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bpx 김유비닷컴

Tag: 베드로

두려움은 잠잠하라

From 베드로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 우리는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화창한 날씨에 무료함을 느꼈지요. 예수님은 피곤하셨는지, 배 밑으로 들어가 잠시 눈을 붙이셨습니다. 나와 다른 제자들도 여기저기 쪼그려 앉아 꾸벅꾸벅 졸았지요. 
 
평온함도 잠시, 안드레가 나를 흔들어 깨우며 말했습니다. 
 
“형, 큰일 났어!”
 
잠에선 깬 나는, 눈앞의 광경에 깜짝 놀랐습니다. 시커먼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내리고, 비바람이 거세게 불었습니다. 파도는 배를 집어삼킬 듯이 미쳐 날뛰었습니다. 배에 물이 가득 차서, 침몰하기 직전이었습니다. 
  
우리는 곧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나는 다급하게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배밑으로 내려가, 예수님께 소리를 지르듯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죽습니다!” 
 
뒤돌아 누워 계시던 예수님이 몸을 돌려 일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없이 계단을 오르시고, 배 위에 섰습니다.  비바람이 예수님의 따귀를 때리듯, 거칠게 달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미쳐 날뛰는 시커먼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잠하라.” 
 
예수님의 목소리는 짧고 묵직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바다가 잠잠해졌습니다. 시커먼 먹구름이 물러가고, 비바람이 그쳤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밝은 햇살이 물결 위에서 보석처럼 빛났습니다.  
 
예수님이 침묵을 깨고, 물으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솔직히, 나는 두려웠습니다. 
 
만약 내가 바다에 대해 몰랐다면, 덮어놓고 대충 생각했겠지요. ‘설마 우리가 죽겠어? 이러다 말겠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 순진할 수 없었습니다. 어부였으니까요. 
 
나는 갈릴리 바다를 내 손바닥처럼 잘 알았습니다. 바람의 강도와 파도의 높이를 파악한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습니다. 
 
‘우리 모두 끝장이다.’  
 
내 두려움은 현실적이었습니다. 차라리 내가 바다에 대해 몰랐기를 바랄 정도였습니다. 
 
변명처럼 들렸을지도 모르지만, 내 솔직한 심정입니다. 비바람이 몰아칠 때, 내 눈앞에서 끔찍한 장면들이 생생하게 펼쳐졌습니다. 현실을 아는 만큼, 나는 두려웠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예수님께서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우리의 믿음 없음을 탓하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부족한 믿음을 소중하게 여겨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비난하실리 없지요. 
 
예수님의 말씀을 조금 더 분명하게 표현해 보겠습니다. 
 
“왜 너희 믿음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냐?” 
 
예수님은 우리의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신 겁니다. 두렵고 다급한 상황에서, 믿음을 사용하기 원하셨습니다. 부족한 믿음이라도, 사용하라는 것이지요. 
 
위기의 상황에서, 두려움에 끌려다니지 말고, 현실에 매몰되지 말고, 작고 초라한 믿음이라도 발휘하라는 예수님의 부탁이셨습니다.  
 
우리가 배에 오르기 전,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바위 위에 뿌려진 씨앗은 뿌리를 내리지 못해, 곧 말라죽게 된다.” 작은 믿음이라도, 예수님께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말씀이었지요.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이 험하고 무섭지요. 현실의 두려움을 무시하기에는, 당신은 너무나 현실적입니다. 이미 너무나 많은 아픔을 겪었겠지요. 아는 만큼, 무서울 겁니다. 
 
당신의 그 두려운 마음, 예수님이 아십니다. 보잘것없는 믿음으로, 다급하게 예수님을 부르는 것이 당신과 나의 형편입니다. “내 인생 끝장났다고….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말하는 것이 전부겠지요. 
 
당신에게 부탁합니다. 믿음 없다고, 자책하지 마세요. 위기의 순간에, 당신의 그 작은 믿음을 사용하세요. 작고 초라한 믿음이라도 괜찮아요. 힘껏 발휘하세요. 
 
당신이 다급한 목소리로 “주님!”이라고 부를 때, 예수님은 일어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잠잠하라.” 
 
당신이 예수님을 부를 때, 두려움은 놀라움으로 바뀝니다. 
 
당신을 잡아먹을 듯 미쳐 날뛰는 지독한 현실은 잠잠해질 것입니다. 당신을 집어삼킬 듯,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는 지독한 감정도 잠잠해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차분한 목소리로, 오늘 하루도 당신이 침착하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잠시 흔들릴 뿐, 절대로 끝장나지 않습니다.

용서는 무한 반복이에요

<마태복음 18:21-22>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주님, 형제가 제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
 
반복해서 상처를 주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관계를 단절하고 떠나버리고 싶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발목이 잡혀요. 
 
상처 준 사람이 한없이 가벼운 말 한마디로 미안하다고 말할 때, 용서해야 한다는 의무감. 그를 미워할 때마다 찾아오는 죄책감.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에요. 
 
만약 반복적으로 상처 주는 사람에게 반복적인 고통을 겪고 계시다면, 성경을 오해하신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을 풀어드릴게요. 오해 없이 들어주세요.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했어요. “예수님, 용서를 구하는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할까요? 일곱 번이면 될까요?” 
 
베드로는 왜 일곱 번이라고 질문했을까요? 일곱은 유대인의 문화에서 “완전 수”였어요. 7이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바가 있었지요. 일곱 번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베드로가 추측했던 거예요. 
 
예수님은 베드로의 예상을 깨고 전혀 다른 대답을 하세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라.” 7 곱하기 70을 해서, 490번을 용서하라는 의미인가요? 아니에요. 용서의 횟수에 제한을 두지 말라는 뜻이에요. 
 
예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바보처럼 살기를 원하시는 걸까요? 상처 준 사람이 하루에 490번씩 우리를 괴롭히는데, 그때마다 용서하라니요. 아무리 예수님이시라도, 너무 하시는 것 같아요.
 
일단, 침착하세요. 예수님을 오해하시면 안 돼요. 예수님의 의도를 아셔야 해요. 
 
당시의 바리새인은 율법을 의미를 왜곡해서,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하고 합리화했어요. 바리새인들은 딱 세 번만 용서했어요. 네 번째에는 그 사람을 정죄해 버렸어요. 
 
네 번째부터는 더 이상 용서하지 않아도 해도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었죠. 율법을 자기들 멋대로 왜곡하는 상황을 예수님이 따끔하게 지적하신 거예요. 
 
베드로가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일곱이라고 넉넉하게 숫자를 부풀려 말했는데, 그조차 충분하지 않았던 거예요. 
 
율법의 참된 가르침은, 용서는 끊임없는 과정이라는 거예요. 끔찍한 일을 경험해 보세요. 용서라는 말을 떠올리고 싶지도 않을 거예요. 상처를 준 사람이 찾아와서, 용서를 운운하는 것조차 헛구역질이 날 정도니까요. 
 
상처 준 사람이 눈앞에 없을지라도, 상처의 고통은 하루 일곱 번씩 일흔 번 반복될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횟수의 제한을 두지 말고 상처의 고통을 예수님께 가져다주세요.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일곱 번, 다시 일흔 번…. 절대로 멈추지 마세요. 상처의 고통을 끌어안고 아파하지도 마세요. 예수님께 가져다주셔야 해요. 
 
일곱 번씩 일흔 번, 예수님께 내어맡기면서, 차분하게 기다리세요. 시간 오래 걸려요. 자책과 정죄는 용서할 때까지, 잠시 미루세요. 예수님도 일곱 번씩 일흔 번, 충분히 이해하세요.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