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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 치유자의 고백

침묵이 만든 세상

“아내는 자기 생각을 표현하지 않을 때가 많아요. 말해서 뭐하냐, 말해도 못 알아듣는데…, 이런 마음인지는 몰라도 같이 사는 게 얼마나 답답한지 모릅니다. 앉아서 이야기를 해보자고 해도 결국 저 혼자 말하고 있어요. 아내는 그저 웃기만 해요. 그러다 기분이 거슬리면 표정이 싹 변합니다. ‘당신 생각 좀 들어보자’라고 하면 말하고 싶지 않다고, 말해서 뭐하냐고 하죠. 
 
저는 정말 답답합니다. 퀴즈쇼에 출현해 문제를 맞추는 사람 같아요. 상자 밖에 나와 있는 꼬리만 보고 그 동물을 맞추는 거죠. 맞추기 쉬운 문제도 있지만, 맞추기 어려운 문제도 있어요. 아직도 풀지 못한 문제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죠. 아내가 원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뭔지 모르는 거죠.” 
 
남편은 결혼 생활이 답답하다고 말했다. 아내는 독립심이 강한 여자다. 남편이 없어도 못하는 일이 없다. 그가 전날 야근을 하고 잠든 주말 오전, 아내는 남편을 깨우지 않고 다섯 살, 세 살인 아이들을 데리고 병원에 다녀왔다. 잠에서 깬 남편이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며, 왜 깨우지 않았냐고 물으면 아내는 피곤해보여서 그랬다고 말했다. 남편은 그런 아내가 고마웠다. 
 
그러나 말 없는 아내에게 서운할 때가 많았다. 퇴근 길, 예상보다 늦게 오면 그녀의 표정이 밝지 않다. 미안하다고 말해도 소용없다. 그녀는 남편이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식사를 준비한다. 예정보다 늦으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남편은 아내가 왜 기분이 나쁜지 알 수가 없다. 그녀의 불편한 표정을 보는 것이 괴롭다. 
 
아내는 설명한 적이 없다. 그저 온도계를 보고 방의 온도를 알 수 있듯이 남편은 아내의 표정으로 그녀의 상태를 파악한다. 퀴즈쇼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말하기 싫을까요? 아마 남편이 알아서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겠죠.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요. 제 성장 과정이 독특했거든요. 어릴 때부터 가진 습관이랄까. 원래 말이 별로 없었어요. 말을 많이 하면 실수하잖아요. 실수는 또 다른 실수를 낳고. 남편이 뭘 요구하는지 알아요. 그런데 자꾸 표현하기 시작하면 그가 더 괴로워질 거예요. 
 
제가 이것저것 요구하기 시작하면 더 희생해야 할 거고요. 남편은 알아서 잘하고 있어요. 결혼 생활도 전반적으로 만족스럽고요. 제가 무리한 것을 요구했다가 갈등이 일어나면 남편이 괴롭겠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아요. 때로는 ‘귀찮아도 말할까?’ 하다가 ‘말 한다고 이 사람이 다 이해할까?’ 싶어서 마음을 접죠. 제가 살아온 방식대로 살게 되는 것 같아요. 사람은 한 순간에 바뀌지 않잖아요.” 
 
그녀는 어린 시절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아빠가 다른 여자를 만나 가정을 버렸다. 그녀의 나이 일곱 살, 동생은 세 살이었다. 엄마가 고생하며 아이 둘을 키웠다. 함께 할 시간이 당연히 부족했다. 가만히 내버려둬도 엄마는 충분히 힘들어 보였다. 
 
가장 친한 친구가 영어 과외를 받는다고 했다. 과외 선생님이 친구들을 그룹으로 묶어달라고 부탁했다고 하면서 그녀에게 함께 공부하자고 말했다. 그녀는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했다. 과외 받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엄마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용기를 내어 엄마에게 말했다. 과외 받고 싶다고. 아침밥을 먹던 엄마의 표정이 굳었다.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한숨을 쉬면서 남은 밥을 싱크대에 버렸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엄마는 표정과 몸짓으로 ‘과외 보낼 형편이 안 된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후회했다. 말하지 않았다면, 엄마가 고통 받지 않았을 것이다. 괜한 말을 꺼내 엄마를 괴롭게 했다. 그 이후부터 그녀는 뭐든 혼자 생각하고 결정을 내렸다. 
 
“참, 웃긴 게 제가 말을 하지 않고 잘 들어주니까 제게 고민상담하는 친구가 많았어요. 저도 제 고민 때문에 힘들었는데, 친구들이 와서 고민을 털어놓더라고요. 친구들이 ‘넌 마음이 따뜻한 사람 같아. 네게 말하고 나면 마음이 편해져’라고 했어요. 
 
저는 그게 좋은 줄 만 알았죠. 사회생활을 할 때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어요. 다른 직장 동료들이 회사, 상사를 원망하고 불평할 때, 저는 불평 한 마디 안 했어요. 저도 화나고 답답하고 억울한 일을 많이 겪었지만 표현하지 않은 것뿐이에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윗분들이 좋게 보시더라고요. 
 
의도한 상황은 아니었는데, 인정받기 시작했어요. 제 실력을 보여줄 기회도 남들보다 많아졌고요. 모든 생각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잖아요. 때론 말하지 않는 것이 더 유익해요. 남편이 답답하다고 하니까 고민은 고민이지만요….”  
 
남편은 사소한 것 하나도 가족과 함께 모여 대화하면서 공유하는 가정에서 성장했다. 남편 가족 모임에 가면 별 사소한 이야기를 하면서 가족이 웃고 떠들고 좋아했다. 아내가 살아온 세상에서 남편은 수다스런 사람이었다. 
 
남편은 가족과 대화하는 것이 행복한 삶의 전제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대화하지 않으면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없고, 사소한 일에도 오해가 생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에게 더 많은 대화를 요구했고, 아내는 그럴수록 위축되었다. 입을 닫고 침묵하는 것으로 그에게 항의했다. 아내가 출제하는 문제는 갈수록 어려워졌고, 그는 문제를 풀고 싶은 의욕을 잃었다. 
 
서로의 차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라는 상식적인 명제를 되뇌어 보지만 끊임없이 갈등이 일어났다. 
 
***
 
남편에게는 아내의 과거가 중요하지 않았다. 힘든 어린 시절을 자꾸 떠올리게 하는 것은 그녀에게 마음 아픈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살아온 삶이 궁금했지만 묻지 않은 이유다. 그의 배려였다. 
 
아내는 어린 시절을 남편과 공유할 기회가 없었다. 원래 말이 없는 성향 탓에 묻지도 않은 것을 혼자 떠든다는 것은 그녀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내가 살아온 삶을 처음 공유했을 때, 남편은 충격을 받았다. 가장 힘든 시절을 이야기 할 때, 그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는 장인어른이 암에 걸려 일찍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었다. 결혼 전, 장모님이 그렇게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아내가 살아온 삶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던 남편은 아내의 말이 끝나자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남편은 자신을 원망했다. 아내를 배려한다면서 그녀가 살아온 삶에 대해 묻지 않은 것을. 오늘의 아내를 이해하기 위해서 어제의 아내가 중요했다는 것을 인식한 순간, 남편은 허공에 깊은 한숨을 쉬었다. 허공을 응시하는 남편 눈에서 쉬지 않고 눈물이 솟아났다. 
 
어린 시절, 아내가 선택한 전략은 옳았다. 혼자 깊이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삶은 그녀를 지켜주었다.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강한 정신력으로 무장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삶은 오늘과 같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현실을 비난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길 수 있었다. 아버지를 원망하거나, 가난을 탓하거나, 자신을 세밀하게 돌봐주지 않은 엄마를 비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자신을 온전히 책임진 것이다. 그녀는 박수를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제 변화가 필요하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전략이 필요한 것처럼 과거를 빛나게 해주었던 전략을 버리고, 오늘 그녀를 빛나게 해줄 전략을 찾아야 한다. 침묵은 과거의 것이다. 대화가 현재의 것이다. 과거에 유익했던 전략을 버리고 오늘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마음을 열고 남편과 대화해야 한다. 직접 무대 앞으로 나아가 퀴즈쇼의 막을 내려야 한다. 모든 생각을 말할 필요는 없다. 열 번 참고, 한 번은 말해라. 아무리 말하고 싶지 않아도 말해야 한다. 부부의 미래가 달렸다. 
 
한 순간에 변화하기를 어렵지만 일단 시작해야 한다.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부부가 대화한다면 아내는 남편의 지지와 격려를 한 몸에 받을 수 있다.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것은 남편이 대화에 능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아내가 말할 때, 그는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의 눈물은 남자다운 것이다. 아내의 고통스런 기억을 들으면서 함께 흘린 눈물은 보석이다. 결혼식에 아내 손가락에 끼워준 다이아몬드 반지보다 값지다. 
 
남편은 아내의 어제와 오늘, 내일까지도 사랑한다.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할 줄 아는 사람이 시대를 선도하듯 아내의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할 때,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이끌어 줄 수 있다. 
 
말없이 서로를 배려해주던 부부, 이제, 수다를 좀 떨라. 대화를 많이 할수록 사랑은 깊어진다. 알면 알수록 사랑스러운 것이 아내다. 알면 알수록 듬직한 것이 남편이다. 그렇다. 대화를 통해 사랑은 더욱 단단해진다.   

상처의 속성은 반복이다

지연의 오전은 한가롭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고, 집 안에 머문다. 커피를 내리고, 소파에 앉은 지연은 평온해 보인다. 잠시 후, 그녀는 쓰러지듯 소파에 누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석 달 전, 그녀는 끔찍한 일을 겪었다. 
 
빨랫감을 정리하다가 남편의 주머니에서 유흥업소의 명함을 발견했다. 아내는 충격을 받았다. 빨랫감을 집어던지고,  소파에 앉은 남편에게 소리를 질렀다. 
 
“당신 이게 뭐야?” 
 
남편은 당황했다. 
 
“뭐가?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래?” 
 
“왜 이런 게 당신 주머니에 있어?” 
 
지연은 유흥업소의 명함을 남편에게 집어던졌다. 남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 그거 어제 술에 취해서 받은 거야. 친구랑 포장마차에서 술 마시고 대리기사 기다리는 동안, 길에서 나눠주는 거 받은 거네. 술에 취해서 기억을 못 했어, 내가….” 
 
“그게 지금 말이 되는 소리야?” 
 
“말이 안 되면 뭐 어떻게 해. 그게 사실인데. 당신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지연은 남편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남편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남편은 술을 즐겨마시는 사람이 아니었다. 남편의 친구 A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는 말에 모처럼 만난 자리였다. 
 
“정말 믿어도 되는 거지? 당신 나한테 숨기는 거 없지?” 
 
“아, 그런 거 없다니까.” 
 
지연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사흘 뒤, 지연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남편 친구 A의 아내였다. 지연이 전화를 받아들었을 때, A의 아내가 흐느껴 우는 소리부터 들려왔다. 
 
“언니, 알고 있었어요?”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지연이 되물었다. 
 
“우리 오빠하고 언니 남편하고, 성매매 업소 갔다 왔어요.” 
 
지연은 귀를 의심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오빠가 PC로 카카오톡 메신저를 하다가, 로그아웃을 안 하고 나갔어요. 거기서 두 사람 대화를 읽었는데, 서로 그 짓을 하러 다닌 거예요.” 
 
지연은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사실이야?” 
 
“사실이라니까요. 우리 오빠는 인정했어요. 내가 어제 미친 여자처럼 살림 부수고 난리 쳤다니까요. 언니 이제 우리 어떻게 해요? 저 이 남자랑 못 살아요.” A의 아내는 다시 흐느껴 울었다. 
 
지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떨리는 입술을 이빨로 꽉 깨물고, 뭉개진 발음으로 말했다. 
 
“일단, 전화 끊어.” 
 
남편은 회사에서 조퇴를 하고 한 걸음에 집으로 달려왔다. 무릎을 꿇고 빌었다. 지연은 남편의 옷가지를 집어던지며, 당장 집을 나가라고 울부짖으며 소리를 질렀다.
 
남편의 얼굴조차 보고 싶지 않았다. 새벽에 출근하고 저녁 늦게 퇴근하라고 말했다. 각방을 쓰면서 얼굴조차 마주치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남편은 아내가 시키는 대로 했다. 
 
한 달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지연의 몸과 마음이 망가졌다. 지연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같은 일로 이혼한 선배 언니의 조언이 냉수처럼 지연을 일깨웠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혼은 아니야. 나는 너무 후회스러워. 부부 상담이라도 받아봐.”
 
지연은 남편에게 통보하듯 말했다. 
 
“부부 상담이라도 받자. 이대로 당신도 나도 못 살아.” 
 
남편은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아내가 하자는 대로 했다. 
 
상담 안에서, 두 사람은 일상 대화에서 불가능했던, 진심을 공유했다. 남편은 아내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다. 아내는 오열하듯 고통스러운 감정을 쏟아내었고, 남편은 그 감정을 오랜 시간 받아냈다. 
 
아내는 남편을 용서하고 새로운 기회를 주었다. 남편 역시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노라고 약속했다. 표면적으로, 두 사람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내는 반복되는 기억으로 고통받았다. 
 
남편이 식탁 앞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거짓말을 했던 모습이 떠오르면, 남편을 향한 분노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분노를 느낄 때마다 쥐잡듯 남편을 잡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될 것이 뻔했다. 두 사람의 회복을 위해 혼자 간직해야 할 것으로 여겼다. 
 
남편을 향한 분노는 점차 스스로를 비난하는 목소리로 변질되어갔다. 
 
‘왜 몰랐을까? 얼마나 어리석으면 몰랐을까? 남편 친구의 아내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평생 모르고 살았지 않았을까? 얼마나 멍청하면 그랬을까?’ 
 
지연은 하루에도 몇 번씩 소리 없이 무너졌다.  
 

 
상처의 사건은 일시적이지만, 상처의 기억은 무한 반복이다. 상처의 무시무시한 속성이다. 
 
피해자의 의견을 묻지 않고, 제멋대로 기억을 재생한다. 피해자를 의자에 묶어놓고, 바로 눈앞에서 끔찍한 장면을 무한 반복, 자동 재생하는 것이다.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는 것만으로 상처의 공격을 버텨낼 수 없다. 현명한 전략이 필요하다. 상처의 속성을 알고 올바르게 대처하는 것이다. 
 
첫째, 의자에 묶이면 안 된다. 몸을 움직여라. 아등바등 움직여서, 꽉 묶인 밧줄에 공간을 만들어라. 손목 하나라도 뺄 수 있다면, 밧줄을 풀고 의자에서 탈출할 수 있다. 
 
둘째, 눈을 감지 말아라. 눈을 뜨고 놓친 장면을 세세히 살펴라. 눈으로 바라보는 모든 장면은 상처가 각색하고 편집한 장면이다. 편집되고, 왜곡된 장면을 찾아내라. 상처가 일부러 도려낸 장면이 있다. 찾아내서 원래의 자리에 끼워 넣어라. 
 
지연의 잘못은 없다. 이것이 나의 결론이다. 그러나, 지연은 상처의 왜곡된 기억으로 스스로를 자책하며 끔찍한 시간을 보낸다. 남편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순간의 결단보다 중요한 것은, 용서로 다시 시작된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다. 
 
남편을 용서한 지연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다. 용서의 결단이 고통스럽게 반복되는 기억을 지워주지 않는다. 반복되는 기억으로 고통받는 과정을 남편과 공유해야 할 용기가 필요하다. 
 
고통을 표현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고통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솔직한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다. 
 
“나 오늘도 문득 그 기억이 찾아왔어.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 생각나. 내가 기억으로 힘들 때마다, 내 곁에 있어줄 수 있어? 내가 힘들어서 울면, 따뜻하게 안아줘.” 
 
남편을 향한 비난을 제거하고, 진심을 담아라.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고,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남편은 기꺼이 아내를 돌볼 것이다. 
 
용서받은 남편에게 부탁한다. 상처의 속성은 반복이다. 일 년이든 십 년이든, 아내가 반복되는 상처에서 벗어날 때까지, 남편은 지치지 않고 아내를 돌봐야 한다. 
 
남편이여, 자존심 때문에 과거를 부정하지 말아라. 아내가 용서했다면, 과거는 남편의 실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아내의 상처에 관한 것이다. 용서는 순간이지만, 기억은 평생 간다.    
 
남편의 자존심 때문에, 아내가 툭하면 과거를 꺼내서, 남편의 발목을 잡으려는 것으로 오해한다. 남편의 약점을 언급해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다. 아내가 서툴러서 그렇다.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는 것이다. 
 
진심은 간단하다. 
 
“과거의 기억으로 아프다.”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아라. 
 
“너 때문에 아프다.”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아내가 과거를 언급하며 괴로운 감정으로 되돌아간다면, 아내를 위한 치유자가 되라. 오해를 넘으려면,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아내를 과거에 얽매여 사는 나약한 여자로 취급하지 말고,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불쌍한 여자로 보라.  
 
아내가 남편의 가치를 안다. 그래서, 절망했고, 그래서, 포기할 수 없었다. 상처의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면서도, 남편을 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남편, 당신은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다. 
 
잘못이 후회된다면, 그만큼 아내에게 정성을 쏟아라. 당신의 가치는 변하지 않았고, 고통의 시간을 지나면서,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그날이 오기까지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동굴에 갇힌 남편

“이상한 습관이 생겼습니다. 회사 일이 뜻대로 안 되면 집에 와서 가족들과 말을 하지 않아요. 방에 혼자 들어가 저만의 시간을 보냅니다. 아내든, 아이들이든 그 시간을 방해하면 화를 참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안 되는데, 가족들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던진 적이 있어요. 
 
요즘 회사가 힘들어서 혼자 감당하기 힘들어요. 가족에게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워낙 예민해진 상태니까, 감정을 다스리기 어렵습니다. 당분간만 가족이 이해해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제 이런 모습이 오래가지는 않을 거니까 조금만 배려해주면 좋겠어요.”
 
그는 사십 대 초반, 결혼 10년 차, 열두 살, 여덟 살 두 아들의 아버지이다. 결혼하고 두 아들이 태어나자 지금보다 더 많은 수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 초기 힘들고 어려운 일도 있었지만, 잘 이겨냈다. 
 
사업 시작 후 5년 정도 지나자 업계에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매출이 두 배 세 배 늘면서, 더 많은 직원을 채용하고, 사업 규모를 키웠다. 사업 규모가 커지자 고민도 그만큼 깊어졌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었지만, 현재 상황은 자신이 원하는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과연 사업을 지속해야 할 이유가 있는지 의문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앞으로 밀고 가야 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일에 대한 만족이 사라지자 우울한 기분으로 하루하루 살았다. 어두운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는 이해받기 원했다. 가족은 받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희망사항이었다. 아내는 남편 곁에서 점점 지쳐갔다. 처음에는 남편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했지만, 그마저 그만뒀다. 이제 남편이 집에 들어와 안방 문을 닫으면, 아내와 아이들은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었다. 남편, 아빠가 없어도 전혀 지장 받지 않는 가정이 되어갔다. 남편은 불안했다. 
 
아내가 말했다. 
 
“남편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남편이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면 마음 아프죠. 그렇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는 없다고 생각해요. 더 이상 남편 비위를 맞추는데 지쳤어요. 아이들이 없었다면, 남편을 더 배려해줄 수 있었겠죠. 그렇지만, 아이들이 있잖아요. 아빠 눈치만 보면서 살얼음 위를 걷게 할 수는 없어요. 
 
자기 감정은 자기가 책임져야 하잖아요. 우린 둘 다 성인이에요. 힘들고 어려운 일을 각자 극복할 수 있어야죠. 남편 감정을 대신 책임져 줄 수는 없어요. 우리가 부부인 것은 맞지만, 각자의 몫이 있는 거죠. 남편이 스스로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지 않는 한 아무도 남편의 비위를 맞춰줄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문 닫고 들어가 있는 남편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면 할수록, 제 자존감이 낮아졌어요. 비참하다는 생각까지 했죠. 제가 노력하면 남편이 기분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뒤늦게 깨달았죠.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을. 남편도 알거예요. 남편은 혼자가 아니에요. 책에서 보니까 남자는 자신 만의 동굴이 있다면서요. 동굴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남편이 힘들어하는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녀 역시 마음이 괴로웠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 말을 걸어보기도 하고, 아이들을 시켜서 아빠에게 말을 걸어보기도 했다. 남편은 반응하지 않았다. 귀찮다는 듯 방문을 잠궈버렸다. 노크해도 반응이 없었다. 아내는 그런 남편에게 더욱 지쳐갔다. 
 
남편이 퇴근한 후에 대화를 시도했다. 남편은 지금 말할 기분이 아니니까 나중에 말하자고 퉁명스럽게 한 마디 내뱉고는 방으로 들어가 씻고 침대에 누워 움직이지 않았다. 남편이 차갑게 말할 때마다 그녀는 상처를 입었다. 마음 한 편으로 남편을 이해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남편이 싫어졌다. 
 
남편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에서 성장했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무리하게 사업을 시작했다. 친척, 친구, 주변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서 사업을 시작했지만, 일 년 만에 망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구박하기 시작했다. 사람 취급 하지 않았다. 인격적으로 무시했다. 
 
돈을 빌려준 사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집으로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 어머니가 그 사람들을 상대했다. 조금만 시간을 주면 갚겠다고 설득했다. 소용없었다. 어머니를 밀쳐서 어머니가 다치기도 했다.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오면 아버지는 뒷문으로 도망쳤다. 
 
술에 잔뜩 취해 길에 쓰러진 아버지를 누군가 발견해 연락하면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서 업고 온 날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항상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간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빚을 청산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 빚을 고스란히 떠안고 조금씩 갚아나갔다. 
 
어머니의 팽팽했던 피부가 주글주글 주름질 때쯤, 모든 빚을 갚았다. 아버지가 남긴 빚이 어머니의 젊음을 빼앗았다. 단 한 번이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 그 한 번의 아버지 사업 실패가 그의 어린 시절을 어둠으로 몰아넣었다. 그가 사업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반대했다. 아버지 망하는 거 보고 정신을 못 차렸다고. 피는 못 속인다고. 
 
아내 역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 아버지는 예민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감정 기복이 심했다. 어머니는 아버지 성격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일생 동안 그랬다. 아버지는 항상 갑이었고, 어머니는 을이었다. 
 
아버지 독재는 그녀가 결혼해 독립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노예였다. 그녀가 어머니를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들어온 날은 아버지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것이라고, 아버지가 주말에 낮잠을 자고 있으면, 아버지가 피곤해서 그런 것이라고 아버지를 감쌌다. 어머니는 아버지 위주로 생각하고 말했다. 
 
그녀는 어머니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이 아버지를 응석받이로 만들었다고 인식했다.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모든 상황이 흘러간 것이 결국 아버지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생활비만 가져다주고 아버지, 남편으로써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태도가 싫었다. 아버지와 어긋난 관계는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조금 시간이 필요해.”
그가 말했다.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지.” 
그녀가 말했다. 
 
“우리 부부 아닌가? 남처럼 말하네.” 
“부부니까 이렇게 말하지.”
“사업 힘들어지니까, 남편이 남편같이 안보이지?” 
“아니, 나는 그런 말 한 번도 한 적 없는데.”
“말 안한다고 내가 모를 것 같아?”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한 것 같은데.” 
“말만 아니라고 하지. 사업 어려워진 다음부터 당신이 날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어.”
“아니라고 했잖아.” 
“갑자기 차갑게 대하는데 그걸 못 느낄 사람은 없지.” 
“내가 잘해줘도 소용없잖아.”
“아니, 사업 때문에 힘들다고 말한 그 순간부터, 당신이 날 무시하기 시작했다고.” 
“또, 또, 또 시작이야! 아니라고! 억지로 끼워 맞추지 말라고.”
 
“사업이 힘들어졌다고 말한 그 순간부터 절 대하는 태도가 싹 달라졌죠. ‘아, 이 여자는 내가 사업 실패하면 날 버리겠구나’ 생각하고 있어요. 솔직히 제가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아세요. 아이들 크면 이혼하려고 해요. 이 사람은 제가 필요한 게 아니라, 제가 벌어다주는 돈이 필요한 거예요.”
 
그가 말했다.  
 
“매번 이런 식이에요. 아니라고 말해도, 자기 세계에 빠져서 똑같은 말만 되풀이한다니까요. 차라리 방문을 닫고 있는 게 서로에게 편한 것 같아요. 이상한 사람이요, 정말.” 
 
그녀가 말했다.    
 
***
 
그 누구도 어린 시절 상처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과거 지향적인 사람이 되라는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그런 말 아니다. 과거를 소중히 다루어줬으면 하는 부탁이다. 과거나 현재나 자신은 항상 자기 자신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라는 존재와 함께 살아간다. 
 
“내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혼자일 때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보고 싶은 대로 보면 되니까. 그 또한 개성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결혼해서 배우자와 함께 살아가게 되면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눈앞에 배우자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로 부부의 관계가 정의되기 때문이다. 
 
배우자를 바라보는 관점은 주로 부모에게서 학습된다. 어린 시절 부모가 서로를 바라보는 관점이 배우자를 바라보는 관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과거일 뿐이다. 내 부모는 나와 상관이 없다”라고 단정 짓는다면 인생을 쉽게 생각하는 것이다. 과거를 외면하는 사람에게 성장은 없다. 
 
남편은 불안감을 숨기지 못한다. 사업이 망하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가족에게 버림받는 것이다. 사업에는 언제나 리스크가 따른다. 롤러코스터를 타듯 사업은 오르락내리락 한다. 남편 사업이 잠시 자금난으로 어려워진 것은 맞지만, 결과적으로 사업은 성장하고 있다. 
 
사업이 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울했다. 그가 느끼는 우울한 감정은 사업 그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내면 깊숙한 곳에 시작되는 것이다. 사업이 그의 내면에 만족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해야 한다. 그가 사업을 시작한 이유는 가족 때문이었다. 행복하고 풍족한 삶을 선물하고 싶었다. 
 
순조로운 인생에 먹구름이 드리운 것은 사업이 잠시 흔들리기 시작할 그 시점이었다. 사업이 어려워진 순간부터 아내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아내를 바라보는 관점이 왜곡되어 있다. 아내가 아니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그는 아내의 말을 듣지 못한다. 
 
어린 시절 상처가 그의 눈과 귀를 가려버렸다. 아버지의 무리한 사업, 부도, 가난, 재기 실패, 어머니의 남편 구박, 어머니의 희생. 생생하게 떠오르는 아픈 기억이 그를 괴롭힌다. 그의 내면 어딘가에 곪아터진 상처가 썩어들어가고 있다. 도려내지 않으면, 가정이 깨질 것이다. 
 
남편이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이유는 아내의 배타적인 태도에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내가 배타적인 태도를 취했는가, 취하지 않았는가?” 형사처럼 조사해서 진실을 파헤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황과 상관없이 남편에게는 왜곡된 진실이 확인된 진실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왜곡된 인식을 바로 잡고 진실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고무보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어머니에게 구박받았던 아버지와 현재의 자신을 분리하는 것. 변화의 첫 시작이다. 
 
방에 갇힌 사람은 남편 자신이 아니라, 남편 안에 드리운 아버지 그림자이다. 그는 혼란스럽다. 그림자 주인이 자신인지, 아버지인지 구분할 수 없다. 아내의 말 한 마디, 작은 표정 하나가 아버지 그림자와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림자의 주인은 실제로 자신이 아니다. 그림자를 지워내는 방법은 단 하나, 정수리 위에서 찬란하게 비추는 빛이다. 비스듬히 비친 빛은 그림자를 만든다. 관점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정수리에서 위에서 직각으로 비추는 빛은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정면에서 올바른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가 추구하는 목적이 그를 병들게 할지 모른다. 결핍으로 시작된 이상적인 목표, 행복에 대한 막연한 생각이 그를 실패하게 만든다. 남편이 말하는 행복은 지나치게 추상적이다. 아버지, 남편 이미지에 대한 부재는 그에게 허구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게 된다. 완벽한 남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높은 기준을 가진 사람은, 배우자가 던진 사소한 말 한 마디에 자존감이 무너질 수 있다. 상식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업은 어려워질 수 있다. 남편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내 역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행복할 수 없고, 언제나 불행할 수 없는 것이다. 남편이 행복하면, 아내도 행복해진다. 남편이 불행하면 아내도 불행해진다. 어쩌면 사업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아내 역시 아버지에 대한 상처 때문에 남편을 건강하게 바라보지 못한다. 남편에게 거절감을 느끼는 강도가 세다. 남편이 힘들고 어려움을 느낄 때, 지지해주고 격려해줄 수 있는 여유가 아내에게 없다. 아내가 말한 대로, 남편이 우울감을 느끼는 것은 아내 책임이 아니다. 그 감정을 처리해야 할 사람은 남편 자신뿐이다. 감정을 대신 책임지려고 하면 오히려 부작용이 심해진다. 
 
그러나 아내가 가정 안에서 격려와 지지의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은 중요하다. 그에 대한 책임은 아내에게 있다. 남편이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는 순간에도 인정받는다는 느낌이 있어야 한다. 아내가 남편을 인정해주기보다는 방치하고 있지 않은가 묻게 된다. 아내는 남편의 부정적인 감정이 괴롭기 때문에 그 감정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내가 어떻게 하면, 남편의 감정을 바꿔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고 문제에 접근한다면  금방 상처받을 것이다. 기다려주는데 익숙해져야 한다. 기다리는 과정에서 아내의 진정한 실력이 발휘되는 것이다. 편안하게 기다려주는 연습을 해야 한다. 
 
아내여, 어디서 들었다고 하지 않았나. 남자가 동굴에 스스로를 가둔다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혼자 있고 싶어 동굴로 들어가지만, 바깥 상황이 궁금한 것이 남자이다. 자신이 사라져 버린 동굴 밖 상황이 궁금한 것이다. 자기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 두렵기도 하다. 그래서 남자는 동굴 안에서 밖을 보고 앉는다. 여자는 이 사실을 모른다. 
 
남자는 동굴 안에서 오래 못 산다. 며칠 내로, 밖으로 나온다. 자신이 지켜보고 있었던 동굴 밖 상황으로 돌아온다. 자신이 필요 없다 생각되면, 그는 목적을 상실한 채로 현실에 순응하며 산다. 자신이 사라져도 전혀 지장이 없는 세계로 돌아오는 남자에게 어떤 희망이 남아있을까? 그러나 자신이 필요했다고 생각되면 당당하게 산다. 그것이 착각이라도 상관없다. 의욕적으로 산다. 동굴 밖 상황에 대한 남자의 관심은 참으로 미묘한 것이다. 
 
남편이 혼자만의 생각에서 벗어나기를 기대한다. 아내가 지치지 않기를 바란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다. 두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세상에 도깨비 방망이 따위는 없으니까.

실패한 상담자

“내 이야기를 들으면 상처받으실 수도 있어요. 사람들이 내게 그랬거든요. 네 이야기를 들으면, 나까지 이상해지는 것 같다고.” 
 
주연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녀가 처음 내뱉은 말의 의미를 굳이 묻지 않았다. 
 
주연은 한참을 기다리다, 다시 말했다. 
 
“괜찮으시겠어요? 내 말을 들으면, 목사님도 상처받을 수 있어요.”
 
나는 말했다.  
 
“나는 이미 상처받았어요. 흉터 하나 더 생긴다고 무슨 일 있겠어요. 제 걱정 마시고, 편안하게 이야기하세요.” 
 
주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아마 혼자 계실 때 알게 되실 거예요. 가끔 저는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게 보여요. 목사님도 저와 대화를 시작하시면,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영향을 받으실 거예요.” 
 
그 순간 내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얼굴 근육이 마비가 된 듯했다. 표정 관리를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섬뜩했다. 
 
주연은 알 수 없는 미소를 띠어 보이며, 내게 동의를 구했다. 
 
“정말로 괜찮으시겠어요?”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 걱정은 마세요. 편하게 이야기하시면 돼요.” 
 
주연은 차분한 말투로 물었다. 
 
“목사님은 귀신을 본 적 있으세요?” 
 
주연은 내가 대답할 기회를 주지 않고 혼잣말로 속삭였다.   
 
“나는 귀신을 본 적 있어요.” 
 

 
새벽 예배를 마치고, 주연은 싱글벙글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을 챙겨 학교에 보내고, 집안을 대충 치우고 교회에 갈 작정이었다. 시계가 9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교회 성경공부 모임에 늦고 싶지 않았다. 
 
주연은 부리나케 화장실에 들어갔다. 샤워기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몸을 적시고, 손바닥에 샴푸를 담았다.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감는데, 주연의 등골이 오싹했다. 
 
누군가 위에서 그녀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주연은 비명을 질렀다. 
 
젖은 머리카락에 샴푸 거품이 뒤엉킨 채 화장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거실에서 신문을 보고 있던 남편에게 달려가 매달렸다. 
 
“여보, 화장실에 뭔가 있어. 시커먼 게 나를 보고 있었다고.” 
 
주연의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남편의 손에 들린 신문을 적셨다. 주연이 말하는 동안에도, 거품 낀 물방울이 남편의 옷과 얼굴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남편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또 시작이네. 당신이 애야? 화장실에 뭐가 있다고 그래. 제발 좀 그만해.” 
 
“여보, 그게 아니고, 정말 뭐가 있다니까. 당신이 한 번 가봐. 응? 제발 부탁이야.” 
 
남편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문을 열었다. 주연은 거실 귀퉁이에 앉아 손과 발을 벌벌 떨었다. 남편은 의도적으로 화장실 불을 몇 번이나 껐다 켜면서, 주연을 안심시켰다. 
 
“아무것도 없지?” 
 
남편의 물음에, 주연은 고개를 끄떡였다. 
 
남편은 주연에게 다가와 진지하게 말했다. 
 
“여보, 당신 정말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정신과 치료를 받아보면 어때?” 
 
주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난번에도 가봤잖아. 그냥 약만 주고, 별다른 도움도 못 받잖아. 나 약 먹기 싫어. 약 기운에 하루 종일 누워서 지낸단 말이야.” 
 
“아니, 그럼 뭐 어떻게 하려고 그래. 당신, 애들은 생각 안 해?” 
 
“내가 애들 생각 안 한 게 뭐 있어?” 
 
“당신이 지금 정상이야? 애 둘만 싸질러 낳고, 엄마 구실을 못하잖아.” 
 
“뭐? 당신 지금 말 다 했어?” 
 
“내가 무슨 틀린 말 했어? 당신 올해 들어 집에서 몇 번이나 잤어. 하루가 멀다 하고 교회 가잖아. 왜 멀쩡한 집을 놔두고 교회에서 잠을 자? 애들 뒤치다꺼리는 누가 하라고?”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래? 나도 지금 미칠 것 같아.” 
 
“그러니까, 정신과 치료를 꾸준히 받으라고.”
 
“내가 그랬잖아. 약 먹기 싫다고. 나 기도해서 고칠 거야.”  
 
남편은 어이가 없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하자. 더 말하면 나 미칠 것 같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남편은 차가운 말을 내뱉고, 베란다로 나갔다.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주연은 남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주연은 남편에게 서운하면서도,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 주연을 괴롭히는 문제가 담배 연기처럼 허공에서 사라지기를 바랐다. 
 
서러운 감정이 주연을 덮쳤다. 소파에 엎드려 하염없이 울었다. 수건으로 둘둘만 머리카락 끝자락에서 거품이 뒤섞인 물방울이 거실 바닥에 뚝뚝 떨어져 내렸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이었다. 
 
남편은 24시간 하루 근무, 24시간 하루 휴식의 일정을 반복했다. 
 
남편이 집에 없는 날이면, 주연은 혼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문을 이중으로 잠가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주연은 두려움을 이길 수 없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엄마 집으로 도망쳤다. 
 
주연은 엄마와 같은 방에서 함께 자기를 원했다. 
 
“오늘 외할머니 오셨으니까 불편하더라도 외할머니하고 같이 자. 엄마가 오늘은 혼자 자고 싶어.” 
 
주연은 가만히 고개를 끄떡였다. 
 
밤새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주연은 벽에 기대 우두커니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인기척에 놀라 잠에서 깬 할머니가 말했다. 
 
“으미, 깜짝이야. 너 시방 뭐 하는 거여. 누워야 잠이 오제, 어찌 앉아서 잠을 잔다야. 빨랑 누워, 이것아.” 
 
“신경 쓰지 말고 자, 할머니. 나는 잠이 안 와. 밤마다 이래.” 
 
“별 희한한 일 다 보겠구먼. 잠을 안 자면 사람이 어떻게 산데….” 
 
할머니는 밤새 주연과 대화를 나누었다. 동이 틀 무렵 할머니는 피곤했는지, 코를 골며 잠에 들었다. 
 
주연은 주섬주섬 이불을 정리하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남편이 오기 전에 집에 도착해, 아침 식사를 준비할 작정이었다. 
 
할머니는 엄마에게 주연의 상태를 물었다. 
 
“걔가 언제부터 그러데? 밤새 잠을 못 자면 사람이 어떻게 산데?” 
 
엄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다 큰 애가 뭐가 무섭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 혼자 잠을 못 자. 안 그러던 애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그래.” 
 
할머니는 진지하게 말했다. 
 
“애가 눈빛이 영 이상해. 점을 한 번 보러 가야 쓰것어. 애 눈을 보는데 섬뜩하더라니까.”
 
할머니는 주연을 챙겨,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갔다. 
 
무당은 주연의 눈빛을 살피더니, 뭐에 씌인 것 같다며 크게 굿을 한 판 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연은 내심 걱정이었다. 굿을 하는데, 당장 수백만 원이 필요했다. 주연은 망설였다. 남편에게 굿을 하자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주연은 쓸데없는 짓이라며,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터벅터벅 집으로 향하는 길에, 도로 옆 교회의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십자가를 올려다보는 순간,  햇빛으로 눈이 부셨다. 인상을 찌푸렸지만, 주연의 마음은 이상하게 편했다.
 
‘굿은 무슨 굿이야. 차라리 교회를 나가보자.’ 
 

 
“사모님 죄송한데, 어려운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사모는 멈칫하며 주연의 말을 기다렸다. 
 
“사실 제가 요즘 잠을 잘 못 자요. 혼자 방에 누우면, 천장에서 마주하는 얼굴이 있어요. 눈을 감으면, 천장에서 그 얼굴 뚝 떨어져 나를 덮칠 것 같거든요. 너무 무서워요.” 
 
주연은 슬픈 감정에 사로잡혔다. 눈물이 얼굴을 뒤덮었다. 
 
“마귀가 역사하네요. 기도하면 나아질 거예요.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죠?” 
 
사모가 물었다. 
 
“교회에서 잘 수 있게 해주시겠어요? 교회에 오면, 마음 편하게 잠을 잘 수 있거든요. 불편하게 하지는 않을 게요.” 
 
사모는 그게 뭐 어려운 일이겠냐며, 주연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 
 
“그럼요, 언제든 오셔서 주무세요. 저랑 같이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고 하면 되죠. 저도 가끔 교회에서 자고 그래요.”
 
주연은 사모에게 거듭 감사하다 말했다. 사모는 주연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주연은 밤낮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집과 거리, 어느 곳 하나 예외가 없었다. 
 
두려움이 엄습하지 않는 유일한 장소는 교회뿐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아무도 없는 교회에 혼자 가는 건 무섭지 않으세요?” 
 
“아, 무섭지 않아요. 어두운 예배실에 들어서면 잠깐 움찔은 해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편해져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교회에 가면, 예수님이 날 지켜주시는 것 같아요. 건물 위층에 사모님도 계시고요. 그 위에서 사시거든요.” 
 
“두려움을 없애주는 사람이 예수님인가요, 사모님인가요?” 
 
“물론, 예수님이죠. 하지만, 사모님도 필요해요. 솔직히 말하면, 사모님이 성품이 따뜻하신 분은 아니에요. 그래도, 당분간은 사모님이 필요해요.” 
 
어려운 개척교회였다. 사모는 주연의 부탁으로 예배실 옆에 마련된 작은 공간에서 주연과 함께 잤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연이 교회에서 잠을 자도록 허락해 준 것으로만 알았던 것이다. 
 
사모는 밤마다 사택에서 내려와 주연과 함께 지냈다. 사모 입장에서도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모의 불편한 감정이 주연에게도 전해졌다. 그러나, 주연은 불편한 감정을 감수하고라도 사모 곁에 있고 싶었다.
 
주연은 물에 빠진 심정이었다. 구명조끼를 던져주는 사람의 표정을 살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관계의 유통기한이 생각보다 짧다는 것을 주연은 분명히 알았다. 사모는 주연이 의존한 세 번째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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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과 사모가 함께 성경을 읽는 자리에, 목사가 들어와 한 마디를 꺼냈다. 
 
“자꾸 대출이자 때문에 은행에서 전화가 오네.”
 
사모는 주연을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우리 교회 팔리면, 이제 주연 자매는 어떻게 해? 기도 많이 해야겠어. 우리야 어디 가서 또 목회하면 되지만, 주연 자매는 우리 없으면 어떻게 할 거야?” 
 
주연은 당황했다.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어색한 웃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교회가 어려울 때마다, 주연이 큰마음을 먹고 헌금을 한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감사한 마음에 헌금을 한 것을 두고, 사모가 그런 태도를 보인 것에 주연은 실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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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나빴어요. 무시를 당한 것 같았거든요. 마음 같아서는 ‘나를 뭘로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라고 대꾸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죠. 
 
자존심이 상해서, 두 번 다시는 사모님을 의지하지 않고 싶다고 결심했어요.”
 

 
사모가 내뱉은 말이 떠오를 때마다, 주연은 짜증 섞인 혼잣말을 내뱉었다. 
 
“내가 뭐, 지 아니면 안 될 줄 알고?”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주연은 마음이 급해졌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를 정도로 불안했다. 
 
밤새도록 혼자 있을 것을 생각하니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괴로웠다. 
 
저녁을 대충 차려놓고 남편을 기다렸다. 학원에서 아이들이 먼저 돌아오고, 남편이 뒤늦게 들어왔다. 
 
남편이 들어오자마자, 주연은 바통을 넘겨주듯 말했다. 
 
“여보, 미안해. 나 오늘 상태가 너무 안 좋아. 애들하고 저녁 먹고 뒷정리 좀 부탁해.” 
 
남편은 한심한 듯 말했다.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 그 사모가 뭐라고 그렇게 매달려. 그러다, 또 실망하고 뭐하고 비참해진다며? 제발 작작 좀 해.” 
 
주연은 남편의 말에 대꾸할  여유조차 없었다. 집에서 교회까지 쉬지 않고 뛰었다. 
 
교회에 도착한 주연은 예배실 문을 열었다. 예배실은 조용했다. 어두운 예배실 안에서 주연은 안정을 되찾았다. 
 
불안에 떨면서 감정 소모가 심한 탓인지, 주연은 엎드린 채로 기도하다 잠에 들었다.
 
주연은 팔이 잘려나가는 꿈을 꾸었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꿈에서 본 것처럼 팔에 감각이 없었다. 팔을 베고 잔 탓에 피가 통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주위를 살폈다. 예배실 뒤편에 작은 할로겐 조명이 켜진 채였다. 
 
사모가 들어온 것이다. 
 
주연은 교회 뒤편 마련된 작은방을 살폈다. 사모가 피곤했는지 미리 이불을 펴고 잠든 후였다. 
 
주연은 잠시 멈칫했다. 
 
‘우리 없으면, 이제 주연 자매 어떻게 해?’ 
 
며칠 전 사모가 내뱉은 말이 생각났다. 
 
그러나, 차마 집으로 돌아갈 용기는 없었다. 주연은 가만히 들어가 사모 옆자리에 이불을 펴고 누웠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서글픈 감정이 밀려왔다. 주연은 사모 옆에 자리를 폈지만, 사모를 등지고 뒤돌아 누워 하염없이 울었다. 
 

 
“부모님은 내가 어릴 때, 자주 심부름을 시켰어요. 밤에 슈퍼를 가려면 대나무숲을 지나야 했거든요. 가로등 하나 없는 길을 지나가는데 너무 무서웠어요. 
 
항상 누가 쫓아오는 느낌이 들어서, 죽도록 뛰었거든요. 가끔 엄마가 사 오라고 했던 물건을 떨어뜨리고 그냥 집으로 뛰어온 적이 있어요. 
 
그러면, 엄마가 엄청나게 화를 내면서, 다시 가서 가져오라고 그러죠. 저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만큼 무서웠거든요.” 
 

 
나는 주연의 공포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녀가 살아온 인생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주연은 적극적이었다. 공포심을 물리치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내게 전해졌다. 그녀는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기억들을 순서 없이 말했다. 
 

 
“증조할머니가 무당이었어요. 할머니가 굿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죠. 어머니는 할머니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 같아요. 자녀들을 사랑할 줄 모르는 분이셨어요.” 
 
주연은 그녀의 어머니가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상한 미신 같은 것을 잘 믿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그녀가 20살 남짓 되던 해에, 고기를 먹다가 급하게 체한 적이 있었다. 소화제를 먹어도 소용이 없어, 시름시름 앓았다. 
 
주연의 어머니는 낯선 남자에게 주연을 데려갔다. 
 
낯선 남자 앞에서, 주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가 모든 상황을 설명했다. 
 
남자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옆에 마련된 세면기에 손을 씻었다. 
 
남자는 주연에게 다가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입을 벌렸다. 주연은 당황스러웠다. 남자는 사정없이 솥뚜껑 만한 손을 주연의 입속에 밀어 넣었다. 
 
남자의 억센 손은 목구멍을 타고 가슴 안으로 들어갔다. 주연은 외마디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헛구역질이 나서 웩웩 소리를 지르는 찰나에, 남자는 주연의 목구멍에서 손을 빼냈다. 
 
남자의 손은 주연의 타액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남자가 손을 펴자 그 안에는 작은 고기 조각이 들려 있었다. 
 
남자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다시 세면기로 가서 손을 씻었다. 
 
어머니는 남자에게 돈을 지불하고 돌아서며, 주연에게 말했다. 
 
“속이 뻥 뚫려서 후련하지. 집에 가자.”
 

 
나는 충격에 빠졌다.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내 귀가 의심스러웠다. 
 
주연이 말하는 동안, 무심결에 그 장면을 상상했는데, 그 자체로 역겨웠다. 헛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나는 내담자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버렸다. 
 
“사실인가요?” 
 
주연은 내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믿기 힘드실 텐데, 정말이에요. 가끔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은 진짜였어요. 제가 고기를 먹으면 자주 체하거든요. 그 후로도 그 사람을 몇 번 찾아갔어요.” 
 
주연의 말을 억지로 믿었다. 그러나, 내 진심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듯했다. 나는 그날 밤 악몽을 꾸었고, 섬뜩한 남자에게 내 입을 벌려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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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의 근원을 찾으려는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사방이 막혀 있는 듯 답답했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나는 주연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들이 무서웠다.  
 
첫 세션에서 주연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사람들이 내게 그랬거든요. 너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까지 이상해지는 것 같다고.”
 
주연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사람들 역시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내 감정을 주연에게 효과적으로 설명해야 했다. 
 
“당신 이야기가 너무 기괴하고 무섭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방식은 옳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첫 발을 내디뎠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내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생각나요. 
 
할머니가 사랑방에 손주들을 모아놓고, 호롱 불을 하나 켜셨거든요. 호롱 불이 불규칙적으로 흔들리니까, 그림자가 춤을 추는 것 같더라고요. 
 
할머니는 군밤을 까주시면서, 할머니가 어려서 시골에서 겪었던 기괴하고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할머니가 어린 시절에 살았던 시골 마을에 들어가려면 고개를 하나 넘어야 했데요. 자정에 고개를 넘을 때는, 절대로 혼자가면 안된다고 했어요. 
 
자정이 지나면, 푸른 불빛이 사람을 홀려서 깊은 숲속으로 끌어들인다고 했어요.
 
마을 어른 여럿이 푸른 불빛 때문에 죽어나갔다고 했죠. 
 
긴장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 할머니는 “워!”라고 소리를 질렀죠. 손주들 중에 내가 제일 컸는데, 나마저도 울음을 터뜨릴 뻔했어요. 
 
나는 그날 밤, 이불에 오줌을 쌌어요. 잠에서 깼지만, 혼자 화장실에 갈 용기가 없었거든요.”
 
 주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묻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처음부터 두려운 감정을 가진 것 같아요.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랐지만,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아요. 
 
당신은 직접 말로 표현한 적 없지만, 지속적으로 내게 똑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어요. 
 
‘자, 잘 들어보세요, 지금부터 내가 무서운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우리는 무서움의 근원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고, 당신은 계속 내게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어요. 
 
내가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당신과 동일한 두려움을 느낄 수 있어야 당신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에요. 당신을 두려움의 소용돌이에서 구해주려면, 나는 소용돌이 밖에 서 있어야 해요. 그래야, 당신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으니까요.
 
나는 이 지점에서 실패했어요. 이미 나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어요. 당신의 이야기가 섬뜩하고 무서웠거든요. 
 
당신 말대로 나는 당신의 이야기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어요. 
 
내 일상에서 악몽을 몇 차례 꾼 적이 있거든요. 악몽은 내게 드문 일이에요. 당신과의 상담 전후에 있었던 일이에요. 
 
당신이 나를 완벽히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조용히 상담을 받던 당신이 일어서는 거죠. 그리고, 상담실 안에 시커먼 것이 있다고 말하며, 혼비백산해서 상담실 밖으로 도망을 쳐버리면 돼요. 그러면, 나는 완전히 무너질 거예요.
 
내게는 그것이, 호롱불 아래서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던 할머니의 “워!”라는 메시지겠죠.” 
 
주연은 가만히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내려놓은 듯 안정적인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누군가 한 사람은 내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주기를 바랐어요. 
 
사람들은 다 똑같아요. 내가 무섭다고 말하면, 다들 무시해요. 다 큰 어른이 무섭다고 말하니, 한심하다고 생각하죠.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애써 무섭지 않은 척 해요. 두려운 감정을 부정하는 거죠. 소리 없이 내 곁을 떠나요.
 
이해해요. 사람들이 내게 거리를 두면, 내가 느끼는 두려움에서 멀어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나를 데리고 살아야 해요. 내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는 사람들은 내 곁에 남아 있지 않아요.  
 
내 이야기를 듣고, 솔직히 무섭다고 말해준 사람이, 목사님이 처음이에요.”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울기 시작했다. 작은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정말로, 무서웠어요.” 
 
그녀는 울음소리는 점점 커지고 격해졌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를 내며 우는 동안, 나는 기다렸다. 간간이 손으로 내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가면서 조용히 창밖을 응시했다. 
 

 
그녀의 감정이 차분해지고, 다시 대화가 가능해진 상황에서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주연의 차분했던 감정이 다시 울컥했다. 눈물이 쏟아져 내릴까 걱정스러운 듯, 손바닥을 가슴에 올려놓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주연은 차분히 말했다. 
 
“제 마음을 공감해주신 것 같아요. 제가 확대해석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주신 것 같아요. 그 순간,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들어왔어요.” 
 
주연의 말을 한참 동안 듣고 나서, 내 생각을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당신과의 상담에서 실패했어요. 나는 당신 안의 두려움의 근원을 찾아내고 싶었어요. 두려움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싶었고요. 
 
두려움의 소용돌이 빠진 당신을 구해주려다, 나까지 소용돌이에 빠져 버린 꼴이죠. 마음이 급했나 봐요. 유능한 상담자라면, 당신을 제대로 도와줄 수 있었을 거예요. 당신에게 미안해요, 정말로.”
 
주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목사님은 실패하지 않았어요. 소용돌이라고 말씀하시니까, 언뜻 떠오른 생각이 있어요. 
 
솔직히 그동안은 극단적인 생각을 했거든요. 나 같은 인생 살아서 뭐해. 죽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누군가 내 마음을 알아줬다는 사실에 문득 호기심이 생겼어요.
 
예수님은 날 어떻게 생각하실까? 
 
그동안 나는 감히 예수님 앞에 설 수 없었거든요. 나를 비난하시는 것 같아서요. 
 
제가 무서운 것을 본다는 것 자체가 믿음이 없어서 그런 거잖아요. 
 
예수님 앞에 떳떳이 설 수가 없었어요. 밤마다 교회에서 회개 기도를 했어요. 이런 나를 용서해달라고. 
 
목사님께 조심스럽게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예수님도 나를 비난하지 않으시겠죠? 얼마나 무섭겠냐고 공감해주시겠죠? 
 
나를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원해서 이런 게 아니거든요.” 
 
주연은 또다시 얼굴을 감싸 쥐고 울기 시작했다. 
 
나도 함께 울었다. 
 
감정의 소용돌이에 함께 빨려 들어가면서,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불렀다.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셔서 우리 둘을 살려주시기를 바랐다. 
 

 
급류에 영향받지 않는 존재는 오직 예수님뿐이다. 
 
예수님은 그녀를 찾아가셨고, 그녀를 건져주셨다. 나는 그다음으로 건져졌고, 간신히 내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가 상담실 안에서 머무는 동안, 나는 내가 할 일을 했다. 
 
예수님과의 왜곡된 관계를 복음적 관계로 전환하기 위한 몇 가지 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사모를 극단적으로 의존하는 관계를 정리하고, 남편에게 돌아가 온전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방향을 제시했다. 
 
장기적인 정신과 치료 역시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하며, 시간과 비용이 허락하는 한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정신과에서 처방해준 약을 먹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약을 먹는 것이 신앙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며, 적절한 범위 안에서 유익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그녀에게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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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떠나보낸 지금에도, 나는 여전히 그녀가 느끼는 두려움의 출처를 모른다. 
 
그녀는 여전히 두려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까. 아니면, 조금이나마 평안을 누리고 있을까. 아니면, 견딜 수 없는 두려움으로 또 다른 사람을 찾아내서 매달리고 애원하고 있을까. 
 
평온한 일상에서 문득 그녀가 떠오르면, 죄책감을 느낀다. 
 
나 역시 그녀를 밀어낸 것은 아닌가. 
 
어쩌면, 그녀가 말한 대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를 버린 사람들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잔잔한 죄책감은 바람을 타고 거센 파도가 되어 내 가슴을 퍽퍽 치고 쓸어내렸다. 
 
나는 잠시 상담을 멈추고 나 자신을 돌봐야 했다. 
 
조용한 곳에 내 몸을 밀어 넣고,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죄책감을 떨쳐내고 싶었다. 
 
바쁜 일정 중에 시간을 내는 것이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옳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내 안의 죄책감처럼, 그녀 안의 두려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그녀 안의 두려움은, 내 안의 죄책감처럼 그리스도에게로 달려가는 강렬한 욕망이 될 것이다. 
 
두려움은 절대로 그녀의 인생을 집어삼킬 수 없을 것이다. 두려울수록 그리스도가 더욱 절실할 것이다. 
 
나는 물러났어도, 그리스도는 절대로 물러나지 않으실 것이다. 그녀 안의 그리스도가 그녀와 영원토록 함께하실 것이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Z는 결혼 13년 차 마흔 둘, 두 딸의 엄마이다. 그녀가 결혼할 때 걱정했던 것은 남편의 종교였다. 아내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지만 그는 특정 종교와 상관없는 가정에서 자랐다. 그녀의 부모는 남편에게 단 하나의 조건을 제시했다. 일요일은 무조건 교회에 가라는 것. 남편은 그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남편이 그저 교회만 나가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몸만 교회에 가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에게 예배, 설교, 교회 사람들과 관계는 안중에 없다. 설교 시간에 휴대폰으로 뉴스를 검색하거나 예배 후 식사할 맛집 찾기에 바쁘다. 
 
아내는 그의 행동이 민망해서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그러면  움찔 놀라며 민망한 듯이 아내를 쳐다본다. 곧 팔짱을 끼고 설교를 듣는가 싶더니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아내는 설교에 집중할 수가 없다. 예배가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이다. 
 
그녀는 화가 났지만 표현하지 않았다. 교회에 오기 싫어하는 남편에게 핑계거리를 주고 싶지 않았다. 주말이면 그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나, 이번 주에 교회 안 가.” 
 
아내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남편을 윽박질렀다. 그러면서도 남편의 비위를 맞추느라 애쓴다. 서로 불편한 시간을 보내다 토요일 저녁이 되면 아내는 그가 교회에 갈 것인지 묻고 싶지만 자존심 때문에 참는다. 
 
일요일 아침이 되자 남편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내는 두 딸을 챙겨 교회 갈 준비를 마쳤지만 그는 여전히 누워있다. 아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는다. 
 
“당신, 진짜 교회 안 갈 거야?” 
 
남편은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를 기다리다 예배에 늦을 것 같은 아내는 두 아이를 챙겨 현관을 문을 나선다. 
 
예배를 마치고 집에 들어오니 남편이 씻지도 않은 채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다. 한 마디 하고 싶지만 꾹 참는다. 아이들 앞에서 신앙 문제로 싸우고 싶지 않다. 말없이 점심을 차리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남편이 전화를 받는다. 친정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자네, 오늘 교회에 갔다 왔나?” 
 
남편은 넉살 좋게 몸이 좋지 않아 못 갔는데, 다음 주는 꼭 가겠다고 말한다. 그는 전화를 끊고 다시 소파에 앉아 TV를 본다. 아내는 점심 준비를 마치고 아이들을 부른다. 남편은 리모컨을 든 채 식탁에 앉는다. 아내와 두 아이가 손을 모으고 식사 기도를 할 때, 그는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린다. 
 
아내는 신앙 문제로 감정싸움 하는 것에 지쳤다. 주말이 되면 최대한 남편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남편이 친정엄마의 전화 때문이라도 교회에 나간다는 것이다.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요즘 설교를 들으면 마음이 편해지네.” 
 
아내는 놀랐지만, 태연하게 말했다. 
“다행이네.” 
‘이제 조금씩 달라지는구나….’
 
아내에게 기대가 생겼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길, 누군가 이중 주차를 한 것을 발견했다. 주자창이 작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내는 침착하게 차창으로 보이는 전화번호로 연락을 했다. 상대방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 시간이 지나자 남편 얼굴이 일그러졌다. 주차장을 나서면서 욕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있으니까 그만하라고 아내가 말하자 그가 고함쳤다.
 
“교회 다니면 뭐 해! 양심도 없는 사람들이. 이러니까 기독교가 욕을 먹는 거 아니야. 차를 이상하게 세워 놨으면 전화라도 받아야 할 것 아니야!”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것은 바라지 않아요. 남편이 제게 무관심해도, 아이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남편이 예수님을 믿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많은 것이 달라지겠죠. 주변 사람들이 ‘내 남편도 처음에는 그랬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기도해라.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라고 해요. 저는 그날만 기다려요. 처음보다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까요. 
 
두 아이만큼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애들로 기르고 싶어요. 저 혼자서 할 수 없잖아요. 아이들이 자라니 더 조급해지네요. 하나님께서 언제 그를 변화시켜 주실까요? 과연 그날이 오기나 할까요?” 
 
아내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내는 남편이 자신에게 무관심할수록 교회 일에 매진했다. 교회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올빼미 형 인간이었던 아내는 자신의 오랜 습관을 깨고, 새벽예배에 나가기 시작했다. 남편은 새벽에 아이들이 깨서 덩달아 잠을 설치니까 새벽예배만큼은 나가지 말라고 부탁했다. 
 
아내가 말했다. 
 
“당신이 나 안 돌봐주잖아. 이렇게라도 안 하면 나 못 살아.” 
 
남편은 포기한 듯 말한다. 
 
“알겠어. 알아서 해.” 
 
아내는 생각했다. 남편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지금의 자신을 이해해줄 것이라고. 
 
 
***
 
 
아내의 마음속에는 ‘만약…’이라는 가정법이 있다. ‘만약 내 남편이 예수님을 믿으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라는 가정법은 실제로 남편을 기독교 신앙에서 멀어지게 한다. 아내가 겪는 문제가 신앙적인 문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부부 사이 현실적인 문제다. 
 
남편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삶을 통째로 뜯어고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삶을 한꺼번에 바꿔야 하는 것이 편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내의 요구가 거셀수록 남편의 거부는 심해질 것이다. 
 
‘만약…’이라는 가정법은 “노력하지 않고 원하는 목표를 얻을 수 있다”라는 가설을 세운다. 현실적인 변화를 위한 노력을 뒤로 미루게 한다. 그래서 그 가정법만을 받아들이면 비현실적인 미래를 그리게 된다. 
 
세상에는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남편들이 많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부부 문제로 고통 받는 사람들 역시 셀 수 없이 많다. 예수님은 도깨비 방망이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분이 아니다. 변화를 위한 노력은 고스란히 우리 몫이다. 변화는 점진적, 지속적, 장기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만약…’이라는 가정법은 시작과 결론만 남긴 채 노력하는 과정은 생략한다. 
 
그녀의 경우, 남편을 위해 기독교 신앙을 심어주려는 노력에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그 방법을 바꿀 필요가 있다. 아내는 부부 사이에 기대하는 변화를 남편의 회심 이후로 미루고 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믿을 때까지 남편은 아내로부터 관계 개선을 위한 요청을 받지 않게 된다. 아내는 남편의 무관심, 남편이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의 부족, 가족 안에서의 남편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바로 지금’ 대화해야 한다.
 
‘남편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에…’라는 가정법은 버리는 것이 좋다. 저절로 되는 것은 없다. 그가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에도 부부가 지속적으로 해결해야 할 사안들이다. 기다리는 것은 답이 아니다. 지금 당장 용기를 내어 마주해야 하는 현실이다.  
 
아내는 혼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그녀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알고 계신다. 남편에게 예수님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은 그에 대한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다. 누군가에게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남편이 예수님을 믿든 믿지 않든 당신은 이미 하나님께 최고의 기쁨을 선물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말할 수 없이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그분은 머지않아 그녀의 남편을 찾아가실 것이다. 아내의 예상을 뛰어넘어 일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 이것이 그녀가 간직해야 할 희망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남편의 변화가 생각보다 더딜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마음속에 남편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아내를 교회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남편은 하나님과 대립하게 된다. 기독교 신앙은 남편의 존재 가치를 더욱 고귀하게 만든다. 그가 주는 위로와 사랑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보다 부족하다는 걸 안다 
 
그러나 아내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만큼 남편의 사랑도 필요하다. 그녀의 마음속에 남편을 위한 자리가 있어야 한다. 그가 들어와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그가 아니면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자리가 필요하다. 
 
그의 가치관을 자녀와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를 바란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남편의 가치관을 깎아내리지 말라. 가정 안에서 아버지를 존중하는 문화는 어머니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아버지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자녀들이 심판받아야 할 죄인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을 막아야 한다. 
 
단지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다. 남편이 자녀들에게 기독교 신앙과 전혀 상관없는 말을 할지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의 가치관을 존중해주기를 바란다. 
 
아내가 헛된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남편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그날,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를 끌어안을 것이다. 그날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포기하지 말라. 하나님은 아내에게 남편을 선물로 주셨다.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사랑받도록 만나게 하셨다. 
 
하나님은 남편을 사랑하신다. 예수님을 그토록 사랑하는 아내를 그에게 보내주신 것이 증거이다. 남편이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한두 마디 말로 변화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셨기에 아내를 남편에게 보내주신 것이다. 
 
같이 살며, 사랑하며, 부대끼며 
변하기를 바라시면서…. 

분명히 보았다

“야, 너 서울에서 전학 왔다며?” 
 
“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나는 대답했다. 
 
명식이 형은 마을의 전설이었다. 서울에서 이사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명식이 형의 클럽에 가입을 했다. 
 
명식이 형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명식이 형이 데리고 다니는 또래 역시 전부 초등학생이었다.
 
그렇다면, 명식이 형은 중학생이었을까? 고등학생이었을까? 아니다. 
 
어른이었다. 
 
흐릿한 기억을 추적해보건데, 적어도 이십 대 중후반이었을 것이다. 다 큰 어른이 동네 꼬마들 사이에서 골목대장을 하고 있으니, 중고등학교 형들도, 클럽에 소속된 아이들을 섣불리 건드릴 수가 없었다. 
 
한 번은 우리 동네 규칙을 아무것도 모르는 다른 동네 중학생이, 명식이 형이 돌봐주는 애 하나를 잘못 건드렸다 봉변을 당했다. 
 
명식이 형은 중학생에게 맞았다는 아이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다른 동네까지 직접 찾아갔다. 클럽 아이를 때리고 도망간, 중학생을 기어코 찾아내서 사정없이 패줬다. 부모가 달려 나와 욕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뜯어말려도 소용 없었다. 
 
말리는 부모를 밀쳐내고, 그 집 아들을 두들겨 팰 정도니 명식이 형이 나타났다고 하면, 동네 어른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명식이 형은 동네 꼬마들을 모아놓고 틈만 나면, 강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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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강해야 돼, 알아? 약하잖아? 그거 등신이야, 등신. 남자가 힘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야.” 
 
한심한 듯이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주먹을 쥐는 방법을 제대로 가르쳐 준다며,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자, 먼저 손바닥을 쭉 펴봐. 그리고, 손가락 네 개를 반으로 접어. 그다음, 손바닥 안의 살을 움켜쥔다고 생각하고, 주먹을 꽉 쥐는 거야. 그럼, 엄지손가락이 자연스럽게 딸려오거든. 주먹 안에 살이 조금 잡혀야 힘이 꽉 들어가는 거야. 그다음에는 이걸로, 그냥.”
 
명식이 형은 이론만으로는 안되겠다는 듯이 아이들을 비슷한 체형으로 둘씩 짝을 지었다.  
 
“야, 이제부터 내 말 잘 들어. 오늘부터 서바이벌이야. 이긴 놈만 살아남는다. 지는 놈은 이제부터 우리 클럽 아니야. 바로 탈락이다.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죽도록 싸워. 알겠지?” 
 
서로 눈치를 보고 서성거리니까, 명식이 형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미치겠네. 야, 공과 사를 구분 못해? 지금은 친구가 아니라, 적이라고. 미친 듯이 싸워라. 싸우는 척만 하면, 나한테 죽는다.” 
 
아이들의 반응은 대략 둘로 나뉘었다. 
 
“너 죽었어”,라고 기세등등하게 상대를 바라보는 아이들. 그리고, 잔뜩 주눅이 들어 겁을 먹고,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만 같은 아이들.
 
승부는 금세 갈렸다. 
 
명식이 형은 패배자들을 한 줄로 세웠다. 그리고, 말했다. 
 
“여기 이놈들은 패배자야. 우리 동네에 같이 살아도, 더 이상 우리 클럽은 아닌 거지. 야, 한 줄로 나와서 이 새끼들 신발에 침 뱉어.” 
 
나는 한 살 많은 형의 신발에 침을 뱉어야 했다. 뱉고 싶지 않았다. 그 형은 이미 울고 있었다. 그렇게, 비참한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엉거주춤 망설였다. 
 
명식이 형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뭔가 번쩍했고, 나는 잠깐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코밑으로 진한 쑥 냄새가 났다. 쑥을 빻아 둥그렇게 말아서 콧구멍에 쑤셔 박은 것이다. 그러면, 피가 멈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어린 마음에 서러워서 눈물을 흘렸다. 명식이 형은 그것마저 못마땅했는지, 내 볼을 두 손가락으로 세게 움켜쥐고 사정없이 흔들면서 말했다. 
 
“야, 울어? 남자 새끼가 우냐고? 죽고 싶지 않으면, 그만 울어라.” 
 
살아남은 아이들은 다음 날부터 싸움 기술을 배웠다. 애들끼리 마주 서서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학교 마치고 집에 오면 학원 가듯 명식이 형의 클럽으로 가야 했다. 그것이 하루 일과였다. 
 
#
 
싸움을 가르치는 시간을 제외하면, 명식이 형은 친구처럼 다정했다. 
 
“우리 삼촌이 비디오 가게 하거든. 언제든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구해다 줄게.”
 
명식이 형의 집에 놀러 가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수 십 개의 비디오테이프였다. 책상 위에 책 대신 비디오테이프가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제목은 다양했지만, 장르는 단순했다. 무술 영화 아니면 액션 영화였다. 
 
명식이 형의 집에서 영화를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영화를 보다가 배가 고프면, 명식이 형이 끓여준 라면을 먹었다. 그리고 또 영화를 봤다. 
 
화면이 유난히 밝게 빛나는 것 같으면, 바깥이 어두워졌다는 뜻이었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삼삼오오 집으로 흩어졌다. 
 
나는 영화를 좋아했다. 영화를 계속 보기 위해서라도 명식이 형의 클럽에 계속 남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낯선 남자가 찾아왔다.  
 
“여기 혹시 왕명식 씨 댁이 어딘가요?” 
 
마을 입구에서부터 보이는 십자가를 보고, 교회다 싶었는지, 낯선 남자는 우리 집을 찾아와 길을 물었다.
 
아버지는 손가락을 이리저리 사용해 명식이 형의 집을 알려줬다. 명식이 형은 집에 없었다. 나 역시 명식이 형을 따라다니느라 낯선 남자가 우리 집에 찾아와 아버지에게 길을 물었는지 알지 못했다. 
 
낯선 남자는 명식이 형의 집 앞에서 명식이 형을 한참 동안 기다렸다. 
 
동네 꼬마들을 거느리고 자기 집으로 들어가려던 명식이 형은, 멀리서 자기 집 앞에 서 있는 낯선 남자를 발견했다. 당황한 티도 내지 않고, 곧바로 뒤돌아서서, 꼬마들에게 말했다. 
 
“야, 오늘은 뱀 잡으러 가자. 지금 산딸기 철이니까, 산딸기도 먹고 하면 되겠네. 뒤로 돌아!” 
 
저녁쯤해서,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오늘 읍내 비디오 가게 사장님이 우리 집에 와서, 명식이 집을 묻더라고. 명식이가 빌리고 안 갖다 준 비디오테이프가 수 십 개라네. 아무리 전화를 해도 안 받아서, 집까지 찾아온 거야. 연체료가 수 십만 원인데, 그놈이 그 돈을 어디서 구한다냐.” 
 
나는 명식이 형에게 들은 말이 있어서, 아버지의 말이 끝나자마자 명식이 형의 편을 들었다. 
 
“아니야, 아빠. 명식이 형이 그랬어. 삼촌이 비디오 가게를 한다고. 거기서 가지고 온 거야.” 
 
아버지는 으흠하고 팔짱을 끼시더니, 타이르듯 내게 말했다. 
 
“요즘 너, 명식이네 너무 자주 가는 것 같아. 거기서 무슨 일이 있어? 동네 애들도 그 집에서 살다시피 하던데. 아빠가 걱정 안 해도 되는 거지?” 
 
나는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해서라도, 명식이 형의 집에 놀러 가고 싶었다.  
 
“아니야. 명식이 형이 숙제도 도와주고 그래. 모르는 문제도 알려주고. 그러니까, 애들이 좋아서 가는 거지. 나도 그렇고.” 
 
아버지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셨다가, “알겠다”라고 짧게 말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명식이 형이 한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온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글을 모르는 명식이 형이, 동네 아이들의 숙제를 가르쳐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내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순간적으로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아버지는 놀라셨을 것이고, 그 이유가 궁금하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 몰래 명식이 형을 찾아가셨고, 명식이 형을 차에 태우고 직접 운전을 해서 비디오테이프를 가게에 돌려주었다. 사장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밀린 연체료를 최대한 줄여서 명식이 형 대신 연체료를 해결해주었다. 
 
아버지는 그 모든 사실을 당시에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명식이 형이 마을을 떠나고 나서야, 어머니를 통해 전해 들은 것이다. 
 
나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명식이 형을 따랐고, 명식이 형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이들을 거느렸다. 
 
적어도, 그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야, 우리 오늘 한댁 개울에 물고기 잡으러 가자. 형이 모래무지 잡아서, 기름에 바로 튀겨줄게. 라면도 사가서 같이 끓여먹자.” 
 
나를 비롯한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개울을 따라 걷는데, 그 발걸음이 얼마나 신나던지, 태평양 너머의 디즈니랜드를 가는듯했다. 
 
“물속을 걸어 다닐 때, 조심해야 돼. 포클레인이 모래 퍼간다고 깊이 파놓은 곳이 있어. 발 잘 못 디뎌서 빠지면 큰일 난다. 내 눈앞에서만 놀아.”
 
아이들은 흥분한 상태였다. 앞뒤 안 가리고 물에 뛰어들어 정신없이 물장구를 쳤다. 
 
명식이 형이 물속에서 그물을 들고, 앞으로 걸어나가면, 아이들은 명식이 형의 뒤를 졸졸 따랐다. 물고기가 놀라 도망치지 않도록 살살 걸으니, 그 장면이 마치 비밀작전 같았다. 
 
물고기가 꽤 많이 잡혔다. 명식이 형이 실력을 발휘했다. 버너 두 개를 준비해서, 한쪽에는 기름을 올리고, 다른 한쪽에는 물을 올렸다. 약속대로 물고기를 튀기고, 라면을 끓여줄 생각이었다. 
 
물고기를 산 채로 튀기는 것을 처음 봤다. 명식이 형은 손가락 길이만한 크기의 모래무지를 들어 올리더니, 순식 간에 내장을 발라냈다. 머리 부분을 잡고, 몸통을 걸쭉한 튀김 반죽에 담갔다 빼서, 바로 달궈진 기름 냄비에 넣었다. 젓가락으로 머리 부분을 잡고 있어서, 튀김옷을 입은 몸통 부분만 아삭하게 튀겨졌다. 
 
어찌나 고소하고 맛있던지, 둥지에서 어미 새를 기다리는 새끼 새 마냥, 아이들이 입을 벌리고 줄을 서서 명식이 형이 모래무지를 입안에 떨궈주기만 기다렸다. 
 
옆 냄비에서 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명식이 형은 파를 쏭쏭 썰어 넣고 라면을 맛있게 끓였다. 아이들은 각자 나무젓가락을 들고, 라면에 달려들었다. 
 
환상적인 경험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다다다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길가를 지나가는 엔진 소리가 아니라, 이곳을 향해 긴박하게 다가오는 거친 소리였다. 
 
두 명의 남자 어른이었다. 둘 다 민소매티를 입었는데, 두 사람의 어깨에 비슷한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뒤에 타고 있던 남자가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어이, 명식이. 너 여기서 뭐 하냐? 동네 꼬마들 데려다가 또 대장 놀이하냐?” 
 
나와 함께 있던 모든 아이들은 기대감에 설레었다. 드디어 명식이 형의 싸움 실력을 직접 보게 된 것이다. 시원하게 한 방 날려주기를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상황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명식이 형은 잔뜩 얼어붙은 채, 말까지 더듬었다. 
 
“아.. 니야. 그게… 아니라….”
 
남자는 껄렁껄렁 걸어와서 물고기를 담아놓은 플라스틱 바구니를 발로 차서 뒤집어엎었다. 
 
모래 위에 엎어진 바구니는 구토를 하듯, 물과 물고기를 쏟아냈다. 모래사장은 기다렸다는 듯, 순식 간에 물을 빨아들였다. 마른 모래로 범벅이 된 물고기들은 금방이라도 호흡이 끊어질 것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남자는 물고기를 찌익 밟고, 명식이 형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협박하듯 말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여기서 이러고 노니까 좋냐? 너 어제 왜 술 먹다 그냥 갔어? 내가 분명히 말했지? 술값 내고 가라고.”
 
명식이 형은 천천히 뒷걸음질 치면서 말했다. 
 
“그게 아니라, 매번 내가 돈을 내니까…. 나도 돈이 없어서….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 애들이 보고 있으니까 그만하자. 부탁이야.” 
 
남자는 우리 쪽을 바라보고, 알 수 없는 미소를 띠더니, 명식이 형의 뺨을 후려쳤다. 
 
“그만하기는 뭘 그만해. 콱 그냥 죽여버릴까 보다. 야, 오토바이에서 가위 꺼내. 이 새끼 이거, 정신을 차리게 해줘야 돼.”  
 
오토바이에 걸 터 앉아, 그 장면을 지켜보던 남자가 오토바이에서 가위를 꺼내 가져왔다. 그리고, 우리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른 말 잘 들어야 돼. 말 안 들으면 이렇게 된다, 알겠지?” 
 
우리는 얼어붙은 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구라도 먼저 울음을 터뜨리면, 모두가 함께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두 남자는 명식이 형을 힘으로 짓눌렀다. 주먹으로 얼굴을 사정없이 내려치고, 꿇어 앉혔다. 
 
가위를 가져온 남자가 명식이 형의 뒤에서 팔로 목을 조였다. 가위를 받아든 남자는 명식이 형을 마주 보고 가위로 머리카락을 뜯어내듯 닥치는 대로 잘라냈다. 
 
명식이 형의 얼굴이 떨어져 내리는 머리카락으로 뒤덮였다. 그 순간 나는, 명식이 형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분명히 보았다. 
 
그는 울고 있었다. 잘린 머리카락 사이로 명식이 형이 애처롭게 울고 있는 모습을, 나는 분명히 보았다. 
 
“이 새끼 이거 꼴좋다. 다음부터 정신 똑바로 차려라. 다음에는 죽여버린다, 진짜.” 
 
남자는 바닥에 가래침을 뱉고, 짜증 난다는 듯이 손등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털어냈다. 다시 오토바이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었다. 
 
명식이 형은 무릎을 꿇고 엎어져서, 머리를 가리고 웅크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희미해져서 귀에 들리지 않게 되었다. 오토바이가 사라지고 나서도, 명식이 형은 웅크린 채 그대로였다. 
 
누구 하나 명식이 형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버너 위에 라면은 냄비에 꺼멓게 달라붙어서, 코끝을 찌르는 쓴 냄새를 풍겼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명식이 형에게 물었다.
 
“형, 괜찮아?”  
 
명식이 형은 움직이지 않았다. 웅크린 채로 목소리만 들렸다. 
 
“다… 꺼져. 지금부터 셋 셀 동안 안 꺼지면, 전부 죽여버린다. 하나. 둘….” 
 
모래사장에 폭탄이 떨어진 것 같았다. 아이들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고, 소리를 지르며 사방팔방 흩어졌다. 
 
나는 울음이 터졌다. 셋을 세고 나면, 명식이 형이 정말로 우리를 죽여버릴 것 같았다. 나는 두려움에 압도되었다. 
 
아이들 모두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엉엉 울면서 각자 살아보자고 죽을 힘을 다해 뛰어서 도망쳤다. 
 
그렇게, 명식이 형의 클럽은 하루아침에 공중분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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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 명식이 형을 마을에서 본 사람은 없었다. 명식이 형이 사라진 마을은 적막했다.  
 
상처는 깊었다. 아이들 모두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식사 자리에서 부모님이 명식이 형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지가 열무김치를 집어 들면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명식이가 사라졌다고 마을 사람들이 난리야. 이 녀석, 도대체 어디로 간 건지, 도통 소식을 모르겠네.” 
 
명식이가 마을을 떠난 것이 어른들 사이에서도 뉴스거리였다. 명식이 형은 마을에 남은 몇 안 되는 젊은 일꾼이었다. 
 
명식이 형은 하루 일당을 받으면, 두세 명의 장정이 해야 할 일을 혼자서 너끈히 해냈다. 농사일이 바빠질 무렵에, 명식이 형이 한 마디 말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은 어른들에게 이만저만 아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그러게. 명식이 걔 정말 불쌍한 앤데. 명식이 어릴 때, 아빠는 사고로 죽고, 엄마는 신 내려서 무당 한다고 명식이 버리고 떠났잖아. 동네 사람들이 명식이를 자식처럼 키웠는데, 갑자기 사라지니까 자식을 잃은 것 같지.” 
 
갑자기 눈물이 났다. 밥을 먹다가 내가 우니까, 부모님이 놀랐다. 당황한 아버지가 아버지가 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 가만히 나를 쳐다보고, 차분하게 말했다. 
 
“너도 명식이가 떠나서 허전하겠다.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그 녀석 다시 올 거니까.” 
 
나는 팔 등으로 눈물을 닦아내면서, 말했다. 
 
“그 형 안 와. 절대로 안 올 거야. 동네 애들도 다 알아. 그래서, 못 온다고.” 
 
부모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나는 밥이 가슴에 얹혀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밖으로 나가서, 골목길을 내달렸다. 명식이 형의 집 앞에 섰다. 
 
마당에서 주먹만 한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명식이 형의 집 대문에 돌멩이를 세차게 내던졌다. 
 
빈 집이었다.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문이 부서져라 흔들었다. 손과 발로 사정없이 문을 때렸다. 분하고 슬퍼서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보이지 않는 계약서

“아내는 매사에 부정적이에요. 긍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확대해석해서 혼자 걱정하죠. 우리 아이가 좀 작아요. 말도 늦고. 아내는 밤마다 인터넷을 뒤져서  키 크는 데 좋은 음식, 유명하다는 한의원을 샅샅이 뒤져요. 주말마다 언어치료를 받으러 다니고요. 제가 보기에는 아직 걱정할 단계는 아니거든요. 조금 더 기다려보면 좋겠는데, 아내는 아이가 무슨 큰 병에 걸린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S는 아내의 부정적인 성향이 불만이다. 그녀의 부정적인 말을 들으면 견딜 수 없이 짜증난다고 했다. 그는 어려운 상황일수록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헤쳐 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또 아내의 부정적인 감정과 말에 전염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그녀가 걱정할 때마다 습관처럼 말했다. 
 
“여보, 좋게 생각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남편은 아내의 부정적인 성향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는 나름의 가설을 제시했다. 아내의 과거와 현재를 적절히 연결해서 추론하고 있었다. 
 
“일단 아내의 부정적인 성향은 어린 시절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 같아요. 장모님이 아내와 똑같거든요. 장인어른이 젊을 때 실수를 많이 하셨나 봐요. 술을 좋아하셨고, 다른 여자를 만나기도 한 것 같아요. 도박에 빠져 빚을 져서 장모님이 갚았다는 말을 들었고요. 
 
장모님, 아내, 그리고 처남이 모이면 장인어른 욕하느라 정신이 없어요. 옆에서 듣고 있노라면 짜증이 나서 못 견디겠어요.  처음에는 ‘저 세 사람이 힘들었겠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저건 아닌데, 왜 저렇게 생각할까?’ 하게 되었어요. 
 
장인어른의 인생이 측은하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아버님께 가끔 안부 전화를 드리면 장모님이 싫어하세요. 자기한테는 안하면서 아버님에게 한다고. 제가 생각할 때, 장모님은 외롭지 않아요. 아내와 처남이 있으니까요. 
 
살면서 자꾸 ‘장모님이 아버님을 대하듯이 아내가 나를 대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무시당하는 기분이 자주 들거든요. 아내가 오해도 많이 하고, 자기 멋대로 결론 내리고 비난하는 습관이 있어요. 아내가 부모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받은 건 확실합니다. 뭔가 변화가 필요한데, 제 능력으로 힘드네요.” 
 
남편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해 담담히 털어놓았다. 
 
“제 아버지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좋은 아버지가 아닐지 몰라요. 젊은 시절부터 병을 얻어서 가정을 온전히 책임지지 못했으니까요. 주로 경제적인 활동은 어머니가 하셨어요. 어머니는 아버지 머리맡에 쪽지를 써놓고 가셨죠. 저는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어머니가 써놓은 쪽지를 보고 아버지를 돌봐드렸어요. 냄비에 죽을 데워서 갖다드리라거나 식사 후에 잊지 말고 약을 챙겨 주라는 거였죠. 
 
어릴 때는 아버지 옆에 누워 대화를 많이 했는데 중학교, 고등학교 가면서 그러지 못했어요. 어머니도 제 뒷바라지를 하느라 많이 힘드셨죠. 저는 공부할 시기에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하면서 하루하루 지냈습니다. 제가 입대하고 얼마 안 되서 연락이 왔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휴가를 나와서 장례를 치르고 부대로 복귀하는 길에 참 많이 울었어요. 더 잘해드릴 수 있었는데…. 가슴에 사무치더라고요.” 
 
그는 살아오면서 부모님에게 어떤 부탁이나 요구를 하지 않았다. 사춘기 방황도 그에게는 사치였다.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하지 않고 꿋꿋이 버텼다. 가족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누구 하나 힘들어서 더 이상 못하겠다고 하면 가정이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 
 
다행히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말할 자격 있는 사람은 어머니뿐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어머니가 그 말을 하면 모든 것이 끝나버릴 것 같았다. 그는 두려운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힘들어 보이는 날이면 불안해서 물었다. 
 
“엄마, 힘들지 않아?” 
 
어머니의 답변은 교과서처럼 정확하게 그의 귓가에 전해졌다. 
 
“아니, 엄마는 전혀 힘들지 않아. 우리 아들이 이렇게 엄마를 걱정해주는데 뭐가 힘들겠어. 조금만 쉬고 일어날게. 걱정하지 마.”  
 
어머니는 바다를 좋아했다. 그래서 TV에 바다가 나올 때마다 그가 입버릇처럼 말했다. 
 
“엄마, 나는 우리나라 바다 색이 마음에 안 들어. 내가 나중에 에메랄드 빛 바다를 보여줄게. 조금만 기다려.” 
 
어머니는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젊은 날에 쉬지 않고 고생을 한 탓일까. 그가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혼자 시골에 살던 어머니가 감기 몸살에 걸린 줄 알고, 패혈증을 방치한 것이다. 하루아침에 벌어진 일이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어머니를 보는 순간, 그는 누군가 예리한 칼날로 자신의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두 다리에 힘을 잃고 쓰려졌다. 
 
인생에서 가장 큰 슬픔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겪은 그는 결심했다. 두 번 다시 울지 않겠노라고.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두 번 다시 쓰러지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모두가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말해도 그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상황을 다르게 보기 위해 노력했다. 
 
기회는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찾아온다고 생각했다. 힘들면 힘들수록, 이를 악물고 버티고 또 버텼다. 보상은 확실했다. 입사 동기 중 가장 많은 연봉을 받았고, 가장 빠르게 승진했다.  
 
“대학 동아리에서 선배가 미술치료를 배운다고 제 모습을 그려보라는 거예요. 종이에 대충 그렸죠. 선배가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제가 입고 있는 옷에 아무 장식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단추나 벨트, 무늬, 색상도 없다고. 어린 시절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란 것 같다고. 
 
그런데 얼굴만은 활짝 웃고 있데요. 선배가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이렇게 웃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냐고. 아직도 그 장면이 기억나요. 친하지도 않은 선배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죠. 눈물 콧물 주체하지 못하고 엉엉 울었거든요. 그때까지 숨겨 왔던 마음 속 비밀을 들켜 버린 것 같았어요.그 말 한마디에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어요. 지금도 힘들 때마다 ‘힘들어도 웃어. 이렇게 웃기까지 힘들었잖아. 어떤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마. 어렵게 되찾은 웃음이니까’라고 자신을 위로합니다.” 
 
그런 그의 긍정적인 태도가 효력 없는 사람은 아내뿐이었다. 아내와 관계를 생각하면, 그는 억지웃음을 지어야 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왜곡되게 보는 아내. 아무리 설득하고 대화해도 바뀌지 않는 그녀의 부정적인 관점 때문에 절망했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그를 조용히 파괴하고 있었다. 
 
***
 
남편은 아내의 부정적인 성향을 고민하면서 정작 자신이 아내를 부정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긍정적인 성향은 그의 성품이 아니라, 그의 노력에 산물이다. 그의 긍정적인 태도가 특별한 몇몇 문제에 한정되는 것이 그 증거다. 
 
아내가 현재 겪는 어려움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역설이다. 아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 그녀에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강요한다. 아내의 관점에서 남편이 이중적으로 보이거나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의 긍정적인 성향은 아내에게 매력적이지 않다. 그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지금까지 이끌어주었던 긍정적 태도가 부부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걸림돌이 된 것이다. 
 
남편의 일관된 태도, 긍정적인 생각을 하라는 호소는 아내의 감정을 차단한다. 세상에 나쁜 감정은 없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감정은 있는 그대로 존중받아야 한다. 감정은 가치중립적이다. 행복한 관계를 유지하기 하기 위해서 부정적인 감정 역시 적절히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부부관계 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되는 원리이다. 배우자가 화를 낸다고 그 감정을 무시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된다. 화를 낸다는 것은 그 감정이 표현되고 있다는 뜻이다. 분노를 느끼는 것은 자연스럽다. 
 
모든 감정은 수용되어야 하지만 감정을 표현하는 모든 방식이 정당한 것은 아니다. 표현 방식이 문제가 될 수 있다. 분노를 느낀다고 폭력적 행동이 정당화 될 수 없다. 감정을 적절히 표현하는 훈련은 일생을 거쳐 성숙되어야 한다. 왕도는 없다. 
 
아내가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배우자가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 안에 분명한 신호가 있다. 둘 중 한 명이라도 그 필요를 먼저 인식할 수 있다면 부부 행복은 보장된 것이다. 
 
아내 역시 건강한 방식으로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아내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남편을 주변인으로 전락시켰다.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남편에게 투영된 것이다. 아내에게 남편은 외부인이다. 아내가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편안하게 그와 대화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힘들고 어렵더라도 대화해야 한다. 피하거나 물러서면 안 된다. 남편은 아버지가 아니다. 
 
남편보다 아이와 더 밀착된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문제다. 부부는 서로 협력해서 문제를 풀어야 한다. 부부가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은 각자가 아니라,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대화하기 힘들다고, 남편을 포기해버린 아내는 절대로 아이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없다. 아이에게 상처 주게 된다. 
 
남편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내야 한다. 서로 다른 기질, 관점, 성장 과정 등이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피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남편이 아내에게 긍정적인 태도를 강요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내가 충분히 아이를 걱정할 상황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현실을 외면하면서까지 아내에게 긍정적인 태도를 강요하고 있다. 이유가 있다. 
 
남편은 어릴 적에 보이지 않는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어머니는 고통스런 상황에도 한 번도 아들 앞에서 “힘들다, 어렵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물려준 유일한 유산이자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의도와 달리 보이지 않는 계약서 뒷면에 무언의 명령이 적혀 있었다. 
 
“나도 불평하지 않을 테니까 너도 불평하지 마.” 
 
남편이 그 흔한 반찬 투정 한 번 하지 못하고 성장했다는 것은 그가 어린 시절에 “아이”답지 못했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계약서에 쓰인 조항에 따라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했다. 부모가 아무리 자녀를 잘 키워도, 그늘이 드리운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어린 시절에 내면에 찾아온 결여는 일생 동안 무언가를 추구하게 만든다. 
 
불가능한 현실을 긍정적인 태도로 극복했던 경험이 그에게 삶의 의미를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확실한 앞날을 걱정하는 자신을 발견하면 실패감이나 죄책감을 느낀다. 부정적인 생각이 그에게 죄책감을 심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생각은 가치중립적인 것이다. 나쁜 것이 아니다. 걱정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 감정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다. 
 
남편이 살아남으려면 보이지 않는 계약서를 찢어버려야 한다. 힘들면 힘들다고, 걱정되면 걱정된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말하는 남자가 진정한 남자이다. 아내는 어머니가 아니다. 자신의 약함을 아내와 공유하는 사람은 그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더 이상 자신의 약함을 숨기고 살 필요가 없다. 
 
그 공허한 마음을 누가 달래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젊은 날, 당신에게 아름드리 꽃바구니처럼 다가온 아내뿐이다. 남편이여, 아내의 품에 안겨라. 진정한 남자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천사의 노래

“아까 은아가 뭐라고 한 거야?” 
 
미주가 남편에게 물었다. 
 
“뭘 뭐래? 검정고시 일주일 남아서 긴장되니까, 은아가 기도해달라고 했어.” 
 
미주의 표정이 좋지 않자, 주혁이 미주에게 되물었다. 
 
“왜? 기분 나빴어?”
 
“기분 나쁠 게 뭐가 있어. 목사가 기도해주는 거 당연하지.” 
 
“근데, 분위기가 왜 이래? 말하고 표정 하고 다르잖아.” 
 
“내가 부탁 하나 할까?”
 
“뭔데?” 
 
“기도는 보이는 데서 해도 되는 거잖아. 굳이 그 좁은 방에 기어들어갈 필요는 없어.”
 
“기어 들어가?”
 
“둘이 문 닫고 방에 들어가는 게 불편하다는 말이야.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아니, 은아가 따로 할 말이 있다고 하는데, 어떡해?” 
 
“몰라, 나는 기분 나빠. 은아가 당신을 쳐다보는 눈빛도 그렇고, 당신 눈빛도 마찬가지고.” 
 
“살다 살다 참 별말을 다 듣네. 당신 이러는 거 유치하지 않아? 그냥 고등부 학생이야.” 
 
“나도 알아. 그러니까, 신경 쓰이게 하지 말라고.” 
 
“당신이 신경 쓰지 마.” 
 
“나 지금 말장난하는 거 아니야. 걔가 하고 다니는 것 좀 봐. 나보다 성숙해.” 
 
“그만하자. 나 이러다 폭발하겠어. 사람을 뭘로 보고.” 
 
“내 말은 듣기 싫고, 은아 말은 귀에 쏙쏙 들어오나 봐?” 
 
“아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잖아.” 
 
주혁은 숟가락으로 식탁을 내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쿵 하고 문을 닫는 소리가 미주의 고막을 후려쳤다. 
 
미주는 식탁에서 일어나, 식탁에 놓인 그릇을 싱크대에 옮겨 담았다. 손도 대지 않은 음식이 고스란히 버려졌다. 
 
#
 
“처음에는 ‘내가 너무 민감한가?’ 그 정도로만 생각했어요. 하지만, 날이 갈수록 은아에 대한 집착이 심해졌어요. ‘내 판단이 옳았구나’ 확신을 가진 건 한참 뒤였어요.”
 
미주는 차분하게 말했다.  
 

 
“나 오늘 늦게 들어가.” 전화기 너머로 주혁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왜 무슨 일 있어?” 미주가 물었다. 
 
“오늘 수련회 답사야. 주말이라 고속도로 많이 막힐 거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알겠어. 조심해서 다녀와.” 
 
주혁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렸다. 미주는 불안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미주는 주혁의 서재실로 성큼성큼 들어가, 지난주 고등부 주보를 살폈다. 수련회 일정과 장소가 적혀 있었다. 
 
미주는 소파에 걸 터 앉아 손톱을 자근자근 깨물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아니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게 차라리 나아.’ 서로 다른 생각들이 미주를 덮쳤다. 미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직접 가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두어 시간 만에 수련회 장소에 도착했다. 경비실에 들러, 주혁의 자동차 종류와 색상을 설명했다. 경비는 그런 차가 온 적이 없다고 말했다. 
 
자신이 먼저 도착했다는 사실에 미주는 안심했다. 
 
구석진 곳에 차를 세우고, 의자 시트를 눕혔다. 멀리서 남편이 오는 것을 살펴볼 작정이었다. 
 
그렇게 밤이 되었다. 
 
미주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다. 주차장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미주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마트폰을 꺼내,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잘 도착했어?” 
 
곧바로 주혁에게 답장이 왔다. 
 
“지금 다시 올라가는 길이야. 길이 너무 막혀서 새벽쯤에 도착할 것 같아.” 
 
주혁의 문자를 받고, 미주는 황급히 차에서 내려 경비실을 향해 뛰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경비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검은색 카니발 차량 들어온 적 있나요?” 
 
경비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아니, 아직도 여기 계신 거예요?” 
 
“네, 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요. 검은색 카니발 차량 들어온 적 없다는 거죠?” 
 
“없었다니까요. 오늘 차가 딱 세 대만 들어왔는데, 여기 공사하는 차량이에요.”
 
“알겠어요.”
 
미주는 다시 주혁에게 문자를 보냈다. 
 
“장난해?”
 
주혁이 답장을 했다. 
 
“뭐가?”
 
미주는 다시 차에 몸을 실었다. 시동을 걸고, 무서운 속도로 내달렸다. 
 
미주에게 답장이 없자, 주혁은 전화를 걸었다. 
 
“당신 왜 그래?”
 
“지금 어디야?” 
 
“말했잖아. 수련회 답사 다녀오는 길이라고. 길도 막혀서 짜증 나는데, 왜 자꾸 그래?” 
 
미주는 참을 수 없었다. 
 
“길이 막히기는 뭘 막혀? 지금 시속 160이야. 너 지금 어디서 뭐하고 있어?” 
 
주혁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나 지금 미행한 거야?”
 
“내가 묻는 말에나 대답이나 해. 너 지금 은아랑 같이 있지?” 
 
“또 그 소리야?” 
 
“묻는 말에만 대답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진짜 미쳤나 봐. 전화 끊어!”
 
주혁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미주는 갓길에 차를 세웠다. 운전대를 잡은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목사님, 저 은아인데요.” 
 
주혁의 전화기 너머로 은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은아야. 웬일이야?” 
 
“목사님 혹시 이번 주 주말에 시간 되세요?” 
 
“이번 주 주말? 글쎄…. 무슨 일 있어?” 
 
“다름이 아니라요. 요즘 공부가 안돼서 너무 답답해요. 바람도 쐴 겸, 제가 가고 싶은 대학에 한 번 가보려고요.” 
 
“그거 좋은 생각이네.”
 
“그런데, 목사님.”
 
“응.” 
 
“혹시 시간 되시면 같이 가주실 수 있으세요?” 
 
주혁은 당황했다. 
 
“그건 생각을 조금 해봐야 할 것 같은데…. 주말에 목사님이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 
 
“아, 그래요…. 그러면, 목사님 시간 되시는 날 같이 가요. 그래 주실 수 있죠?” 
 
주혁은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러자, 그럼.” 
 
반대편에서 은아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통화를 끊고 주혁은 생각에 잠겼다. 
 
옳지 않은 결정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주혁은 은아를 외면할 수 없었다. 
 

 
“은아는 결핍이 있는 아이에요. 저도 처음에는 은아가 불쌍해서 잘 챙겼거든요. 이렇게 결론이 날지는 꿈에도 몰랐어요.
 
은아는 선교사님 자녀에요. 어릴 때부터 마음고생을 했겠죠. 현지에서 적응을 못했어요. 은아 부모님이 고민이 많았겠죠. 결국, 한국에 있는 친구 목사님 가정에 은아를 맡겼어요. 
 
그 친구 목사님이 저희가 모시는 담임 목사님이세요. 제 남편은 그 교회 부목사인 거죠. 남편이 고등부를 맡은 시점에 은아가 온 거예요. 
 
남편이 은아를 데려다가 저녁 한 번 먹이자고 말하길래 그러자고 했죠. 저녁을 먹으면서 은아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는데,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남편과 제가 은아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어요. 
 
그때부터 남편이 은아에게 연민을 느낀 것 같아요. 은아와 자주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잘 챙겼죠. 은아를 만나고 온 날이면, 저녁 늦게까지 은아 이야기를 했어요.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닌데, 시간이 갈수록 기분이 이상해지는 거예요. 마음 같아서는 “왜 하루 종일 은아 이야기야? 내 이야기는 안 들어줘?”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한 마디 쏘아붙이고 싶은데, ‘유치하게 내가 왜 그러지?’ 생각하고 말았죠. 자존심 상하잖아요. 그냥, ‘저러다 말겠지. 언제까지 저러겠어.’ 그 정도로만 생각했어요.” 
 
남편이 은아 이야기를 할 때마다, 가슴에 뭐가 걸린 것처럼 답답했거든요. 그때는 이유를 몰랐지만, 지금은 알아요. 남편도 결핍이 있는 사람이거든요. 남편이 은아에게 빠져버릴까 두려웠던 거죠.  
 
은아의 결핍과 남편의 결핍이 교묘하게 만나서, 이런 상황까지 온 것 같아요.”
 
“남편과 제가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말씀드리고 싶어요. 은아와 저는 겹치는 게 많아요. 아마 남편은 스스로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저에게서 느꼈던 감정을 은아에게도 느끼는 것 같아요. 남편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요.” 
 

미주의 직업은 간호사였다. 3교대로 돌아가는 고된 일은 미주의 삶을 갉아먹었다. 미주는 버텨야 했다. 미주의 월급은 미주의 독립이었다. 
 
스스로 돈을 벌면서, 지긋지긋한 집을 떠났다. 미주는 아버지가 싫었다. 폭력적인 아버지는 미주가 성인이 되어서까지 손찌검을 했다. 
 
아버지의 맨손이 얼굴에 닿을 때, 미주는 소름이 돋았다. “차라리 매로 때리라”고 울부짖어도 소용없었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자기감정에 충실할 뿐이었다. 
 
아버지의 폭력에 견디다 못한 미주는 맨발로 집을 뛰쳐나왔다. 갈 곳이 없었다. 미주는 주머니에 담겨 있던 자동차 열쇠를 발견했다. 엄마의 부탁으로 저녁에 장을 보고 와서 미처 빼놓지 못한 열쇠였다. 
 
 미주는 가만히 운전석에 앉았다. 서러운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미주는 울다 지쳐 잠에 들었다.
 
퍽, 퍽, 퍽. 
 
미주를 깨운 것은 야구방망이었다. 아버지는 술기운에 야구방망이를 들고, 미주를 찾아다닌 것이다. 차 안에서 자고 있던 미주를 발견한 아버지는, 야구방망이로 사정없이 유리창을 내리쳤다. 
 
자동차의 경보음이 울리고, 경비가 와서 말려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욕을 하면서, 미주를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자동차 유리창이 사정없이 갈라졌다. 유리창에 새겨진 촘촘한 거미줄이 미주를 덮쳤다. 손가락 하나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미주는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집을 떠났다. 
 

“제가 일하는 병원하고 집하고 두 시간 넘는 거리였거든요. 병원 가까운 쪽에 원룸을 얻었어요. 당연히 교회도 옮겨야 했어요. 집 근처 교회를 가면, 아버지를 우연히라도 마주칠까 봐 두려웠거든요. 
 
남편을 만난 것도 그때쯤이에요. 새로 다니기 시작한 교회에서 남편을 처음 만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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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혁의 전화기에 은아의 이름이 새겨졌다. 주혁은 전화를 받아들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그래. 은아야.” 
 
“목사님, 바쁘실 때 전화드렸죠? 
 
“아니 괜찮아. 말해.”
 
“혹시, 이번 주말에는 시간 되세요?”
 
같은 질문만 세 번째였다. 
 
“이번 주말은….”
 
“바쁘신 거죠?” 
 
은아는 풀이 죽었다.
 
“아니야…. 차라리 이번 주에 가자. 다음 주부터는 더 바빠질 것 같아.” 
 
“정말이에요, 목사님?” 
 
“그럼. 그런데, 은아야. 목사님이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뭔데요?”
 
“아무래도 은아하고 목사님만 단둘이 가면, 사람들한테 오해를 받을 것 같아. 혹시, 둘이 같이 가는 거 비밀로 해줄 수 있어?”
 
“그럼요, 목사님. 그렇게 할게요. 저도 비밀로 하고 싶었어요.” 
 
“그래, 고마워. 그럼 주말에 보자.”
 
“아, 잠깐요, 목사님. 제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응, 말해.” 
 
“저, 있잖아요. 목사님이 좋아요.” 
 
“고마워. 나도 그래.” 
 
“그게 아니라요, 목사님. 저 진심으로 목사님을 좋아한다고요.”
 
“….” 
 

“남편이 은아에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알 것 같아요. 우리도 비슷하게 시작했거든요. 
 
교회를 옮기고 처음 간 수련회에서 간증을 한 적이 있어요. 하나님이 제게 은혜를 주셨거든요. 그동안 제게 있었던 일들을 솔직하게 말했어요. 
 
간증이 끝나고, 남편이 제게 다가왔어요. 많이 힘들었겠다면서 위로해주는데, 남편의 태도나 눈빛이 너무 좋더라고요. 
 
그다음부터 남편이 계속 연락을 했어요.  거절을 하다가, 결국 처음 만나 식사를 했죠. 그 자리에서 제가 그랬거든요. ‘지금 누구를 만날 상황이 아니다.’ 
 
남편은 괜찮데요. 자기는 충분히 기다릴 수 있다고. 솔직히 남편이 그렇게 말할 때, 좋았어요. 저도 사랑받고 싶었나 봐요. 
 
제가 거리를 두고 지냈는데도, 남편은 저를 기다리면서, 헌신적으로 사랑하고 아껴줬어요. 결국, 제 마음도 열렸죠. 
 
남편은 섬세하고 따뜻한 사람이에요. 은아를 만나기 전까지는, 나만 사랑해줬어요. 귤 하나를 먹어도, 제 입에 먼저 넣어줄 정도로 다정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
 
주혁은 자정이 넘어서 집에 들어왔다. 
 
미주는 미쳐 날뛰고 싶었지만, 주혁의 말을 끝까지 들어볼 작정이었다. 
 
“지금 어디 있다 오는 건데? 수련회 답사 갔다 온다며? 은아랑 같이 있었지?”
 
“나중에 이야기하자. 지금은 상황이 복잡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주혁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당신 정말 미쳤어? 고등부 제자하고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기는 뭐가 아니야! 그럼, 뭔데?”
 
“지금 말하기 싫다고 했잖아.” 
 
“너 목사 아니야. 목회하지 마. 너 그럴 자격 없어. 당장 교회에 알리고, 너 같은 놈 두 번 다시 목회 못하게 할 거야.” 
 
“그래, 잘 됐다. 제발 그렇게 해줘! 누가 목회하고 싶다고 했어? 지금까지 억지로 한 거야. 사람들 눈치 보는 것도 이제 지긋지긋해! 다른 일하면서, 나답게 살 거야. 알겠어?”
 
미주는 충격을 받았다. 주혁이 그러지 말라고 사정할 줄 알았던 것이다. 남편의 당당함에 미주는 무너졌다.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기에,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너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완전 돌았어. 경찰에 신고할 거야.” 
 
“은아 고3이야. 내년에 대학 가. 이제 몇 달 안 남았어. 나 이혼하고 싶어.” 
 
미주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그녀의 결혼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릴지 몰랐던 것이다. 
 

“은아가 성인이 되면, 정식으로 마음을 고백하겠다고 했어요. 
 
은아가 받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바보 같은 말도 했고요. 자기 마음을 받아줄 때까지 기다린데요. 언제든 곁에서 지켜줄 거라고….” 
 
미주는 남편이 은아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여주었다.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동안, 은아와 주고받은 연애편지였다. 
 
편지에는 도발적인 내용이 담겨있었다. 
 
“차 안에서 너를 안고 있는 동안, 절제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들었어. 너의 호흡, 너의 살결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거든. 하지만, 참을 거야. 은아가 성인이 될 때까지, 소중하게 지켜줄 거야. 우리 조금만 견디자.” 
 
주혁은 유치하다 못해, 파렴치했다. 피가 거꾸로 쏟는 듯했다. 미주가 편지를 찢어버리지 않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미주를 바라보았다. 미주는 내 눈빛에 대한 응답으로 차분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미치겠죠, 목사님? 저도 그랬어요. 왜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지는 모르겠는데, 한 편으로는 이 인간이 불쌍하더라고요.”
 
예상치 못한 미주의 답변에 내 작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주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저도 이 인간이 미웠어요. 지금도 밉고요. 그런데, 문득 궁금하더라고요. 도대체 이 인간이 왜 이럴까? 그러다, 알게 되었죠. 시어머니가 남편을 이렇게 키웠어요.
 
남편은 목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요. 시어머니의 강요로 목사가 된 거죠. 황당하게 들리시겠지만, 사실이에요. 
 
남편은 시어머니에게 반항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살았어요. 착한 아들이었죠. 남편이 어머니 말에 순종한 덕분에, 전도사 때부터 어머니가 꼬박꼬박 생활비를 지원해줬어요. 
 
좋은 목사님 밑에서 잘 배우라고 지금  사역하는 교회를 소개해 준 거고요. 몇 년 후에는 교회도 개척시켜주신다고 자주 말씀하셨어요. 크게 건물은 못 지어줘도, 상가 하나는 얻어줄 수 있다고 명절마다 말씀하셨거든요.  
 
그럴 때마다 남편은 기가 죽었어요. 옆에서 지켜보는 저도 속이 상했죠. 그 사람도 그 사람 나름의 상처가 있을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제 잘못은 아니겠지만, 제 안에서도 이유를 찾아봤어요. 남편이 왜 그랬을까?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요. 남편이 힘들어하는 동안, 제가 남편 곁에 없었거든요. 
 
엄마가 많이 아팠어요. 엄마가 암 투병을 하는 동안 제가 엄마를 돌봤거든요. ‘엄마를 혼자 두고 나와서 엄마가 그런 몹쓸 병에 걸린 건 아닌가’, 하루에도 몇 번씩 무서웠어요. 엄마가 이대로 세상을 떠날까 봐서요. 
 
다행히 엄마는 회복되셨어요.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엄마 곁에 있었네요. 남편이랑 여행이라도 한 번 다녀올 생각이었어요. 남편에게도 미안했고, 저도 많이 지쳐있었고….” 
 
미주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조용히 우는 동안, 나는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눈을 찌르는 바람에, 자꾸 눈물이 났다. 
 
“그런데, 목사님. 제가 엄마가 아플 때, 엄마 옆에서 기도를 했거든요. 엄마 대신 제가 아파도 되니까, 엄마를 낫게 해달라고요. 그런 기도가 응답되나 봐요.
 
남편이 속 썩일 때, 몸이 조금 이상하더라고요.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는데, 종양이 발견된 거예요. 곧바로 수술을 받았어요. 
 
혼자 수술을 받고, 나오는데 서러워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날 결심했어요. 남편도 보내주고, 엄마도 내려놓고, 이제 나를 위해 살고 싶다고….”
 

 
병원에서 돌아온 미주는, 차분한 목소리로 주혁에게 말했다. 
 
“이혼해 줄게.” 
 
“정말?”
 
주혁은 미주의 말을 반겼다. 
 
“응. 며칠 만 기다려 줘. 나도 내가 살 집은 구해야 하니까.”
 
“그럼, 물론이지.” 
 
“최대한 빨리 나갈 거니까, 걱정은 하지 말고.”
 
“알겠어. 그동안 고마웠어, 미주야. 나 만나서 고생 많았고. 앞으로 잘 살아. 나도 잘 살게.” 
 
“우리 앞으로 이혼 관련해서 꼭 필요한 말만 하고, 서로 말 걸지 말자.” 
 
“그러고 싶어?”
 
“응. 나 더 이상 당신하고 말하고 싶지 않아.” 
 
“알겠어, 그럼. 꼭 필요한 말은 문자로 할게.” 
 
“그렇게 해.” 
 
주혁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서재로 들어갔다. 은아와 통화하는 주혁의 목소리가 거실을 넘어, 미주가 있는 안방까지 크게 들렸다. 
 
“응, 허락받았어. 이혼해준대. 응, 그래. 진짜라니까. 그래, 확실해. 이따 저녁에 만나. 응…. 나도.” 
 
미주는 화장대 위에 놓인 액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주와 주혁이 신혼 때 찍은 사진이었다. 
 
미주는 아무런 감정도 없이, 액자에서 사진을 분리했다. 사진은 구겨져서 쓰레기통에 버려졌고, 액자는 상자에 가지런히 담겼다. 미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옷가지들을 꺼냈다.
 
여행을 가듯, 홀가분한 마음이었다.    
 

 
“목사님, 제가 한 달 정도 상담을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선교지에 잠시 다녀오고 싶거든요. 
 
제가 청년 때, 단기선교를 갔다가 은혜받은 곳이 있어요. 그곳에 계신 선교사님께서 저를 많이 아껴주셨거든요.
 
꼭 다시 가보고 싶었는데, 살다 보니까 기회가 없었어요. 이제 홀가분해졌으니까, 한 번 다녀오려고요. 도착하면 바로 연락드릴게요.” 
 
그녀가 선교를 떠난 한 달 동안, 그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나는 그야말로 무능력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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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이라는 시간은 의외로 짧았다. 그녀는 밝은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났다. 
 
“선교지에서 뜻하지 않은 은혜를 받았어요. 그곳에서 아이들을 다시 만났을 때, 저는 깨달았어요. 내가 무너지는 동안, 예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놓치고 있었구나. 
 
아이들이 다른 언어로 해맑게 찬양을 하는데, 천사의 노랫소리를 듣는 것 같았어요. 내 안의 모든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이랄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르더라고요. 
 
잠깐의 위기도 있었어요. 선교지에 있는 동안, 남편이 이혼소송과 관련해서 메신저로 말을 걸었는데, 나쁜 감정이 몰려오더라고요. 메신저 프로필이 커플링 사진으로 바뀌어 있었거든요. 둘이 손을 잡고 커플링이 크게 보이게 사진을 찍었더라고요.
 
당분간은 힘들겠죠. 계속 화나고 혼자 울고. 마음 같아서는 두 사람이 끔찍한 벌이라도 받았으면 좋겠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마음은 아니겠죠.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요. 
 
하나님께서 내게 건강을 주시고, 새로운 은혜를 부어주시면, 다시 선교지로 나가고 싶어요. 선교지에서 제가 확실히 깨달은 게 있거든요. 
 
“예수님은 정말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미주는 목이 메이는지, 잠시 감정을 추슬렀다. 다음에 일어날 일을 예상이라고 했다는 듯이,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남편도, 부모도,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지만, 예수님은 정말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미주는 오열했다. 
 
나는 손수건이 없었다. 눈물이 흐르면, 흐르는 데로 내버려 두었다. 다행이었다. 미주는 손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려서 나를 볼 수 없었다. 
 
나는 미주를 바라보았다. 눈물로 굴절된 시선은 착시현상을 일으켰다. 소파에 기대어 앉은 미주가 마치 예수님 품에 안겨 있는 듯했다. 
 
나는 안심했다. 상담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걱정하지 않았다. 그동안 참아왔던 눈물을 마저 쏟아냈다. 
 

 
상담을 종결하고 내 일상을 살던 어느 날, 미주는 내게 메신저로 안부를 전했다. 그것은 마치 손으로 정성스럽게 써 내려간 편지 같았다.  
 
“목사님, 저는 요즘 풍랑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있어요. 말 안 해도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두려움과 평안함 사이를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 갔다 해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 지금 잠시 외국에 나와 있어요.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거든요. 다시 한국에 돌아가면, 그동안 못 해본 것들을 해보고 싶어요.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내면서, 계속 기도하고 있어요. 선교지에 가서 아이들을 돌보며 살고 싶은데, 그 꿈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지 모르겠어요. 생각나실 때, 함께 기도해주세요.” 
 
그녀가 보낸 글의 분량만큼 나도 답장을 보냈다. 답장의 세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응원이나 격려였을 것이다.  
 
다만, 여러 번 썼다 지웠던 문장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마음속에 담아두고 끝내 보내지 못한 문장이었다. 
 
“당신은 나를 치유했고, 내게 복음을 전했어요. 당신은 더 이상 내담자가 아니에요. 당신은 치유자이며, 동역자입니다.”
 
과도한 기대로 미주가 부담을 느낄까 두려웠다. 힘든데 씩씩한 척할까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내 가슴에 묻어둔 말은 진실이었다. 
 
미주는 치유자이며, 전도자이다. 
 
그녀는 몰라도, 주님은 아신다.

용서 못해도 괜찮아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지금까지 잃어버렸던 제 자신을 되찾을 거예요.”
 
H는 5살 아들을 둔 엄마이다. 그녀는 결혼 생활 7년을 뒤로 하고 이혼했다. 결혼하고 3년 후부터 남편은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렸고, 결국 이혼했다. 
 
아들 어린이집 재롱잔치가 있던 날, 남편의 외도를 처음 알았다. 그는 일이 많아 토요일에 출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내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달 전 부터 미리 알려준 일정이었다. 그날 남편이 오지 않으면 아들이 서운할 게 뻔했다. 아내는 일단 왔다가 얼굴이라도 보이고 가라고 부탁했다. 남편은 짧게 알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지 않았다. 
 
저녁 늦게 퇴근해서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말로 넘어가려고 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불안감을 이겨낼 수 없었다. 남편이 잠든 사이에 그의 휴대폰을 확인했다. 비밀번호가 걸려있었다. 그날 밤, 아내는 한숨도 못 잤다. 긴 한숨이 베개를 타고 침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전화가 걸려오면 남편은 밖으로 나갔다. 안에서 받으라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남편이 화장실에 갔을 때 전화가 걸려왔다. 거래처 이름이 떴다. 퇴근, 주말 구분 없이 자주 걸려 오는 전화라 의심스러웠다. 아내는 긴장한 채로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지금 나올 수 있어?” 
 
아내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어서 서둘러 종료버튼을 눌렀다. 화장실에서 나온 남편이 말했다. 
 
“뭐야? 당신, 내 전화 받았어?” 
 
아내는 일어나 남편의 뺨을 후려쳤다. 그리고 자신이 뺨을 맞은 듯, 그녀는 그의 발 앞에 맥없이 쓰러졌다. 남편은 아내에게 용서를 구했다. 실수라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가 아무리 용서를 구해도 아내는 용서하지 않았다.
 
남편은 죽은 듯이 아내 옆을 지켰다. 아내의 눈치를 보면서 평소에 하지 않는 집안일과 육아를 도왔다. 먼저 안부를 묻지 않았던 친정 엄마에게도 주말마다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남편의 위선이 싫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목사님이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설교를 했다. 양심에 가책이 들었다.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반성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날 저녁, 감정은 따라주지 않았지만 의지를 발휘해서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나 당신을 용서하려고. 다시는 내게 상처주지 말아줘. 다 잊을게.” 
 
“아니야, 여보, 내가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아내가 예상한 답변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아니. 나 이제 너랑 안 살려고. 더 이상 못살겠어. 내가 왜 다른 사람을 만났는지 생각해봤어? 나만 잘못한 것 같아? 우리  사이가 안 좋잖아. 대화도 안 되고. 전부 내 잘못이라고 하면 난 억울한데? 나 집 나가려고 원룸 알아봤어. 주말에 와서 애랑 놀아줄게. 평일에는 거기서 살 거야. 나 없다고 생각해. 이혼은 안 하지만 너랑은 살고 싶지 않으니까.” 
 
아내가 말했다. 
 
“그 말을 하지 말 걸 그랬어요. 제가 용서하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올 줄 알았거든요. 사실 저는 남편을 용서한 것도 아니었어요. 용서에는 의지가 필요하다고 들었어요. 의지를 가지고 용서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라고. 저는 그렇게 믿었어요. 하지만 그의 반응은 제 예상과 전혀 달랐죠. 
 
그가 밖에 나가 혼자 산다고 했을 때, 그러라고 동의한 건 솔직한 제 심정이었죠. 저도 남편하고 살고 싶지 않았거든요. 밖에 나가서 제멋대로 하고 살라고. 나도 너 필요 없다고. 너무 괘씸했어요. 차라리 안 보니까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평일에는 아이와 단 둘이, 주말에는 남편과 같이 시간을 보냈다. 주말에 남편을 만나도 말 한 마디하지 않았다. 부부 관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주말에 아이와 있는 남편을 보면 그 여자와 완전히 끝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실 남편 모르게 젊은 여자를 만나서 말했다. 그녀는 울면서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다시는 남편을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허무하게 대화가 끝났다. 그녀의 마음은 조용히 무너졌다. 
 
주말에 아이와 아파트 단지 앞에 자전거를 타러 나간 남편이 전화기를 두고 나갔다. 문자 알림이 울렸다. 일부러 본 것이 아니었다. 메신저 알림에 한두 줄 문장과 함께 그녀의 프로필 사진이 떴다. 그걸로 끝이었다. 남편의 전화기를 건드리지 않았다. 문자 내용 역시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알게 되었다. 남편은 그 젊은 여자와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남편이 아이와 집에 들어오자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주말에도 오지 마.” 
 
남편은 무릎을 꿇고 빌었다. 
 
‘이건 뭘까? 남편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누구를 위해 이러는 것일까? 나를 위해 아니면 그 젊은 여자를 위해?’ 
 
머리가 아팠다.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에는 이혼 서류가 보였고, 눈동자로 서류 위에 사인했다. 편안했다. 두 번 다시 남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사인을 하자, 장면이 바뀐다. 천장에 갑자기 남편의 웃는 모습이 그려졌다. 젊은 여자 얼굴도 보였다. 둘이 비웃듯이 자신을 내려 본다. 소름 끼쳤다. 
 
‘이대로 이혼해 줄 수는 없지.’ 
 
아내는 결심했다. 남편에게 복수하고 난 다음에 이혼한다고.  남편에게 짧은 문자를 보냈다. 당장 원룸을 정리하고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남편이 다니는 회사와 젊은 여자가 다니는 대학에 진실을 알리겠다고. 그녀는 단 하루의 시간을 줬다. 
남편은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처음 외도를 들켰던 때처럼 집안일과 육아를 도왔다. 아내는 그런 남편이 정상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네 인생도 비참하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사냐!’ 
 
아내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6개월 동안 남편에게 고통을 줬다. 조용한 복수극이 끝나고, 그녀는 이혼했다. 남편이 없는 지금, 그녀는 10년 동안 잃어버렸던 자신을 되찾았다고 말했다. 
 
“복수극은 끝났어요. 충분하지는 않지만 아쉬움은 없어요. 이제 그 둘이 어떻게 살든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죠. 다 잊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슬프게 들렸다. 
 
“그러니까… 만약, 친구가 이런 일을 겪었고 제가 그 친구를 위로해준다고 하면 무슨 말을 해주고 싶냐고요? 참 어려운 질문인데요. 음… 저라면….”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다 지난 일이라고 쿨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어가던 그녀가 갑자기 오열했다. 좋은 회사에 다니며 많은 연봉을 받는 그녀는 이혼하고 나서 당당하게 살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질문에 답하면서 그녀의 비밀창고가 열렸다. 댐의 수문이 열린 것처럼 쏟아져 내리는 눈물에 주변 모든 것이 떠내려가는 것 같았다. 
 
처음 남편을 만났을 때, 호감을 느끼지 못했다. 무시하고 거절해도 한결같이 자기를 좋아해주는 모습에 끌렸다. 그와 같이 있으면 왠지 모를 우월감이 느껴졌다. 그가 자신을 더 좋아하니까. 남편에게 조금씩 빠져들었다. 
 
결혼하고 많은 것이 변했다. 육아와 일로 정신이 없었다. 쏜살같이 시간이 흘렀다. 부부가 아닌 파트너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의 기능을 하고, 자신은 자신의 기능을 하는 형식적인 관계가 되었다. 서로 대화할 시간이 부족했다. 
 
“저는 가정이 깨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요. 부모님도 사이가 좋지 않았거든요. 어머니가 아버지를 찾아오라고 해서 동생과 어떤 집에 갔던 기억이 나요. 모르는 아줌마가 문을 열어줬고, 아빠가 현관에 나와 용돈을 주면서 나중에 집에 갈 거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말했어요. 
 
저는 그 돈으로 동생이랑 문방구에 들러서 이것저것 사먹었죠. 어려서 상황 판단을 못했어요. 어머니는 이혼하지 않았죠. 아버지와 싸우면서 우리에게 물었어요. 누구와 살 거냐고. 저는 울면서 대답을 못했어요. 엄마를 대답하라고 고함을 쳤고, 저는 더 크게 울었죠. 아버지는 그 모습을 보고 집을 나갔어요. 
 
몇 년이 지나자 아버지가 짐을 싸서 다시 들어왔죠. 그 이후로 며칠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은 적은 있었지만 집을 나가진 않았어요. 둘은 부모 자리만 지키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서로 무언가를 요구하지도 않고, 해주려고 하지도 않았죠. 
 
여름휴가도 자식들 때문에 마지못해 가는 것 같았으니까. 결혼은 유지했지만 부부 관계는 깨진 채로 산 거죠. 어릴 때는 원망을 많이 했는데 다 크고 나니까 고맙더라고요. 어쨌든 가정은 유지했으니까요. 저도 어머니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원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처럼 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이혼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아이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 반복해서 말했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엄마보다 강하다. 남편 없이 아이를 더 잘 키울 수 있다.” 
 
애써 노력했지만, 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부러졌다. 차고 넘치는 슬픔과 분노를 억누르자 댐이 무너지면서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아까 하신 질문에 답할게요. 친구가 저와 같은 일을 겪었다면 이렇게 말할 거예요. ‘지금까지 참 수고 많았어. 잘 견뎌줘서 고마워. 힘들지만 이제 널 되찾았으면 좋겠어. 한 사람의 아내와 엄마로서 이름 없는 존재가 아니라 온전한 네 자신이 되어서 너를 돌봐주기를 바라. 그리고 말이야, 네가 원수를 사랑하면 하나님이 널 사랑하시는 게 아니래. 그러니 용서 못해도 괜찮아. 하나님은 여전히 널 사랑하시니까. 네게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 내가 항상 곁에 있어줄게. 힘내!’” 
 
***
 
그녀는 스스로를 치유하고 있었다. 비밀창고에 물이 빠지고 나서 남은 것은 조그만 상자였다. 그 상자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그녀는 상자 안을 혼자 들여다보고, 안에 든 것에 대해 말했다. 그것은 ‘조건 없는 사랑’이라고. 인간이 만들어낼 수 없는 초월적인 사랑이 그녀에게 필요했나보다. 
 
사랑이 의무가 되면 메마른다. 사랑을 강요하면 짓눌린다. 사랑은 자유다. 처음으로 그녀의 미소를 보았다. 억지웃음이 아니라 입술 끝자락이 내면에 닿아있는 미소였다. 

차가운 목도리

연수는 멈칫했다. 
 
신중하게 내 표정을 살폈다. 나의 반응이 궁금한 것 같았다. 물 밖에서 물속의 깊이를 알 수 없듯, 연수는 내 속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나는 온화한 표정으로 기다렸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말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였어요. 학원 기사 아저씨가 있었거든요. 그 아저씨에게 순결을 잃었어요.” 
 
내가 멈칫하는 순간, 연수는 마치 내가 질문이라도 했다는 듯이 말했다. 
 
“왜 신고하지 않았냐고요? 그때 당시에는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주 잠시 동안이지만,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거든요.” 
 
학원 운행노선 끝자락에 연수의 집이 있었다. 학원차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집 앞에 머물렀다. 학원차가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집 안의 모든 불은 이미 꺼진 후였다. 그녀가 오기 전에 모두가 잠든 것이다. 
 
연수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기사 아저씨와 대화를 나눴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아무도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은 덕분에, 아저씨는 그녀의 대화 상대가 될 수 있었다. 대화는 점점 깊어졌다. 연수는 학원 아저씨와 단둘이 집에 가는 시간이 기다려졌다. 
 
아저씨는 연수의 생일을 기억했다. 텅 빈 차 안에서 그녀에게 생일 선물을 건넸다. 목도리였다. 아저씨는 연수에게 목도리를 둘러주고, 볼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연수를 끌어안았다.
 
한 시간이나 늦게 학원차가 집 앞에 도착했다. 아무도 깨어있지 않았다. 집에 도착한 연수를 맞이한 것은, 환하게 빛나는 생일 케이크이 아니었다. 적막한 어둠뿐이었다. 생일 저녁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연수의 순결을 목도리와 맞바꿨다는 사실을 가족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연수는 엄마에게 학원을 옮겨달라고 말했다. 엄마는 딸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지금 학원을 옮겨달라고?” 
 
연수는 엄마의 말 한마디에 감정이 상했다. “됐으니까, 알아서 하겠다”라고 말했다. 
 
연수는 더 이상 학원에 가지 않았다. 학교에서 가까운 독서실에 다녔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그녀는 목도리를 두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목도리로 목을 감싸자 온기가 느껴졌다. 
 
  연수는 목도리를 버리지 않았다.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10년이 지났지만, 연수는 그때의 사건과 감정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밤 제가 엄청난 실수를 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되돌릴 수 없어 슬펐고요. 집에 와서 침대에 누워 많이 울었어요. 내가 이런 일을 당했다는 사실에 슬펐고, 그런 일을 당했는데 싫지만은 않았다는 것이 슬펐어요. 저는 많이 외로웠거든요.” 
 
기사 아저씨를 다시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학원을 끊은 이유였다. 그러나, 사랑받은 기억은 소중했다. 아저씨의 따뜻한 표정, 친절한 말투가 그리웠다. 
 
목도리를 두를 때마다, 그녀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연수는 끔찍한 기억을 뒤로하고, 좋은 기억만을 간직했던 것이다. 
 
그녀는 10년이나 지나버린 일을 들춰내기 위해, 나를 찾아온 것일까? 
 
아니었다. 
 
연수는 엄연히 현실의 문제로 고통받았다. 
 
연수의 남자가 떠났다. 어떻게든 다시 만나고 싶은 것이 그녀의 바람이다. 
 
3개월이 지났다. 연락이 닿지 않았다. 전화는 물론이고 문자 역시 무시당했다. 그럴수록 그녀는 고통받았다.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다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과 말투에서 그녀의 상실감이 전해졌다. 그녀의 교제 기간은 6개월에 불과했다. 
 
4살 연상의 남자, 제준을 크리스천 데이팅 앱으로 만났다. 눈에 띄는 외모였다. 크리스천으로 진지하게 살아가려는 그에게 끌렸다. 지금까지 만나왔던 남자들과는 ‘뭔가 다르겠지’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만나온 남자들 중에 크리스천은 없었다.  
 
그동안 연수는 자신을 좋아해 주는 남자들과 사귀었다. “좋아한다, 사귀자”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설레었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보다, 나를 사랑해주는 남자와 사귀자.” 그녀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제준은 신중한 남자였다. 사귀자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우리 한 번 사귀어보면 어떨까요?” 
 
연수가 먼저 물었다.
 
그녀가 먼저 남자에게 사귀자고 말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가 대답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제가 헤어진 지 얼마 안 되었어요. 연수 씨를 정말로 좋아하는 건지, 외로움을 달래려고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연수 씨를 좋아한다는 확신이 들면, 제가 먼저 말할게요.”
 
그것으로 충분했다. 연수에게 제준은 사려 깊은 남자였다. 그날 이후 연수는 새벽예배를 다니면서, 제준과의 만남을 위해 기도했다. 그를 좋아하는 감정만큼 그녀의 기도 역시 간절했다. 
 
크리스마스 이브, 제준은 연수와 함께 했다. 그가 사귀자고 말했을 때, 연수는 눈물을 흘렸다. 외로움으로 고통받았던 아픔을 한꺼번에 보상받는 듯했다. 
 
두 사람은 그날 밤 함께 했다. 연수는 죄책감을 느꼈지만, 곧 결혼할 사이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연수에게 제준은 완벽한 남자였다. 하루하루가 행복할 뿐이었다. 자신 안의 상처를 온전히 이해줄 사람이라고 믿었기에, 언젠가는 진실을 말해도 괜찮을 것이라 믿었다. 
 
“나 사실 오빠에게 말 못 할 비밀이 있어. 오빠가 감당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속이고 결혼하고 싶지는 않아.” 
 
연수는 목도리에 대해 말했다. 
 
제준의 반응은 태연했다. 그는 “괜찮다”라고 말했다. 
 
연수는 홀가분했다. 제준은 몇 마디 말로, 연수를 위로했다. 평소처럼, 둘은 함께 식사하고 커피를 마셨다. 단 하나의 절차만이 생략되었다. 그날 밤, 제준은 연수를 안아주지 않았다. 
 
그날 이후 일주일 동안, 연락이 되지 않던 제준이 연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시간 되면, 잠깐 만나서 이야기 좀 하자.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연수는 제준의 무뚝뚝한 목소리에 당황했다. 손이 떨리고 가슴이 답답해 더 이상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말하고 일찍 회사를 나왔다. 
 
그녀가 찾은 곳은 병원이 아니라, 그를 만나기로 한 카페 근처 공원이었다. 숨을 쉴 수 없었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던 그녀는 하염없이 산책로를 걸었다. 
 
“나 도착했어. 어디야?” 
 
카페에 먼저 도착한 제준이 전화를 걸 때까지, 연수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공원을 누볐다. 땀으로 화장이 망가져 버렸다. 공원 화장실에서 얼굴을 대충 고치고, 제준의 앞에 앉았다. 
 
그녀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제준이 말했다. 
 
“나 오래 생각해봤는데, 우리 그만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으면, 네가 오해할까 싶어 만나서 직접 설명하고 싶었어. 
 
목도리 사건,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것 때문에 헤어지는 건 아니야. 오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너를 만나는 동안, 계속 생각해봤는데 내가 아직 이별에 대한 상처가 있는 것 같아. 너를 정말로 사랑한 건지, 아니면 내가 외로워서 너를 만난 건지 판단이 안 서거든. 
 
사랑해서 사귄 거라고 믿었는데, 점점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어. 더 늦기 전에,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정말 미안해.” 
 
연수는 침묵했다. 
 
연수의 침묵이 불안했는지, 제준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  
 
“연락은 계속해도 되는 거지?” 
 
“그건 너 편할 대로 해. 그게 전부야?” 
 
제준은 당황한 듯 말했다. 
 
“응, 그게 전부야.” 
 
그러나, 제준은 연수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아마 제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궁금하실 거예요. 저는 솔직히 이별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어요. 연락이라도 받아주면, 언젠가 기회가 다시 있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연수는 제준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 같았다. 
 
연수에게 제준은 이상적인 남자로 왜곡되어 있다. 그러나, 상식적인 관점에서 제준은 이상적인 남자가 아니라 이상한 남자다.  
 
제준이라는 남자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자기 외로움을 달래려 연수을 선택했고, 그녀가 자기 기준에 맞지 않자 자기 외로움을 핑계로 그녀를 버린 것이다. 
 
처음부터 그에게는 연수을 진지하게 만나려는 의도가 없었을지 모른다. 제준은 본능적으로 연수가 취약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사귀자고 말한 첫날 그는 연수를 안았다. 사귀는 것과 자는 것, 어쩌면 그에게 같은 의미였을지도 모른다. 
 
목도리 사건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도 거짓처럼 보였다. 연수가 비밀을 털어놓은 그날 밤, 그는 연수를 안아주지 않았다. 심경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연수의 비밀을 알게 된 순간, 그가 마음을 닫지 않았을까? 
 
그의 말과 행동에서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제준이 무슨 자격으로 그녀의 상처를 이해하고 말고를 결정할 것인가? 
 
그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떠났다. 연수는 상처의 늪에 빠져버렸다. 취약한 그녀가 더욱 취약해진 것이다. 
 
나는 제준에게 한 마디 말도 건넬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그녀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과거로 돌아가자. 그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어떤 인생을 살았는가. 무엇이 그녀를 취약하게 만든 것인가. 목도리 이전의 사건들을 알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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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친년은 왜 여기 서 있어. 걸리 적 거리게.” 
 
할머니는 분을 못 참고, 어린 연수의 뺨을 후려쳤다. 
 
“왜 애한테 화풀이를 하세요!” 
 
그녀의 엄마가 할머니에게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격한 몸싸움을 했다. 
 
연수의 나이 여섯 살, 잊을 수 없는 기억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가족은 친할머니 댁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져서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기 가족을 어머니에게 맡겨놓고 밤늦도록 일에 매달렸다. 고부 갈등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버지가 밤늦도록 일에 매달리는 사이, 집안은 아수라장이었다. 할머니는 아들에 대한 분풀이를 며느리에게 쏟아부었다. 엄마는 질세라 할머니에게 덤벼들었다. 엄마의 잘못이라면, 무능한 남자와 결혼한 것뿐이었다. 
 
그녀의 엄마와 할머니가 격하게 다투는 날이면, 살림살이가 허공을 날아다녔다. 어린 그녀는 방구석에 움츠러들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울었다. 한바탕 소동이 나면, 어린 그녀는 엄마에게 다가가 엄마 무릎에 앉았다. 
 
딸을 안아줄 여유가 없었던 엄마는 연수을 땅에 내려놓고, 뒤돌아 앉았다. 
 
엄마가 뒤돌아 앉은 날이면, 그녀는 할머니 감정이라도 풀어보려는 듯, 할머니를 주변을 서성거렸다. 할머니는 그녀를 차가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그런 날의 반복이었다. 
 
감정이 사그라들지 않았던 할머니는 며느리가 보라는 듯이 어린 손녀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어린 그녀는 균형을 잃었다. 옆으로 주춤거리며 몇 발을 내딛다,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엄마가 할머니에게 달려들었다. 할머니는 엄마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아무도 말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엄마와 할머니, 두 사람이 체력이 다해 스스로 멈출 때까지 싸움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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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그녀의 볼에 파란 멍이 들었다. 선명하게 손바닥 자국이 새겨졌다. 
 
어린 연수가 말했다. 
 
“엄마, 나 오늘 어린이집 안 가면 안 돼? 너무 창피해.”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수의 머리카락에 빗질을 하며, 머리카락을 바짝 묶어 올렸다. 
 
“엄마, 머리 너무 세게 묶지 마. 아프단 말이야.”  
 
아프다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엄마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딸의 머리카락을 끌어 머리 한가운데서 세게 묶었다. 
 
엄마가 같이 나갈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엄마의 눈치를 살피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나 오늘 안 데려다줘?”  
 
엄마의 표정은 차가웠다. 파리를 내쫓는 손동작으로 그녀를 밖으로 내보냈다. 
 
연수는 혼자 주섬주섬 신발을 신었다. 마당을 지나 대문을 나서자, 또래 친구들이 각자의 엄마와 함께 공터로 모여들였다. 곧 어린이집 차량이 도착할 시간이었다. 
 
혼자 멍하게 서 있던 그녀에게, 옆집 아줌마가 깜짝 놀라 물었다. 
 
“어머, 너 얼굴이 왜 그러니?” 
 
연수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머, 어른들이 때렸니?” 
 
연수는 가만히 고개를 끄떡였다. 옆집 아줌마는 충격을 받은 듯, 멈칫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누가?” 
 
“할머니….” 
 
“할머니가?”
 
연수는 파랗게 멍든 볼을 손으로 숨기고, 고개를 끄떡였다. 
 
옆집 아줌마는 그럴 리 없다는 듯, 화들짝 놀랐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옆집 아줌마의 반응에, 연수의 등골이 오싹했다. 
 
여섯 살 아이가 섬뜩한 생각을 하고 만 것이다. 어쩌면 엄마는 일부러 머리를 묶어 올렸을지 모른다. 그녀의 볼에 새겨진 선명한 멍 자국을 온 동네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작은 마을에서 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던 할머니는 후한 인심으로 평판이 좋았다. 사나운 며느리를 만나 노년이 불행해졌다는 소문이 마을에 돌았다. 
 
마을 사람들이 엄마를 바라보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녀의 볼에 새겨진 멍 자국은 그녀의 할머니가 얼마나 지독한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그날 밤, 할머니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엄마에게 달려들어 엄마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네가 무슨 짓을 했길래, 동네 사람들이 나를 개처럼 쳐다보는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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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아픈 과거를 회상하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 지난 일이라는 듯,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할머니는 독했어요. 제가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 엄마를 들들 볶았죠. 엄마는 우울증이 분명했어요. 
 
중학교 2학년 때쯤인가, 아빠와 같이 살게 됐어요. 아빠도 자기 나름대로 악착같이 산 거죠. 사업으로 돈을 조금 번 것 같았어요. 
 
할머니 집에서 벗어나 엄마 아빠랑 살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완전한 착각이었죠.”
 
“아빠, 자꾸 어디 가?”
 
“잠시만, 아까부터 계속 전화가 와서….” 
 
아빠는 저녁을 사준다며, 연수가 다니는 학원 앞으로 찾아왔다. 아빠가 평소와 달라 보였다. 아빠는 연수의 눈치를 살피며 계속 밖으로 나가 전화 통화를 했다. 
 
아빠가 다시 와서 앉았을 때, 연수가 물었다. 
 
“아빠, 혹시 엄마 몰래 만나는 여자 있어?” 
 
아빠는 정색을 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뜬금 없이….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 
 
“아빠 오늘 평소와 다른 거 알지?” 
 
철없는 아빠는 딸에게 비밀을 털어놓았다. 
 
“사업하다가 잠시 만난 여자가 있는데, 이상하게 자꾸 연락을 해. 아빠가 외로울 때, 잠시 만났던 사람이야. 이제 엄마랑 같이 사니까, 아빠가 알아서 정리할게. 그때까지 엄마한테는 비밀이다. 꼭 비밀 지켜야 해.” 
 
그녀의 눈에 비친 아빠는, 덩치만 큰 철부지 어린애였다. 아빠가 없는 동안, 엄마와 딸이 흘린 눈물, 고통스러운 날들은 새로 장만한 아파트로 만회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연수는 아빠의 비밀을 엄마에게 말할 수 없었다. 함께 산지 일 년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엄마와 아빠가 헤어진다면, 이제 돌아갈 곳도 없었다. 
 
그녀는 침묵을 선택했다. 
 
며칠 후, 엄마가 연수에게 심문하듯 물었다.
 
“너 알고 있었지?”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뭘?” 
 
“아빠 말이야. 다른 여자 만나는 거 알고 있었잖아?” 
 
“아빠가 그래?” 
 
“알고 있었네. 엄마한테 왜 말 안 했어?” 
 
“말하면 어떻게 되는데?” 
 
엄마는 말 대신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그걸 말이라고 해. 미리 말했으면, 엄마가 가만히 있었을 것 같아?” 
 
연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왜 나한테 그래?”
 
“너도 똑같아. 하는 짓이 어떻게 그렇게 아빠를 닮았니?” 
 
연수는 참을 수 없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연수가 대들자, 엄마는 미친 사람처럼 오열하며 살림살이를 부수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 들고, 연수에게 던졌다. 
 
삐리릭. 
 
아빠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난장판이 된 거실 한가운데 서서 아내에게 말했다. 
 
“이 여자가 미쳤나.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아빠가 순간 멈칫했다. 입이 바짝 말랐다. 연수을 바라보며, 궁색하게 물었다. 
 
“연수아, 너 엄마한테 말했니?” 
 
연수는 폭발했다. 
 
“그래. 내가 말했다. 뭐 어쩔래! 왜 전부 나한테만 지랄이냐고!” 
 
엄마는 남편을 쏘아보고, 돌아서서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빠가 연수에게 말했다.   
 
“이런 미친년. 아빠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아빠가 오해라고 했잖아. 아무 일도 없었다고 몇 번을 말했어? 계속 연락을 해서, 아빠도 힘들다고 말한 거잖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엄마에게 말하면 어떻게 해? 널 믿은 내가 바보지.” 
 
그녀의 아빠는 굳게 닫혀버린 안방 문 앞에서, 엄마에게 사정하듯 말했다.   
 
“여보, 오해야. 정말 오해라고. 내가 설명할게. 문 좀 열어 봐.” 
 
연수는 견딜 수 없었다. 집을 뛰쳐나갔다. 텅 빈 운동장 한 귀퉁이에 앉아 엎드려 하염없이 울었다. 
 
“아직도 두 분은 저를 오해하고 있을 거예요. 나 때문에 이혼할 뻔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죠. 오해를 바로잡고 싶지도 않아요. 저는 그냥 두 분이 한심하다고 생각거든요.
 
엄마도 아빠도, 제가 어떻게 되든 상관 안 하셨어요. 학교 보내주고, 학원 보내주고. ‘그거면 됐지’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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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과거에서 나는 치명적인 손상을 발견했다. 그녀는 거절과 비난을 반복적으로 경험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면서, 다른 누군가가 내다 버린 감정은 고스란히 마음에 담는다. 받아들이면 절대로 안 되는 감정조차, 그녀는 거부할 수 없다.
 
제준은 자신 안의 외로움을 연수라는 존재로 달랬다. 안전한 방식으로 자신 안의 욕구를 채우고, 연수을 버리고 떠났다. 
 
학원 운전기사 역시 마찬가지다. 어린 연수의 취약함을 이용해, 자신의 욕구를 채웠다.  
 
그녀는 평생 목마른 사람처럼, 사랑을 구걸하며 다닐지 모른다. 자기 아닌 모습으로 살아가면서, 남이 베푸는 작은 호의에 마음이 끌리고,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에게 의지해 살아갈지 모른다. 
 
평생을 외로움으로 허덕였던 그녀의 삶을 어떻게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상담이 어떻게 끝나게 될지 예측할 수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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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멍이 들어, 혼자 어린이집 버스를 기다리는 어린 연수가 기억나세요?”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기억나요.” 
 
“어린 연수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요?”
 
“글쎄요…. 아마도 외로움이 아닐까요?”
 
“조금 더 자세히 말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냥 공터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아이가 불쌍해 보이거든요.” 
 
“그렇군요. 그럼, 이제부터 나와 잠시 역할극을 해 볼 거예요. 조금은 어색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주세요.” 
 

 
나는 혼자 공터에 서 있는 어린 연수에게, 현재의 연수를 데리고 갔다. 나는 어린 연수를 역할을 맡았고, 그녀는 현재의 자신이었다. 
 
나는 어린 연수의 입장에서, 당시의 상황과 감정을 설명하고, 현재의 연수에게 “도와달라”라고 말했다. 
 
현재의 연수는 어린 연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어린 연수를 위로해줄 말이 단 한 마디도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상처 입은 자신을 공터에 버려두고 방치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상처 입은 자신과 마주한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작업을 중단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지금 무엇이 스쳐 지나갔죠?”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터에 혼자 서 있는 아이에게 아무 말도 못 해주고, 그 옆에서 서서 울고 있는 나를 발견했어요.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로 모르겠어요.”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의 말속에 깊게 배어든 절망감이 내게 전해졌다. 
 
나는 그녀를 그리스도에게로 데려가야 했다. 
 
“다시 한 번 작업을 시도할 거예요. 지금처럼 솔직하게 반응해주시면 돼요. 그럼, 시작해 볼게요.”
 
나와 그녀 사이에 그리스도가 계시듯, 상처 입은 그녀와 현재의 그녀 사이에도 그리스도가 계시다. 
 
현재의 그녀가 어린 연수를 그리스도에게 데려다준다면,  그녀는 예수님께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나는 정말로 궁금했다. 
 
그녀는 어렵게 첫 마디를 꺼냈다. 
 
“예수님, 이 아이는 어린 시절 저예요.” 
 
그녀의 감정이 요동쳤다.  
 
“저는 상처가 많아서, 도저히 연수를 돌봐줄 수 없어요. 이십 년이 지나도 연수는 스스로를 돌볼 수 없어요. 너무 불쌍한 아이에요. 
 
제가 치유돼서 연수를 돌볼 수 있을 때까지, 예수님이 대신 돌봐주시면 안 돼요? 
 
예수님이 연수를 잠시만 맡아주세요. 제가 치유되면… 어린 연수를 찾으러 올게요….” 
 
그녀는 오열하며 울었다. 
 
그녀의 마지막 말에, 나 역시도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내가 들고 있던 노트에 눈물이 투두둑 떨어졌다. 그녀의 말을 받아 적던 메모가 번졌다. 
 
나는 잉크가 번져나가는 노트에 시선을 고정하고, 그녀가 마음껏 울도록 충분한 시간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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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감정이 차분해졌을 때, 나는 다시 물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할 때, 예수님의 표정이 어떠셨나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그녀가 만난 예수님은 말로 다할 수 없이, 따뜻했다. 정서적, 신학적으로 온전한 예수님이셨다. 
 
내가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었다.
 
그녀가 말했다.  
 
“내가 나를 돌보지 못할 때에도, 나를 돌봐줄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 같아요. 
 
상처 입은 나를 예수님께 데려다줄 수 있다니, 그 자체만으로 안심이 돼요. 
 
지금까지 나는, 다른 누군가를 끊임없이 찾아다녔거든요.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치 마약에 중독된 사람처럼 끊을 수 없었어요. 
 
말씀해주신 대로, 상처에는 완치가 없다는 말에 동의해요. 과정이 쉽지는 않겠죠. 
 
하지만, 이제부터, 저는 나 자신을 돌볼 거예요. 절대로 공터에서 혼자 울게 내버려 두지 않으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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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스러운 감정이 밀려들었다. 
 
나는 그녀가 부러웠다. 
 
역설적인 상황이었다. 
 
나는 그녀와 똑같은 성경을 읽고, 똑같은 예수님을 믿는다. 그러나, 나의 예수님은 그녀처럼 따뜻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그녀보다 지식적으로 예수님을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성경 구절을 외우고, 더 많은 시간 기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따뜻함에 관한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누구를 원망하겠나. 아무도 원망할 수 없다. 내가 살아온 인생이었다.  
 
그녀와 똑같은 방식으로 나는 상처 입은 나 자신을 예수님께 내어 맡긴다. 
 
좁고 어두운 방 안에 홀로 갇혀 매질을 당하는 아이는 삼 십 년이 지나도, 두려움에 떤다. 
 
사라지지 않는 두려움으로 평생을 고통받는 아이는, 여전히 두려운 채로 상담실 안에 머문다. 
 
좁고 어두운 방 안에, 자신을 만나주셨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을 직접  다시 만날 때까지 좁고 어두운 방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나의 예수님은 따뜻하지 않아도, 상처 입은 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따뜻하시다. 나는 같은 공간에서 따스한 온기를 느낀다. 
 
내가 상처 입은 한 사람을 저버리지 못하는 이유다. 어쩌면, 나는 예수님께 사랑받기 위해, 상처 입은 한 사람을 마주하는 것이다. 
 
나는 따뜻한 예수님이 미치도록 그립다.

당신이 살아나기를

“갑자기 남편이 죽었어요. 작년 어느 날, 사고로 떠나버렸죠. 남편을 따라 죽고 싶었지만 아이들만 두고 갈 수는 없잖아요. 힘들어도 참고 또 참았어요. 나중에 천국에서 남편을 만나면 수고했다고 말해주지 않을까 싶어서요.” 
 
T는 마흔일곱, 두 아들의 엄마다. 남편은 포크레인 기사였다. 신도시 예정지구에 대규모 공사가 진행되면, 그의 얼굴을 몇 달 동안 볼 수 없었다. 아내는 남편이 보내오는 돈으로 살림을 하고 아이를 키웠다. 날씨가 춥거나 더운 날이면 남편이 걱정스러웠다. 
 
가족을 위해 고생하는 남편에게 어떻게든 힘이 되고 싶어 아이들 사진을 열심히 찍어서 보내줬다. 남편이 집에 오는 날이면 그가 좋아하는 삼계탕을 끓어주며 힘내라고 말했다. 남편은 그저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아내는 남편이 표현을 못해도 가족을 끔찍하게 사랑한다고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과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서 전회가 왔다. 남편이 교통 사로고 숨졌다고. 다급하게 병원으로 가서 싸늘하게 식은 남편을 보는 순간, 그녀는 기절했다. 
 
남편은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웠다가 변을 당했다. 차에서 내려 담배를 한 대 태우고 다시 차에 타려는 순간, 자동차 타이어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아 플래시를 가져와 바닥에 엎드려 타이어를 살펴보고 다시 몸을 일으키는 순간, 쾅 소리가 났다. 도로 위를 달리던 1톤 트럭 사이드 미러에 머리를 부딪쳤다.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미 그는 숨을 거둔 뒤였다. 
 
남편 죽음에 대해 말하던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그녀의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은 슬픔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흔들렸다. 그녀는 울어야 했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그녀는 두 아이들을 위해서 꿋꿋이 살아야 했다. 강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감정을 억누르며 살았다. 
 
갑작스럽게 떠난 남편을 뒤로 하고, 그녀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그녀는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두 달이 흘렀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 유품을 정리하다가 남편의 트럭에서 낯선 휴대폰을 발견했다. 
 
그 안에는 낯선 여자와 찍은 사진이 담겨 있었다. 주고받은 문자에는 성적인 농담, 진한 애정 표현이 가득했다. 마음속에서 흙탕물이 일었다. 남편을 그리워하던 감정이 증오심으로 바뀌었다.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제가 남편을 잘못 본 걸까요? 남편에 대한 모든 신뢰가 무너졌어요.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이제 더 물어볼 수도 없어요. 가슴 속에 묻고 살아야겠죠. 남편이 미워요.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요?”
 
그녀는 삶을 포기하려고 수면제를 사 모았다. 유서를 지니고 다녔지만 실행할 수 없었다. 아이들 때문이었다. 두 아이는 엄마가 아니면 아무도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자랐다. 
 
시댁은 남편이 죽고 나서 돈 문제로 갈라섰다. 트럭을 매입할 때 돈이 모자라 남편 형의 명의로 대출을 받았다. 남편이 죽자 아주버니는 트럭을 자신의 회사에 귀속시키고 돈 한 푼 가져다주지 않고 인연을 끊었다. 아이들에게는 엄마뿐이었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
 
그녀를 위로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떤 영화나 소설보다도 비극적이다.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은 그녀에게 남겨진 것은 유산이 아니라 남편의 불륜 증거뿐이었다. 그 고통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마치 길을 걷다 강도 만난 사람 같다. 어두운 밤길을 걷던 그녀는 강도가 휘두른 칼에 배를 찔린다. 길에 쓰러진 그녀는 살아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두 아이가 생각나서 더듬더듬 주머니에 손을 넣고 휴대폰을 꺼내 구급차를 부른다. 사이렌 소리를 들은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구급차 안에서 그녀는 생각한다. 
 
‘살아야 한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살아야 한다. 살아서 아이들 곁으로 가야 한다.’   
 
상담실을 찾은 사람은 용기 있는 사람이다. 그녀는 자기 손으로 상담실에 전화를 걸었다. 피를 흘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 신고를 한 것이다.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위해 꼭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수술대 위에 누워 상처 부위를 치료받기 원했다. 찢고 꿰매는 수술의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기 원했다.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길 위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간다. 자신을 기다리는 소중한 가족을 남기고 눈을 감는다. 그녀는 생존자다. 극적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다. 
 
수술대 위에 누운 그녀에게 필요한 처방은 ‘격려’다. 격려는 절망을 넘어 용기로 나아가게 한다. 진부한 말이지만 진실을 말하고 싶다. 그녀는 자신을 절망을 확대하는 동시에 잠재력을 축소하고 있다. 승리의 소식은 묵인하고, 패배의 소식을 수용한다. 이미 일어난 일을 바꿀 수는 없다. 남편을 살릴 수 없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고 물을 수 없다. 과거에 일어난 일이다. 
 
그녀를 짓누르는 절망의 실체는 미래에 관한 것이다. 미래에 대한 절망에는 근거가 없다. 미래에 대한 절망은 그녀의 추측으로 구성되어 있을 뿐이다. 그 절망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녀는 자신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다고 한다. 자신이 죽어 없어지면 아이들이 살아남을 수 없다. 그래서 그녀는 생존한다. 
 
하지만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는 건 진실이 아니다. 그녀는 이미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감정이 그녀를 속인다. 살아남은 그녀에게 죽으라고 말한다. 
 
희망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녀가 살아남은 경험이다. 이 경험이 그녀를 끝까지 지켜줄 것이다. 그녀의 본능 속에 생존의 DNA가 숨어있다. 절망이 축소되면 잠재력이 고개를 든다. 그녀는 책임지는 사람이다. 회피하거나 외면하거나 변명하지 않는다. 아이들에 대한 책임을 고스란히 그녀의 두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 
 
그 무게는 상당하지만, 그녀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기운을 차릴 동안 누군가 그녀를 포기하지 않도록 격려해준다면 그녀는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고통스런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더 깊은 의미를 발견하며 미래로 나아갈 것이다. 
 
그녀는 한 달 전부터 집 앞 공방에 나가 퀼트를 배우기 시작했다. 교회에서 가족처럼 지내던 한 언니의 부탁을 더 이상 거절 할 수 없었다. 손으로 작은 천 조각을 이어 붙이는 게 무슨  도움이 될까 생각했다. 그런데 남편에 대한 슬픔, 원망이 머릿속에서 잠시나마 사라진 경험을 했고,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일주일 동안 매달려 작은 작품 하나를 완성하자 성취감이 밀려왔다. 일상의 변화가 찾아왔다. 아이들 간식을 준비하고, 숙제를 도와주는 자신을 발견했다. 
 
집 앞에 작은 공방을 열고 싶다는 꿈도 생겼다. 아이들 등교 시간에 공방을 열고, 하교 시간에 맞춰 공방을 닫으면 된다. 아이들 곁을 지키면서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었다. 차분히 준비하고 기다리면서 그녀는 다음 인생을 준비했다. 
 
“지금은 제 몸 하나 추스르기 힘들지만 언젠가는 다른 사람은 돕고 싶어요. 이번 일로 많은 것을 깨달았거든요. 예전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니까. 제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을 고민하면서 살아야죠. 모든 고난에는 뜻이 있어요. 단지 아직 그걸 발견하지 못한 것뿐이죠.” 
 
죽음과 생명의 경계에는 사건이라는 울타리가 있다. 그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은 우리의 선택이다. 사건은 사건일 뿐이다. 그 사건에 대한 관점이 우리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나는 바란다. 당신이 살아나기를. 소소한 행복에 대해 잠시 떠올리며 미소 짓는 것만으로 당신은 살아날 수 있다. 어서 일상으로 돌아오라. 그것이 당신이 그토록 바라는 행복일 테니.

도둑을 지키는 여자

희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앞에 앉았다. 
 
아파트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녀는 손에 쥔 야구방망이를 단단히 잡았다. 혹시라도 누군가 문을 열면, 사정없이 내려칠 작정이었다. 
 
그녀가 열여덟 살 때였다. 
 
“희수야. 너 잠 안 자고 뭐 하는 거야?” 
 
인기척을 느낀 엄마가 현관 앞에 우두커니 앉은 희수에게 물었다. 
 
희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을 안 자고 뭐 하냐고 희수야?” 
 
희수는 현관문을 똑바로 응시한 채,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둑 지키잖아.” 
 
엄마는 당황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희수야?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빨리 가서 자.” 
 
“엄마는 상관하지 마.”
 
다음 날, 희수는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정신과 의사는 희수에게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말했다. 
 
“요즘 고등학생들이 스트레스가 많아요. 입시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희수의 엄마는 불안했지만, 의사의 말을 신뢰하고 싶었다. 
 
정신과에 다녀온 이후에도, 희수는 한 달에 한 번꼴로 밤에 일어나, 도둑을 지켰다. 
 
그녀의 엄마는 시간이 빨리 흘러, 희수가 이상한 증상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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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 달에 한 벌꼴인지 아세요? 제가 생리하는 주기마다 도둑을 지킨 거예요. 엄마는 같은 여자면서, 그것도 모른 거죠. 얼마나 무심한 여자인지 아시겠죠? 저한테 관심이 없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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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주섬주섬 내리는 토요일 아침이었다. 
 
“희수야. 그만 좀 자고 일어나. 너는 주말마다 그렇게 늦잠을 자니? 엄마, 지금 오빠랑 백화점에 다녀올 테니까, 일어나면 아침밥 챙겨 먹어.” 
 
희수는 샛눈을 뜨고, 시계를 확인했다. 엄마를 힐끔 보고는, 짜증 난다는 듯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뒤돌아누웠다. 
 
“고등학생이 잠을 저렇게 자.” 
 
현관에서, 오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게 말이다. 어쩌려고 저러는지 모르겠어.” 
 
엄마가 장단을 맞췄다. 
 
“한심하다, 한심해.” 
 
오빠가 남긴 마지막 말에, 희수는 정신이 또렷해졌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머그컵에 우유를 따라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코코아 분말 가루를 세 숟가락 넣었다. 차 스푼으로 코코아를 저으며, 창가에 섰다. 주섬주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머그컵 안의 코코아가 입술에 닿았을 때, 쇠로 된 현관문이 쿵쿵 울렸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손에 들고 있던 코코아를 놓쳤다. 머그컵은 바닥에 내동댕이 쳐지고, 코코아는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그녀는 얼어붙은 채,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저 택배인데요, 반품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안에 계시나요?”
 
그녀는 숨을 죽였다. 
 
인터폰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카메라에 비친, 남성은 검은색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랫도리에서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 코코아 위에 주저앉아서 그런 게 아니었다. 때아닌 생리가 시작된 것이다. 
 
“뭐야, 이거? 집이 왜 이렇게 난장판이야?” 
 
오빠가 말했다. 
 
“희수야! 이게 뭐야.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엄마가 말했다. 
 
사방으로 튀겨서 굳어버린 코코아 자국은 차갑게 식어버린 핏자국처럼 참혹했다. 마치 살인사건의 현장을 방불케 했다. 
 
“이게 무슨 일이래?” 
 
희수의 엄마는 물걸레로 사방에 새겨진 코코아 자국을 닦아내면서 짜증스럽게 말했다. 
 
침대에 누워 울고 있는 그녀를 그대로 내버려 둔 채였다. 
 
자정이 넘은 시각, 그녀는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앞 베란다 창고에서, 오빠가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야구방망이를 꺼냈다. 정자세로 현관 앞에 앉아, 밤을 지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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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꿔요. 지금까지 여러 명의 상담자를 만나봤지만, 내가 왜 이런 꿈을 꾸는지 정확히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나는 왜 이런 꿈을 꾸는 걸까요?” 
 
그녀는 꿈에 대해 말했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내 방에 들어와요. 검은 모자에 검은 마스크, 나는 그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없어요. 그 남자는 내 존재를 알지 못해요. 
 
나는 이 모든 것을 내 옷장에서 지켜보고 있어요. 그 남자는 옷장으로 다가와, 옷장 아래 서랍을 열죠. 나는 살짝 열린 옷장 틈으로, 그 남자를 마주 봐요. 
 
그 남자는 서랍을 열고, 내 양말을 훔쳐서 달아나요. 그 남자가 떠나고 나면, 나는 내 양말을 돌려달라며 엉엉 울죠.
 
이 꿈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녀와 나 사이에 묘한 긴장이 흘렀다. 그녀는 차분하게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궁금해서 던진 질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의도가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내게 퀴즈를 낸 것이다. 내가 안전하고 믿을만한 사람인지 그녀의 방식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그녀는 상담실에 남을 수도, 상담실을 떠날 수도 있었다. 그녀는 이미 여러 명의 상담자를 만나봤고, 그동안의 상담이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새로운 상담자를 끊임없이 찾아다닌다. 그녀는 왜 다른 내담자들처럼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말해주지 않는가? 알 수 없었다.
 
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떠올랐다. 
 
첫째, 그녀가 그렇게 질문한 의도를 묻는다. 의도를 묻는 과정에서, 그녀 자신만의 고유한 “의미”를 찾아낸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녀가 무슨 일을 겪었고, 왜 그런 꿈을 꾸는지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 앞에 꼿꼿하게 서 있는 그녀는 자신이 겪은 일을 순순히 말해줄 의도가 없어 보였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판단하냐고 묻는다면, 나도 모르겠다. 그녀의 눈빛은 내게 답을 맞힐 수 있겠냐고 묻는듯했다. 
 
둘째, 그녀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상담자와 내담자의 관계를 건강하게 설정하기 위해, 잠시 동안 교육적인 대화를 나눈다. 
 
상담자는 초능력자나 점쟁이가 아니다. 내담자가 모르는 것을 상담자가 알 수는 없다. 
 
내담자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정리해서, 보다 명확하게 내담자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상담자의 역할이다. 
 
내담자가 상담자의 능력을 테스트한다거나, 상담자와 힘겨루기를 한다면 상담의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다. 
 
교육적인 대화를 통해, 내담자가 상담자를 바라보는 관점에 변화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도 효과가 없을 것 같았다. 
 
만약 내가 그런 태도를 취한다면, 그녀는 예의 바르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자리를 떠날 것이다. 
 
셋째, 솔직하게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때로는 상담자 스스로가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는 것이 상담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간다. 
 
상담자가 솔직하게 자신을 개방했기 때문에, 내담자가 적극적으로 자신을 개방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이다. 
 
단, 기술이 아닌 진심을 담아야 한다. 진심이 없으면, 상담자는 실제로 무능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진심을 담으면 무능함도 실력이 될 수 있다. 
 
내가 “모르겠다.”라고 솔직히 말한다면, 그녀가 어떤 결정을 내릴까? 
 
상담은 즉시 종결될 것이었다. 내가 그 말을 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상담실을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그녀가 원하는 방식으로 대화하는 것이다. 그녀가 묻는 말에, 군더더기 없이 대답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틀린다면? 
 
어차피 그녀는 떠날 것이다. 
 
만약 내가 맞춘다면? 
 
몇 세션을 더 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그것이 내게 실제적인 유익이 있을까?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상담은 일대일로 비밀리에 진행된다. 그녀가 나를 유능한 상담자로 인정해준다고 해도 다른 내담자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녀와의 상담을 지속하고 싶은가? 
 
자존심 때문일까? ‘너도 다른 상담자들과 다를 바 없구나’라는 식으로 나를 평가하는 것이 불편한 것일까? 
 
전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지만, 단지 그런 이유에서 상담을 지속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나는 왜 그녀와의 상담을 지속하고 싶은 것일까? 
 
이미 중년이 되어버린 그녀는 이제껏 자신을 안전하게 개방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퀴즈를 멈추지 않는 이상, 상담실을 전전하는 기약 없는 여정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멈춰야 했다. 그리고, 진실을 말해야 했다. 그곳에 진정한 자유가 있었다. 
 
꼭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그 일을 해주기를 바랐다. 
 
그녀는 유능한 상담자들을 십수 년 간 만나온 터였고, 기적은 없었다. 무능한 내가 그녀를 마주한 이유였다. 유능한 상담자들을 거치고 거쳐, 나에게 흘러든 것이다.  
 
제아무리 유능한 상담자라도, 스스로 상담실을 떠나려는 내담자를 변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상담자는 상담실 밖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무모해지기로 했다. 
 
정면돌파를 선택한 것이다. 
 
“당신은 어릴 때, 성적인 공격을 받았을 거예요. 옷장에 숨을 수 있는 나이였다면, 아주 어린아이였겠죠. 
 
끔찍한 일을 저지른 사람은 아는 사람은 아닐 겁니다. 익명의 사람일 거예요. 
 
당신이 고등학교 때 겪은 일은, 최초의 사건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나에게 그것이 최초의 사건인 것처럼 말했어요. 의도적으로 나를 혼란스럽게 한 것이죠.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나에게 제시한 유일한 단서이자 힌트였을 겁니다. 내가 문제를 맞추기를 바란 것이죠. 
 
고등학교 때, 당신이 인터폰 앞에서 마주한 남자가 쇠사슬을 끊은 거예요. 그 바람에, 지하 감옥에 가둬놓은 괴물이 탈출한 것이죠. 
 
당신의 내면 깊숙이 숨겨진 상처를 그 사건이 끄집어 낸 겁니다.  
 
당신이 어린 시절 끔찍한 일을 겪은 그날에도, 비가 내렸을 가능성이 높아요. 
 
평소에 나는 절대로 내담자가 말하지 않는 내용을 앞서서 추측하지 않습니다. 내담자의 인격을 무시하는 행동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나는 지금 무모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당신이 원했기 때문에, 내 멋대로 당신을 추측해버린 겁니다. 
 
자,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실 건 가요? 아니면, 평소처럼 예의 바르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상담실을 떠나버리실 건가요?”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녀가 침묵한 몇 초의 시간 동안, 나는 늙어버릴 지경이었다. 
 
그녀는 자세를 고쳐앉고,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다섯 살 때였어요.” 
 

 
“희수야. 엄마 나갔다 올 테니까, 잠깐만 집에 있어.” 
 
“어디 가는데, 엄마?” 
 
“갑자기 비가 오잖아. 오빠가 우산도 없이 학교에 갔어. 오빠 비 맞으면 안 되니까, 엄마가 데리러 가려고. 잠깐만 집에 있어. 우리 희수 씩씩하잖아.” 
 
희수의 오빠는 그녀보다 일곱 살이나 많았다. 열두 살 남자아이에게 비를 맞히지 않으려고, 다섯 살 난 여자아이를 집에 혼자 남겨둔 것이었다. 
 
엄마는 우산을 챙겨들고 나가면서, 실수로 문을 잠그지 않았다. 단독주택이라 길 가던 사람이 담장 너머로 고개를 들면 거실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희수는 거실에 누워 TV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거실 문이 열리고, 도둑이 들어왔다. 검은 모자, 검은 마스크를 쓴 강도는 희수를 덮쳤다. 어린 희수는 고통스러웠다. 하반신이 잘려나가는 듯했다. 
 
비에 젖은 남자의 냄새는 역겨웠다. 남자는 희수를 바닥에 내버려 두고, 안방으로 들어가 돈이 될 물건들을 훔쳐서 달아났다. 
 
희수는 가만히 일어나, 옷장으로 걸어갔다. 피에 젖은 속옷을 벗어서 세탁기에 넣고, 새로운 속옷으로 갈아입었다. 
 
“희수야! 이게 무슨 일이야?” 
 
엄마는 안방으로 달려 들어가, 잃어버린 물건들을 살폈다. 장롱 안에 곗돈이 사라진 것을 알고 나서, 엄마는 하얗게 질려버렸다. 
 
희수를 째려보며 말했다. 
 
“넌 그때 뭐하고 있었어?”
 
희수는 소파에 엎드린 채로 말했다. 
 
“여기 이렇게 누워 있었어.”
 
엄마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이 바보 같은 계집애야. 도둑이 들었으면, 얼른 도망쳐야지. 거기 그러고 있으면 어떻게?” 
 
오빠가 옆에서 거들었다. 
 
“내가 있었으면, 야구 방망이로 콱 그냥 때려 눕혔을 텐데….” 
 
희수는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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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충격에 손발이 떨렸다. 손에 쥐었던 만년필을 놓치고 말았다. 만년필이 그녀의 발 앞으로 굴러떨어졌다. 곧바로 몸을 숙여 만년필을 집어 들 여유가 없었다. 
 
그런 내 심정을 이해라도 한다는 듯이, 그녀는 차분하게 몸을 숙여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만년필을 건내주면서, 그녀가 말했다. 
 
“처음이에요. 다른 누군가에게 그날의 일을 말해 본 게….”
 
나를 진정시킨 것은 그녀였다. 그녀의 도움으로 나는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가 따뜻한 표정으로 나를 기다려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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댐의 수문이 열리듯, 그녀는 자신 안에 담겨 있던 이야기를 방출했다. 
 
“엄마는 오빠밖에 몰랐어요. 내가 정신과를 들락거릴 때, 오빠는 유학 준비를 하고 있었거든요. 
 
단독주택을 팔아서, 복도식 아파트로 이사를 했어요. 그 돈으로 오빠 유학 자금을 만들어준 거예요. 오빠는 지금 잘 먹고 잘 살아요. 
 
엄마가 저한테는 뒷바라지 못해준다고, 독일로 유학 가라고 했어요. 거기는 학비가 없으니까, 아무래도 수월하지 않겠냐고. 
 
가서 일 년쯤 지났나? 오빠가 전화를 했어요. 엄마가 아프니까 귀국하라고. 돌봐줄 사람이 없으니까, 나보고 돌봐주라는 거죠. 
 
오빠가 그랬어요. ‘나는 결혼해서 신혼인데, 어떻게 아내에게 병수발을 들게 하냐’고요. ‘네가 와서 돌봐야 한다’고.  
 
저도 참 어리석었죠. 엄마가 아프다는 말에, 걱정이 되더라고요. 귀국해서 엄마를 돌봤어요. 그렇게 십 년이 지났죠. 
 
엄마 돌아가실 때까지 내가 병수발을 다했는데, 엄마가 내 앞으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셨어요. 오빠 앞으로 전부 돌려놓고 세상 떠나셨죠. 
 
내가 이렇게까지 해도, 소용없는 건가? 엄마한테는 오빠밖에 없는 건가? 많이 슬프더라고요. 
 
장례식장에서 오빠가 그랬어요. ‘고생했다. 이제 네 인생 살아라.’라고. 
 
답답했어요.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몰랐거든요. 내 인생을 갈아 넣어서, 엄마를 보살핀 것 같았어요. 세상을 떠난 엄마가 부러울 정도였으니까요. 
 
엄마 돌아가시고, 오빠가 아파트를 팔았어요. 오피스텔을 장만해주더라고요. 그래도, 양심은 있구나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오피스텔이 오빠 명의로 되어 있었어요. 
 
지금은 연락도 안 하고 살아요. 오빠를 보고 싶지 않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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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내게 용서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어떻게 하면, 엄마를 용서할 수 있는지 물었다. 세상을 떠난 엄마가 미워질 때는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어떻게 하면, 오빠를 용서할 수 있는지 물었다.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오빠를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양심이 찔린다고 말했다. 
 
‘용서라니….’ 
 
내 안에 분노가 일어났다.
 
상담이 궤도를 이탈했다. 상담자, 목사와 같은 호칭이 얼굴에 엉겨 붙은 거미줄 같았다. 
 
나 역시 사람이었다. 상담자의 기능을 벗겨내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 그녀 앞에 마주 섰다. 
 
나는 말했다.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은 당신이 아닙니다.” 
 
그녀가 움찔했다. 
 
“네?”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그들입니다.”  
 
다소곳하게 앉아 있던 그녀는 몸의 균형을 잃었다.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짚었다. 점차 그녀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어갔다. 
 
그녀는 이내, 폭포수와 같은 눈물을 쏟아냈다. 감옥에서 풀려난 괴물이 떠내갈 만큼, 강력한 물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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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어요. 남자에 대한 호감조차 없었거든요. 젊을 때, 내가 좋다고 따라다닌 남자들이 있었는데, 번거롭게 느껴져서 떼어내는데 힘들었어요.”
 
그녀가 살아온 인생에서 연애와 관련된 기록은 단 한 줄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남자와의 사랑, 이것은 그녀가 살아온 인생과 전혀 관련 없었다. 그곳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남자분들이 가까이 다가오면, 저는 부담스러워서 멀리하고 싶거든요. 때로는 일상생활에서 부딪힐 때가 있어요.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얼마 전에, 교회에서 행사가 있었거든요. 같이 봉사하다가, 어느 남자 성도하고 사소한 의견 충돌이 있었어요. 너무 사소해서 그분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채지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복잡한 감정으로 빠져들었어요. 괴로워서 미칠 지경이었죠.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어요. 곧바로 집으로 와 버렸죠. 수면제를 한 알 먹고, 바로 잠들었어요. 미쳐버릴 것 같았거든요.”
 

 
“여기 의자는 뭐죠?” 
 
A가 말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남성이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럼, 이것 좀 치우죠. 사람들이 지나는 자리에 이런 게 있으면 다칠 수도 있잖아요.” 
 
“제가요?” 
 
“아, 아니에요. 제가 말실수를 했네요. 그냥 제가 치울게요.” 
 
A는 허리를 굽혀 의자를 들어 올렸다. 몇 걸음 걸어서, 구석진 곳에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A와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A는 그녀의 노력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안내한다고, A가 계속 나서는 바람에, 그녀와의 동선이 겹쳤다. 한꺼번에 사람들이 몰려들어오는 탓에, 자리를 안내하는 사람들이 분주했다. 그 과정에서, A와 그녀가 살짝 부딪혔다.
 
A가 전혀 의식하지 못할 정도의 충돌이었다. A는 여전히 자기 자리에서 서서, 밝게 웃으며 다른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 그녀를 짓눌렀다. 
 
그녀는 함께 행사를 준비하는 여자 전도사님께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다는 말을 남기고 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나는 남자 상담자인데, 그건 괜찮으신 가요?”
 
내가 물었다. 
 
“교회에 계신 목사님들에게는 불안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아요.” 
 
그녀가 말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글쎄요. 목사님들은 조금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아무래도 일반 사람들하고는 다르신 분들이니까요. 물론, 그렇지 않은 목사님들도 계시기는 한데, 대부분 좋은 분들이니까요.”
 
“그렇군요. 한 가지만 더 묻고 싶어요. 내가 당신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목사님도 상처받으셨잖아요. 적어도, 나를 비난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솔직히 제가 이상한 사람이잖아요.  
 
내 인생 밑바닥에 숨겨둔 진실을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 내가 그 말을 내뱉은 순간, 내 자아가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어요. 
 
목사님의 책이나 설교를 듣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용기를 냈죠.  
 
막상 목사님을 만나니까, 또다시 두려운 거예요. 예의 없는 행동이었지만, 다른 상담자들에게 했던 방식으로 목사님을 테스트 한 거죠. 
 
사실 저는, 처음부터 목사님께 제 이야기를 전부 꺼내놓고 싶었어요. 목사님이 내 꿈 이야기를 듣고, 엉뚱한 이야기를 하셨더라도, 제 이야기를 하고 말았을 거예요. 
 
상처받은 사람만이 상처받은 사람의 심정을 알겠죠. 목사님은 이해해주실 것 같았어요. 목사님도 아프셨으니까요.” 
 
탐정놀이는 어리석은 것이었다. 
 
나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점차 희미해졌다. 두 눈에 눈물이 고여, 초점이 흐려졌다. 
 
나는 도무지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 그러면, 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잠시의 공백을 두고, 나는 감정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상담 과정에 충실했다. 
 
상담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나의 미천한 능력과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을 개방하기로 결단했고, 변화의 의지 또한 누구보다 강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진실한 마음이 상담을 더욱 효과적으로 이끌었다. 
 
상처는 완치될 수 없지만,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상처를 돌볼 수 있다는 나의 견해에 그녀는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그녀와의 상담을 종결하는 순간이 생생히 기억난다. 나는 그녀의 삶을 축복했고, 그녀는 밝은 미소를 남겨두고 상담실을 떠났다. 
 
물가에 아이를 내놓는 부모처럼 마음 한편으로 두려웠으나, 그것은 잘못된 감정이었다. 그리스도가 그녀를 지켜주실 것이다. 나는 안심해야 했다. 
 
“예수님은 여기 좁은 상담실 안에 머물지 않으신다. 이곳을 떠나는 그녀와 동행하신다. 상담은 종결되어도, 사랑은 종결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그녀와 함께 하신다.” 
 
이것이 나의 고백이었다.  
 
그녀가 떠나고, 나는 창가에 서서 한참을 머물렀다. 마음속으로 간절한 기도가 흘러나왔다. 나의 진심이 예수님께 전해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녀를 떠나보낸, 저녁이었다. 
 
피곤한 몸으로 집에 들어서자, 다섯 살 난 막내딸이 뛰어나왔다. 
 
“아빠!” 
 
현관 앞에서 마주한, 다섯 살 자리 여자아이. 
 
내 딸과 그녀가 겹쳤다. 
 
그날 그녀는 혼자였다. 그녀가 애처롭게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나를 바라보며,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아이를 끌어 앉았다. 왈칵 눈물이 터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친 곳이 없는지 살폈다. 나는 그대로 아이를 끌어안고, 하염없이 토닥여주며 귓가에 속삭였다. 
 
“많이 무서웠지? 걱정하지 마. 이제, 안전해.” 
 
자신을 끌어안고 엉엉 우는 아빠를, 아이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이도 무언가를 느꼈는지,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아빠, 울지 마. 나 씩씩해.” 
 
울고 있는 나를 달래느라, 아이는 오랜 시간 내 품에 머물렀다.

나한테 떠넘기지 마

“우리 부모님은 당신을 아들처럼 대해주는데, 당신 부모님은 나를 왜 이런 식으로 대하냐고!”
 
I는 결혼 2년 차, 임신 6개월의 여자다. 남편이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에 복학했을 때, 같은 과 선후배로 만났다. 대학에서 같이 공부하고 같은 회사에 입사했다. 하루 일과는 단순했다. 아침에 출근, 저녁에 퇴근, 퇴근 후에 TV 시청과 취침. 주말이면 마치 계약서에 쓰여진 조항을 지켜나가듯이 살림을 나눠서 했다. 요리는 아내, 청소는 남편. 
 
둘 사이에 대화가 사라진 건 결혼하고 처음 맞이하는 어느 명절부터이다. 바쁘게 사는 탓에 시댁에 자주 갈 수 없었다. 명절이 되어 시댁에 찾아갔을 때, 시부모님의 반응이 차가웠다. 시아버지는 며느리를 보고, “오느라 고생 많았다”라는 상투적인 말을 하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시어머니는 인사도 하지 않고 TV만 보고 있었다. 
 
아들은 그런 집안 분위기가 익숙한 듯 차에서 내린 짐을 거실 한 구석에 쌓았다. 아내는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 견뎌야 할지 몰랐다. 남편은 시어머니 옆에 앉아 말없이 TV를 볼 뿐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시부모님 사이가 안 좋은 건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남편이 결혼하기 전에 말했거든요. 부모님 사이가 좋지 않으니까 시부모님 사랑은 기대하지 말고, 자기만 보고 살면 좋겠다고.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어차피 남편하고 사는 거니까. 시댁에는 일 년에 한두 번 가니까 그것이 제게 고통으로 이어질지 몰랐죠. 
 
남편은 부모님 사이에 끼기 싫어했어요. 그러니까 스트레스는 제가 다 받죠. 두 분이 서로 다른 말을 해요. 요구가 다르다고요. 남편에게 말하면 저한테 알아서 하래요. 한 분 말을 들으면 다른 한 분이 서운해 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남편이 외아들이라 시댁 식구 중에 상의할 사람도 없어요.”
 
그녀는 시부모님이 혼수에 대해 과도한 요구를 했다고 말했다. 
 
“제 부모님은 남편에게 아무 요구도 하지 않았어요. 딸만 잘 사랑해주라고. 시부모님은 혼수를 같이 한다고 말했어요. 집과  살림살이를 제 쪽에서 거의 다 했어요. 그것도 모자랐는지 시부모님 한복, 그 형제들 한복까지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남편에게 말했더니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라고 했어요. 전 어이가 없었죠. 
 
남편에게 ‘당신이 가서 정리해야 한다’라고 말했더니 시어머니에게 엄청 혼만 나고 왔어요. 시어머니가 말하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다 듣고 오니, 너무 화가 나더라고요. 제 부모님은 뭐냐고요. 저를 키우면서 고생을 하셨는데, 시부모님에게 무시당하고, 황당한 일을 다 겪었어요. 어느 날은 엄마가 제 앞에서 속상하다고 막 우시더라고요…. 남편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중간에서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려요.”
 
차에서 남편에게 시부모님에 대한 말을 꺼냈다. 남편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내는 그의 표정에 화가 났다. 아내의 목소리가 커졌고, 강도 높은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당신 마마보이야? 왜 아무 말도 못해? 당신도 성인이야!” 
 
순간, 남편이 이성을 잃었다. 자동차 핸들을 이리저리 꺾으며 한 마디만 더 하면 같이 죽어버릴 거라고 말했다. 차가 신호에 걸려 멈췄을 때, 아내는 차문을 열고 내렸다. 바로 뒤에 오는 택시를 잡아탔다. 친정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온 아내는 침대에 엎드려 서럽게 울었다.    
 
남편이 말했다. 
 
“저도 알아요. 장모님, 장인어른이 얼마나 좋은 분들인지…. 제게 과분한 사랑을 주시죠.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내도 예쁘고 착하게 잘 키워주셨죠. 그것만 해도 저는 그 분들을 평생 잘 모셔야겠죠. 제 부모님을 생각하면…. 
 
아내에게는 미안한 마음보다는 부끄럽고 수치스런 생각이 들어요. 제 부모님이지만 저도 이해가 안 되거든요. 아내에게도 여러 번 말했어요. 그냥 그런가 보다 하라고. 그녀는 제가 아무런 노력을 해보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저도 할 수 있는 노력은  다했어요. 그러다 포기한 거죠. 
 
제 부모님은 바뀔 분들이 아니에요. 같이 대화하면 제가 상처를 받아요. 그래서 아내에게 ‘너희 부모님과 다른 분들이니까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 말라’라고 부탁했어요. 그런데 아내는 자기가 잘하면 된다며 저 대신 해보겠다고 하다가, 뜻대로 안 되니까 저를 원망하는 거예요. 저는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우리는 우리대로,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사셔야죠. 최대한 부딪히지 말고.”
 
남편 어린 시절, 아버지는 건축현장에서 일했다. 전국으로 일하러 다녔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심심풀이 고스톱을 치면서 도박에 빠져들었다. 가정의 경제가 기울었다. 
 
어머니는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식당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야 했다. 남편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외삼촌 댁, 고모 댁에 맡겨졌다. 
 
남편이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야 부모님이 조그만 아파트를 마련해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분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고, 남편은 공부를 핑계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두 분은 각자 사는 데 바빠서 제게는 관심이 없었죠. 두 분이 왜 같이 사는지 모르겠어요. 어린 시절부터 저는 혼자 자랐어요. 남들은 제가 외동아들이라 사랑받고 자란 줄 아는데 전혀 아니거든요. 
 
외삼촌 집에 살 때였어요. 아침 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외숙모가 밥을 차려주면서 ‘먹고 살기 힘든데, 누나 애까지 데려와서 이게 뭐냐?’라고 말하자 삼촌이 밥상을 뒤집어엎고 제 앞에서 외숙모와 싸웠어요. 
 
외숙모는 대놓고 표현을 하지 않았지만, 제게 항상 눈치를 줬죠. ‘아, 나는 어디가나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구나. 날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라고 느꼈지요. 다시 부모님과 살면서  좋았던 것은 눈칫밥 안 먹어도 되는 것뿐이었어요. 어린 시절부터 떨어져 살아서 서로 정이 없었죠.” 
 
남편은 부모님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보다 아내가 부모님을 싫어하는 게 고통스럽다고 말했다. 아내가 부모님 이야기만 꺼내면, 남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아내는 그런 남편이 답답했다. 그녀는 남편이 부모님과 관계를 개선해야 더 이상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는 계속 거절했다.
 
 
***
 
남편의 부모는 상처받은 사람들이다. 상처가 치유되지 않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아들에게 집착한다. 어머니에게는 아들에 대한 미안함과 애틋함이 묘하게 얽혀 애증을 만들어냈다. 아들에게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면서도, 무언가 요구하고 싶다. 아들보다 며느리가 편한 게 아니다. 며느리가 아들보다 덜 불편한 것이다. 
 
남편은 부모에게 상처받았다.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 아내가 던지는 말은 그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후비는 것이다. 쓰라리고 아프다. 사람은 조언이 아닌 사랑으로 변화된다. 남편에게 사랑이 필요하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아이를 생각해보라. 홀로 남겨진 채 오랜 시간을 보냈다면 그가 새로운 부모를 만나 새로운 관계에 적응하기 위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남편은 부모와 떨어져 오랜 시간을 보냈다. 부모를 다시 만났어도 그가 온전히 치유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시간도 충분하지 않았다. 
 
남편의 상처가 여전히 붉게 벌어져 쓰라리다. 부모님 이야기만 나와도 먼저 방어하고 긴장한다. 전투태세를 갖춘다. 그런데 아내가 원하는 것은 시부모님과 친정부모님처럼 다정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다. 남편이 아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다. 
 
남편은 자기 상처가 아파서 아내의 상처를 바라볼 여유가 없다. 아내의 말을 충분히 들어주면 그녀는 불편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감정적 여유가 생긴다. 
 
아내가 남편을 바라보는 관점이 시부모님을 바라보는 관점을 결정한다. 남편이 아내를 외면하면 아내는 시부모를 원망하고, 남편이 아내에게 공감하면 아내는 시부모에게 감사한다. 아내는 남편과 결혼했다. 시부모에게 입양된 것이 아니다.      
 
아내가 남편보다 앞서 불편한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내 부모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힘들고 어렵겠지만, 남편과 나, ‘우리 부모’라는 인식을 가진다면 어떻게 될까? 남편을 대신해 시어머니와 소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어머니의 상처가 자신을 꾹꾹 찌를 때마다 남편의 마음을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시어머니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어쩌면 그보다 아내일 수 있다. 남편 상처, 시어머니 상처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내이다. 그녀가 깨달은 바를 신중하고 겸손하게 남편과 공유하면 그의 상처도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남편이 말했다. 
 
“나는 장인 장모님께 감사하고 있어. 날 아들처럼 생각해주시잖아. 우리 부모님도 날 사랑하는 것은 알아. 머리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가슴으로 느낄 수가 없어. 장인 장모님이 날 사랑해주시는 걸 마음으로 느낄 수 있어서 감사해.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겠지. 
 
당신이 임신했을 때, 장인어른을 찾아갔어. 걱정이 된다고, 두렵다고 솔직히 말씀 드렸어. 부모님께 사랑받지 못하고 성장해서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아버님이 나를 한참 바라보시고는 ‘자네, 잘 할 수 있을 거야.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니까’라고 하셨어.” 
 
사랑받고 자란 사람이 사랑할 수 있다. 사랑받고 자란 사람이 미워하고 있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당신이 사랑받고 자랐다면 겸손하라. 당신이 태어난 환경은 당신이 노력해서 얻은 결과가 아니라 주어진 것이다. 사랑받지 못한 배우자를 사랑해주기 바란다. 그 역시 자신이 원해서 상처 많은 가정에 태어난 게 아니라 주어진 것이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사랑 받았다면 사랑을 전해주기 바란다. 그를 뜯어고치기 위해 당신이 이 세상에 온 게 아니라 치유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닐까? 

엄마도 내가 이상해?

“소희 선생님, 잠깐 나 좀 봅시다.” 교무실 중앙에 책상을 놓고 앉은 교감 선생님이 말했다. 
 
한소희는 중저음의 목소리를 듣고 얼어붙고 말았다. 권위적인 말의 무게에 짓눌려,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잠깐 이리 와보시라니까!” 더 커진 교감의 목소리에 한소희는 움찔했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교감 선생님을 향해 걸어갔다. 주위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사람들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레이저 반점이 그녀의 온몸을 가득 매웠다. 걷다가 주춤하면, 일제히 쏴버릴 기세였다. 
 
“아니, 말 길을 한 번에 못 알아들으시는 거야? 바로 앞에 앉은 사람을 몇 번을 불러야 대답을 해요?” 
 
“죄송합니다….”
 
“내가 왜 부른지 알죠?”
 
“….” 
 
“두 달 동안 교육감 온다고 학교 전체가 들썩거리면서 준비를 했잖아. 왜 한소희 선생님만 준비를 안 한 거야? 개망신을 당했잖아! 어떻게 책임질 거야!”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면, 다야? 지금 기간제라고 대충대충 하는 거야?”
 
“….” 
 
“어떻게 두 달 동안 가만히 있다가, 교육감 오는 당일에 준비를 못 했다는 거야? 실험실에서 아이들이 교과서만 가지고 공부하는 게 말이 돼! 빔 프로젝터도 안되고 말이야.” 
 
한소희의 옆자리에 앉은 K 교사가 보다 못해 나섰다. K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교감에게 말했다. 
 
“교감 선생님, 사석에서 이야기하는 게 어떨까요? 사람들 다 보는데, 너무 심하시잖아요.” 
 
교감의 얼굴빛이 붉게 변했다. 헛기침을 하더니,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 됐으니까, 자리로 돌아가 보세요. 그리고, 내년에는 다른 학교 알아보세요. 정교사처럼 일하라고 했더니, 건성건성….” 
 
다음 수업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교무실에 울려 퍼졌다. 선생님들은 썰물처럼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교감은 인파에 몸을 숨겨 도피하듯이, 책상 위에 놓인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K 교사 역시, 한소희에게 한 마디도 건네지 못한 채, 다급하게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교무실은 고요했다.
 
한소희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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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상담 일정을 확인했다. 나의 시선이 월요일 오후 7시에 머물렀다. 한소희가 첫 세션을 시작하기로 예정된 시간이었다. 그녀와의 통화를 떠올렸다. 다급했던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듯했다. 
 
“저는 한소희라고 해요. 목사님이 쓰신 책을 읽고, 연락드렸어요. 지금 제 상황이 절박해서, 당장 내일이라도 상담을 받고 싶어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였다. 
 

 
한소희는 서른두 살의 여성이었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푸른색 긴 코트를 입은 채였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 보였다. 
 
“급하게 연락드렸는데, 시간 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하지요.”
 
한소희는 교무실에서 그녀가 겪은 사건을 말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상담실에 오기 전까지, 그녀는 이틀 밤을 꼬박 뜬 눈으로 지새웠다. 소화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이틀 동안 간단한 음식을 두 끼 밖에 먹지 못했다. 
 
정서적인 문제도 심각했다.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몸살 기운과 두통, 어깨결림, 손떨림 증상까지 그녀를 괴롭혔다. 해가 뜨는 것이 두려웠다. 교감 선생님, 동료 선생님, 그리고 학생들 마저도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았다.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무리 기간제 교사라도 학교의 평가는 중요했다. 다른 지역 다른 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를 지원한다고 하더라도, 무책임하게 학교를 떠난 교사에게 기회를 줄 가능성은 낮았다. 남은 두 달을 어떻게든 버터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결론이었다. 
 
남은 두 달을 혼자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상담을 택한 것이다. 
 
“마음을 열고 이야기해주신 덕분에, 소희 씨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제가 궁금한 것들을 차례대로 질문해 볼게요. 지금처럼 편안하게 답변해주시면 됩니다.” 
 
교무실에서 그녀에게 일어난 사건을 자세히 알고 싶었다. 교감이 그녀를 부르기 전에,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소희 선생님, 교육감 참관수업 많이 긴장되지?” K 교사가 물었다. 
 
“네, 조금이요.” 
 
“너무 긴장하지 마. 어차피 내가 다 준비해야 하는 거니까. 소희 선생님은 내가 부탁하는 것만 옆에서 도와주면 돼.” 
 
“네, 선생님.” 
 
K 교사는 책상 위 책꽂이에서 파일첩을 꺼내들었다.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서류 한 장을 한소희에게 넘겼다. 
 
“여기 이 목록에 있는 물품들 한 번 확인해주고, 없는 물품은 체크 좀 해줘. 이것만 확인해서, 나한테 넘겨주면 돼.” 
 
한소희는 K 교사가 넘겨주는 종이 한 장을 받아들었다. 의외로 간단한 일이었다. 
 
“간단한데요.” 
 
“그럼, 간단하지. 내가 뭐 그렇게 어려운 일 시키겠어? 나머지는 내가 할 거야. 수업 내용 정리해서 이메일로 보내주면, PPT만 하나 만들어줘. 내가 나이가  있다 보니까, 센스가 떨어지는 것 같아. 소희 선생님은 아직 젊잖아. 센스 있게 잘 만들어 봐.”  
 
“지난번에 보니까, 잘 만드시던데요?”
 
“그것도 내 딸한테 부탁한 거야. 이제 고3이라고, 내가 시중들고 있어.”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다, 풋 하고 웃음이 터졌다.
 
“알겠어요, 선생님. 나중에 이메일 보내주세요.” 
 
“항상 고마워, 소희 선생님.” 
 
“제가 고맙죠. 항상 도와주시잖아요.” 
 
한소희는 점심시간에 과학실에 내려갔다. K 교사에게 받은 물품 목록을 확인했다. 단순한 일이었다. 점심시간마다 내려와서 물품을 확인한다면, 한 주 내로 충분히 끝날 일이었다. 
 
일주일 후, 한소희가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 책상 앞에서 수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K 교사가 정시에 맞춰 허겁지겁 교무실에 들어왔다. 
 
“오늘 출근길에 접촉사고가 났어. 사고 처리하느라고 늦었네. 운전에도 나이 제한이 있어야 할 것 같아. 연세 많으신 할아버지가 뒤에서 내 차를 받았지 뭐야.” 
 
한소희는 깜짝 놀랐다. 
 
“병원에 가보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 정도는 아니야. 살짝 부딪혔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래도, 병원에 가보셔야 해요. 교통사고는 사고 난 당시에는 잘 모르거든요.” 
 
“그래, 그렇게 할게.” 
 
“참, 선생님께서 지난 번에 부탁한 물품 확인 끝냈어요.” 
 
한소희는 파일첩을 펼쳐들어, K 교사에게 확인을 부탁했다. 
 
“잘 했네. 이렇게 하면 돼. 나도 수업 내용 정리 거의 끝냈으니까, 이번 주 내로 이메일 보내줄게.”
 
K 교사는 한소희에게 전해 받은 파일첩을 책상 위 책꽂이에 끼워 넣었다. 첫 수업을 알리는 벨이 울리자,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교실로 향했다. 
 
다음 날, 아침 K 교사는 출근하지 않았다. 한소희는 K 교사가 걱정돼, 문자를 보냈다. K 교사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나 방심했나 봐. 어젯밤에 허리가 아파서 한숨도 못 잤어. 일주일 정도 입원해서, 치료받으려고.” 
 
“잘 하셨어요. 아무 걱정 마시고, 일주일 푹 쉬다 오세요.”  
 
한소희는 교육감 참관 수업이 은은하게 걱정되었다. 혹시라도 K 교사의 퇴원이 늦어진다면, 열흘 뒤에 있을 교육감 참관 수업이 자신의 몫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소희는 교육감 참관수업 일정이 다가올수록 불안하고 초조했다. K 교사에게 하루라도 빨리 퇴원하라고 다그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 주 내로 보내주겠다던, 이메일은 깜깜무소식이었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에 새벽 예배를 나가기 시작했다. K 교사가 하루라도 빨리 퇴원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아니면, 이메일이라도 하루빨리 받아보기 원했다. K 교사가 이메일을 보낸다는 것은, K 교사가 직접 수업하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한소희의 기대와는 달리, K 교사는 일주일 내내 연락을 하지 않았다. 교육감 참관 수업이 3일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다. 한소희는 K의 문병을 갔다. 만나서 직접 확인할 생각이었다. 
 
한소희는 K가 입원한 병실에 들어가, 인사치레의 안부를 묻고 나서, 참관 수업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선생님, 혹시 참관 수업은 예정대로 진행하실 수 있으신 거죠?” 
 
“그래야지. 내일이나 모레 퇴원할 생각이야.” 
 
한소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희 선생님, 많이 걱정했구나. 뭘 그런 걸 걱정해? 그거 확인하려고 병원까지 온 거야?”
 
한소희는 움찔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K가 피식 웃었다. 
 
“뭘 그런 게 아니야. 솔직히 말해도 돼.” 
 
K의 말에, 한소희 역시 긴장이 풀렸다. 
 
“솔직히 조금 걱정됐어요. 혹시라도, 내가 수업을 맡게 되면 어떻게 하지…. 평소에 안 나가던, 새벽 예배까지 나갔다니까요.” 
 
“걱정도 팔자다, 소희 선생님.”
 
K는 한소희의 한쪽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제가 소심한 성격이라니까요.” 
 
한소희는 어색하게 웃었다. 
 
한소희는 일단 안심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주말을 보내면 될 일이었다. ‘월요일이 되면 K 교사가 퇴원을 할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K 교사는 퇴원하지 않았다. 한소희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참관 수업을 맞이했다. 과학실의 보조교사 역할을 맡았던, 한소희가 교육감이 참관하는 수업에서 홀로 서서 수업을 진행해야 했던 것이다. 
 
결과는 최악이었다. 
 
모든 책임을 한소희가 짊어져야 했다. K 교사는 참관 수업 일정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퇴원을 했다. 당일 오후가 돼서야, 학교에 들른 것이다.
 
상식적으로 보면, K 교사가 비난받아야 하겠지만 아무도 나서서 한소희를 두둔해주는 교사는 없었다. 전후 맥락을 모르는 다른 교사들은 아마도 K 교사의 부득이한 사정으로, 한소희가 책임지고 수업을 진행해줄 것이라 예상했을 것이다. 
 
교감 선생님의 혹독한 비난이 쏟아져 내릴 때, 한소희를 감싸준 K 교사였다. K 교사의 행동을 지켜본 다른 교사들은 지레짐작 판단했을 것이다. 신입 기간제 교사의 명백한 실수라고. 
 

 
“그날 사건에 대해, K 교사와 따로 이야기해보셨나요?” 내가 물었다. 
 
“네, 아주 짧게 대화를 나눴어요.” 
 
“K 교사가 뭐라고 하던가요?” 
 
“미안하다고 했어요. 몸이 계속 아파서, 도저히 퇴원할 수가 없었다고 했죠. 상황이 이렇게 될지 몰랐다면서, 이해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자매님의 반응은요?” 
 
“그래도 너무하신 거 아니냐고 물었어요. 그 말을 할 때는 저도 흥분한 상태라 예민한 말투였어요.”
 
“K 교사 자기 잘못을 인정하던가요?” 
 
“아니요. 제가 공격적으로 말하니까, K 선생님도 당황하셨나 봐요. 갑자기 태도를 바꾸시더라고요.” 
 
“어떻게요?”
 
“그날 소희 선생님이 문자로 “아무 걱정 하지 말고 푹 쉬라고” 말하지 않았냐고. 그래서, 아무 걱정 없이 쉬다 왔는데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하냐고. 오히려 저한테 따지시더라고요. 거기서 제가 할 말을 잃었어요. 대화가 중단됐죠.”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으셨어요?”
 
“아니요. 머리가 멍해지면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어요.”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어떤 심정이었는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두려웠던 것 같아요. 이미 지나간 일이고, 상황은 바꿀 수 없잖아요. 나는 기간제 교사이고, 그분은 정교사이고요.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내 잘못 아니라고 말할 자신까지는 없었어요.” 
 
“무엇에 대한 두려움일까요?”
 
“….”
 
한소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두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티슈로 눈물을 닦아내며, 감정을 애써 진정시키고자 했다.
 
 나는 침착하게 기다렸다. 그녀가 천천히 생각하기를 바랐고,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둔 진실을 말하기 원했다. 
 
“사람들이 저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봐 두려웠어요. 제가 조금 더 강하게 말했다면, K 선생님뿐만 아니라, 주변 모든 선생님들이 저를 이상하게 봤을 거예요. 그런 상황을 감당할 힘이 저한테 없거든요. 저는 그냥 사람들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아요. 조용히 지내고 싶거든요.” 
 
그녀가 진실을 말했다. 그녀의 마음속에 숨겨진 비밀의 문이 비스듬히 열렸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두렵다는 말이 무슨 뜻이죠?” 
 
“제가 살짝 이상하지 않나요? 말투도 어눌하고, 걷는 모습도 조금 이상하고. 목사님은 제가 상담실을 들어올 때, 제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셨나요?” 
 
그 순간이었다. 비디오테이프가 빠른 속도로 뒤로 감기듯이, 한소희가 상담실에 처음 들어오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한소희는 미세하게 절뚝거렸다. 상담실 입구와 상담실 내부까지의 거리는 짧았다. 내담자를 안내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는 한소희보다 한 걸음 앞서 걸어야 했다. 한소희가 걷는 것을 볼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는 상담실에 들어선 그녀가 의자에 앉기까지였다. 굳이 걸음걸이를 세어본다면, 세네 발자국이었다.  
 
한소희의 말투 역시 느리고 차분했다. 가끔 복잡한 단어를 말할 때,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상담과 관련해서 중요한 정보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에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면, 상담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소희가 자신의 말투와 걸음걸이를 상담실 테이블에 올려놓는 순간, 그녀의 말투와 걸음걸이는 반드시 언급하고 넘어갈 중요한 의제가 됐다. 열리다 멈춰버린, 비밀의 문을 그녀가 활짝 열어젖힌 것이다.
 

 
한소희가 9살이었던, 3월의 주말이었다. 그녀의 가족은 가까운 놀이공원에 갈 예정이었다. 마음이 들뜬 한소희는 부모가 준비하는 동안, 집 안에 머무를 수 없었다. 
 
“엄마, 나 먼저 나가서 기다릴게.” 
 
“안돼, 같이 나가. 조금만 기다려.” 
 
“나 잠깐 슈퍼에서 살 거 있단 말이야.” 
 
“안 된다고. 어차피 우리도 슈퍼 잠깐 갈 거야. 같이 나가.” 
 
“싫어. 나 혼자 갔다 올 거야.” 
 
한소희가 신발을 신고, 현관 밖으로 나가는 동안 엄마는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고 있었다. 두 손가락에 로션을 잔뜩 묻혀 얼굴에 바르면서, 현관 밖을 나가는 한소희에게 소리쳤다. 
 
“너 차 조심해야 돼! 앞에 잘 보고 다녀.”
 
화장실에서 씻고 나오던, 그녀의 아빠가 아내에게 말했다. 
 
“아니, 소희 혼자 나가게 내버려 뒀어?” 
 
“몰라, 혼자 간 데. 바로 집 앞인데, 뭐.” 
 
“걱정인데….”
 
“그렇게 걱정되면, 당신이 나가봐. 당신은 옷만 입으면 되잖아.” 
 
그녀의 아버지는 이상하게 불안했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딸을 따라나섰다. 
 
한소희가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걸을 때,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한소희는 까치발을 하고, 집집 사이에 좁은 골목 틈새로 연기가 나는 곳을 찾았다. 그녀의 눈에 펼쳐진 것은 봄날의 맑은 하늘뿐이었다. 연기가 나는 곳은 없었다. 
 
한소희는 손바닥으로 담장을 짚어가며, 골목을 따라 걸었다. 그녀가 코너를 돌아, 슈퍼 앞 사거리에 들어섰을 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하얀색 승합차가 그녀를 들이박은 것이다. 그녀의 몸이 공중에 떴다가,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응급환자를 싣고 가던 구급차가 좁은 골목길을 과도한 속도로 달리다, 한소희를 치어 버린 것이다. 구급 대원이 부리나케 차에서 내려, 한소희를 살폈다. 
 
그녀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무릎은 반대쪽으로 꺾여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중대한 상황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구급 대원은 한소희를 구급차에 태우고, 병원으로 이송했다. 
 
멀리서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에, 한소희의 아버지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가 사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  슈퍼의 사장이 덜덜 떨리는 손짓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한소희의 아버지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멘트 바닥에 흥건한 피를 보고, 잠시 기절했다. 
 

 
“머리를 심하게 다쳐서 큰 수술을 여러 번 받았어요. 일 년 내내 병원에 살다시피 했죠. 어렸지만, 정말 힘들었던 것 같아요. 이마부터 뒤통수를 가로지르는 수술 자국이 생겼거든요. 지금은 머리카락으로 가릴 수 있는데, 당시에는 수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머리카락이 없었어요. 
 
부모님이 조금만 신중하셨더라면, 머리카락이 자란 다음에 학교에 보내셨을 텐데, 저희 부모님은 그러지 않으셨어요. 출석 일수를 채우지 못하면 큰일 나는 줄 아셨나 봐요. 머리에 수술 자국이 선명한데, 바로 학교에 갔어요.”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녀가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이유, 그녀의 얼굴이 유독 하얗고 창백한 이유를 그제서야  알게 된 것이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파란 코트 역시, 그녀의 걸음걸이를 조금이라도 숨겨볼 의도였던 것이다. 
 
9살의 교통사고 이후, 한소희가 받은 고통을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목이 메였다. 내가 입술을 떼서, 그녀에게 말을 건네려고 하는 순간, 눈물이 터져버렸다. 한소희도 함께 울었다. 
 
“그날 차라리 죽었어야 했나 봐요.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들어요, 목사님….” 
 

 
“괴물이래요, 괴물이래요.” 
 
한소희의 같은 반 남학생들이 떼를 지어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친구들이 두려웠다.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에 숨어들었다. 변기에 앉아 다음 수업을 알리는 벨이 울리기만을 기다렸다.  
 
“엄마, 나 학교 가기 싫어.” 
 
한소희는 엄마에게 참아왔던 말을 내뱉었다. 
 
“친구들이 나를 이상하게 본단 말이야.” 
 
엄마는 딸의 이야기를 한참 동안 들어주었다. 한소희가 말을 마치자, 엄마는 딸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엄마도 내가 이상한 것 같아?” 엄마 품에 안겨 있던, 한소희가 물었다. 
 
“아니, 엄마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소희가 아파서 그런 거야. 다 나으면 괜찮아져. 조금만 참아, 소희야.” 
 
한소희는 엄마의 위로에 힘을 얻었다. 학교 친구들을 상대하는 것이 불편하고 힘들었지만, 견디고 견뎠다. 해가 바뀌고, 학년이 바뀌고, 친구들도 바뀌었다. 그녀의 머리카락 속에 감춰진 흉터를 기억하는 사람도 하나 둘 사라졌다.  
 

 
더운 여름날의 체육시간이었다. 체육 선생님은 내리쬐는 햇볕을 피하고자, 학교 공터 그늘로 아이들을 이끌었다. 한소희도 줄을 맞추어 걸었다. 그때였다. 한소희는 갑자기 몸의 균형을 잃고 맥없이 넘어졌다. 일어나려고 해도,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소희야, 괜찮니?” 
 
한소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혀가 굳어버린 것 같았다. 온몸의 근육에 경련이 일어났다. 반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선생님은 다급하게 한소희를 들쳐 업고, 양호실로 뛰었다. 
 
학교 운동장에 구급차가 도착했다. 한소희는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구급차로 옮겨졌다. 체육 선생님이 구급차에 함께 올랐다. 의사에게 상황을 설명할 의도였다. 
 
한소희는 그날 이후 미세하게 다리를 절게 되었다. 뇌 수술의 후유증이었다. 
 
한소희는 몸에 일어난 변화를 감지했다. 두려움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학교에도 갈 수 없었다.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끔찍한 기억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그녀의 엄마가 딸을 위로했다. 마음을 추스를 수 있도록 옆에서 도운 것이다. 
 
“소희야, 괜찮아. 의사 선생님이 약만 제때 잘 먹으면, 두 번 다시 그런 일 없을 거라고 했어.” 
 
“거짓말이잖아. 엄마는 맨날 나 걱정할까 봐 일부러 거짓말하잖아.” 한소희가 울면서 말했다. 
 
“아니야. 소희야. 엄마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오늘 병원에 같이 가서, 의사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 들어보면 되잖아. 엄마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엄마는 속상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남편과 함께, 딸을 챙겨 집을 나섰다. 셋이 나란히 걷다가, 엄마가 지갑을 두고 나왔다며,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한소희는 무심결에 앞서 걸었고, 그녀의 아버지는 길가에 멈춰 엄마를 기다렸다. 지갑을 챙겨 나온 엄마가 빠른 걸음으로 아빠에게 다가왔다. 한소희는 부모님보다 열 걸음 앞서 걸었다. 
 
아빠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몰라. 요즘 내 정신이 아니야.” 
 
“그나저나 갑자기 병원은 왜 가는 거야?” 
 
아빠가 그렇게 말하자, 엄마는 아빠의 팔을 세게 꼬집으면서,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엄마가 작은 목소리로 아빠에게 말했다.
 
“저거 안 보여? 소희가 지금 다리를 절잖아. 당신은 그것도 몰랐어?” 
 
“뭐가? 난 모르겠는데.” 아빠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세히 좀 봐. 이상하잖아. 어떻게 아빠가 그것도 몰라.” 
 
한소희는 충격에 빠졌다. 부모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속삭 말한 모든 대화를 듣고 만 것이다. 한소희는 울음을 터뜨렸다. 뒤돌아서서 부모를 가로질러 집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에 엎드려 하염없이 울었다.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온 부모님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엄마가 문을 두드리며,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돼서 그랬어, 소희야. 엄마 착각일 수도 있잖아. 괜히 너 걱정할까 봐 말 못 했어. 미안해, 소희야. 문 좀 열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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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이해할 수 있어요. 제가 걱정할까 봐 그러셨겠죠. 엄마 한 사람이라도 괜찮다고 말해주시지 않았다면, 제가 견딜 수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아쉬워요. 제 상태를 부정하거나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주셨으면 어땠을까? 혼자 생각해보거든요. 어차피, 다 지난 일이지만요.”
 
한소희가 들려준 이야기를 마음속으로 되새겨보았다. 한소희는 스스로를 “이상한 사람”으로 정의 내렸다.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마도 교무실에서 일어난 사건은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걸었던 골목길로 그녀를 소환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끔찍한 교통사고를 극복하고 살아돌아온 한소희를 세상은 반겨주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마저도 비웃음거리가 되었던 어린 시절이 그녀가 살아갈 세상을 두렵게 만든 것이다. 
 
그것은 아이러니였다. 이상한 사람은 한소희가 아니라, K 교사이며 교감이었다. 
 
사소한 접촉사고를 핑계로, 자신의 업무적 과실을 한소희에게 떠넘긴 K교사는 이상한 사람이다. 한소희가 K를 대신해, 교감 선생님에게 인격적인 모독을 당할 때, 좋은 사람인 척 한 K 교사는 위선적인 사람이다.  
 
교감은 자초지종을 들어보지도 않은 채, 한소희를 인격적으로 모독했다. 정교사와 기간제 교사를 운운하며, 사람을 자기 방식으로 평가하는 태도 역시 옳지 않다. 그는 여러 면에서 이상한 사람이다. 
 
한소희는 이상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정작 자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몸이 불편한 한소희를 은은하게 무시했던 사람들은, 그녀가 어린 시절에 “괴물”이라고 놀리며 비웃던 사람들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괴물의 사전적 의미는 괴상하게 생긴 물체다. 교무실에서 그녀에게 쏠린 다수의 시선은, 그녀를 괴상하게 여겼다. 어린 시절 교실에서, 사리분별하지 못했던 악동들에게 받았던 고통이 십수 년 뒤에 고스란히 되살아난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은 진실을 알지 못했다. 
 
한소희는 죽음을 이긴 진정한 승리자였다. 
 

 
“참 이상하네요. 정말 이상한 사람이에요.” 내가 말했다. 
 
한소희는 가만히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K 교사 말이에요. 상식 이하의 사람이군요. 어떻게 그런 식으로 행동할 수가 있죠? 교감도 마찬가지예요. 그런 사람 꼭 있죠. 권위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요. 제가 볼 때, 두 사람 모두 이상한 사람들이에요.” 
 
한소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만약에 소희 씨가 나를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준다면, 나는 이 상황을 간단히 정리하고 싶어요. ‘이상한 사람들은 정작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을 모른다. 정작 멀쩡한 사람이 상담을 받으러 왔다.’ 제가 전해드린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한소희는 머뭇거렸다. 그러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내담자라서 그런 말을 해주시는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너무 제 입장에서만 말했나 봐요. 그분들 이야기를 들어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거예요. 그분들께 괜히 죄송하네요.”
 
나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나도 나름 상식적인 사람이에요. 한 사람 말만 듣고 쪼르르 달려가 그 사람 편을 들 정도로 어리석지 않아요. 소희 씨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소희 씨는 나를 설득하고 있어요. 내 생각을 바꾸고 싶어 해요. ‘내가 이상한 사람이에요.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해주세요.’ 진실은 그게 아니죠. 이상한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에요.”
 
한소희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소희 씨, 속지 마세요. 당신은 정상이에요. 그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이라고요. 세상에는 의외로 이상한 사람들이 많아요.” 
 
한소희는 감정이 격해져,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한소희와 여섯 번의 상담 세션을 지속했다. 그 과정에서 한소희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현재의 대인관계에서 적절히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제시하고 연습했다. 
 
관계에서 갈등이 일어날 때, 방아쇠처럼 당겨지는 “나는 이상한 사람이야.”라는 파괴적인 생각은 적어도 완화되거나 지연되었다. 그러나, 언제든 반복될 수 있었다. 그에 따른 후속 조치로 긴급 상담을 이어갈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한소희를 배웅하고 돌아와, 상담 일지에 간단한 메모를 남겼다. 
 
언제나 한소희가 옳으냐고? 물론, 아니다. 상대방 잘못이라고 결론을 내리면 뭐가 달라지냐고? 모르는 소리다. 그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았다. 정당하지 못한 비난마저도 스스로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관계의 문제는 언제나 상대방이 존재한다.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잘못하지 않는다. 갈등은 상호 책임이다. 
 
한소희는 상대방의 책임을 빼앗아버렸다. 모든 것을 그녀의 잘못으로 여긴 것이다. 극단은 좋지 않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객관적으로 따져볼 기회를 가져야만 했다. 그것은 곧, 그녀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표현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소희가 건물 밖을 걸어나고 있었다. 절뚝거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울컥 눈물을 흘렸다. 동정심은 아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것은 경외심이었다. 
 
그녀는 생존자이며, 위대한 승리자였다.

넌 엄마의 인형 같아

“‘이상하다, 이 남자가 왜 이러지?’ 하면서도 거절하지 못했어요. 결국 석 달 만에 결혼했죠.”
 
M은 서른두 살이고, 세 살 된 아들의 엄마이며 현재 별거 중이다. 그녀는 5년 전 남편을 만났다. 친구 소개로 만난 그는 성격이 시원시원했다. 평소 내성적인 자기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녀는 그에게 끌렸다. 두 사람은 연애 3개월 만에 결혼했다. 
 
남편은 유통마트 지점 하나를 관리하는 매니저였다. 신혼 초에는 출퇴근 시간이 분명했다. 그런데 출근 시간이 조금씩 늦어지고, 퇴근 시간에 맞춰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늘어났다. 알아서 하겠지, 남편을 믿었다.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남편의 통화를 엿듣게 되었다. 친구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이 해외여행을 가려고 하는 것 같았다. 아내가 임신했기 때문에 남편의 도움이 필요했다. 친구와 해외여행을 간다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남편은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아내는 남편 친구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필리핀 여행을 가려고 했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내는 남편에게 집요하게 물었고, 필리핀에 성매매 여행을 떠나려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내는 살림을 던지면서 울부짖었고, 남편은 집을 나갔다. 
 
남편이 집을 나간 후, 아내는 청소를 하다가 우연히 외장하드를 발견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외장하드 안에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야한 영상이 가득했다.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본능적으로 잘못된 결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에게 그나마 남아 있던 정이 뚝 떨어졌다. 아내는 법률사무소를 찾아가 이혼을 준비했다. 
 
남편은 아내에게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각서를 썼다. 아내는 용서할 수 없었지만 뱃속에 아이가 마음에 걸렸다. 아빠 없는 아이로 키우고 싶지는 않았다. 남편에게 성 중독 치료를 받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줬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남편은 또 다시 문제를 일으켰다. 저녁에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일주일에 여러 번이었다. 
 
아내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남편이 일하는 회사에 찾아갔다. 그런데 남편이 두 달 전에 사직서를 내고 일을 그만두었다는 말을 들었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이 물려준 유산을 현금화해서 가지고 있던 통장을 결혼 초에 남편이 애원하면서  달라고 했다. 거절하기 힘들었던 아내는 그에게 통장을 맡겼다.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고 인근지역에 대형 마트를 인수하기 위한 계약을 했다고 주변 사람들이 말했다. 그녀가 남편을 찾으려고 수소문 해봤지만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남편은 사기를 당해서 돈을 전부 날려버리고 잠적했다. 그녀는 답답해서 견딜 수 없었다. 시어머니를 찾아갔다. 시어머니는 잠적한 남편에게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 이해하라는 식으로 말했다. 어디 숨어서 뭘 하고 있는지 시어머니는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녀는 변호사를 다시 찾아갔다. 이혼 절차를 진행하고 있을 때, 남편을 소개시켜 준 친구가 찾아왔다. 성급한 결론을 내리면 안 된다고 설득했다. 남편이 돌아온 다음에 말을 들어보고 이혼해도 늦지 않다고 했다. 뱃속에 아이는 어떻게 할 거냐고. 혼자서 어떻게 살아갈 거냐고. 옆에서 도와줄 테니 이혼하지 말고 그를 기다려보자고 했다. 
 
그녀는 마음이 흔들렸다. 변호사는 법적인 절차를 진행해야 남편도, 돈도 찾는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친구 말을 따랐다. 당시에는 그 친구가 남편과 한편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남편은 친구에게 돈을 보냈고, 친구는 남편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었다. 
 
그 사이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를 먹여 살리려면 어떤 일이라도 해야 했다. 시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편의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녀는 마음의 병을 얻었다. 술에 취해 집에 들어가 시어머니에게 행패를 부렸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말라고 말했다. 술을 끊지 않으면 아이를 다시는 보여주지 않겠다고.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다. 
 
“저는 엄마가 원망스러워요. 엄마가 공주처럼 키웠거든요. 대학에 다닐 때, 남자친구가 ‘너는 사람 같지 않고 인형 같아. 엄마의 인형. 엄마 없이 아무 것도 못하잖아. 말끝마다 엄마, 엄마, 엄마!’라고 말했어요. 처음 그 말을 듣고 충격 받았던 기억이 나요. 그 말을 부인할 수 없었거든요. 
 
그랬던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신 이후, 제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어요. 혼자서 살아갈 수가 없었죠. 누굴 원망하겠어요? 남편을 선택한 건 제 자신이니까요. 당시에는 너무 불안정했어요. 엄마가 사라지고 나서 도저히 혼자 견딜 수 없었거든요….” 
 
그녀의 아버지는 이미 가정이 있던 남자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돌이킬 수 없었다. 뱃속에 아이가 생겨버렸다. 아버지는 이혼하지 않은 채로 그녀의 엄마와 함께 살았다. 겉으로 보면 정상적인 가정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외동딸로 부족함 없이 자랐다. 엄마가 세상의 전부였다. 엄마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엄마의 사랑과 집착이 혼란스럽게 뒤엉킨 채 그녀는 성장했다. 그녀가 중학교 다닐 때, 아버지는 엄마를 떠났다. 그러면서 엄마의 집착이 더욱 심해졌다. 
 
“엄마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예쁜 줄 알았나봐요.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지역 미인대회에 내보냈어요. 제 외모가 그 정도는 아닌데, 제가  싫다고 해도 들은 체도 안했어요. 넉 달 정도 준비하고 나갔지만 결과는 뻔하죠. 엄마는 제가 실망한 줄 알았나 봐요. ‘괜찮다. 심사위원들이 네 가치를 몰라서 그렇다. 실망하지 마라’라고 일주일 내내 말했어요. 
 
어차피 기대를 안 해서 실망도 하지 않았어요. 엄마가 나가보라고 하니까 나간 거죠. 그때 친구들 앞에서 얼마나 창피했는지,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녀의 전부였던 엄마는 어느 날 갑자기 암 진단을 받았다. 6개월 투병 생활을 하는 동안, 그녀는 휴학하고 엄마 곁을 지켰다. 엄마는 점점 작아졌다. 얕은 언덕처럼 보였던 엄마의 볼은 움푹 파인 구덩이가 되었다. 팔 다리는 짝이 맞지 않는 젓가락처럼 보였다. 엄마는 그녀 곁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기억했다. 
 
“엄마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 텐데…. 제가 걱정이 되셨는지 똑같은 말을 반복했어요. ‘사인 막 해주지 마라. 잘 읽어보고 해라. 모르겠으면 변호사를 찾아가라’라고요. 아무래도 아버지 재산 때문에 그랬겠죠. 제가 불안해 보였나봐요. 잘 읽어보고 사인했는데 제가 졌어요.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 매일 술 마시고, 남자를 만나며 방황했어요. 혼자 있고 싶지 않았죠. 가장 좋은 방법이 뭘까 생각했어요. 결혼해서 안정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남편을 만났어요. 인생 최악의 실수를 한 거죠.” 
 
***
 
배고픈 아이는 음식을 급하게 먹는다. 급하게 먹은 음식은 반드시 탈이 난다. 배가 아파 발을 동동 구르다 구토한다. 한 번 고생하고 나서 다시는 음식을 급하게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소용없다. 배고프면 또 닥치는 대로 먹는다. 절제하지 못하고 음식을 먹는 아이를 도와줄 사람은 부모다. 부모가 적절한 음식을 적당한 양만 먹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나 아이가 음식을 급하게 먹든 천천히 먹든 관심 없는 부모가 있다. 그저 아이가 먹는 모습이 사랑스럽다고 무절제하게 음식을 먹인다. 자꾸 밥상에 음식을 가져다 놓는다. 몸에 좋으니 먹으라고 한다. 아이는 부모가 먹으라는 대로 먹어 치운다. 
 
문제는 어느 날, 밥상을 차려주는 부모가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숟가락 하나로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던 아이는 부모가 사라지는 즉시 텅 빈 밥상을 받는다. 음식을 차려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아이는 굶는다. 스스로 밥을 지어먹을 수 없는 아이는 학교 앞 문방구로 간다. 
 
새빨간 사탕, 새파란 아이스크림, 현란한 먹거리가 아이를 유혹한다. 닥치는 대로 형형색색 불량식품을 먹은 아이는 틀림없이 병원 신세를 진다. 그녀의 상황이 이와 같다. 
 
그녀의 남편에 대해 생각해보자. 남편은 나쁜 사람이다. 훈육이 되지 않은 사람이다. 남편 안에 자리 잡은 특정한 결핍이 문제 행동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아내가 임신했을 때 외국에 나가 성매매를 시도한 일, 음란물에 중독된 상황, 아내 돈을 허락 없이 가져다 다른 사람에게 사기를 당한 일, 모든 책임을 외면하고 딸과 아내를 두고 잠적한 일. 모두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녀와 남편을 나란히 놓고 바라본다면 그녀는 확실한 피해자다. 
 
그러나 그녀를 마냥 위로해줄 수만은 없다. 결혼은 성인 남녀가 상호 합의 통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 결혼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녀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왜 문제 많은 남자를 선택했을까? 
 
그녀는 엄마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딸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았다. 그녀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과정을 겪지 않았다. 엄마가 딸을 대신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책임졌기 때문이다. 딸에 대한 애착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미 가정이 있는 남자와 불안한 결혼 생활을 하며 안정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존재가 그녀의 딸이었다. 아름답고 따뜻한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의도와 달리 엄마는 딸의 눈가리개가 되어버렸다. 엄마가 손을 잡아주면 어둠 속에서 앞이 보이지 않아도 괜찮았다. 딸은 엄마가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어둠 속을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엄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앞을 볼 수 없는 딸을 그대로 둔 채로. 그녀는 넘어져서 다시 일어설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부를 노래도, 노래를 부를 의지도 없었다. 엄마 목소리가 사라진 세상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마저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의 엄마는 그녀에게 우주와 같았다. 엄마 없는 세상에서 살 준비가 되지 않은 스물여섯 살의 성인, 그녀는 낯선 세상에 고아처럼 버려졌다. 엄마가 사라지고 난 그 순간, 눈가리개를 한 채로 더듬더듬 길가의 벽을 의지해 걷다가 만난 낯선 남자의 손을 잡은 것이다. 
 
남자는 그녀의 손을 잡고 안전한 곳으로 대려다 주는 대신 좁고 위험한 길로 그녀를 이끌었다. 위험한 길가에서 아이를 낳게 하고 갓난아이를 여자 품에 버려둔 채 도망쳐버렸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녀는 아이를 안은 채 어둠 속을 헤매고 있다. 
 
“어쩔 수 없었다고 할까요. 두 번 만나고 나서 바로 그 남자가 결혼하자고 했어요. ‘이상하다, 이 남자가 왜 이러지?’ 하면서도 거절하지 못했죠. 결국 석 달 만에 결혼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제 친구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제 유산에 대해 남편에게 말해준 것 같아요. 결혼이 목적이 아니라 돈이 목적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는 거죠. 알면서도 당한 거예요. 엄마가 돌아가신 후 미친 여자처럼 살다가 갑자기 내게 잘해주는 사람이 나타나니까 거부할 수 없었던 거죠….” 
 
그녀는 새로운 직장을 구했다. 월급은 적지만 아이를 되찾고 월세 방을 얻어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고통스럽고 힘든 인생 길에서 그녀는 쓰려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한다. 때로는 바닥난 통장 잔고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때로는 아이가 방긋 웃는 모습에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넘어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면서도 아이를 품에 안고 걷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는 더 이상 길가의 벽을 의지하지 않는다. 눈가리개를 스스로 벗어던지자 갑작스러운 빛이 그녀의 눈을 찌른다. 눈앞에 형체들이 희미하게 보이지만 머지않아  시력을 회복할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선명하게 모든 것을 보게 된 그녀 앞에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날지.

상자 안으로 들어와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죠? 저는 이해가 안 돼요. 문자도 남고, 부재중이라고 뜨잖아요. 몇 시간 동안 전화를 안 받으면 당연히 걱정되지 않겠어요?” 
 
남편이 말했다. 
 
“미용실 갔다고 말했잖아. 여자는 남자와 달라. 몇 시간 걸린다고. 아는 언니하고 밥 먹고 머리하느라 확인을 못했어. 문자보고 바로 전화했잖아.” 
 
아내가 남편 말을 잘랐다. 
 
두 사람은 대화를 이어갔다. 
 
“말이 안 되잖아. 밥 먹으면서 문자 확인 못해? 미용실 가기 전에도 마찬가지야. 확인할 시간 있었잖아. 미용실에서 요즘 다 휴대폰 가지고 이것저것 하던데, 당신은 휴대폰을 맡겼다고 했잖아.”
 
“휴대폰만 따로 맡긴 게 아니라, 가방에 넣고 통째로 맡겼다고. 오랜 만에 만난 언니랑 대화해야 하니까.”
 
“참 나, 내가 보통 점심 먹고 전화하잖아.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여보, 내가 어린애가 아니잖아. 전화를 안 받으면 그냥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 돼? 미용실에서 나와 바로 전화했잖아.” 
 
“세 시간이나 지난 다음이지.”
 
“됐어. 그만해.”
 
“당신이 걱정 되어서 그런 건 알지?”
 
“내가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는 건 이해했어?” 
 
“아니, 솔직히 이해는 안 가.”
 
“이해가 안 된다고? 내가 계속 설명했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앞으로 개선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지.”
 
“내가 한 말을 못 믿겠다는 거잖아.”
 
“아니, 믿는데 이해가 안 간다고.”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누가 거짓말한데? 그건 논점을 벗어난 거야. 당신이 전화를 안 받은 이유에 대해서만 말해. 주제에서 벗어나지 말고.”
 
“나는 당신이 날 이해 못하는 게 이해가 안 돼. 사실대로 말했잖아. 다음부터는 전화 받겠다고 했고.”
 
“그래. 다음부터는 전화를 받아. 그럼 대화 끝난 거지?”
 
“당신 정말 답답하다. 나 숨 막혀 죽을 것 같아.”
 
J는 결혼 8년차 두 아들의 엄마이다. 남편의 가정적인 모습에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때로 그가 자신을 구속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힘들다고 말했다. 남편은 회사와 집 밖에 모른다. 다른 취미 활동도 하지 않는다. 활동적이고 사교적인 사람이지만 두 아이를 키우며 아내가 힘들어하자 아내에게 우선순위를 두었다. 
 
“남편이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반쪽짜리 고마움이죠. 제가 뭘 해달라고 하면 싫어하는 게 눈에 보여요. 자기 방식이 있다고, 잔소리 하지 않아도 알아서 하니 명령하지 말라고요. 제가 무슨 명령을 하겠어요? 남편이 무시하니까 더 이상 부탁하고 싶지 않아요. 도와준다고 뭘 해놔도 제가 다시 해야 돼요. 부탁한대로 해주면 좋겠는데 자기 방식으로 하니까 저도 피곤하고 힘들죠.” 
 
남편은 계획대로 일이 되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의 규칙에는 점심에 아내에게 전화하고 안부 묻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정해진 시간에 전화를 하기 위해 나름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회의 중이거나 출장을 가서 동료들과 차를 마시다가도 잠깐 나와 전화를 한다. 집에서 혼자 고생하고 있는 아내를 위해 다짐한 행동 수칙을 지킨다. 
 
아내가 전화를 받으면 기분이 좋다. 가족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하고 싶다. 그런데 전화를 받지 않으면 기분이 묘하다. 아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이 되면서도 약간은 무시당한다는 생각이 든다. 몇 번 전화해도 받지 않으면 기분이 나빠진다.  
 
남편이 말했다. 
 
“아내가 좀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저는 아내를 통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제 마음을 표현하는 거예요. 주변 사람들은 아내를 속이면서 자기 시간을 가져요. 저는 그런 사람들이 싫어요. 무엇을 위해 일하나요? 가족을 위해서죠. 제 신념입니다. 
 
가족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제게는 최고의 보상이죠. 아내는 모를 거예요.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만족을 줄 수는 없거든요. 그때 마음이 좀 힘듭니다. 제가 어린애처럼 느껴져서 자책감이 들어요. 그러다 다 잊고 새로운 마음으로 아내를 돕죠. 아내는 잔소리하고 투정하고, 계속 원하는 것을 말하지만 묵묵히 합니다. 완벽한 건 없잖아요.” 
 
아내가 말했다. 
 
“이 사람이 뭘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자기 방식 대로 하고 혼자 보람을 느끼죠. 남편이 상처받을까봐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요. 
 
자기가 하는 일, 한 말에 대해 원하는 방식으로 반응해주지 않으면 얼마나 괴로운지 몰라요. 남편은 자기가 얼마나 가정적인 사람인지에 대해 인정해달라고 하지만 저는 동의할 수 없어요. 제가 고맙다고 느껴야 고마운 거죠. 답답하니까 답답하다고 말하는 거예요.”
 
남편은 대학에서 행정업무를 보고 있다. 각 부서의 업무가 충돌할 경우, 중재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업무 스트레스가 크다고 말한다. 서로 의견이 좁혀지지 않으면 개인적으로 찾아가 충분한 대화를 하고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회사는 경직되어 있어서 윗사람에 말에 그대로 따라야 했다. 업무지시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대화 역시 상사가 명령하듯 말했다. 
 
“회사라서 어쩔 수 없죠. 명령하듯 말해도 다 따라야 해요. 아내가 명령하듯 말하는 게 싫어요. 도와줘야지 생각하다가도  명령하듯 짧게 말하면 얼마나 기분이 나쁜지. ‘내가 집에서도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나?’ 싶어요. 다정하게 말해주면 좋잖아요. 아내가 말만 예쁘게 하면 무엇이든 도와줄 수 있어요. 제가 여러 번 말했는데 아내는 못 알아듣더라고요.” 
 
아내는 남편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말했다. 뉴스 기사를 보고  의견을 말하면 그는 조용히 비웃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은 자기 생각이 분명했고, 그것을 관철시켰다. 아내 생각은 늘 모자라고 부족한 듯이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받은 대로  되돌려 주고 싶었다. 아내가 남편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영역은 육아와 살림이었다. 그녀가 남편을 가르칠 수 있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무시당한 감정을 그대로 돌려줬다. 
 
***
 
아이들은 종이 상자 안에 들어가기 좋아한다. 이유는 모른다. 상자 안이 아늑해서 일까 아니면 혼자만의 영역이라 생각해서 그런가? 혼자 들어가 놀 수 있는 상자는 아이들에게 놀이 공원만큼 즐겁다. 
 
상자 안에 들어가 좌우로 몸을 흔들면 상자는 배가 된다. 부모가 상자를 끌어주면 기차가 되고, 아이가 상자 안에서 잠들면 침대가 된다. 상자가 익숙해진 아이는 상자를 자기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상자만 보면 본능적으로 들어가 앉는다. 
 
때론 상자 때문에 싸운다. 좁은 상자 안에 다른 친구가 들어오려고 하면 나가라고 떠민다. 충분한 공간이 있어도 못 들어오게 한다. 다른 친구는 들어가려고 발버둥을 친다.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상자가 찢어진다. 혼자 놀기에는 충분한 공간이지만 둘이 들어가기에는 좁다. 찢어진 상자를 보면서 서로 비난하면서 울고 난리다. 
 
부모는 찢어진 상자를 버린다. 다시 고치고 붙여서 둘이 같이 들어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더 이상 물건을 담는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찢어진 상자는 버리는 것이 맞다. 
 
부부가 서로 만나 결혼하기 전에는 각자의 상자에서 살았다. 혼자 들어가기 적당한 상자이다. 둘이 들어가기는 좁다. 두 사람은 결혼하고 나서 상자를 합친다. 나란히 붙여놓고 노는데 재미가 없다. 
 
남자 꼬마가 말한다. 내 상자에 들어오라고. 여자 꼬마가 말한다. 싫다고. 두 사람은 힘겨루기를 한다. 결국, 가위바위보를 한다. 여자 꼬마가 졌다. 남자 꼬마의 상자로 옮겨간다. 남자 꼬마는 다리를 모으고 공간을 만들어준다. 여자 꼬마는 조심성 없이 막 들어와 자기 상자인 것처럼 행동한다. 불편하다고 다리를 펴다가 상자 모서리 부분이 찢어진다. 
 
남자 꼬마가 말한다. 
 
“조심해!” 
 
자기가 오라고 해놓고 막상 오니까 푸대접이다. 여자 꼬마는 자기 상자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남자 꼬마는 그냥 있으라 말한다. 둘이 서로 밀치고 싸우다가 상자가 찢어진다. 남자 꼬마는 화가 나서 여자 꼬마의 상자를 발로 찬다. 상자가 찢어진 채로 너덜거린다. 둘은 서로를 비난한다.
 
종이 상자는 생각, 기준을 의미한다. 결혼 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지고 살았다. 결혼하면 그것을 합쳐야 한다.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희생할 수 없다. 정확히 절반씩 합치는 것도 불가능하다. 
 
방법은 하나다. 종이 상자를 찢어버리고 새로운 상자를 만드는 것이다. 종이 상자는 힘이 없고 약해서 두 사람이 들어갈 수 없다. 둘이 들어갈 넉넉한 상자를 만들어야 한다. 집착은 하지 말자. 익숙해지면 버려야 한다. 곧 세 사람, 네 사람이 쓰는 상자로 갈아타야 한다. 상자 안에 들어갈 가족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부부가 서로 만나 유연한 사고를 하지 못하면 위기를 만난다. 연애, 결혼, 출산. 단어 몇 개로 표현할 수 있지만 각 단어 사이에 띄어쓰기가 만든 공간 안에는 혼란과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 서로 다른 기준을 조정하기 위해 가위바위보를 하면 안 된다. 종이 상자는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버리고, 상자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 잠깐 쓰고 버릴 상자를 만들다가 우리는 인생의 끝을 만나게 된다. 
 
남편은 혼자 쓰던 상자를 버리고 아내가 원하는 상자에 새롭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내가 쓰던 상자를 유심히 살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상자 속 아내가 혼자 가지고 놀던 인형과 장난감, 즐겨 먹던 사탕 봉지와 과자 부스러기를 살펴보자. 아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모르면 물어보자. 아내가 원하는 것을 새로운 상자에 채워 넣어라. 그녀가 좋아한다.  
 
아내는 남편의 상자를 발로 걷어차지 말자. 정성이 깃든 상자이다. 버리라고 하면 아까워서 버릴 수가 없다. 버리는 걸 쉽게 생각하지 말자. 지금 당장 버리라고 재촉하면 남편은 그 상자 안에 머문다. 미련이 남는다. 너덜너덜해진 종이 상자 안에서 혼자 산다. 
 
가족과 단절된다. 남편을 모질게 대하지 말고, 따뜻하게 대하라. 새로운 상자로 남편을 초대하자. 그가 새 것과 낡은 것 사이에 걸쳐 있는가? 새로운 상자로 완전히 넘어 올 수 있도록 그를 격려하라.

기억의 전이

“내가 바보 천치인 줄 알지? 당신이 아랫집 남자와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거 내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 운동은 무슨 운동, 새벽마다 그 남자하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남편은 오늘도 어김없이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 정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갈 때까지, 남편은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욕설을 쉬지 않고 내뱉었다. 
 
정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현관문을 열었다. 
 
아직 동이 트기 직전이었다. 삼십 년 지기 친구, P를 산책로 입구에서 만났다.
 
“오늘도 영감이 욕하는 소리가 창밖으로 다 들리데? 밤낮 그 소리여?” 
 
P가 물었다. 
 
“나도 모르것어. 갈수록 심해져. 딸들이 병난 것 같다고, 요양원에 보내자는데, 사지가 멀쩡한 사람을 어떻게 요양원에 보내것어. 내가 그냥 참고 살아야 제” 
 
정희가 말했다. 
 
두 사람은 산책로를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정희는 요즘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찌근거려서 산책을 나갔다 오면, 오전 내내 침대에 누워 움직일 수 없다고 말했다. P는 당뇨가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걱정이라고 말했다. 
 
삼십 년 동안 매일 아침마다 대화를 나누어도, 소재는 고갈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치 세상에 존재하기 이전부터, 서로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정희가 산책을 마치고, 집에 들어서자 남편이 쏜살같이 달려들어 말했다. 
 
“이 여편네 얼굴 좀 봐. 그리도 좋았어? 늙어서 추하게, 쓸데없는 것에 맛 들여 가지고, 부끄러운 줄 알아!” 
 
정희는 남편을 무시하듯, 화장실을 향했다. 
 
남편은 정희에게 따라붙으며, 말했다. 
 
“암, 그래야지. 흔적은 확실히 지워야지. 내 집에 들어왔으니까, 그 더러운 놈의 흔적은 지우는 게 맞지.” 
 
나이 팔십이 넘어, 이렇게 추한 꼴을 당할지, 정희는 몰랐다.
 

 
“이 여편네, 당장 문 열어. 문 닫고 지금 뭐 하는 거야?” 
 
남편은 문 손잡이를 부러뜨릴 기세였다. 
 
정희는 어지러워 침대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남편은 문을 발로 차고, 뒤흔들더니 갑자기 조용해졌다. 밖에서 찰랑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남편이 마스터키를 가져온 것이다. 
 
“아랫집 그놈, 벌써 창문으로 내뺐구먼. 이 여편네 이거 기운이 하나도 없네. 지 몸뚱이 지가 몰라? 늙어서 그 짓을 하니까, 몸이 견뎌나겠어? 제발 정신 좀 차려, 이 여편네야.” 
 
정희의 의식이 희미해졌다. 사력을 다해, 남편에게 말했다. 
 
“영감, 구급차 좀 불러줘. 나 지금 큰일 난 것 같아.” 
 
남편은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양심도 없는 여자 같으니라고.”
 
남편은 구급차를 불렀다. 정희는 가까운 병원에 입원을 했다. 수액을 맞으며 기운을 차리고 있는데, P가 다급하게 들어왔다. 
 
“정희야. 너 아무래도 안되겠다. 지금 나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 요양원에 가든지, 딸네 집에 가든지 해야 할 것 같아.” 
 
정희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내가 이 동네에서 삼십 년을 살았는디, 어디를 가서 살어. 쓸데없는 소리 말어.” 
 
P가 정희의 말을 받아치려는 순간, 정희의 전화기가 울렸다. 
 
“엄마, 지금 병원이야?” 
 
호주에 사는 큰딸, 미숙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아니, 그걸 어찌 알았데?” 
 
“P 아줌마한테 방금 전화 왔었어. 엄마 그런 일이 있으면 나한테 먼저 말해야지. 왜 말을 안 해?” 
 
“아니, 알아도 어찌한데? 호주에 있는데, 걱정만 하지. 별일 아니니께, 걱정하지 말어. 기운 차리면, 바로 집으로 들어갈 거여.” 
 
“안 돼, 엄마. 지금 미현이 보냈어. 엄마 데리러 갈 거야. 절대로 집으로 들어가지 마. 그러다, 엄마 죽어.” 
 
“쓸데없는 소리 말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죽기는 죽는다고 호들갑이여.” 
 
정희는 미숙의 전화를 끊고, P를 쳐다봤다. P는 뭘 그리 빤히 쳐다보냐는 말투로 정희에게 말했다. 
 
“그래, 내가 말했어. 너라도 그랬을 거야. 고집 좀 그만 부려. 지금 미현이 온다고 했으니까, 미현이 따라 미숙이 집으로 가.” 
 
P의 말이 끝나자마자, 미현이가 병실로 들어왔다. 호주에 있는 언니의 연락을 받고, 한 걸음에 달려온 것이다. 
 
“엄마, 괜찮아?”
 

 
미현은 엄마가 수액을 맞는 동안, 엄마 짐을 대충 챙겨올 생각으로 엄마의 집으로 갔다.
 
미현이 집에 들어서자, 아빠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거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네 엄마가 시켰냐?” 
 
“아니에요, 아빠. 엄마가 당분간 병원에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짐 좀 챙기러 왔어요.” 
 
“엄마가 왜 아픈지 알지? 검사해봐라. 아마 몹쓸 병에 걸렸을 거야.” 
 
미현은 피가 거꾸로 솟는듯했다. 
 
“엄마가 무슨 몹쓸 병에 걸려요? 그만 좀 하세요, 이제.” 
 
“뭐 그런 병 있잖냐. 다른 사람에게서 옮는 병, 그거 약도 없다는데…. 늙어서 추하게 그게 뭔 짓인지, 원.”
 
미현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받쳤다. 멀쩡한 사람도 쓰러뜨릴 것처럼, 집 안의 공기가 탁했다. 
 
“엄마 없어도 밥 잘 챙겨드시면서, 운동 꾸준히 하세요. 제가 자주 들여다볼게요.” 
 
아빠는 여전히 신문에 시선을 고정하고 말했다. 
 
“올 것 없다.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가서 네 엄마한테도 전해라. 이참에 갈라서자고.”
 
미현은 혼란스러웠다. 
 
치매라고 하기에는 아버지가 너무나 멀쩡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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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이 그러다 엄마 큰일 난다고, 얼른 그 집에서 나오라고 하도 극성을 부려서, 일단 큰 딸 집으로 나왔어요. 큰 딸이 사위랑 호주에서 사는데, 자기 없는 동안 집에 와 있으라고 해서요. 아따 근데, 여기 아는 사람 한 명 없고 답답해 죽겄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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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미현의 차에서 내리는 정희를 손녀 재희가 맞이해주었다. 호주에서 나고 자란, 재희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서 취업을 했다. 
 
호주에 사는 큰딸, 미숙은 정희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재희가 챙겨줄 것이라고 믿었다.
 
내가 정희를 상담하게 된 시점도 그쯤이었다.
 

 
“상담을 신청하셨죠? 그래서, 연락드렸어요.” 
 
내가 말했다. 
 
“딸이 신청한 것 같아요.” 
 
정희의 말에, 나는 당황했다. 
 
“아, 본인이 아니라 따님이 신청하셨다고요?” 
 
“긍께, 내가 그러지 말라고 하는데, 딸이 고집을 부려가지고 어디 안 할 수가 있어야지요.” 
 
나는 참으로 난처했다. 당사자가 동의하지 않는 상담을 진행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상황이 어렵겠다고 판단했다. 내 입장을 충분히 설명하고, 예의 바르게 전화를 끊을 작정이었다. 
 
그때, 정희가 말했다. 
 
“딸이 그러데요. 목사님이 쓸데없는 말 하시것냐고. 가만히 이야기 들어보면, 좋은 말씀 많이 해주실 거니까 일단 상담받아보라고.”
 
나는 웃음이 터졌다. 
 
“따님이 그러셨어요?” 
 
“아따, 말도 마세요. 어찌나 설득을 하던지, 안 받는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니까요.” 
 
“딸이 저에 대해 뭐라던가요?”
 
“아, 젊어서 고생 많이 하셨다고. 엄마 이야기 잘 들어주실 거라고 그러더라고요.”
 
정희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동안, 나는 본능적으로 큰딸 미숙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저 멀리 호주에서 엄마를 걱정하는 딸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에게 엄마를 부탁한 것이다.’ 
 
나는 정희와의 상담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 소식을 딸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목사님이시죠?” 
 
정희가 상담을 받기로 했다고 하자, 정희의 둘째 딸 미현이 전화를 걸었다. 
 
“아, 그러시군요. 반갑습니다.” 
 
미현은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히 전해줬다. 그리고, 대화 말미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사실, 언니가 목사님에게 상담을 신청했다고 해서 놀랐어요.”
 
“그게 무슨 뜻이죠?”
 
“아, 제 표현이 조금 이상했죠? 오해하지는 마세요, 목사님. 사실, 저나 엄마는 교회에 다니지 않거든요. 심지어, 엄마는 젊으셨을 때 불교셨어요. 언니만 교회 다녀요.” 
 
“아, 괜찮습니다. 전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상담 전에, 어머니에 관한 중요한 이야기를 해주셔서, 여러모로 감사드립니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통화를 끊고,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나는 내 생애 가장 어려운 내담자를 만난 것일지도 몰랐다. 
 

 
“사람이 그렇게 멀쩡해 보이는데, 치매라고 할 수 있나요?” 
 
정희는 여러 번 반복해서 물었다. 나로서는 확답을 줄 수 없었다. 나는 딸들의 판단을 옳게 여겼고, 상식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정희는 내가 딸들과 같은 답변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담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 말을 더욱 신뢰하는 듯했다. 
 
“그 양반이 그래서 그랬구먼요. 같이 있으면 멀쩡하다니까요. 참 신기하네요.” 
 
나는 자신의 기억을 조금씩 잃어가는 정희의 남편이, 왜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는지 궁금했다. 
 
정희와 남편이 살아온 세월 동안, 외도와 관련된 이슈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정희는 내 질문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더러운 짓은 그 양반이 했지요. 아따 그 양반이 젊었을 때, 얼마나 내 속을 썩였는지, 말도 마요. 내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어요.” 
 
정희는 마음속 깊이 담아두었던 말을 꺼냈다. 
 

 
정희는 시골에서 자랐다. 부모님이 논밭에서 일하는 동안, 정희는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동생들을 챙기느라, 결혼할 나이도 지나버렸다. 
 
스물일곱이 되어, 한 남자를 소개받았다. 남자는 정희보다 두 살이 많았다. 대학까지 나오고, 성실하게 산다고 마을에 소문이 자자했다. 
 
서울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는 남자는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뵈러, 명절이나 가끔 내려오는 정도였다. 다급해진 남자의 부모가 마을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정희를 소개하고 나선 것이다. 
 
정희는 집을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남자와 결혼한다면, 지긋지긋한 시골집을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희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첫아이를 임신한 순간부터, 두 사람은 어긋나기 시작했다. 
 
남편은 하루가 멀다 하고 외박을 했다. 정희가 이유를 물으면, 남편은 공무원 일이 다 그런 거라며, 대답을 회피했다.
 
정희가 거세게 따져 물으면, 남편은 정희를 때릴 기세로 달려들었다. 뱃속에 아이가 아니라면, 벌써 매서운 손이 날아왔을 것이다. 
 
“초등학교 밖에 안 나온 무식한 년이, 나랑 무슨 대화를 한다고. 입 다물어 이년아.” 
 
정희는 남편을 포기했다. 
 

 
“내가 제대로 배운 여자였으면, 그런 남편하고 살지도 않았을 거예요. 여우처럼 야무졌으면, 당장에 뛰쳐나왔을 텐데, 곰처럼 미련해서 참고 살았어요.” 
 

 
둘째 딸 미현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집으로 남편을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건 사람은 남편의 내연녀였다. 
 
공무원을 때려치우고, 사업을 시작한 남편이 회사 직원과 바람이 났다. 
 
정희는 남편이 그동안 만나왔던 여자들을 알지 못했다. 한 가지 아는 것이 있다면, 남편이 오랫동안 한 여자를 만날 성격이 못된다는 것이다. 
 
전화를 건 여자 역시, 잠시 만나고 헤어질 사람이라 여겼다. 
 
그러나, 정희의 예상은 빗나갔다. 
 
남편은 그 여자와 살다시피 했다. 그의 아내는 정희가 아니라 내연녀였다. 
 
그러나, 내연녀는 정희처럼 순진하고 착한 여자가 아니었다. 
 
내연녀는 남편을 만나는 동안, 또 다른 남자를 만나면서 남편을 괴롭혔다. 
 
정희는 남편이 거실에 앉아 엉엉 우는 모습을 봤다. 내연녀가 다른 남자와 여행을 떠나, 며칠 동안 남편의 전화를 받지 않은 것이다. 
 
정희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한 편으로 내연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 여자가 정희 대신 남편에게 통렬하게 복수를 해줬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남편은 그 여자에게 집요하게 매달렸다. 이십 년의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버렸다. 길고 긴 세월 동안, 남편은 내연녀와 부부처럼 살았다. 
 
“남편과 내연녀와의 관계는 어떻게 정리가 되었나요?” 
 
나는 정희에게 물었다. 
 
정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한심한 듯 말했다. 
 
“그 여자가 남편 돈을 훔쳐서 달아났어요. 남편이 평생 모든 돈 전부는 아니었어도, 절반은 넘어요. 남편이 미친 사람처럼 돼서, 그 여자를 찾아다녔는데 결국 못 찾았어요. 사람이 얼마나 한심해요. 대학 나오고 잘 배운 사람도 그리 어리석은 짓을 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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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기억은 정희의 것이 아니었다. 남편의 젊은 날, 내연녀에게 받았던 배신감과 집착이 아내에게 투영된 것이다. 
 
정희가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그녀는 팔십이 넘은 노인이었다. 가냘픈 몸을 의자에 기대어 가만히 앉은 정희를 바라보며, 나는 연민을 느꼈다. 
 
“다 지난 일인데, 그 양반만 멀쩡하면, 그 동네 가서 살고 싶어요. 딸네 집은 좋고 편하기는 한데, 도대체 아는 사람이 있어야지. 내 친구 P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두통과 관절염으로 거동이 불편한 정희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친구 P를 만나러 가는 길이 몹시 긴장되었다. 혹시라도, 동네에서 남편을 만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던 차에, 둘째 딸 미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시골 친척 집에 장례가 나서 아버지가 급하게 시골에 내려가야 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정희는 다급하게 친구 P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에 바퀴 달린 큰 가방 있어? 이따가 나올 때, 그것 좀 들고 나와. 병원에서 바로 딸네 집에 갔더니, 입을 것이 하나도 없었어. 그 양반 없는 참에 짐 좀 챙겨 나올 것이여.” 
 

 
정희는 친구 P를 시켜, 집안에 남편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 정희는 현관문 앞에서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세 차례 같은 번호를 눌렀지만,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남편이 비밀번호를 변경한 것이다. 정희는 억장이 무너졌다. 남편이 미쳐도 단단히 미쳐버린 것 같았다. 
 
정희의 머릿속에서 남편이 내뱉었던 독한 말들이 선명하게 스쳐 지나갔다. 남편의 기억은 비밀번호를 바꿀 만큼 또렷했던 것이다. 남편의 모든 독설이 진실처럼 다가왔다. 
 
아버지를 모시고, 시골집에 내려가던 미현이 정희의 전화를 받았다. 문이 잠겨 있다는 말에 발끈해서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빠, 혹시 현관문 비밀번호 바꾸셨어요?” 
 
아버지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암, 그랬지. 그 여자가 내 돈을 얼마나 노리는 줄 알아? 나 없는 틈에 금고 열어서 돈 가지고 도망가면, 나는 다 늙어서 굶어죽으라고? 그건 안되지.” 
 
미현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수화기 너머로 전해진, 미현의 숨소리는 정희의 귀를 후벼팠다. 
 
“어쩌면, 사람이 그럴 수 있어요. 나는 도무지 그 양반이 이해가 안 돼요.” 
 
정희가 말했다. 
 

 
정희는 하루 종일 남편의 독설에 시달렸다. 정희가 침대에 누우면, 남편은 하루 종일 정희의 천장을 거닐며, 정희를 괴롭힌다. 물리적으로 남편을 떠났지만, 정서적으로 남편을 떠날 수는 없었다. 
 
정희에게 천장은 영화 스크린이다. 지난날의 상처와 고통이 편집 없이 상영된다. 정희에게는 천장을 벗어날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다. 가냘픈 몸을 침대에 파묻고,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나는 정희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무슨 힘으로 버텨오셨어요.” 
 
내가 질문하자, 정희는 끝내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애들이지요. 애들이 잘 컸어요. 나는 무식했는데, 애들은 똑똑 허니 잘 배웠어요. 얼마나 착한지, 애들 때문에 마음고생한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요.” 
 

 
둘째 딸 미현이 시골 친척의 장례를 마치고, 정희를 찾아왔다. 기운 없이 침대에 누워있는 정희를 끌어안았다. 미현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정희를 아기처럼 품에 안고, 쓰다듬었다.
 
미현은 아이에게 옛날이야기를 전해주듯, 따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나는 있잖아. 엄마가 내 엄마여서 너무 감사해. 엄마가 없었으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자꾸 눈물이 났다. 미현은 한 손으로는 엄마의 머리를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눈물을 닦았다. 
 
“뭐가 고맙다는 말이여. 나 같은 엄마 만나서 고생만 했지. 엄마가 잘 배운 여자였으면, 너희들 데리고 나와서 험한 꼴 안 보여주면서 살았을 텐데, 내가 능력이 없어서 그랬지. 엄마는 못 배운 게 평생 후회여.” 
 
“아니야. 엄마 덕분에 언니랑 나랑 잘 컸잖아. 이제, 엄마만 생각해. 다른 걱정은 하지 말고….” 
 
미현은 한참 동안 엄마를 품에 안고 토닥거렸다. 정희의 머리통을 으깨려는 듯이 달려들던 두통도 잠시 멈칫했다. 
 

 
“호주에 사는 딸은 전화기만 들면 울어요. 울지 말라고 해도 소용이 없어요. 매일 엄마 생각하면서, 교회 가서 기도한다고, 그러데요.” 
 
나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정희의 입 밖으로, 기도라는 말이 흘러나왔을 때, 나는 뛸 듯이 기뻤다.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딸이 엄마를 위해 무슨 기도를 할까요?” 
 
“글쎄요. 뭐 그냥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을까요?” 
 
“그럴 거예요. 그 기도를 빼놓지는 않겠죠. 하지만, 딸은 거기서 멈추지 않을 거예요. 제가 목사인 거 아시죠? 딸이 무슨 기도를 하는지 알려드려도 될까요?” 
 
정희는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기도에 관한 가르침에 관심을 보인 것이 아니라, 딸이 무슨 기도를 할까 궁금했던 것이다. 
 
“제가 따님은 아니지만, 따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인생을 살아왔아요. 아마도 따님이 저를 어머니와 연결해준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일단, 제가 살아온 이야기부터 짧게 전해드릴게요.” 
 
정희는 경청했다. 중간중간 눈물을 닦아내며, 내 이야기를 끊지 않고 들어주었다. 내가 살아온 인생을 진지하게 들어준 정희에게 고마웠다.
 
“아따, 젊은 양반이 고생을 많이 했네요. 생긴 건 멀쩡하구먼, 속은 많이 아팠겠어요. 어찌 그런 일을 겪고, 이런 일을 한데요.”
 
나는 정희의 따뜻한 목소리와 눈빛에 위로를 받았다. 그 순간의 정희는 동화책에 나오는 마음씨 따뜻한 할머니였다. 
 
“제가 딸이라면 이런 기도를 할 것 같아요.” 
 
정희는 다시 한 번 나에게 집중했다. 나는 정희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입술을 뗐다.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첫째 딸 미숙의 심정을 정희에게 전했다. 내 감정에 동요가 일어나 눈물을 쏟아지고, 정희가 함께 따라 울 때,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나는 정희의 딸이 아니었다. 정희가 내 어머니였다. 
 
정작 나는 내 어머니에게 전하지 못한 진심을, 내 목소리로 정희에게 전한 것이다. 
 
엄마, 미안해. 
엄마, 고마워. 
엄마, 사랑해. 
 
감정의 홍수였다. 갑작스럽게 불어난 물살에 내 자아가 떠내려갔다. 정희를 혼자 남겨두고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상담자로서의 완전한 실책이었다. 
 
그때, 정희가 내 손을 붙잡았다. 
 
“목사님, 엄마도 알 거예요. 목사님이 직접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엄마니까 알아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마음 가져줘서, 고마워요.”
 
나는 후회했다. 정희의 나이 절반도 살지 못한 내가, 얇퍅한 상담의 기술로 무엇을 하려고 했던가. 
 
정희는 상처 입은 내담자였지만,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위대한 어머니였다. 
 
미숙한 상담자로 잠시 역전이가 일어나 정희를 어머니로 여긴 순간에도,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나는 잠시 동안 따뜻한 어머니를 만났고, 정희는 가족이라는 주관적인 울타리를 넘어 객관적으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가치를 재평가하게 되었다. 
 
무능한 상담자에게 베풀어진 과도한 은혜였다. 
 
정희는 내게 고맙다는 말을 남겼다. 나는 두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정희, 그리고 호주에서 나를 정희와 연결해준 미숙이었다. 
 
정희를 돌려보내고, 나는 창가로 먼 산을 바라봤다. 전화기를 손에 잡고 머뭇거렸다. 그러다, 용기를 내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엄마. 뭐해? 그냥 전화 걸었어.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나서….”

차별 없이 키울 거예요

“제발 아내가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을 망치고 있거든요.” 
 
N은 마흔둘, 열 살 아들, 일곱 살 딸의 아빠다. 그는 아내가  과도할 정도로 아이들 교육에 집착하는 것을 걱정한다. 임신한  순간부터 아내는 태교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몸에 좋다는 음식을 먹고, 아이의 두뇌 발달에 도움을 주는 음악을 듣고, 정서에 도움이 된다는 책을 읽었다. 
 
처음에는 남편도 아내의 적극적인 노력이 싫지 않았다. 웹서핑을 하다가 유익한 정보를 발견하면 그녀에게 문자를 보내주기도 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첫 아이가 태어난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남편이 생각할 때, 아내는 너무 이른 나이부터 아들에게 글자와 숫자를 가르쳤다. 아이가 하기 싫다고 우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간식으로 아이를 달래면서 공부를 시켰다. 아내의 양육 방식에 대해 남편이 대화를 시도하면, 그녀는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잔소리를 한다고 입을 막아버렸다. 
 
남편은 아이들과 마음껏 놀 수도 없었다. 학원 숙제, 엄마가 내준 숙제를 하느라 아이들이 바빴다. 남편이 애들 얼굴이라고 보고 싶어서 아이들 방문을 열면, 아내가 거실에서 말했다. 애들 방해하지 말고 방에서 나오라고. 
 
“저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첫째는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이고, 둘째는 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에요. 도대체 아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과연 나중에 애들이 엄마에게 고맙다고 할까요? 아닐 걸요. 지금 애들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밖에서 뛰어놀아야 한다고요. 우리 애들이 공장에서 찍어낸 물건과 뭐가 달라요? 전 아내의 방식에 동의할 수 없어요.” 
 
아내도 가만있지 않았다. 
 
“여보, 당신은 참 마음 편하게 산다. 아파트의 다른 엄마들 이야기를 좀 들어보라고. 우리 애들만 놀이터에서 키우면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 알아? 바보 되는 거야. 우리 어린 시절하고 완전히 다르다고. 애들이 스스로 할 때까지 기다려주다가 애들 기죽으면 어떻게 할 건데? 학교 수업을 못 따라간다니까. 다른 애들은 선행을 다 해서 따라갈 수가 없다고. 
 
그러면 학교에서 전화 온대. 학원 보내라고. 누군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안 도와줘도 되니까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 마. 나도 힘들어.” 
 
남편이 다시 말했다. 
 
“그래도 이건 아동학대라고.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여보, 제발 그만해.” 
 
아내는 ‘아동학대’라는 말을 듣고 눈이 뒤집혔다. 남편에게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들었다. 처음 보는 아내 모습이었다. 남편은 절망했다. 다시 예전처럼 지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부터 남편은 아내가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에 불만을 느껴도 표현하지 않았다. 
 
아내가 아이들을 혼내는 소리가 방문 너머에서 들리면 밖으로 나갔다. 매번 아내와 다툴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파트 주변을 한 바퀴를 돌며 끊었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어 보지만 공허한 마음을 달랠 수 없었다. 
 
“남편이 아동학대라는 표현을 쓰다니요. 말도 안 되죠. 그는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거라고요. 제가 하루 동안 아이들과 어떻게 지내는지 남편이 알아야 해요. 아이들 준비시켜서 학교에 보내고, 집안일을 하고, 간식을 준비하고, 공부시키고, 저녁 준비를 하고, 애들을 씻기고 재워요. 
 
남편은 집에 와도 도와줄 생각은 안하죠. 이건 아닌 것 같다? 그런 말은 누가 못하나요. 남편은 아이들만 걱정하지 제 걱정은 전혀 안 해요. 저도 지쳤어요.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남편은 버스가 하루에 일곱 번 밖에 들어오지 않는 시골에서 자랐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누나 셋. 셋째 누나와 여섯 살 터울이 지는 막내로 태어나 사랑받고 자랐다. 
 
다른 집 아이들은 어린 시절 농사일을 도와주러 밭에 나갔지만 남편 부모님은 절대로 일을 시키지 않았다. 누나 셋이 일을 거들었다. 남편은 책을 좋아했고, 공부도 제법 잘했다. 시골에서 초등학교 졸업하고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했다. 
 
오고가는 시간이 아까워 영어 단어를 외웠다. 중학교 졸업하고 수도권에 있는 명문고에 진학했다. 성적은 최상위권이었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들어갔다. 
 
“공부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가 하고 싶을 때 하는 거죠. 만약 부모님이 강제로 공부를 시켰다면 저는 절대 공부하지 않았을 거예요. 필요하면 하는 거죠. 아이들이 어릴 때는 밖으로 나가 뛰어놀아야 정상이에요. 언제 놀아보겠어요? 아마 우리 애들은 공부를 못할 거예요. 벌써 질려버렸을 테니까. 더 늦기 전에 이 상황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내는 경찰 공무원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 어머니, 세 살 위 오빠.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순종적인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아내는 차별 받았다고 생각한다. 오빠만 다닌 피아노 학원, 속셈 학원, 태권도 학원. 그녀는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녀가 배우고 싶은 것이 있어도 부모님은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 독하게 노력했다. 중학교에 올라간 다음부터는 오빠보다 학교 성적이 좋았다. 관심 받고 싶어 노력한 결과였다. 그러나 부모님은 그녀가 만족할만한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그러다 절망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녀가 대학 합격 통보를 받은 날, 부모님이 말했다. 대학 등록금은 스스로 마련해서 다니라고. 오빠도 그렇게 했다고. 오빠 역시 그랬다니 부모님의 말에 따랐다. 오빠가 제대하고 단 둘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그녀는 짧은 투정을 부렸다. 등록금을 벌면서 학교에 다니기가 너무 힘들다고, 오빠는 힘들지 않았냐고 물었다. 오빠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직감했다. 오빠와 자신의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그날 저녁, 술에 잔뜩 취해 집에 들어가 부모님에게 처음으로 대들었다. 부모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늘 오빠, 오빠, 오빠였어요. 저는 무슨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패배한 거죠. 독한 마음을 먹고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았어요. 내 아들, 딸은 차별 없이 키울 거예요. 차별하지 않고 공평하게 최선을 다해 교육하려고요. 
 
아이들을 패배자로 키우고 싶지 않아요. 잘 키워서 보란 듯이 세상에 내놓을 거예요. 대학 졸업할 때까지 배우고 싶고,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최선을 다해 지원할 거예요. 그 다음은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죠. 아이들이 독립할 때까지는 어쩔 수 없어요.” 
 
***
 
자녀 교육에 대한 관심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부모 내면에 상처가 도사리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투수가 손으로 꽉 쥐고 던진 공은 포수의 글러브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원하는 방향으로 정확히 던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무줄에 묶어 빙빙 돌리다 끊어진 공은 원치 않는 방향으로 날아간다. 누군가에 몸에 맞아 상처를 낸다. 
 
아내가 던지는 공은 손으로 꽉 쥐고 던진 공이 아니라 고무줄에 묶어 빙빙 돌리는 공이다. 아내의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아이들 마음에 또 다른 상처를 준다. 상처 입은 그녀는 자기답지 못한 방식으로 자녀를 키운다. 
 
그녀 마음에 자리 잡은 감정은 두려움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지켜내지 못하면 다른 사람과 경쟁에서 지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이 그녀를 억누르고 있다. 아이들이 세상이 뒤처지면 안  된다는 엄마의 왜곡된 신념은 두 아이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엄마가 느끼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자녀에게는 엄마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그녀의 왜곡된 신념을 건강한 신념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남편이다. 그러나 그는 아내를 도와주지 못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역시 두렵기 때문이다. 부부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 자체가 두렵다. 그것이 아내와 대화를 단절시키고, 아이들이 처한 상황을 외면하게 만든다. 남편에게는 회피 행동이 보인다. 
 
자녀 교육에 대한 갈등이 일어나면 그는 밖으로 나간다. 아내가 아이들에게 언어폭력을 휘두르면 괴로운 마음을 억누르고  상황을 회피한다. 아내에게 아동학대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남편 또한 아이들을 외면하거나 방치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부모 중 한 사람에게 아동학대 당한 성인은 누가 자신을 때렸는지 분명하게 기억한다. 그러나 그가 매질을 당할 때, 자신을 때리지 않았던 부모는 무엇을 하고 있었냐는 질문에 분명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기억하지 못한다.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은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아버지에게 맞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지만 어머니가 당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자신이 맞을 때마다 어머니가 집에 없었을 리 없다. 단 한 번도 같은 공간 안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죄 없는 아이는 왜 아버지의 매질을 당해야 했을까? 그를 보호해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폭력적인 남편과 사는 아내는 두려움으로 인해 남편에게 맞서지 못한다. 고통스러운 상황을 목격하면 침묵하거나 집을 나가 버린다. 아이를 보호해줄 유일한 사람이 도망치는 것이다.  
 
남편이 빨간 망토를 몸에 두르고, 언어폭력에서 아이들을 구해내는 슈퍼 영웅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상황을 피하지 말고 아내와 대화해야 한다. 담배 하나 물고 아파트 주변을 서성거리는 동안, 둘 사이에 해결해야 할 문제는 그만큼 복잡해진다. 더 이상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도망치지 마라. 두려움을 극복하고 아내와 대화하자. 
 
또한 남편은 자녀 교육에 대한 모든 책임을 아내에게 떠맡기고 있다. 아이들 교육에 대한 스트레스는 결코 가볍지 않다. 아이들은 뜻대로 자라주지 않는다. 남편이 뒤로 물러나면 아내의 짐은 무거워진다. 
 
남편이 퇴근 후에 잠시 돌보는 아이들과 아내가 종일 돌보는 아이들은 완전히 다르다. 종일 돌보는 아이들이 훨씬 감당하기 힘들다. 육아는 ‘아내의 과업’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부부의 공동 과업이라고 생각하자. 
 
그러면 남편은 아내에게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아내의 신념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아내 상처를 치유할 사람은 남편이다. 따뜻한 사랑으로 그녀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다.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여 아내와 함께 하라. 
 
이 순간에도 차별 받으며 받으며 성장하는 아이가 있다. 차별 받으며 성장했던 부모가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 역시 자녀에게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예민한 첫 아이를 마음속으로 밀어내지는 않았는가? 자신과 성향이 너무 다른 아이를 밀어내지는 않았는가? 유독 손이 많이 가는 아이에게 모든 관심을 쏟아 부은 나머지 다른 자녀를 돌아볼 여유가 없는 것은 아닌가? 
 
상처 입은 우리가 어느덧 부모가 되었다. 우리 안에 상처를 보듬어가는 힘으로 자녀 마음속의 상처를 치유하는 부모로 성장하자. 그것이 나와 당신과 책임이자 의무이다.  

결론부터 말하지 마

“아내가 우울증으로 힘들어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왔어요. 행복한 가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아내가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아요. 침대에 누워 일어날 생각을 안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A는 마흔두 살, 결혼 9년 차 두 아이의 아빠이다. 아내와 교회 청년부에서 만났다. 그는 청년부 회장이었고, 아내는 청년부 임원이었다. 직업도 비슷했다. 그는 초등학교 신임 교사였고, 아내는 이름 있는 입시 학원 영어 강사였다. 아내가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그가 말했다. 
 
“나, 학교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아보고 싶어.” 
 
그는 공교육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며, 삶이 불안정하더라도 올바른 길을 가고 싶다고 했다. 그것이 하나님 뜻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가 선택한 일은 기독교 대안학교 교사였다. 공교육 교사보다 월급은 적었지만 의미 있는 일이었다.  
 
학교는 집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었다. 일 년이 지났을 때,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학교 이전 소식이었다. 학교 측은 아이들에게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학교를 지방으로 이전한다고 했다. 학교 설립 취지에 공감하는 재력가 한 사람이 땅을 기부해서 시작된 일이었다.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아내에게 시골에 내려가 살자고 부탁해 봤자 싫어할 것이 뻔했다. 집은 그녀의 친정과 어릴 때부터 다닌 교회와 가까웠다. 거주지를 옮기면 아내는  가족, 친구와 멀어진다. 그는 고민 끝에 주말 부부를 제안했다. 학교에서 선생님을 위한 숙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아내가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부터 주말 부부로 살기 시작했다. 
 
그는 주말마다 집에 내려와 아내와 가족에게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아내는 그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았다. 주말마다 반복되는 그녀의 짜증과 불평에 지쳐갔다. 그는 아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남편을 의지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아내가 불평할 때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내의 짜증은 날로 심해졌고, 마침내 그녀는 입을 닫아버렸다. 
 
아내가 입을 닫은 날을 기억한다. 목사님이 심방을 오셨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아내의 부정적인 생각을 바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심방을 요청했다. 아내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아내는 무슨 짓이냐며 소리를 질렀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내의 믿음이 사라져 버린 게 분명했다. 목사님은 감사하는 삶에 대해 설교했다. 남편이 미리 목사님께 상황을 알렸기 때문이다. 목사님이 가신 후에 아내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기 시작했다. 
 
“저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해결해보고 싶었어요. 교직을 유지했어야 했나, 이사를 갔어야 했나, 둘째를 늦게 가져야 했나….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아내는 더 이상 제 말을 듣지 않아요. 같이 상담을 받자고 했지만 아내는 그럴 생각이 없었어요.” 
 
***
 
 
남편의 실수다. 과정 없는 ‘결론 제시’는 아내에게 상처가 된다. 남편은 가정을 위해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가를 고민했을 것이다.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다. 그것을 정리하지 않은 채 아내에게 전달하면 결론 없는 대화가 될 것이 뻔하다. 복잡한 생각이 단순하게 정리될 때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아내와 아이들과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차례차례 생각한다. 복잡한 생각이 정리되고 윤곽이 잡히면 아내에게 통보한다. 
 
“나, 학교 그만두기로 했어.” 
또 말한다. 
“우리, 주말 부부하자.” 
아내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단번에 거절한다. 그녀는 남편이  이기적이고 무책임하다고 생각한다. 남편은 당황해서 설득하기  시작한다. 이건 이래서 그렇고, 저건 그래서 그렇다.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고 장황한 설명을 하다 그는 지친다. 아내는 실망한다. 그녀의 표정이 돌처럼 굳는다. 
 
남편이 묻는다. 
“그럼, 당신 생각은 뭔데?” 
아내가 대답한다. 
“몰라. 그런데, 그건 아니야.” 
 
남편은 대화가 안 되는 여자라고 생각한다. 두 번 다시 상의하지 않고 혼자 결정을 내리겠다고 결심한다. 이것이 반복된다. 남편은 생각 없는 여자와 살고, 아내는 이기적인 남자와 산다. 
 
상황을 바꾸려면 ‘결론 제시’가 아니라 ‘과정 공유’가 필요하다. 남편이 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결정해야 한다면 복잡한 상황 그대로 아내와 공유해야 한다. 그가 혼자 내린 결정으로 아내를 설득해서는 안 된다. 
 
플랜 A, B, C, D, E … Z까지 말할 각오를 하자.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실제로는 C, D에서 멈출 테니까. 과정을 있는 그대로 공유하다 보면 아내가 “걱정 그만하고, 당신이 알아서 해”라고 말할 것이다. 믿고 맡긴다는 뜻이다. 
 
고민하는 과정을 있는 그대로 말할 때, 아내는 남편이 가정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자신보다 아내와 아이를 배려한다고 느끼면 그녀는 남편을 위해 희생하고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 역시 가족을 위해 삶의 한 부분을 포기하며 산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 과정을 공유하면 진심이 전해진다. ‘이 사람에게는 가족이 가장 중요하구나’라는 신뢰를 얻은 남편은 존경받는다. 그래서 “걱정 그만하고, 당신이 알아서 해”라는 말에 담긴 속뜻은 이렇다. 
 
“당신이 우리를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아.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선택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도 알고. 그러니 이제 걱정 그만해. 당신이 결정하면 따를게.”
 
하지만 남편이 아내에게 과정을 공유하는 것은 어렵다. 아버지 세대가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이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가부장적인 문화가 아직도 자리 잡고 있다. 아내에게 시시콜콜하게 일상을 말하는 남편은 수다쟁이로 취급 받는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 없다. 나는 아직까지 아내와 대화를 많이 해서 아내에게 무시당하는 남편을 만나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 경우를 많이 보았다. 
 
번거롭더라도 최선을 다해 과정 자체를 아내와 공유하기 바란다. 아내를 위해 희생할 것은 희생하고, 포기할 것은 포기하려는 의지를 갖는다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며 살 수 있다.  
 
정말로 그렇다. 

지금 당장 결정해

“남편이 얼마 전에 급성 맹장으로 일주일 동안 입원한 적이 있어요. 집에서 필요한 물건을 챙겨서 병원으로 출발하면서 전화를 했어요. 남편이 평소와 다른 목소리로 시어머니가 오고 계시니 조금 있다가 오라고 했어요. 서로 만나면 불편하니까.  제가 괜찮다고 하니까 남편이 짜증을 내기에 저도 오기가 나서 바로 가겠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시어머니 목소리가 들렸어요. 조금 있다가 오라면 이따가 오면 되지 무슨 말이 많냐고. 옆에 계셨던 거예요. 남편은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전부 다 해요. 그의 마음속에는 제가 없어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상담을 받기로 한 거죠. 
 
남편은 상담 받아보자고 하면 너나 받아보라고 할거예요. 그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하겠죠. 상담이 끝나는 대로 결정하라고 말하려고요. 어머니를 선택할 것인지, 나를 선택할 것인지.” 
 
그녀는 네 살 연하 남편과 결혼했다. 결혼 10개월이 지난 지금 이혼을 생각하고 있다. 짧은 결혼 생활 동안에 그녀는 밀려난 기분이었다. 그녀의 고통은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그녀는 일찍 시작한 사회생활 덕분에 남편보다 더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남편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갓 시작해서 모은 돈이 거의 없었다. 아내가 괜찮다고 여러 번 말했지만 남편은 자존심 때문인지 어머니가 도와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시어머니가 그녀에게 일정 금액을 입금해주기로 약속했다. 남편과 시어머니가 반복적으로 하는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시어머니가 약속한 금액에 맞춰 결혼식, 신혼살림을 준비했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시어머니는 태연하게 말했다. 
 
주기로 한 돈의 절반만 줄 테니 절약하면서 살면 좋겠다고. 아내는 짜증이 났다. 진작 말해주셨으면 결혼식을 그에 맞춰 계획했을 것이다. 신혼살림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스란히 갚아야 할 빚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에게 답답한 마음을 전했다. 
 
“당신은 알고 있었어?” 그녀가 말했다. 
 
“당연히 알고 있었지.” 그가 말했다. 
 
“왜 미리 말 안했어?”
 
“엄마가 내 생각을 묻기에 나는 괜찮으니까 당신한테 직접 물어보라고 했지.” 
 
“나 빼놓고 둘이 말을 맞춘 거네. 내 반응이 중요했어? 둘이 미리 결정한 거잖아!” 
 
“엄마가 오랫동안 모은 돈이야. 대출받아서 금액을 맞추려고 한 건데 대출을 못 받은 거야.” 
 
“그럼, 진작 말씀을 하셨어야지. 다 당신하고 나하고 갚아야 할 빚이야.” 
 
“갚으면 되잖아. 나는 돈 몇 푼 때문에 당신이 엄마 앞에서 인상을 팍팍 쓰고 앉아 있는 게 더 화가 났어.”
 
“내 표정이 중요해?”
 
“당신이 엄마 무시하는데 화 안나? 내가 장모님한테 그런 적 있어?” 
 
“당신 정신 나갔구나. 지금 우리 큰일 났어. 어떻게 갚아. 미치겠어, 진짜….”
 
“난 당신 때문에 미치겠어. 엄마는 최선을 다한 거야. 어떻게 당신이 엄마한테 그럴 수가 있어?” 
 
“그만하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 당신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남편에게는 오직 어머니뿐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과연 아내의 자리가 있는지 의문이었다. 이미 밀려나버린 자신을 인식하는 순간, 그녀는 비참해졌다. 
 
그녀는 남편과 시어머니의 독특한 관계를 이해하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난도 퍼즐조각을 맞추는 사람처럼 그녀는 신중해보였다. 
 
남편의 아버지는 가정에 충실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젊은 날부터 고생이 많았다.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밤늦게까지 집에 들어오지 못했다. 
 
어린 시절, 남편은 하교하면 집이 아닌 식당으로 갔다. 식당은 바빴다. 어머니가 아들을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식당 TV를 보다가, 숙제를 하다가, 혼자 놀다가 잠들었다. 밤늦은 시간 식당 일이 끝나면 어머니의 등에 엎혀 집으로 왔다. 
 
그의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이 남달랐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어머니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많았다.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면서 그가 여유 있게 생각하자고 했지만 아내의 생각은 달랐다. 남편보다 네 살이나 많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일정에 맞춰 두 사람은 결혼했다. 
 
아내는 어린 시절부터 독립적으로 성장했다. 부모님은 따뜻한 가정환경을 만들어주었지만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다. 하나 있는 동생은 여섯 살이나 어렸다. 부모님이 일이 바빠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아서 그녀가 동생을 돌봐야 했다. 학원에 다니거나 과외 한 번 하지 않고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에 들어가는 날, 그녀는 부모님에게 편지를 썼다. 대학 등록금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녀는 과외를 하면서 돈을 벌고, 성적 장학금을 받아서 등록금을 마련했다. 정신없이 사느라 미팅 한 번, 연애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20대가 지나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에게 남은 것은 서른이 넘은 나이, 그리고 통장 하나가 전부였다. 인생 허무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고민하고 있을 때, 친구 소개로 남편을 만났다. 그녀는 결혼을 앞두고 부모님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알아서 하면 될 일이었다. 
 
두 사람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러니까 만약에 병원에 제가 먼저 도착했고, 어머니가 병원으로 오고 계시다면 상황이 어떻게 달라질 것 같으냐고 물으신 거죠? 반대 상황이네요. 아… 잘 모르겠어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아마 남편은 제게 집에 가라고 했겠죠. 서로 불편하다고. 이렇게 말하니까 제가 더 비참해지네요. 남편은 항상 어머니가 먼저라고 생각하니까요. 분명히 제게 집에 가라고 했을 거예요.” 
 
병원에서 퇴원한 날, 남편은 아내에게 오지 않고, 시댁으로 갔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그녀가 수십 번 전화한 끝에 시어머니와 통화가 되었다. 아들 몸이 불편해서 이것저것 챙겨줘야 할 것이 많으니 몸이 다 회복되면 집에 보내겠다고. 
 
다음 날, 저녁 늦게 남편이 보낸 문자를 받았다. 평소와 다르게 존댓말을 사용했다. 일주일 내로 갈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왜 존댓말을 사용했을까?’ 
 
그녀는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남편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가 돌아오면 담판을 짓고 싶었다. 더 이상 이런 식으로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다. 마음속으로 여러 문장을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정리된 생각을 종이에 적었다. 종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예스 아니면 노 둘 중 하나, 그의 대답에 따라 그녀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그 종이 위에 문장은 간단했다. 
 
“나를 선택하든지, 엄마를 선택하든지 둘 중 하나야.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살 수는 없어. 지금 당장 결정해.” 
 
 
***
 
그녀 마음이 조급하다. 자신의 관점으로 남편을 바라보고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싶어한다. 남편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한다면 그는 아내가 원하는 답을 주지 않을 것이다. 질문 자체를 회피하거나 어머니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둘 중 무엇을 선택하든 아내는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 이혼하지 않은 채 결혼 생활을 유지하게 된다면 아내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된다. 남은 결혼 생활은 지옥이 된다. 아내보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남편과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조급하게 남편을 밀어붙여 얻는 결과는 결국 두 사람을 파괴한다. 남은 인생이 달린 문제다. 조급할수록 천천히 생각하고 결정해야 한다. 
 
결혼 생활 10개월, 너무 짧다. 서로 알아가는 시간이 부족하다. 연애 시작하고 결혼식을 올리기까지는 서로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결혼 후에는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던 관심이 보다 넓게 확대된다. 원가족에 대한 영향력을 서로 알아가는 시간이다. 결혼 전에도 두 사람은 양가 부모님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결혼 이후에 체감하는 원가족의 영향력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다. 
 
남편의 어린 시절을 보라. 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10개월이 아니라 10년이 필요하지 모른다. 남편이 올바른 길을 찾는 동안, 아내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 
 
아내가 이해하기는 힘들겠지만 남편에게 어머니와 아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양쪽에 최선을 다하고 싶은 그를 이해하자. 남편이 아내에게 일방적인 요구를 하는 이유는 절망감 때문일지 모른다. 어머니를 바꿀 수 없다는 절망감, 그래서 어머니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못한 채 아내에게 희망을 거는 것이다. 
 
아내 쪽에서 노력해주면 무언가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말이다. 옳지 못한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방법이 없기에 아내를 몰아세우게 된다. 그녀의 반박이 심해지면 남편은 자리를 잃고 방황한다. 어머니와 아내,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을 관망한다. 관중으로 전락한 채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두 사람을 동시에 떠나버릴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주고 후회 하는 남편을 적지 않게 보아왔다. 모두가 파괴되는 불행한 일은 언제나 남의 이야기일 수 없다. 10개월은 너무 짧다. 더 살아봐야 한다. 남편의 진심을 알고 나서 결정 내려도 늦지 않다. 
 
아내 역시 자신만의 관점으로 시어머니를 바라보는 것을 바꾸기 어렵다. 그녀의 부모님과 시부모님은 다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것뿐이다. ‘그럴 수도 있구나…’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결코 풀리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시부모님을 바꿀 수 있는 며느리는 하루아침에 북핵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협상의 달인일 것이다.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시부모님은 그 자체로 인정해야 한다. 달리 방법이 없다. 그들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아내는 절망의 벽을 향해 돌진하는 버스에 올라탄 것과 같다. 
 
그녀가 변화시켜야 하는 사람은 시부모님이 아닌 남편이다. 그는 충분히 변화될 수 있다. 그의 정체성이 확실하면 문제가 풀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아내와 시어머니 사이에 갈등이 일어날 때, 남편은 자신이 협상의 달인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도,  아내도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착각이다. 중재하려고 하면 더 꼬인다. 
 
남편은 협상가가 아니라 상담사가 되어야 한다. 아내가 화가 나서 자신의 어머니를 비난하고 일어난 일에 대해 불평하더라도 그녀의 감정이 풀릴 때까지 중립적인 자세로 상담을 잘 해줘야 한다. 
 
솔직히 말해보자. 남편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모님을 아내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지나친 욕심이다. “나는 못하더라도 당신은 해야 한다”라는 신념은 아내를 절망의 벽으로 향하는 버스에 태운다. 아내는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 대상이 다른 사람일 때, 남편은 비교적 마음에 여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부모일 때는 마음의 여유는 사라진다. 아내는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하는 중이다. 남편이 협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없다. 그냥 ”그렇구나, 그래서 힘들었겠구나”라고 말해주면 된다. 상담을 잘해주라는 뜻이다. 
 
협상은 아내가 시어머니와 알아서 할 일이다. 아내가 손에 쥔 카드가 없으면 협상이 불가능하겠지만 남편이 상담을 잘 해준 아내는 손에 쥔 카드가 있다. “남편 사랑”이라는 카드다. 그것을 가진 아내는 시어머니의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에 휘둘리지 않는 내공을 갖는다. 
 
남편 마음속에 빛이 들어가지 않은 영역이 있다. 숨겨진 방이다. 문 앞에 “어머니”라고 쓰인 팻말이 있다. 창문 없는 그 방에 노출이 필요하다. 일단 힘껏 열어라. 그래도 힘들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라. 남편을 설득해서 가까운 상담센터에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마저 어렵다면 부부가 함께 모이는 건강한 모임에 나가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다. 다른 부부가 어떻게 사는지 공유하고, 그 모임에서 먼저 고생한 인생 선배에게 조언을 듣는 것도 유익하다. 남편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서투른 사람이다. 익숙해지면 된다. 조금 더 기다려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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