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bpx 김유비닷컴

Tag: 상처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상처로 아파하는 당신에게

나는 오랜 시간 나 자신을 탓하며 살았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청소년기, 나는 내 인생을 비관하며 자살을 시도했었다.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열정으로 20-30대를 보냈지만, 내 마음속 한구석에는 내가 부정하고 싶은 어두운 감정들이 남아 있었다. 

불안, 두려움, 외로움…. 

벗어나고 싶은 감정이었다. 

하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그 감정들을 외면했고 괜찮은 척 아닌 척 애써 노력했다. 

그러다, 나는 무너졌고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나는 내가 고장 난  줄 알았다. 
고쳐서 쓸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나는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나의 상처는 그대로였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나는 알게 되었다. 

나의 모든 고통은 나의 상처를 외면한 결과였다. 

사람들은 모른다. 

부모와의 안정적인 애착이 결여된 채 정서적 신체적 학대를 받은 아이들이 겪는 고통을… 

“누가 상처 없이 자랐겠냐고, 누구나 저마다의 아픔이 있다고, 그러니 과거는 그만 말하자”라는 사람과는 대화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끔찍한 일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다. 

끔찍한 일을 겪은 사람은, 그 기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장면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를 기억하는 것이다. 

현재의 삶이 아무리 행복하고 만족스럽다고 할지라도, 근거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 내면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린다. 

나의 불안, 나의 두려움, 나의 외로움이 나의 믿음 없음으로 인한 감정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자책했다.  

나와 같은 아픔으로 고통받는 당신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들려주고 싶다. 

누가복음 5:31-3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당신과 나를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 

종교의 관점에서는, 말끔한 척 성숙한 척하는 사람들이 주목받는다. 

아프고 병들고 가난하고 죄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비난받는다. 

예수님 당시가 그랬다. 

복음의 관점에서는, 안 아픈 척, 죄 없는척 하는 사람들이 외면당한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아프고 병들고 가난하고 죄에 허덕이는 사람들이야말로 예수님이 필요하다. 

상처로 아파하는 당신을 위로하고 싶다. 

어린 시절, 당신 겪은 끔찍한 일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치유하기 원하신다.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가자. 

예수님은 당신을 치유하고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관계가 힘들어 교회를 떠났어요

관계가 힘들어 교회 청년부를 떠났어요. 시간을 두고 생각하다가 다시 마음이 열려 청년부 공동체에 가려 했어요. 떠나온 것이 미안해서 먼저 리더 언니에게 제 상황을 알렸어요. 다시 교회에 나가고 싶다고 말했어요.
 
환영해줄 거라는 저의 바람과는 달리, 리더 언니는 너무 조급한 것 같다며 기다려 달라고 했어요. 공동체 사람들이 너 때문이 힘들어한다고. 알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어요. 그때는 괜찮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화가 났어요. 내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는 전혀 물어보지 않았어요. 공동체에서 저를 밀어냈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엇 때문에 교회를 떠났는지 알 길이 없어 정확한 답변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교회 사람들과 갈등이 일어나 공동체를 떠난 것 같아요. 교회는 어떤 상황에서든 자매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줘야 하지만, 실제로는 교회 사람들이 서로 상처가 많아서 쉽지가 않지요. 리더 언니라는 분은 아마 다른 사람에 대한 걱정이 앞섰던 것 같아요. 리더 언니를 이해해줄 필요가 있어요. 리더 역할은 언제나 쉽지 않으니까요.
 
아쉬운 게 하나 있다면, 리더 언니가 자매님이 오고 말고를 결정할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해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자녀를 거절할 권리는 없거든요. 자매님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위임하지 마세요.
 
자매님이 리더 언니에게 물을 필요가 없었던 것 같아요. 가고 말고를 결정하는 분은 자매님이지 리더 언니가 아니거든요. 리더 언니가 어떤 말을 해도 만족할만한 답변을 듣지 못했을 거예요. 그전에 교회를 떠나올 만큼 갈등이 깊었을 테니까요.
 
과정을 공유하는 게 핵심이에요. 다녔던 교회를 사랑한다면, 교회에 다시 출석하는데 목적을 두지 마세요. 자매님에게 있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 리더 언니와 공유하는 게 먼저예요.
 
무엇으로 상처받았고, 혼자 시간을 보내면서 어떻게 회복되었는지 말해주세요. 같은 말이라도 표현이 중요하니까 최대한 진실되게 대화하세요.
 
리더 언니로부터 또다시 거절을 당한다면, 전도사님이나 목사님께 도움을 요청하세요. 도와주실 거예요. 만약에 또다시 거절을 당한다면, 그때는 다른 교회를 고려해보세요.
 
교회를 쉽게 옮겨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교회 사람에게 상처받아서 신앙을 버릴까 걱정돼서 드리는 말이에요. 어떠한 경우에도 예수님을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스스로 회복할 시간이 필요해요. 사람들에게 상처받았으니까요. 한 가지만 말씀드릴게요. 예수님은 자매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세요. 하지만, 교회 사람들은 자매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아요. 자매님 역시 리더 언니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에요.
 
리더 언니를 묵상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묵상하세요. 리더 언니와 나누었던 대화를 반복하지 마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반복하세요. 이 과정에서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펼쳐 가시기를 기대해봅니다. 부족한 답변 들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분명히 보았다

“야, 너 서울에서 전학 왔다며?” 
 
“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나는 대답했다. 
 
명식이 형은 마을의 전설이었다. 서울에서 이사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명식이 형의 클럽에 가입을 했다. 
 
명식이 형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명식이 형이 데리고 다니는 또래 역시 전부 초등학생이었다.
 
그렇다면, 명식이 형은 중학생이었을까? 고등학생이었을까? 아니다. 
 
어른이었다. 
 
흐릿한 기억을 추적해보건데, 적어도 이십 대 중후반이었을 것이다. 다 큰 어른이 동네 꼬마들 사이에서 골목대장을 하고 있으니, 중고등학교 형들도, 클럽에 소속된 아이들을 섣불리 건드릴 수가 없었다. 
 
한 번은 우리 동네 규칙을 아무것도 모르는 다른 동네 중학생이, 명식이 형이 돌봐주는 애 하나를 잘못 건드렸다 봉변을 당했다. 
 
명식이 형은 중학생에게 맞았다는 아이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다른 동네까지 직접 찾아갔다. 클럽 아이를 때리고 도망간, 중학생을 기어코 찾아내서 사정없이 패줬다. 부모가 달려 나와 욕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뜯어말려도 소용 없었다. 
 
말리는 부모를 밀쳐내고, 그 집 아들을 두들겨 팰 정도니 명식이 형이 나타났다고 하면, 동네 어른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명식이 형은 동네 꼬마들을 모아놓고 틈만 나면, 강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
 
“남자는 강해야 돼, 알아? 약하잖아? 그거 등신이야, 등신. 남자가 힘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야.” 
 
한심한 듯이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주먹을 쥐는 방법을 제대로 가르쳐 준다며,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자, 먼저 손바닥을 쭉 펴봐. 그리고, 손가락 네 개를 반으로 접어. 그다음, 손바닥 안의 살을 움켜쥔다고 생각하고, 주먹을 꽉 쥐는 거야. 그럼, 엄지손가락이 자연스럽게 딸려오거든. 주먹 안에 살이 조금 잡혀야 힘이 꽉 들어가는 거야. 그다음에는 이걸로, 그냥.”
 
명식이 형은 이론만으로는 안되겠다는 듯이 아이들을 비슷한 체형으로 둘씩 짝을 지었다.  
 
“야, 이제부터 내 말 잘 들어. 오늘부터 서바이벌이야. 이긴 놈만 살아남는다. 지는 놈은 이제부터 우리 클럽 아니야. 바로 탈락이다.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죽도록 싸워. 알겠지?” 
 
서로 눈치를 보고 서성거리니까, 명식이 형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미치겠네. 야, 공과 사를 구분 못해? 지금은 친구가 아니라, 적이라고. 미친 듯이 싸워라. 싸우는 척만 하면, 나한테 죽는다.” 
 
아이들의 반응은 대략 둘로 나뉘었다. 
 
“너 죽었어”,라고 기세등등하게 상대를 바라보는 아이들. 그리고, 잔뜩 주눅이 들어 겁을 먹고,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만 같은 아이들.
 
승부는 금세 갈렸다. 
 
명식이 형은 패배자들을 한 줄로 세웠다. 그리고, 말했다. 
 
“여기 이놈들은 패배자야. 우리 동네에 같이 살아도, 더 이상 우리 클럽은 아닌 거지. 야, 한 줄로 나와서 이 새끼들 신발에 침 뱉어.” 
 
나는 한 살 많은 형의 신발에 침을 뱉어야 했다. 뱉고 싶지 않았다. 그 형은 이미 울고 있었다. 그렇게, 비참한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엉거주춤 망설였다. 
 
명식이 형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뭔가 번쩍했고, 나는 잠깐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코밑으로 진한 쑥 냄새가 났다. 쑥을 빻아 둥그렇게 말아서 콧구멍에 쑤셔 박은 것이다. 그러면, 피가 멈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어린 마음에 서러워서 눈물을 흘렸다. 명식이 형은 그것마저 못마땅했는지, 내 볼을 두 손가락으로 세게 움켜쥐고 사정없이 흔들면서 말했다. 
 
“야, 울어? 남자 새끼가 우냐고? 죽고 싶지 않으면, 그만 울어라.” 
 
살아남은 아이들은 다음 날부터 싸움 기술을 배웠다. 애들끼리 마주 서서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학교 마치고 집에 오면 학원 가듯 명식이 형의 클럽으로 가야 했다. 그것이 하루 일과였다. 
 
#
 
싸움을 가르치는 시간을 제외하면, 명식이 형은 친구처럼 다정했다. 
 
“우리 삼촌이 비디오 가게 하거든. 언제든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구해다 줄게.”
 
명식이 형의 집에 놀러 가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수 십 개의 비디오테이프였다. 책상 위에 책 대신 비디오테이프가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제목은 다양했지만, 장르는 단순했다. 무술 영화 아니면 액션 영화였다. 
 
명식이 형의 집에서 영화를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영화를 보다가 배가 고프면, 명식이 형이 끓여준 라면을 먹었다. 그리고 또 영화를 봤다. 
 
화면이 유난히 밝게 빛나는 것 같으면, 바깥이 어두워졌다는 뜻이었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삼삼오오 집으로 흩어졌다. 
 
나는 영화를 좋아했다. 영화를 계속 보기 위해서라도 명식이 형의 클럽에 계속 남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낯선 남자가 찾아왔다.  
 
“여기 혹시 왕명식 씨 댁이 어딘가요?” 
 
마을 입구에서부터 보이는 십자가를 보고, 교회다 싶었는지, 낯선 남자는 우리 집을 찾아와 길을 물었다.
 
아버지는 손가락을 이리저리 사용해 명식이 형의 집을 알려줬다. 명식이 형은 집에 없었다. 나 역시 명식이 형을 따라다니느라 낯선 남자가 우리 집에 찾아와 아버지에게 길을 물었는지 알지 못했다. 
 
낯선 남자는 명식이 형의 집 앞에서 명식이 형을 한참 동안 기다렸다. 
 
동네 꼬마들을 거느리고 자기 집으로 들어가려던 명식이 형은, 멀리서 자기 집 앞에 서 있는 낯선 남자를 발견했다. 당황한 티도 내지 않고, 곧바로 뒤돌아서서, 꼬마들에게 말했다. 
 
“야, 오늘은 뱀 잡으러 가자. 지금 산딸기 철이니까, 산딸기도 먹고 하면 되겠네. 뒤로 돌아!” 
 
저녁쯤해서,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오늘 읍내 비디오 가게 사장님이 우리 집에 와서, 명식이 집을 묻더라고. 명식이가 빌리고 안 갖다 준 비디오테이프가 수 십 개라네. 아무리 전화를 해도 안 받아서, 집까지 찾아온 거야. 연체료가 수 십만 원인데, 그놈이 그 돈을 어디서 구한다냐.” 
 
나는 명식이 형에게 들은 말이 있어서, 아버지의 말이 끝나자마자 명식이 형의 편을 들었다. 
 
“아니야, 아빠. 명식이 형이 그랬어. 삼촌이 비디오 가게를 한다고. 거기서 가지고 온 거야.” 
 
아버지는 으흠하고 팔짱을 끼시더니, 타이르듯 내게 말했다. 
 
“요즘 너, 명식이네 너무 자주 가는 것 같아. 거기서 무슨 일이 있어? 동네 애들도 그 집에서 살다시피 하던데. 아빠가 걱정 안 해도 되는 거지?” 
 
나는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해서라도, 명식이 형의 집에 놀러 가고 싶었다.  
 
“아니야. 명식이 형이 숙제도 도와주고 그래. 모르는 문제도 알려주고. 그러니까, 애들이 좋아서 가는 거지. 나도 그렇고.” 
 
아버지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셨다가, “알겠다”라고 짧게 말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명식이 형이 한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온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글을 모르는 명식이 형이, 동네 아이들의 숙제를 가르쳐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내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순간적으로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아버지는 놀라셨을 것이고, 그 이유가 궁금하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 몰래 명식이 형을 찾아가셨고, 명식이 형을 차에 태우고 직접 운전을 해서 비디오테이프를 가게에 돌려주었다. 사장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밀린 연체료를 최대한 줄여서 명식이 형 대신 연체료를 해결해주었다. 
 
아버지는 그 모든 사실을 당시에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명식이 형이 마을을 떠나고 나서야, 어머니를 통해 전해 들은 것이다. 
 
나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명식이 형을 따랐고, 명식이 형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이들을 거느렸다. 
 
적어도, 그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야, 우리 오늘 한댁 개울에 물고기 잡으러 가자. 형이 모래무지 잡아서, 기름에 바로 튀겨줄게. 라면도 사가서 같이 끓여먹자.” 
 
나를 비롯한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개울을 따라 걷는데, 그 발걸음이 얼마나 신나던지, 태평양 너머의 디즈니랜드를 가는듯했다. 
 
“물속을 걸어 다닐 때, 조심해야 돼. 포클레인이 모래 퍼간다고 깊이 파놓은 곳이 있어. 발 잘 못 디뎌서 빠지면 큰일 난다. 내 눈앞에서만 놀아.”
 
아이들은 흥분한 상태였다. 앞뒤 안 가리고 물에 뛰어들어 정신없이 물장구를 쳤다. 
 
명식이 형이 물속에서 그물을 들고, 앞으로 걸어나가면, 아이들은 명식이 형의 뒤를 졸졸 따랐다. 물고기가 놀라 도망치지 않도록 살살 걸으니, 그 장면이 마치 비밀작전 같았다. 
 
물고기가 꽤 많이 잡혔다. 명식이 형이 실력을 발휘했다. 버너 두 개를 준비해서, 한쪽에는 기름을 올리고, 다른 한쪽에는 물을 올렸다. 약속대로 물고기를 튀기고, 라면을 끓여줄 생각이었다. 
 
물고기를 산 채로 튀기는 것을 처음 봤다. 명식이 형은 손가락 길이만한 크기의 모래무지를 들어 올리더니, 순식 간에 내장을 발라냈다. 머리 부분을 잡고, 몸통을 걸쭉한 튀김 반죽에 담갔다 빼서, 바로 달궈진 기름 냄비에 넣었다. 젓가락으로 머리 부분을 잡고 있어서, 튀김옷을 입은 몸통 부분만 아삭하게 튀겨졌다. 
 
어찌나 고소하고 맛있던지, 둥지에서 어미 새를 기다리는 새끼 새 마냥, 아이들이 입을 벌리고 줄을 서서 명식이 형이 모래무지를 입안에 떨궈주기만 기다렸다. 
 
옆 냄비에서 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명식이 형은 파를 쏭쏭 썰어 넣고 라면을 맛있게 끓였다. 아이들은 각자 나무젓가락을 들고, 라면에 달려들었다. 
 
환상적인 경험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다다다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길가를 지나가는 엔진 소리가 아니라, 이곳을 향해 긴박하게 다가오는 거친 소리였다. 
 
두 명의 남자 어른이었다. 둘 다 민소매티를 입었는데, 두 사람의 어깨에 비슷한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뒤에 타고 있던 남자가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어이, 명식이. 너 여기서 뭐 하냐? 동네 꼬마들 데려다가 또 대장 놀이하냐?” 
 
나와 함께 있던 모든 아이들은 기대감에 설레었다. 드디어 명식이 형의 싸움 실력을 직접 보게 된 것이다. 시원하게 한 방 날려주기를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상황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명식이 형은 잔뜩 얼어붙은 채, 말까지 더듬었다. 
 
“아.. 니야. 그게… 아니라….”
 
남자는 껄렁껄렁 걸어와서 물고기를 담아놓은 플라스틱 바구니를 발로 차서 뒤집어엎었다. 
 
모래 위에 엎어진 바구니는 구토를 하듯, 물과 물고기를 쏟아냈다. 모래사장은 기다렸다는 듯, 순식 간에 물을 빨아들였다. 마른 모래로 범벅이 된 물고기들은 금방이라도 호흡이 끊어질 것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남자는 물고기를 찌익 밟고, 명식이 형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협박하듯 말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여기서 이러고 노니까 좋냐? 너 어제 왜 술 먹다 그냥 갔어? 내가 분명히 말했지? 술값 내고 가라고.”
 
명식이 형은 천천히 뒷걸음질 치면서 말했다. 
 
“그게 아니라, 매번 내가 돈을 내니까…. 나도 돈이 없어서….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 애들이 보고 있으니까 그만하자. 부탁이야.” 
 
남자는 우리 쪽을 바라보고, 알 수 없는 미소를 띠더니, 명식이 형의 뺨을 후려쳤다. 
 
“그만하기는 뭘 그만해. 콱 그냥 죽여버릴까 보다. 야, 오토바이에서 가위 꺼내. 이 새끼 이거, 정신을 차리게 해줘야 돼.”  
 
오토바이에 걸 터 앉아, 그 장면을 지켜보던 남자가 오토바이에서 가위를 꺼내 가져왔다. 그리고, 우리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른 말 잘 들어야 돼. 말 안 들으면 이렇게 된다, 알겠지?” 
 
우리는 얼어붙은 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구라도 먼저 울음을 터뜨리면, 모두가 함께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두 남자는 명식이 형을 힘으로 짓눌렀다. 주먹으로 얼굴을 사정없이 내려치고, 꿇어 앉혔다. 
 
가위를 가져온 남자가 명식이 형의 뒤에서 팔로 목을 조였다. 가위를 받아든 남자는 명식이 형을 마주 보고 가위로 머리카락을 뜯어내듯 닥치는 대로 잘라냈다. 
 
명식이 형의 얼굴이 떨어져 내리는 머리카락으로 뒤덮였다. 그 순간 나는, 명식이 형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분명히 보았다. 
 
그는 울고 있었다. 잘린 머리카락 사이로 명식이 형이 애처롭게 울고 있는 모습을, 나는 분명히 보았다. 
 
“이 새끼 이거 꼴좋다. 다음부터 정신 똑바로 차려라. 다음에는 죽여버린다, 진짜.” 
 
남자는 바닥에 가래침을 뱉고, 짜증 난다는 듯이 손등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털어냈다. 다시 오토바이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었다. 
 
명식이 형은 무릎을 꿇고 엎어져서, 머리를 가리고 웅크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희미해져서 귀에 들리지 않게 되었다. 오토바이가 사라지고 나서도, 명식이 형은 웅크린 채 그대로였다. 
 
누구 하나 명식이 형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버너 위에 라면은 냄비에 꺼멓게 달라붙어서, 코끝을 찌르는 쓴 냄새를 풍겼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명식이 형에게 물었다.
 
“형, 괜찮아?”  
 
명식이 형은 움직이지 않았다. 웅크린 채로 목소리만 들렸다. 
 
“다… 꺼져. 지금부터 셋 셀 동안 안 꺼지면, 전부 죽여버린다. 하나. 둘….” 
 
모래사장에 폭탄이 떨어진 것 같았다. 아이들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고, 소리를 지르며 사방팔방 흩어졌다. 
 
나는 울음이 터졌다. 셋을 세고 나면, 명식이 형이 정말로 우리를 죽여버릴 것 같았다. 나는 두려움에 압도되었다. 
 
아이들 모두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엉엉 울면서 각자 살아보자고 죽을 힘을 다해 뛰어서 도망쳤다. 
 
그렇게, 명식이 형의 클럽은 하루아침에 공중분해되었다. 
 
#
 
그날 이후로, 명식이 형을 마을에서 본 사람은 없었다. 명식이 형이 사라진 마을은 적막했다.  
 
상처는 깊었다. 아이들 모두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식사 자리에서 부모님이 명식이 형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지가 열무김치를 집어 들면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명식이가 사라졌다고 마을 사람들이 난리야. 이 녀석, 도대체 어디로 간 건지, 도통 소식을 모르겠네.” 
 
명식이가 마을을 떠난 것이 어른들 사이에서도 뉴스거리였다. 명식이 형은 마을에 남은 몇 안 되는 젊은 일꾼이었다. 
 
명식이 형은 하루 일당을 받으면, 두세 명의 장정이 해야 할 일을 혼자서 너끈히 해냈다. 농사일이 바빠질 무렵에, 명식이 형이 한 마디 말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은 어른들에게 이만저만 아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그러게. 명식이 걔 정말 불쌍한 앤데. 명식이 어릴 때, 아빠는 사고로 죽고, 엄마는 신 내려서 무당 한다고 명식이 버리고 떠났잖아. 동네 사람들이 명식이를 자식처럼 키웠는데, 갑자기 사라지니까 자식을 잃은 것 같지.” 
 
갑자기 눈물이 났다. 밥을 먹다가 내가 우니까, 부모님이 놀랐다. 당황한 아버지가 아버지가 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 가만히 나를 쳐다보고, 차분하게 말했다. 
 
“너도 명식이가 떠나서 허전하겠다.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그 녀석 다시 올 거니까.” 
 
나는 팔 등으로 눈물을 닦아내면서, 말했다. 
 
“그 형 안 와. 절대로 안 올 거야. 동네 애들도 다 알아. 그래서, 못 온다고.” 
 
부모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나는 밥이 가슴에 얹혀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밖으로 나가서, 골목길을 내달렸다. 명식이 형의 집 앞에 섰다. 
 
마당에서 주먹만 한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명식이 형의 집 대문에 돌멩이를 세차게 내던졌다. 
 
빈 집이었다.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문이 부서져라 흔들었다. 손과 발로 사정없이 문을 때렸다. 분하고 슬퍼서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한 사람이 정말 중요한가요?

개인적인 질문에 일일이 답변해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한 사람의 문제는 그저 한 개인의 문제일 수 있는데요. 다수를 위해 보편적인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을까요?
 
나는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인 질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거창해 보이는 질문이라도 결국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하니까요.
 
오래전부터 그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고 싶었습니다. 다수를 위한 삶을 의도적으로 피했어요. ‘상처 입은 한 사람’을 위해 글 쓰고 말하는 것이 내 사명이 아닐까 고민하며 삽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에는 지극히 보편적인 이야기가 담겨요. 우리가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는 이유입니다. 등장인물이 개인적으로 겪는 이야기에 사람들이 공감하지요.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야기에 빠져들어 울고 웃습니다.
 
내게 한 사람의 존재는 우주이며 온 세상이에요. 한 사람을 위해 글 쓰고 말하는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아요. 책을 쓰고, 설교하는 것도 대중을 위한 것은 아닐 겁니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꿈이 작다 못해 초라한 것 아니냐?”라는 억센 질문을 받을지 모르겠네요. 남 생각이야 어떻든 당분간 고집을 꺾지 않을 겁니다.
 
굳이 효율을 따지자면 한 사람을 위해 글 쓰고 말하는 것이 다수를 위해 하는 것보다 효율적이라고 생각해요. 목회 사역을 처음 시작하고 가장 난처한 것이 설교였습니다. ‘누구를 위해 어떻게 설교를 준비해야 하지?’ 고민했지만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 정거장에 붙어 있는 광고 포스터를 우연히 보았어요. 매력적인 여성이 정면을 보고 찍은 화장품 광고였어요. 사진 속 그녀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어서 버스 정거장 어디에서도 그 시선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시선이 렌즈를 빗나갔다면, 나 역시 피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때 책상에 앉아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고민해도 풀리지 않던 의문이 풀렸어요. 이전까지 나는 연령과 직업, 취향 같은 것으로 청중을 분류했어요. 숫자처럼 모두 더하고 나누어 평균을 내는 방식으로요. 치명적인 실수였지요. 나는 청중을 짐작했을 뿐 정확히 몰랐습니다.
 
어리석게도 그 자리에 없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설교한 겁니다. 이후부터는 과감히 설교 준비부터 설교하는 순간까지 단 한 사람을 위해 준비하고 전했습니다.
 
한 사람을 위한 설교는 아무도 배제하지 않아요. 누군가가 ‘아, 저건 내 이야기다. 어떻게 내 마음을 저렇게 잘 알지?’라고 생각한다면 아마 그 자리에 있는 다수의 사람 역시 같은 마음 이지 않을까요?
 
글을 쓰기 시작할 때도 독자가 누구인지 몰랐어요. 처음 설교 할 때와 같은 실수를 반복했지요. 독자를 더하고 나누면서 짐작했어요. 평균치의 독자를 예상하고 글을 썼어요.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쓰느라 적지 않은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하나님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한 사람을 바라보고 글을 쓸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어요. 그러자 사람들이 공감해주기 시작했지요. 참 알 수 없는 일이죠. 한 사람을 위해 쓴 글이 다수에게 읽히다니요.
 
그래서 나는 한 사람의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에 성실히 답합니다. 진심을 담아 답변하고, 그가 도움을 받았다면 만족합니다. 아마도 다수를 위해 글을 쓰고 말하는 날은 내 인생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나는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고 싶습니다.

결론은 무조건 예수님인가요?

목사님이나 기독교 상담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말로 시작하더라도 결국 “예수님을 바라보라”라고 말하는데, 솔직히 너무 쉽고 뻔한 대답 아닌가요? 아무도 반박할 수 없잖아요. 결론은 무조건 예수님인가요?
 
좋은 질문입니다. 나도 오랫동안 고민해온 문제거든요. 저 역시 말끝마다 “예수님, 예수님” 하는 사람들에 대한 시선이 곱지 못했어요. 예수님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왜 정답인지 알고 싶었어요.
 
상처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기도했어? 성경은 읽어? 그런데, 왜그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솔직히 이런 태도로 대화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이 남용되고 있다는 생각도 했어요. 문제의 실체에 다가가지 못하고, 대충 덮어버리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풀이 과정 없이 정답만 있는 답지를 보면 마음이 후련한가요? 그렇지 않아요. “뭘 그렇게 고민해? 이 문제 답은 3번이야. 빨리 채점해”라고 말한다고 가정해보세요. 답을 맞혀도 답답합니다. 맞고 틀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왜 그 문제의 답이 3번인지 알아야겠지요.
 
친절한 선생님은 정답만 설명해주지 않아요. 1번, 2번이 왜 답 이 될 수 없는지 설명하지요. 그래야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서 오답을 피해갈 수 있습니다. 나도 그런 방식으로 말해볼게요.
 
요즘 유행하는 ‘마음 챙김’과 ‘인지행동치료’라는 상담 방법론이 있어요. 아마 당분간 상당한 인기를 누릴 겁니다. 마음 챙김은 불교의 명상에서 시작됐습니다. 구글의 명상 전문가 차드 멩 탄이 《너의 내면을 검색하라》에서 ‘할머니의 마음’이라는 기법을 소개하지요.
 
스스로를 자애로운 할머니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할머니의 눈으로 보면 각자는 모든 면에서 완벽하며, 할머니는 누군가 못된 짓을 해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고요.
 
이 이론을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 사람마다 할머니에 대한 정서가 다르다고 말하고 싶어요. 할머니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거든요. 내가 떠올린 할머니가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준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내담자 중에 할머니에게 학대를 받은 사람도 있고, 반감이나 두려움을 가진 사람이 있었어요. 눈을 감고 따뜻한 할머니를 떠 올리자고 하면 감정이 저마다 다를 거예요. 그러니 기법에 대한 효과도 다르겠지요.
 
인지행동치료의 기법을 한 가지 소개할게요. 인지오류에 빠져서 자신을 합리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내담자에게 ‘소중한 친구’가 찾아와 자신과 똑같은 고민을 털어 놓는다면 뭐라고 말할까요? 소중한 친구니까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이해해주고 공감해줄 거예요.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소중한 친구에게는 공감해주면서, 자신은 왜 비난하시나요?” 라고 되물으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돕습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소중한 친구의 개념이 상대적이지 않을까요? 지금 당장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생각하는 우정의 크기만큼 큰돈을 꿔달라고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거절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서겠지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친구는 상상 속에나 있어요.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담자 중에는 소중한 친구가 한 명도 없거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사람도 있었어요. 친구는 친구일 뿐입니다. 우정은 언제든 깨질 수 있고, 아무리 소중한 친구라도 절대적이지 않아요.
 
내게 ‘따뜻한 할머니’와 ‘소중한 친구’, 그리고 ‘예수님’ 중에 누구를 택할 거냐고 묻는다면, ‘예수님’을 택할 거예요.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내가 믿는 답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합리적인 선택을 하게 돕고 싶어요.
 
다른 상담 이론을 무시할 의도는 없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자애로운 할머니를 바라보자고 하면 웃음이 터질 것 같아요. 또 소중한 친구를 바라보자고 해도 썩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아요.
 
하지만 내게 “예수님을 바라보자”라는 말은 설득력이 있어요. 할머니나 친구를 바라보자는 말보다 훨씬 듣기 좋아요. 예수 님의 사랑은 절대적이에요. 세상이 무너져도 그분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할머니와 친구에게 감히 비교할 대상이 아니지요. 그래서 나는 제안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건 어때요?”
 
만약 당신이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을 믿게 된다면 당신 안에 기적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당신을 있는 그대 로 사랑하는 그분을 만날 수 있으니까요.
 
사람마다 예수님을 다르게 말하겠지만, 성경은 한결같이 동일한 그분을 말해요. 그 사랑은 변치 않고 영원합니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용기 내어 고백합니다. 결론은 ‘예수님’입니다.

나는 무엇이 문제일까요?

일단 내 이야기를 들려줄게요. 그리고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말해줘요. 문제를 발견하면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거예요. 무엇이 문제인지 진심으로 알고 싶어요.
 
나는 초능력자나 예언가가 아닙니다. 만약 내게 사람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있어도 당신의 이야기를 잠깐 듣고, “당신은 이런 사람이고, 이런 문제가 있다”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건 예의 없는 행동이거든요. 누가 누구를 판단하고 정의하나요.
 
오히려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어요. 만약 다른 누군가에게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면 아마 당신은 그에게 휘둘릴 거예요. 그러면 관계를 지속하기 어렵지요. 당신을 평가하고 판단한다고 느끼거든요. 관계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부담스러워서 멀리하게 될 거예요.
 
마음을 조금 편하게 가져요.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문제가 있고, 고민하며 삽니다. 문제없는 척하는 것도 문제지만,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문제라는 말 대신 다른 표현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상처’라는 말은 어때요? 경우에 따라 받아들이는 의미가 다르겠지만 문제라는 말보다 나은 것 같아요. 문제는 고치거나 해결해야 하는데, 인생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하나의 과정을 마치고 다음 과정으로 들어가지 않아요. 하나의 과정으로 쭉 이어져 있지요. 마무리도, 완성도 없어요.
 
상처에는 치유나 치료라는 말을 쓰지요. 상처가 아물면 그대로 끝이 아니에요. 한번 상처 난 부위는 흉터가 남습니다. 겉은 멀쩡해 보여도 누르면 아플 수 있어요. 상처 부위가 약해져서 같은 곳을 두 번 다칠 수도 있고요. 상처에 완치는 없어요. 계속 조심하며 상처를 돌봐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당신에게 문제가 없다고 말하고 싶어요. 다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자신 안의 상처를 스스로 발견하기를 바라요. 다른 사람은 절대 당신의 상처를 대신 찾아낼 수 없어요.
 
아파서 병원에 가면 의사에게 “내가 어디 어디가 아파요”라고 합니다. 의사는 여기저기 확인해보고 처방을 해줍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워요. 아프다고 먼저 말해야 의사도 왜 아픈지 말해 줄 수 있거든요.
 
만약 의사에게 “내가 어디가 아플까요? 한번 말해보세요”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이런 기가 막히는 일이 상담실 안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내담자가 원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상담자가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나는 상담자가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에 묶여서 오랜 시간 고통받은 내담자를 적지 않게 만나왔어요.
 
목회자, 상담자를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자신 위에 군림할 기회를 주지 마세요. 상처로 오랜 시간 고통받으면 약해져서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요. 위로나 통찰력 있는 말 한마디를 해 주면 그에게 의존하게 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요. 끝이 좋지 않거든요.
 
상담이나 심방을 받을 때나 기준을 최대한 낮게 잡으세요. 내가 모르는 상처를 누군가가 기가 막히게 발견해서 치유하는 게 아닙니다. 내 안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는 없어요.
 
이미 충분히 아프고 힘든 문제를 함께 나누세요. 상담하는 과정에서 용기를 얻고 힘을 얻는 거예요. 상담자가 아무리 유능해도 소용없어요. 자기 자신은 결국 자신이 돌봐야 합니다.
 
내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온전히 사랑해주실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같은 질문을 사람이 아니라 예수께 던지면 당신은 안전할 수 있어요. 그분은 당신 위에 군림하거나 당신의 약함을 이용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의존하고 싶은 만큼 예수님을 의존하세요. 그럴수록 당신은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사람이 될 겁니다.
 
상담자나 목회자마다 서로 다른 말을 한다면 답은 한 가지에요. 모든 말과 조언을 평정할 만한 가르침은 결국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묻지 말고, 예수께 여쭈어요. 그분은 당신이 원할 때마다 딱 맞는 일관된 진리를 계속 말씀해주실 겁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까요.

나 같은 사람도 치유될까요?

나는 어릴 때부터 많은 상처를 받고 자랐어요. 치유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 사람들이 나 같은 일을 겪었다면, 치유될 수 있었을까?’라고 속으로 말합니다. 그들이 겪은 일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인생을 살았거든요.
 
인생의 고통은 서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듣고 나보다 더 힘들었다 혹은 덜 힘들었다고 비교할 수 없어요. 각자 말할 수 없이 고통받으며 살아온 삶을 위로하고 격려하기를 바라요. 모두 여기까지 오느라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당신의 질문에서 “다른 사람은 치유되어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데, 나는 아직 치유되지 않았다”라는 서운한 마음이 느껴지네요. 하지만 당신도 치유될 거예요. 단지 조금 오래 걸릴 뿐 입니다.
 
당신의 상처가 다른 사람보다 깊어서가 아닙니다. 상처의 깊이에 따라 치유되는 시간이 결정되는 게 아니거든요. 치유는 하나님의 손에 달렸어요. 하나님 입장에서는 더 큰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더 능력이 필요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이시고, 말씀 한마디로 우리를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마음이 급할수록 치유가 오래 걸린다고 느낄 거예요. 주변을 보면 자신을 빼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치유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 진실이 아니에요. 각자 자기 문제로 충분히 고통받아요. 말끔히 치유된 게 아니라 그 과정 가운데 있습니다.
 
누군가 “나는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 이렇게 치유되었다”라고 말했다고 치유가 끝났다는 의미는 아닐 거예요. 치유가 시작되었고, 과정 중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위축되지 마세요. 당신이 예수님을 만났다면, 당신 역시 치유되는 과정인 겁니다.
 
나도 아내 앞에서 바보처럼 울어버린 적이 있거든요. 아내에게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치유하겠어. 나도 아직 치유되지 않았고, 당신도 행복하지 않은데 내가 어떻게 다른 부부를 돕겠어…”라고 하면서요.
 
예전에 심방을 갔는데 한 부부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며 상담을 요청했어요. 아내가 남편 때문에 살기 싫다고 하는데, 듣고 보니 그 남편이 나보다 좋은 남편이었어요. 나는 생각했어요.
 
‘만약 내가 행복한 가정에서 상처 없이 자랐어도 이렇게까지 힘들까?’
 
내가 보기에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목회자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목회도 편히 하는 것 같았어요. 나는 너무 답답하고 서러워서 아내에게 말하며 엉엉 울었습니다. 아내가 도와준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서 버틸 수 있었어요.
 
나는 지금도 내가 치유되고 있다고 믿어요. 오래 걸리겠지만 기다리려 해요. 조급해한다고 더 빨리 치유되는 게 아니니까요.
 
당신은 남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 았어요. 당신이 겪은 일과 고통은 아무도 모를 거예요. 하지만 걱정 말아요. 주님이 아시고 당신을 도와주실 거예요.
 
당신의 생각보다 더딜 뿐, 치유는 이미 시작되었어요. 주변을 바라보면 속도에 신경을 쓰고,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비교하게 됩니다. 예수님만 바라보세요. 그러면 방향에 신경을 쓰게 됩니다. 그분이 눈앞에 보이면 안심되고,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다면 안전한 거예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걸어요. 몇 걸음 걸었나, 몇 걸음 남았나 계산하지 말아요. 멀어서 안 보이는데, 예수님도 걸어 오고 계세요. 당신이 그분 품에 안겨 함박웃음 짓는 날까지 당신을 응원할게요.

나는 언제 치유될까요?

주변에서는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아요. 언제까지 상처받은 채로 살 거냐고 다그치는 사람도 있어요. 과거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나는 자꾸 왜 이러는 걸까요?
 
누군가 내게 “언제까지 상처받은 채로 살 거냐?”라고 질문한다면 고민하지 않고 답할 거예요. “예수님 오실 때까지”라고요. 상처는 완치되지 않아요. 그분이 오실 때까지, 우리 안의 상처 를 돌보며 살 뿐이에요.
 
상처로 고통받는 사람은 상처가 치유되기를 바랍니다. 너무 힘드니까요. 치유를 과정으로 바라보지 않고, 성취로 바라보면 더 큰 고통이 찾아와요. 치유되지 않는 책임을 자신이 떠안게 되니까요. 오해하지 마세요. 치유는 과정이지 성취가 아닙니다.
 
내 관점에서 치유는 구원과 닮았어요. 사람들은 ‘치유’라는 말을 오해해요. 우리가 복음 안에서 사용하는 치유라는 단어는 국어사전과는 다른 뜻이에요.
 
같은 말이라도 사용하는 사람이나 문맥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보세요. 연인 사이, 부모 자녀 사이에 쓰는 뜻이 달라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도 마찬가지예요. 똑같은 단어를 쓰지만, 일반적인 사랑과는 다릅니다.
 
사전에서 치유는 ‘치료하여 병을 낫게 함’이라는 뜻입니다. ‘다 낫는 것, 완치’를 의미하지요. 이것을 성경 안으로 가져오면 충돌이 일어나요. 성경적인 치유의 관점에서 완치는 없거든요.
 
예수님이 상처 입은 사람을 치유해주실 때, 치유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어요. 치유는 구원 드라마의 예고편 같은 역할을 했지요. 보이지 않는 구원을 눈앞에 보여주기 위한 예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병자가 고통에서 벗어나듯이, 귀신 들린 사람이 억압에서 벗어나듯이, 구원받은 사람도 이와 같을 것이다”라는 뜻이었어요.
 
치유와 구원이 닮았다고 말했으니, 구원에 대해 조금 더 살펴 볼게요. 구원은 심오하고 복잡하지만, 이해하기 쉽게 세 가지 관점에서 설명해볼게요. 하지만 구원이 세 토막이나 삼 단계라는 뜻은 아닙니다.
 
햇빛은 수천 개의 가시광선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우리는 모든 색을 말할 수 없지요. 유치원 아이들은 보통 햇빛을 노란색으로 칠해요. 중고등학생이 되면 햇빛을 프리즘에 통과시키고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 일곱 가지 색깔이라고 말해요. 어른이 되면 햇빛 그 자체로 느끼죠.
 
같은 맥락에서 구원도 이해하기 쉽게 세 가지로 설명하지만, 실제로는 하나입니다.
 
일단,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즉시 구원받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가 그랬지요. 그가 누구든,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았든,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세요. 그리스도를 믿으면 즉시 구원받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구원받은 강도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어요. 만약 그에게 덤으로 인생이 주어졌다면 마땅히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야 했을 겁니다. 즉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점차적으로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따르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노력해서 구원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어요. 예수님을 닮으려 노력한다고 예수님이 될 수는 없지요.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스스로 구원을 완성할 수 없어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게 훨씬 빨라요. 그날 예수님이 약속 하신 대로 우리는 영화롭게 됩니다. 그분이 다시 오시는 날, 구 원이 완성됩니다.
 
구원을 시작하신 분도, 이루시는 분도, 완성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분의 사역이에요. 사람의 노력이나 공로가 끼어들 틈이 없어요. 
 
교리 강의 시간도 아닌데 왜 길게 설명했을까요. 구원과 치유 가 닮았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을 믿은 즉시 우리는 치유됩니다. 그러나 치유는 즉시 완성되지 않아요. 이미 치유된 우리는 아직 치유되지 않은 거예요.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몰아내고 빛으로 나아가야 해요.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우리 안에서는 육신의 법과 하나님의 법이 치열하게 싸웁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끊임없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 포기하지 말아요. 예수님이 오시는 날, 우리의 모든 수고도 끝납니다.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치료의 광선으로 외양간의 송아지가 기뻐 뛰는 것처럼 홀연히 치유될 것입니다.
 
“너 언제까지 상처받은 채로 살아갈 거냐?”라는 말은 내게 “너 언제 완전해질래?”와 같은 의미로 들립니다. 누군가 이렇게 묻 는다면 “아무도 완전할 수 없어요. 누가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 할 수 있을까요?”라고 대답할 거예요. 이제 위축되지 말아요. 누군가 또다시 같은 질문을 던지면 당당하게 대답해요.
 
“나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상처받은 채로 살련다!”
 
성경을 펼쳐놓고 치유되는 삶을 시작해요.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자신 안의 상처를 잘 돌봐요.

예수님이 따뜻하지 않아요

제가 만나는 예수님은 그렇게 따뜻하지 않아요. 과거에 상담을 받았는데, 관계가 어려운 건 원가족과 관련이 있다고 상담사가 말했어요. 부모님께 사랑받지 못해서 그런 걸까요? 예수님이 정말 멀게 느껴져요.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과거를 수용해주세요. ‘내가 그래서 그랬구나. 나는 어쩔 수 없어. 처음부터 잘못된 거야’라고 생각하 면 과거에 발목이 잡힌 거예요.
 
과거를 수용한 사람은 다른 관점으로 과거를 바라볼 수 있어 요. “내게 그런 결핍이 있었구나. 이제부터 나를 돌볼 거야. 절대 방치하거나 외면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할 수 있어요.
 
과거에 얽매인 삶과 수용하는 삶을 구분하는 절대적 기준이 있냐고요? 솔직히 말하면 없어요. 내 관점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과거의 상처를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는가는 스스로 선택해야지 누구도 강요할 순 없어요. 대신 결정해줄 수도 없고요.
 
나는 내 상처의 의미를 혼자 결정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마음은 없어요. 내가 돌볼 수 있는 방식으로 과거를 바라봅니다. 파괴적인 결론을 내리면 절대 나 자신을 돌볼 수 없을 테니까요.
 
잠시 생각해보세요. 누가 부모에게 원하는 만큼의 사랑을 다 받을 수 있을까요? 세상에 완벽한 사랑은 없습니다. 부모 자녀 사이에도 예외가 없지요. 부모가 자녀를 위해 모든 희생을 감내한다 해도, 자녀는 다른 방식으로 부모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어요.
 
나도 세 아이의 아빠지만, 자녀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지 늘 걱정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시지만 자녀들은 그렇지 않을 거니까요.
 
자,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볼게요.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다’라고 결론을 내리면 자신을 돌 볼 수 없어요. 과거를 되돌릴 수 없으니 답답할 뿐이지요. 다른 방식으로 표현해보면 어떨까요?
 
‘나는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어. 하지만 예수님은 부모님과 달라. 나를 온전히 사랑해주실 수 있어. 지금까지 사랑받지 못 한 채로 살아왔지만 이제는 걱정할 필요 없어. 그분이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실 거야.’
 
같은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자신을 방치하고 외면한 채 살아가느냐, 아니면 예수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돌보느냐”가 중요해요. 나는 자신을 돌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방치하거나 외면하지 마세요.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 식으로 말하면 상처받은 사람을 탓하는 거예요. 어디 말처럼 그렇게 선택이 쉬운가요?”
 
맞아요. 그마저 힘들다면 선택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조건 없이 안아주실 겁니다. 그러면 복잡한 과정 없이 사랑받고 끝납니다. 예수님 품에 안긴 사람은 단순해집니다.
 
상처받은 과거가 새로운 의미로 받아들여지지요. 고통스러운 순간마저도 그분이 주신 선물처럼 느껴집니다. 고통의 시간을 잘 지나온 덕분에 그분을 더욱 사랑하게 된 거지요.
 
과거에 얽매이지 마세요. 어제의 당신, 오늘의 당신, 내일의 당신도 예수님의 사랑스러운 자녀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살아온 모든 시간을 사랑하세요. 한없이 따스한 눈빛으로 당신을 바라보시는 그분을 만나보세요.

나를 어떻게 돌보나요?

자기를 돌보자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에요. 하지만 나 자신을 어떻게 돌볼지 모르겠습니다. 자기를 돌보자는 말이 무슨 뜻인가요?
 
먼저 ‘자기 사랑’과 ‘자기 돌봄’이 다름을 말하고 싶어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쓰는지 모르지만 나는 두 단어를 다른 의미로 씁니다. ‘자기 사랑’이란 말 자체를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삶은 때로는 이기적으로 변질될 수 있거든요. 세상은 이미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넘쳐납니다. 또 많은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자는 구호를 외칩니다. 나까지 소리치지 않아도 이미 귀가 아프도록 같은 말을 듣고 있지요.
 
솔직히 ‘자기 사랑’이란 말 자체가 성경적인가 의심스럽습니다. 단정적으로 표현해서 오해를 살까 걱정이 되지만, 기독교는 ‘자기 사랑’이 아니라 ‘자기 부인’을 말합니다. 자신을 부인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를 사랑하지 말고, 나를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이 역설적으로 자신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사랑할 수 없는 이유는,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잘 알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예수님 앞에 서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형편없어도 그분 앞에 서면 고귀한 존재로 변화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만큼 확신 있게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삶이 자기를 돌보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으로 자신을 이끌어주는 삶이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에 관한 말씀, 그분이 하신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은 예수님에 관한 말씀이고, 신약성경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말 그대로 성경 전체입니다. 성경으로 우리 각자를 이끌어가는 삶이 곧 자기 돌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께 사랑받아야 합니다. 나는 상담을 하면서 ‘예수님을 진지하게 따르기는 하지만, 그분께 사랑받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은 예수님이 따뜻하지 않습니다. 그분께 거절당할까,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면서 따르지요. 예수님이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정서적으로 그분을 누리지 못합니다.
 
이것은 말씀 자체의 결함이 아닙니다. 말씀은 그 자체로 완전합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안의 해결되지 않은 상처와 상처로 고통받는 기억이 말씀과 예수님의 사랑을 왜곡시킵니다.
 
나 역시 상처 입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며 누구보다도 열심히 성경을 연구했지만, 그분을 단단히 오해하며 살았습니다. 상처의 렌즈로 말씀을 읽었고, 예수님과 비틀어진 관계로 오랜 시간 고통받았지요.
 
이제, 나는 당신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자신 안의 상처를 돌보는 삶을 시작하자고. 그분의 사랑과 말씀으로 자신 안의 상처를 따뜻하게 돌봐야 치유될 수 있습니다.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