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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 말씀・기도

너의 걱정을 내게 맡기렴

나의 자녀야, 
너의 걱정을 내게 맡기렴
 
걱정이 너를 짓누를 때
너는 조급한 마음으로 
무엇이든 해보려고 한단다 
 
너의 의지를 꺾고 싶지 않지만
너의 힘으로 매진하는 일에는 
내가 끼어들 자리가 없단다
 
걱정이 너를 짓누를 때마다
네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거라
내가 너를 책임지고 돌볼 것이다
 
너의 걱정을 다른 사람에게 
쏟아놓지 말거라
 
사람들은 저마다의 걱정으로 
너의 걱정을 받아줄 여유가 없단다
 
사람을 찾아가면 
한두 번 위로받을 뿐
결국 실망한단다
 
나는 너의 걱정에 공감한단다
네가 수십 번 똑같은 말을 해도
나는 지루하지 않단다
 
너의 걱정을 사람에게 말하면 푸념이지만 
내게 와 말하면 기도란다 
 
내게 와 말하렴 
너의 간절한 기도가 너를 살릴 것이고  
내가 기꺼이 너를 도울 거란다  
 
사랑한다, 나의 자녀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베드로전서 5:7

먼저 걷는 길은 외로운 길이란다

나의 자녀야, 
지친 너를 위로하고 싶구나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사람은 
쉽게 탈진한단다
 
이미 난 길을 걷는 것보다 
없는 길을 만들며 걷는 것이 
몇 배나 힘이 들기 때문이란다
 
네가 지친 것은 네가 약해서가 아니라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기 때문이란다
 
힘이 들면 잠시 쉬거라
쉬었다 가도 늦지 않는단다
 
경쟁하지 말고 편히 걷거라
이 길에는 너와 나 둘 뿐이란다 
 
사람들의 평가에 무뎌지거라
남보다 뒤처질 두려움에서 벗어나거라
 
아무도 밟지 않은 곳에 
첫 발을 내딛거라 
 
너의 발자국을 보며 
다음 사람이 따르게 하거라
 
먼저 걷는 길은 외로운 길이란다
 
포기하지 말거라
 
나는 광야에 길을 내는 
살아있는 너의 하나님이란다
 
사랑한다, 나의 자녀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이사야 43:19

첫 발을 내딛거라

나의 자녀야, 
지친 너를 위로하고 싶구나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사람은 
쉽게 탈진한단다
 
이미 난 길을 걷는 것보다 
없는 길을 만들며 걷는 것이 
몇 배나 힘이 들기 때문이란다
 
네가 지친 것은 네가 약해서가 아니라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기 때문이란다
 
힘이 들면 잠시 쉬거라
쉬었다 가도 늦지 않는단다
 
경쟁하지 말고 편히 걷거라
이 길에는 너와 나 둘 뿐이란다 
 
사람들의 평가에 무뎌지거라
남보다 뒤처질 두려움에서 벗어나거라
 
아무도 밟지 않은 곳에 
첫 발을 내딛거라 
 
너의 발자국을 보며 
다음 사람이 따르게 하거라
 
먼저 걷는 길은 외로운 길이란다
 
포기하지 말거라
 
나는 광야에 길을 내는 
살아있는 너의 하나님이란다
 
사랑한다, 나의 자녀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이사야 43:19

더 멀리 바라보거라

나의 자녀야, 
 
너는 지금 너무 많은 생각에 
짓눌려 있단다
 
눈앞의 일들에 파묻혀 버리면 
큰 그림을 그리며 멀리 내다볼 수 없단다
 
너의 눈앞에 모든 일은 긴급한 일이지만
때로는 멀리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단다
 
너의 다음 10년을 
내다보라는 것이 아니란다
 
더 멀리 바라보거라
너의 끝에는 내가 있단다 
 
밀려드는 일에 파묻혀 
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거든 
나를 깊이 생각하거라
 
시끄러운 세상은 고요해질 것이고
모든 두려움은 잠잠해질 것이다
 
너 혼자 모든 일을 다해 낼 수 없단다 
버릴 것은 버리고 위임할 것은 위임하거라
 
두려움으로 붙잡은 것들을 내려놓거라
너의 시작과 끝에는 내가 있단다
 
두려워 말거라
내가 너를 형통케 하고
너의 모든 걸음과 동행할 것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6:9 

너를 용서하기 원한다

나의 자녀야, 
죄책감에서 벗어나 평안하거라
 
너는 이미 충분히 고통받았고 
나는 너를 용서하기 원한다
 
너는 많은 죄를 떠올리며  
내 앞에 설 자격이 없다고 말하지만 
나는 네가 사랑스러울 뿐이란다 
 
스스로 의롭다 믿는 사람은 
자기 죄를 가볍게 여긴단다
 
가벼운 몇 마디 기도문으로    
스스로를 용서해 버린단다
 
내가 용서해 줄 틈도 없이 
자기를 용서하는 사람은 
내가 필요 없는 사람이란다
 
나의 용서는 결코 가볍지 않단다 
내 목숨으로 값을 치렀단다 
 
용서의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용서받을 수 있단다 
 
내 앞에서 밤낮없이 울며 
용서해달라고 말하는 너를 보면 
내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단다 
 
내 가슴을 열어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고 싶구나  
 
너는 너를 정죄하지만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내가 너를 용서하기 원한다 
이제 내 품에 안겨 평안하거라
 
사랑한다, 나의 자녀야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누가복음 7:47

나의 말씀을 심고 가꾸거라

감정을 따라 
너의 믿음을 평가하지 말거라
 
감정은 언제나 요동친단다
결실을 맺으려면 인내가 필요하단다
 
말씀을 듣고 잠시 기뻐할 수 있지만 
기쁨을 오래 지속하기는 어렵단다
 
세상은 온갖 유혹과 시험으로 
너를 쓰러뜨리려 할 거야
 
나의 사랑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거라
 
유혹에 꺾여 넘어졌을지라도 
낙심하지 말거라
 
내가 너를 일으켜 세우고 
새로운 힘을 공급해 줄 것이다
 
강해서 넘어지지 않는 것이 
인내가 아니란다
 
약해 넘어졌을지라도  
다시 일어나는 것이 인내란다
 
내 손을 잡고 일어나렴 
너는 회복될 수 있단다  
 
너의 마음 밭에 
나의 말씀을 심고 가꾸거라 
 
네가 백 번을 넘어질지라도 
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단다
 
백 번을 사랑한다 말해주고 
백배의 결실 맺게 할 거란다
 
너는 내게 기쁨을 주는 
인내하는 자녀란다
 
사랑한다, 나의 자녀야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누가복음 8:15

다른 무엇으로 너를 대신할 수 없단다

나의 자녀야, 
내게로 와줘서 고맙다
 
내게 오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니 
내가 너의 진심을 안다
 
죄책감으로 고통받았던 
지난날을 뒤로하고
나의 사랑으로 평안하거라
 
사람들은 너를 과거의 시선으로 
바라볼지 모른단다
 
너의 모든 잘못을 
깨알같이 기억하고 비난하는 
그들 앞에 서기 두렵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나의 자녀야
용기를 내렴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말거라
나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한단다
 
내게로 나올 때 망설이지 말거라
나는 이미 너를 용서했단다
나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단다
 
너는 내게 보답하고 싶겠지만
나는 이미 가장 좋은 것을 받았단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네 손에 들린 무엇이 아니라 
바로 너 자신이란다 
 
나에게는 값비싼 향유보다 
너의 눈물이 값지단다
 
다른 무엇으로 너를 대신할 수 없단다
나에게는 오직 너뿐이란다
 
사랑한다, 나의 자녀야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누가복음 7:37-38

다른 사람을 돌보다 지쳐버린 당신에게

나는 상담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상처를 가져온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아프고 힘든 이야기이다. 
 
부족한 내가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뿐이다. 
 
하지만, 나 역시도 슬럼프가 온다. 
 
여러 번의 슬럼프를 겪으면서, 그 원인을 알게 되었다. 
 
마음이 조급해지면, 어김없이 슬럼프가 왔다. 
 
‘내가 더 상담을 잘했다면…’
‘내가 더 관심을 기울였다면…’
‘내가 더 기도했다면…’ 
 
상처 입은 한 사람을 마주하면 절박해진다. 
 
정말로 돕고 싶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예수님보다 앞서가게 된다. 
 
어김없이 넘어진다. 
 
상처 입은 한 사람을 돌보려면, 내 위치를 잘 알아야 한다. 
 
나는 상처를 치유할 능력이 없다. 
 
당연히 알고 있지만, 절박한 상황과 마주하면 마음이 급해진다. 
 
마음이 앞서갈수록, 나 스스로에게 말해줘야 한다. 
 
“나는 상처를 치유할 능력이 없다. 나의 역할은 상처 입은 한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다주는 것이다. 예수님이 치유하실 것이다. 나는 목격자일 뿐, 치유자가 아니다.” 
 
나 혼자만 겪는 일은 아닐 것이다. 
 
다른 사람을 돌보는 사람이라면, 자주 겪는 일이다. 
 
아무 능력 없는 자기 자신과 마주하더라도 실망할 필요 없다. 
 
예수님은 당신을 기뻐하신다. 
 
누가복음 5: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다준 친구들의 이야기이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를 데려갔지만 사람이 많아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가 천장을 뜯었다.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그들의 믿음에 감동하셨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즉시 중풍병자를 치유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그를 구원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분명한 역할 분담을 목격한다. 
 
친구들은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다주었고, 예수님은 치유하셨다. 
 
우리의 무능함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부여된 역할이 있다면, 상처 입은 한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다 주는 것이다. 
 
내가 치유하고 고치려 들면, 결국 그 무게를 감당 못해 무너지고 만다. 
 
우리는 목격자일 뿐, 치유자가 아니다. 
 
상처를 치유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다.

바쁜 사역으로 탈진하지 않으려면

크리스천은 쉴 수 없다. 
 
왜 그럴까? 
 
도와야 할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자기를 돌볼 겨를도 없이 다른 사람을 열심히 돕고 섬기다가 탈진을 반복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일상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을 외면하기 힘들다. 
 
더 빠르게 소진되어 탈진해 버린다. 
 
나라고 예외였을까? 
 
목사라는 직업은 출퇴근이 없다. 
 
굳이 말하자면, 새벽 5시 출근, 퇴근은 10시 넘어서다. 
 
목사가 하는 일 중에 나쁜 일은 없다. 
 
전부 좋은 일이다. 
 
사람을 차별해서도 안된다.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해야 한다. 
 
당연히 거절도 안 된다. 
 
다른 사람 상처받는다. 
 
모든 일을 다하고, 모든 부탁을 다 들어주고, 모든 사람을 다 돌보려고 하니, 금방 탈진한다. 
 
목사마저 이런데, 성도들은 오죽하겠는가. 
 
몸과 마음이 탈진해서 고통받는 목사, 성도가 너무나 많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예수님께 배워야 한다.
 
누가복음 5:15-16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예수님은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계셨다. 모두가 예수님을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들뿐이었다. 
 
혼자 만의 시간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예수님은 어떻게 고갈되지 않고 한결같이 그의 자녀들을 사랑할 수 있으셨을까? 
 
그 비결은 다음 한 문장에 있다.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그 뜻을 살펴보자. 
 
물러가시다: 예수님이 사람들과 물리적 정서적 거리를 두셨다는 뜻이다.
 
한적한 곳: 조용히 하나님을 만날 장소가 필요했다는 뜻이다. 
 
기도하시니라: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동작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기도는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반복적이었다. 
 
예수님은 아무리 바쁘고 고된 사역 속에서도, “물러나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 어떠한 일정과도 타협하지 않으셨다. 
 
기도를 최우선 순위에 놓고 사역하신 것이다. 
 
몸이 피곤하면 며칠 쉬면 된다. 
 
그러나, 정서가 고갈되면 회복에 기약이 없다.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사역을 위해, 적정한 바운더리는 필수다. 
 
예수님은 다른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하신다. 
 
예수님께 죄송한 마음을 가질 필요 없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을 따라 해라. 
 
그래야, 기쁨으로 지치지 않고 사역할 수 있다.

내가 반드시 이루어 줄 것이다

나의 자녀야, 
쫓기듯 살아가지 말거라
 
네가 원하는 것을 
이미 가졌다고 상상해 보렴
 
이미 가진 사람처럼 믿고 
당당하게 행동하거라
 
내게 사랑받으려 애쓰지 말고
나의 사랑을 믿고 받아들이렴
 
너는 나의 사랑스러운 자녀이고 
따뜻한 미소로 너를 바라본단다
 
내게 인정받으려 애쓰지 말고 
이미 인정받았다고 믿고 받아들이렴
 
네가 자격 없는 사람이라 말할 때
너는 이미 자격을 갖춘 거란다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해 
쫓기듯 살아가는 너를 보면
나는 속상하단다
 
네가 추구하는 것을 가지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게 아니란다
 
나는 네 안에 있고 
너는 나로 인해 모든 것을 가졌단다  
 
모든 것을 가진 사람처럼 
믿고 말하고 행동하거라
 
너에게는 단지 
시간이 필요할 뿐이란다
 
쫓기고 불안한 삶을 살면서 
오늘 하루를 희생하지 말거라
 
나를 믿고 의지하거라 
내가 너의 소원을 이루어 줄 것이다 
 
사랑한다, 나의 자녀야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린도후서 6:10

너를 차별하지 않는단다

혼자 외롭게 믿는 
너를 위로하고 싶구나
 
네가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지 못했다고 
아쉬워하지 말거라
 
너를 위해 기도해 줄 부모가 없어도
나는 너를 차별하지 않는단다
 
나의 사랑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단다
 
4대째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어도 
나는 아무런 혜택을 주지 않는단다
 
교회에서 서로를 부르는 호칭마저도 
내게는 아무 의미가 없단다
 
10년을 믿었다, 100년을 믿었다
믿음의 가문을 이뤘다,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주눅 들지 말거라
 
오늘 처음 나를 믿은 너라도,
더듬더듬 나를 알아가는 너라도
나의 사랑은 동일하단다
 
나는 다른 그 무엇으로 
너를 차별하지 않는단다
 
너를 위해 기도해 줄 부모가 없다고 
슬퍼하지 말거라
 
내가 너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밤낮없이 기도한단다
 
내가 너를 자녀 삼았고
영원토록 너와 함께 할 거란다
 
사랑한다, 나의 자녀야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누가복음 3:8

나를 무서워하지 말거라

나를 무서워하지 말거라
나는 따뜻하고 좋은 하나님이란다
 
누군가 너에게 하나님께 벌받기 전에  
똑바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버리거라
 
나의 이름을 팔아 
너를 협박하는 사람을 멀리해야 한단다
 
사람은 애초부터 스스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단다
 
사람의 노력으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내가 세상에 왔을 이유가 없었단다
 
변화된 삶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은혜의 결과란다
 
황폐한 율법의 땅에 뿌리를 내린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단다
 
비옥한 은혜의 땅에 뿌리를 내려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단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발버둥 치지 말거라
 
나에게 깊이 뿌리를 내리고 
나의 사랑을 듬뿍 받거라
 
너는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고
너의 향기가 사방으로 퍼져갈 거란다
 
나에 대한 오해를 풀고 
은혜로 살아가거라
 
나는 무서운 하나님이 아닌 
사랑의 하나님이란다
 
사랑한다, 나의 자녀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누가복음 3:9 

많은 말로 설득할 필요 없단다

큰일을 앞두고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하는 너를 위로하고 싶구나
 
걱정하지 말거라
 
너에게는 큰일이지만
나에게는 작은 일이란다
 
내가 기꺼이 응답할 것이고
나의 뜻대로 너를 이끌어 갈 거란다
 
두려워하지 말고 
한 걸음을 내딛거라
 
많은 말로 나를 설득할 필요 없단다
거창한 명분을 내세울 필요도 없단다
 
내가 너의 진심을 안다 
 
작은 일부터 큰 일까지 
세세하게 나를 믿고 의지하거라
 
너의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친다면 
내게로 나아와 온종일 기도하거라
 
네가 기도하는 동안
나의 뜻이 선명하게 드러날 거란다 
 
불안으로 요동치는 
너의 감정이 잠잠해질 것이고
너를 짓누르는 모든 걱정이 사라질 거란다
 
내게 와 듣거라
그리고 안심하거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단다
 
사랑한다, 나의 자녀야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누가복음 6:12-13

조용히 사라지는 거야

“잊힐까 두려워. 
두려워 미칠 것 같아.” 
 
네가 주인공이구나.
그러면, 못 견뎌. 
 
태어나서 지금까지 
영원한 주인공을 본 적 있어?
 
없잖아. 
너라고 예외일 수 없어. 
 
주인공이 되고 싶으면
그렇게 해. 
 
위태로운 사치를 
잠시 잠깐 즐길 테니까.
 
진실은 간단해. 
사람들은 널 잊을 거야.
몸부림쳐도 소용없어. 
 
하지만, 기억해.
하나님은 널 잊지 않아. 
처음부터 지금까지 영원토록. 
 
이쯤에서 인정할까?  
주인공은 하나님이야. 
 
네가 든 조명으로 
예수님을 비춰드려. 
 
팔은 아파도 
마음은 편할 거야. 
 
배터리가 닳아서 
조명이 꺼지면
미련 없이 사라져. 
 
다음 사람이 
생생한 조명으로 
예수님을 비출 거야. 
 
조용히 사라지는 거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인정하면, 편해져. 
공황도 사라지고 
불안도 사라지거든.
 
그리고, 
가끔 편안하게 잠들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한복음 3:30>

과거를 그리워할 필요 없어

“열정이 식었어.
뜨거웠던 시절이 그리워.”  
 
봄바람은 봄에만 불어. 
겨울에는 불지 않아. 
 
성령의 바람은 
하나님이 몰고 와. 
 
선풍기를 켜듯, 
간단한 게 아니야. 
 
민들레 씨앗은 
바람을 탄데. 
 
그러다, 
땅에 내려앉아
뿌리를 내린데. 
 
뿌리를 내린 씨앗은 
바람만으로는 못 자라.
 
땅속으로 파고들어 
양분을 당기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은혜를 구걸하지 마.
 
씨앗이 뿌리를 내리듯 
성경에 파묻혀. 
 
한 장 한 장 
성경을 넘기면 
바람이 불 거야. 
 
어디서 어떻게 불어오는지 모르는 
성령의 바람. 
 
종이 한 장이 일으키는 바람이 
너의 가슴을 뛰게 할 거야. 
 
과거를 그리워할 필요 없어. 
오늘 부는 바람으로  
훨훨 날아올라 뜨거워질 테니.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요한복음 3:8>

예수님이 멀게 느껴져요

예수님만 바라보라고 하잖아요.
나는 그 말이 뭔지 몰라요.
예수님이 친밀하지 않아요.
멀게만 느껴지고.
 
사람들하고 기도하면서 같이 울잖아요.
같이 울어도 똑같이 우는 게 아니에요.
내 눈물은 성분이 달라요.
감사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에요.
서러워서 흘리는 눈물이에요.
 
왜 나를 만들었나.
왜 나만 차별하나.
서럽고 외로워서 눈물만 흘러요.
어떻게 해야 주님을 만날 수 있나요.
방법을 알고 싶어요.
 
상투적인 말부터 해야겠네요.
지루하더라도 참고 들어주시겠어요?
듣다 보면 남는 건 있을 거예요.
 
데이트해보셨지요.
상대방을 알아가는 과정이 있어요.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야 해요.
그 사람이 했던 말과 행동.
그 사람의 태도와 감정.
알면 알수록 좋아요.
 
친구들을 만나보는 것도 좋겠죠.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에 대해
뭐라 말하나 들어봐야죠.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운다면
좋은 사람이란 뜻이죠.
 
결혼을 전제로 만난다면
더욱 신중해야겠죠.
섣불리 결론 내리면 안 돼요.
따질 건 전부 따져봐야죠.
 
예수님도 마찬가지예요.
신랑을 고르는 것과 비슷해요.
많이 알면 알수록 좋아요.
따질 건 전부 따져보세요.
 
예수님이 하신 말,
예수님에 대한 말,
모두 성경에 있어요.
신중하게 읽고 생각하세요.
 
예수님에 대해 알았다고 해서
바로 믿어지는 건 아니에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려면
성령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마른 장작에 불을 붙여야죠.
그래야 활활 타오르니까요.
성령님이 불을 붙어주시면
고백할 수 있어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나는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까요.
설명하기 힘들어요.
어느 날, 예수님이 찾아와 주셨어요.
 
나도 혼자라고 생각했어요.
아무도 날 지켜주지 않았으니까요.
저러다 애 죽겠다 싶으니까
급하게 찾아 오셨나 봐요.
조금만 늦게 오셨어도 나는 세상에 없겠죠.
간신히 살았어요, 정말로.
 
바로 질문하겠죠.
왜 나에게는 안 오시나요?
나도 믿고 싶은데.
사람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혼자라고 느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예수님은 차별하지 않으세요.
예수님은 당신 곁에 오셨어요.
당신도 혼자가 아니에요.
 
당신이 내 앞에서
혼자라고 말하면서 우는데
이상하게 나는 불안하지 않아요.
이제야 알 것 같아요.
당신의 진심을.
 
당신은 그리워하고 있어요.
예수님과 친밀했던 그 시절을.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것처럼 말해서
정말 그런 줄 알았어요.
내가 잘못 알아들었어요.
주님의 따뜻한 품이 그리운 거예요.   
 
처음부터 당신의 마음을 알았다면
길게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내가 무뎠어요.
 
이제 알았으니 부탁할게요.
조급할 필요 없어요.
기다려주세요.
주님이 다시 만나주실 거예요.
 
옛사랑을 그리워하는 당신이 아니라
오늘 주신 사랑으로 설레는 당신이 되기를
나는 바랍니다.

계속 고통받아요, 우리는

내가 더 잘 믿으면
이런 일 없을 텐데.
 
이런 일?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거죠.
 
더 이상 이런 문제로
고통받지 않을 텐데.
 
아, 그 뜻이군요.
아니에요.
 
그건 진실이 아니에요.
진실을 말할게요.
 
계속 고통받아요,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계속.
 
엥, 아닌데.
다른 사람은 잘 믿고 잘 되던데.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세요.
고통받고 있어요.
 
남의 인생 대충 둘러보고
쉽게 평가하지 마세요.
 
모두, 전부
고통받으며 살아요.
 
그럼, 뭐 하러 하나님을 믿나요.
어차피 고통받으며 산다면.
 
좋은 질문이에요.
답해볼게요.
 
복음의 본질은
문제 해결이 아니에요.
 
복음의 본질은
관계 회복이에요.
 
왜곡된 관계가
온전한 관계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왜곡된 관계를
회복시켜주셨어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
끊어진 관계를 이어주신 거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릴 수 있어요.
 
이제 눈치채셨나요?
진짜 문제는 따로 있어요.
 
주변에서 뭐라 하든
성경에서 뭐라 하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는 거죠.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끊임없이 물어요.
 
왜 나만?
왜 나만 이런 거지?
 
아니에요.
우리 모두 그래요.
 
나라고 다르겠어요.
나도 매일 고통받아요.
 
문제 해결에 집착하면
우리는 빠르게 고갈돼요.
 
문제 해결에 전전긍긍하며
믿음을 낭비하지 마세요.
 
미안하지만,
고통은 사라지지 않아요.
 
고통을 피하려고 하면
더 고통스러워져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고통 속에서 꺼내주지 않았어요.
 
도와주시지 않고
고통의 잔을 마시게 했죠.
 
예수님이 고통의 잔을 피하셨다면
우린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은 하나님만의
방식이 있어요.
 
고통 한가운데서
의미를 찾아내세요.
 
의미를 찾는 사람은
성장할 수 있어요.
 
의미를 발견하면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지요.
 
말도 안 된다.
어떻게 고통 속에서 기뻐하냐.
 
결국에 뻔한 소리 하네.
뭔가 다를 줄 알았다.
 
맞아요.
고통 속에서 기뻐하기 어려워요.
 
하지만, 아시나요?
 
항상 기뻐한다는 건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에요.
 
24시간 하루 종일 기뻐하면
그 사람은 병원에 가야 해요.
 
말도 안 되는 기준을 세워놓고
스스로를 정죄하지 마세요.
 
아침에 잠깐 주님을 찾고
하루 종일 분주할 수 있지요.
 
절망할 필요 없어요.
하나님은 쉬는 시간이 없으시니까.
 
당신이 하나님을 찾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은 당신을 찾아내실 거예요.
 
하나님 한 분 만으로
영원토록 기뻐하는 것.
 
당신과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이자 목적입니다.

말씀을 읽어도 은혜가 없네요

말씀을 읽어도 은혜가 없다는
사람을 만납니다.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이런 말이겠지요.
 
예전에는 말씀을 읽을 때
마음이 뜨겁고 감동이 되었는데
요즘에는 뭐가 잘못되었는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없어요.
 
은혜가 없으면 조급해집니다.
만회할 방법을 찾습니다.
 
뭔가 잘못되었다.
그러니, 은혜가 없지.
 
불안 요소를 하나둘 제거합니다.
거리끼는 게 없나 계속 살핍니다.
 
그러다 지치면 본색이 드러납니다.
슬슬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밉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안되네.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지?
 
나는 묵상과 글쓰기가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남이 쓴 글을 읽기만 할 때는
전혀 몰랐던 게 있어요.
 
글을 잘 쓰려면
특별한 영감이나
재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특별한 영감이 떠올라야
특별한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틀린 말이에요.
 
가끔 글을 쓰는 사람은
영감을 기다릴 수 있겠지요.
 
유유자적 편하게 지내다가
영감이 떠오르면 글을 쓰는 거죠.
 
미안하지만
그건 영화의 한 장면일 뿐
실제 벌어지는 일은 아니에요.
 
영감을 기다리는 사람은
오랫동안 글을 쓸 수 없어요.
 
매일 글을 쓰는 사람은
저마다 자신만의 루틴이 있습니다.
 
절제된 삶을 살면서
공장처럼 일정 분량의 글을
매일 찍어냅니다.
 
영감 따위는 믿지도 않고
기다리지도 않아요.
 
그런데, 어떻게 매일 글을 쓰나요?
특별한 비결이라도….
 
없어요. 그런 거.
그냥 쓰는 겁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냥 써 내려가는 거예요.
 
반복하다 보면 가끔
놀라운 일을 겪어요.
 
내 수준을 넘는
특별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아마 사람들이 이런 걸
영감이라 부르나 봅니다.
 
아쉽게도 영감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냥 왔다가
그냥 사라져요.
 
붙잡아두고 싶지만,
어쩔 수 없어요.
 
인정할 건 빨리
인정하는 게 나아요.
 
아! 내가 글쓰기와 묵상이
닮았다고 했지요.
 
나는 매일 글을 쓰기 전에
항상 성경을 읽습니다.
 
특별한 은혜가 없어도
매일 꾸준히 읽습니다.
 
마음이 메마르지 않았나.
그런 고민은 아예 하지 않습니다.
 
하루 세 끼 밥 먹듯이
그냥 앉아서 말씀을 섭취해요.
 
야금야금
잘 씹어 먹습니다.
 
매일 말씀을 읽다 보면
가끔 폭포수 같은 은혜가 느껴져요.
 
매일이 아니라
아주 가끔.
 
성경을 펼칠 때마다
은혜가 있기를 바라죠.
 
하지만, 그건 내 바람일 뿐
현실이 아니에요.
 
내가 통제할 수 없잖아요.
은혜를 만들어 낼 수도 없고.
 
쥐어짜도
발버둥 쳐도
소용없어요.
 
그건 선물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
 
선물을 보내야
선물을 받지요.
 
아까 했던 질문
다시 해볼까요?
 
어떻게 성경을 매일 읽나요?
비결이라도….
 
없어요. 그런 거.
그냥 읽는 겁니다.
 
은혜가 있든 없든
매일 성경을 펼쳐야
평생 동안 읽을 수 있습니다.
 
매일 내리는 비는 장마.
가끔 내리는 비는 단비.
 
둘 중 하나 선택하라면
나는 단비가 좋습니다.
 
매일 비가 내리면
비의 소중함을 모를 테니까요.
 
자책은 이제 그만.
그냥 성경을 펼치세요.

예수님만 바라본다는 말

예수님만 바라보는 삶,
적지 않은 사람이 오해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자고 하면
예수님 보려고 노력합니다.
 
예수님 모습을 떠올리려고
애를 씁니다.
 
커다란 스크린에
예수님이 고난받으시는
장면이라도 틀어주면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릅니다.
 
혼자 기도할 때
예수님 이미지가 떠오르면
감격이 밀려옵니다.
 
시간이 갈수록 예수님 이미지는
더 나은 이미지로 교체됩니다.
 
어릴 때 봤던 예수님 얼굴보다
지금 예수님 얼굴이 더 낫습니다.
 
아쉽게도 예수님 얼굴을
실제로 본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자.
예수님을 보자.
 
두 문장이 같다고 생각해서
발생한 오해입니다.
 
두 문장은
같은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 이미지를
떠올리려 할수록
우리는 약해집니다.
 
예수님 이미지가
효력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이미지는
상상으로 지어낸
허구에 불과합니다.
 
유명 영화배우의 얼굴이나
어느 화가의 작품이겠지요.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건
예수님 얼굴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예수님 말씀을 바라보는 겁니다.
 
눈보다는
귀를 사용해야 합니다.
 
귀보다는
마음을 사용해야 합니다.
 
예수님 얼굴을 떠올리지 말고
예수님 말씀을 떠올리십시오.
 
예수님에 대한 말씀.
예수님이 하신 말씀.
 
성경 전부를 뜻합니다.
모든 구절을 뜻합니다.
 
치유하는 능력은
예수님 얼굴이 아니라
예수님 말씀에서 나타납니다.

내 믿음이 형편없어요

내 믿음이 형편없어요.
나 어떻게 하죠?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
나아갈 수가 없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믿음이 제자리에 있으니
괴로워요.
 
믿지 못해 괴롭고
믿고 싶어 괴롭다면
그건 믿음이에요.
 
당신의 믿음을
싸구려 취급하지 말아주세요.
 
사람들은 믿음에
레벨이 있는 것처럼 말해요.
 
진실이 아니에요.
믿음에는 레벨이 없어요.
 
믿음이 있냐, 없냐.
둘 중 하나에요.
 
문제에 집중하면
불안해져요.
 
감기가 낫느냐
암이 낫느냐.
 
1억을 갚느냐.
10억을 갚느냐.
 
암보다는
감기를 고치기 쉽고
 
10억보다는
1억을 갚기 쉬우니까.
 
암이나 10억을 놓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더 큰 믿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다시 말하지만,
진실이 아닙니다.
 
믿음의 대상이
분명하기 바랍니다.
 
문제에 집중하면 불안해서
더 믿으려고 발버둥 쳐요.
 
문제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믿어봐요, 우리.
 
감기와 암.
10억과 1억.
 
하나님은 차이를
느끼지 못하세요.
 
예수님이 이방 여인에게 말씀하셨죠.
네 믿음이 크도다.
 
예수님은 믿음의 크기에
놀라신 게 아니에요.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믿으니까
예수님이 감격하신 거예요.
 
얼마나 잘 믿느냐.
그만 고민하세요.
 
무엇을 믿느냐.
고민하세요.
 
문제 해결을 믿으시나요.
하나님을 믿으시나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감사할 수 있으려면
 
문제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방법뿐입니다.

결핍의 또 다른 얼굴, 우상

예수님보다 사랑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건 우상입니다.
 
맞습니다.
우상은 모든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우상을 대하는 방식에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
눈앞에 있으면
바로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자세히 살피지 않습니다.
무시하고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죄책감 때문일 겁니다.   
우상이란 말을 듣기만 해도
죄책감이 밀려오니까요.
 
나는 우상에게 더 가까이 가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적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적을 제대로 알아야 이길 수 있습니다.
 
질문해보세요.
왜 그 우상을 섬기게 되었을까.
나는 왜 예수님보다 다른 것을 사랑하는가.
 
그 안에는 결핍이 있습니다.
결핍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 했던 것이죠.
 
자신 안의 결핍을 직면하기 전에
고개를 돌리면 안 됩니다.
 
우상을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우상에게 굴복하지 않습니다.
 
결핍을 정확히 모르면
똑같은 우상이
계속 다른 색 옷을 갈아입고
평생 당신을 쫓아옵니다.
 
위장술에 속아서
우상을 못 알아보면
평생 괴롭힘당합니다.
 
계속 같은 녀석에게
고통받기 싫다면
그 녀석 얼굴을
제대로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생존해야 한다는
강박이 심합니다.
 
내 안에 자리 잡은
결핍입니다.
 
“아무도 날 지켜주지 않아.”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
 
나는 성취를 숭배했습니다.
자극적이고 매력적이었습니다.
 
사명으로 포장되니
속도가 붙고 성능이 좋아졌습니다.
 
믿음으로 도전하는 삶을 산다고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도전하고 이루고
도전하고 이루었습니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면
나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군침이 돌았습니다.
이루어내서 보여주고 싶었으니까요.
 
나는 중독되었고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내가 숭배하던 실체와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소름 끼쳤고
무서웠습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더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드디어 그 녀석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검을 꺼내 그 녀석 심장에
박아주고 싶었습니다.
 
그 녀석을 숭배하는 동안
나는 너무나 고통스러웠으니까요.
 
그 녀석을 제거하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난 이제 압니다.
그 녀석 얼굴을.
 
제아무리 변장을 하고 찾아와도
나는 그 녀석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습니다.
 
당신도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당신 안의 결핍을.
 
교묘히 찾아와 더러운 손으로
당신 안의 결핍을 어루만지는 우상을
물리쳐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당신의 결핍을 채울 수 있습니다.
 
자신 안의 결핍을 직면하고
그 결핍을 주님으로 채우는 것.
 
이것이 우상을 대하는
더 나은 방법입니다.

너 주님 사랑하는 거 맞아?

나 예수 믿는데
내 인생 왜 이렇죠?
 
불행하고
우울하고
힘들어요.
 
예수님 사랑하세요?
네?
 
예수님 사랑하시냐고요?
네….
 
내가 볼 때는 아닌데.
그 정도로는 안돼요.
 
그럼 어떻게 하죠?
알려주세요.
 
더 사랑해야죠.
예수님 사랑하시는 거
정말 맞죠?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사실 잘 모르겠어요.
 
거봐요.
그렇게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행복하겠어요.
 
목숨 다해 주님만
사랑하세요.
 
주님만 사랑하면
다 해결되는데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괴로운 거예요.
 
옆에서 지켜보려니
나는 마음이 괴롭습니다.
 
나는 당신과
생각이 다릅니다.
 
주님 사랑하자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확신이 부족하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어요.
 
아니, 그럼
예수님 사랑 안 합니까.
확신 없이 천국 갑니까.
 
나는 당신처럼
강한 확신은 없지만,
당신이 부럽지 않아요.
 
내가 불안한 건
맞습니다.
 
솔직히 나는
내가 너무 불안합니다.
 
나는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모르겠어요.
확신이 서지 않아요.
 
주님을 사랑한다면
내가 이래서는 안되죠.
 
나는 알고 있어요.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내가 실수해서 고통받는지
나를 사랑해서 고통을 주시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정확한 판별법이 있으면
내게 알려주세요.
 
나도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그런 확신도 없이
무슨 목사라고.
 
맞아요.
당신 말이 맞아요.
 
하지만, 나도 당신만큼
주님을 사랑해요.
 
당신만큼 확신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당신이 확신하는 동안
나는 계속 불안할 거예요, 아마.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확신했던 사람들.
 
베드로는 확신했어요.
다른 사람 몰라도
나는 주님 부인하지 않겠다고.
 
도마는 확신했어요.
내가 손가락으로 예수님 옆구리를
후벼보기 전까지는 믿지 않겠다고.
 
바울은 확신했어요.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되게 하는
그리스도인을 모조리 잡아 처넣겠다고.
 
확신도 그리 안전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어떠세요.
 
내가 확신 없어도
행복한 이유 알려드릴까요.
 
나는 내가 얼마나
주님 사랑하는지
별로 고민 안 해요.
 
생각할수록 좌절되니까요.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해야
나도 안심되고 주님도 만족할까요.
 
어려워요.
다르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주님이 날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루 종일 생각해요.
 
생각할수록 행복하거든요.
너무 너무 행복해요.
 
내가 주님을 사랑하면
얼마나 사랑하겠어요.
 
주님이 날 사랑하시는 거에 비하면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 같죠.
 
당신하고 나하고 누가 더 주님 사랑하는지
따져 봤자 도토리 키재기에요.
 
당신이 이겼다고 해줄게요.
그래도, 난 손해 볼게 없어요.
 
당신과 나.
주님은 차별 없이 사랑해주시니까요.
 
내가 얼마나 주님 사랑하는가에
집중하지 말고
 
주님이 날 얼마나 사랑하시는가에
집중하세요.
 
내가 불안해도 행복한 이유
이제 아시겠죠.
 
계속 고민하세요.
나 주님 사랑하나.
나 믿음 있나.
 
그게 사랑이고
그게 믿음이니까요.

하나님이 해결해주셔야죠

하나님이
해결해주셔야죠.
 
그렇군요.
나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당신 얼굴이
왜 이리 슬퍼 보일까요.
 
못다 한 이야기가 있군요.
하나님께 서운한가요.
 
네. 그래요.
이제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아무리 기도해도
상황이 좋아지지 않으니까요.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해요.
나는 더 이상 못하겠어요.
 
당신이 내게 한 말,
언뜻 보면 믿음 같지만
자세히 살피면 절망입니다.
 
내 환경이 달라지겠어?
저 사람이 달라지겠어?
 
바뀌지 않을 거야.
바뀌지 않을 거야.
절대로 절대로.
 
당신의 문제가 풀리기 전에
당신의 마음이 풀리기를
나는 바랍니다.
 
믿음과 절망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마음이 엉키면
절망입니다.
 
마음이 풀리면
믿음입니다.
 
눈물이 강을 이루고
탄식이 산을 이룰지라도
마음이 엉키면
낙원이 아닙니다.
 
강 없고 산 없어도
얼어붙은 땅이 풀리고
작은 겨자씨 하나 피어나면
그곳은 낙원입니다.
 
나는 기도합니다.
나는 소망합니다.
 
당신 마음이 풀어지기를.   
당신 마음이 낙원 되기를.

조금만 쉬고 싶어요

교회는 언제나 바빠요. 
봉사하는 사람이 부족해요. 
 
주보에 사람 구하는 광고가 
매주 빠지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헌신된 사람은 
목사만큼 바빠져요. 
 
주일에 봉사하다가   
목사보다 늦게 집에 가는 
사람도 있어요.   
 
이게 맞나. 
그만할까. 
 
이래저래 생각하다 
받은 은혜가 떠올라요. 
 
감사한 게 더 많으니까 
계속하기로 결심하죠. 
 
잠깐만요.
너무 힘들면 잠깐 쉬어도 돼요. 
 
엥, 정말요?
막상 쉬면 조금 불편해지는데. 
 
알아요.
그래도 힘들면 쉬어야죠.  
 
당장 그만두라는 말이 아니에요. 
억지로 버티지 말라는 말이에요. 
 
교회 일 거절해도 
하나님을 거절하는 건 아니거든요. 
 
교회 일 잘해도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도 아니고요. 
 
사람들이 부탁한 봉사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비슷해 보여도 서로 다른 거예요.   
 
교회 일 하나만 하는 사람 드물어요. 
일단 시작하면 사람들 눈에 띄어서 
여기저기 불려 다녀요. 
 
탈진하는 순간이 와요. 
의지로 버티는 순간이 오죠. 
 
“조금만 쉬고 싶어요.” 
 
그 말 한 마디 못해서 참고 참다가 
조용히 교회를 떠난 사람 많이 봤어요. 
 
하나님께서 얼마나 
마음 아프실까요. 
 
남 이야기만 할 수 있나요. 
나도 고민 많았어요. 
 
내가 목사라서 직업으로  
교회 일을 열심히 하는 건지. 
 
주님을 사랑해서 순종으로 
교회 일을 열심히 하는 건지. 
 
신학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교회 일이 내 직업이 되었으니까요. 
 
내가 아무리 교회 일을 열심히 해도 
사람들은 생각했을 거예요.  
목사니까 그렇지.
 
당연한 거죠. 
내 직업이잖아요. 
 
반대로,
교회 일을 대충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목사가 왜 저래. 
그러지 않았을까요. 
 
분명히 알고 싶다고 
목회를 그만둘 수는 없잖아요. 
그대로 살았죠. 
 
직업인지 봉사인지 
구분되지 않은 채로 
그냥 열심히 했어요. 
 
어쩌다 보니 남들과 
다른 길을 가게 되었어요. 
 
더 이상 교회 일을 안 하니까 
안 보이던 게 보이더라고요. 
 
교회 건물
교회 행정 
교회 사람 
다 교회죠. 
 
평범한 건물이 교회라고 
불리는 이유는 아시죠?  
 
당신이 교회이기 때문이에요. 
자, 그럼 나는 묻고 싶어요.
 
당신을 위한 봉사는 
열심히 하고 있나요. 
 
당신이 예배에 집중하도록 
자신을 잘 돕고 섬기나요.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들려주듯
자신에게 복음을 들려주고 있나요.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나는 그러지 못했어요. 
너무 바빠서. 
 
자신을 돌보면서 
교회를 돌봐주세요. 
 
교회를 돌보면서 
자신을 돌봐주세요. 
 
그래야 당신도 살고 
교회도 삽니다. 
 
걱정 마세요.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마음에 부담이 돼서 
교회 일을 전혀 하지 않는 분에게는 
조심스럽게 부탁드리고 싶어요.  
 
부담되지 않는 
작은 일 하나만 맡아주세요.  
 
고객이 아닌 성도가 될 때 
돌봄을 배울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돌보는 법을 배우면 
자신을 더 잘 돌볼 수 있답니다. 
 
걱정 마세요.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억지로 사랑하지 마세요

<마태복음 5: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여라.
 
당신이 얼마나 아파하는지 예수님은 이미 아세요. 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죄책감까지 끌어안지 마세요. 예수님이 슬퍼하세요.  
 
당신이 상처로 아파할 때, 예수님이 그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기를 바라요. 
 
“이제 잊을 때도 되지 않았니? 너를 위해서라도 그 사람 용서해라. 그래야, 너도 살지.” 
 
누군가 그렇게 말할 때, 고개를 끄떡이지 마세요. 그건 복음이 아니에요. 드라마 대사죠. 용서가 그렇게 쉽다면, 누가 용서 못 하겠어요. 복음이 아닌 말에 매여서, 자책하시면 안 돼요.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가해자 그 사람이에요. 원수가 사랑스러워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게 아니에요. 사랑할 수 없으니까, 사랑하라고 하신 거죠.    
 
원수 사랑, 우리 힘으로 못해요. 억지로 사랑하면, 예수님이 마음 아파 하세요. 예수님은 먼저 당신이 사랑받기를 원하세요. 
 
사랑 먼저 받으세요. 예수님께 사랑 듬뿍, 넘치도록 받아서 원수에게 흘러가게 하세요. 
 
원수는 그렇게 사랑하는 거예요. 바닥에 들러붙은 사랑을 억지로 긁어내서 사랑하면, 쓰라리고 아파요. 부디, 사랑 먼저 받으세요. 
 
용서는 사랑의 조건이 아니에요. 용서 못 한다고 버림받지 않아요. 예수님이 깨뜨린 율법을, 주섬주섬 끼워 맞추시면 안 돼요. 또 다른 율법이에요. 
 
불쑥불쑥 아픈 기억이 떠오른다고, 그 사람을 용서 못 한 게 아니에요. 용서하는 과정이고, 과정이 곧 용서에요. 
 
조급 할 필요 없어요. 당신은 언젠가 용서할 거예요. 그날이 오면, 상처도 아픔도 미움도 모두 떨쳐버릴 수 있어요. 힘들어도, 조금만 견뎌 주세요.

믿음을 크기로 비교하지 마세요

<누가복음 8:2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믿음을 크기로 비교하지 마세요. 믿음은 크고 작음으로 표현할 수 없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믿음의 크기에 놀라신 게 아니에요.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믿었기 때문에 놀라신 거죠. 
 
믿음은 크기와 상관없어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의 크기는 겨자씨 만큼이에요. 예수님은 겨자씨만큼만 믿어도, 산을 뿌리째 뽑아서 옮길 수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보다 더 큰 믿음을 가지려 애쓰는 것은, 어쩌면 낭비일지도 몰라요. 
 
믿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해요. 믿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겨자씨만큼이라도 믿으라는 것이죠. 절망 속에서 믿음을 사용한다면, 예수님은 기뻐하세요.
 
폭풍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이 물으셨어요.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예수님은, “왜 못 믿어?”가 아니라, “왜 믿음을 사용하지 않았니?”라는 물으셨어요.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속에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고 보신 거예요. 하지만, 제자들은 위기 상황에서, 믿음을 사용하지 않았어요. 
 
당황하면 그럴 수 있어요. 누군가 갑자기 동전을 달라고 하면, 다급하게 주머니를 뒤지겠죠. 아무리 찾아도 동전이 나오지 않아서 없다고 말했는데 집에 가서 보니까, 속주머니 깊은 곳에서 동전이 나와요. 없었던 게 아니라 있었는데, 못 찾아서 못 준 거죠. 
 
폭풍을 만난 제자들은 다급해서 믿음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어요. 예수님께서 배에 함께 타고 계신 것조차 잊어버렸으니까요. 사력을 다해 폭풍과 싸우다 승산이 없자, 누군가 허공에다 한 마디를 외쳤을 거예요. “가서, 예수님을 깨워!”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바람과 성난 파도를 말씀 한 마디로 잠잠하게 하실 수 있으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잊어버렸어요. 예수님과 함께라면, 당연히 죽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조차 못 했던 거죠. 
 
겨자씨보다 믿음이 작다면, 믿음을 키우세요. 겨자씨보다 믿음이 작다면, 어쩌면 믿지 못하시는 거니까요. 하지만, 겨자씨만큼이라도 믿는다면, 더 이상 크기를 탓하지 마세요. 크기는 상관없어요. 
 
겨자씨만큼 작은 믿음이라도, 주저하지 말고 사용하세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더욱 믿음을 사용하세요. 잠시 흔들릴 뿐, 당신은 절대로 끝장나지 않을 거예요. 
 
작고 작은 믿음이라도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랄 때, 예수님은 기뻐하세요.  

예수님께 솔직하게 나아가세요

<누가복음 8:24>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성숙한 믿음을 가지면,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고, 언제나 차분한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요? 글쎄요, 나는 잘 모르겠어요. 
 
가끔 그렇게 보이는 사람이 있기는 한 것 같은데, 속 마음은 알 수가 없으니까요. 애써 태연한 척하는 것이지, 마음속 감정은 다를 거예요. 로봇이 아닌 이상 차분하기 힘들어요. 
 
갑작스럽게 위기를 만나는 사람은, 감정에 휘둘려요. 어쩔 수 없어요. 사람이라 그런 거예요. 자책하지 말고, 내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감정에 휘둘렸다면, 예수님께 솔직하게 나아가세요. 
 
예수님이 용납 못할 감정은 없어요. 감정에 휘둘려 어찌할 바를 몰라도, 예수님은 꾸짖지 않으세요. 
 
애써 위로하는 말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제자들이 아니라, 바람과 성난 파도를 꾸짖으셨어요. 제자들의 다급한 감정을 꾸짖으신 게 아니라, 제자들을 놀래킨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신 거예요. 
 
예수님을 오해하시면 안 돼요.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녀를 꾸짖지 않으세요. 굳이 말하자면, 안타까워하시는 거예요. 함께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직도 철부지라 속상해서 그러셨죠. 
 
자녀가 무서워서 아버지를 찾는데, 아버지가 혼을 내다니요. 우리는 예수님은 그런 분 아니세요. 자녀는 잘못한 거 없어요. 무서워서 그런 거잖아요. 예수님은 이해하세요. 두렵고 무서운 감정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가세요. 
 
차분할 필요도 없고, 성숙할 필요도 없어요. 직분이고 체면이고 따질 필요 없어요. 솔직한 게 좋아요.
 
다른 사람은 뭐라든, 나는 철부지로 살 거예요. 나도 힘든 날 있어요. 주위를 둘러보면, 덩그러니 혼자에요. 내 감정을 받아줄 사람이 항상 내 옆에서 기다리고 있나요?
 
 목사가 고민을 들어줄 때나 목사죠. 자기가 먼저 힘들다고 말하면, 누가 좋아하겠어요. 눈치 보여서 아무 말이나 쉽게 못해요. 
 
예수님 앞에서만큼은 솔직해지고 싶어요. 예수님 만큼은 속이고 싶지 않아요. 내 수준이 고작 이런데, 어쩌겠어요. 내 감정, 내 생각 있는 그대로 말씀드릴 거예요. 예수님은 내 마음을 아시고, 편견 없이 받아주시니까요. 
 
참된 성숙은 예수님과 가까워지는 거예요. 감정에 휘둘릴 때, 예수님을 찾는 거죠. 위기 상황에서, 가장 먼저 예수님이 떠오른다면, 그게 바로 믿음이에요. 작고 초라한 믿음이라도, 예수님이 기뻐하세요. 
 
그러니, 자책하지 마세요.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가세요. 당신의 감정뿐만 아니라, 현실의 문제도 해결해 주실 거예요. 
 
예수님은 솔직한 당신을 좋아하세요. 다른 곳에 가서 감정을 풀지 말고, 예수님께 쏟아놓으세요. 예수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의 당신을 기다리세요. 
 

예수님이 내 기도를 듣고 계실까?

<누가복음 8:22-23>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예수님께서 내 기도를 듣고 계실까? 확신이 없을 때가 있어요. 그럴 수 있죠. 예수님이 듣고 있다고 직접 목소리로 대답해 주시지 않으시니까요.
 
나도 기도하다 답답할 때가 있어요. 기도를 하는 건지, 혼자 푸념을 하는 건지 딱 부러지게 구분을 못할 때도 있죠.
 
나는 기도가 막힐 때, 성경을 읽어요. 특히, 복음서를요. 예수님의 목소리가 안 들리니까, 이미 하신 말씀이라도 들어보고 싶어서요. 
 
말씀을 읽다 보면, ‘그렇지, 답답한 건 내 감정이지. 예수님이 분명히 듣고 계시지.” 혼자 위로받거든요. 감정이 너무 나를 힘들게 하니까, 말씀으로 감정을 돌보는 거예요. 
 
예수님은 절대로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세요. 나의 슬픔, 고통, 두려움, 외로움, 모르시지 않아요.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시느라 몸을 혹사하셨어요. 한 사람이라도 더 치유하시고, 구원하시느라 일분일초가 아까우셨어요. 
 
낮에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이셨고, 밤에는 한 사람 한 사람 찾아다니며 돌보셨어요. 이른 새벽에는 조용히 산에 올라 기도하셨고요. 정말로 쉴 틈이 없으셨죠. 
 
예수님이 제자들과 배에 오르시자마자, 잠에 드신 게 당연하죠. 얼마나 피곤하셨을까요? 
 
예수님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호수를 건너 거라사의 광인을 만나러 가셨어요. 가족에게 버림받은 것으로 모자라, 온 세상 사람에게 버림받은 한 사람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그분이 우리 예수님이세요. 
 
예수님은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쉬지도 못할 만큼 한 사람을 사랑하셨어요.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으셨어요. 동시에 모든 사람을 만나실 수 없었어요.
 
이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요. 예수님은 더 이상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세요.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예수님은 모든 일을 제쳐놓고 우리를 찾아와 만나주세요. 
 
예수님의 사랑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더 많은 것을 해주실 수 있어요. 온 세상의 버림을 받은 상처 입은 한 사람을 치유하시고자, 폭풍을 뚫고 호수를 건너신 예수님이 우리를 외면하실리 없으시죠. 
 
말씀 속에 거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면, 나는 항상 설득 당해요. 혼자라는 감정을 거슬러 예수님께 나아가요.  
 
‘예수님, 저는 지금 혼자인 것 같아요. 예수님이 느껴지지 않아요. 하지만, 예수님, 지금 제 목소리 듣고 계시죠? 저 너무 힘들어요.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제 힘든 마음 한 번만 위로해 주세요.”
 
외로운 감정이 밀려오면, 성경을 펼쳐서 말씀 안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보세요.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은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하세요. 기억하세요. 속이는 건 감정이고, 진실은 사랑이에요.

결핍은 약점이 아니에요

<누가복음 4:3-4>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왜 시험에 자주 걸려 넘어질까요? 약해서 그렇겠죠.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사탄이 우리의 약점을 정확히 알아요. 
 
귀신같이 안다는 말이 사탄에게 어색한 말은 아닐 거예요. 사탄이 우리 안의 결핍을 작정하고 파고들면 견뎌내기 힘들어요. 
 
사탄은 예수님에게도 같은 전략을 썼어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어요. 배고픔을 이겨내기 힘드셨을 거예요. 
 
사탄은 그 틈을 파고 들었어요.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사용해서,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했거든요. 
 
사탄이 사용한 가정법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는 말은,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었어요. “너 그거 할 수 있잖아. 떡으로 만들어서 먹어!”라고 말한 거죠. 
 
예수님은 능력이 모자라서, 사탄의 유혹을 거절하신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으로 순종하기 위해서, 배고픔의 고통을 참으신 거예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능력을 남용하지 않으셨어요.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능력을 사용하셨거든요. 
 
자신의 배고픔을 철저히 견뎌내신 예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의 배고픈 모습은 견딜 수 없으셨어요. 오병이어의 기적은 그렇게 일어난 거예요. 
 
사탄이 사람의 결핍을 간파하고, 기습적으로 공격하면 아무도 못 견뎌요.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잖아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살자는 말은 아니에요. 자주 넘어지는 것이 당신 만의 잘못은 아니라는 거죠.  
 
약해서 예수님이 필요하잖아요. 혼자 설 수 없어서, 예수님께 매달리는 거잖아요. 우리는 강할 수 없어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 
 
신명기 8장 3절 말씀이에요.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 실패해요. 굶주림을 못 이겨요. 시험이 올 때마다 넘어져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버리셨나요? 아니에요.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자주 넘어지거든, 기억하세요. 하나님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세요. 
 
모든 사람이 실패했지만, 예수님은 유혹을  이기셨어요. 예수님은 배고프셨지만, 우리를 위해 기꺼이 떡이 되어 주셨어요. 우리 안의 결핍은, 예수님으로만 채워져요. 
 
결핍은 약점이 아니에요. 결핍은 기회에요. 예수님으로 배부르면, 안전할 거예요. 
 
생명의 떡을 먹은 사람들, 예수님과 하나 되었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예수님은 다시 오실 거예요.

시험은 피할 수 없어요

<누가복음 4:1-2>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성령 충만하면, 사탄이 공격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항상 성령 충만해야 한다.” 
 
언뜻 들으면 맞는 말 같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어요. 내 생각은 조금 다르거든요. 아무리 성령 충만해도 시험을 피할 수 없어요. 
 
예수님은 성령이 충만하셨지만, 시험을 당하셨어요. 사탄은 물러서지 않았어요. 예수님을 쓰러뜨리려고 40일 밤낮으로 덤벼들었죠. 
 
누군가 우리에게, “당신은 성령 충만합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당당하게, “네!”라고 대답할 수 있겠어요. 교만해 보이잖아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목말라요. 더 사랑하고 싶고, 더 가까워지고 싶어요. 항상 부족하게 느껴져요. 
 
성령 충만하고 싶지만 성령 충만하지 못한 거죠. 아쉬우니까, 자책하게 돼요. 
 
‘내가 요즘 느슨해. 사탄이 나를 우습게 봐. 사탄도 그걸 알아. 나는 사탄의 밥이야. 툭하면 나를 건드려.’ 
 
시험을 피하려고 하는 사람은, 시험이 찾아올 때 억울하고 속상해요. 시험을 감당할 힘조차 없다면, 하나님이 원망스러울 거예요. 
 
시험은 필수에요. 예수님은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셔야 했어요. 아담은 유혹에 넘어갔지만, 예수님은 유혹을 이겼어요.
 
예수님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에요. 싸움에 임할 때, 우리가 앞장서면 안 돼요. 우리는 예수님 뒤로 피해야 해요. 예수님이 우리 대신 싸워주세요. 
 
광야에 홀로 섰다면 기억하세요. 당신은 절대로 혼자가 아니에요. 먼저 시험받으신 예수님은, 당신을 외면할 수 없어요. 
 
넘어지고 쓰러지더라도, 끝난 게 아니에요. 일어서서 보듬고 다시 시작하세요. 이미 승리하신 예수님이, 당신을 끝까지 책임져 주실 거예요.

마음이 무너지는 날

<누가복음 3: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마음이 막 무너지는 날, 있잖아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잘나 보이고, 나 빼고 모든 사람이 걱정 없이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날, 다른 사람과 비교할 의지조차 사라질 만큼 나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지는 그런 날 있잖아요. 
 
막 울고 싶은데, 어디 가서 울어야 할지 몰라 성경을 펼쳐 읽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평소에 많이 읽은 말씀인데, 왜 갑자기 눈물이 나지? 
 
‘내가 네 마음을 안다, 그 마음을 내가 모르겠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예수님의 시작은 고요했어요.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죠. 예수님이 누추한 옷을 입고 요단 강에 나타나셨을 때, 사람들 눈에는, 자기들처럼 죄를 용서받으려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온 사람처럼 보였을 거예요. 
 
그럴만해요. 당시의 모든 종교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있었어요. 갈릴리 요단 강은, 유능하고 탁월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아니었죠. 예루살렘에서 낙오한 사람들이나 모여드는 변두리에, 감히 메시아라니…. 상상할 수도 없었겠죠.   
 
예수님은 아무런 설명도 변명도 없이,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 요한 앞에 서셨어요.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그 누구의 동의도 필요 없으셨지만, 이제 허락하라는 말로 세례를 받으셨어요. 
 
예수님이 기도하셨을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님이 비둘기처럼 내려오셨고, 하나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어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단다.”
 
여기서, 많이 울었어요. 하나님의 목소리가 나한테도 들리는 것 같아서요. 내가 위로를 받고 마음이 따뜻해지니까, 이제야 당신이 보여요. 당신을 위로하고 싶어요. 
 
‘내가 이렇게 비참해진 건 내 선택의 결과일지도 몰라. 내가 어리석었어. 올바른 결정을 내렸다면, 이렇게까지 비참해지지 않았을 거야.’ 
 
그보다 비참한 생각은 없을 거예요. 당신이 나처럼 슬프다면, 우리 잠시 대화해요. 
 
어쩌면, 우리 실수한 게 아니에요. 과거로 돌아가 똑같은 상황에 놓이더라도, 똑같은 결정을 내릴지도 몰라요. 두 번 어리석을 수 있다면,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신념이에요. 
 
혹시, 예수님을 사랑해서 내린 결정 아닐까요? 책임을 회피하고, 변명하고, 합리화하자는 말이 아니에요. 진실을 알고 싶어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어리석은 결정이 가능했을까요?
 
당신은 예루살렘에서 밀려난 게 아니라, 예루살렘을 추구하지 않은 거예요.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예수님을 닮아서, 예수님처럼 올바른 결정을 내린 거예요.
 
당신의 실수가 아니에요. 올바른 선택이에요. 자책하지 마세요. 비록 예루살렘과는 멀어졌을지 몰라도, 예수님이 당신과 함께 하세요. 
 
좁고 험한 그 길 끝에서, 예수님이 두 팔로 안아주시고, 사랑으로 속삭여 주실 거예요. ‘잘했다. 수고했다. 내가 너무 기쁘구나’ 예수님의 진심이에요. 조금만 힘을 내주세요. 얼마 남지 않았아요.

용서는 무한 반복이에요

<마태복음 18:21-22>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주님, 형제가 제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
 
반복해서 상처를 주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관계를 단절하고 떠나버리고 싶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발목이 잡혀요. 
 
상처 준 사람이 한없이 가벼운 말 한마디로 미안하다고 말할 때, 용서해야 한다는 의무감. 그를 미워할 때마다 찾아오는 죄책감.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에요. 
 
만약 반복적으로 상처 주는 사람에게 반복적인 고통을 겪고 계시다면, 성경을 오해하신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을 풀어드릴게요. 오해 없이 들어주세요.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했어요. “예수님, 용서를 구하는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할까요? 일곱 번이면 될까요?” 
 
베드로는 왜 일곱 번이라고 질문했을까요? 일곱은 유대인의 문화에서 “완전 수”였어요. 7이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바가 있었지요. 일곱 번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베드로가 추측했던 거예요. 
 
예수님은 베드로의 예상을 깨고 전혀 다른 대답을 하세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라.” 7 곱하기 70을 해서, 490번을 용서하라는 의미인가요? 아니에요. 용서의 횟수에 제한을 두지 말라는 뜻이에요. 
 
예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바보처럼 살기를 원하시는 걸까요? 상처 준 사람이 하루에 490번씩 우리를 괴롭히는데, 그때마다 용서하라니요. 아무리 예수님이시라도, 너무 하시는 것 같아요.
 
일단, 침착하세요. 예수님을 오해하시면 안 돼요. 예수님의 의도를 아셔야 해요. 
 
당시의 바리새인은 율법을 의미를 왜곡해서,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하고 합리화했어요. 바리새인들은 딱 세 번만 용서했어요. 네 번째에는 그 사람을 정죄해 버렸어요. 
 
네 번째부터는 더 이상 용서하지 않아도 해도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었죠. 율법을 자기들 멋대로 왜곡하는 상황을 예수님이 따끔하게 지적하신 거예요. 
 
베드로가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일곱이라고 넉넉하게 숫자를 부풀려 말했는데, 그조차 충분하지 않았던 거예요. 
 
율법의 참된 가르침은, 용서는 끊임없는 과정이라는 거예요. 끔찍한 일을 경험해 보세요. 용서라는 말을 떠올리고 싶지도 않을 거예요. 상처를 준 사람이 찾아와서, 용서를 운운하는 것조차 헛구역질이 날 정도니까요. 
 
상처 준 사람이 눈앞에 없을지라도, 상처의 고통은 하루 일곱 번씩 일흔 번 반복될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횟수의 제한을 두지 말고 상처의 고통을 예수님께 가져다주세요.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일곱 번, 다시 일흔 번…. 절대로 멈추지 마세요. 상처의 고통을 끌어안고 아파하지도 마세요. 예수님께 가져다주셔야 해요. 
 
일곱 번씩 일흔 번, 예수님께 내어맡기면서, 차분하게 기다리세요. 시간 오래 걸려요. 자책과 정죄는 용서할 때까지, 잠시 미루세요. 예수님도 일곱 번씩 일흔 번, 충분히 이해하세요.

성장은 커지는 게 아니에요

<에베소서 4:15> 

사랑으로 진리만을 말하고,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모든 면에서 성장하도록 하십시오. 
 
성장은 커지는 게 아니에요. 더 높이 더 멀리 나아가는 것이 성장일 수 없어요. 바울이 말한 성장은, 연합이에요.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이죠. 
 
복음이 말하는 성장은 친밀감이죠. 예수님과 가까워지는 거예요. 매일매일 조금씩 예수님과 가까워지고 있다면, 그것은 성장이에요.  
 
어쩌면, 그마저도 쉽지 않겠죠. 서 있을 힘조차 없어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을지도 몰라요. 예수님은 점점 멀어지고, 다른 사람들은 나를 앞질러 가버리고. 불안하고 무섭죠.   
 
예수님을 오해하시는 거예요. 우리의 노력으로 예수님에게 나아갈 수 없어요. 우리가 이미 예수님의 자녀라면, 그것은 선물이죠. 예수님이 찾아와 만나주셨거든요. 
 
아무리 성장해서 높아진 들,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겠어요. 예수님을 간절히 바라만 볼 뿐, 우리 힘으로 거리를 좁힐 수 없어요. 예수님도 아시죠. 우리가 포기해 버릴까 봐, 다시 오신다고 약속해 주셨어요.  
 
우리가 낙심해서 바닥에 주저앉아 항상 제자리에 있어도, 예수님이 다가와 손잡아 주시면, 성장이에요. 거리는 좁혀졌고, 예수님이 가까워졌으니까요. 
 
성장하지 못한다고 자책하지 말아요.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해요. 예수님과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 그것이 성장이에요. 

외로움이라는 감정

<열왕기상 19:9>

시내 산에 도착한 엘리야는 한 동굴 속에 들어가 밤을 지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야,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절망에 빠진 사람은 누구나 혼자가 돼요. 깊은 동굴 속으로 숨어버리죠. 두 번 다시 상처받기 싫으니까,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아요. 어쩌면, 하나님에게도.
 
엘리야가 깊은 절망에 빠져 동굴에 숨어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물으셨어요. “엘리야야, 왜 여기 있느냐?” 
 
엘리야의 감정이 어땠을까요? 화났을 것 같아요. “그걸 몰라서 물으세요, 하나님? 동굴 밖으로 나가면, 저 죽어요.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도대체 이게 뭐예요. 내 옆에는 아무도 없어요.”
 
엘리야는 깊은 절망에 빠져서, 하나님의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어요. 하나님은, “왜 거기 있느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왜 여기 있느냐”라고 물으셨어요. 
 
“거기”와 “여기”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하나님이 “거기”라고 말씀하셨다면, 엘리야는 정말로 혼자였을 거예요. 하나님이 동굴 밖에 계시다는 뜻이니까요. 동굴 밖에서, 남의 일 보듯 말씀하시는 거죠. “너 거기서 뭐 하니? 힘든척하지 말고, 얼른 나와라.“
 
하나님은, “거기”가 아니라 “여기”라고 말씀하셨어요. 하나님이 지금 어디 계신 걸까요? 엘리야가 동굴의 어둠 속에 머리를 파묻고 “나는 혼자”라고 말할 때에도, 하나님은 엘리야와 함께 계셨어요.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좁고 어두운 동굴에 찾아오셨어요.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혼자두지 않으세요.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우리를 속여요. “넌 혼자야. 아무도 네 맘 알아주는 사람 없어.” 감정이 하는 말에 속지 마세요.
 
당신에게 진실을 말할게요.
 
하나님은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하세요.

오래 참음에 관하여

“미워하는 사람이 있어요. 
참아야지, 받아줘야지
다짐하지만 하루를 못 가요.
 
성경에서 
오래 참으라고 하잖아요. 
나도 오래 참고 싶어요. 
 
하루도 못 참고 
다시 미워하는 
나 자신이 실망스러워요.” 
 
도를 닦듯이 
오래 참으려고 노력한다면  
하루가 아니라 잠시도 못 버텨요. 
 
오래 참으라는 말, 
다른 종교에서도 가르쳐요. 
착하게 살면서 참으라고 말하죠. 
 
복음과 종교
무엇이 다를까요?
맞아요, 은혜에요. 
 
오래 참음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은혜의 결과에요.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려고 애쓴다고 
사랑할 수 없어요. 
 
잠시 잠깐 마주치기만 해도 
화가 나는데 어떻게 해요. 
 
그 사람은 내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도 몰라요. 
 
매일 똑같은 방식으로
기분 나쁘게 말하는데   
어떻게 견디겠어요. 
 
하루하루 은혜받고 
은혜받은 만큼 받아주는 거예요. 
 
성격 같았으면 
소리 지르면서 싸울 일
따뜻하게 말하고
지나가는 거죠.  
 
은혜가 마르면 싸우고
은혜가 넘치면 받아주는 거예요. 
 
무작정 희생하고 
참으라는 말은 아니에요. 
 
은혜받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세요. 
 
은혜받은 사람의 말은 
따뜻해서 잘 들리거든요. 
 
미운 감정으로 
내던진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어요.
 
따가워서 
받아낼 수 없어요.
냅다 받아치죠. 
 
진심이 담긴 말은 
매끄럽고 푹신해요. 
 
엉겁결에 받아들고 
한참을 품고 있어요. 
 
안 듣는 것 같아도 
두고두고 생각하거든요.  
 
잘 지내다 
또 폭발하면요?
 
괜찮아요. 
과정이에요. 
 
내일 아침 은혜받고 
다시 시작하시면 돼요. 
 
은혜받으면서 
하루하루 살았는데 
지나보면 오래 참은 거예요.
 
넘어지고 쓰려져도 
포기하지 않았잖아요. 
 
지나온 모든 날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해요. 
 
오래 참으려고 애쓰지 말고 
은혜받으려고 애쓰세요. 
 
하나님은 
오래 참은 당신보다 
지금 이 순간의 당신을 
사랑하시니까요. 

하나님을 비웃어 버렸다

<창세기 17:17>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웃으며, 마음으로 혼잣말을 했습니다. “어떻게 백 살이나 먹은 사람이 아기를 낳을 수 있을까?
 
From 아브라함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다고 하셨을 때, 나는 비웃었어요. 당연하지요. 나는 이미 100세였고, 아내 사라는 90세였습니다. 늙을 대로 늙은 두 사람이 어떻게 아들을 낳겠어요? 
 
나는 말했습니다. “아이고, 하나님. 됐으니까, 지금 있는 아들에게나 복을 주세요. 종의 몸을 통해서 낳았지만, 그래도 내 자식입니다.” 
 
믿음 없는 말이지요? 하나님을 조롱할 의도는 없었지만, 그렇게 됐습니다. 무심결에 말해놓고, 잔뜩 긴장했지요.  
 
믿음 없다고 혼내실 줄 알았거든요. 별 볼일 없는 믿음에 실망해서, 나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나버리실까 걱정했지요. 
 
하나님의 반응은 내 예상과 달랐습니다. 
 
“그래, 네가 말한 그 아들에게도 복을 주겠다. 하지만, 그 아들이 내가 약속한 자녀는 아니다. 내년 이맘때 네가, 자녀를 낳을 것이다. 내가 약속한 아들이다.” 
 
하나님은 믿음이 부족한 나를 이해하셨습니다. 은혜를 베푸셨지요. 나는 당황했습니다. 덤으로, 종의 몸에서 난 아들까지 축복해주셨으니까요.    
 
내 아내 사라도 믿음이 부족한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남편에 그 아내였을까요? 아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속으로 비웃어버렸습니다. 
 
“그렇면 좋게요? 남편과 내가 이렇게 늙었는데,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겠어요?” 
 
그 당시 나와 아내는 하나님을 잘 모르고, 우리의 처지를 스스로 비웃고 조롱했지요. 
 
나도 내 나름대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내 현실이 너무나 슬프고 끔찍해서, 하나님이 바꾸실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지요. 
 
“아무리 하나님이시라도, 내 상황은 못 바꾸신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믿음 없는 나에게 막상 아들을 주시자,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비웃던 사라는, 기쁨의 웃음이 터져버렸습니다. 아이를 품에 안고 하나님을 찬양했지요.   
 
“하나님께서 내게 웃음을 주셨다.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도 나처럼 웃게 될 것이다. 내가 아이를 낳을 수 있으리라고 어느 누가 알았겠는가!”
 
그제서야, 나는 기억났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아셨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말씀입니다. 
 
“네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아들을 낳으면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여라.” 
 
내 아들의 이름은 처음부터 “이삭”이었어요. 이름의 뜻이 “웃음”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웃음”을 주신다고 했는데, 나는 믿지 못해서, 하나님을 비웃어 버렸습니다.  
 
내가 훗날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린다니, 부끄러울 뿐입니다. 내 믿음으로 이룬 결과가 아닙니다. 믿음 없는 나에게 거저 주신 은혜입니다. 
 
인생이 힘들 때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땅만 쳐다봅니다. 엄연한 현실 앞에서, 감히 꿈조차 꿀 수 없습니다. 형편과 처지를 탓하며, 자신을 조롱하고 비웃습니다.  
 
나는 부탁합니다. 당신의 믿음을 하찮게 여기지 마세요. 당신의 믿음이 부족해서, 하나님이 못 도와주실 것이라 단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입니다.  
 
당신이 힘들어서 웃을 수 없다는 걸 압니다. 나도 그랬으니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셔서, 우리를 잘 아십니다. 우리의 연약한 믿음마저도 배려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나는 당신을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약속하신 모든 일을 이루십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마세요.   
 
결국, 당신도 웃게 될 겁니다.  

항상 기뻐할 수 없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 
항상 기뻐하라
 
당신은 항상 기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불가능한 목표를 제시하고,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을 정죄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을 오해하는 겁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단지, 두 단어로 짧습니다. 하지만, 이 짧은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극단적이죠.
 
말씀 그대로 기뻐하는 사람이 있고, 기뻐하지 못해 슬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뻐하는 사람도 마냥 기뻐할 일이 아니고, 슬퍼하는 사람은 굳이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쁨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없거든요.
 
사람이 항상 기뻐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물리적 시간으로 24시간 기뻐하는 사람은 정상이 아니거든요. 어쩌면 치료가 필요한 사람일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항상”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기쁨의 개념을 복음적으로 이해한다면, “항상”이라는 말이 물리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게 될 겁니다.
 
“항상”이라는 말은, 오히려 의지적인 개념입니다.
 
기쁨을 말하기 전에, 우리는 보다 포괄적인 개념인 감정에 대해 살펴봐야 합니다.
 
감정은 무엇일까요?
 
감정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은 특정한 대상에 따른 심리적인 반응이거든요.
 
내 주장이 아니라 상식이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으로부터 창조의 능력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창조할 수는 없겠지요. 사람 역시 피조물이니까요. 그 예로, 사람은 감정을 창조할 수 없습니다. 
 
만약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창조할 수 있다거나, 손바닥을 뒤집듯이 감정을 전환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중대한 착각에 빠진 겁니다. 
 
감정은 느끼는 것이지 억지로 쥐어짜는 것이 아니거든요.
 
사람이 원수를 마음에 품으면 그에 따른 감정은 분노입니다. 원수를 바라보는 사람은 원수에 대한 감정을 느끼는 거죠.
 
원수에 대한 감정이 사랑인 사람이 있을까요? 
 
감정의 속성을 오해한 채로 말씀을 지키려는 사람은 원수를 바라보면서 사랑의 감정을 억지로 쥐어짭니다. 안타깝지만, 실패하겠죠.
 
역설적으로, 원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은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바라보는 대상이 원수가 아니라 예수님이기 때문이죠.
 
다시 말하지만, 사람은 감정을 스스로 창조해 낼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원수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것은 스스로 창조한 감정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반사된 감정입니다.
 
항상 기뻐하려는 자, 억지로 기뻐하지 마십시오. 기뻐하지 못하는 자신을 정죄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감정을 창조할 수 없습니다.
 
기쁨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은혜의 결과입니다.
 
당신에게 은혜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라보는 대상이 잘못되었다는 말이죠. 기쁨의 대상을 바라봐야 기쁨을 느낍니다.
 
잘못된 대상은 무엇일까요?
 
내 옆에서 나보다 기뻐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의 감정은, 결국 열등감으로 이어집니다. 
 
세상 어딘가에 항상 기뻐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추론하지 마십시오. 그럴수록 더욱 비참해질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세상에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도 항상 기뻐할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세상 어딘가에 항상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라, 당신의 결핍이 만들어낸 상상 속 인물일 뿐입니다.
 
사람은 예수님을 바라볼 때만 기쁩니다. 바울도 알았습니다. 항상 기뻐하려고 해도 기뻐할 수가 없었거든요. 바울 역시도 예수님을 바라볼 때만 기뻤습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은,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의 감정이 어떠할까요? 원망, 불평, 슬픔, 고독, 절망, 불안, 우울일까요?
 
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항상”이라는 말은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의지적 개념입니다. 항상 바라보면 항상 기쁘지만, 항상 바라보기는 어렵거든요.
 
시선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하는 그 무엇에, 시선이 머무르게 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셔야 합니다.
 
항상 기쁘려고 하는 사람은 슬플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바라보는 사람은 기쁠 것입니다.

존재를 받으시는 하나님

<창세기 4:4-5>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면 기뻐하실까요? 가장 좋은 것을 드려야겠지요. 동의해요. 하나님께 대충 드릴 수는 없잖아요. 
 
그러면,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인가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잘 모르겠어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고 있나요? 누군가 물으면, 가만히 고개를 숙이죠. 누가 이 질문에 떳떳하겠어요.  
 
열정적으로 헌신해 보세요. 가장 좋은 것을 드리고 싶지만, 항상 부족한 것 같아요. 더 열심히 해야 하는데…. 습관처럼 내뱉은 말이죠.  
 
과감하게 큰 금액을 헌금해보세요. 왠지 더 드려야 할 것 같아요. 불현듯 아깝다는 생각이라도 해버리면,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에 부끄러워요.  
 
직업적 성취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해보세요. 원하는 대로 안돼요. 자신보다 성공한 사람의 신앙 간증을 들으면, 나름대로 도전은 되는데, 내 인생은 이게 뭔가, 은근히 주눅 들어요. 
 
뭘 드릴까 고민하면, 하나님을 오해해요. 하나님은 당신이 가져온 것에 별로 관심 없으세요. 하나님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으세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고 싶다면, 당신이 가진 무엇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드리세요. 하나님에게 가장 좋은 것은 당신이에요. 당신이 예수님으로 기뻐하는 그 모습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세요. 
 
내 주장이 아니에요. 하나님 말씀이에요. 가인과 아벨이 아시죠? 하나님은 가인의 것은 거절하시고, 아벨의 것은 받아주셨어요. 차이가 뭘까요? 
 
제물의 종류일까요? 아벨은 피의 제사를 드려서 받아주셨고, 가인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려서 거절했을까요? 아니에요. 하나님은 곡식 제사도 받아주세요(레위기 2:2). 종류 차이는 아니에요.   
 
제물을 준비한 정성일까요? 아니요. 얼마나 정성을 다하면, 하나님이 만족하시겠어요. 아무리 정성을 다해도 부족해요. 정성 그 자체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는 없어요. 
 
그럼 뭘까요? 가인과 아벨의 제사 장면에서, 성경은 독특한 표현을 쓰거든요. 한 번 살펴볼게요. 
 
아벨과 그의 제물. 
가인과 그의 제물. 
 
제물을 드린 사람과 제물이 서로 묶여 있지요? 사람과 제물이 동시에 하나님께 드려진 거예요. 하나님은 제물을 드리는 사람과 제물 그 자체를 하나로 보세요.  
 
만약 제물이 서로 바꿔서 드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벨이 곡식을 드리고, 가인이 어린 양을 드렸다면요? 하나님이 가인의 것을 받아주셨을까요? 아니에요. 아벨의 것만 받으셨을 거예요. 
 
제물보다 사람이 중요해요. 하나님은 아벨의 중심, 다시 말해 진심을 아신 거예요. 
 
가장 좋은 것을 드린다는 명분으로, 혼자 애쓰지 마세요. 더 좋은 것을 드리다가, 가장 좋은 당신이 사라져요. 그러면, 나는 속상해요.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세요. 남들 보여주기 부끄럽고, 정성이 부족해도, 용기 내서 하나님께 나아가세요.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주눅 들지 마세요. 있는 모습 그대로의 당신을 드린다면, 그것으로 충분해요. 하나님은 말할 수 없이 기뻐하세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은 당신이에요.

나를 간절히 찾는 자

<잠언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우리 주변에는 인생의 위기를 겪으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넘쳐 납니다. 그들의 간증은 우리를 기쁘게 하고, 기대하게 합니다. 
 
“아, 나도 간절히 하나님을 찾으면 만날 수 있겠구나.” 
 
하지만,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나서, 하나님을 못 만나면 자책감에 빠집니다. 
 
“왜 나는 하나님을 못 만나지? 나는 정말 간절한데…. 그래도, 모자라나? 얼마나 간절해야 하나님을 만나는 거야?” 
 
 말씀을 오해하신 겁니다. 간절함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마음가짐, 즉 태도입니다. 간절함이 조건일 수 없습니다. 
 
남다른 간절함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당신을 만나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 속상한 것이 아니라, 이미 만났던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의 간절함은 우리의 간절함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녀를 찾는 절박함으로, 우리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찾으셨고, 그의 품 안에 우리를 안고 계십니다. 
 
잠언 8장의 말씀은, 지혜와 지혜를 찾는 사람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두 존재의 관계는 사랑이 바탕입니다. 친밀합니다. 단절감과 소외감이 없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관계로 나아갑니다. 
 
우리에게 관심 없는 하나님에게 구걸하듯 매달리는 찾음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우리가 더욱 간절한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을 찾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결핍의 정서는, 하나님을 오해하도록 부추기고,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로 나아가게 합니다. 정서에 속으시면 안 됩니다. 복음으로 정서를 돌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멀게 느껴지는 것도 서러운데, 정성이 부족해서 하나님을 못 만났다고 말씀하시면, 나는 슬픕니다. 
 
하나님이 멀게 느껴지는 것은 감정입니다. 당신에게 진실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은 정성으로 못 만납니다. 은혜로 만납니다. 정성이 모자라도, 괜찮습니다. 은혜의 하나님을 부르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두려움은 잠잠하라

From 베드로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 우리는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화창한 날씨에 무료함을 느꼈지요. 예수님은 피곤하셨는지, 배 밑으로 들어가 잠시 눈을 붙이셨습니다. 나와 다른 제자들도 여기저기 쪼그려 앉아 꾸벅꾸벅 졸았지요. 
 
평온함도 잠시, 안드레가 나를 흔들어 깨우며 말했습니다. 
 
“형, 큰일 났어!”
 
잠에선 깬 나는, 눈앞의 광경에 깜짝 놀랐습니다. 시커먼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내리고, 비바람이 거세게 불었습니다. 파도는 배를 집어삼킬 듯이 미쳐 날뛰었습니다. 배에 물이 가득 차서, 침몰하기 직전이었습니다. 
  
우리는 곧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나는 다급하게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배밑으로 내려가, 예수님께 소리를 지르듯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죽습니다!” 
 
뒤돌아 누워 계시던 예수님이 몸을 돌려 일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없이 계단을 오르시고, 배 위에 섰습니다.  비바람이 예수님의 따귀를 때리듯, 거칠게 달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미쳐 날뛰는 시커먼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잠하라.” 
 
예수님의 목소리는 짧고 묵직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바다가 잠잠해졌습니다. 시커먼 먹구름이 물러가고, 비바람이 그쳤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밝은 햇살이 물결 위에서 보석처럼 빛났습니다.  
 
예수님이 침묵을 깨고, 물으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솔직히, 나는 두려웠습니다. 
 
만약 내가 바다에 대해 몰랐다면, 덮어놓고 대충 생각했겠지요. ‘설마 우리가 죽겠어? 이러다 말겠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 순진할 수 없었습니다. 어부였으니까요. 
 
나는 갈릴리 바다를 내 손바닥처럼 잘 알았습니다. 바람의 강도와 파도의 높이를 파악한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습니다. 
 
‘우리 모두 끝장이다.’  
 
내 두려움은 현실적이었습니다. 차라리 내가 바다에 대해 몰랐기를 바랄 정도였습니다. 
 
변명처럼 들렸을지도 모르지만, 내 솔직한 심정입니다. 비바람이 몰아칠 때, 내 눈앞에서 끔찍한 장면들이 생생하게 펼쳐졌습니다. 현실을 아는 만큼, 나는 두려웠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예수님께서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우리의 믿음 없음을 탓하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부족한 믿음을 소중하게 여겨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비난하실리 없지요. 
 
예수님의 말씀을 조금 더 분명하게 표현해 보겠습니다. 
 
“왜 너희 믿음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냐?” 
 
예수님은 우리의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신 겁니다. 두렵고 다급한 상황에서, 믿음을 사용하기 원하셨습니다. 부족한 믿음이라도, 사용하라는 것이지요. 
 
위기의 상황에서, 두려움에 끌려다니지 말고, 현실에 매몰되지 말고, 작고 초라한 믿음이라도 발휘하라는 예수님의 부탁이셨습니다.  
 
우리가 배에 오르기 전,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바위 위에 뿌려진 씨앗은 뿌리를 내리지 못해, 곧 말라죽게 된다.” 작은 믿음이라도, 예수님께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말씀이었지요.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이 험하고 무섭지요. 현실의 두려움을 무시하기에는, 당신은 너무나 현실적입니다. 이미 너무나 많은 아픔을 겪었겠지요. 아는 만큼, 무서울 겁니다. 
 
당신의 그 두려운 마음, 예수님이 아십니다. 보잘것없는 믿음으로, 다급하게 예수님을 부르는 것이 당신과 나의 형편입니다. “내 인생 끝장났다고….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말하는 것이 전부겠지요. 
 
당신에게 부탁합니다. 믿음 없다고, 자책하지 마세요. 위기의 순간에, 당신의 그 작은 믿음을 사용하세요. 작고 초라한 믿음이라도 괜찮아요. 힘껏 발휘하세요. 
 
당신이 다급한 목소리로 “주님!”이라고 부를 때, 예수님은 일어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잠잠하라.” 
 
당신이 예수님을 부를 때, 두려움은 놀라움으로 바뀝니다. 
 
당신을 잡아먹을 듯 미쳐 날뛰는 지독한 현실은 잠잠해질 것입니다. 당신을 집어삼킬 듯,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는 지독한 감정도 잠잠해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차분한 목소리로, 오늘 하루도 당신이 침착하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잠시 흔들릴 뿐, 절대로 끝장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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