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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믿음

마음 편히 물어보렴

나는 네가 의심 없이 
믿기를 바라지 않는단다
 
네 안에 찾아드는 수많은 
질문들을 억누르지 말거라 
 
네가 나를 온전히 믿으려면 
수많은 질문이 필요하단다
 
내게로 와서 
마음 편히 물어보렴
 
나는 오히려 네가 아무런 질문 없이 
맹목적으로 믿을까 걱정스럽단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세상에 왔는지
깊이 생각해 보거라 
 
남이 말해 준 내가 아니라 
네가 직접 만난 내가 되기를 바란다 
  
나의 사랑이 너의 마음에 닿을 때 
너의 믿음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단다
 
나를 더욱 알고 싶다면
나의 말씀을 읽거라
 
모든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에 대한 기록이란다 
 
밋밋한 글자들이 
너의 눈물로 희미해질 때
첫 만남이 시작되는 거란다 
 
서두르지 말거라
너는 이미 충분하단다 
 
사랑한다, 나의 자녀야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누가복음 7:19

하나님을 비웃어 버렸다

<창세기 17:17>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웃으며, 마음으로 혼잣말을 했습니다. “어떻게 백 살이나 먹은 사람이 아기를 낳을 수 있을까?
 
From 아브라함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다고 하셨을 때, 나는 비웃었어요. 당연하지요. 나는 이미 100세였고, 아내 사라는 90세였습니다. 늙을 대로 늙은 두 사람이 어떻게 아들을 낳겠어요? 
 
나는 말했습니다. “아이고, 하나님. 됐으니까, 지금 있는 아들에게나 복을 주세요. 종의 몸을 통해서 낳았지만, 그래도 내 자식입니다.” 
 
믿음 없는 말이지요? 하나님을 조롱할 의도는 없었지만, 그렇게 됐습니다. 무심결에 말해놓고, 잔뜩 긴장했지요.  
 
믿음 없다고 혼내실 줄 알았거든요. 별 볼일 없는 믿음에 실망해서, 나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나버리실까 걱정했지요. 
 
하나님의 반응은 내 예상과 달랐습니다. 
 
“그래, 네가 말한 그 아들에게도 복을 주겠다. 하지만, 그 아들이 내가 약속한 자녀는 아니다. 내년 이맘때 네가, 자녀를 낳을 것이다. 내가 약속한 아들이다.” 
 
하나님은 믿음이 부족한 나를 이해하셨습니다. 은혜를 베푸셨지요. 나는 당황했습니다. 덤으로, 종의 몸에서 난 아들까지 축복해주셨으니까요.    
 
내 아내 사라도 믿음이 부족한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남편에 그 아내였을까요? 아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속으로 비웃어버렸습니다. 
 
“그렇면 좋게요? 남편과 내가 이렇게 늙었는데,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겠어요?” 
 
그 당시 나와 아내는 하나님을 잘 모르고, 우리의 처지를 스스로 비웃고 조롱했지요. 
 
나도 내 나름대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내 현실이 너무나 슬프고 끔찍해서, 하나님이 바꾸실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지요. 
 
“아무리 하나님이시라도, 내 상황은 못 바꾸신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믿음 없는 나에게 막상 아들을 주시자,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비웃던 사라는, 기쁨의 웃음이 터져버렸습니다. 아이를 품에 안고 하나님을 찬양했지요.   
 
“하나님께서 내게 웃음을 주셨다.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도 나처럼 웃게 될 것이다. 내가 아이를 낳을 수 있으리라고 어느 누가 알았겠는가!”
 
그제서야, 나는 기억났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아셨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말씀입니다. 
 
“네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아들을 낳으면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여라.” 
 
내 아들의 이름은 처음부터 “이삭”이었어요. 이름의 뜻이 “웃음”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웃음”을 주신다고 했는데, 나는 믿지 못해서, 하나님을 비웃어 버렸습니다.  
 
내가 훗날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린다니, 부끄러울 뿐입니다. 내 믿음으로 이룬 결과가 아닙니다. 믿음 없는 나에게 거저 주신 은혜입니다. 
 
인생이 힘들 때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땅만 쳐다봅니다. 엄연한 현실 앞에서, 감히 꿈조차 꿀 수 없습니다. 형편과 처지를 탓하며, 자신을 조롱하고 비웃습니다.  
 
나는 부탁합니다. 당신의 믿음을 하찮게 여기지 마세요. 당신의 믿음이 부족해서, 하나님이 못 도와주실 것이라 단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입니다.  
 
당신이 힘들어서 웃을 수 없다는 걸 압니다. 나도 그랬으니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셔서, 우리를 잘 아십니다. 우리의 연약한 믿음마저도 배려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나는 당신을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약속하신 모든 일을 이루십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마세요.   
 
결국, 당신도 웃게 될 겁니다.  

내가 반드시 이루어 줄 것이다

나의 자녀야, 
쫓기듯 살아가지 말거라
 
네가 원하는 것을 
이미 가졌다고 상상해 보렴
 
이미 가진 사람처럼 믿고 
당당하게 행동하거라
 
내게 사랑받으려 애쓰지 말고
나의 사랑을 믿고 받아들이렴
 
너는 나의 사랑스러운 자녀이고 
따뜻한 미소로 너를 바라본단다
 
내게 인정받으려 애쓰지 말고 
이미 인정받았다고 믿고 받아들이렴
 
네가 자격 없는 사람이라 말할 때
너는 이미 자격을 갖춘 거란다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해 
쫓기듯 살아가는 너를 보면
나는 속상하단다
 
네가 추구하는 것을 가지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게 아니란다
 
나는 네 안에 있고 
너는 나로 인해 모든 것을 가졌단다  
 
모든 것을 가진 사람처럼 
믿고 말하고 행동하거라
 
너에게는 단지 
시간이 필요할 뿐이란다
 
쫓기고 불안한 삶을 살면서 
오늘 하루를 희생하지 말거라
 
나를 믿고 의지하거라 
내가 너의 소원을 이루어 줄 것이다 
 
사랑한다, 나의 자녀야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린도후서 6:10

성장은 커지는 게 아니에요

<에베소서 4:15> 

사랑으로 진리만을 말하고,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모든 면에서 성장하도록 하십시오. 
 
성장은 커지는 게 아니에요. 더 높이 더 멀리 나아가는 것이 성장일 수 없어요. 바울이 말한 성장은, 연합이에요.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이죠. 
 
복음이 말하는 성장은 친밀감이죠. 예수님과 가까워지는 거예요. 매일매일 조금씩 예수님과 가까워지고 있다면, 그것은 성장이에요.  
 
어쩌면, 그마저도 쉽지 않겠죠. 서 있을 힘조차 없어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을지도 몰라요. 예수님은 점점 멀어지고, 다른 사람들은 나를 앞질러 가버리고. 불안하고 무섭죠.   
 
예수님을 오해하시는 거예요. 우리의 노력으로 예수님에게 나아갈 수 없어요. 우리가 이미 예수님의 자녀라면, 그것은 선물이죠. 예수님이 찾아와 만나주셨거든요. 
 
아무리 성장해서 높아진 들,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겠어요. 예수님을 간절히 바라만 볼 뿐, 우리 힘으로 거리를 좁힐 수 없어요. 예수님도 아시죠. 우리가 포기해 버릴까 봐, 다시 오신다고 약속해 주셨어요.  
 
우리가 낙심해서 바닥에 주저앉아 항상 제자리에 있어도, 예수님이 다가와 손잡아 주시면, 성장이에요. 거리는 좁혀졌고, 예수님이 가까워졌으니까요. 
 
성장하지 못한다고 자책하지 말아요.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해요. 예수님과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 그것이 성장이에요. 

나의 말씀을 심고 가꾸거라

감정을 따라 
너의 믿음을 평가하지 말거라
 
감정은 언제나 요동친단다
결실을 맺으려면 인내가 필요하단다
 
말씀을 듣고 잠시 기뻐할 수 있지만 
기쁨을 오래 지속하기는 어렵단다
 
세상은 온갖 유혹과 시험으로 
너를 쓰러뜨리려 할 거야
 
나의 사랑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거라
 
유혹에 꺾여 넘어졌을지라도 
낙심하지 말거라
 
내가 너를 일으켜 세우고 
새로운 힘을 공급해 줄 것이다
 
강해서 넘어지지 않는 것이 
인내가 아니란다
 
약해 넘어졌을지라도  
다시 일어나는 것이 인내란다
 
내 손을 잡고 일어나렴 
너는 회복될 수 있단다  
 
너의 마음 밭에 
나의 말씀을 심고 가꾸거라 
 
네가 백 번을 넘어질지라도 
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단다
 
백 번을 사랑한다 말해주고 
백배의 결실 맺게 할 거란다
 
너는 내게 기쁨을 주는 
인내하는 자녀란다
 
사랑한다, 나의 자녀야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누가복음 8:15

성경이 믿어지지 않아요

나는 성경이 믿어지지 않아요. 
문제가 있는 걸까요. 
 
언제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내가 의심이 많데요. 
그래서 믿음이 자라지 않는다고.
 
나도 믿고 싶어요. 
뜻대로 안되는 걸 어쩌죠. 
 
도저히 믿기 어려워요.  
성경에는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섞여 있어요. 
 
바다가 둘로 갈라졌다든지
바위에서 물이 나온다든지. 
 
말이 안 되잖아요. 
목사님은 다 믿으시나요. 
 
네, 믿어요. 
하지만, 믿기까지 힘들었어요. 
 
주변에서 무조건 믿으라고 할 때 
마음이 답답했어요. 
 
나중에 믿고 나니까 
그게 그 뜻이구나 했죠. 
내가 느낀 걸 말해볼게요. 
 
믿음에는 순서가 중요해요. 
순서가 바뀌면 오해가 생겨요. 
 
지식은 이해되면 믿어져요.
말씀은 믿어지면 이해돼요.
 
무슨 말인지 설명해 볼게요. 
잘 들어보세요.  
 
우리가 지식을 배울 때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되지만 
이치를 깨달으면 믿어져요. 
 
지식이 이해되지 않을 때까지는 
지식이 나보다 우월해요. 
 
지식을 이해하고 나면 
지식은 나보다 열등하죠. 
 
어려워서 풀지 못하는 
수학 문제를 만나면 주눅 들지만  
 
한 번 풀어버린 문제는 
시시하잖아요. 
 
이해된 지식은 나보다 열등해요. 
내가 정복하고 그 위에 올라서요. 
 
말씀은 어떤가요. 
완전히 이해되지 않아요. 
 
처음 읽는 순간부터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돼요. 
 
어떤 사람은 말하죠. 
이해를 못하는데 어떻게 믿어. 
 
나는 거꾸로 말하고 싶어요. 
이해되는데 왜 믿어. 
 
이해되면 이해된 거예요.
믿고 안 믿고 할게 없어요. 
 
말씀은 지식과 달라요. 
믿고 난 다음에 이해돼요. 
 
하나님이 내 머리로 다 풀려버리면 
하나님이 아닌데 믿을 이유가 없죠. 
 
오해하지는 마세요. 
덮어놓고 믿는 건 아니에요.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요. 
조금만 더 들어주세요. 
 
바다가 둘로 갈라지는 이야기 
바위에서 물이 나오는 이야기
나도 믿기 어려웠어요. 
 
상식적으로 말해볼게요. 
사람을 처음 만나면 우리는 신중해져요. 
 
상대방의 말과 행동을 먼저 살피죠.
쉽지는 않아요.   
 
말과 행동이 전부가 아니거든요.
같은 말을 하더라도 느낌이 달라요.  
 
말은 거칠어도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있죠. 
 
말은 따뜻해도 
마음이 차가운 사람도 있어요. 
 
처음에는 몰라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해요. 
함께 오래 있다 보면 알게 되죠. 
 
우리는 무엇으로 그 사람을 
느끼고 있는 걸까요.  
 
생각을 깊게 안 해서 그렇지 
따져보면 정확하게 몰라요.  
 
하지만, 일단 사람을 신뢰하면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신뢰해요.  
 
가끔 황당한 말을 하더라도
저 말을 왜 할까. 
이유가 있겠지 생각하죠. 
 
나는 말하고 싶어요. 
성경을 전부 믿고 싶다면.  
먼저 하나님을 믿어야 해요.
 
사건에 집착하면 
하나님 못 믿어요. 
 
사람을 처음 만나 
계산기를 두드리는 사람은
친구 사귀기 힘들어요.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사건을 따지기 시작하면 
하나님 만나기 어려워요. 
  
하나님을 알고 싶다면 
먼저 하나님과 친해지세요. 
 
함께 대화하면서 
시간을 보내세요.  
 
조급할 필요 없어요.
자책할 필요 없어요. 
시간이 필요할 뿐이에요. 
 
그가 느껴지기 시작하면
당신은 결국 믿게 될 거예요.
 
그가 하신 모든 말을. 
그가 이루신 모든 일을. 

시험은 피할 수 없어요

<누가복음 4:1-2>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성령 충만하면, 사탄이 공격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항상 성령 충만해야 한다.” 
 
언뜻 들으면 맞는 말 같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어요. 내 생각은 조금 다르거든요. 아무리 성령 충만해도 시험을 피할 수 없어요. 
 
예수님은 성령이 충만하셨지만, 시험을 당하셨어요. 사탄은 물러서지 않았어요. 예수님을 쓰러뜨리려고 40일 밤낮으로 덤벼들었죠. 
 
누군가 우리에게, “당신은 성령 충만합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당당하게, “네!”라고 대답할 수 있겠어요. 교만해 보이잖아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목말라요. 더 사랑하고 싶고, 더 가까워지고 싶어요. 항상 부족하게 느껴져요. 
 
성령 충만하고 싶지만 성령 충만하지 못한 거죠. 아쉬우니까, 자책하게 돼요. 
 
‘내가 요즘 느슨해. 사탄이 나를 우습게 봐. 사탄도 그걸 알아. 나는 사탄의 밥이야. 툭하면 나를 건드려.’ 
 
시험을 피하려고 하는 사람은, 시험이 찾아올 때 억울하고 속상해요. 시험을 감당할 힘조차 없다면, 하나님이 원망스러울 거예요. 
 
시험은 필수에요. 예수님은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셔야 했어요. 아담은 유혹에 넘어갔지만, 예수님은 유혹을 이겼어요.
 
예수님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에요. 싸움에 임할 때, 우리가 앞장서면 안 돼요. 우리는 예수님 뒤로 피해야 해요. 예수님이 우리 대신 싸워주세요. 
 
광야에 홀로 섰다면 기억하세요. 당신은 절대로 혼자가 아니에요. 먼저 시험받으신 예수님은, 당신을 외면할 수 없어요. 
 
넘어지고 쓰러지더라도, 끝난 게 아니에요. 일어서서 보듬고 다시 시작하세요. 이미 승리하신 예수님이, 당신을 끝까지 책임져 주실 거예요.

첫 발을 내딛거라

나의 자녀야, 
지친 너를 위로하고 싶구나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사람은 
쉽게 탈진한단다
 
이미 난 길을 걷는 것보다 
없는 길을 만들며 걷는 것이 
몇 배나 힘이 들기 때문이란다
 
네가 지친 것은 네가 약해서가 아니라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기 때문이란다
 
힘이 들면 잠시 쉬거라
쉬었다 가도 늦지 않는단다
 
경쟁하지 말고 편히 걷거라
이 길에는 너와 나 둘 뿐이란다 
 
사람들의 평가에 무뎌지거라
남보다 뒤처질 두려움에서 벗어나거라
 
아무도 밟지 않은 곳에 
첫 발을 내딛거라 
 
너의 발자국을 보며 
다음 사람이 따르게 하거라
 
먼저 걷는 길은 외로운 길이란다
 
포기하지 말거라
 
나는 광야에 길을 내는 
살아있는 너의 하나님이란다
 
사랑한다, 나의 자녀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이사야 43:19

기다림이 은혜입니다

<출애굽기 14:14>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하시오.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위해 싸워 주실 것이오.
 
나는 자주 무너집니다. 일에 진보가 있을 때는 삶에 의욕이 넘칩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낙심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성과가 없다고 느껴지면, 나도 모르게 지칩니다. 
 
내 글쓰기가 작년보다 더 나아졌을까요? 글쎄요. 내 글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될까요? 모르겠습니다. 나는 기질적으로 내 성취에 도취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제자리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무얼 하겠다고 이렇게 바보같이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절망적인 생각에 사로잡히면, 혼자 조용히 무너집니다. 무슨 걱정이 그리 많은지, 며칠 전에, 새벽이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잠을 포기하고 책상 앞에 앉아 성경을 펼쳤습니다. 참 희한합니다. 아무리 걱정이 많아도 말씀을 읽다 보면, 무엇 때문에 걱정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립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놀라지요. 걱정은 사라지고, 은혜만 남습니다. 
 
“보아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높은 곳에서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라.”
누가복음 24:49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성경을 쭉 읽어내려가는데, 불쑥 이 말씀을 만나게 하신 것이죠. 울컥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내게는 이렇게 들렸습니다. 
 
“기다려라. 기다림이 능력이다. 나의 때가 있다. 내가 하늘 문을 연다. 나의 때에, 나의 일을 할 것이다. 그때까지 머물러야 한다. 무섭다고, 두렵다고 도망치지 말거라.”
 
주관적인 해석일 수도 있겠지요. 다음 날 아침 일찍 본문을 연구했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가 성경의 맥락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걱정하지 말고 마음 편히 푹 자라고 은혜를 베푸신 것이지요. 
 
예수님이 눈앞에서 사라진 마당에,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로마 군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의 시선을 피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벗어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까, 그저 순종한 것이지요. 두려웠지만, 머물렀습니다. 
 
“머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사도행전과 연결해서 읽으면, 그 뜻이 명확해집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과 성도들이 기도하다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셨을 때, 놀라운 광경이 펼쳐집니다. 술에 취했다 조롱하는 사람들을 향해, 베드로가 담대히 설교합니다. 베드로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꿰뚫어, 예수님이 메시아였다고 선포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변화된 사람들이 삼천 명입니다. 쾅 하고 방아쇠를 당기듯,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질주하듯, 온 세계 열방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온 세계로 전해지는 복음이지만, 그 시작은 유대의 중심 예루살렘이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약속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예루살렘에 머물게 하셨고, 성령을 보내주셨고,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세상은 가만히 있는 사람을 무시합니다. 하나님은 가만히 있는 사람을 주시합니다.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능력을 베푸시고 붙잡아 사용하십니다. 
 
머무는 것이 능력입니다. 기다림이 은혜입니다. 노력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두렵다고 먼저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도망가고 싶어도, 참고 머무르며 지속하십시오. 포기하고 싶은 그 순간에, 하늘 문이 열립니다. 
 
가만히 울고 있는 당신을 위로하고 싶습니다. 가만히 있는 당신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두렵고 무서워도 머물러 주세요.
 
나도 당신 곁에 머물겠습니다. 절대로 도망가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무능한 나를 통해서라도, 예수님의 사랑이 당신에게 전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것만으로 나는 충분합니다.

믿음을 크기로 비교하지 마세요

<누가복음 8:2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믿음을 크기로 비교하지 마세요. 믿음은 크고 작음으로 표현할 수 없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믿음의 크기에 놀라신 게 아니에요.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믿었기 때문에 놀라신 거죠. 
 
믿음은 크기와 상관없어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의 크기는 겨자씨 만큼이에요. 예수님은 겨자씨만큼만 믿어도, 산을 뿌리째 뽑아서 옮길 수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보다 더 큰 믿음을 가지려 애쓰는 것은, 어쩌면 낭비일지도 몰라요. 
 
믿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해요. 믿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겨자씨만큼이라도 믿으라는 것이죠. 절망 속에서 믿음을 사용한다면, 예수님은 기뻐하세요.
 
폭풍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이 물으셨어요.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예수님은, “왜 못 믿어?”가 아니라, “왜 믿음을 사용하지 않았니?”라는 물으셨어요.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속에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고 보신 거예요. 하지만, 제자들은 위기 상황에서, 믿음을 사용하지 않았어요. 
 
당황하면 그럴 수 있어요. 누군가 갑자기 동전을 달라고 하면, 다급하게 주머니를 뒤지겠죠. 아무리 찾아도 동전이 나오지 않아서 없다고 말했는데 집에 가서 보니까, 속주머니 깊은 곳에서 동전이 나와요. 없었던 게 아니라 있었는데, 못 찾아서 못 준 거죠. 
 
폭풍을 만난 제자들은 다급해서 믿음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어요. 예수님께서 배에 함께 타고 계신 것조차 잊어버렸으니까요. 사력을 다해 폭풍과 싸우다 승산이 없자, 누군가 허공에다 한 마디를 외쳤을 거예요. “가서, 예수님을 깨워!”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바람과 성난 파도를 말씀 한 마디로 잠잠하게 하실 수 있으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잊어버렸어요. 예수님과 함께라면, 당연히 죽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조차 못 했던 거죠. 
 
겨자씨보다 믿음이 작다면, 믿음을 키우세요. 겨자씨보다 믿음이 작다면, 어쩌면 믿지 못하시는 거니까요. 하지만, 겨자씨만큼이라도 믿는다면, 더 이상 크기를 탓하지 마세요. 크기는 상관없어요. 
 
겨자씨만큼 작은 믿음이라도, 주저하지 말고 사용하세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더욱 믿음을 사용하세요. 잠시 흔들릴 뿐, 당신은 절대로 끝장나지 않을 거예요. 
 
작고 작은 믿음이라도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랄 때, 예수님은 기뻐하세요.  

불확실성, 믿음을 사용할 기회

<창세기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면, 하나님이 정확한 답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분적으로 동의하지만, 절대적으로 옳은 생각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상황마다, 명확한 답을 주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비범한 성취가 아니라, 비범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불확실한 상황을 우리 앞에 두십니다. 의심이 되고, 불안한 상황으로 우리를 몰아가십니다.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성경은 “예측 가능한 인생, 정해진 답”을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예측 불가능한 인생, 답을 찾아가는 과정”.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삶입니다.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은 “보여준 땅”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무것도 보여 준 게 없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왜 “보여준 땅이 아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아브라함이 믿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본 땅을 향한 출발과 “보여줄 땅”을 향한 출발은 엄연히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을 먼저 보여주셨다면, 순종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땅을 보지 못한 채 첫 발을 내디뎠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고,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은 떠났습니다.  
 
이미 본 땅을 향한 출발을 믿음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실체를 눈으로 봤는데, 믿고 안 믿고 할 것이 없지요. 믿음을 사용할 기회조차 없습니다. 하지만, 보여준 땅을 향한 출발은 다릅니다. 믿음이 없으면, 출발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땅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대한 믿음을 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장차 받을 보상이 아니라, 그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불확실성, 두려움, 불안, 근심, 걱정은 불편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불편한 상황 속에서, 믿음을 사용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새로운 도전을 눈앞에 두고 불안한 사람,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사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로 아파하는 사람. 
 
믿음을 사용하셔야 합니다. 믿음을 사용하는 사람만이, 불확실한 상황을 확실한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옳다고 믿었던 방식 그대로 변화 없이 편안하게 살 수 있다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불편함 없이 평안한 삶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살아왔다면, 그만큼 믿음을 사용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만약 예상하지 못한 일로, 두렵고 무섭다면, 새로운 믿음의 여정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주저하지 말고, 믿음을 사용하십시오. 당신은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익명의 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되어주십니다.

나 정말 왜 이럴까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으신  분 맞죠?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나는 왜 매일
다르게 느껴지나요.
 
하나님.
부르면 좋은데.
 
하나님 아버지.
부르면 화나요.    
 
하나님께 미안하고
아버지께 미안해요.
 
나 잘 믿고 있나.
나 상처 있나.
 
나 왜 이럴까요.
뭐가 잘못된 건가요.
 
나도 그래요.
당신만 그런 거 아니에요.
 
나는요, 바보같이
하나님께 도와달라는
말을 못해요.
 
도와달라 말하고 싶은데
자꾸 자책이 돼요.
 
너 최선 다했니.
죽도록 노력했니.
 
처음에는 이유를 몰랐죠.
나 왜 이럴까.
 
결국 알게 되었죠.
나는 아버지에게도 도와달라는
말을 못했어요.
 
내 부모님 많이 힘드셨거든요.
내가 도와달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릴 때는 장난감 사달라고
때도 쓰고 그랬겠죠.
 
철들고 나서는
뭐 사고 싶은 게 있어도
말을 못 했어요.
 
철이 일찍 들었나.
학교에서 돈 내라는 게 있어도
말을 못 했어요.
 
부모님을 도와드리지 못할망정
도와달라니요.
 
스스로 해결했어요.
부모님은 힘드시니까요.
 
걱정 말라고.
나 할 수 있다고.
항상 말했지요.
 
뉘 집 자식인데 그렇게 잘 컸냐.
부모님 어떤 분이냐.
 
가끔 그런 말 들으면 좋았어요.
효도하는 기분이었죠.
 
아버지는 아버지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지
서로 무슨 상관?
 
그러게요.
나도 상관없으면 좋겠는데
난 왜 이럴까요.
 
아직도 하나님께
도와달라는 말을 하기 힘들어요.
 
하나님,
저 사람 도와주세요.
기도 잘 해요.
말이 술술 나와요.
 
하나님,
나 도와주세요.
기도 못 해요.
말이 턱턱 막혀요.
 
도와달라는 말은 안 나오고
눈물만 흘러요.
 
언젠가 내 문제가 해결되면
당신에게도 알려줄게요.
 
아, 됐고요.
그나저나 힘들지 않아요?
하나님께 도와달라는 말을
안 하고 어떻게 사나요?
 
나 안 힘들어요.
내 마음은 전해요.
 
나 그렇다고.
그냥 그렇다고.
 
하나님도 아실 거예요.
내가 얼마나 답답한지.
 
도와달라는 말 못한다고
안 도와주시는 거 아니에요.
 
다 도와주셨어요.
말 못하고 바보처럼 우니까
불쌍하지 않을까요.
 
생각해보니까 사람한테도 그래요.
도와달라는 말을 못했어요.
목회하는 내내 그랬죠.
 
목사가 혼자 사역 못하잖아요.
도와달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해야 되는데요.
 
도와달라는 말 한 마디 못해서
종이 자르고 풀칠하고 붙이고
혼자 다 했어요.
 
나중에는 사람들이 알아요.
와, 이 사람은 도와달라고
말을 못하는 사람이구나.
 
내 마음 알아주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생겨났어요.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 나요.
 
나 같은 사람을 데리고
사역해준 사람들.
정말 고맙죠.
 
나 못난 거 사람들도
알고 도와줬어요.
 
하나님이 모르실까요.
그럴 리 없죠.
 
당신 힘들다고 말했는데
나 못난 거 말해서 미안해요.
 
하나님이 그 마음 아신다고.
아실 거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
같은 하나님이길 바라요.
 
함께 기도할게요.
당신을 도와달라는 말은
편하게 할 수 있으니까.

나도 당신처럼 두려웠어요

<창세기 22장 7절>

이삭이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했습니다. “불과 장작은 있는데, 번제로 바칠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이삭이 물었습니다.
 
From 이삭
 
어느 날부터 아버지가 이상했어요. 항상 밝게 웃던 아버지가 웃음을 잃으셨거든요. 내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아버지는 내 앞에서 웃음을 잃은 적이 없어요. 오죽하면 내 이름을 “웃음”이라고 지었겠어요. 
 
웃음을 잃은 아버지는 며칠 동안 시름 시름 앓아누우셨어요. 그러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러 가자고 말씀하셨죠. 
 
몸도 안 좋으면서 그 높은 산을 어떻게 올라가려 하는지 걱정스러웠어요. 가는 내내 아버지는 쉬었다 걸었다를 반복했어요. 산이 가까워질수록 아버지의 발걸음은 점점 느려졌죠. 
 
산 입구에서 아버지는 종들에게 더 이상 따라오지 말라고 했어요. 나와 아버지, 단둘이 산을 오르기 시작했죠. 나는 불안했어요. 아버지가 평소와 달랐거든요. 하나님께 바칠 어린 양이 없었어요.  
 
나는 그제야 알았죠. 아버지가 나를 죽여서 바치려 한다는 사실을. 미치도록 두려웠어요. 다리가 후들거려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아버지를 거역할 수 없었죠. 
 
아버지가 날 죽이려 한다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온몸이 꽁꽁 묶일 때까지 나는 반항하지 않았어요. 제단에 누워 눈물만 흘렸지요.
 
아버지는 내 눈을 쳐다보지 않았어요. 칼을 뽑아들고 내 목을 찌르려 했어요.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숨을 멈췄어요. 이렇게 끝이구나 생각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어요. 아버지를 부르는 목소리였죠.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역시 그랬어요. 하나님이 아버지를 시험하셨던 거예요. 아버지가 아무 이유 없이 날 죽일 리 없었어요. 아버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마자 미친 사람처럼 흐느끼며 날 묶었던 끈을 풀어줬어요. 나를 힘껏 끌어안아주시며 엉엉 우셨어요. 날 안아주신 아버지의 품을 잊을 수 없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도 그 품이 그리울 정도니까요. 
 
하나님은 나 대신 숫양을 준비해주셨어요. 날 대신해서 죽은 숫양 덕분에 내가 살 수 있다는 감정이 정말 묘했어요.  
 
사람들이 묻더군요. 어떻게 어린아이가 모든 장면을 정확히 기억하냐고요? 오해하고 계세요. 어리지 않았어요. 영화에서 보니까 내가 꼬마 아이던데, 맞나요? 사실이 아니에요. 
 
나는 청년이었어요. 산을 오를 때, 장작을 짊어진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 나예요. 나는 아버지보다 힘도 세고 발도 빨랐어요. 
 
아버지는 백 살에 나를 낳았어요. 아버지가 날 힘으로 결박한 게 아니라, 내가 반항하지 않은 거예요. 내가 먼저 제단에 올라가 눕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힘으로 나를 제단 위로 올릴 수 없었지요. 
 
사람들이 내게 가끔 물어요. 아버지가 당신을 죽이려 했는데, 상처받지 않았냐고. 대답은 간단해요. 상처받지 않았어요. 그날 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하나님은 언제나 아버지의 하나님이셨어요. 처음으로 하나님 목소리를 직접 들었죠.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는 순간이었어요. 만약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상처받은 채 고통받으며 살았겠죠. 
 
내가 서 있었던 그 자리는 상처와 눈물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어요. 하늘의 별처럼 많아진 나의 후손들은 이 산을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기억했어요.    
 
나는 이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아버지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사람들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아버지가 주인공처럼 보일 거예요. 이 사건의 주인공은 아버지가 아니에요. 이 사건의 주인공은 바로 하나님이죠. 
 
일의 시작도 하나님이고, 일의 마침도 하나님이에요. 나와 아버지는 그저 무서웠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어요.   
 
나도 당신처럼 두려웠어요.
하나님이 살려주셨죠.

너 주님 사랑하는 거 맞아?

나 예수 믿는데
내 인생 왜 이렇죠?
 
불행하고
우울하고
힘들어요.
 
예수님 사랑하세요?
네?
 
예수님 사랑하시냐고요?
네….
 
내가 볼 때는 아닌데.
그 정도로는 안돼요.
 
그럼 어떻게 하죠?
알려주세요.
 
더 사랑해야죠.
예수님 사랑하시는 거
정말 맞죠?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사실 잘 모르겠어요.
 
거봐요.
그렇게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행복하겠어요.
 
목숨 다해 주님만
사랑하세요.
 
주님만 사랑하면
다 해결되는데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괴로운 거예요.
 
옆에서 지켜보려니
나는 마음이 괴롭습니다.
 
나는 당신과
생각이 다릅니다.
 
주님 사랑하자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확신이 부족하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어요.
 
아니, 그럼
예수님 사랑 안 합니까.
확신 없이 천국 갑니까.
 
나는 당신처럼
강한 확신은 없지만,
당신이 부럽지 않아요.
 
내가 불안한 건
맞습니다.
 
솔직히 나는
내가 너무 불안합니다.
 
나는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모르겠어요.
확신이 서지 않아요.
 
주님을 사랑한다면
내가 이래서는 안되죠.
 
나는 알고 있어요.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내가 실수해서 고통받는지
나를 사랑해서 고통을 주시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정확한 판별법이 있으면
내게 알려주세요.
 
나도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그런 확신도 없이
무슨 목사라고.
 
맞아요.
당신 말이 맞아요.
 
하지만, 나도 당신만큼
주님을 사랑해요.
 
당신만큼 확신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당신이 확신하는 동안
나는 계속 불안할 거예요, 아마.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확신했던 사람들.
 
베드로는 확신했어요.
다른 사람 몰라도
나는 주님 부인하지 않겠다고.
 
도마는 확신했어요.
내가 손가락으로 예수님 옆구리를
후벼보기 전까지는 믿지 않겠다고.
 
바울은 확신했어요.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되게 하는
그리스도인을 모조리 잡아 처넣겠다고.
 
확신도 그리 안전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어떠세요.
 
내가 확신 없어도
행복한 이유 알려드릴까요.
 
나는 내가 얼마나
주님 사랑하는지
별로 고민 안 해요.
 
생각할수록 좌절되니까요.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해야
나도 안심되고 주님도 만족할까요.
 
어려워요.
다르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주님이 날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루 종일 생각해요.
 
생각할수록 행복하거든요.
너무 너무 행복해요.
 
내가 주님을 사랑하면
얼마나 사랑하겠어요.
 
주님이 날 사랑하시는 거에 비하면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 같죠.
 
당신하고 나하고 누가 더 주님 사랑하는지
따져 봤자 도토리 키재기에요.
 
당신이 이겼다고 해줄게요.
그래도, 난 손해 볼게 없어요.
 
당신과 나.
주님은 차별 없이 사랑해주시니까요.
 
내가 얼마나 주님 사랑하는가에
집중하지 말고
 
주님이 날 얼마나 사랑하시는가에
집중하세요.
 
내가 불안해도 행복한 이유
이제 아시겠죠.
 
계속 고민하세요.
나 주님 사랑하나.
나 믿음 있나.
 
그게 사랑이고
그게 믿음이니까요.

성경은 위인전이 아니다

<사무엘상 17:50>  

이처럼 다윗은 물매와 돌 하나만 가지고 블레셋 사람을 물리쳐 이겼습니다. 다윗은 그 사람을 돌로 맞혀 죽였습니다. 다윗은 손에 칼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골리앗을 이겼을까요? 사람들은 용기와 실력이라고 말하더라고요. 전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요. 
 
다윗의 용기는 대단했어요. 왕을 설득해서 골리앗과 맞섰어요. 골리앗 앞에서도 겁먹지 않았고요. 
 
하지만, 용기 자체가 승리를 보장할 수는 없어요. 다윗이 이겼으니까 용기라고 하는 거죠. 싸움에서 졌다면, 객기였겠죠. 
 
성경은 위인전이 아니거든요. 용기를 강조하려고 쓰여진 게 아니에요. 다윗이 아무리 용기 있는 사람이라도, 이순신 장군이나 잔다르크보다 더 할까요? 
 
다윗의 실력은 어떤 가요? 대단하죠. 작은 돌멩이 하나로 골리앗을 쓰러뜨렸잖아요. 우연이 아니었어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돌멩이 던지는 실력을 갈고닦았죠.
 
하지만, 다윗의 실력을 높게 평가하더라도 태어날 때부터 군사 훈련을 받은 골리앗과 비교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요? 실력으로 따지면, 골리앗이 앞서잖아요. 
 
다윗을 읽어내려 갈 때, 용기나 실력을 강조하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쳐 버려요. 가장 중요한 게 뭘까요? 하나님의 은혜에요.  
 
다윗은 목동이었고, 다윗의 가족은 떠돌이였죠. 하나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새로운 왕으로 세우셨어요.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주시고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게 하셨죠. 다윗의 때에 이스라엘은 전 세계의 패권을 움켜쥐었어요. 
 
다윗 이전, 다윗 이후에도 다윗처럼 영광스러운 시절은 없었어요. 유대인들은 “다윗의 왕국”이라는 말을 들으면 감격했어요. 
 
다윗의 왕국과 하나님 나라는 밀접해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실 때, 다윗의 왕국을 염두해 두신 거예요. 
 
다윗의 왕국이 없었다면,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지 않았겠지요. 다윗의 열쇠이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거예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예요. 다윗의 용기와 실력을 앞세워서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을 수 없어요. 다윗도 원치 않을 거예요. 
 
다윗도 무서웠겠죠. 믿음으로 한 걸음 내딛은 거예요. 하나님이 승리하신다고 믿었기에 돌멩이 하나로 덤벼든 거죠. 
 
다리가 벌벌 떨리지 않았을까요? 다윗 이야기를 전부 읽어보세요. 다윗도 우리와 다를 바 없어요. 
 
돌멩이 던지기를 실력으로 봐야 하나요? 글쎄요, 나는 잘 모르겠어요. 다윗이 물매를 들고 있으니까, 그것을 그냥 사용하신 게 아닐까요? 
 
모세의 지팡이를 실력으로 안 보잖아요. 하나님이 보실 때는 모세의 지팡이나 다윗의 물매나 별반 다르지 않아요. 
 
모세의 지팡이로 이집트를 무너뜨리고, 다윗의 돌멩이로 골리앗을 쓰러뜨렸는데, 실력이 들어설 틈이 어디 있나요? 
 
하나님은 작고 미천한 사람의 보잘것없는 재능을 사용하세요. 하나님의 은혜죠. 
 
용기 없다고, 실력 없다고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마세요. 잠시 쉬다가 다시 일어서서 뚜벅뚜벅 걸어가세요. 
 
나도 가끔은 포기하고 싶어요. 내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마 모르실 거예요. 은혜 없으면 하루도 못 살겠어요. 
 
용기 없어도 괜찮아요. 실력 없어도 괜찮아요. 은혜로 살아가요. 있는 모습 그대로 귀하게 쓰실 거예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까요.

내 믿음이 형편없어요

내 믿음이 형편없어요.
나 어떻게 하죠?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
나아갈 수가 없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믿음이 제자리에 있으니
괴로워요.
 
믿지 못해 괴롭고
믿고 싶어 괴롭다면
그건 믿음이에요.
 
당신의 믿음을
싸구려 취급하지 말아주세요.
 
사람들은 믿음에
레벨이 있는 것처럼 말해요.
 
진실이 아니에요.
믿음에는 레벨이 없어요.
 
믿음이 있냐, 없냐.
둘 중 하나에요.
 
문제에 집중하면
불안해져요.
 
감기가 낫느냐
암이 낫느냐.
 
1억을 갚느냐.
10억을 갚느냐.
 
암보다는
감기를 고치기 쉽고
 
10억보다는
1억을 갚기 쉬우니까.
 
암이나 10억을 놓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더 큰 믿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다시 말하지만,
진실이 아닙니다.
 
믿음의 대상이
분명하기 바랍니다.
 
문제에 집중하면 불안해서
더 믿으려고 발버둥 쳐요.
 
문제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믿어봐요, 우리.
 
감기와 암.
10억과 1억.
 
하나님은 차이를
느끼지 못하세요.
 
예수님이 이방 여인에게 말씀하셨죠.
네 믿음이 크도다.
 
예수님은 믿음의 크기에
놀라신 게 아니에요.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믿으니까
예수님이 감격하신 거예요.
 
얼마나 잘 믿느냐.
그만 고민하세요.
 
무엇을 믿느냐.
고민하세요.
 
문제 해결을 믿으시나요.
하나님을 믿으시나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감사할 수 있으려면
 
문제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방법뿐입니다.

예수님께 데려다줄게요

From 목격자 (중풍병자의 친구)
 
나의 소중한 친구 세르오는 앞날이 창창한 20대에, 뇌혈관이 터져 온몸이 굳어버렸습니다. 밭에 쓰려져 숨만 쉬고 있던 세르오를, 마을 사람들이 발견해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요. 
 
세르오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내가 세르오를 찾아갈 때마다, 차라리 자기를 죽여달라고 울부짖었지요. 나는 그를 사랑했지만,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을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나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병을 고치고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그분에게, 내 친구 세르오를 데려다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장에 세르오에게 달려갔지요. 
 
“세르오! 우리 마을에 예수님이 오신대! 이제 너도 걸을 수 있어. 내가 너를, 예수님에게로 데려다줄게.” 
 
세르오는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눈물을 쏟아냈지요. 나는 세르오를 부둥껴 안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부디, 내 친구 세르오를 고쳐주시라고요. 
 
나는 다른 친구 셋을 불러, 세르오를 들것에 실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장소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고개를 떨구고 말았습니다. 네 사람이 들것을 들고 발을 맞춰 걸으려니, 다른 사람들처럼 빨리 걸을 수가 없더군요. 
 
우리는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구름 떼처럼 많은 사람들이 겹겹이 쌓여있었습니다. 군중 밖으로 떠밀려, 예수님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지요. 
 
세르오가 말했습니다. 
 
“괜찮네, 친구들. 자네들이 나를 위해 여기까지 와준 것만으로 고맙다네.” 
 
나는 세르오의 손을 꼭 잡고 말했습니다.
 
“세르오, 절대로 포기하지 말게. 나는 자네를 꼭 살려야겠네. 자네를 예수님에게로 데려다주겠어.” 
 
 나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세르오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밖에는 없었습니다. 나와 친구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었습니다. 
 
지붕 위에 구멍이 생기자, 예수님 발 앞에 흙이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집 안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얼마나 걱정이 되던지요. 
 
내가 먼저 고개를 내밀어 안쪽의 상황을 살폈습니다. 그때,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예수님은 따뜻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시며, 말없이 고개를 끄떡이셨습니다. 
 
나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수평을 맞추어 조심히 세르오를 내려보냈습니다. 지붕에서 세르오를 내리는 동안, 예수님은 단 한순간도 시선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세르오가 바닥에 내려진 순간, 예수님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네 죄가 용서되었다. 침상을 들고 일어나렴. 이제 너는 걸을 수 있단다.” 
 
세르오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일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순간이었습니다! 세르오의 굳은 몸이 풀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지붕에서 떨어질 뻔했습니다. 나와 친구들은 너무나 감격해서, 서로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르오를 안아주시며, 등을 두드려 주셨습니다. 
 
세르오의 어깨너머로 예수님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올려다보시며, 인자하게 웃으셨습니다. 이제 세르오는 건강하고 밝은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내게 말하더군요. 세르오가 나은 건, 모두 내 덕분이라고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어색하게 웃을 뿐입니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세르오를 예수님에게 데려다준 것뿐이에요.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세르오는 여전히 절망 속에 있었겠지요.  
 
훗날, 예수님이 우리의 믿음을 언급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와 친구들의 믿음 때문에, 세르오를 고쳐주셨다고요. 자칫 잘못하면, 나와 친구들의 믿음으로 세르오가 나았다고 오해하실 것 같아요. 
 
예수님은 네 사람의 믿음이 아니라, 다섯 사람의 믿음을 보신 겁니다. 세르오 역시 간절히 치유되기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믿음을 보신 거예요. 예수님은 우리의 작은 믿음을 기뻐하시며, 세르오를 고쳐주셨습니다. 
 
사람들은 계속 말을 만들지요. 부정적인 소식은 빨리도 퍼집니다. 들것을 함께 들어준 친구가 어느 날, 내게 속상한 말을 전하더군요. 
 
“이봐, 자네도 들었나? 마을에서 이상한 말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네. 예수님이 세르오에게 “네 죄가 용서되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그 말을 오해한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야. 세르오가 중풍병에 걸린 게, 세르오의 죄 때문이라고…. 이런 터무니없는 말이 어디 있나? 세르오가 그 말을 듣게 되면, 얼마나 상처를 받겠나.”
 
나는 친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해서 실수한 것이라도, 제아무리 상처를 줄 의도가 없다고 하더라도, 세르오가 들으면 마음이 아플 것이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르오의 죄를 지적하신 게 아닙니다. 죄 때문에 세르오가 병든 게 절대로 아닙니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아픈 것도 전부 네 잘못이다”라고 말하다니요.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끔찍한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한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세르오의 질병을 치유하신 것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치유해 주신 겁니다. 참된 자유를 선포하신 것이지요. 예수님은 치유와 용서의 예수님이십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돌보며, 함께 기도하는 당신을 위로하고 싶습니다. 나와 당신은 무능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상처 입은 한 사람을 예수님에게 데려다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나는 못한다고, 나는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다고, 절망하지 마세요. 
 
우리는 못해도, 예수님은 하십니다. 예수님이 반드시 치유하십니다. 당신과 나는 치유자가 아니라, 목격자입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상처 입은 한 사람을 예수님에게로 데려다주세요. 
 
내 이름은 남기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머문 자리, 우리의 이름 대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남겨지기를 소망합니다.

먼저 믿은 게 잘못은 아니잖아요

당신이 참으세요.
먼저 믿었잖아요.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남편은 하나님을 모르죠?
 
희생하고
참고 기다리세요.
 
조심스럽지만
묻지 않을 수 없네요.
 
이런 가르침을 뒷받침할
성경 구절이 있나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아내만을 위한 말씀인가요.
그렇지 않아요.
 
모두에게 전해진 말씀이죠.
남편과 아내 예외가 없지요.
 
먼저 믿은 아내는
마음고생이 심해요.
 
마음 한 편에
죄책감이 쌓여있어요.
 
내 기도가 부족해서 그런 거다.
내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거다.
 
어디 가서 말하기도
힘들답니다.
 
주변에서 한두 번은 들어줘도
여러 번은 안 들어줘요.
  
또 그 문제냐.
이제 털고 일어나라.
 
나도 그랬다.
참고 기다리니까
결국 돌아오더라.
 
조언하거나
영웅담을 들려줍니다.
 
사람한테 실망하고 나서
깨닫습니다.
 
하나님만 붙잡자.
그리고, 결심합니다.
 
참는다.
견딘다.
버틴다.
 
아내에게
부탁드립니다.
 
그러지 마세요.
좋은 방법 아닙니다.
 
희생하기 보다
대화해야 합니다.
 
대화 없이 희생하면
당신은 불행해져요.
 
희생하는 법을 배우기 전에
대화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대화가 희생보다
어렵습니다.
 
대화하고 싶지 않아 참아버린다면
그건 희생이 아니라 회피입니다.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
남편과 대화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당신의 진심을 전해줄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해주세요.
 
남편의 진심을 알아내는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해주세요.
 
희생하며 살기보다
희망으로 살아주기 바랍니다.
 
부부가 대화하며
진심을 공유하기
쉽지 않아요.   
 
시간이 오래 걸려요.
포기하기 쉽지요.
 
사람은 한순간에
바뀌지 않아요.
 
당신이 그렇듯이
남편도 그렇습니다.
 
그래도 대화 없는 희생은
절대로 하지 마세요.
  
당신이 남편과
대화하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당신의 진심이
남편에게 닿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남편의 진심이
당신에게 닿기를 바랍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나는,
쉬지 않고 글을 쓰겠습니다.
 
희생이 아닌
희망을 품고서….
 
내 진심이 당신에게
닿기를 바랍니다.

나를 간절히 찾는 자

<잠언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우리 주변에는 인생의 위기를 겪으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넘쳐 납니다. 그들의 간증은 우리를 기쁘게 하고, 기대하게 합니다. 
 
“아, 나도 간절히 하나님을 찾으면 만날 수 있겠구나.” 
 
하지만,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나서, 하나님을 못 만나면 자책감에 빠집니다. 
 
“왜 나는 하나님을 못 만나지? 나는 정말 간절한데…. 그래도, 모자라나? 얼마나 간절해야 하나님을 만나는 거야?” 
 
 말씀을 오해하신 겁니다. 간절함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마음가짐, 즉 태도입니다. 간절함이 조건일 수 없습니다. 
 
남다른 간절함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당신을 만나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 속상한 것이 아니라, 이미 만났던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의 간절함은 우리의 간절함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녀를 찾는 절박함으로, 우리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찾으셨고, 그의 품 안에 우리를 안고 계십니다. 
 
잠언 8장의 말씀은, 지혜와 지혜를 찾는 사람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두 존재의 관계는 사랑이 바탕입니다. 친밀합니다. 단절감과 소외감이 없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관계로 나아갑니다. 
 
우리에게 관심 없는 하나님에게 구걸하듯 매달리는 찾음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우리가 더욱 간절한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을 찾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결핍의 정서는, 하나님을 오해하도록 부추기고,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로 나아가게 합니다. 정서에 속으시면 안 됩니다. 복음으로 정서를 돌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멀게 느껴지는 것도 서러운데, 정성이 부족해서 하나님을 못 만났다고 말씀하시면, 나는 슬픕니다. 
 
하나님이 멀게 느껴지는 것은 감정입니다. 당신에게 진실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은 정성으로 못 만납니다. 은혜로 만납니다. 정성이 모자라도, 괜찮습니다. 은혜의 하나님을 부르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예수님만 바라본다는 말

예수님만 바라보는 삶,
적지 않은 사람이 오해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자고 하면
예수님 보려고 노력합니다.
 
예수님 모습을 떠올리려고
애를 씁니다.
 
커다란 스크린에
예수님이 고난받으시는
장면이라도 틀어주면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릅니다.
 
혼자 기도할 때
예수님 이미지가 떠오르면
감격이 밀려옵니다.
 
시간이 갈수록 예수님 이미지는
더 나은 이미지로 교체됩니다.
 
어릴 때 봤던 예수님 얼굴보다
지금 예수님 얼굴이 더 낫습니다.
 
아쉽게도 예수님 얼굴을
실제로 본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자.
예수님을 보자.
 
두 문장이 같다고 생각해서
발생한 오해입니다.
 
두 문장은
같은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 이미지를
떠올리려 할수록
우리는 약해집니다.
 
예수님 이미지가
효력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이미지는
상상으로 지어낸
허구에 불과합니다.
 
유명 영화배우의 얼굴이나
어느 화가의 작품이겠지요.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건
예수님 얼굴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예수님 말씀을 바라보는 겁니다.
 
눈보다는
귀를 사용해야 합니다.
 
귀보다는
마음을 사용해야 합니다.
 
예수님 얼굴을 떠올리지 말고
예수님 말씀을 떠올리십시오.
 
예수님에 대한 말씀.
예수님이 하신 말씀.
 
성경 전부를 뜻합니다.
모든 구절을 뜻합니다.
 
치유하는 능력은
예수님 얼굴이 아니라
예수님 말씀에서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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