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말씀・기도

교회에서 봉사하고 상처받아요

보상을 바라지 않고 봉사하는 방법이 없을까요? 바쁜 시간 쪼개가면서 최대한 봉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고맙다는 말을 해주기를 바라지는 않아요. 최소한 상처를 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힘들게 봉사하고 돌아오는 건 상처뿐입니다. 
 
보상이라는 단어를 어떤 의미로 쓰셨는지 묻고 싶습니다. 보상은 “받는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갚는다”라는 뜻입니다. 남을 위해 애쓴 것에 대한 대가를 인정받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미리 받은 혜택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플러스알파가 아니라 플러스제로입니다. 성경적인 의미를 말하는 게 아니라 사전적 의미를 말하는 겁니다. 내 말이 의심스럽거든 국어사전을 찾아보세요. 
 
봉사라는 단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남을 돕기 위해 애를 쓴다는 뜻입니다. 받은 것이 없는 사람이 대가 없이 순수하게 봉사하면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러나, 받은 것이 많은 사람이 받은 것의 일부를 다시 돌려주는 건 상식입니다. 봉사했다고 생색내면, 본인의 순수한 의도마저 사라져 버립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남는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 발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교회에서 받은 게 없다. 교회에서는 자기들 필요할 때만 실컷 부려먹다가 힘들어서 잠깐 쉰다고 하면 믿음 없는 사람이라고 정죄한다. 그동안 참았다. 더 이상은 못하겠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 마음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우리 서로 같은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성도니까 목사에게 분풀이라도 할 수 있지만, 나는 목사니까 어디다 하소연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말했습니다. 화가 잔뜩 난 채로 말입니다. 
 
교회 사람, 교회 구조를 먼저 생각하면 당연히 화납니다. 봉사할 맛 안 납니다.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봉사하는 대상이 잘못되면, 실망하고 지칩니다. 봉사하는 대상을 바꾸세요. 봉사의 대상은 사람이 아닙니다. 올바른 대상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봉사하면, 상처받을 일 없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면, 받은 은혜가 먼저 떠올라야 합니다. 감격으로 봉사해야 상처 안 받습니다. 예수님께 받은 게 없으면 봉사하면 안 됩니다. 봉사 먼저 하고 나중에 보상받으려고 하면 사람 망가집니다. 예수님 없이 봉사하는 삶,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러니, 잘 분별하세요.  
 
지금 하고 있는 봉사 안 해도 하나님 나라에 지장 없습니다. 은혜 먼저 받으세요. 차고 넘치도록 받으세요. 은혜받은 만큼만 봉사하세요. 그래도, 충분합니다. 은혜가 비어버리면, 다 끝입니다. 은혜 없이 죽도록 봉사해도 자기만족입니다. 당신의 삶에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넘쳐흐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멀게 느껴져요

예수님만 바라보라고 하잖아요.
나는 그 말이 뭔지 몰라요.
예수님이 친밀하지 않아요.
멀게만 느껴지고.
 
사람들하고 기도하면서 같이 울잖아요.
같이 울어도 똑같이 우는 게 아니에요.
내 눈물은 성분이 달라요.
감사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에요.
서러워서 흘리는 눈물이에요.
 
왜 나를 만들었나.
왜 나만 차별하나.
서럽고 외로워서 눈물만 흘러요.
어떻게 해야 주님을 만날 수 있나요.
방법을 알고 싶어요.
 
상투적인 말부터 해야겠네요.
지루하더라도 참고 들어주시겠어요?
듣다 보면 남는 건 있을 거예요.
 
데이트해보셨지요.
상대방을 알아가는 과정이 있어요.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야 해요.
그 사람이 했던 말과 행동.
그 사람의 태도와 감정.
알면 알수록 좋아요.
 
친구들을 만나보는 것도 좋겠죠.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에 대해
뭐라 말하나 들어봐야죠.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운다면
좋은 사람이란 뜻이죠.
 
결혼을 전제로 만난다면
더욱 신중해야겠죠.
섣불리 결론 내리면 안 돼요.
따질 건 전부 따져봐야죠.
 
예수님도 마찬가지예요.
신랑을 고르는 것과 비슷해요.
많이 알면 알수록 좋아요.
따질 건 전부 따져보세요.
 
예수님이 하신 말,
예수님에 대한 말,
모두 성경에 있어요.
신중하게 읽고 생각하세요.
 
예수님에 대해 알았다고 해서
바로 믿어지는 건 아니에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려면
성령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마른 장작에 불을 붙여야죠.
그래야 활활 타오르니까요.
성령님이 불을 붙어주시면
고백할 수 있어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나는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까요.
설명하기 힘들어요.
어느 날, 예수님이 찾아와 주셨어요.
 
나도 혼자라고 생각했어요.
아무도 날 지켜주지 않았으니까요.
저러다 애 죽겠다 싶으니까
급하게 찾아 오셨나 봐요.
조금만 늦게 오셨어도 나는 세상에 없겠죠.
간신히 살았어요, 정말로.
 
바로 질문하겠죠.
왜 나에게는 안 오시나요?
나도 믿고 싶은데.
사람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혼자라고 느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예수님은 차별하지 않으세요.
예수님은 당신 곁에 오셨어요.
당신도 혼자가 아니에요.
 
당신이 내 앞에서
혼자라고 말하면서 우는데
이상하게 나는 불안하지 않아요.
이제야 알 것 같아요.
당신의 진심을.
 
당신은 그리워하고 있어요.
예수님과 친밀했던 그 시절을.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것처럼 말해서
정말 그런 줄 알았어요.
내가 잘못 알아들었어요.
주님의 따뜻한 품이 그리운 거예요.   
 
처음부터 당신의 마음을 알았다면
길게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내가 무뎠어요.
 
이제 알았으니 부탁할게요.
조급할 필요 없어요.
기다려주세요.
주님이 다시 만나주실 거예요.
 
옛사랑을 그리워하는 당신이 아니라
오늘 주신 사랑으로 설레는 당신이 되기를
나는 바랍니다.

속마음을 말하면 눈물이 나요

저는 지금까지 제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말한 적이 없어요.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교회에서는 속마음을 말할 자리가 많은 것 같아요. 공동체에서 속마음을 말할 때 계속 눈물이 나요. 부끄러워서 울고 싶지 않은데, 멈출 수가 없어요.  
 
괜찮아요. 우세요. 안심하고 울어도 돼요.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모든 사람이 겪는 일이에요. 마음이 복잡할 거예요.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겠죠. 나는 내 경험에 비추어서 잠시 그 감정을 표현해보려고 합니다. 
 
장례식에 가면 눈물이 납니다. 누군가를 잃었다는 슬픔때문이죠. 예수님을 처음 믿는다는 건 이전에 내가 죽었다는 뜻이에요. 지금까지 붙잡고 살았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으려니 무섭기까지 하겠지요. 눈물이 나는 건 당연합니다. 
 
예수님을 믿게 된 순간부터 자매님은 다시 태어납니다. 새로운 생일을 맞이한 겁니다. 깜짝파티를 상상해보세요. 생일 날, 축해해주는 사람 하나 없어 실망한 채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엽니다. 어두운 방 안에 불을 켰을 때, 소중한 사람들이 한가득 모여 폭죽을 터트리며 환호성을 지릅니다. 감동받겠지요. 감동이 크면 눈물이 납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은 결혼식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신부로 일생을 사는 겁니다. 결혼식은 기쁘지요. 부모와 헤어지는 슬픔도 있습니다. 복잡한 감정입니다. 결혼식에서 신부가 흘리는 눈물은 보석입니다. 성분이 H2O가 아닙니다. 
 
장례식, 깜짝파티, 결혼식을 동시에 겪었으니 얼마나 정신이 없을까요. 누군가 말을 걸면, 두서 없이 말하게 될 거예요. 그동안 자신을 꼭꼭 숨겨 온 사람이라면, 표현하기 더욱 힘들겠지요. 말보다 마음이 앞설 겁니다. 울음이 먼저 터지는 건 당연합니다.
 
처음이라 부끄럽겠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공동체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 비슷한 일을 겪었습니다. 사람들이 이해해줄 거예요. 울고 싶은 만큼 우세요. 어쩌면 누군가는 자매님이 흘리는 눈물을 보면서, 첫 사랑을 떠올릴 겁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첫 사랑 말입니다. 
 
자매님은 공동체의 선물입니다. 갓 태어난 자매님을 공동체가 사랑으로 안아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과거를 그리워할 필요 없어

“열정이 식었어.
뜨거웠던 시절이 그리워.”  
 
봄바람은 봄에만 불어. 
겨울에는 불지 않아. 
 
성령의 바람은 
하나님이 몰고 와. 
 
선풍기를 켜듯, 
간단한 게 아니야. 
 
민들레 씨앗은 
바람을 탄데. 
 
그러다, 
땅에 내려앉아
뿌리를 내린데. 
 
뿌리를 내린 씨앗은 
바람만으로는 못 자라.
 
땅속으로 파고들어 
양분을 당기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은혜를 구걸하지 마.
 
씨앗이 뿌리를 내리듯 
성경에 파묻혀. 
 
한 장 한 장 
성경을 넘기면 
바람이 불 거야. 
 
어디서 어떻게 불어오는지 모르는 
성령의 바람. 
 
종이 한 장이 일으키는 바람이 
너의 가슴을 뛰게 할 거야. 
 
과거를 그리워할 필요 없어. 
오늘 부는 바람으로  
훨훨 날아올라 뜨거워질 테니.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요한복음 3:8>

오래 참음에 관하여

“미워하는 사람이 있어요. 
참아야지, 받아줘야지
다짐하지만 하루를 못 가요.
 
성경에서 
오래 참으라고 하잖아요. 
나도 오래 참고 싶어요. 
 
하루도 못 참고 
다시 미워하는 
나 자신이 실망스러워요.” 
 
도를 닦듯이 
오래 참으려고 노력한다면  
하루가 아니라 잠시도 못 버텨요. 
 
오래 참으라는 말, 
다른 종교에서도 가르쳐요. 
착하게 살면서 참으라고 말하죠. 
 
복음과 종교
무엇이 다를까요?
맞아요, 은혜에요. 
 
오래 참음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은혜의 결과에요.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려고 애쓴다고 
사랑할 수 없어요. 
 
잠시 잠깐 마주치기만 해도 
화가 나는데 어떻게 해요. 
 
그 사람은 내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도 몰라요. 
 
매일 똑같은 방식으로
기분 나쁘게 말하는데   
어떻게 견디겠어요. 
 
하루하루 은혜받고 
은혜받은 만큼 받아주는 거예요. 
 
성격 같았으면 
소리 지르면서 싸울 일
따뜻하게 말하고
지나가는 거죠.  
 
은혜가 마르면 싸우고
은혜가 넘치면 받아주는 거예요. 
 
무작정 희생하고 
참으라는 말은 아니에요. 
 
은혜받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세요. 
 
은혜받은 사람의 말은 
따뜻해서 잘 들리거든요. 
 
미운 감정으로 
내던진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어요.
 
따가워서 
받아낼 수 없어요.
냅다 받아치죠. 
 
진심이 담긴 말은 
매끄럽고 푹신해요. 
 
엉겁결에 받아들고 
한참을 품고 있어요. 
 
안 듣는 것 같아도 
두고두고 생각하거든요.  
 
잘 지내다 
또 폭발하면요?
 
괜찮아요. 
과정이에요. 
 
내일 아침 은혜받고 
다시 시작하시면 돼요. 
 
은혜받으면서 
하루하루 살았는데 
지나보면 오래 참은 거예요.
 
넘어지고 쓰려져도 
포기하지 않았잖아요. 
 
지나온 모든 날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해요. 
 
오래 참으려고 애쓰지 말고 
은혜받으려고 애쓰세요. 
 
하나님은 
오래 참은 당신보다 
지금 이 순간의 당신을 
사랑하시니까요. 

조용히 사라지는 거야

“잊힐까 두려워. 
두려워 미칠 것 같아.” 
 
네가 주인공이구나.
그러면, 못 견뎌. 
 
태어나서 지금까지 
영원한 주인공을 본 적 있어?
 
없잖아. 
너라고 예외일 수 없어. 
 
주인공이 되고 싶으면
그렇게 해. 
 
위태로운 사치를 
잠시 잠깐 즐길 테니까.
 
진실은 간단해. 
사람들은 널 잊을 거야.
몸부림쳐도 소용없어. 
 
하지만, 기억해.
하나님은 널 잊지 않아. 
처음부터 지금까지 영원토록. 
 
이쯤에서 인정할까?  
주인공은 하나님이야. 
 
네가 든 조명으로 
예수님을 비춰드려. 
 
팔은 아파도 
마음은 편할 거야. 
 
배터리가 닳아서 
조명이 꺼지면
미련 없이 사라져. 
 
다음 사람이 
생생한 조명으로 
예수님을 비출 거야. 
 
조용히 사라지는 거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인정하면, 편해져. 
공황도 사라지고 
불안도 사라지거든.
 
그리고, 
가끔 편안하게 잠들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한복음 3:30>

조금만 쉬고 싶어요

교회는 언제나 바빠요. 
봉사하는 사람이 부족해요. 
 
주보에 사람 구하는 광고가 
매주 빠지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헌신된 사람은 
목사만큼 바빠져요. 
 
주일에 봉사하다가   
목사보다 늦게 집에 가는 
사람도 있어요.   
 
이게 맞나. 
그만할까. 
 
이래저래 생각하다 
받은 은혜가 떠올라요. 
 
감사한 게 더 많으니까 
계속하기로 결심하죠. 
 
잠깐만요.
너무 힘들면 잠깐 쉬어도 돼요. 
 
엥, 정말요?
막상 쉬면 조금 불편해지는데. 
 
알아요.
그래도 힘들면 쉬어야죠.  
 
당장 그만두라는 말이 아니에요. 
억지로 버티지 말라는 말이에요. 
 
교회 일 거절해도 
하나님을 거절하는 건 아니거든요. 
 
교회 일 잘해도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도 아니고요. 
 
사람들이 부탁한 봉사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비슷해 보여도 서로 다른 거예요.   
 
교회 일 하나만 하는 사람 드물어요. 
일단 시작하면 사람들 눈에 띄어서 
여기저기 불려 다녀요. 
 
탈진하는 순간이 와요. 
의지로 버티는 순간이 오죠. 
 
“조금만 쉬고 싶어요.” 
 
그 말 한 마디 못해서 참고 참다가 
조용히 교회를 떠난 사람 많이 봤어요. 
 
하나님께서 얼마나 
마음 아프실까요. 
 
남 이야기만 할 수 있나요. 
나도 고민 많았어요. 
 
내가 목사라서 직업으로  
교회 일을 열심히 하는 건지. 
 
주님을 사랑해서 순종으로 
교회 일을 열심히 하는 건지. 
 
신학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교회 일이 내 직업이 되었으니까요. 
 
내가 아무리 교회 일을 열심히 해도 
사람들은 생각했을 거예요.  
목사니까 그렇지.
 
당연한 거죠. 
내 직업이잖아요. 
 
반대로,
교회 일을 대충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목사가 왜 저래. 
그러지 않았을까요. 
 
분명히 알고 싶다고 
목회를 그만둘 수는 없잖아요. 
그대로 살았죠. 
 
직업인지 봉사인지 
구분되지 않은 채로 
그냥 열심히 했어요. 
 
어쩌다 보니 남들과 
다른 길을 가게 되었어요. 
 
더 이상 교회 일을 안 하니까 
안 보이던 게 보이더라고요. 
 
교회 건물
교회 행정 
교회 사람 
다 교회죠. 
 
평범한 건물이 교회라고 
불리는 이유는 아시죠?  
 
당신이 교회이기 때문이에요. 
자, 그럼 나는 묻고 싶어요.
 
당신을 위한 봉사는 
열심히 하고 있나요. 
 
당신이 예배에 집중하도록 
자신을 잘 돕고 섬기나요.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들려주듯
자신에게 복음을 들려주고 있나요.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나는 그러지 못했어요. 
너무 바빠서. 
 
자신을 돌보면서 
교회를 돌봐주세요. 
 
교회를 돌보면서 
자신을 돌봐주세요. 
 
그래야 당신도 살고 
교회도 삽니다. 
 
걱정 마세요.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마음에 부담이 돼서 
교회 일을 전혀 하지 않는 분에게는 
조심스럽게 부탁드리고 싶어요.  
 
부담되지 않는 
작은 일 하나만 맡아주세요.  
 
고객이 아닌 성도가 될 때 
돌봄을 배울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돌보는 법을 배우면 
자신을 더 잘 돌볼 수 있답니다. 
 
걱정 마세요.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우리 목사님이 변했어요

우리 목사님 변했어요.  
처음에는 안 그러시더니  
지금은 얼마나 권위적인지 몰라요.  
 
은혜는커녕 상처를 줘요.  
교회를 옮길까 고민 중이에요.  
 
교회 옮기는 게 어렵잖아요.  
그래서 더 힘들어요.  
 
옮겨도 또 실망하거든요.  
벌써 세 번째에요.  
 
미안해요.  
그 말에서 나도 자유롭지 못해요.  
 
대신 사과하는 게 아니에요.  
말할 수 없이 미안해서 그래요.  
 
지금 둘이 말하는 중이니까  
조심스럽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목사에게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좋은 거 아니에요.   
 
기대감은 어떤 방식으로든  
목사를 파괴해요.  
 
사람들이 기대하면 
반응은 둘 중 하나에요. 
 
기대감에 도취되거나  
기대감에 부응하거나.  
 
도취한 사람은 들떠요.   
도취되면 못 빠져나와요. 
 
부응하는 사람은 비참해져요.  
기준에 도달하려고 애쓰거든요. 
 
나도 시간 많이 낭비했어요. 
들뜨다 비참하다 비참하다 들뜨다가.  
 
목사라고 다르지 않아요.  
잘 기능하게 도와주세요.  
 
기대하면 실망해요.
우리 다 같은 사람이에요.   
 
말로 관심 표현하고 싶을 때마다 참아주세요.  
말로 표현하면 부작용 있어요.  
 
나는 개척 운동하는 교회에서 사역했어요.  
개척에 동참하고 싶은 성도들이 있지요.  
 
함께 사역하다 보면 아주 가끔  
성도들이 말할 때가 있어요. 
 
목사님 개척하면 따라갈 거예요. 
듣기는 좋지요. 
 
그다음 뭐가 남나요.  
아무것도 없어요. 부담만 남아요.  
 
그 마음은 알겠어요. 고마워요.  
하지만,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누가 누구를 따라가요.  
우리가 따라야 하는 존재는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어요.  
 
성도가 목사 따르면 실망해요.  
성도가 주님 따르면 성장해요.  
 
나도 목사니까  
조심스럽게 말할게요.  
 
목사의 제자가 돼서는 안되요.  
주님의 제자가 되어주세요.  
 
좋은 목자를 만나서  
좋은 양이 될 수 있거든  
좋은 목자를 찾아 떠나세요.  
 
목자 여럿 만나도  
좋은 양이 될 수 없거든  
참 목자를 만나세요.  
 
참 목자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입니다. 

하나님이 해결해주셔야죠

하나님이
해결해주셔야죠.
 
그렇군요.
나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당신 얼굴이
왜 이리 슬퍼 보일까요.
 
못다 한 이야기가 있군요.
하나님께 서운한가요.
 
네. 그래요.
이제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아무리 기도해도
상황이 좋아지지 않으니까요.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해요.
나는 더 이상 못하겠어요.
 
당신이 내게 한 말,
언뜻 보면 믿음 같지만
자세히 살피면 절망입니다.
 
내 환경이 달라지겠어?
저 사람이 달라지겠어?
 
바뀌지 않을 거야.
바뀌지 않을 거야.
절대로 절대로.
 
당신의 문제가 풀리기 전에
당신의 마음이 풀리기를
나는 바랍니다.
 
믿음과 절망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마음이 엉키면
절망입니다.
 
마음이 풀리면
믿음입니다.
 
눈물이 강을 이루고
탄식이 산을 이룰지라도
마음이 엉키면
낙원이 아닙니다.
 
강 없고 산 없어도
얼어붙은 땅이 풀리고
작은 겨자씨 하나 피어나면
그곳은 낙원입니다.
 
나는 기도합니다.
나는 소망합니다.
 
당신 마음이 풀어지기를.   
당신 마음이 낙원 되기를.

성경이 믿어지지 않아요

나는 성경이 믿어지지 않아요. 
문제가 있는 걸까요. 
 
언제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내가 의심이 많데요. 
그래서 믿음이 자라지 않는다고.
 
나도 믿고 싶어요. 
뜻대로 안되는 걸 어쩌죠. 
 
도저히 믿기 어려워요.  
성경에는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섞여 있어요. 
 
바다가 둘로 갈라졌다든지
바위에서 물이 나온다든지. 
 
말이 안 되잖아요. 
목사님은 다 믿으시나요. 
 
네, 믿어요. 
하지만, 믿기까지 힘들었어요. 
 
주변에서 무조건 믿으라고 할 때 
마음이 답답했어요. 
 
나중에 믿고 나니까 
그게 그 뜻이구나 했죠. 
내가 느낀 걸 말해볼게요. 
 
믿음에는 순서가 중요해요. 
순서가 바뀌면 오해가 생겨요. 
 
지식은 이해되면 믿어져요.
말씀은 믿어지면 이해돼요.
 
무슨 말인지 설명해 볼게요. 
잘 들어보세요.  
 
우리가 지식을 배울 때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되지만 
이치를 깨달으면 믿어져요. 
 
지식이 이해되지 않을 때까지는 
지식이 나보다 우월해요. 
 
지식을 이해하고 나면 
지식은 나보다 열등하죠. 
 
어려워서 풀지 못하는 
수학 문제를 만나면 주눅 들지만  
 
한 번 풀어버린 문제는 
시시하잖아요. 
 
이해된 지식은 나보다 열등해요. 
내가 정복하고 그 위에 올라서요. 
 
말씀은 어떤가요. 
완전히 이해되지 않아요. 
 
처음 읽는 순간부터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돼요. 
 
어떤 사람은 말하죠. 
이해를 못하는데 어떻게 믿어. 
 
나는 거꾸로 말하고 싶어요. 
이해되는데 왜 믿어. 
 
이해되면 이해된 거예요.
믿고 안 믿고 할게 없어요. 
 
말씀은 지식과 달라요. 
믿고 난 다음에 이해돼요. 
 
하나님이 내 머리로 다 풀려버리면 
하나님이 아닌데 믿을 이유가 없죠. 
 
오해하지는 마세요. 
덮어놓고 믿는 건 아니에요.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요. 
조금만 더 들어주세요. 
 
바다가 둘로 갈라지는 이야기 
바위에서 물이 나오는 이야기
나도 믿기 어려웠어요. 
 
상식적으로 말해볼게요. 
사람을 처음 만나면 우리는 신중해져요. 
 
상대방의 말과 행동을 먼저 살피죠.
쉽지는 않아요.   
 
말과 행동이 전부가 아니거든요.
같은 말을 하더라도 느낌이 달라요.  
 
말은 거칠어도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있죠. 
 
말은 따뜻해도 
마음이 차가운 사람도 있어요. 
 
처음에는 몰라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해요. 
함께 오래 있다 보면 알게 되죠. 
 
우리는 무엇으로 그 사람을 
느끼고 있는 걸까요.  
 
생각을 깊게 안 해서 그렇지 
따져보면 정확하게 몰라요.  
 
하지만, 일단 사람을 신뢰하면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신뢰해요.  
 
가끔 황당한 말을 하더라도
저 말을 왜 할까. 
이유가 있겠지 생각하죠. 
 
나는 말하고 싶어요. 
성경을 전부 믿고 싶다면.  
먼저 하나님을 믿어야 해요.
 
사건에 집착하면 
하나님 못 믿어요. 
 
사람을 처음 만나 
계산기를 두드리는 사람은
친구 사귀기 힘들어요.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사건을 따지기 시작하면 
하나님 만나기 어려워요. 
  
하나님을 알고 싶다면 
먼저 하나님과 친해지세요. 
 
함께 대화하면서 
시간을 보내세요.  
 
조급할 필요 없어요.
자책할 필요 없어요. 
시간이 필요할 뿐이에요. 
 
그가 느껴지기 시작하면
당신은 결국 믿게 될 거예요.
 
그가 하신 모든 말을. 
그가 이루신 모든 일을. 

너 주님 사랑하는 거 맞아?

나 예수 믿는데
내 인생 왜 이렇죠?
 
불행하고
우울하고
힘들어요.
 
예수님 사랑하세요?
네?
 
예수님 사랑하시냐고요?
네….
 
내가 볼 때는 아닌데.
그 정도로는 안돼요.
 
그럼 어떻게 하죠?
알려주세요.
 
더 사랑해야죠.
예수님 사랑하시는 거
정말 맞죠?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사실 잘 모르겠어요.
 
거봐요.
그렇게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행복하겠어요.
 
목숨 다해 주님만
사랑하세요.
 
주님만 사랑하면
다 해결되는데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괴로운 거예요.
 
옆에서 지켜보려니
나는 마음이 괴롭습니다.
 
나는 당신과
생각이 다릅니다.
 
주님 사랑하자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확신이 부족하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어요.
 
아니, 그럼
예수님 사랑 안 합니까.
확신 없이 천국 갑니까.
 
나는 당신처럼
강한 확신은 없지만,
당신이 부럽지 않아요.
 
내가 불안한 건
맞습니다.
 
솔직히 나는
내가 너무 불안합니다.
 
나는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모르겠어요.
확신이 서지 않아요.
 
주님을 사랑한다면
내가 이래서는 안되죠.
 
나는 알고 있어요.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내가 실수해서 고통받는지
나를 사랑해서 고통을 주시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정확한 판별법이 있으면
내게 알려주세요.
 
나도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그런 확신도 없이
무슨 목사라고.
 
맞아요.
당신 말이 맞아요.
 
하지만, 나도 당신만큼
주님을 사랑해요.
 
당신만큼 확신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당신이 확신하는 동안
나는 계속 불안할 거예요, 아마.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확신했던 사람들.
 
베드로는 확신했어요.
다른 사람 몰라도
나는 주님 부인하지 않겠다고.
 
도마는 확신했어요.
내가 손가락으로 예수님 옆구리를
후벼보기 전까지는 믿지 않겠다고.
 
바울은 확신했어요.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되게 하는
그리스도인을 모조리 잡아 처넣겠다고.
 
확신도 그리 안전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어떠세요.
 
내가 확신 없어도
행복한 이유 알려드릴까요.
 
나는 내가 얼마나
주님 사랑하는지
별로 고민 안 해요.
 
생각할수록 좌절되니까요.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해야
나도 안심되고 주님도 만족할까요.
 
어려워요.
다르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주님이 날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루 종일 생각해요.
 
생각할수록 행복하거든요.
너무 너무 행복해요.
 
내가 주님을 사랑하면
얼마나 사랑하겠어요.
 
주님이 날 사랑하시는 거에 비하면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 같죠.
 
당신하고 나하고 누가 더 주님 사랑하는지
따져 봤자 도토리 키재기에요.
 
당신이 이겼다고 해줄게요.
그래도, 난 손해 볼게 없어요.
 
당신과 나.
주님은 차별 없이 사랑해주시니까요.
 
내가 얼마나 주님 사랑하는가에
집중하지 말고
 
주님이 날 얼마나 사랑하시는가에
집중하세요.
 
내가 불안해도 행복한 이유
이제 아시겠죠.
 
계속 고민하세요.
나 주님 사랑하나.
나 믿음 있나.
 
그게 사랑이고
그게 믿음이니까요.

연약해도 괜찮아요

나 힘들었어요. 
잘 이겨냈어요. 
 
지금은 괜찮아요. 
다 지난 일이에요. 
 
예수 믿고 나아졌어요. 
계속 좋아지겠죠. 
 
더 이상 과거의 내가 아니니까요. 
나는 새로운 사람이에요. 
 
예전처럼 고통받고 싶지 않아요. 
예수님 붙잡고 이겨낼 거예요. 
 
당신의 말에 동의해요. 
잘 견뎌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알고 있나요?
당신 이야기를 말할 때
남의 이야기를 말하듯 해요. 
 
나는 왜 이렇게 
당신의 목소리가 슬프게 들릴까요. 
조심스럽지만 그냥 말할게요. 
 
당신은 강해질 필요 없어요.  
말씀은 당신을 강하게 만들지 않아요. 
오히려 의존적으로 만들어요. 
 
세상에서는  
약하고 의존적인 사람을   
실패한 사람이라고 불러요. 
 
예수님은 그렇지 않아요. 
예수님은 당신이 약해지기를 바라세요. 
예수님만 바라보기 원하세요. 
 
예수님 앞에서 씩씩할 필요 없어요.
작고 초라해지세요. 
예수님 없으면 못 사는 사람처럼. 
 
당신에게는 힘들지 몰라요. 
살아오면서 강해야만 했잖아요.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서 일어서야 했어요. 
 
모든 사람이 당신을 보며 
이제는 끝났다고 말했을 때도 
몇 번이나 다시 일어났어요. 
 
기적처럼 살아줘서 고마워요. 
정말 정말 고마워요. 
 
살아난 당신에게 필요한 건 
독립심이 아니에요. 
 
더 이상 혼자가 아닌데 
자꾸 혼자가 되려고 하면 
당신은 더 외로워요. 
 
약하다는 느낌
의존적이라는 느낌 
그 자체로 나쁜 게 아니에요. 
 
대상이 분명하면 괜찮아요.
주님이면 안전해요. 
 
복음에서는 
약하고 의존적인 사람을 
강한 사람이라고 불러요. 
 
약할수록 강해지니까. 
강할수록 약해지니까. 
 
울고 싶으면 우세요. 
그래도 괜찮으니까요. 
 
언젠가 당신을 다시 만나는 날, 
나는 보고 싶어요. 
 
약해도 괜찮은 당신을. 
약해도 편안한 당신을.

결핍의 또 다른 얼굴, 우상

예수님보다 사랑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건 우상입니다.
 
맞습니다.
우상은 모든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우상을 대하는 방식에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
눈앞에 있으면
바로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자세히 살피지 않습니다.
무시하고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죄책감 때문일 겁니다.   
우상이란 말을 듣기만 해도
죄책감이 밀려오니까요.
 
나는 우상에게 더 가까이 가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적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적을 제대로 알아야 이길 수 있습니다.
 
질문해보세요.
왜 그 우상을 섬기게 되었을까.
나는 왜 예수님보다 다른 것을 사랑하는가.
 
그 안에는 결핍이 있습니다.
결핍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 했던 것이죠.
 
자신 안의 결핍을 직면하기 전에
고개를 돌리면 안 됩니다.
 
우상을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우상에게 굴복하지 않습니다.
 
결핍을 정확히 모르면
똑같은 우상이
계속 다른 색 옷을 갈아입고
평생 당신을 쫓아옵니다.
 
위장술에 속아서
우상을 못 알아보면
평생 괴롭힘당합니다.
 
계속 같은 녀석에게
고통받기 싫다면
그 녀석 얼굴을
제대로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생존해야 한다는
강박이 심합니다.
 
내 안에 자리 잡은
결핍입니다.
 
“아무도 날 지켜주지 않아.”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
 
나는 성취를 숭배했습니다.
자극적이고 매력적이었습니다.
 
사명으로 포장되니
속도가 붙고 성능이 좋아졌습니다.
 
믿음으로 도전하는 삶을 산다고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도전하고 이루고
도전하고 이루었습니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면
나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군침이 돌았습니다.
이루어내서 보여주고 싶었으니까요.
 
나는 중독되었고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내가 숭배하던 실체와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소름 끼쳤고
무서웠습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더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드디어 그 녀석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검을 꺼내 그 녀석 심장에
박아주고 싶었습니다.
 
그 녀석을 숭배하는 동안
나는 너무나 고통스러웠으니까요.
 
그 녀석을 제거하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난 이제 압니다.
그 녀석 얼굴을.
 
제아무리 변장을 하고 찾아와도
나는 그 녀석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습니다.
 
당신도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당신 안의 결핍을.
 
교묘히 찾아와 더러운 손으로
당신 안의 결핍을 어루만지는 우상을
물리쳐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당신의 결핍을 채울 수 있습니다.
 
자신 안의 결핍을 직면하고
그 결핍을 주님으로 채우는 것.
 
이것이 우상을 대하는
더 나은 방법입니다.

용서 못 하는 나 자신이 싫어요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건 머리로는 알겠어요. 하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아요. 용서 못 하는 제 자신이 싫어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것 같거든요. 오랫동안 이 문제를 피해 도망 다녔지만 벗어나지 못했어요. 정말 용서하고 싶지 않은데, 용서해야만 하나요.  
 
용서 못 하는 자신을 용서해주세요. 용서는 과정이지, 성취가 아닙니다. 용서하겠다는 마음을 가진 그 순간부터 용서가 시작된 겁니다. 조급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용서하는 삶이 시작되었으니, 용서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정죄하시면 안 됩니다. 끔찍한 일을 당한 건 당신입니다. 당신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비난한다면, 나는 슬픕니다. 세상에 그런 일은 없습니다. 억울한 일이에요. 그러니, 자신을 비난하지 말아주세요.
 
아직 용서하지 못했다는 생각은 감정에서 비롯되었을 겁니다. 마음으로는 용서하고 싶은데 그 사람, 그 상황을 생각하면 분노가 일어나겠지요. 분노라는 감정과 용서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용서는 지난 일이고, 감정은 지금 일이죠. 감정이 남아 있다고 해서, 용서 못 한 게 아닙니다. 감정과 용서를 구분할 수 있어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끝나도 감정은 느껴집니다. 없애려 하지 마세요. 사라지지 않습니다. 숨기면 강해지는 게 감정이고, 표현하면 사라지는 게 감정입니다. 격한 감정을 사람에게 표현하면, 부작용 있으니 예수님께 표현하세요. 차분히 누그러질 때까지 마음껏 표현하세요. 예수님은 하품 한 번 안 하고 끝까지 들어주십니다. 
 
용서하고 싶은데 감정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면, 이미 용서하신 겁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감정을 돌보세요. 분하고 화나도 참지 말고 표현하세요. 그 과정에서 감정마저 편안할 날 올 겁니다. 감정을 느끼는 동안, 자책하지 마시고 기다려주세요. 용서의 삶을 시작한 당신을 바라보시며, 예수님이 기뻐하십니다.

내 믿음이 형편없어요

내 믿음이 형편없어요.
나 어떻게 하죠?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
나아갈 수가 없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믿음이 제자리에 있으니
괴로워요.
 
믿지 못해 괴롭고
믿고 싶어 괴롭다면
그건 믿음이에요.
 
당신의 믿음을
싸구려 취급하지 말아주세요.
 
사람들은 믿음에
레벨이 있는 것처럼 말해요.
 
진실이 아니에요.
믿음에는 레벨이 없어요.
 
믿음이 있냐, 없냐.
둘 중 하나에요.
 
문제에 집중하면
불안해져요.
 
감기가 낫느냐
암이 낫느냐.
 
1억을 갚느냐.
10억을 갚느냐.
 
암보다는
감기를 고치기 쉽고
 
10억보다는
1억을 갚기 쉬우니까.
 
암이나 10억을 놓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더 큰 믿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다시 말하지만,
진실이 아닙니다.
 
믿음의 대상이
분명하기 바랍니다.
 
문제에 집중하면 불안해서
더 믿으려고 발버둥 쳐요.
 
문제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믿어봐요, 우리.
 
감기와 암.
10억과 1억.
 
하나님은 차이를
느끼지 못하세요.
 
예수님이 이방 여인에게 말씀하셨죠.
네 믿음이 크도다.
 
예수님은 믿음의 크기에
놀라신 게 아니에요.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믿으니까
예수님이 감격하신 거예요.
 
얼마나 잘 믿느냐.
그만 고민하세요.
 
무엇을 믿느냐.
고민하세요.
 
문제 해결을 믿으시나요.
하나님을 믿으시나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감사할 수 있으려면
 
문제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방법뿐입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자기 위로를 구분할 수 있나요?

기도하면서 힘들면 주님을 찾잖아요. 가끔은 따뜻한 위로를 받는 것 같아요. 어느 날 갑자기 혼란스러웠어요. 내가 너무 힘드니까 스스로를 위로하는 거 아니야?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자기 위로와 어떻게 다른 가요.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자기 위로를 구분할 수 있나요? 
 
두 가지를 극단적으로 나누는 건 위험한 생각 같아요. 신앙생활에 있어서 정서는 중요해요. 우리는 로봇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고귀한 존재니까요. 자기 위로라도 필요한 사람에게 잘못하고 있다고 손가락질하는 상황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물론,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으로 위로받기를 바라고요.  
 
우리는 주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해요. 적극적으로 말씀을 읽고, 기도할 시간을 우선적으로 확보해야 하죠. 주님이 기도에 응답해주실 수 있겠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기적처럼 응답을 바라지만, 세상 고요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가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속수무책으로 기다릴 필요는 없어요. 주님이 응답하시는 방법을 제한할 필요는 없잖아요. 주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일하시니까요. 
 
그동안 자신에게 은혜가 되었던 성경 구절을 묵상하는 것을 추천하고 싶어요. 신비한 방식으로 말씀해주시지 않아도 걱정할 필요 없어요. 성경을 직접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 자신에게 들려주면 되니까요. 읽고 생각하세요. 그 말씀을 통해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위로를 받으세요. 
 
이 과정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자기 위로가 헷갈릴 수 있겠네요. 거짓말 탐지기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구분하기 어렵겠죠. 그래도 질문하셨으니 내 나름의 생각을 말해볼게요. 
 
하나님의 위로와 자기 위로를 구분하는 가장 결정적인 지표는 ‘무엇에 근거한 메시지인가’라고 생각해요. 자기 생각에 근거한 메시지는 한계가 있어요. 하지만, 자기 위로의 메시지라도 복음적 가치에서 근거하고 있다면, 그건 엄청난 힘을 발휘하겠죠. ‘메시지의 근거가 무엇인가’를 깊이 고민해보세요. 
 
 예를 들어볼게요. ‘너는 소중해. 너는 특별해.” 메시지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이 메시지 들으면 위로받을 거예요. 같은 말이라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이 메시지를 사용할 때는 의미가 다르죠. 자기 암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린다면 그건 성공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볼게요. ‘너는 절대로 끝장나지 않을 거야.’ 자기 암시로 사용한다면, 주문에 불과하겠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로 사용한다면, 이건 믿음의 고백이 될 수 있어요. 그 문장 뒤에 보이지 않는 문장이 하나 더 있으니까요. ‘너는 절대로 끝장나지 않을 거야. 하나님이 지켜주실 거니까.’메시지의 근거가 하나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안전할 수 있어요. 
 
하나님의 위로와 자기 위로를 구분한다는 건 어쩌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한 번쯤 고민해보는 건 좋은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질문해주신 덕분에 답변하면서 나 자신도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만 바라본다는 말

예수님만 바라보는 삶,
적지 않은 사람이 오해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자고 하면
예수님 보려고 노력합니다.
 
예수님 모습을 떠올리려고
애를 씁니다.
 
커다란 스크린에
예수님이 고난받으시는
장면이라도 틀어주면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릅니다.
 
혼자 기도할 때
예수님 이미지가 떠오르면
감격이 밀려옵니다.
 
시간이 갈수록 예수님 이미지는
더 나은 이미지로 교체됩니다.
 
어릴 때 봤던 예수님 얼굴보다
지금 예수님 얼굴이 더 낫습니다.
 
아쉽게도 예수님 얼굴을
실제로 본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자.
예수님을 보자.
 
두 문장이 같다고 생각해서
발생한 오해입니다.
 
두 문장은
같은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 이미지를
떠올리려 할수록
우리는 약해집니다.
 
예수님 이미지가
효력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이미지는
상상으로 지어낸
허구에 불과합니다.
 
유명 영화배우의 얼굴이나
어느 화가의 작품이겠지요.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건
예수님 얼굴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예수님 말씀을 바라보는 겁니다.
 
눈보다는
귀를 사용해야 합니다.
 
귀보다는
마음을 사용해야 합니다.
 
예수님 얼굴을 떠올리지 말고
예수님 말씀을 떠올리십시오.
 
예수님에 대한 말씀.
예수님이 하신 말씀.
 
성경 전부를 뜻합니다.
모든 구절을 뜻합니다.
 
치유하는 능력은
예수님 얼굴이 아니라
예수님 말씀에서 나타납니다.

회사의 접대 문화가 싫습니다

제가 다니는 회사는 술, 담배, 유흥을 즐길 줄 알아야 승진할 수 있다는 문화가 있습니다. 혼자 힘으로 잘못된 문화를 바꾸기가 너무 힘듭니다. 힘들더라도 참으면서 주님을 의지해야 할까요, 아니면 다른 회사로 옮기는 게 맞을까요? 
 
나도 모르겠습니다. 본인 선택입니다. 그 회사에 남는 게 올바른 선택인지, 회사를 옮기는 것이 올바른 선택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주님만이 아시겠지요. 힘들게 질문했는데, 말장난 하는 것처럼 보일까 걱정입니다. 나는 진실을 말하고 싶습니다. 남을지, 떠날지 본인이 선택하세요. 본인 선택이 정답입니다. 
 
내 주장에 대한 근거를 말해보겠습니다. 인생이라는 미로가 있습니다. 시작점에서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걷다보니 두 개의 문이 나왔습니다. 왼쪽이 1번, 오른쪽이 2번입니다. 선뜻 문을 열지 못하고 중간에서 고민합니다. 문 밖에 뭐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문 하나 잘못 열면 10년 고생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며칠 마음고생하다가 1번 문을 선택했습니다. 문을 열고 뛰쳐나갑니다. 힘든 선택 뒤에 마주한 결과는 당황스럽습니다. 기대했던 결과는 없고 또 다른 문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문이 세 개입니다. 1-1, 1-2, 1-3. 또다시 문을 열면 1-1-1, 1-1-2, 1-1-3, 1-1-4, 1-1-5의 문이 있습니다. 문은 계속 많아지고, 선택은 복잡해집니다. 
 
열어도 열어도 문이라면,“어떤 문을 여는 게 좋을까?”는 좋은 질문 아닙니다. 문이 하나라면 모를까. 열어도 열어도 계속 문이라면, 멈춰서 질문해야 합니다. “어떤 태도로 문을 열어야 할까?” 올바른 태도를 가졌다면, 자신의 선택을 믿어야 합니다. 과감하게 여십시오. 문 뒤에 절벽이 있더라도, 절대로 떨어져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계시니까요. 
 
올바른 선택을 내리지 말고, 올바른 태도를 가지세요. 선택이 아니라 태도가 급합니다. 하나님을 믿으세요. 당신이 실수할지라도 괜찮아요. 하나님은 올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회사에 남아서 견딘다고 승자가 되는 게 아닙니다. 반대로, 회사를 옮겨도 패배자가 되는 게 아닙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항상 태도를 고민하세요. 내가 아는 주님은 언제나 중심을 보십니다. 진심을 다하면, 밖에서 문이 열릴 겁니다. 차례대로 활짝 열릴 거예요. 사람이 문을 열면 미로지만, 주님이 문을 열면 도로입니다.  머지않아 힘차게 달릴 날 올 거예요. 
 
어깨 펴고 회사 다니세요. 당당하게 일하세요. 옮길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떠나세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회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을 책임지십니다. 

말씀을 읽어도 은혜가 없네요

말씀을 읽어도 은혜가 없다는
사람을 만납니다.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이런 말이겠지요.
 
예전에는 말씀을 읽을 때
마음이 뜨겁고 감동이 되었는데
요즘에는 뭐가 잘못되었는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없어요.
 
은혜가 없으면 조급해집니다.
만회할 방법을 찾습니다.
 
뭔가 잘못되었다.
그러니, 은혜가 없지.
 
불안 요소를 하나둘 제거합니다.
거리끼는 게 없나 계속 살핍니다.
 
그러다 지치면 본색이 드러납니다.
슬슬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밉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안되네.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지?
 
나는 묵상과 글쓰기가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남이 쓴 글을 읽기만 할 때는
전혀 몰랐던 게 있어요.
 
글을 잘 쓰려면
특별한 영감이나
재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특별한 영감이 떠올라야
특별한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틀린 말이에요.
 
가끔 글을 쓰는 사람은
영감을 기다릴 수 있겠지요.
 
유유자적 편하게 지내다가
영감이 떠오르면 글을 쓰는 거죠.
 
미안하지만
그건 영화의 한 장면일 뿐
실제 벌어지는 일은 아니에요.
 
영감을 기다리는 사람은
오랫동안 글을 쓸 수 없어요.
 
매일 글을 쓰는 사람은
저마다 자신만의 루틴이 있습니다.
 
절제된 삶을 살면서
공장처럼 일정 분량의 글을
매일 찍어냅니다.
 
영감 따위는 믿지도 않고
기다리지도 않아요.
 
그런데, 어떻게 매일 글을 쓰나요?
특별한 비결이라도….
 
없어요. 그런 거.
그냥 쓰는 겁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냥 써 내려가는 거예요.
 
반복하다 보면 가끔
놀라운 일을 겪어요.
 
내 수준을 넘는
특별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아마 사람들이 이런 걸
영감이라 부르나 봅니다.
 
아쉽게도 영감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냥 왔다가
그냥 사라져요.
 
붙잡아두고 싶지만,
어쩔 수 없어요.
 
인정할 건 빨리
인정하는 게 나아요.
 
아! 내가 글쓰기와 묵상이
닮았다고 했지요.
 
나는 매일 글을 쓰기 전에
항상 성경을 읽습니다.
 
특별한 은혜가 없어도
매일 꾸준히 읽습니다.
 
마음이 메마르지 않았나.
그런 고민은 아예 하지 않습니다.
 
하루 세 끼 밥 먹듯이
그냥 앉아서 말씀을 섭취해요.
 
야금야금
잘 씹어 먹습니다.
 
매일 말씀을 읽다 보면
가끔 폭포수 같은 은혜가 느껴져요.
 
매일이 아니라
아주 가끔.
 
성경을 펼칠 때마다
은혜가 있기를 바라죠.
 
하지만, 그건 내 바람일 뿐
현실이 아니에요.
 
내가 통제할 수 없잖아요.
은혜를 만들어 낼 수도 없고.
 
쥐어짜도
발버둥 쳐도
소용없어요.
 
그건 선물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
 
선물을 보내야
선물을 받지요.
 
아까 했던 질문
다시 해볼까요?
 
어떻게 성경을 매일 읽나요?
비결이라도….
 
없어요. 그런 거.
그냥 읽는 겁니다.
 
은혜가 있든 없든
매일 성경을 펼쳐야
평생 동안 읽을 수 있습니다.
 
매일 내리는 비는 장마.
가끔 내리는 비는 단비.
 
둘 중 하나 선택하라면
나는 단비가 좋습니다.
 
매일 비가 내리면
비의 소중함을 모를 테니까요.
 
자책은 이제 그만.
그냥 성경을 펼치세요.

설교를 들어도 아무 의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주일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들어도 아무 의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닙니다. 예배 시간에 뜨겁게 은혜받은 기억도 있습니다. 요즘은 정말 억지로 교회를 나가고 있습니다. 제게 어떤 문제가 있는 걸까요? 
 
아무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말이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주일 아침 피곤한 몸을 이끌고 교회를 나가시는 걸까요. 나는 조심스럽게 추측합니다. 아마 주일에 예배를 가지 않는 것보다 교회 가서 자리라도 지키며 앉아 있는 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이상 되지 않아서 괴로운 것이지, 아무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말은 솔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교회에 나가 자리는 지키고 앉아 있는데, 원하는 만큼 감동할 수 없는 것이 깊은 고민이겠지요.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해보면 좋겠습니다. 만일 지금이 최악의 상황이고,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더 이상 교회에 나갈 이유가 없다고 결론 내려보겠습니다. 그럼, 이제 정반대의 상황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최악의 상황이 있다면, 최선의 상황도 있겠지요? 최선의 상황은 무엇인가요? 설교를 들을 때,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 무엇인지 떠올릴 수 있으신가요? 아마 떠올리기 힘들 겁니다. 그런 상황은 없으니까요. 
 
결핍이 크면 원하는 욕구를 과장하는 경향이 사람마다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상태를 과장하려는 욕구는 자칫 위선으로 전락합니다. 안 그런데 그런 척하는 상황이 오면, 오히려 나쁜 상태가 됩니다. 느껴지면 느껴지는 대로, 안 느껴지면 안 느껴지는 대로 자리를 지키세요.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은혜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 가슴이 답답하겠지만, 남은 인생 계속 답답하지는 않을 겁니다. 가슴이 뻥 뚫릴 만큼 은혜받는 날도 있을 거예요. 그럴 일 없다고 결론 내리지는 마세요. 만약 당신의 일생에서 단 한 번도 은혜받은 적이 없다고 하면, 주일마다 억지로 그 자리를 지킬 이유도 없을 겁니다. 지난날 받은 은혜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신 것이지요. 
 
모태신앙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겸손한 척 마세요. 부모님 손잡고 억지로 교회 나오시는 거 아니잖아요. 다 커서 제 발로 교회 나오시는데, 자신의 신앙을 하찮게 볼 필요 있나요. 부모의 신앙은 부모의 신앙이고, 당신의 신앙은 당신의 신앙이지요. 싸구려로 만들지 마세요. 고귀한 믿음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정말로 고맙습니다. 남모르게 주님을 만나신 겁니다. 그러니, 예배의 자리를 지키고 계시죠. 
 
내가 목사라고 예배드릴 때마다 의미를 발견하고, 감동하고 그러지 못합니다. 어떤 때는 졸기도 하고, 졸다 깨서 설교 내용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목회할 때는 예배에 집중하기도 힘들었습니다. 내가 예배에 가장 집중하는 날은 내가 설교하는 날이었습니다. 말도 못 하게 부끄럽지요. 
 
모자라고 부족한 거 다 똑같습니다. 내가 능력되서 여기서 이러는 게 아닙니다. 부끄럽지만 참고 자리를 지키는 것이지요. 내 말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된다면, 힘들어도 참고 자리를 지켜주세요. 은혜가 임할 겁니다. 당신이 그렇게 그리워하는데, 하나님이 안 주실리가 없지요. 나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계속 고통받아요, 우리는

내가 더 잘 믿으면
이런 일 없을 텐데.
 
이런 일?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거죠.
 
더 이상 이런 문제로
고통받지 않을 텐데.
 
아, 그 뜻이군요.
아니에요.
 
그건 진실이 아니에요.
진실을 말할게요.
 
계속 고통받아요,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계속.
 
엥, 아닌데.
다른 사람은 잘 믿고 잘 되던데.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세요.
고통받고 있어요.
 
남의 인생 대충 둘러보고
쉽게 평가하지 마세요.
 
모두, 전부
고통받으며 살아요.
 
그럼, 뭐 하러 하나님을 믿나요.
어차피 고통받으며 산다면.
 
좋은 질문이에요.
답해볼게요.
 
복음의 본질은
문제 해결이 아니에요.
 
복음의 본질은
관계 회복이에요.
 
왜곡된 관계가
온전한 관계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왜곡된 관계를
회복시켜주셨어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
끊어진 관계를 이어주신 거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릴 수 있어요.
 
이제 눈치채셨나요?
진짜 문제는 따로 있어요.
 
주변에서 뭐라 하든
성경에서 뭐라 하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는 거죠.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끊임없이 물어요.
 
왜 나만?
왜 나만 이런 거지?
 
아니에요.
우리 모두 그래요.
 
나라고 다르겠어요.
나도 매일 고통받아요.
 
문제 해결에 집착하면
우리는 빠르게 고갈돼요.
 
문제 해결에 전전긍긍하며
믿음을 낭비하지 마세요.
 
미안하지만,
고통은 사라지지 않아요.
 
고통을 피하려고 하면
더 고통스러워져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고통 속에서 꺼내주지 않았어요.
 
도와주시지 않고
고통의 잔을 마시게 했죠.
 
예수님이 고통의 잔을 피하셨다면
우린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은 하나님만의
방식이 있어요.
 
고통 한가운데서
의미를 찾아내세요.
 
의미를 찾는 사람은
성장할 수 있어요.
 
의미를 발견하면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지요.
 
말도 안 된다.
어떻게 고통 속에서 기뻐하냐.
 
결국에 뻔한 소리 하네.
뭔가 다를 줄 알았다.
 
맞아요.
고통 속에서 기뻐하기 어려워요.
 
하지만, 아시나요?
 
항상 기뻐한다는 건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에요.
 
24시간 하루 종일 기뻐하면
그 사람은 병원에 가야 해요.
 
말도 안 되는 기준을 세워놓고
스스로를 정죄하지 마세요.
 
아침에 잠깐 주님을 찾고
하루 종일 분주할 수 있지요.
 
절망할 필요 없어요.
하나님은 쉬는 시간이 없으시니까.
 
당신이 하나님을 찾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은 당신을 찾아내실 거예요.
 
하나님 한 분 만으로
영원토록 기뻐하는 것.
 
당신과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이자 목적입니다.

Loading

Pin It on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