와 용서는 그들에게 전혀 필요하지 않다. 그들은 각자 혼자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문득문득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아쉬움이 남겠지만, 저마다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면서 각자의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인생은 그들의 것이 아니다. 그녀의 인생은 그녀의 것이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비참하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은 그녀가 그녀 스스로를 버리는 것이다. 그녀는 아직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타버린 잿더미 속에 작은 희망의 불씨가 남았다.
 
그녀는 어렴풋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돌봤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버릴 때마다, 그녀는 스스로를 다시 주웠다. 버려진 자신을 줍고 닦아서 간직했다.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죽고 싶지만, 살고 싶다. 살고 싶은 본능이 그녀를 내 앞으로 데려온 것이다. 그녀는 알고 있다. 언젠가 그녀는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일어설 것이다.
 
그녀가 고통받는 이유는 버림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고통받는 이유는 그녀가 미지의 세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해결하지 못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언제 어떻게 고통이 해결될 것인지 알지 못해 두려운 것이다.
 
고통은 영원히 미지의 세계다.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고통을 피할 수 없다면, 고통을 다루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고통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이 고통을 견딜 수 있다. 현재의 고통은 현재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다. 현재의 고통은 한 사람이 일생 동안 추구할 궁극의 의미와 맞닿아 있다.
 
버림받은 기억으로 고통받는 사람은 버림받지 않기 위해 값비싼 비용을 치른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사랑하고 희생한다. 자기 인생은 어찌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버림받을지언정,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고통이 찾아오면 깨닫는다. 자신 안의 결핍을 발견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 자신을 희생시켜 관계를 유지하는 자신을 직면한다.
 
같은 패턴으로 고통이 반복되면, 결국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절망과 좌절의 터널을 지나면서, 자신을 지키고 보호할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고통은 반복된다. 고통의 터널은 하나가 아니다. 쉬지 않고 계속 나타난다. 터널을 지날 때, 라이트는 자동으로 켜지지 않는다. 수동이다. 때에 맞춰 라이트를 켜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도로 위에 터널이 없기를 바라면 안 된다. 어두운 터널을 만나면, 침착하게 라이트를 켜라. 그러면, 당신은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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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남자친구를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아요. 자기가 힘들다고 여자를 버린 사람이잖아요. 결혼했어도 행복하지 않았을 거예요. 시어머니를 제가 어떻게 감당했겠어요. 게다가 그 사람은 마마보이처럼 행동했는데요.
 
정확히 말하면, 그 남자가 그리운 게 아니에요. 사랑받았던 감정이 그리운 거죠. 남자친구의 뒷바라지를 해서라도 사랑받고 싶었던 제 자신이 후회스러운 거죠. 사랑받으려고 너무나 비싼 값을 치렀어요.
 
언젠가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도 있겠죠. 나이도 있으니, 평생 혼자 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서두르지 않으려고 해요. 누군가를 만나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지금 당장은 괜찮아진 것 같아도,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지도 모르고요. 지금은 그냥 제 자신을 조금 더 알고 싶어요.”
 
그녀가 라이트를 켰다. 터널 세 개를 지나는 동안 라이트를 켜는 방법을 깨달은 것이다. 다음 터널에서는 그녀가 때에 맞춰 라이트를 켤 수 있을 것이다.
 
라이트를 켜고 끄는 일은 번거롭다. 라이트를 제때 못 켰다고 우는 날 있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언젠가 하늘의 찬란한 빛이 그녀의 앞길을 비춰줄 것이다. 눈부신 그날이 속히 오기를 바랄 뿐이다.

믿지 않는 남자친구를 만나요

내 마음속에 외로움이 가득 있어요. 주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제 신앙이 부족하다고 느껴져요. 제 신앙이 부족해서 그런지 교회를 건성으로 다니거나 아예 다니지 않는 남자 친구를 만나요. 솔직히 저는 지금 남자 친구가 좋아요. 신앙이 없어서 문제에요.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계속 만나고 싶어요. 세상적인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제 신앙이 부족해서 일까요?
 
아빠는 악마 같아요. 술만 먹으면 엄마를 때렸어요. 무책임하고 무기력한 아빠 때문에 가정이 고통받았어요. 엄마는 천사 같아요. 늘 제 편이 되어줬어요. 아빠 때문에 고생했는데, 언제나 밝은 모습을 잃지 않으셨어요. 그런 엄마를 보면 마음이 아파요. 늘 저와 제 동생을 위해 사셨거든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있었던 일이에요. 밤 11시쯤 학원을 마쳤어요. 아빠가 데리러 왔어요. 아빠 차를 타고 집에 가는데, 아빠가 말씀하실 때 너무 피곤해서 하품을 했어요. 아빠가 운전하다가 말고 제 뺨을 때렸어요. 아빠가 말하고 있는데 버르장머리 없이 하품을 한다고. 화나고 무섭고 슬펐어요. 집에 와서 엄마에게 말했어요. 두 분이 제 앞에서 싸웠어요. 아빠는 엄마를 또 때렸어요. 나 때문에 엄마가 맞았잖아요.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어요.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내 답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요. 자매님은 자신의 신앙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믿지 않는 남자 친구를 사귀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계시고요. 나는 자매님이 처한 상황보다 믿지 않는 남자 친구를 만나면서 느끼는 죄책감이란 감정에 더 많은 관심이 있어요.
 
반대로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자매님의 신앙이 깊고, 믿음이 좋은 남자 친구를 만났다고 해보죠. 그러면, 외로움이 사라질까요. 아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아니에요.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아요. 외로움은 없애야 할 감정이 아니라 돌봐야 하는 감정이에요.
 
자매님은 외로움에 취약한 삶을 살아오셨어요. 폭력적인 아버지, 희생하는 어머니, 불안한 두 분의 관계. 자매님의 정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거예요. 고등학교 1학년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버지에게 맞았던 사실을 어머니에게 말했어요. 도움을 주려던 어머니 역시 아버지에게 맞았어요. 어머니는 자매님을 지켜줄 수 없었어요. 아마 그 후로는 자매님이 힘든 일이 있어도 어머니에게 말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조심스럽게 추론하는 거예요. 혼자 참고 견디는 것에 익숙해졌을 거예요.
 
나는 자매님의 신앙이 깊어지기를 바라고, 믿음 좋은 남자 친구를 만나기를 바라요. 하지만, 그전에 나는 자매님이 스스로를 정죄하지 않기를 부탁드려요.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그 누가 손가락질 할 수 있겠어요. 얼마나 외로우면 그러겠어요.   
 
불안정한 관계 속에서 자매님이 얼마나 고통받으며 살아왔는지 하나님도 알고 계세요. 하나님은 믿지 않는 남자 친구를 만났다고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니세요. 오히려, 하나님은 마음 아파하세요.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누구라도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자매님을 보시며 안타까워하는 하나님의 얼굴이 나는 보여요. 하나님은 자매님이 사랑받기 원하세요.
 
그렇다고, 아무나 만나라는 말은 아니에요. 가능하다면, 예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세요.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믿음 있다고 좋은 남자 아니고, 믿음 없다고 나쁜 남자 아니에요. 복음이 없다면 복음을 전해주세요. 복음이 있다면 복음을 공유하세요. 서로의 진심이 중요해요.   
 
신앙이 성숙하고 성경 지식이 많아져도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아요. 제아무리 믿음이 좋은 남자 친구를 만나도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아요. 그 누구도 자매님 안에 결핍을 채워줄 수 없어요. 외로움은 스스로 돌봐야 하는 감정이에요. 예수님의 사랑과 그분의 말씀으로 외로움을 돌봐주세요. 절대로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나같이 부족한 사람에게 질문해주셔서 감사해요. 외로운 당신을 하나님이 따뜻하게 안아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남자가 그리워요

이혼해서 아이들을 혼자 키우며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권유로 연애를 했고, 재혼 이야기까지 오고 갔습니다. 결국, 상대방 부모님의 반대로 관계를 정리했어요.
 
하지만, 저는 힘든 일을 겪고 나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두 달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서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어요. 남자가 그리워졌어요. 누군가 곁에서 날 안아줬으면 하는 바람이 점점 심해졌어요.
 
다른 싱글맘들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 친구들은 참지 말고 다른 사람을 만나라고 해요. 하지만, 저는 단지 성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가벼운 만남을 이어가는 게 성경적이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런 나 자신이 낯설어 운동도 열심히 하고 바쁘게 지내고 있지만, 혼자 있을 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럴 때마다 죄책감이 들어요.
 
사실, 저는 어린 시절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어요. 가족에게 말하지 못했어요. 아빠는 술주정, 외도로 엄마에게 고통을 주었어요. 오빠는 같이 어렸고 힘이 없다고 느껴지니까 도와줄 거란 기대 조차 없었죠. 전 남편은 결혼하고 얼마 후부터 외도를 하더니 결국 날 떠나서 그 여자랑 살아요.
 
민감한 주제라 답변을 피하고 싶었어요. 용기 내어 답변하는 이유는 자매님이 살아온 삶을 자세히 적어주셨기 때문이에요. 자매님은 지금 남자가 그리운 게 아니에요. 자매님을 보호해줄 사람이 필요한 거예요. 주장을 했으니 근거를 말해야겠죠. 제가 드리는 말은 추론에 불과해요. 제 이야기에 얽매이지 마시고, 하나의 견해로 받아들여주세요. 받아들일 만큼만 받아들이면 좋을 것 같아요.
 
자매님은 초등학교 때, 집에 놀러 온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했어요. 아빠는 술에 취해 잠든 상황이었고, 오빠는 자고 있었어요. 결국 아무도 도와줄 수 없었어요. 그 사실을 지금도 숨기고 있고요. 자매님은 엄청난 일을 당했지만, 가족에게 말하지 않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자매님을 보호해 줄 수 없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에요.
 
아빠는 가정 폭력, 외도로 엄마에게 상처를 줬어요. 어린 자매님은 아빠가 칼을 들고 엄마를 죽이려고 했던 장면을 목격했어요. 아빠가 어린 자매님을 보호해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초등학교 때, 오빠와의 일도 마찬가지예요. 자매님을 괴롭혔던 덩치 큰 아이가 나타났어요. 자매님은 오빠에게 일렀어요. 오빠는 어린 자매님을 보호해준다며 대신 싸워줬어요. 하지만, 졌어요. 두 사람은 민망한 채 말없이 집으로 돌아왔어요. 오빠 역시 자매님을 보호해줄 사람이 아니었어요.
 
전 남편은 잦은 외도 자매님에게 고통을 주었고, 결국 집을 나가 바람난 여자와 살림을 차렸어요. 자매님을 보호해주기는 커녕 상처를 주고 말았죠. 가슴 아픈 한 여자의 인생을 나는 보았어요. 그래서 외면할 수 없었고, 민감한 주제이지만 답변을 하게 되었어요.
 
자매님의 이야기가 진실이라면, 자매님은 지금 사랑받고 싶은 거예요. 보호받고 싶은 거죠. 성적인 만족을 원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 따뜻하게 안아줬으면 하는 거예요.
 
그 지점에 자매님의 결핍이 있어요. 남자를 원한다는 생각은 죄책감으로 이어지지만,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감정은 자연스러운 감정이에요. 그러니까 자신을 정죄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자매님을 온전히 사랑하세요. 지금까지 상처받으며 살아온 자매님을 보시며 하나님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요.
 
자매님은 보호해줄 사람 없이 최선을 다해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요. 누군가 찾아와 따뜻하게 안아주기를 바라는 건 자연스럽고 당연한 감정이에요. 다른 대안을 찾지 않는다는 점에서 올바른 방향을 잡았다고 생각해요. 과정은 힘들 거예요. 오래 걸려요.
 
자매님에게 부탁드리고 싶어요. 외로운 자신을 정죄하지 마시고, 돌봐주셨으면 해요. 외로운 건 자연스러운 거예요. 자매님은 누구보다 외로울 수 있어요. 외로울 때마다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고 안아달라고 말씀하세요. 자매님 안의 결핍을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채워달라 기도하세요. 예수님이 자매님을 끝까지 돌보시고 책임져 주실 거라고 믿어요. 자매님의 하나님은 정죄하는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매님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되어주셔야 해요.
 
다시 누군가를 만나기 원한다면, 솔직히 하나님께 기도해 보세요. 자매님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소중한 존재니까요.

차가운 목도리

연수는 멈칫했다. 
 
신중하게 내 표정을 살폈다. 나의 반응이 궁금한 것 같았다. 물 밖에서 물속의 깊이를 알 수 없듯, 연수는 내 속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나는 온화한 표정으로 기다렸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말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였어요. 학원 기사 아저씨가 있었거든요. 그 아저씨에게 순결을 잃었어요.” 
 
내가 멈칫하는 순간, 연수는 마치 내가 질문이라도 했다는 듯이 말했다. 
 
“왜 신고하지 않았냐고요? 그때 당시에는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주 잠시 동안이지만,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거든요.” 
 
학원 운행노선 끝자락에 연수의 집이 있었다. 학원차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집 앞에 머물렀다. 학원차가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집 안의 모든 불은 이미 꺼진 후였다. 그녀가 오기 전에 모두가 잠든 것이다. 
 
연수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기사 아저씨와 대화를 나눴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아무도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은 덕분에, 아저씨는 그녀의 대화 상대가 될 수 있었다. 대화는 점점 깊어졌다. 연수는 학원 아저씨와 단둘이 집에 가는 시간이 기다려졌다. 
 
아저씨는 연수의 생일을 기억했다. 텅 빈 차 안에서 그녀에게 생일 선물을 건넸다. 목도리였다. 아저씨는 연수에게 목도리를 둘러주고, 볼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연수를 끌어안았다.
 
한 시간이나 늦게 학원차가 집 앞에 도착했다. 아무도 깨어있지 않았다. 집에 도착한 연수를 맞이한 것은, 환하게 빛나는 생일 케이크이 아니었다. 적막한 어둠뿐이었다. 생일 저녁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연수의 순결을 목도리와 맞바꿨다는 사실을 가족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연수는 엄마에게 학원을 옮겨달라고 말했다. 엄마는 딸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지금 학원을 옮겨달라고?” 
 
연수는 엄마의 말 한마디에 감정이 상했다. “됐으니까, 알아서 하겠다”라고 말했다. 
 
연수는 더 이상 학원에 가지 않았다. 학교에서 가까운 독서실에 다녔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그녀는 목도리를 두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목도리로 목을 감싸자 온기가 느껴졌다. 
 
  연수는 목도리를 버리지 않았다.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10년이 지났지만, 연수는 그때의 사건과 감정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밤 제가 엄청난 실수를 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되돌릴 수 없어 슬펐고요. 집에 와서 침대에 누워 많이 울었어요. 내가 이런 일을 당했다는 사실에 슬펐고, 그런 일을 당했는데 싫지만은 않았다는 것이 슬펐어요. 저는 많이 외로웠거든요.” 
 
기사 아저씨를 다시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학원을 끊은 이유였다. 그러나, 사랑받은 기억은 소중했다. 아저씨의 따뜻한 표정, 친절한 말투가 그리웠다. 
 
목도리를 두를 때마다, 그녀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연수는 끔찍한 기억을 뒤로하고, 좋은 기억만을 간직했던 것이다. 
 
그녀는 10년이나 지나버린 일을 들춰내기 위해, 나를 찾아온 것일까? 
 
아니었다. 
 
연수는 엄연히 현실의 문제로 고통받았다. 
 
연수의 남자가 떠났다. 어떻게든 다시 만나고 싶은 것이 그녀의 바람이다. 
 
3개월이 지났다. 연락이 닿지 않았다. 전화는 물론이고 문자 역시 무시당했다. 그럴수록 그녀는 고통받았다.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다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과 말투에서 그녀의 상실감이 전해졌다. 그녀의 교제 기간은 6개월에 불과했다. 
 
4살 연상의 남자, 제준을 크리스천 데이팅 앱으로 만났다. 눈에 띄는 외모였다. 크리스천으로 진지하게 살아가려는 그에게 끌렸다. 지금까지 만나왔던 남자들과는 ‘뭔가 다르겠지’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만나온 남자들 중에 크리스천은 없었다.  
 
그동안 연수는 자신을 좋아해 주는 남자들과 사귀었다. “좋아한다, 사귀자”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설레었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보다, 나를 사랑해주는 남자와 사귀자.” 그녀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제준은 신중한 남자였다. 사귀자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우리 한 번 사귀어보면 어떨까요?” 
 
연수가 먼저 물었다.
 
그녀가 먼저 남자에게 사귀자고 말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가 대답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제가 헤어진 지 얼마 안 되었어요. 연수 씨를 정말로 좋아하는 건지, 외로움을 달래려고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연수 씨를 좋아한다는 확신이 들면, 제가 먼저 말할게요.”
 
그것으로 충분했다. 연수에게 제준은 사려 깊은 남자였다. 그날 이후 연수는 새벽예배를 다니면서, 제준과의 만남을 위해 기도했다. 그를 좋아하는 감정만큼 그녀의 기도 역시 간절했다. 
 
크리스마스 이브, 제준은 연수와 함께 했다. 그가 사귀자고 말했을 때, 연수는 눈물을 흘렸다. 외로움으로 고통받았던 아픔을 한꺼번에 보상받는 듯했다. 
 
두 사람은 그날 밤 함께 했다. 연수는 죄책감을 느꼈지만, 곧 결혼할 사이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연수에게 제준은 완벽한 남자였다. 하루하루가 행복할 뿐이었다. 자신 안의 상처를 온전히 이해줄 사람이라고 믿었기에, 언젠가는 진실을 말해도 괜찮을 것이라 믿었다. 
 
“나 사실 오빠에게 말 못 할 비밀이 있어. 오빠가 감당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속이고 결혼하고 싶지는 않아.” 
 
연수는 목도리에 대해 말했다. 
 
제준의 반응은 태연했다. 그는 “괜찮다”라고 말했다. 
 
연수는 홀가분했다. 제준은 몇 마디 말로, 연수를 위로했다. 평소처럼, 둘은 함께 식사하고 커피를 마셨다. 단 하나의 절차만이 생략되었다. 그날 밤, 제준은 연수를 안아주지 않았다. 
 
그날 이후 일주일 동안, 연락이 되지 않던 제준이 연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시간 되면, 잠깐 만나서 이야기 좀 하자.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연수는 제준의 무뚝뚝한 목소리에 당황했다. 손이 떨리고 가슴이 답답해 더 이상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말하고 일찍 회사를 나왔다. 
 
그녀가 찾은 곳은 병원이 아니라, 그를 만나기로 한 카페 근처 공원이었다. 숨을 쉴 수 없었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던 그녀는 하염없이 산책로를 걸었다. 
 
“나 도착했어. 어디야?” 
 
카페에 먼저 도착한 제준이 전화를 걸 때까지, 연수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공원을 누볐다. 땀으로 화장이 망가져 버렸다. 공원 화장실에서 얼굴을 대충 고치고, 제준의 앞에 앉았다. 
 
그녀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제준이 말했다. 
 
“나 오래 생각해봤는데, 우리 그만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으면, 네가 오해할까 싶어 만나서 직접 설명하고 싶었어. 
 
목도리 사건,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것 때문에 헤어지는 건 아니야. 오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너를 만나는 동안, 계속 생각해봤는데 내가 아직 이별에 대한 상처가 있는 것 같아. 너를 정말로 사랑한 건지, 아니면 내가 외로워서 너를 만난 건지 판단이 안 서거든. 
 
사랑해서 사귄 거라고 믿었는데, 점점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어. 더 늦기 전에,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정말 미안해.” 
 
연수는 침묵했다. 
 
연수의 침묵이 불안했는지, 제준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  
 
“연락은 계속해도 되는 거지?” 
 
“그건 너 편할 대로 해. 그게 전부야?” 
 
제준은 당황한 듯 말했다. 
 
“응, 그게 전부야.” 
 
그러나, 제준은 연수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아마 제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궁금하실 거예요. 저는 솔직히 이별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어요. 연락이라도 받아주면, 언젠가 기회가 다시 있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연수는 제준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 같았다. 
 
연수에게 제준은 이상적인 남자로 왜곡되어 있다. 그러나, 상식적인 관점에서 제준은 이상적인 남자가 아니라 이상한 남자다.  
 
제준이라는 남자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자기 외로움을 달래려 연수을 선택했고, 그녀가 자기 기준에 맞지 않자 자기 외로움을 핑계로 그녀를 버린 것이다. 
 
처음부터 그에게는 연수을 진지하게 만나려는 의도가 없었을지 모른다. 제준은 본능적으로 연수가 취약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사귀자고 말한 첫날 그는 연수를 안았다. 사귀는 것과 자는 것, 어쩌면 그에게 같은 의미였을지도 모른다. 
 
목도리 사건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도 거짓처럼 보였다. 연수가 비밀을 털어놓은 그날 밤, 그는 연수를 안아주지 않았다. 심경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연수의 비밀을 알게 된 순간, 그가 마음을 닫지 않았을까? 
 
그의 말과 행동에서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제준이 무슨 자격으로 그녀의 상처를 이해하고 말고를 결정할 것인가? 
 
그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떠났다. 연수는 상처의 늪에 빠져버렸다. 취약한 그녀가 더욱 취약해진 것이다. 
 
나는 제준에게 한 마디 말도 건넬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그녀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과거로 돌아가자. 그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어떤 인생을 살았는가. 무엇이 그녀를 취약하게 만든 것인가. 목도리 이전의 사건들을 알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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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친년은 왜 여기 서 있어. 걸리 적 거리게.” 
 
할머니는 분을 못 참고, 어린 연수의 뺨을 후려쳤다. 
 
“왜 애한테 화풀이를 하세요!” 
 
그녀의 엄마가 할머니에게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격한 몸싸움을 했다. 
 
연수의 나이 여섯 살, 잊을 수 없는 기억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가족은 친할머니 댁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져서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기 가족을 어머니에게 맡겨놓고 밤늦도록 일에 매달렸다. 고부 갈등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버지가 밤늦도록 일에 매달리는 사이, 집안은 아수라장이었다. 할머니는 아들에 대한 분풀이를 며느리에게 쏟아부었다. 엄마는 질세라 할머니에게 덤벼들었다. 엄마의 잘못이라면, 무능한 남자와 결혼한 것뿐이었다. 
 
그녀의 엄마와 할머니가 격하게 다투는 날이면, 살림살이가 허공을 날아다녔다. 어린 그녀는 방구석에 움츠러들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울었다. 한바탕 소동이 나면, 어린 그녀는 엄마에게 다가가 엄마 무릎에 앉았다. 
 
딸을 안아줄 여유가 없었던 엄마는 연수을 땅에 내려놓고, 뒤돌아 앉았다. 
 
엄마가 뒤돌아 앉은 날이면, 그녀는 할머니 감정이라도 풀어보려는 듯, 할머니를 주변을 서성거렸다. 할머니는 그녀를 차가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그런 날의 반복이었다. 
 
감정이 사그라들지 않았던 할머니는 며느리가 보라는 듯이 어린 손녀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어린 그녀는 균형을 잃었다. 옆으로 주춤거리며 몇 발을 내딛다,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엄마가 할머니에게 달려들었다. 할머니는 엄마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아무도 말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엄마와 할머니, 두 사람이 체력이 다해 스스로 멈출 때까지 싸움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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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그녀의 볼에 파란 멍이 들었다. 선명하게 손바닥 자국이 새겨졌다. 
 
어린 연수가 말했다. 
 
“엄마, 나 오늘 어린이집 안 가면 안 돼? 너무 창피해.”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수의 머리카락에 빗질을 하며, 머리카락을 바짝 묶어 올렸다. 
 
“엄마, 머리 너무 세게 묶지 마. 아프단 말이야.”  
 
아프다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엄마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딸의 머리카락을 끌어 머리 한가운데서 세게 묶었다. 
 
엄마가 같이 나갈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엄마의 눈치를 살피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나 오늘 안 데려다줘?”  
 
엄마의 표정은 차가웠다. 파리를 내쫓는 손동작으로 그녀를 밖으로 내보냈다. 
 
연수는 혼자 주섬주섬 신발을 신었다. 마당을 지나 대문을 나서자, 또래 친구들이 각자의 엄마와 함께 공터로 모여들였다. 곧 어린이집 차량이 도착할 시간이었다. 
 
혼자 멍하게 서 있던 그녀에게, 옆집 아줌마가 깜짝 놀라 물었다. 
 
“어머, 너 얼굴이 왜 그러니?” 
 
연수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머, 어른들이 때렸니?” 
 
연수는 가만히 고개를 끄떡였다. 옆집 아줌마는 충격을 받은 듯, 멈칫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누가?” 
 
“할머니….” 
 
“할머니가?”
 
연수는 파랗게 멍든 볼을 손으로 숨기고, 고개를 끄떡였다. 
 
옆집 아줌마는 그럴 리 없다는 듯, 화들짝 놀랐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옆집 아줌마의 반응에, 연수의 등골이 오싹했다. 
 
여섯 살 아이가 섬뜩한 생각을 하고 만 것이다. 어쩌면 엄마는 일부러 머리를 묶어 올렸을지 모른다. 그녀의 볼에 새겨진 선명한 멍 자국을 온 동네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작은 마을에서 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던 할머니는 후한 인심으로 평판이 좋았다. 사나운 며느리를 만나 노년이 불행해졌다는 소문이 마을에 돌았다. 
 
마을 사람들이 엄마를 바라보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녀의 볼에 새겨진 멍 자국은 그녀의 할머니가 얼마나 지독한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그날 밤, 할머니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엄마에게 달려들어 엄마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네가 무슨 짓을 했길래, 동네 사람들이 나를 개처럼 쳐다보는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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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아픈 과거를 회상하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 지난 일이라는 듯,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할머니는 독했어요. 제가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 엄마를 들들 볶았죠. 엄마는 우울증이 분명했어요. 
 
중학교 2학년 때쯤인가, 아빠와 같이 살게 됐어요. 아빠도 자기 나름대로 악착같이 산 거죠. 사업으로 돈을 조금 번 것 같았어요. 
 
할머니 집에서 벗어나 엄마 아빠랑 살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완전한 착각이었죠.”
 
“아빠, 자꾸 어디 가?”
 
“잠시만, 아까부터 계속 전화가 와서….” 
 
아빠는 저녁을 사준다며, 연수가 다니는 학원 앞으로 찾아왔다. 아빠가 평소와 달라 보였다. 아빠는 연수의 눈치를 살피며 계속 밖으로 나가 전화 통화를 했다. 
 
아빠가 다시 와서 앉았을 때, 연수가 물었다. 
 
“아빠, 혹시 엄마 몰래 만나는 여자 있어?” 
 
아빠는 정색을 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뜬금 없이….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 
 
“아빠 오늘 평소와 다른 거 알지?” 
 
철없는 아빠는 딸에게 비밀을 털어놓았다. 
 
“사업하다가 잠시 만난 여자가 있는데, 이상하게 자꾸 연락을 해. 아빠가 외로울 때, 잠시 만났던 사람이야. 이제 엄마랑 같이 사니까, 아빠가 알아서 정리할게. 그때까지 엄마한테는 비밀이다. 꼭 비밀 지켜야 해.” 
 
그녀의 눈에 비친 아빠는, 덩치만 큰 철부지 어린애였다. 아빠가 없는 동안, 엄마와 딸이 흘린 눈물, 고통스러운 날들은 새로 장만한 아파트로 만회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연수는 아빠의 비밀을 엄마에게 말할 수 없었다. 함께 산지 일 년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엄마와 아빠가 헤어진다면, 이제 돌아갈 곳도 없었다. 
 
그녀는 침묵을 선택했다. 
 
며칠 후, 엄마가 연수에게 심문하듯 물었다.
 
“너 알고 있었지?”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뭘?” 
 
“아빠 말이야. 다른 여자 만나는 거 알고 있었잖아?” 
 
“아빠가 그래?” 
 
“알고 있었네. 엄마한테 왜 말 안 했어?” 
 
“말하면 어떻게 되는데?” 
 
엄마는 말 대신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그걸 말이라고 해. 미리 말했으면, 엄마가 가만히 있었을 것 같아?” 
 
연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왜 나한테 그래?”
 
“너도 똑같아. 하는 짓이 어떻게 그렇게 아빠를 닮았니?” 
 
연수는 참을 수 없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연수가 대들자, 엄마는 미친 사람처럼 오열하며 살림살이를 부수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 들고, 연수에게 던졌다. 
 
삐리릭. 
 
아빠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난장판이 된 거실 한가운데 서서 아내에게 말했다. 
 
“이 여자가 미쳤나.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아빠가 순간 멈칫했다. 입이 바짝 말랐다. 연수을 바라보며, 궁색하게 물었다. 
 
“연수아, 너 엄마한테 말했니?” 
 
연수는 폭발했다. 
 
“그래. 내가 말했다. 뭐 어쩔래! 왜 전부 나한테만 지랄이냐고!” 
 
엄마는 남편을 쏘아보고, 돌아서서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빠가 연수에게 말했다.   
 
“이런 미친년. 아빠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아빠가 오해라고 했잖아. 아무 일도 없었다고 몇 번을 말했어? 계속 연락을 해서, 아빠도 힘들다고 말한 거잖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엄마에게 말하면 어떻게 해? 널 믿은 내가 바보지.” 
 
그녀의 아빠는 굳게 닫혀버린 안방 문 앞에서, 엄마에게 사정하듯 말했다.   
 
“여보, 오해야. 정말 오해라고. 내가 설명할게. 문 좀 열어 봐.” 
 
연수는 견딜 수 없었다. 집을 뛰쳐나갔다. 텅 빈 운동장 한 귀퉁이에 앉아 엎드려 하염없이 울었다. 
 
“아직도 두 분은 저를 오해하고 있을 거예요. 나 때문에 이혼할 뻔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죠. 오해를 바로잡고 싶지도 않아요. 저는 그냥 두 분이 한심하다고 생각거든요.
 
엄마도 아빠도, 제가 어떻게 되든 상관 안 하셨어요. 학교 보내주고, 학원 보내주고. ‘그거면 됐지’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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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과거에서 나는 치명적인 손상을 발견했다. 그녀는 거절과 비난을 반복적으로 경험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면서, 다른 누군가가 내다 버린 감정은 고스란히 마음에 담는다. 받아들이면 절대로 안 되는 감정조차, 그녀는 거부할 수 없다.
 
제준은 자신 안의 외로움을 연수라는 존재로 달랬다. 안전한 방식으로 자신 안의 욕구를 채우고, 연수을 버리고 떠났다. 
 
학원 운전기사 역시 마찬가지다. 어린 연수의 취약함을 이용해, 자신의 욕구를 채웠다.  
 
그녀는 평생 목마른 사람처럼, 사랑을 구걸하며 다닐지 모른다. 자기 아닌 모습으로 살아가면서, 남이 베푸는 작은 호의에 마음이 끌리고,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에게 의지해 살아갈지 모른다. 
 
평생을 외로움으로 허덕였던 그녀의 삶을 어떻게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상담이 어떻게 끝나게 될지 예측할 수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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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멍이 들어, 혼자 어린이집 버스를 기다리는 어린 연수가 기억나세요?”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기억나요.” 
 
“어린 연수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요?”
 
“글쎄요…. 아마도 외로움이 아닐까요?”
 
“조금 더 자세히 말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냥 공터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아이가 불쌍해 보이거든요.” 
 
“그렇군요. 그럼, 이제부터 나와 잠시 역할극을 해 볼 거예요. 조금은 어색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주세요.” 
 

 
나는 혼자 공터에 서 있는 어린 연수에게, 현재의 연수를 데리고 갔다. 나는 어린 연수를 역할을 맡았고, 그녀는 현재의 자신이었다. 
 
나는 어린 연수의 입장에서, 당시의 상황과 감정을 설명하고, 현재의 연수에게 “도와달라”라고 말했다. 
 
현재의 연수는 어린 연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어린 연수를 위로해줄 말이 단 한 마디도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상처 입은 자신을 공터에 버려두고 방치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상처 입은 자신과 마주한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작업을 중단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지금 무엇이 스쳐 지나갔죠?”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터에 혼자 서 있는 아이에게 아무 말도 못 해주고, 그 옆에서 서서 울고 있는 나를 발견했어요.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로 모르겠어요.”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의 말속에 깊게 배어든 절망감이 내게 전해졌다. 
 
나는 그녀를 그리스도에게로 데려가야 했다. 
 
“다시 한 번 작업을 시도할 거예요. 지금처럼 솔직하게 반응해주시면 돼요. 그럼, 시작해 볼게요.”
 
나와 그녀 사이에 그리스도가 계시듯, 상처 입은 그녀와 현재의 그녀 사이에도 그리스도가 계시다. 
 
현재의 그녀가 어린 연수를 그리스도에게 데려다준다면,  그녀는 예수님께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나는 정말로 궁금했다. 
 
그녀는 어렵게 첫 마디를 꺼냈다. 
 
“예수님, 이 아이는 어린 시절 저예요.” 
 
그녀의 감정이 요동쳤다.  
 
“저는 상처가 많아서, 도저히 연수를 돌봐줄 수 없어요. 이십 년이 지나도 연수는 스스로를 돌볼 수 없어요. 너무 불쌍한 아이에요. 
 
제가 치유돼서 연수를 돌볼 수 있을 때까지, 예수님이 대신 돌봐주시면 안 돼요? 
 
예수님이 연수를 잠시만 맡아주세요. 제가 치유되면… 어린 연수를 찾으러 올게요….” 
 
그녀는 오열하며 울었다. 
 
그녀의 마지막 말에, 나 역시도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내가 들고 있던 노트에 눈물이 투두둑 떨어졌다. 그녀의 말을 받아 적던 메모가 번졌다. 
 
나는 잉크가 번져나가는 노트에 시선을 고정하고, 그녀가 마음껏 울도록 충분한 시간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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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감정이 차분해졌을 때, 나는 다시 물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할 때, 예수님의 표정이 어떠셨나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그녀가 만난 예수님은 말로 다할 수 없이, 따뜻했다. 정서적, 신학적으로 온전한 예수님이셨다. 
 
내가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었다.
 
그녀가 말했다.  
 
“내가 나를 돌보지 못할 때에도, 나를 돌봐줄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 같아요. 
 
상처 입은 나를 예수님께 데려다줄 수 있다니, 그 자체만으로 안심이 돼요. 
 
지금까지 나는, 다른 누군가를 끊임없이 찾아다녔거든요.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치 마약에 중독된 사람처럼 끊을 수 없었어요. 
 
말씀해주신 대로, 상처에는 완치가 없다는 말에 동의해요. 과정이 쉽지는 않겠죠. 
 
하지만, 이제부터, 저는 나 자신을 돌볼 거예요. 절대로 공터에서 혼자 울게 내버려 두지 않으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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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스러운 감정이 밀려들었다. 
 
나는 그녀가 부러웠다. 
 
역설적인 상황이었다. 
 
나는 그녀와 똑같은 성경을 읽고, 똑같은 예수님을 믿는다. 그러나, 나의 예수님은 그녀처럼 따뜻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그녀보다 지식적으로 예수님을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성경 구절을 외우고, 더 많은 시간 기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따뜻함에 관한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누구를 원망하겠나. 아무도 원망할 수 없다. 내가 살아온 인생이었다.  
 
그녀와 똑같은 방식으로 나는 상처 입은 나 자신을 예수님께 내어 맡긴다. 
 
좁고 어두운 방 안에 홀로 갇혀 매질을 당하는 아이는 삼 십 년이 지나도, 두려움에 떤다. 
 
사라지지 않는 두려움으로 평생을 고통받는 아이는, 여전히 두려운 채로 상담실 안에 머문다. 
 
좁고 어두운 방 안에, 자신을 만나주셨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을 직접  다시 만날 때까지 좁고 어두운 방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나의 예수님은 따뜻하지 않아도, 상처 입은 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따뜻하시다. 나는 같은 공간에서 따스한 온기를 느낀다. 
 
내가 상처 입은 한 사람을 저버리지 못하는 이유다. 어쩌면, 나는 예수님께 사랑받기 위해, 상처 입은 한 사람을 마주하는 것이다. 
 
나는 따뜻한 예수님이 미치도록 그립다.

당신의 눈빛이 무서워서 그랬어

“내가 힘들다고 말하면 날 위로해줘야지. 왜 당신이 더 힘들어 해? 당신을 괴롭히고 있는 느낌이야.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U는 남편 회사 때문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이사 와서 고립된 삶을 살고 있었다. 유일하게 바라보고 의지할 사람은 남편뿐인데 답답하고 힘든 일을 말하면 그는 외면했다. 
 
“여보, 내가 미안해.” 
 
남편이 말했다. 아내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남편은 작은 목소리로 아내를 다독이며 말했다. 아내는 남편 손을 뿌리쳤다. 가벼운 이야기는 주고받았지만, 조금이라도 진지해지면 남편은 대화를 거부했다. 그녀가 서운하다고 하면, 그는 힘없는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전부였다. 아내는 점점 힘이 빠졌다.  
 
“제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커지면 남편이 위축되는 것 같아요. 미안하다는 말로 상황을 빨리 마무리하려고 하죠. 얼마 전에 너무 화가 나서 남편에게 소리쳤어요. ‘여보! 제발 그렇게 미안하다고 말하지 마. 비난을 하려는 게 아니라 당신과 대화하고 싶은 거라고. 당신, 정말로 내가 무서운 거야? 말해줘!’라고요.”
 
남편은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무능했다. 술 취해 들어와 집안 살림을 수시로 때려 부수며 행패를 부렸다. 어머니는 삼형제를 키우면서 온갖 고생을 다했다. 그에게 아버지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그는 거친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다. 친구들 사이에서 제법 주먹을 쓴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몸집이 커지면서 따르는 친구들도 늘어났다. 어느덧 아버지보다 덩치가 커졌다. 아버지보다 힘이 셌지만 덤비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여전히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화가 나면 밥상머리에서 따귀를 때리거나 물건을 집어던졌다. 아버지에게 대들 생각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심장이 빨리 뛰고 손에서 땀이 났다. 아버지가 눈을 부릅뜨면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제대를 하고 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대들었다. 친구들과 정신없이 놀다가 밤늦게 집에 들어간 날이었다. 어머니의 눈이 파랗게 멍들어 있었고, 입술은 터져 피가 흥건했다. 순간 그는 이성을 잃고 아버지의 멱살을 잡았다. 아버지는 움찔 놀라더니 곧 그의 멱살을 잡고 따귀를 때리기 시작했다. 넘어진 그에게 발길질을 허서 온갖 욕을 퍼부었다. 
 
“이 후레자식이 아버지 멱살을 잡아? 어떻게 하려고? 어디 해봐! 넌 벼룩도 네 손으로 못 죽여. 이 겁쟁이 자식!”
 
그는 어머니 옆에 주저앉아 울었다.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다.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면서 주먹으로 벽을 쳤다. 문짝 하나를 손으로 다 때려 부수고 집을 뛰쳐나왔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겁먹은 눈동자를 보았다. 
 
그날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눈을 피했다. 점점 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는 괴로웠다. 차라리 자신이 따귀를 맞는 것이 나았다. 아버지를 비참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을 느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집을 나와 따로 살았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미안함이 복잡하게 얽혀 정리되지 않은 채 살아가던 어느 날, 그는 아내를 만났다. 
 
1년 동안 연애를 한 후에 결혼했다. 처음으로 부부싸움을 한 날, 아내는 대화가 잘 되지 않자 남편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날 그는 아내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자존심 때문에 표현하지 못했지만 아내가 소리를 지르면 머리가 텅 비어버렸다. 심장이 빨리 뛰고 손에서 땀이 났다. 
 
그의 큼지막한 손과 다부진 어깨도 그 두려운 감정을 몰아내지 못했다. 화난 아내가 아버지처럼 보였다. 아내 눈빛이 그를 짓눌렀다. 그래서 아침에 아내가 깨기 전에 조용히 집을 나섰다. 그녀의 눈을 보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싸우고 싶지 않아요. 아내 눈빛이 무서워서.” 
 
***
 
트라우마trauma, 남편 가슴 깊이 새겨진 상처이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코끼리 말뚝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서커스단에서 코끼리를 길들일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새끼 코끼리 목에 줄을 건다. 말뚝에 그 줄을 묶는다. 새끼 코끼리는 목에 감긴 줄에서 벗어나려고 애쓴다. 소용없다. 지친 코끼리는 포기한다. 땅에 주저 않아 순응한다. 코끼리 몸집이 커지고 힘이 세진다. 나무를 들이받으면 나무가 쓰러지고, 코로 나무를 들어 올리면 뿌리째 뽑힌다. 아무리 힘이 세도 코끼리는 말뚝을 뽑아 올릴 생각을 못한다. 어릴 때의 기억 때문이다. 땅에 박힌 말뚝은 코끼리 내면에 영향을 미친다.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었어.’ 
 
남편에게 일어난 일이다. 어린 시절 학대 경험은 성인이 된 후에도 영향을 미친다.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의도적인 노력을 해야 벗어날 수 있다. 말뚝을 뽑아 올리려면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학대로 인한 트라우마는 개인의 내면 안에서 영상처럼 반복된다. 극장 의자에 꽁꽁 묶인 채,  끔찍한 영화의 한 장면을 반복해서 보는 것처럼. 고개를 돌려도 소리가 들리고, 눈을 감아도 그 장면이 떠오른다. 트라우마 징후이다. 남편은 아내와 다툴 때마다 아버지로 인한 상처가 떠오른다. 
 
아버지와 아내, 두 사람은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남편은 아내보다 힘에 세고, 목소리도 크다. 상관없다. 그의 두려움은 아내를 통해 반복되고 있다. 반복을 멈추려면, 반론을 제기해야 한다. 
 
‘무서운’ 감정은 ‘무능한’ 감정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대처할 힘이 없을 때, 사람은 무섭다. 눈앞에 꼬마가 장난감 칼을 들고 휘두르면 무섭지 않다. 마음만 먹으면 꼬마를 제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수부대 요원이 칼을 들고 찌를 자세를 취하면, 무섭다. 무서워서 두 다리가 떨린다.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무능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대상에 무서움을 느낀다. 어떤 사람은 카드빚이 무섭다. 과거에 카드빚을 갚지 못해 고생했다면, 신용카드를 쓰는 게 무서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새로운 이성을 만나 사귀는 게 무섭다. 과거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다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무서울 것이다. 
 
무서움을 이겨내려면 무서움의 대상을 정면으로 바라봐야 한다. 나와 그 대상을 비교한다. 누가 더 힘이 센가 객관적으로 따져 본다. 전력을 비교해 보는 것이다. 유치한 짓이 아니다. 코끼리를 묶은 말뚝을 뽑아내고 싶다면, 말뚝을 잡고 흔들어봐야 한다. 얼마나 단단하게 박혀있는지 확인해 본다. 잡아서 흔들어보면 안다. 뽑아 올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어린 시절 남편은 아버지의 학대를 벗어날 능력이 없었다. 지금은 아니다. 더 이상의 학대는 없다. 그가 벗어나지 못한 건 두려움이라는 감정이다. 학대는 사라졌지만 두려움을 남겼다. 벗어날 방법이 있다. 
 
가까이 가서 잡고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흔들어 보는 것이다. 코끼리 말뚝을 잡고 흔들듯이 두려운 감정을 잡고 흔든다. 앞뒤 좌우로 흔들다보면 흙이 밀리면서 공간이 만들어진다. 원심력을 이용해서 말뚝을 뱅뱅 돌리면 공간이 넓어진다. 손힘이 뿌리까지 닿으면 말뚝은 뽑힌다. 
 
남편은 혼자가 아니다. 아내가 도울 수 있다. 아내는 말뚝이 아니다. 남편을 속박하는 사람이 아니라 돕는 사람이다. 말뚝을 뽑으려 하는 손에 힘을 보탤 수 있다.   
 
모든 사람은 결핍이 있다.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욕구를 느낀다.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건, 자신 안에 결핍을 보상해줄 사람일지 모른다는 희망 때문일 것이다. 남편에게 아내는 결핍을 채워줄 사람이다. 부부 사이 갈등은 주로 배우자가 가진 결핍에서 비롯된다. 
 
그 결핍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지만 실재한다. 그것을 채워달라고 배우자에게 호소하고 강요하면서 서로에게 고통을 준다. 부부가 절망에 빠지는 이유다. 그러나 이것은 곧 기회다. 배우자가 고통을 호소하는 문제 속에 배우자가 바라는 욕구가 숨어있다. 
 
배우자가 지속적으로 고통을 호소한다면 귀를 기울여 진심을 알아봐야 한다.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배우자가 채워줄 수 있다. 아내가 두려움에 떠는 남편을 이끌어 줄 수 있다는 뜻이다.  
 
아내여, 남편은 나쁜 사람이 아니다. 결핍이 있는 사람이다. 겁먹은 소년이 당신 품에 안겼다. 사내로 키워라. 참고 견뎌라. 그가 진정한 남자가 되면 넓은 가슴으로 당신을 안아줄 것이다. 당신을 사랑하고 보호해줄 것이다. 포기하지 마라. 그날이 멀지 않았다.
 
소년이 치유되면 남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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