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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가정폭력

별처럼 슬픈 밤

“참 바보 같지요. 앞날이 뻔히 보이는데, 두려워서 말도 못 하고 남자친구 뒷바라지를 했으니까요.
 
그 사람은 다른 여자를 만나 결혼했어요.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보고 알았어요. 가끔 생각날 때 확인해 봤어요. 터무니없지만, 아직 기회가 있다는, 뭐 그런 생각하면서요.
 
다른 여자와 찍은 사진을 처음 봤을 때, 잠을 잘 수 없었어요. 프로필 사진이 웨딩 사진으로 바뀐 날은 죽고 싶었고요. 지금도 밤마다 생각해요. 이대로 영원히 잠들면 좋겠다. 살아서 뭐 하겠어요. 살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말했다. 남자친구가 떠나간 그날 밤, 모든 것을 잃었다고.
 
#
 
“괜찮은 남자라니까, 한 번 만나 봐.”   
 
“난 어린 사람 싫어, 언니.”
 
“일단 한 번 만나 봐. 생각도 깊고 듬직한 애야.”
 
교회 언니 소개로 그를 처음 만났다. 남자에게 흥미가 없던 터라, 일부러 남자를 만나지 않았다. 친한 사람들이 남자를 소개할 때마다 난처했다. 예의상 한 번 만나준다는 생각으로 마지못해 나갔다.
 
듬직한 체격, 다부진 어깨, 각진 얼굴. 그의 첫인상은 듬직하다 못해 부담스러웠다. 적당히 시간만 때우고 일어나자, 생각했다.
 
대화를 하는데 묘한 매력을 느꼈다. 외모와는 달리 부드러운 말투였다. 얼굴을 손을 가리고 웃는 소심함이랄까.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받았다. 한 번쯤은 더 만나도 될 것 같은 그런 남자였다.
 
두 달이 지난 후, 고백을 받았다. 어쩌면 처음이었다. 누군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설레였던 감정 말이다. 두 사람은 기념으로 반지를 맞췄다.
 
그녀의 나이 서른하나, 남자친구는 스물일곱, 네 살 연하의 남자였다. 남자친구는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해서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그녀는 회사생활 5년 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취업을 앞두고 심란해 보였던 그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 대학원에 가야 할까 봐. 하고 싶은 공부가 있어.”
 
공부를 하고 싶다는 그의 말에 그녀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녀의 나이 서른하나였다. 공부를 마치고 나면, 서른셋이 된다.
 
사귄 지 187일이다. 선뜻 ‘결혼은?’이라고 물을 수 없었다. 우리 둘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그잔을 손으로 감싸 쥐며 창밖을 바라봤다.
 
“걱정하지 마. 공부 마치면 우리 바로 결혼하자. 나 진심이야. 조금만 더 기다려줘.”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애써 태연한 척했다.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공부하는 동안 남자친구는 그녀에게 최선을 다했다. 학생의 장점이랄까. 퇴근 시간에 맞춰 그녀를 기다렸다. 카페 유리창 너머로 그를 바라볼 때마다 그녀는 행복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두 사람은 결혼 이야기를 시작했다.
 
#
 
상견례를 앞두고 그는 초초하게 말했다.
 
“사실은 우리 부모님이 조금 까다로우셔. 특히,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어머니가 결혼을 반대하셔. 하지만, 걱정 마. 계속 설득하고 있어. 반대하셔도 할 수 없잖아. 내 결심은 달라지지 않아. 너도 오래 기다렸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조각 케이크가 심장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기분이었다. 숨이 막혀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 엄마는….”
 
평소에 그는 어머니에 대해 말을 아꼈다. 어머니 이야기만 나오면, 시선을 피하고 말을 돌렸던 그였다. 그가 처음으로 어머니에 대해 말을 꺼냈다.
 
그의 아버지는 술만 먹으면 어머니에게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다.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었다. 경제적인 이유였다.
 
“내가 아버지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뭔지 아니? 너 때문이야. 너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지긋지긋한 삶도 이제 끝이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어머니가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너 결혼할 때까지는 참아야 되지 않겠니? 빨리 장가가라. 그래야, 지긋지긋한 삶에서 벗어나야 할 거 아니야.”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의 어머니는 말했다.
 
“어디서 그걸 여자라고 데리고 왔어. 내가 고작 그런 년하고 결혼시키려고 이날 이때까지 참은 줄 알아!”
 
그는 답답했는지, 커피를 물처럼 들이켰다.
 
“말하고 나니 속은 시원하네.”
 
그녀의 반응이 없자, 그가 조급한 듯 말했다.
 
“나한테 시간을 조금만 줘. 급할 거 없잖아. 올해까지 설득해보고, 그때 안되면 그냥 우리끼리 결혼해버리자.”
 
한 달이 지난 후, 그의 어머니가 전화를 했다. 교양 있는 말로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본론을 말했다.
 
“우리 애가 우유부단해서 결정을 못 내리는 애야. 그러니까, 네가 결정을 내리는 게 맞지 않니? 이제, 우리 아들 그만 만나라. 너 나이도 있는데, 하루라도 빨리 좋은 남자 만나야지.”
 
참을 수 없었다. 남자친구를 원망했다. 독설을 퍼부었다. 남자친구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는 말없이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다음 날도 그의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벨은 주말도 없이 부지런히 울렸다.
 
그녀가 전화를 받으면 릴레이 경주를 하듯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어머니에게 걸려오는 전화는 쉬지 않고 울렸지만, 남자친구의 전화기는 고요했다. 그의 전화기는 꺼져있었다. 바통터치 되지 않는 릴레이가 계속됐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한 그는 회의 핑계를 댔다. 회의 중에는 모든 직원이 전화기를 꺼둔다고 변명했다. 퇴근 후에 야근, 회식 때문에 전화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수 십 번을 전화했을 때가 그가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이성을 잃었다. 길 한복판에서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야! 너 미쳤어. 어디서 지금 이따위로 사람을 대하고 난리야. 나도 아쉬울 거 없어, 알아? 너 같은 놈 나도 싫어!”
 
그는 침묵했다. 할 말 다 했냐고 물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주말 내내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남자친구에게 문자라도 오지 않을까, 머리맡에 전화기를 뒀다. 진동이 울리면 손을 뻗어 전화기를 확인했다. 스팸문자뿐이었다.
 
‘설마, 그럴 리 없어. 나한테 이럴 수는 없어.’
 
출근은 했지만, 일을 할 수 없었다. 몸이 아프다고 핑계를 대로 집에 돌아와 누웠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전화기가 부르르 떨렸다. 그가 보낸 문자였다.
 
“오늘 퇴근 후에 잠깐 보자.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그를 만났을 때, 그는 혼자 선언하듯 말했다.
 
“우리 여기까지야. 이제 그만하자. 너도 나도 할 만큼 했어.”
 
#
 
그녀가 어릴 때 아버지는 집을 나갔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건 초등학교 오학년 여름 날이었다.
 
물건이 깨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화장대 거울에 금이 갔다. 깨진 거울에 엄마가 비쳤다. 거울에 비친 엄마 얼굴이 여러 개였다. 하나, 둘, 셋.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이대로 나가면 어떻게!”
 
“내가 말했잖아. 잠깐 피하는 거라고.”
 
아빠가 짐을 싸느라 정신이 없다.
 
“당신만 살면 되는 거야? 우린 어떻게 해?”
 
엄마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그게 아니라고 몇 번 말해. 일단 도망가야 해. 같이 살 집 구하면 내가 바로 연락할게. 일주일도 안 걸려. 나 감옥 가면, 우리 가족은 누가 먹여 살려. 나 절대로 감옥 안 갈 거야. 억울해서 미치겠다고.”
 
“여보, 다시 생각해 봐. 그래도 이건 아니야. 우리도 데려가. 제발, 여보.”
 
“애까지 데리고 어떻게 도망을 치라고. 비켜!”
 
아버지가 문을 박차고 나갔다. 엄마가 뛰어나가 아버지에게 매달렸다. 아버지는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엄마는 몇 미터 끌려다가 멈췄다. 무릎이 까진 채 엎드려 세상이 떠나가듯 울었다.
 
그녀는 창가에 서서 바닥에 쓰러져 우는 엄마를 바라봤다.   ‘내가 없었다면, 아빠는 엄마를 데려갔을까.’
 
엄마의 대본에서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엄마의 대본을 고치고 싶지 않았다. 대본대로 행동하는 게 편했다.
 
그녀는 적절한 시기마다 대본에 쓰인 대로 말했다. ‘엄마, 아빠는 언제 와?” 엄마 역시 대본에 충실했다. “곧 오실 거야.”
 
‘엄마는 정말 몰랐을까.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었을까.’
 
어린 그녀도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발걸음은 일주일짜리 발걸음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구두가 시멘트 바닥에 부딪혀 따닥따닥 내는 소리는, 모스 부호처럼 선명했다.
 
“다. 시. 는. 돌. 아. 오. 지. 않. 을. 거.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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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나간 후, 엄마는 시체처럼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뱃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요동해도 엄마를 깨울 수 없었다. 배가 고프다고 엄마를 깨우면, 밥 대신 욕을 얻어먹었다.
 
방은 어두웠다. 엄마는 울다 자다를 반복했다. 이틀에 한 번 엄마가 일어나 돈 만 원을 던져줬다. 돈을 집어 들고, 집 앞 가게에 가서 담배 한 갑과 라면을 사 왔다.
 
이모에게 전화를 받은 엄마가 갑자기 달라졌다. 밤마다 화장을 짙게 하고 밖으로 나갔다. 알록달록 이상한 옷들이 늘어갔다. 엄마가 먹고살려고 술집에 나가 일을 시작한 것이다.
 
밤마다 혼자 자는 게 무서웠지만, 엄마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동이 틀 때쯤 집에 들어오는 엄마는 딸보다 변기를 먼저 찾았다. 남편 대신 변기를 끌어안고 구토와 울음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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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잠깐 마주하는 엄마는 칼처럼 예민했다. 작은 것 하나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말투, 눈빛에서 세상을 향한 분노가 새어 나왔다.
 
“비누 어디 갔어?”
 
엄마가 물었다.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그녀가 말했다.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우리 집에 둘 밖에 없는데.”
 
“나 정말 몰라.”
 
“이게 어디서 거짓말이야.”
 
엄마가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그날은 비누가 없어졌다. 전날은 벽 시계가 멈췄다. 택배가 늦은 날도, 가스비가 청구된 날도 그녀는 뺨을 맞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는 엄마의 쓰레기통이었다. 엄마는 구깃구깃한 감정을 딸에게 던져버렸다.
 
“어디서 거짓말을 하고 난리야. 어린 게 제 아빠를 빼다 박아가지고. 생긴 것도 모자라서 거짓말하는 것도 닮았어. 한 번 만 더 거짓말하면 그때는 가만히 안 둬, 알겠어!”
 
엄마는 저녁 10시가 되면 어김없이 집을 나갔다. 짙은 향수 냄새를 단칸방에 채워 넣고 밖에서 문을 잠갔다.
 
그녀는 저녁 대신 향수를 먹었다. 엄마가 없는 저녁마다 창문을 열었다. 바닥에 누우면 한 뺨 창밖으로 밤 하늘이 보였다. 외로웠다. 울다 잠든 날이 별처럼 많았다.
 
#
 
엄마가 없는 날, 아빠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뇌의 저편에서 아빠라는 단어가 번쩍했다. 의식에서 지워졌던 기억이 7년 만에 되살아났다. 차분하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여보세요?”
 
그녀가 말했다.
 
“잘 지내지? 아빠야.”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엄마, 지금 옆에 있니? 있으면 바꿔줄래.”
 
“….”
 
엄마는 집에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볼래. 아빠가 몇 년 만에 전화했잖아. 그동안 힘들었지. 아빠가 미안하다. 지금 최선을 다해 방법을 찾고 있으니까 아빠가 곧 데리러 갈게.”
 
“….”
 
이제 그럴 필요 없다.
 
“너 지금 우니?”
 
“….”
 
울지 않는다.
 
“그래, 그럼 알았다. 아빠가 또 연락할게.”
 
뚜 –
 
변한 건 없었다. 그녀에게는 아빠의 자리는 없었다.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다. 엄마는 엄마의 인생을 되찾았다.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고 말하면 엄마의 인생은 다시 멈춘다. 엄마를 위한 배려였다.
 
“엄마, 전화번호 바꿔줘.”
 
“왜?”
 
“옛날에 빚 갚으라 했던 사람들이 낮에 전화했어. 이러다 우리 집까지 알아내면 어떻게 해. 나 무서워.”
 
엄마는 화장을 하다 멈칫했다. 파우더를 든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를 바라보며,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알겠어. 엄마가 내일 전화번호 바꿀게.”
 
#
 
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녀는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밤늦게 집에 들어온 그녀가, 현관에서 남자 신발을 목격했다. 빨간색 뾰족구두와 밤색 구두가 뒤엉켜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엄마는 태연한 듯 행동했다. 이른 새벽, 밤색 구두의 사내는 사라지고 없었다. 엄마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엄마의 대본대로 행동했다.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엄마의 인생을 살고, 그녀는 그녀의 인생을 살았다.
 
그 남자가 집에 오는 날이 늘어갔다. 엄마가 집에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그녀의 집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집에 라면 있냐?”
 
“없어요.”
 
“그럼 가서 사 올래? 여기 돈.”
 
“아저씨가 직접 사다 드세요.”
 
“버릇없다, 진짜.”
 
“엄마도 없는데 왜 우리 집에 계세요. 불편해요, 저.”
 
“라면 한 그릇만 끓여먹고 나갈 거야. 제발 그런 눈빛 좀 하지 마라.”
 
그 말이 전해진 것 같았다. 엄마는 그날 이후 그녀를 보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주말 저녁, 엄마는 그녀를 불러 앉혔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깊이 빨았다. 그녀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엄마는 그 아저씨 좋아해. 너만 괜찮으면 같이 살자.”
 
그녀는 대답 대신 기침을 했다.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얼굴이 빨개지도록 기침을 했다. 연기에 질식한 것인지, 엄마가 내뿜은 말에 질식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반응은 중요하지 않았다. 엄마는 미리 외워둔 자기 대사를 계속했다.
 
“사실 이 집 그 사람 거야. 우리 판자촌 벗어나게 해주고, 너 학교 다니게 해준 사람이야. 그 교복도 그 사람이 해 준 거고. 같이 살기는 힘들겠지만, 적응 잘 해봐. 어차피 학교에서 밤늦게 오니까 잠깐만 참으면 되잖아.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하면 독립해. 엄마는 능력 없어.”
 
“….”
 
처음으로 엄마에게 욕을 했다. 입에 담을 수 없는 쌍욕을 무한 반복했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폭탄은 속에서 터졌다. 충격에 입술이 씰룩였지만, 엄마는 몰랐다. 이를 악물고 간신히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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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독립했다. 대학에 가서 고시원에서 살았다. 바로 취업해서 독하게 살았다. 월급을 아끼고 아껴 썼다. 오피스텔 보증금을 마련하고 고시원을 탈출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빠듯한 삶을 벗어날 수 없었다. 월급의 절반을 엄마에게 보내도 엄마는 모자라고 난리였다. 소소한 일이라도 하면서 용돈이라도 벌어보라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무리하게 몸을 쓰면 병원비로 나가는 돈이 더 많다고 말했다. 쉬면서 조용히 사는 게 돈을 아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엄마였다.
 
#
 
“딸, 엄마가….”
 
엄마가 돈을 보내달라고 하기 전에 항상 하는 말이다.
 
“지난번에 ‘미니’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왔는데, 치료가 길어질 것 같다고 해서….”
 
“엄마, 지금 개새끼한테 들어갈 돈 없어. 나도 간신히 살고 있는데 무슨 개한테 돈을 써. 안락사 시켜.”
 
“너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 그러면 못 써.”
 
“내가 여유가 없어서 그래. 아무리 힘들어도 매달 보내주는 용돈 안에서 살아야 해. 매번 이런 식으로 하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그래서, 말하잖아. 이번 한 번 만이라고.”
 
“그 말이 벌써 몇 번째야, 엄마.”
 
“무슨 몇 번째니? 오늘 처음 말한 건데.”
 
“처음 아니야. 개 갖다 버려. 끊을게, 엄마.”
 
엄마에게 전화가 온 날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옥상에 올라가 잠시 머리를 식혔다. 미니라는 개는 늙어간다. 앞이 보이지 않아 똥오줌을 못 가리고, 기운이 없어 산책도 못한다.
 
엄마는 미니와 자신을 구분하지 못했다. 엄마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듯, 하루 종일 거실에 앉아 안쓰럽게 개를 쳐다보고 쓰다듬었다.
 
결국, 엄마에게 돈을 보냈다. 그녀는 엄마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다. 감정과 상관없었다. 반사 신경처럼 그녀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아빠가 떠난 날, 엄마의 영혼도 떠났다. 술집에 나가 웃음을 팔아 번 돈으로 그녀를 키운 엄마였다. 그런 엄마라도 살아있어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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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오지 않았다. 남자친구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우리 여기까지야. 이제 그만하자. 너도 나도 할 만큼 했어.”
 
그녀는 혼잣말을 반복했다.
 
‘아니,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밤마다 고통이 찾아왔다. 울다 지쳐 잠드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새벽에 잠에서 깨면 식은 땀으로 온몸이 젖어 있었다. 백 일이 지나도, 일 년이 지나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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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저녁 퇴근길, 그녀는 편의점에 들렀다. 노란색 바나나 우유를 샀다. 다 마신 병을 버리지 않았다. 집에 가져와 책상에 내려놓았다. 똑같이 생긴 플라스틱병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가지런히 놓였다. 촘촘하게 일자로 놓인 플라스틱병이 책상을 가득 매웠다.
 
플라스틱병이 갈수록 늘어갔다. 책상을 가득 메운 플라스틱병은 방바닥으로 이어졌고,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집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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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미친년아. 너 실성한 거 아니냐.”
 
엄마가 찾아왔다. 주말 내내 전화를 받지 않으니까, 걱정돼서 찾아온 것이다. 엄마의 잔소리에 그녀가 돌아누웠다. 엄마는 쉬지 않고 말했다.
 
“아니, 무슨 바나나랑 원수 맺었냐. 먹으면 치워야지. 왜 쓰레기를 방에 쌓아두고 있어? 이게 도대체 뭔 일이야.”
 
“엄마, 그만 나가.”
 
엄마는 듣지 못했다. 쓰레기봉투에 병을 담느라 정신이 없다.
 
“엄마, 나가라고.” 그녀가 다시 말했다.
 
엄마는 여전히 듣지 못했다. 그녀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엄마, 내 말 안 들려? 나가라고!”
 
깜짝 놀란 엄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플라스틱 통이 여기저기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녀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엄마, 나가라는 말 안 들려. 나가서 두 번 다시는 오지 마. 내 앞에 나타나지도 말고, 나한테 연락하지도 마. 꼴도 보기 싫으니까.”
 
찰싹.
 
그녀의 얼굴이 후끈거렸다. 엄마가 노려보며 말했다.
 
“별 미친년을 다 보겠네. 알겠어, 이년아. 다시는 안 오면 되잖아.”
 
#   
 
“웃기죠? 엄마는 그날 이후로 정말 연락을 안 해요. 내가 딸 노릇 한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결국 이렇게 됐네요. 남자친구에게 버림받고, 엄마에게 버림받고….
 
나같이 비참한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모든 걸 잃은 것 같아요. 밤마다 생각해요. 이대로 잠들어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녀가 비참해졌다는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녀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 했다. 어쩌면 그녀는 오래전에 버려졌다. 아빠의 말로 버려졌고, 엄마의 말로 버려졌고, 남자친구의 말로 버려졌다.
 
“애까지 데리고 어떻게 도망을 치라고. 비켜!”
“고등학교 졸업하면 독립해. 엄마는 능력 없어.”
“우리 여기까지야. 이제 그만하자.”
 
그들의 말은 차갑고 무서웠다.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한 채, 한 사람의 내면을 짓밟아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길 수는 없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다. 저마다 자신만의 이유가 있을 것이고,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면서, 이미 스스로를 용서했을 것이다.
 
그녀의 이해와 용서는 그들에게 전혀 필요하지 않다. 그들은 각자 혼자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문득문득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아쉬움이 남겠지만, 저마다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면서 각자의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인생은 그들의 것이 아니다. 그녀의 인생은 그녀의 것이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비참하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은 그녀가 그녀 스스로를 버리는 것이다. 그녀는 아직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타버린 잿더미 속에 작은 희망의 불씨가 남았다.
 
그녀는 어렴풋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돌봤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버릴 때마다, 그녀는 스스로를 다시 주웠다. 버려진 자신을 줍고 닦아서 간직했다.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죽고 싶지만, 살고 싶다. 살고 싶은 본능이 그녀를 내 앞으로 데려온 것이다. 그녀는 알고 있다. 언젠가 그녀는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일어설 것이다.
 
그녀가 고통받는 이유는 버림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고통받는 이유는 그녀가 미지의 세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해결하지 못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언제 어떻게 고통이 해결될 것인지 알지 못해 두려운 것이다.
 
고통은 영원히 미지의 세계다.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고통을 피할 수 없다면, 고통을 다루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고통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이 고통을 견딜 수 있다. 현재의 고통은 현재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다. 현재의 고통은 한 사람이 일생 동안 추구할 궁극의 의미와 맞닿아 있다.
 
버림받은 기억으로 고통받는 사람은 버림받지 않기 위해 값비싼 비용을 치른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사랑하고 희생한다. 자기 인생은 어찌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버림받을지언정,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고통이 찾아오면 깨닫는다. 자신 안의 결핍을 발견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 자신을 희생시켜 관계를 유지하는 자신을 직면한다.
 
같은 패턴으로 고통이 반복되면, 결국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절망과 좌절의 터널을 지나면서, 자신을 지키고 보호할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고통은 반복된다. 고통의 터널은 하나가 아니다. 쉬지 않고 계속 나타난다. 터널을 지날 때, 라이트는 자동으로 켜지지 않는다. 수동이다. 때에 맞춰 라이트를 켜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도로 위에 터널이 없기를 바라면 안 된다. 어두운 터널을 만나면, 침착하게 라이트를 켜라. 그러면, 당신은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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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남자친구를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아요. 자기가 힘들다고 여자를 버린 사람이잖아요. 결혼했어도 행복하지 않았을 거예요. 시어머니를 제가 어떻게 감당했겠어요. 게다가 그 사람은 마마보이처럼 행동했는데요.
 
정확히 말하면, 그 남자가 그리운 게 아니에요. 사랑받았던 감정이 그리운 거죠. 남자친구의 뒷바라지를 해서라도 사랑받고 싶었던 제 자신이 후회스러운 거죠. 사랑받으려고 너무나 비싼 값을 치렀어요.
 
언젠가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도 있겠죠. 나이도 있으니, 평생 혼자 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서두르지 않으려고 해요. 누군가를 만나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지금 당장은 괜찮아진 것 같아도,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지도 모르고요. 지금은 그냥 제 자신을 조금 더 알고 싶어요.”
 
그녀가 라이트를 켰다. 터널 세 개를 지나는 동안 라이트를 켜는 방법을 깨달은 것이다. 다음 터널에서는 그녀가 때에 맞춰 라이트를 켤 수 있을 것이다.
 
라이트를 켜고 끄는 일은 번거롭다. 라이트를 제때 못 켰다고 우는 날 있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언젠가 하늘의 찬란한 빛이 그녀의 앞길을 비춰줄 것이다. 눈부신 그날이 속히 오기를 바랄 뿐이다.

엄마가 전화할게

민수는 자정이 넘어 집에 들어왔다. 수능이 10개월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다. 학원에서, 독서실로 갔다가 집으로 오는 것이 하루 일정이었다. 
 
민수가 집에 도착했을 때, 집은 난장판이었다. 아빠와 엄마가 부부 싸움을 한 것이다. 민수는 깊은 한숨을 내뱉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민수는 바로 잠에 들 수가 없었다. 학원에서 내준 과제가 적지 않았다. 졸린 눈을 비벼가며, 책상 앞에 앉았다. 
 
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지만, 익숙한 소리였다. 책에 집중하려고, 이어폰으로 귀를 막았다. 
 
그때였다. 이어폰 너머로 와장창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민수는 깜짝 놀라 밖으로 뛰어나갔다. 거실에서 부모님을 마주한 민수는 짜증이 극에 달했다. 
 
장식장이 쓰려지면서, 거실 바닥에 유리 파편을 쏟아냈다. 엄마와 아빠는 거칠게 몸싸움을 했다. 엄마는 아빠의 손목을 잡고, 사력을 다해 버텼다. 아빠는 엄마의 손목을 뿌리치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빠가 엄마의 손을 떨쳐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엄마의 뺨을 내리쳤다. 
 
찰싹.
 
아빠의 솥뚜껑 같은 손에 엄마는 힘없이 쓰려졌다. 민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아빠에게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질렀다. 
 
“제발 그만 좀 하라고!” 
 
민수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아빠가 깜짝 놀랐다. 아빠는 민수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말했다. 
 
“뭐라고? 다시 한 번 말해 봐.” 
 
“그만 좀 하라고!” 
 
민수가 아빠에게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아빠가 민수의 멱살을 잡았다. 
 
“이 자식이, 어디서 아빠한테 그딴 식으로 말해?” 
 
민수는 바닥에 쓰려져 울고 있는 엄마와 눈이 마추쳤다. 
 
민수는 이성을 잃었다. 
 
아빠의 손을 뿌리치고, 아빠의 멱살을 잡았다. 
 
“이제 그만하라고 했지! 당신이 아빠야? 왜 술만 처먹으면,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민수의 아빠도 이성을 잃었다. 민수를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민수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아빠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죽자 살자 덤벼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유리 파편 위로 넘어졌다. 민수가 아빠 위로 올라앉아서, 아빠를 사정없이 팼다. 
 
아빠는 민수를 떨쳐내고 일어서려고 온몸을 비틀었다. 유리 파편이 등에 비벼졌다. 
 
민수의 엄마는 오열하면서, 민수를 뜯어말렸다. 엄마의 울음소리를 들은 민수는 그제서야 이성을 되찾았다. 
 
미끄럼을 타듯이 아빠 몸에서 떨어져 나간, 민수는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민수의 아빠는 터진 입술에서 새어 나온 피를 빨아당겼다가, 침으로 뱉어냈다.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고는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빠의 등 뒤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엄마가 흐느껴 울면서, 아빠의 등에 박힌 유리 파편을 빼내고, 수건으로 흐르는 피를 막았다. 
 
민수는 견딜 수 없었다. 아빠를 때린 자기 손을 잘라버리고 싶었다. 주먹을 쥐고 거실 벽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시멘트로 차갑게 굳어진 벽은 민수의 손을 부러뜨렸다.  
 
퍽.
 
민수의 손가락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엄마의 귓가를 울렸다. 엄마는 민수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민수도 엄마의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엄마를 끌어안은 민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빠는 비틀비틀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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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지나고, 아빠가 이야기 좀 하자고 했어요. 아빠가 맨 정신에 이야기하기 힘들다고, 술 한 잔 하자고 하시더라고요. 술은 원래 아빠한테 배우는 거라고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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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의 아빠는 말없이 소주 한 잔을 따라 민수에게 건넸다. 민수는 잔을 받아들고 머뭇거렸다. 
 
아빠가 말했다. 
 
“마셔. 아빠가 주는 술은 일단 받는 거야.” 
 
민수는 소주를 입속에 털어 넣었다. 학교 사물함에 있는 가그린 맛이었다. 가그린을 삼켜버린 듯 찝찝한 기분이었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아빠가 한 잔을 더 따르며 말했다. 
 
“민수야. 아빠가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아빠는 반쯤은 울먹거리는 목소리였다. 
 
소주 병을 입에 물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꺼억하고 트림을 내뱉으면서, 민수에게 말했다. 
 
“있잖아. 아빠하고 엄마 사이에는 네가 모르는 일이 있어.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야. 어른들의 문제니까, 네가 끼어들면 안 돼.” 
 
민수는 하고 싶은 말을 참았다. 민수가 들이킨 알코올이 민수의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뜨거운 숨만 콧구멍 밖으로 새어 나올 뿐이었다. 
 
아빠의 연설은 세 시간이나 지속되었다. 아빠의 말이 장황하게 무한 반복되었지만, 민수는 아빠의 말을 경청했다. 
 
아빠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다혈질의 아빠는 풀이 죽어지냈다. 민수가 아빠에게 달려든 후로, 아빠는 집에서 존재감 없이 지냈다. 무기력한 아빠의 모습을 볼 때마다, 민수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아빠의 처량한 모습이 날개가 부러진 독수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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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한 달이 넘도록 민수는 아빠와 말을 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서로 말다툼을 하다가도, 민수가 들어오면 서로 말을 멈췄다. 아빠는 방으로 들어가고, 엄마는 밤늦게 들어온 민수를 챙겼다. 
 
“늦게 피곤하지?” 
 
엄마가 물었다. 
 
“엄마, 나 어떻게 하지?” 
 
민수가 엄마에게 되물었다. 
 
“뭘 어떻게 해?” 
 
“답답해서 미쳐버릴 것 같아.” 
 
엄마는 할 말을 잃었다. 말없이 민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떻게 평생을 그렇게 살아? 나 때문에 참고 사는 거면, 그럴 필요 없어. 나는 괜찮으니까, 엄마도 그냥 엄마 인생 살아.” 
 
엄마는 민수의 침대에 힘없이 걸 터 앉았다.  
 
“일단, 수능부터 끝내. 그다음에 이야기하자.”   
 
민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눈물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알겠어, 엄마. 이제 나가.” 
 
엄마가 방문을 닫고 나가자, 민수는 책상에 엎드려 울었다. 지우개를 삼킨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PC방으로 와.” 민수의 친구 K가 말했다. 
 
“알겠어, 기다려.” 민수는 터벅터벅 걸어, 학원 근처 PC방으로 들어갔다. 
 
PC방을 한 바퀴 돌아봐도 K와 친구들이 없었다. 민수는 K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민수가 물었다. 
 
“아, 우리 밖으로 나왔어. 분식점으로 와.” 
 
K가 말했다. 
 
민수는 슬슬 짜증이 밀려왔다. 때마침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타고, 분식점 앞에 내렸다. 분식점에서도 친구들은 보이지 않았다. 
 
민수는 다시 K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우리 다시 PC방으로 왔어. 빨리 이쪽으로 와. 우리 지금 세 명이라, 한 명 더 필요해. 최대한 빨리 와라.” 
 
민수는 화가 치밀었다. 
 
PC방에서 마주한 친구들은 게임에 빠져있느라 민수가 온 것도 몰랐다. 민수가 K의 옆자리에 앉았다. 
 
K가 말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조금만 기다려. 이 판 끝나면, 2 대 2로 붙자.” 
 
민수는 K의 옆에 앉아, 인터넷 브라우저를 켜면서 짧게 말했다. 
 
“알겠어.” 
 

 
“화나지 않았을까? 보통 고등학생이면, 욕하고 소리 지르고 난리 한 번 났을 텐데….” 
 
내가 민수에게 물었다. 
 
“화는 났지만, 표현할 수 없었어요.” 
 
민수가 말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어?” 
 
“두려웠던 것 같아요.” 
 
“무엇이?” 
 
“친구들이 나를 따돌릴까 봐요. 예전에도 그런 적이 있어요.” 
 
“그 친구들이?”
 
“아니요. 중학생 때 친구들이요. 제가 화를 한 번 냈는데, 친구들이 나를 멀리했어요. 중학교 2학년 때 있었던 일인데, 졸업할 때까지 혼자 다니고, 혼자 밥 먹었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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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려 간 만화책 언제 갖다 줄 거야?” 
 
민수가 L에게 물었다. 
 
“아, 깜빡했다. 내일 갖다 줄게.” L이 대답했다.  
 
“자꾸 왜 그래?” 
 
“뭘? 내일 준다고 했잖아.”
 
“그 소리 벌써 세 번째야.”
 
“뭐래? 갖다 준다고 이 새끼야.” 
 
L은 민수의 멱살을 잡았다. 
 
민수와 L은 서로가 휘두른 주먹에 얼굴이 상했다. 민수가 L을 힘으로 눌러 넘어뜨렸다. L의 위에 올라타, 주먹으로 L의 얼굴을 때리기 직전이었다. 
 
그 순간, 눈앞이 번쩍했다.
 
L의 절친, C가 주먹으로 민수의 관자놀이를 가격한 것이다. 민수는 의식을 잃고 쓰려졌다. L과 그의 친구들이 민수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만화책을 돌려달라는 말 한마디, 그 대가는 혹독했다. 친구들은 민수를 괴롭혔다. 같이 어울려주는 친구 하나 없이 중학교를 쓸쓸히 졸업했다. 
 

 
“그래서, 말을 못 했어요.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긴장돼요. 내가 뭔가 작은 실수라도 하면, 친구들이 나를 어떻게 하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고….” 
 
나는 민수에게 중학교 시절 그 친구들의 이름을 묻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달려가, 그 녀석들을 박살 내주고 싶었다. 
 
나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민수에게 물었다. 
 
“솔직하게 한 번 말해주지 않을래? 다시 PC방에 찾아갔을 때,  미안한 내색 하나 없던, K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뭐였을까?” 
 
민수는 생각에 잠겼다. 
 
“글쎄,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요? 막상, 말을 하려니까 생각이 잘 안 나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민수가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다, 두 손을 겹쳐서 깍지를 끼더니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어차피 다시 PC방으로 올 거면, 분식집으로 왜 부른 거야? 무슨 똥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지금 감정이 어때?” 
 
“말하고 나니까 그냥 시원한데….”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줄래?” 
 
“솔직히 저는 제가 친구들에게 말을 잘 못하고, 제 표현을 못 하는 게, 집 안에서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해요. 저는 외동이고, 부모님과도 대화를 별로 안 하니까요. 제 감정, 제 생각을 표현할 줄 모르는 것 같아요. 혼자만 계속 답답하고….” 
 

 
민수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어느 날, 도둑이 든 것처럼 집 안이 어수선했다. 
 
당황한 민수는 큰 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집에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다급하게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당황해서 닫지 못한 현관문 앞에 아빠가 나타났다.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였다. 비닐봉지에 소주와 맥주, 오징어와 땅콩 같은 것들이 담겨있었다. 
 
“엄마는요?” 
 
아빠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주 병을 손에 쥔 채, 벌컥벌컥 들이켜고,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여전히, 현관 앞에 기댄 채였다. 
 
“엄마는 어디 갔냐고요?” 
 
아빠가 소주 병을 현관 대리석 바닥에 내리꽂으며 소리를 질렀다. 소주 병이 깨지면서 유리 파편이 사방에 흩어졌다.  
 
“몰라, 이 새끼야. 내가 어떻게 알아?” 
 
민수의 예상이 맞았다. 엄마는 급하게 짐을 챙겨 집을 나간 것이다. 
 
민수가 수능을 마칠 때까지 곁에 있어주고 싶었던 엄마의 바람은 물거품이 되었다. 
 
민수는 아빠를 밀치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계단을 뛰어내려가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의 전화기는 꺼져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민수는 계단을 헛디뎌 우당탕 넘어지고 말았다. 민수에게는 일어날 기운이 남아있지 않았다. 엎드린 채로 엉엉 울었다. 
 
엄마와 함께 살고 싶었던 것이 민수의 바람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엄마와 따로 나와 살고 싶었다. 민수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민수는 그날 밤, 엄마를 잃고 자신을 잃었다. 
 

 
“민수야, 엄마야.” 
 
일주일이 지나고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 어디야?” 
 
“지금 독서실 앞이니까, 얼른 내려와.” 
 
민수는 번개처럼 계단을 뛰어내려와 엄마 앞에 섰다. 
 
“엄마!”
 
민수는 어린아이처럼 엄마를 끌어안았다. 엄마도 민수를 끌어앉고 소리 없이 울었다. 엄마를 끌어안은 채로 민수가 물었다. 
 
“엄마, 어떻게 된 거야? 왜 갑자기 집을 나갔어?” 
 
엄마는 민수에게서 몸을 떼어내고 조용한 곳에 앉아 대화를 나누자고 말했다. 두 사람은 독서실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았다.
 
엄마가 민수에게 그날 밤의 일을 말했다.  
 

 
민수의 아빠는 여느 때처럼,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왔다. 민수의 엄마는 빨래를 개고 있었다. 민수의 아빠는 다짜고짜 엄마에게 시비를 걸었다. 
 
짜증이 난 엄마는 아빠의 말을 무시했다. 엄마가 아빠를 무시하자, 아빠는 이성을 잃었다. 엄마가 개놓은 빨래를 발로 차서 헝클어뜨렸다. 
 
엄마는 아빠를 쳐다보지도 않고, 빨래를 주섬주섬 집어 들었다. 다시 자리에 앉아, 침착하게 빨래를 갰다. 
 
아빠는 엄마를 사정없이 때렸고, 엄마는 아빠에게 달려들었다. 감정이 격해진 아빠는, 주방에서 칼을 꺼냈다. 
 
엄마에게 칼을 휘두르며, 같이 죽자고 말했다. 엄마는 어디 한 번 죽여보라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아빠를 자극했다. 
 
아빠가 칼로 엄마를 내리쳤다. 엄마가 팔로 얼굴을 가렸다. 칼은 엄마의 팔 등에 부딪히고 멈췄다.
 
그 순간 아빠는 하얗게 질렸다.
 
아빠는 엄마를 위협할 생각이었다. 실제로 칼이 엄마의 몸에 닿을 줄을 몰랐던 것이다. 
 
칼날 부위가 아닌 칼등이 엄마의 팔에 내려앉았지만, 이미 늦었다. 엄마 눈에 아빠는 짐승이었다. 
 
엄마는 아빠를 밀쳐내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아빠가 뭐 하는 짓이냐고 힘으로 뜯어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이번에 칼을 집어 든 사람은 엄마였다. 칼을 휘두르며, 아빠에게 소리쳤다. 
 
“나 한 번만 더 건드리면, 그때는 죽여버릴 거야.” 
 
아빠는 물러섰다. 
 
엄마가 작별 인사도 없이 민수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엄마의 말이 끝나고, 민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집으로 뛰어가 아빠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중요한 사람은 엄마였다. 
 
민수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그럼 이제 집에 안 오는 거야?” 
 
“응, 그럴 것 같아.” 
 
“그럼, 지금은 어디서 지내?”
 
“나중에 알려줄게. 지금은 말 못 해.” 
 
“그럼, 어떻게 먹고살아? 돈은?” 
 
“그것도 천천히 생각해보려고….” 
 
민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할 뿐이었다. 
 
잠시의 침묵을 깨고, 엄마가 말했다. 
 
“민수야. 넌 엄마 이해하지? 엄마가 왜 이럴 수밖에 없는지….” 
 
엄마가 울먹거렸다. 
 
민수는 엄마의 손을 잡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전에도 말했잖아. 나는 괜찮다고. 엄마는 엄마 인생 살아. 나도 조금만 시간 지나면 독립할 거야. 그때는 내가 다시 엄마 찾으러 갈게. 우리 같이 살자. 조금만 참아, 엄마.”
 
민수의 말이 끝나자 엄마는 흐느껴 울었다. 그리고, 조금은 단호한 말투로 민수에게 말했다. 
 
“민수야. 엄마는 걱정하지 마. 너도 네 인생 살아야 해. 엄마는 씩씩하게 잘 살 거야. 너 가고 싶은 대학에 가고, 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야 해. 엄마 때문에 희생하지 말고, 알겠지?” 
 
민수는 불안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민수에게 말했다. 
 
“민수야, 너무 늦었다. 우리 이제 일어나자. 아빠한테는 엄마 만났다는 말 하지 마, 알겠지?” 
 
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언제 다시 만나?” 
 
“엄마가 다시 전화할게.” 
 

 
민수는 독서실에 올라가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아빠에게 달려가 따질 작정이었다. 모든 것이 아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민수 역시 맨 정신으로 대화할 수 없었다. 냉장고를 열어, 아빠가 사다 놓은 술을 사정없이 마셨다.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똑바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퇴근한 아빠가 집에 들어와서, 술에 취한 민수와 마주했다. 
 
아빠는 기가 막혔다. 
 
“너 지금 뭐 하는 짓이냐?”
 
“아빠 때문이야.” 
 
“뭐? 이게 미쳤나?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아빠 때문에 엄마가 나갔어.”
 
그 순간 뭔가 번쩍했다. 아빠가 민수의 뺨을 때린 것이다. 
 
“정신 차려, 이 새끼야. 어디서 아빠한테 술 주정이야!”
 
“아빠한테 배웠지. 내가 어디서 배워?” 
 
민수는 바닥에 넘어진 채로, 소금에 담근 미꾸라지처럼 온몸을 비틀었다. 머리를 쥐어뜯고, 발버둥을 치면서, 오열했다. 
 
아빠는 바닥에 누워 미쳐 날뛰는 민수에게 차가운 물 한 바가지를 쏟아부었다. 
 
“정신 차리고, 여기 앉아 봐.” 
 
민수는 어안이 벙벙했다. 몸을 일으켜 앉았는데,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래서, 엄마 지금 어디서 지낸다고 말해주디?” 
 
민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빠가 예전에 말했지. 어른들 문제니까 끼어들지 말라고.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 거 기억나지?” 
 
민수가 고개를 끄떡였다. 
 
“3년 전부터, 엄마가 이상했어. 처음에는 내가 오해하나 싶었어. 엄마가 아니라고 잡아떼니까, 뭐 방법이 있어야지.” 
 
민수의 정신이 또렷해졌다. 아빠의 말을 토씨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 상체를 바로 세웠다. 
 
“그러다, 큰맘 먹고 흥신소에 부탁을 했더니, 아니나 달라? 딱 걸렸지. 진명이 삼촌, 너도 알지? 그 새끼랑 네 엄마랑….”
 
민수는 고개를 가로 저였다. 그럴 리 없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엄마가 왜 어디있는지 말 못하는 지 알아? 그 자식이랑 같이 살림 차린 거야. 네 눈에는 엄마가 천사로 보이지? 엄마가 뭐 집에 붙어있은 줄 알아? 나 회사 가고, 너 학교 가면 엄마도 집에 없었어. 아빠가 맨 정신으로 살 수 있었겠냐? 아빠 인생은 3년 전에 끝났어.” 
 
아빠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인생의 쓴맛을 담배 연기로 누그러뜨렸다. 
 
“내가 너한테 별말을 다한다. 너는 신경 쓰지 말고 너 할 일이나 잘해. 정신 똑바로 차리고, 대학이나 가라고. 
 
아빠가 뼈빠지게 번 돈 너한테 다 쓰는 거야. 꼭 성공해서, 보란 듯이 잘 살아. 아빠처럼 살지 말고, 알겠어?” 
 
민수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물방울인지 눈물방울인지, 민수조차 알 수 없었다. 
 

 
정식 상담에서 민수를 만난 것이 아니었다. 
 
청소년 수련회 강사로 초대를 받아 저녁 집회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 담당 전도사님이 조심스럽게 민수의 이야기를 꺼냈다. 
 
수련회 일정 중에, 잠시 시간을 내어 민수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느냐는 부탁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물놀이를 할 시간에, 민수와 조용히 앉아 두 시간 정도의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두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민수의 이야기가 끝나고 남은 시간은 고작 10분이었다. 
 
산더미 같은 질문을 뒤로하고, 나는 억지로 대화를 마무리해야 했다. 
 
나는 아빠의 관계, 엄마와의 관계, 그리고 친구들과의 관계를 언급했다. 
 
교과서에서 나올 법한 진부한 말들이었다. 듣는 사람이 마음만 답답해지는 그런 말들이었다. 
 
고맙게도, 민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떡이며 경청했다. 
 
다음 집회 일정 때문에, 우리는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했지만, 못내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나는 민수의 등을 두드려주면서, 힘내라고 말했다. 
 
민수는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출입구를 향했다. 나는 그 자리에 선 채로, 민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민수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돌아서서 내게 말했다. 
 
“그런데, 목사님…. 저도 치유될 수 있을까요?” 
 
나는 블랙홀에 몸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민수는 어쩌면 나 자신이었다.
 
내가 민수를 향해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갈라진 자아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느꼈다. 
 
그대로 민수를 내보낼 수 없었다. 나는 민수에게 다가가 민수를 끌어안았다. 
 
민수는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그리고,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도 목사님처럼, 치유돼서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 좋은 아빠가 되고 싶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어요. 부모님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제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나는 민수의 손을 꼭 붙잡고, 고개를 끄떡였다. 
 
내가 위로랍시고 한마디를 내뱉는다면, 민수의 어깨에 내려앉은 희망이 깃털처럼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민수가 나가고, 나는 의자에 힘없이 걸 터 앉았다. 
 
나는 인정해야 했다. 민수는 내게 모든 것을 말했지만, 나는 민수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정작 나 자신은 치유되지도 않았고, 좋은 아빠도 아니었으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도 못했다. 
 
아버지와 단둘이 마주 앉으면 어색함이 흐르고, 어머니를 향한 연민으로 잠을 뒤척인다. 
 
아내에게는 여전히 서투른 남편이고, 자녀들에게는 욱하고 사과하는 일을 반복하는 일관성 없는 아빠다. 
 
오히려, 나는 민수에게 묻고 싶었다. 
 
‘민수야. 목사님도 치유될 수 있을까? 내가 자격 있는 사람일까? 언젠가 네가 아빠가 되어 나타난다면, 나도 그때 진실을 말할게.’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예수님을 찾았다. 집회 장소 어딘가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앉아 있는 민수를 찾아가셔서, 따뜻하게 안아주시기를 바랐다.  
 
또다시 아이러니였다. 
 
정작 나는 방문을 열고 나갈 용기가 없었다. 작은 방 안에 조용히 머무르고 싶었다. 잠시라도, 감정을 추스르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문밖에서, 누군가 노크를 했다. 담당 전도사님의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목사님, 이제 나가실 시간입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채로, 사람들 앞에 섰다. 
 
내 시선이 군중을 향했다. 아이들은 와글와글 시끄러웠다. 밝은 조명에 눈이 부셨다. 
 
나에게는 오직 한 사람, 상처 입은 한 사람만이 중요했다. 내 관심은 민수를 향했다. 
 
저 멀리 맨 뒷자리에, 민수가 보였다. 민수의 옆자리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민수는 말없이 조용했다.  
 
그날 밤, 설교는 기도였다.

믿지 않는 남자친구를 만나요

내 마음속에 외로움이 가득 있어요. 주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제 신앙이 부족하다고 느껴져요. 제 신앙이 부족해서 그런지 교회를 건성으로 다니거나 아예 다니지 않는 남자 친구를 만나요. 솔직히 저는 지금 남자 친구가 좋아요. 신앙이 없어서 문제에요.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계속 만나고 싶어요. 세상적인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제 신앙이 부족해서 일까요?
 
아빠는 악마 같아요. 술만 먹으면 엄마를 때렸어요. 무책임하고 무기력한 아빠 때문에 가정이 고통받았어요. 엄마는 천사 같아요. 늘 제 편이 되어줬어요. 아빠 때문에 고생했는데, 언제나 밝은 모습을 잃지 않으셨어요. 그런 엄마를 보면 마음이 아파요. 늘 저와 제 동생을 위해 사셨거든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있었던 일이에요. 밤 11시쯤 학원을 마쳤어요. 아빠가 데리러 왔어요. 아빠 차를 타고 집에 가는데, 아빠가 말씀하실 때 너무 피곤해서 하품을 했어요. 아빠가 운전하다가 말고 제 뺨을 때렸어요. 아빠가 말하고 있는데 버르장머리 없이 하품을 한다고. 화나고 무섭고 슬펐어요. 집에 와서 엄마에게 말했어요. 두 분이 제 앞에서 싸웠어요. 아빠는 엄마를 또 때렸어요. 나 때문에 엄마가 맞았잖아요.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어요.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내 답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요. 자매님은 자신의 신앙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믿지 않는 남자 친구를 사귀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계시고요. 나는 자매님이 처한 상황보다 믿지 않는 남자 친구를 만나면서 느끼는 죄책감이란 감정에 더 많은 관심이 있어요.
 
반대로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자매님의 신앙이 깊고, 믿음이 좋은 남자 친구를 만났다고 해보죠. 그러면, 외로움이 사라질까요. 아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아니에요.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아요. 외로움은 없애야 할 감정이 아니라 돌봐야 하는 감정이에요.
 
자매님은 외로움에 취약한 삶을 살아오셨어요. 폭력적인 아버지, 희생하는 어머니, 불안한 두 분의 관계. 자매님의 정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거예요. 고등학교 1학년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버지에게 맞았던 사실을 어머니에게 말했어요. 도움을 주려던 어머니 역시 아버지에게 맞았어요. 어머니는 자매님을 지켜줄 수 없었어요. 아마 그 후로는 자매님이 힘든 일이 있어도 어머니에게 말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조심스럽게 추론하는 거예요. 혼자 참고 견디는 것에 익숙해졌을 거예요.
 
나는 자매님의 신앙이 깊어지기를 바라고, 믿음 좋은 남자 친구를 만나기를 바라요. 하지만, 그전에 나는 자매님이 스스로를 정죄하지 않기를 부탁드려요.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그 누가 손가락질 할 수 있겠어요. 얼마나 외로우면 그러겠어요.   
 
불안정한 관계 속에서 자매님이 얼마나 고통받으며 살아왔는지 하나님도 알고 계세요. 하나님은 믿지 않는 남자 친구를 만났다고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니세요. 오히려, 하나님은 마음 아파하세요.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누구라도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자매님을 보시며 안타까워하는 하나님의 얼굴이 나는 보여요. 하나님은 자매님이 사랑받기 원하세요.
 
그렇다고, 아무나 만나라는 말은 아니에요. 가능하다면, 예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세요.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믿음 있다고 좋은 남자 아니고, 믿음 없다고 나쁜 남자 아니에요. 복음이 없다면 복음을 전해주세요. 복음이 있다면 복음을 공유하세요. 서로의 진심이 중요해요.   
 
신앙이 성숙하고 성경 지식이 많아져도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아요. 제아무리 믿음이 좋은 남자 친구를 만나도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아요. 그 누구도 자매님 안에 결핍을 채워줄 수 없어요. 외로움은 스스로 돌봐야 하는 감정이에요. 예수님의 사랑과 그분의 말씀으로 외로움을 돌봐주세요. 절대로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나같이 부족한 사람에게 질문해주셔서 감사해요. 외로운 당신을 하나님이 따뜻하게 안아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남자가 그리워요

이혼해서 아이들을 혼자 키우며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권유로 연애를 했고, 재혼 이야기까지 오고 갔습니다. 결국, 상대방 부모님의 반대로 관계를 정리했어요.
 
하지만, 저는 힘든 일을 겪고 나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두 달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서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어요. 남자가 그리워졌어요. 누군가 곁에서 날 안아줬으면 하는 바람이 점점 심해졌어요.
 
다른 싱글맘들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 친구들은 참지 말고 다른 사람을 만나라고 해요. 하지만, 저는 단지 성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가벼운 만남을 이어가는 게 성경적이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런 나 자신이 낯설어 운동도 열심히 하고 바쁘게 지내고 있지만, 혼자 있을 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럴 때마다 죄책감이 들어요.
 
사실, 저는 어린 시절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어요. 가족에게 말하지 못했어요. 아빠는 술주정, 외도로 엄마에게 고통을 주었어요. 오빠는 같이 어렸고 힘이 없다고 느껴지니까 도와줄 거란 기대 조차 없었죠. 전 남편은 결혼하고 얼마 후부터 외도를 하더니 결국 날 떠나서 그 여자랑 살아요.
 
민감한 주제라 답변을 피하고 싶었어요. 용기 내어 답변하는 이유는 자매님이 살아온 삶을 자세히 적어주셨기 때문이에요. 자매님은 지금 남자가 그리운 게 아니에요. 자매님을 보호해줄 사람이 필요한 거예요. 주장을 했으니 근거를 말해야겠죠. 제가 드리는 말은 추론에 불과해요. 제 이야기에 얽매이지 마시고, 하나의 견해로 받아들여주세요. 받아들일 만큼만 받아들이면 좋을 것 같아요.
 
자매님은 초등학교 때, 집에 놀러 온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했어요. 아빠는 술에 취해 잠든 상황이었고, 오빠는 자고 있었어요. 결국 아무도 도와줄 수 없었어요. 그 사실을 지금도 숨기고 있고요. 자매님은 엄청난 일을 당했지만, 가족에게 말하지 않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자매님을 보호해 줄 수 없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에요.
 
아빠는 가정 폭력, 외도로 엄마에게 상처를 줬어요. 어린 자매님은 아빠가 칼을 들고 엄마를 죽이려고 했던 장면을 목격했어요. 아빠가 어린 자매님을 보호해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초등학교 때, 오빠와의 일도 마찬가지예요. 자매님을 괴롭혔던 덩치 큰 아이가 나타났어요. 자매님은 오빠에게 일렀어요. 오빠는 어린 자매님을 보호해준다며 대신 싸워줬어요. 하지만, 졌어요. 두 사람은 민망한 채 말없이 집으로 돌아왔어요. 오빠 역시 자매님을 보호해줄 사람이 아니었어요.
 
전 남편은 잦은 외도 자매님에게 고통을 주었고, 결국 집을 나가 바람난 여자와 살림을 차렸어요. 자매님을 보호해주기는 커녕 상처를 주고 말았죠. 가슴 아픈 한 여자의 인생을 나는 보았어요. 그래서 외면할 수 없었고, 민감한 주제이지만 답변을 하게 되었어요.
 
자매님의 이야기가 진실이라면, 자매님은 지금 사랑받고 싶은 거예요. 보호받고 싶은 거죠. 성적인 만족을 원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 따뜻하게 안아줬으면 하는 거예요.
 
그 지점에 자매님의 결핍이 있어요. 남자를 원한다는 생각은 죄책감으로 이어지지만,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감정은 자연스러운 감정이에요. 그러니까 자신을 정죄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자매님을 온전히 사랑하세요. 지금까지 상처받으며 살아온 자매님을 보시며 하나님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요.
 
자매님은 보호해줄 사람 없이 최선을 다해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요. 누군가 찾아와 따뜻하게 안아주기를 바라는 건 자연스럽고 당연한 감정이에요. 다른 대안을 찾지 않는다는 점에서 올바른 방향을 잡았다고 생각해요. 과정은 힘들 거예요. 오래 걸려요.
 
자매님에게 부탁드리고 싶어요. 외로운 자신을 정죄하지 마시고, 돌봐주셨으면 해요. 외로운 건 자연스러운 거예요. 자매님은 누구보다 외로울 수 있어요. 외로울 때마다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고 안아달라고 말씀하세요. 자매님 안의 결핍을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채워달라 기도하세요. 예수님이 자매님을 끝까지 돌보시고 책임져 주실 거라고 믿어요. 자매님의 하나님은 정죄하는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매님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되어주셔야 해요.
 
다시 누군가를 만나기 원한다면, 솔직히 하나님께 기도해 보세요. 자매님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소중한 존재니까요.

기억의 전이

“내가 바보 천치인 줄 알지? 당신이 아랫집 남자와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거 내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 운동은 무슨 운동, 새벽마다 그 남자하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남편은 오늘도 어김없이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 정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갈 때까지, 남편은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욕설을 쉬지 않고 내뱉었다. 
 
정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현관문을 열었다. 
 
아직 동이 트기 직전이었다. 삼십 년 지기 친구, P를 산책로 입구에서 만났다.
 
“오늘도 영감이 욕하는 소리가 창밖으로 다 들리데? 밤낮 그 소리여?” 
 
P가 물었다. 
 
“나도 모르것어. 갈수록 심해져. 딸들이 병난 것 같다고, 요양원에 보내자는데, 사지가 멀쩡한 사람을 어떻게 요양원에 보내것어. 내가 그냥 참고 살아야 제” 
 
정희가 말했다. 
 
두 사람은 산책로를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정희는 요즘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찌근거려서 산책을 나갔다 오면, 오전 내내 침대에 누워 움직일 수 없다고 말했다. P는 당뇨가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걱정이라고 말했다. 
 
삼십 년 동안 매일 아침마다 대화를 나누어도, 소재는 고갈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치 세상에 존재하기 이전부터, 서로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정희가 산책을 마치고, 집에 들어서자 남편이 쏜살같이 달려들어 말했다. 
 
“이 여편네 얼굴 좀 봐. 그리도 좋았어? 늙어서 추하게, 쓸데없는 것에 맛 들여 가지고, 부끄러운 줄 알아!” 
 
정희는 남편을 무시하듯, 화장실을 향했다. 
 
남편은 정희에게 따라붙으며, 말했다. 
 
“암, 그래야지. 흔적은 확실히 지워야지. 내 집에 들어왔으니까, 그 더러운 놈의 흔적은 지우는 게 맞지.” 
 
나이 팔십이 넘어, 이렇게 추한 꼴을 당할지, 정희는 몰랐다.
 

 
“이 여편네, 당장 문 열어. 문 닫고 지금 뭐 하는 거야?” 
 
남편은 문 손잡이를 부러뜨릴 기세였다. 
 
정희는 어지러워 침대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남편은 문을 발로 차고, 뒤흔들더니 갑자기 조용해졌다. 밖에서 찰랑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남편이 마스터키를 가져온 것이다. 
 
“아랫집 그놈, 벌써 창문으로 내뺐구먼. 이 여편네 이거 기운이 하나도 없네. 지 몸뚱이 지가 몰라? 늙어서 그 짓을 하니까, 몸이 견뎌나겠어? 제발 정신 좀 차려, 이 여편네야.” 
 
정희의 의식이 희미해졌다. 사력을 다해, 남편에게 말했다. 
 
“영감, 구급차 좀 불러줘. 나 지금 큰일 난 것 같아.” 
 
남편은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양심도 없는 여자 같으니라고.”
 
남편은 구급차를 불렀다. 정희는 가까운 병원에 입원을 했다. 수액을 맞으며 기운을 차리고 있는데, P가 다급하게 들어왔다. 
 
“정희야. 너 아무래도 안되겠다. 지금 나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 요양원에 가든지, 딸네 집에 가든지 해야 할 것 같아.” 
 
정희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내가 이 동네에서 삼십 년을 살았는디, 어디를 가서 살어. 쓸데없는 소리 말어.” 
 
P가 정희의 말을 받아치려는 순간, 정희의 전화기가 울렸다. 
 
“엄마, 지금 병원이야?” 
 
호주에 사는 큰딸, 미숙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아니, 그걸 어찌 알았데?” 
 
“P 아줌마한테 방금 전화 왔었어. 엄마 그런 일이 있으면 나한테 먼저 말해야지. 왜 말을 안 해?” 
 
“아니, 알아도 어찌한데? 호주에 있는데, 걱정만 하지. 별일 아니니께, 걱정하지 말어. 기운 차리면, 바로 집으로 들어갈 거여.” 
 
“안 돼, 엄마. 지금 미현이 보냈어. 엄마 데리러 갈 거야. 절대로 집으로 들어가지 마. 그러다, 엄마 죽어.” 
 
“쓸데없는 소리 말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죽기는 죽는다고 호들갑이여.” 
 
정희는 미숙의 전화를 끊고, P를 쳐다봤다. P는 뭘 그리 빤히 쳐다보냐는 말투로 정희에게 말했다. 
 
“그래, 내가 말했어. 너라도 그랬을 거야. 고집 좀 그만 부려. 지금 미현이 온다고 했으니까, 미현이 따라 미숙이 집으로 가.” 
 
P의 말이 끝나자마자, 미현이가 병실로 들어왔다. 호주에 있는 언니의 연락을 받고, 한 걸음에 달려온 것이다. 
 
“엄마, 괜찮아?”
 

 
미현은 엄마가 수액을 맞는 동안, 엄마 짐을 대충 챙겨올 생각으로 엄마의 집으로 갔다.
 
미현이 집에 들어서자, 아빠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거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네 엄마가 시켰냐?” 
 
“아니에요, 아빠. 엄마가 당분간 병원에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짐 좀 챙기러 왔어요.” 
 
“엄마가 왜 아픈지 알지? 검사해봐라. 아마 몹쓸 병에 걸렸을 거야.” 
 
미현은 피가 거꾸로 솟는듯했다. 
 
“엄마가 무슨 몹쓸 병에 걸려요? 그만 좀 하세요, 이제.” 
 
“뭐 그런 병 있잖냐. 다른 사람에게서 옮는 병, 그거 약도 없다는데…. 늙어서 추하게 그게 뭔 짓인지, 원.”
 
미현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받쳤다. 멀쩡한 사람도 쓰러뜨릴 것처럼, 집 안의 공기가 탁했다. 
 
“엄마 없어도 밥 잘 챙겨드시면서, 운동 꾸준히 하세요. 제가 자주 들여다볼게요.” 
 
아빠는 여전히 신문에 시선을 고정하고 말했다. 
 
“올 것 없다.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가서 네 엄마한테도 전해라. 이참에 갈라서자고.”
 
미현은 혼란스러웠다. 
 
치매라고 하기에는 아버지가 너무나 멀쩡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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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이 그러다 엄마 큰일 난다고, 얼른 그 집에서 나오라고 하도 극성을 부려서, 일단 큰 딸 집으로 나왔어요. 큰 딸이 사위랑 호주에서 사는데, 자기 없는 동안 집에 와 있으라고 해서요. 아따 근데, 여기 아는 사람 한 명 없고 답답해 죽겄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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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미현의 차에서 내리는 정희를 손녀 재희가 맞이해주었다. 호주에서 나고 자란, 재희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서 취업을 했다. 
 
호주에 사는 큰딸, 미숙은 정희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재희가 챙겨줄 것이라고 믿었다.
 
내가 정희를 상담하게 된 시점도 그쯤이었다.
 

 
“상담을 신청하셨죠? 그래서, 연락드렸어요.” 
 
내가 말했다. 
 
“딸이 신청한 것 같아요.” 
 
정희의 말에, 나는 당황했다. 
 
“아, 본인이 아니라 따님이 신청하셨다고요?” 
 
“긍께, 내가 그러지 말라고 하는데, 딸이 고집을 부려가지고 어디 안 할 수가 있어야지요.” 
 
나는 참으로 난처했다. 당사자가 동의하지 않는 상담을 진행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상황이 어렵겠다고 판단했다. 내 입장을 충분히 설명하고, 예의 바르게 전화를 끊을 작정이었다. 
 
그때, 정희가 말했다. 
 
“딸이 그러데요. 목사님이 쓸데없는 말 하시것냐고. 가만히 이야기 들어보면, 좋은 말씀 많이 해주실 거니까 일단 상담받아보라고.”
 
나는 웃음이 터졌다. 
 
“따님이 그러셨어요?” 
 
“아따, 말도 마세요. 어찌나 설득을 하던지, 안 받는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니까요.” 
 
“딸이 저에 대해 뭐라던가요?”
 
“아, 젊어서 고생 많이 하셨다고. 엄마 이야기 잘 들어주실 거라고 그러더라고요.”
 
정희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동안, 나는 본능적으로 큰딸 미숙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저 멀리 호주에서 엄마를 걱정하는 딸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에게 엄마를 부탁한 것이다.’ 
 
나는 정희와의 상담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 소식을 딸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목사님이시죠?” 
 
정희가 상담을 받기로 했다고 하자, 정희의 둘째 딸 미현이 전화를 걸었다. 
 
“아, 그러시군요. 반갑습니다.” 
 
미현은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히 전해줬다. 그리고, 대화 말미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사실, 언니가 목사님에게 상담을 신청했다고 해서 놀랐어요.”
 
“그게 무슨 뜻이죠?”
 
“아, 제 표현이 조금 이상했죠? 오해하지는 마세요, 목사님. 사실, 저나 엄마는 교회에 다니지 않거든요. 심지어, 엄마는 젊으셨을 때 불교셨어요. 언니만 교회 다녀요.” 
 
“아, 괜찮습니다. 전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상담 전에, 어머니에 관한 중요한 이야기를 해주셔서, 여러모로 감사드립니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통화를 끊고,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나는 내 생애 가장 어려운 내담자를 만난 것일지도 몰랐다. 
 

 
“사람이 그렇게 멀쩡해 보이는데, 치매라고 할 수 있나요?” 
 
정희는 여러 번 반복해서 물었다. 나로서는 확답을 줄 수 없었다. 나는 딸들의 판단을 옳게 여겼고, 상식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정희는 내가 딸들과 같은 답변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담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 말을 더욱 신뢰하는 듯했다. 
 
“그 양반이 그래서 그랬구먼요. 같이 있으면 멀쩡하다니까요. 참 신기하네요.” 
 
나는 자신의 기억을 조금씩 잃어가는 정희의 남편이, 왜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는지 궁금했다. 
 
정희와 남편이 살아온 세월 동안, 외도와 관련된 이슈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정희는 내 질문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더러운 짓은 그 양반이 했지요. 아따 그 양반이 젊었을 때, 얼마나 내 속을 썩였는지, 말도 마요. 내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어요.” 
 
정희는 마음속 깊이 담아두었던 말을 꺼냈다. 
 

 
정희는 시골에서 자랐다. 부모님이 논밭에서 일하는 동안, 정희는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동생들을 챙기느라, 결혼할 나이도 지나버렸다. 
 
스물일곱이 되어, 한 남자를 소개받았다. 남자는 정희보다 두 살이 많았다. 대학까지 나오고, 성실하게 산다고 마을에 소문이 자자했다. 
 
서울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는 남자는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뵈러, 명절이나 가끔 내려오는 정도였다. 다급해진 남자의 부모가 마을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정희를 소개하고 나선 것이다. 
 
정희는 집을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남자와 결혼한다면, 지긋지긋한 시골집을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희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첫아이를 임신한 순간부터, 두 사람은 어긋나기 시작했다. 
 
남편은 하루가 멀다 하고 외박을 했다. 정희가 이유를 물으면, 남편은 공무원 일이 다 그런 거라며, 대답을 회피했다.
 
정희가 거세게 따져 물으면, 남편은 정희를 때릴 기세로 달려들었다. 뱃속에 아이가 아니라면, 벌써 매서운 손이 날아왔을 것이다. 
 
“초등학교 밖에 안 나온 무식한 년이, 나랑 무슨 대화를 한다고. 입 다물어 이년아.” 
 
정희는 남편을 포기했다. 
 

 
“내가 제대로 배운 여자였으면, 그런 남편하고 살지도 않았을 거예요. 여우처럼 야무졌으면, 당장에 뛰쳐나왔을 텐데, 곰처럼 미련해서 참고 살았어요.” 
 

 
둘째 딸 미현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집으로 남편을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건 사람은 남편의 내연녀였다. 
 
공무원을 때려치우고, 사업을 시작한 남편이 회사 직원과 바람이 났다. 
 
정희는 남편이 그동안 만나왔던 여자들을 알지 못했다. 한 가지 아는 것이 있다면, 남편이 오랫동안 한 여자를 만날 성격이 못된다는 것이다. 
 
전화를 건 여자 역시, 잠시 만나고 헤어질 사람이라 여겼다. 
 
그러나, 정희의 예상은 빗나갔다. 
 
남편은 그 여자와 살다시피 했다. 그의 아내는 정희가 아니라 내연녀였다. 
 
그러나, 내연녀는 정희처럼 순진하고 착한 여자가 아니었다. 
 
내연녀는 남편을 만나는 동안, 또 다른 남자를 만나면서 남편을 괴롭혔다. 
 
정희는 남편이 거실에 앉아 엉엉 우는 모습을 봤다. 내연녀가 다른 남자와 여행을 떠나, 며칠 동안 남편의 전화를 받지 않은 것이다. 
 
정희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한 편으로 내연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 여자가 정희 대신 남편에게 통렬하게 복수를 해줬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남편은 그 여자에게 집요하게 매달렸다. 이십 년의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버렸다. 길고 긴 세월 동안, 남편은 내연녀와 부부처럼 살았다. 
 
“남편과 내연녀와의 관계는 어떻게 정리가 되었나요?” 
 
나는 정희에게 물었다. 
 
정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한심한 듯 말했다. 
 
“그 여자가 남편 돈을 훔쳐서 달아났어요. 남편이 평생 모든 돈 전부는 아니었어도, 절반은 넘어요. 남편이 미친 사람처럼 돼서, 그 여자를 찾아다녔는데 결국 못 찾았어요. 사람이 얼마나 한심해요. 대학 나오고 잘 배운 사람도 그리 어리석은 짓을 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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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기억은 정희의 것이 아니었다. 남편의 젊은 날, 내연녀에게 받았던 배신감과 집착이 아내에게 투영된 것이다. 
 
정희가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그녀는 팔십이 넘은 노인이었다. 가냘픈 몸을 의자에 기대어 가만히 앉은 정희를 바라보며, 나는 연민을 느꼈다. 
 
“다 지난 일인데, 그 양반만 멀쩡하면, 그 동네 가서 살고 싶어요. 딸네 집은 좋고 편하기는 한데, 도대체 아는 사람이 있어야지. 내 친구 P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두통과 관절염으로 거동이 불편한 정희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친구 P를 만나러 가는 길이 몹시 긴장되었다. 혹시라도, 동네에서 남편을 만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던 차에, 둘째 딸 미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시골 친척 집에 장례가 나서 아버지가 급하게 시골에 내려가야 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정희는 다급하게 친구 P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에 바퀴 달린 큰 가방 있어? 이따가 나올 때, 그것 좀 들고 나와. 병원에서 바로 딸네 집에 갔더니, 입을 것이 하나도 없었어. 그 양반 없는 참에 짐 좀 챙겨 나올 것이여.” 
 

 
정희는 친구 P를 시켜, 집안에 남편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 정희는 현관문 앞에서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세 차례 같은 번호를 눌렀지만,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남편이 비밀번호를 변경한 것이다. 정희는 억장이 무너졌다. 남편이 미쳐도 단단히 미쳐버린 것 같았다. 
 
정희의 머릿속에서 남편이 내뱉었던 독한 말들이 선명하게 스쳐 지나갔다. 남편의 기억은 비밀번호를 바꿀 만큼 또렷했던 것이다. 남편의 모든 독설이 진실처럼 다가왔다. 
 
아버지를 모시고, 시골집에 내려가던 미현이 정희의 전화를 받았다. 문이 잠겨 있다는 말에 발끈해서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빠, 혹시 현관문 비밀번호 바꾸셨어요?” 
 
아버지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암, 그랬지. 그 여자가 내 돈을 얼마나 노리는 줄 알아? 나 없는 틈에 금고 열어서 돈 가지고 도망가면, 나는 다 늙어서 굶어죽으라고? 그건 안되지.” 
 
미현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수화기 너머로 전해진, 미현의 숨소리는 정희의 귀를 후벼팠다. 
 
“어쩌면, 사람이 그럴 수 있어요. 나는 도무지 그 양반이 이해가 안 돼요.” 
 
정희가 말했다. 
 

 
정희는 하루 종일 남편의 독설에 시달렸다. 정희가 침대에 누우면, 남편은 하루 종일 정희의 천장을 거닐며, 정희를 괴롭힌다. 물리적으로 남편을 떠났지만, 정서적으로 남편을 떠날 수는 없었다. 
 
정희에게 천장은 영화 스크린이다. 지난날의 상처와 고통이 편집 없이 상영된다. 정희에게는 천장을 벗어날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다. 가냘픈 몸을 침대에 파묻고,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나는 정희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무슨 힘으로 버텨오셨어요.” 
 
내가 질문하자, 정희는 끝내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애들이지요. 애들이 잘 컸어요. 나는 무식했는데, 애들은 똑똑 허니 잘 배웠어요. 얼마나 착한지, 애들 때문에 마음고생한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요.” 
 

 
둘째 딸 미현이 시골 친척의 장례를 마치고, 정희를 찾아왔다. 기운 없이 침대에 누워있는 정희를 끌어안았다. 미현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정희를 아기처럼 품에 안고, 쓰다듬었다.
 
미현은 아이에게 옛날이야기를 전해주듯, 따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나는 있잖아. 엄마가 내 엄마여서 너무 감사해. 엄마가 없었으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자꾸 눈물이 났다. 미현은 한 손으로는 엄마의 머리를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눈물을 닦았다. 
 
“뭐가 고맙다는 말이여. 나 같은 엄마 만나서 고생만 했지. 엄마가 잘 배운 여자였으면, 너희들 데리고 나와서 험한 꼴 안 보여주면서 살았을 텐데, 내가 능력이 없어서 그랬지. 엄마는 못 배운 게 평생 후회여.” 
 
“아니야. 엄마 덕분에 언니랑 나랑 잘 컸잖아. 이제, 엄마만 생각해. 다른 걱정은 하지 말고….” 
 
미현은 한참 동안 엄마를 품에 안고 토닥거렸다. 정희의 머리통을 으깨려는 듯이 달려들던 두통도 잠시 멈칫했다. 
 

 
“호주에 사는 딸은 전화기만 들면 울어요. 울지 말라고 해도 소용이 없어요. 매일 엄마 생각하면서, 교회 가서 기도한다고, 그러데요.” 
 
나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정희의 입 밖으로, 기도라는 말이 흘러나왔을 때, 나는 뛸 듯이 기뻤다.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딸이 엄마를 위해 무슨 기도를 할까요?” 
 
“글쎄요. 뭐 그냥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을까요?” 
 
“그럴 거예요. 그 기도를 빼놓지는 않겠죠. 하지만, 딸은 거기서 멈추지 않을 거예요. 제가 목사인 거 아시죠? 딸이 무슨 기도를 하는지 알려드려도 될까요?” 
 
정희는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기도에 관한 가르침에 관심을 보인 것이 아니라, 딸이 무슨 기도를 할까 궁금했던 것이다. 
 
“제가 따님은 아니지만, 따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인생을 살아왔아요. 아마도 따님이 저를 어머니와 연결해준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일단, 제가 살아온 이야기부터 짧게 전해드릴게요.” 
 
정희는 경청했다. 중간중간 눈물을 닦아내며, 내 이야기를 끊지 않고 들어주었다. 내가 살아온 인생을 진지하게 들어준 정희에게 고마웠다.
 
“아따, 젊은 양반이 고생을 많이 했네요. 생긴 건 멀쩡하구먼, 속은 많이 아팠겠어요. 어찌 그런 일을 겪고, 이런 일을 한데요.”
 
나는 정희의 따뜻한 목소리와 눈빛에 위로를 받았다. 그 순간의 정희는 동화책에 나오는 마음씨 따뜻한 할머니였다. 
 
“제가 딸이라면 이런 기도를 할 것 같아요.” 
 
정희는 다시 한 번 나에게 집중했다. 나는 정희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입술을 뗐다.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첫째 딸 미숙의 심정을 정희에게 전했다. 내 감정에 동요가 일어나 눈물을 쏟아지고, 정희가 함께 따라 울 때,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나는 정희의 딸이 아니었다. 정희가 내 어머니였다. 
 
정작 나는 내 어머니에게 전하지 못한 진심을, 내 목소리로 정희에게 전한 것이다. 
 
엄마, 미안해. 
엄마, 고마워. 
엄마, 사랑해. 
 
감정의 홍수였다. 갑작스럽게 불어난 물살에 내 자아가 떠내려갔다. 정희를 혼자 남겨두고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상담자로서의 완전한 실책이었다. 
 
그때, 정희가 내 손을 붙잡았다. 
 
“목사님, 엄마도 알 거예요. 목사님이 직접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엄마니까 알아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마음 가져줘서, 고마워요.”
 
나는 후회했다. 정희의 나이 절반도 살지 못한 내가, 얇퍅한 상담의 기술로 무엇을 하려고 했던가. 
 
정희는 상처 입은 내담자였지만,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위대한 어머니였다. 
 
미숙한 상담자로 잠시 역전이가 일어나 정희를 어머니로 여긴 순간에도,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나는 잠시 동안 따뜻한 어머니를 만났고, 정희는 가족이라는 주관적인 울타리를 넘어 객관적으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가치를 재평가하게 되었다. 
 
무능한 상담자에게 베풀어진 과도한 은혜였다. 
 
정희는 내게 고맙다는 말을 남겼다. 나는 두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정희, 그리고 호주에서 나를 정희와 연결해준 미숙이었다. 
 
정희를 돌려보내고, 나는 창가로 먼 산을 바라봤다. 전화기를 손에 잡고 머뭇거렸다. 그러다, 용기를 내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엄마. 뭐해? 그냥 전화 걸었어.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나서….”

나 무섭단 말이야

“저는 방에 숨었고, 남편이 발로 문을 차면서 열라고 했어요. 순간, 저는 기절했고, 이후는 기억나지 않아요.”  
 
G는 결혼 5년 차, 서른여덟 살의 여성이다. 결혼 1년 후부터 남편의 폭력적인 행동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수건, 휴지 같이 깨지지 않는 물건을 던졌다. 물건은 점점 무거운 것으로 바뀌었다. 수저, 탁상시계, 가습기, 선풍기. 
 
처음에는 남편이 소리를 지르면 그녀도 같이 목소리를 높여 싸웠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남편이 무섭다. 남편 목 혈관이 두꺼워지고 눈이 충혈 되면, 그녀는 두려워서 안방으로 뛰어가 숨었다. 문을 잠그고 남편의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남편은 발로 문을 차면서 당장 나오라고 소리치고, 그녀는 문에 등을 기댄 채 울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문이 열릴까 두려워 몸으로 문을 막았다. 덜컹거리는 문이 그녀의 등짝을 후려치는 채찍처럼 느껴졌다. 
 
한번은 남편이 선풍기를 바닥에 내던졌다. 아내는 숲 속에서 뱀을 본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방으로 달려가 숨었다. 문을 닫고 잠그는 순간, 숨을 잘 쉴 수가 없었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쓰려져도 침대에 쓰려야져야 한다고 생각한 그녀는 힘을 다해 침대로 걸어갔다. 침대 모서리 이불을 손으로 쥔 채 방바닥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창가로 쓰며든 햇살이 그녀를 깨웠다. 전날 밤 일이 기억나지 않았다. 차가운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아 울기 시작했다. 그녀가 흘린 눈물이 조용히 침대 위로 떨어졌다. 
 
“제가 꿈꾸던 결혼 생활은 이런 게 아니었어요. 남편은 결혼 전에 저를 아기처럼 조건 없이 사랑해줬어요.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만났던 남자들은 정말 이기적이었어요. 그런데 남편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죠. 
 
남편이 왜 이렇게 변한 걸까요? 제가 속은 걸까요 아니면 제가 그를 그렇게 만든 걸까요? 혼란스러워요. 남편은 화날 때만 무섭고 평소에는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에요. 갑자기 화내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사는 느낌이랄까…. 저는 불안해서 약을 먹기 시작했어요.” 
 
남편이 말했다. 
 
“내가 문을 발로 찼다고? 제발 그렇게 말하지 마. 손으로 문고리를 잡고 열려고 한 거야. 대화하다가 갑자기 방으로 들어가면 나보고 어쩌라고. 대화를 해야 문제가 풀릴 거 아니야. 당신이 내 말을 들어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말하잖아.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당신은 들을 생각을 안 하잖아. 그럴 때마다 내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아. 
 
물건을 던진 건 내 잘못이야. 그러고 나면 얼마나 마음이 힘든 줄 알아. 당신은 내가 매일 물건을 던지는 것처럼 말하는데, 단 두 번뿐이야. 당신의 말은 엄청나게 과장된 거라고. 제발 진실을 말해. 당신 혼자만의 세상에서 벗어나란 말이야!” 
 
아내는 조용히 눈물을 흘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보이지 않는 방에 가두었다.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고, 아내는 그 안에 들어가 숨는 것이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은 매서운 눈으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면 폭발해버릴 듯한 눈빛으로. 
 
아내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사실… 나, 기억이 잘 안나. 당신이 너무 무섭단 말이야. 당신이 소리 지르면 정신이 나가버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소리 지르지 마. 제발 부탁이야….” 
 
남편은 목이 메는 듯, 어렵게 말을 꺼냈다. 
 
“사실, 어젯밤에 결혼식 앨범을 꺼내봤어요. 사진을 보면서 생각했죠. ‘우리 행복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아내에게 더 이상 상처주고 싶지 않아요.” 
 
아내가 여덟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투병 생활은 길었다. 어머니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다. 아홉 살,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녀는 친구들과 정신없이 놀다가 해질녘에 집에 들어왔다. 엄마는 딸의 머리채를 잡고 화장실로 끌고 가서 회초리로 온몸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울면서 살려달라고  말했다. 평소 엄마의 눈빛이 아니었다. 빨갛게 충혈 된 눈은 무언가에 씌인 것 같았다. 어머니는 실성한 듯 그녀를 심하게 때렸다. 그녀는 죽음의 두려움을 느끼고, 화장실에서 뛰쳐나와 방으로 도망쳤다. 
 
문을 잠그고 엄마 눈이 원래대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방에 갇힌 그녀는 귀를 막았다. 방문 너머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 아빠를 닮아 그 모양이지. 너도 죽어. 다 필요 없어. 다 같이 죽어!” 
 
그녀는 아버지가 그리웠다. 
 
“아버지는 제게 한 번도 화낸 적이 없었어요.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좋았을 텐데…. 아버지가 너무 그리웠어요. 너무 보고 싶고, 생각나고…. 엄마도 힘들었을 거예요. 지금은 이해할 수 있어요. 마음에 상처는 남았지만, 그때 엄마도 아마 어쩔 수 없었을 거예요.” 
 
남편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연예인이 되고 싶었다. 연극영화과에 지원하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반대했다. 아버지에게 맞설 수 없었다. 아버지의 생각은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으니까. 아버지 뜻을 거스르면 뺨을 맞거나 매질을 당했다. 아버지와 직접 대화할 수 없어서 늘 엄마가 중간 역할을 했다. 
 
“아버지 생각은 이래. 그러니까 네가 이해하렴.” 
 
어머니는 아버지가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상황을 설명해줘도 속 시원하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들은 동의할 수 없었다. 
 
방학 중에도 그는 아버지의 기상 시간에 맞춰 일어나 밥을 먹었다. 해도 뜨기 전, 이른 새벽 시간에 식사를 했다. 그리고 단정히 옷을 입고 도서관에 갈 준비를 하는 척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출근하시면 다시 옷을 갈아입고 모자란 잠을 잤다. 
 
그는 늘 아버지 눈치를 봤다. “영화배우는 안 된다”라는 아버지의 말 한 마디에 진로를 정하지 못하고 오랜 시간 방황했다. 
 
두 사람은 지인의 소개로 만났다. 
 
남편이 말했다. 
 
“아내는 있는 그대로 저를 인정해줬어요. 기를 살려줬다고 해야 하나… 사실 저는 부족한 게 많거든요.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성격이 좋은 것도 아니고요. 아내는 얼굴도 마음도 예뻐서 한눈에 반했죠. 사실 지금도 그래요. 가끔 아내를 보면서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나? 이렇게 사랑스런 여자에게’라고 생각해요.” 
 
아내가 말했다. 
 
“남편이 사랑해주는 게 느껴졌어요. 그의 눈빛이 따뜻했어요. 저를 아기처럼 쓰다듬으며 사랑한다고 말해줬거든요. 남편이 손을 잡아주면서 결혼하자고 했을 때 저는 감격해서 울었어요. 그를 만나기 전까지 제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두 사람의 존재는 서로에게 축복이었다. 향기 가득했던 신혼집은 사랑이라는 꽃이 시들면서 악취가 났다. 남편의 거친 입에서 풍기는 침냄새와 아내가 문고리를 잡고 버티며 흘린 땀냄새로 얼룩졌다. 
 
***
 
물에 빠져 죽을 뻔 했던 사람은 물이 두렵다. 물을 볼 때마다 두렵다. 다른 사람 눈에는 에메랄드빛으로 보이는 물이 그에게는 시커멓게 보인다. 물에 대한 기억이 물 색깔을 결정한다. 눈에 보이는 물 색깔을 바꾸려면 물속에 들어가야 한다. 
 
발부터 시작해서 허리, 목까지 천천히 담그자. 방심하지 말자. 물속에서 손발을 사용해서 앞으로 나아가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아내는 아버지가 그립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아버지를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어머니의 불안한 감정 상태, 학대와 상처 주는 말이 그녀를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에게 도피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남편을 처음 만나 가진 느낌, “아기처럼 예뻐해줬다”라는 말은 연인 사이에서 쓰는 말보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쓰는 말에 가깝다. 아버지 모습이 투영된 남편에게 끌린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아버지가 아니다. 그녀가 남편을 통해 보았던 아버지는 사막에 신기루 같은 것이다. 멀리서 아버지처럼 보였지만 가까이 가보니 모래 언덕이다. 착시현상이다. 아버지가 없다는 상실로 쓰러진 그녀에게 사정없이 모래바람이 불었다. 코와 눈에 모래가 가득 끼어 앞을 볼 수도, 숨을 쉴 수 없다. 
 
어머니가 남긴 상처는 그녀를 파괴했다. 남편 눈빛이 엄마 눈빛과 연결된다. 어린 시절, 그녀는 어머니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대항하지 않아 모진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았다. 남편에게는 달랐다. 사력을 다해 그에게 대항했다. 두 번 다시 고통  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독설이 나갔다. 남편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살기 위한 투쟁이었다. 그녀의 정서는 아홉 살 어느 여름 날, 엄마의 집 화장실 안에 갇혀있었다. 방으로 도망가 문을 잠근 사람은 현재의 그녀가 아니다. 아홉 살 소녀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느끼는 두려움은 같다. 그녀를 기절시킨 사람은 누구인가? 엄마인가, 남편인가?
 
남편이 말했다.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사람이 자기 목소리를 녹음하면 그 소리가 낯설게 들리잖아요. 제가 말을 할 때, 목소리가 이렇게 컸나요? 전혀 몰랐어요. 아내는 체구도 작은데 제 목소리가 커지면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저는 먼저 화를 낸 사람이 아내라고 생각했어요. ‘이 여자는 작은 것 하나도 그냥 못 넘어가나?’ 생각했죠. 그녀가 사나운 고양이처럼 날뛰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흥분해서 몰아세우는데 정말 답답했거든요. 제가 아니라고 말해도 귀를 막고 듣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 이 사람은 대화하고 싶은 게 아니구나. 그냥 날 이기고 싶은 거구나.’ 혼자 결론을 내렸어요. 그 다음부터는 아내가 무슨 말을 하면 입을 막으려고 했어요. 화를 참지 못하고 실수할 것이 뻔하니까요.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게 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제 깨닫게 되었네요. 아내가 무서워서 그런 거예요. 아내를 지켜줘야 할 사람이 아내를 두렵게 만든 거죠.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만약 제가 아내의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아내의 손을 잡고 말했을 거예요. ‘이제 무서워하지 마. 이제부터는 내가 곁에 있어 줄 거야’라고요.”
 
아내는 남편 옆에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남편은 아내 손을 조용히 잡아주었다. 두 사람이 맞잡은 손에서 다시 향기가 났다. 더 이상 남편의 침냄새, 아내의 땀냄새가 나지 않았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혈액처럼 따뜻한 사랑이 아내의 손을 타고 흘렀다. 아내의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모래시계를 두 번 뒤집은 것처럼 긴 시간이 흐른 후에 그녀가 말했다.  
 
“제가 만일 남편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면 남편을 대신해서 아버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요? 그거야 간단하죠. ‘아버님, 왜 제 남편의 기를 죽이세요. 남편이 아니라잖아요. 왜 그의 말을 끝까지 안 들으세요? 끝까지 들으시고 하고 싶은 말을 하세요. 제 남편은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제발 아버님 방식대로 생각하지 말고, 남편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세요, 제발!’이라고요.”  
 
그녀는 남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을 타고 따뜻한 기운이 흘렀다. 조용히 손을 잡은 채, 울기 시작했다.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은 남편이 엎드려 우는 순간, 아내는 두 손으로 남편 등을 감쌌다. 그녀가 남편을 안은 것인지, 그에게 안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남편 등에 기댄 그녀는 편안해보였다. 
 
남편이 뭐라고 말했다. 등 근육이 울리면서 남편의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닿았다. 그녀가 문 넘어 듣던 무서운 목소리와 달랐다. 남편 등에서 울린 소리가 아내의 마음을 울렸다. 
 
“여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당신의 눈빛이 무서워서 그랬어

“내가 힘들다고 말하면 날 위로해줘야지. 왜 당신이 더 힘들어 해? 당신을 괴롭히고 있는 느낌이야.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U는 남편 회사 때문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이사 와서 고립된 삶을 살고 있었다. 유일하게 바라보고 의지할 사람은 남편뿐인데 답답하고 힘든 일을 말하면 그는 외면했다. 
 
“여보, 내가 미안해.” 
 
남편이 말했다. 아내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남편은 작은 목소리로 아내를 다독이며 말했다. 아내는 남편 손을 뿌리쳤다. 가벼운 이야기는 주고받았지만, 조금이라도 진지해지면 남편은 대화를 거부했다. 그녀가 서운하다고 하면, 그는 힘없는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전부였다. 아내는 점점 힘이 빠졌다.  
 
“제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커지면 남편이 위축되는 것 같아요. 미안하다는 말로 상황을 빨리 마무리하려고 하죠. 얼마 전에 너무 화가 나서 남편에게 소리쳤어요. ‘여보! 제발 그렇게 미안하다고 말하지 마. 비난을 하려는 게 아니라 당신과 대화하고 싶은 거라고. 당신, 정말로 내가 무서운 거야? 말해줘!’라고요.”
 
남편은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무능했다. 술 취해 들어와 집안 살림을 수시로 때려 부수며 행패를 부렸다. 어머니는 삼형제를 키우면서 온갖 고생을 다했다. 그에게 아버지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그는 거친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다. 친구들 사이에서 제법 주먹을 쓴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몸집이 커지면서 따르는 친구들도 늘어났다. 어느덧 아버지보다 덩치가 커졌다. 아버지보다 힘이 셌지만 덤비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여전히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화가 나면 밥상머리에서 따귀를 때리거나 물건을 집어던졌다. 아버지에게 대들 생각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심장이 빨리 뛰고 손에서 땀이 났다. 아버지가 눈을 부릅뜨면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제대를 하고 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대들었다. 친구들과 정신없이 놀다가 밤늦게 집에 들어간 날이었다. 어머니의 눈이 파랗게 멍들어 있었고, 입술은 터져 피가 흥건했다. 순간 그는 이성을 잃고 아버지의 멱살을 잡았다. 아버지는 움찔 놀라더니 곧 그의 멱살을 잡고 따귀를 때리기 시작했다. 넘어진 그에게 발길질을 허서 온갖 욕을 퍼부었다. 
 
“이 후레자식이 아버지 멱살을 잡아? 어떻게 하려고? 어디 해봐! 넌 벼룩도 네 손으로 못 죽여. 이 겁쟁이 자식!”
 
그는 어머니 옆에 주저앉아 울었다.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다.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면서 주먹으로 벽을 쳤다. 문짝 하나를 손으로 다 때려 부수고 집을 뛰쳐나왔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겁먹은 눈동자를 보았다. 
 
그날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눈을 피했다. 점점 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는 괴로웠다. 차라리 자신이 따귀를 맞는 것이 나았다. 아버지를 비참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을 느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집을 나와 따로 살았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미안함이 복잡하게 얽혀 정리되지 않은 채 살아가던 어느 날, 그는 아내를 만났다. 
 
1년 동안 연애를 한 후에 결혼했다. 처음으로 부부싸움을 한 날, 아내는 대화가 잘 되지 않자 남편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날 그는 아내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자존심 때문에 표현하지 못했지만 아내가 소리를 지르면 머리가 텅 비어버렸다. 심장이 빨리 뛰고 손에서 땀이 났다. 
 
그의 큼지막한 손과 다부진 어깨도 그 두려운 감정을 몰아내지 못했다. 화난 아내가 아버지처럼 보였다. 아내 눈빛이 그를 짓눌렀다. 그래서 아침에 아내가 깨기 전에 조용히 집을 나섰다. 그녀의 눈을 보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싸우고 싶지 않아요. 아내 눈빛이 무서워서.” 
 
***
 
트라우마trauma, 남편 가슴 깊이 새겨진 상처이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코끼리 말뚝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서커스단에서 코끼리를 길들일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새끼 코끼리 목에 줄을 건다. 말뚝에 그 줄을 묶는다. 새끼 코끼리는 목에 감긴 줄에서 벗어나려고 애쓴다. 소용없다. 지친 코끼리는 포기한다. 땅에 주저 않아 순응한다. 코끼리 몸집이 커지고 힘이 세진다. 나무를 들이받으면 나무가 쓰러지고, 코로 나무를 들어 올리면 뿌리째 뽑힌다. 아무리 힘이 세도 코끼리는 말뚝을 뽑아 올릴 생각을 못한다. 어릴 때의 기억 때문이다. 땅에 박힌 말뚝은 코끼리 내면에 영향을 미친다.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었어.’ 
 
남편에게 일어난 일이다. 어린 시절 학대 경험은 성인이 된 후에도 영향을 미친다.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의도적인 노력을 해야 벗어날 수 있다. 말뚝을 뽑아 올리려면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학대로 인한 트라우마는 개인의 내면 안에서 영상처럼 반복된다. 극장 의자에 꽁꽁 묶인 채,  끔찍한 영화의 한 장면을 반복해서 보는 것처럼. 고개를 돌려도 소리가 들리고, 눈을 감아도 그 장면이 떠오른다. 트라우마 징후이다. 남편은 아내와 다툴 때마다 아버지로 인한 상처가 떠오른다. 
 
아버지와 아내, 두 사람은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남편은 아내보다 힘에 세고, 목소리도 크다. 상관없다. 그의 두려움은 아내를 통해 반복되고 있다. 반복을 멈추려면, 반론을 제기해야 한다. 
 
‘무서운’ 감정은 ‘무능한’ 감정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대처할 힘이 없을 때, 사람은 무섭다. 눈앞에 꼬마가 장난감 칼을 들고 휘두르면 무섭지 않다. 마음만 먹으면 꼬마를 제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수부대 요원이 칼을 들고 찌를 자세를 취하면, 무섭다. 무서워서 두 다리가 떨린다.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무능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대상에 무서움을 느낀다. 어떤 사람은 카드빚이 무섭다. 과거에 카드빚을 갚지 못해 고생했다면, 신용카드를 쓰는 게 무서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새로운 이성을 만나 사귀는 게 무섭다. 과거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다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무서울 것이다. 
 
무서움을 이겨내려면 무서움의 대상을 정면으로 바라봐야 한다. 나와 그 대상을 비교한다. 누가 더 힘이 센가 객관적으로 따져 본다. 전력을 비교해 보는 것이다. 유치한 짓이 아니다. 코끼리를 묶은 말뚝을 뽑아내고 싶다면, 말뚝을 잡고 흔들어봐야 한다. 얼마나 단단하게 박혀있는지 확인해 본다. 잡아서 흔들어보면 안다. 뽑아 올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어린 시절 남편은 아버지의 학대를 벗어날 능력이 없었다. 지금은 아니다. 더 이상의 학대는 없다. 그가 벗어나지 못한 건 두려움이라는 감정이다. 학대는 사라졌지만 두려움을 남겼다. 벗어날 방법이 있다. 
 
가까이 가서 잡고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흔들어 보는 것이다. 코끼리 말뚝을 잡고 흔들듯이 두려운 감정을 잡고 흔든다. 앞뒤 좌우로 흔들다보면 흙이 밀리면서 공간이 만들어진다. 원심력을 이용해서 말뚝을 뱅뱅 돌리면 공간이 넓어진다. 손힘이 뿌리까지 닿으면 말뚝은 뽑힌다. 
 
남편은 혼자가 아니다. 아내가 도울 수 있다. 아내는 말뚝이 아니다. 남편을 속박하는 사람이 아니라 돕는 사람이다. 말뚝을 뽑으려 하는 손에 힘을 보탤 수 있다.   
 
모든 사람은 결핍이 있다.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욕구를 느낀다.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건, 자신 안에 결핍을 보상해줄 사람일지 모른다는 희망 때문일 것이다. 남편에게 아내는 결핍을 채워줄 사람이다. 부부 사이 갈등은 주로 배우자가 가진 결핍에서 비롯된다. 
 
그 결핍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지만 실재한다. 그것을 채워달라고 배우자에게 호소하고 강요하면서 서로에게 고통을 준다. 부부가 절망에 빠지는 이유다. 그러나 이것은 곧 기회다. 배우자가 고통을 호소하는 문제 속에 배우자가 바라는 욕구가 숨어있다. 
 
배우자가 지속적으로 고통을 호소한다면 귀를 기울여 진심을 알아봐야 한다.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배우자가 채워줄 수 있다. 아내가 두려움에 떠는 남편을 이끌어 줄 수 있다는 뜻이다.  
 
아내여, 남편은 나쁜 사람이 아니다. 결핍이 있는 사람이다. 겁먹은 소년이 당신 품에 안겼다. 사내로 키워라. 참고 견뎌라. 그가 진정한 남자가 되면 넓은 가슴으로 당신을 안아줄 것이다. 당신을 사랑하고 보호해줄 것이다. 포기하지 마라. 그날이 멀지 않았다.
 
소년이 치유되면 남자가 된다.

당신은 그 소년을 알고 있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는데,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네요. 돈, 가정, 친구, 다 잃었어요….”  
 
E는 서른아홉 살 여자다. 6년의 결혼 생활을 끝내고 혼자된 지 3년 지났다. 남편은 교회 목사님 소개로 만났다. 목사님은 남편이 진지하고 성실한 남자라고 하셨다. 첫눈에 호감이 느껴지는 남자는 아니었지만, 목사님이 인정한 사람이니 한두 번 만나보자고 생각했다. 따뜻한 성품이 좋았다. 8개월 만나고, 결혼했다. 
 
신혼집은 다세대 주택에서 시작했다. 4층 건물 맨 꼭대기 주인세대에 시어머니가 살고, 그녀와 남편은 2층에서 살았다. 결혼 일주일 만에 남편과 다퉜다. 그가 급여를 아내에게 갖다 주지 않았다. 생활비는 여자가 관리해야 한다며 남편을 설득했다. 그러자 그는 “그런 게 어디 있냐? 돈 버는 사람이 관리하자”라고 말했다. 아내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물러섰다. 
 
두 달 뒤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편은 결혼 전에 대출을 받아 주식에 돈을 투자했다가 2억 정도 빚을 지고 있었다. 그래서 급여가 모두 대출금 상환으로 쓰였다. 기약 없는 기간 동안 수입 없이 살아야 했다. 
 
시어머니는 “알고 있었고, 부부가 함께 짊어져야 할 짐이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분노했다. 남편과 시어머니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했다. 
 
이혼을 생각했지만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임신 4개월이었다. 남편은 집안일을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저녁마다 침대에 누워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속이 터졌다. 남편에게 화를 내고 잔소리를 했다. 그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아내 얼굴에 베개를 던지며 싸늘하게 말했다. 
 
“입 닥쳐.” 
 
이후로 던지는 물건이 달라졌다. 베개에서 시계로, 시계에서 컵으로. 컵이 깨지던 날,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남편은 울고 있는 그녀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아내는 휴대폰 게임을 그만하라고 말했다. 남편은 무시했다. 남편이 게임으로 100만 원 넘는 돈을 썼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녀는 그동안 쌓였던 불만을 터트렸다. 
 
남편이 소리 지르며 욕을 했다. 아내는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밤새도록 말다툼을 했다. 신경이 예민해졌다. 배가 아팠다. 두려움에 싸인 아내는 의식을 잃었다. 아기는 유산되었다. 시어머니는 주변 사람들에게 며느리가 몸을 돌보지 않고 무리해서  유산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를 불러 말했다. 
 
“내가 그 놈을 혼내줄 테니까, 이번 한 번만 눈 감고 넘어가자.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야.” 
 
그러고 5만원 권 한 뭉치를 그녀의 손에 쥐어줬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돈을 한 장씩 찢기 시작했다. 눈물이 흘렀다. 돈을 갈기갈기 다 찢을 때까지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돈도 눈물도 말없이 땅에 떨어졌다. 
 
그녀는 이혼했다. 
 
어린 시절, 그녀는 아버지에게 맞고 자랐다. 술 취한 아버지는 매일 엄마를 때렸다. 참다못한 엄마는 집을 나갔다. 혼자 남겨진 그녀는 아버지의 주정과 매질을 당해야 했다. 
 
몇 달 뒤, 엄마가 집에 돌아왔다. 아빠가 없는 틈에 짐을 가지러 온 것이었다.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다. 엄마에게 매달리다시피 하여 같이 문을 나서는데 처음 보는 아저씨가 서 있었다. 엄마는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그 아저씨와 가버렸다. 
 
4년이 지났다. 견디다 못해 엄마를 찾아갔다. 그리고 예전에 만났던 아저씨를 “아빠”라고 부르며 살았다. 너무나 그리웠던 엄마였다. 하지만 헤어져 산 시간이 길어서 인지 아니면 상처가 많아서 인지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엄마는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뭘 물어봐도 짧게 대답했다. 그녀에게 소리 없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 때문에 난처해졌어. 불편해졌다고.” 
 
아저씨 표정도 달라졌다. 그 집에 오래 살 수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나왔다. 
 
“제 안에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있어요. 외로움에 미쳐버릴 것 같았어요. 매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세요? 남편에게 전화해서 ‘욕하지 않고, 돈 관리 내가 하고, 게임 안 하고, 빚 갚기로 약속하면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어’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언젠가 전화를 걸지도 몰라요. 남편은 바뀌지 않을 거예요. 제가 너무 외로워서 그래요.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까.” 
 
외로움이 찾아오면, 그녀는 잠을 잔다. 그러면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밤과 낮이 바뀐 채 3년이 지났다. 깨어있는 시간은 TV를 본다. 외로움을 느끼고 싶지 않아 선택한 방법이다. 자신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과 전쟁을 치르고 있다. 조용하지만 치열하다. 그녀는 승리한 적이 없다. 
 
외로움은 갑자기 찾아와서 그녀를 휘젓는다. TV보다가 눈물이 흐르고, 잠에서 깨면 슬픔이 밀려온다. 휴대폰에 전남편의 번호를 누르고, 통화 버튼을 바라본다. 번호를 다시 지우고 입력하는 일을 반복한다. 휴대폰을 소파에 던지고, 수면제를 먹고 잠든다.    
 
***
 
외로움은 견디기 힘든 감정이다. 외로움이 속삭이는 말은 무섭다. 
 
‘넌 혼자야. 아무도 없어.’ 
 
거짓말이지만 진실처럼 들린다. 거짓을 거부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지만 외로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노력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거짓이 진실이 된다. 전기고문 의자에 꽁꽁 묶인 채 저항하지 않고 고통을 받아들인다. 외로움은 사람을 서서히 파괴한다.    
 
사람은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외로움과 싸워 이긴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누구나 외롭다. 외로움은 그림자처럼 항상 따라다닌다. 그것과 싸우면 질 것이 뻔하다. 의미 없는 싸움이다. 외로움이 삶을 파괴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택해야 한다. 
 
외로움과 싸우지 않고 
외로움을 돌보는 것이다. 
 
외로움을 돌보려면 그것에 대해 알아야 한다. 외로움을 “꼬마”라고 부르겠다. 언제 꼬마가 활동하는지 알아야 한다. 특정한 상황이나 분위기나 시기에 꼬마가 활동한다면 어디서 나타는지 따라가 본다. 쥐구멍에 갇힌 쥐를 찾는 것처럼 자세히 살핀다. 
 
그다음에 꼬마가 활동하기 시작하면 자신에게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확인한다. 꼬마가 나타나면 자신이 하는 행동을 관찰한다. 반응은 다양하다. 자는 사람, 먹는 사람, 우는 사람, 화내는 사람. 패턴을 발견할 때까지 유심히 관찰한다. 
 
외로움에 이름을 붙인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으로부터 감정을 분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감정을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착각하는 것이다. 감정은 감정일 뿐이지 자신이 아니다. 감정과 자신을 분리하지 않으면 감정을 변화시킬 수 없다. 
 
외로움이 느껴지면 절망하지 말고, 차분하게 말한다. 
 
“또 시작이군.” 
 
만약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난다. 감정이 분리된 사람은 감정을 돌볼 수 있다. 
 
상상해 보자. 당신은 상담자다. 꼬마는 상담실에 찾아온 내담자다. 꼬마는 통제불능이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 사랑받지 못했다. 관심 받고 싶어 과도한 행동을 한다. 작은 말 한 마디에 상처받고, 우울해진다. 다들 기분 좋아서 웃고 있는데, 뭐 하나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물건을 집어던지고 난리다. 설득하고 달래도 소용없다. 
 
꼬마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미안하지만 변화되지 않는다. 꼬마는 피터팬처럼 영원히 나이 먹지 않는다. 철들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그 꼬마를 돌보는 게 의미가 있을까? 물론이다. 꼬마를 대하는 자기 자신이 변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는 꼬마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대하는 자신에게 일어난다. 
 
감정을 바꿀 수 없지만
감정에 대한 반응을 바꿀 수 있다. 
 
나는 내 안에 있는 꼬마를 “소년”이라고 부른다. 소년은 다섯 살 정도 된다. 발가벗겨졌다. 온몸이 멍 자국이다. 파랗고 빨갛다. 파란 자국은 생긴 지 오랜 된 것이고, 빨간 자국은 방금 생긴 것이다. 머리는 지저분하고, 얼굴은 눈물자국, 땟자국으로 얼룩졌다. 
 
소년은 불안해 보인다. 시선을 어디다 둘지 몰라 눈알을 이리저리 굴린다. 어깨는 움츠러들어 있고, 두 손은 덜덜 떨린다. 아무리 설득하고 달래고 돌봐주고 씻겨줘도 항상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있다. 소년은 내가 원치 않을 때 갑자기 나타나 말을 건다. 
 
‘못 하겠어…. 두려워…. 안 하면 안 돼? 그만하자. 뭘 위해서 그래.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사람들이 알아줄 거라고 생각해? 의미 없는 일이야. 소용없는 일이라고. 현실은 달라. 너는 실패할 거야. 망할 거라고. 멈춰. 이대로 있어. 하지 마. 그만해!’
 
나는 소년과 오랫동안 함께 지냈다. 익숙할 법도 한데, 쉽지가 않다. 그가 입을 열면 움찔한다. 때로는 깊은 절망에 빠진다. 마음을 가다듬고 말한다. 
 
‘알아. 네가 얼마나 두려운지…. 나 만나서 고생이 많구나. 그래도 우리 가야 해. 무서워도 같이 가자. 내가 도와줄게. 힘들어도 조금만 참자.’
 
나는 그 소년을 따뜻하게 안아준다. 
 
나는 당신 마음 속 소년이 누군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그 소년을 알고 있다. 
 
그녀의 마음 속에 소녀가 있다. 길가에 버려진 소녀. 지나가는 사람은 많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 갖지 않는다. 때리는 아빠가 무서워 집을 도망쳐 나온 소녀. 엄마를 찾아갔지만 커다란 대문은 잠겨있다. 소녀는 발걸음을 돌려 길을 걷는다. 길에서 날리는 먼지가 머리에 뽀얗게 앉는다. 
 
두 눈에 눈곱이 구슬처럼 박혀있고, 눈물과 콧물자국이 얼굴에 굽이굽이 골목을 냈다. 비가 와서 옷이 젖고, 해가 떠서 다시 마르고. 옷은 종이처럼 너덜거린다. 신발은 닳아서 뒤꿈치가 땅에 닿는다. 소녀는 갈 곳이 없다. 
 
걷다 지친 소녀는 길가에 앉는다. 지나가는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한 사람이 다가왔다. 손가락은 두툼하고 굳은살이 박였다. 소매 밖으로 팔을 타고 오르는 용의 꼬리가 보인다. 짧은 머리카락은 송곳처럼 삐쭉 서있다. 껌을 씹으면서 소녀에게 말한다. 
 
“나랑 가자. 좋은 데 알려줄게.” 
 
소녀는 무섭다. 가면 안 된다. 그러나 소녀는 남자를 따라간다. 길가에 버려진 것보다 나으니까. 누군가 뒤에서 소리친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남자에게서 소녀를 빼앗는다. 남자는 놀란다. 눈치를 보다가 멀리 도망쳐 버린다. 그녀가 소녀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내가 널 돌봐줄 거야. 넌 버려진 아이가 아니야. 그렇게 아무나 따라다녀서는 안 돼. 사랑을 구걸해서는 안 된다고. 이제 외롭지 않을 거야. 같이 있을 거니까.” 
 
소녀를 찾아 나선 사람은 바로 그녀, 
그녀 자신이었다. 
 
외로움은 그녀 자신이 아니다. 외로움은 그녀 감정이다. 그녀는 소녀를 돌보기 시작했다. 그녀가 한 눈 판 사이에 소녀가 사라질지 모른다. 누군가 내민 손을 잡고 어디론가 가버릴 것이다. 소녀는 아무나 따라간다. 소녀를 해칠지 모르는 위험한 사람이라도. 소녀와 함께 하는 삶이 익숙해지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소녀는 변하지 않으니까. 
 
상처와 싸우는 사람은 고통 받지만,    
상처를 돌보는 사람은 치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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