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1-2>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직분은 기능입니다

상담실 안에서 교회 목사님들에게 상처 받은 사람들을 적지 않게 만납니다. 목사님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권위 있는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난 사람도 있습니다. 장로, 권사, 집사, 교사, 소그룹 리더 모두 포함됩니다. 

예수님은 사랑해도 교회는 싫다는 사람을 만나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머리를 숙이며 용서를 구하면서, 지난 날 내가 상처 준 사람을 떠올립니다.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사람들은 자주 오해합니다. 직분이 권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직분은 기능입니다. 직분이 권위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권위는 복음에서 나옵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를 포함한 지도자를 존중해야 할 필요는 있지만, 복종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목사의 말이라고, 리더의 말이라고 무조건 복종한다면, 결국 상처 받고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복음이 최종적인 권위를 갖습니다. 지도자의 말과 행동이 복음과 나란히 가고 있다면, 마땅히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도자의 말과 행동이 복음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아무리 교회가 상식을 무시한다고 해도 상식으로 반박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으로 반박해야 합니다. 복음은 상식을 초월한 진리입니다.   

바울은 십사 년이 지나서야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예루살렘은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사도들의 본부였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는 것은 사도들과 공식적인 만남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물론, 바울이 언급하는 만남에서 공식적인 종교회의가 열린 건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사도들을 만났다는 것은 밀실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진 만남이 아니라 공적인 의미를 가진 만남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교회 지도자들을 만나, 자신이 전한 복음을 상세히 설명합니다. 아마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설명을 듣다가 사도들 중에 누구 하나라도 “다 좋은데, 이거 하나는 잘못된 것이다. 오해의 소지가 있다. 바로 잡아야 한다.”라고 말하면, 바울은 치명타를 입었을 것입니다. 

14일이 아니라 14년 동안 복음을 전하고 나서 사도들을 만난 바울입니다. 사도들이 인정하지 않는 복음을 14년 동안 전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바울의 입지는 한 없이 좁아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려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바울의 복음을 흔쾌히 인정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에 불순물 하나 끼어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믿는 복음과 바울이 전한 복음은 일치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사람들의 공격이 피곤하니까 인증마크라도 하나 달고 싶은 심정으로 사도들을 만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사도들의 허락이나 동의를 받으러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기록된 그대로,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순종해서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사도들의 동의나 허락을 구해야 했다면, 14년이나 지나버린 시점이 아니라, 회심 후 즉시 찾아갔어야 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교회 지도자들의 인정이나 허락을 받을 목적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미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전한 복음이 옳다는 확신입니다. 바울의 확신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근거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만나서 전해주신 복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바울을 만나주신 덕분에 이방인에게 차별없이 전해지는 복음이 바울에게 전해졌습니다. 

바울은 사도들의 인정에 목마르지 않았습니다. 복음 그 자체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믿는 복음이나 자신이 전한 복음이나 출처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복음을 말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 지도자들을 존중했습니다. 그들의 허락과 동의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들의 의견을 경청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도들이 복음의 권위에 순종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사도 개인의 권위에 순종한 것이 아니라, 복음의 권위에 순종했습니다. 제아무리 사도라도 복음에 위반하면, 바울은 거침없이 비난의 말을 쏟아붓습니다. 

다음 본문에서 베드로를 맹렬히 비난하는 바울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가 복음을 무시하는 행동을 저질렀을 때, 바울은 가차없이 베드로를 공격합니다. 바울이 순종할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복음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지도자에게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은 길을 잃습니다.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지도자에 대한 존중은 그들이 복음에 순종할 때만 유효한 것입니다. 지도자가 복음을 말한다면, 변명하지 말고 순종하십시오. 

복음이 아닌 다른 것을 말한다면, 거부하십시오. 무조건 순종하거나 편들면 안 됩니다. “우리 목사님 그럴 분 아니다. 전부 오해다.” 그 말이 복음에 근거한 것이라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의리에 근거한 것이라면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과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 매순간 복음적이어야 합니다. 

만약 자신이 지도자라면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복음을 무시하는 순간, 사람들도 우리를 무시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내 의견을 무시할 때, 기분 나쁠 필요 없습니다. 나 좋아서 모인 사람들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모인 사람입니다. 

내 의견에 안 받아준다고 괴로워하면 잘못된 겁니다. 자신의 고난을 미화하지 마십시오. 복음적이고 더욱 복음적이면, 복음적인 사람들은 따라줄 것입니다. 

사람들이 반대하면 내 뜻은 막힙니다. 걱정마십시오. 하나님의 일은 막힘 없이 진행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돌보실 것입니다. 사람으로 낙심해도, 하나님이 위로해주십니다.  

<갈라디아서 2: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하나님이 판단하십니다

나는 복음이 없는 사람들과 편견없이 어울립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좋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취미라면 취미입니다. 

나에게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미 친구인 사람, 아직 친구가 아닌 사람. 시간과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무라도 편하게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목회하면서 터득한 기술이 아니라, 개인적인 성향입니다. 

마음 편히 사람들과 어울리다 가끔 어색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의도치 않게 상대방의 호의를 거절해야 하는 일이 생깁니다. 술에 관련된 문제가 등장할 때 그렇습니다. 한국 문화에서 술은 곧 관계입니다. 이리저리 고민할 일이 적지 않습니다. 

다행히, 목사인 나에게 대놓고 술 한 잔 하자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술 친구가 없어도, 목사와 술을 마시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누군가 나에게 술을 권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마시지 않습니다. 정중하게 거절합니다. 

“술마시지 마라.” 이런 말 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내 직업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목사로 압니다. 목사가 맥주 한 잔 하는 모습을 보고, “융통성 있고 개방적이네. 말이 좀 통하겠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뭐야, 목사라 조금 다를 줄 알았더니 우리랑 똑같네.” 

마시는 행위가 품고 있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열 사람을 얻어도 한 사람을 잃는다면, 모든 사람을 잃는 것입니다. 내 존재의 신뢰가 사라지면, 내 말의 신뢰도 함께 사라집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보든 안 보든 나름의 원칙과 기준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크리스천으로 인생을 살다보면, 원칙과 기준에 대한 고민을 적지 않게 해야 합니다. 물 흐르듯 사는 것이 아니라,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급변하는 시대를 살아가니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양보해야 해야할지 모른 채 삽니다. 타협할 것과 타협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이랬다저랬다 일관성 없는 사람이 됩니다. 

기준은 단순합니다. 복음이 기준입니다. 복음적 가치가 왜곡되고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면 절대로 타협하면 안 됩니다. 사소하고 작은 것 하나 눈 감아주면 복음 자체가 왜곡됩니다. 누구라도 처음부터 작정하고 이단되는 게 아닙니다. 조금씩 변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필요한 곳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유연해야 합니다. 융통성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단, 복음이 왜곡되거나 변질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유연해야 합니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과 치밀한 논리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는 상황에 갑자기 디도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디도는 디모데처럼 바울의 사랑스런 동역자이자 영적인 아들이었습니다. 

아마도 거짓 교사들은 “디도가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이니 할례를 받게 하라”고 따지고 들었을 것입니다. 디도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이 아니니 당연히 할례를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만약 디도가 목회를 하고 싶다면, 더 이상 교회 갈등을 일으키지 말고 할례를 받으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할례는 지금으로 말하면 포경수술입니다. 간단한 절차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바울은 거절했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바울에게 필요한 건 융통성이 아니었습니다. 좋은 게 좋다고 말하다가 복음이 송두리째 무너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 이유입니다. 

아마 거짓 교사들은 디모데가 이미 할례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당하게 디도에게 할례를 받으라 말했습니다. “디모데도 할례를 받았는데, 디도가 거절할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논리입니다. 

그들은 바울을 기준 없는 사람으로 몰아갑니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된다고? 그딴 말이 어디있냐? 당신은 일관성 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말하는 복음도 엉터리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분명한 기준이 있었습니다. 본질을 지켜내기 위해, 절대로 타협하지 않은 것입니다. 바울의 관점에서 디도와 디모데의 상황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디도는 부모가 모두 이방인이었습니다. 디모데는 아버지가 이방인이고 어머니가 유대인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유대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이니 할례를 받는 것이 상관 없었습니다. 원래 받아야 할 것을 나중에 받은 것 뿐입니다. 

할례를 받은 목적은 구원 받을 목적이 아니라, 디모데의 사역을 확장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자격으로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기 위해 할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디도는 달랐습니다. 디도는 이방인으로 태어나 이방인으로 자랐습니다. 할례를 받을 이유가 없었던 겁니다. 만약 디도가 할례를 받는다면, 바울이 전한 복음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이방인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선언적인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울이 타협했다면, 갈라디아 지역 교회 뿐만 아니라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개척한 모든 교회가 동시에 혼란에 빠져버렸을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이중적인 잣대로 바울을 바라봤지만, 바울은 오직 한 가지 기준으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복음이 왜곡되지 않고 온전히 전해질 수 있다면, 그는 파격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과감한 융통성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복음이 왜곡될 수 있다고 판단이 들면, 그는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사람처럼 완고해졌습니다.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온 세상이 맞서도 그는 의연하게 버텨낼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우리는 급변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연히 혼란스럽습니다.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교회가 유행을 탄다고 말합니다. 교회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바라보며, 본질을 저버리고 세상과 타협한 것이라 말합니다. 

반대로, 낡은 전통을 유지하는 교회를 무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과 단절한 주제에, 어떻게 세상에 복음을 전하냐고 비아냥 거립니다. 

누가 옳은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판단은 오직 하나님이 하실 뿐입니다. 우리는 계속 고민할 뿐입니다. “내가 옳다”는 확신은 게으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부지런히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복음이 위협받지 않고 온전히 전해질 수 있겠는가? 유연해지자. 복음이 왜곡될 위험이 있는가? 엄격해지자.” 

고민하는 과정 속에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우리를 통해, 온전한 복음이 전해지게 하실 줄 믿습니다.  

<갈라디아서 2:4-5>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이단은 교묘합니다

교회가 신뢰를 잃었습니다. 안팎으로 비난받습니다. 이대로 가면 희망이 있나 걱정하는 사람 많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힘든 교회 이단들이 침투합니다. 교회를 쑥대밭으로 만듭니다. 정말로 큰일입니다. 

현상만 보면 교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걱정과는 달리 절대로 교회는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교회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사람은 못해도 예수님은 하십니다. 

부패한 목사가 교회를 쓰러뜨릴 수 없습니다. 세상의 핍박이 교회를 쓰러뜨릴 수 없습니다. 이단의 공격이 교회를 쓰러뜨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진리의 복음으로, 교회를 지켜내실 것입니다.   

바울이 목회하던 시대 교회가 안팎으로 어려웠습니다. 지금보다 희망적이지 않았습니다. 밖으로는 세상의 핍박과 이단의 공격이, 안에서는 세력 싸움과 교리적 혼란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지켜내려 합니다. 바울에게 교회를 지켜낸다는 것은 진리의 복음을 지켜내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단들의 전략을 공개합니다. 바울은 두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첫 단어는 “가만히 들어오다”입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이단은 요란하게 들어오지 않습니다. 반듯하게 차려 입고 교양 있게 들어옵니다. 사람들의 신뢰를 얻을 때까지 성실하게 봉사하고 섬깁니다. 때가 되면 본색을 드러냅니다. 편을 가르고 싸움을 붙여 교회를 파괴합니다. 

그다음 단어는 “엿보다”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몰래 훔쳐봅니다. 사람들을 몰래 훔쳐보다가 방심한 틈에 거짓으로 옭아맵니다. 자유를 빼앗고 속박합니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이 디도의 할례 문제로 교회를 분열시키려는 전략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혼란을 예상했지만, 디도에게 할례를 주지 않았습니다. 복음의 진리가 성도들을 보호하고 교회를 지켜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거짓이 교회 안에 난무하는 이 시대에 교회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 합니다. 

모든 의견을 수용하려고 하고 모든 갈등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의 정교한 말과 논리로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설 틈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놓치면 교회는 무너집니다. 교회가 무너질 것 같아도 예수님을 붙잡으면 교회는 삽니다. 불안하고 무서울수록 진리의 복음이신 예수님을 꽉 붙잡아야 합니다. 

교회가 잘못된 길로 갈 때 목소리를 높여 비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거짓에 맞서 싸울 때는 자기 목소리를 내면 안 됩니다. 일심 단결해서 거짓 복음을 향해 진리의 복음을 외쳐야 합니다. 거짓을 물리치는 능력은 논리와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2:6>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목사를 우러러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의 말을 어기면 큰일 나는 줄 압니다. 가까이 오면 저절로 고개를 숙입니다. 반대로, 목사를 무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슨 말만 하면 시비를 겁니다. 지나가다 만나면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목사를 떠받드는 태도, 목사를 무시하는 태도, 모두 건강하지 않습니다. 존경하든 무시하든 신앙생활이 피곤합니다. 목사 말 한마디에 살고 죽는 신앙생활을 하게 될 테니까요.

목사에게 집중하지 말고 복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안전합니다. 목사라고 별 거 없습니다. 똑같은 사람입니다. 목사이기 전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한 사람의 크리스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똑같습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이라도 자신을 과시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권위를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도들과 동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교만이 아니라 진실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이나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 서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같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의 권위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 그 자체에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 앞에서 주눅 들지 않았고 성도 앞에서 과시하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진심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복음을 듣는 사람도 모두 고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복음을 들었다면 복음을 믿었다면 어깨를 펴고 당당히 걸으십시오. 당신은 고귀한 사람입니다.

<갈라디아서 2:7-9>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똑같은 복음입니다

교회가 편의점보다 많다고 합니다. 상가 하나에 교회가 여럿입니다. 신도시 입주하면 교회 현수막이 경쟁하듯 길가에서 휘날립니다.   

자리 잡은 교회는 효율을 위해 지역별, 연령별로 성도를 나눕니다. 목사가 여럿이고 사역도 다양합니다. 목사는 목사끼리 성도는 성도끼리 사역하다 예민해지는 일 많습니다.

“내 지역이다. 내 사역이다. 넘어오면 불편하다”,라고 말한다면 본질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유익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을 위해 베드로를 부르셨고 이방인을 위해 바울을 부르신 것처럼 우리도 나눠서 효율적으로 사역하자.” 성경을 오해하는 겁니다.

베드로 역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고, 바울 역시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내 지역 내 사역 넘보지 말라고 한 적 없습니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한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전해지는 복음이나, 이방인에게 전해지는 복음이나 서로 다른 복음 아닙니다. 똑같은 복음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에게 같은 복음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같은 복음을 가졌다면 서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어느 교회 목사, 어느 교회 성도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있는 곳에서 사역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인도하신 것입니다.

효율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잠든 바울 깨워 세계 선교의 문을 여셨습니다. 말 그대로 “신의 한 수”였습니다. 성령님께서 전략을 세우십니다. 성령님께서 최고의 효율을 내십니다. 성령님께서 적재적소에 배치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순종하고 협력할 뿐입니다. 이웃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함께 사역하는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 모두 같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복음은 낮은 곳에 전해집니다

뉴스를 보다가 통큰 기부를 했다는 사람을 보면 대단하다 생각합니다. 평생을 바쳐 남을 위해 헌신한 사람을 만나도 같은 감정입니다. 마음 따뜻해지는 일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뜬금없이 자기 인생을 평가하면서 자책합니다. “나는 뭔가. 나 혼자 먹고 살기도 빠듯해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진실이 아닙니다. 

당신 역시 고귀한 존재입니다. 복음이 없는 곳에 복음을 전했다면 당신은 값진 일을 해낸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이 누군가를 도울 수 있겠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은혜주시면 은혜주시는대로, 할 수 있는 만큼만 도우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딱 맞는 자리를 준비하십니다. 

복음의 시선은 언제나 낮고 약한 곳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시선을 두는 사람은 복음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게 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과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서로 같은 복음이었습니다. 사도들은 바울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과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 일치하듯이 바울과 사도들의 사역이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바울은 사도들의 부탁하기 이전에 이미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시선이 같은 곳에 머물렀습니다. 낮고 약한 곳입니다. 같은 복음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한 것입니다. 놀라울 따름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돕는 사역은 언제나 복음과 함께 했습니다. 바울은 인생을 마치는 그날까지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걱정하고 도왔습니다. 

복음은 강자를 향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약자를 향합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약함은 곧 강함이 됩니다. 복음의 사람이라면 약한 곳을 돌아봐야 합니다. 

가난한 이웃에게 생명의 떡인 복음과 끼니의 떡을 함께 전해야 합니다. 인정 많은 사람은 가난한 사람에게 당장 먹을 떡만 갖다 줍니다.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복음의 사람은 가난한 사람에게 생명의 떡과 당장 먹을 떡을 함께 전해야 합니다.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한 사람은 영혼의 허기짐을 해결하고 싶어합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에게 전해질 때 그는 진정으로 살아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통해 가난한 자들을 돕기 원하십니다. 내가 가진 것이 보잘 것 없어 보여도 괜찮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도시락 하나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당신의 작은 손이 필요합니다. 작고 보잘 것 없다 생각 마시고 용기 있게 가진 것을 드리세요. 온 세상이 따뜻해집니다. 

<갈라디아서 2: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예수님만 옳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면 못 참는 사람이 있습니다. 잘못한 사람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그 즉시 바로잡으려고 합니다. “그 사람을 위한 거다, 교회를 사랑해서 그런 거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말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이 조용히 떠납니다. 사람들의 차가운 눈빛과 광야에 혼자 서 있는 듯한 외로움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복음을 가진 사람의 특권이라 여기면서 기회만 오면 다른 사람을 비판합니다.  

교회 안의 문제를 보고, 분노하고 맞서 싸우면서 자신 안에 의로움을 주장한다면 성경을 오해하고 계신 겁니다. 

내가 옳으냐, 네가 옳으냐 싸우면서 큰 목소리로 주장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목사든 성도든, 목소리 큰 사람이 교회 주인이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주장의 근거는 자기감정, 자기 생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베드로가 잘못하자 공개적으로 비난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권위를 앞세워 감정적으로 베드로를 비난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복음을 타협하고 왜곡한 것을 비난한 것입니다. 바울 자신이 옳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옳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바울이 율법과 할례를 생략한 간편한 복음을 이방인에게 팔아먹는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의 관점으로는 바울이 사람들의 비위나 맞추면서 타협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바울은 그 어떤 순간도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복음을 왜곡하지 않았습니다. 그에 대한 근거로 베드로를 책망한 사건을 제시한 것입니다. 

안디옥에 도착한 베드로는 이방인과 함께 거리낌 없이 식사를 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등장한, 고넬료 사건으로 베드로는 이방인의 음식과 문화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졌습니다.   

평온하게 식사를 하던 중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른 유대인들이 갑자기 찾아 온 것입니다. 베드로는 식사를 중단하고 급하게 자리를 떠납니다. 

다른 유대인들에게 받을 비난과 핍박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바나바를 비롯한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덩달아 자리를 떠났습니다.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합니다. 베드로의 행동이 복음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권위를 바로 세우기 위해 베드로를 거침없이 비판한 것입니다. 

누군가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공개적으로 책망하고 그 즉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바울의 복음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권위를 내세운 것이 아니라, 복음의 권위를 내세운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복음을 왜곡하거나 타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많은 갈등이 일어납니다. 내가 옳으냐, 내가 옳으냐 바람 잘 날 없습니다. 무엇을 주장하든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교회 갈등은 반드시 복음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자기 기준으로 주장하면, 파벌이나 만들어 세력 다툼하는 세상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누가 먼저 왔나, 얼마나 오래 다녔나, 누가 더 잘 배웠나, 누가 더 열심히 했나. 직분이 뭔가, 누가 더 어른인가. 

예수님 앞에서 아무 의미 없는 것입니다. 누구도 자신이 옳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만 옳습니다. 

누군가를 책망하고 싶거든 자기감정, 자기 생각에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십시오. 책망을 들어야 할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입니다. 

<갈라디아서 2: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리더의 책임은 무겁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유연하고 지혜로워야 합니다. 나만이 옳다는 태도로는 절대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소통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좋은 말이지만, 삶에서 적용하기는 어렵습니다. 지혜가 어디까지 허용되는 것인가, 사람을 어디까지 배려해야 하는 것인가, 모두가 고민합니다. 

교회 소그룹에서 분위기 어색하다고 가볍게 소주 한 잔씩을 따라 마시고, 열린 마음으로 낮아져서 누구라도 올 수 있도록 교회 문턱을 낮춘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배려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게 가능하려면, 교회 목사님을 초대하고도 떳떳하게 술잔을 기울여야 합니다. 모두가 알듯이, 말처럼 간단하지 않습니다.

배려를 논하다가 자칫 잘못하면, 복음을 놓쳐버릴 수 있습니다. 복음이 더욱 복음 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배려가 필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따뜻한 배려라도 복음을 왜곡한다면, 그건 변명에 불과합니다. 

바울 역시 이 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다른 그리스도인을 배려한다고 한 행동이 결국 교회를 위기에 빠뜨렸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베드로의 경솔한 행동으로 거짓 교사들에게 빌미를 제공한 것에 대해 분노합니다. 왜곡된 복음을 바로잡으려고 베드로를 책망합니다.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들”은 말 그대로 베드로와 바울과 같은 마음을 가진 유대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한 가족이었습니다.   

베드로는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할례받은 유대인들을 직접적으로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다른 그리스도들에게 미칠 영향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교회 지도자였습니다. 수많은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하게 설교했던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그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경솔한 행동이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미칠 영향을 두려워했습니다. 할례받은 유대인들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빌미를 제공할까 걱정했던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가 핍박받은 성도들을 돌보는 것은커녕 지혜롭지 못한 행동으로 교회를 위기로 몰아넣지는 않을까 미리 걱정한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베드로의 판단은 정당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적으로 베드로의 판단은 명백한 실수였습니다. 베드로의 행동 하나로, 복음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중심을 잃고 흔들린 순간, 예수님의 죽음이 헛것이 된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지켜내기 위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따라 피를 흘렸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불순물이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은혜의 복음 앞에 율법과 할례가 끼어들 틈은 없습니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지켜내기 위해, 핍박받아야 한다면 기꺼이 핍박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리더의 책임은 무겁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할지라도, 그리스도가 주신 십자가의 무게는 각자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대신 짊어질 수 없습니다. 

바울은 온전한 복음을 지켜내고 싶었습니다. 왜곡된 복음을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에게 어떠한 빌미도 제공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온전한 복음을 선포한 대가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는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을 피해 가지 않았습니다. 바울을 비롯한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희생과 헌신 덕분에 우리에게도 온전한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지혜를 빌미로 타협하지 마십시오.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변명하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대가를 치르며 온전한 복음을 지켜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13-14>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누구나 실수합니다

지도자의 말과 행동에 관한 기사가 아침 뉴스에 빠짐없이 등장합니다. 말 한마디로 영웅 대접을 받기도 하고, 말 한마디로 역적이 되기도 합니다. 지도자는 영광의 대가로 많은 값을 치릅니다. 

지도자의 말 한마디, 작은 행동 하나는 메시지입니다. 지도자가 말과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자신의 뜻과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하게 됩니다.  

한 청년이 목사님에게 실망했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청년은 건축 현장에서 폐기물을 치우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길을 지나던 목사님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청년은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닦아내고 목사님께 악수를 청했습니다. 

목사님은 밝은 미소로 청년의 손을 잡아주시고, 격려해주셨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목사님은 뒤돌아서서 자기 길을 갔습니다.  

청년은 목사님이 가시는 길을 배웅했습니다. 뒤돌아서서 길을 가던 목사님은 무심결에 손수건을 꺼내 악수했던 손을 닦았습니다. 손에 묻은 땀이 찝찝했었나 봅니다. 청년은 실망했습니다. 목사님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청년의 손이 더럽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죠.  

지도자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지도자는 자신의 말과 행동에 항상 신경을 써야 합니다.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잘못된 메시지를 전할 수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의도치 않게 실수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이죠.  

베드로를 경솔한 지도자로 몰아세우거나, 바보 취급 한다면, 본문의 소중한 가르침을 놓칠 수 있습니다. 누구라도 복음을 왜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아무리 베드로라도 예외가 없지요.  

바나바도 예외가 아닙니다. 바나바는 바울을 초대교회에 소개한 사람입니다. 바울에게 기회를 주자고 교회 지도자들을 설득했던 그 역시 엉겁결에 베드로의 뒤를 따라 나갔습니다. 

베드로와 바나바는 자신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함께 식사하던 이방인들에게 “너희와 함께 식사하는 것이 부끄럽다”라는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베드로와 바나바 같은 사람이 실수했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실수합니다. 복음의 진리 앞에서, “누가 먼저 사도가 되었는가?, 누가 더 영향력 있는가?” 따져 묻는 시도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복음의 진리 앞에 모두가 순종하며 엎드리는 것이지요. 

바울과 베드로는 훗날 화해합니다.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바울과 베드로는 같은 복음을 전합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바로잡은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당시 베드로의 영향력은 막강했습니다. 바울은 이제 막 사역을 시작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권위를 앞세워 바울을 짓누르지 않았습니다. 실수를 합리화하거나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교회를 바로 세웠습니다. 

바울과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 앞에 순종한 덕분에, 복음의 진리가 우리에게도 전해졌습니다. 바울의 표현 그대로, 이방인은 더 이상 유대인처럼 살 필요가 없었습니다. 복음은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구라도 복음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탁월한 지도자라도 예외가 없습니다. 지도자의 말과 행동은 모두 메시지입니다. 사소한 말실수, 경솔한 행동 하나로 무너질 수 있습니다.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불안할 필요는 없습니다. 실수하더라도, 실수를 인정하고 바로잡으면 됩니다. 복음의 진리 앞에 무릎 꿇는 사람이라면, 언제라도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복음이 소망입니다. 복음의 진리 앞에 순종하며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갑시다. 

<갈라디아서 2:15-16>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당신은 합격입니다

사람들은 목사가 다른 사람보다 성숙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에요, 목사님.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이 다 똑같죠.”라고 말하신다면, 일단 고맙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목사가 죄를 지었다는 소식을 접하면, 발끈합니다. “목사라는 사람이 말이야, 어떻게 저럴 수 있어….”  

목사도 사람이라 별 수 없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목사에게 남다른 기준을 기대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못 살아도, 목사님은 제대로 사셔야지. 당연히 목사님은 우리보다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읽으시겠지. 목사님이시니까.”

목사인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면, “네, 그렇게 살겠습니다.”라고 답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무도 실족하지 않는다면, 솔직히 말하고 싶습니다. “나도 사람입니다. 실수하고 넘어지고 똑같아요. 목사로서 기능하는 것이지, 목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안 그런 척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게 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목사님이나 직분자 중에, “이렇게 살아야 한다! 저렇게 살아야 한다!” 큰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솔직히 부담스럽습니다. 

소리쳐 강조한 그 말, 그 항목에 대한 자신감이 느껴집니다. 자신 있는 항목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큰소리를 치는 것이죠. 

새벽예배를 나가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새벽예배 나오라고 큰소리칩니다. “나는 잘 하고 있으니까, 너도 잘하라”라는 뜻이죠. 새벽예배뿐만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한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는 다양한 기준이 있습니다. 큰소리치는 사람은 점수가 높은 사람들입니다. 자기 채점지로 스스로에게 높은 점수를 준 것이죠. 

큰 소리쳐본 사람으로 솔직히 말하자면, 큰소리치고 나서 후회 많이 합니다. 뒤통수가 간지럽거든요. 새벽예배 나오라고 큰 소리 한 번 치고 나면, 그다음부터 새벽예배 절대 못 빠집니다. 전날 밤을 새워도 꼭 나갑니다. 큰소리칠 때 바라보는 눈이 많았잖아요. 그 다음날부터, 사람들을 마주칠 때마다 무섭습니다. 

모태신앙으로 교회를 한 번도 떠나본 적 없는 사람, 뒤늦게 예수 믿고 지금까지 흐트러짐 없이 반듯하게 살아온 사람, 누구라도 예외가 없습니다. 

“자기 노력, 자기 의지”로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우리 유대인이지? 이방인과는 다르잖아, 맞지?” 베드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을 겁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럼, 뭐 해? 그게 무슨 소용 있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수 없잖아.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랬어. 이방인에게 유대인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한 꼴이잖아. 가능성이라도 남기면, 우리 다 끝장이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아무도 예외가 없어.”

 

바울은 베드로에게 말하고 있지만,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바울과 베드로의 대화에서 복음의 본질을 엿듣게 됩니다. 평생 동안 철저하게 율법을 지켜온 유대인이라도,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사는 사람은, 문제지에 동그라미를 치는 기쁨으로 살면 안 됩니다. 터무니없는 실력으로 빵점을 맞았지만, 은혜로 말미암아 합격된 기쁨으로 사는 것입니다. 

채점하다 보면, 생각보다 틀린 문제가 많을 겁니다. ‘기초가 부족하다, 개념이 부족하다, 열정이 부족하다.’ 실패의 원인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자책하면서, 엎드려 울기 전에 차분하게 고민해보세요. 문제지 한 권 다 푸는 게 목적이 아니라, 합격이 목표입니다. 

정답을 모르겠거든, 무조건 빈칸에 “예수님”이라고 쓰세요. 채점하시는 하나님이, 정답으로 처리해 주십니다. 미리 긴장할 필요 없습니다. 떨어질까 걱정팔 필요도 없습니다. 

 

당신은 이미 합격입니다.

<갈라디아서 2:17-1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은혜받은 사람은 자신을 드립니다

거짓 교사들은 정교한 논리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비판했습니다. 그들의 논리를 자세히 한 번 살펴보세요. 방심하다가, 혹 하고 넘어갈 정도로 대단합니다. 

“자, 내 말 좀 들어보세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칩시다. 그럼, 과거에 율법이 왜 필요했습니까? 아무 필요도 없는 율법을 우리가 수 천년 동안 지켜왔다는 겁니까? 모세에게 전해주신 율법이 없었다면, 우리는 뭐가 죄인지 구분할 수조차 없었다고요. 

율법을 어떻게 버립니까. 율법을 폐기했다가, 사람들이 ‘응, 나는 구원받았어. 나는 예수님 믿어’라고 말하면서 제멋대로 살면 어떻게 합니까. 이것을 통제할 수단이 필요하다고요. 그러니까,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도 율법을 지키면서 율법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거짓 교사들의 논리가 2천 년 전에만 유효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소위, 잘 믿는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자꾸 기준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십일조를 안 해? 당신은 교인 아니다.” 

“받기만하고 사냐? 봉사를 해야지.” 

뿐만 아니죠.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이렇게 살아야 한다.”  

명분은 분명합니다. 이런 기준이 없으면, 성도들이 나태해져서 올바르게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알려줘야 뭐가 옳고 그른지 알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기준을 제시한 사람의 의도와는 다르게 성도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기준 안에 들어온 사람은 안심하고, 기준 밖으로 나간 사람은 불안합니다. 죄책감의 경계는 말씀이 아니라, 교회마다 다르게 제시하는 일관성 없는 기준입니다. 

바울이 오늘날의 교회에 편지를 쓴다면, 뭐라고 말할까요? 바울은 이와 같이 말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죄를 짓게 하는 분인가요? 절대로 아닙니다. 불안하다고 못 믿겠다고, 다시 율법을 세워서 사람을 닦달하면 안 됩니다” 

기준은 사람이 세우는 게 아닙니다. 목사가 세우는 게 아닙니다. 기준은 이미 선명하게 정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외의 다른 기준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조건을 요구하는 것은, 오히려 죄를 조장하는 것입니다. 

십일조하고 헌금하고, 헌신하고 봉사하는 모든 신앙생활의 과정은 은혜의 전제 조건이 아니라, 은혜받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억지로 드린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아무 것도 못 드려도 예수님을 사랑하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냐?”라고 억세게 질문하신다면, 나는 답변하고 싶습니다. 

그건 나에게 묻지 마시고, 하나님께 물어보세요. 하나님 앞에서도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사람이 만든 기준을 강조하면, 복음 없는 사람은 도망쳐 버립니다. 교회를 떠나버립니다.

기준을 강조할수록 고통받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저건 복음이 아닌데….” 하면서도 계속 혼란스럽습니다. 복음과 기준을 함께 지키려 애를 씁니다. 복음으로 감격했다가, 기준으로 시험에 들었다가 정신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숨죽여 조용히 지내면서, 진실되게 주님을 사랑하는  고귀한 사람이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목사의 허물을 온전히 이해해주고, 주님만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주님만 바라보고 희생해주셨기에, 교회가 무너지지 않은 겁니다. 목사가 설교 잘해서, 교회가 부흥했다고 말할 일 아닙니다. 장로가 헌금 많이 해서, 교회 재정 넉넉하다고 자랑할 일 아닙니다. 

구석진 곳에 웅크리고 엎드려 기도하던 성도들이 기억납니다. 십분의 일이 아니라, 삶의 전부를 드려도 부족하다고 주님 앞에서 눈물로 회개하던 목소리를 기억합니다. 나 같이 철없는 목사, 온전히 이해해주고 받아준 사람들의 얼굴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은혜받은 사람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드립니다. 이것이 성령의 사역입니다. 

<갈라디아서 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억지로 믿지 마세요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는 지켜보는 눈이 별로 없습니다. 주님을 처음 만난 감격으로 감사가 넘칩니다. 받은 은혜 감사해서, 열심히 믿다 보면 교회에 깊숙이 들어갑니다. 그만큼 해야 할 것도 많고, 지켜야 할 것도 많아집니다. 당연히 보는 눈도 많아집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누구를 가장 유심히 살펴볼까요? 아무래도 목사입니다. 목사가 강대상에 올라갈 때, 사람들은 목사의 걸음걸이, 말투, 태도, 하나라도 놓칠세라 자세히 살핍니다. 강대상에서 내려와도, 사람들의 시선은 목사의 일상에 머뭅니다. 뭘 먹는지, 뭘 하는지, 뭘 사는지 계속 쳐다봅니다. 

사람들의 반응 하나하나에 신경 쓰고 맞춰주려고 하면 못 견딥니다. 목사로 사는 삶을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속 편합니다. “목사는 무슨, 그리스도인으로 살자.”라고 다짐하고 사람들의 눈치를 벗어나려고 하는데, 이마저도 쉽지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역시 녹록지 않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의 눈치를 살펴야 합니다. 교회 처음 나올 때는 봐주다가, 어느 정도 적응했다 싶으면 엄격한 규칙을 적용합니다. 

누가 만든 건지, 누가 시작한 것인지는 몰라도 자기 교회 사람들끼리는 서로 다 아는 규칙이 있습니다. 자기 멋대로, 자기 다운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기대, 주변의 시선에 갇혀버리면, 하나님을 온전히 만날 수 없습니다. 율법을 벗어났다고 말하지만, 또 다른 족쇄에 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만 있는 대로, 의무와 형식, 전통에서 끊임없이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제한 없이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인간의 노력으로 도저히 율법을 지켜낼 수 없다는 바울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절망처럼 보이지만, 절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율법에 대해 죽는 대신, 하나님에 대해 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율법에 대해 죽었습니다. 바울이 “내가”라고 말할 때, “내가”는 모든 성도들의 대표하는 말이 아닙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대표하는 말입니다. 뼛속까지 유대인이었던, 바울이 율법과 공식적으로 작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새로운 만남, 이것이 목적입니다. 옛 시대는 지났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새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사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제한 없는 관계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목회가 힘들어 견딜 수 없었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 집에 목사는 나  한 사람인데, 사람들은 내 아내와 자녀들마저 목사로 보는 것 같았습니다. 아내에게 정중히 말했습니다. “나 목회 안 해도 상관없다. 우리 가족이 먼저다.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라.”

누군가는 날 비난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사명감이 그 정도 밖에 안됩니까? 목회보다 가정이 우선이라니.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그렇게 가볍게 여깁니까? 당신 같은 사람은 목회할 자격 없어요, 당장 그만두세요.”

내 대답이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기회가 있다면 차분하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모든 직업이 성직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목사로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한 걸음씩 걷다 보니 목사가 된 것이지요. 내가 목사가 아니어도,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치 않습니다.”

다른 것에 매이면, 하나님을 온전히 만날 수 없습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 없을 때, 아무도 강요하지 않을 때, 교회 안에서 나를 부르는 호칭마저 사라질 때, 나 혼자 만나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아무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삶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누가 완벽하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질문하고 싶겠지요. “그럼, 어떻게 하죠? 이대로 살면 되나요?” 내가 대답하겠습니다. “아닙니다. 당신이 살게하지 마시고, 그리스도가 살게 하세요.” 

말장난이 아닙니다. 나는 진지합니다. 바울의 고백 그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죠.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시작됐습니다. 

여기서, “내가 죽다”라는 말은, 내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 없어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내 존재는 여전히 현실 속에서 두 발을 딛고 살아갑니다. 세상은 천국이 아니거든요. 부족하고 연약한 나 자신으로 살아갑니다.  

낙심하지는 마세요. 혼자 버티라는 말은 아닙니다. 당신에 그리스도가 사십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십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신데, “나는 왜 이렇게 무기력할까?” 고민되실 겁니다. “나는 언제까지 이럴까?” 자책할 수도 있습니다. 나 역시도 그렇습니다. 내가 알기로 모두가 숨기지만, 모두가 그렇습니다. 

새로운 구원의 시대 속에서 사는 우리지만, 아직까지는 완전히 죄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여전히 “육체 가운데”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반복됩니다. 벗어날 수 없는 딜레마입니다. 죄로 고통받으며 절망하다가, 예수님으로 기뻐합니다. 

누군가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어쩔 수 없네. 죄를 지을 수밖에 없잖아. 벗어날 수 없으니, 그냥 즐기면서 살 거야.”

틀린 말입니다. “육체 가운데 사는 것”과 “죄 가운데 사는 것”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육체”라는 말은 사람이 가지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의미합니다. 죄와 싸우기 힘겹다고, 포기하면 안 됩니다. 의도적으로, 죄를 즐기면서 살아도 안 됩니다. 우리 안에 사시는 예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실패해도, 예수님은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완벽하지 않아 다행입니다. 실패하지 않는 예수님이 도와주실 겁니다. 

<갈라디아서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반복 또 반복입니다

바울은 한 문장으로 선언하듯 말합니다. 

“율법으로 의로워진다고 믿는 거냐? 그렇게 믿는다면, 그리스도가 헛되이 죽으신 것이다.”  

여기서 바울의 한 마디는, 앞서 말한 모든 진술을 요약하고 결말짓는 기능을 합니다. 호흡을 가다듬고,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당시의 독자들은 바울이 무슨 말을 할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읽었을 것입니다.    

귀를 기울이는 독자들에게 전하는 바울의 메시지는 새로운 내용이 아닙니다. 반복 또 반복입니다.

율법으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끔찍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믿음의 표현방식이 아닙니다. 유사어가 아니라 반의어입니다. 믿음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왜 끊임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사람들이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해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라는 말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한 경쟁의 시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1등이 아니면,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승리하지 않으면 패배한다. 남들을 짓밟지 않으면, 짓밟힌다.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라는 논리로 세상이 흘러갑니다.

 “에이, 나는 그 정도는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일단 감사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경쟁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아이가 어느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냐, 무슨 분유를 먹냐, 어떤 기저귀를 쓰고, 어떤 유모차를 타냐, 언제 걷고, 언제 말을 하기 시작했냐. 어느 유치원에 다니고 있냐.”

동네 언니와 카페에서 하루 종일 이야기를 해도 끝이 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으려면 대단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정신없이 살다가, 교회만 오면 복음을 듣습니다. 복음의 논리가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낯설다 못해 불안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복음 그대로가 아니라, 세상적인 방식과 섞어서 믿게 되는 것입니다. 

왜곡된 복음을 믿으면, 성도는 성도끼리, 목사는 목사끼리 경쟁합니다. 

누가 더 잘 섬기냐, 누가 더 희생하냐. 누가 더 인정받냐, 누가 더 사랑받냐. 성도끼리 경쟁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교회끼리도 경쟁합니다. 어느 교회가 더 크냐, 어느 교회가 더 멋지냐. 어느 교회가 더 건강하냐, 더 영향력 있냐, 치열합니다. 

노력한 만큼 보상받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거스르기 어렵습니다. 노력한 만큼 성취할 수 있다는 논리로, 복음을 바라보면 당연히 억울합니다. 

1억을 헌금한 사람이나, 동전 하나를 헌금한 사람의 차이를 없애는 것이 믿음입니다. 액수로 표현해서 죄송한 마음이지만,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라 날 것 그대로 말했습니다. 

시간의 차이를 극복하는 것도 믿음입니다. 어제 믿은 사람이나 평생 믿은 사람이나, 4대째 믿은 사람이나, 가족 중 처음 믿은 사람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나 장로나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누구라도 믿으면 최상급 평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억울한 사람은 땅을 치면서 말할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말이 되냐?”

혹시 억울하다면, 왜곡된 복음을 믿은 것입니다. 노력한 만큼 보상받는다, 잘 믿으면 더 잘 된다는 식으로 믿으면, 의도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것입니다. 

당사자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된 것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은혜를 폐기처분 한 것입니다. 왜곡된 복음에 온전한 복음이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며 가장 낮은 곳에서 감사하며 삽니다. 보상심리가 작동하면, 그 즉시 민감하게 대응하세요. 반복 또 반복입니다. 

은혜받은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