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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기도

고개를 돌리지 말아요

나는 무서워요. 
현실을 마주할 수 없어요. 
 
하나님이 없었다면
나는 살 수 없었을 거예요. 
 
무너지는 순간마다 
버틸 힘을 주셨죠. 
그래서 살았어요. 
 
그렇군요. 
지금은 왜 힘든가요. 
 
하나님이 멀게 느껴져요. 
기도해도 대답하지 않으세요. 
 
난 알고 있어요. 
계속 버텨야 해요.  
 
이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이 날 만나주실 거예요.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어요. 
당신에게는 패턴이 있어요. 
 
현실을 마주하기 두려워
고개를 돌려버려요. 
 
고개를 돌린 쪽에 
하나님이 계신 건 다행이에요. 
하나님을 찾아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당신의 하나님은 
언제나 멀리 계세요. 
평소에는 보이지 않아요. 
 
당신이 고통받는 문제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요. 
 
고개를 돌린 쪽에 계세요. 
아주 멀리. 
 
당신에게 부탁할게요. 
고개를 돌리지 말아요.
 
고통스러워도 
끝까지 현실을 바라보세요.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아요. 
당신이 고통받는 문제 속에 계세요. 
 
고개를 돌려버리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없어요. 
 
눈물만 닦아주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죠. 
 
고통을 해결하시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죠. 
 
하나님이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신다는 말이 아니에요.  
 
문제 속으로 걸어가는 
당신의 손을 꼭 붙잡아주신다는 말이에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만날 수 있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당신에게 필요해요. 
 
더 이상 닫힌 문 앞에서 울지 마세요.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 하나님을 찾지 마세요. 
당신은 고아가 아니에요.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 옆에 계세요. 
아주 가까이. 
당신의 숨소리마저 듣고 계시죠.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당신 가까이에서 안아주시는 
하나님을 선물하고 싶어요. 
 
내 마음 전해졌나요.
자, 그럼 앞을 보세요.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씩씩하게 걸으세요. 
하나 둘. 하나 둘. 
당신이 두려워하는 현실을 향해. 

예수님께 솔직하게 나아가세요

<누가복음 8:24>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성숙한 믿음을 가지면,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고, 언제나 차분한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요? 글쎄요, 나는 잘 모르겠어요. 
 
가끔 그렇게 보이는 사람이 있기는 한 것 같은데, 속 마음은 알 수가 없으니까요. 애써 태연한 척하는 것이지, 마음속 감정은 다를 거예요. 로봇이 아닌 이상 차분하기 힘들어요. 
 
갑작스럽게 위기를 만나는 사람은, 감정에 휘둘려요. 어쩔 수 없어요. 사람이라 그런 거예요. 자책하지 말고, 내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감정에 휘둘렸다면, 예수님께 솔직하게 나아가세요. 
 
예수님이 용납 못할 감정은 없어요. 감정에 휘둘려 어찌할 바를 몰라도, 예수님은 꾸짖지 않으세요. 
 
애써 위로하는 말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제자들이 아니라, 바람과 성난 파도를 꾸짖으셨어요. 제자들의 다급한 감정을 꾸짖으신 게 아니라, 제자들을 놀래킨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신 거예요. 
 
예수님을 오해하시면 안 돼요.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녀를 꾸짖지 않으세요. 굳이 말하자면, 안타까워하시는 거예요. 함께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직도 철부지라 속상해서 그러셨죠. 
 
자녀가 무서워서 아버지를 찾는데, 아버지가 혼을 내다니요. 우리는 예수님은 그런 분 아니세요. 자녀는 잘못한 거 없어요. 무서워서 그런 거잖아요. 예수님은 이해하세요. 두렵고 무서운 감정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가세요. 
 
차분할 필요도 없고, 성숙할 필요도 없어요. 직분이고 체면이고 따질 필요 없어요. 솔직한 게 좋아요.
 
다른 사람은 뭐라든, 나는 철부지로 살 거예요. 나도 힘든 날 있어요. 주위를 둘러보면, 덩그러니 혼자에요. 내 감정을 받아줄 사람이 항상 내 옆에서 기다리고 있나요?
 
 목사가 고민을 들어줄 때나 목사죠. 자기가 먼저 힘들다고 말하면, 누가 좋아하겠어요. 눈치 보여서 아무 말이나 쉽게 못해요. 
 
예수님 앞에서만큼은 솔직해지고 싶어요. 예수님 만큼은 속이고 싶지 않아요. 내 수준이 고작 이런데, 어쩌겠어요. 내 감정, 내 생각 있는 그대로 말씀드릴 거예요. 예수님은 내 마음을 아시고, 편견 없이 받아주시니까요. 
 
참된 성숙은 예수님과 가까워지는 거예요. 감정에 휘둘릴 때, 예수님을 찾는 거죠. 위기 상황에서, 가장 먼저 예수님이 떠오른다면, 그게 바로 믿음이에요. 작고 초라한 믿음이라도, 예수님이 기뻐하세요. 
 
그러니, 자책하지 마세요.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가세요. 당신의 감정뿐만 아니라, 현실의 문제도 해결해 주실 거예요. 
 
예수님은 솔직한 당신을 좋아하세요. 다른 곳에 가서 감정을 풀지 말고, 예수님께 쏟아놓으세요. 예수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의 당신을 기다리세요. 
 

딸에게 장애가 있어요

막내 딸에게 장애가 있어요.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삶이 망가지기 시작했어요. 제가 생각한 결혼 생활은 이게 아니었는데, 모든 게 엉망이 된 것 같아요. 어릴 적 아빠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엄마가 고생했어요. 엄마의 스트레스를 제가 다 받으며 자랐어요. 엄마로부터 탈출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결혼을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숨쉬기 조차 힘드네요.
 
딸에게 사랑을 듬뿍 주고 싶은데, 쉽지 않아요. 우울증이 온 것 같아요. 다른 사람 도움 없이 장애가 있는 딸을 키우면서 재활, 육아, 살림은 혼자 다 하고 있어요. 딸에게 스트레스를 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상처가 되물림 되는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정말 행복하게 살고 싶었어요. 아이를 꽃처럼 예쁘게 키우고 싶었는데, 아이들을 사랑으로 보듬어 줄 수 없어서 항상 죄를 짓는 것 같아요.
 
자매님, 지금 정말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세요. 자매님이 겪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거예요. 몸이 불편한 아이를 키우며 힘든 시간을 보내던 내담자를 만난 적이 있어요. 아이에게 미안하다며 흐느껴 우는 모습에 나도 따라 울었어요. 자신 때문에 아이가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자책했어요. 그런 아이를 부담스러워하는 자신을 보며 하나님 앞에서 죄책감을 느끼며 고통 받았죠. 그분이 느꼈던 고통의 무게는 상상을 초월했어요. 자매님이 보내주신 사연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그분과의 기억 때문이에요.
 
가장 먼저 자매님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자매님은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죄책감을 느끼시면 안돼요. 무작정 덮어 놓고 위로하는 게 아니에요. 내 나름의 근거가 있어요. 내게 질문하신 이유는 더 좋은 엄마가 되고 싶은 마음일 거예요.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이 있다고 믿는 거죠. 아이들에게 더 나은 삶을 선물하고 싶은 거예요. 아이들의 행복이 곧 자신의 행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보다 좋은 엄마가 세상에 있나요? 나는 자매님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어요.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몸이 불편한 아이를 키우는 어려움이 몇 마디 위로하는 말로 쉬워지지 않기 때문이에요. 자매님이 몸이 아픈 자녀를 돌보며 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잘 돌보며 살아야 해요. 그래야, 오래 동안 지치지 않을 수 있어요. 자매님의 상처를 돌보면서 아이를 돌보자고 말하고 싶어요.
 
자매님의 아버지는 어린 시절 암투병을 했어요. 일찍 돌아가셨고, 자매님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어요. 어머니는 자녀들을 혼자 키우며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막내인 자매님이 희생양이었죠. 어머니의 스트레스를 받아주는 사람이었어요. 어머니를 이해하는 마음과 원망하는 마음이 뒤섞어 혼란스런 시간을 보냈고, 결혼이 탈출구였어요.
 
자매님이 자녀들에게 불편한 감정느껴서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짜증을 낼 때, 어머니와 자신이 겹치는 것 같아요. 아이에게 짜증 내고 화를 내는 상황은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아픈 아이에게 짜증내고 화내도 괜찮다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 육아가 힘들다는 말이에요.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은 자매님의 욕구 깊숙한 곳에는 엄마처럼 아이들을 키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어요.
 
자매님이 몸과 마음이 치져서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고 있을 때, 그 장면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이 어떤 표정인가요? 인상을 찌푸리시며 화난 표정으로 자매님을 바라보신다면, 하나님을 오해하고 계신 거예요. 내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은 슬픈 표정으로 자매님을 바라보고 계실 것 같아요. “내 딸 너무 힘들어 보인다. 많이 힘들지? 너에게 힘이 되고 싶구나.”라고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지금 이 순간은 상담자로서가 아니라 목사로서 말하고 싶어요. 자매님은 자매님의 엄마처럼 아이들을 키우지 않을 거예요. 예수님처럼 키울 거예요. 자매님이 부족하니까 엎드려 기도하면서 울잖아요.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그 기도 받으실 거예요. 자매님이 최선을 다해도 부족한 거 있어요. 우리 부모가 어떻게 자녀들 앞에서 떳떳하겠어요. 하나님이 우리 자녀 길러 주실 거예요. 우리의 상처를 돌봐주시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아이들 덮어주실 거예요.
 
자매님 역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기억해주세요. 하나님 앞에서 만큼은 무너져도 괜찮아요. 상처로 고통받는 우리를 돌보며 이끌어주시듯, 자매님의 딸 아이는 하나님이 돌보고 사랑해주실 거예요.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자신을 먼저 돌봐주세요. 자신을 돌볼 수 있어야 자녀를 돌볼 수 있으니까요.

나 정말 왜 이럴까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으신  분 맞죠?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나는 왜 매일
다르게 느껴지나요.
 
하나님.
부르면 좋은데.
 
하나님 아버지.
부르면 화나요.    
 
하나님께 미안하고
아버지께 미안해요.
 
나 잘 믿고 있나.
나 상처 있나.
 
나 왜 이럴까요.
뭐가 잘못된 건가요.
 
나도 그래요.
당신만 그런 거 아니에요.
 
나는요, 바보같이
하나님께 도와달라는
말을 못해요.
 
도와달라 말하고 싶은데
자꾸 자책이 돼요.
 
너 최선 다했니.
죽도록 노력했니.
 
처음에는 이유를 몰랐죠.
나 왜 이럴까.
 
결국 알게 되었죠.
나는 아버지에게도 도와달라는
말을 못했어요.
 
내 부모님 많이 힘드셨거든요.
내가 도와달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릴 때는 장난감 사달라고
때도 쓰고 그랬겠죠.
 
철들고 나서는
뭐 사고 싶은 게 있어도
말을 못 했어요.
 
철이 일찍 들었나.
학교에서 돈 내라는 게 있어도
말을 못 했어요.
 
부모님을 도와드리지 못할망정
도와달라니요.
 
스스로 해결했어요.
부모님은 힘드시니까요.
 
걱정 말라고.
나 할 수 있다고.
항상 말했지요.
 
뉘 집 자식인데 그렇게 잘 컸냐.
부모님 어떤 분이냐.
 
가끔 그런 말 들으면 좋았어요.
효도하는 기분이었죠.
 
아버지는 아버지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지
서로 무슨 상관?
 
그러게요.
나도 상관없으면 좋겠는데
난 왜 이럴까요.
 
아직도 하나님께
도와달라는 말을 하기 힘들어요.
 
하나님,
저 사람 도와주세요.
기도 잘 해요.
말이 술술 나와요.
 
하나님,
나 도와주세요.
기도 못 해요.
말이 턱턱 막혀요.
 
도와달라는 말은 안 나오고
눈물만 흘러요.
 
언젠가 내 문제가 해결되면
당신에게도 알려줄게요.
 
아, 됐고요.
그나저나 힘들지 않아요?
하나님께 도와달라는 말을
안 하고 어떻게 사나요?
 
나 안 힘들어요.
내 마음은 전해요.
 
나 그렇다고.
그냥 그렇다고.
 
하나님도 아실 거예요.
내가 얼마나 답답한지.
 
도와달라는 말 못한다고
안 도와주시는 거 아니에요.
 
다 도와주셨어요.
말 못하고 바보처럼 우니까
불쌍하지 않을까요.
 
생각해보니까 사람한테도 그래요.
도와달라는 말을 못했어요.
목회하는 내내 그랬죠.
 
목사가 혼자 사역 못하잖아요.
도와달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해야 되는데요.
 
도와달라는 말 한 마디 못해서
종이 자르고 풀칠하고 붙이고
혼자 다 했어요.
 
나중에는 사람들이 알아요.
와, 이 사람은 도와달라고
말을 못하는 사람이구나.
 
내 마음 알아주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생겨났어요.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 나요.
 
나 같은 사람을 데리고
사역해준 사람들.
정말 고맙죠.
 
나 못난 거 사람들도
알고 도와줬어요.
 
하나님이 모르실까요.
그럴 리 없죠.
 
당신 힘들다고 말했는데
나 못난 거 말해서 미안해요.
 
하나님이 그 마음 아신다고.
아실 거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
같은 하나님이길 바라요.
 
함께 기도할게요.
당신을 도와달라는 말은
편하게 할 수 있으니까.

하나님의 위로와 자기 위로를 구분할 수 있나요?

기도하면서 힘들면 주님을 찾잖아요. 가끔은 따뜻한 위로를 받는 것 같아요. 어느 날 갑자기 혼란스러웠어요. 내가 너무 힘드니까 스스로를 위로하는 거 아니야?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자기 위로와 어떻게 다른 가요.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자기 위로를 구분할 수 있나요? 
 
두 가지를 극단적으로 나누는 건 위험한 생각 같아요. 신앙생활에 있어서 정서는 중요해요. 우리는 로봇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고귀한 존재니까요. 자기 위로라도 필요한 사람에게 잘못하고 있다고 손가락질하는 상황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물론,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으로 위로받기를 바라고요.  
 
우리는 주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해요. 적극적으로 말씀을 읽고, 기도할 시간을 우선적으로 확보해야 하죠. 주님이 기도에 응답해주실 수 있겠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기적처럼 응답을 바라지만, 세상 고요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가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속수무책으로 기다릴 필요는 없어요. 주님이 응답하시는 방법을 제한할 필요는 없잖아요. 주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일하시니까요. 
 
그동안 자신에게 은혜가 되었던 성경 구절을 묵상하는 것을 추천하고 싶어요. 신비한 방식으로 말씀해주시지 않아도 걱정할 필요 없어요. 성경을 직접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 자신에게 들려주면 되니까요. 읽고 생각하세요. 그 말씀을 통해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위로를 받으세요. 
 
이 과정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자기 위로가 헷갈릴 수 있겠네요. 거짓말 탐지기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구분하기 어렵겠죠. 그래도 질문하셨으니 내 나름의 생각을 말해볼게요. 
 
하나님의 위로와 자기 위로를 구분하는 가장 결정적인 지표는 ‘무엇에 근거한 메시지인가’라고 생각해요. 자기 생각에 근거한 메시지는 한계가 있어요. 하지만, 자기 위로의 메시지라도 복음적 가치에서 근거하고 있다면, 그건 엄청난 힘을 발휘하겠죠. ‘메시지의 근거가 무엇인가’를 깊이 고민해보세요. 
 
 예를 들어볼게요. ‘너는 소중해. 너는 특별해.” 메시지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이 메시지 들으면 위로받을 거예요. 같은 말이라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이 메시지를 사용할 때는 의미가 다르죠. 자기 암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린다면 그건 성공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볼게요. ‘너는 절대로 끝장나지 않을 거야.’ 자기 암시로 사용한다면, 주문에 불과하겠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로 사용한다면, 이건 믿음의 고백이 될 수 있어요. 그 문장 뒤에 보이지 않는 문장이 하나 더 있으니까요. ‘너는 절대로 끝장나지 않을 거야. 하나님이 지켜주실 거니까.’메시지의 근거가 하나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안전할 수 있어요. 
 
하나님의 위로와 자기 위로를 구분한다는 건 어쩌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한 번쯤 고민해보는 건 좋은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질문해주신 덕분에 답변하면서 나 자신도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었습니다.

내 말 들어줄 사람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네요.
말할 사람이 없어요.
 
어릴 적부터
그랬어요.
 
아빠도 엄마도
내 말 들어주지 않았죠.
 
난 내가 왜 고통받는지 알아요.
외로워서 그래요.   
 
그렇군요.
묻고 싶어요.
 
만약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면
당신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몰라요. 나는.
생각해본 적 없어서.
 
고통이 익숙해지면
고통이 삶이 됩니다.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면
원하는 대로 살 수 없어요.
 
상점에서 물건을 고르듯
원하는 걸 말하라는 게 아니에요.
 
당신의 삶에서 오래전에
희망이 사라져 버렸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희망을 말하려 할 때마다
말문이 막히는 당신이
답답해 보여요.
 
오래전에 혀가 굳어
말 못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입에서 소리는 났지만
무슨 소리인지 모르니
옆 사람이 통역을 해줘야 했죠.
 
소리를 못 내서 일까요.
그의 귀가 막혀버렸어요.
 
입과 귀가 막힌 그는
절망으로 고통받았죠.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예수님을 만났어요.
 
예수님은 그의 귀에
손가락을 넣고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말씀하셨죠.
 
에바다.
열려라.
 
그의 귀가 열렸어요.
그의 혀가 풀렸어요.
 
예수님의 말씀으로
그는 치유되었어요.
 
신기하게도
성경에는 귀가 열렸다는
표현이 맨 앞에 나와요.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리고
말이 나왔죠.
 
나는 당신의 입보다
귀가 먼저 열리기를 바라요.
 
에바다.
열려라.
 
귀가 열리면
당신은 들을 수 있어요.
그분의 말씀을.
 
너는 혼자가 아니야.
나는 너와 함께 있어.
언제나 그랬단다.
 
당신은 말할 사람이 없어
슬프지만
 
그분은 듣는 사람이 없어
슬프답니다.
 
당신이 들을 수 있다면
말할 수 있어요.
 
당신이 원하는 것을.
그분이 원하는 것을.

결혼할 사람을 만나면 특별한 응답이 있나요?

하나님이 만나게 해주신 배우자는 다른 사람과 달리 뭔가 분명한 응답이 있는 건가요? 저는 이제까지 연애하는 동안 목사님이나 교회 선배들이 말하는 특별한 응답을 받은 적이 없거든요. 
 
어려운 질문입니다. 신중하게 답변하겠습니다. 가끔 주변에서 신비로운 간증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처음 본 순간 하나님께서 확신을 주셨다”,“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었는데,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라는 식의 간증은 흔합니다. 청년의 시기에 결혼은 중요한 문제이니, 신비한 간증에 귀가 쫑긋하는 건 당연합니다.  
 
물론, 나 역시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를 믿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지금도 일하시니까요. 하지만, 한 개인의 간증을 모든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일반화하면 위험합니다. 배우자를 만날 때, 모든 사람이 신비한 응답을 받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응답받았다”라는 확신 때문에 실수할 수 있습니다. 지나친 확신이 눈을 가려서 상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잘못된 선택합니다. 
 
연애는 과정입니다. 서로 교제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모 아니면 도’라는 식으로 결론 내리고 출발하면 위험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성급하게 결론 내리지 마세요. 절대로 확신하면 안 됩니다. 확신이 의심이 되고, 의심이 이별이 됩니다. 끊임없이 고민하세요. 고민이 멈추면 성장도 멈춥니다. 
 
배우자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이 분명히 응답해 주실 수 있습니다. 응답을 받았다면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응답을 받았다 해도, 연애나 결혼이 쉬워지는 건 아닙니다. 두 사람이 함께 걸어야 하는 길은 절대로 편해지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확실한 응답을 받았다 해도, 과정에서 서로를 아껴주고 사랑해줘야 합니다. 
 
결과 중심의 연애를 하지 마시고, 과정 중심의 연애를 하세요. 결과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우리는 다만,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이 사람이 하나님이 보내주신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라는 마음으로 진실되게 사랑하고 돌봐주세요. 물건을 사듯 이리저리 평가하지 마시고, 선물을 받은 사람처럼 감사하세요. 머지않아,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람과 결혼하게 될 겁니다.

당신 어디 있나요

어디 있나요.
살아 있나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요.
 
글자 속에 있군요.
동화처럼.
 
나도 남들처럼
만나고 싶어요.
 
배운 대로 했어요.
소용없어요.
 
하늘에 있을까
안구에 하얀 먼지
내려앉아도
 
땅에 있을까
눈물이 망막을
잡아당겨도
 
없어요, 당신은.
절대로, 없겠죠.
 
나타나세요.
어디 있나요.
 
그를 찾고 있군요.
나도 그랬죠.
 
저기 계시나.
여기 계시나.
 
말똥말똥
눈으로 못봐요.
 
두근두근
마음으로 보여요.
 
어디 계시나.
찾지 마세요.
 
그가 계시니
여기 계세요.
 
기록된 말씀,
그분이 계시[啓示].
 
보고 싶은 만큼 볼 수 없어요.
보여주신 만큼 보여요.
 
먼지 후후 불어내고
가죽 표지 들춰보세요.
 
그는 온 세상에 계시지만
그의 말씀은 그 안에 있어요.
 
말씀으로 그를 봅니다.
말씀으로 나를 봅니다.
 
나를 보면 그가 보이고
그를 보면 내가 보여요.
 
말씀을 펼치세요.
말씀을 읽으세요.
 
바람이 불면
마음이 떠집니다.
 
언젠가
보게 될 겁니다.
 
그가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아내가 기도를 안 해요

장모님이 건강이 안 좋으세요. 아내를 도와주고 있기는 한데, 가끔은 제 마음도 힘들어요. 아내가 힘든 건 이해하는데, 아내가 기도를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이럴 때일수록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더 의지하면 좋겠어요.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아내가 힘들 때, 곁에 있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질문에 조심스럽게 답하겠습니다. 
 
아내는 기도하고 있을 거예요. 다만, 남편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뿐이죠. 상황이 힘든 만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지 않을까요. 어머니가 아픈 상황은 딸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다 줍니다. 실제로 기도하지 못하고 있다면, 아마 기도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지금 아내에게 필요한 건 조언이나 해결책이 아닙니다. 아내에게 필요한 건 위로입니다. 많은 말을 하지 말고, 많은 말을 들어주세요. 아내가 하고 싶은 말 있을 거예요. 끊지 말고 끝까지 들어주세요. 쉽지 않을 거예요. 남편 역시 하고 싶은 말이 있잖아요.
 
아내가 남편에게 푸념한다 생각하지 마시고, 예수님께 기도한다 생각해주세요. 남편 마음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요. 아내가 고통을 말할 때, 남편 안에 계신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생각해주세요. 아내가 말하는 내용 하나하나 마음에 담으세요. 절박한 아내의 기도입니다. 기도가 끝나면, 아내가 말할 거예요.   
 
“여보, 고마워. 내 상황 이해해줘서. 나 힘내서 다시 일어설게.” 
 
남편은 해결책을 제시하고 싶지만, 아내는 위로받고 싶은 거예요. 힘든 시간 동안 아내 곁에 있어주시면, 아내는 힘을 낼 수 있을 거예요. 상황은 쉽게 바뀌지 않아요. 아내 마음이 든든해야 해요. 
 
절대로 손해 보는 일 아니에요. 인생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어요. 항상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지만, 누구도 보장할 수 없죠. 남편에게도 힘든 시기가 올 거예요. 남편이 무너졌을 때, 함께 있어줄 사람은 아내뿐입니다. 아내가 무너졌을 때, 남편이 곁에 있어 줬던 것처럼, 아내 역시 남편 곁에 있어줄 거예요. 
 
아내를 사랑해서 질문해주신 남편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너 주님 사랑하는 거 맞아?

나 예수 믿는데
내 인생 왜 이렇죠?
 
불행하고
우울하고
힘들어요.
 
예수님 사랑하세요?
네?
 
예수님 사랑하시냐고요?
네….
 
내가 볼 때는 아닌데.
그 정도로는 안돼요.
 
그럼 어떻게 하죠?
알려주세요.
 
더 사랑해야죠.
예수님 사랑하시는 거
정말 맞죠?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사실 잘 모르겠어요.
 
거봐요.
그렇게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행복하겠어요.
 
목숨 다해 주님만
사랑하세요.
 
주님만 사랑하면
다 해결되는데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괴로운 거예요.
 
옆에서 지켜보려니
나는 마음이 괴롭습니다.
 
나는 당신과
생각이 다릅니다.
 
주님 사랑하자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확신이 부족하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어요.
 
아니, 그럼
예수님 사랑 안 합니까.
확신 없이 천국 갑니까.
 
나는 당신처럼
강한 확신은 없지만,
당신이 부럽지 않아요.
 
내가 불안한 건
맞습니다.
 
솔직히 나는
내가 너무 불안합니다.
 
나는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모르겠어요.
확신이 서지 않아요.
 
주님을 사랑한다면
내가 이래서는 안되죠.
 
나는 알고 있어요.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내가 실수해서 고통받는지
나를 사랑해서 고통을 주시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정확한 판별법이 있으면
내게 알려주세요.
 
나도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그런 확신도 없이
무슨 목사라고.
 
맞아요.
당신 말이 맞아요.
 
하지만, 나도 당신만큼
주님을 사랑해요.
 
당신만큼 확신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당신이 확신하는 동안
나는 계속 불안할 거예요, 아마.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확신했던 사람들.
 
베드로는 확신했어요.
다른 사람 몰라도
나는 주님 부인하지 않겠다고.
 
도마는 확신했어요.
내가 손가락으로 예수님 옆구리를
후벼보기 전까지는 믿지 않겠다고.
 
바울은 확신했어요.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되게 하는
그리스도인을 모조리 잡아 처넣겠다고.
 
확신도 그리 안전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어떠세요.
 
내가 확신 없어도
행복한 이유 알려드릴까요.
 
나는 내가 얼마나
주님 사랑하는지
별로 고민 안 해요.
 
생각할수록 좌절되니까요.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해야
나도 안심되고 주님도 만족할까요.
 
어려워요.
다르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주님이 날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루 종일 생각해요.
 
생각할수록 행복하거든요.
너무 너무 행복해요.
 
내가 주님을 사랑하면
얼마나 사랑하겠어요.
 
주님이 날 사랑하시는 거에 비하면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 같죠.
 
당신하고 나하고 누가 더 주님 사랑하는지
따져 봤자 도토리 키재기에요.
 
당신이 이겼다고 해줄게요.
그래도, 난 손해 볼게 없어요.
 
당신과 나.
주님은 차별 없이 사랑해주시니까요.
 
내가 얼마나 주님 사랑하는가에
집중하지 말고
 
주님이 날 얼마나 사랑하시는가에
집중하세요.
 
내가 불안해도 행복한 이유
이제 아시겠죠.
 
계속 고민하세요.
나 주님 사랑하나.
나 믿음 있나.
 
그게 사랑이고
그게 믿음이니까요.

마음을 쏟아놓는 기도

From 한나(사무엘의 어머니)
 
내 남편 엘가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어요. 매년 세 번씩 의무적으로 지키는 절기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가 따로 시간을 내서 하나님께 예배했으니까요. 게다가, 남편은 자상한 사람이었어요. 
 
남편이 믿음 좋고, 자상하고, 부자였으니까 남부럽지 않게 살았을 거라고 생각하면, 저는 억울해요. 저는 남들이 모르는 슬픔을 마음속 깊이 간직한 채로 살았어요. 
 
내 인생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어요. 겉만 번드레 한 인생이었어요. 마음은 텅 빈 채로, 쓸쓸하게 살았어요.  
 
남편의 사랑의 의심하지는 않았어요. 남편의 진심도 알았고요. 하지만, 남편이  내 모든 고통을 해결해 줄 수는 없잖아요. 
 
나는 아이를 못 낳았어요. 남편이 따로 얻은 브닌나라는 여자는, 남편이 내게 눈빛을 주는 것조차 견딜 수 없어했어요. 아이를 못 낳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를 못살게 굴었죠. 
 
나는 당당할 수 없었어요. 내가 살았던 시대에, 아이가 없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만큼 괴로운 일이었어요. 사람들의 동정하는 눈빛, 쯧쯧 혀를 차는 소리…. 나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어요. 
 
가족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 나 혼자 이방인 같더라고요. 도저히 함께 할 수 없었어요. 내가 식탁에서 일어나자, 남편은 걱정스러운 듯 말하더군요. 
 
“여보, 왜 그래요? 왜 이렇게 슬퍼하세요? 자식이 없으면 어때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잖아요. 나 하나로 만족 못 해요? 더 이상 슬퍼하지 마세요.” 
 
남편이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저렇게 눈치가 없나’ 속상하더라고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어요. 간신히 눈물을 참고 자리를 벗어났어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세상이 떠나가라 엉엉 울었죠. 참았던 설움이 터져 나왔어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 따지듯 물었어요. 
 
“하나님, 내 마음을 이렇게 모르세요? 남편이 저를 사랑해도, 저는 행복하지 않아요. 가슴이 뻥 뚫려버린 것처럼 외로워요. 하나님은 내 모든 필요를 아신다면서요?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세요.” 
 
엎드린 채로 한참을 기도했어요. 그때, 엘리 제사장이 나에게 다가와,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죠. 
 
“이보시오. 술을 먹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시겠소? 언제까지 취한 채로 살아갈 것이요. 하루라도 빨리 술을 끊으시오.” 
 
저는 당황했어요. 남편도, 하나님도 내 마음을 몰라주는데, 제사장마저도 내 마음을 모르니,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거잖아요. 
 
나는 울먹이며 말했어요. 
 
“아니에요, 제사장님. 저는 술을 마시지 않았어요. 너무나 큰 고통을 겪고 있어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놓으며 기도했어요.” 
 
엘리 제사장은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더니, 그제야 실수를 깨달았어요. 어찌할 바를 몰라 우물쭈물하다가 민망한 표정으로, 내게 축복의 말을 전해주었죠. 
 
“그러셨군요. 이제 평안하세요. 하나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까요? 엘리 제사장이 그렇게 말했을 때, 내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어요. 하나님께 직접 응답을 받은 건 아니지만, 사람을 통해서라도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께 그저 감사했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어요. 얼굴을 씻고, 밝은 얼굴로 가족에게로 돌아가 함께 식사를 했어요. 
 
솔직히 말하면, 그동안 가족이라고 해도 나는 가족과 섞이지 못했어요. 언제나 이방인 같은 심정이었거든요.
 
남편 엘가나, 브닌나,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 나는 그 사이에 덩그러니 혼자 존재했죠. 그들이 하하 호호 웃을 때마다, 그 웃음소리에 짓눌리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거든요.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놓고, 엘리 제사장의 위로를 듣고, 다시 내 삶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다시 한번 희망으로 살아갈 용기를 얻었어요. 
 
그로부터 1년 후, 하나님은 정말로 내게 아들을 주셨어요. 하나님은 내 모든 슬픔을 아시고, 내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세요. 
 
훗날 나는 깨달았아요.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놓고 그저 울었을 뿐인데, 하나님은 그것을 참된 믿음으로 인정해 주신다는 사실을요. “마음을 쏟아놓다”는 말과 “믿는다”는 말이 같은 뜻이더라고요. 
 
아무도 당신 마음 모를 거예요. 남편도 가족도, 친구도, 목사님도 당신이 왜 우는지 몰라요. 하지만, 슬퍼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아세요. 
 
당신이 울부짖으며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은 듣고 계세요. 하나님이 침묵하셔도,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놓으세요. 당신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아요.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실 거예요. 
 
당신을 위해 기도할게요. 오늘 하루도 포기하지 마세요. 

많은 말로 설득할 필요 없단다

큰일을 앞두고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하는 너를 위로하고 싶구나
 
걱정하지 말거라
 
너에게는 큰일이지만
나에게는 작은 일이란다
 
내가 기꺼이 응답할 것이고
나의 뜻대로 너를 이끌어 갈 거란다
 
두려워하지 말고 
한 걸음을 내딛거라
 
많은 말로 나를 설득할 필요 없단다
거창한 명분을 내세울 필요도 없단다
 
내가 너의 진심을 안다 
 
작은 일부터 큰 일까지 
세세하게 나를 믿고 의지하거라
 
너의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친다면 
내게로 나아와 온종일 기도하거라
 
네가 기도하는 동안
나의 뜻이 선명하게 드러날 거란다 
 
불안으로 요동치는 
너의 감정이 잠잠해질 것이고
너를 짓누르는 모든 걱정이 사라질 거란다
 
내게 와 듣거라
그리고 안심하거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단다
 
사랑한다, 나의 자녀야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누가복음 6:12-13

예수님께 데려다줄게요

From 목격자 (중풍병자의 친구)
 
나의 소중한 친구 세르오는 앞날이 창창한 20대에, 뇌혈관이 터져 온몸이 굳어버렸습니다. 밭에 쓰려져 숨만 쉬고 있던 세르오를, 마을 사람들이 발견해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요. 
 
세르오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내가 세르오를 찾아갈 때마다, 차라리 자기를 죽여달라고 울부짖었지요. 나는 그를 사랑했지만,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을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나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병을 고치고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그분에게, 내 친구 세르오를 데려다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장에 세르오에게 달려갔지요. 
 
“세르오! 우리 마을에 예수님이 오신대! 이제 너도 걸을 수 있어. 내가 너를, 예수님에게로 데려다줄게.” 
 
세르오는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눈물을 쏟아냈지요. 나는 세르오를 부둥껴 안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부디, 내 친구 세르오를 고쳐주시라고요. 
 
나는 다른 친구 셋을 불러, 세르오를 들것에 실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장소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고개를 떨구고 말았습니다. 네 사람이 들것을 들고 발을 맞춰 걸으려니, 다른 사람들처럼 빨리 걸을 수가 없더군요. 
 
우리는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구름 떼처럼 많은 사람들이 겹겹이 쌓여있었습니다. 군중 밖으로 떠밀려, 예수님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지요. 
 
세르오가 말했습니다. 
 
“괜찮네, 친구들. 자네들이 나를 위해 여기까지 와준 것만으로 고맙다네.” 
 
나는 세르오의 손을 꼭 잡고 말했습니다.
 
“세르오, 절대로 포기하지 말게. 나는 자네를 꼭 살려야겠네. 자네를 예수님에게로 데려다주겠어.” 
 
 나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세르오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밖에는 없었습니다. 나와 친구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었습니다. 
 
지붕 위에 구멍이 생기자, 예수님 발 앞에 흙이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집 안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얼마나 걱정이 되던지요. 
 
내가 먼저 고개를 내밀어 안쪽의 상황을 살폈습니다. 그때,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예수님은 따뜻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시며, 말없이 고개를 끄떡이셨습니다. 
 
나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수평을 맞추어 조심히 세르오를 내려보냈습니다. 지붕에서 세르오를 내리는 동안, 예수님은 단 한순간도 시선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세르오가 바닥에 내려진 순간, 예수님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네 죄가 용서되었다. 침상을 들고 일어나렴. 이제 너는 걸을 수 있단다.” 
 
세르오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일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순간이었습니다! 세르오의 굳은 몸이 풀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지붕에서 떨어질 뻔했습니다. 나와 친구들은 너무나 감격해서, 서로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르오를 안아주시며, 등을 두드려 주셨습니다. 
 
세르오의 어깨너머로 예수님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올려다보시며, 인자하게 웃으셨습니다. 이제 세르오는 건강하고 밝은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내게 말하더군요. 세르오가 나은 건, 모두 내 덕분이라고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어색하게 웃을 뿐입니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세르오를 예수님에게 데려다준 것뿐이에요.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세르오는 여전히 절망 속에 있었겠지요.  
 
훗날, 예수님이 우리의 믿음을 언급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와 친구들의 믿음 때문에, 세르오를 고쳐주셨다고요. 자칫 잘못하면, 나와 친구들의 믿음으로 세르오가 나았다고 오해하실 것 같아요. 
 
예수님은 네 사람의 믿음이 아니라, 다섯 사람의 믿음을 보신 겁니다. 세르오 역시 간절히 치유되기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믿음을 보신 거예요. 예수님은 우리의 작은 믿음을 기뻐하시며, 세르오를 고쳐주셨습니다. 
 
사람들은 계속 말을 만들지요. 부정적인 소식은 빨리도 퍼집니다. 들것을 함께 들어준 친구가 어느 날, 내게 속상한 말을 전하더군요. 
 
“이봐, 자네도 들었나? 마을에서 이상한 말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네. 예수님이 세르오에게 “네 죄가 용서되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그 말을 오해한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야. 세르오가 중풍병에 걸린 게, 세르오의 죄 때문이라고…. 이런 터무니없는 말이 어디 있나? 세르오가 그 말을 듣게 되면, 얼마나 상처를 받겠나.”
 
나는 친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해서 실수한 것이라도, 제아무리 상처를 줄 의도가 없다고 하더라도, 세르오가 들으면 마음이 아플 것이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르오의 죄를 지적하신 게 아닙니다. 죄 때문에 세르오가 병든 게 절대로 아닙니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아픈 것도 전부 네 잘못이다”라고 말하다니요.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끔찍한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한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세르오의 질병을 치유하신 것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치유해 주신 겁니다. 참된 자유를 선포하신 것이지요. 예수님은 치유와 용서의 예수님이십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돌보며, 함께 기도하는 당신을 위로하고 싶습니다. 나와 당신은 무능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상처 입은 한 사람을 예수님에게 데려다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나는 못한다고, 나는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다고, 절망하지 마세요. 
 
우리는 못해도, 예수님은 하십니다. 예수님이 반드시 치유하십니다. 당신과 나는 치유자가 아니라, 목격자입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상처 입은 한 사람을 예수님에게로 데려다주세요. 
 
내 이름은 남기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머문 자리, 우리의 이름 대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남겨지기를 소망합니다.

너를 차별하지 않는단다

혼자 외롭게 믿는 
너를 위로하고 싶구나
 
네가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지 못했다고 
아쉬워하지 말거라
 
너를 위해 기도해 줄 부모가 없어도
나는 너를 차별하지 않는단다
 
나의 사랑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단다
 
4대째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어도 
나는 아무런 혜택을 주지 않는단다
 
교회에서 서로를 부르는 호칭마저도 
내게는 아무 의미가 없단다
 
10년을 믿었다, 100년을 믿었다
믿음의 가문을 이뤘다,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주눅 들지 말거라
 
오늘 처음 나를 믿은 너라도,
더듬더듬 나를 알아가는 너라도
나의 사랑은 동일하단다
 
나는 다른 그 무엇으로 
너를 차별하지 않는단다
 
너를 위해 기도해 줄 부모가 없다고 
슬퍼하지 말거라
 
내가 너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밤낮없이 기도한단다
 
내가 너를 자녀 삼았고
영원토록 너와 함께 할 거란다
 
사랑한다, 나의 자녀야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누가복음 3:8

나를 간절히 찾는 자

<잠언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우리 주변에는 인생의 위기를 겪으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넘쳐 납니다. 그들의 간증은 우리를 기쁘게 하고, 기대하게 합니다. 
 
“아, 나도 간절히 하나님을 찾으면 만날 수 있겠구나.” 
 
하지만,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나서, 하나님을 못 만나면 자책감에 빠집니다. 
 
“왜 나는 하나님을 못 만나지? 나는 정말 간절한데…. 그래도, 모자라나? 얼마나 간절해야 하나님을 만나는 거야?” 
 
 말씀을 오해하신 겁니다. 간절함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마음가짐, 즉 태도입니다. 간절함이 조건일 수 없습니다. 
 
남다른 간절함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당신을 만나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 속상한 것이 아니라, 이미 만났던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의 간절함은 우리의 간절함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녀를 찾는 절박함으로, 우리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찾으셨고, 그의 품 안에 우리를 안고 계십니다. 
 
잠언 8장의 말씀은, 지혜와 지혜를 찾는 사람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두 존재의 관계는 사랑이 바탕입니다. 친밀합니다. 단절감과 소외감이 없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관계로 나아갑니다. 
 
우리에게 관심 없는 하나님에게 구걸하듯 매달리는 찾음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우리가 더욱 간절한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을 찾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결핍의 정서는, 하나님을 오해하도록 부추기고,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로 나아가게 합니다. 정서에 속으시면 안 됩니다. 복음으로 정서를 돌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멀게 느껴지는 것도 서러운데, 정성이 부족해서 하나님을 못 만났다고 말씀하시면, 나는 슬픕니다. 
 
하나님이 멀게 느껴지는 것은 감정입니다. 당신에게 진실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은 정성으로 못 만납니다. 은혜로 만납니다. 정성이 모자라도, 괜찮습니다. 은혜의 하나님을 부르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바쁜 사역으로 탈진하지 않으려면

크리스천은 쉴 수 없다. 
 
왜 그럴까? 
 
도와야 할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자기를 돌볼 겨를도 없이 다른 사람을 열심히 돕고 섬기다가 탈진을 반복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일상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을 외면하기 힘들다. 
 
더 빠르게 소진되어 탈진해 버린다. 
 
나라고 예외였을까? 
 
목사라는 직업은 출퇴근이 없다. 
 
굳이 말하자면, 새벽 5시 출근, 퇴근은 10시 넘어서다. 
 
목사가 하는 일 중에 나쁜 일은 없다. 
 
전부 좋은 일이다. 
 
사람을 차별해서도 안된다.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해야 한다. 
 
당연히 거절도 안 된다. 
 
다른 사람 상처받는다. 
 
모든 일을 다하고, 모든 부탁을 다 들어주고, 모든 사람을 다 돌보려고 하니, 금방 탈진한다. 
 
목사마저 이런데, 성도들은 오죽하겠는가. 
 
몸과 마음이 탈진해서 고통받는 목사, 성도가 너무나 많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예수님께 배워야 한다.
 
누가복음 5:15-16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예수님은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계셨다. 모두가 예수님을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들뿐이었다. 
 
혼자 만의 시간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예수님은 어떻게 고갈되지 않고 한결같이 그의 자녀들을 사랑할 수 있으셨을까? 
 
그 비결은 다음 한 문장에 있다.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그 뜻을 살펴보자. 
 
물러가시다: 예수님이 사람들과 물리적 정서적 거리를 두셨다는 뜻이다.
 
한적한 곳: 조용히 하나님을 만날 장소가 필요했다는 뜻이다. 
 
기도하시니라: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동작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기도는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반복적이었다. 
 
예수님은 아무리 바쁘고 고된 사역 속에서도, “물러나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 어떠한 일정과도 타협하지 않으셨다. 
 
기도를 최우선 순위에 놓고 사역하신 것이다. 
 
몸이 피곤하면 며칠 쉬면 된다. 
 
그러나, 정서가 고갈되면 회복에 기약이 없다.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사역을 위해, 적정한 바운더리는 필수다. 
 
예수님은 다른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하신다. 
 
예수님께 죄송한 마음을 가질 필요 없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을 따라 해라. 
 
그래야, 기쁨으로 지치지 않고 사역할 수 있다.

항상 기뻐할 수 없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 
항상 기뻐하라
 
당신은 항상 기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불가능한 목표를 제시하고,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을 정죄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을 오해하는 겁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단지, 두 단어로 짧습니다. 하지만, 이 짧은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극단적이죠.
 
말씀 그대로 기뻐하는 사람이 있고, 기뻐하지 못해 슬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뻐하는 사람도 마냥 기뻐할 일이 아니고, 슬퍼하는 사람은 굳이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쁨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없거든요.
 
사람이 항상 기뻐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물리적 시간으로 24시간 기뻐하는 사람은 정상이 아니거든요. 어쩌면 치료가 필요한 사람일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항상”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기쁨의 개념을 복음적으로 이해한다면, “항상”이라는 말이 물리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게 될 겁니다.
 
“항상”이라는 말은, 오히려 의지적인 개념입니다.
 
기쁨을 말하기 전에, 우리는 보다 포괄적인 개념인 감정에 대해 살펴봐야 합니다.
 
감정은 무엇일까요?
 
감정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은 특정한 대상에 따른 심리적인 반응이거든요.
 
내 주장이 아니라 상식이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으로부터 창조의 능력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창조할 수는 없겠지요. 사람 역시 피조물이니까요. 그 예로, 사람은 감정을 창조할 수 없습니다. 
 
만약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창조할 수 있다거나, 손바닥을 뒤집듯이 감정을 전환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중대한 착각에 빠진 겁니다. 
 
감정은 느끼는 것이지 억지로 쥐어짜는 것이 아니거든요.
 
사람이 원수를 마음에 품으면 그에 따른 감정은 분노입니다. 원수를 바라보는 사람은 원수에 대한 감정을 느끼는 거죠.
 
원수에 대한 감정이 사랑인 사람이 있을까요? 
 
감정의 속성을 오해한 채로 말씀을 지키려는 사람은 원수를 바라보면서 사랑의 감정을 억지로 쥐어짭니다. 안타깝지만, 실패하겠죠.
 
역설적으로, 원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은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바라보는 대상이 원수가 아니라 예수님이기 때문이죠.
 
다시 말하지만, 사람은 감정을 스스로 창조해 낼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원수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것은 스스로 창조한 감정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반사된 감정입니다.
 
항상 기뻐하려는 자, 억지로 기뻐하지 마십시오. 기뻐하지 못하는 자신을 정죄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감정을 창조할 수 없습니다.
 
기쁨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은혜의 결과입니다.
 
당신에게 은혜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라보는 대상이 잘못되었다는 말이죠. 기쁨의 대상을 바라봐야 기쁨을 느낍니다.
 
잘못된 대상은 무엇일까요?
 
내 옆에서 나보다 기뻐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의 감정은, 결국 열등감으로 이어집니다. 
 
세상 어딘가에 항상 기뻐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추론하지 마십시오. 그럴수록 더욱 비참해질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세상에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도 항상 기뻐할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세상 어딘가에 항상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라, 당신의 결핍이 만들어낸 상상 속 인물일 뿐입니다.
 
사람은 예수님을 바라볼 때만 기쁩니다. 바울도 알았습니다. 항상 기뻐하려고 해도 기뻐할 수가 없었거든요. 바울 역시도 예수님을 바라볼 때만 기뻤습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은,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의 감정이 어떠할까요? 원망, 불평, 슬픔, 고독, 절망, 불안, 우울일까요?
 
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항상”이라는 말은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의지적 개념입니다. 항상 바라보면 항상 기쁘지만, 항상 바라보기는 어렵거든요.
 
시선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하는 그 무엇에, 시선이 머무르게 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셔야 합니다.
 
항상 기쁘려고 하는 사람은 슬플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바라보는 사람은 기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돌보다 지쳐버린 당신에게

나는 상담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상처를 가져온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아프고 힘든 이야기이다. 
 
부족한 내가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뿐이다. 
 
하지만, 나 역시도 슬럼프가 온다. 
 
여러 번의 슬럼프를 겪으면서, 그 원인을 알게 되었다. 
 
마음이 조급해지면, 어김없이 슬럼프가 왔다. 
 
‘내가 더 상담을 잘했다면…’
‘내가 더 관심을 기울였다면…’
‘내가 더 기도했다면…’ 
 
상처 입은 한 사람을 마주하면 절박해진다. 
 
정말로 돕고 싶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예수님보다 앞서가게 된다. 
 
어김없이 넘어진다. 
 
상처 입은 한 사람을 돌보려면, 내 위치를 잘 알아야 한다. 
 
나는 상처를 치유할 능력이 없다. 
 
당연히 알고 있지만, 절박한 상황과 마주하면 마음이 급해진다. 
 
마음이 앞서갈수록, 나 스스로에게 말해줘야 한다. 
 
“나는 상처를 치유할 능력이 없다. 나의 역할은 상처 입은 한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다주는 것이다. 예수님이 치유하실 것이다. 나는 목격자일 뿐, 치유자가 아니다.” 
 
나 혼자만 겪는 일은 아닐 것이다. 
 
다른 사람을 돌보는 사람이라면, 자주 겪는 일이다. 
 
아무 능력 없는 자기 자신과 마주하더라도 실망할 필요 없다. 
 
예수님은 당신을 기뻐하신다. 
 
누가복음 5: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다준 친구들의 이야기이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를 데려갔지만 사람이 많아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가 천장을 뜯었다.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그들의 믿음에 감동하셨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즉시 중풍병자를 치유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그를 구원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분명한 역할 분담을 목격한다. 
 
친구들은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다주었고, 예수님은 치유하셨다. 
 
우리의 무능함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부여된 역할이 있다면, 상처 입은 한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다 주는 것이다. 
 
내가 치유하고 고치려 들면, 결국 그 무게를 감당 못해 무너지고 만다. 
 
우리는 목격자일 뿐, 치유자가 아니다. 
 
상처를 치유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다.

마음이 무너지는 날

<누가복음 3: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마음이 막 무너지는 날, 있잖아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잘나 보이고, 나 빼고 모든 사람이 걱정 없이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날, 다른 사람과 비교할 의지조차 사라질 만큼 나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지는 그런 날 있잖아요. 
 
막 울고 싶은데, 어디 가서 울어야 할지 몰라 성경을 펼쳐 읽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평소에 많이 읽은 말씀인데, 왜 갑자기 눈물이 나지? 
 
‘내가 네 마음을 안다, 그 마음을 내가 모르겠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예수님의 시작은 고요했어요.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죠. 예수님이 누추한 옷을 입고 요단 강에 나타나셨을 때, 사람들 눈에는, 자기들처럼 죄를 용서받으려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온 사람처럼 보였을 거예요. 
 
그럴만해요. 당시의 모든 종교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있었어요. 갈릴리 요단 강은, 유능하고 탁월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아니었죠. 예루살렘에서 낙오한 사람들이나 모여드는 변두리에, 감히 메시아라니…. 상상할 수도 없었겠죠.   
 
예수님은 아무런 설명도 변명도 없이,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 요한 앞에 서셨어요.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그 누구의 동의도 필요 없으셨지만, 이제 허락하라는 말로 세례를 받으셨어요. 
 
예수님이 기도하셨을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님이 비둘기처럼 내려오셨고, 하나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어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단다.”
 
여기서, 많이 울었어요. 하나님의 목소리가 나한테도 들리는 것 같아서요. 내가 위로를 받고 마음이 따뜻해지니까, 이제야 당신이 보여요. 당신을 위로하고 싶어요. 
 
‘내가 이렇게 비참해진 건 내 선택의 결과일지도 몰라. 내가 어리석었어. 올바른 결정을 내렸다면, 이렇게까지 비참해지지 않았을 거야.’ 
 
그보다 비참한 생각은 없을 거예요. 당신이 나처럼 슬프다면, 우리 잠시 대화해요. 
 
어쩌면, 우리 실수한 게 아니에요. 과거로 돌아가 똑같은 상황에 놓이더라도, 똑같은 결정을 내릴지도 몰라요. 두 번 어리석을 수 있다면,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신념이에요. 
 
혹시, 예수님을 사랑해서 내린 결정 아닐까요? 책임을 회피하고, 변명하고, 합리화하자는 말이 아니에요. 진실을 알고 싶어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어리석은 결정이 가능했을까요?
 
당신은 예루살렘에서 밀려난 게 아니라, 예루살렘을 추구하지 않은 거예요.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예수님을 닮아서, 예수님처럼 올바른 결정을 내린 거예요.
 
당신의 실수가 아니에요. 올바른 선택이에요. 자책하지 마세요. 비록 예루살렘과는 멀어졌을지 몰라도, 예수님이 당신과 함께 하세요. 
 
좁고 험한 그 길 끝에서, 예수님이 두 팔로 안아주시고, 사랑으로 속삭여 주실 거예요. ‘잘했다. 수고했다. 내가 너무 기쁘구나’ 예수님의 진심이에요. 조금만 힘을 내주세요. 얼마 남지 않았아요.

예수님이 내 기도를 듣고 계실까?

<누가복음 8:22-23>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예수님께서 내 기도를 듣고 계실까? 확신이 없을 때가 있어요. 그럴 수 있죠. 예수님이 듣고 있다고 직접 목소리로 대답해 주시지 않으시니까요.
 
나도 기도하다 답답할 때가 있어요. 기도를 하는 건지, 혼자 푸념을 하는 건지 딱 부러지게 구분을 못할 때도 있죠.
 
나는 기도가 막힐 때, 성경을 읽어요. 특히, 복음서를요. 예수님의 목소리가 안 들리니까, 이미 하신 말씀이라도 들어보고 싶어서요. 
 
말씀을 읽다 보면, ‘그렇지, 답답한 건 내 감정이지. 예수님이 분명히 듣고 계시지.” 혼자 위로받거든요. 감정이 너무 나를 힘들게 하니까, 말씀으로 감정을 돌보는 거예요. 
 
예수님은 절대로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세요. 나의 슬픔, 고통, 두려움, 외로움, 모르시지 않아요.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시느라 몸을 혹사하셨어요. 한 사람이라도 더 치유하시고, 구원하시느라 일분일초가 아까우셨어요. 
 
낮에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이셨고, 밤에는 한 사람 한 사람 찾아다니며 돌보셨어요. 이른 새벽에는 조용히 산에 올라 기도하셨고요. 정말로 쉴 틈이 없으셨죠. 
 
예수님이 제자들과 배에 오르시자마자, 잠에 드신 게 당연하죠. 얼마나 피곤하셨을까요? 
 
예수님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호수를 건너 거라사의 광인을 만나러 가셨어요. 가족에게 버림받은 것으로 모자라, 온 세상 사람에게 버림받은 한 사람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그분이 우리 예수님이세요. 
 
예수님은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쉬지도 못할 만큼 한 사람을 사랑하셨어요.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으셨어요. 동시에 모든 사람을 만나실 수 없었어요.
 
이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요. 예수님은 더 이상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세요.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예수님은 모든 일을 제쳐놓고 우리를 찾아와 만나주세요. 
 
예수님의 사랑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더 많은 것을 해주실 수 있어요. 온 세상의 버림을 받은 상처 입은 한 사람을 치유하시고자, 폭풍을 뚫고 호수를 건너신 예수님이 우리를 외면하실리 없으시죠. 
 
말씀 속에 거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면, 나는 항상 설득 당해요. 혼자라는 감정을 거슬러 예수님께 나아가요.  
 
‘예수님, 저는 지금 혼자인 것 같아요. 예수님이 느껴지지 않아요. 하지만, 예수님, 지금 제 목소리 듣고 계시죠? 저 너무 힘들어요.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제 힘든 마음 한 번만 위로해 주세요.”
 
외로운 감정이 밀려오면, 성경을 펼쳐서 말씀 안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보세요.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은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하세요. 기억하세요. 속이는 건 감정이고, 진실은 사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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