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bpx 김유비닷컴

Tag: 분별

하나님의 위로와 자기 위로를 구분할 수 있나요?

기도하면서 힘들면 주님을 찾잖아요. 가끔은 따뜻한 위로를 받는 것 같아요. 어느 날 갑자기 혼란스러웠어요. 내가 너무 힘드니까 스스로를 위로하는 거 아니야?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자기 위로와 어떻게 다른 가요.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자기 위로를 구분할 수 있나요? 
 
두 가지를 극단적으로 나누는 건 위험한 생각 같아요. 신앙생활에 있어서 정서는 중요해요. 우리는 로봇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고귀한 존재니까요. 자기 위로라도 필요한 사람에게 잘못하고 있다고 손가락질하는 상황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물론,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으로 위로받기를 바라고요.  
 
우리는 주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해요. 적극적으로 말씀을 읽고, 기도할 시간을 우선적으로 확보해야 하죠. 주님이 기도에 응답해주실 수 있겠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기적처럼 응답을 바라지만, 세상 고요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가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속수무책으로 기다릴 필요는 없어요. 주님이 응답하시는 방법을 제한할 필요는 없잖아요. 주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일하시니까요. 
 
그동안 자신에게 은혜가 되었던 성경 구절을 묵상하는 것을 추천하고 싶어요. 신비한 방식으로 말씀해주시지 않아도 걱정할 필요 없어요. 성경을 직접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 자신에게 들려주면 되니까요. 읽고 생각하세요. 그 말씀을 통해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위로를 받으세요. 
 
이 과정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자기 위로가 헷갈릴 수 있겠네요. 거짓말 탐지기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구분하기 어렵겠죠. 그래도 질문하셨으니 내 나름의 생각을 말해볼게요. 
 
하나님의 위로와 자기 위로를 구분하는 가장 결정적인 지표는 ‘무엇에 근거한 메시지인가’라고 생각해요. 자기 생각에 근거한 메시지는 한계가 있어요. 하지만, 자기 위로의 메시지라도 복음적 가치에서 근거하고 있다면, 그건 엄청난 힘을 발휘하겠죠. ‘메시지의 근거가 무엇인가’를 깊이 고민해보세요. 
 
 예를 들어볼게요. ‘너는 소중해. 너는 특별해.” 메시지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이 메시지 들으면 위로받을 거예요. 같은 말이라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이 메시지를 사용할 때는 의미가 다르죠. 자기 암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린다면 그건 성공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볼게요. ‘너는 절대로 끝장나지 않을 거야.’ 자기 암시로 사용한다면, 주문에 불과하겠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로 사용한다면, 이건 믿음의 고백이 될 수 있어요. 그 문장 뒤에 보이지 않는 문장이 하나 더 있으니까요. ‘너는 절대로 끝장나지 않을 거야. 하나님이 지켜주실 거니까.’메시지의 근거가 하나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안전할 수 있어요. 
 
하나님의 위로와 자기 위로를 구분한다는 건 어쩌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한 번쯤 고민해보는 건 좋은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질문해주신 덕분에 답변하면서 나 자신도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었습니다.

회사의 접대 문화가 싫습니다

제가 다니는 회사는 술, 담배, 유흥을 즐길 줄 알아야 승진할 수 있다는 문화가 있습니다. 혼자 힘으로 잘못된 문화를 바꾸기가 너무 힘듭니다. 힘들더라도 참으면서 주님을 의지해야 할까요, 아니면 다른 회사로 옮기는 게 맞을까요? 
 
나도 모르겠습니다. 본인 선택입니다. 그 회사에 남는 게 올바른 선택인지, 회사를 옮기는 것이 올바른 선택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주님만이 아시겠지요. 힘들게 질문했는데, 말장난 하는 것처럼 보일까 걱정입니다. 나는 진실을 말하고 싶습니다. 남을지, 떠날지 본인이 선택하세요. 본인 선택이 정답입니다. 
 
내 주장에 대한 근거를 말해보겠습니다. 인생이라는 미로가 있습니다. 시작점에서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걷다보니 두 개의 문이 나왔습니다. 왼쪽이 1번, 오른쪽이 2번입니다. 선뜻 문을 열지 못하고 중간에서 고민합니다. 문 밖에 뭐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문 하나 잘못 열면 10년 고생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며칠 마음고생하다가 1번 문을 선택했습니다. 문을 열고 뛰쳐나갑니다. 힘든 선택 뒤에 마주한 결과는 당황스럽습니다. 기대했던 결과는 없고 또 다른 문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문이 세 개입니다. 1-1, 1-2, 1-3. 또다시 문을 열면 1-1-1, 1-1-2, 1-1-3, 1-1-4, 1-1-5의 문이 있습니다. 문은 계속 많아지고, 선택은 복잡해집니다. 
 
열어도 열어도 문이라면,“어떤 문을 여는 게 좋을까?”는 좋은 질문 아닙니다. 문이 하나라면 모를까. 열어도 열어도 계속 문이라면, 멈춰서 질문해야 합니다. “어떤 태도로 문을 열어야 할까?” 올바른 태도를 가졌다면, 자신의 선택을 믿어야 합니다. 과감하게 여십시오. 문 뒤에 절벽이 있더라도, 절대로 떨어져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계시니까요. 
 
올바른 선택을 내리지 말고, 올바른 태도를 가지세요. 선택이 아니라 태도가 급합니다. 하나님을 믿으세요. 당신이 실수할지라도 괜찮아요. 하나님은 올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회사에 남아서 견딘다고 승자가 되는 게 아닙니다. 반대로, 회사를 옮겨도 패배자가 되는 게 아닙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항상 태도를 고민하세요. 내가 아는 주님은 언제나 중심을 보십니다. 진심을 다하면, 밖에서 문이 열릴 겁니다. 차례대로 활짝 열릴 거예요. 사람이 문을 열면 미로지만, 주님이 문을 열면 도로입니다.  머지않아 힘차게 달릴 날 올 거예요. 
 
어깨 펴고 회사 다니세요. 당당하게 일하세요. 옮길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떠나세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회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을 책임지십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하고 싶어요

교회에서는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할 기회가 많잖아요. 저는 공감능력이 부족해요. 다른 사람의 힘든 이야기를 들어도 공감이 되지 않아요. 다른 사람의 상처와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이 있나요?  
 
자신이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쉽게 결론 내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정말로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상처와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다른 사람의 상처와 아픔을 공감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는 것은 당신이 공감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다만, 지금보다 다른 사람의 상황에 대해 더 공감하고 싶다는 말이겠지요. 
 
나는 상대방의 아픔에 대해 쉽게 공감하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공감은 언제나 쉽지 않습니다. 공감이라는 말 자체가 “함께 느낀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직접 곁은 일도 아닌데, 마치 같은 일을 겪고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면, 잘못하다 상대방을 동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의도와 달리, 상대방이 자존심 상합니다. 공감을 쉽게 생각할수록 쉬운 사람 되니까 신중해야 합니다.
 
억지로 장단을 맞추면 실패합니다. 다른 방식으로 상대방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마음을 열었다는 것은 이미 당신을 신뢰했다는 뜻입니다. 당신에게 마음을 열고 아픈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는 뜻이지요. 이미 말하고 싶어서 온 거니까, 상대방이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들어주면 됩니다. 곧바로 떠오르는 말이 있어도 입 밖으로 내뱉지 말고 잘 들어주세요. 억지스럽지 않게, 매우 자연스럽게 말입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자신의 감정이 동요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자기감정을 억제하지 말고 솔직하게 함께 느끼면 됩니다. 함께 웃고 싶으면 웃고, 함께 울고 싶으면 우는 겁니다. 나 역시 그렇습니다. 내담자가 울면 나도 함께 웁니다. 내담자가 웃으면 함께 나도 웃습니다. 나는 노련한 상담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따뜻한 상담자가 되고 싶습니다. 
 
공감 잘하는 사람 되기 어렵습니다. 잘 들어주는 사람이 먼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싶은 말 참고 잘 들어주면, 상대방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자신에게 느껴지는 감정을 솔직히 표현해주세요. 웃든 울든, 대화가 끝나면 상대방이 말할 겁니다. 고맙다고, 정말 고맙다고. 그럼, 성공입니다.

누구 말이 옳은 걸까요?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편이에요. 다양한 의견을 듣는 건 좋은데, 가끔은 혼란스러워요. 교회 안에서 목사님, 리더들이 서로 다른 조언을 해주거든요. 누구 말이 옳은 건지 모르겠어요. 
 
아무도 올바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조언이 전부 틀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무리 옳은 답을 내놔도 자매님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 틀린 답이 됩니다. 사람들의 조언을 너무 많이 듣지 마세요. 그러다가, 길을 잃습니다. 이리저리 헤매다 인생 낭비할 수 있어요. 
 
사람들의 조언을 듣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의존적이에요. 상담실 안에서도 흔히 있는 일입니다. 나에게 자기 인생을 결정해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안에는 자신만의 이야기가 숨어 있어요. 자기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자신만의 이유가 있습니다. 찾아내서 돌봐줘야 해요. 
 
이제부터 조언을 구할 때, 상대방의 표정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자신은 오랜 시간 고민하다가 조언을 구했는데, 상대방은 질문을 받은 순간부터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1초도 생각하지 않고 즉시 말합니다. 상대방이 즉흥적으로 던진 조언에 자기 인생을 맡기는 건 정말 위험합니다. 
 
교회 청년들 중에 목사님이나 리더의 말 한마디로 대학 전공이나 직업을 바꾸고, 심지어 진지하게 교제하는 형제자매와 헤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말씀해 주신다고 해도, 신중하게 생각하세요. 그분들은 자매님의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습니다. 함께 고통을 겪지도 않아요. 말 한마디하고 사라집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들도 자매님이 누군지 잘 몰라요. 목사님, 공동체 리더, 소중한 친구들, 멘토, 가족처럼 가까워도 자매님을 온전히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보다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니, 절대로 선택권을 넘겨주면 안 됩니다.  
 
제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사람들의 의견을 듣다 보면, 나중에 그들의 생각에 파묻혀 버려요. 그들의 말에 영향력이 생기면, 그 말을 어기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들의 말이 규범이 됩니다. 사람들 눈치 보면서 인생 살면 그때부터는 불행해집니다. 
 
나도 글 쓴다고 할 때, 주변에서 좋은 소리 못 들었습니다. 나를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반대했어요. “글로 먹고사는 사람 없다. 네 글을 누가 읽어주냐. 글은 써 본 적 있냐.” 헤아릴 수 없는 말을 들었어요. 마음이 아팠죠. 하지만, 나는 스스로 선택했고 계속 글을 썼어요. 
 
막상 책 한 권 나오니까, 똑같은 사람들이 예전과 다른 말을 합니다. “나는 결국 네가 해낼 줄 알았다. 정말 잘 했다.” 만약 내가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선택권을 넘겨줬다면 나는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했을 겁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죠.     
  
귀를 닫고 살면서 사람들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최대한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의견을 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선택은 자기 자신이 내리라는 말이에요. 처음부터 결심해야 합니다. “의견은 듣지만, 선택은 내가 한다.” 그래야 조언을 해주는 사람도 부담이 없습니다. 사람들의 말은 조언일 뿐이지, 법칙이 아닙니다. 
 
자매님을 가장 잘 아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사람들의 조언은 적당히 들으세요. 나도 목회해봤지만, 목사가 세상만사 다 아는 거 아닙니다. 목사 의지하지 마세요. 리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의지하시고 하나님 말씀을 들으세요. 답답하고 두려운 거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걱정 마세요. 실수해도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나는 지극히 정상이야

“정상적인 삶을 원했어요. 제 인생이 이 정도로 망가질 줄은 몰랐죠.” 
 
O는 마흔한 살, 결혼 12년 차, 두 딸의 아빠다. 그는 우울증,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 아내와 사는 것이 힘들다고 말했다. 결혼 초부터 아내의 정신적인 문제가 심각해보였다. 
 
부부 싸움을 했던 어느 날, 아내는 안방으로 들어가 울부짖으며 옷장 안에 있는 옷들을 꺼내 가위로 자르고 손으로 찢기 시작했다. 그가 그만하라고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는 무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더니 가위로 위협했다. 
 
그날 이후, 부부 싸움 할 때마다 이상한 행동을 했다. 신발을 모조리 꺼내 현관문으로 던진다든지, 다리미로 문을 부순다든지. 아내에게 정신질환이 생긴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남편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힘들고 답답한 마음이 들 때마다 새벽에 교회에 가서 기도했다. 12년 동안, 아내를 위해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더 이상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목 놓아 우는 순간,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상처 많은 딸을 네게 맡겼으니 절대로 버리지 마라.’
 
그는 더욱 힘을 냈다.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목사님을 비롯한 교회 사람들에게 아내의 상황을 알렸다. 아내에게 상담을 받자고 설득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거절했다. 
 
아내의 반발은 갈수록 심해졌다. 남편은 다른 사람들에게 아내 문제를 말하고 동의 없이 상담을 신청했다. 아내는 분노했다.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 그녀를 볼 때마다 남편은 속이 터졌다. 견딜 수가 없어서 혼자 상담실을 찾아왔다. 
 
“제가 바라는 것은 기본적인 것들이에요. 아이가 아프면 엄마가 밥에 물이라도 말아 먹이고, 그 다음 약을 먹여야죠. 아내는 애가 아파도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어요. 제가 뭐라도 좀 먹어야 하지 않겠냐고 하면 아내가 기다렸다는 듯 말합니다. ‘당신이 해. 당신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제가 ‘그건 당신이 좀 해줘야지’라고 해도 아내는 눈 하나 깜짝 안 해요. 답답하니까 제가 편의점에 가서 삼각김밥을 사와서 먹여요. 이게 정상입니까?”
 
그는 반복적으로 아내의 문제 행동에 대해 말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저는 아내가 화장실에서 뭘 하고 있는지 몰랐어요. 그런데 갑자기 딸이 배가 아프다는 거예요. 너무 급하다고 해서 아내에게 화장실 문을 열어달라고 했죠. 아내는 안 된다고 해요. 너무 화가 나서 아내에게 당장 문을 열라고 했는데도 안 열어줘요. 
 
아이가 울려고 하기에 손잡이를 힘으로 비틀어 열었죠. 아내가 당황하더라고요. 제가 아내에게 막 뭐라고 했어요. 그것  하나 때문에 아내가 일주일 내내 말을 안 하더라고요. 저는 그런 아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요.” 
 
남편이 계속 말했다.
 
“명절에 제 어머니, 여동생, 아내와 어디 다녀올 일이 있었어요. 운전하는데 길이 막혀 제가 짜증이 난 상태였어요. 그런데 아내와 여동생이 별 것도 아닌 일로 예민하게 대화를 하는 거예요. 서로 싸울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아내에게 그만하라고 했더니 저를 째려보더라고요. 여동생보다 아내가 나이가 더 많아요. 언니가 참는 게 당연하죠. 아내가 뭐하는 짓이냐고 따지기에 그만하라고 했어요. 아내는 멈추지 않았죠. 시어머니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더라고요. 
 
저를 막 비난하는 거예요. 참을 수가 없어서 갓길에 차를 대고 아내에게 소리를 질렀어요. ‘제발, 그만하라고!’ 아내는 혼자 막 울더니 차에서 내렸어요. 그러고는 반대편 도로 쪽으로 건너가더니 골목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거예요. 미칠 노릇이었죠.” 
 
교회 모임에서 그가 마음을 열고 고민을 나누면, 교회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했다. 
 
“고생이 많다. 아내를 위해 기도하자. 언젠가는 변화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도에 응답해주실 것이다.”
 
사람들이 위로해줬지만, 그는 위로받지 못했다. 도저히 버틸 수 없어 포기하고 싶은 생각 찾아올 때, 하나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상처 많은 딸을 네게 맡겼으니 절대로 버리지 마라.’ 
 
그는 생각했다. 힘들다고 아내와 이혼하면 하나님 말씀을 어기는 것이다. 아내만 변화된다면 그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는 더욱 간절히 기도했다. 
 
그는 반복해서 말했다. 아내가 상처 많은 사람이라 계속 문제가 일어난다고. 어린 시절, 그녀는 엄마에게 신체적 학대와 언어폭력을 당했다.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았는지 아내는 엄마 얼굴을 보지 않는다. 남편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아내와 장모님의 관계는 나아지지 않았다. 
 
남편은 아내가 장모님을 용서하지 않으면 좋은 엄마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더 이상 시간 끌지 말고 엄마를 용서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내가 아이들에게 던지는 거친 말들이 거슬렸기 때문이다. 
 
“그만해! 너네 미친 거 아니야? 누구 닮아서 저러는 거야.” 
 
아내 입에 습관처럼 달라붙은 말이다. 거친 말을 들을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는다. 그녀는 자신이 상처 입은 사람이라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남편 역시 역기능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가정 살림을 부수거나 어머니를 때렸다. 폭력적인 아버지 모습을 보면서 청소년기에 방황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했고, 그는 어머니를 따라 집을 나왔다. 
 
남편은 자신 안에 상처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 상처를 신앙의 힘으로 극복했다고 말했다. 군대 생활을 포함한 다른 어떤 대인관계에서도 화를 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상처 많은 가정에서 자랐지만, 그 상처를 극복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확신이 있는 듯 했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일주일 전에 부부 싸움을 하고 아내가 집을 나갔어요. 인도네시아로 가버렸어요. 거기에 아는 선교사님이 계시거든요. 지금 아이들이 방학 기간도 아닌데 혼자 가버리니까 어처구니가 없죠. 
 
제가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어머니, 장모님이 교대로 아이들을 봐주고 계세요. 깊이 고민하고 있어요. 결혼생활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아내 얼굴을 다시 보게 되면 미쳐버릴 것 같아요. 저는 아무리 힘들어도 버텼는데 아내는 힘들다고 아이들을 버려두고 다른 나라로 떠나버렸어요. 엄마가 아닌 거죠. 
 
아내에게 연락이 오기는 했어요. 한 달 뒤에 다시 돌아올 거라고.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다고 말하네요. 미쳐버릴 사람은 아내가 아니라 접니다. 이제 정말 그만하고 싶어요.”
 
아내가 집 나가기 전날 밤, 남편은 이성을 잃었다. 아내가 침대에 누워 휴대폰으로 게임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 짜증이 났다. 남편은 아내에게 말했다. 
 
“내일 새벽 출근해야 하니까, 아이들 재워주고 와.”
 
아내는 아직 잘 시간이 아니라고 말했다. 세탁기 타이머가 10분 정도 남았으니까 조금 있다 재운다고 했다. 그는 아내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벽에 던져버렸다. 아내도 지지 않았다. 남편의 노트북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노트북이 산산조각이 났다. 남편은 이성을 잃고 베란다에서 락스를 꺼내왔다. 그것을 방바닥에 뿌리면서 말했다. 
 
“우리 같이 죽자. 더 이상 살아서 뭐해.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 
 
락스의 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의 아내는 하얗게 질렸다. 다음날, 남편이 출근한 틈에 아내는 남편 곁을 떠나버렸다. 
 
***
 
그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논리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주장한다. 
 
“나는 항상 옳다.” 
 
아마  교회 사람들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이 그의 아내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남편 입장에서 그의 아내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아내의 이상 행동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의 아내를 만날 기회가 없었기에 추측할 뿐이다. 남편의 유창한 말은 아내를 끔찍한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 아내의 이상 행동은, 사람의 감정이 극단적으로 억눌렸을 때 나타는 행동이다. 손으로 옷을 찢거나, 다른 물건으로 문을 부수는 행동은 억눌린 감정을 표출하기 위한 생존수단이다. 
 
안전핀이 빠진 수류탄을 혼자 끌어안고 있다가 내면이 여러 번 산산조각 난 아내는 수류탄을 밖으로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야 그녀도 사니까. 아내의 폭력적인 행동을 정당화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살핀 것이다. 
 
남편과 대화하면 아내는 벼랑 끝에 몰린다. 남편은 싸울 때마다 아내의 감정을 무시하고 오직 이치에 맞는 말, 논리적인 대화만을 원한다. 말 잘하는 남편과 말싸움을 하면 아내는 불리하다. 승자는 언제나 남편이다. 
 
그에게 조용히 묻고 싶다. 그렇게 말을 잘할 필요가 있을까? 또박또박 유창한 말을 하면서 아내를 짓밟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물러서고 싶지 않은 마음은 안다. 아내를 짓밟을 의도가 없다는 것도 안다. 그렇다면 당신의 의도는 무엇인가? 진지하게 생각해보라.  
 
남편은 반복해서 말했다. 
 
“나는 정상적인 가정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가정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문장이 하나 숨어 있다. 
 
“나는 지극히 정상입니다.”
 
이 문장을 앞의 두 문장 사이에 끼워 넣으면 그의 신념을 분명이 알 수 있다. 
 
“나는 정상적인 가정을 원했습니다. 나는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결혼생활을 파괴하고 있던 왜곡된 신념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 신념의 실체는 다음과 같다. 
 
“나는 정상적인 가정을 원했습니다. 나는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내가 정상이 아니거든요.”
 
남편은 무의식 중에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있다. 
 
“내 아내는 정상이 아니에요. 당신도 그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고통 받고 있는지 아셔야 해요. 내가 비정상적인 여자와 결혼을 해서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기 위해 얼마나 헌신적으로 노력하는지. 저는 신앙의 힘과 강한 의지력으로 이혼하지 않고 버텨왔습니다. 당신도 이것을 인정해줘야 합니다. 하나님도 인정하셨거든요. 상처 많은 아내를 위해 내가 얼마나 희생하고 있는지.” 
 
남편은 정상이고, 아내는 비정상이라는 말은 전혀 근거가 없다. 여기 등장하는 남편뿐만 아니라 많은 부부가 자신이 아닌 배우자에게 문제가 있다고 근거 없는 결론을 내린다. 
 
“나는 문제가 없어. 당신이 문제야.”  
“제가 왜 상담을 받아요? 저는 문제가 없어요.” 
“왜 저한테 뭐라고 하세요? 저는 잘못이 없는데.” 
“아무리 노력하면 뭐합니까? 저 사람은 노력하지 않는데.” 
 
부부 상담은 개인 상담보다 효과가 낮은 경향이 있다. ‘비난할 대상’이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결혼 전 남녀는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의지를 가진다. 부모에게 받은 상처, 다른 사람에게 받은 상처, 어찌되었건 피해자는 자신이다. 그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피해를 입는다는 것을 안다. 상처를 인정하고 그것을 돌보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부 상담은 다르다. 비난할 대상이 바로 눈앞에 있기 때문에 문제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하기 어렵다. 
 
“잘못한 사람은 바로 접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제게 있습니다. 저만 변화되면 우리 가정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나는 아직 한 번도 만난 본 적이 없다. 
 
남편이 아내보다 월등히 성숙한 사람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남편 말이 사실이라면, 아내가 아무리 상처 많은 사람이라도 결혼생활 12년 동안 치유되고 성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아내의 상처가 악화된 것처럼 보인다. 없던 상처도 생긴 것 같다. 그러므로 남편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남편은 아내보다 월등히 성숙한 사람이 아니다. 남편과 아내, 두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 그 증거가 현재 둘의 상황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남편의 폭력적인 성향이 아내를 두렵게 했고, 아내는 남편과 아이들을 내버려두고 다른 나라로 떠나버렸다.  
 
하늘에서 내린 비는 낮은 곳에 고인다. 높은 곳에는 절대로 물이 고이지 않는 법이다. 참회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있는 말이다. 참회하는 사람만이 성장할 수 있다. 참회를 모르는 사람에게 은혜가 임할 자리는 없다. 
 
은혜가 사라진 기독교는 종교가 되어버린다. 내용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은 껍데기가 되는 것이다. “자기 의로움을 주장하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입증하라”라는 교리는 기독교에 없다. 
 
‘상처 많은 딸을 네게 맡겼으니 절대로 버리지 마라.’ 
 
남편이 마음에 간직한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닐 것이다. 자기 의로움에서 비롯된 말이다. 자기 위선이 하나님 말씀으로 위장하는 순간, 행복은 더욱 멀어진다. 
 
“차라리 속이 시원하네요.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주위 사람들은 제가 옳다고 말했죠. 이제 알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아내가 힘들어했는지. 맞아요. 제 잘못도 있어요. 100퍼센트는 아니지만. 어떻게 그 사람에게만 잘못이 있다고 말하겠어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그의 말이 진심이기를 바랄 뿐이다. 그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적나라하게 지적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의 진심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술대에 누워있는 환자가 의사에게 “다른 부위에도 암이 퍼졌다면 모조리 제거해주세요”라고 말할 때, 알겠다고 말하는 의사는 없을 것이다. 
 
수술 부위를 열었을 때, 암이 사방팔방 퍼져있으면 일단 덮는 것이 맞다. 여기저기 헤집다가 봉합도 못한 채 환자가 깨어난다면, 그것은 재앙이다. 보인다고 다 떼어낼 수는 없지 않은가. 한 번에 하나씩이다. 환자가 여러 번 수술대 위에 눕더라도 천천히 가야 한다. 
 
시간이 없다면 악성 종양부터 떼어내자. 악성 종양은 ‘자기 우월감’이다. 빨리 떼어내지 않으면 ‘결혼’이라는 환자는 죽는다.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