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치유・성장

도둑을 지키는 여자

희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앞에 앉았다. 
 
아파트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녀는 손에 쥔 야구방망이를 단단히 잡았다. 혹시라도 누군가 문을 열면, 사정없이 내려칠 작정이었다. 
 
그녀가 열여덟 살 때였다. 
 
“희수야. 너 잠 안 자고 뭐 하는 거야?” 
 
인기척을 느낀 엄마가 현관 앞에 우두커니 앉은 희수에게 물었다. 
 
희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을 안 자고 뭐 하냐고 희수야?” 
 
희수는 현관문을 똑바로 응시한 채,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둑 지키잖아.” 
 
엄마는 당황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희수야?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빨리 가서 자.” 
 
“엄마는 상관하지 마.”
 
다음 날, 희수는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정신과 의사는 희수에게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말했다. 
 
“요즘 고등학생들이 스트레스가 많아요. 입시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희수의 엄마는 불안했지만, 의사의 말을 신뢰하고 싶었다. 
 
정신과에 다녀온 이후에도, 희수는 한 달에 한 번꼴로 밤에 일어나, 도둑을 지켰다. 
 
그녀의 엄마는 시간이 빨리 흘러, 희수가 이상한 증상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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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 달에 한 벌꼴인지 아세요? 제가 생리하는 주기마다 도둑을 지킨 거예요. 엄마는 같은 여자면서, 그것도 모른 거죠. 얼마나 무심한 여자인지 아시겠죠? 저한테 관심이 없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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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주섬주섬 내리는 토요일 아침이었다. 
 
“희수야. 그만 좀 자고 일어나. 너는 주말마다 그렇게 늦잠을 자니? 엄마, 지금 오빠랑 백화점에 다녀올 테니까, 일어나면 아침밥 챙겨 먹어.” 
 
희수는 샛눈을 뜨고, 시계를 확인했다. 엄마를 힐끔 보고는, 짜증 난다는 듯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뒤돌아누웠다. 
 
“고등학생이 잠을 저렇게 자.” 
 
현관에서, 오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게 말이다. 어쩌려고 저러는지 모르겠어.” 
 
엄마가 장단을 맞췄다. 
 
“한심하다, 한심해.” 
 
오빠가 남긴 마지막 말에, 희수는 정신이 또렷해졌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머그컵에 우유를 따라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코코아 분말 가루를 세 숟가락 넣었다. 차 스푼으로 코코아를 저으며, 창가에 섰다. 주섬주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머그컵 안의 코코아가 입술에 닿았을 때, 쇠로 된 현관문이 쿵쿵 울렸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손에 들고 있던 코코아를 놓쳤다. 머그컵은 바닥에 내동댕이 쳐지고, 코코아는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그녀는 얼어붙은 채,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저 택배인데요, 반품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안에 계시나요?”
 
그녀는 숨을 죽였다. 
 
인터폰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카메라에 비친, 남성은 검은색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랫도리에서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 코코아 위에 주저앉아서 그런 게 아니었다. 때아닌 생리가 시작된 것이다. 
 
“뭐야, 이거? 집이 왜 이렇게 난장판이야?” 
 
오빠가 말했다. 
 
“희수야! 이게 뭐야.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엄마가 말했다. 
 
사방으로 튀겨서 굳어버린 코코아 자국은 차갑게 식어버린 핏자국처럼 참혹했다. 마치 살인사건의 현장을 방불케 했다. 
 
“이게 무슨 일이래?” 
 
희수의 엄마는 물걸레로 사방에 새겨진 코코아 자국을 닦아내면서 짜증스럽게 말했다. 
 
침대에 누워 울고 있는 그녀를 그대로 내버려 둔 채였다. 
 
자정이 넘은 시각, 그녀는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앞 베란다 창고에서, 오빠가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야구방망이를 꺼냈다. 정자세로 현관 앞에 앉아, 밤을 지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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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꿔요. 지금까지 여러 명의 상담자를 만나봤지만, 내가 왜 이런 꿈을 꾸는지 정확히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나는 왜 이런 꿈을 꾸는 걸까요?” 
 
그녀는 꿈에 대해 말했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내 방에 들어와요. 검은 모자에 검은 마스크, 나는 그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없어요. 그 남자는 내 존재를 알지 못해요. 
 
나는 이 모든 것을 내 옷장에서 지켜보고 있어요. 그 남자는 옷장으로 다가와, 옷장 아래 서랍을 열죠. 나는 살짝 열린 옷장 틈으로, 그 남자를 마주 봐요. 
 
그 남자는 서랍을 열고, 내 양말을 훔쳐서 달아나요. 그 남자가 떠나고 나면, 나는 내 양말을 돌려달라며 엉엉 울죠.
 
이 꿈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녀와 나 사이에 묘한 긴장이 흘렀다. 그녀는 차분하게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궁금해서 던진 질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의도가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내게 퀴즈를 낸 것이다. 내가 안전하고 믿을만한 사람인지 그녀의 방식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그녀는 상담실에 남을 수도, 상담실을 떠날 수도 있었다. 그녀는 이미 여러 명의 상담자를 만나봤고, 그동안의 상담이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새로운 상담자를 끊임없이 찾아다닌다. 그녀는 왜 다른 내담자들처럼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말해주지 않는가? 알 수 없었다.
 
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떠올랐다. 
 
첫째, 그녀가 그렇게 질문한 의도를 묻는다. 의도를 묻는 과정에서, 그녀 자신만의 고유한 “의미”를 찾아낸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녀가 무슨 일을 겪었고, 왜 그런 꿈을 꾸는지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 앞에 꼿꼿하게 서 있는 그녀는 자신이 겪은 일을 순순히 말해줄 의도가 없어 보였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판단하냐고 묻는다면, 나도 모르겠다. 그녀의 눈빛은 내게 답을 맞힐 수 있겠냐고 묻는듯했다. 
 
둘째, 그녀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상담자와 내담자의 관계를 건강하게 설정하기 위해, 잠시 동안 교육적인 대화를 나눈다. 
 
상담자는 초능력자나 점쟁이가 아니다. 내담자가 모르는 것을 상담자가 알 수는 없다. 
 
내담자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정리해서, 보다 명확하게 내담자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상담자의 역할이다. 
 
내담자가 상담자의 능력을 테스트한다거나, 상담자와 힘겨루기를 한다면 상담의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다. 
 
교육적인 대화를 통해, 내담자가 상담자를 바라보는 관점에 변화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도 효과가 없을 것 같았다. 
 
만약 내가 그런 태도를 취한다면, 그녀는 예의 바르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자리를 떠날 것이다. 
 
셋째, 솔직하게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때로는 상담자 스스로가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는 것이 상담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간다. 
 
상담자가 솔직하게 자신을 개방했기 때문에, 내담자가 적극적으로 자신을 개방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이다. 
 
단, 기술이 아닌 진심을 담아야 한다. 진심이 없으면, 상담자는 실제로 무능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진심을 담으면 무능함도 실력이 될 수 있다. 
 
내가 “모르겠다.”라고 솔직히 말한다면, 그녀가 어떤 결정을 내릴까? 
 
상담은 즉시 종결될 것이었다. 내가 그 말을 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상담실을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그녀가 원하는 방식으로 대화하는 것이다. 그녀가 묻는 말에, 군더더기 없이 대답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틀린다면? 
 
어차피 그녀는 떠날 것이다. 
 
만약 내가 맞춘다면? 
 
몇 세션을 더 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그것이 내게 실제적인 유익이 있을까?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상담은 일대일로 비밀리에 진행된다. 그녀가 나를 유능한 상담자로 인정해준다고 해도 다른 내담자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녀와의 상담을 지속하고 싶은가? 
 
자존심 때문일까? ‘너도 다른 상담자들과 다를 바 없구나’라는 식으로 나를 평가하는 것이 불편한 것일까? 
 
전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지만, 단지 그런 이유에서 상담을 지속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나는 왜 그녀와의 상담을 지속하고 싶은 것일까? 
 
이미 중년이 되어버린 그녀는 이제껏 자신을 안전하게 개방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퀴즈를 멈추지 않는 이상, 상담실을 전전하는 기약 없는 여정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멈춰야 했다. 그리고, 진실을 말해야 했다. 그곳에 진정한 자유가 있었다. 
 
꼭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그 일을 해주기를 바랐다. 
 
그녀는 유능한 상담자들을 십수 년 간 만나온 터였고, 기적은 없었다. 무능한 내가 그녀를 마주한 이유였다. 유능한 상담자들을 거치고 거쳐, 나에게 흘러든 것이다.  
 
제아무리 유능한 상담자라도, 스스로 상담실을 떠나려는 내담자를 변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상담자는 상담실 밖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무모해지기로 했다. 
 
정면돌파를 선택한 것이다. 
 
“당신은 어릴 때, 성적인 공격을 받았을 거예요. 옷장에 숨을 수 있는 나이였다면, 아주 어린아이였겠죠. 
 
끔찍한 일을 저지른 사람은 아는 사람은 아닐 겁니다. 익명의 사람일 거예요. 
 
당신이 고등학교 때 겪은 일은, 최초의 사건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나에게 그것이 최초의 사건인 것처럼 말했어요. 의도적으로 나를 혼란스럽게 한 것이죠.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나에게 제시한 유일한 단서이자 힌트였을 겁니다. 내가 문제를 맞추기를 바란 것이죠. 
 
고등학교 때, 당신이 인터폰 앞에서 마주한 남자가 쇠사슬을 끊은 거예요. 그 바람에, 지하 감옥에 가둬놓은 괴물이 탈출한 것이죠. 
 
당신의 내면 깊숙이 숨겨진 상처를 그 사건이 끄집어 낸 겁니다.  
 
당신이 어린 시절 끔찍한 일을 겪은 그날에도, 비가 내렸을 가능성이 높아요. 
 
평소에 나는 절대로 내담자가 말하지 않는 내용을 앞서서 추측하지 않습니다. 내담자의 인격을 무시하는 행동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나는 지금 무모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당신이 원했기 때문에, 내 멋대로 당신을 추측해버린 겁니다. 
 
자,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실 건 가요? 아니면, 평소처럼 예의 바르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상담실을 떠나버리실 건가요?”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녀가 침묵한 몇 초의 시간 동안, 나는 늙어버릴 지경이었다. 
 
그녀는 자세를 고쳐앉고,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다섯 살 때였어요.” 
 

 
“희수야. 엄마 나갔다 올 테니까, 잠깐만 집에 있어.” 
 
“어디 가는데, 엄마?” 
 
“갑자기 비가 오잖아. 오빠가 우산도 없이 학교에 갔어. 오빠 비 맞으면 안 되니까, 엄마가 데리러 가려고. 잠깐만 집에 있어. 우리 희수 씩씩하잖아.” 
 
희수의 오빠는 그녀보다 일곱 살이나 많았다. 열두 살 남자아이에게 비를 맞히지 않으려고, 다섯 살 난 여자아이를 집에 혼자 남겨둔 것이었다. 
 
엄마는 우산을 챙겨들고 나가면서, 실수로 문을 잠그지 않았다. 단독주택이라 길 가던 사람이 담장 너머로 고개를 들면 거실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희수는 거실에 누워 TV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거실 문이 열리고, 도둑이 들어왔다. 검은 모자, 검은 마스크를 쓴 강도는 희수를 덮쳤다. 어린 희수는 고통스러웠다. 하반신이 잘려나가는 듯했다. 
 
비에 젖은 남자의 냄새는 역겨웠다. 남자는 희수를 바닥에 내버려 두고, 안방으로 들어가 돈이 될 물건들을 훔쳐서 달아났다. 
 
희수는 가만히 일어나, 옷장으로 걸어갔다. 피에 젖은 속옷을 벗어서 세탁기에 넣고, 새로운 속옷으로 갈아입었다. 
 
“희수야! 이게 무슨 일이야?” 
 
엄마는 안방으로 달려 들어가, 잃어버린 물건들을 살폈다. 장롱 안에 곗돈이 사라진 것을 알고 나서, 엄마는 하얗게 질려버렸다. 
 
희수를 째려보며 말했다. 
 
“넌 그때 뭐하고 있었어?”
 
희수는 소파에 엎드린 채로 말했다. 
 
“여기 이렇게 누워 있었어.”
 
엄마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이 바보 같은 계집애야. 도둑이 들었으면, 얼른 도망쳐야지. 거기 그러고 있으면 어떻게?” 
 
오빠가 옆에서 거들었다. 
 
“내가 있었으면, 야구 방망이로 콱 그냥 때려 눕혔을 텐데….” 
 
희수는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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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충격에 손발이 떨렸다. 손에 쥐었던 만년필을 놓치고 말았다. 만년필이 그녀의 발 앞으로 굴러떨어졌다. 곧바로 몸을 숙여 만년필을 집어 들 여유가 없었다. 
 
그런 내 심정을 이해라도 한다는 듯이, 그녀는 차분하게 몸을 숙여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만년필을 건내주면서, 그녀가 말했다. 
 
“처음이에요. 다른 누군가에게 그날의 일을 말해 본 게….”
 
나를 진정시킨 것은 그녀였다. 그녀의 도움으로 나는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가 따뜻한 표정으로 나를 기다려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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댐의 수문이 열리듯, 그녀는 자신 안에 담겨 있던 이야기를 방출했다. 
 
“엄마는 오빠밖에 몰랐어요. 내가 정신과를 들락거릴 때, 오빠는 유학 준비를 하고 있었거든요. 
 
단독주택을 팔아서, 복도식 아파트로 이사를 했어요. 그 돈으로 오빠 유학 자금을 만들어준 거예요. 오빠는 지금 잘 먹고 잘 살아요. 
 
엄마가 저한테는 뒷바라지 못해준다고, 독일로 유학 가라고 했어요. 거기는 학비가 없으니까, 아무래도 수월하지 않겠냐고. 
 
가서 일 년쯤 지났나? 오빠가 전화를 했어요. 엄마가 아프니까 귀국하라고. 돌봐줄 사람이 없으니까, 나보고 돌봐주라는 거죠. 
 
오빠가 그랬어요. ‘나는 결혼해서 신혼인데, 어떻게 아내에게 병수발을 들게 하냐’고요. ‘네가 와서 돌봐야 한다’고.  
 
저도 참 어리석었죠. 엄마가 아프다는 말에, 걱정이 되더라고요. 귀국해서 엄마를 돌봤어요. 그렇게 십 년이 지났죠. 
 
엄마 돌아가실 때까지 내가 병수발을 다했는데, 엄마가 내 앞으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셨어요. 오빠 앞으로 전부 돌려놓고 세상 떠나셨죠. 
 
내가 이렇게까지 해도, 소용없는 건가? 엄마한테는 오빠밖에 없는 건가? 많이 슬프더라고요. 
 
장례식장에서 오빠가 그랬어요. ‘고생했다. 이제 네 인생 살아라.’라고. 
 
답답했어요.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몰랐거든요. 내 인생을 갈아 넣어서, 엄마를 보살핀 것 같았어요. 세상을 떠난 엄마가 부러울 정도였으니까요. 
 
엄마 돌아가시고, 오빠가 아파트를 팔았어요. 오피스텔을 장만해주더라고요. 그래도, 양심은 있구나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오피스텔이 오빠 명의로 되어 있었어요. 
 
지금은 연락도 안 하고 살아요. 오빠를 보고 싶지 않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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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내게 용서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어떻게 하면, 엄마를 용서할 수 있는지 물었다. 세상을 떠난 엄마가 미워질 때는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어떻게 하면, 오빠를 용서할 수 있는지 물었다.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오빠를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양심이 찔린다고 말했다. 
 
‘용서라니….’ 
 
내 안에 분노가 일어났다.
 
상담이 궤도를 이탈했다. 상담자, 목사와 같은 호칭이 얼굴에 엉겨 붙은 거미줄 같았다. 
 
나 역시 사람이었다. 상담자의 기능을 벗겨내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 그녀 앞에 마주 섰다. 
 
나는 말했다.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은 당신이 아닙니다.” 
 
그녀가 움찔했다. 
 
“네?”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그들입니다.”  
 
다소곳하게 앉아 있던 그녀는 몸의 균형을 잃었다.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짚었다. 점차 그녀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어갔다. 
 
그녀는 이내, 폭포수와 같은 눈물을 쏟아냈다. 감옥에서 풀려난 괴물이 떠내갈 만큼, 강력한 물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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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어요. 남자에 대한 호감조차 없었거든요. 젊을 때, 내가 좋다고 따라다닌 남자들이 있었는데, 번거롭게 느껴져서 떼어내는데 힘들었어요.”
 
그녀가 살아온 인생에서 연애와 관련된 기록은 단 한 줄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남자와의 사랑, 이것은 그녀가 살아온 인생과 전혀 관련 없었다. 그곳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남자분들이 가까이 다가오면, 저는 부담스러워서 멀리하고 싶거든요. 때로는 일상생활에서 부딪힐 때가 있어요.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얼마 전에, 교회에서 행사가 있었거든요. 같이 봉사하다가, 어느 남자 성도하고 사소한 의견 충돌이 있었어요. 너무 사소해서 그분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채지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복잡한 감정으로 빠져들었어요. 괴로워서 미칠 지경이었죠.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어요. 곧바로 집으로 와 버렸죠. 수면제를 한 알 먹고, 바로 잠들었어요. 미쳐버릴 것 같았거든요.”
 

 
“여기 의자는 뭐죠?” 
 
A가 말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남성이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럼, 이것 좀 치우죠. 사람들이 지나는 자리에 이런 게 있으면 다칠 수도 있잖아요.” 
 
“제가요?” 
 
“아, 아니에요. 제가 말실수를 했네요. 그냥 제가 치울게요.” 
 
A는 허리를 굽혀 의자를 들어 올렸다. 몇 걸음 걸어서, 구석진 곳에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A와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A는 그녀의 노력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안내한다고, A가 계속 나서는 바람에, 그녀와의 동선이 겹쳤다. 한꺼번에 사람들이 몰려들어오는 탓에, 자리를 안내하는 사람들이 분주했다. 그 과정에서, A와 그녀가 살짝 부딪혔다.
 
A가 전혀 의식하지 못할 정도의 충돌이었다. A는 여전히 자기 자리에서 서서, 밝게 웃으며 다른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 그녀를 짓눌렀다. 
 
그녀는 함께 행사를 준비하는 여자 전도사님께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다는 말을 남기고 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나는 남자 상담자인데, 그건 괜찮으신 가요?”
 
내가 물었다. 
 
“교회에 계신 목사님들에게는 불안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아요.” 
 
그녀가 말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글쎄요. 목사님들은 조금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아무래도 일반 사람들하고는 다르신 분들이니까요. 물론, 그렇지 않은 목사님들도 계시기는 한데, 대부분 좋은 분들이니까요.”
 
“그렇군요. 한 가지만 더 묻고 싶어요. 내가 당신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목사님도 상처받으셨잖아요. 적어도, 나를 비난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솔직히 제가 이상한 사람이잖아요.  
 
내 인생 밑바닥에 숨겨둔 진실을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 내가 그 말을 내뱉은 순간, 내 자아가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어요. 
 
목사님의 책이나 설교를 듣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용기를 냈죠.  
 
막상 목사님을 만나니까, 또다시 두려운 거예요. 예의 없는 행동이었지만, 다른 상담자들에게 했던 방식으로 목사님을 테스트 한 거죠. 
 
사실 저는, 처음부터 목사님께 제 이야기를 전부 꺼내놓고 싶었어요. 목사님이 내 꿈 이야기를 듣고, 엉뚱한 이야기를 하셨더라도, 제 이야기를 하고 말았을 거예요. 
 
상처받은 사람만이 상처받은 사람의 심정을 알겠죠. 목사님은 이해해주실 것 같았어요. 목사님도 아프셨으니까요.” 
 
탐정놀이는 어리석은 것이었다. 
 
나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점차 희미해졌다. 두 눈에 눈물이 고여, 초점이 흐려졌다. 
 
나는 도무지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 그러면, 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잠시의 공백을 두고, 나는 감정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상담 과정에 충실했다. 
 
상담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나의 미천한 능력과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을 개방하기로 결단했고, 변화의 의지 또한 누구보다 강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진실한 마음이 상담을 더욱 효과적으로 이끌었다. 
 
상처는 완치될 수 없지만,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상처를 돌볼 수 있다는 나의 견해에 그녀는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그녀와의 상담을 종결하는 순간이 생생히 기억난다. 나는 그녀의 삶을 축복했고, 그녀는 밝은 미소를 남겨두고 상담실을 떠났다. 
 
물가에 아이를 내놓는 부모처럼 마음 한편으로 두려웠으나, 그것은 잘못된 감정이었다. 그리스도가 그녀를 지켜주실 것이다. 나는 안심해야 했다. 
 
“예수님은 여기 좁은 상담실 안에 머물지 않으신다. 이곳을 떠나는 그녀와 동행하신다. 상담은 종결되어도, 사랑은 종결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그녀와 함께 하신다.” 
 
이것이 나의 고백이었다.  
 
그녀가 떠나고, 나는 창가에 서서 한참을 머물렀다. 마음속으로 간절한 기도가 흘러나왔다. 나의 진심이 예수님께 전해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녀를 떠나보낸, 저녁이었다. 
 
피곤한 몸으로 집에 들어서자, 다섯 살 난 막내딸이 뛰어나왔다. 
 
“아빠!” 
 
현관 앞에서 마주한, 다섯 살 자리 여자아이. 
 
내 딸과 그녀가 겹쳤다. 
 
그날 그녀는 혼자였다. 그녀가 애처롭게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나를 바라보며,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아이를 끌어 앉았다. 왈칵 눈물이 터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친 곳이 없는지 살폈다. 나는 그대로 아이를 끌어안고, 하염없이 토닥여주며 귓가에 속삭였다. 
 
“많이 무서웠지? 걱정하지 마. 이제, 안전해.” 
 
자신을 끌어안고 엉엉 우는 아빠를, 아이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이도 무언가를 느꼈는지,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아빠, 울지 마. 나 씩씩해.” 
 
울고 있는 나를 달래느라, 아이는 오랜 시간 내 품에 머물렀다.

엄마, 미안해

“모든 것이 제 잘못처럼 느껴져요. 사람들이 직접 말하지 않지만 느낄 수 있어요.” 
 
B가 세 번째 직장을 그만둔 직후였다. 마케팅 회사를 다녔던 그녀는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에 선배와 참여했다. 발표를 맡은  선배의 자료 파일 화면을 넘겨주기로 했다. 그런데 프레젠테이션이 중간 정도 진행되었을 쯤, 동영상 파일이 열리지 않았다. 
 
B는 식은땀을 흘렸다. 선배는 당황하면서도 노련하게 상황에 대처했다. 그가 시간을 끌 동안 동영상이 다시 플레이 되었다. 청중은 실수를 알아채지 못했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 선배는 그녀에게 수고했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3일 후, 선배로부터 다른 업체가 선정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선배가 말했다. 
 
“실망하지 마. 경쟁이 원래 치열해. 이번 주에도 프레젠테이션 두 개 더 있으니까 준비 잘하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회사를 그만뒀다. 세 번째 회사를 그만둔 그녀가 다시 취업하는 건 쉽지 않았다. 면접을 볼 때마다 똑같은 질문을 받았다. 
 
“우리 회사가 네 번째네요. 지난 번 회사는 7개월 동안 다니셨네요. 나머지 두 회사는 1년 정도고,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적성에 맞지 않아 회사를 옮겼다고 말했지만 면접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3개월이 지났다. 그녀는 취업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프리랜서로 살아갈 준비를 했다. 
 
“어릴 때 만화 작가가 되고 싶었거든요. 웹툰을 그리고 있어요. 지금은 시작 단계니까 열심히 노력해야죠.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요. 모아둔 돈이 있으니까 잠깐은 버틸 수 있어요.” 
 
그녀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느낌이 싫었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짓눌리는 것처럼 답답했다. 밀폐된 공간에 머물 수 없어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가야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런 날이면 밤잠을 이룰 수가 없다. 머릿속에서 그날 그 장면이 반복적으로 생각났다. 
 
‘그 사람은 왜 내게 그런 말을 한 걸까? 무슨 뜻일까? 나는 왜 그렇게 대답을 했을까?’
 
머릿속 생각을 멈추기 위해 TV를 보고, 샤워를 해도 소용없었다. 잠시 사라졌던 생각은 금방 다시 찾아왔다. 해 뜨는 게 두려웠다. 암막 커튼으로 햇살을 가리고 알람 소리를 의지해 일어났다. 수면부족으로 몸이 무거워졌다.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가는 횟수가 늘어났다. 한 달에 한 번에서 일주일에 한 번으로, 일주일에 한 번에서 매일 한 번으로. 
 
12년 전 어느 날, 그녀는 엄마에게 짜증을 냈다. 고등학교 입학하고 야간자율학습에 적응하지 못했다. 집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여러 번 말했다. 
 
“시간이 조금 필요하지 않겠니? 이번 여름 방학 때까지만 잘 버텨봐. 그래도 힘들면, 엄마가 선생님께 말해줄게.” 
 
다음 날,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저녁 먹고 책상 앞에 앉은 그녀는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선생님께 배가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엄마에게 전화했다. 가방을 챙겨 교실 밖으로 나가 엄마를 기다렸다. 30분이 지나도 엄마가 오지 않았다. 다시 30분이 흘렀다. 벨소리가 들렸다.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왜 안 와? 빨리 와.” 
 
전화기 너머로 아빠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엄마가 운전했던 차는 음주운전 차량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날 전화하지 않았다면…. 그날 그냥 교실에 있었다면…. 엄마는 죽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울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끊었던 술을 다시 입에 대면서 간경화가 진행되고, 아버지가 성급하게 재혼해서 새엄마와 관계가 엉망이 된 것. 모두 자기 탓이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되면 혀가 꼬부라져 하는 말이 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네가 그런 말 할 때마다 아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그날 내가 갔어야 했어. 엄마가 아니라 아빠가 운전을 했어야 했다고…. 아빠 잘못이야….” 
 
그녀는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아니에요. 아빠, 제 잘못이에요.’ 
 
그녀 아버지, 친척, 친구, 모두가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비난 받을 사람이 있다면 그날 술을 먹고 운전한 그 자식이야. 그 자식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그녀의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애써 위로하려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녀는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자신을 숨겼다. 
 
***
 
사람이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하면, 그 사건 이전을 기억하지 못할 수 있다. 충격과 함께 기억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12년 전, 사고가 일어난 이후 그녀는 엄마를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의 창고 후미진 곳에 엄마에 대한 기억을 가두고 문을 걸어 잠갔다. 
 
엄마를 기억하면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의도적으로 기억하지 않는 편을 택했다. 엄마가 그리워지면, 그녀는 사건이 일어난 그날 밤 고통스런 순간으로 되돌아간다. 내면에 구간반복 기능이 켜진다. 고통스러운 장면을 무한 반복한다. 누군가 구간반복 기능을 꺼준다면, 엄마에 대한 소중한 기억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 기능을 끌 수 있는 사람은 그녀 자신뿐이다.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다. 엄마에 대한 기억을 되찾으려면, 걸어 잠근 문을 열어야 한다. 고통스런 기억을 꺼내는 것이다. 그곳에 자유가 있다.  
 
“제가 다섯 살쯤인 것 같아요. 엄마가 동화책을 읽어주는 장면이 생각나요. 엄마 무릎에 앉으면 엄마는 두 팔을 둥그런 원으로 만들어 그 안에 저를 담았죠. 두 손으로 책을 들고 있었고요. 엄마가 만든 둥그런 원이 좋았어요. 아늑하고….” 
 
다섯 살 꼬마로 되돌아간 그녀는 엄마 품에 안겨 말했다. 
 
“엄마, 미안해.” 
 
“뭐가?” 엄마가 말했다. 
 
“내가 그날 전화만 하지 않았어도…. 나 때문에 많이 아팠지?” 
 
“아니야, 엄마가 미안해. 같이 있어주지 못해서…. 우리 딸 엄마 없이 잘 할 수 있지?”
 
“응….”
 
현실의 그녀는 오열했다. 
 
사건을 바꿀 수는 없지만,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꿀 수 있다. 그날의 기억을 지울 수 없지만, 그날의 사건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날 그 사건은 그녀 잘못이 아니다. 아버지 잘못 또한 아니다.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고, 아무도 대비할 수 없었다. 그 일이 일어났고, 그 일은 막을 수 없었다. 이것이 진실이다. 
 
진실을 받아드리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설득으로 외부에서 주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내면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일이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두려움과 마주할 용기이다. 현실에서 그녀는 두려운 상황과 마주할 것이다. 사랑, 일,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그녀의 구간반복 기능이 켜진다. 
 
“모든 것이 다 내 잘못이야.” 
 
그때마다, 그녀는 리모컨 버튼을 누르듯, 자기 비난의 목소리를 꺼야 한다.  
 
“전부 내 잘못은 아니지. 어쩔 수 없는 일도 있잖아.”   
 
사람마다 자기 비난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하고 자신에게는 무자비한 목소리. 우리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산다. 목소리를 만드는 것도 자신이고, 고통받는 것도 자신이다. 반대로, 목소리를 거부하는 것도 자신이다. 왜 그 목소리가 들리는지 아무도 모른다. 선택만이 남았다. 듣느냐, 마느냐.

당신은 그 소년을 알고 있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는데,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네요. 돈, 가정, 친구, 다 잃었어요….”  
 
E는 서른아홉 살 여자다. 6년의 결혼 생활을 끝내고 혼자된 지 3년 지났다. 남편은 교회 목사님 소개로 만났다. 목사님은 남편이 진지하고 성실한 남자라고 하셨다. 첫눈에 호감이 느껴지는 남자는 아니었지만, 목사님이 인정한 사람이니 한두 번 만나보자고 생각했다. 따뜻한 성품이 좋았다. 8개월 만나고, 결혼했다. 
 
신혼집은 다세대 주택에서 시작했다. 4층 건물 맨 꼭대기 주인세대에 시어머니가 살고, 그녀와 남편은 2층에서 살았다. 결혼 일주일 만에 남편과 다퉜다. 그가 급여를 아내에게 갖다 주지 않았다. 생활비는 여자가 관리해야 한다며 남편을 설득했다. 그러자 그는 “그런 게 어디 있냐? 돈 버는 사람이 관리하자”라고 말했다. 아내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물러섰다. 
 
두 달 뒤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편은 결혼 전에 대출을 받아 주식에 돈을 투자했다가 2억 정도 빚을 지고 있었다. 그래서 급여가 모두 대출금 상환으로 쓰였다. 기약 없는 기간 동안 수입 없이 살아야 했다. 
 
시어머니는 “알고 있었고, 부부가 함께 짊어져야 할 짐이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분노했다. 남편과 시어머니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했다. 
 
이혼을 생각했지만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임신 4개월이었다. 남편은 집안일을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저녁마다 침대에 누워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속이 터졌다. 남편에게 화를 내고 잔소리를 했다. 그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아내 얼굴에 베개를 던지며 싸늘하게 말했다. 
 
“입 닥쳐.” 
 
이후로 던지는 물건이 달라졌다. 베개에서 시계로, 시계에서 컵으로. 컵이 깨지던 날,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남편은 울고 있는 그녀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아내는 휴대폰 게임을 그만하라고 말했다. 남편은 무시했다. 남편이 게임으로 100만 원 넘는 돈을 썼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녀는 그동안 쌓였던 불만을 터트렸다. 
 
남편이 소리 지르며 욕을 했다. 아내는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밤새도록 말다툼을 했다. 신경이 예민해졌다. 배가 아팠다. 두려움에 싸인 아내는 의식을 잃었다. 아기는 유산되었다. 시어머니는 주변 사람들에게 며느리가 몸을 돌보지 않고 무리해서  유산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를 불러 말했다. 
 
“내가 그 놈을 혼내줄 테니까, 이번 한 번만 눈 감고 넘어가자.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야.” 
 
그러고 5만원 권 한 뭉치를 그녀의 손에 쥐어줬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돈을 한 장씩 찢기 시작했다. 눈물이 흘렀다. 돈을 갈기갈기 다 찢을 때까지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돈도 눈물도 말없이 땅에 떨어졌다. 
 
그녀는 이혼했다. 
 
어린 시절, 그녀는 아버지에게 맞고 자랐다. 술 취한 아버지는 매일 엄마를 때렸다. 참다못한 엄마는 집을 나갔다. 혼자 남겨진 그녀는 아버지의 주정과 매질을 당해야 했다. 
 
몇 달 뒤, 엄마가 집에 돌아왔다. 아빠가 없는 틈에 짐을 가지러 온 것이었다.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다. 엄마에게 매달리다시피 하여 같이 문을 나서는데 처음 보는 아저씨가 서 있었다. 엄마는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그 아저씨와 가버렸다. 
 
4년이 지났다. 견디다 못해 엄마를 찾아갔다. 그리고 예전에 만났던 아저씨를 “아빠”라고 부르며 살았다. 너무나 그리웠던 엄마였다. 하지만 헤어져 산 시간이 길어서 인지 아니면 상처가 많아서 인지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엄마는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뭘 물어봐도 짧게 대답했다. 그녀에게 소리 없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 때문에 난처해졌어. 불편해졌다고.” 
 
아저씨 표정도 달라졌다. 그 집에 오래 살 수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나왔다. 
 
“제 안에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있어요. 외로움에 미쳐버릴 것 같았어요. 매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세요? 남편에게 전화해서 ‘욕하지 않고, 돈 관리 내가 하고, 게임 안 하고, 빚 갚기로 약속하면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어’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언젠가 전화를 걸지도 몰라요. 남편은 바뀌지 않을 거예요. 제가 너무 외로워서 그래요.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까.” 
 
외로움이 찾아오면, 그녀는 잠을 잔다. 그러면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밤과 낮이 바뀐 채 3년이 지났다. 깨어있는 시간은 TV를 본다. 외로움을 느끼고 싶지 않아 선택한 방법이다. 자신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과 전쟁을 치르고 있다. 조용하지만 치열하다. 그녀는 승리한 적이 없다. 
 
외로움은 갑자기 찾아와서 그녀를 휘젓는다. TV보다가 눈물이 흐르고, 잠에서 깨면 슬픔이 밀려온다. 휴대폰에 전남편의 번호를 누르고, 통화 버튼을 바라본다. 번호를 다시 지우고 입력하는 일을 반복한다. 휴대폰을 소파에 던지고, 수면제를 먹고 잠든다.    
 
***
 
외로움은 견디기 힘든 감정이다. 외로움이 속삭이는 말은 무섭다. 
 
‘넌 혼자야. 아무도 없어.’ 
 
거짓말이지만 진실처럼 들린다. 거짓을 거부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지만 외로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노력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거짓이 진실이 된다. 전기고문 의자에 꽁꽁 묶인 채 저항하지 않고 고통을 받아들인다. 외로움은 사람을 서서히 파괴한다.    
 
사람은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외로움과 싸워 이긴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누구나 외롭다. 외로움은 그림자처럼 항상 따라다닌다. 그것과 싸우면 질 것이 뻔하다. 의미 없는 싸움이다. 외로움이 삶을 파괴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택해야 한다. 
 
외로움과 싸우지 않고 
외로움을 돌보는 것이다. 
 
외로움을 돌보려면 그것에 대해 알아야 한다. 외로움을 “꼬마”라고 부르겠다. 언제 꼬마가 활동하는지 알아야 한다. 특정한 상황이나 분위기나 시기에 꼬마가 활동한다면 어디서 나타는지 따라가 본다. 쥐구멍에 갇힌 쥐를 찾는 것처럼 자세히 살핀다. 
 
그다음에 꼬마가 활동하기 시작하면 자신에게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확인한다. 꼬마가 나타나면 자신이 하는 행동을 관찰한다. 반응은 다양하다. 자는 사람, 먹는 사람, 우는 사람, 화내는 사람. 패턴을 발견할 때까지 유심히 관찰한다. 
 
외로움에 이름을 붙인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으로부터 감정을 분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감정을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착각하는 것이다. 감정은 감정일 뿐이지 자신이 아니다. 감정과 자신을 분리하지 않으면 감정을 변화시킬 수 없다. 
 
외로움이 느껴지면 절망하지 말고, 차분하게 말한다. 
 
“또 시작이군.” 
 
만약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난다. 감정이 분리된 사람은 감정을 돌볼 수 있다. 
 
상상해 보자. 당신은 상담자다. 꼬마는 상담실에 찾아온 내담자다. 꼬마는 통제불능이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 사랑받지 못했다. 관심 받고 싶어 과도한 행동을 한다. 작은 말 한 마디에 상처받고, 우울해진다. 다들 기분 좋아서 웃고 있는데, 뭐 하나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물건을 집어던지고 난리다. 설득하고 달래도 소용없다. 
 
꼬마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미안하지만 변화되지 않는다. 꼬마는 피터팬처럼 영원히 나이 먹지 않는다. 철들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그 꼬마를 돌보는 게 의미가 있을까? 물론이다. 꼬마를 대하는 자기 자신이 변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는 꼬마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대하는 자신에게 일어난다. 
 
감정을 바꿀 수 없지만
감정에 대한 반응을 바꿀 수 있다. 
 
나는 내 안에 있는 꼬마를 “소년”이라고 부른다. 소년은 다섯 살 정도 된다. 발가벗겨졌다. 온몸이 멍 자국이다. 파랗고 빨갛다. 파란 자국은 생긴 지 오랜 된 것이고, 빨간 자국은 방금 생긴 것이다. 머리는 지저분하고, 얼굴은 눈물자국, 땟자국으로 얼룩졌다. 
 
소년은 불안해 보인다. 시선을 어디다 둘지 몰라 눈알을 이리저리 굴린다. 어깨는 움츠러들어 있고, 두 손은 덜덜 떨린다. 아무리 설득하고 달래고 돌봐주고 씻겨줘도 항상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있다. 소년은 내가 원치 않을 때 갑자기 나타나 말을 건다. 
 
‘못 하겠어…. 두려워…. 안 하면 안 돼? 그만하자. 뭘 위해서 그래.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사람들이 알아줄 거라고 생각해? 의미 없는 일이야. 소용없는 일이라고. 현실은 달라. 너는 실패할 거야. 망할 거라고. 멈춰. 이대로 있어. 하지 마. 그만해!’
 
나는 소년과 오랫동안 함께 지냈다. 익숙할 법도 한데, 쉽지가 않다. 그가 입을 열면 움찔한다. 때로는 깊은 절망에 빠진다. 마음을 가다듬고 말한다. 
 
‘알아. 네가 얼마나 두려운지…. 나 만나서 고생이 많구나. 그래도 우리 가야 해. 무서워도 같이 가자. 내가 도와줄게. 힘들어도 조금만 참자.’
 
나는 그 소년을 따뜻하게 안아준다. 
 
나는 당신 마음 속 소년이 누군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그 소년을 알고 있다. 
 
그녀의 마음 속에 소녀가 있다. 길가에 버려진 소녀. 지나가는 사람은 많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 갖지 않는다. 때리는 아빠가 무서워 집을 도망쳐 나온 소녀. 엄마를 찾아갔지만 커다란 대문은 잠겨있다. 소녀는 발걸음을 돌려 길을 걷는다. 길에서 날리는 먼지가 머리에 뽀얗게 앉는다. 
 
두 눈에 눈곱이 구슬처럼 박혀있고, 눈물과 콧물자국이 얼굴에 굽이굽이 골목을 냈다. 비가 와서 옷이 젖고, 해가 떠서 다시 마르고. 옷은 종이처럼 너덜거린다. 신발은 닳아서 뒤꿈치가 땅에 닿는다. 소녀는 갈 곳이 없다. 
 
걷다 지친 소녀는 길가에 앉는다. 지나가는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한 사람이 다가왔다. 손가락은 두툼하고 굳은살이 박였다. 소매 밖으로 팔을 타고 오르는 용의 꼬리가 보인다. 짧은 머리카락은 송곳처럼 삐쭉 서있다. 껌을 씹으면서 소녀에게 말한다. 
 
“나랑 가자. 좋은 데 알려줄게.” 
 
소녀는 무섭다. 가면 안 된다. 그러나 소녀는 남자를 따라간다. 길가에 버려진 것보다 나으니까. 누군가 뒤에서 소리친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남자에게서 소녀를 빼앗는다. 남자는 놀란다. 눈치를 보다가 멀리 도망쳐 버린다. 그녀가 소녀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내가 널 돌봐줄 거야. 넌 버려진 아이가 아니야. 그렇게 아무나 따라다녀서는 안 돼. 사랑을 구걸해서는 안 된다고. 이제 외롭지 않을 거야. 같이 있을 거니까.” 
 
소녀를 찾아 나선 사람은 바로 그녀, 
그녀 자신이었다. 
 
외로움은 그녀 자신이 아니다. 외로움은 그녀 감정이다. 그녀는 소녀를 돌보기 시작했다. 그녀가 한 눈 판 사이에 소녀가 사라질지 모른다. 누군가 내민 손을 잡고 어디론가 가버릴 것이다. 소녀는 아무나 따라간다. 소녀를 해칠지 모르는 위험한 사람이라도. 소녀와 함께 하는 삶이 익숙해지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소녀는 변하지 않으니까. 
 
상처와 싸우는 사람은 고통 받지만,    
상처를 돌보는 사람은 치유된다.

분명히 보았다

“야, 너 서울에서 전학 왔다며?” 
 
“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나는 대답했다. 
 
명식이 형은 마을의 전설이었다. 서울에서 이사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명식이 형의 클럽에 가입을 했다. 
 
명식이 형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명식이 형이 데리고 다니는 또래 역시 전부 초등학생이었다.
 
그렇다면, 명식이 형은 중학생이었을까? 고등학생이었을까? 아니다. 
 
어른이었다. 
 
흐릿한 기억을 추적해보건데, 적어도 이십 대 중후반이었을 것이다. 다 큰 어른이 동네 꼬마들 사이에서 골목대장을 하고 있으니, 중고등학교 형들도, 클럽에 소속된 아이들을 섣불리 건드릴 수가 없었다. 
 
한 번은 우리 동네 규칙을 아무것도 모르는 다른 동네 중학생이, 명식이 형이 돌봐주는 애 하나를 잘못 건드렸다 봉변을 당했다. 
 
명식이 형은 중학생에게 맞았다는 아이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다른 동네까지 직접 찾아갔다. 클럽 아이를 때리고 도망간, 중학생을 기어코 찾아내서 사정없이 패줬다. 부모가 달려 나와 욕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뜯어말려도 소용 없었다. 
 
말리는 부모를 밀쳐내고, 그 집 아들을 두들겨 팰 정도니 명식이 형이 나타났다고 하면, 동네 어른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명식이 형은 동네 꼬마들을 모아놓고 틈만 나면, 강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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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강해야 돼, 알아? 약하잖아? 그거 등신이야, 등신. 남자가 힘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야.” 
 
한심한 듯이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주먹을 쥐는 방법을 제대로 가르쳐 준다며,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자, 먼저 손바닥을 쭉 펴봐. 그리고, 손가락 네 개를 반으로 접어. 그다음, 손바닥 안의 살을 움켜쥔다고 생각하고, 주먹을 꽉 쥐는 거야. 그럼, 엄지손가락이 자연스럽게 딸려오거든. 주먹 안에 살이 조금 잡혀야 힘이 꽉 들어가는 거야. 그다음에는 이걸로, 그냥.”
 
명식이 형은 이론만으로는 안되겠다는 듯이 아이들을 비슷한 체형으로 둘씩 짝을 지었다.  
 
“야, 이제부터 내 말 잘 들어. 오늘부터 서바이벌이야. 이긴 놈만 살아남는다. 지는 놈은 이제부터 우리 클럽 아니야. 바로 탈락이다.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죽도록 싸워. 알겠지?” 
 
서로 눈치를 보고 서성거리니까, 명식이 형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미치겠네. 야, 공과 사를 구분 못해? 지금은 친구가 아니라, 적이라고. 미친 듯이 싸워라. 싸우는 척만 하면, 나한테 죽는다.” 
 
아이들의 반응은 대략 둘로 나뉘었다. 
 
“너 죽었어”,라고 기세등등하게 상대를 바라보는 아이들. 그리고, 잔뜩 주눅이 들어 겁을 먹고,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만 같은 아이들.
 
승부는 금세 갈렸다. 
 
명식이 형은 패배자들을 한 줄로 세웠다. 그리고, 말했다. 
 
“여기 이놈들은 패배자야. 우리 동네에 같이 살아도, 더 이상 우리 클럽은 아닌 거지. 야, 한 줄로 나와서 이 새끼들 신발에 침 뱉어.” 
 
나는 한 살 많은 형의 신발에 침을 뱉어야 했다. 뱉고 싶지 않았다. 그 형은 이미 울고 있었다. 그렇게, 비참한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엉거주춤 망설였다. 
 
명식이 형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뭔가 번쩍했고, 나는 잠깐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코밑으로 진한 쑥 냄새가 났다. 쑥을 빻아 둥그렇게 말아서 콧구멍에 쑤셔 박은 것이다. 그러면, 피가 멈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어린 마음에 서러워서 눈물을 흘렸다. 명식이 형은 그것마저 못마땅했는지, 내 볼을 두 손가락으로 세게 움켜쥐고 사정없이 흔들면서 말했다. 
 
“야, 울어? 남자 새끼가 우냐고? 죽고 싶지 않으면, 그만 울어라.” 
 
살아남은 아이들은 다음 날부터 싸움 기술을 배웠다. 애들끼리 마주 서서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학교 마치고 집에 오면 학원 가듯 명식이 형의 클럽으로 가야 했다. 그것이 하루 일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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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을 가르치는 시간을 제외하면, 명식이 형은 친구처럼 다정했다. 
 
“우리 삼촌이 비디오 가게 하거든. 언제든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구해다 줄게.”
 
명식이 형의 집에 놀러 가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수 십 개의 비디오테이프였다. 책상 위에 책 대신 비디오테이프가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제목은 다양했지만, 장르는 단순했다. 무술 영화 아니면 액션 영화였다. 
 
명식이 형의 집에서 영화를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영화를 보다가 배가 고프면, 명식이 형이 끓여준 라면을 먹었다. 그리고 또 영화를 봤다. 
 
화면이 유난히 밝게 빛나는 것 같으면, 바깥이 어두워졌다는 뜻이었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삼삼오오 집으로 흩어졌다. 
 
나는 영화를 좋아했다. 영화를 계속 보기 위해서라도 명식이 형의 클럽에 계속 남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낯선 남자가 찾아왔다.  
 
“여기 혹시 왕명식 씨 댁이 어딘가요?” 
 
마을 입구에서부터 보이는 십자가를 보고, 교회다 싶었는지, 낯선 남자는 우리 집을 찾아와 길을 물었다.
 
아버지는 손가락을 이리저리 사용해 명식이 형의 집을 알려줬다. 명식이 형은 집에 없었다. 나 역시 명식이 형을 따라다니느라 낯선 남자가 우리 집에 찾아와 아버지에게 길을 물었는지 알지 못했다. 
 
낯선 남자는 명식이 형의 집 앞에서 명식이 형을 한참 동안 기다렸다. 
 
동네 꼬마들을 거느리고 자기 집으로 들어가려던 명식이 형은, 멀리서 자기 집 앞에 서 있는 낯선 남자를 발견했다. 당황한 티도 내지 않고, 곧바로 뒤돌아서서, 꼬마들에게 말했다. 
 
“야, 오늘은 뱀 잡으러 가자. 지금 산딸기 철이니까, 산딸기도 먹고 하면 되겠네. 뒤로 돌아!” 
 
저녁쯤해서,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오늘 읍내 비디오 가게 사장님이 우리 집에 와서, 명식이 집을 묻더라고. 명식이가 빌리고 안 갖다 준 비디오테이프가 수 십 개라네. 아무리 전화를 해도 안 받아서, 집까지 찾아온 거야. 연체료가 수 십만 원인데, 그놈이 그 돈을 어디서 구한다냐.” 
 
나는 명식이 형에게 들은 말이 있어서, 아버지의 말이 끝나자마자 명식이 형의 편을 들었다. 
 
“아니야, 아빠. 명식이 형이 그랬어. 삼촌이 비디오 가게를 한다고. 거기서 가지고 온 거야.” 
 
아버지는 으흠하고 팔짱을 끼시더니, 타이르듯 내게 말했다. 
 
“요즘 너, 명식이네 너무 자주 가는 것 같아. 거기서 무슨 일이 있어? 동네 애들도 그 집에서 살다시피 하던데. 아빠가 걱정 안 해도 되는 거지?” 
 
나는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해서라도, 명식이 형의 집에 놀러 가고 싶었다.  
 
“아니야. 명식이 형이 숙제도 도와주고 그래. 모르는 문제도 알려주고. 그러니까, 애들이 좋아서 가는 거지. 나도 그렇고.” 
 
아버지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셨다가, “알겠다”라고 짧게 말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명식이 형이 한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온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글을 모르는 명식이 형이, 동네 아이들의 숙제를 가르쳐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내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순간적으로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아버지는 놀라셨을 것이고, 그 이유가 궁금하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 몰래 명식이 형을 찾아가셨고, 명식이 형을 차에 태우고 직접 운전을 해서 비디오테이프를 가게에 돌려주었다. 사장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밀린 연체료를 최대한 줄여서 명식이 형 대신 연체료를 해결해주었다. 
 
아버지는 그 모든 사실을 당시에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명식이 형이 마을을 떠나고 나서야, 어머니를 통해 전해 들은 것이다. 
 
나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명식이 형을 따랐고, 명식이 형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이들을 거느렸다. 
 
적어도, 그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야, 우리 오늘 한댁 개울에 물고기 잡으러 가자. 형이 모래무지 잡아서, 기름에 바로 튀겨줄게. 라면도 사가서 같이 끓여먹자.” 
 
나를 비롯한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개울을 따라 걷는데, 그 발걸음이 얼마나 신나던지, 태평양 너머의 디즈니랜드를 가는듯했다. 
 
“물속을 걸어 다닐 때, 조심해야 돼. 포클레인이 모래 퍼간다고 깊이 파놓은 곳이 있어. 발 잘 못 디뎌서 빠지면 큰일 난다. 내 눈앞에서만 놀아.”
 
아이들은 흥분한 상태였다. 앞뒤 안 가리고 물에 뛰어들어 정신없이 물장구를 쳤다. 
 
명식이 형이 물속에서 그물을 들고, 앞으로 걸어나가면, 아이들은 명식이 형의 뒤를 졸졸 따랐다. 물고기가 놀라 도망치지 않도록 살살 걸으니, 그 장면이 마치 비밀작전 같았다. 
 
물고기가 꽤 많이 잡혔다. 명식이 형이 실력을 발휘했다. 버너 두 개를 준비해서, 한쪽에는 기름을 올리고, 다른 한쪽에는 물을 올렸다. 약속대로 물고기를 튀기고, 라면을 끓여줄 생각이었다. 
 
물고기를 산 채로 튀기는 것을 처음 봤다. 명식이 형은 손가락 길이만한 크기의 모래무지를 들어 올리더니, 순식 간에 내장을 발라냈다. 머리 부분을 잡고, 몸통을 걸쭉한 튀김 반죽에 담갔다 빼서, 바로 달궈진 기름 냄비에 넣었다. 젓가락으로 머리 부분을 잡고 있어서, 튀김옷을 입은 몸통 부분만 아삭하게 튀겨졌다. 
 
어찌나 고소하고 맛있던지, 둥지에서 어미 새를 기다리는 새끼 새 마냥, 아이들이 입을 벌리고 줄을 서서 명식이 형이 모래무지를 입안에 떨궈주기만 기다렸다. 
 
옆 냄비에서 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명식이 형은 파를 쏭쏭 썰어 넣고 라면을 맛있게 끓였다. 아이들은 각자 나무젓가락을 들고, 라면에 달려들었다. 
 
환상적인 경험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다다다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길가를 지나가는 엔진 소리가 아니라, 이곳을 향해 긴박하게 다가오는 거친 소리였다. 
 
두 명의 남자 어른이었다. 둘 다 민소매티를 입었는데, 두 사람의 어깨에 비슷한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뒤에 타고 있던 남자가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어이, 명식이. 너 여기서 뭐 하냐? 동네 꼬마들 데려다가 또 대장 놀이하냐?” 
 
나와 함께 있던 모든 아이들은 기대감에 설레었다. 드디어 명식이 형의 싸움 실력을 직접 보게 된 것이다. 시원하게 한 방 날려주기를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상황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명식이 형은 잔뜩 얼어붙은 채, 말까지 더듬었다. 
 
“아.. 니야. 그게… 아니라….”
 
남자는 껄렁껄렁 걸어와서 물고기를 담아놓은 플라스틱 바구니를 발로 차서 뒤집어엎었다. 
 
모래 위에 엎어진 바구니는 구토를 하듯, 물과 물고기를 쏟아냈다. 모래사장은 기다렸다는 듯, 순식 간에 물을 빨아들였다. 마른 모래로 범벅이 된 물고기들은 금방이라도 호흡이 끊어질 것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남자는 물고기를 찌익 밟고, 명식이 형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협박하듯 말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여기서 이러고 노니까 좋냐? 너 어제 왜 술 먹다 그냥 갔어? 내가 분명히 말했지? 술값 내고 가라고.”
 
명식이 형은 천천히 뒷걸음질 치면서 말했다. 
 
“그게 아니라, 매번 내가 돈을 내니까…. 나도 돈이 없어서….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 애들이 보고 있으니까 그만하자. 부탁이야.” 
 
남자는 우리 쪽을 바라보고, 알 수 없는 미소를 띠더니, 명식이 형의 뺨을 후려쳤다. 
 
“그만하기는 뭘 그만해. 콱 그냥 죽여버릴까 보다. 야, 오토바이에서 가위 꺼내. 이 새끼 이거, 정신을 차리게 해줘야 돼.”  
 
오토바이에 걸 터 앉아, 그 장면을 지켜보던 남자가 오토바이에서 가위를 꺼내 가져왔다. 그리고, 우리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른 말 잘 들어야 돼. 말 안 들으면 이렇게 된다, 알겠지?” 
 
우리는 얼어붙은 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구라도 먼저 울음을 터뜨리면, 모두가 함께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두 남자는 명식이 형을 힘으로 짓눌렀다. 주먹으로 얼굴을 사정없이 내려치고, 꿇어 앉혔다. 
 
가위를 가져온 남자가 명식이 형의 뒤에서 팔로 목을 조였다. 가위를 받아든 남자는 명식이 형을 마주 보고 가위로 머리카락을 뜯어내듯 닥치는 대로 잘라냈다. 
 
명식이 형의 얼굴이 떨어져 내리는 머리카락으로 뒤덮였다. 그 순간 나는, 명식이 형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분명히 보았다. 
 
그는 울고 있었다. 잘린 머리카락 사이로 명식이 형이 애처롭게 울고 있는 모습을, 나는 분명히 보았다. 
 
“이 새끼 이거 꼴좋다. 다음부터 정신 똑바로 차려라. 다음에는 죽여버린다, 진짜.” 
 
남자는 바닥에 가래침을 뱉고, 짜증 난다는 듯이 손등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털어냈다. 다시 오토바이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었다. 
 
명식이 형은 무릎을 꿇고 엎어져서, 머리를 가리고 웅크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희미해져서 귀에 들리지 않게 되었다. 오토바이가 사라지고 나서도, 명식이 형은 웅크린 채 그대로였다. 
 
누구 하나 명식이 형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버너 위에 라면은 냄비에 꺼멓게 달라붙어서, 코끝을 찌르는 쓴 냄새를 풍겼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명식이 형에게 물었다.
 
“형, 괜찮아?”  
 
명식이 형은 움직이지 않았다. 웅크린 채로 목소리만 들렸다. 
 
“다… 꺼져. 지금부터 셋 셀 동안 안 꺼지면, 전부 죽여버린다. 하나. 둘….” 
 
모래사장에 폭탄이 떨어진 것 같았다. 아이들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고, 소리를 지르며 사방팔방 흩어졌다. 
 
나는 울음이 터졌다. 셋을 세고 나면, 명식이 형이 정말로 우리를 죽여버릴 것 같았다. 나는 두려움에 압도되었다. 
 
아이들 모두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엉엉 울면서 각자 살아보자고 죽을 힘을 다해 뛰어서 도망쳤다. 
 
그렇게, 명식이 형의 클럽은 하루아침에 공중분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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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 명식이 형을 마을에서 본 사람은 없었다. 명식이 형이 사라진 마을은 적막했다.  
 
상처는 깊었다. 아이들 모두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식사 자리에서 부모님이 명식이 형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지가 열무김치를 집어 들면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명식이가 사라졌다고 마을 사람들이 난리야. 이 녀석, 도대체 어디로 간 건지, 도통 소식을 모르겠네.” 
 
명식이가 마을을 떠난 것이 어른들 사이에서도 뉴스거리였다. 명식이 형은 마을에 남은 몇 안 되는 젊은 일꾼이었다. 
 
명식이 형은 하루 일당을 받으면, 두세 명의 장정이 해야 할 일을 혼자서 너끈히 해냈다. 농사일이 바빠질 무렵에, 명식이 형이 한 마디 말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은 어른들에게 이만저만 아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그러게. 명식이 걔 정말 불쌍한 앤데. 명식이 어릴 때, 아빠는 사고로 죽고, 엄마는 신 내려서 무당 한다고 명식이 버리고 떠났잖아. 동네 사람들이 명식이를 자식처럼 키웠는데, 갑자기 사라지니까 자식을 잃은 것 같지.” 
 
갑자기 눈물이 났다. 밥을 먹다가 내가 우니까, 부모님이 놀랐다. 당황한 아버지가 아버지가 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 가만히 나를 쳐다보고, 차분하게 말했다. 
 
“너도 명식이가 떠나서 허전하겠다.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그 녀석 다시 올 거니까.” 
 
나는 팔 등으로 눈물을 닦아내면서, 말했다. 
 
“그 형 안 와. 절대로 안 올 거야. 동네 애들도 다 알아. 그래서, 못 온다고.” 
 
부모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나는 밥이 가슴에 얹혀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밖으로 나가서, 골목길을 내달렸다. 명식이 형의 집 앞에 섰다. 
 
마당에서 주먹만 한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명식이 형의 집 대문에 돌멩이를 세차게 내던졌다. 
 
빈 집이었다.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문이 부서져라 흔들었다. 손과 발로 사정없이 문을 때렸다. 분하고 슬퍼서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차가운 목도리

연수는 멈칫했다. 
 
신중하게 내 표정을 살폈다. 나의 반응이 궁금한 것 같았다. 물 밖에서 물속의 깊이를 알 수 없듯, 연수는 내 속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나는 온화한 표정으로 기다렸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말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였어요. 학원 기사 아저씨가 있었거든요. 그 아저씨에게 순결을 잃었어요.” 
 
내가 멈칫하는 순간, 연수는 마치 내가 질문이라도 했다는 듯이 말했다. 
 
“왜 신고하지 않았냐고요? 그때 당시에는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주 잠시 동안이지만,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거든요.” 
 
학원 운행노선 끝자락에 연수의 집이 있었다. 학원차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집 앞에 머물렀다. 학원차가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집 안의 모든 불은 이미 꺼진 후였다. 그녀가 오기 전에 모두가 잠든 것이다. 
 
연수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기사 아저씨와 대화를 나눴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아무도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은 덕분에, 아저씨는 그녀의 대화 상대가 될 수 있었다. 대화는 점점 깊어졌다. 연수는 학원 아저씨와 단둘이 집에 가는 시간이 기다려졌다. 
 
아저씨는 연수의 생일을 기억했다. 텅 빈 차 안에서 그녀에게 생일 선물을 건넸다. 목도리였다. 아저씨는 연수에게 목도리를 둘러주고, 볼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연수를 끌어안았다.
 
한 시간이나 늦게 학원차가 집 앞에 도착했다. 아무도 깨어있지 않았다. 집에 도착한 연수를 맞이한 것은, 환하게 빛나는 생일 케이크이 아니었다. 적막한 어둠뿐이었다. 생일 저녁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연수의 순결을 목도리와 맞바꿨다는 사실을 가족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연수는 엄마에게 학원을 옮겨달라고 말했다. 엄마는 딸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지금 학원을 옮겨달라고?” 
 
연수는 엄마의 말 한마디에 감정이 상했다. “됐으니까, 알아서 하겠다”라고 말했다. 
 
연수는 더 이상 학원에 가지 않았다. 학교에서 가까운 독서실에 다녔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그녀는 목도리를 두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목도리로 목을 감싸자 온기가 느껴졌다. 
 
  연수는 목도리를 버리지 않았다.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10년이 지났지만, 연수는 그때의 사건과 감정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밤 제가 엄청난 실수를 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되돌릴 수 없어 슬펐고요. 집에 와서 침대에 누워 많이 울었어요. 내가 이런 일을 당했다는 사실에 슬펐고, 그런 일을 당했는데 싫지만은 않았다는 것이 슬펐어요. 저는 많이 외로웠거든요.” 
 
기사 아저씨를 다시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학원을 끊은 이유였다. 그러나, 사랑받은 기억은 소중했다. 아저씨의 따뜻한 표정, 친절한 말투가 그리웠다. 
 
목도리를 두를 때마다, 그녀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연수는 끔찍한 기억을 뒤로하고, 좋은 기억만을 간직했던 것이다. 
 
그녀는 10년이나 지나버린 일을 들춰내기 위해, 나를 찾아온 것일까? 
 
아니었다. 
 
연수는 엄연히 현실의 문제로 고통받았다. 
 
연수의 남자가 떠났다. 어떻게든 다시 만나고 싶은 것이 그녀의 바람이다. 
 
3개월이 지났다. 연락이 닿지 않았다. 전화는 물론이고 문자 역시 무시당했다. 그럴수록 그녀는 고통받았다.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다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과 말투에서 그녀의 상실감이 전해졌다. 그녀의 교제 기간은 6개월에 불과했다. 
 
4살 연상의 남자, 제준을 크리스천 데이팅 앱으로 만났다. 눈에 띄는 외모였다. 크리스천으로 진지하게 살아가려는 그에게 끌렸다. 지금까지 만나왔던 남자들과는 ‘뭔가 다르겠지’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만나온 남자들 중에 크리스천은 없었다.  
 
그동안 연수는 자신을 좋아해 주는 남자들과 사귀었다. “좋아한다, 사귀자”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설레었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보다, 나를 사랑해주는 남자와 사귀자.” 그녀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제준은 신중한 남자였다. 사귀자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우리 한 번 사귀어보면 어떨까요?” 
 
연수가 먼저 물었다.
 
그녀가 먼저 남자에게 사귀자고 말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가 대답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제가 헤어진 지 얼마 안 되었어요. 연수 씨를 정말로 좋아하는 건지, 외로움을 달래려고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연수 씨를 좋아한다는 확신이 들면, 제가 먼저 말할게요.”
 
그것으로 충분했다. 연수에게 제준은 사려 깊은 남자였다. 그날 이후 연수는 새벽예배를 다니면서, 제준과의 만남을 위해 기도했다. 그를 좋아하는 감정만큼 그녀의 기도 역시 간절했다. 
 
크리스마스 이브, 제준은 연수와 함께 했다. 그가 사귀자고 말했을 때, 연수는 눈물을 흘렸다. 외로움으로 고통받았던 아픔을 한꺼번에 보상받는 듯했다. 
 
두 사람은 그날 밤 함께 했다. 연수는 죄책감을 느꼈지만, 곧 결혼할 사이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연수에게 제준은 완벽한 남자였다. 하루하루가 행복할 뿐이었다. 자신 안의 상처를 온전히 이해줄 사람이라고 믿었기에, 언젠가는 진실을 말해도 괜찮을 것이라 믿었다. 
 
“나 사실 오빠에게 말 못 할 비밀이 있어. 오빠가 감당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속이고 결혼하고 싶지는 않아.” 
 
연수는 목도리에 대해 말했다. 
 
제준의 반응은 태연했다. 그는 “괜찮다”라고 말했다. 
 
연수는 홀가분했다. 제준은 몇 마디 말로, 연수를 위로했다. 평소처럼, 둘은 함께 식사하고 커피를 마셨다. 단 하나의 절차만이 생략되었다. 그날 밤, 제준은 연수를 안아주지 않았다. 
 
그날 이후 일주일 동안, 연락이 되지 않던 제준이 연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시간 되면, 잠깐 만나서 이야기 좀 하자.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연수는 제준의 무뚝뚝한 목소리에 당황했다. 손이 떨리고 가슴이 답답해 더 이상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말하고 일찍 회사를 나왔다. 
 
그녀가 찾은 곳은 병원이 아니라, 그를 만나기로 한 카페 근처 공원이었다. 숨을 쉴 수 없었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던 그녀는 하염없이 산책로를 걸었다. 
 
“나 도착했어. 어디야?” 
 
카페에 먼저 도착한 제준이 전화를 걸 때까지, 연수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공원을 누볐다. 땀으로 화장이 망가져 버렸다. 공원 화장실에서 얼굴을 대충 고치고, 제준의 앞에 앉았다. 
 
그녀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제준이 말했다. 
 
“나 오래 생각해봤는데, 우리 그만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으면, 네가 오해할까 싶어 만나서 직접 설명하고 싶었어. 
 
목도리 사건,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것 때문에 헤어지는 건 아니야. 오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너를 만나는 동안, 계속 생각해봤는데 내가 아직 이별에 대한 상처가 있는 것 같아. 너를 정말로 사랑한 건지, 아니면 내가 외로워서 너를 만난 건지 판단이 안 서거든. 
 
사랑해서 사귄 거라고 믿었는데, 점점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어. 더 늦기 전에,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정말 미안해.” 
 
연수는 침묵했다. 
 
연수의 침묵이 불안했는지, 제준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  
 
“연락은 계속해도 되는 거지?” 
 
“그건 너 편할 대로 해. 그게 전부야?” 
 
제준은 당황한 듯 말했다. 
 
“응, 그게 전부야.” 
 
그러나, 제준은 연수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아마 제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궁금하실 거예요. 저는 솔직히 이별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어요. 연락이라도 받아주면, 언젠가 기회가 다시 있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연수는 제준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 같았다. 
 
연수에게 제준은 이상적인 남자로 왜곡되어 있다. 그러나, 상식적인 관점에서 제준은 이상적인 남자가 아니라 이상한 남자다.  
 
제준이라는 남자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자기 외로움을 달래려 연수을 선택했고, 그녀가 자기 기준에 맞지 않자 자기 외로움을 핑계로 그녀를 버린 것이다. 
 
처음부터 그에게는 연수을 진지하게 만나려는 의도가 없었을지 모른다. 제준은 본능적으로 연수가 취약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사귀자고 말한 첫날 그는 연수를 안았다. 사귀는 것과 자는 것, 어쩌면 그에게 같은 의미였을지도 모른다. 
 
목도리 사건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도 거짓처럼 보였다. 연수가 비밀을 털어놓은 그날 밤, 그는 연수를 안아주지 않았다. 심경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연수의 비밀을 알게 된 순간, 그가 마음을 닫지 않았을까? 
 
그의 말과 행동에서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제준이 무슨 자격으로 그녀의 상처를 이해하고 말고를 결정할 것인가? 
 
그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떠났다. 연수는 상처의 늪에 빠져버렸다. 취약한 그녀가 더욱 취약해진 것이다. 
 
나는 제준에게 한 마디 말도 건넬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그녀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과거로 돌아가자. 그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어떤 인생을 살았는가. 무엇이 그녀를 취약하게 만든 것인가. 목도리 이전의 사건들을 알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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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친년은 왜 여기 서 있어. 걸리 적 거리게.” 
 
할머니는 분을 못 참고, 어린 연수의 뺨을 후려쳤다. 
 
“왜 애한테 화풀이를 하세요!” 
 
그녀의 엄마가 할머니에게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격한 몸싸움을 했다. 
 
연수의 나이 여섯 살, 잊을 수 없는 기억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가족은 친할머니 댁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져서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기 가족을 어머니에게 맡겨놓고 밤늦도록 일에 매달렸다. 고부 갈등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버지가 밤늦도록 일에 매달리는 사이, 집안은 아수라장이었다. 할머니는 아들에 대한 분풀이를 며느리에게 쏟아부었다. 엄마는 질세라 할머니에게 덤벼들었다. 엄마의 잘못이라면, 무능한 남자와 결혼한 것뿐이었다. 
 
그녀의 엄마와 할머니가 격하게 다투는 날이면, 살림살이가 허공을 날아다녔다. 어린 그녀는 방구석에 움츠러들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울었다. 한바탕 소동이 나면, 어린 그녀는 엄마에게 다가가 엄마 무릎에 앉았다. 
 
딸을 안아줄 여유가 없었던 엄마는 연수을 땅에 내려놓고, 뒤돌아 앉았다. 
 
엄마가 뒤돌아 앉은 날이면, 그녀는 할머니 감정이라도 풀어보려는 듯, 할머니를 주변을 서성거렸다. 할머니는 그녀를 차가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그런 날의 반복이었다. 
 
감정이 사그라들지 않았던 할머니는 며느리가 보라는 듯이 어린 손녀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어린 그녀는 균형을 잃었다. 옆으로 주춤거리며 몇 발을 내딛다,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엄마가 할머니에게 달려들었다. 할머니는 엄마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아무도 말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엄마와 할머니, 두 사람이 체력이 다해 스스로 멈출 때까지 싸움은 계속됐다. 
 
#
 
다음 날 아침, 그녀의 볼에 파란 멍이 들었다. 선명하게 손바닥 자국이 새겨졌다. 
 
어린 연수가 말했다. 
 
“엄마, 나 오늘 어린이집 안 가면 안 돼? 너무 창피해.”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수의 머리카락에 빗질을 하며, 머리카락을 바짝 묶어 올렸다. 
 
“엄마, 머리 너무 세게 묶지 마. 아프단 말이야.”  
 
아프다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엄마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딸의 머리카락을 끌어 머리 한가운데서 세게 묶었다. 
 
엄마가 같이 나갈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엄마의 눈치를 살피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나 오늘 안 데려다줘?”  
 
엄마의 표정은 차가웠다. 파리를 내쫓는 손동작으로 그녀를 밖으로 내보냈다. 
 
연수는 혼자 주섬주섬 신발을 신었다. 마당을 지나 대문을 나서자, 또래 친구들이 각자의 엄마와 함께 공터로 모여들였다. 곧 어린이집 차량이 도착할 시간이었다. 
 
혼자 멍하게 서 있던 그녀에게, 옆집 아줌마가 깜짝 놀라 물었다. 
 
“어머, 너 얼굴이 왜 그러니?” 
 
연수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머, 어른들이 때렸니?” 
 
연수는 가만히 고개를 끄떡였다. 옆집 아줌마는 충격을 받은 듯, 멈칫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누가?” 
 
“할머니….” 
 
“할머니가?”
 
연수는 파랗게 멍든 볼을 손으로 숨기고, 고개를 끄떡였다. 
 
옆집 아줌마는 그럴 리 없다는 듯, 화들짝 놀랐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옆집 아줌마의 반응에, 연수의 등골이 오싹했다. 
 
여섯 살 아이가 섬뜩한 생각을 하고 만 것이다. 어쩌면 엄마는 일부러 머리를 묶어 올렸을지 모른다. 그녀의 볼에 새겨진 선명한 멍 자국을 온 동네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작은 마을에서 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던 할머니는 후한 인심으로 평판이 좋았다. 사나운 며느리를 만나 노년이 불행해졌다는 소문이 마을에 돌았다. 
 
마을 사람들이 엄마를 바라보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녀의 볼에 새겨진 멍 자국은 그녀의 할머니가 얼마나 지독한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그날 밤, 할머니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엄마에게 달려들어 엄마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네가 무슨 짓을 했길래, 동네 사람들이 나를 개처럼 쳐다보는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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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아픈 과거를 회상하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 지난 일이라는 듯,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할머니는 독했어요. 제가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 엄마를 들들 볶았죠. 엄마는 우울증이 분명했어요. 
 
중학교 2학년 때쯤인가, 아빠와 같이 살게 됐어요. 아빠도 자기 나름대로 악착같이 산 거죠. 사업으로 돈을 조금 번 것 같았어요. 
 
할머니 집에서 벗어나 엄마 아빠랑 살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완전한 착각이었죠.”
 
“아빠, 자꾸 어디 가?”
 
“잠시만, 아까부터 계속 전화가 와서….” 
 
아빠는 저녁을 사준다며, 연수가 다니는 학원 앞으로 찾아왔다. 아빠가 평소와 달라 보였다. 아빠는 연수의 눈치를 살피며 계속 밖으로 나가 전화 통화를 했다. 
 
아빠가 다시 와서 앉았을 때, 연수가 물었다. 
 
“아빠, 혹시 엄마 몰래 만나는 여자 있어?” 
 
아빠는 정색을 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뜬금 없이….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 
 
“아빠 오늘 평소와 다른 거 알지?” 
 
철없는 아빠는 딸에게 비밀을 털어놓았다. 
 
“사업하다가 잠시 만난 여자가 있는데, 이상하게 자꾸 연락을 해. 아빠가 외로울 때, 잠시 만났던 사람이야. 이제 엄마랑 같이 사니까, 아빠가 알아서 정리할게. 그때까지 엄마한테는 비밀이다. 꼭 비밀 지켜야 해.” 
 
그녀의 눈에 비친 아빠는, 덩치만 큰 철부지 어린애였다. 아빠가 없는 동안, 엄마와 딸이 흘린 눈물, 고통스러운 날들은 새로 장만한 아파트로 만회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연수는 아빠의 비밀을 엄마에게 말할 수 없었다. 함께 산지 일 년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엄마와 아빠가 헤어진다면, 이제 돌아갈 곳도 없었다. 
 
그녀는 침묵을 선택했다. 
 
며칠 후, 엄마가 연수에게 심문하듯 물었다.
 
“너 알고 있었지?”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뭘?” 
 
“아빠 말이야. 다른 여자 만나는 거 알고 있었잖아?” 
 
“아빠가 그래?” 
 
“알고 있었네. 엄마한테 왜 말 안 했어?” 
 
“말하면 어떻게 되는데?” 
 
엄마는 말 대신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그걸 말이라고 해. 미리 말했으면, 엄마가 가만히 있었을 것 같아?” 
 
연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왜 나한테 그래?”
 
“너도 똑같아. 하는 짓이 어떻게 그렇게 아빠를 닮았니?” 
 
연수는 참을 수 없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연수가 대들자, 엄마는 미친 사람처럼 오열하며 살림살이를 부수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 들고, 연수에게 던졌다. 
 
삐리릭. 
 
아빠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난장판이 된 거실 한가운데 서서 아내에게 말했다. 
 
“이 여자가 미쳤나.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아빠가 순간 멈칫했다. 입이 바짝 말랐다. 연수을 바라보며, 궁색하게 물었다. 
 
“연수아, 너 엄마한테 말했니?” 
 
연수는 폭발했다. 
 
“그래. 내가 말했다. 뭐 어쩔래! 왜 전부 나한테만 지랄이냐고!” 
 
엄마는 남편을 쏘아보고, 돌아서서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빠가 연수에게 말했다.   
 
“이런 미친년. 아빠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아빠가 오해라고 했잖아. 아무 일도 없었다고 몇 번을 말했어? 계속 연락을 해서, 아빠도 힘들다고 말한 거잖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엄마에게 말하면 어떻게 해? 널 믿은 내가 바보지.” 
 
그녀의 아빠는 굳게 닫혀버린 안방 문 앞에서, 엄마에게 사정하듯 말했다.   
 
“여보, 오해야. 정말 오해라고. 내가 설명할게. 문 좀 열어 봐.” 
 
연수는 견딜 수 없었다. 집을 뛰쳐나갔다. 텅 빈 운동장 한 귀퉁이에 앉아 엎드려 하염없이 울었다. 
 
“아직도 두 분은 저를 오해하고 있을 거예요. 나 때문에 이혼할 뻔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죠. 오해를 바로잡고 싶지도 않아요. 저는 그냥 두 분이 한심하다고 생각거든요.
 
엄마도 아빠도, 제가 어떻게 되든 상관 안 하셨어요. 학교 보내주고, 학원 보내주고. ‘그거면 됐지’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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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과거에서 나는 치명적인 손상을 발견했다. 그녀는 거절과 비난을 반복적으로 경험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면서, 다른 누군가가 내다 버린 감정은 고스란히 마음에 담는다. 받아들이면 절대로 안 되는 감정조차, 그녀는 거부할 수 없다.
 
제준은 자신 안의 외로움을 연수라는 존재로 달랬다. 안전한 방식으로 자신 안의 욕구를 채우고, 연수을 버리고 떠났다. 
 
학원 운전기사 역시 마찬가지다. 어린 연수의 취약함을 이용해, 자신의 욕구를 채웠다.  
 
그녀는 평생 목마른 사람처럼, 사랑을 구걸하며 다닐지 모른다. 자기 아닌 모습으로 살아가면서, 남이 베푸는 작은 호의에 마음이 끌리고,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에게 의지해 살아갈지 모른다. 
 
평생을 외로움으로 허덕였던 그녀의 삶을 어떻게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상담이 어떻게 끝나게 될지 예측할 수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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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멍이 들어, 혼자 어린이집 버스를 기다리는 어린 연수가 기억나세요?”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기억나요.” 
 
“어린 연수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요?”
 
“글쎄요…. 아마도 외로움이 아닐까요?”
 
“조금 더 자세히 말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냥 공터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아이가 불쌍해 보이거든요.” 
 
“그렇군요. 그럼, 이제부터 나와 잠시 역할극을 해 볼 거예요. 조금은 어색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주세요.” 
 

 
나는 혼자 공터에 서 있는 어린 연수에게, 현재의 연수를 데리고 갔다. 나는 어린 연수를 역할을 맡았고, 그녀는 현재의 자신이었다. 
 
나는 어린 연수의 입장에서, 당시의 상황과 감정을 설명하고, 현재의 연수에게 “도와달라”라고 말했다. 
 
현재의 연수는 어린 연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어린 연수를 위로해줄 말이 단 한 마디도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상처 입은 자신을 공터에 버려두고 방치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상처 입은 자신과 마주한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작업을 중단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지금 무엇이 스쳐 지나갔죠?”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터에 혼자 서 있는 아이에게 아무 말도 못 해주고, 그 옆에서 서서 울고 있는 나를 발견했어요.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로 모르겠어요.”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의 말속에 깊게 배어든 절망감이 내게 전해졌다. 
 
나는 그녀를 그리스도에게로 데려가야 했다. 
 
“다시 한 번 작업을 시도할 거예요. 지금처럼 솔직하게 반응해주시면 돼요. 그럼, 시작해 볼게요.”
 
나와 그녀 사이에 그리스도가 계시듯, 상처 입은 그녀와 현재의 그녀 사이에도 그리스도가 계시다. 
 
현재의 그녀가 어린 연수를 그리스도에게 데려다준다면,  그녀는 예수님께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나는 정말로 궁금했다. 
 
그녀는 어렵게 첫 마디를 꺼냈다. 
 
“예수님, 이 아이는 어린 시절 저예요.” 
 
그녀의 감정이 요동쳤다.  
 
“저는 상처가 많아서, 도저히 연수를 돌봐줄 수 없어요. 이십 년이 지나도 연수는 스스로를 돌볼 수 없어요. 너무 불쌍한 아이에요. 
 
제가 치유돼서 연수를 돌볼 수 있을 때까지, 예수님이 대신 돌봐주시면 안 돼요? 
 
예수님이 연수를 잠시만 맡아주세요. 제가 치유되면… 어린 연수를 찾으러 올게요….” 
 
그녀는 오열하며 울었다. 
 
그녀의 마지막 말에, 나 역시도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내가 들고 있던 노트에 눈물이 투두둑 떨어졌다. 그녀의 말을 받아 적던 메모가 번졌다. 
 
나는 잉크가 번져나가는 노트에 시선을 고정하고, 그녀가 마음껏 울도록 충분한 시간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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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감정이 차분해졌을 때, 나는 다시 물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할 때, 예수님의 표정이 어떠셨나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그녀가 만난 예수님은 말로 다할 수 없이, 따뜻했다. 정서적, 신학적으로 온전한 예수님이셨다. 
 
내가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었다.
 
그녀가 말했다.  
 
“내가 나를 돌보지 못할 때에도, 나를 돌봐줄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 같아요. 
 
상처 입은 나를 예수님께 데려다줄 수 있다니, 그 자체만으로 안심이 돼요. 
 
지금까지 나는, 다른 누군가를 끊임없이 찾아다녔거든요.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치 마약에 중독된 사람처럼 끊을 수 없었어요. 
 
말씀해주신 대로, 상처에는 완치가 없다는 말에 동의해요. 과정이 쉽지는 않겠죠. 
 
하지만, 이제부터, 저는 나 자신을 돌볼 거예요. 절대로 공터에서 혼자 울게 내버려 두지 않으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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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스러운 감정이 밀려들었다. 
 
나는 그녀가 부러웠다. 
 
역설적인 상황이었다. 
 
나는 그녀와 똑같은 성경을 읽고, 똑같은 예수님을 믿는다. 그러나, 나의 예수님은 그녀처럼 따뜻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그녀보다 지식적으로 예수님을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성경 구절을 외우고, 더 많은 시간 기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따뜻함에 관한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누구를 원망하겠나. 아무도 원망할 수 없다. 내가 살아온 인생이었다.  
 
그녀와 똑같은 방식으로 나는 상처 입은 나 자신을 예수님께 내어 맡긴다. 
 
좁고 어두운 방 안에 홀로 갇혀 매질을 당하는 아이는 삼 십 년이 지나도, 두려움에 떤다. 
 
사라지지 않는 두려움으로 평생을 고통받는 아이는, 여전히 두려운 채로 상담실 안에 머문다. 
 
좁고 어두운 방 안에, 자신을 만나주셨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을 직접  다시 만날 때까지 좁고 어두운 방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나의 예수님은 따뜻하지 않아도, 상처 입은 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따뜻하시다. 나는 같은 공간에서 따스한 온기를 느낀다. 
 
내가 상처 입은 한 사람을 저버리지 못하는 이유다. 어쩌면, 나는 예수님께 사랑받기 위해, 상처 입은 한 사람을 마주하는 것이다. 
 
나는 따뜻한 예수님이 미치도록 그립다.

엄마도 내가 이상해?

“소희 선생님, 잠깐 나 좀 봅시다.” 교무실 중앙에 책상을 놓고 앉은 교감 선생님이 말했다. 
 
한소희는 중저음의 목소리를 듣고 얼어붙고 말았다. 권위적인 말의 무게에 짓눌려,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잠깐 이리 와보시라니까!” 더 커진 교감의 목소리에 한소희는 움찔했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교감 선생님을 향해 걸어갔다. 주위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사람들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레이저 반점이 그녀의 온몸을 가득 매웠다. 걷다가 주춤하면, 일제히 쏴버릴 기세였다. 
 
“아니, 말 길을 한 번에 못 알아들으시는 거야? 바로 앞에 앉은 사람을 몇 번을 불러야 대답을 해요?” 
 
“죄송합니다….”
 
“내가 왜 부른지 알죠?”
 
“….” 
 
“두 달 동안 교육감 온다고 학교 전체가 들썩거리면서 준비를 했잖아. 왜 한소희 선생님만 준비를 안 한 거야? 개망신을 당했잖아! 어떻게 책임질 거야!”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면, 다야? 지금 기간제라고 대충대충 하는 거야?”
 
“….” 
 
“어떻게 두 달 동안 가만히 있다가, 교육감 오는 당일에 준비를 못 했다는 거야? 실험실에서 아이들이 교과서만 가지고 공부하는 게 말이 돼! 빔 프로젝터도 안되고 말이야.” 
 
한소희의 옆자리에 앉은 K 교사가 보다 못해 나섰다. K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교감에게 말했다. 
 
“교감 선생님, 사석에서 이야기하는 게 어떨까요? 사람들 다 보는데, 너무 심하시잖아요.” 
 
교감의 얼굴빛이 붉게 변했다. 헛기침을 하더니,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 됐으니까, 자리로 돌아가 보세요. 그리고, 내년에는 다른 학교 알아보세요. 정교사처럼 일하라고 했더니, 건성건성….” 
 
다음 수업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교무실에 울려 퍼졌다. 선생님들은 썰물처럼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교감은 인파에 몸을 숨겨 도피하듯이, 책상 위에 놓인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K 교사 역시, 한소희에게 한 마디도 건네지 못한 채, 다급하게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교무실은 고요했다.
 
한소희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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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상담 일정을 확인했다. 나의 시선이 월요일 오후 7시에 머물렀다. 한소희가 첫 세션을 시작하기로 예정된 시간이었다. 그녀와의 통화를 떠올렸다. 다급했던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듯했다. 
 
“저는 한소희라고 해요. 목사님이 쓰신 책을 읽고, 연락드렸어요. 지금 제 상황이 절박해서, 당장 내일이라도 상담을 받고 싶어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였다. 
 

 
한소희는 서른두 살의 여성이었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푸른색 긴 코트를 입은 채였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 보였다. 
 
“급하게 연락드렸는데, 시간 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하지요.”
 
한소희는 교무실에서 그녀가 겪은 사건을 말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상담실에 오기 전까지, 그녀는 이틀 밤을 꼬박 뜬 눈으로 지새웠다. 소화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이틀 동안 간단한 음식을 두 끼 밖에 먹지 못했다. 
 
정서적인 문제도 심각했다.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몸살 기운과 두통, 어깨결림, 손떨림 증상까지 그녀를 괴롭혔다. 해가 뜨는 것이 두려웠다. 교감 선생님, 동료 선생님, 그리고 학생들 마저도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았다.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무리 기간제 교사라도 학교의 평가는 중요했다. 다른 지역 다른 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를 지원한다고 하더라도, 무책임하게 학교를 떠난 교사에게 기회를 줄 가능성은 낮았다. 남은 두 달을 어떻게든 버터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결론이었다. 
 
남은 두 달을 혼자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상담을 택한 것이다. 
 
“마음을 열고 이야기해주신 덕분에, 소희 씨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제가 궁금한 것들을 차례대로 질문해 볼게요. 지금처럼 편안하게 답변해주시면 됩니다.” 
 
교무실에서 그녀에게 일어난 사건을 자세히 알고 싶었다. 교감이 그녀를 부르기 전에,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소희 선생님, 교육감 참관수업 많이 긴장되지?” K 교사가 물었다. 
 
“네, 조금이요.” 
 
“너무 긴장하지 마. 어차피 내가 다 준비해야 하는 거니까. 소희 선생님은 내가 부탁하는 것만 옆에서 도와주면 돼.” 
 
“네, 선생님.” 
 
K 교사는 책상 위 책꽂이에서 파일첩을 꺼내들었다.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서류 한 장을 한소희에게 넘겼다. 
 
“여기 이 목록에 있는 물품들 한 번 확인해주고, 없는 물품은 체크 좀 해줘. 이것만 확인해서, 나한테 넘겨주면 돼.” 
 
한소희는 K 교사가 넘겨주는 종이 한 장을 받아들었다. 의외로 간단한 일이었다. 
 
“간단한데요.” 
 
“그럼, 간단하지. 내가 뭐 그렇게 어려운 일 시키겠어? 나머지는 내가 할 거야. 수업 내용 정리해서 이메일로 보내주면, PPT만 하나 만들어줘. 내가 나이가  있다 보니까, 센스가 떨어지는 것 같아. 소희 선생님은 아직 젊잖아. 센스 있게 잘 만들어 봐.”  
 
“지난번에 보니까, 잘 만드시던데요?”
 
“그것도 내 딸한테 부탁한 거야. 이제 고3이라고, 내가 시중들고 있어.”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다, 풋 하고 웃음이 터졌다.
 
“알겠어요, 선생님. 나중에 이메일 보내주세요.” 
 
“항상 고마워, 소희 선생님.” 
 
“제가 고맙죠. 항상 도와주시잖아요.” 
 
한소희는 점심시간에 과학실에 내려갔다. K 교사에게 받은 물품 목록을 확인했다. 단순한 일이었다. 점심시간마다 내려와서 물품을 확인한다면, 한 주 내로 충분히 끝날 일이었다. 
 
일주일 후, 한소희가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 책상 앞에서 수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K 교사가 정시에 맞춰 허겁지겁 교무실에 들어왔다. 
 
“오늘 출근길에 접촉사고가 났어. 사고 처리하느라고 늦었네. 운전에도 나이 제한이 있어야 할 것 같아. 연세 많으신 할아버지가 뒤에서 내 차를 받았지 뭐야.” 
 
한소희는 깜짝 놀랐다. 
 
“병원에 가보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 정도는 아니야. 살짝 부딪혔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래도, 병원에 가보셔야 해요. 교통사고는 사고 난 당시에는 잘 모르거든요.” 
 
“그래, 그렇게 할게.” 
 
“참, 선생님께서 지난 번에 부탁한 물품 확인 끝냈어요.” 
 
한소희는 파일첩을 펼쳐들어, K 교사에게 확인을 부탁했다. 
 
“잘 했네. 이렇게 하면 돼. 나도 수업 내용 정리 거의 끝냈으니까, 이번 주 내로 이메일 보내줄게.”
 
K 교사는 한소희에게 전해 받은 파일첩을 책상 위 책꽂이에 끼워 넣었다. 첫 수업을 알리는 벨이 울리자,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교실로 향했다. 
 
다음 날, 아침 K 교사는 출근하지 않았다. 한소희는 K 교사가 걱정돼, 문자를 보냈다. K 교사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나 방심했나 봐. 어젯밤에 허리가 아파서 한숨도 못 잤어. 일주일 정도 입원해서, 치료받으려고.” 
 
“잘 하셨어요. 아무 걱정 마시고, 일주일 푹 쉬다 오세요.”  
 
한소희는 교육감 참관 수업이 은은하게 걱정되었다. 혹시라도 K 교사의 퇴원이 늦어진다면, 열흘 뒤에 있을 교육감 참관 수업이 자신의 몫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소희는 교육감 참관수업 일정이 다가올수록 불안하고 초조했다. K 교사에게 하루라도 빨리 퇴원하라고 다그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 주 내로 보내주겠다던, 이메일은 깜깜무소식이었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에 새벽 예배를 나가기 시작했다. K 교사가 하루라도 빨리 퇴원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아니면, 이메일이라도 하루빨리 받아보기 원했다. K 교사가 이메일을 보낸다는 것은, K 교사가 직접 수업하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한소희의 기대와는 달리, K 교사는 일주일 내내 연락을 하지 않았다. 교육감 참관 수업이 3일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다. 한소희는 K의 문병을 갔다. 만나서 직접 확인할 생각이었다. 
 
한소희는 K가 입원한 병실에 들어가, 인사치레의 안부를 묻고 나서, 참관 수업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선생님, 혹시 참관 수업은 예정대로 진행하실 수 있으신 거죠?” 
 
“그래야지. 내일이나 모레 퇴원할 생각이야.” 
 
한소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희 선생님, 많이 걱정했구나. 뭘 그런 걸 걱정해? 그거 확인하려고 병원까지 온 거야?”
 
한소희는 움찔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K가 피식 웃었다. 
 
“뭘 그런 게 아니야. 솔직히 말해도 돼.” 
 
K의 말에, 한소희 역시 긴장이 풀렸다. 
 
“솔직히 조금 걱정됐어요. 혹시라도, 내가 수업을 맡게 되면 어떻게 하지…. 평소에 안 나가던, 새벽 예배까지 나갔다니까요.” 
 
“걱정도 팔자다, 소희 선생님.”
 
K는 한소희의 한쪽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제가 소심한 성격이라니까요.” 
 
한소희는 어색하게 웃었다. 
 
한소희는 일단 안심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주말을 보내면 될 일이었다. ‘월요일이 되면 K 교사가 퇴원을 할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K 교사는 퇴원하지 않았다. 한소희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참관 수업을 맞이했다. 과학실의 보조교사 역할을 맡았던, 한소희가 교육감이 참관하는 수업에서 홀로 서서 수업을 진행해야 했던 것이다. 
 
결과는 최악이었다. 
 
모든 책임을 한소희가 짊어져야 했다. K 교사는 참관 수업 일정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퇴원을 했다. 당일 오후가 돼서야, 학교에 들른 것이다.
 
상식적으로 보면, K 교사가 비난받아야 하겠지만 아무도 나서서 한소희를 두둔해주는 교사는 없었다. 전후 맥락을 모르는 다른 교사들은 아마도 K 교사의 부득이한 사정으로, 한소희가 책임지고 수업을 진행해줄 것이라 예상했을 것이다. 
 
교감 선생님의 혹독한 비난이 쏟아져 내릴 때, 한소희를 감싸준 K 교사였다. K 교사의 행동을 지켜본 다른 교사들은 지레짐작 판단했을 것이다. 신입 기간제 교사의 명백한 실수라고. 
 

 
“그날 사건에 대해, K 교사와 따로 이야기해보셨나요?” 내가 물었다. 
 
“네, 아주 짧게 대화를 나눴어요.” 
 
“K 교사가 뭐라고 하던가요?” 
 
“미안하다고 했어요. 몸이 계속 아파서, 도저히 퇴원할 수가 없었다고 했죠. 상황이 이렇게 될지 몰랐다면서, 이해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자매님의 반응은요?” 
 
“그래도 너무하신 거 아니냐고 물었어요. 그 말을 할 때는 저도 흥분한 상태라 예민한 말투였어요.”
 
“K 교사 자기 잘못을 인정하던가요?” 
 
“아니요. 제가 공격적으로 말하니까, K 선생님도 당황하셨나 봐요. 갑자기 태도를 바꾸시더라고요.” 
 
“어떻게요?”
 
“그날 소희 선생님이 문자로 “아무 걱정 하지 말고 푹 쉬라고” 말하지 않았냐고. 그래서, 아무 걱정 없이 쉬다 왔는데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하냐고. 오히려 저한테 따지시더라고요. 거기서 제가 할 말을 잃었어요. 대화가 중단됐죠.”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으셨어요?”
 
“아니요. 머리가 멍해지면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어요.”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어떤 심정이었는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두려웠던 것 같아요. 이미 지나간 일이고, 상황은 바꿀 수 없잖아요. 나는 기간제 교사이고, 그분은 정교사이고요.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내 잘못 아니라고 말할 자신까지는 없었어요.” 
 
“무엇에 대한 두려움일까요?”
 
“….”
 
한소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두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티슈로 눈물을 닦아내며, 감정을 애써 진정시키고자 했다.
 
 나는 침착하게 기다렸다. 그녀가 천천히 생각하기를 바랐고,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둔 진실을 말하기 원했다. 
 
“사람들이 저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봐 두려웠어요. 제가 조금 더 강하게 말했다면, K 선생님뿐만 아니라, 주변 모든 선생님들이 저를 이상하게 봤을 거예요. 그런 상황을 감당할 힘이 저한테 없거든요. 저는 그냥 사람들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아요. 조용히 지내고 싶거든요.” 
 
그녀가 진실을 말했다. 그녀의 마음속에 숨겨진 비밀의 문이 비스듬히 열렸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두렵다는 말이 무슨 뜻이죠?” 
 
“제가 살짝 이상하지 않나요? 말투도 어눌하고, 걷는 모습도 조금 이상하고. 목사님은 제가 상담실을 들어올 때, 제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셨나요?” 
 
그 순간이었다. 비디오테이프가 빠른 속도로 뒤로 감기듯이, 한소희가 상담실에 처음 들어오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한소희는 미세하게 절뚝거렸다. 상담실 입구와 상담실 내부까지의 거리는 짧았다. 내담자를 안내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는 한소희보다 한 걸음 앞서 걸어야 했다. 한소희가 걷는 것을 볼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는 상담실에 들어선 그녀가 의자에 앉기까지였다. 굳이 걸음걸이를 세어본다면, 세네 발자국이었다.  
 
한소희의 말투 역시 느리고 차분했다. 가끔 복잡한 단어를 말할 때,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상담과 관련해서 중요한 정보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에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면, 상담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소희가 자신의 말투와 걸음걸이를 상담실 테이블에 올려놓는 순간, 그녀의 말투와 걸음걸이는 반드시 언급하고 넘어갈 중요한 의제가 됐다. 열리다 멈춰버린, 비밀의 문을 그녀가 활짝 열어젖힌 것이다.
 

 
한소희가 9살이었던, 3월의 주말이었다. 그녀의 가족은 가까운 놀이공원에 갈 예정이었다. 마음이 들뜬 한소희는 부모가 준비하는 동안, 집 안에 머무를 수 없었다. 
 
“엄마, 나 먼저 나가서 기다릴게.” 
 
“안돼, 같이 나가. 조금만 기다려.” 
 
“나 잠깐 슈퍼에서 살 거 있단 말이야.” 
 
“안 된다고. 어차피 우리도 슈퍼 잠깐 갈 거야. 같이 나가.” 
 
“싫어. 나 혼자 갔다 올 거야.” 
 
한소희가 신발을 신고, 현관 밖으로 나가는 동안 엄마는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고 있었다. 두 손가락에 로션을 잔뜩 묻혀 얼굴에 바르면서, 현관 밖을 나가는 한소희에게 소리쳤다. 
 
“너 차 조심해야 돼! 앞에 잘 보고 다녀.”
 
화장실에서 씻고 나오던, 그녀의 아빠가 아내에게 말했다. 
 
“아니, 소희 혼자 나가게 내버려 뒀어?” 
 
“몰라, 혼자 간 데. 바로 집 앞인데, 뭐.” 
 
“걱정인데….”
 
“그렇게 걱정되면, 당신이 나가봐. 당신은 옷만 입으면 되잖아.” 
 
그녀의 아버지는 이상하게 불안했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딸을 따라나섰다. 
 
한소희가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걸을 때,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한소희는 까치발을 하고, 집집 사이에 좁은 골목 틈새로 연기가 나는 곳을 찾았다. 그녀의 눈에 펼쳐진 것은 봄날의 맑은 하늘뿐이었다. 연기가 나는 곳은 없었다. 
 
한소희는 손바닥으로 담장을 짚어가며, 골목을 따라 걸었다. 그녀가 코너를 돌아, 슈퍼 앞 사거리에 들어섰을 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하얀색 승합차가 그녀를 들이박은 것이다. 그녀의 몸이 공중에 떴다가,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응급환자를 싣고 가던 구급차가 좁은 골목길을 과도한 속도로 달리다, 한소희를 치어 버린 것이다. 구급 대원이 부리나케 차에서 내려, 한소희를 살폈다. 
 
그녀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무릎은 반대쪽으로 꺾여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중대한 상황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구급 대원은 한소희를 구급차에 태우고, 병원으로 이송했다. 
 
멀리서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에, 한소희의 아버지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가 사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  슈퍼의 사장이 덜덜 떨리는 손짓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한소희의 아버지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멘트 바닥에 흥건한 피를 보고, 잠시 기절했다. 
 

 
“머리를 심하게 다쳐서 큰 수술을 여러 번 받았어요. 일 년 내내 병원에 살다시피 했죠. 어렸지만, 정말 힘들었던 것 같아요. 이마부터 뒤통수를 가로지르는 수술 자국이 생겼거든요. 지금은 머리카락으로 가릴 수 있는데, 당시에는 수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머리카락이 없었어요. 
 
부모님이 조금만 신중하셨더라면, 머리카락이 자란 다음에 학교에 보내셨을 텐데, 저희 부모님은 그러지 않으셨어요. 출석 일수를 채우지 못하면 큰일 나는 줄 아셨나 봐요. 머리에 수술 자국이 선명한데, 바로 학교에 갔어요.”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녀가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이유, 그녀의 얼굴이 유독 하얗고 창백한 이유를 그제서야  알게 된 것이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파란 코트 역시, 그녀의 걸음걸이를 조금이라도 숨겨볼 의도였던 것이다. 
 
9살의 교통사고 이후, 한소희가 받은 고통을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목이 메였다. 내가 입술을 떼서, 그녀에게 말을 건네려고 하는 순간, 눈물이 터져버렸다. 한소희도 함께 울었다. 
 
“그날 차라리 죽었어야 했나 봐요.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들어요, 목사님….” 
 

 
“괴물이래요, 괴물이래요.” 
 
한소희의 같은 반 남학생들이 떼를 지어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친구들이 두려웠다.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에 숨어들었다. 변기에 앉아 다음 수업을 알리는 벨이 울리기만을 기다렸다.  
 
“엄마, 나 학교 가기 싫어.” 
 
한소희는 엄마에게 참아왔던 말을 내뱉었다. 
 
“친구들이 나를 이상하게 본단 말이야.” 
 
엄마는 딸의 이야기를 한참 동안 들어주었다. 한소희가 말을 마치자, 엄마는 딸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엄마도 내가 이상한 것 같아?” 엄마 품에 안겨 있던, 한소희가 물었다. 
 
“아니, 엄마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소희가 아파서 그런 거야. 다 나으면 괜찮아져. 조금만 참아, 소희야.” 
 
한소희는 엄마의 위로에 힘을 얻었다. 학교 친구들을 상대하는 것이 불편하고 힘들었지만, 견디고 견뎠다. 해가 바뀌고, 학년이 바뀌고, 친구들도 바뀌었다. 그녀의 머리카락 속에 감춰진 흉터를 기억하는 사람도 하나 둘 사라졌다.  
 

 
더운 여름날의 체육시간이었다. 체육 선생님은 내리쬐는 햇볕을 피하고자, 학교 공터 그늘로 아이들을 이끌었다. 한소희도 줄을 맞추어 걸었다. 그때였다. 한소희는 갑자기 몸의 균형을 잃고 맥없이 넘어졌다. 일어나려고 해도,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소희야, 괜찮니?” 
 
한소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혀가 굳어버린 것 같았다. 온몸의 근육에 경련이 일어났다. 반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선생님은 다급하게 한소희를 들쳐 업고, 양호실로 뛰었다. 
 
학교 운동장에 구급차가 도착했다. 한소희는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구급차로 옮겨졌다. 체육 선생님이 구급차에 함께 올랐다. 의사에게 상황을 설명할 의도였다. 
 
한소희는 그날 이후 미세하게 다리를 절게 되었다. 뇌 수술의 후유증이었다. 
 
한소희는 몸에 일어난 변화를 감지했다. 두려움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학교에도 갈 수 없었다.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끔찍한 기억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그녀의 엄마가 딸을 위로했다. 마음을 추스를 수 있도록 옆에서 도운 것이다. 
 
“소희야, 괜찮아. 의사 선생님이 약만 제때 잘 먹으면, 두 번 다시 그런 일 없을 거라고 했어.” 
 
“거짓말이잖아. 엄마는 맨날 나 걱정할까 봐 일부러 거짓말하잖아.” 한소희가 울면서 말했다. 
 
“아니야. 소희야. 엄마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오늘 병원에 같이 가서, 의사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 들어보면 되잖아. 엄마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엄마는 속상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남편과 함께, 딸을 챙겨 집을 나섰다. 셋이 나란히 걷다가, 엄마가 지갑을 두고 나왔다며,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한소희는 무심결에 앞서 걸었고, 그녀의 아버지는 길가에 멈춰 엄마를 기다렸다. 지갑을 챙겨 나온 엄마가 빠른 걸음으로 아빠에게 다가왔다. 한소희는 부모님보다 열 걸음 앞서 걸었다. 
 
아빠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몰라. 요즘 내 정신이 아니야.” 
 
“그나저나 갑자기 병원은 왜 가는 거야?” 
 
아빠가 그렇게 말하자, 엄마는 아빠의 팔을 세게 꼬집으면서,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엄마가 작은 목소리로 아빠에게 말했다.
 
“저거 안 보여? 소희가 지금 다리를 절잖아. 당신은 그것도 몰랐어?” 
 
“뭐가? 난 모르겠는데.” 아빠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세히 좀 봐. 이상하잖아. 어떻게 아빠가 그것도 몰라.” 
 
한소희는 충격에 빠졌다. 부모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속삭 말한 모든 대화를 듣고 만 것이다. 한소희는 울음을 터뜨렸다. 뒤돌아서서 부모를 가로질러 집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에 엎드려 하염없이 울었다.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온 부모님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엄마가 문을 두드리며,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돼서 그랬어, 소희야. 엄마 착각일 수도 있잖아. 괜히 너 걱정할까 봐 말 못 했어. 미안해, 소희야. 문 좀 열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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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이해할 수 있어요. 제가 걱정할까 봐 그러셨겠죠. 엄마 한 사람이라도 괜찮다고 말해주시지 않았다면, 제가 견딜 수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아쉬워요. 제 상태를 부정하거나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주셨으면 어땠을까? 혼자 생각해보거든요. 어차피, 다 지난 일이지만요.”
 
한소희가 들려준 이야기를 마음속으로 되새겨보았다. 한소희는 스스로를 “이상한 사람”으로 정의 내렸다.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마도 교무실에서 일어난 사건은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걸었던 골목길로 그녀를 소환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끔찍한 교통사고를 극복하고 살아돌아온 한소희를 세상은 반겨주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마저도 비웃음거리가 되었던 어린 시절이 그녀가 살아갈 세상을 두렵게 만든 것이다. 
 
그것은 아이러니였다. 이상한 사람은 한소희가 아니라, K 교사이며 교감이었다. 
 
사소한 접촉사고를 핑계로, 자신의 업무적 과실을 한소희에게 떠넘긴 K교사는 이상한 사람이다. 한소희가 K를 대신해, 교감 선생님에게 인격적인 모독을 당할 때, 좋은 사람인 척 한 K 교사는 위선적인 사람이다.  
 
교감은 자초지종을 들어보지도 않은 채, 한소희를 인격적으로 모독했다. 정교사와 기간제 교사를 운운하며, 사람을 자기 방식으로 평가하는 태도 역시 옳지 않다. 그는 여러 면에서 이상한 사람이다. 
 
한소희는 이상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정작 자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몸이 불편한 한소희를 은은하게 무시했던 사람들은, 그녀가 어린 시절에 “괴물”이라고 놀리며 비웃던 사람들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괴물의 사전적 의미는 괴상하게 생긴 물체다. 교무실에서 그녀에게 쏠린 다수의 시선은, 그녀를 괴상하게 여겼다. 어린 시절 교실에서, 사리분별하지 못했던 악동들에게 받았던 고통이 십수 년 뒤에 고스란히 되살아난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은 진실을 알지 못했다. 
 
한소희는 죽음을 이긴 진정한 승리자였다. 
 

 
“참 이상하네요. 정말 이상한 사람이에요.” 내가 말했다. 
 
한소희는 가만히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K 교사 말이에요. 상식 이하의 사람이군요. 어떻게 그런 식으로 행동할 수가 있죠? 교감도 마찬가지예요. 그런 사람 꼭 있죠. 권위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요. 제가 볼 때, 두 사람 모두 이상한 사람들이에요.” 
 
한소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만약에 소희 씨가 나를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준다면, 나는 이 상황을 간단히 정리하고 싶어요. ‘이상한 사람들은 정작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을 모른다. 정작 멀쩡한 사람이 상담을 받으러 왔다.’ 제가 전해드린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한소희는 머뭇거렸다. 그러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내담자라서 그런 말을 해주시는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너무 제 입장에서만 말했나 봐요. 그분들 이야기를 들어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거예요. 그분들께 괜히 죄송하네요.”
 
나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나도 나름 상식적인 사람이에요. 한 사람 말만 듣고 쪼르르 달려가 그 사람 편을 들 정도로 어리석지 않아요. 소희 씨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소희 씨는 나를 설득하고 있어요. 내 생각을 바꾸고 싶어 해요. ‘내가 이상한 사람이에요.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해주세요.’ 진실은 그게 아니죠. 이상한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에요.”
 
한소희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소희 씨, 속지 마세요. 당신은 정상이에요. 그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이라고요. 세상에는 의외로 이상한 사람들이 많아요.” 
 
한소희는 감정이 격해져,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한소희와 여섯 번의 상담 세션을 지속했다. 그 과정에서 한소희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현재의 대인관계에서 적절히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제시하고 연습했다. 
 
관계에서 갈등이 일어날 때, 방아쇠처럼 당겨지는 “나는 이상한 사람이야.”라는 파괴적인 생각은 적어도 완화되거나 지연되었다. 그러나, 언제든 반복될 수 있었다. 그에 따른 후속 조치로 긴급 상담을 이어갈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한소희를 배웅하고 돌아와, 상담 일지에 간단한 메모를 남겼다. 
 
언제나 한소희가 옳으냐고? 물론, 아니다. 상대방 잘못이라고 결론을 내리면 뭐가 달라지냐고? 모르는 소리다. 그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았다. 정당하지 못한 비난마저도 스스로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관계의 문제는 언제나 상대방이 존재한다.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잘못하지 않는다. 갈등은 상호 책임이다. 
 
한소희는 상대방의 책임을 빼앗아버렸다. 모든 것을 그녀의 잘못으로 여긴 것이다. 극단은 좋지 않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객관적으로 따져볼 기회를 가져야만 했다. 그것은 곧, 그녀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표현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소희가 건물 밖을 걸어나고 있었다. 절뚝거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울컥 눈물을 흘렸다. 동정심은 아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것은 경외심이었다. 
 
그녀는 생존자이며, 위대한 승리자였다.

상처가 많아서 그런가봐

혜연은 용기를 내서 목사님과 마주했다. 교회 목사님이 혜연의 집을 방문한 것이다. 
 
밤새 고민하며, 정리해 두었던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사막에 혼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엄마는 그런 혜연이 답답했는지, 옆구리를 꾹 찌르며 속삭이듯 말했다. 
 
“뭐 한다냐? 목사님 모셔다 놓고.” 
 
혜연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목사님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제가 오랫동안 고민해 온 문제가 있어요. 저는 목사님이 무서워요.” 
 
목사는 당황했다. 그러다, 이내 차분해졌다. 오랜 경륜으로 산전수전 다 겪어봤다는 표정이었다. 
 
“제가 무섭다고요?” 
 
혜연은 움찔했다. 파도처럼 후회가 밀려왔다. 엎질러진 물이었다. 목사는 이유를 알고 싶어 했다.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겠어요?” 
 
혜연은 혹시라도 목사님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주일 설교를 하실 때와 수요 예배 설교를 하실 때, 목사님의 설교 스타일이 조금 다르신 것 같아요….” 
 
“네, 정확히 아시네요. 주일 설교와 수요 설교는 청중이 다르잖아요. 주일에는 교회에 처음 나오시는 분들이 계시니까, 아무래도 부드럽게 설교하지요. 하지만, 수요 예배는 청중이 달라요. 헌신된 분들이고, 말씀을 사모하는 분들이니까 그에 맞게 설교하지요.” 
 
“저는 수요 예배에 가면 무서워요, 목사님.” 
 
“그러니까, 뭐가 무섭다는지 말씀해 주세요.” 
 
혜연은 다시 움츠러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도망치고 싶었다. 심장이 요동치고, 호흡이 가빠졌다. 그녀는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말씀을 전하시다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시면 저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요.” 
 
목사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아,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수요 예배에서는 제가 조금 강하지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요즘 마음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려는 분들이 많아서요. 
 
언제까지나 새가족일 수는 없잖아요. 교회 오래 다니셨으면, 말씀을 듣고 자라나야죠.자매님도 시간이 조금 지나면 적응이 되실 거예요.”
 
벌써 6년이었다. 혜연은 적응할 수 없었다. 
 
생각에 잠긴, 혜연에게 목사가 다시 물었다. 
 
“최근에 그런 적 있으세요?” 
 
“지난주에,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시다가 성도들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드셨나 봐요. 갑자기 소리를 지르셨어요. 말씀을 듣는 태도가 그게 뭐냐고. 그게 성도의 바른 자세냐고. 저는 목사님이 소리를 지르시자마자,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어요.” 
 
“아, 기억나요. 그날 몇 사람이 꾸벅꾸벅 졸더라고요. 그래서, 깨워준 거예요. 제가 소리를 질렀다고 해서, 화가 났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제가 소리를 지른 건,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서예요. 항상 깨어서 말씀을 들어도 모자란 판에, 예배 시간에 졸다니요. 그럴 수는 없지요.” 
 
목사는 혜연의 반응을 살폈다. 
 
“맞아요, 목사님. 저도 목사님이 무슨 말씀 하시는지 알아요. 일상생활에서 목사님 말투는 설교하실 때와 다르시거든요. 평소에는 지금처럼 편안하게 말씀해주시잖아요. 하지만, 저한테는 설교하는 목사님과 대화하는 목사님이 구분이 되지 않아요. 지금처럼 편하게 대화하다가도 목사님이 버럭 화를 내실까 무섭거든요.” 
 
목사는 시계를 바라보며, 조급한 심정을 드러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던 것이다. 
 
“혹시, 어릴 때 상처받은 기억이 있으세요? 저는 한 교회에서 10년 넘도록 목회를 했는데, 자매님처럼 말씀하시는 분은 처음 만나보거든요.” 
 
혜연은 깜짝 놀랐다. 친정 엄마가 옆에 있는 상황에서, 어린 시절의 상처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서운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혜연의 그런 모습이 답답했는지, 그녀의 엄마가 나섰다. 
 
“목사님, 말씀 들으니께, 생각나는 것이 있네유. 사실, 얘 시아버지가 그리 무섭다네유. 신혼 초에 아주 무서워서 혼났다고, 그리 말한 기억이 나유. 혹시 그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유?” 
 
목사는 “아하!”하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그랬구나’라는 단서를 발견한 것이었다. 혜연을 대하는 태도가 급변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매님, 그럴 수 있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실 거예요. 저도 당분간은 소리를 지르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자매님 역시, 그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셔야 해요. 주님이 도와주실 겁니다.” 
 
혜연은 엄마가 야속했다. 
 
목사는 심방을 마무리하는 기도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상처가 치유될 것이라고 강하게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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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연은 감정을 추슬러야 했다. 엄마에게 공격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평정심을 되찾기까지 꼬박 하루가 걸렸다. 
 
마트에 장을 보러 가는 길에, 차 안에서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어제 목사님 앞에서 왜 그렇게 말했어? 나 속상했어. 내가 무슨 환자 같았잖아. 엄마까지 그렇게 말하면 난 어떻게 하라고. 목사님이 나를 얼마나 오해하시겠어.” 
 
혜연의 엄마는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뭐 잘못했다냐. 니가 그래 말을 안하고 있으니까, 내가 대신 말해준 것이여! 니가 또박또박 말을 했으면, 엄마가 그리 말을 했것어? 답답하면 말을 해야지, 왜 말을 한 마디도 못 혀…. 다 커 가지고 답답해 죽것네. 그래서, 지금 엄마한테 따지고 있는 겨?” 
 
운전대를 잡고 있던 혜연은 엄마가 내던진 말에 화가 났다. 빨간색 신호 앞에서 차가 멈춰 섰을 때, 혜연은 엄마를 돌아보며 말했다. 
 
“엄마는 왜 항상 그런 식으로 말해? 나 정말 답답해.” 
 
엄마는 뒷자리에 앉아, 딸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고, 이게 뭔 일이래. 엄마가 입을 처닫고 쥐 죽은 듯이 있어야, 니 속이 편하제? 알것어. 이제 그럴 겨. 교회도 이제 너 혼자 나가 이것아. 억지로 늙은 애미 끌고 나가지 말고!” 
 
마트에 도착할 때까지, 혜연은 엄마의 푸념을 들어야 했다. 그녀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마트 사이를 거닐었고, 택배 직원처럼 식재료를 차에 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혜연의 엄마는 쉬지 않고 푸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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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어요. 교회 목사님 말씀대로, 제 상처 때문에 그런 걸까요? 이런 문제로 상담받는 게 조금 웃기지만, 상처 때문이라면 치유받고 싶어요.” 
 
나는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가, 의도적으로 무례한 질문을 던졌다. 진실에 한 걸음 다가가기 위한, 직설적인 질문이라고 말했다. 
 
“교회를 옮기고 싶은 생각은 없으신가요? 더 건강하고 따뜻한 교회도 있어요.” 
 
“아니요, 그런 생각은 전혀 없어요.” 
 
혜연은 밝은 목소리로 즉시 대답했다. 의외였다. 
 
“그럴 수는 없어요. 저는 제가 다니는 교회가 좋아요. 목사님의 말씀으로 은혜받고 있고요. 단지, 목사님의 표현 방식이 제게 고통스러운 것 같아요. 목사님이 심방 오셨을 때, 제 생각을 솔직히 표현을 못 해서 답답했던 거예요.”
 
그녀는 잠시 기억에 잠긴 듯했다. 
 
“이 교회가 저의 첫 교회에요. 여기서 예수님을 처음 만났거든요. 나는 내 발로 교회를 떠나지는 않을 거예요. 절대로 그럴 수는 없어요.” 
 
나는 마음이 울컥했다. 감동의 파장은 컸다. 나는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추슬러야 했다. 내가 아는 한, 그녀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그녀의 청량한 말투는, 먹구름 사이에서 직선으로 쏟아져 내리는 강렬한 빛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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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나 몸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아. 아기가 나오려나 봐.” 
 
예정보다 두 달이나 빨리 산통이 찾아왔다. 남편은 아내를 급하게 챙겨, 병원으로 데려갔다. 
 
“괜찮습니다. 너무 무리하신 것 같아요. 스트레스 관리를 잘하셔야 해요. 엄마가 마음이 편해야, 아이도 뱃속에서 마음 편하게 잘 지냅니다.” 
 
의사가 혜연을 안심시키며 말했다. 
 
돌아오는 길에, 혜연은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내가 극성떨어서 미안해. 당신 잠도 못하고 피곤할 텐데….” 
 
남편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혜연의 손을 꼭 붙잡았다. 
 
큰일이 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아기는 뱃속에서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두 달 뒤에 태어날 아기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부부는 행복했다.
 
일주일 뒤, 혜연에게 똑같은 증세가 나타났다. 배가 찢어질 듯 아팠다. 남편은 어제 저녁 야근으로 피곤해서 잠을 자고 있었다. 
 
혜연은 지난번의 경험을 떠올렸다. 남편을 깨우고, 병원에 가는 동안 통증이 가라앉았다. 남편을 깨워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소파에 몸을 기대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두세 시간만 버티면, 통증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여보!” 
 
남편이 부르는 소리에 혜연은 의식을 되찾았다. 눈을 뜨고, 맞이한 것은 하얀색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였다. 
 
혜연은 소파에서 의식을 잃고, 기절해버렸다. 잠에서 깬 남편이 의식을 잃은 아내를 병원으로 데려온 것이다. 
 
곧바로 수술이 이어졌다. 
 
혜연은 예정보다 이른 시기에, 아기를 받아들었다. 그러나, 그녀를 기다린 것은 축복의 메시지가 아니었다. 
 
의사는 혜연에게 끔찍한 소식을 전했다. 
 
엄마가 기절해 있는 동안, 아기는 치명적인 사고를 당했다. 산소가 원활히 공급되지 않아, 아기의 뇌가 망가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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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기다려야지. 손으로 음식을 먹으면 안 돼.” 
 
혜연의 남편은 아들에게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들은 가만히 손을 내리고, 아빠의 눈치를 봤다. 아빠가 한 눈을 판 사이에, 손으로 스팸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내려놔! 아빠가 몇 번 말했어? 손으로 음식을 집어 들면 안 된다고!” 
 
남편이 큰 목소리로 말하자, 혜연은 깜짝 놀랐다. 
 
“태호야. 아빠 말 들어야지. 엄마랑 있을 때는 잘하잖아. 조금만 기다려. 엄마가 국만 뜨고, 바로 갈게.” 
 
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식사를 마쳤다. 태호가 엄마의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주말 아침 두 시간 동안은, 마음껏 스마트폰을 쓰게 해준다는 규칙을 따른 것이다.  
 
태호가 방으로 들어가자, 혜연은 남편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여보, 내가 부탁했잖아. 소리는 지르지 말라고. 태호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깜짝깜짝 놀란다니까.” 
 
남편이 말했다. 
 
“그러게. 알면서도 잘 안되네. 답답해서 그랬어.” 
 
“아니야, 여보. 나도 심하게 말해서 미안해. 당신 같은 아빠 없어. 우리 태호가 특별한 거잖아.”
 
남편은 식탁에서 일어났다. 야구 배트와 글러브를 챙겨서 태호를 불렀다. 태호는 신이 나서, 아빠를 따라나섰다. 
 
혜연은 현관까지 걸어 나와, 남편의 볼과 태호의 이마에 차례로 입을 맞췄다. 
 
“태호랑 조금만 놀다 올 테니까, 당신도 집안일 하지 말고 눈 좀 붙여. 내가 갔다 와서 할 테니까.” 
 
“응, 알았어.” 
 
두 사람을 내보내고, 혜연은 싱크대에 서서 물을 틀었다. 수세미에 거품을 내고, 접시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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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야! 너 정말 왜 그래?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고, 엄마가 몇 번을 말해?” 
 
태호는 공중에 팔을 휘저으며, 엄마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태호를 당해낼 수 없었다. 팔을 휘젓고 몸을 비틀어서, 엄마 품에서 빠져나온 태호가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며 말했다. 
 
“엄마, 미워.” 
 
혜연은 지쳐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엄마가 왜 미워? 엄마가 얼마나 힘들게 노력하는데, 태호는 그것도 몰라?” 
 
“몰라. 엄마 나가. 엄마 내 방에서 나가.” 
 
“태호야. 엄마가 왜 나가. 제발 엄마 말 좀 들어. 엄마 힘들어서 미치겠어.” 
 
“싫어. 엄마 싫어.”
 
혜연은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어깨를 떨면서, 그 자리에서 한참을 울었다. 
 
감정을 추스르고 고개를 들어보니, 태호는 책상 밑에서 새근새근 잠에 들었다. 차분해진 아이를 품에 안아, 침대에 눕혔다. 
 
잠에 든 태호는 여느 아이와 다를 것이 없었다. 태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혜연은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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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가 오래 못 버틸 것 같아요.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겠습니다.” 
 
혜연이 피곤해 잠시 눈을 붙인 사이, 태호가 자전거를 타고 아파트 주변을 돌아다녔다. 
 
호기심이 많은 태호는 마음 가는 대로 자전거를 몰았고, 결국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도로 위를 달렸다. 
 
그러다, 거세게 달리는 레커차와 부딪혔다. 무전기로 교통사고 소식을 수신 받은 레커차가 무리한 속도로 갓길을 달리다가, 태호를 치어버린 것이다. 
 
사고가 난지 사흘 만에 태호는 세상을 떠났다. 태호가 세상을 떠나는 날, 혜연의 세상은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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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제를 처방받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 없었어요. 남편도 마찬가지였어요. 주말이면, 남편과 저는 소파에 앉아, 태호의 사진을 바라봤죠.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거예요.” 
 
혜연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했다. 기력이 없이 침대에 누워있는데, 현관의 벨이 울렸다. 
 
혜연의 반응이 없자,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교회에서 나왔어요. 잠시 문 좀 열어주실 수 있나요?”라는 말이 들렸다. 
 
혜연은 침대에 누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옆집으로 옮겨갔고, 옆집의 옆집으로 옮겨갔다. 목소리는 점차 멀어졌고, 이내 안 들리게 되었다. 
 
남편이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문틈에 꽂혀있는, 전단지 뭉치를 가지고 들어왔다. 식탁 구석으로 던져놓고, 피곤한 듯 넥타이를 풀었다. 
 
그날 밤, 혜연은 태호의 꿈을 꾸었다. 
 
꿈에서 태호는, 아픈 아이가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을 또박또박 말했다. 
 
“엄마, 자살하면 지옥 가요?” 
 
“그게 무슨 소리야, 태호야.” 
 
“내가 엄마를 너무 힘들게 하는 것 같아요. 차라리 죽고 싶어요, 엄마.” 
 
“태호야, 아니야. 그러면 안 돼.” 
 
“미안해요, 엄마. 엄마를 너무 힘들 게 해서….” 
 
“태호야….” 
 
태호는 점점 작아지더니, 어두운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혜연이 태호를 애타게 불렀지만, 태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태호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벽에 부딪혀 메아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잠에서 깼다. 눈물이 베개를 적셨다. 목이 메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거실로 걸어 나와 물 한 컵을 들이킨 혜연은 식탁 위에 놓여 있는 교회 전단지를 발견했다. 
 
푸른 초장 위에 세워진 아담한 교회 건물과 아이들이 밝게 웃는 사진이 파스텔톤으로 합성된 전단지였다. 
 
교회 이름이 익숙했다. 잊혀진 기억이 떠올랐다. 태호와 잠시 함께 다녔던 바로 그 교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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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가 교회를 좋아하네요. 자주 나오시고 그러세요.” 
 
무뚝뚝해 보이는 목사가 다정하게 말하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다. 혜연은 어색한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어린이집에 다닐 수 없는 태호가 혹시라도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 싶어 아파트 단지 내의 교회에 잠시 들렀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에게 솜사탕을 나눠주던 교회 봉사자들을 만나고, 호기심이 생긴 터였다. 
 
태호는 교회를 좋아했지만, 혜연은 교회가 편하지 않았다. 새로운 사람들을 한꺼번에 만난다는 것이, 혜연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두어 달 교회를 나가다 그만두었다. 
 
태호는 교회에 가자고 고집을 부렸고, 그때마다 혜연은 태호를 타일렀다. 
 
일요일 아침, 혜연은 늦잠을 자고 일어났다. 태호의 방문을 열었을 때, 태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남편이 부리나케 옷을 챙겨 입고 태호를 찾으러 나섰다. 혹시나 하고 교회를 찾아갔을 때, 신나게 놀고 있는 태호를 발견했다. 남편이 씻지도 않은 얼굴로 교회에 들어가 태호를 끌어안고 나오는 민망한 일이 여러 번이었다. 
 
교회 전단지를 붙잡고 있던 혜연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전단지에 합성된 이름 모를 소년과 태호의 얼굴이 겹쳤다.
 
“엄마….”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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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교회를 나갔는 때는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어요. 목사님 설교도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요. 남편이 혼자 가면 민망하니까, 함께 가준다고 해서 그나마 다행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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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연은 꾸준히 교회에 나갔다. 목사님의 설교가 조금씩 귀에 들어왔다. 아는 사람도 늘어갔다. 혜연은 용기를 냈다. 태호와 같은 또래 아이들을 가르치는 주일학교 교사가 된 것이다. 
 
교회를 나간 첫해, 여름 수련회 준비로 바빴다. 목사님은 마음이 분주할수록, 더욱 기도로 준비해야 한다면서, 교사들을 기도의 자리로 이끌었다. 여름 수련회를 앞두고, 일주일 동안 새벽 예배에 나오라고 독려했다. 
 
세 번째 날이었다. 그녀가 눈을 감고 기도하는데, 어디선가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혜연아, 많이 힘들지?” 
 
그녀는 목이 메어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고개를 숙이고 흐느껴 울 뿐이었다. 
 
그날 밤, 혜연은 수면제를 복용하지 않고, 편안히 잠들었다. 
 
주일 학교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보면서, 혜연은 생각했다. 
 
“이 아이들이 태호다. 예수님이 나에게 새로운 자녀를 맡겨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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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를 잃은 슬픔을 예수님이 위로해주셨어요. 마음이 조금 안정되나 싶었을 때, 엄마가 전화를 했죠.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혜연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아버지의 젊은 날, 가정은 쑥대밭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아내와 아이들을 두들겨 팼다. 술과 도박에 빠져, 가정은 가난에 찌들었다. 
 
혜연의 어머니는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다. 건어물 노점상을 시작해서, 죽도록 일을 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았다. 어머니가 밖에서 벌어준 돈으로 입에 풀칠을 하며 살았다. 
 
혜연은 말이 없는 아이였다. 항상 혼자였다. 그녀는 사춘기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존재감 없는 아이로 자란 것이다. 대학에 가서도, 흔한 미팅 한 번 하지 않았다. 같은 과 선배였던 남편이, 적극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면 결혼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말을 듣고, 혜연의 마음은 복잡했다. 
 
억지로 병원을 찾았던 혜연은, 막상 의식 없이 누워있는 아버지를 바라보자, 생각이 달라졌다. 
 
아버지 옆에 앉아,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혜연은 다짐했다. 
 
‘제가 아빠를 돌봐줄게요.’ 
 
의사는 ‘아버지가 의식은 깨어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혜연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혜연은 남편에게 양해를 구하고, 병원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아버지를 간호했다. 여름에 쓰러진 아버지는, 그 해 첫눈이 내리고 며칠이 지나, 세상을 떠났다. 
 
혜연은 말했다. 
 
“아빠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신 몇 달은 제게 치유의 시간이었어요. 그동안 아빠에게하지 못한 말을 마음껏 했거든요. 혼자 웃고 울고 하면서, 정말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어요. 눈을 감고 있는 아빠가 친밀하게 느껴질 정도였거든요. 나중에는 복음을 전했어요. 천국에서 아빠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요. 아버지가 복음을 듣고, 주님 품에 안기셨기를 바랐거든요.
 
그리고, 아빠에게 부탁했어요. 천국에서 우리 태호를 만나면, 아빠가 잘 돌봐주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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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연은 혼자 남은 어머니를 돌보고 싶었다. 남편도 흔쾌히 동의했다. 까다로운 시부모를 자기 부모처럼 생각해주는 아내에게 고마웠다. 예상과 달리,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힘들어진 사람은 남편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저는 엄마와 친밀하지 않아요. 같이 있으면, 너무 불편하거든요. 생각해보니까, 엄마와 함께했던 기억이 전혀 없어요. 
 
그렇게 술 주정을 했던 아빠도 나중에는 친밀하게 느껴지던데, 엄마는 왜 이렇게 어색할까요?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지겠지 했는데, 점점 심각해지는 것 같아요.” 
 
혜연의 어머니는 거친 성격이었다. 술주정하는 남편 대신 생계를 책임지고, 살림을 해야 했으니, 억세게 살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혜연은 기억했다. 
 
“엄마는 아빠처럼, 집안 살림을 부수거나 우리를 때리지는 않았지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죠. 이렇게 말하면 웃기지만, 저는 차라리 맞는 게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요. 일곱 살 때였을까요? 엄마가 소리를 지르니까, 제가 기절을 했어요. 어린애가 무서웠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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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시대가 좋아졌다고 해도, 스마트폰으로 성경을 찾는 게 지금 말이 됩니까? 북한이 쳐들어와서, 전쟁이라도 나면, 스마트폰 들고 싸울 거예요? 총 들고 싸워야 될 것 아니에요! 영적 전쟁은 그보다 더 치열한 싸움이에요. 성경을 손에서 놓으면  안 된다고요! 예배 오실 때, 성경 좀 가지고 다니세요! 말씀을 의지할 생각을 해야지,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도대체 어떻게 합니까?!” 
 
수요 예배였다. 목사는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혜연은 성경을 가지고 왔지만, 그 자리에 앉아 독설을 들어야 했다. 심장이 뛰고, 식은땀이 났다.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혜연의 엄마가 억세게 말했다. 
 
“그딴 교회를 뭣 하러 나가는 겨? 목사라는 사람이, 오늘도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피우더구먼. 나는 도대체 너 속을 모르것어. 왜 나까지 데리고 나가서, 이렇게 화병이 나게 하는 겨? 말 좀 해봐, 이것아!” 
 
그녀는 말없이 운전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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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신앙이 올바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상담을 받고 있으니까 솔직히 말하고 싶어요.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겠지만, 혹시라도 목사님이 교회 돈을 횡령하거나, 여자 문제로 교회를 쑥대밭을 만들어도 저는 교회를 떠나지 않을 거예요.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우리 태호처럼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돌보고 있어요. 세상 어느 교회를 가도, 예수님이 계시겠죠. 하지만, 우리 교회에도 예수님이 계세요.  
 
예수님만 바라보고 싶어요. 예수님처럼 어린 아이들을 사랑하면서 신앙생활 하고 싶어요. 목사님이 서툰 방식으로 성도들을 대하시더라도 이해할 수 있어요. 제가 상처가 많아서 그런 거니까요. 
 
엄마도 여자로 보면, 정말 불쌍하다는 생각을 해요. 지금까지 고생만 하셨잖아요. 저한테 투정을 안 부리면 어디 가서 그러시겠어요. 힘들어도, 이해하고 싶어요. 아빠도 전도했으니까, 엄마도 전도해야죠. 
 
제 꿈이 뭔지 아세요? 
 
천국에서 우리 가족이 다 같이 만나는 거예요.”
 
그녀는 손가락을 구부려가며, 셈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태호…. 아빠, 엄마. 남편, 그리고 나…. 천국에서 다 함께 만나는 꿈을 꿔요.”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흐느꼈다. 그리고, 부끄러운 듯 내게 물었다. 
 
“제가 이상하게 믿죠? 상처가 많아서 그런 가봐요.” 
 
나는 눈물을 머금은 채로,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내 진심이 그녀에게 전해지기 바랐다. 
 
그녀는 상처 입은 치유자다.

상처는 숨을 곳을 찾는다

“목사님, 그런 식으로 하시면, 당회가 무슨 필요가 있습니다. 절차를 밟아서 일을 진행하세요. 주변 사람들 의견도 경청하시고요. 참다 참다 말씀드리는 겁니다.” 
 
최도훈 장로가 얼굴이 시뻘게 지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옆에 앉은 동갑내기 장로가 최도훈 장로의 팔을 붙잡고 진정하라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김호열 목사는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를 어쩌나 하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장로님, 죄송합니다. 제가 장로님을 불편하게 한 것 같습니다.  진정하시고, 차분하게 대화를 해보는 게 어떨까요?”
 
최도훈 장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그딴 식으로 목회하지 마세요.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최도훈 장로의 협박스러운 말투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참다못했는지, 나이 많은 장로가 최도훈 장로에게 말했다. 
 
“이봐, 최 장로. 너무 나갔어. 그렇게 감정이 앞서면 옳은 말도 틀린 말로 들리는 거야. 일단, 자리에 앉게. 대화로 해결해야지, 이 사람아.” 
 
그리고, 나이 많은 장로는 목사님을 바라보며 말했다. 
 
“목사님, 아무래도 회의를 일찍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너무 심려 마시고, 다음 주에 만나 뵈시죠.” 
 
김호열 목사는 고개를 끄떡일 뿐이었다. 달리 다른 방도가 없었다. 
 
다른 장로들 역시 나이 많은 장로의 지혜로운 처사에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최도훈 장로만 예외였다. 나이 많은 장로에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장로님, 그런 식으로 좋은 게 좋다고 하니까, 목사님이 당회를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하는 겁니다. 나는 용납 못해요. 끝장을 볼 겁니다.” 
 
최도훈 장로는 화가 풀리지 않는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문이 부서져라 힘껏 닫았다. 쾅 하는 소리를 끝으로, 당회실은 적막해졌다. 다들 심각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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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표정이 왜 그래? 오늘 교회에서 무슨 일 있었어?”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서 들어온 최도훈 장로에게 그의 아내가 물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아내는 하던 일을 멈추고, 남편에게 다가왔다. 
 
“여보, 무슨 말 좀 해봐. 왜 그래 도대체?” 
 
남편이 말없이 TV만 응시하자, 아내는 뭔가를 눈치챘다는 듯 말했다. 
 
“오늘 당회하고 왔구나. 또 목사님한테 험한 말 했지? 이제 그만해, 여보. 당신 그거 완전히 오해라니까. 다른 사람들은 괜찮다는데, 왜 당신만 그렇게 핏대를 세우고 반대를 해?”
 
아내의 말은 그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었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리모컨을 바닥에 내던지며 소리쳤다.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거야? 그 쓰레기 같은 목사가 위선을 떨면서 앉아 있는 거 안 보여? 목사가 되기 전에, 사람이 돼야지. 기본적인 인성도 안 된 사람이 무슨 목사야? 두고 봐. 내가 그 자식을 가만히 두나. 끝까지 물고 늘어질 거야, 알겠어? ” 
 
그의 아내는 발을 동동 구르며, 울기 시작했다. 
 
“여보! 당신 완전히 오해라니까. 계속 왜 그래. 당신 그날 말하는 거지? 목사님 우리 집에 심방 오신 날? 그거 아니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 당신 정말 오해하는 거라고!” 
 
그는 아내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그딴 짓을 당하고도, 그놈을 감싸고돌아? 내 편을 안 들고, 어떻게 그놈 편을 드냐고!” 
 
그의 아내는 포기한 듯,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흐느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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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도훈은 젊은 시절, 의류 유통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세상 무서운 게 없었다. 아내가 아무리 교회에 가자고 해도, 들은 체도 안 했다. 
 
그러다, IMF를 만났다. 돈과 사람,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다. 살던 집에 빨간 색 딱지가 덕지덕지 붙었다. 옷 가지 몇 개를 챙겨 나온 게 전부였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장모님이 당분간 시골에 내려와 지내라고  설득했다. 괜찮다고 여러 번 말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모텔, 여관방을 전전하다가 시골로 내려갔다. 
 
장모님이 살던 시골집은 최도훈의 가족이 함께 살기에는 비좁았다. 마당 한 귀퉁이에 컨테이너 박스를 가져다 놓고, 온 가족이 그 안에서 생활을 했다. 가까이 지내던, 이웃이 딱한 사정을 듣고, 컨테이너를 잠시나마 빌려준 것이다.  
 
시골에 내려온 그날부터, 그의 아내는 새벽마다 교회에 가기 시작했다. 밤새 한숨도 잘 수 없었던 최도훈은 아내의 인기척을 느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말없이 아내를 따라나섰다.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걷게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시골 교회 새벽 예배의 풍경은 가관이었다. 피곤에 쩔은 목사가 대충 설교를 하는데, 앉아서 듣는 사람이라고는 머리가 새하얀 노인  세 사람뿐이었다. 그중 한 사람은  장모님이었다. 어이가 없었는지, 최도훈은 피식 웃고 말았다. 
 
목사의 설교가 끝나고 교회 안이 어두워지자 아내가 소리 없이 울었다. 그의 마음이 뭉클했다. 아내가 기도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내는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돈을 실컷 벌어다 줄 때는, 아내가 마음 편히 사니까 교회 나가서 교양이나 떠는 줄 알았다. 사업이 망한 후에도 한결같이 신앙생활을 지속하는 아내에게 숙연한 감정을 느꼈다.
 
사업할 때는, 사업으로 바쁘다고 아내를 돌봐주지 못했다. 사업을 하지 않는 지금은, 그야말로 돈이 없어서 아내를 돌봐주지 못한다. 아내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아내가 진심을 다해, 기도하는 소리를 듣게 되자, 그의 눈이 촉촉해졌다. 어딘가, 신이 존재한다면, 바지 가랑이라도 붙잡고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그의 마음이 열렸다. 처음에는 새벽어둠 속에 자신을 숨기고 민망한 듯 교회에 나갔지만, 이내 조금씩 용기가 났다. 밝은 낮에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에 나간 것이다. 
 
모든 것이 어색했지만, 마음을 활짝 열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몸과 마음이 새롭게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의 인생을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최도훈은 농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지만, 유통에 밝았다. 인터넷이 활성화되던 시기를 기회로 잡고, 직접 재배한 농작물을 고객에게 직접 유통했다. 수익은 고스란히 사업의 규모를 키우는데 투자했다. 땅을 사고, 재배량을 늘리는 일에 집중했다. 
 
그러다, 뉴스에서 신도시 계획을 듣게 되었다. 소파에 앉아 뉴스를 보고 있던 그는, 아내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가 사 모은 땅은  기하급수적으로 가격이 올랐고, 땅을 매각해서 큰돈을 벌었다. 
 
상가 건물 몇 채를 사들였다. 임대료 수익으로 먹고 살 수 있게 되자, 제법 시간이 많아졌다. 자연스럽게 교회 이곳저곳에서 봉사할 일이 늘어났다. 그는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었다.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었다. 
 
사람들도 그의 진심을 알았는지, 그는 어느덧 장로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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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업이 번창하듯, 교회 역시 성장했다. 신도시가 조성되고 사람들이 몰려들자, 교회는 두 번에 걸쳐 넓고 좋은 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김호열 목사는 예배시간에 중대한 발표를 하겠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기도 중에, 교회 건축을 하라는 응답을 받았다고 했다. 성도들은 비좁고 불편한 상가 건물이 불편했던 터라, 담임 목사의 기도 응답에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최도훈 장로는 심기가 불편했다. 다른 장로들의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표정을 제대로 읽어낼 수 없었다. 표정이 모두 제각각이었다. 
 
김호열 목사는 예배를 마치고, 당회를 열었다. 당회에서 겸손한 태도로 장로들에게 사과의 말을 먼저 덧붙였다. 장로님들과 먼저 상의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이었다. 
 
그러고 나서, 나름의 논리로 장로들을 설득했다. 높아지는 임대료와 몰려드는 사람들을 계산했을 때, 땅값이 더 오르기 전에 서둘러 교회를 짓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논리였다. 
 
가만히 목사의 말을 경청하던 장로들 사이에 냉랭한 기운이 돌았다. 이치에 맞는 말이었지만, 손뼉을 치면서까지 동의할 내용은 아니었던 것이다. 
 
최도훈 장로는 참았던 말을 하고 말았다. 
 
“목사님, 땅값이 오르기 전에 교회를 서둘러 지어야 한다는 말이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에, 김호열 목사는 당황했다. 그리고, 어색하게 웃으며 답변했다. 
 
“장로님, 성경에 그런 말은 안 나옵니다. 지혜로운 선택을 내리자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지 않았습니까? 성경을 잘 풀고 해석해서 지혜로운 선택을 내려야지요.” 
 
최도훈 장로는 물러서지 않았다. 목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곧바로 되물었다. 
 
“성경 어느 구절을 해석하면, 그런 지혜가 나옵니까?”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김호열 목사는 한 걸음 물러섰다. 
 
“아이고, 장로님. 제가 장로님 심기를 불편하게 했나 봅니다. 제가 죄송합니다.” 
 
최도훈 장로는 다른 장로들을 둘러보며,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장로님들, 어떻게 이런 말을 듣고 가만히 계십니까? 땅값 오르기 전에 땅을 사서 교회를 짓자는 게 말이 됩니까? 이게 땅 투기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지, 목사님이 하실 말씀이냐고요?” 
 
김호열 목사의 이마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수습해야 했다. 이대로 당회를 마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차분한 어조로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제 말에 오해가 있으신 것 같아요. 제가 조금 더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교회 건축, 안 해도 됩니다. 불편해도 그냥 참고 지내면 되는 거예요. 
 
하지만, 다음 세대는 어떻게 합니까. 아이들이 예배드리는 곳을 한 번 둘러보세요. 아주 난리예요. 교회마다 아이들이 없어서 고민인데, 우리는 아이들이 너무 많이 와서 걱정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아이들이 생각납니다. 아이들이 마음 편하게 예배드리는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요. 
 
그래서, 어려운 말씀드린 겁니다. 교회 건축 안 해도 되니까, 제발 노여움 푸세요.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김호열 목사의 말을 듣고, 다른 장로들은 공감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장면을 본 최도훈 장로는 미칠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목사의 멱살이라도 움켜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야, 이 가식적인 놈아. 말만 그럴듯하지. 나는 네놈의 실체를 다 알고 있어. 이 쓰레기 같은 놈아.” 
 
마음속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최도훈 장로는 그런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오랜 시간, 가슴에 담아둔 말이었다. 세상 그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그는 잊지 못했다. 김호열 목사가 자신의 눈앞에서 저지른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집사님, 저와 같이 심방을 가셔야 할 것 같아요.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신가요?” 
 
같은 마을 김 씨가 교회에 등록했다. 서울에서 반듯하게 살다가,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시골에 내려온 것이다. 김 씨가 시골에 내려온다는 소식을 온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김 씨는 도시로 유학을 떠났다. 혼자 공부해서 어렵다는 사관학교에 들어갔다. 별을 달고 예편해서 군수물품을 제조하는 중소기업의 임원이라고 했다.   
 
김 씨는 2층짜리 전원주택이 완공된 다음에 심방을 받고 싶다고 했다. 목사님을 누추한 곳에 모실 수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김호열 목사는 남자 성도가 귀한 마당에, 외지에서 내려와 시골에서 잘 정착한 최도훈이 김 씨에게 좋은 말벗이 되어줄 것이라 했다.  
 
김호열 목사가 최도훈에게 김 씨의 집에 함께 심방을 가자고 제안한 이유였다. 
최도훈은 목사의 말을 따를 생각이 없었다. 며칠 전, 길에서 김 씨를 만나지 않았다면, 절대로 목사와 마주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이, 자네. 목사님 심방 오실 때, 같이 올 거지? 내가 귀한 음식 차릴 거니까, 자네도 꼭 와. 절대 후회 안 할 거라고.” 
 
최도훈은 마지못해 알겠다고 말했다. 심방 당일, 김호열 목사와 심방 전도사, 그리고 최도훈 장로와 그의 아내가 김 씨의 집을 방문했다. 
 
간단히 예배를 드리고, 음식을 대접받았다. 김 씨의 말은 허세가 아니었다. 잔치라도 벌어진 듯, 온갖 음식이 나왔다. 김 씨는 목사님에게 말했다. 
 
“목사님, 이것 좀 드셔보세요. 이게 뭐냐면요. 과메기라는 거예요. 제 친구가 포항에 사는데, 이게 딱 한 철에만 나오는 거라, 그 동네 사람에게도 귀한 음식이라고 하네요. 철마다 친구가 보내주는데, 저는 이거 먹는 게 한 해의 낙이랍니다.” 
 
김호열 목사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그래요?”라고 물었다. 들뜬 얼굴로 과메기를 미역에 싸더니, 초장에 찍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다른 사람들이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특히, 김 씨가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그러나, 최도훈은 웃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김 씨는 집안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김호열 목사는 “그럼, 그럴까요?”라는 말과 함께 심방 전도사에게 눈빛을 보냈다. 심방 전도사는 전화기를 들고, 거실 구석으로 가더니, 다음 심방을 뒤로 미루는 듯 보였다. 서로 이야기가 잘 되었는지, 밝은 표정으로 김호열 목사에게 “편안히 보셔도 될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김 씨의 안내로 집안 구석구석을 들여다봤다. 그러다, 2층 서재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김 씨가 만년필을 수집하는지, 유리로 된 장식장에 다양한 만년필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서글서글 대충대충 보이던, 김 씨의 이미지가 한순간에 바뀌던 순간이었다. 
 
함께 서 있던 모든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만년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김 씨가 입을 열었다. 
 
“목사님, 관심 가는 물건 있으시면, 하나 골라보세요. 다 제 자식 같은 놈들이지만, 목사님께 하나 드리려고 생각해서 오늘 오시라고 했습니다. 걱정 마시고, 하나 골라보세요.”
 
김호열 목사는 거듭 사양했지만, 김 씨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만년필 하나를 집어 들었다. 김 씨는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봤다. 
 
김호열 목사가 차에 올라타서, 김 씨의 집을 떠나려고 하자, 김 씨는 농담처럼 목사에게 말했다. 
 
“목사님, 역시 보는 눈이 있으세요. 지금 타고 가시는 자동차보다 비싼 녀석을 주머니에 넣고 가시는 거예요. 오래오래 간직해주세요.” 
 
김호열 목사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감사하는 말을 두세 번 내뱉었다. 김호열 목사가 돌아간 뒤, 최도훈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세 시간이 넘도록 김 씨에 집에 머문 것이다. 최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실룩거리며 말했다. 
 
“쓰레기 같은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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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도훈이 아내를 따라, 교회를 나간지 얼마 되지 않아, 목사님이 심방을 오신다고 했다. 최도훈은 컨테이너 박스에서 누추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아내는 남편을 여러 번 설득했다. 
 
“여보, 목사님이 무슨 성도들이 얼마나 잘 먹고 사나 보시는 줄 알아? 그런 거 아니야. 편안하게 생각해.” 
 
최도훈은 마지못해 심방을 받기로 했다. 
 
막상 심방을 받게 되자, 목사님이 방문하기 며칠 전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설레었다. 
 
최도훈의 마음이 힘들 때마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에 딱 맞는 설교 말씀을 해주시는 목사님에게 고마웠다. 교회에서 데면데면 할 때는 민망해서 표현을 못 했지만, 심방을 받을 때는 제대로 감사하다는 말을 할 작정이었다.  
 
없는 돈에, 나름대로 저녁 상을 차리고 목사님을 기다렸다. 시간에 맞춰, 김호열 목사가 나타났다. 
 
컨테이너 박스에 들어선 김호열 목사는 안을 들여다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컨테이너 박스도 잘 꾸미니까 그럴 듯하군요.” 
 
무슨 의도였는지는 모르지만, 단 번에 최도훈의 기분이 상했다. 그의 아내는 속도 없는지, 다정한 말투로 목사에게 말했다. 
 
“옆집에서 쓰던 거 잠시 빌려주셨어요. 이렇게라도 살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하죠. 하나님 은혜에요, 목사님” 
 
김호열 목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두 분 고생하시는 거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렇게 좋은 마음 가지고 계신데, 하나님께서 좋은 집으로 인도해주실 거예요.” 
 
아내는 손뼉을 치며, 아멘이라고 말했다. 최도훈은 이게 뭔가 싶었다.  
 
김호열 목사는 성경을 펴고, 말씀을 한 줄 읽었다. 그리고는, 잠시 동안 설교했다. 그리고는,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아이고, 죄송합니다. 다음 심방이 있어, 이만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아내가 최도훈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아내 눈치를 살피던, 최도훈은 어색하게 웃으며 김호열 목사에게 말했다. 
 
“목사님, 저녁 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차린 건 별로 없지만, 목사님 오신다고 식사를 준비했어요. 금방  차릴테니까, 5분만 드시고 가세요.”
 
김호열 목사는 정중히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무리하게 일정을 잡았나 봐요. 시간이 조금씩 뒤로 밀려서, 이렇게 됐습니다. 이해 부탁드리겠습니다, 형제님.”
 
아쉬운 마음에 최도훈은 “설교 참 감사합니다. 많이 위로받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김호열 목사는, “제가 감사하지요.”라는 말과 함께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김호열 목사가 최도훈의 집에 도착해 차를 타고 떠나기까지 십오 분이 걸렸다. 교회의 모든 것이 낯설었던 최도훈은 아내에게 물었다. 
 
“여보, 목사님이 시간이 철저하신 분인가 봐. 15분 단위로 사람을 만나네. 나는 사업할 때, 저런 식으로 안 했는데. 사람들이 좋아할까? 나는 기분이 별로야.” 
 
아내는 남편을 꾸짖듯이 말했다. 
 
“당신이 몰라서 그래. 목사님들이 얼마나 바쁘신데. 휴일도 없이 저렇게 일하시는 거야. 당신이 옆에서 많이 도와드려.” 
 
최도훈은 끝내 시계를 들여다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원래 저런 거야, 아니면 나를 무시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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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도훈은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리며, 나에게 말했다.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시간이 흐르니까, 말도 안 되는 일을 당한 거예요. 앞뒤를 맞춰보니까, 완전히 무시를 당한 거죠. 
 
그 목사는 내 사업이 성공할지 몰랐을 거예요.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관심도 없었겠죠. 
 
그날 컨테이너 박스에서 가난하게 사는 나를 보면서,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죠. 별 볼 일 없는 내가 장로까지 되었으니 얼마나 당황스러울까요.
 
표현은 못 해도 아마 속으로 미칠 지경이겠죠. 장로가 항존직이라고 그랬나요? 한 번 직분을 받으면, 죽을 때까지 유효하다면서요? 어디 보세요. 내가 끝까지 괴롭혀 줄 거니까.”  
 
그는 화가 나서,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그 손으로 테이블이라도 내리칠 것만 같았다. 
 
그가 꽉 움켜쥔 손에 무엇을 숨겼는지 궁금했다. 그는 스스로 손을 펴지 못했다. 움켜쥐는 것으로 근육이 적응했을 것이다. 상처는 언제나 숨을 곳을 찾는다. 그의 상처는 분노 뒤에 숨었다.  
 

 
“난 고아였어요. 부모님의 얼굴을 알지 못해요. 부모도 없는 게, 싸가지도 없었는지, 12살에 고아원에서 쫓겨났어요. 
 
밤낮으로 나를 괴롭히는 친구가 있었어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 친구 손등을 망치로 내려쳤거든요. 고아원 원장한테 뺨 한 대 얻어맞고, 그날로 쫓겨났죠. 그 녀석이 원장님 아들이었거든요.  
 
고아원에서 쫓겨나서, 개처럼 살았어요. 구걸도 해보고, 도둑질도 해봤는데 이건 아니다 싶더라고요. 동대문에서 트럭에 옷을 실어주는 일을 했는데, 거기 사장님이 날 좋게 본 거죠. 
 
일을 가르쳐 주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정도 먹고살게 됐고, 아내도 만나고 그랬죠. 
 
사장하고 잘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사장이 날 보는 눈빛이 이상해요. 알고 보니까, 거래처 사람들이 이간질을 하고 있더라고요. 아니, 자기 밑에서 뼈빠지게 일하는 내 말을 안 믿고, 계산기나 두드리는 그런 사람들을 믿는 게 말이 되나요. 기분 더러워서 당장 그만뒀어요. 
 
보란 듯이 성공해서,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마음먹었죠. 더 좋은 조건으로 그 사장의 거래처를 내가 다 빼앗아 왔어요. 거래처 사장들은 내가 잘 데리고 있다가, 물량을 확 끊어버려서 망하게 했고요. 다른 곳에서도 내 눈치 보느라 그쪽에 납품 안 했어요. 나한테 잘못 보이면, 끝장난다는 소문이 업계에 돌았죠. 
 
내가 왜 이런 성격인가 생각을 해봤어요. 연관성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기억이 났으니까 일단 이야기를 해볼게요. 
 
그 고아원 원장 있죠? 아이들 열 명 정도 데리고 있었는데, 완전히 위선 덩어리였어요. 거기 오는 후원자들 중에 잘 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 있는데, 유독 잘 사는 사람한테 그렇게 잘했어요. 
 
어려운 살림에 쌀 20Kg짜리 하나 어깨에 짊어지고 온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앞에서는 감사하다 뭐다 갖은 말을 다하더니, 그 사람 가니까 표정이 싹 변해요. 
 
“요즘 세상에 누가 쌀을 줘. 돈으로 가져와야지. 이거 몇 푼이나 한다고 생색을 그리 내. 내가 자존심이 상해서, 이 짓도 못해 먹겠다, 진짜.” 
 
돈 많은 집에서 후원하러 오잖아요. 그러면, 신발도 안 신고 마당으로 뛰어나가서 인사를 해요. 그거 보고 있으면, 구토가 나오죠. 나는 그 여자 사람으로 안 봤어요. 
 
그 아들자식은 고아원 애들 후원 들어온 걸로, 아주 호강을 했어요. 어린 제 눈에는 없는 게 없는 걸로 보였으니까요. 그 자식이 심심풀이로 애들 때리고, 괴롭히고 그래도, 아무도 말 못 했죠. 
 
그놈하고 싸움 붙는 놈은, 가차 없이 쫓겨나거든요. 갈 곳 없는 어린애들이 어쩌겠어요. 그냥 참는 거죠. 
 
자고 있는데, 그 자식이 내 발가락에 불침을 놨어요. 발가락 사이에 휴지를 끼워서 불을 붙이면, 화상을 입죠. 여름이었는데, 물집이 잡히고 터지고 곪아서 걷기도 힘들더라고요. 그만두라고 해도, 계속 그 짓을 해요. 발가락이 성할 날이 없었어요. 
 
자다가 느낌이 이상해서 깼는데, 또 그 짓을 하고 있어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 되었죠. 당장 죽여버릴 생각으로 망치를 가져왔어요. 차마, 죽일 수는 없어서 손등을 내려친 거죠. 
 
지 자식이 아프다고 울고불고 하니까 원장이 깜짝 놀라 잠에서 깼죠. 지 자식을 끌어안고, 내 뺨을 때리더라고요. 그 새벽에 날 쫓아낸 거죠. 홧김에 불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다른 애들 때문에 참았죠. 그 아이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아직도 가끔 그날이 생각나요. 그 쓰레기 같은 원장 얼굴도 떠오르고요.” 
 
그의 말을 듣고, 잠시 동안 내 생각을 전해주었다. 그는 긴 한숨을 쉬더니, 한참을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흥미롭네요. 원장에게 쓰던 쓰레기라는 말을 목사에게 같이 쓰고 있네요. 생각지도 못했거든요.” 
 
그는 여유를 되찾았는지,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에효. 목사도 사람인데, 그럴 수도 있죠. 나도 뭐 사람인데요. 예수님 앞에서 도토리 키재기죠. 사람한테 뭐 기대할 게 있겠어요. 다 부질없는 짓이죠. 이제 교회에서 목사하고 싸움박질하는 것도 지쳤어요. 때가 되면 떠나야죠. 
 
소박한 꿈이 하나 있거든요. 시골 마을에 조용하고 따뜻한 고아원 하나 짓는 거예요. 사실, 아내와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나처럼 부모 없는 아이들, 갈 곳 없는 아이들, 상처받지 않도록 잘 키워내고 싶어요. 
 
그렇게 하려면, 제 상처부터 먼저 치유해야겠지요?”
 
최도훈은 그의 꿈을 말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의 머리카락에 하얀 새치가 드문드문 보였지만, 내 눈에는 그가 12살 꼬마로 보였다. 그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아주었다. 그는 아주 잠시 동안 나를 끌어안고, 아이처럼 울었다.

내 목소리 기억나?

“내 목소리 기억나?” 
 
문득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번호였고, 낯선 목소리였다. 
 
“잘 모르겠어요. 누구시죠?” 
 
애써 친절하게 말했다. 혹시라도, 실수할까 걱정스러웠다. 아는 사람의 전화번호를 저장하지 않고 있다가 서운하게 한 일이 종종 있었다. 
 
“나 기억 못 하나 보네. 나 민혁이야. 정민혁.” 
 
그의 이름을 들었을 때, 내 시간은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비디오테이프를 거꾸로 감듯이, 온 세상이 삐리릭 거리며 빠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의 목소리가 나를 십 년 전 어느 날로 잡아당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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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사람이 죽는 걸 직접 본 적 있어? 난 본 적 있거든. 정말 무섭더라. 
 
내 눈앞에서, 아빠가 농약을 먹고 자살을 했어. 며칠 전부터 이상하더라고. 갑자기 나한테 통장이랑 도장을 주면서 비밀번호를 알려줬어. 뭔가를 결심한 눈빛이었고.
 
일요일 아침이었는데, 마당에서 우당탕 소리가 났어. 깜짝 놀라 뛰어나갔지. 문을 열고 보니까, 아빠가 입에 거품을 물고 비틀거리고 있더라고. 
 
아빠와 눈이 마주쳤는데, 아빠의 눈빛을 아직도 못 잊겠어. 아빠가 바닥에 쓰러졌는데, 눈을 감지 않았어. 차갑게 천천히 식어갔지. 그때 나는 얼어붙어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어. 눈물조차 나지 않더라고. 
 
한참 동안 멍하게 서 있다가, 아빠에게 천천히 다가갔어. 내 손으로 아빠의 얼굴을 쓸어내렸어. 아빠의 눈을 감겨주려고. 시뻘겋게 충혈된 아빠의 눈이 무섭기도 했고, 마지막까지 날 바라보던 아빠의 눈이 슬프기도 했고. 아빠의 눈을 감겨주는데, 눈물이 울컥 나더라고.” 
 
통장의 돈은 백만 원 남짓이었다. 중학생 용돈으로는 큰돈이었을지 몰라도, 소년 가장의 생활비로는 물 한 방울처럼 적은 돈이었다. 석 달 만에 통장의 모든 돈이 사라졌다. 
 
시골 마을, 인심은 좋았다. 민혁이가 불쌍하다며, 마을 어른들이 먹을 것을 가져다줬다. 그러나, 그 또한 잠시뿐이었다. 마을 어른들은 민혁이를 오롯이 돌볼 수 없었다. 마을 이장님은 기관을 알아봐 주었다. 
 
마땅한 기관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 옆 마을에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소식이 이장님 귀에 전해졌다. 이장님은 한 마디 예고도 없이, 옆 마을 어른과 민혁이를 찾아왔다. 민혁이는 대충 짐을 싸서, 그 아저씨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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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아, 이번에 조사 나오면, 보일러가 고장 나서 네 집에서 살 수 없다고 말해. 그러면, 보상금 나오거든.”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민혁이는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날 밤, 아저씨 가족은 차를 몰고 시내로 나가 자기들끼리 외식을 했다. 
 
민혁이는 창고처럼 간단히 꾸며진 공간에 우두커니 혼자 남겨졌다. 차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민혁이는 밖으로 나가 인사를 했다. 
 
차 문이 열리자, 숯불에 구워진 고기 냄새가 민혁의 콧구멍을 찔렀다. 차에서 흘러나온 진한 고기 냄새는 매정했다. 민혁의 몸에 밴 라면 냄새를 한 꺼번에 몰아냈다. 
 
자기 이름으로 들어오는 지원금을 아저씨가 가로채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민혁이는 그 집을 나왔다. 석 달 만이었다.
 
갈 곳이 없어진 민혁이는 여기저기 전전했다. 그러다, 시내의 작은 교회 목사님을 만났다. 아주 잠시 동안이라도 머물 곳을 찾은 것이다. 
 
학교에서 만나는 민혁이는 항상 밝았다. 책을 좋아했고, 글을 잘 썼다. 창의적인 방법으로 친구들을 웃겼다. “훈민정음 2”라는 민혁이의 노트가 교실 안을 돌아다녔다. 민혁이는 한글을 조합해서 새로운 글자를 만들었다. 친구들은 그 문자를 발음하기 위해서 애를 썼다. 아무도 “훈민정음 2”에 기록된 문자를 제대로 발음할 수 없었다. 민혁이는 새로운 문자의 창시자였다.  
 
나는 그런 민혁이가 신기해 보였다. 운동장 귀퉁이에 앉아 과자를 까먹으면서 “나중에 뭐가 되고 싶냐?”라고 넌지시 물었다.   
 
민혁이는 돈을 많이 벌어서, 한국에서 제일 큰 서점을 열고 싶다고 했다. 4층으로 지어서, 층마다 다르게 꾸미고, 마치 다른 나라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싶다고 했다. 시골 마을을 벗어나 본 적 없는 민혁이는 세계를 동경하는 듯했다. 나는 꿈마저도 창의적인 민혁이가 부러웠다.  
 
그 후 추운 겨울이 찾아왔고, 우리는 중학교를 졸업했다. 민혁이는 일을 하면서,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산업체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날 이후, 민혁이와의 소식은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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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 그럼 목사 되는 거야?”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민혁이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나를 현재의 시간으로 돌려놓았다.
 
“어쩌다 그렇게 됐네.” 나는 피식 웃었다. 
 
민혁이의 기억이 그 당시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면, 기가 막힐 노릇이었을 것이다. 민혁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내가 겪은 일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사용하는 종교의 언어는 어쩌면 그에게 “훈민정음 2”처럼 낯설게 들렸을지 모른다. 
 
민혁이는 결국 통화하게 된 목적을 말했다. 
 
“야, 사실 내가 조금 이상한 것 같아.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른 것 같거든. 오래전부터 네가 생각나더라. 너를 만나면 왠지 대답을 해줄 것 같아서. 우리 시간 내서 잠시 볼 수 있을까?”
 
물론이었다. 나 역시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민혁이를 보고 싶었다. 민혁이는 자신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고, 나는 바로 그다음 날, 민혁이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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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이가 있던 곳은 도봉산역 근처 구석진 판자촌이었다. 주유소에서 밤낮으로 일하고, 집에 들어가 잠시 눈을 붙이는 삶을 반복하고 있었다. 
 
집이라고 해봐야,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신발을 벗으면 곧바로 방이었는데, 한 사람이 누우면 머리끝과 발끝이 벽에 닿을 지경이었다. 한 사람이 누워서 양쪽으로 팔을 벌릴 수 없을 만큼 폭이 좁았다. 
 
좁은 방에 들어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민혁이가 담배를 꺼내 깊이 한 모금을 들이마셨다. 가슴속에 간직한 비밀을 연기로 건져올리듯, 그는 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토끼 가면이 잊혀지지 않아. 그날 밤 끔찍한 일이 있었거든. 그 사건 이후로, 뭔가 잘못된 것 같아.”
 

 
“아빠가 내 앞에서 농약을 먹고 눈앞에서 죽은 이후로 내가 지낼 곳이 없었어. 사기꾼 같은 놈한테 이용당하다, 시내에 어떤 교회 목사님을 만났지. 
 
목사님이 친절하시더라고. 교회 구석진 곳에 작은 공간이 있었는데, 나보고 거기서 먹고 자고 하라고 했어. 내가 갈 데가 어디 있었겠어. 이래저래 고맙더라고.   
 
일주일이 지났나. 밤에 자고 있는데,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교회에 기도하러 왔나 보다 생각했지. 뒤돌아 누워 자려고 하는데, 방문이 열리는 거야.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어. 
 
덩치 큰 남자가 토끼 가면을 쓰고 있었어. 그 남자가 날 덮치고 강간했어. 지금이라면, 볼펜이라도 들어서 그 사람 목이라도 찔렀을 텐데, 그때는 너무 무섭기만 했어. 뒤돌아 울면서, 끔찍한 시간이 끝나기만 바랐지. 
 
다음 날 아침, 바로 그곳을 나왔어. 그대로 있다가는 똑같은 일을 당할 것 같아서.
 
그런데, 문제가 뭔지 알아? 밤마다 토끼 가면이 떠오른다는 거야. 밤이 되면, 생각나. 불을 끄고 잘 수가 없어. 저기 저 문이 갑자기 열릴 것 같거든. 밤이 되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발자국 소리도 무서워.”
 
내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떨어졌다. 눈물을 숨기려 눈을 비볐다. 민혁이는 방 안에 가득 찬 담배 연기 때문인 줄 알고,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작은 창문조차 달려 있지 않는 방이었다. 손으로 휘휘 저어 연기를 내보내면서, 민혁이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나한테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남자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거야. 지금까지 세 번 정도 여자를 사귀어 봤거든. 당연히, 같이 자 본 적도 있지. 생각보다 별로였어.” 
 
민혁이는 양쪽 팔소매를 어깨까지 걷어올렸다. 그리고, 뒤돌아서서 상의를 벗어서 등짝을 드러냈다.      
 
팔부터 시작된 문신은 어깨를 타고 등판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날카롭게 발톱을 드러낸 용이, 화가 난 듯 코에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여자에게 감정을 못 느끼니까, 엄청나게 불안한 거야. 야, 이거 뭐가 잘못됐다. 그래서, 몸에 그림을 좀 그렸어. 나 남자다, 뭐 이런 거? 조금은 나아질 줄 알았거든. 그게 아니더라고. 문신을 이렇게나 크게 그렸는데도 불안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 도로 한가운데를 미친놈처럼 달렸지. 한참을 뛰다가, 지쳐서 바닥에 주저앉았어. 손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거야. 문신한 자리에서 땀처럼 피가 나더라고. 맨살을 바늘로 찔러대니 그런 거지.”
 
민혁이의 말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지하철 막차가 올 시간이 돼서야, 나는 시계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하철역까지 날 바래다주면서, 민혁이가 말했다. 
 
“어릴 때부터 있잖아. 너를 만나면, 마음이 참 편했어. 오늘도 그래. 해결된 건 없지만, 오늘 하루는 마음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민혁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음 주 이 시간에 다시 올 테니까, 그때는 잠시 동안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민혁이는 기뻐하는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좋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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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이에게 가는 길은 짧지 않았다. 나는 상록수역에서 지하철을 탔고, 도봉산역에서 내렸다. 거의 두 시간 거리였다. 민혁이를 보러 가는 날에는, 하루를 온전히 비워야 했다. 
 
나 역시 계속되는 아르바이트와 대학생활로 몸과 마음이 피곤한 상태였다. 시간과 돈이 빠듯했지만, 민혁이를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민혁이를 만나면, 먼저 짜장면을 사줬다. 그리고, 예수님을 전했다. 그에게는 “훈민정음 2”라고 여겨질 만큼 낯설고 불편한 것이었지만, 나는 우정이라는 강력한 신뢰의 다리 위로 끊임없이 복음을 실어 날랐다. 
 
어느 날, 심각해진 민혁이가 담배를 입에 물고, 성경을 뒤적거렸다. 그의 손이 빨라지면서, 담뱃재가 성경에 떨어졌다.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손으로 대충 털어내면서 말했다. 
 
“여기 나오는 이야기를 어떻게 믿냐? 너는 이게 믿어지냐?” 
 
나는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믿으니까, 믿어보라고 말하지 않겠어?”  
 
민혁이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믿는 거 맞아?”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랐다. 나는 엄마 몰래 사탕을 훔쳐 먹은 아이처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댔다. 
 
당시, 나는 신학교 2학년이었다. 나는 신앙의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열여섯 살에 회심하고, 성경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단순하게 믿었던 나는, 신학교에서 배운 지식으로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면서, 다른 종교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내 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았다. 부끄러운 감정을 숨기려고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내가? 아니야. 내가 못 믿는 걸 어떻게 너한테 말해.” 
 
민혁이는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 담배 연기를 내 얼굴에 내뱉으며 말했다. 
 
“가면 벗어, 자식아.” 
 
그 순간, 나는 민혁이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그를 덮쳤던 토끼 가면과 나를 동일시 하다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멱살을 잡고 앞뒤로 흔들면서, “어디서 감히, 그딴 놈과 나를 비교해? 내가 그딴 놈이랑 같냐?”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민혁이는 방문을 열어젖히고 말했다. 
 
“오늘은 그냥 가라. 다음부터는 다른 이야기하자. 성경 이야기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나는 그날 밤, 무기력하게 민혁이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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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가 지나고, 나는 민혁이를 다시 찾아갔다. 지난번 일을 사과하고 싶었다. 확신 있게 믿게 되면, 다시 찾아올 테니, 당분간 잘 지내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민혁이는 주유소에 없었다. 같이 일하는 직원에게 “민혁이 어디있냐”라고 물었다. 직원은 밀려드는 자동차를 혼자 감당하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몰라요. 며칠째 말도 없이 안 나와요. 일 좀 제대로 하라고 말해주세요. 힘들어 죽겠어요.”
 
불길했다. 민혁이의 집으로 냅다 뛰었다. 도착하자마자, 그의 집 문을 거세게 열었다.
 
문을 열고, 내가 마주한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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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이는 나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애원하듯 내게 말했다.  
 
“여기 전기장판 코드 좀 빨리 뽑아줘.”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민혁이가 시키는 대로, 전기장판 코드를 뽑았다. 코드를 꽂는 곳은, 민혁이 발치에 놓여있었다. 
 
민혁이의 등이 전기장판의 전선 자국을 따라 하얗게 타들어간 상태였다. 등 전체는 열에 타서 시커멓고, 전선이 직접 닿은 곳은 오징어처럼 하얗게 익어버린 것이다.
 
민혁이가 말했다. 
 
“며칠 전에 허리가 너무 아픈 거야.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어. 병원에 갔더니, 허리가 심각하게 망가졌데. 절대로 일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하더라. 불구로 살 수 있다고 하는 말에 충격을 받았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데, 어떻게 쉬겠어. 나가서 일했지. 그다음 날,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픈 거야. 아예 일어나지도 못하겠어. 이틀 동안 꼬박 누워서 아무것도 못 했어. 몸을 일으킬 수도 없었으니까.
 
뜨거운 열로 지지면 조금 나아질까 싶어서 전기장판을 최대로 하고 잠에 들었어. 뭔가 이상해서 눈을 떴는데, 연기가 나는 거야. 내 등이 타고 있는지 누가 알았겠어. 
 
오늘 아침부터 옆으로 몸을 돌리고 누워 있었어. 합선이 된 건지, 전원이 안 꺼지더라고. 너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날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 주유소에서 같이 일하는 직원들도 내가 어디 사는 지 몰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민혁이를 데리고 병원에 갈 수도 없었고, 며칠 동안 먹고살라고 돈을 쥐여줄 수도 없다. 무능했다. 한숨을 내쉬며, “미안하다”라고 말했다. 
 
민혁이는 내 손을 잡아주며, “미안하기는 뭘 미안해. 네가 와줘서 난 고맙기만 한데.”라고 말했다. 
 
나는 민혁이의 손을 꼭 잡으며 물었다. “내가 기도를 한 번 해도 될까? 내가 너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잠시 동안, 묘한 긴장이 흘렀다. 민혁이는 생각 끝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라고 했다. 
 
나는 민혁이를 돌려 눕혔다. 민혁이의 허리에 살며시 손을 얹고 기도를 시작했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민혁이는 반드시 나아야 했다. 낫지 않으면 굶어죽을지도 몰랐다. 내가 의심하는 하나님이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도와주셔야 했다. 하나님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했다.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떼를 쓰며 기도했다. 
 
온몸이 땀에 젖었다. 사력을 다해 기도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몰랐다. 기도 마지막에 비장한 각오로 선언하듯, 말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한다. 일어나, 걸어라.” 
 
민혁이는 고개를 돌려, 날 쳐다보며 물었다. 
 
“이제 일어나면 되는 거야?” 
 
나는 긴장한 채로, 말했다. 
 
“천천히 일어나 봐. 다칠 수도 있으니까.” 
 
민혁이는 고개를 떨구고, 민망한 듯 말했다. 
 
“나 못 일어나겠어. 허리가 너무 아파.” 
 
나는 화를 내듯 말했다. 
 
“그럴 리 없어. 도무지 말이 안 된다고.” 
 
민혁이는 당황했다. 
 
나는 민혁이 허리에 손을 얹고 다시 기도했다. 목이 쉴 정도로 큰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더 이상 기도를 할 수 있는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민혁이가 돌아보며, 물었다. 
 
“언제 끝나? 이제 그만하자. 허리를 누르니까, 더 아파.” 
 
나도 지칠 대로 지쳐버린 상태였다. 푸념하듯 말했다. 
 
“그래, 그만하자.”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민혁이를 외면하는 하나님을 더 이상 믿고 싶지 않았다. 
 
나는 차비를 제외한 모든 돈을 민혁이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굶지 말고, 짜장면이라도 시켜 먹어. 내일모레 또 올게. 그때는 먹을 것 좀 사 올게. 일단, 견뎌. 알겠지?” 
 
나는 민혁이의 집을 나섰다. 밤길이 어두웠다. 새들이 구슬프게 우는소리, 의미 없이 울려 퍼지는 고양이의 울음 소리마저도, 나를 비웃는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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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일찍, 나는 민혁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만큼 걱정스러웠다. 민혁이는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주변이 자동차 소리로 시끄러웠다.
 
민혁이가 말했다. 
 
“나 지금 바쁘니까, 이따 통화하자. 지금 일하고 있어,.” 
 
내가 한 마디 던질 겨를 없었다. 민혁이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전화기를 귀에 댄 채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너 지금 아프잖아. 허리가 아파서 일어나지도 못했잖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나는 민혁이의 전화를 기다릴 수 없었다. 곧바로 지하철에 몸을 싣고, 민혁이에게로 갔다. 가는 내내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주유소에 도착해서, 민혁이를 찾았다. 민혁이는 여느 때처럼,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민혁이는 잠시 한가한 틈을 타서,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잘 들어봐. 정말 신기한 일이 있었어. 어제 너 가고 나서 꿈을 꿨어. 토끼 가면을 쓴 그 자식이 또 꿈에 나오더라고. 예전에는 있잖아, 너무 무서운데, 도망을 못 가고 밤마다 그 짓을 당했었거든. 
 
이번에는, 꿈속에서 내가 도망을 치더라고. 그놈을 밀치고, 반대편으로 힘껏 뛰었어. 그 자식이 엄청난 속도로 뒤따라 오더라. 나도 미친 듯이 뛰었지. 
 
이러다 잡히겠다 하는데, 눈앞에 하얀색 빛이 나타났어. ‘어, 이거 뭐지?’하는데,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두 팔로 날 안아주시는 거야. 짧은 순간이었지만, 정말 따뜻했거든. 
 
깜짝 놀라 잠에서 깼어. 잠에서 깨서 보니까, 내가 상체를 일으키고 있더라고. 벌떡 일어나 앉아 있는 거야. 
 
꿈에서 놀라 깼는데, 꿈을 깨고 나서 더 놀랐어. 허리가 안 아픈 거야. 일어나서 움직여보는데, 정말 하나도 안 아프더라고. 
 
그 하얀 옷을 입은 분이, 네가 말한 하나님인가, 예수님인가 하는 그분이 아닐까?”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민혁이는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다시 일을 하러 갔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민혁이를 기다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쁘게 일을 하는 민혁이를 바라보면서, 복잡한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 후로, 오랫동안 민혁이는 나에게 복음을 말할 기회를 줬다. 민혁이에게 복음을 전하는 동안, 나 자신도 의심을 지나, 확신의 길로 돌아설 수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배려하신 것이 분명했다. 
 
민혁이와 함께 겪은 사건은 내 인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날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민혁이에게 전화가 오지 않았다면, 민혁이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민혁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신학교를 그만두고 다른 길을 갔을지도 모른다. 
 
민혁이를 위해 기도해줄 때, 민혁이가 그 자리에서 즉시 나았다면, 나는 치유에 대해 오해했을 것이다. 
 
마치 내 능력이라도 되는 듯, 교만해졌을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기도하는 동안, 아무런 일도 없게 하셨다. 시간적 간격을 두시고, 내가 없을 때, 민혁이를 고쳐주셨다. 
 
내가 없는 동안,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나는 분명히 안다. 궁극의 치유는 치유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치유를 실행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만약 민혁이의 허리만 나았다면, 나는 반쪽짜리 치유를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민혁이의 정서와 육체를 동시에 치유해주셨다. 토끼 가면으로부터 도망쳐,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하셨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나타난 일회적인 사건일지 모르지만, 민혁이의 삶의 구조를 바꿀 만큼 위력적인 경험이었다. 
 
기억 속에서 토끼 가면이 나타날 때마다, 민혁이는 그로부터 도망칠 것이다. 꼼짝도 못 한 채로, 끔찍한 일을 반복적으로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서 벗어나 따뜻한 하나님의 품에 안기고자 할 것이다. 
 
복음적인 치유는 전인격적이다. 육체와 정서를 아우른다. 심리치료가 따라올 수 없는 지점이다. 하나님께서 상처 입은 한 사람의 인생에 개입하실 때 일어나는 일을, 나는 생생하게 목격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도, 내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유다. 나는 보았고, 들었다. 치유는 나의 믿음에 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것이다. 나의 연약한 믿음, 무지와 무능이 치유의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불가능은 없다.  
 
하나님이 치유의 근원이시다.

실패한 상담자

“내 이야기를 들으면 상처받으실 수도 있어요. 사람들이 내게 그랬거든요. 네 이야기를 들으면, 나까지 이상해지는 것 같다고.” 
 
주연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녀가 처음 내뱉은 말의 의미를 굳이 묻지 않았다. 
 
주연은 한참을 기다리다, 다시 말했다. 
 
“괜찮으시겠어요? 내 말을 들으면, 목사님도 상처받을 수 있어요.”
 
나는 말했다.  
 
“나는 이미 상처받았어요. 흉터 하나 더 생긴다고 무슨 일 있겠어요. 제 걱정 마시고, 편안하게 이야기하세요.” 
 
주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아마 혼자 계실 때 알게 되실 거예요. 가끔 저는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게 보여요. 목사님도 저와 대화를 시작하시면,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영향을 받으실 거예요.” 
 
그 순간 내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얼굴 근육이 마비가 된 듯했다. 표정 관리를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섬뜩했다. 
 
주연은 알 수 없는 미소를 띠어 보이며, 내게 동의를 구했다. 
 
“정말로 괜찮으시겠어요?”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 걱정은 마세요. 편하게 이야기하시면 돼요.” 
 
주연은 차분한 말투로 물었다. 
 
“목사님은 귀신을 본 적 있으세요?” 
 
주연은 내가 대답할 기회를 주지 않고 혼잣말로 속삭였다.   
 
“나는 귀신을 본 적 있어요.” 
 

 
새벽 예배를 마치고, 주연은 싱글벙글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을 챙겨 학교에 보내고, 집안을 대충 치우고 교회에 갈 작정이었다. 시계가 9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교회 성경공부 모임에 늦고 싶지 않았다. 
 
주연은 부리나케 화장실에 들어갔다. 샤워기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몸을 적시고, 손바닥에 샴푸를 담았다.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감는데, 주연의 등골이 오싹했다. 
 
누군가 위에서 그녀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주연은 비명을 질렀다. 
 
젖은 머리카락에 샴푸 거품이 뒤엉킨 채 화장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거실에서 신문을 보고 있던 남편에게 달려가 매달렸다. 
 
“여보, 화장실에 뭔가 있어. 시커먼 게 나를 보고 있었다고.” 
 
주연의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남편의 손에 들린 신문을 적셨다. 주연이 말하는 동안에도, 거품 낀 물방울이 남편의 옷과 얼굴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남편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또 시작이네. 당신이 애야? 화장실에 뭐가 있다고 그래. 제발 좀 그만해.” 
 
“여보, 그게 아니고, 정말 뭐가 있다니까. 당신이 한 번 가봐. 응? 제발 부탁이야.” 
 
남편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문을 열었다. 주연은 거실 귀퉁이에 앉아 손과 발을 벌벌 떨었다. 남편은 의도적으로 화장실 불을 몇 번이나 껐다 켜면서, 주연을 안심시켰다. 
 
“아무것도 없지?” 
 
남편의 물음에, 주연은 고개를 끄떡였다. 
 
남편은 주연에게 다가와 진지하게 말했다. 
 
“여보, 당신 정말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정신과 치료를 받아보면 어때?” 
 
주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난번에도 가봤잖아. 그냥 약만 주고, 별다른 도움도 못 받잖아. 나 약 먹기 싫어. 약 기운에 하루 종일 누워서 지낸단 말이야.” 
 
“아니, 그럼 뭐 어떻게 하려고 그래. 당신, 애들은 생각 안 해?” 
 
“내가 애들 생각 안 한 게 뭐 있어?” 
 
“당신이 지금 정상이야? 애 둘만 싸질러 낳고, 엄마 구실을 못하잖아.” 
 
“뭐? 당신 지금 말 다 했어?” 
 
“내가 무슨 틀린 말 했어? 당신 올해 들어 집에서 몇 번이나 잤어. 하루가 멀다 하고 교회 가잖아. 왜 멀쩡한 집을 놔두고 교회에서 잠을 자? 애들 뒤치다꺼리는 누가 하라고?”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래? 나도 지금 미칠 것 같아.” 
 
“그러니까, 정신과 치료를 꾸준히 받으라고.”
 
“내가 그랬잖아. 약 먹기 싫다고. 나 기도해서 고칠 거야.”  
 
남편은 어이가 없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하자. 더 말하면 나 미칠 것 같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남편은 차가운 말을 내뱉고, 베란다로 나갔다.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주연은 남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주연은 남편에게 서운하면서도,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 주연을 괴롭히는 문제가 담배 연기처럼 허공에서 사라지기를 바랐다. 
 
서러운 감정이 주연을 덮쳤다. 소파에 엎드려 하염없이 울었다. 수건으로 둘둘만 머리카락 끝자락에서 거품이 뒤섞인 물방울이 거실 바닥에 뚝뚝 떨어져 내렸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이었다. 
 
남편은 24시간 하루 근무, 24시간 하루 휴식의 일정을 반복했다. 
 
남편이 집에 없는 날이면, 주연은 혼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문을 이중으로 잠가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주연은 두려움을 이길 수 없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엄마 집으로 도망쳤다. 
 
주연은 엄마와 같은 방에서 함께 자기를 원했다. 
 
“오늘 외할머니 오셨으니까 불편하더라도 외할머니하고 같이 자. 엄마가 오늘은 혼자 자고 싶어.” 
 
주연은 가만히 고개를 끄떡였다. 
 
밤새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주연은 벽에 기대 우두커니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인기척에 놀라 잠에서 깬 할머니가 말했다. 
 
“으미, 깜짝이야. 너 시방 뭐 하는 거여. 누워야 잠이 오제, 어찌 앉아서 잠을 잔다야. 빨랑 누워, 이것아.” 
 
“신경 쓰지 말고 자, 할머니. 나는 잠이 안 와. 밤마다 이래.” 
 
“별 희한한 일 다 보겠구먼. 잠을 안 자면 사람이 어떻게 산데….” 
 
할머니는 밤새 주연과 대화를 나누었다. 동이 틀 무렵 할머니는 피곤했는지, 코를 골며 잠에 들었다. 
 
주연은 주섬주섬 이불을 정리하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남편이 오기 전에 집에 도착해, 아침 식사를 준비할 작정이었다. 
 
할머니는 엄마에게 주연의 상태를 물었다. 
 
“걔가 언제부터 그러데? 밤새 잠을 못 자면 사람이 어떻게 산데?” 
 
엄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다 큰 애가 뭐가 무섭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 혼자 잠을 못 자. 안 그러던 애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그래.” 
 
할머니는 진지하게 말했다. 
 
“애가 눈빛이 영 이상해. 점을 한 번 보러 가야 쓰것어. 애 눈을 보는데 섬뜩하더라니까.”
 
할머니는 주연을 챙겨,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갔다. 
 
무당은 주연의 눈빛을 살피더니, 뭐에 씌인 것 같다며 크게 굿을 한 판 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연은 내심 걱정이었다. 굿을 하는데, 당장 수백만 원이 필요했다. 주연은 망설였다. 남편에게 굿을 하자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주연은 쓸데없는 짓이라며,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터벅터벅 집으로 향하는 길에, 도로 옆 교회의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십자가를 올려다보는 순간,  햇빛으로 눈이 부셨다. 인상을 찌푸렸지만, 주연의 마음은 이상하게 편했다.
 
‘굿은 무슨 굿이야. 차라리 교회를 나가보자.’ 
 

 
“사모님 죄송한데, 어려운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사모는 멈칫하며 주연의 말을 기다렸다. 
 
“사실 제가 요즘 잠을 잘 못 자요. 혼자 방에 누우면, 천장에서 마주하는 얼굴이 있어요. 눈을 감으면, 천장에서 그 얼굴 뚝 떨어져 나를 덮칠 것 같거든요. 너무 무서워요.” 
 
주연은 슬픈 감정에 사로잡혔다. 눈물이 얼굴을 뒤덮었다. 
 
“마귀가 역사하네요. 기도하면 나아질 거예요.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죠?” 
 
사모가 물었다. 
 
“교회에서 잘 수 있게 해주시겠어요? 교회에 오면, 마음 편하게 잠을 잘 수 있거든요. 불편하게 하지는 않을 게요.” 
 
사모는 그게 뭐 어려운 일이겠냐며, 주연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 
 
“그럼요, 언제든 오셔서 주무세요. 저랑 같이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고 하면 되죠. 저도 가끔 교회에서 자고 그래요.”
 
주연은 사모에게 거듭 감사하다 말했다. 사모는 주연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주연은 밤낮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집과 거리, 어느 곳 하나 예외가 없었다. 
 
두려움이 엄습하지 않는 유일한 장소는 교회뿐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아무도 없는 교회에 혼자 가는 건 무섭지 않으세요?” 
 
“아, 무섭지 않아요. 어두운 예배실에 들어서면 잠깐 움찔은 해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편해져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교회에 가면, 예수님이 날 지켜주시는 것 같아요. 건물 위층에 사모님도 계시고요. 그 위에서 사시거든요.” 
 
“두려움을 없애주는 사람이 예수님인가요, 사모님인가요?” 
 
“물론, 예수님이죠. 하지만, 사모님도 필요해요. 솔직히 말하면, 사모님이 성품이 따뜻하신 분은 아니에요. 그래도, 당분간은 사모님이 필요해요.” 
 
어려운 개척교회였다. 사모는 주연의 부탁으로 예배실 옆에 마련된 작은 공간에서 주연과 함께 잤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연이 교회에서 잠을 자도록 허락해 준 것으로만 알았던 것이다. 
 
사모는 밤마다 사택에서 내려와 주연과 함께 지냈다. 사모 입장에서도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모의 불편한 감정이 주연에게도 전해졌다. 그러나, 주연은 불편한 감정을 감수하고라도 사모 곁에 있고 싶었다.
 
주연은 물에 빠진 심정이었다. 구명조끼를 던져주는 사람의 표정을 살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관계의 유통기한이 생각보다 짧다는 것을 주연은 분명히 알았다. 사모는 주연이 의존한 세 번째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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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과 사모가 함께 성경을 읽는 자리에, 목사가 들어와 한 마디를 꺼냈다. 
 
“자꾸 대출이자 때문에 은행에서 전화가 오네.”
 
사모는 주연을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우리 교회 팔리면, 이제 주연 자매는 어떻게 해? 기도 많이 해야겠어. 우리야 어디 가서 또 목회하면 되지만, 주연 자매는 우리 없으면 어떻게 할 거야?” 
 
주연은 당황했다.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어색한 웃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교회가 어려울 때마다, 주연이 큰마음을 먹고 헌금을 한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감사한 마음에 헌금을 한 것을 두고, 사모가 그런 태도를 보인 것에 주연은 실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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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나빴어요. 무시를 당한 것 같았거든요. 마음 같아서는 ‘나를 뭘로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라고 대꾸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죠. 
 
자존심이 상해서, 두 번 다시는 사모님을 의지하지 않고 싶다고 결심했어요.”
 

 
사모가 내뱉은 말이 떠오를 때마다, 주연은 짜증 섞인 혼잣말을 내뱉었다. 
 
“내가 뭐, 지 아니면 안 될 줄 알고?”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주연은 마음이 급해졌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를 정도로 불안했다. 
 
밤새도록 혼자 있을 것을 생각하니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괴로웠다. 
 
저녁을 대충 차려놓고 남편을 기다렸다. 학원에서 아이들이 먼저 돌아오고, 남편이 뒤늦게 들어왔다. 
 
남편이 들어오자마자, 주연은 바통을 넘겨주듯 말했다. 
 
“여보, 미안해. 나 오늘 상태가 너무 안 좋아. 애들하고 저녁 먹고 뒷정리 좀 부탁해.” 
 
남편은 한심한 듯 말했다.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 그 사모가 뭐라고 그렇게 매달려. 그러다, 또 실망하고 뭐하고 비참해진다며? 제발 작작 좀 해.” 
 
주연은 남편의 말에 대꾸할  여유조차 없었다. 집에서 교회까지 쉬지 않고 뛰었다. 
 
교회에 도착한 주연은 예배실 문을 열었다. 예배실은 조용했다. 어두운 예배실 안에서 주연은 안정을 되찾았다. 
 
불안에 떨면서 감정 소모가 심한 탓인지, 주연은 엎드린 채로 기도하다 잠에 들었다.
 
주연은 팔이 잘려나가는 꿈을 꾸었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꿈에서 본 것처럼 팔에 감각이 없었다. 팔을 베고 잔 탓에 피가 통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주위를 살폈다. 예배실 뒤편에 작은 할로겐 조명이 켜진 채였다. 
 
사모가 들어온 것이다. 
 
주연은 교회 뒤편 마련된 작은방을 살폈다. 사모가 피곤했는지 미리 이불을 펴고 잠든 후였다. 
 
주연은 잠시 멈칫했다. 
 
‘우리 없으면, 이제 주연 자매 어떻게 해?’ 
 
며칠 전 사모가 내뱉은 말이 생각났다. 
 
그러나, 차마 집으로 돌아갈 용기는 없었다. 주연은 가만히 들어가 사모 옆자리에 이불을 펴고 누웠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서글픈 감정이 밀려왔다. 주연은 사모 옆에 자리를 폈지만, 사모를 등지고 뒤돌아 누워 하염없이 울었다. 
 

 
“부모님은 내가 어릴 때, 자주 심부름을 시켰어요. 밤에 슈퍼를 가려면 대나무숲을 지나야 했거든요. 가로등 하나 없는 길을 지나가는데 너무 무서웠어요. 
 
항상 누가 쫓아오는 느낌이 들어서, 죽도록 뛰었거든요. 가끔 엄마가 사 오라고 했던 물건을 떨어뜨리고 그냥 집으로 뛰어온 적이 있어요. 
 
그러면, 엄마가 엄청나게 화를 내면서, 다시 가서 가져오라고 그러죠. 저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만큼 무서웠거든요.” 
 

 
나는 주연의 공포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녀가 살아온 인생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주연은 적극적이었다. 공포심을 물리치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내게 전해졌다. 그녀는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기억들을 순서 없이 말했다. 
 

 
“증조할머니가 무당이었어요. 할머니가 굿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죠. 어머니는 할머니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 같아요. 자녀들을 사랑할 줄 모르는 분이셨어요.” 
 
주연은 그녀의 어머니가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상한 미신 같은 것을 잘 믿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그녀가 20살 남짓 되던 해에, 고기를 먹다가 급하게 체한 적이 있었다. 소화제를 먹어도 소용이 없어, 시름시름 앓았다. 
 
주연의 어머니는 낯선 남자에게 주연을 데려갔다. 
 
낯선 남자 앞에서, 주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가 모든 상황을 설명했다. 
 
남자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옆에 마련된 세면기에 손을 씻었다. 
 
남자는 주연에게 다가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입을 벌렸다. 주연은 당황스러웠다. 남자는 사정없이 솥뚜껑 만한 손을 주연의 입속에 밀어 넣었다. 
 
남자의 억센 손은 목구멍을 타고 가슴 안으로 들어갔다. 주연은 외마디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헛구역질이 나서 웩웩 소리를 지르는 찰나에, 남자는 주연의 목구멍에서 손을 빼냈다. 
 
남자의 손은 주연의 타액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남자가 손을 펴자 그 안에는 작은 고기 조각이 들려 있었다. 
 
남자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다시 세면기로 가서 손을 씻었다. 
 
어머니는 남자에게 돈을 지불하고 돌아서며, 주연에게 말했다. 
 
“속이 뻥 뚫려서 후련하지. 집에 가자.”
 

 
나는 충격에 빠졌다.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내 귀가 의심스러웠다. 
 
주연이 말하는 동안, 무심결에 그 장면을 상상했는데, 그 자체로 역겨웠다. 헛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나는 내담자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버렸다. 
 
“사실인가요?” 
 
주연은 내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믿기 힘드실 텐데, 정말이에요. 가끔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은 진짜였어요. 제가 고기를 먹으면 자주 체하거든요. 그 후로도 그 사람을 몇 번 찾아갔어요.” 
 
주연의 말을 억지로 믿었다. 그러나, 내 진심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듯했다. 나는 그날 밤 악몽을 꾸었고, 섬뜩한 남자에게 내 입을 벌려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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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의 근원을 찾으려는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사방이 막혀 있는 듯 답답했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나는 주연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들이 무서웠다.  
 
첫 세션에서 주연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사람들이 내게 그랬거든요. 너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까지 이상해지는 것 같다고.”
 
주연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사람들 역시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내 감정을 주연에게 효과적으로 설명해야 했다. 
 
“당신 이야기가 너무 기괴하고 무섭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방식은 옳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첫 발을 내디뎠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내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생각나요. 
 
할머니가 사랑방에 손주들을 모아놓고, 호롱 불을 하나 켜셨거든요. 호롱 불이 불규칙적으로 흔들리니까, 그림자가 춤을 추는 것 같더라고요. 
 
할머니는 군밤을 까주시면서, 할머니가 어려서 시골에서 겪었던 기괴하고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할머니가 어린 시절에 살았던 시골 마을에 들어가려면 고개를 하나 넘어야 했데요. 자정에 고개를 넘을 때는, 절대로 혼자가면 안된다고 했어요. 
 
자정이 지나면, 푸른 불빛이 사람을 홀려서 깊은 숲속으로 끌어들인다고 했어요.
 
마을 어른 여럿이 푸른 불빛 때문에 죽어나갔다고 했죠. 
 
긴장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 할머니는 “워!”라고 소리를 질렀죠. 손주들 중에 내가 제일 컸는데, 나마저도 울음을 터뜨릴 뻔했어요. 
 
나는 그날 밤, 이불에 오줌을 쌌어요. 잠에서 깼지만, 혼자 화장실에 갈 용기가 없었거든요.”
 
 주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묻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처음부터 두려운 감정을 가진 것 같아요.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랐지만,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아요. 
 
당신은 직접 말로 표현한 적 없지만, 지속적으로 내게 똑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어요. 
 
‘자, 잘 들어보세요, 지금부터 내가 무서운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우리는 무서움의 근원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고, 당신은 계속 내게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어요. 
 
내가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당신과 동일한 두려움을 느낄 수 있어야 당신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에요. 당신을 두려움의 소용돌이에서 구해주려면, 나는 소용돌이 밖에 서 있어야 해요. 그래야, 당신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으니까요.
 
나는 이 지점에서 실패했어요. 이미 나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어요. 당신의 이야기가 섬뜩하고 무서웠거든요. 
 
당신 말대로 나는 당신의 이야기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어요. 
 
내 일상에서 악몽을 몇 차례 꾼 적이 있거든요. 악몽은 내게 드문 일이에요. 당신과의 상담 전후에 있었던 일이에요. 
 
당신이 나를 완벽히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조용히 상담을 받던 당신이 일어서는 거죠. 그리고, 상담실 안에 시커먼 것이 있다고 말하며, 혼비백산해서 상담실 밖으로 도망을 쳐버리면 돼요. 그러면, 나는 완전히 무너질 거예요.
 
내게는 그것이, 호롱불 아래서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던 할머니의 “워!”라는 메시지겠죠.” 
 
주연은 가만히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내려놓은 듯 안정적인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누군가 한 사람은 내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주기를 바랐어요. 
 
사람들은 다 똑같아요. 내가 무섭다고 말하면, 다들 무시해요. 다 큰 어른이 무섭다고 말하니, 한심하다고 생각하죠.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애써 무섭지 않은 척 해요. 두려운 감정을 부정하는 거죠. 소리 없이 내 곁을 떠나요.
 
이해해요. 사람들이 내게 거리를 두면, 내가 느끼는 두려움에서 멀어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나를 데리고 살아야 해요. 내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는 사람들은 내 곁에 남아 있지 않아요.  
 
내 이야기를 듣고, 솔직히 무섭다고 말해준 사람이, 목사님이 처음이에요.”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울기 시작했다. 작은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정말로, 무서웠어요.” 
 
그녀는 울음소리는 점점 커지고 격해졌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를 내며 우는 동안, 나는 기다렸다. 간간이 손으로 내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가면서 조용히 창밖을 응시했다. 
 

 
그녀의 감정이 차분해지고, 다시 대화가 가능해진 상황에서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주연의 차분했던 감정이 다시 울컥했다. 눈물이 쏟아져 내릴까 걱정스러운 듯, 손바닥을 가슴에 올려놓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주연은 차분히 말했다. 
 
“제 마음을 공감해주신 것 같아요. 제가 확대해석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주신 것 같아요. 그 순간,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들어왔어요.” 
 
주연의 말을 한참 동안 듣고 나서, 내 생각을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당신과의 상담에서 실패했어요. 나는 당신 안의 두려움의 근원을 찾아내고 싶었어요. 두려움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싶었고요. 
 
두려움의 소용돌이 빠진 당신을 구해주려다, 나까지 소용돌이에 빠져 버린 꼴이죠. 마음이 급했나 봐요. 유능한 상담자라면, 당신을 제대로 도와줄 수 있었을 거예요. 당신에게 미안해요, 정말로.”
 
주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목사님은 실패하지 않았어요. 소용돌이라고 말씀하시니까, 언뜻 떠오른 생각이 있어요. 
 
솔직히 그동안은 극단적인 생각을 했거든요. 나 같은 인생 살아서 뭐해. 죽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누군가 내 마음을 알아줬다는 사실에 문득 호기심이 생겼어요.
 
예수님은 날 어떻게 생각하실까? 
 
그동안 나는 감히 예수님 앞에 설 수 없었거든요. 나를 비난하시는 것 같아서요. 
 
제가 무서운 것을 본다는 것 자체가 믿음이 없어서 그런 거잖아요. 
 
예수님 앞에 떳떳이 설 수가 없었어요. 밤마다 교회에서 회개 기도를 했어요. 이런 나를 용서해달라고. 
 
목사님께 조심스럽게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예수님도 나를 비난하지 않으시겠죠? 얼마나 무섭겠냐고 공감해주시겠죠? 
 
나를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원해서 이런 게 아니거든요.” 
 
주연은 또다시 얼굴을 감싸 쥐고 울기 시작했다. 
 
나도 함께 울었다. 
 
감정의 소용돌이에 함께 빨려 들어가면서,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불렀다.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셔서 우리 둘을 살려주시기를 바랐다. 
 

 
급류에 영향받지 않는 존재는 오직 예수님뿐이다. 
 
예수님은 그녀를 찾아가셨고, 그녀를 건져주셨다. 나는 그다음으로 건져졌고, 간신히 내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가 상담실 안에서 머무는 동안, 나는 내가 할 일을 했다. 
 
예수님과의 왜곡된 관계를 복음적 관계로 전환하기 위한 몇 가지 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사모를 극단적으로 의존하는 관계를 정리하고, 남편에게 돌아가 온전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방향을 제시했다. 
 
장기적인 정신과 치료 역시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하며, 시간과 비용이 허락하는 한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정신과에서 처방해준 약을 먹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약을 먹는 것이 신앙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며, 적절한 범위 안에서 유익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그녀에게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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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떠나보낸 지금에도, 나는 여전히 그녀가 느끼는 두려움의 출처를 모른다. 
 
그녀는 여전히 두려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까. 아니면, 조금이나마 평안을 누리고 있을까. 아니면, 견딜 수 없는 두려움으로 또 다른 사람을 찾아내서 매달리고 애원하고 있을까. 
 
평온한 일상에서 문득 그녀가 떠오르면, 죄책감을 느낀다. 
 
나 역시 그녀를 밀어낸 것은 아닌가. 
 
어쩌면, 그녀가 말한 대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를 버린 사람들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잔잔한 죄책감은 바람을 타고 거센 파도가 되어 내 가슴을 퍽퍽 치고 쓸어내렸다. 
 
나는 잠시 상담을 멈추고 나 자신을 돌봐야 했다. 
 
조용한 곳에 내 몸을 밀어 넣고,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죄책감을 떨쳐내고 싶었다. 
 
바쁜 일정 중에 시간을 내는 것이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옳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내 안의 죄책감처럼, 그녀 안의 두려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그녀 안의 두려움은, 내 안의 죄책감처럼 그리스도에게로 달려가는 강렬한 욕망이 될 것이다. 
 
두려움은 절대로 그녀의 인생을 집어삼킬 수 없을 것이다. 두려울수록 그리스도가 더욱 절실할 것이다. 
 
나는 물러났어도, 그리스도는 절대로 물러나지 않으실 것이다. 그녀 안의 그리스도가 그녀와 영원토록 함께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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