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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수치심

당신이 수치스러워

“남편에게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요. 그를 믿었거든요.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 착각이었죠. 결혼 생활이 파탄 나고 있어요.” 
 
결혼 3년 차, 아이는 없었다. 부부 침실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남편과 성관계를 원하지 않았다. 연애를 포함해서 지금까지 한 번도 남편이 원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본 기억이 없다. 그녀에게 성관계는 고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이를 갖고 싶어서 배란일에 맞춰 의무적으로 한 번씩 관계를 맺었다. 서로 사랑해서가 아니라 부모가 되기 위해 치르는 행사가 되어버렸다. 남편은 아내를 안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아내는 계속 거절했다. 남편의 집착은 심해졌다. 
 
그럴수록 아내는 남편을 밀어냈다. 해야 할 일이 있다는 핑계로 남편이 잠들면 옆에 누웠다. 그가 안으려고 하면 피곤하다며 돌아누웠다. 
 
결혼하고 세 달이 넘도록 성관계를 하지 못한 남편이 화를 냈다. 아내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한 그가 집요하게 이유를 물었다. 어떤 말을 해도 괜찮다는 말로 아내를 안심을 시키며 끊임없이 캐물었다. 아내는 남편의 추궁을 견디다 못해  숨겨둔 비밀을 말했다. 남편에게 버림받지 않을까 두려워 꽁꽁 감춰두었던 이야기를.
 
대학에 입학하여 남자친구를 만났다. 기독교 가정에서 보수적으로 자란 그녀는 혼전순결을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남자친구를 사귀어도 결혼 전에는 성관계를 맺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혼자만의 결심으로 순결을 지켜낼 수 없었다. 그녀와 남자친구는 선을 넘었다. 죄책감이 밀려왔다. 
 
결국 그와 헤어지게 되었다. 죄책감이 직접적인 이유는 아니었지만 그것이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을 가져왔고, 그녀가 남자친구를 밀어내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 남자친구와 헤어진 다음에 발생했다. 그가 스토커처럼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가 혼자 자취하는 집으로 계속 찾아왔다. 
 
어느 날, 그가 술에 취해 현관문 앞에 엎드려 있었다. 그녀가 집에 보내려고 일으켜 세우는 순간, 그의 애원이 시작되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을 테니까 잠깐만 대화를 하자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집으로 들였다. 집에 들어선 남자친구는 이성을 잃었다. 강제로 그녀와 성관계를 맺었다. 그녀는 울면서 경찰서로 향했다. 그는 처벌받았다. 
 
그녀는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어 다닐 수 없어 휴학을 하고 배낭여행을 떠났다. 모든 상처를 먼 곳에 가서 털어내고 싶었다. 배낭여행에서 돌아온 그녀는 아픈 과거를 뒤로 하고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서른두 살에 남편을 만났다. 그는 그녀보다 두 살 어렸지만 책임감이 강하고 듬직했다. 1년 남짓 연애를 하고 결혼했다. 연애 시절, 남편이 그녀를 안고 싶어 할 때마다 그녀는 마음 속 거부감을 숨기고 말했다. 혼전순결을 지키고 싶다고. 
 
그 말을 하며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이미 더럽혀진 몸’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지워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비밀을 들은 남편은 충격에 빠졌다. 
 
“수치스러워. 당신이 얼마나 처신을 잘못했으면 그런 일을 당했겠어! 당신에 대한 모든 신뢰가 무너졌어.” 
 
예상과 다른 남편의 반응에 아내 역시 충격에 빠졌다. 아프고 힘든 상처를 솔직히 털어놓고 나서, 그녀는 일시적인 해방감을 느꼈다. 죄책감이 잠시 사라진 기분이었다. 그러나 남편이 그녀에게 내뱉은 말이 더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날 밤, 남편에 대한 모든 신뢰가 무너져 내렸다.
 
남편은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 대해 집요하게 물었다. 그때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 왜 그 남자를 집으로 들어오게 했는지, 그에게 은근히 안기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왜 미리 경찰서에 신고하지 않았는지. 그녀가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없었다. 남편은 구간반복 기능이 켜진 녹음기처럼 반복했다. 
 
그녀는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불면증도 찾아왔다. 일주일에 이틀은 수면제를 복용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하루도 편하게 잠들 수 없었다. 진실을 말해버린 이후, 마치 지옥에 떨어진 것 같은 고통이 시작되었다. 
 
남편에게 다시 신뢰를 얻기 위한 노력이 그녀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남편은 집안일에 사사건건 참견했다. 살림을 제대로 못한다고 구박을 하고, 돈을 허튼 데 쓴다며 견딜 수 없는 잔소리를 하기 시작되었다. 가장 힘든 것은 그녀의 부모에 대한 비난이었다. 친정 부모님에 대한 거침없는 욕설은 기본이었다. 
 
그녀는 모든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그가 이해해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잘못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고, 과거는 바꿀 없으므로. 남편에게 그 기억을 지우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니까. 
 
“남편에게 말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차라리 남편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전 혼자 살았어야 했나 봐요. 괜히 결혼해서 한 남자의 인생까지 망쳐버린 기분이에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남편을 놔줘야죠.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지만 생각할 게 많네요. 사람이 미쳐버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아요.” 
 
***
 
남편에게 신뢰를 얻으려 노력할수록 그녀는 더욱 비참해질 것이다. 노력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녀가 성폭행 당한 것은 바꿀 수 없다. 일어난 일을 일어나지 않았던 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꿀 수 있는 것은 그 사건이 아니라 그에 대한 관점뿐이다. 그 사건에 대한 관점이 왜곡되어 있다. 두 사람 모두 그 관점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계속 고통 받게 될 것이다. 
 
남편은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피해자가 아니다. 아내가 겪은 고통을 올바른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그는 또 다른 가해자가 된다. 이미 그는 성폭력을 당한 아내에게 언어폭력을 가하고 있다. 
 
바로 잡지 않으면 더욱 심각한 문제로 발전할 것이다. 강박증이나 의처증으로 발전한다면 남편은 자신의 삶뿐 아니라 가정도 파괴할 수 있다. 그의 왜곡된 관점은 왜곡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수치심이다. 그는 아내에게 “수치스럽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아내가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이 그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가 느낀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자신의 아내는 그런 일을 겪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아내가 그런 수치스런 일을 겪을 수 있는가!’ 
 
이 감정은 남편의 지나친 자기애의 부작용이다. 세상에 나쁜 감정은 없지만 남편이 느끼는 수치심은 정당하지 못하다. 왜곡된 인식이 왜곡된 감정을 만들었다. 
 
남편이 아내를 바라보는 관점을 문장으로 표현해보자. 
 
“내 아내가 성폭행을 당했다니, 수치스러워. 분명 아내가 사건에 빌미를 제공했을 거야. 틈을 주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겠지. 술 취한 남자친구를 집 앞에서 발견했을 때, 왜 신고하지 않고 집으로 데리고 들어간 거야? 그 상황을 견딜 수 있는 남자가 어디에 있어? 그도 피해자 아니야? 전과자가 되었으니. 나도 망가져 버렸어. 도저히 이 여자와 살 수 없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남편을 망가뜨리는 사람은 아내가 아니라 그 자신이다. 남편이 바라보는 관점이 자신을 파괴한다. 아내는 가해자나 공범자가 아니다. 피해자다. 남편의 여동생이 성폭행을 당했다고 해도 똑같은 생각과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아닐 것이다. 
 
모든 분노는 가해자에게 집중될 것이다. 여동생은 피해자일 뿐이다. 누군가 남편에게 “처신을 못했네. 그 시간에 남자를 왜 만나? 그것도 짧은 치마를 입고. 그러니 그런 일을 당하지”라고 말한다면 그는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날릴 것이다. 그런데 남편은 그 끔찍한 말을 아내에게 끊임없이 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아내 역시 그 사건의 트라우마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침실에서 일어난 일이 그 증거다. 그녀가 사랑스러워 안아 주려는 남편의 손길을 거부했다. 남편과 결혼할 때, 아내는 “과거에 겪은 사건은 과거일 뿐이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잊고 싶은 과거이기 때문에 잊으려 노력했을 것이다.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한 남자를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되었고, 결혼까지 결심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트라우마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트라우마는 지독히 끈질긴 녀석이다. 직면하지 않으면 일생 동안 따라다니면서 한 사람을 파괴한다. 
 
성폭행을 당한 후, 그녀는 별도로 치료를 받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그녀에게 치료가 필요하다. 트라우마는 오랜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치유되지 않는다. 
 
아내는 바꿀 수 없는 것에 집중하지 말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남편에게 신뢰를 얻기 위한 모든 노력을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 의미 없는 노력이다.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스스로가 비참해질 것이다. 목표를 바꾸자. 다시 신뢰를 얻으려 노력하지 말고, 남편을 상담실에 데리고 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 남편 스스로 바꿀 수 없는 생각이 있다. 그의 왜곡된 생각은 왜곡된 감정을 불러일으켜 아내에게 더 큰 상처를 주었다. 
 
기계처럼 순서대로 되는 일이 아니지만 그 중심에 검증되지 않고 객관적이지 않은 자기만의 생각이 있다. 그 왜곡된 생각을 노출시키지 않으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한 사람이 배우자를 바라보는 관점은 지독히 폐쇄적이며 개인적이다. 죽을 때까지 노출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남편을 빛으로 인도해라. 두려움을 떨쳐내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라. 
 
남편이여, 당신의 아내는 희생자다. 그녀가 원해서 벌어진 일이 절대 아니다. 당신 안에 재생되고 있는 구간 반복 녹음기를 꺼라. 버튼을 눌러도 멈추지 않는다면 밖으로 던져버려라. 그래도 소리가 들린다면 전문가를 찾아가라. 그에게 당신이 피해자라고, 수치스럽다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아내에게는 안 된다. 그녀는 당신이 싫어서가 아니라 상처 때문에 당신에게 안기지 못한 것이다. 불쌍한 여자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좋겠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

“엄마 자격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아이들을 보면 미안한 마음뿐이에요. 남편에게도 마찬가지죠.”  
 
K, 그녀는 서른세 살, 두 아이의 엄마이다. 남편은 그녀보다 열 살 이상 나이가 많다. 그는 젊은 시절 유통 업체에서 일하다, 독립해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성장했다. 바쁜 시간 속에서도 남편은 가정에 최선을 다했다. 주말은 가족과 함께 보내기 위해 애를 썼다. 남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사랑받는다고 느꼈다. 
 
어느 날,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녀는 햇살 좋은 아침에 혼자 마트에 갔다. 물건을 사서 집에 돌아오는 길, 자동차에 주유경고등이 들어왔다. 그녀는 주유소에 방문했다. 자동차 기름 냄새를 맡자마자 불현듯 잊혀진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분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자격 없는 여자야.” 
 
이 문장이 떠오른 그날부터 우울증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남편과 아이들의 눈을 보면 죄책감이 느껴졌다. 주유소 기름에서 기름 냄새를 맡았을 때, 죄책감이 찾아왔다고 했다. 왜 그랬을까? 주유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실 남편에게 말 못할 비밀이 있어요. 언젠가는 말하고 싶지만, 남편은 저를 용서하지 못할 거예요. 젊은 날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거든요.” 
 
그녀는 상고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했다. 처음 일하던 곳은 직원이 10명이 되지 않는 작은 회사였다. 서류 업무로 시작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 매일 똑같은 업무가 지루했다. 그녀는 회사를 그만두고 의류 회사 점원으로 취직했다. 매장에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어울리는 옷을 추천하고 구매로 이어지는 일이 적성에 맞았다. 2년 지나고, 부모님 도움으로 자기 매장을 차렸다.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틀에 박힌 일이 정말 싫었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좋아요. 이런 제가 좋았어요. 그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말이죠.” 
 
어느 날, 매장에 남자 손님이 찾아왔다. 티셔츠 한 장을 구매하고 갔다. 그날부터 매주 정해진 요일이 되면 그가 나타났다. 월요일 오후 7시. 그 남자가 매일 매장을 방문했던 날이다. 짧은 대화가 시작되었다. 사업을 하느라 그동안 제대로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해서 일까. 그 남자의 따뜻한 눈빛과 조금 썰렁한 유머가 좋았다. 
 
그 남자가 데이트 신청을 했다. 그녀는 응했다. 두 사람은 연애를 시작했다. 추운 겨울이 두 번 지났다. 그녀는 남자 친구에게 결혼할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 그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결혼은 나중에 생각하자고 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겨울이 지났다.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매장에 손님이 많아서 받지 못했다. 전화가 다시 왔다. 받지 못했다. 두 세 차례 전화가 걸려왔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 손님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전화기를 들여다보았다. 전화기에는 짧은 문자가 와 있었다. 
 
“000의 아내입니다. 시간 되실 때 전화 부탁 드립니다.”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남자 친구, 그의 아내에게 문자가 온 것이다. 그녀는 탈의실에 들어가 울기 시작했다. 이성을 잃은 그녀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랐다.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100번이 넘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그녀는 남자 친구의 회사도, 집에도 가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그의 전화번호뿐이었다. 일주일 동안 전화기를 붙잡고 살았지만, 남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의 아내와 통화할 수도 없었다. K는 그녀의 남자 친구에게, 그의 아내는 K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통화에 성공한 사람은 없었다.
 
한 달이 지난 후, 그의 아내로부터 다시 문자가 왔다.
 
“그 사람, 세상을 떠났어요.” 
 
K는 반쯤 미친 사람이 되었다. 그녀의 모든 삶이 무너져 내렸다.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했다. 그녀는 그날 이후 6개월 동안 방에 틀어박혀 밖에 나오지 않았다. 매장 매출이 급감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매장 문을 닫았다. 그녀를 살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전국에 유명한 목사님을 찾아다니며 상담 받고 기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높은 곳에 올라가 떨어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녀가 뛰어내리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는 부모님이었다. 부모님을 슬프게 만들 수 없었다. 아파트 옥상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다 내려온 것이 여러 번 이었다. 부모님의 기도 덕분이었을까. 그녀는 조금씩 안정감을 찾았다. 
 
일 년이 지난 후, 그녀는 부모님 일을 돕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주유소를 경영하고 있었다. 딸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전에 바람이나 쐬라고 주유소 경리 일을 맡겼다. 매장을 경영해본 그녀는 주유소 경리 일이 어렵지 않았다. 20대 젊은 아르바이트 직원들과 같이 일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같이 밥을 먹고, 함께 어울리면서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큰 트럭 한 대가 주유소 안으로 들어왔다. 트럭을 운전하던 남자는 기름을 가득 채워달라고 말한 후에 차에서 내렸다. 화장실에 다녀온 그는 유리창 너머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K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날부터 그 남자는 주유소에 매일 기름을 넣으러 왔다. 한 달이 지난 후, 그가 말을 걸었다. 
 
“시간 되세요?” 
“아니요.”
“밥이나 한 번 먹죠?” 
“아빠한테 혼나요.”
“다 큰 어른이 아빠 눈치는.”
“나가세요.”
“알겠어요. 내일 또 봅시다.”
 
어색한 첫 인사를 나눈 그 남자는 현재 그녀의 남편이 되었다.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그에게 말해야 했어요. 자격 없는 여자라고. 그럴 수 없었어요. 용기가 나지 않았거든요. 평생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 남자에게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나는 당신이 아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 말하기로 결심한 날, 남편의 프러포즈를 받았어요. 끝내 말하지 못했죠. 가슴 속 깊은 곳에 진실을 묻어 둔 채 살았어요.”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녀는 행복했다. 두 아이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변함없이 아내를 사랑했다. 성실하게 일했고, 가정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겉으로 보기에 부족함 없어 보이는 그녀에게 우울증이 찾아온 원인을 남편은 알 수 없었다. 
 
“제게는 모든 것이 과분해요. 남편도, 아이들도. 저는 자격 없는 사람이니까요. 솔직한 생각을 말해 드릴까요? 언젠가는 제가 이렇게 행복하게 사는 것을 그 여자가 알게 될 거예요. 그리고 제 남편에게 전화 하겠죠. 그리고 모든 진실을 까발릴거예요. 남편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저는 버려질 거예요. 두 번 다시, 아이들 얼굴을 볼 수 없겠죠. 저의 행복은 유통기한이 정해져 있는 냉장고 음식 같은 거예요. 차갑게 식어버린, 그러나 아직은 상하지 않은.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되요.” 
 
***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날지 모르는 사건이 그녀의 삶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녀가 가진 두려움은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다. 행복한 일상을 누리다가 어느 날, 전화를 받는다. 이전 남자 친구의 아내다. 남편에게 연락이 간다. 남편이 모든 것을 알아버린다. 그녀를 버린다. 아이들을 두고 집을 떠난다. 홀로 남겨진다. 비참한 삶을 산다. 
 
누구도 원망할 수 없다.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정해진 기한만큼, 모든 것이 밝혀지기 전까지만, 그녀는 현재의 삶을 유지할 수 있다. 그녀만의 세상이 흘러가는 방식이다. 
 
과거의 고통으로 인해 비틀어진 관점은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쉽게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깨진 유리 조각을 다시 붙여서 원래의 모습으로 만드는 것만큼 어렵다. 그녀에게 “당신이 두려워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요”라고 말한다면 그녀에게 위로가 될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이미 일어난 일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할 방법은 없다. 그녀는 이미 일어난 일처럼 생각하고 느낀다. 
 
이 상황을 정면 돌파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이 있다. 가장 두려워하는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가정하고 대화를 하는 것이다. 가장 두려워하는 일,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 벌어지는 최악의 상황에 그려본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가장 두려워하는 사건을 외면한다. 두려움의 중심에 서지 않는다. 
 
태풍 변두리가 바람이 가장 세다. 용기를 내어 바람을 뚫고 태풍의 중심에 가 본 사람은 안다. 태풍의 중심은 고요하다. 그 일이 벌어지면 인생이 파멸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그 사건을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할 뿐, 그 사건을 전개하지 않는다. 멀리서만 지켜보고 두려워 떠는 것이다. 
 
그 사건을  끝까지 전개해야 한다. 상상력을 발휘해 그 사건을 머릿속에서 전개해야 한다. 사건을 끝까지 전개시키고 나면, 자신이 맞이할 가장 두려운 상황이 의외로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삶을 파괴할지 모르는 최악의 상황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으로 들어온다. 
 
고통의 대가를 지불하고 태풍의 중심으로 들어간 사람은 삶이 고요해진다. 최악의 상황을 대처할 수 있는 강인한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녀는 태풍의 위력을 느낀다. 멀리서 태풍이 불어오고 있다. 시커먼 비구름이 몰려와서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태풍이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앞집이 무너진 것처럼 내 집이 무너질지 모른다. 그녀는 두려워서 눈을 감는다. 눈을 감으면 태풍이 위력은 더욱 거세진다. 엎드려 운다. 다 끝났다고. 모든 것이 파괴될 것이라고 말한다. 
 
우르르 쾅쾅! 번개 소리를 들은 그녀는 갑자기 정신을 차린다.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갑자기 차를 몰고 태풍으로 달려든다. 강한 바람에 차가 흔들리지만, 그녀는 속도를 올린다. 흔들리던 차는 다시 고요해진다. 시커먼 비구름 역시 사라져 버렸다. 고요함만이 남는다. 그녀는 깨닫는다. 태풍은 강했지만, 자신의 집을 파괴해 버릴만큼은 아니었다고. 태풍을 미리 경험해보고 나서 깨닫게 된 사실이다.
 
남편이 모든 것을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까. 그녀를 버릴까. 아니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처럼 살아갈 것인가. 아무도 모른다. 태풍의 바람은 거셀 것이다. 남편이 흔들리다 쓰러질지, 아니면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설지. 남편의 반응은 예상할 수 없다. 
 
견뎌주면 아내와 살고, 견디지 못하면 아내를 버리게 될 것이다. 남편의 반응이 태풍이라고 전제한다면,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남편 반응은 태풍이 아니다. 태풍의 실체는 그녀 마음 속 두려움이다. 
 
그녀는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다. 그녀는 이전 남자친구가 유부남인 것을 알지 못했다. 유일한 잘못은 그녀의 남자 친구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녀는 신이 아니다. 그녀의 잘못이 아니란 뜻이다. 그녀가 죄책감을 느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무죄이다. 그녀는 비난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다. 
 
그녀가 남편에게 모든 사실을 미리 말해야 할 책임은 없다. 끝까지 숨겨야만 한다는 말도 아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인생을 살면서 때로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일이 있다. 가장 두려운 일을 마음속으로 미리 경험한 사람은, 다가올 일에 대해 편안하다. 
 
그 일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것이다. 그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세상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준비를 오랫동안 한 사람이라면, 그 일이 일어난 다음부터, 자신의 진정한 가치가 빛을 발하기 발한다.

생각보다 오래 걸릴 거야

목사님,
사실 제가  떳떳하지 못해요.
안 좋은 습관이 있거든요.
끊어야 하는데 아직 못 끊었어요.
 
죄책감이 심해요.
순종하면 달라질까 싶어
몇 번 시도해봤는데
계속 실패하네요.
 
예배 시간에 앉아 있기 힘들었어요.
다른 사람 모두가 편하게 듣는 말을
편하게 들을 수 없었거든요.
낙오자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교회를 떠났어요.
이대로는 안된다.
고치고 다시 오자.
마음 먹었죠.
 
혼자 고민하다
용기를 내서 말했어요.
친구가 말하더군요.
 
그렇게 자꾸 미루면 안 돼.
마음 단단히 먹고 끊어.
계속 그렇게 변명하지 마.
하나님이 참는 것도 한두 번이야.
 
마음이 아팠어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집에 와서 알게 되었어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나도 알아.
몰라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
나도 끊고 싶다고 했잖아.
쉽게 안된다고 말한 거야.
이 바보야.
 
어려운 주제를 가져오셨네요.
쉽게 대답하기 어려워요.
솔직히 이야기해주신 덕분에
당신의 진심은 알았어요.
 
교회를 떠났다는 게
걱정되고 불안하기는 해요.
다시 돌아가기로 한 거니까
조급하게 굴지는 않을게요.
 
대신 부탁이 있어요.
예수님은 떠나지 말아주세요.
예수님과 함께 있어주세요.
 
부모님께 인정받고 싶어서
집 나가 성공하겠다는
계획은 실패할 거예요, 아마.
자식 걱정에 처마 밑에 앉아
먼 산 바라보는 부모님 모습은
보이지 않을 테니까.
 
사람 생각하지 마세요.
교회 생각하지 마세요.
오직 예수님만 생각하세요.
그분만이 당신의 진심을 알아요.
당신의 진심을 전하세요.
 
진심을 전하셨나요?
그래요. 잘 하셨어요.
이제 용기를 내세요.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세요.
 
발이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한 걸음 떼세요.
조금만 가까이 가요, 우리.
 
가까이 가면 볼 수 있어요,
당신을 바라보시며
따뜻하게 웃으시는 예수님 얼굴.
그가 당신을 안아주며 말씀하세요.
 
얘야, 조급할 필요 없단다.
나는 기다릴 수 있단다.
생각보다 오래 걸릴 거야.
자책하지 말아주렴.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이 틈에 숟가락 하나 얹어도 될까요.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아, 그렇군요.
오늘 다시 태어난 걸로 하죠.
 
지난 30년 동안 상처받고 살았으니까
오늘부터 당신에게 30년 시간 주세요.
상처받으며 살아온 시간만큼
상처 아무는데 시간 걸려요.
 
나도 마음속에 달력 있어요.
조급하지 않을 거예요.
비난하지 않고 자책하지 않고
나를 돌봐줄 거예요.
 
떨리는 손으로
달력을 한 장 한 장 찢어 넘기며
나는 기도합니다.
 
달력 뒤에 벽을 만나 절망하기 전에
예수님이 먼저 오시기를.
 
지친 이 삶을 뒤로하고
주님 품에 안겨 안식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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