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만나는 예수님은 그렇게 따뜻하지 않아요. 과거에 상담을 받았는데, 관계가 어려운 건 원가족과 관련이 있다고 상담사가 말했어요. 부모님께 사랑받지 못해서 그런 걸까요? 예수님이 정말 멀게 느껴져요.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과거를 수용해주세요. ‘내가 그래서 그랬구나. 나는 어쩔 수 없어. 처음부터 잘못된 거야’라고 생각하 면 과거에 발목이 잡힌 거예요.

 

과거를 수용한 사람은 다른 관점으로 과거를 바라볼 수 있어 요. “내게 그런 결핍이 있었구나. 이제부터 나를 돌볼 거야. 절대 방치하거나 외면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할 수 있어요.

 

과거에 얽매인 삶과 수용하는 삶을 구분하는 절대적 기준이 있냐고요? 솔직히 말하면 없어요. 내 관점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과거의 상처를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는가는 스스로 선택해야지 누구도 강요할 순 없어요. 대신 결정해줄 수도 없고요.

 

나는 내 상처의 의미를 혼자 결정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마음은 없어요. 내가 돌볼 수 있는 방식으로 과거를 바라봅니다. 파괴적인 결론을 내리면 절대 나 자신을 돌볼 수 없을 테니까요.

 

잠시 생각해보세요. 누가 부모에게 원하는 만큼의 사랑을 다 받을 수 있을까요? 세상에 완벽한 사랑은 없습니다. 부모 자녀 사이에도 예외가 없지요. 부모가 자녀를 위해 모든 희생을 감내한다 해도, 자녀는 다른 방식으로 부모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어요.

 

나도 세 아이의 아빠지만, 자녀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지 늘 걱정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시지만 자녀들은 그렇지 않을 거니까요.

 

자,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볼게요.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다’라고 결론을 내리면 자신을 돌 볼 수 없어요. 과거를 되돌릴 수 없으니 답답할 뿐이지요. 다른 방식으로 표현해보면 어떨까요?

 

‘나는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어. 하지만 예수님은 부모님과 달라. 나를 온전히 사랑해주실 수 있어. 지금까지 사랑받지 못 한 채로 살아왔지만 이제는 걱정할 필요 없어. 그분이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실 거야.’

 

같은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자신을 방치하고 외면한 채 살아가느냐, 아니면 예수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돌보느냐”가 중요해요. 나는 자신을 돌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방치하거나 외면하지 마세요.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 식으로 말하면 상처받은 사람을 탓하는 거예요. 어디 말처럼 그렇게 선택이 쉬운가요?”

 

맞아요. 그마저 힘들다면 선택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조건 없이 안아주실 겁니다. 그러면 복잡한 과정 없이 사랑받고 끝납니다. 예수님 품에 안긴 사람은 단순해집니다.

 

상처받은 과거가 새로운 의미로 받아들여지지요. 고통스러운 순간마저도 그분이 주신 선물처럼 느껴집니다. 고통의 시간을 잘 지나온 덕분에 그분을 더욱 사랑하게 된 거지요.

 

과거에 얽매이지 마세요. 어제의 당신, 오늘의 당신, 내일의 당신도 예수님의 사랑스러운 자녀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살아온 모든 시간을 사랑하세요. 한없이 따스한 눈빛으로 당신을 바라보시는 그분을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