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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 아주 짧은 설교

억지로 사랑하지 마세요

<마태복음 5: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여라.
 
당신이 얼마나 아파하는지 예수님은 이미 아세요. 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죄책감까지 끌어안지 마세요. 예수님이 슬퍼하세요.  
 
당신이 상처로 아파할 때, 예수님이 그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기를 바라요. 
 
“이제 잊을 때도 되지 않았니? 너를 위해서라도 그 사람 용서해라. 그래야, 너도 살지.” 
 
누군가 그렇게 말할 때, 고개를 끄떡이지 마세요. 그건 복음이 아니에요. 드라마 대사죠. 용서가 그렇게 쉽다면, 누가 용서 못 하겠어요. 복음이 아닌 말에 매여서, 자책하시면 안 돼요.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가해자 그 사람이에요. 원수가 사랑스러워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게 아니에요. 사랑할 수 없으니까, 사랑하라고 하신 거죠.    
 
원수 사랑, 우리 힘으로 못해요. 억지로 사랑하면, 예수님이 마음 아파 하세요. 예수님은 먼저 당신이 사랑받기를 원하세요. 
 
사랑 먼저 받으세요. 예수님께 사랑 듬뿍, 넘치도록 받아서 원수에게 흘러가게 하세요. 
 
원수는 그렇게 사랑하는 거예요. 바닥에 들러붙은 사랑을 억지로 긁어내서 사랑하면, 쓰라리고 아파요. 부디, 사랑 먼저 받으세요. 
 
용서는 사랑의 조건이 아니에요. 용서 못 한다고 버림받지 않아요. 예수님이 깨뜨린 율법을, 주섬주섬 끼워 맞추시면 안 돼요. 또 다른 율법이에요. 
 
불쑥불쑥 아픈 기억이 떠오른다고, 그 사람을 용서 못 한 게 아니에요. 용서하는 과정이고, 과정이 곧 용서에요. 
 
조급 할 필요 없어요. 당신은 언젠가 용서할 거예요. 그날이 오면, 상처도 아픔도 미움도 모두 떨쳐버릴 수 있어요. 힘들어도, 조금만 견뎌 주세요.

아버지의 피눈물

From 엘리 제사장
 
내 자녀들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두 아들은 한 날 한 시에 함께 죽을 것입니다. 자녀가 죽을 날을 받아놓고,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아가는 부모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예언은 이루어질 것이고, 우리 가문도 끝입니다. 
 
자녀를 의도적으로 망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습니다. 기다려주고 참아주면, 언젠가 깨달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괜찮아, 괜찮아. 잘 되겠지, 잘 크겠지. 언제까지 그러겠어….’ 그러다, 여기까지 왔습니다. 
 
나는 제사장입니다. 성전에서 평생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틈 없이, 주님을 위해 일했습니다. 내 자녀를 돌볼 시간은 없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면, 내 자녀는 하나님이 책임지신다고 믿었습니다. 
 
착각이었습니다. 내 자녀가 맞나 싶을 정도로, 막무가내였습니다. 자녀들의 죄는 갈수록 심각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무시하고, 자기들의 이득을 챙기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제물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 전에, 자기들이 먼저 가서 가장 좋은 부위를 취하고, 성전에서 일하는 남자들을 협박해서 제물을 빼앗고, 성전에서 일하는 여자들과 몸을 뒤섞는 자식이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두려워, 두 아들을 불러다 놓고 말했습니다. 
 
“얘들아,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도와 주실 수 있지만, 하나님께 죄를 지으면 누가 구해 줄 수 있겠느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죄에서 돌아서서 회개하라고 말한 것이지요. 하지만, 자녀들은 눈을 부릅뜨고 대들었습니다. 
 
“아버지가 그런 말 자격이 있으세요? 저희가 빼돌린 음식을 맛있게 잡수실 때는 언제고,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거리고, 아버지의 평판이 나빠지니까, 이제 와서 발을 빼시는 거예요? 이러시면 안되죠! 아버지와 우리는 한배를 탔어요. 이게 다 아버지를 위한 거라고요!” 
 
부끄러웠습니다. 나는 자식과 공범이었습니다. 나는 자녀들이 하나님도 잘 믿고, 세상에서도 남부럽지 않게 살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자녀들은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들의 탐욕에 눈이 팔려, 하나님과 사람을 속여서 부와 명예를 축척한 것입니다. 
 
나는 자녀들이 갖다 주는 더러운 음식을 따박따박 받아먹으면서, 호강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알았는데, 나만 몰랐습니다. 모두 내 잘못입니다. 나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지만, 내 자녀에게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안 가르친 것은 아닙니다. 나를 비롯한 유대인 부모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가르칩니다. 명색이 제사장인데, 대충 했겠습니까? 나도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자녀들의 삶 깊숙한 곳에, 하나님을 심지 못했습니다. 내 자녀들은 하나님을 피상적으로 알았습니다. 
 
자녀들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종교적 관습에 익숙해진 것이었습니다. 그저 내가 시키는 대로 성전을 왔다 갔다하며, 눈속임을 한 것이지요. 하나님을 믿은 척을 한 것이지, 실제로 믿은 게 아니었습니다.  
 
자녀들에게 진심을 담아 죄에서 돌이키라고 말해도, 자녀들은 내 자존심, 내 체면 때문에 자기들을 무시하는 것으로 단정해버렸습니다. 그저 부모의 잔소리로 취급한 것이지요. 
 
아버지의 심정도 모르는 자녀가,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알겠습니까?   
 
어릴 때부터 마주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피상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삶의 중심이 되시는 하나님을 전해야 했습니다. 
 
나는 몰랐습니다. 피멍이 들도록 가슴을 쳐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당신에게 아직 기회가 있다면, 나처럼 어리석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녀를 위해, 시간을 따로 떼어 내십시오. 아무리 바빠도 자녀와 일대일로 마주 앉아, 대화를 하십시오. 자녀가 무엇을 고민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정답 보다 중요한 것은 과정입니다. 자녀는 자기 대신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부모가 아니라, 공감하고 믿고 기다려주는 부모가 필요합니다. 자녀의 마음속 빈자리에, 복음을 전하십시오.
 
자녀의 인생이 막힐 때, 자녀는 부모가 만난 하나님을 듣고 싶어 합니다. 차분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당신이 만난 하나님을 전하십시오. 자녀의 마음속 빈자리에 복음이 전해질 것입니다. 
 
내 나이 98세입니다. 피눈물을 흘리며, 후회합니다. 당신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부디, 나처럼 못난 아비가 되지 마세요.

하나님을 비웃어 버렸다

<창세기 17:17>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웃으며, 마음으로 혼잣말을 했습니다. “어떻게 백 살이나 먹은 사람이 아기를 낳을 수 있을까?
 
From 아브라함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다고 하셨을 때, 나는 비웃었어요. 당연하지요. 나는 이미 100세였고, 아내 사라는 90세였습니다. 늙을 대로 늙은 두 사람이 어떻게 아들을 낳겠어요? 
 
나는 말했습니다. “아이고, 하나님. 됐으니까, 지금 있는 아들에게나 복을 주세요. 종의 몸을 통해서 낳았지만, 그래도 내 자식입니다.” 
 
믿음 없는 말이지요? 하나님을 조롱할 의도는 없었지만, 그렇게 됐습니다. 무심결에 말해놓고, 잔뜩 긴장했지요.  
 
믿음 없다고 혼내실 줄 알았거든요. 별 볼일 없는 믿음에 실망해서, 나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나버리실까 걱정했지요. 
 
하나님의 반응은 내 예상과 달랐습니다. 
 
“그래, 네가 말한 그 아들에게도 복을 주겠다. 하지만, 그 아들이 내가 약속한 자녀는 아니다. 내년 이맘때 네가, 자녀를 낳을 것이다. 내가 약속한 아들이다.” 
 
하나님은 믿음이 부족한 나를 이해하셨습니다. 은혜를 베푸셨지요. 나는 당황했습니다. 덤으로, 종의 몸에서 난 아들까지 축복해주셨으니까요.    
 
내 아내 사라도 믿음이 부족한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남편에 그 아내였을까요? 아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속으로 비웃어버렸습니다. 
 
“그렇면 좋게요? 남편과 내가 이렇게 늙었는데,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겠어요?” 
 
그 당시 나와 아내는 하나님을 잘 모르고, 우리의 처지를 스스로 비웃고 조롱했지요. 
 
나도 내 나름대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내 현실이 너무나 슬프고 끔찍해서, 하나님이 바꾸실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지요. 
 
“아무리 하나님이시라도, 내 상황은 못 바꾸신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믿음 없는 나에게 막상 아들을 주시자,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비웃던 사라는, 기쁨의 웃음이 터져버렸습니다. 아이를 품에 안고 하나님을 찬양했지요.   
 
“하나님께서 내게 웃음을 주셨다.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도 나처럼 웃게 될 것이다. 내가 아이를 낳을 수 있으리라고 어느 누가 알았겠는가!”
 
그제서야, 나는 기억났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아셨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말씀입니다. 
 
“네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아들을 낳으면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여라.” 
 
내 아들의 이름은 처음부터 “이삭”이었어요. 이름의 뜻이 “웃음”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웃음”을 주신다고 했는데, 나는 믿지 못해서, 하나님을 비웃어 버렸습니다.  
 
내가 훗날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린다니, 부끄러울 뿐입니다. 내 믿음으로 이룬 결과가 아닙니다. 믿음 없는 나에게 거저 주신 은혜입니다. 
 
인생이 힘들 때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땅만 쳐다봅니다. 엄연한 현실 앞에서, 감히 꿈조차 꿀 수 없습니다. 형편과 처지를 탓하며, 자신을 조롱하고 비웃습니다.  
 
나는 부탁합니다. 당신의 믿음을 하찮게 여기지 마세요. 당신의 믿음이 부족해서, 하나님이 못 도와주실 것이라 단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입니다.  
 
당신이 힘들어서 웃을 수 없다는 걸 압니다. 나도 그랬으니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셔서, 우리를 잘 아십니다. 우리의 연약한 믿음마저도 배려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나는 당신을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약속하신 모든 일을 이루십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마세요.   
 
결국, 당신도 웃게 될 겁니다.  

바쁜 사역으로 탈진하지 않으려면

크리스천은 쉴 수 없다. 
 
왜 그럴까? 
 
도와야 할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자기를 돌볼 겨를도 없이 다른 사람을 열심히 돕고 섬기다가 탈진을 반복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일상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을 외면하기 힘들다. 
 
더 빠르게 소진되어 탈진해 버린다. 
 
나라고 예외였을까? 
 
목사라는 직업은 출퇴근이 없다. 
 
굳이 말하자면, 새벽 5시 출근, 퇴근은 10시 넘어서다. 
 
목사가 하는 일 중에 나쁜 일은 없다. 
 
전부 좋은 일이다. 
 
사람을 차별해서도 안된다.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해야 한다. 
 
당연히 거절도 안 된다. 
 
다른 사람 상처받는다. 
 
모든 일을 다하고, 모든 부탁을 다 들어주고, 모든 사람을 다 돌보려고 하니, 금방 탈진한다. 
 
목사마저 이런데, 성도들은 오죽하겠는가. 
 
몸과 마음이 탈진해서 고통받는 목사, 성도가 너무나 많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예수님께 배워야 한다.
 
누가복음 5:15-16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예수님은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계셨다. 모두가 예수님을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들뿐이었다. 
 
혼자 만의 시간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예수님은 어떻게 고갈되지 않고 한결같이 그의 자녀들을 사랑할 수 있으셨을까? 
 
그 비결은 다음 한 문장에 있다.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그 뜻을 살펴보자. 
 
물러가시다: 예수님이 사람들과 물리적 정서적 거리를 두셨다는 뜻이다.
 
한적한 곳: 조용히 하나님을 만날 장소가 필요했다는 뜻이다. 
 
기도하시니라: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동작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기도는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반복적이었다. 
 
예수님은 아무리 바쁘고 고된 사역 속에서도, “물러나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 어떠한 일정과도 타협하지 않으셨다. 
 
기도를 최우선 순위에 놓고 사역하신 것이다. 
 
몸이 피곤하면 며칠 쉬면 된다. 
 
그러나, 정서가 고갈되면 회복에 기약이 없다.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사역을 위해, 적정한 바운더리는 필수다. 
 
예수님은 다른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하신다. 
 
예수님께 죄송한 마음을 가질 필요 없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을 따라 해라. 
 
그래야, 기쁨으로 지치지 않고 사역할 수 있다.

엄마 품을 떠난 아이

From 한나
 
하나님은 내게 자녀를 주셨어요. 나는 그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지었지요. 사무엘이 방긋방긋 웃을 때마다, 천사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했어요. 하나님은 내 모든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주셨어요. 아기를 키우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지요. 
 
어느 날, 남편 엘가나가 조심스럽게 말하더군요. 
 
“부인, 사무엘을 성전에 바치지 말고, 우리가 데리고 키워봅시다. 사무엘을 굳이 성전에 바치지 않아도, 거룩한 나실인으로 키울 수 있소. 내가 매년 수차례 성전에 올라가니, 그때마다 사무엘을 데리고 다닙니다.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정을 이해하실 거요. 당신과 사무엘이 생이별을 하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을 것 같소.”
 
남편의 말에, 마음이 잠시 흔들렸어요. ‘정말 그럴까? 하나님도 이해해 주시지 않을까?’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셨어요. 아이를 품에 안고 기도할 때마다, 평안한 마음을 주셨어요. 
 
‘하나님께 눈물로 호소하여 얻은 아기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남편이 절기마다 성전에 올라갈 때, 함께 따라나서지 않았어요. 사무엘과 함께 있는 하루하루가 소중했으니까요. 사무엘과 하루라도 더 같이 있고 싶었거든요. 
 
나는 남편에게 말했어요.  
 
“이 아이가 젖을 떼면, 이 아이를 데리고 여호와를 뵈러 가겠어요. 그리고 이 아이를 영원히 그곳에 있게 하겠어요.”
 
남편은 나를 온전히 이해해 줬어요.  
 
“당신이 편한 대로 하시오. 아기가 젖을 뗄 때까지 나를 따라나서지 말고, 사무엘과 함께 집에 머무시오. 여호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오.” 
 
3년이 지나고, 사무엘이 젖을 뗐어요. 나는 사무엘을 품에 안고, 남편을 따라나섰지요. 남편과 함께 실로의 성전을 향하는 동안, 나는 잠시도 사무엘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사무엘이 방긋 웃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졌어요. 사무엘을 끌어안고 엉엉 울어버렸죠. 남편 엘가나가 말없이 내 등을 토닥였어요. 남편도 고개를 돌리고, 조용히 눈물을 닦았어요. 
 
우리는 금방 성전에 도착했어요. 분명 먼 길이었는데, 그 길이 그리도 짧게 느껴진 것이지요. 
 
성전에 들어가, 엘리 제사장을 만났어요. 엘리 제사장은 단 번에 나를 알아보더군요. 나는 엘리 제사장에게 무릎을 꿇고 말했어요. 
 
“제사장님, 저는 제사장님 가까이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드렸던 그 여자입니다. 저는 아이를 가지기 위해 기도드렸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제 기도를 들어 주시고 이 아이를 저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이 아이를 여호와께 다시 돌려 드립니다. 이 아이는 평생토록 여호와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감격한 얼굴로 사무엘을 받아들었어요.  
 
그날부터 나는, 성전에 올라가 제사를 드릴 때마다, 손으로 직접 만든 겉옷을 가지고 올라갔어요. 사무엘은 무럭무럭 자랐어요. 한 번 올라갈 때마다, 팔이 짧아진 겉옷을 입고 있는 사무엘과 마주했으니까요. 새 옷을 갈아입히면서, 생각했지요. 
 
 ‘사랑스러운 우리 아들, 하나님의 성전에서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구나.’  
 
울컥 눈물이 쏟아나더군요. 엘리 제사장은 그런 내 모습이 측은했는지, 우리 부부에게 다가와 축복해 주었어요. 
 
“당신이 기도하여 얻은 아이를, 여호와께 다시 바쳤소. 사무엘을 대신해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다른 자녀를 주시기를 바라오.” 
 
엘리 제사장의 말은 현실이 되었어요. 하나님은 우리 부부에게, 아들 셋 딸 둘, 다섯 아이를 선물로 주셨어요. 
 
사무엘은 자라면서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겼어요. 하나님은 사무엘의 민족의 지도자로 세워주셨어요. 내 아들을 통해, 하나님은 다윗에게 기름 부으셨고, 위대한 왕국을 이루셨지요.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있다니요. 감히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에요. 나는 아이 없는 서러움에 복받쳐 엎드려 울었을 뿐이고, 하나님이 주신 아이를 다시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드린 것뿐이에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요. 
 
자녀는 언젠가 엄마 품을 떠나요. 나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 일찍 자녀를 떠나보낸 거예요.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아요. 내 품을 떠난 아이가, 하나님 품 안에서 자랐다는 사실을요. 
 
당신은 나처럼 독특한 경우가 아닐 거예요. 하지만, 다 큰 아이를 품에 안고 키우지 마세요. 아이가 젖을 떼고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면, 아이가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자녀를 키우면서 반복했던 수많은 실수와 후회 속에서 엎드려 눈물 흘리겠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위로하기 원하세요. 자녀가 엄마 품에서 벗어나, 자기 길을 간다고 말할 때, 축복해 주세요.  
 
당신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될 거예요.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귀하게 사용해 주실 거예요. 당신의 자녀는 당신의 자녀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이니까요. 하나님이 반드시 끝까지 책임져 주실 거예요.

외로움이라는 감정

<열왕기상 19:9>

시내 산에 도착한 엘리야는 한 동굴 속에 들어가 밤을 지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야,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절망에 빠진 사람은 누구나 혼자가 돼요. 깊은 동굴 속으로 숨어버리죠. 두 번 다시 상처받기 싫으니까,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아요. 어쩌면, 하나님에게도.
 
엘리야가 깊은 절망에 빠져 동굴에 숨어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물으셨어요. “엘리야야, 왜 여기 있느냐?” 
 
엘리야의 감정이 어땠을까요? 화났을 것 같아요. “그걸 몰라서 물으세요, 하나님? 동굴 밖으로 나가면, 저 죽어요.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도대체 이게 뭐예요. 내 옆에는 아무도 없어요.”
 
엘리야는 깊은 절망에 빠져서, 하나님의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어요. 하나님은, “왜 거기 있느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왜 여기 있느냐”라고 물으셨어요. 
 
“거기”와 “여기”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하나님이 “거기”라고 말씀하셨다면, 엘리야는 정말로 혼자였을 거예요. 하나님이 동굴 밖에 계시다는 뜻이니까요. 동굴 밖에서, 남의 일 보듯 말씀하시는 거죠. “너 거기서 뭐 하니? 힘든척하지 말고, 얼른 나와라.“
 
하나님은, “거기”가 아니라 “여기”라고 말씀하셨어요. 하나님이 지금 어디 계신 걸까요? 엘리야가 동굴의 어둠 속에 머리를 파묻고 “나는 혼자”라고 말할 때에도, 하나님은 엘리야와 함께 계셨어요.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좁고 어두운 동굴에 찾아오셨어요.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혼자두지 않으세요.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우리를 속여요. “넌 혼자야. 아무도 네 맘 알아주는 사람 없어.” 감정이 하는 말에 속지 마세요.
 
당신에게 진실을 말할게요.
 
하나님은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하세요.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상처로 아파하는 당신에게

나는 오랜 시간 나 자신을 탓하며 살았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청소년기, 나는 내 인생을 비관하며 자살을 시도했었다.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열정으로 20-30대를 보냈지만, 내 마음속 한구석에는 내가 부정하고 싶은 어두운 감정들이 남아 있었다. 

불안, 두려움, 외로움…. 

벗어나고 싶은 감정이었다. 

하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그 감정들을 외면했고 괜찮은 척 아닌 척 애써 노력했다. 

그러다, 나는 무너졌고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나는 내가 고장 난  줄 알았다. 
고쳐서 쓸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나는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나의 상처는 그대로였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나는 알게 되었다. 

나의 모든 고통은 나의 상처를 외면한 결과였다. 

사람들은 모른다. 

부모와의 안정적인 애착이 결여된 채 정서적 신체적 학대를 받은 아이들이 겪는 고통을… 

“누가 상처 없이 자랐겠냐고, 누구나 저마다의 아픔이 있다고, 그러니 과거는 그만 말하자”라는 사람과는 대화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끔찍한 일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다. 

끔찍한 일을 겪은 사람은, 그 기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장면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를 기억하는 것이다. 

현재의 삶이 아무리 행복하고 만족스럽다고 할지라도, 근거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 내면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린다. 

나의 불안, 나의 두려움, 나의 외로움이 나의 믿음 없음으로 인한 감정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자책했다.  

나와 같은 아픔으로 고통받는 당신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들려주고 싶다. 

누가복음 5:31-3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당신과 나를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 

종교의 관점에서는, 말끔한 척 성숙한 척하는 사람들이 주목받는다. 

아프고 병들고 가난하고 죄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비난받는다. 

예수님 당시가 그랬다. 

복음의 관점에서는, 안 아픈 척, 죄 없는척 하는 사람들이 외면당한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아프고 병들고 가난하고 죄에 허덕이는 사람들이야말로 예수님이 필요하다. 

상처로 아파하는 당신을 위로하고 싶다. 

어린 시절, 당신 겪은 끔찍한 일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치유하기 원하신다.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가자. 

예수님은 당신을 치유하고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아내의 빈자리

From 엘가나 (한나의 남편, 사무엘의 아버지)
 
내 아내 한나는 사랑스러운 여자입니다. 아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지요. 내가 최선을 다하면, 아내가 행복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인생이 뜻대로 안 되더군요. 
 
우리는 신혼 초부터 일찌감치 아이를 낳기로 했습니다. 한나는 하루라도 빨리, 아이를 품에 안아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질게도, 한나에게 아이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아내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습니다. 밤마다 슬프게 우는 아내를 안아주는 것이 일상이 되어갔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울면서 제게 말하더군요. 
 
“여보, 나는 당신을 위해 아이를 낳아줄 수가 없어요. 나를 버리시든가, 나를 대신할 다른 여자를 얻으셔야 해요.” 
 
나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화들짝 놀랐어요. 두 번 다시 그런 소리를 하지 말라고 했지만, 아내는 물러서지 않았어요. 내가 없는 틈을 타서, 브닌나라는 다른 여자를 데려다 놓았지요. 
 
나는 억지로 그 여자와 동침했고, 아이를 낳았어요. 모두 한나를 위한 것이었지요. 한나가 시키는 대로 하면, 한나가 행복할 것이라고 믿었어요. 역시나,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더군요.  
 
브닌나가 한나를 핍박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내 눈치를 보는 것 같더니, 아이를 낳은 이후부터는 대놓고 한나를 무시하더군요. 나는 두 여자 사이에서 말할 수 없이 괴로웠지요. 
 
하지만, 나는 한나를 더 사랑했어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나에게 더 많은 것을 주었지요. 브닌나도 그것을 알았고, 한나는 더 큰 고통에 놓이게 된 것이지요. 
 
한나는 성품이 온유한 사람이었어요. 정면으로 대응하는 법이 없었지요. 억울하고 답답할 때마다, 항상 하나님을 찾았어요. 남편이 얼마나 무능한지 알았던 것이지요. 
 
내가 어찌 그런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어요. 한나는 지혜롭고, 현명하고, 성숙한 여인이었어요. 남편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나에게 늘 반했지요. 
 
어느 날부터인가, 한나는 밝은 웃음을 되찾았어요. 마치 아기를 낳은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했지요. 나는 은근히 마음이 불안했어요. 하루아침에 사람이 그렇게 달라지니, 혹시 정신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싶었지요. 
 
내가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한나가 내게 말하더군요. 
 
“여보,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셨어요. 제게 자녀를 주신다고 약속했어요.” 
 
한나의 들뜬 감정을 망치고 싶지 않았어요. 분위기를 맞춰줬지요. 한나의 의견을 존중하고, 따랐어요. 내게 믿음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어요. 한나는 이미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하나님이 보란 듯이 아이를 주셨을 때, 나는 부끄러웠지요. 한나의 말은 모두 진실이었고, 하나님은 한나의 말대로 모든 상황을 인도해 주셨어요. 한나의 하나님은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셨어요. 
 
한나가 사무엘을 애지중지 키우는 것을 보며, 나는 한편으로 마음이 아팠어요. 한나는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칠 것이라 말했고, 그 표정이 슬퍼 보였거든요. 나는 조심스럽게 한나에게 부탁했어요. 
 
“여보, 그냥 아이를 우리가 데리고 키우면 안 되겠소? 어차피, 이 아이는 나실인이요. 우리가 품에 안고 거룩하게 키웁시다.” 
 
한나는 그럴 수 없다고 주저하지 않고 말하더군요. 한나의 목소리와 말투가 사뭇 진지해, 그다음부터는 말도 못 꺼냈지요. 한편으로는, 한나가 과연 사무엘을 떠나보낼 수 있을까, 걱정스럽더군요. 
 
사무엘이 젖을 떼자, 한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성전으로 올라가자고 말했어요.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목소리였지요. 성전으로 올라가는 여정 내내, 한나는 사무엘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어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프더군요. 
 
한나는 결국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쳤고, 사무엘은 성전에서 자라게 되었지요. 하나님은 사무엘을 민족의 지도자로 세워주셨고, 우리에게 또 다른 다섯 자녀를 선물로 주셨지요.  
 
나는 아내를 마음속 깊이 존경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연약한 여자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요. 그녀의 믿음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이지만, 아내를 위해 모든 것을 해줄 수 없습니다. 아내를 위해 최선을 다해도, 언제나 빈자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같이 있어주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을 경험해본 남편이라면, 내 말에 공감되시겠지요. 
 
당신이 나와 같은 남편이라면, 하나님이 절실합니다. 하나님만이 아내의 빈자리를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아내가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 아내 곁에 있어주셔야 합니다. 기도는 아내의 몫이라고, 뒷짐을 지고 계시면 안 됩니다. 
 
내가 못해주는 것을 하나님이 해주실 때,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내의 기도를 통해,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의 자녀 역시 혜택을 봅니다. 당신은 아내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아내가 원할 때, 언제든 따뜻하게 안아주세요. 
 
하나님이 아내의 빈자리를 채우시고, 아내의 기도와 헌신은 당신의 빈자리를 채웁니다. 절대로 손해 보는 일 아닙니다. 목숨을 다해, 아내를 사랑하세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장은 커지는 게 아니에요

<에베소서 4:15> 

사랑으로 진리만을 말하고,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모든 면에서 성장하도록 하십시오. 
 
성장은 커지는 게 아니에요. 더 높이 더 멀리 나아가는 것이 성장일 수 없어요. 바울이 말한 성장은, 연합이에요.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이죠. 
 
복음이 말하는 성장은 친밀감이죠. 예수님과 가까워지는 거예요. 매일매일 조금씩 예수님과 가까워지고 있다면, 그것은 성장이에요.  
 
어쩌면, 그마저도 쉽지 않겠죠. 서 있을 힘조차 없어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을지도 몰라요. 예수님은 점점 멀어지고, 다른 사람들은 나를 앞질러 가버리고. 불안하고 무섭죠.   
 
예수님을 오해하시는 거예요. 우리의 노력으로 예수님에게 나아갈 수 없어요. 우리가 이미 예수님의 자녀라면, 그것은 선물이죠. 예수님이 찾아와 만나주셨거든요. 
 
아무리 성장해서 높아진 들,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겠어요. 예수님을 간절히 바라만 볼 뿐, 우리 힘으로 거리를 좁힐 수 없어요. 예수님도 아시죠. 우리가 포기해 버릴까 봐, 다시 오신다고 약속해 주셨어요.  
 
우리가 낙심해서 바닥에 주저앉아 항상 제자리에 있어도, 예수님이 다가와 손잡아 주시면, 성장이에요. 거리는 좁혀졌고, 예수님이 가까워졌으니까요. 
 
성장하지 못한다고 자책하지 말아요.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해요. 예수님과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 그것이 성장이에요. 

감정에 속지 마세요

<창세기 3: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졌어요. 서로가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았죠.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어요. 무화과 나뭇잎으로 수치를 가리고, 숲속 깊은 곳에 들어가 서로 다른 곳에 꼭꼭 숨었죠.
 
아담과 하와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은혜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따뜻하게 느껴져요. 은혜가 풍성할 때, 하나님이 부르신다면, 당장에 달려가 그 품에 안길 수 있어요.  
 
하지만, 은혜가 사라졌다고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이 따뜻하지 않아요. 죄를 짓고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이 두렵게 느껴져요. 
 
감정에 속아서 하나님을 오해하면, 
하나님이 무서워요. 
 
음산한 분위기의 스릴러 영화처럼, 하나님이 나를 잡아가실까 두렵거든요. 나무 틈 사이에 숨어서 식은땀을 흘려요. 하나님이 나를 못 보고 지나가시기를 바랄 뿐이에요. 
 
감정에 속으신 거예요. 
하나님을 오해하시면 안돼요. 
 
하나님은 우리를 잡아서 벌주시려고 에덴동산에 나타나신 게 아니에요. 평소처럼 우리가 보고 싶어서 오셨는데, 그 사이에 끔찍한 일이 벌어진 거죠.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은 우리가 걱정스러우셨어요.   
 
“내 자녀 어디 있니? 어디 숨어서 슬프게 울고 있니…. 두려워할 필요 없단다. 내게 나아오렴. 내가 너를 용서했단다.” 
 
잃어버린 자녀를 자녀를 찾듯이, 하나님은 간절히 우리의 이름을 부르세요. 아담과 하와를 찾아내신 하나님은, 부끄러움을 가려주셨어요. 
 
두려움에 떠는 아담과 하와에게 물으셨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셨지요. 일방적으로 혼내지 않으셨어요. 자초지종을 들어주셨고, 용서해주셨고, 새로운 기회를 주셨어요. 
 
하나님이 화내지 않으셨나고요?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세요. 하나님은 온유하셨어요. 아담이 하와에게 책임을 떠넘겨도, 하와가 변명해도, 하나님은 화내지 않으시고 끝까지 들어주세요. 
 
하나님은 딱 한 번 화를 내세요. 아담과 하와가 아닌 뱀에게요. 다시 한번 말할 게요.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화낸 적 없으세요. 뱀에게만 화를 내셨어요. 하나님을 절대로 오해하지 마세요. 
 
아담과 하와가 저주받지 않았나고요? 표면적으로 그렇죠. 하지만, 자세히 보면 저주라고 단정하기 어려워요. 노동의 고통은 보람의 열매이고, 출산의 고통은 해산의 기쁨이죠. 노동 자체는 신성한 것이고, 생명의 고귀함은 말할 것도 없지요.  
 
죄에 대한 대가는 죽음이었어요.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죽이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피할 길을 내시고, 참고 기다려주셨어요. 우리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세요. 
 
그래도 누군가는 벌을 받아야겠죠? 유일하게 저주받은 존재는 뱀이었어요. 뱀은 저주를 피할 수 없었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했으니까요. 뱀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을 하나님도 알고 계셨기에, 하나님은 확실한 약속을 주셨어요. 
 
“내가 너와 여자를 서로 원수가 되게 하고, 네 자손과 여자의 자손도 원수가 되게 할 것이다. 여자의 자손이 네 머리를 부수고, 너는 그의 발꿈치를 물 것이다.” – 창세기 3:15
 
성경에서 처음으로 선포되는 복음이에요. 여자의 자손은, 바로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이죠. 죽음으로 승리하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고, 어둠의 권세를 짓밟아주신다고 약속하셨어요. 
 
죄로 인한 수치심이 우리를 짓눌러도, 절대로 잊지 마세요. 수치심은 감정일 뿐이에요. 감정에 속지 마세요. 우리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세요.

다른 사람을 돌보다 지쳐버린 당신에게

나는 상담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상처를 가져온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아프고 힘든 이야기이다. 
 
부족한 내가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뿐이다. 
 
하지만, 나 역시도 슬럼프가 온다. 
 
여러 번의 슬럼프를 겪으면서, 그 원인을 알게 되었다. 
 
마음이 조급해지면, 어김없이 슬럼프가 왔다. 
 
‘내가 더 상담을 잘했다면…’
‘내가 더 관심을 기울였다면…’
‘내가 더 기도했다면…’ 
 
상처 입은 한 사람을 마주하면 절박해진다. 
 
정말로 돕고 싶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예수님보다 앞서가게 된다. 
 
어김없이 넘어진다. 
 
상처 입은 한 사람을 돌보려면, 내 위치를 잘 알아야 한다. 
 
나는 상처를 치유할 능력이 없다. 
 
당연히 알고 있지만, 절박한 상황과 마주하면 마음이 급해진다. 
 
마음이 앞서갈수록, 나 스스로에게 말해줘야 한다. 
 
“나는 상처를 치유할 능력이 없다. 나의 역할은 상처 입은 한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다주는 것이다. 예수님이 치유하실 것이다. 나는 목격자일 뿐, 치유자가 아니다.” 
 
나 혼자만 겪는 일은 아닐 것이다. 
 
다른 사람을 돌보는 사람이라면, 자주 겪는 일이다. 
 
아무 능력 없는 자기 자신과 마주하더라도 실망할 필요 없다. 
 
예수님은 당신을 기뻐하신다. 
 
누가복음 5: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다준 친구들의 이야기이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를 데려갔지만 사람이 많아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가 천장을 뜯었다.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그들의 믿음에 감동하셨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즉시 중풍병자를 치유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그를 구원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분명한 역할 분담을 목격한다. 
 
친구들은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다주었고, 예수님은 치유하셨다. 
 
우리의 무능함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부여된 역할이 있다면, 상처 입은 한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다 주는 것이다. 
 
내가 치유하고 고치려 들면, 결국 그 무게를 감당 못해 무너지고 만다. 
 
우리는 목격자일 뿐, 치유자가 아니다. 
 
상처를 치유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다.

당신의 오늘이 있기까지

From 어린 사무엘 
 
누구나 부모님께 서운한 일이 있겠지요. 나도 마찬가지였어요. 내가 젖을 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나를 하나님께 바쳤어요.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순종을 이해하기 어린 나이였지요. 
 
나는 항상 어머니의 품이 그리웠어요. 어머니가 한 번씩 예배하러 올라오시면, 나를 마주 앉혀 놓고,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어요. 어머니와 함께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낸 적이 없어요. 말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지요. 
 
어머니가 왔다가 떠나간 그날 밤은, 외롭고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어두운 성막 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 많이 울었어요. ‘어머니는 왜 나한테 한 번도 묻지도 않고, 나를 이런 곳에 버려두었을까?’ 
 
어머니는 항상 말했어요. 내가 하나님의 응답으로 태어난 아이라고. 하나님과의 약속이니, 어쩔 수 없다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속상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어요. 엘리 제사장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사무엘아!”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엘리 제사장에게로 달려갔어요.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부르셨습니까?” 
 
하지만, 엘리 제사장은 저를 부르지 않았다고 말했어요. 
 
“나는 너를 부르지 않았다. 돌아가 자라.”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붙이려 하는데, 또다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사무엘아!”
 
세 번이나 같은 일이 반복되었어요. 세 번째 엘리 제사장에게 찾아갔을 때, 엘리 제사장은 침대에서 비대한 몸을 일으키며, 내게 말했지요. 
 
“잠자리로 돌아가거라. 다시 너를 부르는 소리가 나면 ‘여호와여, 말씀하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제가 듣겠습니다’라고 말하여라.”
 
엘리 제사장의 말을 듣는 순간,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움찔했어요. ‘내가 지금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어머니에게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고?’ 
 
나는 침대에 누워있을 뿐,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어요. 이리저리 뒤척이며, 빨리 아침이 되기를 바랐지요. 하지만, 또다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어요. 
 
“사무엘아, 사무엘아”
 
나는 엘리 제사장이 시키는 대로, 침대에서 내려와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대답했어요. 
 
“여호와여, 말씀하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제가 듣겠습니다.”
 
하나님은 내게 엘리 제사장과 그 가문에 대해, 자세한 말씀을 전해주셨어요. 
 
“내가 이스라엘에 어떤 일을 하려고 한다. 그 일을 듣는 사람은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그 날에 내가 엘리와 그의 집안에게 말했던 일을 다 이룰 것이다. 하나도 빠짐없이 이룰 것이다.
 
엘리는 자기 아들들이 나쁘다는 것을 알았다. 또 자기의 아들들이 나를 배반한 것도 알았다. 그러나 엘리는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엘리의 가족을 영원토록 벌주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엘리의 가족에게 이렇게 맹세했다. ‘엘리 가족의 죄는 제물이나 예물로도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어요. 아침이 되자마자, 나는 언제 그랬냐는듯이 평소처럼 여호와의 집 문을 열었어요. 엘리 제사장이 어젯밤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렸기를 바라면서요. 
 
내 바람과는 달리, 엘리 제사장은 내가 문을 열기가 무섭게 나를 찾으셨어요. 나를 불러 세우고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물었지요. 
 
나는 두려웠지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어요. 누가 가르쳐준 적은 없지만, 웬지 그래야 할 것 같았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니까요. 
 
엘리 제사장은 내 말을 끝까지 듣더니,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어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차분하게 말했지요. 
 
“그분은 여호와시다. 여호와께서는 스스로 생각하셔서 옳은 대로 하실 것이다.”
 
엘리 제사장이 측은해 보였어요. 제발 그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내가 그에게 전한 모든 메시지는 현실이 되었어요. 엘리 제사장과 그의 두 아들은 심판을 받았어요. 
 
그렇게 하나님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어요. 그날 이후로, 하나님은 수시로 나를 찾아와 말씀해 주셨어요. 나는 하나님께 들은 말씀, 있는 그대로를 사람들에게 전했어요.  
 
그 모든 말씀은 모두 현실이 되어 이루어졌어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의 사람들이 나를 예언자라고 불렀어요. 나는 그저 하나님께 들은 말씀을 전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했지요. 
 
어머니를 만나주신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셨을 때, 그제서야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동안 어머니를 적지 않게 오해했거든요. 
 
‘아무리 하나님이 좋지만, 어떻게 자식한테 이렇게까지 하시나?’ 
 
어머니가 자녀인 나를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한 것 같아서, 속으로 원망했지요. 하지만, 이제는 분명히 알아요. 어머님이 하나님께 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찾아와 만나주신 것이지요. 
 
어머니의 기도와 헌신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와 만나주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예요.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어주셨어요. 
 
세월이 흐르고 장성하면, 어머니의 신앙이 맹목적으로 보일 거예요. ‘뭘 저렇게까지 하시나?’ 어머니의 신앙에 동의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거 아세요? 
 
어머니는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할 줄 몰라요. 당신 자신을 위한 기도를 잊은 지 오래거든요.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 기도해요. 자녀의 이름을 부르고, 목이 메어 한 마디도 못하다가, 잘못한 기억이 떠오르면, 엉엉 울어요. 
 
당신이 주님을 만났다면, 어머니에게 감사하세요. 당신의 오늘이 있기까지, 어머니가 눈물로 기도했어요. 당신이 이룬 모든 것, 하나님이 어머니의 기도에 응답하신 거예요.  
 
어머니를 만나시면, 말없이 따뜻하게 안아주세요. 그러면, 내가 당신에게 편지를 쓴 보람이 있을 거예요. 내 편지를 끝까지 읽어준 당신에게 고마워요. 

용서는 무한 반복이에요

<마태복음 18:21-22>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주님, 형제가 제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
 
반복해서 상처를 주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관계를 단절하고 떠나버리고 싶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발목이 잡혀요. 
 
상처 준 사람이 한없이 가벼운 말 한마디로 미안하다고 말할 때, 용서해야 한다는 의무감. 그를 미워할 때마다 찾아오는 죄책감.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에요. 
 
만약 반복적으로 상처 주는 사람에게 반복적인 고통을 겪고 계시다면, 성경을 오해하신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을 풀어드릴게요. 오해 없이 들어주세요.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했어요. “예수님, 용서를 구하는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할까요? 일곱 번이면 될까요?” 
 
베드로는 왜 일곱 번이라고 질문했을까요? 일곱은 유대인의 문화에서 “완전 수”였어요. 7이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바가 있었지요. 일곱 번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베드로가 추측했던 거예요. 
 
예수님은 베드로의 예상을 깨고 전혀 다른 대답을 하세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라.” 7 곱하기 70을 해서, 490번을 용서하라는 의미인가요? 아니에요. 용서의 횟수에 제한을 두지 말라는 뜻이에요. 
 
예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바보처럼 살기를 원하시는 걸까요? 상처 준 사람이 하루에 490번씩 우리를 괴롭히는데, 그때마다 용서하라니요. 아무리 예수님이시라도, 너무 하시는 것 같아요.
 
일단, 침착하세요. 예수님을 오해하시면 안 돼요. 예수님의 의도를 아셔야 해요. 
 
당시의 바리새인은 율법을 의미를 왜곡해서,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하고 합리화했어요. 바리새인들은 딱 세 번만 용서했어요. 네 번째에는 그 사람을 정죄해 버렸어요. 
 
네 번째부터는 더 이상 용서하지 않아도 해도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었죠. 율법을 자기들 멋대로 왜곡하는 상황을 예수님이 따끔하게 지적하신 거예요. 
 
베드로가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일곱이라고 넉넉하게 숫자를 부풀려 말했는데, 그조차 충분하지 않았던 거예요. 
 
율법의 참된 가르침은, 용서는 끊임없는 과정이라는 거예요. 끔찍한 일을 경험해 보세요. 용서라는 말을 떠올리고 싶지도 않을 거예요. 상처를 준 사람이 찾아와서, 용서를 운운하는 것조차 헛구역질이 날 정도니까요. 
 
상처 준 사람이 눈앞에 없을지라도, 상처의 고통은 하루 일곱 번씩 일흔 번 반복될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횟수의 제한을 두지 말고 상처의 고통을 예수님께 가져다주세요.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일곱 번, 다시 일흔 번…. 절대로 멈추지 마세요. 상처의 고통을 끌어안고 아파하지도 마세요. 예수님께 가져다주셔야 해요. 
 
일곱 번씩 일흔 번, 예수님께 내어맡기면서, 차분하게 기다리세요. 시간 오래 걸려요. 자책과 정죄는 용서할 때까지, 잠시 미루세요. 예수님도 일곱 번씩 일흔 번, 충분히 이해하세요.

변명은 그만, 아내를 책임져라

<창세기 3: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라고 물었어요. 아담은 간단히 대답했지요. “하나님이에 저에게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줘서 먹었습니다.” 아담의 대답을 가만히 살펴보면, 자기 잘못은 전혀 없어요. 변명과 비난이에요.
 
아담은 말 한마디로, 하나님과 하와를 동시에 공격했어요. 일상적인 언어로 아담의 심정을 표현해 볼게요.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여자를 보내주셨나요? 왜 이 여자와 결혼하게 하셨어요? 내 가정이 이렇게 된 건, 전부 하나님 때문이에요. 만약 제가 이 여자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불행하지 않았을 거라고요!” 
 
아담이 자기변명을 하고, 하나님과 하와를 동시에 비난한 이유는, 죄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 때문일 거예요. 아담은 자기 합리화를 통해서, 죄의 당사자가 아니라 죄의 피해자가 되고 싶었어요. 
 
아담의 자기 합리화는 성공했을까요? 아니에요. 실패했어요. 성경은 아담이 죄의 당사자라고 분명히 말해요. 아담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요. 잘못을 책임지고 싶은 마음도 없었죠. 
 
죄를 짓고도 책임지지 않은 아담을 대신해서, 예수님이 오셨어요. 두 번째 아담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지만, 죄에 대한 책임을 지셨어요. 죽음의 형벌 앞에서 수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변명하지 않으셨어요. 죄에 대한 모든 책임을 끌어안고 죽으셨기에, 우리는 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요. 
 
불행한 결혼 생활의 중심에는 책임지지 않는 남편이 있어요. 남편은 억울하겠지요. 곧바로 따져 묻고 싶을 거예요. “나만 잘못했나요? 아내 잘못도 있어요.” 맞아요. 당신 말이 맞을 거예요. 
 
오늘은 남편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어요. 아내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어요. 기회가 되면, 나중에 할게요. 너무 억울해 마시고, 조금만 더 들어주세요. 
 
남편에게 한 가지만 더 묻고 싶어요. “남편 잘못, 아내 잘못 서로 골고루 말하면, 그에 대한 책임은 누가 감당할까요?” 각자의 잘못을 인정하면, 서로 책임질 것 같지요?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네가 그러니까, 나도 이러는 거야. 너부터 잘해. 너 하는 거 봐서, 나도 잘할게.” 조건을 붙이면, 남편과 아내 두 사람 모두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결과적으로,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요. 
 
행복한 가정에는 아내를 책임지는 남편이 있어요. 남편 혼자 감당하기 힘들겠지요. 억울하고 답답하겠지요. 남편에게 부탁하고 싶어요. 무거운 짐, 혼자 짊어지지 마세요. 예수님께 모든 책임을 떠넘기세요. 어깨가 가벼워진 남편은, 아내를 돌볼 수 있어요.  
 
나는 어떤 남편일까요? 부끄러워요.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만큼 모범적이지는 않아요.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하고 싶어요. 나는 아내에게 바라는 것 없어요. 아내가 나를 돌봐줄 필요 없어요. 아내는 나를 돌봐줘야 할 사람이 아니라, 내가 일방적으로 돌보고 책임지고 사랑해야 할 사람이에요. 
 
“아내는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마지막 영혼이다.” 
 
내 진심이에요. 하나님은 내가 수천 명을 변화시킨 것보다, 수백 가정을 회복시킨 것보다, 내 아내를 사랑하고 돌보는 내 모습에 더욱 기뻐하실 거예요. 나는 그렇게 믿어요, 정말로.

성경은 위인전이 아니다

<사무엘상 17:50>  

이처럼 다윗은 물매와 돌 하나만 가지고 블레셋 사람을 물리쳐 이겼습니다. 다윗은 그 사람을 돌로 맞혀 죽였습니다. 다윗은 손에 칼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골리앗을 이겼을까요? 사람들은 용기와 실력이라고 말하더라고요. 전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요. 
 
다윗의 용기는 대단했어요. 왕을 설득해서 골리앗과 맞섰어요. 골리앗 앞에서도 겁먹지 않았고요. 
 
하지만, 용기 자체가 승리를 보장할 수는 없어요. 다윗이 이겼으니까 용기라고 하는 거죠. 싸움에서 졌다면, 객기였겠죠. 
 
성경은 위인전이 아니거든요. 용기를 강조하려고 쓰여진 게 아니에요. 다윗이 아무리 용기 있는 사람이라도, 이순신 장군이나 잔다르크보다 더 할까요? 
 
다윗의 실력은 어떤 가요? 대단하죠. 작은 돌멩이 하나로 골리앗을 쓰러뜨렸잖아요. 우연이 아니었어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돌멩이 던지는 실력을 갈고닦았죠.
 
하지만, 다윗의 실력을 높게 평가하더라도 태어날 때부터 군사 훈련을 받은 골리앗과 비교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요? 실력으로 따지면, 골리앗이 앞서잖아요. 
 
다윗을 읽어내려 갈 때, 용기나 실력을 강조하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쳐 버려요. 가장 중요한 게 뭘까요? 하나님의 은혜에요.  
 
다윗은 목동이었고, 다윗의 가족은 떠돌이였죠. 하나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새로운 왕으로 세우셨어요.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주시고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게 하셨죠. 다윗의 때에 이스라엘은 전 세계의 패권을 움켜쥐었어요. 
 
다윗 이전, 다윗 이후에도 다윗처럼 영광스러운 시절은 없었어요. 유대인들은 “다윗의 왕국”이라는 말을 들으면 감격했어요. 
 
다윗의 왕국과 하나님 나라는 밀접해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실 때, 다윗의 왕국을 염두해 두신 거예요. 
 
다윗의 왕국이 없었다면,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지 않았겠지요. 다윗의 열쇠이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거예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예요. 다윗의 용기와 실력을 앞세워서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을 수 없어요. 다윗도 원치 않을 거예요. 
 
다윗도 무서웠겠죠. 믿음으로 한 걸음 내딛은 거예요. 하나님이 승리하신다고 믿었기에 돌멩이 하나로 덤벼든 거죠. 
 
다리가 벌벌 떨리지 않았을까요? 다윗 이야기를 전부 읽어보세요. 다윗도 우리와 다를 바 없어요. 
 
돌멩이 던지기를 실력으로 봐야 하나요? 글쎄요, 나는 잘 모르겠어요. 다윗이 물매를 들고 있으니까, 그것을 그냥 사용하신 게 아닐까요? 
 
모세의 지팡이를 실력으로 안 보잖아요. 하나님이 보실 때는 모세의 지팡이나 다윗의 물매나 별반 다르지 않아요. 
 
모세의 지팡이로 이집트를 무너뜨리고, 다윗의 돌멩이로 골리앗을 쓰러뜨렸는데, 실력이 들어설 틈이 어디 있나요? 
 
하나님은 작고 미천한 사람의 보잘것없는 재능을 사용하세요. 하나님의 은혜죠. 
 
용기 없다고, 실력 없다고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마세요. 잠시 쉬다가 다시 일어서서 뚜벅뚜벅 걸어가세요. 
 
나도 가끔은 포기하고 싶어요. 내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마 모르실 거예요. 은혜 없으면 하루도 못 살겠어요. 
 
용기 없어도 괜찮아요. 실력 없어도 괜찮아요. 은혜로 살아가요. 있는 모습 그대로 귀하게 쓰실 거예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까요.

마음이 무너지는 날

<누가복음 3: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마음이 막 무너지는 날, 있잖아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잘나 보이고, 나 빼고 모든 사람이 걱정 없이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날, 다른 사람과 비교할 의지조차 사라질 만큼 나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지는 그런 날 있잖아요. 
 
막 울고 싶은데, 어디 가서 울어야 할지 몰라 성경을 펼쳐 읽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평소에 많이 읽은 말씀인데, 왜 갑자기 눈물이 나지? 
 
‘내가 네 마음을 안다, 그 마음을 내가 모르겠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예수님의 시작은 고요했어요.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죠. 예수님이 누추한 옷을 입고 요단 강에 나타나셨을 때, 사람들 눈에는, 자기들처럼 죄를 용서받으려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온 사람처럼 보였을 거예요. 
 
그럴만해요. 당시의 모든 종교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있었어요. 갈릴리 요단 강은, 유능하고 탁월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아니었죠. 예루살렘에서 낙오한 사람들이나 모여드는 변두리에, 감히 메시아라니…. 상상할 수도 없었겠죠.   
 
예수님은 아무런 설명도 변명도 없이,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 요한 앞에 서셨어요.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그 누구의 동의도 필요 없으셨지만, 이제 허락하라는 말로 세례를 받으셨어요. 
 
예수님이 기도하셨을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님이 비둘기처럼 내려오셨고, 하나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어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단다.”
 
여기서, 많이 울었어요. 하나님의 목소리가 나한테도 들리는 것 같아서요. 내가 위로를 받고 마음이 따뜻해지니까, 이제야 당신이 보여요. 당신을 위로하고 싶어요. 
 
‘내가 이렇게 비참해진 건 내 선택의 결과일지도 몰라. 내가 어리석었어. 올바른 결정을 내렸다면, 이렇게까지 비참해지지 않았을 거야.’ 
 
그보다 비참한 생각은 없을 거예요. 당신이 나처럼 슬프다면, 우리 잠시 대화해요. 
 
어쩌면, 우리 실수한 게 아니에요. 과거로 돌아가 똑같은 상황에 놓이더라도, 똑같은 결정을 내릴지도 몰라요. 두 번 어리석을 수 있다면,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신념이에요. 
 
혹시, 예수님을 사랑해서 내린 결정 아닐까요? 책임을 회피하고, 변명하고, 합리화하자는 말이 아니에요. 진실을 알고 싶어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어리석은 결정이 가능했을까요?
 
당신은 예루살렘에서 밀려난 게 아니라, 예루살렘을 추구하지 않은 거예요.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예수님을 닮아서, 예수님처럼 올바른 결정을 내린 거예요.
 
당신의 실수가 아니에요. 올바른 선택이에요. 자책하지 마세요. 비록 예루살렘과는 멀어졌을지 몰라도, 예수님이 당신과 함께 하세요. 
 
좁고 험한 그 길 끝에서, 예수님이 두 팔로 안아주시고, 사랑으로 속삭여 주실 거예요. ‘잘했다. 수고했다. 내가 너무 기쁘구나’ 예수님의 진심이에요. 조금만 힘을 내주세요. 얼마 남지 않았아요.

남편을 통제할 수 없다

<창세기 3:16> 

하나님께서 여자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아기를 가지는 고통을 크게 하고, 너는 고통 중에 아기를 낳게 될 것이다. 너는 네 남편을 지배하려 할 것이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
 
부부 상담은 첫 세션부터 긴장돼요. 부부가 웬만한 문제로는 상담받으러 안 오거든요. 힘들게 첫걸음을 떼면, 그다음부터는 각본 없는 드라마가 펼쳐져요. 드라마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될지도 모르고, 등장인물이 무슨 말을 할지조차 몰라요. 
 
각본 없는 드라마라도 반복되는 패턴이 있겠죠? 감독, 배우, 줄거리는 달라져도, 장르가 가지는 기본적인 플롯이 있어요. 기승전결이죠. 반복되는 패턴 중에 하나를 다루어볼게요. 
 
“추격자와 도피자” 패턴이 있어요. 부부 중 한 사람은 항상 잡으러 다니고, 나머지 한 사람은 도망을 다녀요. 누가 잡으러 다니고, 누가 도망 다닐까요? 아내가 잡으러 다니고, 남편이 도망 다녀요. 예외도 있겠지만, 주로 그래요. 
 
아내는 남편과 정서적으로 멀어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껴요. 남편이 다른 일로 바쁘거나, 시댁의 편을 든다거나, 무뚝뚝하면 큰일 나요. 남편이 무심결에 그랬어도, 아내에게는 긴급상황이죠. 남편에게는 선택의 문제지만, 아내에는 존재의 문제거든요.       
 
아내는 남편과 통(通)하고 싶은 거예요. 연결되고 싶은 거죠. 하지만, 남편은 오해하거든요. 남편은 통제받는다고 느껴요. “아내 부탁 들어줘도 끝이 없다. 어느 선까지만 하고 말자.” 아내는 쫓고, 남편은 쫓기는 비극이 시작되는 거죠.  
 
오늘은 아내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할게요. 
 
남편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 하나님도 아실 거예요. 하지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에 변화가 필요해요. 지금 그 방식으로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실 거예요.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방아쇠가 당겨지거든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상태가 될 거예요. 당신만 그런 게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인류 최초의 아내, 하와도 그랬거든요. 어쩌면, 타락 이후에 반복되는 부부 문제일 수 있어요. 모든 아내들이 그렇다는 말이죠. 
 
  “너는 네 남편을 지배하려 할 것이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결핍을 가진 아내는 자기 방식대로 남편을 지배하고 싶어 해요. 결핍을 가진 남편은 자기 방식으로 가정을 다스리려고 하죠. 여기서 충돌이 일어나요.   
 
아내가 은혜받은 사람이라면, 조심스럽게 부탁드리고 싶어요. 남편을 놓아주세요. 남편을 지배하려고 하면 할수록, 남편은 도망쳐 버릴 거예요.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아내의 기준과 방식으로 짓누르지 말고, 숨을 쉬면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공간을 만들어주라는 부탁이에요. 
 
“내 남편하고 살아보세요. 온갖 나쁜 짓을 다 저지르는 사람이라고요. 술을 먹고 나를 때리고, 경제적인 능력은 쥐뿔도 없고, 심지어 다른 여자를 만나고 돌아다녀요.” 
 
나는 그런 남편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 남편이라면, 나쁜 사람이에요. 내가 마음에 두고, 아내에게 놓아주라고 부탁하는 남편은 그런 남편이 아니에요. 내가 마음에 그린 남편은, 서투른 남편이에요. 
 
내가 말하는 서투른 남편은, “자기 나름대로 한다고 하는데, 아내에게 인정도 못 받고 대우도 못 받는 남편이에요.” 아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서, 몸값이 한없이 낮아진 남편이죠.
 
하와의 결핍은 어쩌면 아담이 채워줄 수 없는 결핍이었어요. 하나님과의 단절로 일어난, 근원적인 결핍이에요. 서투른 남편이 성숙해지는 동안, 아내는 예수님께 사랑받으셔야 해요. 
 
남편과 통하고, 남편에게 사랑받아도 빈자리는 여전해요. 남편이 손에 쥔 퍼즐 조각은 아내의 빈자리에 맞지 않거든요. 예수님으로 빈자리를 채우셔야 해요. 그러다 보면, 서투른 남편도 있는 모습 그대로 이해해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거예요.  
 
더 이상 남편을 추격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따라가세요. 남편을 추격하면 남편이 도망가지만, 아내가 예수님을 따라가면 남편은 아내의 뒤를 따를 거예요. 말처럼 쉽지 않지요. 불안한 마음에, 뒤를 힐끔힐끔 보면서 남편이 잘 따라오나 확인하고 싶을 거예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남편이 금방 따라와서 아내의 손을 꼭 잡아줄 거예요. 그런 날, 꼭 올 거예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예수님께 데려다줄게요

From 목격자 (중풍병자의 친구)
 
나의 소중한 친구 세르오는 앞날이 창창한 20대에, 뇌혈관이 터져 온몸이 굳어버렸습니다. 밭에 쓰려져 숨만 쉬고 있던 세르오를, 마을 사람들이 발견해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요. 
 
세르오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내가 세르오를 찾아갈 때마다, 차라리 자기를 죽여달라고 울부짖었지요. 나는 그를 사랑했지만,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을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나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병을 고치고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그분에게, 내 친구 세르오를 데려다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장에 세르오에게 달려갔지요. 
 
“세르오! 우리 마을에 예수님이 오신대! 이제 너도 걸을 수 있어. 내가 너를, 예수님에게로 데려다줄게.” 
 
세르오는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눈물을 쏟아냈지요. 나는 세르오를 부둥껴 안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부디, 내 친구 세르오를 고쳐주시라고요. 
 
나는 다른 친구 셋을 불러, 세르오를 들것에 실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장소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고개를 떨구고 말았습니다. 네 사람이 들것을 들고 발을 맞춰 걸으려니, 다른 사람들처럼 빨리 걸을 수가 없더군요. 
 
우리는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구름 떼처럼 많은 사람들이 겹겹이 쌓여있었습니다. 군중 밖으로 떠밀려, 예수님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지요. 
 
세르오가 말했습니다. 
 
“괜찮네, 친구들. 자네들이 나를 위해 여기까지 와준 것만으로 고맙다네.” 
 
나는 세르오의 손을 꼭 잡고 말했습니다.
 
“세르오, 절대로 포기하지 말게. 나는 자네를 꼭 살려야겠네. 자네를 예수님에게로 데려다주겠어.” 
 
 나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세르오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밖에는 없었습니다. 나와 친구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었습니다. 
 
지붕 위에 구멍이 생기자, 예수님 발 앞에 흙이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집 안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얼마나 걱정이 되던지요. 
 
내가 먼저 고개를 내밀어 안쪽의 상황을 살폈습니다. 그때,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예수님은 따뜻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시며, 말없이 고개를 끄떡이셨습니다. 
 
나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수평을 맞추어 조심히 세르오를 내려보냈습니다. 지붕에서 세르오를 내리는 동안, 예수님은 단 한순간도 시선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세르오가 바닥에 내려진 순간, 예수님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네 죄가 용서되었다. 침상을 들고 일어나렴. 이제 너는 걸을 수 있단다.” 
 
세르오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일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순간이었습니다! 세르오의 굳은 몸이 풀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지붕에서 떨어질 뻔했습니다. 나와 친구들은 너무나 감격해서, 서로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르오를 안아주시며, 등을 두드려 주셨습니다. 
 
세르오의 어깨너머로 예수님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올려다보시며, 인자하게 웃으셨습니다. 이제 세르오는 건강하고 밝은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내게 말하더군요. 세르오가 나은 건, 모두 내 덕분이라고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어색하게 웃을 뿐입니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세르오를 예수님에게 데려다준 것뿐이에요.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세르오는 여전히 절망 속에 있었겠지요.  
 
훗날, 예수님이 우리의 믿음을 언급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와 친구들의 믿음 때문에, 세르오를 고쳐주셨다고요. 자칫 잘못하면, 나와 친구들의 믿음으로 세르오가 나았다고 오해하실 것 같아요. 
 
예수님은 네 사람의 믿음이 아니라, 다섯 사람의 믿음을 보신 겁니다. 세르오 역시 간절히 치유되기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믿음을 보신 거예요. 예수님은 우리의 작은 믿음을 기뻐하시며, 세르오를 고쳐주셨습니다. 
 
사람들은 계속 말을 만들지요. 부정적인 소식은 빨리도 퍼집니다. 들것을 함께 들어준 친구가 어느 날, 내게 속상한 말을 전하더군요. 
 
“이봐, 자네도 들었나? 마을에서 이상한 말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네. 예수님이 세르오에게 “네 죄가 용서되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그 말을 오해한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야. 세르오가 중풍병에 걸린 게, 세르오의 죄 때문이라고…. 이런 터무니없는 말이 어디 있나? 세르오가 그 말을 듣게 되면, 얼마나 상처를 받겠나.”
 
나는 친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해서 실수한 것이라도, 제아무리 상처를 줄 의도가 없다고 하더라도, 세르오가 들으면 마음이 아플 것이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르오의 죄를 지적하신 게 아닙니다. 죄 때문에 세르오가 병든 게 절대로 아닙니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아픈 것도 전부 네 잘못이다”라고 말하다니요.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끔찍한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한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세르오의 질병을 치유하신 것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치유해 주신 겁니다. 참된 자유를 선포하신 것이지요. 예수님은 치유와 용서의 예수님이십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돌보며, 함께 기도하는 당신을 위로하고 싶습니다. 나와 당신은 무능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상처 입은 한 사람을 예수님에게 데려다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나는 못한다고, 나는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다고, 절망하지 마세요. 
 
우리는 못해도, 예수님은 하십니다. 예수님이 반드시 치유하십니다. 당신과 나는 치유자가 아니라, 목격자입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상처 입은 한 사람을 예수님에게로 데려다주세요. 
 
내 이름은 남기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머문 자리, 우리의 이름 대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남겨지기를 소망합니다.

시험은 피할 수 없어요

<누가복음 4:1-2>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성령 충만하면, 사탄이 공격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항상 성령 충만해야 한다.” 
 
언뜻 들으면 맞는 말 같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어요. 내 생각은 조금 다르거든요. 아무리 성령 충만해도 시험을 피할 수 없어요. 
 
예수님은 성령이 충만하셨지만, 시험을 당하셨어요. 사탄은 물러서지 않았어요. 예수님을 쓰러뜨리려고 40일 밤낮으로 덤벼들었죠. 
 
누군가 우리에게, “당신은 성령 충만합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당당하게, “네!”라고 대답할 수 있겠어요. 교만해 보이잖아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목말라요. 더 사랑하고 싶고, 더 가까워지고 싶어요. 항상 부족하게 느껴져요. 
 
성령 충만하고 싶지만 성령 충만하지 못한 거죠. 아쉬우니까, 자책하게 돼요. 
 
‘내가 요즘 느슨해. 사탄이 나를 우습게 봐. 사탄도 그걸 알아. 나는 사탄의 밥이야. 툭하면 나를 건드려.’ 
 
시험을 피하려고 하는 사람은, 시험이 찾아올 때 억울하고 속상해요. 시험을 감당할 힘조차 없다면, 하나님이 원망스러울 거예요. 
 
시험은 필수에요. 예수님은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셔야 했어요. 아담은 유혹에 넘어갔지만, 예수님은 유혹을 이겼어요.
 
예수님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에요. 싸움에 임할 때, 우리가 앞장서면 안 돼요. 우리는 예수님 뒤로 피해야 해요. 예수님이 우리 대신 싸워주세요. 
 
광야에 홀로 섰다면 기억하세요. 당신은 절대로 혼자가 아니에요. 먼저 시험받으신 예수님은, 당신을 외면할 수 없어요. 
 
넘어지고 쓰러지더라도, 끝난 게 아니에요. 일어서서 보듬고 다시 시작하세요. 이미 승리하신 예수님이, 당신을 끝까지 책임져 주실 거예요.

하나님은 존재를 받으신다

<창세기 4:4-5>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면 기뻐하실까요? 가장 좋은 것을 드려야겠지요. 동의해요. 하나님께 대충 드릴 수는 없잖아요. 
 
그러면,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인가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잘 모르겠어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고 있나요? 누군가 물으면, 가만히 고개를 숙이죠. 누가 이 질문에 떳떳하겠어요.  
 
열정적으로 헌신해 보세요. 가장 좋은 것을 드리고 싶지만, 항상 부족한 것 같아요. 더 열심히 해야 하는데…. 습관처럼 내뱉은 말이죠.  
 
과감하게 큰 금액을 헌금해보세요. 왠지 더 드려야 할 것 같아요. 불현듯 아깝다는 생각이라도 해버리면,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에 부끄러워요.  
 
직업적 성취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해보세요. 원하는 대로 안돼요. 자신보다 성공한 사람의 신앙 간증을 들으면, 나름대로 도전은 되는데, 내 인생은 이게 뭔가, 은근히 주눅 들어요. 
 
뭘 드릴까 고민하면, 하나님을 오해해요. 하나님은 당신이 가져온 것에 별로 관심 없으세요. 하나님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으세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고 싶다면, 당신이 가진 무엇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드리세요. 하나님에게 가장 좋은 것은 당신이에요. 당신이 예수님으로 기뻐하는 그 모습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세요. 
 
내 주장이 아니에요. 하나님 말씀이에요. 가인과 아벨이 아시죠? 하나님은 가인의 것은 거절하시고, 아벨의 것은 받아주셨어요. 차이가 뭘까요? 
 
제물의 종류일까요? 아벨은 피의 제사를 드려서 받아주셨고, 가인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려서 거절했을까요? 아니에요. 하나님은 곡식 제사도 받아주세요(레위기 2:2). 종류 차이는 아니에요.   
 
제물을 준비한 정성일까요? 아니요. 얼마나 정성을 다하면, 하나님이 만족하시겠어요. 아무리 정성을 다해도 부족해요. 정성 그 자체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는 없어요. 
 
그럼 뭘까요? 가인과 아벨의 제사 장면에서, 성경은 독특한 표현을 쓰거든요. 한 번 살펴볼게요. 
 
아벨과 그의 제물. 
가인과 그의 제물. 
 
제물을 드린 사람과 제물이 서로 묶여 있지요? 사람과 제물이 동시에 하나님께 드려진 거예요. 하나님은 제물을 드리는 사람과 제물 그 자체를 하나로 보세요.  
 
만약 제물이 서로 바꿔서 드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벨이 곡식을 드리고, 가인이 어린 양을 드렸다면요? 하나님이 가인의 것을 받아주셨을까요? 아니에요. 아벨의 것만 받으셨을 거예요. 
 
제물보다 사람이 중요해요. 하나님은 아벨의 중심, 다시 말해 진심을 아신 거예요. 
 
가장 좋은 것을 드린다는 명분으로, 혼자 애쓰지 마세요. 더 좋은 것을 드리다가, 가장 좋은 당신이 사라져요. 그러면, 나는 속상해요.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세요. 남들 보여주기 부끄럽고, 정성이 부족해도, 용기 내서 하나님께 나아가세요.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주눅 들지 마세요. 있는 모습 그대로의 당신을 드린다면, 그것으로 충분해요. 하나님은 말할 수 없이 기뻐하세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은 당신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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